The Gamer Part1 “어이, 강진성! 같이 가자!” 구름 한 점 없는 무더운 여름날, 쥬신 대학의 공대 3호관의 현관을 나선 한 사람을 뒤쫓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쥬신 대학의 캠퍼스는 연륜을 말해주는 고목들이 즐비했고 고목들이 만드는 시원한 그늘은 지나가는 학생들의 더위를 식혀 주었다. 멀리서 보면 나무숲에 가끔 건물이 솟은 것처럼 보일 정도로 나무가 많은 쥬신 대학은 특히 여름에 그 숲의 진가를 알 수 있었다. 180 정도의 키에 약간 야윈 듯한 몸, 까만 머리에 까만 눈의 그리 특이하지 않은 블루진 스타일의 남자는 자신을 부른 친구를 기다렸다. “현준아, 오늘 수업 다 끝났어?” 턱선이 굵고 목소리 역시 그에 맞게 큰 185 정도의 헐렁한 면티, 면바지의 젊은 남자는 자신에게 묻는 친구에게 약간 짜증 섞인 대답을 했다. “그럭저럭. 그런데 정교수님은 왜 그렇게 레포트를 많이 내지 못해 안달이지? 완전히 레포트로 모든 것을 대신한다니. 뭐, 시험을 보지 않아서 좋기는 하지만 시험을 대체하는 레포트가 양이 좀 많아야지.” “그렇게 레포트가 많아?” “휴... 밤 새야 할지도 모르겠다. 너, 정교수님 과목 듣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아주 탁월한 선택이다. 내가 다음에 정교수님 과목을 수강하면 성을 간다. 성을....” “그래? 고생 좀 하겠네.” “그건 그렇고 너 이번에 그 WIS (War in Space) 아마추어 세계 대회 출전할 거지?” “아직 결정 안했는데. 꼭 나가야 할까?” “네가 아마추어 한국 챔피언이잖아. 네가 안 가면 사람들이 실망할 걸. 게다가 네 팬만 해도 몇 십만 명이니. 나도 WIS 그렇게 못하지 않는데 왜 내 게임을 좋아해 주지 않을까?” 진성과 현준은 공대 3호관에서 나와 한 여름을 시원하게 해주는 연못을 바라보며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쥬신 대학의 별칭은 아쿠아 대학이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캠퍼스를 뒤 덮는 거대한 연못 때문이었다. 물 위에 지어졌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캠퍼스에 연못이 많았다. 게다가 연못들 사이는 땅 아래로 연결되어 있어서 물이 고이지 않고 흘러 고인 물의 썩은 냄새는 전혀 없었다. 쥬신의 학생들은 자신들의 과와 가까이 있는 연못에 이름을 붙였는데 공대 3호관 앞에 있는 연못의 이름은 ‘유레카’였다. 누가 지었는지 아무도 몰랐다. 학생들은 그 이름이 촌스럽다 하면서도 유레카라고 불렀고 그대로 유레카로 굳어졌다. 진성과 현준은 걸어서 정문까지 가야했다. 현준이 차를 가지고 있었지만 차를 정문밖에 주차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쥬신 대학의 규정 중에 학생들과 교수들마저 반발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자가용 자동차의 교내 출입 금지였다. 학생들의 식당과 기타 필요한 것들을 위한 운반차량은 들어올 수 있었지만 학생들이나 심지어 교수들조차 학교에 오면 정문 바로 밖 커다란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걸어서 들어와야 했다. 학생회장 선거의 단골 공약으로 나오지만 대학 당국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학교 설립자의 의지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행정 직원들도 차를 두고 가는 현실이 계속 되자 서서히 쥬신 대학의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바뀌며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진성아, 정말 안 갈거야? 비록 얼굴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네 플레이 하나 보고 열광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데. 세계 대회에 나간다고 해서 네가 불편할 것도 아니고.” 현준은 진성의 성격을 알았기에 옆에서 진성이 세계 대회에 나가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평소 진성은 생각해서 자기의 기준에 맞으면 누가 뭐라고 해도 밀어 붙였고 아니면 교수 할아버지가 와도 아니었다. 그런 점을 알고 있었던 현준은 막무가내의 강요가 아니라 설득을 했다. 물론, 평소의 현준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네가 원해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너도 네 플레이를 보고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고맙잖아. 네게 피해가 가는 것도 아니고 어디 멀리 가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게임 스테이션에 가서 카메라 끄고 게임만 하면 되잖아?” “..... 그래? 그 말 듣고 보니 맞는 것 같네..” 현준은 진성이 자신의 말에 동조하자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였다. “... 그런데.. 너 왜 내가 그 경기에 나가기를 그렇게 원해?” “...아.... 아... 나도 네가 하는 경기가 보고 싶거든.” “... 그래? 정말 그것뿐이야?” “... 어..... 당연하지.” 현준에게 왠지 켕기는 구석이 있었지만 진성은 그냥 믿고 넘어갔다. WIS 몇 게임 한다고 해서 손이 닳아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몇 시간 정도는 친구와 노는 셈 치면 된다. 현준의 어색한 표정이 마음에 걸렸지만 진성은 흔쾌히 말했다. “그래. 별다른 일 없으면 나가지 뭐.” 진성은 친구인 현준이 집에서 같이 지내고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부모님 두 분 모두 다 고아원 출신이어서 진성은 고등학교 2학년 시절 동안 내내 혼자 살았다. 그러다 3학년으로 올라가서 친해진 친구 현준이 진성의 사정을 알고는 자기 집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사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던 진성은 사양했지만 활달한 현준의 성격과 꼭 같은 현준의 아버지의 강권에 진성은 현준의 집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진성에게 남겨진 유산이 조금 있어서 혼자 살기에 그렇게 모자라지 않았지만 현준의 집은 또 다른 세계였다. 평소 현준이 입고 다니는 옷이나 씀씀이를 볼 때 절대 부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진성은 의외였다. 3층 집에 잔디와 멋있는 나무들이 잘 가꾸어진 정원. 너무 얼떨떨한 첫인상이었다. 현준의 부모님은 진성의 사정을 알고는 아예 아들로 삼자는 말까지 했다. 진성은 그런 호의에 감사했지만 돌아가신 부모님에게 죄를 짓는 거라며 한사코 거절했다. 현준의 부모님도 그런 진성의 생각에 기특해 했다. 진성은 현준의 집 3층의 3개의 방 중 하나를 사용했다. 원목 스타일의 바닥과 벽에 밝은 색의 문과 창틀. 아주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곳이었는데 오래 있어서인지 별 감흥이 없었다. 3층은 현준과 그 동생 현석 그리고 진성이 사용했다. 현석 또한 현준과 닮아서 운동도 잘하고 성격도 활달했다. 그런 분위기에서 진성도 조금은 밝아진 모습이었다. “아주머니, 다녀왔습니다.” “엄마, 나도.” “진성이 왔구나. 덥지? 올라가기 전에 음료수 한 잔 마시고 올라가거라.” “엄마! 나는 안 보여?” “나는 반말하는 아들 녀석은 눈에 안 보이는 못된 어미란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앉아라.” 부엌에서 주방일을 거드는 아주머니와 같이 있던 현준의 어머니는 진성과 현준을 이끌고 식탁에 앉았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오렌지 쥬스를 꺼내어 컵에 따라주었다. “요즘 너무 덥지? 공부하는데 괜찮니?” “네, 학교에 나무가 많아서 그리 덥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가는 길은 현준이 차가 있으니까 걱정 없구요.” “그래서 말인데. 엄마. 나 차 좀 바꿔줘. 에어컨이 조금 이상한지 별로 시원하지가 않아. 아무래도 차 바꿀 때가 된 것 같지?” “진.현.준! 네 차, 산 지 얼마 되었니?” “2년 넘었잖아.” “그래? 좋아. 네 아버지와 의논해 볼께.” 아버지와 의논한다는 말에 현준은 기겁했다. “아니. 아니. 차 안 바꿔도 돼. 그냥 카센터에 가서 에어컨 손 좀 보지 뭐. 이런 좋은 차를 왜 또 바꿔? 그치? 아, 시원하다. 진성아, 올라가자.” 바로 말을 바꾼 현준은 시원하다 못해 차가운 음료수를 단번에 마셔버리더니 옆에 있던 진성을 잡고는 3층으로 올라갔다. “아마 진성이 네가 차 사달라고 했으면 엄마는 당장에 좋은 차로 뽑아 줄거다. 쳇, 완전히 찬밥이잖아.” “너야말로 아직 2년도 되지 않은 차를 바꾼다고? 너 돈 한 푼도 벌지 않잖아. 네가 벌어서 차를 바꾼다면 네 부모님 아무 반대도 안 하실거다.” “야, 그건 너무 당연한 얘기잖아.” 예전에 현준의 어머니는 진성에게 차를 사준다고 했다. 그것도 최신 모델 중 괜찮은 차로 골라보라고 진성에게 말했다. 그런데 진성이 자신은 돈도 벌지 않는데 당연히 차도 필요 없다며 나중에 자신이 벌어서 사겠다고 했다. 현준의 부모님은 쌍수를 들고 진성을 칭찬했고 그 여파는 현준을 강타했다. “너도 진성이 본 좀 받아라.” 하루라도 듣지 않고 넘어가는 법이 없는 말이었다. 현준의 성격에 그런 말이 마음의 상처를 주는 일은 절대 없겠지만 매일 들으면 좋은 말도 듣기 싫은 법이다. 방으로 들어온 진성은 책상 아래에 놓인 컴퓨터의 전원을 평소처럼 왼발의 엄지발가락으로 눌렀다. 곧이어 윙하는 낮은 소리와 함께 컴퓨터가 부팅 되기 시작했다. 진텔의 최신 프로세서와 최신 그래픽 카드 등의 최고 사양 부품으로 이루어진 컴퓨터였다. 현준의 아버지가 일하는 곳에서 아주 값싸게 산 컴퓨터였다. 그냥 준다는 현준의 아버지에게 겨우 우겨서 컴퓨터 값의 삼분의 일 정도의 가격으로 계산했다. 진성은 아무리 호의라고 해도 이유 없는 것은 싫었다. 진성의 고집에 현준의 아버지가 한번 졌지만 곧 진성 또한 현준 아버지의 고집에 졌다. 그 증거가 바로 책상위에 놓인 25인치 박막형 와이드 모니터였다. 웬만한 TV와 크기에서 그리 뒤지지 않는 최신 모니터를 공짜로 받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박막형이라 책상의 공간을 차지하지 않고 벽에 붙어 있었다. 진성은 컴퓨터의 부팅이 끝나자 아까 현준이 말한 자신의 팬사이트에 들어갔다. 아마추어 WIS 게임에 출전해서 탁월한 기량으로 본선에 오른 뒤, 단 한번도 방송을 원하지 않고 원격 게임을 원했기 때문에 ‘얼굴 없는 게이머’로 유명한 진성은 자신과는 상관없이 플레이에 반한 사람들끼리 만든 팬사이트가 있었다. 팬 사이트의 이름 또한 특이했다. ‘프지프(FGF : Faceless Gamer Fan)' 홈페이지의 첫 장면은 플래시 애니메이션이었는데 진성의 명장면 여러 개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그 절묘한 장면을 들어갈 때마다 무작위로 보여주었다. 처음에 진성이 이 팬사이트를 들어왔을 때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인기에 굉장히 놀랐었다. 홈페이지의 오프닝 화면을 넘기면 아주 깔끔한 블루 계열의 사이트가 나오는데 진성 자신이 봐도 정성이 느껴지는 화면 배치와 어떤 부분은 전문가가 한 듯한 관록이 느껴져 감동했었다. 사이트를 보고 난 뒤에 게시판에 자신이 그 게이머라고 밝힌 적이 있었다. 연예인도 아니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 이런 수고를 아끼지 않은 것에 감사해서 마음을 담아서 글을 올렸다. 진성은 그 반응에 다시 한번 놀랐다. 어떤 사람은 팬 중의 한명이 장난으로 저런 글을 올렸다고 주장하기도 했고 또 다른 사람은 글에 담긴 진심을 볼 때 정말 그 게이머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자신의 글로 게시판이 온통 그 리플로 도배가 되자 진성은 난감했다. 그러던 중에 재미있는 리플이 올라왔다. 글을 쓴 사람이 정말 그 게이머라면 팬 중의 한 사람과 WIS 한 판 하면 당연히 진짜 게이머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는 의견이 올라온 것이다. 진성은 별로 인터넷 문화나 그 특징에 관심이 없었기에 처음에는 그런 호들갑이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자신에게 쏟아지는 관심은 나쁘지 않았다. 진성은 그 리플대로 WIS에서 만나자고 했고 많은 사람들이 그 경기를 관람하게 되었다. 진성과 게임을 하게 된 사람은 그 팬사이트의 운영자 중 한 사람으로 정해졌고 WIS 의 기능 중 하나인 브로드캐스팅을 이용해 많은 사람들이 그 게임을 라이브로 볼 수 있었다. 진성 특유의 컨트롤과 게임을 이끌어 나가는 스타일이 확연히 드러나는 한 판이었고 운영자도 상당한 고수여서 더 게임을 흥미롭게 만들었다. 마치 상대의 전략을 읽는 듯한 진성의 플레이에 보고 있던 많은 팬들은 바로 그 게이머라고 확신했다. 그 플레이 파일은 팬사이트의 회원만 볼 수 있도록 사이트에 올려졌고 이름없는 게이머와 팬 사이의 이런 일화가 알려지자 인터넷을 타고 엄청난 속도로 펴졌고 그로 인해 더욱 많은 사람들이 이름없는 게이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게임 전문 채널에서도 그 플레이 파일을 방송하기도 했다. 진성의 아이디는 WIS_The_Gamer 였고 진성이 팬사이트로 그 아이디로 접속할 때마다 많은 팬들의 메시지가, 심할 때는 수천 통씩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일일이 대답해 주기도 했지만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자 전공인 컴퓨터 공학을 살려 ARS(Auto Reply System) 프로그램을 만들고 말았다. 특히 그런 팬들의 아이디를 모아서 들어올 때마다 운영자도 아닌 사람이 전체 공지 비슷하게 최근의 인사를 보내기도 했다. “와... 이번에는 더 심하네.” 진성이 로그인하자 쌓인 메시지가 만 통을 넘겼다. 만약 운영자가 특별히 진성의 메시지 박스를 보통 사용자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크게 해 주지 않았다면 반 이상은 반송되고 말았을 것이다. 대충 말머리를 보자 최근의 메시지들은 대부분 아마추어 세계 대회에 대한 것이었다. 진성은 이미 내일의 그 대회에 참가할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또 다시 운영자를 가장한 전체 메일을 보냈다. “The Gamer 입니다. 여러분들의 관심 감사드립니다. 혹시 번거롭지 않을까 해서 세계 대회의 참가를 포기할까도 생각했는데 결국 내일 대회에 참가합니다. 여러분들이 많이 응원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진성의 메시지는 항상 간단했다. 날씨가 더우면 날씨가 더우니 몸조심하라는 것 정도가 내용의 전부였다. 진성 자신도 그런 무뚝뚝한 메시지에 답장을 하는 팬들을 보며 신기해했다. 진성은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자유 게시판을 잠깐 살펴보기로 했다. 그러나 곧 대화방에서의 쇄도하는 초대에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접속해 있다는 것을 아는데 뻔히 모른 체하고 나가버리기는 조금 그랬다. “WIS_The_Gamer 님이 입장하셨습니다.” “Sara : 아, 님. 안녕하세요?” “Roland : 안녕하세요? 그 게이머 맞으시죠? ” “WIS_The_Gamer : 안녕하세요. 여기에 접속만 하면 이렇게 대화방에 들어오게 되네요.” “Osuna_123 : 님이 너무 인기가 좋으시니까요. 내일도 멋진 게임 부탁드려요.” “WIS_The_Gamer : 네 물론이죠.” “Roland : 어디 사시나요?” "Sara : Roland 님, WIS_The_Gamer 님에게 그런 질문은 실례예요. 그런 질문 하지 말아 주세요. WIS_The_Gamer님 난처해 하시거든요.“ “Roland : 아... 운영자 공지 본 적이 있는데 제가 그냥 잊었네요. 그런데 WIS_The_Gamer님 팬은 나이가 든 올드 팬이 많은 것 같네요.” “Utoa34 : 네, 맞아요. 채팅하거나 게시판 글을 보면 20대 초중반의 사람들이 정말 많지요. 보통 다른 프로 게이머들은 나이가 어린 팬들이 많은 것 같은데.. 그쵸?” “Sara : WIS_The_Gamer님 게임은 뭔가 끌어당기는 게 있어요. 게임 플레이 파일을 제가 10번 넘게 본 것은 WIS_The_Gamer님 게임 밖에 없거든요.” “Osuna_123 : 맞아요. 저도 다른 사람에게 WIS_The_Gamer님 파일 다 구해서 봤는데 정말 명게임이더군요. 특히 지난번에 이 팬사이트에서 이루어 졌던 그 게임은 정말 저도 10번은 본 것 같네요. 그 파일 보고는 여기 팬사이트로 완전 이동했지요.” “WIS_The_Gamer : 여러분들이 관심 가져 주셔서 그런 게임이 나오는 모양입니다.” “Sara : 아부도 참 잘 하시네요. ^.^~” “Roland : 여기 대화방처럼 이모티콘 사용하지 않는 대화방은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대화를 보니 정말 진지하네요..... ㅡ.ㅡ” “Utoa34 : 네. 정말 진지하죠. ㅋㅋㅋ” “WIS_The_Gamer : 저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른 분들에게는 제 얘기 잘 전해 주십시오. 시간 없어서 갔다고.” “Sara : 네, 걱정 마셈 준비 잘 해서 내일도 좋은 게임 보여주셈. ” “Roland : 기대하겠습니다.” "Osuna34 : 내일 끝나면 한 번 더 여기 들어오세요. 팬들과도 자주 만나야지요. 그리고 프로 게이머가 되실 생각은 없으세요?“ “WIS_The_Gamer : 저.. 아직은.. 생각 안 해 봤는데요. 저는 이만.” “WIS_The_Gamer님이 퇴장하셨습니다.” 진성은 팬사이트에서 로그아웃하며 한숨을 쉬었다. 마치 복잡한 시장에 갔다온 느낌이다. 저녁을 먹은 뒤에 현준과 간단하게 WIS 게임을 해서 게임감각을 끌어 올렸다. 현준의 실력도 그리 만만치 않았다. 진성이 조금 방심하면 질지도 모를 정도의 숨은 실력자 중의 하나였다. 현준도 진성과 마찬가지로 얼굴을 밝히지 않고 아마추어 WIS 대회에서 5위에 입상했지만 진성과는 달리 팬사이트 같은 것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었다. 현준은 그게 항상 불만이었다. 특히 진성의 팬사이트를 보고 난 뒤에는 더욱 더 못 마땅해했다. 그런 현준이 웬일인지 자청해서 진성의 훈련 파트너가 되어 주었다. 한국 아마추어 WIS를 위해 서로 도와준 적도 있었지만 너무 적극적으로 도와주자 진성은 현준에게 뭔가 꿍꿍이 속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진성이와 현준이는 잠시 쉬기 위해 3층의 세 방의 가운데 있는 쇼파에 앉았다. “현준아, 너 왜 그렇게 열심이지? 내일은 네가 게임을 하는 것도 아니고. 세계 대회라고는 하지만 어차피 아마추어 게임인데. 너 혹시 나 모르게 뭔가 일을 벌인 것 아니야?” 뜨끔하는 현준의 얼굴을 놓치지 않은 진성이다. 확실히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다. 현준은 더듬거리며 변명을 해 보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지..진성아... 내가... 무..무슨 일을 했다고 그래?” “잔말 말고 말해봐. 말 안하면 내일 게임 안 나간다.” 진성은 이미 팬들과 약속했기 때문에 천재지변을 제외하고는 대회에 참가하기로 결심했다. 다만 현준은 그것을 모를 뿐이었다. 짐짓 진성은 화가 난 것처럼 현준을 다그쳤다. “...... 아.. 아니...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래?” 현준을 잘 알고 있는 진성은 확실히 뭔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빨리 말해. 말 안하면 대회 안 나간다.” “.............” 현준은 말도 없이 진성의 눈치를 보다가 모기 죽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난번에 내가 미팅을 했거든. 너도 알지? 그 때 내가 미팅 한다고 했었잖아. 내가 그 때 상대 여자와 다음에 만나게 됐는데 어쩌다가 WIS 의 얼굴 없는 게이머에 대한 얘기가 나왔거든.” “그래서?” “.... 내가 무심코 그 게이머를 안다고 했어. 말하고 나서 아차 싶었지. 그런데 한번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 없잖아. 게다가 그 사람이 네 팬이라고 하잖아. 약간 어색한 뭔가가 있었는데 WIS 이야기를 하자 많이 친해졌지. 거기에 내가 아마추어 5위라고 말하니 아주 놀라더라고. 아주 분위기도 좋아졌고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는데 그 여자가 네가 세계 대회에 나가서 게임하는 것을 직접 보고 싶대.....” “그래서.... 친구를 팔아 먹으려고?” “아.. 아니야.... 내가 친구를 팔아먹다니....” “여자한테 잘 보이려고 친구를 속.여.서. 대회에 나가게 만드는 게 친구를 팔아먹는 게 아니야?” “...............” “그런 기분으로 대회에 나가고 싶지 않다.” 진성은 대회에 참가하지 않을 마음은 없었다. 그렇게 말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 어떻게 안 되겠냐? 내가 게임 스테이션, 저녁 식사까지 다 준비했단 말이야.” 진성은 평소 여자 앞에서는 그 넘치던 숫기가 사라져 버리는 현준이 미팅까지 해서 만난 여자라는 말에 그냥 넘길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쉽게 지나가면 다음에 또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 생각했다. “.........” “진성아, 내가 이렇게 부탁할 테니까. 제발 어떻게 안 될까?” “같이 듣는 세계 문화사 레포트, 초급 중국어 레포트.” “...뭐? 그건 너무...........” “싫으면 말고.” “아니.. 아니야..... 할께. 내가 할께. 됐지? 그러면 내일 같이 가는 거지?” “좋아. 대신 세계 문화사 레포트는 오늘 해서 내일 아침에 보여줘. 그러면 아무 말 않고 내일 네가 준비해 놓은 대로 해주지.” “......으.. 오케이. 이 사나이 진현준. 사랑에 죽는다!” “아,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네 여자친구에게 카메라나 캠코더 같은 거, 아예 들고 올 생각도 하지 말라고 해라. 너도 잘 알아둬라. 알겠지?” “..... 오케이!” 진성은 다시 한번 WIS를 연습했고 현준은 자기 방에서 열심히 레포트를 쓰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야? 이러다 시간 늦어서 게임 못하는 것 아니야?” “아... 분명 이 근처에 제일 게임 스테이션이라고 했는데...” 만약을 대비해서 진성과 현준은 토요일의 오전에 늦은 아침을 먹고는 집을 나섰다. 집 근처의 게임 스테이션에서 해도 충분했고 정 급하면 집에서 해도 되지만 현준이 준비했다는 곳으로 가기로 했다. 그런데 현준은 분명히 여기인데 라고 뇌까리며 계속 다른 곳을 헤맸다. 진성은 그런 현준의 모습에 짜증이 났다. “현준씨, 여기에요.” 현준이 헤매고 있는 곳의 반대쪽에서 청바지에 나시를 입은 붉게 머리를 염색한 여자가 서서 손을 흔들며 현준을 불렀다. 키도 작지 않은 165 정도에 옷도 맵시 있게 입었지만 진성은 그런 모습을 보며 얼굴을 약간 찡그렸다. 진성은 염색을 한 여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자연 그대로가 좋았다. “아.... 유진씨.” “왜 이제 오세요? 아, 이분이 바로 그.. 그 게이머신가요?” 유진은 늦게 온 현준을 보며 나무라듯 말하다 옆에 서 있는 편안한 청바지 스타일에 슬리퍼를 신고 더운 여름에 모자를 쓰고 온 진성을 보며 말을 더듬었다. “맞아. 내 친구이기도 하지.” 자랑스럽게 친구라는 말을 덧붙였다. 진성과 현준, 유진은 빨리 게임 스테이션으로 올라갔다. 2층에 있는 게임 스테이션은 별로 사람이 없었다. 진성 일행은 특별히 고성능의 컴퓨터 4대가 한 방에 있는 VIP 룸으로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이 게임하는 장면을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한 이유도 있었지만 큰 게임을 할 때 사람들이 많은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저 저랑 사진 한 장 찍으시면 안 될까요?” 룸으로 들어와 컴퓨터를 켜고는 손을 풀며 연습을 하고 있던 진성에게 유진이 다가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진성은 대신 현준을 쳐다보았다. “...제 친구는 별로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거든요. 저 친구가 꽤 유명해서 사진이라도 한 장 나돌면 아마도 많이 불편할 것 아니겠어요? 그리고 나중에 다 끝나면 한번 부탁해 보세요. 유진씨.” 앞부분은 크게 얘기하다가 나중에 부탁하라는 부분은 진성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게 속삭였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진성은 그 말을 듣고 말았다. “... 현준, 그런 것은 사생활 침해라고 말씀드려라.” “어쩔 수 없겠는데요.” 현준은 애써 어색한 웃음을 지웠다. WIS 아마추어 세계 대회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게임인 WIS의 각 나라에서 우승한 게이머들이 온라인으로 모여서 자웅을 가려 세계 대회의 우승자를 가리는 아마추어 대회의 최고봉이었다. 그만큼 일반 게이머들의 관심이 많았다. 게임 방식에서 이기기 위한 게임 전략을 주로 사용하는 프로와는 달리 아마추어는 참신한 발상으로 획기적인 전략들이 간혹 나오곤 했었다. 특히 세계에서 가장 게임에 대한 열기가 뜨거운 한국의 게이머들은 ‘얼굴없는 게이머’의 출전에 가히 열광적인 관심을 보였다. “자, 이제 시작이군.” 한국 대회 우승으로 받은 WIS 카드의 뒷면에 있는 일련번호를 통해 서버에 접속했다. 진성이 알기로는 이 대회를 위해 특별히 따로 준비한 서버였다. 그런 만큼 서버의 딜레이로 인한 문제점은 없앴다. 그리고 일반 게이머들도 게임 채널로 생중계 되기 때문에 컴퓨터 앞 보다는 TV 앞으로 모였다. 모두 24개 나라에서 대표가 나왔다. 원래는 26개국이었는데 2개 나라에서 우승자가 접속을 하지 않았다. 곧 추첨을 했다. 토너먼트 방식으로 열릴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5번을 이기면 우승이다. 한번이라도 지면 바로 탈락하는 방식이 바로 토너먼트였다. WIS 의 게임 개발사, 블루 소프트의 이벤트 담당 회사인 서프라이저에서 모든 행사를 주관했다. 추첨은 금방 끝났다. 진성이 확인을 하니 상당히 힘들 것 같다고 느꼈다. 1차전은 유럽의 스페인이니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았지만 2차전이 일본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이기고 올라갈 경우 일반적으로 강하다고 알려진 게이머들과 승부를 피할 수 없었다. “휴....” “진성아, 쉽지 않을 것 같네.” “... 그래도 해 봐야지. 게임이지만 지면 기분이 엿 같거든.” WIS 에는 두 가지 버전이 있었다. 하나는 일반 게이머들을 위한 것으로 보통의 컴퓨터로 무리 없이 플레이할 수 있는 아마추어 버전이고 다른 하나는 프로 게이머들을 위한 것이었다. 또한 게임의 기본 시스템은 같았지만 그 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아마추어 버전은 보통의 일반 모니터에서 게임을 즐길 수 있었지만 프로 버전은 블루 소프트에서 내어 놓은 WIS 전용 게임기에서만 플레이 할 수 있었다. WIS 전용 게임기는 키보드 말고도 미리 입력한 게이머의 음성, 마우스를 대신하는 손에 딱 맞게 끼는 핸드 컨트롤러가 지원이 되었다. 그래서 보통의 키보드와 마우스의 컨트롤 속도로는 전용 게임기의 컨트롤 속도를 따라올 수 없었다. 다시 말해 아무리 뛰어난 아마추어라도 전용 게임기를 사용하는 프로 게이머에게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전용 게임기는 대당 가격이 상당히 비싸기 때문에 프로 게이머들의 소속된 프로팀과 상금이 있는 대회에서만 사용이 가능했다. 이런 전용 게임기의 사용은 자칫하면 프로와 아마의 벽을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제작사와 여러 프로팀들이 적절히 프로와 아마의 관계를 잘 다독였고 그로 인해 아마추어 게이머들이 프로 게이머와 그 게임에 대해 열광하고, 그에 따라 게임 실황 방송의 시청률은 올라가 전체 게임 시장이 활성화 되었다. 또 WIS 가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히트를 치자, 발 빠르게 각 국에 WIS 의 프로팀에 대한 홍보를 대대적으로 시작해서 우후죽순 격으로 프로팀이 탄생했고 결국 전 세계를 연결하는 프로 게임 리그가 탄생했다. 국가간의 경쟁이 되자 더욱 뜨거운 열기를 내뿜었고 WIS를 선두로 많은 게임의 국제 프로 리그가 시작되었다. 1차전의 스페인 게이머와는 게임 시작 후, 진성은 10분 정도만에 완승으로 끝냈다. 진성은 게임을 시작하면 완전히 사람이 달라졌다. 평소에도 약간 차가운 구석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게임을 하는 진성은 그야말로 날카로움 그 자체였다. 진성은 항상 상대방의 의도를 생각하며 플레이를 했다. 초반의 기본적인 오더는 비슷하게 가다가 정찰을 한 다음부터 내가 상대라면 어떻게 할 것인지, 자신을 적으로 생각했을 때의 플레이를 동시에 생각하며 게임을 운영했다. 상대의 본부를 정찰하니 초반의 방어적인 모습이었다. 진성은 곧바로 판단을 내려서 자신의 유닛을 모두 상대 진영으로 보냈다. 진성의 예상에 입구가 막히기 바로 전에 통과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가는 동안도 최단거리로 컨트롤해서 시간을 줄였다. 그 화면을 보고 있던 많은 게이머들은 탄성을 내질렀다. 초반에 보통 유닛 생산을 위한 건물을 짓게 마련인데 슥 한번 정찰을 한 후에 바로 모든 유닛이 한꺼번에 몰려가다니. 이런 도박적인 노림수는 ‘모 아니면 도’였다. 진성은 자신의 예측처럼 멋지게 상대 진영으로 난입했고 건물보다 초반 유닛에 치중했던 진성은 상대가 건물을 짓느라 상대적으로 적은 유닛을 가진 것을 공략했다. 안으로 난입된 진성의 유닛은 상대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초반의 유닛 차이는 그리 유리한 점이 되지 못했지만 절묘한 진성의 컨트롤로 상대의 유닛은 빠르게 숫자가 줄었다. 이윽고 상대는 패배를 인정하고는 게임 밖으로 나가버렸다. “와! 대단하네요. 저렇게 타이밍이 맞게 들어가다니. 정말 대단하네요.” 현준은 옆에서 유진이 감탄하자 자신이 마치 게임을 한 듯 으쓱해졌다. TV를 보고 있던 많은 사람들도 그 절묘한 타이밍과 비록 유닛 수에서 이득이 있었지만 컨트롤로 상대를 압박하는 모습에 역시라며 감탄했다. 진성도 예상보다 쉽게 게임을 끝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기다리니 나머지 경기들의 결과도 나왔다. 역시 일본 게이머가 이겨서 올라왔다. 예전부터 한국의 게이머에게는 절대 일본 게이머에게는 져서 안 된다는 어떤 의무감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진성도 그런 점에서 마찬가지였지만 일본에서 우승했다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 곧 2차전 경기가 시작되었다. 일본의 게이머와의 한판 승부. 진성은 초반 정찰을 포기했다. 상대는 진성 자신의 경기를 보지 못했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모니터 해서 알려주었을 것이다. 자신도 현준이 알려줘서 상대의 게임 스타일의 한 면을 알 수 있었다. 오히려 초보처럼 무조건 입구 막고 절대 정찰을 허용하지 않음으로 상대에게 압박감을 주는 전략을 사용하기로 했다. 진성은 전략의 달인으로 알려져 있어 그런 무대포식으로 게임을 할지는 전혀 예상 못할 것이다. 진성은 절대 상대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 방어는 무시한 채 초반 생산되는 유닛을 대량으로 모았다. 각종 업그레이드는 제대로 다 해 주고 그 업그레이드가 끝날 시점에 맞춰서 진성의 모든 부대가 이동했다. 진성은 본부를 버렸다. 지금 나가는 유닛이 죽으면 진성은 그대로 게임에서 패하고 말 것이다. “저렇게... 해서 이길 수 있을까요?” 유진은 궁금해서 현준에게 물었지만 대답은 간단했다. “쉿, 지금은 조용히.” 많은 한국 게이머들이 걱정을 했다. 전혀 전략이라고는 없는 초반에 모아서 단번에 끝을 내는 것은 초보나 사용하는 전략이라고 부르기에도 부족했다. 하지만 상대가 무엇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던 일본 게이머는 불안한 마음에 모든 맵에 정찰을 계속 했고 그로 인해 시간을 많이 빼앗겼다. 일본 게이머는 정석적인 플레이를 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불안함은 자꾸 컨트롤 미스를 가져왔다. 진성이 단 한번의 공격을 위해 모든 유닛을 다 모아서 전진해서 자신의 진영으로 오자 일본 게이머는 더 불안했다. 저 정도의 병력이면 거의 아무것도 짓지 않고 생산만 계속 해야할 정도인데 저렇게 당당하게 유닛을 이끌고 온 것을 보면 분명 자신이 모르는 다른 뭔가가 있다고 여겼다. 눈앞의 적은 분명 자신이 다른 행동을 못하도록 하는 견제의 역할이라 생각했다. 눈앞의 적도 중요하지만 보이지 않는 적의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 일본 게이머는 무리해서 또 정찰을 시켰다. 진성은 일본 게이머의 심리를 꿰뚫고 있었다. 곧바로 총공격을 시작했다. 너무도 쉽게 입구는 돌파되었고 그 다음은 진성의 컨트롤이 빛나기 시작했다. 한바탕 바람이 몰아치듯 너무도 쉽게 일본 게이머는 무너져 버렸다. 일본 게이머는 게임을 나가면서도 자신이 왜 졌는지 알 수 없었다. “세상에... 어떻게 저렇게 해서 이길 수가 있죠? 제가 해도 저 일본 게이머보다는 잘 할 수 있을 텐데....” 유진은 일본 게이머가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자 대뜸 말했다. 현준은 자세하게는 모르지만 대강 내막을 짐작했다. 하지만 유진에게 그런 것은 이해하기 힘들거라 생각했다. “휴......... 정말 진땀 뺐네.” 진성은 땀을 닦으며 크게 숨을 쉬었다. 그리고 현준에게 씨익 웃어 보였다. “그런 극단적인 플레이는 이제 그만 좀 해라. 보는 사람 조마조마해서 살겠냐?” “그래도 이겼다.” “아마 그 경기 보는 사람들, 다 네가 하는 것 보고 다 속이 터졌을 거다. 정말 기막히게 상대를 흔들어 이겼지만 상대가 말려들지 않았으면 그야말로 창피 당하고 졌을 텐데... 게임할 때 너는 딴 사람 같다.” “.... 그래? 딴 사람이라....” 3차전, 4차전은 지극히 정석적인 플레이를 해서 상대를 고립 시킨 후, 고사시켜서 게임을 끝내 버렸다. 유진은 그런 정교한 플레이에 정말 놀랐다. 사실 앞서 하는 게임을 본 유진은 생각보다 진성의 실력이 낮다고 여겼다. 특히 일본과의 경기에서는 실망스러울 정도였다. 그런데 제대로 된 게임을 하자 그 튼튼한 방어와 전략에 유진 자신이 상대의 모든 것을 본다고 해도 이길 수 없으리라 판단했다. “지금은 이렇게 잘 하면서 아까는 왜 그렇게 못하셨죠?” “네?........ 현준아 네가 얘기해라.” 유진의 말에 진성은 현준에게 짐을 넘겨 버렸다. 저런 초보에게 설명하기는 쉽지 않았다. 현준 역시 어물 거리며 말했다. “그 일본과의 게임은........ 아.. 그러니까... 상대를 혼란에 빠뜨려서 자멸하게 만드는 방법입니다..... 상대는 진성이 아주 전략에 능한 게이머라는 것을 알고 있죠..... 그러니까.... 그렇게 대비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략이고 뭐고 필요없이 초보의 유닛 모으기 해서 나가니까... 일본 게이머는 정찰에 신경 쓰게 되고... 그래서...... 시간이 늦어지고.... 불안해지는 거죠.. 그런 것들이 모여서....... 또 컨트롤도 나빠지고....... 일종의 심리전이에요.... ” 역시 유진은 쉽게 알아듣지 못했다. 이런 전략 게임에서 심리전이라는 자체가 아주 생소하니까. 결국 진성은 결승전까지 올라갔다. 한국의 게이머들은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 대회에서 우승이라니. WIS는 전 세계적인 게임이라 그 게이머 수만도 오천만 명을 넘었다.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아마추어 게이머 중에서 최고이면 WIS의 아마 버전으로는 세계 최고의 게이머가 된다. 프로 게이머도 아마 버전의 WIS로 하게 되면 쉽지 않을 것이다. 상대는 미국 게이머였다. 접전을 예상했던 한국과 미국의 WIS 세계 대회의 결승전은 싱겁게 끝났다. 한국의 게이머, 진성의 유닛 둘이 절묘하게 상대 진영으로 들어가 상대의 발전을 일정 시간 방해함으로 승부의 흐름을 가져왔고 그 후로는 서서히 녹는 눈처럼 미국의 게이머는 힘 한번 제대로 못쓰고 지고 말았다. ‘얼굴 없는 게이머’진성이 아마추어 세계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TV에서는 처음부터 우승까지의 모든 게임을 계속 분석하면서 재방송을 했고 특히 처음과 두 번째 게임에 대한 탁월한 해설까지 겹치면서 시청률은 치솟았다. 거기에 우승자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자 그 게이머에 대한 관심은 더 높아졌다. 진성이 게임을 다 끝내자 시간은 저녁이 다 됐다. 긴 시간 엄청나게 집중하며 게임을 한 뒤 진성은 어지러움마저 느꼈다. 그래도 우승이라는 결과에 아주 만족했다. “축하한다. 정말 잘 한다고 생각했지만 우승까지 할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다. 우리 아버지가 아시면 정말 기뻐할 텐데 그치?” “..... 휴... 배 고프다. 뭐 좀 먹으러 가자. 그리고 나는 집에 빨리 가서 잠 좀 자야겠다. 너무 피곤하다.” 현준은 유진과 진성을 데리고 근사한 레스토랑으로 갔다. 현준은 미리 예약까지 했었다. 유진은 그런 현준의 세심함에 조금 놀랐고 진성은 피곤하고 배가 너무 고파서 그런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간단하게 식사를 마친 진성은 피곤하다며 먼저 집으로 들어왔다. “저 왔습니다.” “진성이 왔구나. 그런데 현준이는?” “무슨 일이 있다면 조금 늦을 것 같다는데요.” “그래? 그 녀석이 이런 주말에 갈 곳이 있다니... 저녁은?” “간단하게 먹고 왔습니다. 저 피곤해서 이만 올라가 보겠습니다.” “그래.. 푹 쉬어라.” 방으로 돌아온 진성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하루가 너무 길게 느껴질 정도로 정신을 혹사했다. 바로 잠에 들었다. 한참을 자다 눈을 뜨니 한밤중인 2시다. 누워서 옷을 보니 들어온 그대로 잠을 잤다는 걸 알았다. 움직이기 싫은 진성이었지만 억지로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고 간단하게 씻었다. 그래도 잠을 좀 자서인지 덜 피곤했다.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잠이 부족한 진성은 팬사이트가 생각이 나서 억지로 컴퓨터를 켰다. “난리가 났겠군..... ” 진성은 자신의 메시지 박스에 넘칠 메시지들을 생각하며 팬사이트로 로그인했다. “...역시... 이때까지 중에 가장 많이 왔네...” 메시지 박스에는 새로 온 메시지가 16793통이었다. 절대 다 읽을 수 없지만 너무 고마운 마음에 맨 위에 있는 하나라도 보려는 순간 여기 저기 채팅방에서 초대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보통 때라면 인사라도 하겠지만 오늘은 힘들어 양해를 구하는 전체 메시지를 보낸 후에 바로 로그아웃했다. 사람들이 그렇게 관심을 가지다니 진성으로서는 상당히 의외였다. 자신이 직접 하지 않는 게임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 진성은 그런 팬들의 열화 같은 성원을 처음에는 이해 못했었다.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보니 오늘 했던 WIS 게임들이 생각이 났다.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와서 만족스러웠다. 보는 것은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직접 하는 게임에서는 심할 정도로 몰입하는 진성이어서 특히 긴장감 있고 상대도 고수일 경우에 더 실력이 좋아졌다. 스스로 만족하는 하루라 생각하며 잠을 청했다. “현준아! 빨리 나와. 아저씨 기다리신다.” “나 좀 두고 가라. 피곤해서 못 간다. 죽어도 못 가!” 일요일마다 현준의 아버지, 현준, 진성, 현석은 집 근처의 약수터에 운동 겸 산책하러 갔다. 무슨 이유가 있든 집에 있다면 꼭 가야했다. 현준은 어제 꽤 늦게 들어온 모양인지 문을 잠그고 절대 못 간다고 버티고 있었다. 이제껏 그런 현준의 발악을 본 진성은 어차피 끌려가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아저씨가 무슨 일을 하실지 모른다니까. 빨리 나와!” 아예 대답이 없다. 그 순간 현준의 핸드폰으로 문자가 수신되었다. “1분내로 안 나오면 네 차... 폐차장으로 보내 버린다.” 현준의 아버지는 말한 것은 실천에 옮겼다. 지금까지의 수도 없는 경험으로 현준은 곧바로 일어나 바람처럼 내려갔다. 진성은 포기하고 내려가는데 달려 내려오는 현준을 보며 놀랐다. 필시 아저씨의 압력이 들어갔음을 눈치 챈 진성이었다. 뒤에서 따라오면서 투덜대는 현준을 제외하고는 상쾌한 새벽 공기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약수터로 향했다. 40분 쯤 산책을 하자 약수터에 도착했다. “진성아, 너 어제 그 세계 대회에서 우승했다며?” “예, 그런데 어떻게 아셨어요?” “현석이 이 녀석이 자랑을 하더라고. 너도 그런 것은 말 좀 하고 다녀라. 말은 안 하지만 현석이 엄마가 좀 섭섭한 모양이더라. 어제도 밖에 나갔다 와서는 그런 얘기도 하지 않고 올라갔다며?” “아... 예... 저는 다른 사람들이 그런 것을 알면 부담스러울 것 같아서요..” “그런 게 사람 사는 방법이야. 내가 상대에게 피해를 줄 수 있으면 나 역시 손해를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사회다. 너무 깨끗하면 고기가 살지 않아.”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우리 회사에서 게임을 하나 출시하는데 너 관심 없냐?” “무슨 게임인데요?” “내가 직접적으로 담당한 곳은 아니지만 아주 대박이 날 게임이라고 사내에 소문이 자자하더군. ‘문명 온라인’이라고 하든데... 그런 이름으로 나올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아. 전략, 경영, 액션 등을 총 망라한 게임이라고 내 동창이 그러더군.” “재미 있겠네요.” “내가 하는 말은 네가 프로 게이머로 그 게임을 해 볼 생각이 없냐는 뜻인데, 어떠냐?” “프로 게이머요? 제가요?” “아버지, 저는, 저는 프로 게이머 생각 있는데요.” “아버지 저도요. 저도 프로 게이머...” 잠자코 있던 현준과 현석이 끼어들었다. “현석이는 어려서 안돼. 그리고 현준이 너는 내가 볼 때 아직 프로로서는 힘들 것 같다. 사실 내가 그 게임 쪽 전문가에게 진성이에 대한 얘기를 들었거든. 아마 쪽에 대단한 게이머가 한 사람 등장했다고 하더군. 게임에서 무조건 이겨서가 아니라 뭔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는 게임을 한다고 내게 귀뜸을 주든데. 그래서 알아보니 뭐라더라 얼굴 없는 게이머 라고 해서 물어보니 현석이가 바로 너라고 말해 주더구나. 조금 있으면 방학이니 경험 삼아 한번 해 보지 않겠니? 거기에 내가 맡고 있는 프로젝트에 실력 있는 프로그래머가 필요해서 내가 아는 네 프로그래밍 실력이면 직원으로도 채용할 의사가 있는데... 프로그래머로서는 내가 채용하고 싶거든.” 너무도 갑작스러운 말에 진성은 어리둥절했다. 번거로운 것은 싫지만 그렇다고 마냥 친구 현준이 집에 얹혀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직 졸업을 하지는 않았지만 휴학을 해서 먼저 사회 경험과 직업을 가지는 사람들은 적지 않았다. 진성은 일단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다. “워낙 갑작스러워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생각해 보겠습니다.” “너무 부담 가질 필요는 없다고. 자, 이제 좀 쉬었으니 집까지 뛰어가 볼까? 다들 알고 있지? 제일 늦은 사람이 정원 청소한다는 것. 자 출발!” 현준 아버지의 말과 동시에 다들 뛰기 시작했다. 거의 대부분 현준의 아버지가 쉬는 날 정원 청소를 했지만 혹시라도 이럴 때 걸리면 같이 청소를 해야 할지도 몰랐다. 진성과 현석은 빨리 앞으로 뛰어 나갔고 컨디션이 좋지 않은지 현준은 기껏해야 아버지와 비슷하게 달렸다. “현준아, 청소하기 싫으면 빨리 뛰는 게 좋을 텐데...” “아버지한테는 안 져요.” 현준의 의지와는 달리 현준의 아버지가 먼저 집으로 들어왔고 그 날, 현준은 하루 종일 정원 청소를 해야 했다. 진성은 현준 아버지의 말에 한동안 고민했다. 지금까지 좋은 집에서 지낼 수 있었던 것만 해도 감사해서 현준 아버지의 말을 거절하기는 힘들었다. 당장 집을 구해서 독립할 수는 없었다. 현준의 가족도 절대 그것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진성이었다. 진성은 기말고사 기간이 지나 방학이 되면 본격적으로 게이머로서, 프로그래머로서 일을 가지기로 결정했다. 진성이 이런 결정을 하게 되기까지 현준의 노골적인 압력이 상당한 역할을 했다. “시험 잘 끝났냐?” “야, 진성! 너 어떻게 그럴 수 있냐?” “내가 뭘?” “아까 그거 좀 보여 달라고 했는데 너 그렇게 배신할 수 있어?” 현준은 마지막 시험인 세계 문화사 시험 답안을 좀 보여 달라는 제스처를 계속 보냈는데도 계속 무시한 진성에게 잔뜩 화가 나 있었다. “아, 그런데 너 그런 짓할 때 조교가 어디 있었는지 알아?” “조교? 밖으로 나갔잖아.” “바보. 조용히 뒤로 들어와 있었어. 내가 보여줬으면 아마 같이 걸렸을 걸.” 진성은 똥 씹은 얼굴이었다. “에이씨, 재수 없어. 어떻게 조교가 그런 치사한 짓을 하냐? 조교 그 녀석도 학생이잖아?” “조금 재수 없기는 하지.” 진성은 기다렸다는 듯 현준의 역성을 들었다. “그렇지? 그 치사한 자식. 그 녀석 친구도 없을 거야? 그렇지?” “...어... 어.. 그래..” 오버하는 현준의 말에 진성은 약간 말을 더듬었다. 이럴 때 끊어줘야 한다는 걸 아는 진성은 재빨리 말을 막았다. “아, 오늘 네 아버지 회사 가기로 했는데, 같이 갈래?” “맞다. 당연하지. 이 진현준, 내가 가지 않으면 누가 너와 같이 가 주겠냐? 하하하” “빨리 가자.” “좋았어.” 진성과 현준은 걸음을 빨리 해서 정문 밖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가는 동안 조금 말을 꺼내길 망설이던 현준은 어렵게 말했다. “저.. 진성아, 부탁이 있는데..” “뭔데?” “... 앞으로 네가 프로 게이머 되면 나 매니저 시켜줘라. 좀 어떻게 안 될까?” “매니저? 내 매니저?” “너 프로 게이머 되잖아? 요즘에 정말 유명한 프로 게이머는 연예인 뺨 친다구. 당연히 매니저가 필요하지.” “푸하하하. 매니저? 좋아. 매니저만 정말 만약에 필요하게 되면 네가 해라. 매니저라니.....” 당시의 최고의 프로 게이머는 정말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새로운 사회현상으로까지 거론되는 게임 문화는 또 다른 스타를 탄생시켰다. 하지만 진성의 생각에 초보 게이머가, 그것도 소속팀이 있는 게이머에게 개인 매니저가 필요할 리는 만무했다. 웃기는 마음에 그냥 말해 버린 진성이었다. “자네가 그 얼굴 없는 게이머인가?” “네, 그렇습니다.” “자네 게임은 많이 봤네. 아주 인상적이더군. 특히 상대의 심리를 꿰뚫는 전략에는 나도 감탄했지. 최근의 그 세계 대회도 아주 유심히 봤다네. 역사 자네라고 생각했지. 사실, 게이머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접촉을 못해서 아쉬웠는데 진팀장이 자네와 아는 사이라니 아주 놀랐네. 아, 미안하구만. 이리 앉게.” 진성과 현준은 자소 소프트에 도착해서 정보 데스크의 안내를 통해 지금 말하는 사람의 방으로 올 수 있었다. 40대 후반의 반바지에 나시를 입고 있는 특이한 사람이 바로 현준의 아버지가 소개한 자신의 동창인 이희철 팀장이었다. “아직 게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겠군. 이름은 들어 봤나? 문명 온라인이라고 하는데..” “현준 아버지를 통해 잠깐 이름만 들었습니다.” “그렇겠지. 그 친구도 제대로 모르고 있으니까. 내가 대강 게임에 대해 설명해 주지. 이 게임은 1:1 도 가능하고 최대 8:8까지 가능한 온라인 게임이지. 뭐 흔한 전략 게임들이 지원하는 정도는 당연히 가능하지. 이름이 문명 온라인이라고 하니 뭔가 거창하지? 사실 나를 포함해 우리 팀원들은 아주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네. 이번 게임은 반드시 대박난다는 자신감이 있지. 문명 온라인은 조금 특이한 게임이네. 처음 게임을 상대와 시작하면 어느 정도 문명화된 사회가 게이머에게 제공된다네. 그 문명의 발달 정도나 기본적인 상태 등을 전혀 모르지. 물론 어느 정도 게임을 계속 해보면 뭔가 문명을 확인할 오더가 생기겠지만. 게이머는 최대한 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문명을 파악해야 돼. 자신의 문명을. 어떤 동력을 기본적으로 사용하는지, 인구 당 전투인력은 어느 정도인지, 살고 있는 사람이 육체적으로 강한지 아니면 정신적으로 강한지 등의 여러 가지를 게이머는 빨리 알아야 하지. 그런 것을 알려면 당연히 시간이 필요하게 돼. 게이머는 그럴 때 선택해야지. 상대의 문명에 대한 일종의 공격을 할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문명의 장점을 더 극대화시키기 위해 자신의 문명을 더 조사해서 발전시킬 것인지. 그렇게 함으로써 게임은 진행된다네.“ 진성은 상당히 특이한 게임이라는 것을 알았다. 보통 문명과 관련된 게임은 게이머 자신이 하나하나 문명을 창조해 나가는 것이 주류였다. 나름대로 재미는 있지만 온라인으로의 성공 가능성은 희박했다. 엄청나게 오래 걸리는 플레이 타임이 온라인 화에 장애가 되었던 것이다. 반면에 이팀장이 소개한 게임은 이미 어느 정도 발달된 문명 사회를 게이머가 파악하고 다시 발전시키며 상대의 사회에 혼란을 주고 공격을 하는 조금은 달랐다. 게다가 그런 게임이라면 온라인도 성공적일 것이다. 하지만 진성은 이 게임에도 약점이 있음을 간파했다. 게이머에게 초기에 주어지는 문명사회의 밸런스와 다양성, 그것이 문제였다. 게이머 자신이 문명을 창조하지 않았다면 초기에 존재하는 문명은 상대 게이머의 것과 비교할 때 상당히 밸런스가 잘 잡혀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한쪽 문명에 무게가 쏠리게 되어 전체 게임이 무너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주어진 문명에서 게이머가 문명의 발전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여지가 많아야 하고 처음에 주어지는 문명 역시 종류가 다양해야만 했다. “저, 그런데 게임 시작 초기에 주어지는 그 문명화 된 사회의 밸런스는 잘 해결된 상태입니까?” “오호... 역시. 자네도 느꼈겠지만 밸런스와 게이머가 고치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범위가 바로 이 게임의 핵심이지. 우리는 이것 때문에 오랜 기간 동안을 허송세월로 보냈지. 그러다가 사회학자, 인류학자 등의 이른바 문명 전문가에게 의뢰를 했지.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문명 시뮬레이터라네. 고대 문명과 상상을 통한 문명의 초기 상태들, 우리는 그것을 문명의 씨앗이라고 부른다네. 문명의 씨앗들을 정교하게 제작된 시뮬레이터에 입력해서 실제와 비슷하게 문명을 발전시킨다네. 게다가 발전 중인 문명들을 서로 영향을 주게 하면서 테스트를 계속 하게 한다네. 그럼으로 독특하면서 밸런스가 맞는 문명의 단면들을 우리는 거의 무한대로 찾아낼 수 있는 거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정말 투자다운 투자를 한 것이지. 고성능 클러스터 컴퓨터가 많이 동원되었으니까. 지금도 문명은 발전해 나가고 있다네.“ 진성은 감탄했다. 이팀장의 말이 사실이라면 게이머는 고대의 문명 뿐 아니라 현대에 가까운 문명까지 다 다루어 볼 수 있고 다루어야 하는 것이다. “.... 그러면 게이머가 그 많은 문명의 발전을 꿰뚫고 있어야 한다는 것 아닙니까?” 진성의 생각에 너무 게임이 방대하다 느꼈다. 한번의 게임은 그리 길지 않겠지만 절대 게임을 클리어 했다는 말은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그것도 생각했지. 하지만 프로 게이머라면 그 정도의 노력은 해야 할 테고 보통 게이머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문명은 어느 정도 알고 있겠지. 게임의 시작 때 자신의 문명과 그 시간대를 대략적으로 정할 수 있다네. 그렇다고 게이머가 완벽하게 파악한 문명은 절대 나오지 않지. 맵과 발전 정도에 있어서도 여러 번 시뮬레이션 한 결과를 사용하기 때문에 정말 완벽하게 똑같은 경우가 나오려면 복권을 한 사람이 연속으로 5번 당첨되는 것보다 더 어려울 걸. 그리고 당연히 프로 게이머에게는 문명의 선택만 할 수 있게 만들 것이네. 그래야 볼거리가 생기지.”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전용 게임기가 따로 있습니까?” “당연하지. 우리가 상당히 많은 신경을 쓴 부분이라네. 프로 게이머용 전용 게임기를 정말 최고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지. 상당히 야심작이거든. 게임 역시 보통과 다르지만 게임 인터페이스 역시 혁명은 아니더라도 혁명으로 가는 과도기라고는 할 수 있다네.” 진성은 저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그 게임기라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 그 게임기에 대한 부분은 차차 같이 일하면 다 알게 될 테니까 별 걱정은 없고.. 아.. 계약해야지. 자네, 진팀장의 아들과 같은 사람이니 내가 편하게 말을 해도 될까?” 진성은 확실히 이 사람, 이팀장도 진팀장과 비슷하다는 걸 느꼈다. 사람과 일할 때는 편해야 일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확실히 두 사람은 친구였다. “물론, 그렇게 하십시오.” “좋아, 잠깐만..” 이팀장은 어지러운 책상에서 뭔가를 찾았다. 한참을 찾은 후에야 책상 밑에 쌓인 서류에서 약간 구겨진 서류 한 장을 진성에게 건넸다. “읽어봐. 맘에 들면 사인하고 아니면 나와 협상해야지.” 서류를 읽어본 진성은 옆에 있던 현준을 봤다. 현준은 그런 진성의 모습에 서류를 뺏어 읽었다. 다른 것들이야 계약할 때 나오는 것이라 해도 제일 중요한 돈과 관련된 것을 본 현준 역시 놀랐다. “....계약금.. 오천만원. 연봉 오천만원 + 알파. 게임대회 출전해서 성적이 좋으면 따로 설정된 보너스 지급..... 게임 상용화 전까지는 베타 테스터 역할........” 정말 좋은 조건이었다. 아니 사기가 아닐까 의심해 볼 만큼 좋은, 과분한 조건이라 생각한 진성이었다. “.... 휴.... 너무 제게 과한 것 아닙니까? 이런 문명 온라인 같은 게임은 처음인데.....” “어떤 게이머라도 이런 게임은 처음이야. 그러니 너도 당연히 처음이지. 그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아. 그리고 너도 네 가치를 아직 모르는 모양인데. 네 팬 사이트 알지? 그 팬 사이트의 회원수가 얼마라고 생각해?” “네? 아... 대략 오만 정도?” 진성은 갑작스런 이팀장의 질문에 급히 머리를 굴려서 대답했다. 메시지가 심할 때는 만통이 넘게 날라오니 대략 오만 정도로 얘기했다. “이런... 정말 모르는구만. 그 팬 사이트의 회원수는 100만이 훨씬 넘어. 100만이라는 팬도 내가 알기로 그나마 경제력이 있는 20대가 많아. 그리고 네가 말한 수는 골수팬일거야. 그 정도면 네가 문명 온라인을 통해서 프로 게이머로 데뷔하게 된다는 뉴스가 실리면 바로 게임을 즐기는 100만명이 문명 온라인에 대해서 아주 호의적으로 받아 들일테고 오만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문명 온라인을 플레이할 걸. 그것만 계산하면 네게 주는 연봉은 내 개인적으로는 많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게다가 내가 볼 때 너는 누구보다도 문명의 온라인에서 성공할 수 있을 것 같거든....” “예? 그렇게 되나요?” “정말 못 해 먹겠구만. 이거 완전히 반대잖아. 네가 내게 돈을 올려 달라고 말하고 나는 깎아야 되는데..... 진팀장만 아니어도 그냥 계약하는 건데....” 이팀장은 진팀장에게 사전에 들은 말이 있었다. 강진성은 진팀장 자신의 아들과 같다고. 그런 소리를 들은 이팀장이기에 속여서 계약할 수는 없었다. 이팀장은 진성에게 계약서를 빼앗더니 ‘슥’하며 고쳤다. “자, 계약금 2억에 연봉 1억. 게다가 각종 옵션도 내가 알아서 올렸으니까 너는 그런 줄 알고 있어라. 자 여기에 사인이나 해라. 이런 계약은 처음 해보는구만.” 진성은 이팀장의 배려에 감사하며 사인을 했다. “강진성. 너 사인 하나 새로 만들어라. 이게 뭐냐? 완전히 지렁이 기어가잖아? 그리고 네 계약금과 월급 나갈 통장이나 하나 만들어 계좌 번호를 우리 팀의 재정 담장인 김하나씨에게 주고 가라. 아직 시간 있으니까 이 건물 1층에 있는 하늘은행에서 만들면 편하겠지. ” “네? 네....” “진현준!” “네. 너도 네 아버지에게 게이머 하고 싶다고 했다며?” “네? 네! 하고 싶습니다.” “너는 내가 특별히 알바생으로 베타테스터 시켜줄 테니 해볼테냐? 한달에 50만원이다. 물론 빨간 날 다 논다. 야근? 조금 있다. 야참? 물론 다 준다.” “당연히 해야지요. 그런데 아버지가 말씀하셨나요?” “내가 안 된다고 했는데 네 녀석 아버지가 우겨서 한다고 했다. 대신 내 딸을 네 아버지 프로젝트의 베타테스터로 해 주기로 서면 계약까지 했지. 크하하.” “네? 아버지 프로젝트?” “아... 그건 알 필요 없다. 현준이 너도 통장 만들어 계좌번호 주고 가라. 그리고 내일 아침 9시까지 여기로 출근해라. 다른 것은 필요 없고 간편한 복장으로 와라. 양복 입고 왔다가는 여기서 쫓겨난다.” 이팀장은 자신의 반바지를 가리키며 진성과 현준에게 이야기했다. 진성과 현준은 웃으며 이팀장의 방에서 나왔다. 일단 먼저 통장을 만들어야 했기에 1층으로 내려갔다. 간단히 통장을 만든 뒤에 다시 20층 건물의 15층으로 올라왔다. 갔다 오는 동안 진성은 자신이 그렇게 돈을 많이 받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기에 기분이 묘했다. 옆에 있는 현준은 벌써 한턱 내라는 말부터 꺼냈다. 다시 안으로 들어온 진성과 현준은 입구 쪽에 가까운 사람에게 물었다. “저... 재정담당 김하나씨 어디 계시는지 아십니까?” 진성은 아주 조심스럽게 칸막이 속에서 일하는 한 사람에게 물었다. 큰 체구에 우람한 근육의 정말 남자다운 남자였다. 게다가 일어서니 190 정도는 되어 보였다. “새로 오신다는 게이머십니까?” “예... 그렇습니다만.” “반갑습니다. 저는 김덕만이라고 합니다. 저도 여기 온지 한달도 안됐거든요. 같이 잘 해 봅시다. 아, 누구 찾으신다고 했죠?” 큰 체구에 어울리는 목소리였지만 어쩐지 약간 수다스러워 보였다. 그런 근육의 소유자가 저런 걸걸한 목소리로 수다를 떨다니. 상상만 해도..... “저는 강진성이라고 합니다..... 재정담당 김하나씨 어디 계신지?” “아, 김하나씨... 저기 저 쪽에 책상 따로 있는 곳 있죠. 저 쪽에 있습니다. 지금 유일하게 앉아있는 저 사람이 바로 김하나씨입니다. 그리고 저....... 내일부터 나오시나요?” “네, 그럴 것 같습니다.” “옆에 분은?” “저와 같이 일할 다른 베타테스터입니다.” “네? 베타테스터는 한 명이라고 들었는데?” “바꿨답니다. 팀장님이 그러시든데요?” 진성은 끊임없이 물어볼 듯한 김덕만의 말을 팀장이라는 말로 막은 뒤 재빨리 김하나씨에게로 다가갔다. 화사한 옷차림에 생머리의 활기찬 20대 여성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새로 온 게이머 강진성이라고 합니다.” “저...는... 베타...테스터 진현준....입니다....” 현준은 김하나를 보더니 말을 더듬었다. 얼굴마저 점차 붉어졌다. “안녕하세요. 새로 오신다는 프로 게이머시군요. 아, 통장 가져 오셨군요. 잠시만요.” 김하나는 현준의 모습을 모르는지 익숙하게 파란 파일을 하나 가져 왔다. 그리고 통장과 민증을 받아서 복사하고 또 스캔도 했다. “이제 됐습니다. 이분은 아르바이트생이시죠?” “네? 네.... 저......는 알바생입니다.” “내일부터 뵙겠네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 나오는 길에 현준은 무척 흥분했다. 숨을 몰아쉬더니 한마디 폭탄을 던졌다. “나 한눈에 반했어.” “유진이는?” 진성은 이미 눈치를 챈 상태여서 별다른 놀람 없이 툭 내뱉었다. “.... 몰라. 아무튼 내일부터 나의 봄날이 시작된다.” 진성은 이런 현준의 상태가 걱정되었지만 이런 미치는 병은 약도 없기에 어쩔 수 없었다. 현준은 다시 15층의 문명 온라인 사무실로 올라갔다. 진성은 현준의 아버지를 만나야할 일이 남아서 그 시간 동안 현준은 기다리기로 했다. 진성은 현준이 김하나라는 여자를 보기 위해 남은 것을 알았다. 진성은 관심을 끊고 16층에 있는 진팀장의 사무실을 향했다. 놀란 것은 이 건물에 17층이 없다는 말이다. 알고 보니 16층에서 17을 없애버리고 사용했다. 이런 낮지 않은 빌딩에서 저런 공사를 하다니. “저 왔습니다. 아저씨.” “아, 진성이 왔구나. 그래, 계약은 했나?” “네, 신경써 주신 덕분에 잘 했습니다.” “신경? 아, 그것. 그래 계약금은?” “계약금 2억에 연봉 1억이라고 하든데요.” “오호, 그 녀석 너의 진가를 알아본 모양이군.” “네? 제가 정말 운이 좋아서죠. 저는 제 팬 사이트의 회원수가 100만이 넘는 줄 몰랐거든요. 그렇게 할 일 없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 나도 그 100만 중의 하나다. 이 녀석아!” “예? 서... 설마.” “... 그만 두자. 아, 맞다. 너 3D 와 인공지능 프로그래밍 중 어떤 게 좋으냐?” “.... 둘 다 상관없는데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너 이거 한번 읽어봐라.” 진팀장은 진성에게 조금 부피가 있는 책자를 건넸다. 책자의 표지에는 뭔가 추상적인 그림과 더불어 ‘가상현실’이라고 고풍스럽게 그려져 있었다. 게다가 아래에는 ‘자소 소프트’라고 자랑스럽게 누가 적은 모양이다. “가상현실?” 진성은 천천히 읽어 나갔다. 가상현실에 대한 기본적인 총론이다. 개념에 대한 이야기가 주로 다루어졌다. 하지만 진성은 이렇게 정리가 잘 된 총론을 보고는 뭔가 가상현실에 대한 성과가 있었다고 예상했다. “아저씨, 아까 이팀장님께 얼핏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저씨가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가상현실인가요?” “관계가 있지.” “그리고 그 가상현실에 대해 뭔가 실용화할 정도로 개발이 된 모양이네요.” “어.. 네가 그것을 어떻게 알지? 정말 극비 중 극비인데..” “다 아는 수가 있죠.” “네가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다만 정말 중요한 얘기다. 혹시 누구에게 들은 건가?” “아닙니다. 그냥 제 추측입니다. 조금 전 본 가상현실 책자를 보니 뭔가 정리가 된 듯해서 그냥 넘겨짚은 겁니다. 절대 다른 사람에게 들은 것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이런... 이런 책자도 절대 밖으로 유출되지 않도록 해야겠군. 허허..” “그런데 정말 가상현실이 게임에 이용될 정도로 발전한 건가요?” “기본적인 시스템은 다 갖추어졌지. 온라인 게임으로 나가려면 어차피 기존의 네트웍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일정 속도 이상은 낼 수 없지. 그런 제한적인 환경에서 완벽한 구성을 하려면 너무 고려해야할 게 많아. 아직 미비한 부분은 너무 비싼 접속장치와 가상현실 내의 세계의 구성이야. 게이머를 마치 딴 세상에 온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의 접속장치는 현재 프로토 타입이 나와 있는데 덩치도 크고 값도 장난이 아니야. 그것을 집에 설치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생각해야 돼. 뭐 대량생산되면 많이 떨어지겠지만.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가상현실 세계를 어떻게 만들고 구성하느냐, 그것이 문제야. 실제 세계와 같이 게이머가 주위를 둘러보려면 한 사람의 게이머에 대해서만도 그 데이터가 상상을 초월하게 된다고. 그러니 게이머가 뛰어 다니고 심지어 날아다닐 세상을 어떻게 프로그래밍할 지가 걱정이라고. 하나씩 만들었다가는 끝도 없을 테니까.“ “그러면 가상현실이라는 시스템 자체는 이미 완성되었다는 뜻입니까?” “그렇다고 봐야지. 현재 아주 조악하지만 실제 테스트도 가능하니까.” “그러면 다른 분야에 적용하면 획기적인 결과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맞아. 우리는 이것을 개발하기 시작한 지 벌써 5년이 넘었다네. 그런데 엄청나게 쏟아붓는 돈 중에서 우리 회사가 부담하는 돈은 극히 일부분이야. 그 이유가 바로 프로토 타입을 본 세계 유수의 회사에서 우리에게 투자를 한 것이지. 나중에 기술 개발이 완료되면 좀 더 유리한 조건으로 계약을 하기 위해서.” “그런 정도입니까? 정말 놀랐습니다.” “내 생각에는 자네가 그 가상현실 세계를 만드는데 도움을 주기를 바라는데. 어때?”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하겠습니다. 저, 그런데......” “왜 그러나?” “제가 프로 게이머로 계약을 했는데 이렇게 일할 시간이 있을지.....” “그것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리고 이왕 이렇게 온 것 계약이나 하세. 자네는 프로그래머로 일하니까 연봉은 2천만원이야. 당연히 계약금은 없다네. 아직 대학 졸업하지 않은 사람에게 그것도 풀타임이 아닌 사람에게는 조금 높은 연봉이라네. 뭐, 프로 게이머로서의 계약금과 연봉에는 한참 못 미치겠지만.” “저는 상관없습니다.” “그래? 좋아. 내일부터 출근하도록 하게나. 아마도 이팀장 쪽에 왔다 갔다 해야할 거야. 걱정은 말게. 자네가 프로 게이머라는 것을 충분히 감안해 줄 테니까. 일에 대한 것은 내일 나오면 그 때 얘기하기로 하지.” 진성은 역시 계약서를 작성하고 나가면서 진팀장의 재정담당를 만났다. 시계를 보니 저녁이 다 됐다. 모든 것을 다 끝내고 나가면서 현준에게 전화했다. “현준아, 나 다 끝났다. 집에 가자.” “진성아, 조금 있으면 저녁인데 우리 저녁 먹고 가자.” “그래? 그럴까? 그럼 아저씨와 같이 식사 할까?” “아니, 절대 안돼. 잠깐 기다려. 아버지에게 말하지 마. 내가 조금 있다가 올라갈 테니까.” 깔끔한 복도의 창가 쪽 간이의자에 앉아 있는 진성을 지나가던 진팀장이 보았다. “진성아, 아직 안 갔냐?” “아, 네..... 현준이 기다리는데요.” “현준이? 아.... 그 녀석 회사에 왔냐?” “네, 지금 아래층에 있는데요.” “맞다. 베타테스터 시켜 준다고 했지. 맞아. 그래..... 진성아, 오랜만에 나왔는데 우리 식사나 같이 할까? 그래 같이 하자. 집사람에게도 전화해야겠는걸. 조금 기다려라. 현준이 오면 같이 식사할 테니까 기다리라고 해라.” 진성이 말할 틈도 없이 진팀장은 후다닥 말하고는 퇴근 하기 위해 사무실로 들어가 버렸다. 진성은 현준이 이 사실을 알면 발작을 할 거라 생각했다. 그 때 현준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진성, 기뻐해라. 하나씨와 저녁 같이 하기로 했다. 푸하하하 하나씨 정말 좋은 여자더라고. 나이는 나보다 조금 많은 것 같지만 그 정도야. 너도 같이 식사하기로 했으니까 빼면 안돼. 알았지?” “...뭐? 어..... ” “뭐야? 반응이 왜 그래? 같이 갈거지?” “....... 그런데... 너... 만약에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면 어떻게 하려고? 회사 찾아왔다가 말도 않고 처음 본 여자와 식사를 같이 한다는 이 사실을 네 아버지가 알면 가만히 안 계실텐데......” “... 절대 알 수가 없지. 아버지가 신이라면 몰라도. 크크큭” “불행히도 이 아비는 신이란다. 이녀석아!” 윗도리를 걸치고 나온 진팀장은 자신의 아들이 복도에서 큰소리로 말하는 것을 듣고는 기가 막혔다. 이런 녀석이 아들이라니. 진팀장은 가만히 있다가 뒤로 다가가 머리를 사정없이 때렸다. “누구얏? 아.... 아... 아버지?” “절대 알 수가 없어? 이런 어쩌지? 알아버렸는데?” “.......... 아버지...”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마라. 그런데 이 녀석아. 그 여자가 누구냐? 하나씨라니? 아, 이팀장의 재정담당이 김하나라고 하든데... 맞아?” “네, 아버지. 정말 괜찮지 않아요?” “괜찮고 안 괜찮고를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런데 오늘 저녁 식사를 같이 하시겠다? 그런데 이를 어쩌지? 네 어머니도 여기로 온다고 했는데.... 네 어머니가 이런 사실을 알면 가만히 안 있을텐데....” 현준의 어머니는 평소에는 다정다감하다가도 뭔가 배신당했다는 느낌이 들면 돌변해 버리곤 했다. 그럴 때는 현준의 아버지조차 피해서 며칠 잠적하기도 할 정도였다. “네? 엄마가 온다구요?” “내가 불렀지. 이 녀석아. 알아서 해라.” 상황은 묘하게 돌아갔다. 재미있어 진 것이다. 결국 어쩔 수 없이 현준은 김하나를 데리고 첫 저녁 식사를 자신의 가족들을 소개하면서 해야 했다. 김하나도 앞으로 같이 일할 사람들과 간단히 저녁 식사인 줄 알았는데 회사내에서 이팀장과 더불어 양대산맥인 진팀장과 같이 식사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게다가 가족이라니 더욱 놀랐다. 중간에서 난처해진 현준은 말도 제대로 못했으면 연신 아버지인 진팀장에 대해 투덜거렸다. 다음날 아침, 현준과 진성은 아버지인 진팀장과 함께 회사로 출근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이렇게 일찍 집을 나서기는 정말 오랜만이어서 진성은 낯익은 거리가 새롭게 느껴졌다. 사람들의 활기가 느껴지는 거리. 한동안 무기력한, 무덤덤한 생활에 익숙했던 진성은 새로운 힘을 느꼈다. “현준아, 역시 출근 때의 거리가 가장 활기찬 것 같다.” “뭐? 활기차? 사람이 많아서 복잡만 하구만.” “그래도 왠지 소란스럽고 부대끼는 맛이 있잖아.” “뭐? 그런 것은 혼자 즐겨라. 나는 취미 없다.” 현준은 빨리 가고 싶은 마음에 진성에게 짜증을 냈다. 짜증내는 현준의 이유를 알았던 진성은 피식 웃었다. 어제 이상하게 끝나고 만 저녁 식사 후에 현준은 전화기를 붙들고 김하나에게 전화를 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좋은 얘기가 오갈 리가 없다. 현준은 미안하다면서 사과했다. 진성이 추측건대 아마 김하나라는 사람은 조금 화가 난 모양이다. 진성 자신이라고 해도 그리 쉽게 이해될 일을 아니었다. 그런 모습을 보는 현준의 아버지는 운전을 하면서 웃었다. 아들 둘과 같이 회사에 출근하는, 꿈이 아닌 현실의 모습에 너무 뿌듯한 현준의 아버지였다. 현준의 어머니도 같이 출근하는 남자들을 보고는 내심 부러워 한 것은 두말할 필요 없다. 약간 복잡했지만 이른 아침의 여름 치고는 서늘한 공기에 기분이 좋아진 진성은 보통 때는 그리 반갑지 않은 오늘의 더운 하루를 기대했다. 처음으로 자신의 일을 하는 기분에 자신이 들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진성이었다. 진성과 현준은 문명 온라인 팀으로 출근했다. 지금 당장 테스트가 필요하고 급한 곳이 ‘문온’팀이라서 진팀장이 이팀장에게 양보했다. 진성과 현준이 사무실로 들어가 이팀장의 방으로 들어가 인사했다. “이제 출근했습니다.” “그래? 빨리 왔군. 일단 밖에 자리를 마련했으니까 나가면 덕만이가 안내해 줄거야. 조금 있다가 사람들이 다 오면 소개하는 자리를 갖자고.” 밖으로 나온 진성과 현준은 거대한 수다쟁이 김덕만을 찾았다. “안녕하세요. 김덕만씨.” “아, 어제 오신 분들이군요. 대장님이 자리를 만들어라고 해서 제가 마련했지요.” 대장이라는 말에 진성은 의아했지만 잘 모르는 관계로 넘어갔다. “예.... 저기 저희들 자리가 어딘지..?” “따라 오시지요.” 진성과 현준은 김덕만의 뒤를 따랐다. 처음에 들어온 사무실이 아니었다. 입구를 통해서 사무실로 들어오면 대략 20명 가까이의 책상이 있고 사무실의 왼쪽에 이팀장의 방이 있었다. 김덕만은 그 반대쪽인 오른쪽으로 걸어갔다. 끝으로 가니 통로가 있었다. “이쪽이 바로 프로그래머와 테스트 장비 일체가 있는 곳이지요. 보통 프로그래머나 테스트 쪽에 일하는 사람은 책상이 이곳과 저 사무실 두 곳에 다 있지요. 저도 뭐.. 명색이 프로그래머다 보니.... 자 이쪽으로.” 김덕만은 조금 걸어가더니 가로막힌 육중한 문 앞에 섰다. 목걸이처럼 걸어놓은 카드를 넣고 엄지손가락을 움푹파인 곳에 넣었다. 그리고 눈을 검사하는 곳에 대었다. 이윽고 삑삑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덜컥하며 육중한 문이 열렸다. “저 안에 거의 대부분의 시설이 다 들어 있어서 보통 밥 먹을 때 빼고는 나오지를 않죠. 자 들어가시죠.” 진성과 현준은 놀랐다. 원래 개발하는 곳은 보안이 엄격하게 지켜져야 하지만 이렇게 철저할 줄을 몰랐다. 진성과 현준은 몰랐지만 보통 이렇게 얼마되지 않은 사람이 이런 곳에 들어오기는 힘들었다. 진성과 현준의 경우는 진팀장이라는 보증인이 있기에 가능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넓은 공간에 게임기로 보이는 것들이 여러 대 놓여 있었고 그 주위를 둘러싸는 컴퓨터와 전자 기계들이 빽빽했다. 그 뒤에 투명 플라스틱 창이 크게 있었다. 그 안에 사무실 같은 것이 존재했다. “저기 안으로 들어가면 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컴퓨터와 문온의, 아.. 여기는 다 문명 온라인을 문온이라고 하니까요, 기본적인 매뉴얼 등이 다 구비되었으니까 들어가서 보고 있으면 될 겁니다.” 진성과 현준은 덕만의 말대로 중앙의 마치 큰 실험실같은 곳을 지나서 뒤에 마련된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곳도 그리 작지는 않았다. 대략 봐도 10개가 넘는 책상들이 들어서 있었다. 그 중, 중간에 ‘강진성’, ‘진현준’이라고 표시가 된 책상이 있었고 진성과 현준은 일단 그 곳에 앉았다. “이야. 이거 좋은데. 이렇게 시원하고 이렇게 좋은 곳에서 일하면 일할 맛나겠는걸.” 전체에 에어컨이 작동되는지 안은 굉장히 시원했다. 그리고 책상도 상당히 좋았고 특히 의자는 정말 편했다. 책상위에서는 갖가지 매뉴얼들이 잘 정리되어 있었고 그 옆에 적어도 25인치는 넘어 보이는 박막형 모니터가 있었다. 진성은 당장 할일도 없었기에 컴퓨터를 켰다. 거의 소음도 나지 않게 컴퓨터는 부팅이 되었다. 옆에서 같이 컴퓨터를 켠 현준은 또 다시 감탄했다. “이렇게 조용한 컴퓨터라니. 게다가 이것 와..... 이거 ALD 프로세서잖아. 이거 정말 비싼 건데.. 진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텐데.. 정말 이 정도면 돈 안 받고도 일하겠다.” 진성은 컴퓨터 안에 아무것도 없을 줄 알았는데 웬만한 프로그램이 있는 것을 보고는 무엇이 있나 살펴보았다. “어... 현준아. 게임이 상당히 많이 깔려 있는데. 여기에 WIS 도 깔려 있네. 너도 한번 살펴봐라.” “그래? 잠깐만.” 진성은 다른 곳도 뭔가 새로운 게 없을까 찾았다. 마치 보물을 찾는 것처럼. “아, 여기에 문명 온라인이 깔려 있네. 베타 버전인가?” 진성은 호기심에 실행시켰다. 물론 프로 게이머 용과는 다르겠지만 어느 정도 분위기를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오프닝 화면은 정말 대단했다. 요즘에 나오는 게임도 상당한 퀄리티의 동영상이 나오곤 하는데 그 중에서도 최상급이라 생각했다. “와... 오프닝은 정말 끝내 주네.” 구석기 시대의 고인돌을 만드는 과정을 하늘 위에서 가까이 다가서더니 곧 옆으로 길게 거리를 벌리면서 실제로 찍어 놓은 듯한 구성에 곧이어 화면이 바뀌더니 이집트 피라미드를 건설하게 스펙터클한 화면이었다. 다음으로 온 들판을 가득 메운 대군이 질서 정연하게 도열해 있다가 앞선 장군의 명령에 돌진하는 거대한 전쟁장면이었다. 화면은 계속 이어졌다. 중세의 기사들과 이슬람 전사들간의 치열한 싸움, 대형 범선을 이용한 무역시대, 장총에 장검을 끼워 움직이는 보병들간의 전투 등 아주 대단한 장면들이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현준 역시 감탄했다. “야, 정말 끝내준다. 동영상으로 거의 20분이 넘다니. 이거 CD가 아닌가?” 진성 역시 오프닝이 이 정도라면 얼마나 정성을 들인지 알 수 있었다. 이제 막 게임을 시작해 보려는 순간 김덕만이 안으로 들어왔다. “사람들이 다 대회의실에 모인다고 하네요. 같이 가시지요.” 진성과 현준은 김덕만을 따라갔다. 왔던 길로 되돌아 갔는데 육중한 문을 넘어 입구의 사무실로 가기 전에 왼쪽에 문이 하나 나 있었다. 김덕만은 그 문을 열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상당히 큰 회의실이었다. 30명은 족히 넘게 앉을 수 있는 곳이었다. 타원형의 탁자를 둘러싸고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자, 이리로 오게나. 여러분, 그 동안 고생 많았다. 이제 우리 문명 온라인이 세상에 알려질 때가 가까이 다가왔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여기 두 사람은 문명 온라인의 테스터로 일하게 될 것이다. 특히 이 친구는 문명 온라인이 더욱 많이 알려지도록 해 줄 프로 게이머다. 너희들 인사해라.” “안녕하십니까? 이름은 강진성입니다. 쥬신대학에 재학중입니다. 이번에 프로 게이머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저는 진현준입니다. 진성이의 친구입니다. 알바생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잘 해보자.” “젊은 사람들이 와서 좋군....” “짝짝짝짝.” 회의실 안에 있는 사람들이 환영의 박수를 쳤다. “자, 나머지는 다들 개인적으로 하고 잠깐 오늘의 회의를 하겠네.” 진성과 현준은 앞에서 물러나 뒤로 가서 앉았다. 이거 정말 대단하잖아. 이런 정도라면 정말 대박난다고 자신할 수 있겠는 걸.’ 회의가 끝난 뒤 진성과 현준은 그 육중한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커다란 전용 게임기에 대한 실험을 보고 있었다. 조금만 있으면 테스트가 가능할 것이다. 진성과 현준이 해야 할 일은 문명 온라인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같은 팀으로 일하게 될 사람들과 친해지는 것이었다. 특이하게 여기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팀장인 이팀장을 대장이라고 불렀다. 게다가 보통 회사라면 서로 존대말을 하기 마련인데 이팀장은 거의 무조건 반말이었고 사람들도 별로 반감을 가지지 않는 듯 했다. 육중한 문 안쪽을 사람들은 요람이라고 불렀다. 무언가 정성스럽게 키운다는 의미에서였다. 요람의 중앙에 있는 많은 모니터와 그 중앙에 있는 문명 온라인 전용 게임기. 전용 게임기는 크기만 해도 사람이 안에 들어갈 정도였다. 진성은 아직 실제로 해 보지 않아서 확실히 알지는 못했지만 자신이 직접 이런 프로 게임기에 앉아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설렜다. “뭐야? 이런 것을 꼭 알아야 해?” 현준은 매뉴얼을 뒤적이며 연신 투덜거렸다. 좋은 자리에 좋은 환경이라며 일도 정말 잘 되겠다고 감탄한 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다. 문명 온라인의 매뉴얼은 조금 과장하면 역사책과 다름이 없었다. 기본적인 조작과 게임의 설명 외에는 각 문명에 대한 설명이 주를 이루었고 계속 발전해 나가는 문명의 축을 이루는 요소들의 설명으로 가득했다. 게임의 실제적인 매뉴얼은 얼마 되지 않았고 각 문명에 대한 해설을 해 놓은 책들이 대부분이었따. 현준은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이거 완전히 역사 공부하라는 거잖아? 이런 게임이 성공할 수 있을까? 주로 게임하는 사람이 중고등학생이라면 이런 게임은 하고 싶지 않을텐데....” 현준은 꽤 진지하게 말했다. 매뉴얼을 보던 진성도 그 부분이 걸렸지만 오히려 더욱 그 방대함에 어린 학생들 뿐 아니라 게임을 손에 놓는 시기인 20대 중,후반까지 끌어들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현준아, 백견(百見)이 불여일행(不如一行) 이라. 게임 한번 해 보자.” “그게 좋겠지?” 현준과 진성은 아직 완료되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플레이가 가능한 아마추어 버전의 문명 온라인을 직접 해 보기로 했다. 아마추어 버전 역시 테스트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팀 내에 설치해 둔 것은 플레이를 하면서 일종의 알파 테스터의 역할도 동시에 하기를 원해서였다. 현재 지원되는 문명은 2개뿐이었다. 로마 문명과 그리스 문명이 지원되었는데 원래의 역사와는 달리 거의 대등하게 밸런스가 조정되었다. 최종적으로는 8개까지 지원이 될 예정이었다. 진성과 현준은 문명도 랜덤, 시대도 랜덤으로 놓고 게임을 시작했다. 비교적 간단히 게임을 시작할 수 있어서 좋았다. 게임이 시작되자 진성은 광대한 맵을 볼 수 있었다. 한 나라의 영토인 듯한 지도인데 처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당황했다. 그러다 하나씩 클릭해 보면서 사정을 알아갔다. 국경인 듯한 곳에서 여러 군단과 장군들의 이름을 보자 진성은 곧 로마제국이라는 것을 알았다. 로마제국 뿐 아니라 거의 지중해, 북 유럽, 아프리카, 인도까지 망라된 맵이어서 진성은 상대인 현준이 동유럽의 오스만 제국이 아닐까 생각했다. “오스만 제국이라면 쉽지 않겠는데.....” 시대가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매뉴얼 상에서 역사와 같지는 않다는 것을 기억한 진성은 다른 것은 그냥 두고 제국 내부를 신경 썼다. 한참을 보다 보니, 신기하고 흥미로운 것이 있었다. 게이머인 자신이 직접 어떤 경제활동이라든지, 아니면 군대의 이동을 명령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가만히 살펴보니 제국의 황제가 직접 그런 일들을 처리했다. 진성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게임인데 게이머가 조종을 할 수 없다니. 뭔가 이상해서 빨리 매뉴얼을 펼쳤다. 조금 찾으니 바로 답이 나왔다. 이것은 문명 온라인의 여러 모드 중 하나인 ‘신’모드였다. 보통의 강력한 신이 아니라 신탁이라든가 여러 간접적인 방법으로 영향을 주어서 정책을 변화시킬 수 있고 제한이 있는 강력한 권능으로 위엄을 발할 수 있는 모드였다. 아주 어려운 난이도로 보통 개인 사용자들이 혼자 플레이할 때 많이 사용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누군가 모드를 바꾸어 놓은 모양이었다. 재빨리 진성은 그 모드를 ‘게이머’ 모드로 바꾸었다. 곧 신모드에서는 없던 아이콘들이 생겨났고 진성은 하나씩 눌러보면서 익혀 갔다. 현준도 진성과 비슷한지 전혀 접촉이 없었다. 약 10분이 넘자 진성은 국경에 있던 군단 하나를 북쪽으로 진군시켰다. 알프스 산맥 바로 앞까지 전진시켰다. 동시에 로마 위의 항구 루카에서 전선에 다른 군단을 실어서 에스파냐로 옮겼다. 그리고 해군의 전선을 이용해서 동유럽쪽으로 정찰을 보냈다. 로마 군대의 최고 장점은 밀집보병부대였다. 여러 능력치들을 확인한 결과 군단의 생산비에 비례한 최고 공격력은 보병이었다. 진성은 당연히 보병을 중시하는 작전을 사용해야함을 알았다. 곧바로 군단의 병력 재배치를 시작했다. 한데 뭉쳐 있는 밀집 보병을 3개로 나누고 3개를 따로 이름을 붙였다. 그 밀집 보병 부대가 차례로 중앙에 위치하고 기병은 양 날개에 배치했다. 기병은 기동력을 최대로 이용하는 방법을 택해 지휘관의 재량에 맡겼다. 또 진성은 어차피 연습하는 것이어서 남부의 모든 군단을 북쪽 국경으로 이동시켰다. 현준이 분명 북쪽에 있으리라 생각하고 군대 이동을 보기 위해 모조리 다 이동시켰다. 또한 로마에서 자유민에게 배급되는 모든 빵과 밀을 중단하고 콜로세움에서 계속되는 모든 행사를 중지시켰다. 사람들의 불만이 많았지만 오히려 그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소집령을 내렸다. 군대에 입대할 수 있는 사람은 모조리 입대하라는 명령이었다. 원로원에서 계속 불가하다는 메시지가 왔지만 진성은 무시했다. 곧바로 원로원을 해체시켜 버렸다. 그래서 군인을 훈련시킨 후 족족 북쪽으로 보냈다. 이미 알프스 근처까지 간 군단은 다음 명령을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었다. 진성은 군단의 전투력을 보기 위해 주변의 다른 민족의 부락을 찾아서 섬멸하고 영토를 늘리라고 명령했다. 에스파냐로 간 군단에게도 같은 명령을 내렸다. 군단 하나로 그런 짓을 하다가는 대부분 포위되어 전멸하겠지만 진성은 개의치 않았다. 하다보니 이미 현준에 대한 생각은 버리고 최대한의 군사력과 그에 대한 반응들, 사회의 통제 등을 해 보고 싶었다. 독재를 시작하니 반발이 생겼다. 새로 만든 정보 기구에 포착된 반대하는 귀족들을 감옥에 다 가두었다. 보통 이럴 때는 달래지만 진성은 게임 내에서 최대한 제국의 역량을 보고 싶었다. 북쪽에 도착한 군대는 30만이 넘었다. 아직도 올라가고 있는 군대도 적지 않았다. 진영은 30만 군대의 반을 동유럽으로 진군하도록 했다. 가면서 걸리는 것은 무조건 쓸어버리라고 명령했다. 진성은 군대의 이동 속도의 최대 걸림돌은 가도의 존재 유무와 보급선이라는 것을 알았다. 특히 대군을 원정 보낼 때 엄청난 보급이 필요하다고 깨달았다. 진성은 그런 문제를 현지의 약탈로 보충했지만 실제로 그런 짓을 하면 적이 아니라 가는 동안에 주변의 민족들에게 당할 수도 있었다. 진성은 그렇게 무리하면서 제국을 다루었다. 알프스를 넘은 군단은 계속 전진하면서 나가다나 갈리안 인들에게 둘러싸여서 전멸했다. 에스파냐에 간 군단 역시 같은 결과였다. 동쪽으로 보낸 대군은 가는 동안 여러 전쟁을 깔끔하게 마무리 짓고는 마게도니아 부근까지 갔다. 진성은 그 곳에서 현준의 사회를 발견했다. “그리스였네. 시대가 다른데... 아, 그런 시대와는 다르다고 했지. 그러면 어느 정도 군사력도 많이 강해졌겠군.” 진성은 또 다른 문명에 잠시 생각한 후에 곧바로 15만의 병력에게 총공격을 명했다. 많은 도시국가로 이루어진 그리스여서 한꺼번에 점령하기는 힘드리라 생각했는데 현준이 아직 게임에 대해 알지 못해서인지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거의 게임은 끝나가는 분위기여서 진성은 새로운 게임에 만족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로마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게이머 자신인 독재자는 순식간에 반역자로 몰려 처단 당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곧이어 화면에는 게임에 졌다는 메시지가 나왔다. “이런... 이런 식으로 하면 게임에 이길 수 없다는 말이군. 이것 아주 재미있는걸. 아주 게임을 하려면 머리 싸매야 겠는데....” 진성은 진심으로 만족했다. 이런 게임은 처음이었다. 현준이 다가오더니 물었다. “야, 너 어떻게 했길래 그렇게 빨리 쳐들어 오냐? 나는 뭐가 뭔지 한참 알아보고 있었는데... 그리고 도대체 내가 거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냐?” “... 몰랐어. 그냥 군대 모아서 보내 본 거야. 어차피 연습인데.....” “................. 휴... 그런데 아주 재미있다. 그런데 네가 다 이긴 게임인데 갑자기 네가 지는 걸로 나오든데...” “아, 나 로마제국인데 갑자기 반란이 일어나서 그냥 죽어버렸어! 그러더니 네가 이겼다고 나오든데...” “반란? 그래서 죽으면 지는 건가?” “아마도.” “이야.. 이 게임 정말 재밌는데........” 현준과 진성은 휴게실에서 음료수를 뽑아 들고는 앉아서 얘기하고 있었다. 몇 게임 하는 동안 완전히 지쳐 버린 진성은 몸을 식히며 콜라를 마셨다. 확실히 재미있지만 그에 비례해서 아주 긴장시키는 게임이었다. “어, 이런 곳에 있었네. 벌써 퇴근한 줄 알았잖아요. 자, 이제 곧 게임 전용기 테스트 시작할 테니. 빨리 오세요.” 김덕만이다.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테스트를 한다니 이상했다. 하지만 이제 정식 직원인 진성과 알바생인 현준은 가 보아야 했다. 게다가 호기심도 발동했다. 몇 번 현준과 문명 온라인을 해본 진성은 대강의 게임에 대한 맥을 알 수 있었다. 특히 문명에서 필요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로마의 경우 군단으로 대표되는 군대와 그 군대 내에서 밀집보병인 중장보병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했다. 로마의 군인은 모두 자유인이어서 아주 책임감이 강했다. 시대에 따라서 다르지만 진성이 경험한 로마 문명은 아주 강성한 시기였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군단의 배치, 군대의 병력수, 전략가 등이 아니라 보급이라는 것도 문명 온라인을 통해 알았다. 전쟁의 시작은 바로 보급이었다. 안정된 보급로가 확보되어야만 전쟁이 성립될 수 있었다. 그 다음에야 지휘부의 전술,전략이 빛을 발하고 병력수와 군대의 강함이 승부를 가릴 수 있게 된다. “정말 대단한 게임이이군. 이렇게 잘 짜여져 있다니. 정말 전쟁을 하는 것 같잖아. 마치 도시나 국가를 건설하고 경영하는 것과 전략 시뮬레이션을 결합한 것 같군. 게다가 플레이 타임도 짧고.” 진성은 감탄했다. 게임은 아주 완성도가 뛰어났다. 무엇보다도 플레이해니 재미있었다. 게임의 목적은 누가 뭐라 해도 재미였기에 그런 면에서 문명 온라인은 결코 뒤지지 않았다. “현준아, 이런 게임은 처음이다. 이 정도가 알파 버전이라니. 내가 보기에는 보통 게임 타이틀 상용과 그리 다를 게 없어 보이는데..” “진성 네가 그런 칭찬을 다 하다니. 이 게임 분명 뜰 거다. 이 정도면 순식간에 사람들이 몰릴 거야. 하긴 게임 출시도 되기 전에 프로 게이머부터 구한 정도의 자신감이니....” ‘요람’안의 중앙 실험실로 가니 한창 준비 중이었다. “이제 왔군. 진성, 저기로 가서 준비해라.” “예? 준비라니요?” “아, 못 들었나보군. 이번 테스트는 테스터가 직접 하는 거라고. 어아, 김덕만! 자네 진성이에게 테스트에 대해 말 안했나? 뭐? 안했다고? 어쩔 수 없지. 진성아 네가 직접 저 게임기 안으로 들어가서 테스트 하는 거다. 뭐 별 위험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저기로 가면 게이머 전용 옷이 있으니까 입고 와라.” 대장이라 불리는 이팀장의 말에 조금 불안한 진성이지만 이팀장이 가리킨 곳으로 갔다. 가니 표면에 뭔가 금속들이 많이 붙은 마치 에어로빅 옷처럼 몸에 밀착되는 옷이었다. ‘이런... 이런 옷을 입고 저 사람들에게 가야 한다니... 좀 창피하네. 꼭 이런 옷이어야 하나?’ 혼자 넋두리하면서 진성은 옷을 갈아입었다. 입고 자신이 봐도 좀 이상했다. 남자 체조전수? 진성은 쭈뼛거리며 밖으로 나섰다. “와..... 드디어 저 게이머 옷을 입어주는 사람이 생겼구나. 와... 축하해요.” “.... 이제야 디자인팀의 노고를 알아주는 군요.” “하하하하.. 저 옷이 진짜 사용될 줄이야... 크크큭...” 뭔가 이상한 분위기다. 다들 환호하는 가운데 진성은 게임기 근처로 다가갔다. 전투기의 콕핏과 비슷하게 생겼다. 하지만 내부는 훨씬 넓었으며 복잡한 계기판 같은 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의자는 굉장히 편안했다. 그런데 모니터나 키보드, TV에서 보았던 핸드 컨트롤러 같은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게임을 할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에어로빅 옷 같은데다가 금속판들이 잔뜩 붙어 있을 뿐 아무런 특징 없는 옷과 아무런 것도 발견할 수 없는 조종석 같은 게임기라니. 주위를 둘러봐도 전혀 다른 것은 없었다. “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게임기 주변에서 한창 프로 게이머가 직접 테스트를 하자 신이 나서 준비하는 테스트 요원에게 물었다. “아, 이 게임기 테스트 처음이시죠?” “네, 그런데요.” “조금 있으면 알게 될 겁니다. 좋은 게임 부탁합니다.” ‘좋은 게임? 그냥 단순히 테스트 하는 것 아니었나?’ 모든 준비가 끝났는지 새로 설치된 멀티비젼에서는 문명 온라인의 오프닝 장면이 나왔다. 아마추어 버전과 완전히 같았다. 그리고 역시 같은 화면이다. 사람들이 달라붙어 진성의 옷에 여러 케이블을 연결했다. 콕핏에 어울릴 법한 헬멧까지 씌웠다. 손에는 그리 두껍지 않은 장갑까지 꼈다. 이윽고 콕핏의 덮개가 씌워졌다. “이런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 도대체 어떻게 작동하는 거지? 설마?” 덮개가 씌워지자 게임기 전체에 희미한 빛이 들어왔다. 멀티비젼에는 연결중이라는 말이 떠 올랐다. 평소 요람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도 특별히 팀장의 허락을 받고는 다들 몰려왔다. 자신들이 오랜 시간 동안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문명 온라인이 프로 게이머가 직접 게임을 하다니 관심이 없을 수가 없었다. “이야... 드디어 우리의 문온도 빛을 발하는군. 그런데 프로 게이머 오늘 처음 온 것 아닌가?” “맞아, 그러면 제대로 게임도 안 해 봤겠는데....” 사무실에서만 있던 사람들은 흥미를 가지고 마치 스포츠 게임을 관전하는 양 말했다. “맞아요. 저 게이머 한번도 이 프로 전용 게임기에서 해 본적이 없지요. 사실 오늘은 단지 성능 테스트니까요. 조금 고생 좀 할 걸요.” 옆에서 듣고 있던 테스트 요원 중 한 사람이 말을 받았다. 연결되었다는 메시지가 멀티비젼에 뜨자 이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 연결 OK. 다음!” 멀티비젼에는 사람의 몸을 그린 그림이 나왔다. 그러더니 머리부터 시작해서 몸의 색깔이 바뀌기 시작했다. 처음의 검은 색에서 푸른색으로 완전히 바뀌자 다음이라는 팀장의 외침이 들렸다. 꽤 긴 시간 동안 여러 가지를 체크한 연구원들은 한시름 던 모양인지 얼굴에서 표정이 살기 시작했다. “자.... 이제.. 게임 시작 해 볼까?” 이팀장의 목소리에도 다소 여유가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이제 드디어 시작이구만. 재미있겠는데... 아마버전과 어떻게 다른지 기대가 되는 걸..” “이야... 팝콘이라도 좀 사올 걸.” “나는 오징어..............” 이팀장은 진성에게 콘트롤러 사용하는 방법도 가르쳐 주지 않은 체 게임을 시작시켰다. “자, 게임 스타트!” 멀티비전에는 게이머와 다른 게이머간의 1:1 플레이가 선택되었고 문명과 시간은 랜덤으로 결정되었다. 테스트 연구원 중 한명이 아마버전의 문명 온라인으로 게임을 하기로 했다. 로딩 화면이 잠깐 나오더니 곧바로 화면이 나왔다. 멀티비젼의 왼쪽 절반은 실제 아마버전과 같은 화면을 보여 주었다. 반면에 오른쪽은 어두운 곳에 게이머가 서 있었다. 아주 특이한 화면이었다. 게임은 시작되었다. 지금껏 사용하지 않았던 멀티비전에는 테스트 연구원의 게임 화면이 나오고 있었다. 테스트 연구원의 화면에는 뭔가 움직이는 것들이 나왔는데 게이머 진성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팀장님, 여기가 어디죠? 깜깜해요. 게임 시작했나요? 이거 어떻게 컨트롤 하죠?” 이팀장의 헤드셋에서 진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이런 게이머에게 컨트롤 하는 방법도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다니. 진성아, 박수 두 번 쳐봐라.” 프로그래머 중에서 상당히 특이한 사람이 있어서 시작하는 것을 박수로 정했다. 진성이 박수를 두 번 치자 곧 앞이 환해졌다. 자신은 어떤 공간에 떠 있었다. “앗... 여기가 어디지? 옷도 다르잖아....” 진성은 공간에 떠 있었고 앞에는 커다란 화면과 자신의 옆과 앞, 위 가까이 아주 많은 버튼들이 즐비했다. 진성은 가상현실이라는 추측을 했다. 아니 거의 확실했다. 완전한 가상현실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진성 자신은 완전히 딴 곳으로 온 줄로 착각했다. 이 정도면 대단하다고 느꼈다. “팀장님...... 어떻게 컨트롤 해요?” “네 앞에 버튼들이 많지? 그리고 바로 앞에 뭔가 손을 올리는 곳이 있지?” “네...” “버튼은 신경 쓰지 말고 그 위에 오른손을 올려라.” “네, 했습니다.” “이제 앞의 그 화면을 보면서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라.” 진성이 손을 올려놓자 화면이 갑자기 바뀌었다. 아니 화면이 바뀐 게 아니라 공간이 바꿔 버렸다. 진성의 눈앞에는 단순한 화면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이 도시의 하늘 위에 있었다. 하늘 위에서 땅과 수평처럼 거꾸로 누워 있었다. 너무 놀라서 뒤를 보았다. 끝없이 펼쳐진 하늘이었다. 떨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진성이 놀라 허우적거리자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휴..... 여기는 가상현실이다. 침착. 침착......” 밖에 있는 모든 멀티비젼에 화면이 들어왔다. 어떤 화면은 진성의 눈을 통해 보는 화면도 있었고 진성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비춰주는 것도 있었다. 사람들은 아주 기대하며 화면을 주시했다. 떨어지던 진성은 점차 속도가 줄었다. 손과 발을 부드럽게 내젖고 몇 번 떨어져 보니 진성은 그 원리를 알았다. 진성은 게임이 시작된 것을 알았기에 재빨리 게임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고심했다. 다행히 진성이 걸린 문명은 현준과 했던 로마였다. 진성은 망설이다 정신을 집중해서 커다란 건물을 손으로 가리켰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시 한번 해도 아무 일이 없자 진성은 다시 물었다. “어떻게 합니까? 도대체?” “....... 크크크.. 말로 해라. 말과 같이 해라. 음성 인식이 된다. 푸풋.....” 밖에는 한바탕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주 진지한 모습의 게이머가 공중에서 아주 엄숙한 모습으로 뭔가를 가리켰는데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아 의아해진 사람들이었는데 이팀장의 말을 듣자 그제야 웃음을 터트렸다. “웃지 마세요. 어떻게 하는지도 가르쳐 주지 않고 이러기 있습니까?” 한마디 한 진성은 바로 게임에 몰입했다. 게임에 집중하면 전혀 달라지는 진성이었다. 곧바로 나직하게 얘기하며 게임속으로 들어갔다. “모드” 망설이며 얘기했지만 곧바로 진성의 눈에는 모드 관련 창이 반투명으로 떴고 게이머 모드라는 것을 확인했다. 진성은 이런 것에는 음성모드가 편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전체 지도” 진성은 로마의 전체 지도를 보았다. 확실히 자신이 했던 아마추어 버전 게임 때와는 또 달랐다. 더 영토가 늘어나 있었다. 진성은 재빨리 전체 동원령을 내렸다. 분명 상대는 문명 온라인을 많이 해 본 사람일 것이다. “군대, 전체 동원령 선포.” “원로원 해체.” “북쪽 국경 2군단 전체 북동쪽으로 진군. 반도 서쪽의 항구 네아폴리스와 동쪽의 항구 브룬디시움에 수송용 전선 각각 100척 건조. 모든 귀족의 사유재산 몰수.” 모든 음성은 명령은 접수가 되면 화면에 반투명으로 확인이 가능했다. 마지막 귀족의 사유재산 몰수는 인식되지 못했다. “모든 귀족의 사유재산 몰수.” 진성은 빠르게 명령했다. 이미 시간적으로 상당히 뒤져 있었기 때문에 극단적으로 가야했다. 진성은 아마추어 버전과 달리 명령을 인식하고 해석하는 능력을 가진 프로 버전 문명 온라인에 감탄했다. 이렇다는 말은 메뉴가 필요 없다는 말이다. 정말 빠르게 명령을 할 수 있었다. 물론 명령이 몇 개 없다면 키보드의 단축키로 하는게 좋겠지만 이런 방대한 명령을 기억하기도 힘들겠지만 그 때 그 때 적재적소에 하기 위해서는 음성이 가장 적합한 방법일 것 같았다. “2군단은 백부장 중심의 소규모 부대로 나누어 국경 감시. 무슨 일이 일어나면 무조건 보고 우선. 적군을 잡으면 즉시 어떤 수단을 사용하더라도 심문해서 정보를 보고.” “2군단 제외한 군단 중 1,3,6,7 군단은 네아폴리스로 집결, 나머지는 브룬디시움에 집결.” “수송선 건조 현황?” 진성은 처음으로 음성으로 확인했다. 음성으로 확인하자 바로 눈앞에 거대한 항구와 배의 건조 현장이 나왔다. 마치 영화를 보는 듯 했다. 거의 삼분의 일 정도의 건조가 되었다. 진성은 문명을 발전시킨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시간이 없었기에 단 한번의 기회밖에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비명 소리가 들렸다. [전투 발생] 반투명 창이 보였다. “전체 지도” 로마의 북쪽 지역에서 소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 지역.” 눈앞에 엄청난 대군과 맞딱트린 로마의 소규모 부대가 보였다. 보고를 통해 올라왔기에 그 대군이 이미 국경 가까이 다가왔다는 것을 알았다. 진성은 또한 반란의 기미를 사전에 처리하고는 또 다른 보고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동원령으로 모아 훈련이 끝난 예비 군단을 둘로 나누어 항구인 네아폴리스와 브룬디시움으로 보냈다. 보내고 난 다음에 바로 진성에게 보고가 들어왔다. [적병 신문, 상대는 카르타고에서 온 한니발 장군의 군대로 확인됨.] “한니발? 카르타고? 그건 로마에게 멸망당했잖아? 그것도 하나의 문명인가?” “2군단 전원 후퇴. 로마를 우회해서 네아폴리스로 집결. 내려오면서 만나는 도시를 소각하라. 모든 시민들의 죽음도 허락한다.” 진성은 극단적으로 갔다.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지금까지 준비한 수송선을 이용해서 상대의 본부를 치려고 했는데 한니발이라면 어쩌면 완전히 그 본진조차 없을 가능성이 컸다. 역사적으로 한니발은 본진이 없이 로마 내에서 십년이 넘도록 싸우다가 로마의 영웅 스키피오에게 패하게 되었다. “로마를 소거한다.” 진성은 역사와 다를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있었지만 어차피 기울어진 것 최선이라고 가정했다. 모든 물자와 군인을 싣고 실을 수 없는 물자는 완전히 없애버렸다. 진성이 로마 군인의 시민에 대한 무차별 공격과 살인을 허락했기 때문에 군의 사기는 말할 수 없이 떨어져 있었다. 한니발의 군대는 점점 내려왔고 진성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게임 플레이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진성은 점점 지쳐감을 느꼈다. 아마추어 버전도 아주 몰입이 되어 피곤했지만 프로 버전의 문명 온라인은 정말 대단했다. 마치 하늘의 신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실시간으로 빠르게 명령하며 게임을 컨트롤해야 했기 때문에 힘들었다. “네아폴리스의 모든 장병들은 전선을 타고 북쪽의 루카로 이동해라.” “로마의 모든 시민들은 시실리 섬으로 이동해라. 모든 배를 동원해서 전 시민은 시실리 섬으로 이동해라.” 시실리 섬은 로마 반도와 거의 붙어 있는 섬으로 아무리 대군이라고 해도 그 가장 가까운 곳을 쉽게 공략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현준과의 연습에서 그것을 알게 된 진성은 그 곳을 최후의 결전지로 삼았다. 여러 명령을 내리며 점차 시스템에 익숙해지는 진성은 점차 복잡한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브룬디시움의 2개 군단은 로마로 가서 내려오는 한니발 군대와 전투를 시작한다. 절대 전면적으로 붙지 말고 측면으로 가볍게 피해만 주고 도망치듯이 전투해라. 아, 아니다. 일단 로마로 올라가고 전투 시작 전에 알려라. 직접 지휘한다.” 진성은 로마 반도 전체를 완전히 소거시킬 작정이었다. 상대는 보급에 취약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네아폴리스의 군대를 루카로 보내어 병참선을 끊어 버리고 반도 내에서는 소극적으로 싸우다가 시실리와 가까운 곳에서 양쪽으로 상륙해서 일거에 쓸어버릴 계획을 했다. “브룬디시움의 병력은 모두 시실리로 이동해라.” “남부 로마의 남은 모든 물자는 시실리로 옮겨라. 최대한 빨리 옮기고 한니발이 도착할 때라면 모두 태워라.” 어느 정도 준비를 한 진성은 한니발의 부대가 로마에 다다르기를 기다렸다. “한니발은 우리 문명에 없던 것 아닌가?” 이팀장은 멀티비전을 통해 지켜보다가 옆에 있는 김성철 프로그래밍 팀장에게 물었다. 30대 후반의 보통 사람정도의 키인 김성철 팀장은 웃으며 대답했다. “에, 없습니다. 저것은 저희 프로그래머 팀에 한니발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이것저것 손봐서 끼워 넣은 겁니다. 정식 출시될 때는 없어지겠죠. 지금 플레이하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기술적으로 그렇게 다른 문명을 넣었다 뺐다하는 게 가능한가?” “예, 모듈이라서 인터페이스만 맞으면 별 상관없습니다.” “음.... 그래? 그것도 고려해 봐야겠군. 게이머에게 그런 자신만의 문명을 만들 수 있는 툴을 준다? 괜찮겠군.” “...... 그럼 밸런스 조정은 어떻게 합니까?” “.... 그것도 문제겠군. 그런 것은 차차 생각해 보도록 하세나.” “그런데 이번에 온 프로 게이머 상당한데요.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버리고 적의 뒤를 치려고 하다니. 게다가 상대가 한니발이라는 것을 알고 보급으로 전쟁을 이기려고 하다니. 정말 대단한데요.” “자네, 혹시 WIS 게임 좀 하나?” “아 그 게임이요. 프로그래머이지만 게임을 만들 때 다른 게임도 잘 알아야 장점을 뽑을 수 있죠.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그 게임 좋아합니다만.” “그러면 ‘얼굴 없는 게이머’도 알겠군.” “당연히 알죠. 지난번의 세계 아마추어 대회에서 우승한 게이머잖습니까? 그 게이머는 뭐랄까 특이해요. 상대를 꿰뚫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거든요. 아마 아마추어 게이머로서는 가장 인기가 좋을 겁니다. 그 친구라면 프로로 들어와도 충분히 두각을 나타낼 겁니다.” “오, 잘 아는군. 저기 저 게임기 안에 앉아 있는 친구가 바로 그 친구야.” “예? 그 얼굴 없는 게이머 말입니까?” “맞아, 나도 아주 우연히 알게 되어 이렇게 우리 팀으로 영입할 수 있었네. 나도 직접 저 친구의 게임을 살펴보았지. 아주 특이하고 무엇보다도 저 친구의 게임에는 매력이 있어. 자네, 저 친구의 팬이 몇 명인지 혹시 아나?” “...... 10만명은 넘지 않겠습니까?” “아마추어라서 사람들이 그렇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가운데에서도 100만이 넘어. 게다가 골수팬들만 해도 5만이 넘을 걸.” “그 정도입니까?” “돈 들여서 사람 영입하려면 그 정도는 조사해야지.” “대단하군요.” “아, 드디어 한니발이 로마까지 내려왔군. 이제 재미있어 지겠는걸.” 대화를 나누던 이팀장은 멀티비전을 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적의 상황?” 진성의 말에 이미 적의 대군이 진치고 있는 평원이 잘 보이는 로마군의 소규모 정찰부대가 있는 곳으로 주변 광경이 바뀌었다. 진성은 조금 적응되었지만 정말 현실감 있는 공간과 같은 화면에 쉽게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한니발의 군대를 보니 확실히 강함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코끼리였다. 코끼리를 사용하는 부대라니. 진성은 역사적 사실을 몰랐기에 상대가 문명의 발전을 통해 생산해 낸 유닛이라고 생각했다. 진성은 제일 껄끄러운 것이 바로 코끼리를 이용한 전략이라고 직감했다. 적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에 타격을 주면 적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 가장 자신있는 부분이 무기력해지면 의외로 쉽게 무너진다는 것을 진성은 알고 있었다. ‘코끼리 부대가 저 군대의 가장 내세울 것이라면 저 코끼리 부대를 무력화시키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이겠군.’ 진성은 고민했다. 코끼리 부대를 제거할 새로운 계획을 수립하느냐 아니면 원래 계획대로 시실리 섬에서 방어전을 하면서 상대의 보급선을 완전히 끊어 버리느냐. 일단 진성은 적의 보급에 타격을 주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네아폴리스에서 이동한 전선의 상황?” [이제 곧 루카로 진입합니다.] “루카에도 한니발의 군사가 있을지 모르니 한꺼번에 상륙해서 거점을 만들고 캠프를 쳐라. 주변으로 산개해서 한니발의 병참을 끊어라.” “브룬디시움에서 출발한 전선은?” [이틀 후에 시실리에 도착합니다.] “계획을 바꾼다. 시실리에 도착해서 2개 군단을 내려서 방어전을 구축하고 나머지는 전선을 이용해서 북부의 센티눔으로 가라.” 센티눔은 로마 반도의 동북부에 있는 항구였다. 진성은 한니발 군대의 병참을 일단 끊은 뒤에 양방향으로 30만이 넘는 대군을 이용해서 한니발을 흔들 생각이었다. 그 동안에 기회가 되면 코끼리를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릴 생각이었다. 진성은 어떻게 해야 물자와 병력의 손실을 최소로 해서 한니발의 군대에 양적, 질적 타격을 동시에 줄 수 있을까 생각했다. 진성은 귀족의 사유재산을 몰수한 돈을 살폈다. 엄청난 액수였다. 이대로 전쟁에서 진다면 아무 소용도 없는 돈이었다. “루카에 있는 캠프로.” 눈앞에는 15만의 대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전 병력을 모아라.” 진성은 엄청난 병력 앞의 높은 단 위에 서 있었다. 전 병력은 오와 열을 맞추어 로마의 최고 권력자인 진성을 보고 있었다. 그 규모는 대단했다. 게임이지만 자신도 모르게 위축되는 것을 느꼈다. 진성은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너희 형제들, 너희 가족들을 어쩌면 죽였을지도 모른다. 로마를 위해서 나는 너희도 죽이고 나 자신도 죽일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죽었다. 나도 잘 안다. 하지만 전쟁에서 지면 그들의 목숨값이 아무것도 없다. 나는 지금 너희들에게 로마를 위해 돈을 줄 것이다. 이겨라. 그래서 로마의 돈으로 그대들은 누려라. 로마가 있어야 너희도 있다.” “한 사람당 500 데나리우스를 나눠줄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그 열배를 준다고 약속한다. 로마를 위해, 너희 자신을 위해 이겨라.” “와.. 와.. 와...” “와~~ 와와...” 진성은 문명 온라인을 단순한 게임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하나의 문명 그 자체로 생각하며 행동했다. 그래서 가진 모든 자원들을 사용할 생각을 했고, 군대도 하나의 유기체로 여겨 강한 동기와 동기를 유발할 수 있는 것들을 제공했다. 진성은 또 한번 센티눔으로 가서 군대의 사기를 최대한 끌어 올렸다. 이제는 한니발을 궁지 속에 밀어 넣어야 할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프로그래밍 팀의 공동진은 문명 시뮬레이터와 관련된 일을 하다가 자신이 좋아하는 한니발을 모듈로 문명 온라인에 끼워 넣은 장본인이었다. 좋아하는 것에는 아주 광적인 매니아 성향을 지닌 공동진은 자신의 일에 전문이면서도 역사의 영웅 중 하나인 한니발을 좋아해 일에까지 끌고 들어온 것이었다. 공동진은 처음으로 테스트를 하기 위한 프로 게이머의 상대가 자신이라는 것에 기분이 좋았다. 원래의 문명에는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만큼 한니발을 등장시켜 재미를 더해 주고 싶었다. 공동진은 상대 게이머가 처음으로 문명 온라인을 접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봐줄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쉬운 게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더 열심히 하리라 생각했다. 처음 시작해서 공동진은 아주 여유 있게 게임을 운영했다. 카르타고에서 수송선을 만들고 코끼리 부대를 준비해서는 바다를 건너 에스파냐로 갔다. 당연히 상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던 공동진은 천천히 게임을 했다. 자신은 프로 문명 온라인을 컴퓨터로 하기 때문에 컨트롤 방법에 문제가 있지만 워낙 많이 했기 때문에 능숙하게 할 수 있었다. “음... 이 정도면 본부는 아무 문제가 없겠군. 이제 서서히 가 볼까?” 미리 어느 정도의 정찰을 끝낸 공동진은 상대가 로마라는 것을 알았다. 공동진은 군대를 이끌고 동북진했다. 주변의 여러 민족들은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이윽고 알프스에 이른 공동진은 군대를 독려해서 산맥을 넘기 시작했다. 미리 알프스 지형 중 넘을 만한 곳을 찾은 후라서 군대의 사기와 체력이 저하되었지만 별다른 피해는 입지 않고 산을 넘었다. 거의 30만의 부대가 길게 늘어서서 산맥을 넘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산맥을 넘어 정렬되지 않은 상태에서 주변의 민족의 습격으로 피해가 조금 생겼지만 그리 걱정할 수준은 아니었다. 점차 아래로 내려오던 공동진은 드디어 로마의 군대를 만날 수 있었다. 아주 소규모 부대였다. 공동진은 로마의 부대는 기본적으로 군단으로 이동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소규모 부대라니. 공동진은 대응하기 위해 병력을 보냈다. “게릴라 전인가? 이렇게 병력 차이가 나고 정글 같은 지형이 아닌 이상, 게릴라 전은 무의미 할텐데?” 하지만 공동진의 생각과는 달리 로마의 군대는 접전하는가 싶더니 후퇴했다. 로마군이 후퇴라니. 원래의 인공지능이라면 계속 공격을 해야 맞다. 공동진은 그제야 상대 게이머의 술책이라는 것을 알았다. “오호... 그냥은 죽지 못한다 이건가? 아무튼 대단하군.” 공동진은 자신의 군대도 피해가 있었지만 너무 경미해서 무시했다. 그리고 자신만만하게 아래로 내려가 드디어 국경을 돌파했다. 자신이 애써 데려온 코끼리 부대의 위용을 내세워 아래로 천천히 내려갔다. “아니... 이게 뭐야? 어떻게 된 거지?” 지금까지 가져온 물자가 빠르게 줄어들자 공동진은 현지보급을 위해 주변의 도시에 여러 정찰병들을 보냈다. 그런데 한결같이 들어온 보고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지? 다 도망간 것인가? 이거 싸울 줄 알았더니.... 무서워서 도망간 것인가?” 공동진은 부족하기 시작한 물자에 걱정도 되었지만 일단 로마만 점령하면 끝이라는 생각에 오히려 군대의 이동 속도를 늘렸다. 공동진은 빠르게 로마까지 내려왔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로마를... 로마를... 도대체가....” 눈앞에 완전히 타버린 로마를 보며 공동진은 말을 잊었다. 최고의 도시 중 하나인 로마가 이렇게 불타 버렸다니. 게다가 필요한 보급 물자들은 하나도 없었다. 공동진은 이제야 상대 게이머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상대는 보급을 주무기로 시간을 끌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게임 시작 20분이 넘었다. 공동진은 이대로 남하해서 로마 반도의 끝까지 최대한 빨리 가야함을 알았다. “1,3,6,7 군단 전진. 1,3 군단은 적의 왼쪽을 6,7군단은 오른쪽을 공격하되 정면승부는 없다. 치고 빠지는 작전을 구사해라.” “센티눔의 8,9,11,13,17,18,19 군단은 정비된 도로를 통해 빠르게 행군해서 적의 예상로 우측을 공격할 준비를 해라.” “전 군단의 보병들은 코끼리에 대비해서 대형을 새로 짠다. 완전 밀집이 아니라 코끼리가 지나갈 통로를 만든다. 그래서 코끼리가 밀집 대형 자체를 흩트리지 못하도록 해라. 그리고 큰 소리나는 것을 준비해서 코끼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어라.” “4,5 군단은 시실리 섬을 철통같이 지켜라.” “루카와 센티눔에 있던 수송선들은 모두 시실로 움직여라.” 진성은 여전히 빠르게 명령했고 또 그 결과를 확인했다. 한니발은 이미 로마를 지나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상대 역시 진성 자신의 의도를 눈치 챘으리라 생각했다. 상대는 분명히 단숨에 남부까지 완전히 장악할 것이다. 진성은 이미 남부도 완전히 소각시켰고 나머지는 모두 시실리로 옮겼기 때문에 걱정은 하지 않았다. 또한 겨울도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는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계속 꼬리를 잘리다니.” 공동진은 화가 났다. 상대의 군대가 뒤에서 나타났다. 좌우로 나누었는지 그나마 남아 있던 후미의 물자를 수송하는 부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로마 군대를 만나지 못했던 공동진은 군대를 돌려 싸우려고도 했지만 상대는 절대 정면승부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래로 내려가려면 뒤에서 역습을 가했다. “이럴수가.... 정말 대단하군. 아무리 보급에 약하다지만... 그리고 아무리 게임이라지만... 이렇게 철저하게 보급을 막다니. 이러다가는 굶어 죽겠는데...” 공동진은 어쩔 수 없이 부대를 나누었다. 물자를 싣고 가는 부대를 중간에 두고 뒤에는 전투부대 10만 여명을 두고 로마 군대를 상대하게 했다. 공동진은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고 앞의 부대를 먼저 출발시켰다. 선발부대는 코끼리를 몰고는 남부로 빨리 내려갔다. ‘오호.. 부대를 둘로 나누었단 말이지... 뭐, 어쩔 수가 없었겠지.’ 진성은 웃었다. 상대가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상대는 모든 부대가 남부에 있다고 생각했다. 또 다른 부대가 가까운 곳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1,3,6,7 군단 합쳐서 대기. 다른 군단에서 전쟁이 시작되면 동시에 공격.” “8,9,11,13,17,18,19 군단. 남아 있는 한니발의 군대를 향해 행군 후, 지휘관의 재량에 따라 전투 시작.” 거의 두 배가 넘는 병력수이고 압도적인 밀집 중장 보병이 강한 로마군이었기에 쉽게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진성은 나머지 군대의 코끼리를 어떻게 할지 생각했다. “뭐? 이럴 수가. 10만이 전멸하다니. 어떻게 된 거지? 상대는 겨우 6~7만 정도였는데 그 정도면 시간 좀 끌다가 올 수 있을 텐데.... 아... 이런 다른 군대가 있었다니. 나는 남부에 있을 줄 알았는데..” 공동진은 자신의 실수로 전체 병력의 삼분의 일을 잃었다는 것을 알았다. 되돌릴 수 없는 실수였다. 상대가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느꼈다. 겨울은 다가오고 상대의 병력은 많고 보급은 심각한 상황이다. 본부가 있었기에 꼭 진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저 굉장한 게이머라면 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단 내려가서 최후의 결전을 해야지. 어쩌면 단 한번의 기회가 있을지도.” 공동진은 경악했다. 로마의 남부를 뒤져봐도 아무것도 없었다. 절망이었다. 이런 상태라면 절대로 겨울을 넘길 수 없을뿐더러 위에서 내려오는 로마의 군대를 이길 방법이 없었다. “도대체 로마인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설마 그 게이머가 다 죽인 것인가? 아니야. 그렇다면 이미 게임은 끝났을 지도. 폭동이 일어나면 겉잡을 수가 없으니까. 도대체 어디로 간 거야?” 공동진은 아무리 정찰을 해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시실리 섬에 로마인이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공동진은 무릎을 쳤다. “이..이런... 맞아. 거기라면... 코끼리와 보병, 기병 위주인 부대가 절대 넘어갈 수가 없지. 보나마나 근처의 배는 하나도 없을테고. 본부에서 오기에는 너무 시간이 많이 걸리기도 하지만 상대가 그걸 그냥 바라보지는 않을테고. 끝났군. 휴.... 정말 잘하는데..” 공동진은 이미 패배를 직감했지만 마지막으로 게임을 보고 있을 사람들에게 볼 것을 제공하기로 했다. 진성은 상대의 의도를 알았다. 분명히 지금쯤 보급이나 여러 사정으로 인해 아주 힘들고 게임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임을 알았다. 그런데 상대는 여전히 진을 갖추고 싸우기 위해 준비했다. 틀림없이 마지막 결전을 위한 모습이다. ‘상대가 원한다면 들어 줘야지.’ “모든 군단 집결.” 평원에 모두 합쳐 40만 명 가까운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 모습을 정말 장관이었다. 진성은 이런 것을 마치 영화처럼 자신이 볼 수 있다는 것에 놀라웠다. 나부끼는 깃발의 바람이나 전장의 체취는 느낄 수 없었지만 전장의 엄숙함이 자신을 누르는 것은 몸이 느꼈다. 이번에는 전략보다는 정면승부를 하고 싶었다. “모두 공격.” “휴우우우아..... 대단하네요. 저 친구가 저렇게 나가떨어지다니. 분명 그 프로 게이머 이 문명 온라인 해 본적이 없지 않습니까?” “허허..... 오늘 처음 해 봤을 걸. 그나저나 정말 재미있군. 마치 영화를 한 편 본 것 같아. 플레이 타임은?” “네, 36분입니다.” “음... 그 정도면 적당하군.” “정말 대단합니다. 물론 우리가 만든 그 그래픽과 가상현실을 적용한 인터페이스도 좋지만 역시 사람이 직접 움직이는 그 맛은 정말 좋은 걸요. 이 게임을 스크린 샷과 함께 인터넷에 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떻습니까?” “음... 좋아... 그렇게 하게나.” 이팀장은 조금 전의 그 마지막 전쟁을 떠올렸다. 대단했다. 마치 스펙터클한 전쟁 영화를 보는 듯했다. 거대한 코끼리 부대와 그에 맞서는 로마의 중장보병부대. 처음에 한니발 쪽의 우세를 생각했지만 중장 보병 부대의 대형이 갑자기 바뀌면서 전쟁의 양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밀집 보병 사이에 코끼리가 지나갈 만한 길이 생기자 어디로 갈지 몰라 망설였던 코끼리는 빠른 속도로 그 통로를 지나가 전장을 이탈했다. 게다가 로마 군인들 사이에서 아주 커다랗고 자극적인 소리를 내는 것으로 인해 코끼리는 오히려 한니발 군대가 있는 쪽으로 머리를 돌려 한니발 군대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그 뒤를 이어 로마군의 기병이 쐐기 모양으로 한쪽을 뚫어 버렸고 밀집 보병은 다시 대열을 갖추고는 전진해서 한니발의 제 일선을 완전히 무력화시켰다. 전투는 점점 한니발 부대의 패배로 기울었다. 3선으로 이루어진 로마의 밀집 보병 부대가 하나로 합쳐지더니 혼란되어 있는 한니발의 중앙을 그대로 돌파해 버렸다. 로마의 전투 방법이 아니었다. 하지만 상황도 맞아 떨어져서 한니발의 군대는 추풍낙엽처럼 흩어져 버렸다. 이팀장은 마지막 진성의 상대인 공동진이 띄운 메시지를 기억했다. “당신은............ 스키피오인가?” 이팀장이 알기에 스키피오는 로마의 영웅으로 한니발의 적수였던 젊은 천재였다. 이팀장 역시 진성에게 묻고 싶었다. 진성은 온몸에 땀으로 가득해 샤워실로 가서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밖에는 게임을 멀티비전을 통해서 본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와.... 정말 끝내줬습니다!” “.......... 정말 프로게이머 다와요.” “잘했어!” 사람들은 진성이 안으로 들어오자 환호를 보냈다. 첫 출근이라 잘 모르지만 사람들은 앞 다퉈서 진성에게 다가가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현준 역시 진성의 게임을 보고는 감탄했다. “진성 네가 게임 잘하는 줄은 알았지만 방금 전은 정말 예술이었다. 예술. 나 감동 먹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인사를 받고 이야기를 하니 이팀장이 진성에게 다가왔다. “수고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렇게까지 하다니. 정말 대단했다. 네가 그렇게 게임을 해 준다면 확실하게 대박날 것 같다.” “.... 저는 그냥 지지 않으려고 했던 것뿐인데요.” “...그래? 아, 그리고 혹시 스키피오라고 들어본 적이 있나?” “.... 아니오. 누군가요?” “아... 역시 그렇군.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의 숙적이지. 자네가 마지막 전투에 쓴 그 코끼리를 무력화시키는 방법을 만든 사람이기도 하고.” “네? 아.... 그럼 한니발의 부대에 원래 코끼리가 있는 건가요?” “그래. 원래 있지. 진성 자네도 대단하군. 그 상태에서 그런 생각을 해 내다니. 지금부터 자네 별명은 스키피오야. 스키피오! 하하하하” “스키피오.....” 얼떨떨하고 있는 진성에게 다가온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 “... 정말 잘하시던데요. 저도 문명 온라인을 만든 팀 일원이고 게다가 테스트 겸해서 게임도 제법 했고 한니발이라는 것은 제가 만든 건데 이렇게 완벽하게 패할지는 몰랐습니다.” “아.... 누구신지?” “제 소개가 늦었군요. 공동진이라고 합니다. 조금 전에 저와 게임을 하셨지요.” “아, 한니발!” “맞습니다. 역시 역사에 밝으신 분인가요?” “예? 아, 아니오. 저는 쥬신대 컴퓨터 공학과입니다. 역사에는 별로...” “그럼, 어떻게 스키피오의 전략을?” “아... 그것은.... 워낙 시간이 없고.. 해서...... 그냥 생각해서..” “네? 그냥 생각해서 썼다고요? 이런 말도 안돼!! 말도 안돼!! 아...... 죄송합니다. 제가 흥분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팀장이 나섰다. “진성이의 말이 맞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스키피오의 전략을 사용한 것이야. 그래서 오늘부터 진성의 별명을 ‘스키피오’라고 했네. 스키피오 어울리지 않는가? 젊은 천재!” 진성은 더욱 고개를 들 수 없었고 공동진은 이팀장의 말에 쌍수 들고 환영했다. “그렇지요. 충분히 그렇게 불러야 하지요.” 한번의 게임으로 진성은 문명 온라인 팀의 히어로로 떠올랐다. 진성이라는 이름보다 애칭인 ‘스키피오’라는 이름으로 불리웠고 문명 온라인의 상용 이후 온라인이 활성화 되면 진성에게는 스키피오라는 아이디를 제일 먼저 지정해 주기로 했다. 이팀장은 물론 문명 온라인 팀 전체가 진성의 게임에 빠졌고 그 뒤로 이어진 테스트에는 소문을 듣고 모인 다른 팀의 사람들도 간혹 보였지만 이팀장의 보안 유지라는 철퇴를 맞고 나가 떨어졌다. 또한 처음 했던 테스트의 동영상 파일이 자소 소프트를 돌다가 인터넷으로 유출되어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다행히 게이머의 얼굴은 이미 식별할 수 없게 만들었다. 또한 독특한 게임 시스템이나 영화 같은 화면도 대단했지만 실제 게이머가 게임을 했다는 것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거기에 그 게이머가 바로 ‘얼굴 없는 게이머’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인터넷이 들끓었다. 특히 얼굴 없는 게이머의 팬 사이트는 이 사건으로 엄청난 열기를 보여주었다. 프지프(FGF : Faceless Gamer Fan)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자소 소프트의 게시판을 장악해 버린 것이다. 2십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접속하자 폭주해 버린 게시판이었지만 게시판의 내용은 전혀 사이버 테러와는 상관이 없었다. “새로운 게임의 테스터가 ‘얼굴 없는 게이머’가 맞느냐?” “새로운 게임의 이름은 무엇인가?” “언제 출시되는가?” “프로 게임으로도 나오는가?” “‘얼굴 없는 게이머’가 자소 소프트의 프로 게이머인가?” “우리도 테스트에 참가할 수 있게 해 달라! 베타 테스터를 뽑아라!” 대부분의 질문들이 문명 온라인에 대한 강한 호기심과 ‘얼굴 없는 게이머’에 대한 질문이었다. 처음에 당황했던 자소 소프트는 진상을 알고는 재빨리 게시판에 자소 소프트의 입장을 전달했다. “문명 온라인(가제)이라는 새로운 게임의 프로 게이머로 ‘얼굴 없는 게이머’가 자소 소프트에 정식으로 입사했습니다. 그 게이머의 신상은 공개할 수 없으니 이해바랍니다. 물론 프로 게임이 시작되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알파 테스트를 하고 있는 관계로 문명 온라인을 공개할 수는 없음을 양해 바랍니다. 빠른 시간 내로 베타 테스트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전에 베타 테스터를 뽑을 테니 그 때까지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자소 소프트의 게시판은 이틀 사이에 프지프 외에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가서 천만 히트를 가볍게 넘었고 게시판에 글을 올린 건수만 해도 200만 건이 넘었다. 아직 게임 출시 전인 자소 소프트로서는 아주 고무할 만한 현상이었다. 심지어 게임채널에서 자소 소프트의 양해를 구해 유출된 게임의 동영상을 방송하기도 했다. 새로 만드는 게임이 알파 테스트 단계에서 이렇게 이슈화 된 것은 문명 온라인이 처음이었다. 좋은 일이었지만 이팀장과 팀원으로서는 부담을 가질 상황이었다. 더 완성도가 높은 게임을 출시해야만 했다. “스키피오, 너 덕분에 우리만 정말 고생하게 생겼다.” 시간이 지나면서 친해진 공동진은 진성에게 농담을 던졌다. 20대 후반이라서 나이 차이가 있지만 처음 게임으로 상대의 실력을 알고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나서는 아주 친해졌다. 게다가 공동진이 느끼는 진성은 평범한 보통 대학생이었다. 거드름이나 자만 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더욱 좋아진 것인지도 모른다. 보통 회사에서는 쉽지 않았지만 이팀장의 스타일로 인해서 아래 있는 사람들도 비슷하게 바꿔 버렸다. “아니,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해? 동진이 형. 생각해 보라고. 진성이 덕분에 광고 효과만 해도 엄청날 걸. 내 생각에 최소 30억 정도의 광고 효과는 거두었을 텐데...” 옆에 있는 현준은 공동진의 농담에 짐짓 흥분한 듯 침 튀기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덕분에 주목 받잖아. 이렇게 되면 정말 대단한 게임으로 만들어야 된다고.” “당연히 그래야지. 당연히 그럴 걸 왜 진성이를 탓해?” “야... 무섭다. 농담 한번 못하냐?” 공동진은 너스레를 떨었다. 그 동안 몇 번의 테스트를 통해 정말 문명 온라인을 위해 나타난 게이머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진성의 게임은 탁월했다. 컴퓨터와의 싱글 게임보다는 상대가 사람이었을 경우에 더욱 빛을 발하는 진성의 게임은 비록 지는 게임이라고 해도 다시 보고 싶어지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공동진 자신은 나중을 생각해서 지금까지의 모든 동영상을 모아두고 있었다. 나중에 유명해지면 이런 초기 진성이의 테스트 동영상은 그 값이 천정부지로 뛰어 오를게 분명했다. 공동진은 딴 생각을 하다가 진성이 쥬신대 컴퓨터 공학과라는 생각이 들어서 물었다. “스키피오 너, 컴퓨터 공학과라며?” “어, 아직 2학년이야.” “... 듣기로는 프로그래밍도 수준급이라고 하든데..?” “동진이 형, 누가 그래? 그냥 내가 필요한 간단한 것 만들어 쓸 정도야.” “진팀장님 밑에 있는 내 친구인 수현이가 그러든데? 내 귀가 잘 못 된 것은 아닐텐데...” 공동진은 알고 있었다. 진팀장님이 이끄는 다음번의 온라인 게임을 개발하는 팀에서 진성이 프로그래머로 일한다는 것을 친구인 민수현이 공동진에게 말해 버린 것이다. 진팀장이 기밀이라며 절대로 외부로 발설하지 말라고 했지만 민수현에게 공동진은 외부가 아니었다. “아... 그건.... 사실 현준이 아버지가 그 진팀장님이거든. 그래서 일도 배울 겸 해서.....” “그래? 그런데 내 친구 말로는 보통 실력이 아니라고 하든데....” “아.. 그건.... 하다 보니.... ” “스키피오! 너는 이 형님이 고생하는 게 보이지 않니? 그 쪽도 도우면 우리도 도와야지. 안 그래?” 진성은 난처했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는 수밖에. “동진 형, 저 사실 진팀장님과 계약했어요. 프로그래머로. 그래서 일하는 것뿐이고요.” “뭐? 계약? 얼마에?” “그것은 비밀인데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프로 게이머에다가 게임 프로그래머라. 이러다가는 나 같은 사람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것 아냐?” 공동진의 악의 없는 농담에 진성은 쩔쩔 맸다. 이럴 때 나서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 “그렇게 아쉬우면 내가 이팀장님한테 말해 줄까? 동진 형이 일이 많아서 사람 더 필요하다고.... ” 현준이 사악하게 웃으며 공동진에게 말했다. “뭐? 야! 꼭 그럴 필요까지야........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그렇지? 난 형이 진담하는 줄 알았지. 오늘 집에 가서 아버지한테 이런 농.담.에 대해서 진지하게 말해야지. 크크크” “야! 진현준! 그런 말..................... 안... 해..도.. 돼...” 공동진은 아주 세게 강압적으로 나가다가 어느새 모기소리로 끝맺었다. 그런 말에 가만히 있을 현준이 아니었다. “아니야. 꼭 해야겠어.” 말하면서 실눈으로 공동진을 바라보는 현준. 공동진은 어이 없어했다. “이.......이........ 이번에는 뭐가 필요하냐?” “흐흐흐... 오늘 저녁 근사하게!” “뭐? 저녁? 또?” “오늘은 특별해. 김하나씨와 같이........ 진성, 너도 빠지지 마. 형도 오늘 좀 도와줘. 앞으로 저녁 사달라고 안 할 테니까.” “네가 하나씨와 만나는데 내가 왜 저녁을 사?” “................. 그럼 오늘 집에 빨리 들어가서 아버지와 오붓한 대화의 시간을....” “그만! 알았다. 알았어!” 현준은 승리의 V자를 그렸고 진성 역시 옆에서 웃었다. 공동진은 벌써 현준에게 3일 연속으로 뜯기게 생기자 울상이었다. “저......,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저는 그냥 한정식 먹을께요.” 현준은 근사한 레스토랑으로 가고 싶었지만 오늘의 주인공인 김하나가 한식을 먹고 싶다고 하자 급히 바꿔서 괜찮다고 알려진 한식집으로 왔다. 현준은 아무리 해도 고쳐지지 않는 자신의 말투에 신경이 쓰였다. “나도 한정식, 스키피오 너는?” “나도 한정식.” 요람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밖의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다. 밖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재정이나 운영과 관련되어서 실제 게임과는 차이가 있었다. 물론 게임의 성격이나 개발과정은 알지 몰라도 실제 게임이나 개발, 테스트는 사실 모른다고 봐야했다. 그러다 보니 요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많은 시간 동안의 테스트와 개발로 인해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었지만 사무실에서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존칭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비록 이팀장이 워낙 대놓고 반말을 하기 때문에 그에 영향을 받았지만 분위기 자체는 완전히 달랐다. 현준은 일단 음식을 시키고 나자 할 말이 없었다. 그런 것을 보던 공동진은 마구 웃었다. 물론 대 놓고 웃지는 못했지만. 저녁을 사는 것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현준의 어색함은 공동진을 웃겼다. “저...... 게임...은... 좋아하시지...... 않나요?” “아니에요. 저도 게임 좋아해요.” 지난번 이상한 저녁 식사 이후로 별로 말도 걸어보지 못했던 현준으로서는 김하나의 대답이 아주 반가웠다. “호..혹시...... 어떤.. 게임... 좋아하시는지......?” “웬만한 것은 다 좋아해요. WIS도 좋아하구요. 실력도 그렇게 하수는 아니구요.” “네? WIS? 그러면 당연히 진성 이 녀석 알겠네요?” 현준은 진성을 팔기로 마음먹었다. 하나씨와 대화하기 위해서라면 친구 정도는 충분히 팔리라 생각한 현준이었다. 멀뚱히 눈 뜨고 자신을 이야기 거리로 만들어 버리는 현준에 진성은 한숨만 쉬었다. “당연히 알지요. ‘얼굴 없는 게이머’라면 아주.... 아주 유명하거든요.” 왠지 차갑고 비꼬는 목소리다. 현준은 뭔가 자신이 잘못한 게 없나 살폈다. 진성과 공동진 역시 움찔했다. “그렇죠? 제 친구긴 하지만 정말 게임 하나는 잘하죠. 액션 게임 같은 것은 그다지 못하지만 전략이나 상황판단을 하는 것에는 정말 귀신이죠.” 역시 자신은 진성과 게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더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죠. 아주 잘하죠. 저도 예전에 그 플레이 파일 보고는 반해서 정말 계속 보기도 했었죠. 저도 그 팬 사이트 회원이에요.” “아, 그렇습니까?” 현준은 뭔가 이야기할 가닥을 잡았는지 연신 이야기를 했다. 주로 팬 사이트와 WIS 에 대한 이야기였다. 곧 음식이 나왔어도 여전히 현준과 김하나는 게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진성과 공동진은 음식을 먹으며 간간히 얘기를 나눴다. 마치 한 테이블에 두 팀이 앉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김하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갑고 뭔가 벼려진 느낌이었다. “게임 잘하면 사람 무시해도 됩니까?” “예? 그게 무슨?” 한참 게임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나온 김하나의 말에 현준은 물론이고 막 식사를 끝내가던 진성과 공동진도 당황했다. “진성씨, 게임 잘한다고 사람 무시해도 되는 건가요?” “네? 제가 언제?” 진성은 김하나를 입사해서 처음 보았기에 도대체 이유를 알 수 없었다. “.......... 기억하지 못하는군요.” “네? 저는 자소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뵌 것 같은데요.” 현준과 공동진은 갑자기 변한 상황에 멍해 있었다. “예전에 한국 아마추어 WIS 대회에서 8강에서 저와 만났죠. 뭐 온라인이었기 때문에 얼굴은 당연히 모르겠죠. 그 때, 저는 처음으로 완패라는 것을 느꼈어요. 정말 상대방에게 감탄했기 때문에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아보려고 했죠. 그 때 ‘얼굴 없는 게이머’라는 말을 들었지요. 그 뒤에 난 당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 인터넷을 뒤지다가 팬 사이트에 들어가서 회원 가입을 했지요. 그래서 당신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죠. 내 사진에다 처음 만났던 대회에, 그 ‘얼굴 없는 게이머’를 위한 전략들도 나름대로 생각해서 보냈죠. 당신이 단 한번만이라도 보고 답장해 주기를 바라면서 보낸 메시지가 100통이 넘었고 나중에는 오기가 생기더군요. 매번 읽기는 하는 듯 했지만 간단한 전체 메일. 아마도 제가 보낸 메시지를 다 합치면 2000 통은 넘을 겁니다. 게임은 잘 한다는 걸 인정하지요. 그런데 어떻게 한 번도 보지 않고 그냥 쓰레기통으로 넣어버릴 수 있는 거죠?“ 진성은 이제야 상황을 알았다. 자신이 그 ‘얼굴 없는 게이머’라고 알려진 이후부터 왠지 딱딱한 느낌을 받았는데 이제야 이유를 알았다. 진성은 자신의 잘못이라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러셨군요. 제가 사과드립니다.” “...............” “사실 그 때는 아마추어였고 제 얼굴이나 신상이 드러나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단지 게임만 즐겼죠. 제 팬 사이트가 생겼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으니까요. 저 녀석이 말해 준 뒤에 회원가입한 후에 나 자신을 밝힌 후로 들어갈 때마다 수천통의 메시지가 날라 와 있더군요.” 진성은 목이 마른지 물을 한잔 먹고는 다시 말을 했다. “처음에는 계속 읽었죠. 그러다가 백통 정도 읽고 답장을 하니 몇 시간이 지나가버리더군요. 저도 제 생활이 있고 게임은 제 삶의 일부분이라 그런 시간을 낼 수가 없었지요. 특히 학교생활이 바쁘면서 더욱 그랬지요. 그래서 제가 메시지를 읽고 그 메시지를 보낸 사람들에게 전체적으로 답장을 할 수 있는 간단한 프로그램을 말들었고 그걸로 대신 메시지에 답장을 보내게 된 겁니다. 일단, 제가 그런 식으로 메시지를 버린 것은 잘못 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도 저 나름대로의 생활이 있습니다. 돈을 받고 일하는 프로도 아니어서 더 그랬지요. 아무튼 이야기를 듣고 보니 본의 아니게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현준과 공동진은 상황을 완전히 알게 되었다. 자신들에게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팬과 스타간의 문제였다. “아하.... 이거 완전히 광팬과 무심한 스타 사이의 눈물나는 사연이구만... 하하하.. 읍~” 공동진은 너스레를 떨다가 김하나의 눈빛 한방에 입을 바로 다물었다. 그리고는 진성을 향해 말했다. “저도.... 제 감정에 치우쳐서 실례했습니다.” “자.. 자... 잘못은 서로 했으니 이제 떨어버리지요. 식사도 다 했으니 제가 2차를 쏘지요. 어떻습니까?” “2차? 쫌생이 인간 진현준 네가?” 공동진은 절대, 100% 믿을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네, 제가 쏩니다. 그러니 3차와 4차는 다른 분들이.... 헤헤..” 김하나는 2차 얘기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안 그래도 자신이 욱하는 바람에 분위기가 그랬는데.. 게다가 진성의 앞에서 눈을 들지 못하는 김하나였다. “저... 저는.... 그만..” “이상한 곳에 가지 않으니까 걱정마세요. 아, 제가 가려는 곳도 조금 어둡고 남자들이 많은 곳이기는 하네요.” 김하나는 현준의 말에 더욱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두 남자의 강권을 이길 수 없었다. 결국 김하나와 현준, 공동진, 진성은 현준을 따라 나섰다. “여긴?” “네, 게임 스테이션이지요. 어때요? 어둡고 남자가 많지 않습니까?” “아.. 네... 그런데 왜 여기로?” “김하나씨와 ‘얼굴 없는 게이머’ 강진성과의 재대결을 위해서. 그리고 남은 앙금을 완전히 털기 위해서죠.” 김하나는 상상도 못한 현준의 말에 마음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진성 역시 현준이 이럴 때는 제대로 한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 현준, 네가 뭘 좀 아는구나. 자, 한번 세계 대회 우승자의 게임을 한번 볼까?” 어느새 붙어 있는 자리 두 개를 잡은 공동진이 옆으로 와서 진성과 김하나에게 말했다. 진성은 피식 웃으며 자리에 앉았고 김하나도 말없이 옆에 앉았다. 진성과 하나는 말없이 컴퓨터를 켜서는 WIS를 실행했다. “자, 한번 볼까? 얼마나 잘 하는지?” “하나씨가 이길 겁니다. 요즘 진성이 머리에는 문명 온라인이 가득차서요.” 현준이 하나에게 침발린 소리를 하자 동진은 그런 것을 참지 못하는 듯 뭔가를 참으며 얘기했다. “아니야. 우리 스키피오가 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동진이 형. 내기 하자.” “무슨 내기? 말만 해라. 나는 무조건 우리 스키피오 편이다.” “좋아, 나는 하나씨에게 걸 테니까. 진 사람이 3차 쏘기!” “뭐? 3차... 음.... 그렇다면.. 음..” “사나이는 두 말하지 않는대며?” “에이........ 좋아! 하자. 해. 스키피오! 지면.... 내일부터 테스트 힘들어질 거다.” “진성아, 겁먹지 마라. 내가 팀장님한테 얘기해 줄께.” 동진의 협박은 현준에게 통하지 않았다. “이....이........” 현준과 동진이 이야기를 주고 받을 즈음 진성과 하나는 게임을 시작했다. 하나는 자신이 그 ‘얼굴 없는 게이머’와 WIS를 할 수 있다니 꿈만 같았다. 꼭 게임 파일 세이브해서 팬 사이트에 올리리라 마음먹었다. “야, 스키피오. 네가 이렇게 나를 배신할 수 있어? 우리가 무슨 사이야? 엉?” “동진 형. 솔직히 진성이와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 설마 진성이를.... 그런 것은 아니겠지? 그러다가는 회사에서 쫓겨날지도...” 현준은 앞에서 얼쩡거리며 슬슬 놀려 먹었다. 문명 온라인에 빠져 있었어도 진성은 진성이었다. 아주 정확하고 상대의 허를 찌르는 전략에 고수라고 할 수 있는 하나도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결전 때 진성의 양보성 짙은 컨트롤 미스 하나가 승부를 갈랐다. 하나 역시 진성이 일부러 져 주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채팅으로 온 잘못에 대한 사과라는 문자에 기분 좋게 받아 들였다. 물론 그로 인해 동진은 덤터기를 쓰게 되었지만. “저.... 진성씨. 저 게임 비디오 파일, 제가 팬 사이트에 올려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단 제 이름이나 다른 것은 적지 말아 주세요.” “네.....” 하나는 기분이 무척 좋았다. 곧 자신의 이메일로 파일을 보냈다. 그 동안의 섭섭함이 완전히 사라졌다. 자신보다 나이 어린 진성이었지만 조금 지내보니 괜찮은 사람으로 느껴졌다. 특히 게임에서 느꼈던 날카롭고 정확한 어떤 것과는 전혀 달라서 더 강한 인상이 남았다. 좋은 기분에 하나는 현준, 진성, 동진과 함께 3차까지 가서 늦게 집으로 돌아갔다. 당연히 집으로 돌아와서 처음으로 한 일이 자신의 메일을 확인해서 그 파일을 팬 사이트에 올린 일이었다. 그리고는 씻지도 않고 침대에서 골아 떨어졌다. 아침에 일어난 하나는 다시 팬 사이트로 들어갔다. 평소 한산한 자신의 메시지 박스에 오백 통이 넘는 메시지가 와 있음에 놀랐다. 조금 읽어보니 거의 다 같은 내용이었다. 그 게이머를 어디에서 만났는지.. 게이머가 누구인지 묻는 것이었다. 오백 통이 넘는 메시지를 본 뒤에야 하나는 ‘얼굴 없는 게이머’진성의 고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도 이 메시지를 다 읽고 답장을 보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반송된 것만 해도 굉장할 것이다. “진성씨에게 정말 다시 사과해야겠는걸.”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관심 가져 하는 ‘얼굴 없는 게이머’의 정체를 자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진성, 네가 새로운 프로그램 방법을 제의했다며?” “아, 제의까지는 아니고 그냥 생각이 나서요.” “그래? 한번 들어볼까?” 진성은 진팀장의 ‘RofL(Reality of Life:가제)' 로플 팀에서 가상현실의 배경에 관한 프로그래밍을 하면서 완전 노가다인 프로그래밍 방법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특히 문명 온라인에서 사용된 과도기의 가상현실 게임기가 아닌 거의 완벽한 가상현실이 사용되는 로플팀에서는 다른 방법으로 가능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진팀장님, 가상현실이라면 사람의 의도나 생각을 시스템에 전달할 방법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사람마다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현재 그런 시스템을 만든 셈이지.” “그러면 그것을 이용해서 프로그래밍하면 되지 않습니까?” “어떻게?” “일단 프로그래머가 가상현실에 접속해서 미리 생각한 대로 그 현실 속에서 바로 만드는 겁니다. 바다를 만든다면 세세히 하나의 코드를 적거나 연결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바다라는 이미지를 그대로 시스템에 전달해서 시스템이 그것을 알도록 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보통 단순히 코드로 조건에 제한을 둔 바다보다는 훨씬 현실적인 바다가 되겠지요.” “음........ 자네 말이 맞아.” “예? 알고 계셨습니까?” “당연하지. 그 정도도 생각도 못하면 가상현실은 어떻게 구축했겠나? 우리 팀들도 다들 최고 수준이거든.” “아, 그렇군요.... 그런데..” “문제가 있거든.” “문제라니요?” “이론적으로는 가능한데 아무도 그렇게 할 수가 없다네. 가상현실에 접속한 채로 그렇게 이미지를 그려서 거의 완벽한 이미지를 그릴 만한 사람이 없다는 거지. 그냥 단편적인 평면 사진이라면 상관없지. 누구나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현실과 같은 사물이야. 예를 들어, 땅에 박힌 돌을 파내면 그 밑에 흙이 있거나 아니면 다른 돌들이 있겠지. 우리로서는 그런 통합적인 이미지 메이킹이 가능한 사람이 없어. 아마 어디에도 없다고 봐야지. 만약 있다고 해도 그런 사람을 어떻게 어디에서 찾겠나? 그래서 그 방법은 포기했지.” “아.....” 진성은 진팀장의 고충을 알 수 있었다. “저........ 제가 한 번 해 보면 안 될까요?” 진성은 용기를 내어 물었다. 평소의 진성이라면 이런 때에 이런 말을 선뜻 꺼내기 힘들었다. 그리 내성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귀찮은 것을 찾아서 하는 스타일은 절대 아니었다. 진팀장도 그런 진성을 알았기에 진성의 제안이나 이런 질문에 아주 의아했다. “진심이냐?” “네, 한번 해 보고 싶습니다. 제가 직접 해 봐야지 이해할 것 같습니다.” 진팀장은 진성이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평소와 다른 적극적인 모습에 흔쾌히 대답했다. 남자라면 저런 모습이 마땅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평소 자신의 아들인 현준이에 비해 딱 하나 부족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완벽하게 현준이 보다는 나은 모습이어서 더욱 아들로 삼아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진팀장이었다. “그래? 좋아. 한번 해 보자.”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까지는 없다. 성공하면 회사에 아주 큰 도움이 되니까.” 진성이 나가고 난 뒤에 진팀장은 프로그램 팀장인 조진철과 가상현실 팀장인 곽진호를 불렀다. 30대 초반에 175 정도의 그리 작지 않은 키, 국내에서 유명한 프로그래머이자 시스템 쪽에서는 가히 최고라 불리는 사람이 바로 조진철 프로그램 팀장이었다. 또한 그 뒤에 들어오는 40대 초반의 170정도의 키에 얼굴이 붉은 사람이 바로 세계 최초인 가상현실을 개발한 주역인 곽진호 가상현실 팀장이었다. 특히 곽진호는 진팀장의 후배로 진팀장을 형님으로 따르는 사람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대장님.” “설마 재촉하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형.님.?” 문명 온라인 팀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는 곳이 바로 로플팀이었다. 역시 전체 팀장을 대장이라고 불렀고 심지어 곽진호는 진지한 공식 석상을 제외하고는 꼬박꼬박 형님이라고 불렀다. “내가 그딴 짓을 왜 하겠나? 사실은 지난번에 우리가 한번 의논한 것 있지?” “대장님, 뭘 말씀하시는 건지?” “그 있잖아. 그 가상현실 속에 들어가서 이미지로 프로그래밍 하는 것!”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이 났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곽팀장님.” “내 기억에도 안 되는 걸로 아는데... 형님, 뭔가 다른 길이 있습니까?” “아니 다른 길 보다는... 자네들도 그 문명 온라인 팀의 프로 게이머 알지?” “아, 그 친구... 알죠. 지난번의 그 게임보고 제가 문명 온라인팀에 가고 싶어 얼마나 노력을 했는..데....... 어... 어.. 아니 그렇다기 보다는....... 아무튼 알죠...” 곽진호의 얼버무림에도 불구하고 이미 말은 했고 진팀장은 들었다. “그래? 이팀장에게 말해 줄까? 네 녀석이 간다고?” “형님. 왜 이러십니까? 저와 얼마동안 같이 있었는데... 농담도 모르십니까?” “일단 넘어가지. 나중에 보자고. 그 녀석이 우리 팀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하는 것도 알지?” “대장님, 알죠. 바로 제 밑에서 있으니까요.” 조진철 팀장이 대답했다. “그 녀석이 자네에게 뭐라고 하지 않든가?” “아, 뭐라고 했는데 제가 바빠서 대장님에게 가보라고 했는데요...” 뻔뻔한 조진철의 대답에 진팀장은 한숨을 쉬었다. 자기 팀원이 뭔가 질문을 했는데 바쁘다고 상관에게 그 일을 넘기다니. 보통 회사에서는 힘들지만 문명 온라인 팀과 로플 팀에서는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어쩐지, 아무것도 모르고 내게 묻더군. 그 게이머가 내게 묻든데... 왜 가상현실로 들어가서 프로그래밍을 하지 않느냐고. 그래서 내가 대답했지. 그게 불가능하다고. 그런데.” “그런데요?” “그 녀석이 자기가 직접 해 봐야겠다고 하든데...” “네? 직접 해 봐요?” “해 봐야지 납득을 하겠다고 해서 해 보라고 했어.” “정말이세요? 대장님?” “정말이지. 그러니까 자네 둘이 조금 준비 좀 해 주게. 진철이 자네는 그 녀석에게 예전에 실패했던 사례와 경과를 설명하고 대강 어떻게 동작했는지 알려줘. 진호 자네는 가상현실 팀에게 알려서 프로그램 팀이 사용할 수 있도록 세팅도 하고 알지? 아무튼 혹시 모르니 한번 해봐.” “대장님, 너무 그 프로 게이머에게 휘둘리는 것 아닙니까? 누구도 성공 못했는데....” “그러니까 해 보자는 것 아닌가?” “그래도... 지금도 하는 일이....” “어허... 자네 혹시 모르는 것 아닌가? 그 녀석 내 아들이 될 놈이야. 내 아들!” 진팀장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아들이니 당연히 한번 봐주라는 말투로 조진철 팀장을 압박했다. 하지만 조진철 팀장도 만만치 않았다. “대장님, 이런 일에 가족관계를 이용하시다니요?” “그럼 정식으로 왜 진철이 네 녀석이 그 일을 내게 떠맡겼는지 따져 볼까?” 진팀장은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게다가 자네에서 녀석으로 호칭까지 바뀌었다. “윽..... 예, 알겠습니다.” “그래야지. 진호 자네는?” “저야 당연히 찬성이지요. 방금 전화해 두었습니다.” “그래. 역시 자네야. 자네 밖에 없군. 요즘 젊은 것들이란.... ” 조진철은 두 나이든 상관이 자신 앞에서 젊은 것들 운운하자 화를 낼 수도 있었지만 상대 역시 장난이라는 것을 알기에 웃어넘길 수 있었다. “요즘 나이 드신 분들은...... 그 젊.은.것.들.을. 부려먹지요.” 조진철 프로그램 팀장은 재빨리 할말을 하고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조진철 팀장은 팀원에게 얘기해서 자료를 모은 다음 진성을 불러 세미나 실에서 거의 반나절을 투자해서 설명과 강의를 했다. 처음에는 이 모든 일의 원흉인 강진성에게 날카롭게 했지만 진지한 모습에 되려 성의 있는 설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이 절대 자신의 잘못이라고는 생각지 않는 조진철이었다. 진성은 팀장인 조진철에게 불려가서 반나절 동안의 강의와 설명을 들어야했다. 조금 들으니 자신이 대장인 진팀장에게 말한 것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고 진지하게 듣기 시작했다. 조진철 팀장은 뭔가 기분이 좋지 않은 듯하다가 조금 있으니 괜찮아졌다. 진성이 들은 바로는 대부분, 아니 모든 사람이 실패를 했다. 로플팀의 프로그래머는 모두 다 실패했고 다른 곳에서 유능한 사람들 역시. 거기에 상상력이 풍부한 소설가나 만화가 같은 사람도 테스트 했지만 모두 실패를 하고 말았다. 자신이 괜한 짓을 한 것은 아닌지 걱정되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런 기회도 흔치 않기 때문에 밀어 붙이기로 했다. 가상현실 내의 프로그래밍 인터페이스는 대부분이 상상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바다를 상상하면 바다의 이미지가 나오고 거기에 파도가 출렁이는 것을 상상하면 그대로 되는 방식이었다. 사람이 바다를 생각하면서 그 아래의 해저까지 상상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는 것은 당연했다. 진성은 왜 그 많은 사람들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진성은 자신의 좌우명 중의 하나인 ‘게으름은 창조의 어머니다’라는 것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가상현실과 관련된 코딩은 거의 노가다였다. 이미 시스템 자체는 거의 완성되어 있었기에 게임으로서의 틀을 씌우는 과정인데 게임 자체도 논리적으로는 완성되어 있었다. 가상현실과 게임을 붙이고 배경인 가상현실과 내용인 게임을 적절히 조화시키는 것이 해야할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일은 정말 일일이 하나씩 정해 줘야만 하는 일이어서 사람을 질리게 만들었다. 진성은 그런 일을 한꺼번에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느껴지는 가상현실에서의 프로그래밍에 대해 절실하게 원했다. 창조의 또 다른 어머니인 ‘필요’역시 진성에게 차고 넘쳤다. “도대체 어떻게 하지? 저렇게 해서는 아무것도 안 되는데... 아예 원소부터 하나씩 만들까? 아니야. 그럴 바에야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더 낫지.” 실제 가상현실 접속은 3일 뒤로 계획이 잡혔고 이제 거의 이틀 밖에 남지 않은 진성은 머리를 싸매며 좋은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노력해서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을 게임 밖에서는 평범한 진성이 쉽게 찾기는 힘들었다. “~~ 사랑이 날 떠날 때 내 어깰 두드리며 보낼 줄 알아야 시작도 안다고...” 진성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강진성입니다.” “저.... 김하나인데요......” “네? 누구라구요?” “김하나입니다. 기억 하시죠?” “아, 저의 광팬이시죠?” “... 네.. 바로 그 광팬이에요.” “그런데 어쩐 일로? 아, 전화번호는 어떻게 아셨나요?” “제가 어떤 일을 하는지 모르시는군요. 그리고 저녁도 다 됐는데...... 식사나 같이 하면 해서요..” “예? 아.... 잠깐만요..” 진성은 안 그래도 머리는 아프고 배는 고파서 밥이라도 먹을까 하고 생각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현준이 보이지 않았다. 현준은 당연히 같이 밥을 먹으면 좋아하리라 생각했다. “네, 그러지요. 어디로 가면 될까요?” “지금 6시니까 6시 30분에 현관에서 만나지요.” “네, 제 친구 현준이와 같이 정확하게 6시 30분까지 나갈께요.” “네? 같이요?” “아.... 안 되나요?” “아니요. 같이 오세요.” 왠지 서운한 목소리였지만 진성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곧바로 현준에게 전화했다. “야야~~ 야야야야~ 야야야야야야야~ 꽃 바구니 옆에 끼고~~~” “아니, 이 녀석 핸드폰 두고 갔잖아. 도대체 어디를 간 거야?” 진성은 전화를 끊고는 시계를 보았다. 6시 5분이다. 책상을 정리했다. 오늘은 조금 쉬는 게 좋을 거라 마음먹었다.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진성은 핸드폰에 문자로 남겨 놓고는 1층의 현관으로 나갔다. 1층까지 내려가니 역시 화사한 원피스에 아주 우아한 모습의 하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늦었나요? 빨리 나온다고 했는데.....” 아직 시간은 30분이 되지 않았다. “제가 먼저 나왔는걸요. 현준씨는?” 하나의 얼굴에는 반가움이 가득했다. 혼자 왔기 때문일까? “지금 없더라구요. 그래서 핸드폰에다 전화하라고 문자 남기고 왔어요.” “아..... 그래요?” 기대했던 하나는 약간 아쉬웠다. 연하에다가 아직 대학생인 진성에게 억지로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고 했지만 힘들었다. 그리 잘생기지도 않았는데 몇 번 보니 보통 남자에게서 볼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 뭐라고 꼭 집어서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마치 진성의 게임 플레이와 같으면서도 다른 것이었다. 게임에서의 진성은 아주 터프하고 날카롭고 과단성이 있지만 현실에서는 거의 반대였다. 하지만 그 독특한 매력은 게임에서나 현실에서나 같다고 생각하는 하나였다. 하나는 생각하다 꾀를 내었다. 핸드폰이 와도 받을 수 없는 곳. 그곳으로 가기로 했다. “저.... 제게 영화 티켓이 2장 있는데 같이 보러 안 가실래요?” “예? 저...... 그런데 현준이가 좀 있으면 전화할 텐데.....” “.....사실 저도 별 생각 없었는데 오늘까지 봐야하는 티켓이라서... 현준씨와 같이 나오면 그냥 버릴려고 했거든요......” “..... 그냥 현준이와 같이 보러 갈까요?” “....... 그런데 시간이 될지? 한번 전화해 보세요.” 진성은 빨리 핸드폰으로 현준에게 전화했다. 2번 했지만 여전히 받지 않았다. “...... 제가 현준씨에게 음성으로 사정을 설명할 테니 저와 영화 보러 가시죠.” 하나는 아주 적극적으로 나섰다. 진성은 뺄래야 뺄 이유가 없었다. “......네... 그렇게 하시죠.” 하나는 바로 현준에게 전화를 걸어 음성으로 사정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다. 전화가 끝나자 아주 밝은 모습으로 진성을 보더니 말했다. “.... 저 쪽에 제 차가 있으니 같이 가시죠.” “네....” 진성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어쩔 수 없이 하나를 따라갔다. 하나는 영화 티켓이 없었다. 하나 역시 평소에 그리 활발하고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런데 기회가 되니 사람이 바뀐 듯했다. 세련된 소형차를 타고는 같이 극장으로 갔다. 극장 근처에는 차를 대기가 곤란해서 멀리서 차를 대고는 조금 걷기로 했다. 극장이 밀집된 곳이라서 커플들이 많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진성은 괜히 난처했다. “저.... 테스트는 잘 되어가고 있나요?” “예... 그럭저럭...” “저.... 지난번의 그 테스트 게임, 저는 보지 않았거든요. 그러다가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봤는데... 정말 압권이더군요. 전쟁 장면은 아직도 선명해요. 그리고 하늘 위에서 지시하는 진성씨의 모습도 아주 멋있었구요.” “....그랬습니까?” “제가 듣기로는 그 때 처음 문명 온라인을 한 것으로 아는데, 제가 보기에도 정말 감탄할 정도로 게임을 잘 하시든데요. 그 상대했던 분은 게임을 만드신 분이라고....” “제가 운이 좋았죠. 그 날 처음 게임을 접했지만 그 전에 아마추어 버전인 문명 온라인을 두 세 번 현준이와 같이 했거든요. 그래서 많은 도움이 되었죠.” “그랬나요? 잠깐만요. 화장실 좀.” 극장 안으로 들어오자 하나는 화장실 핑계를 대고는 재빠르게 예매를 했다. 영화는 반지의 제왕. 다른 것들도 있었는데 기다리지 않기 위해 줄이 없는 곳을 선택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진성은 여전히 기다리고 있었고 곧 하나가 왔다. “어떤 영화인가요?” “네, 반지의 제왕이라고 하는데요.” “반지의 제왕? 아, 그거 꼭 보고 싶었는데 정말 잘 됐네요.” 하나는 아무거나 고른 것이 진성이 보고 싶었던 거라니 내심 기분이 좋았다. “자, 안으로 들어가요.” 진성과 하나는 깜깜한 곳으로 들어왔고 곧 자리에 앉았다. 앞자리와 거리가 넓어서 아주 편안했다. 극장에 잘 오지 않는 진성은 좀 얼떨떨하게 왔지만 그래도 보고 싶었던 영화라서 기분이 좋았다. “진성씨, 핸드폰!” 하나는 핸드폰을 끄면서 진성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진성도 현준을 생각하며 끄고는 영화의 예고편이 시작되자 핸드폰에 대한 생각은 사라졌다. “아니, 이 녀석 도대체 어디로 간 거야? 하나씨에게 전화가 왔다니.. 게다가 저녁 식사라니. 덕만이 형이 날 잡고 놔주지 않아서 이렇게 됐잖아. 아, 음성도 들어와 있었네.” “뚜...” “....... 같이 영화 보려고 했는데 현준씨에게 연락이 안 되어 진성씨와 둘이서 갑니다. 나중에 전화할께요....” 현준은 화가 났다. 하나나 진성이 아니라 알바생이라고 부려먹은 김덕만을 저주했다. 사무용품이 한꺼번에 들어온다면서 자신을 끌고 간 김덕만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30분 이상을 잡아먹더니 사무용품도 늦게 도착해서 현준은 늦고 말았다. 진성에게 전화하니 꺼져 있었고 하나도 역시 핸드폰이 꺼져 있었다. 현준은 화가 나서 덕만에게로 달려갔다. “형, 덕만이 형!” 막 퇴근할 준비를 하던 김덕만은 자기에게 씩씩거리며 달려온 현준을 보며 감격했다. “드디어... 드디어.... 네가 내게 저녁식사 같이 하자는 말을 하려는구나. 좋지. 자 가자. 너 옷 입고 나와라. 나 먼저 밖에 있을께. 내가 밥도 사고, 커피도 한잔 사 줄 테니까.” 김덕만은 180의 커다란 체구로 할말만 하고는 나가 버렸다. 현준은 완전히 얼어 버렸다. 결국 덕만이 얼어버린 현준을 데리고는 근처에 잘한다는 일식집으로 가서 주인에게 특별 부탁한 따뜻한 국으로 현준을 녹일 수 있었다. “아니... 여기는 형!!!!” “이제 깨어났네. 자, 내가 시켜 놓았다. 초밥 괜찮지?” “지금 밥이 문제가 아니라니까. 형 때문에 하나씨와 영화 못 봤잖아?” “하나씨?” “웁~~~” 현준은 자신의 입을 막았다. 자신이 하나씨를 좋아하는 것은 진성 외에는 아무도 몰랐다. 물론 가족들은 알았지만. 하나를 위해서 유진도 포기한 현준이었다. 포기라기보다는 서로 연락 안하게 된 것이지만. “아.... 재정담당 김하나씨? 그 사람하고 너 무슨 관계야?” “아니... 아... 아니...야.....” 현준은 이럴 때 더듬으면 상대가 눈치 챈다는 것을 알았지만 입은 자신의 마음을 배신했다. “오호라.... 그렇단 말이지. 그런데 연상이잖아?” “연상이 무슨 상관이야? 아..... 아니... 아니야..” 평소의 큼지막한 눈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덕만의 얼굴에는 실눈만 남았다. “그으래? 내일 하나씨에게 물어 보면 되겠군.” “뭐? 물어 본다고? 절대 하지 마. 물어 보면 내가 가만 안 있을 테니까. 알았지 덕만이 형!” “아무 관계도 아니라며? 상관없잖아?” “..... 실례잖아. 실례.” “내가 실례 좀 하지 뭐.” “아... 아니... 아니라니까..” “뭐가 아닌데?” “이...이씨..” 현준은 안 그래도 덕만이 시킨 일 때문에 열 받았는데 꼬치꼬치 캐묻는 탓에 더 흥분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에이.... 형 때문에 하나씨와 같이 저녁 식사할 수 있었는데 놓쳤잖아. 게다가 영화도 같이 볼 수 있었는데....” “왜? 맘이 바꿨대?” “아니, 지금 친구 진성이와 같이 있어. 원래 같이 가려고 했는데 내게 연락이 안 되어서 둘이 갔나봐. 다 형 때문이라니까. 다음부터는 그런 것 시키지 마. 나는 테스터 아르바이트 하러 왔으니까.” 사정을 알게 된 덕만은 그제야 실눈에서 큰 사내다운 눈으로 바꿨다. “그래서 열 받았구나? 어쩔 수 없잖아. 영화 본다면 조금 있다가 끝나겠네. 그 때 전화하면 되잖아?” “...... 그래도 같이 영화 볼 수 있었는데...” “그런데 하나씨가 먼저 전화한 건가? 아니면 진성이가?” “하나씨가 진성이에게 전화했대. 그래서 진성이는 내게 연락한 거고. 왜?” “아무래도... 뭔가 냄새가 나는데..” “무슨 냄새?” “생각해 봐. 하나씨가 갑자기 왜 진성에게 영화 보러 가자고 했겠어. 게다가 식사까지? 분명 내 생각에는 뭔가가 있어.” 현준은 그 뭔가가 무엇인지 짐작이 갔다. 그래서 더욱 큰 소리로 말했다. “뭐가? 도대체 뭐가 있는데?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 혹시나 해서 충고하는데 너 만약 하나씨가 진성이를 좋아하면 어쩔래?” “말도 안돼! 하나씨가 왜 진성이를 좋아해? 말도 안돼!” 현준은 강하게 부정했지만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성이는 아주 스타잖아. 나도 그 게임보고 나니 진성이가 완전히 다르게 보이든데... 내가 봐도 아주 멋있고 매력 있던데 여자의 눈에는 오죽 하겠냐? 내가 볼 때는 솔로로 있다는 것이 더 신기했다.” 현준은 덕만의 말에 턱도 안 된다며 쏘아 주고 싶었지만 왠지 그 말이 맞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신과 같이 살면서 진성은 여자에게 관심을 가진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아니 뭔가에 관심을 가진 것은 게임이 유일했다. 그렇다고 다른 모든 것에 아예 관심을 끊고 사는 것도 아니었지만. 현준은 벌써 4번째 여자친구와 헤어진 셈이었다. 오랜만에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여자가 진성이를 좋아한다면..... 현준은 속이 조금 쓰리겠지만 진성이를 위해서라면 포기하리라 생각했다. 여자는 또 있지만 진성이는 단 하나였다. 게다가 현준이 알기로 이번에 뭔가 된다면 진성이의 첫 여자친구일 것이다. 현준은 오히려 축하해 주리라 마음먹었다. “덕만이 형 말을 들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구나. 음.... 만약 그렇다면 친구를 위해서 내가 여자를 포기해야겠네. 진성이는 내 유일한 친구니까. 여자는 세상에도 많잖아? 그렇지?” “맞아. 현준이 네가 이제 정신 차리는구나. 그런 친구는 평생 친구지. 암, 그렇고 말고.” “그런데 덕만이 형, 왜 이렇게 맘이 쓰리지?” “휴..... 그래... 휴유유우~~ 너 오늘 나하고 술 한 잔 하자. 나도 듣고 있으려니까 열 받네. 내 나이 29인데 아직 여자친구도 하나 없는데 이런 20대 초반 녀석들이 여자 하나 놓고 내 앞에서 이런 말을 꺼내? 이씨.... 오늘 술이나 마시자. 야, 너 따라와. 내가 특별히 좋은 곳으로 데려가 주지.” 덕만은 현준을 데리고 일식집을 나섰다. 술을 마시러 간 그 둘은 의기투합해서 의형제까지 맺기로 했다. 그러면서 그 날을 잊기 위해 술을 들이켰다. “어이, 스키피오! 준비 다 됐나?” “네? 팀장님?” “자네를 그 문명 온라인 팀에서는 스키피오라고 부르더군. 나도 그 게임 봤는데 정말 압권이든걸. 나도 그 문명 온라인 정말 하고 싶어졌어. 사실 내가 게임 만드는 일을 해서인지 게임은 정말 싫어했는데 이제는 한 번 해보고 싶던데...” “그러셨습니까?” “너무 딱딱해 하지 말라고.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그리고 편하게 불러.” 조진철 프로그램 팀장은 곧 있을 가상현실에서의 프로그래밍 테스트를 앞두고 진성의 긴장된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말을 건넸다. “네? 아. 알겠습니다.” 진성은 현준과 달리 그렇게 빨리 친해지지는 못했다. 특히 같이 일을 할 경우에는 더욱 더 그랬다. 그래서 같이 일하는 30대 초반의 젊은 조진철 팀장과도 그리 편하게 말하지는 못했다. 조진철 팀장 역시 진성과 그런 면에서 비슷했지만 대장인 진팀장과 가성현실 파트장인 곽진호를 통해서 많이 달라졌다. 그래서 자신의 옛모습을 기억나게 하는 진성을 보며 편하게 대해라고 했다. “그냥 형이라고 불러. 단 공식적이나 윗분들 있을 때는 팀장님이라고 부르라고.” “.........” 진성은 뭔가 주저하는 듯했다. “뭐 문제라도 있어?” “저... 형은 조금............” “뭐?” 진지한 진성의 얼굴은 사라졌고 장난기 어린 표정이었다. “....... 아저씨...” “뭐!!!? 아저씨? 이거 완전 사람 잡는군. 나 아직 30대 초반이라고. 아저씨라고 하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아? 이거, 이거 너무 하는데.....” “하하하하...” 농담을 한 진성과 그 농담에 기분 좋게 받아치는 조진철 팀장은 서로 바라보며 웃었다. “자, 이제 시작하자고.” 진성은 문명 온라인의 전용 게임기와는 달리 더욱 크고 복잡한 콕핏으로 들어갔다. 또 에어로빅 옷을 입어야 하는지 걱정했지만 로플팀의 가상현실 접속기는 그런 것이 필요 없었다. 진성은 조진철 팀장을 뒤로 하고 수십 개의 모니터가 빙 둘러싸고 있는 가상현실 접속기 옆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붉은 얼굴의 곽진호 가상현실 팀장이 있었다. “스키피오, 준비 다 됐냐?” “네, 곽팀장님.” “뭐? 안 들려.” 진팀장의 소개로 진성을 알게 된 곽진호 팀장은 진성에게 자신을 형이라고 부르게 했다. 진팀장은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은 꺼내지도 말라고 했는데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 형님.” “그래... 한번 들어가서 네 하고 싶은 대로 해 봐라. 하지만 지금은 2시간 내에 나와야 하니까 그렇게 알고. 기본적인 것들은 다 알고 있겠지? 자 들어가라.” 스르륵 하면서 콕핏의 덮개가 뒤로 부드럽게 밀렸다. 문명 온라인의 게임기는 덮개가 위로 젖혀지는 구조였는데 로플의 접속기는 그야말로 부드러워 더 세련되게 느껴졌다. 안으로 들어간 진성은 역시 큰 공간에 쿠션 좋은 조종석 같은 것에 편하게 앉았다. 가만히 있으니 뭔가 ‘위잉’하는 소리와 함께 미약한 조명도 켜졌다. “여기는 형님이다, 스키피오 나와라.” 40대 초반의 활기찬 곽진호의 목소리였다. “............. 진성입니다.” “괜찮지?” “네, 약간 어두운 것 빼고는 괜찮습니다.” “조금 있으면 조명이 서서히 약해지다가 한순간 번쩍할 거다. 그리고 조금 어지러울 지도 모르니까 걱정 말고. 그 다음은 가상세계니까 잘 해 봐. 자 시작한다.” 진성은 몸에 긴장을 풀었다. 문명 온라인 프로 버전을 게임기로 처음 테스트 하던 것과는 또 달랐다. 게다가 몸에 아무런 장치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랐다. 당연히 복잡한 과정이 있으리라 생각한 것과는 정반대였다. 조명이 점차 어두워지더니 완전히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어둠이었다. “번쩍” 미리 준비하고 있어서인지 눈이 그다지 부시지는 않았다. 눈을 떴다고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너무 어두운데....’ 진성은 앞으로 한걸음 내딛었다. 발밑에 딱딱한 뭔가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진성은 너무 어두워서 자신의 팔을 들어 올렸다고 생각했는데도 알 수 없었다. 손을 들어 얼굴을 만졌다. ‘아, 아니. 얼굴이 없다니. 도대체 팔은?’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완전히 암흑가운데서 손을 들어 얼굴을 만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무 느낌이 없었다. 놀란 진성은 다른 손으로 팔을 만졌지만 역시 느낌이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진성아, 네가 있는 어둠이 바로 가상현실의 초기 모습이다. 네 생각과 가상현실을 연결시켰으니까 네 생각대로 될 거다. 잘 해 봐라.” 조진철 팀장의 목소리가 아주 크게 공간을 울리며 들렸다. 진성은 설명을 들었지만 말과 실제 체험과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었다. 생각은 있지만 몸이 없다니..... 진성은 자신의 몸을 정신을 집중시켜 상상했다. 평소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보지 않기 때문에 현실의 모습이 아니라 문명 온라인에서 형성된 그 게이머의 이미지를 머리 속으로 그렸다. “휘이잉” 순식간에 진성의 눈앞에 움직이지는 않지만 로마의 웅장한 건축물들이 있는 도시가 나타났다. 원래의 문명 온라인이라면 사람들의 움직임들이 보여야 하는데 그런 활동적인 부분들은 아예 없었다. 죽어 있는 도시라고 할까? 진성은 일단 밝아진 것과 어색하지만 자신의 몸을 볼 수 있었다. “와! 진짜잖아.” 자신이 상상한 것이 자신의 눈앞에 펼쳐졌고 자신의 몸도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곧 진성은 진팀장이 한 얘기를 실감했다. 하나의 살아있어 움직이는 도시가 아니라 그림이었다. 웅장하고 굉장히 스케일이 큰 그림일 뿐이었다. “이래서 불가능하다고 했었구나.” 진성은 또다시 정신을 모아서 보통의 밝은 공간을 생각했다. 완전히 바뀌었다.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진성은 기본부터 하기로 했다. 이미 생각해 온 대로 물을 담을 용기를 만들었다. 최대한 간단한 컵 모양을 생각했고 평면 이미지가 아니라 입체로 형상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진성의 목표는 자신의 의도대로 자신이 들어 움직일 수 있는 컵 모양을 만드는 것이었다. 거기다 물의 형상을 이미지화해서 컵에 물을 담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라고 여겼다. 역시 쉽지 않음을 느끼는 진성이었다. 처음에 만든 컵을 잡았을 때는 마치 그림으로 그려 놓은 컵을 잡은 것처럼 평면이었다. 힘을 주자 그 평면의 한 부분이 뜯겨져 나왔는데 그 뒤는 완전한 암흑이었다. 처음 들어와서 본 그 어둠이었다. 몇 번을 더 해 보니 마치 벽에 뭔가를 붙여 놓은 것 같은 입체감이 느껴졌다. “휴.....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거의 한 시간을 땀을 뻘뻘 흘려서야 속이 조금 파진 둥근 물체를 만들 수 있었다. 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조악해서 어릴 때 찰흙으로 만든 그릇 같지 않은 그릇이라면 믿을 정도였다. “.......... 왜 이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지 이해가 되는군. 아직 50분 정도는 남았으니까 물이나 한번 만들어 볼까?” 진성은 이런 가상현실 테스트가 정말 귀한 경험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시간을 아껴서 그 이상한 컵에 담을 물을 만들기 시작했다. 당연히 쉽지 않았다. 더욱 어려운 것은 딱딱한 고체의 경우 형체가 그대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상상하기도 쉽고 여러 각도에서 보는 모습도 비교적 쉽게 알 수 있었지만 물을 형상화 하려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물을 만들어야 하는 것 같은 막막함을 느꼈다. 물이라고 생각한 것들은 평면에 흐르는 시내의 모습이거나 아니면 이상한 고무 같은 고체였다. 너무 힘든 일이었다. 진성은 자신이, 그리고 사람이 얼마나 그 본질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지 절실히 깨달았다. 매일 먹고 마시는 물, 아주 쉽게 생각하는 이 물조차 이렇게 완벽하게 상상하면 이루어지는 이 공간에서 만들 수 없다니. 이런 곳에서 만들 수 없다는 것은 바로 물에 대해서 진성 자신이 전혀 모르고 있다는 말과 같았다. “............ 정말 포기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네....” 진성은 결국 물을 형상화하는 것을 포기했다. 아예 마음을 접으니 편해졌다. “.......... 오랜만에 포기라는 걸 해 보네. 가끔 포기 같은 것도 해 봐야겠네. 너무 좋은걸.” 진성은 대신 밝은 방에서 바닥을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다. 어떨 때는 오른쪽으로 가다가 왼쪽으로 급회전도 하고 발차기도 하고 앞으로 주먹을 내지르기도 했다. 현실에서도 비슷한 조명에 비슷한 환경을 조성하면 이 곳과 같을 것이라는 느낌마저 들었기에 진성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 보았다. “.... 스키피오. 어때? 힘들지?” 곽진호 팀장이었다. “.... 빨리 꺼내 주십시오. 힘들어요.” “그래? 하하하.... 역시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구나.” 진성은 땀범벅으로 밖으로 나왔다. “저... 곽팀장님. 제가 저기 접속했을 때 제 생각과 가상현실 시스템과의 인터페이스 기록한 것 있으면 저 좀 주십시오.” “왜?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은 알 텐데?” “제가 궁금한 것이 있어서요. 부탁드립니다.” “그래? 그렇다면 뭐.. 하지만 회사 내에서, 이 요람에서만 봐라. 가지고 나가서는 절대 안 된다. 약속할 수 있겠냐?” “네, 약속합니다.” “나중에 내가 보내 주마. 이런.... 완전히 땀으로 목욕을 했군. 꽤 애 쓴 모양이네. 일단 씻어라. 조금 있으면 저녁이니까 같이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자 씻고 와.” “~~ 사랑이 날 떠날 때 내 어깰 두드리며 보낼 줄 알아야 시작도 안다고...” 진성이 막 샤워를 끝내고 나와서 머리를 말리고 있을 때, 핸드폰 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강진성입니다.” “저...... 김하나입니다. 저... 오늘 저녁에 같이 식사 어떠세요?” “... 이런 어쩌죠? 저희 팀장님과 다른 동료와 같이 식사하기로 했는데..... ” “아, 그런가요? 그럼 할 수 없죠. 다음에 하죠.” “네.......” “그럼 이만.” 진성은 여전히 머리를 말리며 이미 끊어진 핸드폰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지난번에 같이 영화를 본 이후로 진성은 하나가 왠지 부담스러웠다. 분명 친구인 현준이 좋아한다는 것을 아는데 비록 하나가 진성 자신에게 관심 있다는 것을 알아도 도저히 정상적으로 대해 주기 힘들었다. 그래서 은근히 만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다행히 오늘은 정말 식사 약속이 있었기에 맘 편하게 거절할 수 있었다. 근처에서 얼큰한 부대찌게로 저녁을 든든하게 먹은 진성은 다시 회사로 돌아왔다. 식사하러 갈 때 조진철 팀장은 진성에게 데이터를 담은 DVD를 진성의 책상에 놓고 왔다고 얘기했기 때문에 진성은 되돌아가 그 결과를 보고 싶었다. 요람 속의 작은 사무실에 있는 자신의 책상에는 조팀장의 말처럼 DVD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컴퓨터를 켜고는 급한 마음으로 DVD를 드라이브에 넣었다. DVD 에는 가상현실에서의 진성의 행동과 그와 관련된 가상현실 시스템이 받아들인 부분에 대한 결과가 나와 있었다. 그리고 진성의 모습을 찍은 동영상까지 있었다. 진성은 천천히 체크하면서 읽어 나갔다. 진성은 자신이 그 안에서 없는 것을 완전히 창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 뿐 아니라 인간이라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얻은 것도 있었다. 물을 만들려고 고심에 고심을 하다가 진성은 결국 포기했었다. 진성은 포기하면서 뭔가 힌트를 얻은 것이었다. ‘가상현실도 하나의 현실이다. 절대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진성은 데이터를 보면서 생각했다. ‘아! 창조를 할 수 없다면 모방 밖에 남지 않는다. 모방!’ 뭔가 실마리를 얻은 진성은 빠르게 데이터에서 자신이 원하는 모방에 대한 증거를 찾기 시작했다. 특히 자신이 가상현실에서 보낸 시간 중에 뒤의 뛰고 걷고 마치 발광을 하는 그 부분에 집중했다. 자신의 생각으로 몸을 움직이는 방법, 방향전환, 뛰는 법, 발차기.... 진성은 마치 손에 잡힐 듯 말 듯한 무언가가 있음을 알았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몰랐다. 벌써 새벽 2시다. 현준에게서 전화가 와서 회사에서 밤 샐 일이 있다며 얼버무렸다. 진성은 계속 집중해서 이번에는 물을 만드는 부분을 보았다. 자신이 직접 상상했던 것이 이렇게 얼토당토 않는 것으로 나온 이유를 알았다. 하지만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이유라는 것도 알았다. 새벽 4시가 넘었다. 수면 부족인지 진성은 생각이 느려지고 머리가 무거워짐을 느꼈다. “아... 조금만 하면............ 될 것... 같...은데...” 말이 점점 늘어지더니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잠들어 버렸다. “현준아, 이것 좀 갖고 가거라.” 현준의 어머니는 막 식사를 끝내고 현준의 아버지와 같이 출근하려는 현준에게 뭔가를 바리바리 싸서 주었다. 소풍 때 많이 쓰는 4단 도시락이었다. “엄마? 이거 설마 진성이 주라고?” “회사에서 밤 샌 모양인데 밥은 제대로 먹겠니? 네가 신경 좀 써서 이거 잘 먹으라고 해라. 알겠지?” “.... 그런데 이거 너무 오버 아니야? 아침 식사에 이런 도시락이라니...” “아무 소리 말고 갖다 주고 맛있게 먹으라고 해라. 그리고 당신, 회사에서 그렇게 일을 많이 시키나요? 어제도 얘기했지만 또 화가 나네요. 당신은 그렇게 빨리 들어오면서 진성이에게 그렇게 일을 시켜야 하나요?” 움찔했던 현준은 다행히 짜증의 대상이 자신의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자 내심 안심했다. “아... 왜 내게 화살을 돌린 거요? 어제 아무 일 없었다니까. 진성이 녀석이 왜 회사에서 밤을 샌 것인지는 나도 모르오. 제발 생사람 잡지 마시구료.” 현준의 아버지는 억울했다. 어제 밤에도 회사에서 밤샌다는 진성의 소식을 들은 아내의 등살에 아주 고생했는데 이렇게 아침 출근하는 첫 시간부터 또 이런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현준의 아버지는 무슨 소리가 나올지 몰라 빨리 차를 타고는 출발했다. “현준아, 진성이가 무슨 일 새로 시작한 것 있냐?” “모르겠는데요. 저는 문명 온라인 팀에 있어서요. 요즘 진성이 거의 로플 팀에 있잖아요. 아버지가 모르면 누가 알아요? 팀장이잖아요?” “나도 그렇게 밤 샐 정도의 일은 시킨 적이 없으니까 하는 말이지. 아무튼 빨리 가야겠다. 조금 늦겠다.” “야, 강진성! 도대체 무슨 일이야?” “........ 어... 어... 현준이네. 여기는... 회사잖아? 내가 왜 여기 있지?” “어라. 기억도 못하냐? 너 어제 여기서 일할 것 있다면서 밤샌다고 했잖아?” “........... 아.. 맞아.” “무슨 일이기에 집에도 들어오지 않고 이렇게 회사에서 날밤을 새냐?” “...... 그 가상현실 접속기 테스트 결과 좀 본다고......” “뭐? 그런 것은 말해도 잘 모르니까. 아무튼 자, 이거 받아.” 현준은 진성에게 두툼한 도시락을 꺼냈다. 거기다 현준 자신이 오면서 뽑은 음료수까지. “이게 뭐야?” “뭐긴 뭐야? 네가 밥도 안 먹었을 것 같아서 이 형님이 바리바리 싼 거지. 아침으로 먹어. 참고로 안 먹고 남기면 화가 있을 거야.. 크크크...” “아주머니께서 싸셨구나. 그런데 양이 좀 많네. 현준아 같이 먹자.” “나 밥 먹고 왔다니까. 배 불러.” 현준은 배를 쓰다듬으며 진성에게 말했다. 진성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어떻게 다 먹지? 혼자서는 못 먹을 것 같은데....” “그래? 그럼 여기 있지 말고 요람 밖으로 나와. 덕만이 형이 아마 출근했으면 같이 먹어도 되니까.” “아, 맞다. 그러면 되겠네.” 진성은 도시락을 들고 밖의 사무실로 갔고 덕만은 아직 오지 않았다. 평소에 친한 공동진과 다른 사람들도 아직 출근하지 않았다. “현준아 어쩌지?” “일단 여기서 먹어라. 식으면 맛없으니까. 좀 있으면 오겠지.” 진성과 현준은 사무실의 작은 테이블에 당당하게 앉아서 도시락을 열었다. 현준은 도시락의 내용에 깜짝 놀랐다. 새우튀김부터 시작해서 쇠고기 볶음, 생선조림, 야채튀김, 산채나물 등 갖가지 반찬이 아주 맛깔스럽게 들어가 있었다. 현준의 입에 침이 고였다. “.... 진성아, 나도 같이 먹으면 안 될까?” “좋지. 같이 먹자.” 현준은 젓가락도 들지 않고 손으로 반찬을 집어 먹었다. 평소에도 이렇게 하면 좀 좋을까 생각했다. 그 때 하나가 출근해서 사무실로 들어왔다. 진성과 하나의 눈빛이 마주쳤지만 진성은 먼저 돌려버렸다. “하나씨, 이리 오세요. 아침 안 드셨죠? 좀 드세요?” “예? 아.. 예.” 진성을 보느라 현준의 말을 듣지 못한 하나는 눈치껏 움직였다. 하나 역시 테이블로 와서 같이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다. “와, 아주 맛있는데요. 그런데 왜 갑자기 도시락을?” “아, 이 녀석이 어제 일이 많은지 밤샜거든요. 그래서 우리 어머니께서 특별히 이 녀석 아침 굶는다고 이렇게 도시락을 싸 주셨지요.” “예? 밤을 새요? 요즘도 그렇게 바쁘나요?” 하나는 예전에 프로그램 팀 한창 바쁠 때를 생각했다. 거의 합숙 분위기였다. 이팀장부터 집에 들어가지를 않으니 실제 개발팀은 완전 비상체제로 거의 보름을 회사에서 지낸 것으로 알고 있었다. “아, 아닙니다. 제 개인적으로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도 몸조심하세요. 건강 한번 잃어버리면 다시 찾기 어려우니까요. 안 피곤하세요? 혹시 감기는? 제가 약 좀 사 드릴까요?” 진성과 현준은 얼빠진 사람마냥 갑자기 터져 나온 하나의 말에 멀뚱멀뚱 눈만 껌벅였다. 현준은 하나가 진성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진성은 그런 현준의 생각을 모른 체 아주 불편해했다. 이런 모습을 보는 현준의 마음이 상하지나 않았을까 걱정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진성은 티나게 말을 딱딱하게 해서 상대가 무안할 정도였다. 어색한 분위기였다. 진성은 현준에게 잘 먹었다고 말하면서 빨리 자리를 빠져 나갔다. 하나는 뭔가 자신이 잘못한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현준은 대강 눈치를 챘다. 현준은 보통 둔하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이런 중요한 때는 뭔가 자기 몫을 해내는 사람이었다. “하나씨, 진성이에게 관심 있죠?” 현준은 바로 꼬집어 물었다. “예? 아..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저 녀석, 저를 걱정해서 이렇게 딱딱하게 구는 겁니다. 사실 제가 하나씨를 좋아했거든요. 그래서 저 녀석 앞에서 하나씨 좋아한다고 말했구요. 그러니 아무리 하나씨가 관심이 있다고 해도 저 진성이 녀석 끄떡도 않을 겁니다. 제가 아는 진성은 여자 때문에 친구를 배신할 녀석은 아니거든요. 아, 여자라고 해서 기분 나쁜 것은 아니시죠?” “........... 그랬나요?” 바로 눈앞의 현준이 사정을 말하자 하나는 바로 이해했다. 그리고 동시에 현준에게 미안했다. 자신에게 별로 관심 주지 않는 상대를 좋아해 보니 현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저.... 저도 현준씨에게 미안해요. 듣고 보니 제 생각만 한 것 같네요.” “그런 말 대신에 진성에게 잘 해 주십시오. 진성은 아직까지 한번도 여자 친구가 없었거든요. 하나씨가 어쩌면 첫 번째가 될 수도 있겠네요.” “네? 정말이요? 여자들이 꽤 쫓아다닐 것 같은데요...” “저 녀석이 별로 관심이 없어서요. 아무튼, 잘 해 주십시오. 그리고 조금 불편할지도 모르겠지만 하나씨에 대한 마음은 접었으니까 그냥 진성의 친구로 대해 주세요. 그게 편하겠죠?” 하나는 남자다운 현준의 말에 감동했다. 친구를 위해 좋아하는 감정까지 포기한다니. 남자만의 세계가 이런가 싶었다. 현준의 안타까울 마음을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아...주... 많이 감사드려요.... ” 현준은 하나의 눈에 눈물이 맺히자 당황해서는 바로 자리를 떴다. “아... 저...저는 볼일이 있어서요.....” 하지만 불행하게도 덕만이 출근해서 들어오다가 그 광경을 보았다. 누가 봐도 오해할 광경, 남자는 어쩔 줄 몰라 하고 여자는 그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는 바로 그 장면. 현준은 밖으로 나가다 바로 덕만에게 붙잡혀서 옥상으로 끌려갔다. “현준아, 너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남자는 힘으로 하면 안 된다. 절대 그러면 안 된다. 하나씨가 네 친구를 좋아한다며? 그러면 깨끗하게 포기해야지. 남자가 쩨쩨하게... 어제 나와 한 얘기는 술김에 한 얘기냐? 이 놈 정신 차리게 좀 맞아야겠군.” “뭐? 덕만이 형. 그게 아니고....” 현준은 끝까지 말을 할 수 없었다. 바로 눈앞에 덕만의 무시무시하게 큰 주먹이 날아왔기 때문이었다. “퍽!” “형! 내 얘기 좀 들어보...” “퍼퍼퍽!” “이씨. 내 얘기좀 ...” “퍼퍽! 퍼퍼퍽! 퍼퍼퍼퍼퍽!” 진성이 자소 소프트에 정식으로 입사를 한 것도 벌써 한달이 지났다. 그 동안에 여러 번의 문명 온라인의 프로 버전에 대한 테스트를 했고 여러 중요한 버그들을 잡아낼 수 있었다. 게다가 진성은 프로그래머로서 로플팀의 가상현실 관련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일조를 했다. 처음에는 상당히 많은 것들을 배워야 했지만 3주 정도가 지나자 어느 정도 다른 프로그래머들과 의견도 나누면서 한 사람의 프로그래머로서 대우를 받기 시작했다. 또한 문명 온라인의 프로 버전 게임 테스트를 통해 알려진 진성, 스키피오의 실력에 자소 소프트의 사내에 팬클럽이 생겨 버렸다. 십대의 아주 열렬하고 광적인 팬클럽은 절대 아니었고 평균 연령이 30대 초반인 게이머의 팬클럽으로서는 최고령 클럽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여러 번의 게임 동영상이 회사 내에서 나돌면서 그 동영상을 본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서 만든 팬클럽인데 이름이 ‘스키피오’였다. 테스트와 관련되어 있는 개발팀의 대부분은 그 팬클럽 같지 않은 팬클럽에 가입을 했고 행정 부분이나 다른 게임 개발과 관련된 많은 사람들도 회사내의 가장 큰 사조직이 되어 버린 스키피오의 회원으로 등록했다. 모두 자소 소프트의 직원이라는 공통점에 팬클럽의 공식적인 일은 한달에 한번 정도 모여서 회식을 하면서 서로의 친하게 지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내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한 곳에서 테스트 동영상 파일을 받으면 그것을 전 스키피오 회원들에게 서로 퍼트리는 비공식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젊은 20대 초반의 여자 직원들은 카메라폰을 이용하거나 소형 디지털 카메라를 이용해서 진성의 사진을 찍어서 서로 돌려 보곤 했다. 그러다가 누군가 최근의 테스트 동영상 중 2개를 인터넷에 공개해 버렸다.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파일로 인해서 또 다시 자소 소프트의 게시판은 몸살을 앓게 되었다. 그 게임 파일은 현준과 진성이 둘 다 프로 게임기에서 문명 온라인 프로 버전을 한 것이었는데 처음과는 달리 그래픽과 게임 인터페이스가 세련되게 변하고 게임의 시스템도 더 정교하게 변해 자체적으로 베타 테스트를 해도 되겠다는 의견이 나올 정도였다. 그런 파일이 인터넷에서 퍼져 나가자 예전의 ‘얼굴 없는 게이머’의 팬들과 문명 온라인을 기대하는 팬들이 합세해서 자소 소프트에 빨리 베타 테스트를 시작하라는 압력을 가했다. 그렇지 않아도 베타 테스트를 고려 중이었던 이팀장과 팀원들은 그 유출 경위는 조사하지 않고 바로 의논해서 베타 테스트를 하기로 결정했다. 베타 테스트를 곧 시작한다는 말이 나가자마자 게시판은 인원이나 방법에 대한 문의나 제안들이 봇물같이 터져 나왔다. “저...... 진성씨...” “아, 하나씨.” 진성은 얼마 전에 현준으로부터 진지하게 하나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하나의 마음을 알게 된 현준이 하나를 포기한다는 말과 하나와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쉽게 그런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불편한 것은 아예 하기 싫어하는 진성이었다. 그래서인지 거의 일주일이 지나는 동안에도 거의 말 한 번 하지 않고 지나갔다. 물론 그 중에는 ‘스키피오’의 젊은 행동대원들의 카메라 공세 때문이기도 했다. 진성은 하나가 그리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계속 현준이 신경쓰였다. “저... 오늘 저녁에 식사 어때요?” 진성은 여러 번 식사 요청을 거절했기 때문에 아주 미안했다. 더 이상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정식으로 관심 갖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럴까요? 7시에 현관에서 만나지요.” “네......” 진성이 요람으로 들어가자 하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재정팀의 다른 사람들이 와서 작은 소리로 환호를 했다. 하나의 마음을 아는 몇 사람이 옆에서 용기를 불어 넣어 이렇게 말을 했던 것이다. 일주일 정도 동안 의식적으로 자신을 피하는 진성을 보자 마음도 아프고 자신도 없었지만 든든한 동료들의 지원 아래 드디어 진성과 저녁을 같이 할 수 있게 되자 뿌듯한 하나였다. “현준아, 나와 같이 사무실 비품 받으러 가자.” 덕만은 아직도 자신에게 말을 하지 않는 현준에게 말을 걸었다. 지난번에는 원래 그 일 하는 사람의 부탁이었기 때문에 오늘 갈 필요는 없었다. 자신에게 있는 불만을 풀기 위해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김덕만씨, 무슨 일입니까?” 현준의 말에는 얼음이 풀풀 날렸다. “야, 너 언제까지 이럴래? 쫀쫀하게 남자가... 좀 맞을 수도 있지....” “오호... 그러면 김덕만씨가 제게 한번 맞아 보겠습니까?” “뭐? 음.... 음... 그건... 좀....” “그리고 저 바쁩니다. 괜히 그런 일로 부르지 마세요. 저는 테스트로 들어온 알바생입니다. 알겠습니까? 김.덕.만.씨.” 현준은 일주일 전의 그 비참했던 구타사건을 아직도 잊지 못했다. 그야말로 떡이 되었다. 말 한번 못해보고 그렇게 억울하게 맞은 적인 한번도 없었다. 나중에는 눈물까지 났다. 아파서가 아니라 억울해서였다. 게다가 그렇게 사람을 패 놓고는 덕만은 실망했다느니, 너 같은 놈은 남자도 아니라는 말만 늘어놓고는 사라져 버렸다. 현준은 스스로 일어나 그 몰골로 집으로 돌아가서 집안을 발깍 뒤집어 놓았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현준이었다. 그 다음날 하나를 통해 사정을 알게 된 덕만은 현준 앞에서 손금이 사라질 정도로 싹싹 빌었지만 현준의 말은 싸늘했다. 형이라는 호칭도 사라졌고 다른 사람에게는 서글서글하고 붙임성 있게 하면서 덕만에게는 그야말로 얼음덩어리였다. 다른 사람들도 그 사정을 알고는 매일 시간 날 때마다 덕만을 놀렸다. 덕만이 어디 가려고만 하면 “어이? 덕만씨? 또 누구 잡으러 가나? 하하하하..” 악의 있는 농담은 아니었지만 덕만은 자신의 속단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기에 얼굴만 붉게 변했다. 게다가 다행히 진팀장이 그런 일은 남자 사이에는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했다. 잘못했으면 해고당했을 지도 몰랐다. “좋아, 네가 원하는 만큼 때려라. 그럼 날 용서해 주는 거냐?” “............ 음...... 거기다가 2달 동안 저녁 식사!” 현준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사실 현준도 자신의 성격에 맞지 않게 계속 냉기를 풍기려니 힘들었다. 아직 화는 풀리지 않았지만 덕만의 말에 바로 물어버린 현준이었다. 덕만은 그래도 자신을 용서해준 현준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리고 설마 형인 자신을 그렇게 많이 때리지는 않을 거라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곧 그것은 오산이라는 것을 알았다. 현준은 점심 식사 후 만반의 준비를 다한 뒤에 덕만을 옥상으로 불렀다. “마음껏 때려라.” “걱정 마십시오. 정말 마음껏 때릴 테니까.” “아..... 그래? ” “갑니다.” 현준은 손에 가죽 장갑을 끼고는 앞으로 다가갔다. 덕만 앞에서 주먹에 힘을 주고 일단 한번 날리려는 순간. “잠깐.............” “뭡니까? 맘이 바뀐 겁니까?” “아니.... 나 턱이 약하거든. 그리고 무릎도 약하고.... 아, 허리도 좋지 않아. 너 알지? 남자가 허리 다치면 안 된다는 것. 그리고 나 고혈압이.... 아, 맞다. 빈혈도 조금 있다............ 게다가....” 현준은 덕만이 그렇게 약한 모습을 할 줄 몰랐다. 강해보이는 사람이 이러니까 더 웃겼다. 자신이 준비해 두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맞을 겁니까? 아닙니까?” “맞...아..야지...” 현준은 다가갔다. 오른손 주먹을 쥐고 가볍게 눈을 질끈 감고 있는 덕만의 턱을 가볍게 쳤다. 기다리던 덕만은 움찔했다. “내가 가장 기분 나빴던 것은 맞아서가 아닙니다. 이유도 묻지 않고... 그렇게 때리다니. 아니, 그것도 이해합니다. 남자가 욱해서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런데 자신이 때려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사람을 그대로 두고 가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덕만씨 당신은 좀 당해 봐야 합니다.” 덕만은 그제야 현준이 화가 난 이유를 제대로 알 수 있었다. 덕만은 그런 생각은 해 보지 않았다. 현준은 덕만을 그야말로 개 패듯이 팼다. 어릴 때 조금 배웠던 태권도의 어슬픈 동작으로 때리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우격다짐이었다. 그러다 현준은 턱만 집중적으로 때렸다. “퍽!” “나도 엄청 맞았지. 억울하게 맞으면 더 아픈 거 아십니까?” “퍼퍼퍽!” “생각보다 스트레스가 해소가 안 되네.” “퍼퍽! 퍼퍼퍽! 퍼퍼퍼퍽! 퍽!” 현준은 사무실로 가야할 시간임에도 계속 때렸다. 한참을 때리니 현준이 지쳤다. 덕만은 큰 덩치로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헉헉... 흐흐헉... 헉헉.. 휴........” 현준은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조금 쉬다가 현준은 별 타격이 없어 보이는 덕만을 보면서 한 마디 하고는 옥상의 한쪽에 숨겨져 있던 뭔가를 품에 넣더니 내려가 버렸다. 덕만은 그 말을 듣고는 얼굴이 하얗게 변해 버렸다. “나머지는 내일 합시다.” 현준은 미리 설치해 두었던 비디오 카메라를 가져 왔다. 멀어서 음성은 잘 들리지 않겠지만 그것은 자신의 몸에 설치한 녹음 테이프로 대체할 수 있었다. 현준 자신이 때리는 부분은 제외하고 앞의 덕만이 비굴하게 변명하는 부분만 잘라냈다. 거기에 녹음기에서 뽑은 음성으로 완벽하게 싱크를 맞추었다. 자신이 봐도 재미있는 화면이었다. 현준은 덕만에게 완벽한 복수를 작정했다. ‘스키피오 팬클럽’의 회원이었던 현준은 그 화면과 현준 자신이 덕만에게 맞았던 사연과 오늘 일어난 일을 자신이 덕만을 때리기 전까지만 아주 잘 포장해서 적어서 회원들 중에 젊은 사람들에게만 오늘 밤으로 시간을 예약해서 보냈다. 현준은 이것이 내일 일으킬 파장을 생각하고는 몸서리치며 사악하게 웃었다. 그 덩치가 저런 소리를 하다니. 괜히 실없이 웃는 현준에게 진성이 다가갔다. “무슨 좋은 일 있냐? 왜 그렇게 웃어?” “아....... 당연히 좋은 일이 있지. 내일 정말 좋은 일이 있을 거다. 정말로. 으히히히..” “그래? 뭔데? 어떤 좋은 일이길래...? ” “기다려봐. 그래야 더 기쁘지. 으하하하..” “아, 맞다. 너 오늘 같이 저녁 먹으러 가지 않을래?” “왜? 집에 가서 먹으면 되잖아.” “아... 약속이...” “하나씨?” “......... 응..” 진성이 뭔가 미안한 표정을 짓자 현준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난 안가. 지난번에도 얘기했잖아. 난 이제 상관 하지 않는다고. 너와 하나씨가 잘 되면 나는 친구로서 축하해주고 하나씨에게 친구나 동생 좀 소개시켜 달라고 할거다. 그러니까 너는 네 생각만 해라. 알겠냐?” “..... 그래도....” “안 간다면 안 가. 그리고 너도 하나씨 입장도 좀 생각해라. 여자인 하나씨가 매일 너더러 저녁식사하자고 말하고 너는 빼고... 남자와 여자가 바뀐 거 아니야? 그리고 정말 난 신경 쓰지 말고 네가 좋으면 만나고 싫으면 만나지 마. 그러면 돼. 절대로 나를 끼우지 마. 알겠지? 게다가 나도 오늘 즐거운 저녁 약속이 있어서 말이야. 푸하하하..” 현준은 말하다가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진성은 현준의 말을 듣고는 뭐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하나의 입장을 생각하라는 현준의 말에 자신이 그동안 실례를 많이 했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내가 그 동안 네 핑계 대고 너무 실례를 많이 한 것 같다. 알겠다. 고맙다. 현준아.” “푸풋.... 고맙기는.... 너도 내일을 기대해라. 엄청나게 재밌는 사건이 터질 테니까.....” 현준이 너무도 쾌활하게 이야기하자 오히려 진성이 무안했다. 피식 웃고는 요즘 계속 붙잡고 있는 예전의 자신의 가상현실 접속 결과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저.. 뭐 드시겠습니까?” “치즈 돈까스가 좋을 것 같네요. 진성씨는?” “저도 같은 걸로 하죠.” “네..... 여기 치즈 돈까스, 둘 주세요.” 진성과 하나는 만나서 뭘 먹을까 생각하다가 진성의 제의로 쥬신대 앞에서 유명한 돈까스 전문점으로 왔다. 하나는 진성이 자신과 만나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말하자 작은 일이지만 아주 행복해했다. “........ 이제까지 제가 실례를 많이 한 것 같습니다. 친구 핑계 대면서.. 조금 본의 아니게 실례했습니다.” “.... 예? 아.. 아닙니다. 실례라니요. 뭐, 제가 좋아서 한 일이니...” 진성이 말한 다음으로 서로 말이 없었다. 이런 자리가 익숙하지 않은 진성도 진성이었지만 가슴이 두근거려서 말할 때 떨리는 것을 진성이 알아차릴 까봐 말 못하는 하나였다. 둘 다 쑥맥인지 도무지 대화는 진전되지 않았다. 가끔 진성이나 하나가 질문했지만 간단한 대답 다음으로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하나는 아주 좋은 대화거리를 찾았다. “.... 혹시 스키피오라는 것 아세요?” “.... 그것 제 닉네임인데요... 그 처음의 테스트 이후로 저 요람안의 사람들은 저를 스키피오라고 부르거든요... 한니발을 무너뜨린 로마의 영웅 이름이죠.” “아니... 그것 말구요...” “네? 또 다른 것도 있습니까?” ‘스키피오 팬클럽’은 이상하게 그 주인공인 진성이 그 존재를 몰랐다. 최고령 팬클럽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나중에 정식으로 게임이 상용화되면 알릴지는 팬클럽 회장만이 알았다. “... 모르셨군요. 지금 회사내에 가장 큰 사조직이 바로 ‘스키피오 팬클럽’이에요. ” “팬클럽? 스키피오?” “... 역시 조금 무디시네요. 아마 평균 연령이 30대가 넘어가는 게이머 팬클럽 중에서 최고령 팬클럽이죠. 게다가 당사자가 모르는 팬클럽이기도 하구요. 사실, 저도 거기 가입했거든요.....” “... 그런게 있었나요?.... 그런 팬클럽이라니... 저는 팬사이트는 있었는데 팬클럽은 처음이네요......” “다들 진성씨의 그 게임 플레이를 보고 모인 사람들이에요. 진성씨의 게임은 참 특이해요. 봐도 질리지 않는다고 할까요. 저도 아마 5번씩은 봤을 거예요. 누가 진성씨를 스카웃했는지 몰라도 아마 그 사람 선견지명이 있네요.” “... 하핫... 현준이 아버지 아시죠? 진팀장님.” “아, 지난번의 그 분?” “네, 그 분이 소개하셨어요. 그 덕분에 자소 소프트에 입사하게 되었구요.” “아... 그랬군요. 아직 대학생이라고 하든데?” “예, 바로 이 앞의 쥬신대 컴퓨터 공학과 2학년입니다. 졸업할려면 아직 한참이지요.” “뭐, 요즘에는 휴학하고 직업전선에 뛰어드는 젊은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저도 그럴 생각입니다. 현재로서는.......” 그 때, 주문한 음식이 왔다. 이어졌던 대화는 다시 끊어졌고 서로 음식만 먹고 있었다. 그 뒤로 몇 번 서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 회사 얘기로 시간을 보내고는 헤어졌다. “진성아, 여기 좀 않아봐라.” “진성아, 어떻더냐?” “진성이 형, 그 누나 이뻐?” 진성이 집으로 들어오자 기다리고 있었던 듯, 현준의 아버지가 진성을 식탁에 앉히더니 바로 질문이 쏟아졌다. 진성은 현준을 쳐다보았지만 현준은 곧바로 딴청을 부리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동료와 그냥 저녁식사 했을 뿐인걸요.” “그 김하나씨 맞지? 음.. 내가 내일 이팀장에게 물어 봐야겠군. 어떤 처자인지 알아봐야지..... 그렇지?” “맞아요. 당신, 오랜만에 똑바른 말씀하시네요. 진성아, 마음에는 들어?” “형, 좀 자세하게 말해 봐.” 현준의 아버지와 어머니, 거기다 동생인 현석이까지 끼여서 진성을 난감하게 만들었다. 진성은 거의 30분 정도나 붙잡혀서 자세하게 보고를 하고 나서야 3층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어이! 진.현.준. 어디를 가시려나?” “.....아.. 잠깐 산책이나....” 먼저 올라갔던 현준은 진성이 올라오자 바로 아래로 내려가다 딱 걸렸다. “산책은 나중에 가고 여기 앉아 봐.” “........” “너, 왜 그런 말을 하고 그래? 나야 그렇다 쳐도 상대인 하나씨를 생각해야지. 회사에서 소문나면 어떻게 해?” “아, 그렇구나!” 현준은 짐짓 몰랐다는 눈치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너무 티가 났다. 그런 현준을 보던 진성은 한숨을 쉬었다. “휴....... 너 때문에 내가 덤터기를 쓰는 것 같다. 휴....” “... 그러니까 네가 잘 해 주면 되잖아. 하나씨 좋은 여자니까.” 착 가라앉은 현준의 말에 진성은 현준의 눈을 보았다. 그 속에서 안타까움과 아픔을 본 진성은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일어난 진성은 현준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방으로 향했다. “아참........ 그런데, 너 오늘 저녁식사 약속 있었다며? 누구야?” 방으로 들어가다 돌아서서 현준에게 물었다. “아.... 앞으로 2달 동안 계속 약속이 있을 거야. 아주 즐거운 약속이야.. 크크큭” 현준의 목소리는 어느새 쾌활한 평소의 그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뭐?” 현준은 아래로 내려가며 돌아보지도 않은 채 손을 흔들었다. “며칠 전에 베타 테스트를 하기로 결정을 했다. 그리고 그 동안 자세한 일정을 잡기 위해 논의를 한 결과가 나왔다. 다른 얘기도 있으니까 다들 잘 들어주기 바란다.” 이팀장은 회의실에 팀원들을 다 모아서는 중대 발표를 했다. 드디어 베타 테스트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만든 문명 온라인이 그 이름 그대로 문명 온라인으로 확정되었다.” “와!” “이야~~~” “휘익~” 혹시나 다른 곳의 입김에 의해 이름이 바뀔까봐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기에 다들 환호했다. “단지....” 이어진 이팀장의 말에 다들 조용해졌다. “타이틀에 부제가 붙었다. 바로 ‘영웅 스키피오’다. 게임 오프닝 영상이 대대적으로 바뀌었다. 예전의 그것이 아니라 우리 게이머 ‘스키피오’의 게임 화면을 적절하게 편집해서 사용하기로 했다. 앞으로 발표될 확장판과 차별하기 위해서 이번에 나갈 문명 온라인의 부제가 바로 ‘영웅 스키피오’로 하기로 했다.” 한바탕 난리가 났다. 진성 옆에 있던 사람들은 아주 과격하게 축하해 주었다. “그리고.... 잘 알고 있겠지만 ‘스키피오’의 인기로 인해 우리 회사 서버가 폭주되어 다운될 위기까지 갔었다. 그 정도로 문명 온라인에 대한 열기가 뜨거웠던 것이지. 여러 가지 설문 조사를 통해서 일단 베타 테스터를 얼마 정도 뽑을 것인가를 결정했다. 내 개인적으로는 만 명 정도를 생각했는데 다른 게임 개발을 맡은 팀장들과 홍보와 총무 등 각기 책임 맡은 사람들 중에 아주 특이하면서 재밌는 의견이 나왔다. 많은 사람의 테스터가 아니라 적은 인원을 뽑고 보통의 게임 타이틀만 보내주는 베타 테스터가 아니라 확실한 게임 홍보를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천 명으로 결정했다. 대신 그 사람들을 위해 다양한 행사를 준비해서 회사 차원에서 그들 자신들이 단순한 테스터만이 아니었구나 라는 마음이 들도록 만들기로 했다. 그래서 지금 회사의 지하에 있는 커다란 창고로 사용하는 곳을 개조하고 있다. 그곳에 베타 테스터들을 모아서 일반에 공개되지 않는 정보들을 나누고 프로 전용 게임기의 탑승 시범도 보일 생각이다. 게다가 홍보팀에서는 베타 테스터들끼리의 대회를 열어서 상위 입상자 100명에게 특별한 여행을 보내주는 이벤트를 계획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처럼 다양한 행사가 베타 테스터들을 위해서 열릴 것이다.“ 모인 사람들은 서로 의견을 나누었다. 게임이 출시되기 전에 그런 행사를 벌이는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게임의 성공에 대한 불투명한 가능성이 그런 투자를 막은 것이다. 자소 소프트는 확실한 대박이 예상되는 문명 온라인에 대해서 다른 게임 개발사와는 다른 차별화 전략을 취한 것이었다. “........ 그리고 문명 온라인의 출시일이 정해졌다. 이미 베타 테스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완성도가 올라간 상태다. 하지만 베타 테스터를 통해 혹시나 있을 버그를 없앤 후에 올 가을인 10월 1일, 정식으로 출시된다.” 사람들은 소리 지르고 난리가 났다. 자신들이 직접 키운 자식과 같은 문명 온라인이 이렇게 햇빛을 본다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오늘 오후부터 정식으로 출시될 문명 온라인에 대한 예약을 받게 된다. 아마도 국내 게임 사상 최고의 예약을 갱신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 동안 수고했다.” “대장님........ 저희들 단체로 휴가 같은 것은 안 갑니까?” 문명 시뮬레이터 담당인 공동진이 벌떡 일어나더니 물었다. 뭔가를 따지는 것을 보니 공동진은 뭔가 아는 것이 있는 것 같았다. “...... 이야기해 주기 싫었는데.... 예상대로 출시되고 대박이 나면 회사에서 우리 팀 전체의 괌 여행을 보장했다.” 이팀장은 나중에 확실할 때 터트리고 싶었다. 하지만 동진이 물으니 어쩔 수 없이 대답한 것이다. “정말입니까? 대장님?” “와..” “여름에도 바다 한번 못갔는데........ 이야...” “대장님! 몇 일 동안 갑니까?” 또 공동진이었다. “......... 일주일 간이다. 이상!” 난리가 났다. 사람들은 오전의 업무가 불가능할 정도로 흥분했다. 다들 삼삼오오 둘러 앉아 괌으로 여행가는 것을 서로 꿈꾸며 얘기했다. 이미 게임은 거의 완성되었고 인기도 이미 검증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휴가는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진성 역시 해외에 나가본 적이 없었고 괌 하면 이국의 휴양지라는 인식에 아주 많이 기대했다. 그런 진성에게 이팀장이 찾는다는 전화가 왔다. 진성은 무슨 일일까 생각하며 이팀장의 방으로 찾아갔다. “진성입니다.” “.... 그래, 어서 들어와.” 진성이 들어가니 이팀장이 있었고 처음 보는 사람 2명이 더 있었다. “스키피오, 인사하게. 이 분은 홍보팀의 대장 홍인철이시고 이 분은 홍보팀 내의 TV광고 쪽 담당하시는 분으로 최진만씨라네. 이분들이 네게 관심이 많거든.” “안녕하십니까? 강진성이라고 합니다.” 홍인철이라고 하는 사람은 작은 키에 아주 말을 잘할 것 같은 인상이었고 나이는 40대는 넘어 보였다. 최진만은 젊었다. 30대 초반의 운동으로 다져진 아주 보통 남자들이 부러워할 만한 몸이었다. “홍보팀의 홍인철이라네.” “홍보팀에서 홍대장님 밑에서 일하는 최진만이라고 합니다.” “저.... 그런데 무슨 일로?” “제가 설명하도록 하죠.” 최진만이 입을 열었다. “이번에 새로 출시가 확정된 문명 온라인에 대한 광고를 만들 생각입니다. 포스터 광고 뿐 아니라 TV 광고도 만들 예정입니다. 이번에 출시되는 타이틀의 부제를 아시지요? 바로 ‘영웅 스키피오’가 아니겠습니까? 또한 인터넷은 문명 온라인의 테스터 게이머에 대한 관심이 엄청나게 높습니다. 이럴 때 가장 광고에 적합한 사람은 바로 강진성씨입니다.” “예?” “제가 온 이유는 바로 진성씨가 TV 광고에 나왔으면 하는 마음에는 온 겁니다. 그리고 대강 컨셉을 잡아 왔는데 한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진성은 이제야 말을 알아들었다. 광고라니, 그것도 TV CF? 당황해서 진성은 이팀장을 쳐다보았다. “내가 보기에는 그리 나쁘지 않아. 네가 잘 생각해서 판단하는 게 좋겠지.” “저.... 저는 TV CF 같은 것은 별로 찍고 싶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마추어 게이머일 때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부담스러웠던 진성이었다. 프로 게이머가 되었어도 이런 TV 출연은 내키지가 않았다. 이팀장이 미리 진성에 대해 이야기를 한 모양인지 최진만은 별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진성씨, 그러면 이제까지 플레이 했던 그 비디오 파일을 편집해서 사용하면 어떻겠습니까?” “그것은 회사에서 결정할 문제가 아닌가요?” 진성은 그 정도라면 회사에서 알아서 할 문제라 여겼다. “하지만 게이머의 초상권 문제가 있어서요. 그렇게 게임 대회도 아닌 것에 저희가 함부로 게이머에 대한 것을 보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진성은 그런 문제가 있을 줄은 몰랐다. 난감했는데 그 때 이팀장이 나섰다. “그 초상권 문제는 새로 광고 계약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분명 프로 게이머로서의 계약에는 초상권은 게이머가 갖는다고 되어 있었으니까요. 그러니 여러 가지로 조사해 보고 적정한 계약을 할 수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몇 가지 더 이야기를 하다가 홍보팀 두 명은 곧 일어났다. 두 명이 나가자 이팀장은 진성을 부르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진성아, 너는 이제 네 마음대로, 가볍게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네가 공식적으로 하는 말은 인간 강진성이 아니라 게이머 스키피오가 하는 말이다.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냐? 그리고 광고나 여러 다른 약속들은 절대 네가 하지 마라. 조금 있으면 네게 매니저가 붙을 것이다. 회사에서 고용하는 사람이니 만큼 그 사람을 통해서 모든 것을 처리하도록 해라. 그렇지 않으면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 알겠냐?” 진성은 이팀장의 이야기를 알아 들었다. 공인으로서 가벼운 말을 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너의 가치는 상당하다. 아마 홍보팀에서 조사를 통해 계약을 맺겠지만 적어도 1년에 2억은 넘을 것이다. 문명 온라인이 출시되고 프로 게임까지 실시되면 몸값은 껑충 뛸 게 분명하다. 하지만 절대로 돈을 좇지 마라. 그러다가는 망한다.” “네, 알겠습니다.” “너는 아직 젊다. 돈은 나중에도 많이 벌 수 있으니까 네 주변의 사람을 챙기고 잘 보살펴라. 네가 스타가 되면 네 주변의 사람들이 많이 다칠 수가 있으니까. 알겠지?” 진성은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부분이었다. “네..” “그래 됐다. 아, 무슨 문제든지 나나 네 아버지라고 극구 주장하는 진팀장을 찾아라. 너보다는 밥 많이 먹었으니까.” “네, 정말 감사합니다. 이팀장님.” “아무튼 네 덕분에 내가 키운 자식인 이 문명 온라인이 더 성공하는 것 같아 기쁘다. 자, 나가 봐라. 아, 그 광고계약건은 내가 살펴본 뒤에 너를 부르마.” 이팀장이 말을 끝마치자 말자 전화가 왔다. 긴 전화인 듯해서 진성은 그냥 나가기로 했다.. “네, 저 나갑니다.” 이팀장은 그냥 손을 휘이 내 저었다. 다음날 인터넷은 문명 온라인의 출시일 발표와 베타 테스터 모집, 정식 문명 온라인 판매 예약 등으로 열기가 뜨거웠다. 자소 소프트는 회사의 홈페이지와는 달리 문명 온라인 전용 홈페이지를 미리 따로 마련해서 베타 테스터 모집과 예약 받는 일, 모두 문명 온라인 홈페이지에서 처리했다. 반응은 대단했다. 3일 동안 베타 테스터를 모집하기로 했는데 하루가 지난 다음날 오전에 집계된 신청자 수는 무려 10만을 넘어섰다. 베타 테스터를 원하는 사람은 대개 게임에 대해 아주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10만이라니. 자소 소프트로서는 아주 긍정적이다 못해 환상적인 결과였다. 게다가 아직 이틀이나 있으니 얼마가 더 신청할지 몰랐다. 더욱 더 자소 소프트를 흥분시킨 것은 예약 건수였다. 역시 첫날이 지난 시점에서 8만 건이 넘어섰다. 하루 만에 인터넷 예약이 8만 건이라니. 베타 테스터를 신청한 사람 대부분이 예약을 했다고 볼 수 있었다. 예약은 출시 열흘 전까지 받고 예약으로 게임을 사는 사람에게는 할인 혜택과 게이머 스키피오의 브로마이드 등 애장할 수 있는 게임 관련 아이템을 제공하기로 한 것이 주효한 모양이었다. 자소 소프트의 문명 온라인 팀은 마치 축제 분위기였다. 열흘 앞으로 다가온 베타 테스팅 기간이 있지만 그렇게 큰 문제는 없을 거라 여겼고 하루가 지난 것 치고는 예상을 넘어서는 폭발적인 반응에 입이 귀에까지 걸렸다. 이팀장은 다른 개발팀장으로부터 미리 축하한다는 전화를 받기도 했다. 진성은 그런 분위기에 조금 들뜨기는 했지만 자신에게 있어 하나의 벽이 된 예전의 그 가상현실 접속 자료를 보고 있었다. 손에 잡힐 듯 하면서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는 그 무엇 때문에 이렇게 인상 쓰며 책상에 앉아 있었다. 오늘은 특히 하나와 저녁 약속이 있어서 뭔가 좀 진척이 있어 기분 좋게 나갔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 휴.. 이거 내가 잘못 파고 있는 건가? 꼭 그렇게 일일이 코딩을 해야만 하는 걸까?... 계속 노가다를 해야 하는 건가?” 자신이 금방 알 정도면 다른 사람들이 이미 개발했을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도 했지만 그렇다고 안 되는 것에 대한 짜증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도리어 더 열만 받을 뿐이었다. 진성은 가상현실 내에서 자신이 생각으로 움직일 때의 시스템과 자신 사이의 오고간 인터페이스를 보면서 점점 더 열만 받고 있었다. 진성은 특이하게 열 받거나 짜증이 날 때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곤 했다. 뚜껑이 열린다는 것은 전혀 없고 대신 서늘할 정도여서 스스로도 신기해했다. 진성은 그런 자기의 성격이 게임에서는 오히려 도움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극도로 흥분하고 단 한번의 컨트롤로 모든 승부가 가려지는 긴장된 순간에 오히려 뜨거웠던 머리가 서늘해지면서 모든 것이 뚜렷하게 보였던 것이다. 바로 그 순간에 상대의 약점이나 급소가 훤히 보였다. 하지만 지금 머리는 서늘했지만 그 가상현실 접속 데이터의 급소나 약점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미궁속으로 빠지는 느낌이었다. 복잡한 머리를 붙잡고 데이터를 봐야 별 소용이 없을 것을 아는 진성은 그냥 퇴근할 준비를 했다. 진성은 하나와 일주일에 한번 정도 만나고 있었다. 처음에는 별 거리낌 없이 가볍게 만날 수 있었는데 최근에는 아주 번거롭게, 어떨 때는 첩보작전을 방불케 하는 스릴이 있을 정도였다. 회사 내에서 급상승한 인기에 맞게 진성이 움직이거나 할 때 사람들의 관심이 쏠렸다. 특히 ‘스키피오 팬클럽’의 젊은 행동대원들은 온갖 카메라를 동원했기에 더욱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저...... 여기에요.” 진성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서 기다리던 하나의 차에 재빨리 탔다. 그런 모습에 하나는 피식 웃었고 진성 역시 자신의 예민한 행동에 어이없어 웃고 말았다. “어디로 갈까요? 진성씨?” “일단 회사 근처를 벗어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요즘 더 극성스러워 졌어요.” “그게 다 진성씨를 좋아하니까 그런 거죠. 사실 저도 진성씨를 이렇게 만날 수 없었다면 카메라폰이라도 사서 사진을 찍었을 걸요. 후훗..” “...... 그래도 회사 안에서 그러니 제가 그 요람 밖으로 나올 수가 없어요.” “그런 것이 바로 스타의 고뇌 아니겠어요?” “거창하게 고뇌라니요? 스타가 고민하는 것은 고뇌인가요?” 진성과 하나는 유쾌하게 웃으며 회사 근처를 벗어났다. 진성은 자신에게 뭔가를 요구하거나 하는 일이 없는 하나가 부담스럽지 않아서 좋았다. 꼭 여자로서 좋다는 것보다는 같이 있으면 굉장히 편했기 때문에 어떨 때는 만나기 전에 설레기도 했다. 진성은 이팀장이 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스타가 되면 주변 사람들이 상처 받을 수 있다는 말. 하나 같은 경우도 자신이 프로 게이머로서 자리를 잡으면 쉽게 만나기 힘들지도 몰랐다. 진성은 하나가 싫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자기 생각만으로 상대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쉽게 다가갈 수는 없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진성은 미리부터 걱정하기는 싫었다. 미리 걱정해서 해결되는 일은 없었기에 지금의 마음에 충실하기로 했다. 진성이 느끼기에 눈앞의 여자, 하나는 마치 청량음료 같았다. 하나는 처음과 달리 아주 부드러운 진성과의 만남에 행복함을 느꼈다. 역시 자기 생각대로 진성은 묘한 매력이 있었다. 게임을 통해 묻어나는 그 묘한 매력이 현실의 진성에게도 있었다. 그런 매력을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이 빨리 알았다는 것에 하나는 더 행복했다. 하나 역시 진성이 점점 더 인기가 높아가고 더욱이 프로 게이미로서 생활을 시작하게 되면 이렇게 만나기 힘들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 매니저까지 생겨서 진성의 옆에 있을 것이다. 회사 여직원이 회사의 얼굴과 같은 존재가 될 사람 옆에서 쓸데없는 소문을 만들 게 가만히 내버려 둘 회사는 없을 것이다. 사람을 만나는 것은 개인의 문제지만 진성과 같은 경우는 특별함을 하나는 알았다. 그런 사실 때문에 하나는 무척이나 속상했지만 결국에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 역시 깨달았다. 그런 진성의 재능을 하나 자신만이 혼자 독차지 한다는 것은 너무 이기적이었다. 하나는 앞으로의 걱정은 말고 지금 순간순간을 나중에 기억하면 좋은 추억이라고 여길 만큼 소중히 하나하나 만들어 가기로 했다. “진성씨, 우리 교외로 나가서 저녁 먹을까요?” “그럴까요? 이번에는 제가 살께요. 매번 얻어먹어서.......” 진성은 몇 번 만나지 않았지만 이제껏 한번도 저녁을 산 적이 없었다. 이제는 미안할 만도 했다. “저는 그 말이 도대체 언제쯤 나올까 했어요?” 하나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예? 그랬습니까? 귀뜸이라도 해 주시지...” “그런 건 기본이에요. 기본....” “그런가요? 하하..” 교외로 나가는 한산한 도로에서 창문을 열고 들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웃으니 회사에서의 복잡한 문제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런 환한 웃음의 진성을 보는 하나의 마음도 따뜻해져 왔다. 드디어 베타 테스터가 정해졌다. 무려 25만 명이라는 사람들이 지원했다. 3일 동안 예약 주문 건수도 18만이 넘어섰다. 자소 소프트는 원래 베타 테스터를 천 명만 뽑으려고 했지만 너무 많은 사람이 지원해서 결국 수를 늘려 오천 명을 뽑기로 결정했다. 그런 결정에 베타 테스터에 지원한 사람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자소 소프트는 오천 명의 사람을 나중에 베타 테스터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벤트를 위해 각각 천 명씩 다섯 조로 나누었다. 자소 소프트는 발빠르게 홈페이지에 당첨된 베타 테스터들의 명단을 공개함과 동시에 ‘문명 온라인, 영웅 스키피오’ 아마추어 버전 게임 타이틀을 발송하기 시작했다. 오천 명의 베타 테스터의 명단이 발표되고 게임 타이틀이 속속 테스터들에게 도착되자 선정된 테스터들은 밤을 새어 가면서 ‘문명 온라인, 영웅 스키피오.’를 플레이하기 시작했다. 컴퓨터로 즐길 수 있는 아마추어 버전이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게임 시스템은 프로 버전과 그리 다를 점이 없었기에 베타 테스터들은 게임에 몰입했다. 8개의 문명이 지원되었지만 그 중에 로마제국이 부제 ‘영웅 스키피오’때문인지 가장 인기가 좋았다. 공식 문명 온라인의 홈페이지에는 베타 테스터들이 올리는 감상이나 문제점에 대한 코너를 따로 마련했다. 자유 게시판과는 달리 게임 타이틀과 동봉된, 각 테스터에 할당된 일련번호로 접속해서 글을 쓸 수 있었기 때문에 베타 테스터의 코너는 문명 온라인에 대한 살아 있는 정보를 느낄 수 있었다. 자소 소프트에서도 그런 측면을 살려 보통의 홈페이지에 접속한 사람도 글을 쓸 수는 없지만 읽을 수는 있게 만들었다. 엄청난 테스터 인원의 지원과 대박을 확신케 하는 예약판매 건수로 인해 이미 인터넷에서 이슈가 되어 버린 문명 온라인에 대한 생생한 정보는 많은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기하급수적으로 퍼져 나갔다. 게임 관련 사이트에서는 성급하게 ‘프리뷰’라는 형식으로 문명 온라인에 대한 기사를 싣기도 했다. 그만큼 문명 온라인은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진성씨, 이것이 저희가 책정한 조건들입니다.” 진성은 이팀장의 호출에 이팀장의 방으로 와 지난번에 봤던 홍보팀의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이팀장은 그 계약조건을 미리 본 모양인지 웃으며 진성에게 눈짓했다. 진성은 홍보팀의 TV 관계자인 최진만이 건네는 서류를 보았다. “....... 1년 전속, 계약금 3억 5천만원........” 진성은 이팀장의 말보다 더 높은 금액에 대뜸 이팀장을 바라보았다. 이런 일이 자신에게는 익숙하지 않았기에 이팀장의 도움을 구했다. “진성아,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무엇보다도 네가 직접 출연할 필요 없이 게임 플레이 화면을 가지고 편집해서 넣는다고 하니까.” “..... 이팀장님이 보시고 괜찮다고 하시면 저도 좋습니다.” 진성은 회사의 상사가 아니라 마치 아들처럼 잘 대해 주는 이팀장의 판단을 믿었다. “... 아, 그럼 계약하시겠습니까?” 최진만은 이렇게 원만하게 계약이 이루어질 줄 몰랐다. 매니저도 아직 없고 친한 사람들이 자소의 직원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뭔가 조정이 있을 줄 알았다. 최진만은 일이 쉽게 풀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진성은 이팀장을 봤고 이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계약하지요.” 이팀장이 보는 가운데 진성은 계약서에 사인을 했고 최진만과 악수를 했다. “이렇게 빨리 계약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일주일 정도 뒤에 어느 정도 광고가 완성이 되면 그 때 또 들리겠습니다. 그럼 이만.” 최진만은 이팀장의 방을 나섰고 진성 역시 이팀장에게 인사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진성은 이팀장의 방에서 나와서 요람으로 걸어가면서 생각에 잠겼다. ‘음.... 프로그래머로 연봉 2천만원, 프로 게이머로 계약금 2억에 연봉 1억, 게다가 이제는 광고 계약으로 3억 5천이라. 6억 7천만원인가? 휘유.... 너무 쉽게 돈을 버는 것은 아닌가?’ 진성은 어려운 생활도 알만큼 알았기에 6억 7천만원이라는 돈의 크기 역시 알았다. 자신이 쓰기에는 너무 큰 돈이었다. 지금까지 친구인 현준이 집에 같이 살면서 미안한 마음으로 일을 시작했지만 자신이 이렇게 빨리 그리고 많이 돈을 벌 수 있을지 몰랐다. 현금을 가지고 다니기 귀찮아 신용카드 하나 만들어 저녁 식사 정도로 돈을 쓴 경우를 빼면 돈은 고스란히 통장에 있음을 알았다. ‘너무 쉽게 돈을 버는 것 같다. 내가 하고 싶고 잘하는 것을 하는데 그게 돈이 되는 일이라니... 내게 아주 큰 행운이 있는 걸까?’ 진성은 요람으로 가는 길에서 발길을 돌려 진팀장의 사무실로 걸어갔다. “진성입니다. 시간이 되시는지?” “아, 진성이구나. 오랜만이다. 들어와라.” 회사에서는 오랜만에 보는 진팀장은 진성이 들어오자 반갑게 맞이했다. 현준과 더불어 진성이 같이 느끼는 점은 회사에서의 진팀장과 집에서의 현준 아버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분명 같은 사람인데 실제로 회사에서의 진팀장과 퇴근 후의 현준 아버지는 달랐다. 마치 게임 내의 진성과 게임 밖의 진성처럼. “어쩐 일이냐? 그 쪽 일은 거의 마무리 되어 가고 있나?” “이제 곧 베타 테스터들이 올려준 정보나 문제들을 정리하고 마무리만 하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럴 테지. 그 친구 입이 귀에 걸려 있겠군. 너희 팀, 괌에 놀러 간다고 하든데?...” “이팀장님 말에 일주일 정도 간다고 하든데요...” “일주일이라.... 음.... 우리 일은 언제 끝나려나..... 그래, 어쩐 일로 왔냐? 네가 그냥 놀러 왔을 리는 없을 테고.... ” 진팀장의 로플 프로젝트는 아직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너무 많은 시간과 예산이 들어서 지금 현재 새로운 방법을 찾지 못하면 처음의 기획을 바꿔야 할지도 모를 위기였다. 하지만 진성 앞에 있는 진팀장의 얼굴에는 그런 걱정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저.... 사실은..... 오늘 홍보팀과 광고 계약을 했습니다.” “그래? 얼마에 계약했나?” “....... 3억 5천만원입니다.” “오...... 좋은 조건인데? 1년이겠지?” “네....” “아주 좋은 조건인데 왜 무슨 걱정이라도 있나?” “........ 제가 너무 돈을 쉽게 버는 것 같아서요... 처음에 일을 시작한 것은 사실, 친구 집에 너무 폐를 끼치는 게 아닐까 해서 나 스스로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에서 시작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내가 할 수 있고, 즐기는 일로 너무 쉽게 더구나 그렇게 많은 돈을 손에 쥐니까 조금 두렵고 떨려서요....” “....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구나.” 진팀장은 잠깐 말을 끊고 생각을 하더니 진성의 눈을 바라보며 부드럽지만 가볍지 않은 목소리로 얘기를 시작했다. “진성아, 일단 네게 먼저 말하고 싶구나. 너는 우리 가족이야.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나는 네 아버지다.” 진성은 그런 진팀장의 말에 뭔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진팀장이 손을 올려 진성의 말을 막았다. “내 얘기를 다 들어보고 얘기해라. 처음에 네가 우리 집에 왔을 때, 나와 내 아내는 아주 많이 놀랐었다. 왜냐면 그 녀석 현준이 아주 어릴 때를 제외하고는 친구를 데려온 적이 없었거든. 그런데 갑자기 한 녀석을 데려오더니 같이 살 거라고 하자 아주 기가 막혔지. 하지만 기분도 좋았다. 네 사정을 듣고는 현준이 녀석이 사내답다고 느꼈으니까. 그 후로 시간이 많이 흘렀지. 네 사정을 알게 되고 어려움이 있을 텐데도 손을 벌리기는커녕 도와준다는 것도 마냥 사양하는 네 모습도 아주 마음에 들었지. 어느 순간인가 기억할 수는 없다. 마치 봄의 숲이 그 연초록의 색깔을 벗고 짙푸른 여름옷을 그야말로 한 순간에 입듯이 나 역시 네가 한순간에 아들로 느껴졌다. 그것은 절대로 네가 성격 좋고 내 마음에 들고 뭔가 내게 이익이 있겠구나 생각이 들어서가 아니다. 나 자신,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명예를 걸고 맹세한다. 너는 내 아들이다. 네가 뭐라고 해도 소용없다. 아들이 아버지를 인정 하지 않아도 아버지는 아버지다. 나는 네가 그 동안의 외로움으로 네 주위에 쳐 버린 벽을 이제는 조금씩 허물었으면 좋겠다. 내가 살아봐야 앞으로 30년 정도면 많이 살았다고 할 수 있지. 그 동안에 아들 셋 키우며 아주 보람 있게 살고 싶다.“ 진팀장은 할말을 다 했다는 듯 조용히 놓여 있던 차만 조금씩 마셨다. 진성은 진팀장의 진심이 서린 말에 바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돌아가셨지만 자신에게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직도 가슴에 살아 있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있었다. 진성 자신이 진팀장의 말을 받아들이면 가슴 속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배신하게 되는 꼴이라 믿었다. 진성은 진팀장에게 어렵지만, 힘들지만 불가능하다고 말하려고 했다. “진성아, 나는 네가 내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 역시 언젠가 너의 모습을 보며 자랑스러운 아들이라고 느꼈으면 한다.” “아버지, 어머니....... 왜 저를 버리고 가셨어요?” 이웃과 친구들의 도움으로 장례를 치른 진성은 집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품을 보며 오열을 터트렸다. 부자는 아니었고 오히려 가난하다고 할 수 있는 집이었지만 어려움과 외로움을 어릴 때부터 알았던 진성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가정을 아주 소중하게 여겼고 그래서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화목한 집이었다. 그런데 한순간에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 진성은 믿을 수도 없었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도무지 이 현실이 용서가 되지 않았다. 먹지도 않으면서 텅 빈 집에 홀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진성은 일어나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갑자기 들이닥친 혼자 있다는 외로움은 화목하고 단단하게 뭉쳐 있던 가정을 잃은 소년에게 버거웠다. 진성은 부모님의 방에 있는 서랍들을 다 뒤지고 책꽂이도 다 뒤졌다. 사진첩이란 사진첩은 모두 다 꺼냈다. 반 미치다 시피 하면서 온 집을 뒤집었다. 진성은 어머니, 아버지의 사진을 보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한 장, 한 장 정성스럽게 만지며 진성은 마치 사진의 그림을 머리 속에 넣으려는 듯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사진을 다 본 진성은 평소 부모님들이 쓴 글들을 읽기 시작했다. 두 분 다 고아 출신이라 유독 외로움을 많이 탔기 때문에 진성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특별한 방법인 편지로 서로의 사랑을 표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진성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연애 시절 편지부터 최근까지의 글들을 찾아냈다. 천천히 한 단어, 한 줄, 혹시나 그냥 넘어갈까 다시 돌아와서 읽기도 하면서 진성은 편지들을 읽어 나갔다. 아버지가 처음으로 어머니를 본 날의 그 감동을 쓴 일기, 어머니와 첫 데이트에서 쭈뼛거리고는 자신의 자취방으로 돌아와 자책했던 일, 많은 편지를 보내고 나서 처음으로 어머니에게서 온 편지를 받고 너무 기뻐 일기를 3장이나 쓴 날도 있었다. 진성의 눈앞에는 젊은 날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아 있었다. 눈물이 났다. 어머니의 글도 있었다. 첫 데이트에서 아버지가 어떻게나 말을 더듬든지, 게다가 어머니가 원하는 부드러운 면은 하나도 없는 투박한 아버지, 만난지 일년이 되었는데 아버지가 그것을 기억하지 못해서 아웅다웅 다퉜던 일...... 진성은 흐른 눈물이 뺨에서 마르기도 전에 웃었다 울었다를 반복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다른 일기와 그냥 생각을 적은 메모들은 아주 많았다. 진성은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보물인양 아주 조심스럽게 읽어 나갔다. 자신에 대한 글이 나왔다. 아들이 태어났다는 말에 너무 기뻐서 동네 한바퀴를 전혀 힘든 줄 모르고 뛰었다는 아버지, 어린 아들의 엄마라는 말에 기뻐서 눈물을 흘렸던 어머니. 진성은 끝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러다가 진성은 아버지의 결혼 전 글을 발견했다. “나는 정말 나 자신을 저주했고 나를 버린 아버지와 어머니를 저주했다. 키우지 않을 거라면 낳지도 말지. 왜 이렇게 나를 낳아서 이렇게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게 했는지... 오랫동안 나를 저주하고 세상을 저주하며 살았다. 하지만 나는 나 자신을 위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용서하기로 결심했다. 증오도 적지 않았지만 나를 사랑해 주는 세상의 단 하나뿐인 내 아내가 될 사람을 위해 나는 용서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증오하고 잊지 않는다면 내 속의 그것들이 나를 파먹고 내 가족들도 파먹을 것이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그것 뿐이다.“ 다음 글은 결혼하고 진성, 자신이 태어난 뒤의 글이었다. “...... 지금 옆에서 아내가 내 아들 진성에게 젖을 먹이고 있다. 아들의 크는 모습도 보고 싶지만, 세상이 이대로 멈춰도... 난.. 전혀 불만 없다. 행복하다. 내가 내 속의 있어서는 안 되는 것들을 빨리 버리고 포기했다는 것에 감사한다. 내 아들 진성. 진성에게 나는 따뜻함만을 물려주고 싶다. 그 아들이 나를 기억할 때, 정말 자랑스러운 아버지로, 내가 진성을 키운 후에는 정말 자랑스러운 아들이라고 느꼈으면 좋겠다.“ 진성은 아버지의 글에 펑펑 울었다. 힘든 일에도 웃으시는 아버지, 어릴 때 고아였다는 것은 알았지만 아버지의 고통을 몰랐던 진성은 더욱 더 서럽게 울었다. “........... 그 아들이 나를 기억할 때, 정말 자랑스러운 아버지로, 내가 진성을 키운 후에는 정말 자랑스러운 아들이라고 느꼈으면 좋겠다............” 진성의 마음속에 아버지의 글이 박혔다. 다시는 지워지지 않을 정도로. 진성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런 자랑스러운 아버지 앞에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넘어가지 않는 밥을 넘기려고 애썼고 사고 당사자를 원망하는 마음도 버렸다. 진성은 진심으로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기 원했다. 진성은 잠깐 옛날 생각을 했다. 눈앞의 진팀장이 얘기한 그 말은 바로 자신을 그 절망에서 건진 아버지의 유언과도 같은 말이었다. 비록 아버지가 직접 남긴 유언은 아니었지만 진성에게는 정말 중요한, 진성 자신만의 비밀이며 자신을 떠받치는 기둥이었다. 그런데 그 말이 진팀장의 입에서 나오자 그렇지 않아도 옛 생각에 울컥한 진성의 눈에는 두 줄기 맑은 눈물이 아무런 소리도 없이 흘러내렸다. 진팀장은 놀랐다. 평소 생각했던 말을 기회가 되었다 싶어서 어렵게 했는데, 진성이 조용하다 갑자기 눈물을 주르르 흘리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성아..........?” 눈물로 눈앞이 흐려진 진성은 순간적으로 아버지를 보았다. 자신에게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어 달라는 아버지를 보았다. 진성은 한쪽 손을 들었다. “.......... 아버지...?......... 아버지!”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진성은 결국 가족으로서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도저히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를 생각하니 그런 불효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진성은 이제까지 빚을 져서 언젠가는 갚아야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진짜 자신을 이해해 주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으로 현준과 현준의 가족을 받아 들였다. 어떻게 보면 법적으로,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라 부르는 것을 제외하고는 가족이 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또한 진성은 스쳐 지나 독립해야할 곳이 아니라 자신이 머물 자리가 있는 곳으로 현준의 집을 마음속 깊이 인정했다. 진성은 보이지 않던 하나의 장애물이 사라지자 집안에서 점점 눈에 띄게 적극적으로 변했다. 현준의 동생인 현석이와도 이야기를 많이 나누기 시작했고 현준의 어머니와도 식후의 차 한 잔 정도는 부담 없을 정도였다. 그런 진성의 모습에 현준의 아버지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자신의 섣부른 판단으로 아들을 잃을까 걱정했던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또한 진성은 현준 아버지와의 상의를 거쳐 자신이 가지고 있던 돈 중에 진성 자신이 필요할 정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현준 아버지와 거래하는 투자신탁에 모두 맡겨 놓기로 했다. 진성 자신도 아직 돈에 대해 걱정하고 관리할 나이는 아니라 생각했다. 진성은 프로 게이머로서의 준비도 착실하게 했다. 자신의 닉네임인 스키피오와 어울리는 로마제국 뿐 아니라 나머지 7개의 문명인 그리스, 중국, 이집트, 아틀란티스, 인도, 한국, 일본 역시 아마추어 버전으로 익숙해지려고 노력하고 그 뒤에 프로 버전의 게임기로 마무리를 했다. 진성이 생각하기에 한국과 일본이라는 문명은 문명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마야나 잉카 문명이 더 나을 것이지만 아무래도 한국과 일본의 게이머를 의식한 것이라고 봐야 했다. 베타 테스터들 역시 문명으로서는 약간 억지가 있지만 한국 게이머로서 한국을 선택해서 플레이할 수 있다는 것은 또 다른 매력이었다. 진성은 문명 온라인이라는 게임이 클리어 불가능함을 알았다. 그 많은 경우를 일일이 다 분석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한 케이스에 분석을 했다고 하더라도, 다음의 똑같은 문명과 시기라 할지라도 같은 지도가 나올 확률은 많지 않았다. 문명 온라인은 원래의 문명이나 나라의 위치와는 달리 지도가 선택되기도 했다. 세계 지도 전체에 문명이 흩어져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현실성을 갖기 위해 중국과 이집트의 전쟁은 그 거리로 인해 힘들었다. 때문에 지구상에 없는 새로운 지도나 아니면 두 문명의 장소 중 하나로 무작위로 결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지형이든 원래의 문명의 성격은 그대로 이어졌다. 진성은 때 아닌 역사 공부를 해야만 했다. 문명 간의 밸런스를 위해서 많은 부분에서 그 전력과 생산 능력이 조정되었지만 기본적으로 문명의 가장 대표적인 스타일과 전략 등은 그대로 이용되었다. 그런 것은 기본적으로 숙지하고 있어야 했다. 진성 역시 그런 것에는 예외가 아니었다. 어느 정도의 분석과 실전을 반복했지만 진성은 무언가 부족함을 느꼈다. 매번 다른 상황에 다른 지도, 상대는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게이머, 모든 게 불확실했다. 진성은 현준과 공동진과 번갈아 가면서 게임을 했지만 생각만큼 승률이 나오지 않았다. 10번에 3번은 졌다. WIS로 게임을 한다면 현준에게 10번이 아니라 50번에 3번 정도 질 정도였는데.... 진성은 자신에게 뭔가 부족함을 느꼈다. 그 정도면 실제 중요한 경기에서 선택되는 조건에 따라 상대를 압도한다고 볼 수 없었다. ‘조건에 상관없이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진성은 고민을 거듭하던 중에 동양과 서양의 전쟁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진성아, 정말 프로 게이머 하기도 정말 어렵다. 학교 다닐 때도 이런 책은 손도 대지 않았는데 게임 하는데 이런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니... 나 같은 사람은 프로 게이머 꿈도 못 꾸겠다.” 현준은 자기 앞에서 공부하는 진성을 살며시 건드렸다. 아르바이트생인 테스터로서 역시 자신도 공부해야 했지만 진성과 달리 압박감은 없었다. 진성은 한 번 날카롭게 째려본 후에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렸다. “이거 겁나서 말도 못하겠네. 진성아, 조금 있으면 점심인데 밥 먹으러 가자. 배 안 고파?” 계속 되는 현준의 장난에 진성은 인상을 찡그렸다. “야! 진현준!” “이크, 알바생은 사라져야지.” 현준은 과장되게 겁먹은 표정으로 한번 어깨를 으쓱하더니 요람을 빠져 나갔다. 진성은 도와줄 생각은 없고 장난만 가득한 현준의 행동에 화가 났다. 그렇다고 친한 친구에게 그런 일로 정색해서 화를 내는 것도 할 짓이 아니었다. 진성은 가만히 앉아서 화를 가라앉히며 하던 일에 몰두했다. 현준은 진성이 부러웠다. 이미 아르바이트생으로서의 자신은 일은 끝났다. 로플팀의 팀장의 아들이며 프로 게이머 진성의 친구라는 배경으로 아직 문명 온라인 팀에서 버티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현준은 화가 날 정도로 진성이 부러웠다. 예전의 WIS 아마추어 대회에서 우승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팬 사이트가 생길 때도 부러웠지만 지금은 그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현준은 진성이라는 개인에 대해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원래 게이머에 관심이 있었던 현준은 테스트를 하면서 문명 온라인과 같은 매력 있는 게임 속에서 분,초를 다투는 프로 게이머의 세계를 더욱 더 동경했다. 아예 몰랐으면 모르되, 같이 먹고 같이 지내는 옆의 친구가 그 세계로 진출한다니 기분 좋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자신의 실력이 프로 게이머를 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안 되는 줄 알았기에 더 화가 났다. 자신에 대해 쌓인 화가 조금씩 밖으로 드러난 것이다. 평소의 진성이라면 뭔가 현준의 이상함을 바로 알았겠지만 진성 역시 쫓기는 마음으로 프로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유롭지 못했다. 아버지에게 부탁하면 아버지의 성격에 가능성은 적더라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현준은 자신의 실력으로 해결하고 싶었다. 현준은 하고 싶은 것은 눈앞에 있는데 자신의 한계가 느껴져 안타까웠다. “현준아, 시간 있으면 나와 얘기 좀 하자.....” 진성은 골몰히 혼자 고민하다가 친구인 현준에게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뭔데? 네가 모르는 것도 있냐?” 약간 삐딱선을 타는 현준의 말에도 진성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나를 천재로 생각했냐? 나는 진짜 스키피오가 아니라고. 요즘 계속 연습을 해도 그다지 승률도 올라가지 않고 여러 가지로 공부를 하기도 했는데 그런 것으로는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고... 정말 답답하다. 이렇게 나가다가는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해야 될 것 같은데 그렇게 하면 꼭 이긴다는 보장도 없는데다가 몇 번 게임하면 상대 역시 알아 버릴 테니까 그것도 좋지 않고.... 정말 대단한 게임이라고 느낀다. 이렇게 게이머에게 절망감을 주다니.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빠른 판단력과 상황판단이 게임의 승패를 좌우하는데 그 경우가 너무 많아 오히려 제 꾀에 넘어가는 경우도 많다. 도대체 어떻게 하지?“ 현준은 진심어린 진성의 말에 비아냥거릴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진성의 말에 뭔가 명확한 해결책을 줄 수도 없었다. 순간 뭔가 떠오른 현준은 진성에게 말했다. “진성아, 문제는 너무 경우가 다양하다는 거지?” “너무 많아. 상대가 어떤 전력을 가질지 알 수가 없어. 심지어 문명의 종류를 정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야. 그러면 가장 일반적이고 모범적으로 가야 되는데 만약 상대가 극단적으로 나와 그것이 우연히 내가 취한 전략의 극성이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패하는 거지.” “음.... 다양한 상황에서의 전략이라..... 진성아, 너 혹시 병법은 봤냐?” “병법? 그건 왜?” “솔직히 나 고백하는데 나도 문명 온라인 잘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애를 썼거든. 동진 형에게도 물어보고 너처럼 전쟁사도 뒤적거렸지. 네 경우는 모르겠지만 내게는 정말 소용이 없더라. 그래서 마지막으로 찾은 것이 바로 병법이었지.” “그래?” “내가 겉핥기로 본 병법은 상대의 전략의 다양함에 따라 자신의 전략을 바꾸는 것도 하나의 핵심이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자신의 전력과 상태를 빨리 파악해서 역량을 키우고 난 다음에 상대를 자신의 의도에 휘말리도록 만드는 방법이야. 그게 바로 지지 않는 법이라고 하더라고.” “뭐? 지지 않는 법?” “잘은 모르지만 상대가 극단적으로 나오면 분명 그 내부는 허술해질 수밖에 없지. 그런 어떤 면으로 보면 미친 상대를 한번에 무찌른다는 것은 일종의 자만심일 것 같은데... 대신 그 상대가 쳐들어 왔을 때, 상대에게 지지 않는 전쟁을 하면 되는 거지. 그렇게만 하면 상대가 자멸할 테니까.” “아.....” “게다가 이기는 전쟁은 단기간에 끝내어야 하고 제일 중요한 것은 정보, 거기에 기세가 더해지면 무서운 위력을 발하지. 물론 구체적인 전투의 작전은 물처럼 유연해야겠지만.” 진성은 현준의 말을 듣자 뭔가 머리가 시원해짐을 느꼈다. “와.. 현준이 너 대단하다. 요즘 테스트 일이 없어 그냥 노는 줄 알았더니 언제 그런 것을 다 준비했냐? 너, 프로 게이머 해도 되겠다.” 진성의 감탄 섞인 칭찬에 현준은 기분이 좋았지만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고는 씁쓸해졌다. “..... 그러면 뭐해? 한심한 알바생인데...” 진성은 진심으로 생각하고 말했다. “뭐? 알바생? 나는 네 말을 듣고 눈앞이 환해졌다니까. 너도 나 못지않게 문명 온라인에 대해서 잘 알잖아? 못할 것도 없지. 네게 부족한 컨트롤은 내가 어느 정도 도와줄 수 있고 승부처에서의 판단이나 직감은 게임을 하면 어느 정도는 발전하니까. 내가 보기에 너 정도면 상당한 프로 게이머가 될 수 있을 듯한데.... 야, 진현준, 너 나와 같이 프로 게이머 하자. 너 혼자 학교 다니기 싫지? 그렇지?” 진성은 이미 자신은 대학을 휴학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그리고 진성은 현준도 같이 다니고 싶었다. 현준은 정색을 하며 같이 프로 게이머 하자는 진성의 말이 너무도 고마웠다. 자신이 아는 진성은 이런 말을 꾸며서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진성의 진심에 현준은 자신의 옹졸함이 부끄러웠다. 진성이 찬성한다고 해서 프로 게이머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진성의 마음을 알게 된 현준은 너무 기분이 좋았다. 만약 프로 게이머가 되지 못한다고 해도 매니저나, 그것도 안 되면 매니저 보조라도 해서 진성을 따라다닐 생각이었다. “잠깐만 기다려라.” 진성은 부리나케 요람을 나가버렸다. “그러니까 네 말은 현준이 그 녀석도 프로 게이머의 재능이 있다는 얘기냐?” “네, 맞습니다. 이팀장님.” 진성은 요람을 뛰어 나와 곧바로 이팀장의 방으로 들이닥쳤다. 그리고 흥분된 목소리로 현준과의 대화와 현준이 가능성이 있는 이유를 말했다. 그 중에는 WIS 아마추어 국내 대회 5위라는 현준의 게이머로서의 성적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이팀장은 진성의 얘기를 들으며 현준이 게이머로서 국내 대회에서 5위까지 올랐다는 말에 약간 놀랐다. 그렇게 인기 있는 게임의 아마추어이지만 게임 열기가 상당히 높은 국내에서 5위라면 인정해야 했다. “네 판단에는 어떤 것 같냐? 친구로서가 아니라 냉정하게 프로 게이머로서...” “사실, 제가 이렇게 급하게 찾아온 것은 조금 전 말씀드린 대로 전략과 관련된 고민에 대해서 아주 명쾌하게 현준이 해결해 버린 것 때문입니다. 그 정도의 이야기라면 누구나 할 수 있고 게임에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지만 실제 게임을 하는 사람으로서 그런 넓은 생각은 쉽지 않습니다. 저만 해도 책더미에 쌓여서 한참이나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순간의 판단력도 재능이지만 저런 넓은 시야도 재능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호, 그래? 순간의 판단력과 넓은 시야라... 그러면 둘이 합쳐지면 무적이 되겠군..” “네?” 진성은 이팀장의 말에 기뻤다. 하지만 그것은 일렀다. “단, 현준이 다른 사람들이 납득할 만한 실력이 되었을 경우에. 나는 바로 프로 게이머로 올려도 된다고 생각하지만 회사는 혼자 사는 곳이 아니거든. 게다가 현준이 아버지가 로플팀장이니까 더욱 조심해야지. 안 그래?” “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잘 되면 우리는 쉽게 두 사람의 게이머를 확보한 셈이니까. 스키피오, 네가 현준이에게 좀 도움을 줘야 할 것 같은데...” “현준은 저의 단 하나뿐인 친구입니다.” “그래.. 친구.. 맞아.. 친구 좋지.... 자, 나가봐.” 이팀장은 나가는 진성을 보며 따뜻한 웃음을 지었다. 현준은 진성이 너무 고마웠다. 자신은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진성이 가지고 온 소식은 귀를 의심해야할 정도였다. 다른 사람이 인정할 만한 실력이라는 단서가 붙었지만 현준은 가능성이 생긴 것만으로도 너무 기뻤다. 현준은 너무 고맙고 너무 부끄러워서 자신이 괜히 틱틱거리고 훼방을 놓은 이유를 말하려고 했는데 진성이 막았다. 그 다음에 이어진 진성의 말에 현준은 말을 잇지 못했다. “다 잘 해결 되었으니까 걱정마, 그리고 이제 이렇게 여유 있는 시간은 우리에게 없다. 너도, 나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돼.” “........” 진성과 현준은 그 때부터 시간을 쪼개어 요람의 테스트 연구원들이 있는 낮의 일과 시간에는 실제로 전용 게임기를 통해 게임을 하면서 서로의 장,단점을 지적했고 저녁 식사 후에 한가해진 때는 요람의 사무실에서 밤을 새면서까지 병법과 전쟁사를 통해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고 둘만의 비밀 오더도 만들었다. 오더라도 해 봐야 실제 게임을 하고 나면 계속 고쳐졌지만 그런 수정을 하면서 얻은 살아 있는 많은 전략들은 여러 권의 노트에 빼곡히 적혀 있었다. 또한 그 때부터 실제로 게임을 하는 테스터가 한 명 더 늘었다. 꽤나 바빠진 현준 덕에 저녁식사를 살 필요가 없어진 덕만이 요람으로 들어와 테스터의 역할을 잠시 맡기로 했다. 이팀장의 배려였다. 원래 현준은 비록 어느 정도 테스트가 끝나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기계 테스트와 성능 테스트를 위한 일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덕만이 하는 바람에 현준은 하루 종일 진성과 같이 있으면서 서로의 장점을 흡수해 가기 시작했다. “어이, 현준아. 너 요즘 뭐 몸에 좋은 보약 먹어? 어떻게 너한테는 특별히 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데도 어느새 보면 승부의 흐름은 넘어가 버렸거든. 어떻게 10번을 해도 2번을 이기기 힘드니. 역시 진성과 붙어 있어서 그런가?” 현준은 공동진의 마지막 진성을 치켜세우는 말에도 너무 기분이 좋았다. 자신에게 별다른 개성이 없어서 걱정하다가 어제 저녁에 진성에게 고민을 털어 놓았는데 진성은 정말 아무 느낌이 없다가 마치 가랑비에 물 젖듯 상대를 이겨버리는 것이 현준의 개성이라고 했다. 그런 말을 동진에게 또 들으니 진성의 말대로 자신에게도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프로 게이머로서 가져야 할 개성이 있다는 확신에 기분이 날아갈 듯 했다. 아직 진성에게는 3번 하면 2번은 지지만 그래도 상당한 실력인 동진에게는 승률 80%를 넘어섰다. 그런 객관적인 결과로 현준은 문명 온라인의 프로 게이머로서 계약도 했다. 진팀장 역시 자신에게 단 한마디도 않고 현준 스스로 그런 길을 개척했다는 것에 아주 만족해했다. 진성의 계약보다는 액수가 적은 계약금 오천만 원에 연봉 오천만 원이었지만 현준은 적은 돈도 아니었고, 그보다는 프로 게이머의 세계에, 그리고 진성과 같이 그 세계에 들어왔다는 사실이 더 기뻤다. 진성의 실력은 그야말로 일취월장했다. 상황파악과 컨트롤의 정확성, 승부처에서의 대담함은 이미 정평이 나 있었던 진성에게 넓은 시야와 흐름에 대한 이해가 더해지자 무섭게 변하기 시작했다. 현준이 제시한 병법에 대한 이해를 위해 진성은 먼저 손자병법을 선택했다. 현준이 말한 지지 않는 전쟁, 불패의 전략에 대한 것도 손자병법에 있었다. 손자병법을 탐독한 진성은 그 책이 거의 2,500년 전에 저술되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아주 탁월한 전쟁과 전략에 대한 책이었다. 손자의 병법은 전쟁을 자신의 흐름으로 돌리기 위한, 자기의 의도대로 움직이게 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진성은 그런 추상적이었지만 정말로 중요한 명언을 천천히 하나하나 실제 게임을 통해서 자기 것으로 소화시켜 나갔다. 게다가 진성은 한 발짝 더 나가서 고대의 병법 백과사전 격인 육도(六韜) 역시 독파했다. 특정 상황에 대한 대처법을 마치 객관식처럼 선택해서 사용할 수 있는 병법이 육도였다. 진성은 손자에 심취하면서 육도 역시 참고로 했다. 또한 육도를 보충하는 삼략까지 팔을 뻗었다. 진성은 삼략에서 유가 강을 제압하는 것과 인재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는 바로 현준과의 게임에서 언변의 달인인 로마의 변론가 카토를 이용해 전쟁 하나 치르지 않고 현준의 사회를 혼란시켜 항복하게 만들었다. 그 게임에서 진성이 한 것은 전쟁을 위한 준비보다 내치에 힘을 쓰고 정치가와 변론가들로 하여금 상대인 그리스의 도시국가 시민들에게 혼란과 로마 제국과의 전쟁은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임을 끊임없이 알렸다. 일종의 정보전이었다. 그런 일에 바로 진성 자신이 아니라 카토에게 어느 정도 일임을 하고 진성은 카토에게 자신의 카토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보여주었고 그로 인해 결과적으로 유가 강을 제압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 문명 온라인에서의 진성은 그야말로 너구리, 호랑이. 하이에나 등 다양하게 변했다. 게임 초반은 아주 비슷하게 나가는 듯 했지만 어느 순간엔가 늙은 너구리처럼 함정과 음모로 상대를 농락하기도 했고, 전선을 넓게 확대해서 상대의 약점을 자신의 강한 전력으로 일격에 부숴 버리는 호랑이가 되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는 철저하게 상대의 약점을 게릴라전을 통해서라도 물고 늘어지는 전략을 사용하기도 했다. 진성에게 30% 정도의 승률은 있었던 현준은 자신이 공동진에게 거의 지지 않게 될 무렵, 진성에게 승률이 10%도 채 되지 않음을 알았다. 특히 진성이 나서지도 않고 삼략의 병법을 실험하기 위해 사용한 카토라는 인공지능 캐릭터에게 일격을 맞고 지자 한동안 게임 할 맛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경쟁심보다는 그런 진성에게 하나라도 더 배우기를 원했다. 그런 현준의 마음은 아주 변화가 선명하고 절묘하며 보는 사람의 눈을 붙들어 두는 진성의 게임과는 달리 밀물이 밀려오듯 언제인지 모르게 상황이 끝나버리는 현준 자신만의 게임 운영 방법을 탄생시켰다. “진성아, 요즘에는 너한테 이길 수가 없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길 수가 있냐?” 현준은 농담을 섞어 푸념처럼 진성 앞에 늘어놓았다. 진성에게 꼭 답을 구한 것은 아니었지만 반응은 딴 곳에서 왔다. “딱!” “앗.. 누구? 동진 형, 왜 때려요?” “이 녀석아, 내가 네 녀석한테 지금 26연패를 하고 있는데 네 녀석이 진성에게 그 딴 소리를 할 자격이 있냐?” “........ 저는 프로 게이머잖아요.” “그래도 이 녀석아, 한번은 져 줘야지 게임 할 맛이 나지, 그렇게 연패를 하는데 게임하고 싶겠냐? 이 녀석은 말을 안 하면 져 줄 생각을 안 한다니까? 진성은 그래도 10번에 1번은 지는데....” “네? 진성이가 형한테 진다구요? 말도 안 돼요.” “야! 네가 그렇게 확인사살 안 해도 안다. 진성이 실력으로 지겠냐? 지도 사람이니 내게 계속 이기기가 미안해서 그런 거지. 네 녀석하고는 다르다. 이 놈아.” “네?” 현준은 그 얘기를 듣고 혹시 자기에게도 한번 지는 것이 자신의 실력보다는 진성의 배려가 아닐까 생각했다. 현준은 그것이 진성의 배려라고 해도 기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오히려 그런 막강한 진성에게 뭔가를 배울 수 있으리라 여겼다. 잠깐 나갔던 진성이 들어오자 현준은 바로 물어 봤다. “진성아, 혹시 너..... 요즘에 나한테도 져 주는 거냐? 별로 기분 나쁘지 않으니까 사실대로 얘기해라.” “뭐? ........아............” 얼버무리려는 진성을 보고 현준은 확신했다. 현준은 속았다는 느낌보다 자신보다 한참 위에 올라가 있는 진성의 실력에 감탄했다. “너.... 언제 그렇게 됐냐?” “아.. 요즘에 몇 가지 시험하고 있는 게 있어서 좀 승률이 되는 것 같은데..... 대충 시험은 했으니까 같이 한 번 해 보자.” 진성은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신이 병법을 오랫동안 생각하고 게임에 하나씩 적용하면서 얻은 것들을 현준에게 하나도 남김없이 가르쳐 주었다. 또 진성이 알게 된 것은 문명 온라인이라는 게임의 바탕이 되는 인공지능이 바로 동양의 병법에 상당히 맞게 설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유난히 전체와 조화를 강조하는 병법들이 게임에 잘 먹히자 궁금한 진성이 이팀장과 김성철 프로그램 팀장에게 시간을 들여서 알아낸 사실이었다. 현준은 그런 진성의 배려에 너무 고마웠다. 자신이 처음에 진성에게 말한 병법은 사실 병법의 총론과도 같아서 잘 사용하지 않으면 사용하지 않은 것보다 못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다시 자기에게 돌아온 것은 진성이 실제 문명 온라인을 하면서 정리한 것들이어서 현준은 검증된 방법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현준이 점점 그런 방법들을 흡수하기 시작하자 공동진은 현준과 게임할 때마다 휘둘리는 느낌을 받게 되었고 진성 역시 그런 현준에게 일방적으로 이기기 힘들었다. 강하고 약하고를 떠나서 상대를 너무 잘 아니까 그런 현상이 벌어졌다. 8월 말, 진성과 현준은 쥬신 대학을 오랜만에 찾아서 이제까지 미루었던 휴학 문제를 마무리 지었다. 1년 동안 휴학하기로 하고는 여러 가지 준비해야할 것들을 모두 해서 깔끔하게 일을 처리했다. 그 즈음에 문명 온라인의 해외용 아마추어 버전이 완성되었다. 알파 테스트만 거쳤지만 언어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국내용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에 별다른 테스트 계획은 없었다. 국내의 베타 테스팅이 완료되면 국내 출시일에 맞추어 동시에 발매가 될 것이다. 해외 버전의 프로 게임기는 음성 인식과 과도기의 가상현실에 대한 안전 문제 때문에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시점이었다. 하지만 인터넷으로 유출된 게임 플레이 동영상을 본 사람들이 해외에서의 프로 리그도 추진하기를 원했다. 자소 소프트로서는 그런 일에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말로 답변을 대신했다. 더운 여름의 8월이 끝나고 9월, 베타 테스팅 기간이 끝나고 그 간의 테스터들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서 다섯 조에 따라 미리 정한 날짜에 자소 소프트의 지하, 게임 센터에서 모인다는 공지가 문명 온라인의 홈페이지에 올라왔다. 현준과 서로 도와 가며 했던 타이트한 훈련으로 원하는 만큼의 성과를 얻은 진성은 하루의 일정 시간만 프로 게이머로서의 감을 향상시키기 위해 사용했을 뿐 나머지 시간은 예전에 보다가 그만 둔 가상현실 접속 결과를 다시 꺼내 들고는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다. 아직 출시도 되지 않은 게임에 프로가 있을 리가 없는데다가 알파 테스트 단계에서부터 프로 게이머가 투입되었기 때문에 진성과 현준의 경우 굉장히 유리한 입장이었다. 이팀장의 예상으로는 프로 리그 출범 후, 3~5개월 정도는 진성과 현준의 독주가 예상된다고 할 정도였다. 그런 사정을 알고 있던 진성은 바빠서 덮어 두었던 것을 꺼내 들었고 현준은 여전히 열심히 연습하며 여러 가지 상황에 맞는 전략들을 만들어 내었다. 현준은 진성에게서 일방적으로 받는 것만 같아서 자신도 뭔가를 만들어 진성과 공유하기를 원했다. 한쪽으로 이끌려가는 것은 싫었다. “휴...... 그 동안 안 보다가 다시 보려니 이거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네.” 진성은 거의 3주 가까이 게이머로서 문명 온라인을 잡고 있었기에 그 동안 가상현실에 대해서 생각했던 것들이 가물가물 했다. 그렇지 않아도 쉽지 않은 데이터였는데 머리 속이 한 때 병법으로 가득 찼었기 때문에 가상현실에 대한 것은 기억 깊숙한 곳에 있었다. 당연히 기억이 제대로 날 리가 없었다. 결국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 뭐? 잘 기억 안 나니까 설명 좀 해 달라고?” 로플팀의 조진철 프로그램 팀장은 기가 막혔다. 보름이 훨씬 넘도록 코빼기도 비치지 않던 녀석이 갑자기 나타나서 까다로운 가상현실에 대한 강의를 한번만 더 해 달라고 하니 어이가 없을 수밖에. 그 때에도 대장인 진팀장의 압력에 시간을 쪼개어 했건만 또 다시 해 달라고 하니 조진철은 어이가 없었다. “나 시간 없다........... 너한테 자료 넘길 테니까 그것 보고 혼자서 연구해 봐라. 내가 공유해 놓을 테니까 가져가라. 아, 암호는 ‘스키피오’로 할 테니까. 그리고 그 자료 유출되면 큰일 난다. 알지?” 조진철은 원래 자기가 가진 자료를 다른 사람, 특히 자신보다 아래인 사람에게 보여주어서는 안 되었지만 워낙 그쪽 일이 정체된 상태였고 할일이 너무 많아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게 만드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할 일이 많아서 진성을 프로그래머로 차출하고 싶었지만 곧 있을 문명 온라인의 베타 테스터의 이벤트와 다가올 출시일 때문에 프로 게이머인 진성을 빼내오기란 불가능했다. 진성은 조진철 팀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생각해도 염치가 없었기에 그 정도라도 양해를 해 준 조진철 팀장이 고마웠다. 자리에 돌아간 진성은 조진철 팀장의 컴퓨터를 찾아서 자료를 다운로드하기 시작했다. “....... 자료의 양이 장난이 아니네.” 한참을 다운 했는데도 여전히 받을 자료는 남았고 컴퓨터의 용량은 다 차 버렸다. 요람 안의 비품실에서 고용량 하드 디스크를 찾아낸 진성은 컴퓨터에 설치하고는 나머지를 다운 받았다. “와..... 이 정도라니..” 새로 설치한 하드 디스크의 반을 채우고야 다운이 끝났다. 진성은 그 엄청난 양에 일단 놀랐다. 새삼 자신에게 강의했던 조진철 팀장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게 되었다. 진성은 일단 하나하나씩 살펴보았다. 자료에는 진성 자신의 가상현실 접속 기록 말고도 다른 사람들의 접속 결과도 포함되어 있었다. 진성 자신 말고도 열 명의 사람이 테스트를 한 것으로 나와 있었고 영상과 인터페이스 역시 정리되어 있었다. 진성은 내심 쾌재를 질렀다. “...... 인터페이스의 자료가 부족하다 느꼈는데... 이런 것들이 있는지 생각지도 못했네..” 진성은 시간을 잊고는 그 자료들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진성아, 밥 먹어야지.”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된 건가?” “요즘 아직도 그거 붙들고 있냐?” 현준은 진성이 너무 모니터에 몰두하고 있어서 뭔가 하고 보니 복잡한 것이 예전에 가상현실 뭐라고 한 것임을 알았다. 진성이의 단점이자 장점인 한번 관심 가지면 끝을 봐야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현준은 피식 웃고는 밥 먹고 하라고 재촉했다. “.... 가자, 가. 그런데 뭘 먹을까?” 진성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는 일어나면서 현준에게 말했다. “너, 요즘에 하나씨 거의 안 만나지?” “아니, 주말에 한 번 정도는 보는데..... 아, 지난주에는 못 봤구나. 요즘 너 때문에 게임에 집중하고 다른 것 하다보니.... 게다가 그 스키피오인가 하는 팬클럽 때문에 마음 놓고 만나기도 어렵다.” “.... 그래? 그렇겠다. 스타만이 그럴 수 있지.” “그런데 왜? 하나씨가 뭐라고 해?” “아니... 내가 그럴 줄 알고 같이 점심 먹으러 가자고 말해 놨지. 자 가자. 내가 점심살께.” “그래? 좋지. 어디로 갈까?” “교외로 나갔다 오자.” “아..... 너.. 새로 산 네 차 운전하고 싶어서 그렇지?” “하하하, 네가 뭘 아는구나. 자 가자. 시원한 바람이 나를 부른다.” 현준은 연봉은 용돈을 제외한 모든 돈을 어머니에게 원천 징수를 당하게 되었지만 대신 계약금으로 차를 살 수 있게 되었다. 현준은 매일 노래를 부르던 차 사달라는 얘기를 자기가 직접 번 돈으로 이루었다. 현준은 결국 한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5인승 레저카 킹덤 주니어(KJ)를 구입했다. 새로 산 차를 타고 운전할 때의 그 기분 때문에 현준은 사람들에게 선심을 쓰며 교외로 내달리곤 했다. 현준은 아주 기분이 좋아서 경쾌한 노래를 틀어 놓고는 아직은 강렬한 햇빛 아래의 도로를 질주했다. 진성은 그런 현준의 옆에서 역시 기분 좋게 나른한 기분을 즐겼다. 하지만 하나는 약간 불만이었다. 자신과 한 주 꼬박 만나지도 얘기를 해 보지도 못했는데 진성이 별다른 반가운 기색도 없는데다가 진성이 자신을 따라 뒤에 앉을 거라 아주 당연히 생각했는데 냉큼 앞에 앉더니 뒤를 쳐다보지도 않자 화가 났다. 현준과 진성은 막힌 공간인 요람에 있다가 이렇게 시원하고 트인 곳으로 드라이브를 하니 너무 좋아 뒤에 하나가 있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하나는 그런 두 명의 무심한 남자에게 성질이 났다. “....... 지금 어.디.로. 가.나.요?” 끊어지는 하나의 목소리. 누가 들어도 저기압이라는 것을 알게 했다. 현준과 진성은 움찔했다. 뒤에 하나가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운전하던 현준은 고개를 약간 돌려 진성을 쳐다보았고 진성 역시 몰랐다는 제스처를 했다. “..... 아...음.... 이 근처에 흑돼지 생고기를 잘 한다는 곳이 있어서 거기로 갈 겁니다.” 현준이 재빨리 사태 수습을 위해 재빨리 말을 했고 그 뒤를 이어 진성이 평소 답지 않은 아부까지 동원했다. “.... 오늘 같이 좋은 날, 이런 미녀와 같이 야외로 나오니 정말 기분이 좋네요. 그렇지 현준아?” “당연하지. 그걸 말이라고 해. 아마 음식도 더 맛있을 거다. 그럼.. 그렇고 말고...” 현준과 진성은 서로를 쳐다보지도 않고 입을 맞추었다. 하나는 뻔히 현준과 진성의 마음을 알았지만 역시 이런 교외에 좋은 사람과 나와서 기분이 좋은 것은 사실이라서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진성아, 너 그거 알아?” “뭐?” 현준과 진성, 하나는 흑돼지 고기로 점심을 두둑하게 잘 먹고는 마지막으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다음 주부터 그 베타 테스터들 모아서 이벤트 한다는 것.” “아... 맞다. 시간이 그렇게 되었구나. 이제 베타 테스팅 기간이 거의 끝난 모양이네.” “지금까지 게시판에 올라왔던 것은 거의 게임에서 조정되거나 반영이 되었다고 덕만이 형이 말하더라.” “이제 정말로 정식 출시만 남은 셈인가.” “그리고 다음 주에 그 이벤트에서 너와 내가 베타 테스터들과 게임해야 한다는 것 알지?” “당연하지. 내가 그런 것도 모르고 살 것 같냐?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제대로 게임해 보겠네.” “정말로 이제 시작인 것 같다. 천 명 정도 온다고 했으니.. 다 오지 않더라도 700명은 올 테니까. 그런 많은 사람 앞에서 게임을 해야 한다니. 정말 떨린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잖아. 나도 프로 게이머는 처음이니....” 진성과 현준은 베타 테스터 이벤트 이야기와 출시 후의 프로 경기에 대한 것들을 얘기하다가 갑자기 옆에서 찬 기운이 흘러나옴을 느꼈다. ‘아! 하나씨!’ 진성과 현준은 또 한번 자신들이 실수했음을 알았다. 옆에 버젓이 살아 숨쉬는 사람을 둘이 힘을 합쳐 잠깐이나마 죽은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진성과 현준은 또 다시 눈을 마주치며 위험한 상황을 타개하기로 합의했다. “..... 우리 하나씨는....” “... 맞아.... 하나씨는........” 진성과 현준은 자신들의 노력에도 회사에 돌아갈 때까지도 풀리지 않는 하나의 마음에 옛말 틀린 것 하나도 없다는 말을 실감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 9월 초, 아직은 더운 9월, 돌아오는 길에 서리는 아니지만 갑작스런 우박이 내렸다. “인준아, 빨리 가야지?” “그래, 천 명이나 모인다고 하니 빨리 가야지. 이왕이면 앞쪽에 앉아야 좋겠지? 그리고 그 게이머도 오겠지? 그 얼굴 없는 게이머?” “공지에 온다고 했으니까. 그 게이머 정말 대단하던데... 나는 그 게이머가 테스트 했던 것 보고 베타 테스터 지원했잖아. 이번에 볼 수 있다니 기분 좋은데...” “나야 원래 이런 게임이 나오기를 기다렸지만 그 동영상 때문에 더욱 해 보고 싶어졌지. 야, 버스 왔다. 타자.” 인준과 한석은 평소 게임을 좋아하는 자칭, 타칭 게임 폐인이었다. 둘 모두 관심 있었던 문명 온라인의 베타 테스터 신청을 해서 운 좋게 뽑혔다. 타이틀이 집에 도착한 이후 처음에는 싱글로 플레이를 해 본 후에 같이 온라인으로도 게임을 즐겼다. 인준과 한석은 여러 번 게임을 해 본 후에 이 게임, 문명 온라인을 클리어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함을 알았다. 워낙 많은 경우가 있었기에 그것 모두를 일일이 해 보려면 그 경우의 수만 해도 엄청남을 알았다. 문명 온라인 홈페이지의 베타 테스터를 위한 게시판에도 많은 테스터들의 클리어 불가능이라는 게시물이 많았다. 문명의 발전에 대한 대강의 방향이나 시대를 대표할 만한 전략과 무기 등을 알 수 있을 뿐, 실제 게임에 들어가면 실제 역사나 분석한 전략과 무기의 영향력이 실제 게임 내에서의 영향력과 비례하지 않았다. 게이머는 오히려 그 게임 속에서 적절한 전략을 찾아내야만 했다. 인준과 한석은 다른 테스터들과 마찬가지로 질리지 않는 게임 시스템에 환호했다. 이 정도 게임이라면 싱글로도 성공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자소 소프트는 베타 테스터에게 일종의 보상을 전제로 질 좋은 분석과 버그 리포트를 원했다. 자소 소프트에서 준비한 보상은 금전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테스터들은 오히려 열광했다. 바로 그 얼굴 없는 게이머, 닉네임 스키피오와의 프로 버전 문명 온라인의 전용 게임기 대결을 약속했던 것이다. 테스터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많은 테스터들의 베타 테스터 지원 동기가 게이머 스키피오와 관련이 있어서 그런 제안은 테스터의 문명 온라인에 대한 열기를 부채질 했다. 인준은 부제인 ‘영웅 스키피오’에 맞게 로마 제국의 전력과 대표적인 전략에 대한 분석을 써서 게시판에 올렸다. 한석은 그와는 달리 또 다른 문명 중 하나인 생소한 이집트에 대해 분석을 했다. 여러 왕조로 나누어진 고대 이집트의 경우 원래의 역사대로라면 시대의 차이로 인한 전력의 차이가 당연했지만 문명 온라인에서는 서로의 전력을 재조정해서 밸런스를 맞추었기 때문에 해 볼만 했다. 한석은 그런 특이한 설정 때문에 이집트 문명을 선택한 유저들에게 일종의 가이드라인 격인 글을 게시판에 올렸다. 인준도, 한석도 자신의 글이 채택되어 몇 명 되지 않을, 그 게이머와 게임을 할 수 있는 선택받은 테스터가 되고 싶었다. 천 명인 한 조당 100명을 선택해서 그 중에 94명은 소정의 상품을, 6명은 하루에 세 명씩 이틀에 걸쳐 진행될 이벤트의 순서로 자소 소프트의 지하에 마련된 게임 센터에서 닉네임 스키피오와 게임을 할 수 있었다. 인준과 한석 뿐 아니라 많은 베타 테스터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해 게임을 분석했고 그 결과는 이미 홈페이지에 올라 있었다. “다녀오겠습니다.” “갔다 오겠소.” “잘 다녀오세요. 진성아, 현준아, 너희들도 잘 갔다 와라. 요즘에는 너희들이 빨리 들어오니까 너무 좋구나. 알겠지?” “네.” 아침을 먹은 뒤에 현준의 아버지와 현준, 진성은 집을 나섰다. 현준 아버지는 혼자 차를 몰고 먼저 출발했고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주차했던 현준의 차 KJ를 타기 위해서 진성과 현준은 조금 걸었다. “오늘이지. 기대 되는 걸.” “이제까지 수없이 많이 게임을 했는데도 조금 걱정이 된다. 늦겠다. 빨리 가자.” 현준은 KJ를 몰면서 역시 경쾌한 음악을 들었고 진성은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아직 서늘한 아침 공기를 들이마셨다. KJ는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회사를 향했다. “스키피오, 한신. 오늘부터 있을 이벤트에 수고스럽더라도 잘 참여해 주기 바란다. 이제부터 너희들은 진짜 프로 게이머니까 공인이라는 생각을 한시도 잊지 마라. 자, 준비해라. 일단 오늘과 내일은 1조 천 명이 올 테니까 그 앞에서 제대로 게임을 해 보는 것도 경험이겠지. 아, 그리고 꼭 게임에서 이길 필요는 없다. 어차피 테스터들은 프로 게임기도 처음 접할 테니까 비교할 수 없지. 그러니 최대한 게임을 재미있고 상대의 능력을 끌어내어 게임을 한 상대 역시 재미있었다는 기분이 들도록 배려해 줘라. 그런 것도 프로로서 팬들을 관리하는 능력이다. 알겠냐?“ “네, 알겠습니다.” 이팀장은 곧 시작될 이벤트에 앞서 진성과 현준을 불러 이벤트에서의 할 일과 이제 시작하는 프로 게이머로서의 태도 등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진성의 닉네임은 완전히 스키피오로 굳혀졌다. 곧 마련될 아마추어 문명 온라인의 서버에서도 스키피오라는 이름은 이미 예약해서 다른 사람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결정되었다. 물론 프로 게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게임 타이틀의 부제로까지 올라가 있었기 때문에 스키피오라는 이름은 상당한 유명세를 탔다. 같이 프로 게이머로 데뷔하는 현준도 뭔가 닉네임을 갖기를 원했지만 마땅히 괜찮은 것이 없었다. 진성은 그냥 손자병법이라고 하라고 했고 이팀장은 물과 비슷한 느낌의 게임을 하니까 ‘아쿠아 게이머’라는 다소 어색한 이름을 지어주었다. 현준은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원래 자신의 WIS 때의 ID이기도 했던 '한신1234‘에서 숫자는 빼버리고 ’한신‘을 자신의 닉네임으로 삼아버렸다. 처음에는 약간 어색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곧 스키피오와 한신으로 닉네임이 정해졌고 스키피오와 마찬가지로 한신이라는 닉네임 역시 예약되었다. 드디어 이벤트가 시작되었다. 상당히 넓은 자소 소프트의 지하 창고를 개조해서 만든 게임센터는 거의 1,0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을 넓이였다. 자소 소프트는 단순히 이번의 이벤트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활성화될 프로 게임 역시 이 곳에서 할 수 있도록 시설을 완비했다. 최대 8개의 프로 게이머의 개인 대기실과 아직은 계획 중인 팀별 대항을 위한 팀 대기실 4곳, 그리고 관중이 없는 방송용을 위한 게임기가 설치될 2개의 룸과 1,000여명이 가운데 무대에서 게이머들의 플레이를 볼 수 있는 멀티비전이 설치된 대형 게임 룸 등이 거의 완벽하게 갖추어진 게임센터였다. 원래 지하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도록 환기 시스템 역시 최신으로 꾸며서 아주 쾌적한 환경을 제공했다. 자소 소프트는 이런 시도를 해서 성공적이라고 판단이 되면 시내의 몇 장소에 이런 대형 게임센터와 영화관 등을 복합시켜 새로운 놀이공간으로 만들 프로젝트도 구상 중에 있었다. 그럴 경우 자소 소프트만의 게임이 아니라 범용으로 프로 게임 대회를 개최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었다. 몰려든 베타 테스터들은 나선형 계단으로 내려가는 동안 약간은 어두운 조명에 조금 이상한 곳이 아닌가 의아해하기도 했지만 막상 가운데의 대형 게임 룸에 들어서자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웬만한 콘서트가 열리는 무대만큼 좋고 조명도 아주 밝았으며 앉을 수 있는 자리도 아주 편안했다. 투자 없이는 나올 수 없는 시설들을 보며 테스터들은 감탄했다. “인준아, 이거 정말 끝내준다. 의자도 이렇게 편안하네. 자소 소프트가 문명 온라인 발표하면서 완전히 게임계를 휩쓰는 것 아냐? 이 정도로 투자할 회사라면 나중에 게임에 대한 업데이트 같은 것도 상당하겠지?” “다른 곳에서는 하지 않는 이런 이벤트를 한다기에 뭔가 좀 특이한 회사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돈을 많이 들일지는 몰랐다. 이 정도면 게임 중계도 할 수 있겠는데.... ” 인준과 한석은 빨리 서둘러 왔기 때문에 상당히 빨리 들어와 대형 게임 룸의 무대와 가까운 곳에 앉을 수 있었다. 시간이 다 되었기에 다른 테스터들도 안으로 몰려 들어왔다. 다들 커다란 게임 전용 룸과 그 시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들어오면서 받은 팜플렛을 조금 읽으니 윙하는 소리와 함께 무대 가운데 부분에서 사람이 서서히 위로 올라왔다. “이야.. 저런 것도 있네. 나중에 여기서 게임하면 정말 기분 좋겠다.” “와..” “죽인다!” 그렇지 않아도 시끄럽던 실내는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그러나 곧 실내가 어두워지고 무대에 조명이 비춰지자 조용해졌다. 무대위의 남자는 말문을 열었다. “이렇게 오시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저는 자소 소프트의 ‘문명 온라인, 영웅 스키피오’의 개발 팀장인 이희철이라고 합니다.” 테스터들은 휘파람을 부르며 환호했다. 좋은 시설에 좋은 연출까지. 테스터들은 이미 흥분된 상태였다. “오늘과 내일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작으나마 저희들이 준비한 이벤트를 열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홈페이지에 공지한 대로 100 분을 뽑아서 94분께 소정의 선물을 드리고 6분에게는 프로 게이머와의 게임을 전용 게임기를 통해 즐길 수 있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다시 한번 테스터들의 환호와 박수소리가 실내를 가득 채웠다. “이제 홍보팀의 최진만 팀장이 나와서 게임에 대한 설명과 저희들이 준비한 여러 화면들을 본 뒤에 다음 순서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앞으로 문명 온라인과 그 이후에 개발될 자소 소프트의 차기작들의 이벤트와 프로 게임을 위해 만들어진 곳입니다. 잘 둘러보시고 많이 소문 퍼트려 주십시오.” 사실, 이팀장은 속으로 화가 나 있었다.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너스레 떠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팀장은 원래 홍보팀장이 해야 하는 일을 자신이 하게 되어 저기압이었다. 감정과 일을 분간하지 못하는 멍청이는 아니었지만 감정 없는 목석도 아니었다. 갑자기 교통사고가 났다는 홍보팀장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언젠가 다 나으면 복수하리라 다짐했다. 이팀장의 뒤를 이어 최진만이 나와서 이벤트 진행을 했다. 최진만은 바로 이미 공개된 게이머 스키피오의 동영상 파일 무삭제판을 테스터들에게 보여줬다. 인터넷으로 유출된 것은 게이머의 얼굴과 여러 장면들이 편집된 것이었다. 게다가 그냥 한 화면이어서 부족한 면이 많았다. 하지만 최진만이 나온 후에 무대에 가득 설치된 대형 멀티비전은 각각 다른 화면을 보여 주고 있었다. 멀티비전은 굉장히 큰 비전들이 겹쳐서 놓았으며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졌다. 한쪽은 게이머 스키피오의 화면인데 각 비전마다 각기 다른 시야의 화면을 보여 주었다. 다른 쪽도 게이머만 다를 뿐 다양한 화면을 보여주었다. 그런 비전들이 원처럼 둘러싸며 무대를 채우고 있었다. 그런 화면에 비록 어떤 부분은 여러 번 본 테스터들이었지만 곧 빠져들었다. 플레이 파일이 끝나자 테스터들은 일제히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자신들이 이곳으로 직접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게다가 얼굴 없는 게이머의 얼굴이 확인되는 최초의 공식적인 순간이었다. “어..... 저 게이머... 혹시 진성이 아냐? 강진성...”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설마...? 아니겠지?” “너무 닮았다.” 인준과 한석은 공개된 얼굴 없는 게이머의 얼굴을 보고는 아는 얼굴과 너무 닮아서 순간 당황했다. 테스터들이 조용해지기를 기다린 후에, 최진만은 말했다. “여러분들은 아마 얼굴 없는 게이머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 보신 그 게임 플레이를 그 게이머가 한 것도 알고 있을 겁니다. 이제부터 여러분들, 테스터 분들에게만 최근의 게임 플레이를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로 게임을 플레이하는 두 사람 다 저희 소속 프로 게이머입니다. 한 사람은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게이머 스키피오이자 얼굴 없는 게이머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최근에 저희가 영입한 게이머 닉네임 한신입니다. 자, 말보다 보는 게 낫겠죠.“ 또 다른 게이머라는 말에 테스터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지만 곧 펼쳐진 게임 화면에 침 넘어가는 소리만 가득했다. 게임속의 현란한 게임 운영과 엄청난 화면, 게이머의 명령에 따라 순식간에 바뀌는 현실감이 살아 있는 화면들. 테스터들은 처음 시작할 때부터 마치 하나의 영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로마제국과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과의 대결이었다. 테스터들은 당연히 로마제국이 바로 스키피오라는 것을 알았다. 스키피오의 로마라는 사회를 다루는 빠른 명령과 북방의 군단들을 움직이는 타이밍, 사회를 아주 튼튼하게 만들면서 빠르게 성장하는 문명. 테스터들 중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것은 당연히 로마제국이었다. 그러니 테스터들이 가장 많이 플레이하고 가장 많이 분석한 것이 바로 로마제국이었다. 그런 만큼 테스터들은 게이머 스키피오의 빠른 플레이의 진가를 알 수 있었다. 몇 몇의 테스터들은 탄성을 발했다. “..... 와.. 정말 군더더기 없는 진행이다...” “................ 일단 초반은 비슷하니까 더 지켜봐야지..” 반대의 그리스 도시 연합의 게이머 한신의 플레이를 지켜보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화려함은 없지만 전혀 흔들리지 않는 플레이를 보여주는 게이머였다. 테스터들은 프로 게이머들끼리의 대결이라는 점에서 손에 땀을 쥐며 지켜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흥미롭게 지켜보았지만 한석과 인준은 너무 놀랐다. 앞서 나온 게이머 스키피오가 강진성을 닮았다면 게이머 한신은 자신들이 아는 진현준과 판박이였다. 한석과 인준은 서로 쳐다본 뒤에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다시 멀티비전에 집중했다. 길지 않은 초반의 진행이 어느 정도 지나가자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스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정치력의 아테네가 있었지만 한신 게이머의 역량인지 쉽게 하나로 뭉쳤다. 테스터들은 알았다. 아무 잡음이 없이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하나로 뭉치기가 얼마나 힘든가를. 곧이어 게이머 한신은 스파르타의 군대 제도를 전 그리스에 퍼트렸다. 저항은 있었지만 강력한 정치력과 이미 아테네의 인재들을 수중에 넣었기 때문에 조기에 수습할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전선의 대량 건조에 들어갔다. 게이머 스키피오는 국경을 튼튼히 하고 곳곳으로 소규모 정찰 부대를 파견했다. 그리고 처음의 공화정을 제정으로 단시간에 여러 공작과 여론을 통해서 탈바꿈시켰다. 그리고 원래의 중장 밀집보병들을 업그레이드 시켜서 중장 전차병을 만들었다. 전차의 생산과 말과 보급의 문제가 있었지만 게이머 스키피오는 아주 능숙하게 해결해 나갔다. 몇 사람의 테스터들이 그런 게임 운영을 보고 넋을 잃고 있다가 몰래 가져온 품안의 캠코더로 녹화를 시작했다. 원래 게이머와의 대결을 녹화할 생각이었지만 지금 눈앞의 게임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게다가 게이머와의 대결은 다음날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스파르타의 강한 훈련을 받은 그리스의 정예 군인이 속속 모여들었고 전선의 건조가 마무리 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의 곳곳에서 강압 정치와 무리한 물자의 징발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져가고 있었다. 게이머 한신은 그런 불만을 예상했다는 듯이 정복전쟁을 통해 해소시킬 작정으로 곧바로 전쟁의 개시를 위해서 정찰부대를 내보냈다. 초반에 보낸 로마의 정찰병은 이미 그리스의 사정을 알고 로마로 돌아갔다. 정보에서만은 로마가 앞선 것이다. 게이머 스키피오는 그동안 모았던 전차병을 곧바로 전차군단으로 조직하면서 전차군단의 전술훈련을 시작했다. “아, 저것은 이집트의 전차부대다.” 한석은 화면을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이집트의 전차병은 특이했다. 보통 다른 전차는 기수와 창병이 분리되어서 강력한 돌진력으로 적의 내부로 난입해서 적의 지휘계통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이집트의 전차는 하나의 독립 부대였다. 오와 열을 맞추어 전진과 후퇴를 하고 절대 적에게 둘러싸이는 일이 없게 하는 보병과 비슷한 부대였다. 절대 돌진형 소규모 부대가 아니었다. 게이머 스키피오가 로마의 전차군단에 완전히 새롭게 지시하는 것은 적의 전열을 흩뜨리는 소모성 돌격부대가 아니라 적보다 월등한 기동력으로 적을 압박하는 부대로서의 전략이었다. 그것은 상대인 그리스가 바다를 통해 그 정예를 실어 나를 동안, 월등한 육상에서의 기동력으로 적을 압박하든가 아니면 비어 있는 그리스의 아테네나 스파르타를 치는 방법으로 아주 적절한 선택이었다. 마치 상대의 전략을 읽은 것처럼. 이집트 문명에 대한 플레이를 깊이 해 본 테스터들은 그 절묘함에 놀랐다. 전차부대는 아주 편하고 업그레이드 된 공격력과 기동력으로 우수했지만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게이머 스키피오는 상대가 초반에 도발하지 않을 것을 알았는지 초반에는 내치에 힘쓰고 국력신장과 사회의 안정에 힘을 썼다. 그리고 제정으로 만들어 다른 곳의 입김을 최대한 약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런 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전쟁에도 불구하고 많은 전비를 들여 전차를 생산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많은 시민들의 반대에 어쩌면 암살당할 위협을 느껴야 할지도 몰랐다. 곧 그리스의 정예 군대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수도 로마의 북동쪽에 상륙했다. 스키피오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근처에 촘촘하게 소규모 정찰 병력을 배치하고 있었다. 스키피오는 그리스의 군대가 도착하기 전에 군단의 이동을 마쳤다. 북쪽과 가까운 모든 군단은 국경으로 전진 배치시켰다. 남쪽의 군단은 3개를 남기고는 모두 서쪽의 가도를 통해서 북쪽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로마의 모든 시민들과 물자는 남쪽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그리스 정병의 도착으로 인한 피난에 게이머 스키피오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높았지만 황제의 권위에 대항할 수는 없었다. 특히 막 황권 강화에 성공한 황제였기에, 군대가 황제의 손에 있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리스의 강군들은 물밀 듯이 내려왔다. 나흘도 걸리지 않고 로마를 점령했지만 그곳의 자유시민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게이머 한신은 고민했다. 예전의 한니발과 스키피오의 대결을 본 한신은 스키피오의 전략인 성을 비우고 상대의 허를 찌른다는 전략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기세로 로마의 전 영토를 유린하고 나중에 빠져나간 로마의 군대와 한판 승부를 펼치는 게 나을지 아니면 바로 그리스로 돌아가서 늦은 감이 있지만 영토를 지켜야할지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만약 돌아간다면 어떻게 막아낸다 하더라도 흐름을 상대에게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초반의 무리한 강압으로 더딘 발전을 한 현준으로서는 시간이 흐르면 더 힘들 것이라 생각하고는 결정을 내렸다. 게이머 한신은 모든 부대를 이끌고 로마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수도 로마 뿐 아니라 모든 항구와 반도 아래의 도시들을 완전히 불사르며 유린했다. 게이머 스키피오는 빠른 기동력의 전차군단과 로마군의 원래 주력인 밀집 중장 보병 부대를 앞세워 그리스를 초토화 시키고 있었다. 육로를 통했기에 조금 늦게 그리스에 도착했지만 기동성을 살린 전차군단은 오히려 반도처럼 긴 로마보다는 집중적인 그리스의 주요 도시국가를 초토화시켰다. 스키피오는 본진이 완파되는데도 구원병이 오지 않는 것을 보고는 게이머 한신의 의도를 알았다. 건곤일척의 단판 승부. 갑자기 멀티비전이 꺼지더니 실내의 불이 켜졌다. “잠깐 10분 휴식 후에 조금 전에 보시던 것을 마저 보시고 그 다음에 저희의 프로 게이머를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인준은 가볍게 숨을 내쉬더니 옆의 한석에게 말했다. “한석아, 정말 대단하다. 아까는 정말 대단했다. 게이머 스키피오도 대단했지만 상대도 정말 대단하다. 그 정도의 컨트롤과 밀리지 않는 판단이라니..” “네 말이 맞다. 아주 빠른 게임 진행인데도 산만하지 않고 정말 깔끔하더라. 그 정도로 하려면.... 휴... 괜히 프로 게이머가 아니군. 정말 실제로 비슷한 게임을 해 보니 알겠다. 그 컨트롤과 빠른 판단이 정말 대단하다. 그치?” “....... 누가 이길까?” “당연히 스키피오가 이기겠지..” “그럴까? 그 게이머 한신도 만만치 않던데... 스키피오는 이번에 처음 프로 게이머로 데뷔하는 거잖아. 그러면 게이머 한신이 이길 수도 있지 않을까?” “경험 많은 프로라면 그럴지도 모르겠네.” “빨리 화장실 갔다 오자.” 한석과 인준은 두 프로 게이머가 자신들이 아는 사람과 우연히 닮았을 뿐이라고 거듭 거듭 생각했다. 모든 테스터가 다시 자리에 앉자 실내는 어두워졌고 멀티비전에서는 게임 플레이가 이어졌다. 자소 소프트 측에서 시간 상 중간의 과정을 생략한 모양이었다. 화면에는 양쪽의 군대가 평원에서 서로 마주보며 진을 치고 있었다. 테스터들은 그 엄청난 광경에 할 말을 잊었다. 스펙터클한 중세 전쟁 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은 게임 화면. 더 멋진 것은 양쪽의 총사령관인 두 게이머가 전쟁터가 될 중간에서 호위병 하나만을 거느리고 만나서 얘기하는 장면이었다. 몇 십만 명이 전쟁을 예감하는 대평원의 한 곳에서, 바람에 펄럭이는 옷을 입은 두 게이머의 모습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얼굴이 장군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었지만 그 비장감만은 대단했다. “스키피오, 복수다.” “한신, 꿈도 꾸지 마라.” 비장하게 한 마디씩 뱉고는 뒤로 돌아서서 자신의 진으로 돌아가는 두 게이머. 그것을 볼 수 있었던 테스터들은 기침소리 하나 낼 수 없었고 눈조차 깜박거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당연하게도 테스터들은 이 부분이 약간의 편집과 연출을 거친 것을 알지 못했다. 곧 엄청난 대부대들의 정면충돌이 있었다. 육상에서 워낙 강한 스파르타의 전통적인 보병들이 1진에 서고 2진에서 5진까지 마련된 게이머 한신의 진영은 쐐기형의 기병이 도저히 돌파하기 힘들었다. 그런 모습을 본 스키피오는 곧바로 용병인 누미디아 기병을 뒤로 돌리고 그 자리에 뒤에 있던 전차부대를 내세웠다. 두 군대는 일제히 달려들었다. 대형을 유지한 채, 마치 파도와 파도가 부딪치는 형상이었다. 중앙의 보병간의 대결은 막상막하였다. 강군인 스파르타의 군대도 밀집중장보병이자 훈련이 잘된 로마의 보병을 한순간에 밀어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밀리지도 않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혼전의 양상을 띠어갔다. 그 순간, 스키피오는 전차부대를 이동시켰다. 스키피오는 그리스에서의 파괴행위 중에도 전차부대를 업그레이드 했다. 자원은 부족했지만 전차부대의 성능향상을 위해 투창을 마련했다. 돌격형이 아니라 마치 밀집보병과 같은 전차부대의 단단함에 투창이 추가되자 엄청난 기동성의 보병이 생겨난 것과 같았다. 투창 역시 이집트 전차의 특징 중 하나였다. 스키피오의 전차부대는 측면으로 빠져나가 한신의 후미를 공격했다. 그것도 정면으로 붙는 것이 아니라 한곳의 부대를 전멸시키려는 듯한 투창공격을 여러 번 실행해서 한신의 부대는 앞, 뒤를 모두 신경 써야 했다. 한신의 부대 중에서 스키피오의 전차부대를 상대하려고 했지만 이미 기동성을 이용해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투창공격을 하는 등, 치고 빠지는 작전을 구사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엄청난 인원이 격돌하는 전장에서 유기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곳은 스키피오의 로마 군대였다.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스키피오는 곧 전략을 바꾸어 전차부대를 후미가 아니라 왼쪽으로 모았다. 그리고 게릴라가 아니라 마치 보병처럼 전차부대를 단단하게 결집시켰다. 스키피오의 군대는 이미 지휘계통이 사라져버린 한신의 부대를 마치 불도저로 미는 것처럼 밀어버렸다. 게다가 더 확실하게 뒤도 돌린 누미디아 기병을 상대의 뒤를 향해 돌진하도록 만들었다. 군인의 수가 어느 정도 이상으로 커지면 전략과 더불어 군의 지휘, 통제가 전투의 승리를 가져온다는 말에 딱 들어맞는 전투였다. 스키피오는 집요하게 상대의 지휘를 마비시켰다. 그것에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은 바로 전차부대였다. 화면은 바뀌어서 게이머 스키피오 앞에 끌려온 게이머 한신의 모습이 있었다. 마치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엄청난 군대를 뒤로하고 늠름한 모습으로 서 있는 스키피오 앞에 한신은 무릎을 꿇고 말았다. 한신 앞으로 다가간 스키피오, 손을 잡고는 한신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노을 지는 하늘을 보며 웃는 장면..... 화면은 거기서 끝이 났다. 끝까지 지켜본 테스터들은 우뢰 같은 박수를 쳤다. “와......... 정말 대단하다.” “......이야...... 스키피오.” “와... 와....” 마지막 무릎 꿇는 장면부터는 현준과 진성이 그 모든 것을 연출한 것이지만 그런 것이 배경과 그 때까지의 감동과 흥분을 가지고 있던 테스터들을 완전히 폭발하도록 만들어 버렸다. 테스터들은 발까지 구르며 자신의 기분을 표현했다. 정말 대작 영화를 본 듯한 느낌에 테스터들은 자신도 모르게 흘린 땀을 닦기도 했다. 자신들이 했던 게임과 그 시스템은 같아 보였지만 화면이라든가 장면의 전환, 사운드, 인터페이스가 너무 환상적이어서 프로 전용 게임기도 살 수 있는지 묻는 사람도 있었다. 곧이어 올라온 최진만은 테스터들을 보며 말했다. “잘 보셨습니까?” “예, 너무 잘 봤습니다. 정말이지... 대단합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대단해요!” “조금 쉬었다가 조금 전 그 게임 플레이의 주인공인 두 명의 게이머를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테스터들 중에는 너무 긴장하고 집중해서 본 탓인지 미리 준비 된 물을 많이 먹었다. 밖으로 나가 삼삼오오 게임 얘기를 하면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있었다. 인준과 한석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가 마주 보았다. “설마.... 아니겠지?” “.... 그렇겠지.. 너 혹시 그 두 녀석 게임한다는 얘기 들었냐?” “........ 아니....” “아... 맞다. 그 두 녀석 이번에 휴학했잖아. 설마.... 에이... 아니겠지? 그렇지?” “휴학했대? 둘 다?” “어... 요즘 수업 안 들어와서 한번 얘들에게 물어보니 휴학했다고 하든데... 1년 동안.” “.............. 혹시.... 정말 그 녀석들일까?” “... 아니야, 걔네들은. 작년에 내가 WIS 동아리 들자고 물어 봤었는데 피식 웃더니 게임 잘 못한다고 했다니까... 그런 사람이 이렇게 갑자기 잘 할 수 있을까? 아니야. 절대 아니야.” 인준과 한석은 애써 그런 의문을 지웠다. “자, 이제 조금 전의 그 감동적인 게임 플레이의 주인공들을 소개하겠습니다.” 무대로 나온 최진만, 실내는 다시 어두워지고 조명이 켜졌다. “게이머 스피키오, 한 때 얼굴 없는 게이머라 불렸고 WIS 아마추어 세계 대회에서 우승한 숨은 실력자입니다. 자, 나와 주세요.” 무대의 가운데 부분에서 한 사람이 화려한 복장을 입고 서서히 올라왔다. 멀티비전은 일제히 켜지면서 무대로 올라온 게이머 스피키오를 비췄다. “스피키오, 자기 소개를......” 최진만은 진성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조금 어색했던 진성은 최진만에게 마이크를 받은 후에 망설이다가 간단하게 말했다. “닉네임 스피키오, 강진성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모였던 테스터들은 화려한 복장의 게이머가 인사를 하자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휘파람 소리와 박수소리가 어우러져 대단했다. 정작 당사자인 진성은 약간 부끄러워했다. “아... 맞잖아. 진성이다. 강진성.” “....... 진짜다..” 인준과 한석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로 들어나자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같이 지내던 과 친구가 이렇게 유명한 게이머라니.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자, 다음으로 스피키오와 자웅을 겨룬 게이머 한신을 소개합니다.” 역시 무대의 중앙에서 한 사람이 독특한 게이머 옷을 입고는 나왔다. “ 게이머 한신은 WIS 국내 아마추어 대회에서 5위에 오른 바가 있는 실력자입니다.” 최진만이 마이크를 넘겨주자 현준은 흔쾌히 받더니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진현준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프로 게이머로서 열심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게이머 한신, 꼭 기억해 주십시오.” 남자답고 거침없는 말에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곧 두 명의 게이머는 최진만, 여러 테스터들과 더불어 테스터들에 대한 각종 시상을 했다. 마우스에서부터 DVD Writer 까지 다양한 상품이 마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테스터들의 관심은 6명의 명단이었다. “이제 프로 게이머와 대결을 펼칠 분들에 대해 발표해 드리겠습니다. 그 전에 양해의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원래 게이머 스피키오와 대결을 다 하려고 했지만 혼자서는 상당히 힘들 것 같습니다. 그리고 처음 공지 때는 게이머 한신이 저희에게 없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세분은 스피키오와 세분은 한신과 게임을 하시는 것이?” 테스터들은 이미 게이머 한신의 실력 역시 굉장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흔쾌히 동의했다. “자 게이머 스피키오님께서 발표하겠습니다.” “중국의 기본적인 몇 가지 오더와 각 오더의 장점과 단점을 비교해서 올려주신 장영식씨, 인도에서 기동성을 중시한 새로운 부대의 제안과 그 가능성을 입증하신 손태규씨, 로마제국의 밀집 보병의 약점과 그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을 올려 주신 임진성씨, 그리스의 초반 도시국가의 통합 오더를 알려주신 제춘길씨, 한국의 단궁의 위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방법을 올려주신 성진희씨, 이집트의 일반적인 오더에 대한 분석을 해주신 김한석씨. 축하합니다.“ 최진만이 진성에게서 마이크를 잡더니 약간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모두 축하드립니다. 이 분들은 내일 오후에 이곳에서 게이머와의 대결을 펼치도록 하겠습니다. 잠깐 쉬었다가 오늘의 마지막 행사인 문명 온라인의 제작과정을 담은 화면과 또 다른 게임 플레이 영상을 보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자신들이 필요한 순서가 끝나자 진성과 현준은 15층의 사무실 요람으로 돌아왔다. 물론 게임 센터를 나오기 전에 그 이상하고 화려하다 못해 반짝 반짝 빛이 나는 게이머 옷은 갈아입었다. 진성과 현준은 그런 옷을 입고 앞으로 프로 게이머 생활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한숨을 내쉬었다. “휴... 현준아, 너 아까 무대 위에서 말 잘 하더라. 나는 떨리기도 했지만 사람들 앞에 서는 것 자체가 싫었는데 너는 정말 당당하더라.” “아.. 그것. 마음먹기에 달렸지. 돈까지 받아가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당연히 당당할 수밖에. 당연한 것 아니겠어?” “그래?” “진성 너도 싫다는 생각보다 이왕 할 것 즐겁게, 스스로 보람을 느끼면서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정말로 일이 재미있어 지지 않을까?” 진성은 현준의 진지하다 못해 감동적인 얘기에 아주 감동한 표정으로 감동과는 전혀 관계없는 말을 했다. “.......... 현준아, 너... 평소에도 그렇게 행동하면 얼마나 좋겠냐?” “뭐야?” 진성은 현준과 한바탕 장난을 치고는 곧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아주 편안한 의자에다 넓고 사용하는 사람의 편의를 고려한 책상이었지만 눈앞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여러 문서들을 보니 한숨이 나왔다. 게임에서와는 달리 현실에서 객관적으로 그렇게 뛰어나게 머리가 좋다고 할 수 없었던 진성은 역시나 자신의 한계를 실감하고 있었다. 진성이 모든 시간을 이 일에 다 투자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떤 명확한 결과보다는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것까지는 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해서 진성이 평생의 연구과제로 하나의 주제를 택하는 대단한 과학자는 절대 아니었다. “불가능한 것인가? 하긴 가상현실 자체도 대단한 것이지만.....” 로플팀의 가상현실은 확실히 시대를 앞선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 완벽하게 가상현실에서 사물을 현실처럼 제대로 표현하지는 못했다. 처음에는 현실감에 놀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가상의 세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진성 역시 직접 체험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로플팀의 가상현실 시스템을 깎아내릴 수는 없었다. 확실한 하드웨어의 구성과 그 이론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진성이 조진철 프로그램 팀장에게서 받은 자료를 종합할 때, 가상현실 접속기 안에서 일종의 가사상태, 최면상태에 빠지게 됨을 알았다. 그런 상태에서 적절한 신호와 자극으로 실제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세계의 문을 열게 되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런 자극들이 사람마다 각기 다른 연상을 하게 해서 한 사람은 귀여운 강아지를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은 똑같은 자극에 사나운 경비견을 생각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 자극에 대한 여러 반응을 보정할 만한 것 역시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지만 쉽게 개발할 수는 없는 형편이었다. 진성이 세심하게 살펴보는 곳은 그런 자극들로 인하여 생기는 어떤 연상 작용과 그 역방향인 연상으로 생기는 자극들의 대응 관계였다. 아름다운 꽃을 연상하도록 만드는 자극과 아름다운 꽃을 생각했을 때 나타나는 자극이 완전히 같을까? 진성은 일단 거기에서 출발했다. 어차피 가상현실을 여러 명이 동시에 접속하도록 만들려면 개개인에 대한 자극의 보정을 이미 완료된 상태라야 동일한 것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다는 전제, 그런 전제가 있어야 했다. 그런 전제가 없다면 혼자서 헤매는 삭막한 공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음.... 그러면 접속기에 그런 자극을 보정하는 것이 들어가야 하는데 무수한 자극에 대해 그런 조절을 일일이 하려면... 휴.. 산 넘어 산이군..” 진성은 깍지를 끼고 기지개를 폈다. 너무 집중했던 탓일까? 어깨가 뻐근했다. 일어나서 걸어 다니며 스트레칭을 했다. ‘뭐든지 최고의 방법이나 법칙은 다 단순하면서도 이해하기 쉽다고 하는데... 이런 경우에도 그런 방법이 있을까?’ 물리나 생물 등 모든 학문의 최상위에 존재하는 법칙은 아주 단순하면서도 깔끔했다. 진성은 그런 것을 가상현실이라는 거대한 덩어리에게도 기대했다. 물론 진성도 그런 최고의 법칙이 깔끔하게 정리되기 까지는 천재의 노력과 앞선 사람들의 성과가 바탕이 됨을 알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답답한 마음에 하늘에서 뭔가 툭 하고 떨어졌으면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래도 오늘은 왜 자극을 조정하고 보정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이해를 한 것 같아서 마음 한구석 뿌듯했다. 진성은 기분 좋은 마음에 현준과 오랜만에 문명 온라인 매치를 하고 싶었다. “현준아, 한 판 어때?” “뭐? 아... 좋지. 복수전이다.” “꿈도 꾸지 마라.” 인준과 한석은 이벤트의 첫날이 끝나자 곧바로 학교로 갔다. 학교 근처에서 자취나 하숙을 하는 친구들을 급히 불러내 자신들이 오늘 본 기막힌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하지만 친구들은 믿지 않았다. 비슷한 사람일 거라는 대답을 할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학교에서 별 다른 개성도 없이 둘이서만 계속 같이 다니는 사람이 방학동안에 프로 게이머가 되었다니... 다들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었기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한, 두 달 만에 프로 게이머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인준과 한석은 그에 대해 반박하고 증거를 대고 있는 중이었다. “진짜라니까... 인준아, 너도 말해 봐라.” “한석이 말이 맞아. 나도 비슷한 사람이겠거니 했는데 그 프로 게이머의 이름이 같더라고. 강진성, 진현준. 비슷한 얼굴, 아니 같은 얼굴에 이름까지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또 있을 것 같냐?” “.... 진짜야? 걔네들 이제까지 게임한다는 말 한번도 없었잖아.” “... 그래서 이벤트에서 보여준 게임 플레이.... 아.. 맞다 내가 녹화 했으니까 보면 되겠다.... 잠깐만 기다려라...” 인준은 캠코더에 녹화된 영상을 재생시켜서 친구들에게 보여줬다. 작은 화면이지만 사람은 확인할 수 있었다. “야... 봐라. 저 사람 진성이 맞지?” “.....아... 맞는 것 같기도 한데......” “.... 저 녀석 진현준 맞다.... ” “진짜다. 진짜야..” “이야.... 우리 과에서 프로 게이머가 둘이나 생긴 건가?” “그리고... 또 하나 빅뉴스가 있는데...” “뭔데? 또 다른 프로 게이머가 있다는 그런 것은 아니겠지?” “....... 내일 강진성, 진현준과 베타 테스터들 간에 프로 전용 게임기를 이용한 대결이 있거든. 그런데 거기에 한석이가 뽑혔다. 그래서 아마 진성이나 현준이와 대결을 할 것 같다. 재미있을 것 같지?” “정말?” “진짜야? 이야... 재미있겠는데... 거기 테스터들 말고도 들어갈 수 있냐?” 약간 뜨끔한 인준이 재빨리 무마하기 위해 대답했다. 친구들이 무식하게 들어가려고 하면 그 불똥이 자신에게 튀기 마련이었다. “그것은 모르겠다. 아마도 힘들지 않을까? 기대되지? 내가 캠코더로 죄다 찍어올 테니까.. 걱정 말고 기다려.” “........... 도저히 안 되겠다. 야, 우리도 내일 거기 가자. 안 되면 어쩔 수 없지만 조금 사정해 보면 들여보내 줄지도 모르잖아.” “... 그래.. 일단 가보자. 진성이 녀석... 그렇게 친한 건 아니었다고 해도 그런 일을 숨겼다니... 현준이도....” “그래, 일단 가 보자.” 인준과 한석은 친구들이 모여서 자소 소프트의 게임 센터로 내일 간다고 하자 뜯어 말렸는데도 듣지 않았다. 오히려 관계자에게 인준과 한석이 부탁 좀 해 달라는 협박을 받았다. 인준과 한석이 또 다시 한 학기 동안을 생존하려면 친구들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 “...... 알았다. 내일 한번 해 보자.” “역시 친구다. 친구가 좋아, 그치?” “당연하지. 당연히 우리 친구지... 푸하하..” 인준이와 한석은 서로 눈을 마주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인준은 자신의 옆에 앉아서 마른 오징어를 뜯어서 잘근잘근 씹어 먹는 친구들을 보니 골치가 아파왔다. 30분 전 쯤에 원칙적으로 출입이 안 되는 것이었는데 인준은 어쩔 수 없이 관계자에게 부탁했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하지만 친구들은 말도 안 된다면 게이머와 같은 과 친구라는 말을 큰 소리로 외쳤다. 주위의 많은 테스터들은 게이머에 대한 궁금증이 많았는데 같은 과 친구라는 사람들이 나타나자 그 주위로 구름같이 몰렸다. 그 뒤의 일은 그 관계자가 어디로 전화를 해 보더니 뭔가를 확인했고 그 다음, 인준과 그 친구들에게 와서는 말했다. “게이머 스키피오와 한신의 친구분들이시군요.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하지만 이 번 뿐입니다. 그런 관계로 무턱대고 밀고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이 번 뿐입니다.” 인준은 자신의 얼굴이 다 빨개졌다. 자신이 친구들과 같이 다른 곳에서 야료를 부릴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옆에서 자신의 친구들을 보자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친구들은 오히려 전투에서 승리한 개선장군과 같이 당당했다. “으이그......” “너희들 정말 이제 사고 치지 마라. 부끄럽다....” “........ 어이구.. 겁나서 옆에 못 앉아 있겠다. 다른 사람이 다 그런 말해도 너는 그러면 안 된다. 네가 우리 집에 와서 한 일을 생각하면 .....” 인준은 친구들이 입구에서 벌인 일을 생각하다가 무심코 친구들에게 주의를 주는 말을 내뱉고 말았다. 옆에 있는 친구 하나가 곧바로 대꾸했고 인준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며 말을 잊었다. 분명히 자신이 그 친구의 집에 가서 온갖 실례란 실례는 다 했으니까. 진성과 현준은 놀랐다. 과 친구들이 이렇게 이벤트 장소인 게임 센터에 나타날 줄은 전혀 예상 못했다. “현준아, 너 혹시 다른 사람에게 알린 적 있냐?” “....... 아니, 우리 가족밖에 모르잖아. 내가 시간이 남아서 사람을 만나는 것도 아니고..” “... 나도 마찬가지인데... 도대체 어떻게 알았지? 우리 신상 명세가 인터넷에 뿌려진 건가?” “...... 설마...” “아니겠지? 아, 어쩌면 이번에 베타 테스터 중에 우리 과 친구나 그 형제가 섞여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설명이 되잖아.” “그럴 수도 있겠네. 그나저나 그 녀석들 조금 화낼텐데... 우리 아예 알리지도 않았잖아. 그 녀석들 우리가 게임하고 있는 줄도 몰랐을 텐데.... ” “........ 어쩌지?....” 진성과 현준은 눈만 깜박이며 서로 먼저 얘기하길 바랬다. 문명 온라인에서 지원하는 문명마다 상당히 자신만의 특징이 있었지만 이집트 문명의 특징 중 가장 큰 것은 태양신 라의 아들 파라오가 지배하는 사회이자 국가였기 때문에 사회의 통제가 쉽고 반란의 가능성이 매우 적다는 점이었다. 문명 온라인에서 처음 하는 사람들이 가장 곤혹스러워 하는 부분이 제멋대로 흘러가는 사회와 그로 인해 일어나서 폭동, 봉기 등이었다. 어느 정도 문명마다의 기본 빌더 오더가 서서히 생겨나지만 초보자들은 처음의 사회에 대한 이해와 그 컨트롤이 어렵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이집트 문명은 그런 사람들에게 비교적 쉽게 다가오는 문명 중 하나였다. 시대에 따라서 그 영향력이 다르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파라오의 명령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문제가 별다른 저항 없이 실행되었다. 또한 초보자들은 전쟁에서 침략보다는 방어에 어려움을 느꼈다. 군대를 정비해서 어떤 평원에서의 전투는 이기고 지고에 상관없이 비교적 초보자들도 쉽게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떤 지역을 꼭 방어해야할 필요가 있을 때, 그런 방어에 대한 전략은 정말 쉽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이집트 문명의 발달된 건축기술은 막강한 요새의 구축을 용이하게 했다. 비록 많은 물자가 소요되지만 든든한 방어를 다른 문명보다 빨리 기술적으로 구축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 장점이었다. 이집트 문명도 무리한 게이머의 운영에 반란과 무장봉기, 폭동이 일어날 수 있었지만 그런 불만을 신을 향한 대규모 행사를 통해서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 역시 제공되었고 기본적인 문명의 디자인 자체가 ‘신의 나라’에 맞춰져 있었다. 한석은 자신이 입고 있는 이 에어로빅 같은 옷을 입고 처음 천 명이나 되는 사람 앞에 서기가 참으로 난감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한석은 대기실에서 진성을 보았다. “......... 강진성, 오랜만이다. 네가 이렇게 게이머가 될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더구나 그 얼굴 없는 게이머가 너라니......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어떻게 그렇게 시치미 떼고 속였냐?” “...... 아... 김한석이구나... 그럼.. 아까 그 소동도?” “휴.. 맞아. 그런데 너 어쩌면 그럴 수 있냐?” “..... 별로 드러내고 싶지 않았거든. 지금이야 프로 게이머이기에 어쩔 수 없지만 그 때는 아마추어였잖아. 괜히 알려지면 귀찮은 일만 벌어질 테니까...” “......... 그래도 너무 심했다.” “... 인정.... 그건 미안하게 생각한다.” “... 됐다... 아무튼 이왕 게이머 된 것 열심히 해라. 하긴 그 플레이 파일 보니까 정말 대단하긴 대단하더라.. ” “............ 얼마나 연습을 했는데 그 정도도 못하면 안 되지..... 이번 게임에서 나는 아틀란티스 문명으로 할 테니까 한 번 잘 해 보자.” “그래? 너는 로마 제국 아니었냐?” “원래는 로마 제국인데 아틀란티스와 한국은 특별히 상대도 연구할 겸, 어느 정도 플레이는 할 수 있게 연습했거든.” “그래? 나는 이집트 문명, 아무튼.... 게임 재미있게 한번 해 보자!” “좋지.” 진성과 한석은 무대아래에서 위로 서서히 움직여서 미리 준비된 문명 온라인 전용 프로 게임기로 올라갔다. 각 게임기에는 3~4명이 달라붙어서 여러 가지를 체크해 주었다. 특별히 한석의 옆에는 공동진이 붙어서 게임기와 연결된 헤드셋을 통해 프로 게임기에서의 게임 방법에 대해 알려주고 있었다. 게임 시스템은 거의 같지만 처음 하면 쉽게 적응하기 힘들기 때문에 공동진이 붙어서 코치를 해 주었다. 드디어 게임이 시작되었다. 한석은 자신이 분석했고 재미있어한 ‘이집트 문명’을 선택했고 진성은 자신의 주 문명인 로마가 아니라 ‘아틀란티스’를 선택했다. 테스터들은 그런 선택에 예상 밖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아틀란티스 문명은 존재하지 않았던 일종의 상상의 문명이라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견해였다. 플라톤의 대화편에 실린 몇 개의 문장이 아틀란티스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원인이었다. 하지만 문명 온라인 개발팀은 그런 아틀란티스에 대한 문명의 씨앗을 찾는 작업에 들어갔고 결국 아틀란티스라는 이미지에 맞는 문명의 씨앗을 창조해 내었다. 그 점에서 다른 문명과는 달랐지만 그 독특한 개성에 여러 검증 과정을 거쳐서 문명 온라인의 문명에 포함되게 된 것이다. 문명 온라인에서 지원하는 아틀란티스는 테스터들이 뽑은 가장 다루기 어려운 문명이었다. 아틀란티스는 초반에 아주 약했다. 전체적으로 약한 것이 아니라 방어의 핵이 되는 군사적인 부분이 전체 문명 중에서 제일 약했다. 게다가 문명의 발전 속도도 그리 빠르지 않았고 인구 당 가능한 군인 수도 상당히 적었다. 그런데다가 처음 시작하면 복잡한 사회에 대한 적절한 명령을 내려야 했다. 그 부분에서의 실수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중요했다. 사회의 통제도 어려웠고 초반의 방어도 어려운 그야말로 이집트와는 거의 반대인 문명이 바로 아틀란티스였다. 하지만 그런 단점을 상쇄할 만한 장점도 있었다. 그것은 초기에 주어지는 발전된 문명이었다. 나머지 문명들보다 이미 발전된 상태에서 출발했다. 그것은 군대의 강력함을 뜻했다. 아틀란티스의 군대는 소수이면서도 강력하고 기동성이 뛰어났다. 시대에 따라 정도가 다르지만 그런 기동성을 보장하는 운송수단들이 초기부터 제공되었다. 또한 아틀란티스는 초반에서 중반까지만 잘 견디면 장기전에서는 타의추종을 불허할 문명이었다. 너무 초반이 어려워서일까 아틀란티스에는 상상의 문명다운 타레도라 불리는 문명 온라인의 유일한 비공정과 포르투라고 하는 투척용 폭탄까지 개발할 수 있었다. 어쩌면 사기라고 볼 수 있는 그런 도구의 존재에 테스터들 사이에 아틀란티스가 인기폭발이었지만 어느 정도 고수가 되지 않고서는 거의 초반을 넘기기가 사실상 힘들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어서 관심은 시들해졌다. 그런 문명을 프로 게이머 스키피오가 선택하자 테스터들은 의아해하면서도 프로 게이머가 운영하는 아틀란티스의 모습을 기대하기 시작했다. “우앗..........” 밖에서 누군가의 지시를 따라 했는데 순간 자신은 거대한 피라미드가 건설되고 있는 현장의 하늘 위에 떠 있었다. 한석은 화면으로 보는 것과 자신이 직접 느끼는 것과의 차이를 몸으로 경험했다. 머리는 당연히 하늘이 아니라 그렇게 느껴지는 것뿐이라 자꾸 몸을 일깨웠지만 몸은 얼어버렸다. “한석씨, 몸의 긴장을 풀고 이제 아마추어에서 했던 것과 같이 하시면 됩니다. 음성으로 명령을 내리는데 아마추어 버전과는 달리 정해진 메뉴와 같은 명령이 아니라 하고 싶은 것을 다 해 보십시오. 아마 대부분은 가능할 겁니다. 또 화면의 전환이 아주 빨라 어쩌면 멀미를 느낄지도 모릅니다만 조금만 있으면 적응될 겁니다. 즐거운 게임 되십시오.” 공동진의 목소리였다. 한석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머리와는 달리 몸은 아직도 저항하고 있었다. 5분이 넘어서야 몸이 적응했다. 한석은 눈앞의 거대한 도시와 그 외곽에서 지어지는 피라미드의 건축현장을 볼 수 있었다. 영화 같았다. 한석은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뭐든지 음성으로 해 보라는 말에 가까스로 입 밖으로 말을 했다. 한석은 분명 자신의 게임을 천여 명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더 긴장했다. “피라미드로 가까이.” 말하는 순간 삼분의 이 정도 건축된 피라미드의 가장 위쪽 바로 위에 떠 있었다. “...으악....” 너무 갑작스런 변화에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그리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너무 놀랐다. “휴.... 헉헉........” 이미 한석의 머리에는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은 날아가 버렸다. 놀랐지만 너무 대단했다. “전체 광경.” 한석은 원래의 자기 위치로 돌아갔음을 알았다. 정말 실감나고 정말 재미있는 게임이었다. 한석은 이제 대충 어떤 식으로 해야 할지 감을 잡았다. 한석은 두리번거리며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푸하하하하하.... 저 사람 표정 봐. 이야... 저런 표정이라니 정말 실감나는데...” “와... 저 얼굴 보니 장난이 아닌 모양이다. 새파랗게 질렸다. 무슨 문제 있는 것 아닐까?” “아니야. 저 얼굴 봐. 저건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이라고. 나도 뽑혔으면..... 아...” 밖에서 한석의 플레이를 지켜보는 테스터들은 한석의 놀랍고 실감나는 표정에 부러워했다. 처음의 비명 지르는 모습에 몹시 웃었지만 차근차근 적응해 나가고 무엇보다도 게임에 열중해서 정말 즐겁다는 표정이 얼굴에 가득하자 테스터들은 멀티비전을 통해서 본다는 것에 만족하지 못함을 느꼈다. 자신들도 프로 게이머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마음속에 일기 시작했다. 진성은 게임을 시작하지 않았다. 상대인 한석이 처음 프로 게임기를 접했기 때문에 자신의 첫 경험을 생각하면서 배려 차원에서 그저 아틀란티스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것과 사회가 혼란되지 않게만 하는 최소한의 명령만 할 뿐이었다. 진성은 프로 게임기를 통해서 아주 많은 테스트와 게임을 했지만 아직도 회사 자체의 비공식 이름인 PVR(Pseudo Virtual Reality)로 부르는 이 인터페이스에 감탄했다. 자신이 직접 모든 것을 만지고 느낄 수는 없다고 해도 커다란 화면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현실감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재미있는 영화라고 해도 수십, 수백 번 보게 되면 질릴 만도 한데 진성에게 문명 온라인의 프로 버전은 정말 아직도 새로운 감상을 느끼게 했다. “스키피오, 이제 해도 될 것 같은데...” 공동진의 목소리였다. 미리 어느 정도 테스터가 익숙해지면 공동진이 스키피오, 진성에게 말해 주기로 약속했었다. 진성은 수도인 아틀란티스 위로 올라가서 한번 크게 기지개를 켜고는 게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번 게임의 지형에서 아틀란티스는 지중해의 섬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존재했다는 증거도 없고 어디 인지도 모르기에 문명 온라인 팀은 상대의 문명에 따라 아틀란티스의 위치를 조금씩 바꾸었다. 당연히 게이머는 그 위치를 예상하기 어려웠다. 진성은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빠르게 문명의 발전을 시작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초반에 당하지 않는 점이었다. 상대가 아무리 이런 프로 게임기에 익숙하지 않다고 해도 초반에 약하지 않은 이집트 문명이라면 위험했다. 게다가 그리 멀지도 않기 때문에 더욱 더 위험했다. 초반의 정찰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고 역량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진성이 생각하기에 아틀란티스가 초반에 약한 이유 중에 가장 큰 것은 바로 군대의 실전 경험이 전무하다는 점이었다. 왜 군대가 그렇게 약해졌는지에 대한 배경은 진성도 몰랐지만 여러 번 플레이해서 현준과 분석해 본 결과 진성 자신의 생각에 아틀란티스의 군대는 실전 경험이 없어서 전쟁수행 능력이 극도로 뒤쳐졌다. 진성은 군인들을 더 모집하지 않고 기존의 군인들을 혹독한 훈련에 투입했다. 반발은 강한 처벌과 혹할 만한 보상의 채찍과 당근을 이용해서 무마했다. 제일 중요한 것은 군대의 체질을 개선하는 것이었다. 적을 보면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맞서 싸우는 것이 중요했다. 원래의 군 지휘관들을 모조리 갈아 치우고 새로운 훈련을 통해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군인을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지휘관으로 삼았다. 진성은 그것을 통해서 체질 개선과 군의 자신에 대한 충성도를 높이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았다. “이번에는 확실한 방어전으로 가야겠지? 음.... 일단은 정(正)이겠군. 나중에는 상황을 봐서 변화시켜야지.” 손자의 병법에는 전투 전술에 대해서 두 가지로 나타내었다. 바로 기(奇)와 정(正). 기는 기습전이나 상대의 허를 찌르는 작전을 말했고 정은 정규전과 같은 전면 대치에서 유용한 작전을 가리켰다. 기는 아주 위험한 작전이었다. 상대가 예측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큰 피해를 줄 수 있지만 반대로 간파당하면 공격한 군대가 심하면, 전멸을 당할 수도 있는 양날의 검이었다. 그래서 기습적이고 절묘한 전략은 적절한 시기와 그 조건이 선행되어야 했다. 반대로 정은 적과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기도 힘들지만 일방적으로 밀리지도 않았다. 압도적인 전력차라면 어쩔 수 없지만 비슷한 경우에는 정의 전략이 위험부담이 적었다. 진성은 당연히 정의 전략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객관적으로 약한 전력으로 방어전을 펼쳐야 하니 극단적으로 밀리는 상황을 제외하면 당연한 선택이라 할 수 있었다. 진성은 이미 상대의 문명이 이집트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에 맞게 준비를 했다. 당장 강력한 해군을 양성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 공격적인 해군은 포기했다. 대신에 착실히 군대를 늘려가면서 상대의 상륙작전에 대비했다. 진성이 알기로 이집트 군대 역시 바다에서의 전투는 익숙하지 않았다. 그런 것을 고치려면 게이머 자신이 진성처럼 소수의 군대를 제외하고는 모두 해산시켜 훈련으로 통해 다시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진성은 불리한 약점을 장점으로 바꿔 버렸다. 모든 군대를 남쪽의 예상되는 상륙지점에 고루 분포시키고 부유한 재정을 통해 장애물을 쌓았다. 제일 좋은 것은 성을 짓는 것이지만 시간과 그 넓은 곳에 성을 쌓을 때 필요한 막대한 재물이 발목을 잡았다. 아무리 튼튼한 성으로 방어를 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었다. 지금은 좋지 않은 상황이라서 이런 방법을 사용하지만 고금을 통해 공격이 가장 좋은 방어라는 말을 진성 역시 알고 있었다. 한석은 정신없이 명령을 내렸다. 자신이 분석을 했을 정도로 많은 플레이를 해 본 이집트 문명이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아마추어 버전과 프로 버전이 게임 자체는 많은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이 만든 오더대로 발전시켰다. 처음으로 한다는 긴장감과 점점 더 빠져드는 게임에 대한 흥분이 한석을 들뜨게 만들었다. 나일강 유역의 치수문제에 신경 쓰면 사회에 대한 다른 컨트롤은 별로 필요하지 않았다. 한석은 넓은 영토와 막대한 물자에서 나오는 엄청난 군대를 모으기 시작했다. 태양신 라의 아들, 파라오의 이름아래 모이는 신의 군대는 물경 50만이 넘었다. 또한 50만을 실어 나르기 위한 수송선의 건조 역시 이루어지고 있었다. 다른 문명에 비해 바다에 대해 약했기에 한꺼번에 많은 인원을 실어 나를 배를 만들 수가 없어 많은 수송선이 필요했고 그로 인해 시간이 지연되었다. 한석은 아틀란티스라는 문명이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빨리 공격을 원했다. 하지만 초기에 강한 것과 달리 약한 해전의 기술 때문에 원하는 배의 반 정도밖에 만들지 못했다. 한석은 곧 결단을 내렸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아몬 군단과 레 군단, 라스 군단, 사디 군단, 코로나 군단은 배를 타고 아틀란티스로 건너간다. 지금 당장.” 한석의 군단 중 거의 절반이 수송선을 타고 정찰선이 보고한 위치의 아틀란티스로 출발했다. 25만이라는 대군이 한곳에 집중적으로 상륙을 해서 어느 정도 방어가 가능한 곳을 점거할 수만 있으면 아틀란티스와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일단 한번 점거하면 공격에서 방어가 될 테고, 뒤에서 곧 25만의 군대가 도착할 테니까. 당연히 쉽게 이길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계속적으로 군대의 전력을 키우기 위해서 여러 다른 사회의 기술들도 같이 개발하는 한석은 국가 전체의 전력을 그 수송선을 만들기 위한 것에 아낌없이 투자했다. 그리고 곧 배를 완성시켜서 남은 군대를 이끌고 아틀란티스로 향했다. 진성은 이집트에서 엄청난 수의 수송선이 온다는 정찰부대의 보고를 받았다. 예상 경로를 검토했고 그 근처의 지형의 전문가를 통해서 대군이 캠프를 칠 장소를 미리 선정했다. 방어전의 이점 중 하나가 바로 익숙한 지형이었다. 진성은 그 대군이 진지를 치기에 적당한 곳을 살펴보다가 그 사이에 작은 강이 흐르는 것을 알았다. “그 인근의 주민들을 동원해서, 물론 삯을 주는 조건으로, 강에 둑을 쌓아라. 물 한 방울 아래로 흐르지 않도록 만들어라.” 넉넉한 재정을 통해 민간인을 불만 없이 동원할 수 있었던 진성은 천천히 대군을 맞을 준비를 했다. 해안가에까지 흩어져 있던 정찰부대를 모두 모았다. 그리고 이제까지 증강과 훈련을 동시에 해 온 군대를 정비했다. 이제 갓 10만이 넘었다. 병력면에서는 분명 이집트에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라고 진성 스스로 생각했다. 하지만 용맹한 10만의 병력이었다. 절대 밀린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진성은 최대한 이집트의 군을 끌어 들여서 섬멸하기로 했다. 군대를 동원해 장애물 뒤에서 이집트 군과 교전하다가 후퇴를 해서 적의 대형을 길게 만들은 후에 계속되는 교전에서 패배를 당함으로 이집트 군대가 지켜야할 곳이 많도록 전선을 늘릴 생각이었다. 전선이 늘어나 병력이 흩어진 상대는 더 이상 두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상대가 그런 책략에 빠지지 않는다면 작은 강을 막은 것처럼 식수를 봉쇄해서 고사 작전을 쓸 수도 있었다. 진성은 상대를 기다리면서 이제 막 궤도에 오른 발전을 통해서 꾸준히 군을 업그레이드 시키고 장기전으로 갈 때를 대비했다. 특히 고사작전이 필요할 때를 대비해서 해상 봉쇄를 위한 전함의 건조를 시작했다. 이집트에서 온 1차 원정부대는 쉽게 상륙했다. 한석은 이집트 문명의 약점 중 하나인 바다에서 위력이 떨어지는 군대의 특징으로 인해 상륙을 가장 염려했다. 하지만 일단 상륙을 용이하게 넘어갈 수 있자 자신감이 생겼다. 원정부대는 서서히 바닷가를 벗어났고 곧 장애물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장애물 뒤에는 그리 강해 보이지 않는 군대가 진을 치고 있었다. 이집트에서 아직 출발하지 않았던 한석은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일단 원정군이 몰리지 않을 안정된 주둔지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1차 원정부대의 전진을 명령했다. 직접 가 있지 않는 이상 세부적인 전투까지 신경 쓸 수 없었기에 한석은 최대한 신중하게 전진하라고 지시했다. 원정부대는 점차 장애물을 향해 다가갔고 곧이어 처음으로 교전이 일어났다. 낯선 지형에 대한 익숙하지 못함과 게이머의 지시를 받은 원정 총사령관은 일단 게이머에게 사실을 알리고 신중하게 대처했다. 하지만 전투는 곧 종결되었다. 너무도 쉽게 적은 격퇴되었고 적이 진치고 있던 장애물은 금방 함락시켰다. 원정부대는 천천히 야금야금 아틀란티스의 중심부를 향해 나아갔다. 하지만 낮과 밤을 가리지 않는 잦은 소규모 전투에 1차 원정부대는 점점 지쳐갔다. 신중을 기하기 위해 밤에는 전투 불가라는 방침으로 계속해 오던 원정부대는 게이머 한석의 지시 아래 게릴라를 펼치는 적을 괴멸시키기를 작정했다. 원정부대는 레 군단을 분리해서 적의 소규모 게릴라 부대를 소탕하는 한편 다른 부대들은 모두 2차 원정군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주둔지를 찾았다. 그 정도면 충분하리라 생각한 한석의 예상을 깬 것은 또 다른 게릴라 부대의 등장이었다. 기동성에서 너무 큰 차이가 나서 상대의 치고 빠지는 전법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결국 행군을 멈추고 빨리 근처에서 50만이 머물 수 있는 주둔지를 찾았다. 그런 동안에 한석은 원정군의 불만을 샀다. 월등한 전력인데 계속적인 방어 위주의 전략에 현지의 총사령관을 비롯해서 지휘관들의 불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한석은 그 불만이 왜 자신들은 신의 군대인데 상대를 너무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자신감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그 유명한 게이머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 공격하라고 할 수는 없었다. 두 부대가 합쳐야만 가능하리라 생각한 한석이었다. 하지만 한석은 계속되는 게릴라전과 부족해지는 식수, 가중되는 불안, 늘어가는 불만으로 인한 혹이 터져 버릴 지는 전혀 예상 못했다. 태양신 라의 아들 파라오를 향한 강한 복종심은 신의 군대라는 오만으로 나타났고 그런 신의 군대가 저런 오합지졸을 한꺼번에 쳐부수지 못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사령관을 위시하여 지휘부에게 생겨났다. 사령관은 파라오를 배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명령을 복종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신의 군대로서 그 위엄을 보여 준다고 하며 각 군대를 나누어 게릴라 전을 행하는 아틀란티스의 군대를 모두 섬멸하도록 지시했다. 25만의 군대가 5개로 나누어져 각기 다른 곳으로 전투를 하는 소탕 작전이 시작되었다. 그 작전을 손바닥 보듯 꿰뚫어 보고 있던 진성은 웃었고, 그 소식이 전해진 이집트의 한석은 왜 사령관이 그런 지시를 했는지 이해를 못했다. 한석은 이미 지휘 계통이 중간에서 끊어진 것을 알았지만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드디어 움직여야겠군.” 진성은 적의 병력을 나누는데 성공했다. 적은 5개의 부대로 나누어졌다. 각 부대는 거의 5만 여명, 진성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부대는 10만이 넘으니 일대일로 붙으면 당연이 진성의 부대가 이길 수 있는 병력이었다. 조금 상대의 전체 병력수가 적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진성은 손바닥처럼 훤히 꿰뚫고 있는 지형을 이용해 적의 부대 가까이로 부대를 진군시켰다. “으...악!” “적군이다. 적군이 공격해 온다.” “으윽..... 20만이 넘는 대군이다....” “도망가라. 도망가서 전해라....” 진성은 10만이 넘는 병력으로 5만의 군대를 기습 공격하면서 절대 병력의 피해를 최소화해야 했다. 상대는 5개의 부대이지만 진성에게는 오직 하나였다. 그래서 진성은 첩자를 이용했다. 진성의 군대의 군세는 부풀리고 이집트 군의 전력은 약하게 느껴지는 선동과 공격하기 전에 재수가 나쁜 지형과 그런 날씨라는 근거 없는 소문을 이집트 진영에 퍼트리기도 했다. 진성이 노리는 것은 단 한번의 승리가 아니라 패잔병들이 다른 부대로 들어가 그 부대 역시 공포와 혼란이라는 전염병을 감염시키는 것이었다. 한번 당한 공포감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 법이었다. 상대의 지휘관이 그런 것을 잘 알아서 패잔병들을 따로 관리해서 전쟁에 투입하지 않는다면 상대의 병력이 추가되지 않는 것이고 그 반대라면 진성의 노림수와 같았기에 손해가 없는 작전이었다. 게다가 원정대가 부대를 분리시키는 것을 본 진성은 한석이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거나 이집트에서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진성이 느끼기에 아주 성공 가능성 높은 작전이었다. 진성의 작전은 주효했다. 3개의 부대를 특유의 기동력을 발휘해서 섬멸했고 2대의 군대는 각개격파의 계를 알고는 합쳤지만 그 지형이 협곡의 내부여서 그리 힘들지 않게 큰 피해를 줄 수 있었다. 게다가 그 협곡에는 식수가 없었기에 날이 갈수록 남은 원정대는 어려워졌고 진성의 부대는 입구만 봉쇄했기 때문에 탈출하기도 어려웠다. 한석은 거의 아틀란티스에 도착할 즈음에 제2차 원정대에서 그런 보고를 듣고는 화가 났다. 평소 게임하다가 잘 풀리지 않으면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지금의 한석은 정말 화가 났다. 정말 몰입한 게임이기에 더 화가 났다. 그러면서도 상대인 진성이 대단함을 느꼈다. 한석은 재빨리 상륙해서 문제의 그 협곡으로 향했다. 진성은 맥없이 무너지는 원정대를 보면서 게이머인 한석이 원정부대에 없음을 알고는 미리 정찰부대를 예상 상륙지점에 배치했었다. 20만이 넘어가는 상대의 병력에 진성은 순간적으로 놀랐다. 만약 진성이 처음의 원정부대를 가만히 두었다면 상당히 어려운 게임이 될 뻔했었다. 진성은 거의 전투부대로서 가치가 사라진 협곡 안의 원정대를 지킬 필요가 없고 배후를 당할 위험이 있어서 부대를 후퇴시켰다. 이때 진성의 부대는 처음의 10만 중에 8만이 여전히 최상의 전투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진성의 전투부대는 실전의 경험과 전투에서의 승리를 맛본 강군 중의 강군이 되어 버렸다. 한석은 전장에 도착해서 부대를 보고는 이미 보고를 받았지만 그 비참함에 말을 할 수 없었다. 25만 중에서 거의 20만이 섬멸당하고 5만 중에서 제대로 싸울 수 있는 병사가 5천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상대가 아틀란티스라면 초기에 그렇게 많은 병력을 모을 수도 없고, 기습을 제대로 할만한 전력도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던 한석이었다. 그런데 이런 결과가 나오다니. 게다가 한석은 진성이 자신이 신중하게 진군하라는 부대를 이렇게 완전히 분리시켜 각개격파 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이유를 몰랐다. 단순히 여러 소규모 부대의 게릴라로 인한 원정군 지휘부의 판단 정도로 생각했지 ‘신의 군대’라는 자존심으로 인한 결과라는 것은 생각지 못했다. 한성은 일단 협곡에서 벗어나 넓은 평지에 진지를 구축했다. 시간은 부족했지만 그렇다고 바로 쳐들어간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한석은 상대의 전력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일반적인 아틀란티스라면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전과가 발생했기에 보통의 아틀란티스에 대한 정보는 모두 다 쓰레기통에 집어넣어야만 했다. “........ 처음에 시간적으로 내가 늦은 건가?” 한석은 자신이 처음으로 프로 게임기를 접했기 때문일까 의심하기도 할 정도로 상대를 알 수가 없었다. 한석은 과연 언제, 어떻게 공격을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상대를 완전히 파악해서 공격하면 좋지만 상대의 발전 정도를 모르고 이미 초반이 지난 지금 시간은 금보다 더 중요했다. 특히 상대는 아틀란티스였다. 한석은 어쩌면 이미 승리의 흐름은 상대에게 넘어 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쩔 수가 없겠구나. 어차피 게임이니까... 즐기자...” 한석은 마음을 편하게 먹었다. 상대는 이 게임에 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실력자인 프로 게이머고 자신은 베타 테스터일 뿐이라 생각했다. 밖에서 구경할 사람들을 위해 대규모 전쟁씬을 선물로 주기로 생각했다. 한참을 게임에 빠져 있다가 이제야 밖에서 이 게임을 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기억난 것이다. 한석은 제갈량처럼 분위기 있게 출사표를 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군주이기에 출사표를 쓰는 마음으로 상대인 진성에게 평지에서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가리자는 전서를 써서는 사자를 통해 보냈다. 상대인 프로 게이머 스키피오, 진성이라면 결코 피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곧 답서가 날아왔다. “.............................. ................................ ................................ ................................ 북동쪽으로 하루 정도의 거리에서 4일 뒤. 정오.” 한석은 자신의 부대를 천천히 이동시켰다. 진성은 한석의 전서를 받고는 즐거웠다. 게임을 몰입해서 하면서도 완전히 빠지지 않고 어느 정도 승부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 상대가 승부가 기운 것을 알고는 당당하게 한판 붙자는 호쾌한 말을 하니 괜히 즐거웠다. 물론 진성은 위엄이 가득한 앞부분의 쓸데없는 내용과 시간과 장소를 적어서 멋있게 사신을 통해서 보냈다. 재미있는 한판이 되리라 생각했다. 거기에 진성은 밖에서 보고 있는 베타 테스터들을 위해서 또 다른 볼거리를 준비했다. 넓은 벌판에는 수많은 깃발이 나부끼는 가운데 두 군대가 서로 마주 보며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미 정면 공격을 하기로 서로 약속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시간이 되자 양 군대가 서로 진지에서 나와 진지 앞에 도열했다. 서로의 군기를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서 벌써 차이가 났다. 진성의 부대는 처음으로 경험한 큰 승리와 승리로 이끈 사령관에 대한 믿음으로 활기찬 반면, 1차 원정대가 거의 괴멸하다시피 한 이집트의 군대는 어딘지 모르게 힘이 빠져 보였다. 게임이지만 진성의 부대에서 뭔가 모를 위엄이 한석의 부대에는 병력은 많지만 상대적으로 왜소해 보였다. 그것을 느꼈는지 한석은 서둘러 앞으로 진군시켰다. 한석은 그나마 오전에 신을 향한 의식을 치르면서 태양신 라의 위대함을 역설해서 군의 사기를 높인 상태였다. 한석은 후회 없는 전투가 되기를 원했다. 기습은 양쪽 다 생각에 두지 않았다. 25만 대 10만이지만 정정당당한 정면 승부였다. 객관적으로는 당연히 진성의 부대가 불리했다. 2배가 넘는 병력의 상대를 지리적인 이점까지 포기하면서까지 전투를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진성은 그런 조건에서도 상대의 제의를 받아 들였다. 물론 게임을 보고 있는 테스터들도 그런 게이머 스키피오로 인해 멋진 장면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해서 좋아했다. 진성은 이미 아틀란티스의 군제도를 처음에 완전히 바꿀 때부터 로마의 제도와 비슷하게 만들었다. 특히 아틀란티스의 군이 기동성이 높고 한 사람의 전투력이 상당히 높기 때문에 100명을 단위로 하는 백인대를 전체 부대의 유기적인 최소 단위로 정했다. 그리고 강도 높은 연습과 충분한 훈련으로 사령관에서부터 바로 백인대까지 한 번, 두 번으로 명령이 전달되는 빠르고 정확한 지휘체계를 완성시켰다. 그런 군대의 특성으로 인해 진성은 완전히 새로운 전략을 선보일 수 있었다. 드디어 두 부대가 물밀 듯이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말할 수 없이 거대한 두 생명체가 넓은 벌판에서 싸우는 듯했다. 병력수에서 앞선 한석의 군대가 진성의 군대를 마치 싸는 듯한 모습으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한석은 그런 모습에 더욱더 독려했다. 그 순간 진성의 명령이 빠르게 전달되었고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가 많은 수의 작은 생명체로 순식간에 나누어졌다. 그리고 각 생명체는 자기에게 부여된 임무를 자기만의 판단으로 헤쳐 나갔다. 어떻게 보면 무질서했지만 상대인 큰 생명체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랐다. 작은 생명체들은 큰 생명체의 강한 부분은 피해버리고 약한 부분에는 서로 뭉쳐 더 큰 생명체로 바뀌어 돌파해 버렸다. 작은 생명체들은 집요하게 덩치 큰 생명체의 느린 반응을 노렸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를 정면으로 뒤엎어 버렸다. 한석은 마치 생명체와 같이 움직이는 상대의 부대를 보고는 넋을 잃고 말았다. 마치 사령관이 직접 그 작은 부대에게 지시를 내리지 않고는 거의 불가능한 움직임이었다. 허탈했지만 도리어 웃음이 나왔다. 이런 상대와 게임을, 프로 게임기를 통해 게임을 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최선을 다했다는 마음이 더욱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저 멀리 하늘에서 뭔가가 유유히 날아왔다. 사람 키의 10배가 넘는 비공정 타레도였다. 한석을 비롯해 멀티비전을 통해 게임을 보고 있었던 테스터들은 함성을 질렀다. 이렇게 치열한 게임 속에서 치밀하게 모든 것의 타이밍을 재지 않았다면 저런 비공정 타레도가 이렇게 빨리 나오기는 쉽지 않았다. 싱글 게임이나 상대가 아주 하수인 경우에는 비공정 타레도가 나올 수도 있지만 테스터들은 눈앞의 엄청난 게임 속에서 비공정 타레도가 등장하자 그 흥분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아.... 비공정......... 타레도.....” 한석은 웃음이 절로 나왔다. 확실히 상대는 프로다. 이런 것까지 다 계산하다니. 진성이 같은 과 친구이기도 했지만 프로로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한석은 인정했다. 하지만 놀랄 일은 더 남았다. 비공정 타레도가 전장을 몇 바퀴 선회하니 전장의 작은 생물체들은 일제히 전장을 벗어났다. 한석은 이미 게임에 졌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컨트롤은 전혀 하고 있지 않았다. 그로 인해 전장에는 이집트의 원정부대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비공정 타레도는 유유히 전장을 돌다가 갑자기 낮게 날더니 뭔가를 떨구었다. 테스터들은 그것이 무엇일까 유심히 쳐다보았다. 테스터 중 누군가가 외쳤다. “......와... 포르투다!” “꽈콰쾅! 꽝꽈꽈꽝! 꽈꽝! 쾅!” 비공정 타레도에서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투척용 폭탄인 포르투가 이집트 원정부대를 타겟으로 떨어졌다. 그리 많은 양이 아니었지만 포르투가 등장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테스터들은 흥분으로 발광 직전의 상태가 되어버렸다. “두두두두... 두두두두..” 발을 구르는 소리가 실내를 엎어버렸다. 박진감 넘치는 게임을 마무리하는 비공정 타레도와 포르투. 테스터들은 발을 구르며 박수를 치고 환호했다. 게임이 끝나고 게임기에서 두 게이머가 나올 때까지도 여전히 테스터들의 환호와 발구름은 멈추지 않았다. 두 게이머가 무대의 가운데로 나오고 서로 악수하자 환호는 극에 달했다. 두 게이머가 퇴장하는 순간까지도 테스터들은 앉을 줄 몰랐다. “휴....... 정말 대단하다.” 아래로 내려온 한석은 얼굴에 웃음을 지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 뭐.. 프로잖아.....” 진성은 수줍은 듯 얘기했다. “앞으로는 연락 좀 하고.. 그런 것은 말 좀 하고 다녀라......” “..... OK!" 둘은 각자의 대기실로 들어갔다. 게임 시간은 거의 40분 정도였지만 테스터들이 느끼는 시간은 거의 영화 한 편을 보는 시간이었다. 화면도 화면이지만 전투할 때의 사운드와 압도할 만한 군대의 모습과 그런 군의 전략적인 싸움, 멋진 게이머의 판단과 게임을 보는 이들을 위한 서비스. 마지막의 그 비공정과 폭탄, 잊을 수 없는 게임이리라 생각했다. 보통 상대가 잘해야지만 명게임이 나온다는 것을 테스터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테스터들 사이에 프로 게이머 스키피오와 대전했던 베타 테스터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처음인데도 불구하고 녹녹치 않은 컨트롤과 판단력. 테스터들은 그것을 알아보았다. 스키피오는 다른 두 사람과 더 게임을 했고 현준도 세 사람과 게임을 했다. 모두 다 재미있는 게임이었지만 처음의 그 엄청난 게임을 봐서인지 테스터들은 약간 아쉬워했다. 예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려서 모든 행사는 거의 7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준비된 다과를 나누는 시간에 무대로 현준과 진성이 나타났고 개인적인 질문을 받고 대답하는 시간도 가졌다. 그 때, 진성의 학교와 과가 드러나고 말았다. 그것은 인준과 한석이 데려온 진성의 과 친구들 때문이었다. 인준과 한석은 서서히 그 친구들 옆에서 멀찍이 떨어졌다. 마치 일행이 아닌 것처럼. 프로 게이머들이 돌아가자 남은 테스터들끼리 다과를 즐기며 서로 오늘의 감동에 대해서 말했다. 그러다가 그 중에 한명이 크게 말했다. “저......... 우리... 사이트 하나 만드는 게 어떻습니까? 오늘 정말 좋은 게임을 보여준 저 두 프로 게이머라면 앞으로도 정말 잘 나갈 테고, 그러면 더 많은 명게임이 나오겠지요? 그리고 베타 테스터 1조로 모였는데 이렇게 그냥 헤어지면 아쉽지 않습니까?” 같이 테스트를 하고 같은 플레이에 열광해서인지 어느새 공감대가 생겼다. “....... 좋아요. 우리 사이트 하나 만들죠.” “네.. 좋아요. 만들어요.” “좋아요..” “찬성!!” “.... 자... 말만 하지 말고..... 제가 펜과 종이 돌릴 테니까 이름과 핸드폰 번호, 이메일 주소 좀 적어주세요. 꼭 귀찮더라도 핸드폰 번호도 적어주세요. 자... 여기요.....” “.... 그럼 적을 분은 적으시고.. 우리 사이트는 어떻게 만들까요?” “제가 처음 얘기했으니... 제가 운영하는 사이트가 하나 있는데 그것을 바꾸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뭐 상업적인 사이트가 아니었으니까.. 걱정은 하지 마세요...” “좋아요......” 테스터들 중에서 몇 몇의 적극적인 사람들이 얘기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이름은 어떻게 하고, 회원제로 할 것인지 아니면 공개 홈페이지로 만들 것인지 등을 의논하고 결정했다. 평소 게임 폐인과는 달리 아주 과단성 있는 일처리였다. 사이트의 오프닝 테마는 스키피오와 한신의 기억할 수밖에 없는 대화 장면,‘복수다 vs 꿈도 꾸지마라.’ 였고 주소는 SCIPIOandHANSIN 이었다. 회원제로 운영하기로 한 사이트의 정식 오픈은 문명 온라인의 출시일로 하고 그 사이트 광고를 문명 온라인의 홈페이지를 통해 알리기로 했다 베타 테스트와 테스터들을 위한 이벤트는 무사히 끝났다. 프로 게이머와 테스터간의 대결은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자소 소프트에서는 테스터들이 가져온 캠코더를 금지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프로 게이머의 신상과 게임 플레이가 외부로 유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소 소프트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이벤트 기간 동안 테스터들이 찍어 퍼트린 화면들로 인해 게이머들의 관심은 더욱 증폭되었다. 새로운 프로 게이머 한신의 등장은 사람들로에게 스키피오의 라이벌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며 뭔가 신비함을 느끼게 했다. 특히 그 화면들 중의 가장 명게임으로 손꼽히는 게이머 스키피오와 테스터 김한석의 대결은 그야말로 최고의 히트 수를 기록할 정도였다. 이미 정평이 난 스키피오의 탁월하면서도 프로로서의 쇼맨쉽을 보여주는 멋진 장면과 대규모 전쟁과 쉽지 않는 컨트롤을 매끄럽게 잘 한 김한석의 게임 운영은 한 때 문명 온라인의 게시판을 도배할 정도로 인기폭발이었다. 특히 김한석이 스키피오와 한신의 같은 과 친구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더욱 더 관심이 증폭되었다. 항간에는 김한석 역시 프로 게이머로 등용된다는 근거 없는 얘기도 나돌았다. 게임 관련 채널에서도 자소 소프트의 양해를 구하고 김한석과 스키피오의 게임을 방송할 정도로 폭넓은 인기를 얻었다. 자소 소프트로서는 그런 관심이 나쁠 리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 시간은 흘렀고 오픈 베타 테스트는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결정에 다가오는 10월 1일 드디어 확정되었고 일주일 전인 오늘부터는 TV 광고도 나가기로 되어 있었다. ꡒ헉헉..... 현준아, 너 광고 봤냐?ꡓ 덩치 큰 덕만이 밖의 사무실 자기 자리에 앉아서 직접 정리한 전략 노트를 보고 있는 현준에게 헐레벌떡 다가와 물었다. 그 큰 덩치로 현준의 시야를 완전히 가려버렸다. 현준은 답답함을 느끼며 물었다. ꡒ무슨 광고요?ꡓ ꡒ문명 온라인! 현준이 너도 나오던데....ꡓ ꡒ네? 광고요? 제가요?ꡓ 현준은 무슨 영문인지 몰랐다. 분명 진성이가 광고 계약을 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신은 분명 계약한 적이 없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 때 이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ꡒ현준아, 나 좀 보자.ꡓ 현준은 무슨 일일까 생각하면서 이팀장의 방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니 평소 회사에서는 정말 보기 어렵고, 보기 어렵도록 자신이 노력하는 자신의 아버지, 진팀장이 같이 있었다. ꡒ앉아라.ꡓ 이팀장의 말에 현준은 무슨 일인지는 몰랐지만 쇼파에 앉았다. ꡒ내 말을 잘 들어라. 오늘부터 문명 온라인의 TV 광고가 시작되었다. 혹시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광고에는 네 모습도 나온다. 알고 있나?ꡓ ꡒ예, 조금 전에 들었습니다만..ꡓ 이팀장은 현준의 말을 끊었다. ꡒ음.... 원래는 네게 말을 하고 사용해야 했지만 그 당시 네가 엄청나게 열심히 연습을 하고 있어서 도저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돈 얘기를 하면 네 마음이 흔들릴까봐 말을 못했지. 그럴 때 나는 네 아버지를 찾았다. 아들에 대한 얘기는 당연히 아버지에게 물어야지.ꡓ 현준은 대강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 챘다. 그 때 아버지가 나섰다. ꡒ........ 내가 이팀장의 말을 듣고는 흔쾌히 허락했다. 아들이 열심히 하겠다는데 그 마음을 흔들 필요는 없다고 했지. 원래 그런 계약은 안 되지만 나와 이팀장 사이에 그런 것은 필요 없지. 암 필요 없고 말고. 그래서..........ꡓ ꡒ그래서요? 혹시 중간에 어떻게 하신 것은 아니겠죠?ꡓ 현준은 더 이상 말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재빨리 허를 찔러서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ꡒ뭐? 어... 어.....ꡓ ꡒ저는 아버지를, 아버지를 믿습니다.ꡓ 현준은 아버지라는 말을 강조했다. 마치 그 돈에 손을 대었다가는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는 듯했다. 생각 외의 공격에 진팀장은 잠깐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현준을 굴복시킬 만한 말을 한마디했다. ꡒ.......... 내 아내이자 네 엄마.ꡓ 아버지의 말을 들은 순간 현준은 절망했다. 엄마의 손으로 들어가면 다시는 나오지 않는다. 아니, 나오더라도 현준의 계약금처럼 뭉치돈이 아니라 아주 작은 형태인 ꡐ용돈ꡑ으로 나온다. 현준은 절망하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아버지인 진팀장에게 말했다. ꡒ....... 어머니가 전부 다 가져 가셨습니까?ꡓ 진팀장은 움찔했다. 사실, 반은 자신이 삼켜버렸으니까...... ꡒ아.... 그게 말이지.... 그러니까...ꡓ ꡒ아버지........?ꡓ ꡒ......... 그게.....ꡓ 현준은 자신의 몫을 중간에서 가로챈 아버지가 머뭇거리자 화가 났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되면 같이 공범이 되어야 했다. ꡒ저와 반반 나누시죠...ꡓ ꡒ........ 그게 저....ꡓ 현준은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집으로 전화를 했다. 미리 짠 이팀장과 진팀장은 현준이 전화를 하자 무슨 짓인지 몰랐다. ꡒ..... 엄마! 현준이에요. 왜 전화 했냐구요? 그게....ꡓ ꡒ...아... 알았다...ꡓ ꡒ... 엄마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죠. 나중에 빨리 들어갈께요.ꡓ 현준은 엄마에게 싱겁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현준은 비록 자신이 광고에 나오는 조건으로 받은 돈의 반의 반만을 건질 수 있었지만 충분히 만족했다. 현준 역시 그렇게 돈이 많이 필요할 정도로 낭비하거나 할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좋아하는 자동차를 산 것 외에는 진성과 같이 프로 게이머로서의 일을 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란 현준이었다. “.... 아버지, 우린 공범이에요. 공범!” 현준 역시 어머니가 진실을 아는 것은 결사 반대였다. 현준은 아버지인 진팀장에게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하고는 이팀장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평소의 당당한 모습과는 전혀 달리 이팀장은 현준의 눈을 순간이나마 피했다. “이팀장님, 이팀장님도 공범입니다. 공범!” 현준은 아버지의 공작에 이팀장 역시 관련있다고 확신한 뒤, 약간은 능청스럽게 말하고는 바로 이팀장의 방을 나왔다. 생각지도 않았던 공돈이 생기자 현준은 괜시리 기분이 좋았다. “거 봐, 내가 얘기했잖아. 저 녀석 어리숙해 보여도 결정적일 때는 안 속는다니까. 지 엄마를 닮아서 이런 돈 얘기에는 절대 지지 않는다고.” “진짜네.... 완전히 평소와는 다른데...... 그래도 25%는 건졌잖아.” “.... 뭐 그렇지. 그나저나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는데 돈이 너무 부족하지 않을까?” “어떻게든 마련해야지. 그 시간 동안 무사히 넘어가야 될텐데.... 하긴 그 정도의 기술이라면 정부에서도 당연히 관심을 가지고 있기는 할테지.....” “휴.... 걱정이군. 시간은 어느 정도 남았지?" "음..... 대략 1년 반정도 될까?" ".... 그 머저리들이 그 사실을 알까?" "알아도 어쩔 수 없겠지. 사회조직에 속하면 어쩔 수 없으니까..." "그래, 그렇겠지..." 현준이 나가자 진팀장과 이팀장의 얼굴에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이 사라지고 수심이 가득했다. 게다가 나누는 대화까지 그리 가볍지 않았다. 공기마저 무거워졌다. TV 광고의 힘은 대단했다. 게임상에서의 멋진 모습, 그대로 진성, 스키피오와 현준, 한신이 TV에 나오자 그 여파는 상상을 초월했다. 이미 수개월에 걸쳐 인터넷을 통해 알고 있었던 골수 게이머들에게는 화려한 하나의 광고일 뿐이었지만 ‘문명 온라인’에 대한 들려오는 소문만을 듣고 있었던 대다수의 어린 학생들과 게임에 별 관심이 없는 일반인에게는 너무도 대단한 실제 게임화면을 이용한 광고였다. 그리고 그 어필은 기대 이상이었다. 완벽한 가상현실이 아니라 PVR(Pseudo Virtual Reality) 시스템이지만 화면상으로는 거의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현실감이 있었다. 게다가 멋진 전쟁씬은 게임에 생소한 30대 후반 이상의 사람들에게도 하나의 영상문화로서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런 여론 때문인지 게임채널이 아닌 공중파 채널에서도 이런 ‘문명 온라인 신드롬’에 대해 다루기 시작했다. 마치 눈덩이가 굴러가며 그 크기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듯 문명 온라인에 대한 관심과 두 프로 게이머에 대한 호기심은 점점 더 커져갔다. 이미 WIS를 대신할 차세대 게임이라는 수식이 붙을 정도였고 새로운 게임의 프로리그를 위한 스폰서들이 줄을 서고 있다는 확인되지 않은 뉴스거리도 방송을 탔다. 이미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문명 온라인에 대한 관심은 단순한 관심이 아니라 새로운 문화 코드로서 서서히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그런 신드롬의 중심에는 프로 게이머 스키피오와 한신이 존재했다. 특히 스키피오는 예전부터 독특한 플레이로 유명한 데다가 문명 온라인 신드롬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게임 플레이 동영상 파일의 주인공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게이머 한신 역시 탁월하지만 드러나지 않는 게임 스타일, 화끈한 무대 매너 등으로 유명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스키피오의 팬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서 물경 200만이 넘은 것으로 예상되었다. 여러 커뮤니티 사이트에는 수십, 수백개의 스키피오 팬사이트가 만들어져서 서로 겹치는 회원들이 다수 존재할 것이라 생각해도 200만의 숫자는 적지 않았다. 게다가 인터넷 여론 조사로 나온 결과에는 조사에 응한 만 2천 여명 중에서 거의 절반인 5천여 명이 문명 온라인 게임의 아마추어 버전을 구입할 것이라 대답했고 그 중 십여 명은 프로 버전의 게임기 역시 구입할 수 있으면 하고 싶다는 의향을 밝혔다. 인터넷 조사라 신빙성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도 엄청난 숫자임에는 틀림없었다. 한신의 팬 역시 다른 게임에서 활동하는 최고의 프로 게이머와 비교해도 그리 뒤지지 않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여러분들...... 모두 수고했다. 드디어 내일, 내일 문명 온라인이 출시된다. 그 동안 정말 수고 많았다. 게임의 기획에서부터 마지막 테스트까지 여러분과 여러분이 이끄는 팀이 없었다면 절대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인정한다. 서로 다 같이 믿고 잘 참았기 때문에 이런 날도 올 수 있다. 이제 오늘이 지나면 문명 온라인은 우리의 손을 떠날 것이다. 앞으로 남은 일이 많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문명 온라인은 우리의 품을 벗어나서 수많은 게이머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제까지 제대로 된 회식 한번 못하고, 제대로 모이지도 못했는데 오늘에서야 이렇게 모였다. 자, 서로 격려하고 다들 오늘을 즐기기를 바란다. 아, 한가지 빠뜨렸군. 거의 세 달이 넘도록 우리와 같이 생활하다시피 한 게이머 스키피오와 한신이 이제 우리의 곁을 떠나게 되었다. 내일부터 새로 조직될 프로게이머팀으로 옮기게 될 예정이다. 서로 많이 도왔으니... 아쉬움도 많겠지. 뭐 그렇다고 해도 어차피 같은 회사니까 가끔 볼 수도 있을테니..... 다들..... 정말..... 수고했다. 이만.“ 이팀장은 정말 기억에는 전혀 없는 회식을 하면서 팀원들에게 뭔가 수고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자신의 어떻게 보면 독재적인 개발 방법을 잘 따라와 준 팀원들에게 제대로 감사하고 싶었지만 세련되지 못한 말에 약간 아쉬움을 남기며 말을 마쳤다. 문명 온라인 개발팀의 팀원들은 회사 근처의 한식집을 통째로 빌려서 회식다운 회식을 했다. 하지만 거의 처음인 회식치고는 그 강도가 예상밖이었다. “와.... 이거.. 내가 회사 들어오고 나서 거의 처음으로 하는 회식이다. 신입사원이 들어오면 으레 군기를 잡는다거나 해서 회식을 하는데 여기는 전혀 그렇지 않았거든. 내심 기대도 했는데.... 디립다 일만 시키더라고...” 김덕만은 신입사원 환영회를 하지 못해서 아쉬운지 연신 술과 고기를 먹으며 옆에서 인상을 쓰고 있는 공동진을 보며 그 큰 목소리로 말했다. 평소에도 절대 작지 않은 목소리인데 술이 들어가니 그 소리는 더했다. “... 목소리 좀 낮추세요. 고막 터지겠어요. 쳇...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냐?” 마지막에 덧붙인 동진의 나직한 혼잣말을 덕만은 듣지 못했다. 동진은 뭔가 맘에 들지 않는지 고기만 먹다가 술잔을 들고는 한참 많은 사람들의 공격을 받고 있는 진성에게로 갔다. “어이.... 스키피오. 역시 인기 좋은데... 내 술도 한 잔 받아야지?” 진성은 동진이 다가오자 약간 불안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자신에게 술잔을 주자 약간 난색하며 자신의 자리 앞을 턱으로 약간 불안하게 가리켰다. “뭐? .....어..... 이게 뭐야?” 동진은 약간 취한 눈으로 진성의 고갯짓을 따라가니 가득 찬 술잔이 한 줄로, 적어도 10잔은 되어 보였다. 게다가 고갯짓을 한 진성은 맨 앞의 술잔을 들더니 약간 인상을 찌푸리며 마시고는 고기를 한 점 집어먹었다. 진성은 주는 대로 넙죽 술을 받아먹었지만 쌓이는 술은 어쩔 수 없었다. 원래 술잔을 빨리 돌려줘야 하는 것이 예의라서 더더욱 미룰 수는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갈수록 속도는 줄어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또 다른 술잔을 가져와서 술을 마시고 있는 지경이었다. 동진은 그런 진성에게 술잔을 들이밀 수가 없었다. “... 이...리.... 주..세요... 꺼억... 동지이이니... 형..의.... 수우...울잔은....... 무..우...슨일이.... 있어도.... 바...다야지...요........” 평소의 차분한 목소리가 상상이 가지 않는 진성의 술 취한 목소리였다. 진성은 목소리와는 달리 얼굴이나 눈빛에는 그다지 취한 듯한 징후가 없었다. 눈빛도 또렷했고 얼굴도 달아오르지 않았다. 진성은 동진에게서 술잔을 받고는 바로 다 마셔버리고 다시 잔을 동진에게 주고는 술을 따랐다. “어이쿠......” 잔을 따르다가 순간 정신을 잃었는지 진성은 평소 덕만이 외치던 ‘그 귀한 술’을 탁자에다 쏟고 말았다. 동진은 그런 진성을 보며 웃었다. 아직도 귀가 멍멍해서 도망쳐온 동진이었지만 진성의 모습에 그 유명한 프로 게이머 ‘스키피오’도 사람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동진은 웃는 모습으로 진성이 듣건 말건 얘기했다. “..... 진성아, 네가 어디 가더라도... 성공하기 바란다. 이제까지 네가 하던 만큼만 하면 내가 보장하지. 힘들면 찾아오고..... 어.. 나도 취하네..... 알겠지..?” 얘기하다 자신 역시 취기가 올라 고개를 숙였다가 든 동진은 순식간에 맞은편의 진성이 사라졌음을 알았다. 일어나 보니 뒤로 진성은 뒤로 넘어가 버렸다. “...으하하하........ 나중에.. 문명 온라인에서.. 술 먹는 것이 제대로 표현되면.... 진성, 스키피오의 독주도 막을 내리겠구나... 크크크....” 동진은 자신의 ‘한니발’을 깨뜨린 진성, ‘스키피오’에게 복수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술’이라는 얼토당토 되지 않는 생각을 했다. 그런 망상으로 동진은 앞으로 만들 업데이트나 확장판에서는 ‘술’을 제대로 표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당연히, 술이 깨면 그런 생각도 날아가 버리겠지만. 동진은 물끄러미 뒤로 쓰러진 진성을 보다가 아무런 생각도 없이 진성이 남긴 많은 술잔을 보고는 앞에서부터 하나씩 마셨다. “..... 커억... 어.. 취한다..... 이것은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니까....” 동진은 점점 취기가 오르는 얼굴로 안주도 먹지 않고 진성이 남긴 술잔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옆에서 누군가의 엽기적인 소리가 들렸다. “.....어.. 우욱..우욱..... 꿀꺽..... ... 꺼억..... 어.. 어지럽다...어..” 술에 취해 비몽사몽이던 동진은 속이 메스꺼움을 느꼈다. “누구야?.... 이런.... 토해내고 말지... 그 딴 것을 다시 삼켜? 이런.... 아..” 동진은 힘겹게 고개를 돌려서 보니 한신, 현준이었다. 입에서 뭔가 누리끼리한 것이 흐르는 듯한.... 그 모습을 본 동진은 순간 쏠리는 느낌을 받았다. “... 이.... 이런...... 이 녀석 현준이잖아....” 동진은 그런 현준의 모습에 놀랐다. 하지만 동진은 또 한번 놀라야만 했다. 현준이 쓰러진 곳 앞에는 무려 진성의 두 배가 넘는 술잔이 놓여 있었다. 동진은 현준을 아주 불쌍하게 쳐다보았다. “...... 무식한 녀석!” 동진은 그 곳에 있다가는 자신도 현준과 비슷한 꼴이 될 것 같아 다시 술잔을 들고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회식자리는 미리 대피한 사람 외에 상당수의 사람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동진은 그래도 아직까지 의식 있는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이동했다. 그곳으로 가면 집까지 무사히 살아갈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짐을 동진은 알고 있었다. “..... 그래서 말이지. 내가 저 스키피오와 한신을 처음으로 안내했잖아. 내가 그 때... 그 둘이 대단할 거라는 느낌을 받았지? 어떻게 아냐고? 순간 몸에서 빛이 나는 거 있지... 아 물론 평소에도 계속 보이는 것은 아니라고..... 아. 맞아....” 동진이 돌아온 곳은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덕만의 옆자리였다. 적지 않은 술을 먹은 동진이 그나마 제 정신이었던 이유, 아직도 생존한 사람들이 많은 이유가 바로 그 큰 목소리였음을 동진은 비로소 깨달았다. 동진은 내심 전혀 관계도 없지만 왜 옛말에 조강지처를 버리지 말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듯했다. 자, 여러분. 자소 소프트의 대표이신 박경락 사장님을 모십니다. 박수로 환영해 주십시오." 10월 1일. 자소 소프트의 빌딩 지하 게임 센터의 대형 게임 룸에서는 각 언론의 기자들과 각계 각층의 유명인사들이 모여서 게임 문명 온라인의 정식 출시 기념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하나의 게임 출시에 이렇게 많은 취재진과 많은 유명인사들이 모인 적은 없었다. 심지어 국회의원도 몇 명이 보일 정도였다. 자소 소프트의 사장 박경락은 유산으로 물려받은 섬유기업 성진을 대담하게 처리하고 당시로서는 새로운 산업인 소프트웨어로 눈을 돌린 특이한 사람이었다. 아니, 당시에는 특이하다 못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성공적인 변신으로 인정되는 분위기였다. 170정도의 50대 초반인 박경락은 2세 기업인답지 않게 저돌적인 기업 경영과 맥을 짚는 과감한 투자로 소프트웨어 업계에서는 알아주는 사람이었다. 평소 잘 알고 지내는 정치인이 많을 정도로 인맥이 넓은 박경락 사장의 위력인지 게임 센터내의 분위기는 정치적인 사교 파티의 느낌을 띌 정도였다. “바쁘신 시간 중에도 이렇게 저희 회사의 새로 출시되는 게임의 정식 출시 기념회에 오신 것에 정말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새로운 차원의 게임 '문명 온라인, 영웅 스키피오'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대단히 감사 드립니다. 이제부터 홍보팀장인 홍인철 부장의 사회로 출시 기념회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박경락 사장이 낮은 단상에서 좌중을 향해 짧게 인사를 하는 동안 수십 개의 카메라 후레쉬가 터졌다. 이미 게임이 단순한 아이들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부정적인 문화 코드가 아니라 오히려 종합예술이라 불리는 영화보다 더 체계적이고 더 예술성이 필요한 문화 상품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고 있었다. 특히 베타 테스트와 그 전의 알파 테스트 동안에 유출된 게임 장면들은 기존의 게임 문화를 한 차원 끌어올릴 수 있다는 밝은 전망을 갖게 했다. 박경락 사장이 자리에 앉자 곧 일어선 홍인철 홍보팀장의 사회로 출시 기념회는 시작되었다. 차분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클래식 연주와 실내 분수가 곁들여진 대형 게임 룸에는 미리 준비한 오프닝 화면을 통해서 게임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알렸다. 준비된 순서대로 출시 기념회는 진행되었다. 게임의 특징에 대한 것부터 프로 전용 게임기에 대한 것까지 지루하지 않을 정도의 설명과 실제 시범이 이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프로 전용 게임기에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사람들이 가장 기다리는 시간은 기념회의 뒷부분 순서에 배치된 프로 게이머의 공식적인 데뷔였다. 그 동안 2명의 프로 게이머가 자소 소프트의 문명 온라인 게임에 속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직 완전히 실력을 검증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두 프로 게이머를 제외하고는 문명 온라인 신드롬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 자, 기다리는 시간이 왔습니다. 제 생각에는 많은 분들이 이 시간을 기다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소개합니다. 자소 소프트, 문명 온라인의 프로 게이머 강진성군과 진현준군을 소개합니다.” 베타 테스터를 위한 이벤트처럼 무대 중앙을 통해 올라온 두 프로 게이머 진성과 현준은 특별히 디자인된 프로 게이머의 옷을 입고 있었다. 거의 천여 명을 앞에 두고 얘기도 하고 게임도 했지만 진성과 현준은 이 순간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거의 모두가 대단한 사람들이었고 게다가 눈앞에는 쉴새없이 후레쉬가 번쩍거렸다. “휴..... 현준아... 이거.. 이거 너무 대단한데... 이런 카메라 후레쉬라니... ” “.... 어쩔 수 없지 뭐...” 진성과 현준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둘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그리고는 역시 눈은 마주치지 않고 슬쩍 웃었다. 곧 무대의 앞쪽으로 가서는 소개를 했다. “문명 온라인의 프로 게이머 강진성이라고 합니다.” “프로 게이머 진현준입니다.” 처음 무대위로 올라왔을 때부터 무대 앞으로 나와 소개를 할 때까지 정말 후레쉬는 쉬지 않고 번쩍번쩍 진성과 현준을 놀라게 했다. 간단한 소개 뒤에 기자들의 빗발치는 질문이 이어졌다. “.... 강진성씨 몇 살입니까?” “.... 언제부터 게임을 시작했습니까? 얼굴 없는 게이머라고 하든데... 사실입니까?” “진현준씨, 강진성씨와는 친구사이라는데 맞습니까?” “두 분다 쥬신대 2학년이라는 말이 있던데 사실입니까?” 기자들은 이미 사실로 알고 있는 것도 물었다. 하지만 진성과 현준이 생각하기에 얼토당토 않는 얘기도 다수 있었다. “......... 계약금이 10억이라는 말이 있던데.....” “..... 최고의 스타, 탤런트 정효진씨와 사귄다는 소문이 있던데.... 어떻습니까?...” “강진성씨.... 입양되었다는 말이 맞습니까?” “진현준씨, 바람둥이라는 소문이 맞습니까?” 진성과 현준은 어떻게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그 순간에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저.. 그런 질문은 다음에 하시지요. 자, 두 분, 이리로...” 오늘부터 진성과 현준의 매니저가 된 서재필이었다. 30대 초반의 나이, 자소 소프트의 직원임에도 불구하고 청바지와 면티, 가죽재킷이 어울리는 사람이 바로 서재필이었다. 서재필은 재빨리 기자들 앞을 거부감을 주지 않게 막고는 진성과 현준을 데리고 뒤로 이동했다. 자소 소프트 쪽은 단순히 프로 게이머의 소개자리로 생각했었다. 기자들의 질문이 그렇게 많을 줄을 예상하지 못했다. 다행히 매니저가 잘 대처한 관계로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진성과 현준은 무대 뒤로 돌아서 게이머 대기실로 갈 수 있었다. “휴..... 정말 땀나네. 현준아, 너 바람둥이라며?” 진성은 흐르는 땀을 적당히 닦고는 현준에게 농담을 걸었다. 현준은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는 너는 언제부터 우리 집에 입양되었냐?” “.... 그래도 그건 좀 낫다. 바람둥이라니.. 좀 있으면 카사노바라고 나오겠네... 하하하..” 현준은 혹시 자기가 말실수한 게 아닌지 걱정했지만 진성은 그런 현준의 기색을 읽고는 농담으로 받아 넘겼다. 하지만 진성에게 입양이란 말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 저.. 매니저..... 서재필씨... 아까는 정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어요.” 현준 역시 진성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어서 말을 바로 돌려버렸다. 현준은 매니저인 서재필을 바라보았다. 현준에게 있어 매니저인 서재필을 아주 독특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적지 않은 30대 초반의 나이에 결혼은 안 한 것 같았고, 180 정도의 키에 운동으로 다져진 몸매는 대단했다. 성격 역시 쾌활하고 어떤 때는 심각하게 고민해야할 정도로 생각 없이 사는 사람으로 보일 정도로 무던한 사람이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곧바로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사람이었다.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나저나 진현준씨는 왜 바람둥이로 소문이 났습니까?" "예? 아.. 그거 당연히 제가 좀 생겼잖아요. 그러니 뭐 그런 바람둥이로 소문이 날 수도 있지 않겠어요?" 서재필은 가죽재킷을 벗더니 옆에 놓여 있던 생수병을 들어 물을 조금 손으로 받아서는 귀를 씻었다. 그 표정에는 왜 자신이 그런 질문을 했을까 하는 자책이 가득했다. 진성은 키득거렸다. 서재필은 한쪽 귀를 다 씻더니 다른 쪽 귀를 씻기 위해 물을 더 손에 따랐다. ".... 휘유... 그만해요. 알았다니까요. 제가 여자를 좀 좋아해요. 인정할테니 그런 짓 좀 하지 마세요. 제발...." 다른 쪽 귀에 손바닥에 물을 받아 가져가 씻으려 하던 서재필은 현준의 말을 듣더니 곧바로 물을 마셔버렸다. 자신 역시 다른 사람에게 말로나 행동으로나 엽기적으로 그리 지지 않는 않는다고 평소에 생각해 왔던 현준이었지만 서재필에게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서재필의 엽기적인 행각에 현준은 빨리 손드는 게 이익이라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현준은 서재필을 생각하면서 또 다른 강적 이준을 생각했다. 새로 생긴 프로게임팀에서 보디가드 겸 운전기사를 하게 된 사람이 바로 이준이었다. 서재필이 미끈한 몸매의 소유자라면 이준은 정말 뒷골목의 각진 조폭을 상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자신 스스로도 기억하지 못하는 무술이 있다고 할 정도로 격투기에서는 가히 대단한 사람이었다. 약간 터프한 성격인 20대 후반의 이준은 자신이 운영하는 도장이 몇 개가 될 정도여서 경제적인 이유로 보디가드와 운전기사를 할 사람이 아니었다. 뭔가 재미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 보디가드를 한다는 속편한 이유가 이준이 주장하는 보디가드를 하는 이유의 전부였다. 그 정도면 문제가 없었지만 이준은 서재필과는 다른 면으로 엽기적이었다. 짧은 머리와 강인한 인상에 걸맞는 터프한 성격은 보디가드로서 좋은 점이었지만 같이 생활을 해야하는 진성과 현준, 서재필로서는 불편한 점이기도 했다. 다행히 시원시원한 성격 덕에 서로 인정할 수 있는 분위기가 생겼다. 하지만 현준은 안타깝게도 예외였다. “현준씨, 몸 좋은데? 운동 한 번 배워볼래요?” 이준은 평소의 거침없는 말투로 현준에게 호기심 어린 눈빛을 하며 물었다. “네? 제 몸이 좋아요?” “아주 좋은데요, 조금만 배우면 쓸 만 하겠는데요. 남자라면 이런 운동쯤은 해야지요. 그렇지요?” “예, 그렇지요.” 현준은 그런 이준의 말에 혹했다. 평소 체력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지만 뭔가 특별한 운동, 특히 격투기를 하면 더 폼이 나지 않을까 싶었던 현준이었다. 당연히 환영했다. 하지만 그런 환영은 하루도 가지 못했다. 이준은 무술을 가르쳐 준다면서 기초 체력훈련부터 시작해서 급기야 인정사정 보지 않고 다리를 찢었다. 만난 지 3시간도 되기 전이었다. 물론 그 때 진성과 서재필이 아주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는 했지만 현준으로서는 이준이 꿈에서도 나올 정도로 괴로웠다. “휘유.... 진성아, 팀이 바뀌면서 더 혼란스럽다. 게다가 이런 사람들이라니... 재미는 있을 것 같은데.... 몸이 고생할 것 같다...” 현준은 진성에게 진심어린 푸념을 늘어놓았다. 당분간은 여러 장소를 돌면서 문명 온라인 출시를 기념한 행사에 참석해야 했기 때문에 현준과 진성은 물론 매니저인 서재필과 운전기사 겸 보디가드인 이준과 함께 행동해야만 했다. 현준은 앞으로의 시간이 걱정이었다. “자, 이제 이동해야겠습니다. 이준씨, 삼성동 코엑스로 갑시다.” 서재필은 귀에 물이 들어갔는지 어디서 휴지를 구해서 귀에 대고는 감정 없이 말했다. “예? 오늘 어디로 또 가야 되나요?” “현준씨, 우리는 이제 시작입니다.” 의아해하는 현준에게 서재필은 사악하게 느껴지는 웃음으로 대답했다. “코엑스 신관 3층 컨벤션 센터에서 오후 1시에 팬들과의 정식 출시 기념회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팬들과의 게임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오후 4시에는 여의도 제1 전시관에서 앞으로 프로 리그의 스폰서와 프로 팀들을 창단할 사람들을 위한 특별 미팅이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저녁 8시에 게임채널 '게임 포커스‘와의 인터뷰도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끝나면 대략 11시 정도가 되겠지요. 곧바로 부산으로 이동해서 내일의 부산 일정을 시작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예? 도대체 언제 끝나나요?” “... 지금 스케줄이 짜여진 것은 대략 5일 정도입니다. 그 뒤의 스케줄은 지금보다는 많이 좋아질 겁니다. 자 힘을 냅시다! 파이팅!” 전혀 힘이 나지 않는 상황에서 서재필이 목소리를 높혀 진지하게 파이팅을 했는데 그 순간 귀에 꽂혀 있었던 휴지가 뽕 하며 날아가버렸다. “푸훗....” “후하하하...” 엄청난 스케줄로 인해 어이가 없던 진성과 현준은 서재필의 언밸런스한 모습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삼성동 코엑스의 신관 3층에 있는 컨벤션홀은 그야말로 다목적 홀이었다. 7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넓은 공간과 다양한 시설지원이 완벽한 전시공간이었다. 원래 문명 온라인의 정식 출시 기념회를 컨벤션홀에서 하려다가 회사차원의 공식적인 행사는 회사 건물 내의 게임 센터에서 하기로 하고 베타 테스터를 비롯해서 문명 온라인 홈페이지에서 독특한 기준으로 참석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았다. 자소 소프트는 7천여 명의 팬들을 초청해서 팬들을 위한 출시 기념회를 따로 열기로 했다. 또한 그 기념으로 프로 전용 게임기를 이용한 프로 게이머와의 대결과 팬들간의 미니 게임 대회를 계획했다. 팬들에게 최대의 선물은 게임에 대한 직접적인 홍보와 시범이라는 내부 의견 결과였다. 문명 온라인의 팬들이라고 자처하는 많은 게임 폐인들은 베타 테스터들을 위한 이벤트에 이어 또 다시 팬들을 위한 초대형 이벤트를 벌이자 과연 자소 소프트라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투자를 해서 팬들을 모으려는 전략은 딱 들어맞았다. 7천명을 모집하는데 50만 명이 넘는 인원이 지원을 했다. 공휴일이 아니라는 점과 수도권이어야 출시 기념회에 올 수가 있는 점을 감안하면 결코 적지 않는 사람이 지원을 한 셈이었다. 자소 소프트는 공정한 기준과 추첨으로 7천명을 발표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출시 기념회에 오는 사람들은 모두 신분증을 지참토록 당부했다. 출시 기념회 시간이 되자 컨벤션홀은 가득 찼다. 자소 소프트는 혹시나 들어갈 수 있을까 해서 모인 팬들을 위해 급히 멀티비전을 외부에 설치를 하기로 했다. 또한 예상 못한 사태에도 차분히 대응해서 단 한 명의 팬들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팬들이 모인 컨벤션홀에서의 출시 기념회는 콘서트 현장을 방불케 하는 열기로 가득했다. 자소 소프트의 게임 센터에서의 기념회가 사교 파티라면 컨벤션홀에서의 기념회는 정말 젊은이들의 열기가 뜨거운 콘서트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또한 8대의 프로 게임 전용기와 대형 멀티비전을 설치해서 더욱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오랫동안 기다리셨습니다. 지금부터 ‘문명 온라인, 영웅 스키피오’의 정식 출시 기념식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홍보팀의 최진만 TV 담당자가 사회를 보기로 되어 있었지만 젊은 사람들의 요구를 제대로 충족시킬 수 없다는 판단에 TV의 오락 프로그램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김제동을 MC로 섭외하고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가수들을 대거 초청했다. 무늬만 콘서트가 아니라 진짜 콘서트 현장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여러분 제가 누구인지 아시죠? 저 지금, 정말 떨립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사회도 보고 심지어 군대에서 마이크 하나 달랑 주고는 여름날의 땡볕이 내리쬐는 오후 2시에 신병 800명 앞에서 2시간 동안 웃기라는 말도 안 되는 상황도 겪었습니다. 그 때도 지금처럼 떨리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때 못 웃겨서 복날 개패듯이 맞았지요...” “....하하하하..” 컨벤션홀로 들어온 사람들은 이미 사회자가 김제동이라는 것을 알았다. 같은 말이라도 유명한 사람이, 그것도 웃길 것 같은 사람이 하는 말은 더 재미있었다. “제가 왜 떨리는 지 아십니까?” “...아니요..” “이거 아십니까? 무슨 게임 출시 기념식 사회를 맡기는데 제가 이 게임을 해 본 적이 있어야죠. 뭔가 말을 해야 되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나오는 심정, 혹시 아십니까? 사실 조금 전에도 나오면서 많이 망설였죠. 게임에 대해서는 정말 잘 모르는 제가 이런 자리에 서 있을 자격이 있을까 하고 말이죠. 그 때 제게 떠오른 생각 하나가 제게 이 자리에 설 수 있는 용기를 주었습니다.. 세상에서 최고로 크게 느낄 수 있는 기쁨은 바로 가장 많이 집착하는 것을 버릴 때라는 겁니다. 자, 첫 번째 순서는 제가 특히 좋아하는 우.리. 휭클의 무대입니다. 자, 박수로 환영해 주세요.“ “와..... 와...” “휭클이라니....” 김제동의 사회로 오프닝은 아주 뜨겁게 시작되었다. “제가 오늘 이 자리에서 사회를 보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 보이시죠? 이게 바로 그 유명한 문명 온라인 프로 전용 게임기라고 하더군요. 사실 저는 게임은 잘 모르지만 인터넷으로 이 문명 온라인의 게임 장면을 한 번 봤거든요. 우와... 그거 대단하데요.. 보는 순간 저거다 싶었죠. 오늘 저는 부산에 내려가 있어야 하는데 급히 스케줄을 바꾸었습니다. 왜냐구요? 제가 사회를 본다면 저 프로 게임기에서 직접 게임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기에... 크크크.. 여러분들 제가 부러우시죠? 부럽다고 말만 하지 말고 열심히 하셔서 프로 게이머가 되세요. 지나가 버린 강물을 탓하지 말고 여러분이 먼저 바다에 가서 기다리십시오. 지금부터 문명 온라인의 프로 게이머와 추첨을 통해 뽑을 사람들과의 게임 대전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김제동의 말이 끝나자 뒤에서 대기하던 자소 소프트의 직원들이 칠천 명의 염원이 담긴 추첨표가 가득한 투명 상자를 가지고 왔다. “일단 두 프로 게이머와 대결을 할 수 있는 행운의 주인공 세 명을 뽑겠습니다. 왜 세 명이냐구요? 프로 게이머는 두 분인데 각각 두 게임씩 하게 될 겁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네 명 중에 한 명이 바로 접니다. 그리고 곧바로 추첨해서 32명을 뽑아서 이곳에 오신 팬들 여러분들끼리의 작은 게임 대회를 마련할까 합니다. 프로 전용 게임기를 통해서 게임을 하게 될 겁니다. 아주 신나겠죠? 운이 없어 뽑히지 못한 나머지 분들도 너무 아쉬워하지 마시고 대형 비전을 통해서 게임을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세 명은 우리 휭클께서 뽑아 주시고 다음으로 미니 게임 대회에 참가하실 분들은 우리 윤밴 윤다현씨와 그 밴드께서 수고하시겠습니다.“ 김제동의 말이 끝나자 공연을 마친 가수들이 나와서 흥을 돋구며 추첨을 했다. 7천 명이라는 많은 사람 중에 35 명안에 뽑힌 행운의 주인공들은 속속 앞에 마련된 장소로 나왔다. “이제 오늘 출시된 문명 온라인의 프로 게이머 스키피오와 한신을 소개합니다.” 순간 무대를 둘러싸면서 폭죽이 터졌고 컨벤션홀 전체의 조명이 어두워지면서 무대에 나타난 두 게이머를 강조한 밝은 빛의 조명만 남았다. “어.. 이거 너무 하네요. 저도 조명 좀 주세요.” 김제동의 익살에 분위기는 더욱 더 부드러워졌다. “우선 소개부터 하시죠.” “프로 게이머 닉네임 스키피오, 강진성입니다.” “닉네임 한신, 진현준입니다.” 마이크를 대자 간단하게 인사를 끝내는 두 프로 게이머의 대답에 김제동은 한마디했다. “짧은 것은 제 키로도 족합니다. 앞으로 인사할 때는 조금 길게 해 주세요. 사회자들 당황합니다....” “.....” “이런.... 농담입니다. 아시잖습니까? 제 입에서 나오는 말 중에 99%가 농담이라는 것을......” “하하하......” “이거 더 이상 객쩍은 소리했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부터 프로 게이머와 행운의 주인공과의 깜짝 대결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무대의 조명은 조금 밟아졌고 미리 준비된 무대의 프로 게임기로 한신과 처음으로 게임을 하게 될 행운의 주인공이 다가갔다. 조금 준비하는 시간이 지나자 곧바로 게임에 돌입했다. 이벤트이기 때문에 최대한 상대의 실력과 상대가 할 수 있는 것을 끌어내기 위해 한신, 현준은 여러 가지로 천천히 게임을 진행했다. 한신은 그리스 문명을 선택했고 상대 아마추어 게이머는 한국을 선택했다. 한신은 처음으로 전용 게임기를 사용해 게임을 하게될 상대를 위해서 미리 자소 소프트의 직원과 말한 것이 있었다. 아마추어 게이머가 어느 정도 적응할 때까지 한신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한신은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 중의 하나인 초기 그리스 독립국가의 통합 오더를 사용하지 않고 군사적으로는 강하지 않은 아테네를 선택해서 다른 도시 국가는 자립시켜 버렸다. 대형 멀티비전을 통해서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한신의 느긋하면서 상대를 배려하는 플레이에 박수를 쳤다. 또한 아직까지 잘 적응하지 못한 상대를 위한 격려의 목소리도 한껏 올렸다. 게임을 시작해서 10분 여가 지나자 차츰 처음 게임을 하는 아마추어 게이머도 적응해서 자신만의 빌더를 가지고 발전하기 시작했다. 한국을 선택한 게이머는 고구려 시대에 동아시아 최강의 군대였던 철갑기병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역사의 정설로 인정되지 못했지만 문명 온라인은 고구려 고분에서 나온 벽화를 토대로 일각에서 제기된 고구려 당시 최강의 군대를 재현했다. 고구려의 철갑기병은 찰갑이라고 불리는 작은 철편을 이어 만든 갑옷으로 판갑이라 불리는 기존의 갑옷보다 훨씬 나은 성능의 갑옷으로 무장했다. 또한 신발에 못이 박힌 기병 전용의 신을 신고 전쟁에 나가 무적의 명성을 떨칠 수 있는 군대가 바로 철갑기병이었다. 멀티비전으로 보고 있던 사람들은 한국을 선택한 게이머의 플레이에도 아낌없는 박수를 쳤다. 이미 공개된 프로 게이머의 빠른 판단과 컨트롤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착실하게 철갑기병을 준비해서 일종의 ‘쇼’를 보여주려는 의도가 관객들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었다. 게임의 지도는 새로운 지형이었다. 그리스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한반도가 속한 동아시아도 아니었다. 전혀 새로운 지형이어서 게임을 하는 둘 모두 같은 형편이었다. 한신은 착실하게 발전시키면서 주위를 정찰했고 오래지 않아 상대가 한국 문명 중에서도 고구려라는 사실을 알았다. 아테네를 선택한 한신이 주로 발전시킨 부분은 중보병이었다. 한신은 상대가 철갑기병이라는 사실에 곧바로 수비에 들어갔다. 평지에서 특별한 전략이나 우세를 할만한 이점이 없다면 철갑기병 앞에서 중보병은 맛좋은 먹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한신은 곧바로 아테네를 중심으로 성을 축조할 준비를 했다. 이미 끌어올린 문명이어서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시간이었다. 한신의 마음과 달리 상대 게이머는 장기적인 전략이나 방어적인 공략이 아니었다. 철저하게 공격을 위한 철갑기병 위주의 군대를 모으고 창병 등의 군대 훈련에 모든 힘을 집중했다. 평소 게임 스타일이 모 아니면 도인 게이머였다. 한국을 플레이하는 게이머는 모든 전력을 다 동원했고 뒤늦었지만 정찰을 통해 상대의 문명과 위치를 알아냈다. 게이머는 모든 군대를 이끌고 그리 멀지 않은 원정을 떠났다. 강력한 방어와 기동력을 갖춘 평지에서는 보병의 천적인 철갑기병을 거느리고 출정하는 모습은 큰 멀티비전을 통해 밖의 관객들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이야... 와.... 대단한데....” “한신이 고생 좀 하겠는걸... 뭐 처음에 봐 줘서 그런 것이지만.. 재밌겠는걸....” “어쩌면... 프로 게이머가 질 수도 있겠는데... 저거 한방으로 쳐들어가면... 휘유..” “... 한신은 성을 정비할 시간이 없을 것 같은데.... 시시하게 그냥 무너지지는 않겠지?” 성을 준비해서 방어를 튼튼히 하려는 한신과 모든 병력을 거느리고 원정을 떠나는 아마추어 게이머와의 전투의 열쇠는 바로 시간이었다. 한신은 성을 만들어 방어를 완벽하게 하기 전에 상대 아마추어 게이머의 막강한 철갑기병이 들이닥치리라 예상했다. 한신은 자신에게로 올 수 있는 진격로에 매복을 해서 상대 군대의 도착 시간을 조금이라도 지연시킬 수 있을지 고민했다. 싸움에 임할 때 제일 좋은 방법은 싸우지 않고 상대를 제압하는 것임을 알고 있던 한신이었지만 자신의 거점을 상대에게 내주는 것은 곧바로 패배와 직결되기 때문에 전력의 약세에도 불구하고 배수의 진을 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절대 전면전으로는 뒤집을 수 없는 게임이었기 때문에 한신은 어쩔 수없이 게릴라전을 선택했다. 전투에서는 밀려도 전쟁에서 이기려면 주도권을 잡아야 했다. 한신은 이미 상대에게 넘어가 버린 흐름을 다시 가져올 방법에 대해 궁리했다. 이윽고 방법을 결심한 한신은 빠르게 게임을 컨트롤하기 시작했다. 멀티비전을 통해 지켜보던 관객들은 조용했다. 엄청난 대군을 거느린 원정군과 원래의 이점을 버리고 아테네 하나만으로 버티는 한신의 방어 위주의 군대의 충돌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신은 그리스의 군인들이 넓은 대지에서 적과의 정면 대결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자존심 높은 그리스 군인들의 특징 중 하나였다. 하지만 전투에서 항상 정면 대결이 통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신은 그리스 군대의 조직을 잘게 나누었다. 예전 스키피오의 전략을 보면서 나름대로 생각해낸 고육지책(苦肉之策)이었다. 스키피오는 아예 군대를 해산시키다시피 해서 새로운 군을 만들어냈지만 한신은 그럴 수 없었다. 기존의 프라이드 높은 그리스 군인들을 게릴라전에 투입하기 위해서는 서로 모여 불만을 토할 자리 자체가 없도록 만들어야 했다. 한신은 50명 단위의 소부대 조직 정비를 완료했고 그 때 아마추어 게이머의 병력은 점점 아테네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한신은 적의 예상 진격로에서의 매복으로 상대를 괴롭혔다. 하지만 상대가 워낙 기동성이 뛰어나 그리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한신은 상대의 군체계와 병력을 정찰했을 때부터 생각했던 극적인 승부에 미련이 남았지만 곧 포기하고 말았다. 그렇게 이기느니 지더라도 밖에서 보고 있을 사람들에게 좋은 장면을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한신은 아테네를 완전히 비우고 시가전을 생각했었다. 한신 자신이 컨트롤에서는 우위에 있고 시가전에서는 상대의 기동력이 그리 큰 힘을 발휘하기 힘들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신은 그런 시가전을 포기하고 아테네로 들어오기 직전의 평원에 모든 군대를 동원해 진을 치고 상대를 기다렸다. 비록 평원에서의 전투는 자살과 비슷하겠지만 한신은 이것이 프로 게이머로서 꼭 이겨야할 게임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와..... 프로 게이머 한신, 대단한데..... 그냥 정면 대결로 하나본데...” “소규모 게릴라전이 별로 이익이 없었으니까 어쩔 수 없지..” “..... 음.. 아까 한신의 컨트롤을 보니까 뭔가 하려다가 안 한 것 같던데.... 저 정도의 프로 게이머라면 전력의 약세에게 뒤집을 수 있는 묘안은 있을 것 같은데...” 관객들은 각기 자기 나름대로의 해석과 전망을 서로 얘기했다. 아마추어 게이머의 원정부대는 아테네로 들어가는 입구 쪽의 평원에 군대가 진을 치고 있다는 정찰병의 보고를 받을 수 있었다. 혹시 모를 게릴라전에 대비하면서도 평원의 군대에 관심을 쏟는 아마추어 게이머, 드디어 평원의 군대를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한신은 거의 모든 면에서 약세인 자신의 군대로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 병력을 나누는 것도 마땅치 않았고 하나로 모아 상대를 일격에 뚫을 만한 돌진력이나 기동력도 없었다. 기동력이라면 상대가 훨씬 더 나은 상태였다. “휴.... 초반에 너무 방심했네....” 한신은 게임의 초반에 다른 도시국가들을 버리고 아테네만 선택한 것이 오늘 게임의 가장 큰 실수라 여겼다. 결국 상대 아마추어 게이머에 대한 방심이 이런 결과를 불러일으키고 만 것이다. 한신은 전통적인 그리스 보병 운용에 변화를 주기로 했다. 비록 결과는 이미 나와 있는 것과 마찬가지지만 프로 게이머로서 뭔가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다. 한신은 자신의 군대 조직을 바꾸었다. 군대 조직이란 유기적으로 움직여야만 그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전투와 같은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지휘, 통제가 이루어지려면 평소 엄청난 훈련을 소화해야만 가능했다. 하지만 한신은 배수의 진을 치고 군대를 몰아쳐서 중장보병을 세 개의 부대로 나누어 세 개의 열로 군의 배치를 마쳤다. 한신이 지시한 배치는 한 가지면서도 두 가지였다. 일단 기본적인 군진은 원진이었다. 외부에 중장보병 한 부대가 원으로 서 있고 그 안에 또 다른 부대가 탄력적으로 바깥쪽의 부대에 도움을 주고 제일 안쪽의 보병 부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깥의 군인이 부상을 당하면 곧바로 병력 충원이 되는 군진이었다. 하지만 그 큰 군대 전체를 하나의 원진으로 만들 수는 없어서 10개의 원진 부대로 나누어 기본적인 당부만 전했다. 한신은 이제부터의 전투를 지휘를 통한 전쟁이 아니라 군인 하나하나를 사지로 몰아넣어 살기 위한 전투로 만들어 버렸다. 군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로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통제법도 있지만 반대로 군대가 아닌 개개인의 군인으로 만들어 한 사람 한 사람이 살기 위해 발버둥치게 만드는 것 역시 군의 지휘관으로 선택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였다. 한신은 모든 필요한 물자들을 군인 각자에게 최대한 나누어주고 만약에 방어선이 무너지면 아테네 전체가 죽음의 도시가 될 것이라고 선포해 버렸다. 한신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 군인들의 생존본능을 자극했다. 드디어 대평원의 양쪽에 대규모의 군대가 도열했다. 약간은 흐린 날씨에 비마저 올 듯한 우울함이 감도는 대기였다. 잠깐의 소강상태가 지나자 군대는 전진하기 시작했다. 아마추어 게이머는 정석 플레이를 펼쳤다. 철갑기병을 쐐기 모양으로 만들어 적의 중앙을 돌파해서 승기를 잡으려고 했다. 군대가 부딪치기 전에 철갑기병대가 먼저 앞으로 달려와 정면으로 한신의 부대를 두동강 내려고 돌진했다. “원진!” 한신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명령을 하달했다. 대열을 갖춰 전진하던 한신의 군대가 순식간에 10개의 원진으로 바뀌었다. 이동속도가 있었기 때문에 달려나가는 방향으로는 짧고 반대쪽으로는 긴 기형 원진이었지만 곧 상대와 부딪히게 되면 완벽한 원진이 될 것이다. 한신의 명령 후에 각 원진은 서로 다른 움직임으로 기병대에 부딪쳐 나갔다. 철갑기병의 막강한 위력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말에까지 찰갑을 씌워 통상의 보병으로는 정말 상대하기 힘든 군대였다. 하지만 원진으로 앞, 뒤 합해서 6겹의 보병으로 된 한신의 독립부대를 단번에 꿰뚫기는 불가능했다. 게다가 완전히 돌파하지 못하면 둘러싸여서 협공을 당했다. 아마추어 게이머는 처음 2 부대의 철갑기병이 원진에 둘러싸여 당하자 급히 작전을 바꾸었다. “와..... 원진이라니.... 저런 노림수가 있었구나..” “..... 철갑기병을 저런 식으로 막을 수도 있구나... 하지만 전쟁은 힘들겠는데...” “처음에 스파르타만 포함했어도 충분히 이기고도 남는 게임인데...” “.... 재미있다...” 관객들은 적의 가장 강력한 전력인 철갑기병을 극단적인 방법인 원진으로 극복하는 한신의 전술에 감탄했다. 비록 병력의 수와 남아 있는 철갑기병을 볼 때 전쟁에서는 패하고 말겠지만 한신의 기발한 전술은 관객에게 충분히 어필했다. 원진의 독립부대가 적의 본진 가까이 가자 고구려의 또 다른 전력 중 하나인 창병이 등장했다. 창수라고도 불리는 보병으로 창을 들고 있으며 혼자 움직이는 부대가 아닌 철갑기병과 같이 단단한 조직을 갖추어 가히 동아시아를 호령한 최강의 군대를 만든 것이 바로 창병이었다. 기병의 돌파가 아니라 보병과 같은 단단하고 강한 공격에 원진은 속수무책이었다. 한신이 사용한 원진의 최대 약점은 적이 지속적으로 한곳만 계속 공격했을 때였다. 기병의 돌파는 막을 수 있어도 강력한 보병의 공격에는 약한 진이 바로 원진이었다. 한신의 군대는 꽤 오랫동안 저항했다. 한신이 군인 각각을 사지로 내몰았기 때문에 살고 싶으면 싸워야 했다. 그런 정신적인 면은 처음에는 별로 나타나지 않았지만 원진의 궤멸로 병사가 흩어졌을 때 개개인이 상대를 괴롭히는 게릴라전으로 나타났다. 아무런 통제와 지휘를 할 수 없는데도 한신의 군대는 마치 세포로 나뉘어져 상대를 공격하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조직적인 아마추어 게이머의 대응과 월등한 전력차로 인해 한신은 패배하고 말았다. “우와..... 프로 게이머도 질 때가 있네...” “아니야. 처음에 저 한신이 얼마나 많이 양보했는데... 저 정도면 나도 이기겠다.” “아무튼 정말 재미있다... 그치?” 한신은 비록 졌지만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대등한 조건도 아니었고 게다가 이 게임은 이벤트였기 때문에. 그리고 상대 게이머도 실력이 나쁘지 않았다. 침착하게 게임 운영을 하는 것을 보면 언젠가 프로 게이머로 만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와.... 프로 게이머도 질 때가 있습니다. 자, 여러분. 수고하신 프로 게이머 한신과 아마추어 게이머 최영한씨에게 박수를 부탁합니다.” “잘했다.... 수고했다..” “짝짝짝!!!!” 김제동은 사람들의 환호가 수그러들기를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자.... 오늘의 메인 이벤트, 여러분 오래 기다렸습니다. 프로 게이머 스키피오와 제.가. 한판 붙겠습니다. 여러분, 저 잘 못합니다. 그러니 너무 큰 기대는 마시고.... 저도 제게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언제가 준비를 해야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제가 게임 끝나면 집에 가서 사과나무 하나를 심도록 하겠습니다. 자, 박수로 프로 게이머 스키피오를 환영해 주십시오.“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 속에 스키피오, 진성과 김제동은 각각 준비된 프로 게임 전용기로 다가갔다. 게임의 결과는 뻔했지만 유명한 프로 게이머와 유명한 MC와의 대결이라는 것만으로도 관심을 모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잠시 밝아졌던 조명은 다시 어두워졌고 멀티비전에 게임 오프닝 영상이 떠올랐다. 드디어 스키피오와 김제동의 이벤트 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김제동은 처음으로 프로 전용 게임기를 접하면서 당황했다. 수많은 사람 앞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제동으로서도 처음 대하는 것에는 일말의 두려움이 있었다. “김제동씨, 마음 편히 가지세요. 조금 있으면 아마도 공중에 뜬 자신이 느껴질 겁니다. 실제가 아니니까 괜히 요동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게임 진행은 음성으로 가능하니까 하고 싶은 말은 다 하세요. 문명 온라인은 해 보셨나요?” “아.. 어제 두 번 해 봤는데요...” “아마추어 버전이겠지요. 거기 나오는 명령 외에도 생각할 수 있는 대부분의 명령이 음성으로 지원되니까 한번 해 보세요. 자, 곧 시작할테니 즐거운 게임이 되기를 바랍니다.” 자소 소프트의 엔지니어가 몇 가지 필요한 말을 하고는 바로 게임기의 콕핏 덮개를 닫아버렸다. 드디어 게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으아악!” 제동은 기겁했다. 갑자기 어두워졌다가 밝아졌는데 자신은 엄청난 높이에 떠 있었다. 엔지니어의 이야기를 들어 머리는 이해가 되었지만 마음은 이미 놀랐고 심장은 두근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멀티비전으로 보는 것과 실제로 게임하는 것과는 정말 하늘 땅 차이임을 알았다. 제동은 게임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자신이 있는 곳의 주변을 손을 뻗어서 만졌다. 단순한 눈속임이라면 자신은 여전히 그 게임기 속에 있을테고 그러면 뻗은 손에 뭔가 느낌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어..어..어......” 제동의 손과 다리 등, 몸의 감각은 제동의 바램과는 달리 공중에 떠있음을 알렸다. 제동의 마음은 더 세차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프로 전용 게임기를 접하는 게이머들의 허우적거리는 장면을 보고 웃었던 제동이었지만 자신이 그보다 더 심하게 요동치고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런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었다. 제동은 한참을 발광하고서야 조금씩 진정할 수 있었다. “휘유..... 밖의 관객들 난리 났겠구만. 이거... 잘못하면 연예 뉴스로도 나겠는데....” 제동은 여전히 떨리는 자신의 손과 발을 바라보면서 읊조렸다. 급히 해 보았던 아마추어 문명 온라인과 인터넷으로 본 게임 플레이 동영상을 생각하면서 제동은 조심스럽게 명령을 내렸다. 자신이 선택한 문명이 이집트였기 때문에 멀리 바라보니 거대한 피라미드의 위용을 볼 수 있었다. 인터넷에서 예전에 본 게임 플레이와는 달리 피라미드는 이미 건조된 지 오래되어 보였다. “발전 상태?” 제동은 천천히 조심스럽게 명령을 내리고 그 결과를 보면서 본격적으로 게임을 시작했다. 스키피오, 진성은 트레이드 마크인 로마제국을 선택했다. 이런 공식적인 행사에 스키피오가 로마제국을 보여주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었다. 진성 역시도 이벤트인 게임에서 프로 게이머인 자신이 해야할 일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상대는 연예인이기 때문에 더 잘 해야했다. 진성은 상대를 압박하기 위함이 아니라 뭔가 인상깊은 것을 보여줄 수는 없을까 고민했다. “어, 이제까지 해 본 것 중에서 가장 발전된 문명인 것 같은데..... ” 진성은 잠깐 도시들을 살펴보다가 내부의 연습 게임이 아닌 공식적인 게임에서의 가장 발전된 문명이라는 것을 알았다. 도시들의 건축 양식부터 시작해서 각 도시들을 이어주는 거미줄 같은 도로, 각 항구들의 규모 등을 볼 때 확신할 수 있었다. “음... 뭔가 재미있는 것을 보여줄까?” 진성은 슬며시 웃으며 컨트롤하기 시작했다. 제동은 한참을 헤매고 나서야 제대로 게임 운영을 할 수 있었다. 제동은 인터넷 게시판에서 본 사람들의 글을 이제야 이해했다. 베타 테스터 중에서 프로 전용 게임기로 게임을 해 본 사람이 올린 글이었는데 어떻게든 그 전용 게임기를 사고 싶다는 말이었다. 글 중간에 그 게임기로 했을 때의 감상이 적혀 있었는데 그 사람의 얘기대로라면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제동은 그런 말에 상술이라며 조금의 관심도 두지 않았다. “와.... 그 사람 말이 사실이었네.. 이 정도면 비싸게 팔아도 살 사람이 꽤 많겠는데..” 자신이 말하는 대로 게임을 이끌 수 있고 게다가 엄청난 사운드와 자신을 감싸는 거대한 세계로 만들어진 게임에 굴복하지 않을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문명 중에서 가장 쉽다고 알려진 이집트 문명을 선택해 미리 연습한 대로 전차를 양성했다. 만 명이 넘는 전차부대의 연습을 지켜보는 제동은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이집트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그 수가 적지 않았다. 그 중에는 규모와 내용에 있어서 대단한 명작도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영화도 자신이 직접 그 곳에 있다는 느낌을 이 게임보다 줄 수 있는 것은 없으리라 확신했다. “.... 나도 꼭 하나 구해야겠다. 출연료를 이것으로 달라고 하면 줄까?” 제동은 컨트롤보다 게임 감상에 더 열을 올렸다. 그런 제동의 플레이에 게임은 점점 전략 시뮬레이션보다는 문명을 만드는 게임에 가까워졌다. 상대를 공격하는 플레이가 아니라 문명을 키우면서 기쁨을 느끼는 제동의 컨트롤에 사람들은 어이가 없었지만 유명한 사람의 색다른 플레이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진성은 자신이 먼저 도발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상대인 김제동의 이집트를 정찰하니 완전히 이것은 도시건설이었다. 전차부대도 열심히 훈련시켰지만 실전의 배치는 하지 않고 도시 근처에서 그 규모만 늘리면서 훈련만 하는 일종의 근위부대처럼 보였다. 처음에는 뭔가 다른 점이 있을 것 같은 참신한 플레이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대는 전쟁이나 다툼이 없는 혼자만의 게임을 하는 것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 게임 하면서 이런 사람은 처음이네.....” 진성은 시간을 확인하면서 어쩔 수없이 자신이 먼저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준비한 깜짝 이벤트를 위해서 필요한 인력을 남겨 두고는 최대한 끌어 모아서 군선을 이용해 이집트를 향한 원정길에 올랐다. 20만이 넘는 병력을 이동하면서 군단 하나를 먼저 이집트에 상륙해서 작은 전투를 일으키도록 지시했다. 상대인 김제동에게 전쟁이 임박했음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뭐?” 신나게 건물을 증축하고 자신의 이름을 딴 피라미드를 다시 지으려고 재정에 신경 쓰고 있던 제동에게 북쪽 해안에서 전투가 일어났다는 보고는 생각도 못한 것이었다. 제동은 이제야 이 게임이 혼자가 아니라 상대와 전쟁을 해야한다는 것을 알았다. 어쩔 줄 모르던 제동은 자신이 멋지게 키워왔다고 생각한 전차부대를 북쪽으로 보냈다. 자신이 직접 지휘하기는 힘들 것 같아서 군단장 중 한 명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해서 보냈다. 제동은 급한 마음에 이집트 문명의 장점 중 하나인 방벽을 쌓기 시작했다. 재정은 피라미드를 건축하기 위해서 이미 모아 두었기에 충분했다. 제동은 다른 면은 신경 쓰지 못한 채 방어벽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김제동, 정말 대단하네... 저 사람 진짜 문명 온라인 해 본적이 없는 것 같다...” “어떻게 저런 게임기를 이용해서 심시티를 하냐?” “그래도 재밌잖아. 저런 사람이.. 저렇게 허둥대니까 더 재미있는데 뭐....” 먼저 보낸 군단의 상륙에 이어 로마군의 본진 역시 상륙에 성공했다. 진성은 이미 정찰을 통해 알았지만 이렇게 방어가 허술할 줄은 몰랐다. 또한 미리 상륙한 군단의 일부를 정찰병으로 보냈는데 그 정찰병들이 보낸 소식은 진성을 더욱 기막히게 만들었다. 이집트에서 보낸 부대는 완전히 전차로만 이루어진 전차부대라는 첩보는 진성을 어이없게 만들었다. 어떤 문명이건, 어떤 군대건 간에 하나의 부대로만 모든 것을 할 수는 없었다. 기병이 있으면 보병이 그 뒤를 받쳐야 하고 전차가 있으면 그 약점을 받쳐줄 다른 부대는 반드시 필요했다. 보병 없는 전차는 로마의 최강 전력인 중보병과 맞딱뜨리면 풍비박산 깨질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진성은 상대 제동이 얼마나 이 문명 온라인에 대해 무지한 지 다시 한번 알 수 있었다. 진성은 이제까지 해 본 적이 없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상대의 실력을 끌어내기 위해 다가오는 전차부대를 다룰 것인지. 진성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로마군의 진지를 튼튼히 하라고 지시했다. 진성은 결심했다. 아무리 연예인이라지만 전략 시뮬레이션을 하면서 이런 식으로 한다는 것에는 어느 정도 강한 충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5,7,9,14군단. 다가오는 전차부대를 완전히 전멸시켜라. 적의 도주는 허락하지 않는다. 완전히 박살내버려라.” 진성은 4개 군단으로 이집트의 전차부대를 완전히 파괴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는 제동의 근거지 앞에서 본격적인 시위를 하리라 계획했다. “아..... 이런.... 10만의 전차부대가 8만의 보병에게 지다니.....” 제동은 어이가 없었지만 제동이 보낸 부대는 인공지능이 판단해서 전투를 했고 8만의 보병은 진성 자신이 직접 군단장들을 통해서 전술을 수립했기 때문에 비교할 수가 없었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좋아도 기세 싸움인 초반의 전술과 중반이후의 힘 싸움을 적절히 사용하는 진성을 이길리는 만무했다. 진성의 20만에 달하는 군대가 급조된 방어벽 바로 밖에 진을 치고 시위하는 모습을 보니 제동은 마음이 더욱 더 급해졌다. 제동은 자신이 이 게임을 너무 만만하게 본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화면으로 봤을 때의 게임과 자신이 직접 들어와서 게임한 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별다른 신경 쓰지 않고 자신만의 게임을 한 제동은 질 수밖에 없는 게임임을 인정했다. “스키피오, 제가 졌습니다.” 제동은 순순히 패배를 인정했다. 하지만 들려온 스키피오의 대답은 딴 소리였다. “잠깐, 조금만 기다리세요. 재미있는 것을 보여줄 테니까요.” 제동은 이미 게임에서 졌음을 선언했기 때문에 제동이 있는 공간은 관객들이 보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제동의 공간에서 느껴지는 현실감은 관객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이미 게임은 스키피오의 승리로 돌아갔다. 스키피오는 게임의 승자로서 게임 전체를 컨트롤했다. 제동을 비롯해 관객들은 높은 산을 볼 수 있었다. 무척이나 당당해 보이는 산이었지만 왜 스키피오가 이런 화면을 보여주는 지는 알 수 없었다. 관객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릴 무렵 산에서 약간의 움직임이 있었다. 스키피오, 진성은 산을 더 가까이 볼 수 있도록 컨트롤했다. 산은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 진동이 더욱 심해졌다. 곧 산 정상이 심하게 요동친 후에 가스가 세차게 터져 나왔다. 검은 연기가 하늘을 뒤덮고 이어서 가스가 나오는 틈으로 뭔가가 큰 소리를 내며 하늘로 치솟기 시작했다. 사람보다 큰 돌덩어리부터 시작해서 사람의 주먹보다도 작은 돌덩어리가 하늘을 날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붉은 용암이 정상 바로 옆의 바위를 가르고는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엄청난 화산폭발이 일어났다. 용암은 처음에 튀어올랐다가 유유히 아래로 흐르기 시작했다. 정상은 다시 한번 폭발했다. 폭발과 동시에 화산재가 엄청나게 피어올랐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폭발을 일으켰다. 화산재는 검은 회색의 낮은 구름을 만들어 산을 뒤덮고 산 주변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엄청난 속도로 산을 내려오는 화산재는 눈사태보다 더한 규모와 속도를 자랑했다. 지나가는 모든 것을 뜨거운 화산재로 덮어버리는 재앙이 시작된 것이다. 관객들은 숨조차 죽이며 엄청난 화산 폭발을 볼 수 있었다. 산을 완전히 집어삼킨 화산재는 나머지를 유유히 뒤따라오는 용암에게 맡기고는 눈앞에 보이는 고대 도시를 향해 질주했다. 전차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빠른 화산재는 고대 도시를 완전히 덮어 버렸다. 관객들은 저 정도의 빠르기라면 그 도시 안의 누구도 재앙을 피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아...... 폼페이.... 베수비오 화산?” 관객 중 한 사람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 맞다. 폼페이 최후의 날!” “와..........” 스키피오, 진성은 시간적인 예상과 베수비오 화산에 대한 개인적인 지식으로 시간을 겨우 맞출 수 있었다. 이 장면을 위해서 많은 게임상의 NPC를 희생시켰지만 당연히 죄책감을 가질 진성은 아니었다. 단지 많은 사람들이 이런 장면을 보면서 문명 온라인에 더욱 관심을 가지기를 원했다. 원래 문명 온라인의 아마추어 버전에는 이런 스펙터클한 화면이 불가능했다. 그런 관계로 스키피오, 진성이 연출한 폼페이 최후의 날은 사회자인 제동과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관객들은 역시 스키피오라는 탄성을 내지르며 MC 김제동과 게이머 스키피오가 게임기에서 나와 인사를 할 때까지 박수와 환호를 발했다. 제동은 자신의 안이함에 조금 부끄러웠지만 다시 한번 게임을 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넘쳤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프로 게임기를 구해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컨벤션홀에서 정해진 게임을 마치고 대기실로 간 진성과 현준은 잠시 쉬기 위해 뒤로 온 사회자 김제동을 만날 수 있었다. “아까는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진성씨, 현준씨 맞죠?” “네, 제가 아까는 너무 몰아붙였죠?” “아니오. 그렇게 안 했다면 저 아직도 피라미드 짓고 있을 겁니다. 하하하..” 진성의 사과에 농담으로 응수한 김제동이었다. 김제동은 땀을 닦으며 말했다. “.... 나중에 개인적으로 시간 나면 한 번 밥이나 한끼 같이 먹을래요?” “예? 아... 저야 좋죠.. 현준아 너는?” “나야 물론... 연예인 중에서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리고 김제동씨 저희보다 나이가 많으실 것 같은데 말 놓아도 됩니다.” 20대 후반인 김제동은 그 말에 대뜸 말을 놓았다. “그럴까? 그 대신에 너희들도 형이라고 편하게 불러라.” “네, 제동이 형.” 진성과 현준은 처음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붙임성 있게 대해주는 김제동에게 편함을 느꼈다. 브라운관의 스타 이미지가 아니라 이웃집 형 같은 느낌에 더 기분이 좋았다. 진성과 현준은 짧은 시간 동안 김제동과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쉬는 시간은 곧 끝이나 제동은 무대로 올라갔다. “나중에 한번 꼭 보자.” “네, 제동이 형.” “진성아, 현준아. 다음 장소로 이동하자!” 김제동이 무대로 올라가자 곧 매니저 서재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성과 현준은 조금 전의 게임으로 피곤했지만 프로 게이머로서 참아야했다. 둘은 이준이 운전하는 밴에 올라탔다. 진성과 현준은 왜 연예인들이 차로 이동하면서 매일 잠만 자는지 그 이유를 알 듯했다. 이제 막 시작한 자신들도 힘든데 이런 스케줄이 생활인 스타들은 정말 체력 뿐 아니라 정신력도 강해야 함을 절실히 깨달았다. 진성과 현준은 차안에서 팔과 목을 돌리며 몸을 풀었다. 긴장으로 뭉친 몸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 피곤해진다는 운전기사 이준의 말에 달리는 차안에서도 최대한 몸의 긴장을 풀기 위해 노력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서 여의도 제1 전시관에 도착했다. “현준아, 진성아.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과 게임을 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리 피곤하지는 않을 거다. 그리고 이미 회사의 중요한 사람들은 이 자리에 와 있을 테니까 우리가 해야할 일은 정해진 순서에 프로 전용 게임기에 탑승해서 스펙터클한 화면을 보여주기만 하면 되니까. 현준이는 잠깐 쉬어도 될 것 같다. 관계자들이 일단 스키피오의 시범을 원하니까. 자, 안으로 들어가자.” 매니저 서재필의 설명이 끝나자 현준과 진성은 앞서 가는 서재필을 따라 마련된 대기실로 이동했다. 제1 전시관은 정장 차림의 사람들로 가득했다. 조금 전의 콘서트 같은 열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넓은 전시관에 마치 대통령 만찬이라도 하듯 원형 테이블이 즐비했고 테이블마다 간단한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진성과 현준은 매니저가 미리 준비한 정장에 넥타이를 매고는 전시관의 뒤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았다. 물론 청바지를 선호하는 매니저 서재필도 옷을 미리 갈아입었다. 조금 있으니 편한 차림의 이준도 넥타이 차림으로 전시관으로 들어왔다. “와, 여기 있는 사람들은 또 다르네. 완전히 양복 부대에 여자는 거의 없네.” 현준의 말대로 전시관은 온통 정장 차림의 사람들이었고 여자는 두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이미 모임은 시작되었는지 앞에 설치된 낮은 단상에서 어떤 사람이 말을 하고 있었다. “... 이미 보셨겠지만 저희가 개발한 이 ‘문명 온라인, 영웅 스키피오’의 게임성은 누구라도 인정해야할 겁니다. 게다가 프로 전용 게임기의 성능 역시 적지 않은 사람들의 검증을 받았습니다. 오늘 게임이 정식으로 출시된 이상, 이제 저희 자소 소프트로서는 프로 리그의 출범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 게임 출시 전에 여러 곳에서 프로팀 창단에 대한 문의가 많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직 나오지도 않은 게임에 대해 뭐라고 할 수가 없었기에 정중히 사양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 게임이 출시된 이상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이 곳에 오신 분들은 프로팀에 관심이 있거나 프로 리그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입니다......“ 진성과 현준은 단상에서 말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팀장님?” “대장님이?” 바로 이희철 문명 온라인 개발팀장이었다. 개발팀장이었지만 자소 소프트의 특이한 구조상 사장 박경락과 또 다른 개발팀장 진민수와 함께 막강한 삼총사를 이루는 사람이 바로 이희철이었다. 사장인 박경락도 자소 소프트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지만 개발팀장인 이희철과 진민수 역시 다른 회사로 옮길 경우 심각한 타격을 입을 정도로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인 만큼 이런 중요한 프로 리그 출범에 대한 책임까지 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희철 팀장은 말을 계속 이었다. “..... 현재로서는 삼선전자가 초대 문명 온라인 프로 리그의 메인 스폰서 역할을 해 줄 겁니다. 이미 시작된 다른 게임의 프로 리그와는 달리 처음부터 두 개의 리그로 나누어서 경기를 치를 예정입니다. 자, 이 쪽을 봐 주십시오.” 이희철 팀장의 말에 이희철 팀장 뒤에 미리 준비된 스크린 막에 화면이 나타났다. 삼선전자가 메인 스폰서였고 2개의 방송사에서 방송 계약을 맺었다는 내용까지 나와 있었다. 그리고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은 처음 리그의 시작부터 두 개의 리그인 웨스턴 리그와 이스턴 리그로 나누어 경기를 하고 그 경기의 성적에 따라서 마치 미국 프로 야구처럼 플레이오프를 통해 각 리그의 우승을 가리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월드 시리즈라는 이름의 마지막 최종 우승자를 결정하기 위한 게임이 예정되어 있었다. 잘 짜여진 리그 운영 방식에 모인 사람들은 자소 소프트의 프로 리그에 대한 준비를 알 수 있었다. “... 보시는 바와 같이 두 개의 리그로 만들 예정입니다. 지금 아직 각 리그에 출전하는 선수를 기준으로 할지, 팀을 기준으로 삼을 것인지는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많은 팀이 출전한다면 팀을 위주로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일단은 선수 개인으로 리그를 운영하게 될 겁니다.” “저..... 여러 명이 동시에 게임을 할 수는 없습니까?” “죄송합니다만, 질문은 나중에 같이 받겠습니다. 나중에 해 주십시오.” 이팀장은 다시 자신 앞에 놓인 계획서를 보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저희들은 두 경우에 각각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선수 개인을 중심으로 한다면 저희 예상에 그리 문제될 것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단지 팀을 중심으로 할 경우에는 각 리그 당 적어도 8개의 팀이 있어야 원활하게 재미있는 경기가 연출될 것 같습니다. 아직 초기지만 저희의 꿈을 말씀드리면 단순히 온라인에서 즐기는 게임이나 TV를 통해서 보는 게임이 아니라 프로 스포츠와 비슷하게 프로 게임 센터를 곳곳에 설치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곳을 통해 프로 리그를 실제 사람들 앞에서 진행함으로써 컴퓨터 상의 게임이 아닌 야구나 축구와 같은 레포츠로서의 게임을 만드는 겁니다. 그와 더불어 프로 스포츠처럼 프로 팀의 연고제를 통해서 확실한 팬들을 끌어들이고 그와 함께 탁월한 광고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단지 상상이라고 생각하실 분들도 있겠지만 저희는 그것을 이룰 수 있는 꿈, 희망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 자소 소프트는 그 일환으로 이미 다목적 게임 센터를 마련했습니다. 규모 면에서는 여타 프로 스포츠의 경기장에 비해 아주 소규모지만 한 가지 게임이 아닌 여러 게임의 프로 리그를 같이 열 수도 있기 때문에 실현 가능성은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팀장의 발언은 좌중의 사람들을 동요시켰다. 인기 좋은 게임의 프로 리그 출범이라는 어떻게 보면 단순한 과정이라 여겼던 사람들은 자소 소프트의 무리하다 싶을 정도로 공격적인 마케팅의 실체를 알 수 있었다. 자소 소프트의 행보는 문명 온라인의 성공 뿐 아니라 게임이라는 게임팬들만의 전유물을 온라인에서 끌어내어 오프라인에서 성공시키겠다는 당찬 계획이었다. 이미 확인된, 영화를 능가하는 문명 온라인의 게임 인터페이스는 경험한 사람들이면 그 인터페이스가 구현된 프로 전용 게임기를 구입하겠다고 할 정도로 중독성이 강했다. 자소 소프트의 그 엄청난 계획에 대한 자신감은 이미 시장에서의 폭발적인 반응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 전시관에 모인 많은 사람들은 서로 의논하기 시작했다. 이미 프로 게임은 젊은 층에 대한 광고효과가 최고라고 증명되었다. 그런 탁월한 광고효과를 위해 참석한 사람들은 이미 수익성을 예상할 수 있었다. 게다가 곧 초대형 멀티비전을 통해 상영된 게임 화면에 사람들의 수근거림은 더 심해졌다. 비록 여기에 참석한 사람들에게는 결정권이 없지만 그 결정에 충분히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준비된 순서는 계속 진행되어 게이머 스키피오, 진성과 스폰서인 삼선전자에서 온 직원이 프로 전용 게임기를 이용해서 간단히 게임을 하기로 했다. 원래는 삼선전자 스폰서 계약의 책임자가 하기로 했지만 약간은 경직된 기업문화 때문에 따라온 사람 중에 직급이 대리인 사람이 대신 체험하기로 했다. 진성은 밖에 나가서 인사하고는 곧 옷을 갈아입고 게임기에 탑승했다. 삼선전자의 직원도 역시 반대쪽에 설치된 게임기로 올랐다. 진성이 해야하는 것은 게임이 아니라 일종의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기에 미리 자소 소프트의 직원과 얘기가 되어 있었다. 진성은 몰랐지만 이미 매니저인 서재필이 다 처리했고 진성이 옷 갈아입을 때 서재필이 살짝 말했다. “게임이 시작되면 모든 게임의 제어는 네가 할 수 있을 거다. 이미 그렇게 하기로 합의 봤으니까 최대한 스펙터클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 수 있는 걸로 보여 주면 될 것 같다. 수고해라.” 평소에는 엽기적인 매니저인 서재필, 일할 때는 똑 소리날 정도로 다른 사람으로 변해 버렸다. 게임은 시작되었고 진성은 몇 번 조작해 본 후에 자신이 거의 모든 것을 할 수 있음을 알았다. “이거.... 게임 치트키가 있는 건가?” 건물을 새로 지을 때 평소의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지어지는 것과 없는 자원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꾸준히 올라가자 치트키 생각이 난 진성이었다. 곧 그런 생각은 잊고 진성은 어떤 화면을 보여줄까 고민했다. 역시 로마제국을 선택한 진성은 여의도 전시관으로 오기 전에 했던 컨벤션홀에서의 ‘화산폭발’을 떠올렸다. 진성은 일단 빠르게 군대를 양성하면서 밖의 관객들과 아무것도 하지 못한채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을 공간에서 허우적거리며 보고 있는 삼선전자의 직원에게 거대한 군대의 훈련장면을 보여주었다. “와.... 저런 화면이라니..... 이야... 이거 영화 뺨치는데...” 초대형 비전을 통해서 보고 있던 사람들은 탄성을 질렀다. 이미 비슷한 화면을 봤지만 내심 어떤 손질이 간 화면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지금 보는 것은 바로 앞에서 게임하는 화면이었다.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삼선전자의 직원은 자신이 갑자기 공중 위에 떠 있자 놀라서 몸을 요동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그런 모습에 웃었다. “... 테스트를 위해 게임기에 탑승한 삼선전자의 직원은 지금 하늘 위에 떠 있습니다. 탑승자는 거의 현실과 다름없이 자신의 몸이 공중에 떠 있기 때문에 저런 몸짓을 하는 겁니다.” 이팀장의 설명에 웃던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성은 빠르게 문명은 발전시키면서 시간까지 조정했다. 진성은 게임을 하면서 한번도 이런 ‘슈퍼모드’를 사용한 적이 없었고 이런 기능이 있는지도 몰랐다. 이런 방법이 알려지면 곤란할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모든 군대를 폼페이로 옮기기 시작했다. 폼페이 근처에 도착해 진을 친 군대를 동원해서 도시 폼페이와 베수비오 산 사이에 방벽을 치기 시작했다. 높이가 30m가 넘는 방벽을 쌓고 있는 수십 만의 군인들의 모습 역시 장관이었다. 관객들은 왜 이런 일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영화같은 화면에 빨려 들고 있었다. 또한 폼페이의 시민들과 그 주변의 시민들을 다 모아서 집을 개조하기 시작했다. 화산재로 인한 참사를 막기 위해서였다. 대피하면 되겠지만 진성은 화산의 위력과 그 위력을 이겨내는 인간의 노력을 보여주고 싶었다. 모든 것을 다 덮어버리는 화산재의 위력을 피하기 위해서는 지하실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폼페이의 모든 집에는 가족들이 다 들어가서 피할 수 있는 지하실을 만들기 시작했다. 용암을 막기 위한 방벽이 완성되고 폼페이의 집에 지하실이 완성되자 진성은 군대를 멀리 떨어진 안전한 언덕으로 이동시켰다. 진성은 곧 주어진 권한으로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을 시작했다. “.............” “....... 꾸울꺽....” “.......” 서로 얘기를 나누느라 시끄럽던 전시회장은 순간 침 넘어가는 소리만 들렸다.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는 베수비오의 화산 폭발 장면은 압권이었다. 특히 화산재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면서 산을 뒤덮으며 내려오는 장면은 진짜 전시회장을 덮을 듯한 사운드와 더불어 현장감을 생생히 느끼게 했다. 화산재를 뒤따르는 용암의 유유히 흐르는 모습은 그 열기까지 전시회장에 전달할 정도였다. 사람들은 이제야 왜 게이머가 방벽을 쌓았는지, 지하실을 만들었는지 알았다. 곧 화산재는 폼페이에 들이닥쳤다. 높은 방벽도 화산재를 막지 못했다. 순식간에 아름답던 폼페이는 화산재에 당해 화재가 났고 검회색빛으로 변해 버렸다. 뒤이어 천천히 다가온 붉은 용암은 높은 방벽에 막혀 다른 곳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하늘을 뒤덮던 검은 연기에 하늘은 점점 더 어두워지더니 곧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화산폭발로 달궈진 대지에 비가 내리자 초대형 비전에 비춰진 대지에는 거대한 수증기의 연기가 피어올랐다. 화산재와 용암이 쓸고 간 대지는 서서히 식으면서 칼라가 아닌 흑백의 화면으로 바뀌었다. “와.. 살았다!” “살았다!!!!” “로마제국 만세!” 완전히 생기가 사라진 폼페이. 폼페이의 각 집 지하실에 있던 사람들이 한 둘 나오더니 폐허가 된 도시의 광경을 보고 망연자실했다가 그래도 살아났다는 감격에 환호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군인들도 기쁨의 감격을 이기지 못했다. 비전으로 보던 사람들도 거대한 자연의 재앙과 그 재앙을 극복해내는 사람들의 모습이 게임 속의 화면이라는 사실에 말을 잃었다. 사람들은 이제야 자소 소프트가 무모할 정도의 엄청난 계획을 그토록 자신 있게 말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또한 이번에 프로 리그와 게임 문화의 혁신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말은 어쩌면 업계에서의 도태로 이어질 지도 모른다는 극단적인 생각까지도 가능하게 했다. 이제까지와는 달리 사람들은 아는 사람들끼리 조용히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이 하니 나도 한다’의 미지근한 접근이 아니었다. 옛날 영화가 처음 등장했을 때보다 더 충격이 큰 새로운 대중 문화의 등장이라고 여겼다. 그런 사람들의 반응을 지켜보던 이팀장은 미소를 지으며 뇌까렸다. “...... 프로 리그는 문제없겠군. 게다가 게임 센터에 대한 투자도......” “지금부터 질문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 아까 질문했던 내용입니다. 여러 명이 같이 게임을 할 수는 없습니까?” “팀플레이는 내년에 발표될 익스텐션 버전에 포함될 예정입니다. 어느 정도 시스템은 구축된 상태입니다만 테스트 기간이 적어도 3,4 개월 이상 필요합니다.” “LQ 전자입니다. 프로 리그가 구성되면 리그의 운영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 좋은 질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할 내용입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프로 리그에 참가할 팀들이 정해지면 의논하게 되겠지만, 기본적으로는 리그 운영위원회가 만들어져 리그에 대한 모든 것을 관할하게 될 겁니다. 운영위원회의 구성은 저희 자소 소프트를 비롯해서 프로 리그에 참여하는 모든 프로팀들을 망라해서 리그 운영에 대한 잡음을 없앨 수 있게 만들 겁니다. 질문에 대한 답이 되었는지?” “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종합상사 선린입니다. 앞으로 해외에서의 활동 계획은 어떻습니까?” “상당히 멀리 내다보시는군요. 현재, 영어로 된 프로 게임 전용기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물론 아마추어 버전은 해외에서도 오늘 동시에 발매가 되었습니다.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영어권으로 묶어 해외 프로 리그도 현지 사정과 여러 행정적인 문제들을 검토해서 시작할 예정입니다. 국내와는 사정이 다르기 때문에 확실히 언제 시작한다는 말씀은 드릴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질문 있으신 분?” “KBC 방송국입니다. 프로 리그의 시작은 언제쯤으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음... 대략 프로팀들이 결정되고 운영위원회가 소집된 후, 한 달 정도 지나서 시작할 예정입니다.” “그러면 테스트 때부터 투입된 자소 소프트의 프로 게이머가 유리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운영위원회가 구성되면 자세히 의논하겠지만 저희 자소 소프트는 첫 프로 리그에 직접적으로 참여를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저희 소속 프로 게이머가 참가해서 게임을 하겠지만 그것은 프로 리그 게임이 아니라 일종의 번외 게임이 될 겁니다. 그리고 첫 프로 리그가 지나면 자소 소프트의 이름으로 리그에 참여하게 될 겁니다.” 이팀장의 말에 사람들은 웅성대기 시작했다. 게임 개발사로서 프로 리그의 활성화를 위해 어려운 결정을 내린 것이다. 유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그 위치를 버리기는 쉽지 않다는 것을 모인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그 말에 제일 놀란 사람은 진성과 현준이었다. 자신들은 프로 게이머로서 자소 소프트에 1년 동안 고용된 것이기에 의아해 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팀장의 말에는 한 가지 언급하지 않은 사실이 있었다. 이팀장은 첫 프로 리그는 시범적인 리그로 리그의 시간을 최대한 짧게 줄일 생각이었다. 대략 한 달에서 두 달 정도의 시간으로 첫 프로 리그는 마감한 뒤에 내년 초를 기해서 본격적인 프로 리그를 시작할 예정이었다. 이팀장에게 있어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알고 있는 것을 말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이팀장이 알고 있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다 말해줄 의무는 애초에 없었다. 그런 내막을 모르는 진성과 현준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멍해 있었다. “진성, 현준. 걱정 마라. 회사에서 너희를 가만히 놀려 두려고 그 비싼 돈 들여서 계약한 것은 아니니까.” 어느 정도 사실을 알고 있던 매니저 서재필은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더욱 웃음을 짙게 하면서 사악하게 한 마디 붙였다. “자, 준비해라. 우리는 이제 여기 있을 필요가 없으니까.... 방송국으로 가서 인터뷰도 해야 하고 오늘 밤 부산으로 출발해야 하니까......” 진성과 현준은 정식 출시일을 기준으로 거의 일주일 동안 빡빡한 스케줄 때문에 체력이 고갈됨을 느꼈다. 다행히 일주일 정도 지나자 눈에 띄게 스케줄이 줄어들었다. 매니저이자 프로게이머 팀의 팀장이기도 한 서재필의 강력한 주장에 지방 스케줄은 완전히 사라졌고 이동 시간이 많지 않은 곳만 간간이 갈 뿐이었다. 게다가 첫 프로 리그에서 참가하지 않게 됨에 따라 상대적으로 여유 시간은 늘어났다. 현준과 진성은 문명 온라인 개발팀의 요람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프로게이머 팀에 배정된 사무실이 있었지만 일종의 휴게실과 비슷했다. 게다가 매니저인 서재필은 바삐 돌아다녔고 이준은 사무실에 그냥 죽치고 있는 것은 성격에 맞지 않는다면서 일 있으면 전화하라는 말 한마디 해 놓고는 밖으로 나돌아 다녔다. 그러니 현준과 진성이 친근한 개발팀의 요람에서 지내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김덕만과 공동진은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게다가 프로 게이머로 공식적으로 활동하면서 거의 만나지 못했던 김하나는 특히 눈물까지 글썽이며 환영했다. 한바탕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현준과 진성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요람에서 문명 온라인의 새로운 부분을 테스트한다거나 업데이트와 익스텐션 버전에 대한 게이머로서의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현준은 여전히 진성보다 상대적으로 약한 빠른 판단력과 상황 파악을 위한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여러 전략,전술에 대한 이해를 위해 진성과 같이 연구하며 시간을 보냈다. 진성은 현준과의 연습 외에는 자신의 책상에 앉아서 예전에 보다가 치워버린 가상현실 접속에 대한 결과를 다시 검토하기 시작했다. 진성은 로플팀의 조진철 프로그램 팀장에게 가서 한번 더 가상현실에 대한 강의를 요청했다가 한 대 맞을 뻔했다. 그 대신 일만 떠맡았다. 조진철은 잊을 만하면 나타나서 자신에게 그 골치아픈 가상현실에 대해 강의해 달라는 진성을 보니 화가 났다. 요즘 진정한 가상현실 게임으로 가기 전, 과도기적 단계의 게임을 한창 개발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간에 쫓겼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신경이 날카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때에 자신에게 찾아와 골치 아픈 얘기를 꺼내는 진성이 좋게 보이지 않았다. 진성이 회사 차원에서 문명 온라인이라는 게임의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틀림없지만 조진철 자신은 문명 온라인 팀이 아니었다. 게다가 자신이 속한 로플팀과 프로그래머로 계약까지 했는데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듯하자 욱하는 성질에 마음에도 없는 세미나 이야기를 하고 말았다.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자신도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주제를 한창 프로 게이머로 시작하는 사람에게 시킨다는 것은 자신이 생각해도 말도 되지 않았지만 진지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진성을 보자 장난기가 발동했다. “야! 너, 우리 팀에 프로그래머로 계약했다며? 그러면 당연히 일을 해야지. 다음 주 월요일까지 네가 이제까지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가상현실에 대해 정리해서 세미나 한번 해라. 알겠냐?” 진성은 뜨끔했다. 괜히 찾아왔다가 세미나라는 철퇴를 맞고 나자 순간 움찔했던 것이다. 진성은 눈앞에서 눈을 부라리는 조진철 프로그램 팀장 앞에서 못하겠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네.......” “...꼭 준비해라. 로플팀 모두 다 세미나에 참석할 테니까...” “...네....” 진성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로플팀을 나섰다. “푸하하하하, 저 녀석 꼴을 보니 속이 다 시원하네. 설마 그 많은 자료로 세미나 할 엄두는 내지도 못하겠지? 며칠 동안 고생 좀 하겠지.” 진성이 나가자 조진철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진성은 그 기쁨에 찬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휴.... 괜히 찾아가서.........” 진성은 자신의 책상 위에 펼쳐진 많은 복잡한 문서들을 보고 모니터에 나타난 도식과 결코 간단하지 않은 다이어그램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로플팀과 진팀장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엄청난 짐을 지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진성은 아예 처음부터 다시 읽고 생각해야 했다. 옛날에 들었던 가상현실에 대한 강의는 진성의 기억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진성은 자신의 기준에서 많은 문서를 읽고 또 읽었다. 그러다 보니 예전에 자신이 집중적으로 보았던 사람과 가상현실 시스템과의 인터페이스의 관계에 대해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음.... 자극에 대한 반응이라.. 음....” 진성은 자신이 무엇을 중얼거리는지도 모른 체 열심히 생각을 거듭했다. “..... 수많은 자극에 대한 반응을 하나하나 지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수많은 자극을 하나하나의 자극으로 분류하는 방법으로는 문제 해결이 불가능하다. 휴... 어떻게 할 수 있지?” 진성은 계속 생각했다. “....... 나누지 않아야 해결할 수 있다........ 나누지 않아야.......... 분리가 없다? 음....... 나누지 않는다는 말은 분리가 없다라....... 음... 분리? 분쟁? 아... 분쟁이 없어야 된다? 나누어지지 않아야 된다......... 아...” 진성은 예전 병법을 연구할 때 보았던 책 하나를 급히 찾았다. “...음...... 여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진성은 그리 두껍지 않은 책을 이리저리 뒤지지 시작했다. 급한 마음에 빨리 찾고자 하니 더 찾기 힘들었다. 진성은 심호흡을 하고는 천천히 찾았다. “아... 여기다. 다투지 않기에 허물이 없다(夫唯不爭故無尤)...... 다투지 않기에 허물이 없다....... 다투지 않기에... 음... ” 진성이 찾은 책은 바로 도덕경이었다. 진성이 특히 찾던 것은 도덕경의 8장에 나오는 구절이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주제를 가진 8장의 마지막 구절이 바로 夫唯不爭故無尤 였다. 진성은 도덕경을 천천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다시 주의깊게 읽었다. “휴.... 정말 쉽지 않네.........” ‘天長地久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故能長生’ 천지는 장구하다, 천지가 능히 장구할 수 있는 까닭은 스스로 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능히 오래일 수 있다.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 무언가가 유익이 되는 때는 그것이 텅 비어 있을 때다. 진성은 도덕경에서 마음에 닿는 부분을 깊이 생각했다. 도덕경이라는 자체가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상현실을 연구하면 할수록 뜬구름 잡는 듯한 생각이 들었고 그 중에 나타난 의문은 도덕경의 한 구절과 너무 비슷했다. 진성은 잡을 수 없는 뜬구름을 잡는 심정으로 도덕경을 읽어 내렸다. 뭔가 그럴 듯한 구절들은 있었지만 그 내용이 0,1로 이루어진 최신의 시스템에 어떻게 연관될지 진성은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텅 비어 있다는 말을 전산 시스템에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지 진성에게는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문명 온라인, 영웅 스키피오’가 출시된 지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게임에 관한 기록을 차례차례 경신하고 있었다. 예약판매 60만장 돌파라는 위업을 달성하는가 하면 출시 첫날 16만장의 게임 타이틀이 팔려나가 게임 업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게다가 대부분의 게임이 국내 시장에서 승부를 내는데 비해 문명 온라인은 해외에서도 호평과 함께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 출시 첫날에 해외에서 28만장이 팔려나가 게임 관련 업계를 경악케 했다. 예약판매를 포함해서 하루만에 100만장이 넘게 팔린 게임은 국내에서 문명 온라인이 처음이었다. 많은 게임 개발사들은 문명 온라인으로 인해 게임 시장 자체가 커져 다른 게임 타이틀의 판매에도 장기적으로 볼 때 긍정적인 효과가 있으리라 예상했다. 또한 인터넷에서 시작된 ‘문명 온라인 신드롬’은 방송을 통해 더욱 확산됐다. 게임 업계 사상 최초인, 발매 하루만에 100만장이 넘게 게임 타이틀을 판매한 자소 소프트에 대한 궁금증은 각 방송국의 메인 뉴스에 자소 소프트와 문명 온라인에 대한 뉴스가 나오게 만들었다. 그 전까지는 자소 소프트에서 만든 게임 CF 와 게임 채널에서 소개된 것 정도였다. 메인 뉴스의 위력은 엄청났다. 그렇지 않아도 치솟던 자소 소프트의 주식은 하늘 높을 줄 모르는 듯 껑충 뛰어올랐다. 게임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는 40대 이상도 자소 소프트라는 생소한 이름의 기업에 대한 이미지 정도는 가질 정도로 사회적인 파장은 엄청났다. 거기에 자소 소프트의 문명 온라인의 프로 리그 출범에 대한 계획과 게임 센터를 이용한 게임 문화를 레포츠로 끌어올리기 위한 청사진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자 다시 한번 술렁였다. 지금까지의 단순한 방송용 프로 게임 리그가 아니라 프로 스포츠와 비슷한 체계의 프로 게임 리그를 시작하겠다는 당찬 계획 자체는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렸지만 그 계획에 참여하는 기업들의 면면은 현실성을 부여했다. 삼선전자, LQ전자, 선린 종합상사, KBC 방송국, 계룡투신 등 쟁쟁한 재벌 기업들의 적극적인 참여 움직임은 뜬구름이 아닌 실현 가능한 계획으로 여기기에 충분했다. 11월, 12월 두 달간 시범적인 프로 리그를 진행하기 위해 운영위원회가 소집되고 내년의 프로 게임 리그 실현을 위한 각 프로팀 창단 기업들의 적극적인 게임센터 건립을 위한 움직임이 가시화 되자 다른 게임의 프로 리그도 새로운 움직임을 보였다. 자소 소프트에서 마련한 레포츠로서의 프로 리그 계획에는 문명 온라인 뿐 아니라 기존에 진행되고 있는 타 게임의 프로 리그 역시 포함했다. 게임 센터는 문명 온라인 뿐 아니라 WIS를 비롯해서 많은 프로 게임을 치를 수 있도록 처음부터 계획되었다. 다른 게임의 개발사와 프로 리그 스폰서들도 게임 시장의 확대에 엄청난 효과를 몰고 올 자소 소프트의 계획에 동조했다. 물론 그 속에서 자신들만의 이익 창출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했다. 진성은 여전히 가상현실 접속 결과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었다. 연말까지는 비교적 시간적 여유가 많았기에 매일 매일 현준과의 연습 게임을 제외하면 자신의 책상에 앉아 문서와 씨름하는 것이 진성의 일이었다. 도덕경까지 뒤적이며 온갖 실마리가 될 듯한 것들은 나름대로 찾았지만 추상적인 동양 사상을 실제적으로 적용하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휴..... 다음 주면... 세미나 해야 할 텐데.... 어떻게 하지.. 하나하나 나누면 안 된다는 것 밖에 모르겠는데...” 진성은 뒤죽박죽된 머리를 쥐어뜯으며 눈에도 잘 들어오지 않는 문서를 다시 붙잡았다. 한숨만 나오는 진성이었다. 그 때 밖에서 급히 뛰어 들어오는 현준이 급하게 진성을 불렀다. “진성아!” “...... 왜? 왜 불러?” “헉헉.... 너 들었냐?” 숨을 몰아쉬며 현준은 다짜고짜 진성에게 물었다. “뭘?” “너, 몰랐구나. 이번 주 일요일 저녁에..........” “저녁에...? 뭐?” “일요일 저녁에...........” “도대체 뭐?” 진성이 화를 내려고 하자 그제야 대답하는 현준이었다. “....... 일요일 저녁에... 우리 팀 모두 다 같이 괌으로 간대.. 괌으로!” “뭐? 괌?” “언젠가 대장님이 그랬잖아. 출시 후에 반응 봐서 개발팀 다 같이 휴가 간다고... 그게 진짜로 이루어질 것 같아...” “진짜? 그럼 일주일 동안?” “내가 듣기로는 일요일 저녁에 출발해서 토요일 오후에 도착할 거라고 하던데... 아마 그렇겠지?” “야호!!!” 현준은 진성의 반응에 약간 놀랐다. 진성이 조금은 놀란 모습을 보일 거라고 예상 했지만 만세까지 부르며 환호하는 모습은 의외였다. 하지만 진성은 괌으로 놀러가서가 아니라 그 출발하는 날짜가 바로 일요일이라는 데 있었다. 진성은 보기만 해도 지긋지긋한 이 가상현실에 대한 세미나를 피할 수 있다는 마음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 다음주에 해야 할 지도 몰랐지만 일단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연장한 것에 만족했다. 진성은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현준에게 물었다. “누구에게 들었는데? 설마 덕만이 형에게 들은 것은 아니겠지?” 개발팀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사람 2위가 바로 김덕만이었다. 1위는 말할 것도 없이 이팀장이었다. “.... 덕만이 형 말은 나도 안 믿는다고. 하나씨에게 들었어. 아마도 휴가 여행에 필요한 예산이 정해진 모양이야. 그렇다는 말은 거의 확실하겠지?” “음.... 와... 나이스! 굿! 굿 타이밍!” 평소 진성의 흥분하는 모습을 보지 못한 현준은 약간 얼떨떨했다. 진성이 그렇게 휴가를 기다리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기에 더욱 그랬다. 혼자서 뭐라고 계속 외치던 진성은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책상으로 가서 곧바로 컴퓨터를 꺼버리고 보고 있던 문서도 덮어 버렸다. “현준아, 오랜만에 하나씨와 같이 교외로 밥 먹으러 가자. 어때?” “뭐? 네가 웬일이야? 나야 좋지. 나 먼저 내려가서 차 갖고 나올 테니까 주차장 입구로 내려와.” “OK." 진성은 자신이 조금 전에 덮은 문서의 표지 일부분을 찢었다. 그리고는 찢은 종이에 뭐라고 적고는 두, 세 번 접었다. 그리 두껍지 않은 윗옷을 입은 진성은 요람 밖으로 나갔다. 평소에는 전화를 했지만 기분이 좋아 날아갈 듯한 진성은 이런 스릴 넘치는 고전적인 방법도 써보고 싶었다. 진성은 하나 책상 옆으로 지나가며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도록 가볍게 접은 종이를 떨궜다. 진성을 바라보며 약간 놀랐지만, 미소 가득한 얼굴을 내보이는 하나에게 진성은 윙크를 한 후에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진성이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자 하나 역시 준비해서 밖으로 나왔다. 둘은 서로 아는 체도 하지 않은 채 엘리베이터에 탔다. “놀랐어요.” “하하... 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평소에 그렇게 한 번 해 보고 싶었거든요...”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평소와 다른 진성의 행동에 하나는 말했다. 진성과 하나는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회사 밖에서 만나곤 했다. 대학 생활에 익숙했던 진성은 처음에 하나와 이야기할 때 호칭이 약간 어색했다. 하지만 형, 누나가 아니면 동생인 대학생활과 사회생활은 달랐다. 회사생활에 적응하면서 말을 올리는 것도 나름대로 편한 구석이 있다는 것을 안 진성은 하나와 처음과 마찬가지로 말을 주고받았다. 물론 거기에는 진성에게 하나에 대한 어떤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나는 그런 진성의 마음을 어느 정도 짐작했기에 이해를 하고 있는 상태였다. “오늘은 어디로?” “현준이와 같이 교외로 나가볼 생각입니다.” “진성씨,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요?” “아, 하하하. 이번주 일요일에 개발팀 전부 다 같이 괌으로 간다면서요?” “아.... 예, 예산도 배정됐고 여행사와의 이야기도 다 끝났으니.. 그런데 그게 그렇게 기분이 좋아요?” 하나는 자신이 아는 진성이라면 휴가 가는 것으로 이렇게까지 기뻐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좋지요. 특히 일요일 저녁에 출발한다는 게 너무 맘에 들어요. 너무.” 진성은 솔직하게 말했지만 하나는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가오는 일요일 저녁에 우리 팀과 프로게이머 팀이 같이 괌으로 일주일간 휴가를 가게 될 예정이다.” “와....와....” “이야.... 대장 말이 이루어지다니..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이희철 팀장은 팀원을 회의실에 다 모아서 개발팀 일의 대부분이 끝나자 예전에 말했던 ‘휴가건’에 대해서 선언했다. 당연히 팀원들의 반응은 엄청났다. 은근히 기대하기는 했지만 게임 개발이라는 것이 워낙 계획대로 되는 경우가 거의 없어서 드러내 놓고 말을 하기는 힘들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터트린 이희철 팀장의 말은 팀원들을 흥분시켰다. 많은 팀원들이 근거 있는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지만 직접 팀장의 말을 듣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다들 준비 잘 해서 보람 있게 갔다 오도록 하자. 준비할 것은 다들 알아서 잘 챙기도록. 이만.” 이팀장이 나가자 그나마 참았던 사람들은 떠들며 끼리끼리 모였다. “뭐가 필요하지? 아, 여권! 다들 여권 가지고 있지?” 한참 들떠 얘기하고 있던 팀원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공동진이었다. 해외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여권이었다. “당연하지. 여권 정도는 미리 준비해 둬야지.” “나는 지난번에 일본 출장 때문에 만들었지...” 당연한 말을 한다는 팀원들 속에는 갑자기 불안한 한 사람이 있었다. “....지..진성아, 너, 여권 있냐?” “어, 얼마 전에 하나씨가 만들어야 한다고 하길래 여권발급신청서와 주민등록등본하고 주민등록증을 맡겼거든. 설마, 너, 여권 없는 것은 아니겠지?” “........” 현준은 여권에 대해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해외여행마저 설악산 여행가는 것과 비슷하게 평소 생각해 온 현준에게 여권에 대한 생각이 있을 리가 없었다. “..... 어쩌지? 진성아... 설마, 나 혼자 못 가는 것은 아니겠지?” “휴..... 정말 없냐? 장난 하지 말고.” “.... 정말 없어...” 현준의 얼굴이 울상이 되자 진성은 그제야 사태를 파악했다. 일단 상황부터 정리했다. “너, 사진 있어? 여권용 사진?” “.....” “일단 너 먼저 밖으로 나가서 최대한 빨리 여권용 사진 찍고 동사무소 들러서 주민등록등본 한통 떼 와라. 가능한 빨리 갔다 와야 한다. 빨리!” “... 아. 알았어.” 현준이 눈썹이 휘날리도록 밖으로 뛰어나가자 진성이 먼저 웃음을 터트렸고 하나와 팀원들이 따라서 배꼽을 잡고 웃기 시작했다. 특히 처음에 여권 이야기를 꺼낸 사람인 공동진은 진성에게로 다가와 어깨를 가볍게 치며 박장대소를 했다. “... 푸하하하하... 저녀석 정말 단순하다! 이렇게 재미있을 줄이야...” “하하하하..... 그런데 사실 조금 미안한데요.....” “.... 재미있으면 됐지.. 뭐..... 현준이 그 녀석이 이런 일로 꽁할 녀석도 아니고..” 회사의 개발팀 차원에서 휴가를 국내가 아닌 해외로 가기로 한 이상 그에 따른 준비를 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미 개발팀 모두의 여권과 기타 필요한 서류, 항공권 예매까지 모두 끝마친 상태였다. 이미 열흘 전에 여권발급을 위해 서류를 꾸몄지만 현준은 그 때 자리에 있지 않아 서류는 냈지만 무슨 서류인지 몰랐다. 현준에게 연락한 진성이 서류를 대신 꾸며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던 진성, 공동진을 위시한 많은 팀원들이 일을 꾸몄던 것이다. “... 그 녀석, 휴가 못 갈까봐 안달이 났겠지? 푸하하하... 나중에 사실을 알면.. 크크크... 정말 재미있겠다.. ”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김덕만은 예전의 그 ‘비디오 사건’을 기억해 내고는 나름대로 복수를 위해 준비했다. 자신을 자소 소프트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도록 만든 그 사건을 생각하면서 이를 악문 덕만은 두 눈을 부릅뜨고 서둘러 사무실을 나섰다. 덕만은 현준이 그 비디오 파일을 공개한 후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었다. 현준에게 복날 개 맞듯 맞은 덕만은 다음 날 회사에 겨우 출근했다. 처음에 턱 중심으로 때리던 현준은 얼굴과 팔 부분과 같이 드러나는 부분은 손도 대지 않았고 허리와 등, 가슴 등 옷을 입어 사람이 알아보지 못하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때렸다. 그러니 덕만 자신은 힘든데 사람들은 그런 낌새를 알아채지 못했다. 출근한 덕만은 사람들이 자신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지 않아도 아파서 제대로 걷기도 힘든 판국에 사람들까지 신경을 자극하니 무척이나 기분이 저기압이 되어 버렸다. 덕만은 그 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제 딴에는 약간 어색하게 걸으니까 그럴 것이라 생각해 버리고 말았다.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는 아픈 허리와 등을 풀기 위해 기지개를 폈다. 그리고 매일 하는 대로 메일을 확인했다. “[과아아앙고오오].... 당신에게 젊음을 드립니다..... 빨리 전화주세요....” “딸깍, 딸깍.” 덕만은 스팸 메일 필터 설정을 기막히게 뚫고 들어오는 광고성 메일을 지웠다. 지긋지긋한 광고 메일을 지우다가 현준이 보낸 메일을 보았다. “어, 이 녀석, 어제는 그렇게 잡아먹을 듯이 나를 패더니 이런 메일을 보냈네..” 미안하다는 내용의 메일을 본 덕만은 현준에 대한 감정이 스르르 녹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아무리 잘못했어도 형을 그렇게 때리는 현준에게 좋은 감정이 있을 리가 없었다. 내심 어리지만 생각이 깊은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곧 날아가 버렸다. 덕만은 메일에 첨부된 파일을 다운로드했다. “뭐지? 어, 용량이 꽤 되네... 뭘까?” 다운로드한 파일의 압축을 풀었다. “어라... 이것은 동영상이잖아? 화해의 뜻에서 뭔가 찐한.... 흐흐흐...”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는 덕만은 입가에 흐르는 침을 닦으며 플레이시켰다. 물론 소리는 자신만 들을 수 있도록 줄였다. “형, 어제는 내가 형을 때려서 미안해. 아무리 형이 잘못했지만 동생으로 형에게 그렇게 때릴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돼지? 그렇지 형? 그런데 어쩌지? 나는 이해가 되는데... 그리고 나 아직 화가 안 풀렸거든. 그래서 이번 한 번으로 이제까지 형의 잘못을 용서해 주기로 했어. 아, 그 두 달 동안의 저녁 식사는 그대로 유효한 거니까 괜히 딴소리는 하지 마. 형, 기대해!” 기대했던 것은 나오지 않고 현준의 모습이 나오자 조금은 실망했지만 그래도 현준의 진심이 담긴 사과라 기분이 좋았다. 처음 부분은 무슨 말인지 알았는데 현준이 말한 뒷부분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뭔가 아직 더 남았다는 말인가? “아!.... 이.... 이런....” 덕만은 곧 현준이 말한 ‘이번 한 번’이 무엇인지 알았다. 얼굴색이 대추껍질처럼 붉게 변하는 덕만은 씩씩거리며 자신이 주인공인 동영상에 눈도 깜박이지 않고 봤다. 비굴한 자신의 모습. 게다가 자신이 맞는 장면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편집된 것이다. 덕만은 누가 볼까봐 얼른 동영상 플레이어를 닫았다. “휴..... 이 녀석. 이런 장난을 하다니.. 휴... 그래도 다행이다. 이 정도로 끝나서...” 덕만은 자신이 본 영상을 많은 사람이 이미 봤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단지 현준이 이런 장난으로 자신을 용서해 준다는 사실이 고마웠을 뿐이었다. 하지만 세상 일이라는 것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덕만씨, 덕만씨에게 그런 면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저...... 그 허리는 괜찮나요? 빈혈은요.....?” “아니야. 내 생각에 덕만씨는 너무 허약체질인 것 같아... 호호호...” “..... 덕만씨 나중에 같이 저녁 식사해요. 좋죠? 호호..” 가슴을 쓸어내리던 덕만은 자신에게로 다가온 여직원들에게 둘러싸였다. 여직원들은 멀쩡해 보이는 덕만에게 농담을 했지만 덕만은 순간 무슨 말인지 알지 못했다. 평소 덕만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던 여직원들이라 더욱 그랬다. “저... 무슨...” “아직 못 보셨나요? 현준씨가 메일로 보냈던데....” “네? 메일? 현준이?” 덕만은 이제야 상황파악을 했다. 자신에게만 보낸 걸로 생각했던 그 메일이 팀원들에게도 발송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이........ 진.현.준........” 덕만은 현준이가 있을 요람으로 달려갔지만 요람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미리 출근했던 현준이 요람의 문을 굳게 닫아버린 것이었다. 열리지 않는 육중한 문, 그 앞에서 남자의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덕만이었다. 덕만은 자신의 두 뺨 위로 흘러내린 가느다란 남자의 눈물을 닦으며 전의를 불살랐다. 이번에야 말로 복수, 남자의 복수라고 중얼거리며 덕만은 사무실 곳곳에 비디오 카메라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복도와 요람 등에 회사 차원에서 설치한 보안 카메라에 대해서도 손을 써 완벽한 환경을 구성했다. “....... 현준아, 두고 보자. 내가 잘못 했기 때문에 이제까지 참았지만 그래도 그 마지막 그... 그.. 그것은 너무했다. 복수다! 크하하하하..” 진성과 공동진은 평소 현준과도 잘 지내는 덕만이어서 그 사건을 이렇게나 기억하고 있는지 몰랐다. 보통 말려야할 상황인데도 진성과 공동진은 또 한번 재미있는 사건이 되지 않을까 기대만 했다. 자신이 현준의 친구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진성이었다. 어쩌며 재미를 위해 일부러 잊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한바탕 홍역을 치른 듯, 문명 온라인의 개발팀들은 남은 며칠 동안 현준과 덕만의 제 2라운드 대결을 지켜보며 휴가 준비를 했다. 출발 당일, 인천국제공항에서 모이기로 했는데 김포공항으로 가버린 몇 명의 팀원으로 인해 다시 한번 시끄러웠던 개발팀 팀원들은 드디어 괌을 향해 출발할 수 있었다. 대한항공으로 괌을 향해 가기 위해 출입국심사대를 통과해서 해당 비행기 게이트에서 대기하고 있던 진성과 현준은 눈에 익은 사람이 자신들에게 걸어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진성아, 현준아. 너희들 여기서 뭐하냐?” “아..... 제동이 형?” “와... 이것 봐라. 만난지 언제라고 기억도 못하냐? 그리고 목소리 죽여라. 사람들 알면 피곤해진다.” “...... 하하하.. 형 얼굴을 못 알아보는 사람이 이상하잖아요?” “.... 현준아, 너.... 남은 생애가 아깝지 않냐?” “.......... 그래도 사실은 사실이잖아요.....” 현준은 딱 한번 만난 김제동에게 아무런 부담도 없는 듯 대했고 그런 현준에게 제동 역시 자연스럽게 형으로서 말했다. 다가온 제동의 매니저와 코디들은 현준, 진성과 인사를 나누었고 자연스럽게 동행하게 되었다. 일단 그렇게 되니 개발팀 전원이 인기 연예인인 김제동과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성수기가 아니라서 괌으로 향하는 비행기에는 좌석이 남았고 현준과 진성, 제동은 자리를 바꿔서 같이 앉았다. “형, 이렇게 자리를 막 바꿔도 괜찮아요?” 처음 비행기를 타보는 현준은 걱정스레 말했다. “들키지만 않으면 돼. 게다가 들켜도 괜찮아.” “예? 뭐라고 하면 어떻게 해요?” “.... 그냥 여기가 좋다고 하면 된다니까... 스튜어디스도 한국 사람이니까 이해해 주겠지... 안 그래?” “............... 그나저나 형은 괌에 왜 가는데요?” “나? 화보 촬영!” “........ 장난하지 말고. 왜 가는데요?” “....... 윽.. 이런... 이 녀석아! 나도 화보 촬영한다. 내가 어디가 어때서?” “형, 제가 거울 갖다 드릴까요?” “.............” 진성은 제동과 현준이 말하는 것을 보다가 넌지시 물었다. “화보 촬영이라면 혼자 하는 건가요? 아니면 다른 사람과 같이?” “...... 진성아, 네가 내 동생이다. 진정한 내 동생이다. 이제까지 단 한명도 내가 화보촬영 한다고 말해도 바로 믿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네가 처음이다. 진성아, 네 가족 관계가 어떻게 되냐? 나와 의형제 맺자. 의형제!” 제동의 말은 진담 반, 농담 반이었지만 현준과 진성의 얼굴은 순간 굳어버렸다. 사회자로서 경험이 많았던 제동은 그런 반응에 자신이 뭐 실수한 게 아닐까 걱정했다. “.... 뭐 내가 실수한 거라도 있는 거냐? 너희들 둘, 같이 얼굴이 굳어버리니.. 왜 그래?” 현준은 진성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저... 형... 진성이에게 가족 얘기를 물으신 것은 좀......” “그게 뭐? 무슨 문제라도 있냐?” “그게... 저.... 말하기가 좀....” 현준이 난처해하자 진성이 말했다. “제동이 형, 뭐 말 못할 것은 아니니까요. 사실 저는 고아에요.” 제동은 놀랐다. 오늘이 두 번째 만남이었지만 진성에게서 그런 우울한 면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단단하고 의지할 만한 사나이다운 면이 있어서 진성의 아버지 역시 멋진 사람일 거라 생각한 제동이었다. “뭐? 고아? 네가...? 정말이냐?” 제동은 현준을 향해 물었고 현준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부모님은 두 분 다 고아셨어요. 어렵게 사시다가 결혼해서 절 낳으셨죠. 어려운 생활이었지만 저는 아주 행복했어요. 부모님이 저를 끔찍이 사랑하셨으니까요. 그러다가.... 그러다가.. 그러다가.... 제가 고등학교 때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요.” 약간 감정이 격앙되었던 진성은 잠깐 숨을 고르더니 말을 이었다. “뭐, 이 세상에 그런 경우가 저 말고도 많이 있잖아요. 저는 저 자신이 특별히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부모님은 돌아가셨지만 저를 친아들처럼 아껴주시는 현준의 부모님도 계시고 둘도 없는 친구도 있고..... 게다가 제가 할 수 있는 일도 있으니까요...” 제동은 담담한 진성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그렇게 입담 좋기로 소문난 제동도 이런 상황에서 뭐라고 해야 할지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자신이 진성의 상처를 건드린 게 아닌가 하는 자책도 했다. “제동이 형, 너무 그렇게 신경 쓸 필요 없어요. 형이 보신대로 저는 고아 같지 않은 삶을 살고 있고 실제로 저 자신을 고아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렇게 행복한 고아가 있다면 나보다 더 불행한 진짜 고아들에게 미안하잖아요.” 제동은 자신이 진성에게 느꼈던 그 사내다움이 무엇인지 알았다. 무술 몇 단이나 몸 좋은 스포츠 선수의 그런 강함이 아니었다. 끊임없는 고통 속에 모래 등의 이물질을 오랜 시간 삼켜서 찬란한 빛을 발하는 진주로 변화시키는 진주조개의 그런, 그런 강함이라 느꼈다. “맞다. 진성이 너는 절대 혼자가 아니다. 좋았어. 진성아, 너 나와 진짜로 의형제 맺자. 아니, 그럴 필요 없이 너 우리 집으로 올래?” 제동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싫지 않은 진성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진성의 사정을 알게 되자 바로 자신과 같이 살자고 말을 꺼냈다. “..... 제동이 형, 그것은 안 될 말입니다. 저희 아버지가 먼저 찍었거든요. 헤헤헤.. 게다가 제 친구이자 어쩌면 제 동생이 될 진성이를 뺏길 생각은 절대 없습니다. 꿈 깨시죠....... 진성에게 가족이 생긴다면... 아하하하하... 제가 제일 먼저 예약해 놓았습니다.” 현준은 제동의 말에 곧바로 말했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혹시라도 진성이 제동을 따라가겠다고 나서는 날에는 아버지가 자신을 절대 가만 놔두지 않을 것임을 현준은 알고 있었다. 제동은 비록 자신이 진성에 대해서 많이 알지는 못했고 오랫동안 만난 것도 아니어서 섣부른 판단이 아닐까도 생각했지만 연예인이 아니라 생각이 있는 한 사람으로서 진성에 대해 자랑스러움을 느꼈다. “.... 어쩔 수가 없네. 그 대신에 진성아, 현준아, 너희들 나와 의형제 맺자. 삼국지의 도원결의만은 못해도, 한 날 한 시에 죽자는 결심은 못하더라도 진짜 친형제처럼 지내자. 어때?” “.... 저야 좋지요. 아마 진성이도 좋을 겁니다. 그렇지?” “당연하지요. 제동이 형 같은 인기인이 제 형이 된다면 그야말로 삼생의 영광이지요. 그리고 아까 하던 얘기. 화보 촬영 혼자 하나요? 아니면 딴 사람과 같이?” 약간 무거운 분위기가 진성의 아부성 짙은 말에 부드러워졌다. 게다가 재치 있는 진성의 말에 제동 역시 은근슬쩍 말을 이었다. “아, 맞다. 너희들 정효진이라고 알지? 탤런트 정효진!” “정효진?” TV 볼 시간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던 진성이 알 리가 없었다. “진성아 몰라? 정효진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까지 있는데.... 현준아 너도 몰라?” “요즘 회사에서 계속 프로 게이머 연습하느라.... 아... 혹시.. 아..아니겠지..” “뭘 그렇게 중얼거려? 쯧쯧... 정효진을 모르다니.... 너희들 바람의 나라라는 드라마도 모르겠구나.” “............” “쯧쯧쯧... 너희들도 문화생활은 좀 하고 살아라. 바람의 나라라고 얼마 전에 끝난 드라마가 있는데 역대 방송 기록을 죄다 깨 버린 히트작이다. 시청률이 55%를 넘었다고 하던데.... 아무튼 정말 인기가 좋은 드라마였지. 정효진이 바로 그 드라마의 여주인공이야. 갑자기 나타난 신데렐라라고 보면 돼. 내가 이렇게 말해도 잘 모르겠지.” “그러면 그 사람과 형이 같이 촬영을 한다는 말인가요?” “딩동댕! 당근이지. 그리고 야 너희 둘, 말 놔라. 계속 그러자니 좀 이상하다.” “네, 아.... 아.. 응.” “알았어.” 제동과 현준, 진성은 괌까지의 4시간 걸리는 비행동안 서로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특히 제동 특유의 입담으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스타들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를 재미있게 양념까지 뿌려가며 얘기하자 진성과 현준은 배꼽을 내놓고 웃었다. 워낙 시끄러워 스튜어디스에게 주의를 받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런 시끄러움에 공동진과 김덕만마저 가세해서 한층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비행기는 유유히 하늘을 날아 괌을 향했다. “이야.... 끝내주는데... 와..... 진짜 대단하다.” 객실로 들어온 현준은 발코니로 가서 눈앞에 펼쳐진 이국의 바다에 탄성을 내질렀다. 진성은 가방을 정리한 뒤에야 현준이 있는 곳으로 나왔다. “와.. 대단하네.” 펼쳐진 해변과 색깔부터 전혀 다른 바다, 내리쬐는 뜨거운 태양.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게다가 호텔 앞에 있는 야외 수영장은 기대 이상이었다. 야자수로 둘러싸여 쉴 그늘이 있는 수영장은 아주 깨끗했다. 알파벳 S자처럼 휘어진 수영장도 좋았지만 주위 환경과 잘 어울리는 모습이 정말 보기 좋았다. “진성아, 빨리 옷 갈아입고 수영하러 가자.” “수영?” “대장님이 알아서 하라고 했으니까 이제 완전히 자유시간이잖아. 자 빨리 수영복으로 갈아입어. 사람들 모아서 놀러가자.” “OK!" 개발팀원들은 한바탕 같이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면서 놀았다. 나이가 좀 있는 이희철 팀장과 김성철 프로그램 팀장 등은 미리 예약한 골프 코스로 서둘러 떠났고 나머지 사람들은 제각각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저... 강진성씨죠?” “네, 아... 제동이 형 매니저?” “기억하시는군요. 제동이가 진성씨와 현준씨를 초대했거든요. 같이 가지 않겠어요?” 호텔의 로비 근처에 마련된 쇼파에 앉아서 앞으로 뭘 할까 생각하던 진성과 현준, 하나는 제동의 매니저가 다가와 말을 하자 흔쾌히 따라 나섰다. 어차피 자유시간인데다가 다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끼리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만났던 하나도 진성과 같이 붙어 다니며 휴가다운 휴가를 즐겼기 때문에 같이 따라나섰다. 매니저는 미리 대기시킨 차에 진성, 현준, 하나를 태워서는 제동이 있는 곳으로 출발했다. 진성, 현준, 하나가 도착한 곳은 언더 워터월드였다. “이곳에 처음 오신 듯한데,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매니저는 잠깐 뭐라고 한 뒤에 현준 일행을 남겨두고는 사라졌다. “이곳에서 그 화보 촬영이라는 것을 하는 건가? 현준아, 이런 곳에서도 화보촬영 하냐?” “내가 어떻게 알겠냐? 하나씨 혹시 알아요?” “저라고 뭐 알겠어요. 그런데 여기 수족관 같은데요...” 하나의 말에 진성과 현준은 크게 영어로 ‘Under Water World'라고 쓰여진 큰 건물을 보았다. 여행 전에 이미 괌에 대한 정보를 자세히 알고 온 하나는 곧바로 수족관이라는 것을 알았다. 언더 워터월드 근처를 살펴 보다 보니 매니저가 나타났다. “자, 여기...” 매니저는 현준과 진성, 하나에게 표를 건넸다. “자, 저를 따라 오시죠. 안에서 화보촬영을 하니까 조금은 조심해 주세요.” “네? 아..네.. 알겠습니다.” 진성 일행은 매니저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갔다. 게임존을 지나서 수족관 입구로 갔다. 수족관 안은 일정 시간 동안 빌린 모양인지 다른 관광객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천장이 아치형의 투명한 유리로 설치된 터널처럼 되어 있는 통로 위로 커다란 상어와 기기묘묘한 고기들이 지나 다녔다. “와.. 수족관이 위에 있네....” 진성과 현준은 매니저를 따라가면서도 연신 위와 옆을 쳐다보았다. 거대한 상어가 배를 드러내며 유유히 지나가는 모습을 아래에서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현준과 진성은 매니저의 따가운 눈빛에도 불구하고 연신 감탄하며 뒤쳐져 늦게 따라갔다. 한참을 따라가니 통로의 중간 약간 넓은 곳에 조명을 담당하는 사람들, 20대 초반의 미인 옆에서 옷과 얼굴을 만지는 코디들, 여러 가지 카메라를 놓고는 점검하는 사람들, 광도를 측정하는 사람 등, 사람으로 가득했다. 그 곳에서 코디들 사이에 있던 제동이 현준과 진성이 오는 것을 보고는 반갑게 맞이했다. “여... 이제 왔냐?” “형, 우와... 정말 화보 촬영도 쉬운 일이 아니네.” “당연하지. 쉽게 돈 벌 수 있는 일이 어디 있냐?” “..... 저 사람이 그 정효진인가?” 현준은 힐끔거리며 제동에게 물었다. “맞아. 그런데 너 관심 있냐? 내가 소개시켜 주랴?” “네? ..... 저야 형님이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삼생의 영광입지요..” 현준은 바로 제동의 옆으로 순식간에 다가서더니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진성아... 아.. 이 분은?” 제동은 진성에게도 물어보려다 옆에 있는 하나를 발견하고는 진성에게 물었다. “제 직장 동료입니다. 친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눈치 빠른 제동은 하나의 태도와 진성의 말에 둘의 관계가 보통 동료사이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약간 어색해 하는 하나의 모습을 본 제동은 형으로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저 아시죠? 김제동이라고 합니다. 진성이 형이니까 편하게 대하세요. 그리고 나중에 식사나 다 같이 한번 하죠.” “김하나라고 해요. 진성씨 회사 동료입니다.” “제동씨, 독사진 찍을 차례입니다.” 제동은 촬영을 하다가 중간에 조금 쉬는 중이었다. 상대인 정효진이 독사진을 찍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현준, 진성, 하나와 격의 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촬영 보조기사의 부르는 소리에 조금 기다리라는 말만 하고는 조명이 환한 곳으로 재빨리 이동했다. 제동이 사진을 찍기 위해 움직이자 현준과 진성, 하나는 제동의 사진 찍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잘생긴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특유의 입담과 게스트와 시청자를 편하게 해 주는 진행으로 유명한 제동의 약간 어색한 듯한 포즈는 그 이미지에 딱 맞았다. 제동은 사진을 찍으면서도 쉬지 않고 입을 놀려 촬영장의 분위기를 주도했다. 정효진은 내심 부러웠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김제동과의 촬영을 찬성한 이유는 평소 김제동의 모습과 일 때문에 여러 번 만났을 때의 큰 오빠 같은 느낌에 대한 향수였다. 남자로서 좋아한 것은 아니었지만 같이 얘기하면 재미있고 뭔가 의지가 될 것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보다 하루 늦게 도착한 김제동은 무엇이 그리 기분이 좋은지 싱글거렸다. “제동 오빠, 무슨 좋은 일 있어요?” “좋은 일? 당연히 좋은 일 있지. 내가 여기로 오면서 동생 두 명이 생겼거든.” “동생? 둘? 아는 동생이 또 생겼어? 나는?” “그런 동생 말고... 진짜 동생!” “진짜 동생? 오빠 외아들이잖아.” “네가 어찌 사나이의 마음을 알겠냐? 오늘은 정말 기분 좋은 날이다. 나 김제동, 정말 자랑할만한 동생 둘이 생겼다. 푸하하하하.” 평소와 달리 오버까지 하며 웃어대는 제동의 모습에 정효진은 뭔가 배신감마저 느꼈다. 말할 때마다 동생이 생겨서 기분 좋다고 하는 제동의 모습에 정효진은 도대체 그 동생이 누구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오빠, 도대체 그 동생들이 누구야?” “아, 너한테도 내가 소개시켜 줄께. 그 녀석들 정말 좋은 놈들이니까 네가 관심 있으면 대시해봐. 내가 보장하지. 암, 보장하고 말고.” “나는 남자는 별로 관심이 없어. 그런데 도대체 누구야?” “내가 매니저 보냈으니까 조금 있으면 올 거야. 오면 직접 봐.” 제동과 같이 촬영하던 정효진은 자신 혼자 먼저 촬영을 했다. 그 때 반대쪽 통로에서 제동의 매니저와 남자 둘, 여자 하나가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 둘에 그보다 조금은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여자 하나. 정효진은 궁금했지만 꾹 참고 촬영을 했다. 이윽고 자신만의 촬영이 끝나고 제동의 촬영이 시작되자 정효진은 촬영 때의 옷을 그대로 입고는 매니저와 같이 온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진성은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20대 초반의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를 보고 옆에 있던 현준에게 물었다. “... 저 여자 이 쪽으로 오는 것 같은데.....” “어.. 진짜네. 옷 입은 거 보니까 대단한데.. 진성아, 너 아는 사람이냐?” “아니, 너도 알잖아. 내가 여기에 아는 사람이 어디 있어?” “혹시 하나씨 아는 사람이세요?” “..... 휴... 저 사람이 바로 정효진이에요. 탤런트 정효진.” 하나는 진성과 현준의 대화를 듣고는 어이없어 하다가 말했다. “저 사람이? 정효진?” 그 때 정효진이 진성과 현준 앞으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정효진이라고 해요.” “아... 아.안녕하세요. 진현준이라고 합니다.” “김하나입니다.” 현준은 반사적으로 정효진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나 역시 스타인 상대가 먼저 인사하자 가볍게 인사했다. 정효진은 진성을 쳐다보았다. “강진성입니다.” “여러분들이 제동 오빠, 동생분들인가요?” 정효진은 직접적으로 물었다. 눈앞의 사람들에게 무슨 나쁜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마치 큰오빠에게 다른 동생이 생긴 막내 동생의 응석과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모르는 현준과 진성, 하나는 상대의 어투가 왠지 비꼬는 듯하자 얼굴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제동 오빠가 동생이 생겼다고 그렇게 기뻐하나요?” “........... 나는 이 분에게 실수한 적이 없는데... 현준아, 너 뭐 실수한 것 있냐?” 진성은 다짜고짜 몰아붙이는 정효진의 말을 듣고는 현준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니, 오늘 처음 보는데...... 무슨 실수할 시간이라도 있었겠냐?” “하나씨는요?” “저 역시 실제로는 오늘 처음 보는걸요.....” 진성은 현준과 하나에게 묻고는 도대체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담담하게 정효진을 쳐다보았다. 지나가다 갑자기 뺨 맞은 격이었지만 웬만한 일로는 별로 동요하지 않는 진성은 차분했다. “........ 제동 오빠와 어떻게 만났나요?” 정효진은 자신이 상대에게 무례했다는 사실을 바로 알았지만 별로 사과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연예인 스타라서가 아니라 제동에 대한 어떤 배신감에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그렇다고 해도 상대를 윽박지르는 것은 더 이상 할 수 없어 그냥 물었다. “.... 그런 말을 묻기 전에 왜 묻는지는 말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진성은 눈앞의 이 여자에게 싸가지가 부족하다는 것을 곧바로 깨닫고는 천천히 말을 했다. 현준은 오랜만에 진성의 입으로 하는 KO 펀치를 볼 수 있다는 마음에 끼어들려는 하나를 말렸다. “.... 쉿!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재미있는 것을 볼 수 있을 테니까요... 크크크..” 정효진은 자신 앞에서 담담하다 못해 아무런 감정도 없이 말하는 이 남자에게 화가 났다. 그냥 대답해 주면 될 일을 가지고 이렇게 따지니. 점점 감정적으로 격앙됐다. “그냥 말 해주면 안 되나요? 남자가 쫀쫀하게.....” “...... 제동 오빠라고 했는데 가족인가요?” “아니오. 하지만 친한 동생이에요.” “가족이라고 해도 이렇게 다짜고짜 제동 형 본인이 없는 데서 이렇게 몰아부칠 수는 없는데 도대체 얼마나 친한 동생이길래 이렇게 예의 없이 사람을 닦달할 수 있나요?” “네? ... 예의 없이?” “게다가 처음에 이쪽에서 한번 참았으면 그 쪽도 그런 배려를 알고 적당히 말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정효진씨라고 했죠? 저는 잘 모르겠지만 유명한 탤런트라고 알고 있는데..... 그런 스타는 이런 식으로 말해도 되는 겁니까?” “예?...... 무슨 그런....” 정효진은 자신이 처음에 잘못하기는 했지만 상대의 신랄한 말에 더욱 반발심이 생겼다. 아무리 옳은 얘기도 들어서 기분 나쁜 얘기는 어떻게 포장해도 기분 나쁜 법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직설적으로 얘기하니 좋을 리가 없었다. 진성은 이어서 현준이 듣기 원하는 KO 펀치를 날렸다. “그런 동생이라면 제가 제동이 형에게 도시락 싸 들고 다니면서 절대 만나지 말라고 말리겠습니다. 조금 자중하시죠.” “.........” 정효진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가 촬영을 마치고 오는 제동을 보자마자 곧바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마치 영화의 장면처럼 달려 나갔다. “현준아, 뭐야? 왜 저 녀석이 눈물을 흘리며 뛰쳐나가? 혹시 네가? 제동은 평소 털털하고 붙임성이 있는 정효진이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달려 나가자 무슨 일일까 걱정이 됐다. 더구나 평소 제동 자신이 정효진의 눈물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아니.. 내가 아니라 진성이가...” “뭐? 진성이가... 무슨 일인데?” 제동은 곧 진성에게 일의 전모를 들을 수 있었다. 진성은 자신이 관계된 일인데도 아주 담담하게 어떻게 보면 남의 일 말하듯 조리 있게 정리해서 제동에게 말했다. 다 들은 제동은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푸하하하하하... 그랬단 말이지... 푸하하하..” 사람이 울면서 뛰쳐나갔는데도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웃고 있는 제동의 모습에 현준과 진성, 하나는 어리벙벙했다. 한참을 웃고 난 뒤에야 제동의 웃음은 그쳤다. 제동은 너무 웃어 아픈 배를 움켜쥐고는 말했다. “크하하... 그 녀석 임자 만났네. 진성이 너,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 대단한데.... 나도 그 녀석에게는 말로 안 될 때가 많은데... 아무래도 진성이 네가 천적인가 보다. 천적! 하하하..” “제동이 형, 그 사람, 정효진 괜찮을까? 막 울고 나갔는데...” 현준이 걱정스레 말하자 제동은 눈빛을 반짝이며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현준에게 다가오라는 제스처를 했다. “현준아, 너 아직도 아까 그 소개시켜 달라는 말 유효하냐?” “... 당연하지. 내가 저런 미인을 언제 또 볼 수 있겠어?” “그럼,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어떻게?” 진성과 하나는 제동과 현준의 작당을 지켜보아야 했다. 제동은 울면서 나간 정효진이 어디로 가 있을지, 무엇을 하고 있을지,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자세하게 가르쳤다. 현준은 얼마 전에 구입한 PDA를 꺼내 메모까지 하면서 제동의 말을 들었다. “그렇게 하면 좋은 이미지가 생길까?” “너는 직접적으로 말 안 했다며? 그러면 괜찮을 거다. 게다가 그 녀석, 그런 운명적인 것을 믿는 특이한 녀석이거든. 아, 정말 중요한 것은 절대, 그 녀석에게 내가 이런 말 했다는 거 말하면 안 돼. 말하는 순간에 말짱 꽝이니까. 알겠지?” “당연하지. 그걸 내가 말할 것 같아. 나도 머리가 있다고.” “그래? 나는 그거 장식인 줄 알았다.” “뭐?” “야, 약발 떨어지기 전에 빨리 가봐라. 버스 지나고 손 흔들면 미친 놈 소리 듣는다. 자 빨리 가라.” 순식간에 제동과 현준의 모의가 끝나고 현준은 마치 독립운동이라도 하는 듯한 비장한 모습으로 밖으로 뛰어갔다. 진성과 하나는 그런 제동과 현준의 죽이 맞는 행동에 어이가 없었다. “... 성공할 수 있을까?” “성공해야지. 성공 못하면 진성아, 네가 달래야 할 걸...” “내가? 왜? 그 사람이 먼저 잘못 했잖아.” “알아. 하지만 여자잖아. 게다가 너보다 어릴 걸. 아마도 그 녀석, 나를 큰 오빠로 좋아하는데 자신 말고 다른 동생이 생겼다는 말에 욱해서 그랬을 거야. 스타라고 오만한 녀석들과는 전혀 다른 아이니까. 그리고 너도 조금은 심했잖아.” “..... 현준이 반드시 성공해야겠네.” “그러니까... 너와 내가 조금 현준이에게 도움을 줘야 할 것 같다. 어때?” “당연히, 당연히 성공시켜야 하니까.” 하나는 조금 전에 현준과 제동의 모의를 보다가 이제는 진성과 제동의 모의를 보게 되었다. 서로 귓속말로 속삭여서 무슨 말인지는 몰랐지만 뭔가 다른 사람이 들어서는 곤란한 듯 보였다. 그 날 저녁, 제동은 현준과 진성, 하나와 정효진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현준의 약발과 운명을 가장한 필연으로 어느 정도 무마되었지만 그래도 진성과 효진은 서로 좋을 수가 없었다. 제동은 은근히 진성의 편을 들면서 효진을 나무랐다. “.... 효진아, 오늘은 네가 실수한 것 같다. 내가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먼저 잘못한 것 아니냐?” “.......” 효진은 그런 제동의 말에 눈물마저 글썽였다. “제동이 형,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효진씨 마음은 진성이나 저, 하나씨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단지 제동이 형에게 새로운 동생이 생겨서 조금 기분 나쁜 것 아닙니까?” 현준의 격앙된 말에 진성이 한마디 했다. “어, 진현준, 너 내 친구 아니냐?” “이럴 때는 친구 아니다.” 현준은 미리 말한 대로 계속 효진을 은근히 자극하는 제동과 진성에게 맞서서 효진을 지켰다. 그런 현준을 보는 효진은 첫인상과는 달리 따뜻한 사람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면 되었다 싶은 제동은 화해를 주선했고 진성은 흔쾌히 효진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런 상황에서 매섭게 뿌리칠 효진은 아니어서 그 이후의 저녁 식사와 간단한 술자리는 화기애애했다. “두 분은 뭐하는 분이세요?” “아, 저희들은 프로 게이머입니다.” “네? 프로 게이머? 어떤 게임인데요? 혹시 WIS?” “아니요. 문명 온라인이라고 요즘 새로 나온 게임입니다. WIS를 아시나요? 게임 좋아하세요?” 효진의 WIS라는 말에 현준은 약간 놀랐다. 20대 초반의 연예인 스타라고 해서 게임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그래도 효진의 이미지와 게임과는 거리가 멀었다. “.... 저... 사실 오빠가 있는데... 게임에 미쳐 있거든요. 혹시 아세요? 프로 게이머 정성진이라고...” “네? 정성진?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진성아 너 기억나냐?” “.... 현준아, 너 벌써 까먹었어? 프로 WIS 작년 세계 챔피언 이름이잖아. 정성진. 나이 25세. 그나저나 정말 효진씨 오빠인가요?” “네? 세계 챔피언이요? 그렇게 잘 하나요? 저는 그냥 프로 게이머라는 것 밖에는....” “또 다른 정성진이라는 게이머가 있으면 모르겠지만 제가 알기로는 작년 세계 챔피언이었습니다.” 효진을 포함한 사람들 모두 다 놀랐다. 탤런트 스타인 정효진의 친 오빠가 WIS 프로 게이머라니. 그것도 세계 챔피언을 할 정도로 탁월한 게이머라니. 정말 스포츠 신문 1면을 장식할 만한 뉴스였다. “효진씨, 여기 이 친구 진성도 그 WIS하면 끝내주거든요. 올해 아마추어 WIS 게이머 세계 대회 우승자니까요.” “네? 세계 대회 우승자요?” “그것은 프로가 아니고 아마추어 대회입니다. 조금 수준이 떨어지죠.” 진성의 겸손한 말은 제동과 효진의 호들갑 속에 묻혀 버렸다. “진성아 진짜야? 와.. 대단하다. 세계 대회 우승자라니... 네가 대단한 줄은 알았지만... 너 돈도 많이 벌겠다. 너 연봉이 얼마냐?” “진성씨 대단하네요. 우리 오빠가 세계 챔피언이라는 말도 놀랐지만 진성씨가 세계 대회 우승자라니.. 정말 놀랐어요. 그런데 우리 오빠와 진성씨가 게임하면 누가 이겨요?” 효진의 순진한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현준밖에 없었다. “프로와 아마추어는 서로 다른 경기를 하거든요. 그래서 같이 게임할 기회가 없어요. 게임 자체도 엄밀히 말하면 같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지금은 완전히 다른 게임을 하니까 그럴 기회는 전혀 없다고 봐야죠.” “와.. 재미있겠다. WIS 의 프로 세계 챔피언과 아마 세계 챔피언 간의 타이틀 매치! 정말 재미있지 않겠냐? 그런 재미있는 것은 하지 않을까? 사람들이 기대 많이 할 것 같은데... 나야 뭐 그 WIS가 어떤 게임인지도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들도 제동의 말에 호기심이 일었다. 프로와 아마추어 세계 챔피언 간의 대결이라 누구나 흥미를 가질만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었던 누구도 곧 그런 게임이 이루어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무사히 괌에서의 휴가를 마친 개발팀과 프로그램 팀은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김제동은 진성과 현준과는 달리 정효진과 함께 스케줄 상 먼저 돌아갔다. “휴.... 재미있게 놀긴 놀았는데.....” 기내에서 한숨을 쉬는 진성, 그 옆에 있던 현준은 걱정하는 진성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 실컷 잘 놀았잖아.” “.... 사실 나, 지난 월요일에 세미나가 있었거든.” “세미나? 무슨 세미나? 요즘 별로 일 없잖아?” “로플팀.......” “아, 로플팀? 무슨 일인데....?” “내가 매일 보던 거 있잖아. 그 가상현실....” “아.. 그 복잡한 것들.... 그걸 가지고 세미나를 해? 네가?” “응, 그렇게 됐어. 그런데 그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배째고 날랐거든...” “오호... 진성이 네가 배째고 날랐단 말이지... 우리 아버지 가만 안 있겠네...” “휴...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긴... 가서 깜박 잊었다고 얘기하고 다시 날 잡아야지.” “그러면 되겠지? 그렇치?” “그래. 너무 걱정하지마. 다 살자고 하는 짓인데....... 그나저나 너무 아쉽다. 그 제트스키 너무 재미있었는데......... 아, 바나나 보트도 너무 좋았다...” “맞아, 나는 다이빙이 너무 좋았는데.....” 현준과 진성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각자 자기가 좋아했던 코스를 생각하며 아쉬워했다. 이팀장도 상대적으로 싼 골프 코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이팀장은 한편으로는 팀원들이 심한 후유증을 겪어 한동안 일을 하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다. 그 다음주 월요일. 주말 동안 집에서 현준의 아버지를 피해 전전긍긍하던 진성은 출근하자마자 로플팀의 조진철 프로그램 팀장을 찾았다. “안녕하세요?” “어? 강진성! 잘 갔다 왔냐?” “네. 저.......” “뭐? 말해? 나 바빠!” “저.... 그 세미나 언제 하면 될까요?” 조진철은 진성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세미나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저기... 가상현실 세미나 한다고 했잖아요... 지난주 월요일에 한다고..” “아, 그거? 너 설마 계속 준비하고 있었냐?” “네?” “나는 네가 조금 준비하다가 너무 어려워서 그냥 포기할 줄 알았는데.... 야, 너 대단하다. 그 어려운 것을 다 볼 생각도 하고........ 좋았어. 네가 그렇게 열심히 했다면 세미나 해야지. 음..... 오늘은 안 될 것 같고.... 수요일 오전 10시에 우리팀 세미나실에서 하자. 어때? 괜찮지?” “네?” “그럼 그 때 보자. 잘 가라. 나는 회의가 있어서 팀장님 방에 가봐야 할 것 같다. 수요일에 보자. 어이구, 대견해라. 그런 괴물 같은 것을 계속 붙잡고 있었다니... 이번에는 내가 좀 배워보자. 수요일 오전이다. 아, 내가 팀장님께도 말씀드릴 테니... 그 때 보자. 나 먼저 간다.” “저...저...” 진성은 어이가 없었다. 고생고생 해 가며 읽었던 그 문서들. 거기다 이제까지 걱정하며 맘 졸였던 순간들. 주말 동안 진팀장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전전긍긍했던 진성은 조진철 팀장의 말에 진팀장이 아무것도 몰랐다는 사실을 알았다. 자기가 괜히 고생했다는 것을 알게 된 진성이었다. 하지만 그런 진성에게 이번 주 수요일 오전에 세미나를 하겠다는 조 팀장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이제까지 하지 않아도 될 고민을 한 진성에게 세미나를 진짜로 하겠다는 조팀장의 말은 정말 진성을 두 번 놀리는 꼴이었다. 조팀장이 나가고 한참이 지나서야 진성은 움직일 수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문명 온라인 팀의 요람으로 돌아가는 진성이었다. “뭐? 뭐라고? 푸하하하하... 조팀장님이 그랬단 말이야? 푸하하하하.... 너 정말... 푸하하하하 웃기다......... 쓸데 없는 걱정만 하다가 이제는 진짜 세미나를 하게 된 거잖아... 아이고 배야... 아하하하하...”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들어온 진성에게 말을 걸어 사실을 알아낸 현준은 그야말로 떼굴떼굴 구르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심란한 진성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그만 해라.” “푸하핫................” 이럴 때의 진성은 건드리면 안 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현준은 웃음을 참아 빨갛게 변한 얼굴에 손으로 감싸고는 요람 밖으로 나갔다. “....푸하하하하.............” 진성은 듣고 싶지 않았지만 완전히 닫히지 않은 문 사이로 현준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진성은 당장 현준의 웃음소리가 거슬렸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세미나 준비를 해야 했다. 일주일 동안의 휴가. 그 동안 신나게 놀아버린 진성이었기에 코드 하나하나가 낯설게 느껴졌다. “휴.... 이걸 언제 또 하냐? 이틀 밖에 안 남았잖아.... 휴......” 머리를 감싸며 진성은 억지로 책상에 앉아서 눈에도 잘 들어오지 않는 문서는 치우고 자신이 예전에 정리한 파일을 불러다 읽기 시작했다. 진성은 몹시 떨렸다. 세미나 실에는 진팀장과 조진철 프로그램 팀장을 비롯해 10명 정도만 앉아 있었지만 자신이 제대로 모르는 것을 남 앞에서 세미나를 해야 한다는 사실은 진성을 떨게 만들었다. 솔직하게 모르겠다고 말하려고도 했지만 진팀장의 기대한다는 말에 그럴 수도 없었다. 항상 자신에게 잘해 주신 진팀장의 한 마디는 진성에게 천금보다 무거웠다. “제가 지금부터 할 얘기는 가상현실 시스템 접속에 대해 제 나름대로 정리하고 또 질문해 본 것들입니다. 많이 부족합니다. 여러분들의 양해를 바랍니다.” 진성은 운을 뗀 후에 이왕 할 것 열심히 해 보자는 마음에 특별히 세미나를 위해 입은 정장 윗도리를 벗어 옆에 둔 후에 노트북에 띄운 프리젠테이션 파일을 프로젝트로 비췄다. “일단 그 넓은 가상현실 시스템 전체 중에서 저는 프로그래머의 입장에서 접근했습니다. 왜 가상현실에 접속한 상태에서 프로그래밍을 할 수 없을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가상현실과 접속자와의 인터페이스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자, 그림을 보십시오.” 진성은 자신이 그래도 시간을 들여서 준비한 도식과 표가 들어가 있는 그림을 가리켰다. 조금은 부족해서 부끄럽기도 했지만 꿋꿋하게 밀고 나갔다. “화면을 봐서 아시겠지만 제가 여러 명의 테스트 한 사람들의 접속 기록을 살펴본 결과 거의 일치하는 자극과 반응이 없었습니다. 사람마다 정말 판이할 정도로 달랐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나름대로 절대 자극 하나에 대해서 반응 하나를 연결시키려는 노력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음... 그래서?” “결론을 그렇게 내리니 그 때까지 제가 접근했던 방법이 모두 무너지더군요. 그래서 한동안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웃지 마십시오.. 도덕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진성의 웃지 말라는 말에 사람들은 뭔가 하고 기다렸다가 도뎍경이라는 소리에 웃고 말았다. “뭐? 도덕경? 푸후훗...” “푸훗......” 여기저기서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아닌 밤에 홍두깨라고 도덕경이라는 말이 나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사람들이었다. “.... 저도 계속 생각하다가 비빌 언덕이라도 만들자는 생각에서 찾아봤습니다. 夫唯不爭故無尤, 다투지 않기에 허물이 없다. 저는 자극을 여러 개로 나누거나 분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분리와 연관시켜 예전에 문명 온라인 게이머로서 병법을 연구할 때 봤던 도덕경에서의 저 구절이 생각이 났습니다. 어떻게 보면 별 연관이 없어 보였지만 한동안 생각해보니 의외로 가상현실이라는 공간과 연결되는 부분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떤 부분이 연결되는가?” “일단 제가 주목한 구절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진성은 다음 화면으로 넘겼다. ‘天長地久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故能長生’ 천지는 장구하다, 천지가 능히 장구할 수 있는 까닭은 스스로 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능히 오래일 수 있다.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 무언가가 유익이 되는 때는 그것이 텅 비어 있을 때다. “저는 가상현실이라는 것이 인위적으로 처음부터 완벽하게 꾸민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프로그래밍으로 해결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발전된 영화와 같은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 속에서 생활하는 것이 가능하고 접속한 사람이 정말 또 다른 현실로 느끼려면 그런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음.... 그럴 듯하군. 그런데 그렇다는 말은 우리의 목표인 가상현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닐까? 진성, 네 말이 맞다면 우리는 지금 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다 집어치워야 하는 건가?” “..... 그게 제 딜레마였습니다. 그러다가 약간은 억지일지 모르지만 제 나름대로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화면을 봐 주십시오.” 진성은 다음 화면으로 넘겼다. 그 화면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도형들과 다이어그램으로 채워져 있었다. “제 생각은 프로그래머로서 아마추어적인 생각이기 때문에 걸러서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생각한 부분은 어느 정도의 인공지능을 도입하는 겁니다. 자 여기를 보시면 한 사람의 접속자가 있을 경우에 그 접속한 사람에 대해 두 가지의 프로그램이 동작하게 됩니다. 첫 번째 프로그램 알파는 접속자의 자극을 일반적인 항목으로 분류해 주는 프로그램입니다. 아주 보기 좋은 노을을 본 후에 감동했다면 그 감동이라는 자극을 일반적인 그와 비슷한 자극으로 분류를 해 주는 겁니다. 아, 물론 처음에만 그렇습니다. 그러다 접속자의 행동에 따라 점점 인공지능 프로그램은 그 접속자에게만 맞춰져 가는 겁니다. 점점 접속자의 행동이나 습관 등을 파악하는 거지요. 그 다음 프로그램 베타는 위에서 걸려진 자극과 실제 가상현실 시스템과의 인터페이스를 담당하는 부분입니다. 프로그램 알파가 접속자와의 인터페이스라면 이 프로그램 베타는 가상현실과의 인터페이스를 담당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가상현실 내에서 길을 걷다가 길에 굴러다니는 돌을 걷어찼다고 했을 때, 차고 싶다는 자극에 대한 강도나 각도 방향 등은 프로그램 알파가 담당하고 실제로 가상현실에서의 차는 부분은 프로그램 베타가 담당하는 겁니다.“ “대강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가상현실 세계 자체를 어떻게 만드느냐가 더 중요한데... 진성, 네가 말한 것은 이미 만들어진 가상현실에서의 인터페이스가 아닌가?” “맞습니다. 제 생각은 이런 메카니즘을 가상현실 세계 자체를 만드는 것에도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가상현실 세계를 만들기 위해 기본적인 창조명령은 당연히 프로그래밍 해야겠지요. 그런 기본 명령 집합을 이용해서 화면에 나온 대로 프로그래머가 직접 접속해서 처음 프로그램과의 인터페이스 적응 훈련을 통하면서 두 번째 프로그램의 제어 연습을 하는 거죠.” “예를 든다면?” “음... 만약에 돌덩이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면 기본적으로 창조명령을 통해서 여러 가지를 만들어보면서 비슷하면 취하고 완전히 다르다면 버리는 겁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점점 더 돌 덩어리에 가까이 가겠죠.” “.... 그렇게 한다면 시간이 많이 걸릴 텐데....?” 이미 진팀장을 비롯한 사람들은 모두 다 진지해졌다. “.... 처음에는 그렇습니다. 그러다가 두 프로그램이 일정 궤도 이상 오르게 되면 두 프로그램은 단순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접속한 프로그래머가 키운 하나의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됩니다. 결국 제 생각이지만 그 다음부터 프로그래머는 디렉터, 감독의 역할이고 실제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액터, 배우로서 가상현실을 만들어 가게 되는 겁니다.” “....음..........” “물론 그렇게 한다면 프로그래머가 어떻게 설정하고 키우느냐에 따라 다른 세상이 나오겠지만 굉장히 독특하지 않겠습니까?” “음... 자네들 어떤가?” “일단 검토할 가치는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쉽지는 않을 겁니다.” 조진철 팀장은 진지하게 말했다. “하하하.. 가상현실과 관련해서 쉬운 것은 하나도 없지. 진성아 계속 해 봐라.” 진성은 조금 자신을 얻어서 자신이 준비한 것들을 십분 다 설명했다. 도덕경을 말했을 때의 그 웃음은 이제 찾을래야 찾을 수 없었다. 다들 진성의 아이디어가 실현 가능성이 있다 없다를 떠나서 참신했기 때문에 관심을 가졌다. 거의 한 시간이 지나 진성이 세미나를 끝내자 진팀장이 말을 꺼냈다. “진성아, 수고했다. 그 정도면 이제 가상현실에 대한 전문가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겠는데..........” 가상현실의 내부 시스템은 잘 몰랐기에 엄밀히 말해서 전문가라고 하기에는 부족했지만 진팀장은 대학생이 이런 시스템을 그토록 특징적인 것을 꼬집어 내어 새로운 방법을 찾았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고 대견했다. “..... 내가 보기에 확실히 가능성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단지 검토해 볼 가치는 있는 듯하다. 그리고 진성아, 네가 부탁 좀 들어 줬으면 하는데.....” “네? 무슨 부탁을.....?” “혹시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많이 바쁘지 않다면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우리 팀 요람으로 와서 새로 개발하고 있는 게임에 대한 테스트를 해 줬으면 해서.. 어때?” “새 게임이요?” “아직 완벽한 이름은 정하지 않았는데 현재로는 ‘밀리터리 아트’라고 하지.” “그럼 로플은?” “일단 돈 좀 벌고 그것을 해야 할 것 같다. 로플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닐 것 같거든. 네가 말한 대로 어쩌면 불가능할 지도 모르니까.” “저... 그런데 올해까지는 그런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걱정 마라. 나도 자소 소프트 직원이니까. 전적으로 네가 문명 온라인 프로 게이머로 활동하는데 피해가 가지 않을 범위에서만 요청하는 거니까. 어때?” “그렇다면 저도 좋지요. 새로운 게임에 테스트 한다는 것은 저로서도 신나는 일이거든요...” “그래? 좋아. 그리고 현준이에게도 말해서 같이 와라. 현준이가 뭐라고 하거든...... 집에서 보자고 전해라. 오늘 수고했다.” 진팀장이 먼저 나가자 조진철 프로그램 팀장이 다가왔다. “와... 준비 많이 했는걸.... 게다가 도덕경이라니... 내가 너 때문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아무튼 아이디어 자체는 좋았다. 뭐 생각과 구현은 별개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수고했다. 앞으로 테스트 잘 부탁한다.” “네, 조팀장님.” 다른 사람들도 진성에게 세미나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는 헤어졌다. “이게 그 새로운 게임의 게임기인가요?” 로플팀의 가상현실 하드웨어 전문가인 곽진호에게 현준이 물었다. “맞아. 이게 바로 내가 심혈을 기울여서 개발한 PVR-2 지. 그 문명 온라인의 접속기의 다음 버전이라고 보면 된다.” 문명 온라인의 프로 전용 게임기보다 조금 더 크지만 모양은 더 날렵해 보이는 콕핏 모양의 접속기가 바로 PVR-2라는 밀리터리 아트 전용의 게임기였다. 진성과 현준은 새로운 게임, 밀리터리 아트라는 게임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몹시 궁금했다. “어떤 게임인가요?” “그것은 대장님이 오면 물어 봐라. 아니, 조금 있다가 테스트 시작할 테니까 해 보면 알거다. 진성 네가 먼저 해 봐라. 아주 재미있을 거다. 내가 보장한다.” 곽진호 가상현실 팀장은 눈빛을 반짝이며 진성과 현준에게 말했다. 곧 로플팀의 팀장인 진팀장이 요람으로 들어왔다. “빨리 왔네. 어이 진호, 준비 다 됐나?” “예, 대장님. 하드웨어 쪽은 준비 되었습니다.” “조팀장, 그 쪽은?” “다 되었습니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다 준비 되자 진팀장은 진성에게 다가왔다. “진성아, 네가 먼저 테스트 해 봐라. 아마도 재미있을 거다. 사실 나도 해 봤거든. 이것 게임 나오면 나도 어떻게 집에 하나 정도 갖다 놓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으니까. 너도 해 보면 입이 쩍 벌어질 거다. 자, 테스트 시작해 보자.” 진성은 문명 온라인보다 더 발전한 듯한 게이머 옷을 입고는 PVR-2에 탑승했다. 안은 쿠션이 좋은 편한 조종석과 같은 좌석 하나만 있었다. 곧 덮개가 닫히자 안은 완전히 깜깜해졌다. 눈앞의 손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어둠이었다. “진성아, 내 말 들리냐?” 조진철 프로그램 팀장의 목소리였다. “네, 잘 들립니다.” “조금 있으면 위에서 헬멧 비슷한 것이 내려 올 거다. 일단 그것부터 먼저 착용해라. 그리고 무언가가 아마 내부를 가득 채울 테니까 당황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면 된다.” “네? 뭐가 들어오나요?” “당해보면 알겠지.” 진성은 조진철 팀장의 목소리에 장난기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약간 불안해졌다. 저런 것은 타인의 불행이 나의 행복임을 말해 주는 장난기였다. 곧 위에서 위잉하는 진동음과 함께 약간의 조명이 켜지며 헬멧이 내려왔다. 진성은 얼른 헬멧을 착용했다. 헬멧을 쓰니까 안에서 신선한 공기가 나왔다. 묘하게 설계 되어 있어서 숨을 쉬면서도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신선해서 좋았다. 곧 조명은 완전히 꺼지고 다시 어두워졌다. 쾌적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진성의 주위에 갑자기 무언가가 터지면서 흘러나왔다. 물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끈적끈적한 액체도 아닌 것 같았다. 진성은 깜짝 놀랐지만 미리 들은 얘기가 있어서 곧 안정을 찾았다. “이게 뭐지?” 그것은 빠르게 차서 콕핏 전체를 가득 채웠다. 아무것도 볼 수 없었기에 진성은 헬멧을 쓴 채 가만히 있었다. 곧 희미한 불빛이 켜지다가 순간 섬광 같은 밝은 빛이 번쩍했다. “아......” 진성은 자신이 광활한 들판의 한 가운데 서 있음을 발견했다. 진성은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끝없는 지평선만 있을 뿐 산은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이곳이 일종의 가상세계라는 것은 알았다. 자세히 보니 들판의 풀의 모습이 현실과는 차이가 있었다. 게다가 바람이 부는 듯 했지만 자신에게 느껴지는 바람이 어딘지 조금 이상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도 조금 이상함을 알 수 있었다. “여기가 새로운 게임 공간인가?” 진성은 걸었다. “어, 이렇게 쉽게 걸을 수가 있네.” 문명 온라인은 이렇게 게이머가 직접적으로 자신의 몸을 컨트롤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음성으로 많은 장소를 자신이 직접 가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로 대단한 시스템이었지만 게이머가 팔을 움직여서 손으로 뭔가를 잡는 것 하나도 쉽게 해 낼 수가 없는 게임이었다. 너무도 쉽게 걸을 수 있자 진성은 깜짝 놀랐다. 진성은 팔을 움직였다. 실제 자신의 팔과는 조금 다르게 부자연스러웠지만 이 정도면 만족했다. 진성은 뛰었다. 어색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강해진 바람과 옆으로 지나가는 광경들이 현실감을 갖게 했다. “와...... 대단하네.” 진성은 자신이 가상현실에서 하고 싶었던 것들이 예전과는 달리 너무도 쉽게 할 수 있게 되자 너무 기분이 좋아졌다. 자신이 직접 접속해서도 이렇게 걸을 수 있었지만 쉽지는 않았다. “진성아, 어떠냐?” “와... 정말 대단한데요. 약간 현실감이 떨어지는 부분이 있지만 이 정도면 정말...” “대단하지?” “네, 정말 대단해요. 그런데 이게 게임인가요? 아직 게임은 제대로 안 된 건가요?” “게임? 아.. 네가 있는 곳은 일종의 테스트 공간이야. 자 조금만 기다려라. 이제 게임 공간으로 바꿔 줄 테니까.” 조진철 팀장의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진성이 있는 공간은 산 정상의 공터로 바뀌었다. 주위는 온통 구름바다로 둘러싸여 굉장히 높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대강 사방 20여m 정도 되는 공터에 진성 혼자 있었다. 사방을 찾아봐도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없었다. “... 이게 뭡니까?” “진성아, 이 게임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지?” “네, 밀리터리 아트 아닙니까?” “그러면 그 뜻은?” “...... 아........ 설마.... 이 게임 대전게임입니까? 액션게임?” “딩동댕! 자, 진성아 지면 그 높은 곳에서 떨어진다. 열심히 해 봐라.” 진성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뭔가가 공간을 가르고 나왔다. “뭐야? 저거... 어... 저것은.....” 진성이 놀란 것은 공간을 가르고 나온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스트리트 파이터의 류?” 비록 대전 액션 게임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진성이었지만 그래도 게이머로서 기본적으로 재미있게 해 봤던 게임이라서 기억에 남는 캐릭터였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진성은 멍하게 있다가 ‘류’가 다가오자 정신을 차렸다. “조팀장님, 도대체 이거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요?” “.... 싸워서 이겨라. 이기면 돼! 건투를 빈다. 참고로 내 경우 17전 17패다.” 진성은 조팀장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지만 캐릭터 류는 자신에게 다가왔다. 완전히 자신이 스트리트 파이터의 게임 속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진성은 다가오는 류를 보며 서서히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 갑자기 류가 점프를 하자 진성은 놀랐다. 그 점프라는 것이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점프라 더욱 놀랐다. 스트리트 파이터의 류 그대로라면 진성에게 이길 가능성이란 전무할 것이다. 놀란 진성은 가만히 있다가 공중 돌기로 다가온 류의 올려치기 한방에 뒤로 나가 떨어졌다. “윽...... 어...?” 분명히 맞았는데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신기했다. 자신이 분명히 류의 올려치기를 맞아서 뒤로 나가떨어지는 것은 실감났다. 하지만 고통은 전혀 없었다. 진성은 이것 역시 게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려움은 사라졌다. 진성은 약간은 꺼림칙하지만 류를 향해 다가갔다. 류의 간단한 발차기에 진성은 팔로 막다가 계속 뒤로 나가 떨어졌다. 그래도 진성은 재미있었다. 자신이 직접 이런 것을 해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는 보장되었다. “와.... 이거 정말 재미있네.” 진성은 너무 재미있었다. 류의 근처를 맴돌면서 피하기도 했다. 처음의 어색하던 움직임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되니 그런대로 참을 만 했다. 그런 불편함보다 재미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기 때문에 진성은 그런 단점은 아예 잊어버렸다. “어... 어.. 설마?” 류의 기술을 보면서 진성은 경악했다. 어떻게 저런 것이 가능하면....... 결국 진성은 그 기술을 맞고는 그 높은 곳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 용권선풍각이라니..... 이... 이것은 말..도.. 안..... 되잖아... 아아악!” 떨어지던 진성은 또 한번 감탄했다. 절벽에서 떨어질 때의 그 느낌은 정말 떨어지는 것과 느낌이 비슷했다. 아니, 떨어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떨어지면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비명을 지른다는 생각도 못한 채 진성은 아래로 떨어져 내려갔다. 진성이 절벽에서 떨어지는 순간 밖에서 여러 모니터로 보고 있던 진팀장과 조팀장, 곽팀장을 위시한 테스트 요원들은 서로 하이 파이브를 하며 축하했다. 현준은 갑자기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보자 무슨 영문인지 몰랐다. “진성, 스키피오도 어쩔 수 없구만. 푸하하하하.. 저 녀석, 평소에 조용조용 하더니 비명도 지를 줄 아네.” “그러게요, 대장님. 그나저나 저 진성군, 아주 적응력이 대단한데요.. 아직 저 정도까지 제대로 컨트롤하는 사람은 없었거든요.” “네, 제가 보기에도 대단한데요. 서서히 적응해 가는 능력도 뛰어나지만 순간적으로 할 수 있는 컨트롤도 지금까지 중에서 기록인데요..” 진팀장과 조진철, 곽진호는 서로 바라보며 진성의 테스트 결과에 대해 말했다. 이제까지 10명이 넘는 사람들이 테스트를 했고 대부분 한 사람당 적어도 10번 이상씩 테스트를 했다. 그런 테스트 결과를 종합했을 때, 진성의 테스트 결과는 발군이었다. 진팀장과 두 사람은 놀랐다. 세 사람이 알기에 프로 게이머로서 진성의 장점은 빠른 판단과 상황파악이었다. 그런데 이런 신체 적응 테스트에서도 탁월한 결과가 나오자 흥분을 금치 못했다. 현준은 그제야 진팀장과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현준은 내심 그런 진성에 대한 칭찬이 부럽기도 했지만 친구로서 자신은 진성을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만족했다. 그 순간이었다. “지직~~~” 갑자기 게임기 주변의 케이블에서 스파크가 일었다. 스파크가 작고 워낙 순간적이라 그것을 본 현준은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닐까 생각했다. “지지지지직... 지지직..... 팟...” “아.....” 현준은 자신이 본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고 곧바로 진팀장을 쳐다보았다. 워낙 스파크 소리가 크게 났기 때문에 이미 진팀장과 테스트 요원들은 움직이고 있었다. “게이머 상태는?” “맥박수 이상 없음. 뇌파 이상 없음. 신체 리듬 이상 없음................ 게이머 상태 OK!" “하드웨어 체크!” “예, 대장님. Level 1 Test OK. Level 2 Test OK, Level 3 Test Ok.............. 하드웨어 테스트 문제없습니다.” “소프트웨어 체크!” “오브젝트 테스트 OK, 배경 테스트 OK.............. 소프트웨어 테스트 OK!" “다 문제가 없어? 도대체 어떤 현상이야? 곽진호, 빌딩 전기 공급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조금 전에 전화해 봤는데 그런 문제는 없었다고 하던데요?” “조금 전 그것은 뭐지?” 맹렬하게 튀던 스파크는 한 순간 또 사라져 버리고는 나타나지 않았다. 모든 테스트에 문제가 없자 진팀장은 자신들이 단체로 헛것을 보았나 의심하기도 했다. 다행히 게이머와 시스템에 문제가 없어서 안심했다. 그 순간이었다. “지지지직..... 파팟...... 파파파팟...... 피융.... 퍽! 퍽! 퍼퍽!” 엄청난 스파크가 일더니 모니터 몇 대가 터져버렸다. 순간적으로 몸을 숙인 진팀장과 사람들은 재빠르게 상황파악을 했다. “게이머 상태?” “아..... 이런... 맥박수가 떨어지고 있습니다. 뇌파 베타파로 빠르게 바뀌었습니다. 아... 세타파입니다. 이.... 이..이런.... 게이머의 뇌파가 델타파로 바뀌었습니다. 위급합니다. 빨리 게이머를 꺼내야 합니다!” 델타파는 잠이 들었거나 혼수상태에서 나타나는 뇌파였다. 진팀장은 기겁을 하며 외쳤다. “뭐? 빨리 게이머 꺼내!” “..... 덮개가 열리지 않습니다.” “강제로 잘라 내! 빨리!” “시간이 없습니다. 게이머에게 산소 공급이 중지되었습니다.” “곽진호! 방법이 없나?” “..........” 곽진호는 진팀장의 말에 대답하지도 않고 빠르게 게임기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는 게임기의 뒷부분을 주먹으로 세게 내리쳤다. 뭔가 푹 패이면서 떨어져 나갔다. 곽진호의 주먹은 피로 얼룩졌다. 곽진호는 그런 주먹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떨어져 나간 곳을 보더니 뭔가를 잡아 당겼다. 게임기가 잠시 진동을 하더니 멈췄다. 곽진호는 게임기 옆으로 다가가 콕핏을 옆으로 밀었다. 몸으로 해서 안 되자 발로 차기도 했다. 그 모습에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콕핏 옆에 붙어서 그 덮개를 밀었다. “끼이익.... 덜컹!” 10명이 넘는 사람들이 달라붙어 밀고 나서야 겨우 덮개가 열렸고 게임기 안에서 아주 작은 구슬 같은 물체가 흘러나왔다. 현준은 빨리 앞으로 뛰어 나가서 진성을 그 안에서 끌어냈다. “앰뷸런스!” “지금 오고 있다. 그 자리에 그대로 둬라, 현준아. 지금 충격을 주면 안 된다!” 흥분한 현준에게 진팀장은 재빨리 말했다. 혼수상태인 사람을 막 옮긴다는 것은 죽으라는 말과 같았다. 현준은 그 말에 흥분을 가라앉히고 진성을 그래도 게임기 안에 두었다. 고체도 아니면서 액체도 아닌 작은 구슬 속에서 얼굴만 드러낸 채 떠 있는 진성의 얼굴은 말 그래도 백짓장 같았다. 현준은 그런 진성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처음에 그 스파크를 발견했을 때 자신이 제대로 이야기를 했더라면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죄책감마저 느꼈다. 현준은 이럴 때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오래지 않아 구급대원들이 도착했다. 진팀장의 대략적인 설명에 구급대원들은 게임기 안의 진성을 천천히 꺼내어 간이침대에 눕혔다. “보호자는?” “접니다.” 구급대원의 질문에 냉큼 현준이 대답했다. 빠르게 밖으로 나가는 구급대원을 따라서 현준이 뛰어나갔다. “곽진호, 일단 위에다 보고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만 두고. 그 프로게이머 팀장인 서재필씨와 문명 온라인 팀장인 희철이에게 전해 주게. 나는 병원으로 가 볼 테니까 이 곳 정리 잘하고 무슨 이유인지 꼭 밝혀내게. 앞으로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니까. 알겠나?” 그 와중에도 앞으로의 일을 생각한 진팀장은 빠르게 지시하고는 자신 역시 요람을 빠져나갔다. 곽진호는 남은 테스트 요원들을 일사분란하게 지휘하면서 일단 그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 있는 힘을 다했다. 게이머 진성이 걱정되었지만 그런 사태를 방지하려면 사고 직후에 그 원인을 밝혀내야만 했다. 이를 악문 곽진호는 어안이 벙벙한 사람들을 다그쳤다. 병원으로 실려와 응급실에 도착한 진성에게 세 명의 의사가 달라붙었다. 여러 가지 기본적인 바이탈 사인들을 체크한 의사들은 서로 뭐라고 말하더니 간호사에게 뭔가를 지시했다. 진팀장이 미리 도착할 병원에 아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기 때문인지 보통의 응급환자를 대하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한참 동안을 살펴보고 여기 저기 전화를 하더니 보호자를 찾았다. “보호자 되십니까?” “네... 어떻습니까? 상태가 어떻습니까?” “..... 어쩌다 저렇게 되었습니까? 지금 현재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거의 완벽한 혼수상태에 빠졌습니다. 보통의 기절상태와는 조금 다릅니다.” “네? 그러면......” “네... 경과를 지켜봐야 하겠지만 현재로서는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상태입니다. 내일 깨어날 수도 있고 10년 후에 깨어날 수도 있고.... 어쩌면.........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 현준은 마른 하늘에 날벼락 떨어지는 느낌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 옆에서 그렇게 웃고 이야기하던 친구가 하루아침에 의식불명이라니... 게다가 언제 깨어날 지도 모른다는 말은 현준을 완전히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렸다. 뒤이어 들어온 진팀장은 절망하는 아들, 현준을 볼 수 있었다. “현준아....” “으으윽.... 으엉.... 흑흑흑......” 현준의 참고 또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진팀장은 현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가가 앉아 주었다. 이 모든 일의 책임자로서 진팀장은 자신의 머리 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무거운 책임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아들이라고 생각한 진성에 대한 죄책감은 한 사람의 남자의 마음을 무너뜨렸다. 진팀장의 두 눈에서도 두 줄기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소 소프트는 발칵 뒤집혔다. 현재 최고의 게임으로 평가받고 있는 문명 온라인에 있어서 게이머 스키피오, 진성의 역할은 결코 적다고 할 수 없었다. 초기에 돌풍을 일으킨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 바로 진성의 테스트 게임 플레이 화면이었다. 그리고 얼굴 없는 게이머로 구축한 팬들로 인한 인터넷 홍보효과 역시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런 게이머가 다른 게임 테스트 도중에 이런 사고를 당했다는 것은 대단한 손실이었다. 회사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기 때문에 누군가 책임을 져야 했다. 이번 일 책임자는 당연히 진팀장, 진민수였다. 아직 사고의 원인에 대해 밝혀지지 않아 쉽게 다룰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다음날 회사로 나온 진팀장은 곽진호를 만났다. “곽진호, 원인은?” “저... 그게... 원인을 알 수가 없습니다.” “뭐야? 모니터가 퍽퍽 터지고 스파크가 튀었는데 이유가 없어?” “...네.. 저 역시도 믿기 힘들지만 다른 모든 시스템은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도저히 어떤 현상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시간에 태양 흑점의 폭발로 인한 이상현상은 있었지만 그런 큰 스파크 같은 현상의 원인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몇 번이나 점검했지만 시스템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네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냐?” “형님! 절 아시잖습니까? 맹세합니다.” “좋아. 네 말은 믿지만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다. 어떻게든 알아내라. 부탁한다.” 진팀장의 입에서 부탁한다라는 말이 나오자 곽진호는 놀랐다. 20년이 넘도록 같이 일해온 사이지만 진팀장의 입에서 부탁한다는 말을 듣기는 처음이었다. 아주 좋은 사람이지만 자신의 힘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진팀장의 사는 방법이었다. 곽진호는 이번 일이 진팀장에게 얼마나 중요한 지 실감했다. “네, 형님.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아내겠습니다.” 진팀장은 극도로 불안했다. 어제 병원 응급실에서 현준의 반응으로 조금은 짐작했지만 의사의 직접적인 진단을 듣자 마음은 비교할 수 없이 심란했다. 혼수상태라니... 식물인간이라니.... 진팀장은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결과였다. 게다가 그런 소식을 자신의 아내에게 말해야 한다는 사실에 진팀장은 절망했다. 아들이라고 여기고 있는 아내에게 그런 소식을 전하기란.... 불가능했다. 진팀장은 아직 아내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전화로 회사에 일이 있어서 들어가지 못한다고 둘러댔을 뿐이었다. “휴......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어떻게 200번이 넘는 테스트 동안 한번도 없던 일이..... 차라리 내가 테스트할 때 일어났더라면...... ” 진팀장은 차라리 자신이 지금의 진성의 처지였으면 했다. “들었어? 어제 로플팀에 사고가 있었다며?” “응... 어제 그 사고로 진성이가 병원으로 실려갔다는데요. 덕만이 형, 절대 하나씨 모르게 하세요. 알겠죠?” “아... 당연하지. 그나저나 괜찮을지 모르겠네.” “휴... 금방 일어나겠죠.” 공동진과 김덕만은 소곤소곤 거리며 진성에 대한 걱정을 했다. 그리고 알게 되면 매우 걱정하게 될 하나에게는 전혀 내색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마음은 동진과 덕만 뿐 아니라 하나와 진성이 연인은 아니더라도 특별한 관계임을 알고 있던 사람들의 공통된 마음이었다. “대장님, 병원에서 전화 왔습니다!” “뭐? 뭐라고 해?” “대장님, 진성이가... 진성이가.....” “야, 빨리 말해.. 숨 넘어 가겠다.” “진성이가 깨어났다고 합니다.....” 곽진호의 대답에 진팀장은 말도 하지 않고 외투를 들고서는 빠르게 요람을 빠져나갔다. “..... 아버지...... 아버지... 진성이가.....” “알고 있다.” 중환자실로 들어간 진팀장은 아들의 흐느끼는 소리에 딱 잘라 말하고는 진성에게로 다가갔다. 진성은 눈을 뜨고 있었다. 진팀장 역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지..진성아.. 좀 어떠냐?” “..... 괜찮아요. 걱정 많으셨죠? 이제 괜찮으니까 걱정 마세요.” 약간 어눌했지만 또록또록 말 잘하는 진성의 대답에 진팀장은 묵직한 뭔가가 쑥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몇 마디 말을 나눈 뒤에 피곤해 하는 모습에 진팀장은 중환자실 밖으로 나왔다. “.... 좀 어떻습니까?” 담당의사를 만난 진팀장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 한 마디로 말해 기적입니다. 저렇게 안정적인 코마, 혼사상태에 빠진 환자가 하루만에 이렇게 거의 완벽한 의식을 가지고 깨어난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합니다. 사실 제가 이런 경우에 대해 연구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아무튼 축하드립니다. 이틀 정도 경과를 본 후에 일반실로 옮길 수 있을 겁니다.” “..... 가.. 감사합니다.” “제가 뭐 한 것도 없는데요.....” 진팀장은 담당의사의 말에 마지막까지 품었던 불안한 마음이 사라짐을 느꼈다. 마지막 남은 돌을 깨끗하게 치워 버린 듯했다. “휴......” 진팀장은 품안에서 핸드폰을 꺼내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이제까지 미루었던 아내에게 사실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정신이 드냐?” “아.... 어, 아주머니?” “그래... 나다... 고생 많았지?” “걱정 많이 하셨죠?” “나야 어제서야 알았다. 오늘 저녁에 일반병실로 옮긴다니까 조금만 참아라.” “네....” 중환자실로 들어온 현준의 어머니는 걱정스런 얼굴로 진성의 얼굴을 만지며 말했다. 진성은 그런 주위 사람들의 걱정에 가슴 뭉클했다. 오래지 않아서 진성은 일반병실로 가게 되었다. 담당의사의 예상보다 하루 일찍 가게 된 것이다. “와... 여기는 정말 편하네.” 조금씩 움직일 수 있는 일반병실로 오자 진성은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면서 조금씩 자신이 이렇게 병원에 있게 된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아.. 그 새로운 게임 테스트를 하다가..... 아, 맞아.. 그 녀석 류한테 맞아서 절벽에서 떨어졌었지.. 아.. 그 때 이후로 정신을 잃었구나....’ 진성은 아직 자신이 코마,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하루 만에 깨어났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단지 조금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난 정도로 생각할 뿐이었다. 자신이 절벽에서 떨어진 후에 뭔가가 있었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도저히 기억할 수 없었다. “.......... 흐흑....” 하나는 참다 참다 못해 눈물을 흘렸다. 같이 문병 온 동진과 덕만은 하나의 울음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는 진성을 바라보는 하나는 목이 메는 걸 느꼈다. 더욱 더 서러운 것은 다른 팀원들은 진성이 사고를 당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자신만 오늘에서야 알게 됐다는 사실이었다. 다행히 급히 병원으로 와서 편안히 자고 있는 진성의 모습을 확인한 하나는 안심했지만 오는 동안의 긴장된 마음이 풀리면서 순간 울음이 나왔다. 동진과 덕만은 서로 눈짓하며 가져온 음료수를 침대 옆에 놓고는 밖으로 나갔다. 하나는 동진과 덕만이 나가자 진성의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나아 보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손을 들어 진성의 이마에 댔다. 눈물이 흘러나왔다. 하나는 눈물을 닦지도 않은 채 손을 펴서 진성의 뺨에 가져다 댔다. “휴..... 정말... 정말....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뺨을 타고 내려온 눈물은 방울방울 맺히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나는 눈물이 흘러 떨어진다는 것도 모른 채 진성만 바라볼 뿐이었다. 하나는 자신이 진성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공인된 연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진성과 자주 만나는 사이였던 하나는 진성에게 호감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목 메달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진성의 사고를 통해 하나 자신에게 진성은 정말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마음으로 느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치 가랑비에 옷 젖듯 자신의 마음속에서 진성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는 곧 눈물을 닦았다.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또 한번 진성을 바라보고는 핸드백을 들고 밖으로 나섰다. 자신의 마음속에 자신조차 잘 몰랐던 것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자 조금 당황한 하나는 급히 병원을 빠져나갔다. “대장님, 며칠 동안 계속 원인을 찾았는데 도저히 찾을 수가 없습니다...” “자네 개인적인 생각은?” “지난번에 말씀드린 그.... 태양의 흑점 폭발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지만 현재로서 가장 의심스러운 것은 흑점 폭발 밖에 없습니다. 그 때에 근처의 모든 곳, 단 한 곳에서도 전기 이상 현상은 없었습니다. 오직 그 요람에서만 일어난 현상입니다.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테스트도 20번 정도는 했습니다만 아무런 이상도 없습니다.” “테스트? 이런 위험한 상황에 누가?” “....... 제가 했습니다.” “...자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네.” 진성이 일반병실로 옮긴 것을 보고 온 진팀장은 곽진호를 만나 그 동안의 경과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대장님,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걱정 말게. 옷을 벗어도 내가 벗을 테니까.” “네? 대장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대장님이 회사 나가면 저도 나갑니다. 안 되면 이번에 완전히 짐 싸들고 나갈까요? 저야 형님이 회사 만든다면 당연히 그 회사 갑니다. 그리고 제게 붙은 녀석들도 다 거기로 올 테니까 실력 있는 회사 하나 만들기는 어렵지 않지 않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우리가 몇 년 동안 로플을 꿈꿔 왔는데... 이제 와서 모든 것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는가?” “...... 그래도 형님이 나가신다면 저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휴.... 진성이가 깨어났고 별 이상이 없다고 하니 다행이야. 그리고 당분간 그 가상현실 시스템, 아무도 테스트 하지 못하게 해. 한동안은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테스트만 할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대장님.” “나는 사장 만나고 오겠네.” 진팀장은 로플팀의 사무실을 나와서 19층에 있는 사장실로 향했다. 평소 그리 관계가 좋다고 할 수 없는 사장 박경락의 반응을 예상하며 진팀장은 엘리베이터가 아닌 비상계단을 통해 올라갔다. “아, 진팀장님. 사장님은 안에 계십니다.” “내가 왔다고 말해 주게.” “네, 사장님, 진민수 로플팀장님 오셨습니다.” “들어오시라 하게.” 진팀장은 고급 가구로 도배가 된 사장실로 들어갔다. 평소 이런 사무실에 알레르기가 있을 정도로 맘에 들어하지 않았던 진팀장은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허허... 아직도 이런 품격을 모르는가?” “사고가 있었습니다..........” “내 이야기는 들었네.” 진팀장은 사장이 도대체 어떻게 들었을까 생각했다. 하나밖에 없었다. 로플팀에 사장의 끄나풀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 말고는 생각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요람의 경우 비정기적으로 도청장치를 검사하기 때문에 쉽게 도청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 도청장치 검사 지시는 진팀장 자신이 마음대로 하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 그 사고로 게이머가 다쳤습니다.” “스키피오라는 게이머라고 들었네.” “네, 그렇습니다. 한동안 중환자실에 있다가 일반병실로 옮겼습니다. 상태는 아주 좋은 편입니다. 정밀 검사를 더 해 봐야 하겠지만 다른 이상은 없다는 담당의사의 소견이었습니다.” “음... 다행이군... 그런데.... ” “...........” “여기는 회사라네. 이런 크고 중요한 일을 그냥 둘 수는 없지 않은가?” “무슨 말씀입니까?” 진팀장은 사장의 의도를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 되물었다. “알만한 사람이 그렇게 모른 척하면 안 된다네. 이런 일을 유야무야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나?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지.” “.... 그렇다면 제가 책임을 지죠..” “어떻게 책임을 질 텐가?” 진팀장의 말에 사장은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둘의 대화에 전혀 감정이 실리지 않았다. “.... 제가 물러나죠. 제가 회사를 그만 두게 되어도 상관없습니다.” “.... 허허... 초강수구만..” “원하셨던 일 아니었습니까?” “허... 아주 오해가 깊군. 그런데 그것은 안 되겠네. 자네가 떠나면 내가 보기에 그 로플팀 전체가 회사를 나가버릴 것 같거든. 그리고 자네 친구인 이희철 문명 온라인 팀장도 흔들릴 테고..... 음..... 회사에서 볼 때 이익보다 손해가 많아. 절대 회사는 손해될 일은 하지 않지.” “............”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큰 징계 없이 넘어갈 수밖에 없겠구만. 진민수, 너무 무리하지 말게. 자네와 나는 서로 도우면 크게 성공할 수 있다니까. 잘 생각해 보게. 자네가 하는 일은 내가 다 알고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을 거야. 회사는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생물이야. 잘 기억해 두게나.” “......” “이만 나가보게. 그 새로운 게임 밀리터리 아트도 열심히 한 번 해 보게. 하지만 이런 큰 사고는 앞으로 자제하는 게 좋겠지? 괜히 자극할 필요는 없으니까. 앞으로 잘 처신하게. 아, 민선당 사무처장을 만날 약속이 되어 있군. 진팀장 잘 생각해 보게.” 진팀장은 사장실을 나오자마자 벽을 발로 차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너구리같은 녀석..........” 퇴원해서 집에서 쉬고 있던 진성은 점점 답답함을 느꼈다. 그러면서 그 동안 너무 앞만 보고 달려온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일주일 정도는 쉬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이 있었지만 진성 자신이 보건대 몸에는 전혀 이상이 없었다. 진성은 오랜만에 혼자 있다는 느낌을 가졌다. “이렇게 고즈넉하게 혼자 있는 것도 참 오랜만이네.” 침대에만 누워 있기는 너무 몸이 참기 어려워 집안을 계속 돌아다니다가 급기야 현준 어머니의 눈치를 보면서 정원으로 나가 따뜻한 오후의 햇빛을 즐기기도 했다. 나무로 짠 의자에 앉아서 팔을 벌리고 하늘을 향해 눈을 감고 내리쬐는 햇빛을 몸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에 행복감을 느꼈다. 진성은 자신이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것을 현준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 말을 듣기 전에는 그냥 간단히 기절했다가 일어난 것으로 생각했는데 어쩌면 영원히 깨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듣자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해졌다. 진성은 옛날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로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한 자신의 모습이 기억나 피식 웃음을 짓고 말았다. “휴..... 역시 죽는다는 것은 그렇게 좋은 일은 아닌 것 같다....” 진성은 자신의 몸을 두드리는 햇빛 하나만으로 살아있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죽는 경험을 하고 살아나면 성장하는 것일까? 진성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했다. “진성아, 춥지 않니? 이것 좀 입고 있어라.” 현준 어머니는 따뜻하게 보이는 가디건을 정원으로 가지고 나왔다. 현준 어머니는 진성에게로 다가와 천천히 가디건을 건네주었다. “네가 이렇게 있어줘서 너무 고맙다. 네 덕분에 오랜만에 정말 지옥과 천국을 경험하게 됐단다. 가끔 그런 경험이 삶의 활기가 되는 것도 같다만 앞으로는 다시 그러고 싶지 않구나. 진성아, 고맙다.” 진성이 보기에 아주머니의 얼굴에는 광채가 나는 듯했다. 진성은 웃으며 대답했다. “.... 정말 여기가 제가 있을 곳이네요. 아주머니, 정말 고맙습니다.” “... 그래... 그래.. 그게 내가 듣고 싶은 얘기구나. 조금 있다가 들어오너라. 우리끼리만 맛있는 저녁을 먹을 수 있겠다. 오랜만에 내가 솜씨 발휘했거든. 기대해도 좋아.” 진성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현준 어머니는 가볍게 진성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진성은 자신이 정말 행운아라고 생각했다. 이미 돌아가신 부모님도 정말 자신을 사랑해 주셨고 새로 만난 부모님도 같으신 분들도 정말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 해가 산에 걸리면서 혼자 보기 아까운 장관을 연출하자 진성은 가디건을 여미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리고는 서서히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일은 아버지, 어머니께 인사드리러 가야겠다.” 진성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안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진성은 서해안의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대천으로 갔다. 거의 3시간이 넘어서야 대천에 도착했다. 진성은 택시를 타고 근처의 보령 항구로 이동했고 곧 배표를 끊고는 하루 두 번 다니는 여객선을 탔다. 오기 전에 부모님의 묘소에 들렀다 온 진성은 마음이 약간 들뜨기 시작함을 느꼈다. 부모님이 묻히신 묘소보다는 부모님과의 추억이 남아 있는 대천과 가까운 섬 호도가 더 진성에게는 가깝게 느껴졌다. 진성이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전에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호도에 온 적이 있었다. 이박 삼일로 온 일정이었는데 가족여행이라는 말 자체가 어색할 정도로 여행 같은 것을 해 본 적이 없었던 진성 가족으로서는 아주 큰맘을 먹은 것이었다. 이박 삼일간의 시간도 좋았지만 불어 닥친 폭풍으로 인해 배가 끊겨서 섬에서 어쩔 수 없이 있어야 했던 이틀 동안에 느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으로 진성은 호도에 올 때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난 듯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호도는 그 때와 비교해 거의 변하지 않았다. 예전에 아버지, 어머니와 같이 살던 집도 다른 색으로 칠하고 몇 년이 지나니 전혀 옛날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바뀐데 반해 호도는 거의 변함이 없었다. 그 때 머물렀던 바다민박이라는 간판마저 정겨울 정도였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으로 올라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밤바다를 즐겼다. 바쁘게 살았던 생활들이 모조리 어딘가로 가 버렸다. “야아아아아아아!” 한바탕 고함을 치니 속마저 후련했다. 하루를 묵은 진성은 아침에 일어나 섬 한바퀴를 돌았다. 그리 큰 섬도 아닌데다가 사람이 갈 수 있는 길은 정해져 있었기에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볍게 아침을 먹고는 섬을 나갈 준비를 했다. 별로 가져온 짐이 없었기에 메는 가방 하나로 족했다. “.... 아버지, 어머니. 외로울 때면 가끔 찾아올께요.” “이제 올라가는가?” “네, 다음에 또 내려올께요.” “그래... 그리워하는 것도 적당히 해야 돼. 적당히. 그래야 그 사람들도 편하게 살지...” 거의 매년 내려오는 진성을 보는 민박집 노인 대뜸 말했다. 이제껏 별다른 얘기가 없었기에 진성은 마냥 고개만 끄덕였다. “...... 올라가 보겠습니다.” “......” 노인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진성을 쳐다보았다. 진성은 가방을 메고는 방파제와 둑으로 만들어진 길을 따라 간이 선착장으로 가서 배를 기다렸다. 하루에 두 번 밖에 없는 배라서 놓치면 큰일이었다. 어제와 다름없는 좋은 날씨에 숨이 있는 힘껏 들이키고서는 천천히 내쉬었다. “휴........ 얍!” 자신도 깜짝 놀랄 정도로 기합을 내지른 진성은 멀리서 다가오는 배를 기다렸다. “퍽!” “야! 강진성. 너 정신이 있냐?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편지 달랑 써놓고는 그렇게 사라질 수 있냐? 강진성, 대답 좀 해 봐. 여기 오고 싶었으면 내게 말을 하던가? 죽다 살아난 놈이 이렇게 나다닌다는 게 말이 되냐? 네가 나를 친구로 생각했다면 이럴 수는 없다. 야, 강진성, 뭐라고 말 좀 해라.” 항구에서 진성을 맞이한 현준의 격앙된 목소리였다. 진성이 배에서 내리는 것을 본 현준은 다짜고짜 달려가 주먹부터 내질렀다. 잔뜩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고 눈마저 충혈된 현준은 배에서 활기찬 모습으로 내리는 진성을 보며 순간 자신도 모르게 주먹이 나가고 말았다. 자신은 둘도 없는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진성은 그렇지 않았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 “말을 해 봐라.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아냐? 우리 엄마, 아버지가 얼마나 네 걱정하신 줄 생각이나 해 봤냐?” “미안하다.” “그냥 미안하면 다냐? 어떻게.....” “미안하다. 그냥 번거롭게 하기 싫었고, 그리고..... 혼자 여기 오고 싶었거든....” 진성이 호도에 오는 이유를 알고 있는 현준은 불같이 뜨겁던 머리와 가슴이 순식간에 식어버리는 것을 느꼈다. 현준은 천천히 다가가 넘어져 있는 진성을 일으켜 세웠다. “...... 번거롭다니... 너한테 내가 그런 친구였냐?” “미안하다.” “됐다. 아침은 안 먹었지? 아침이나 먹으러 가자.” 진성의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에 현준은 짐짓 모른 채 하면서 손을 잡고 이끌었다. “아침밥? 먹고 왔는데.... ” “...........” 현준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 진성은 버텼다. “................” 현준의 얼굴에 냉기가 깔리기 시작했다. “..... 아, 생각해보니 조금 덜 먹었는지 배가 고프다. 같이 먹으러 가자. 뭐 먹을까?” 켕기는 게 있는 진성이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 그렇지? 배, 고프지? 오랜만에 바닷가에 왔는데 회라고 먹고 가야지. 자 가자.” 진성은 현준과 같이 근처의 횟집으로 가서 고프지 않은 배에 회와 매운탕을 가득 집어넣어야만 했다. “.... 진성아, 일단 집에 전화해라.” 한참을 먹고 배 부르자 뭔가 생각난 현준이 진성에게 핸드폰을 건네주며 말했다. “여보세요? 네... 저 진성입니다. 네... 네.... 알겠습니다.... 네.... 네... 제가 잘못했습니다. 네.. 네... 앞으로는 그럴 일 없을 겁니다. 네... 아... 네....네...” 쩔쩔매는 진성의 모습을 보고 있던 현준은 든든한 배를 만지며 슬쩍 웃었다. 대천으로 내려올 때는 아주 걱정도 많고 조마조마 긴장했지만 그 덕에 이렇게 진성이와 푸짐하게 회도 먹을 수 있어서 아주 잘 내려왔다고 생각했다. “...네... 네.... 현준이요? 아까 만났는데요... 네? 아.. 네... 한 시간 정도는 지났는데요... 네.. 네.... 잠깐만요... 현준아, 아주머니께서 너 바꾸라고 하시는데?” “왜?” “잘 모르겠는데.. 너 아까 만났다고 하니까 막 화를 내시는데.....” “뭐? 너 강진성!” “받어...” 배를 만지며 기분 나쁜 웃음을 짓는 현준이 못마땅했던 진성은 슬쩍 현준을 만난 시간에 대해서 흘렸고 당연히 현준의 어머니는 곧바로 전화하라고 한 자신의 신신당부를 어긴 아들에 대해 무척이나 화가 난 상태였다. “어.. 엄마? ....................................... 네.... 네............ 네.....” 진성은 잔뜩 긴장한 현준이 전화 받고 있는 동안 두 다리 쭉 뻗어 편한 자세로 현준의 그 웃음과 비슷한 웃음을 날렸다. “...........” 로플팀의 테스트 사고의 원인은 결국 밝혀지지 않았다. 거의 일주일 동안 로플팀의 모든 일은 중지되었고 여력을 사고의 원인 규명에 쏟아 부었다. 하지만 태양의 흑점 폭발과 같은 믿기 힘든 사실을 제외하면 어느 것 하나 의심 가는 게 나오지 않았다. 특히 많은 사람이 눈으로 봤던 스파크 현상은 그 후로 백 번이 넘게 수행한 테스트를 통해 단 한번도 재연할 수 없었다. 일주일 동안의 검사 끝에 로플팀은 그 원인을 태양의 흑점 폭발로 인한 전자기장 간섭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대책으로 완벽한 차폐는 아니지만 전자기 차폐 설비를 외국에서 긴급 공수해서 로플팀의 요람에 설치했다. “진성아, 괜찮아?” “동진이 형, 저 아무 이상 없습니다. 그냥 잠 좀 자다가 일어난 것 같은데요 뭘...” “정말 괜찮아? 조금 야윈 것 같기도 한데....” “덕만이 형도 참....... 아무렇지도 않아요.” “진성이가 조금 야위긴 했지요. 사실 혼자 몰래 편지 하나 달랑 써 놓고는 사라졌거든요.. 그러다가 돌아왔는데 우리 엄마가 화가 나서 진성이를 앉혀 놓고.. 거의 두 시간이 넘도록....” 목소리의 주인은 진현준이었다. “현준아, 3시간 30분이다.” 진성이 현준의 말을 정정했다. “.... 아무튼, 거의 매일 그렇게 오랜 시간을 붙들고 얘기를 했거든요. 그러다보니 보시는 것처럼 이렇게.... 으하하하하..” 진성은 집으로 돌아간 후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서 거의 네 시간 동안 같은 얘기를 계속 들어야 한다는 것이 이렇게 고통스러울 줄은 상상도 못했다. 게다가 다음날도 그런 고통이 계속 된다는 사실은 웬만해서는 얼굴에 표가 나지 않는 진성을 야위게 만들었다. 하나와 눈을 마주친 진성은 슬쩍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몇 번인가 집으로 찾아왔던 하나였기에 그냥 눈만 마주친 후에 진성은 이팀장을 만나러 팀장실로 들어갔다. “저 진성입니다.” “어서 들어와. 좀 괜찮은 것 같나?” “아주 좋습니다. 다시 테스트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래? 하지만 안타깝게도 진성, 너는 그 테스트에서 제외야.” “아니, 왜 그렇습니까? 그 테스트 원인이 그 흑점인가 뭔가 하는 것 때문 아닙니까?” “..... 그것과는 상관없이 네 몸이 정상적이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일세.” “저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건 네 생각이고.... 당분간은 테스트 금지야. 금지! 알겠나?” “.....” “그나저나 그 새로운 게임 재미있던가?” “재미 정도가 아닙니다. 이름이 밀리터리 아트라고 하는데 끝내 줍니다. 진짜로 내가 상대와 싸우는 듯합니다. 문명 온라인이 어떤 군대를 조종하는 것 같은 느낌이라면 그 밀리터리 아트는 자신이 직접 상대와 치고 박고 싸우는 겁니다. 문명 온라인과는 다른 중독성입니다.” “그런가.....” “아마 돈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든 그 전용 게임기를 구입하려고 난리일 겁니다. 문명 온라인 프로 전용 게임기도 대단하지만 밀리터리 아트의 경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도 상당한 재미를 느낄 것 같습니다. 대단합니다.” “..... 그렇군. 진성아, 앞으로 한, 두 달 정도는 시간이 여유가 있겠지만 몸조심해라. 여유 있다고 설치다가 다치면 절대 안 된다. 알겠지?” “네, 걱정 마세요.”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눈 진성은 팀장실을 나와 로플팀으로 갔다. 로플팀의 팀장인 진팀장은 매일 집에서 보기에 진성은 바로 요람으로 들어갔다. 요람안의 사람들은 다들 바쁜지 누가 들어오는지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진성은 숨을 가득 들이키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다들 안녕하세요?” “어, 진성이잖아?” “진성이네. 몸은 좀 어떠냐?” “보시면 모르겠어요? 저야 멀쩡하죠.” 다들 하던 일을 멈추고 진성 근처로 다가왔다. 특히 조진철 프로그램 팀장은 진성의 머리를 거칠게 더듬으며 말했다. “네 녀석 때문에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다행이다. 다행이야.” “... 그게 뭐 제가 잘못해서 그런 것은 아니잖아요?” “그래.. 그래... 아직도 왜 그런 사고가 일어났는지 제대로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으니까.” “흑점 폭발 때문이라고 하던데요..” “........... 믿냐?” “........... 아닌가요?” “순진한 녀석. 그게 그나마 제일 의심스럽다는 것이지.” “딱” “아얏” 진성이 조진철 팀장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 뒤에서 누군가가 뒤통수에 알밤을 먹였다. 진성은 아픈 머리를 손으로 감싸며 돌아섰다. “곽팀장님!” “어라, 이제 완전히 다 나은 모양이구나. 나도 이제 다 나았다.” 곽진호 가상현실 하드웨어 팀장은 자신의 주먹을 내보이며 웃었다. 사고 때 진성을 꺼내기 위해 긴급조치를 하다가 다친 주먹에 마치 복서처럼 붕대를 감은 곽진호였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던 진성이었기에 바로 감사의 인사를 했다. “곽팀장님 덕분에 살았어요.” “..... 뭘.. 그런 사고가 나지 않도록 만드는 게 바로 내가 할 일인데...” “그런데 그 사고의 원인이 태양의 흑점 폭발이 아닌가요?” “맞아, 단지 공식적으로는.” “그럼, 비공식적으로는?” “아무도 몰라. 전문가인 내가 모르는데 누구 알겠어? 아무리 테스트 해 봐도, 온갖 검사를 다 해도 그 원인이 나오지 않아. 수백번이 넘는 테스트 동안 유일하게 네가 할 경우 그 한 번만 그런 일이 일어났거든. 게다가 그 이후에는 별다른 이상도 없어. 순전히 네가 운이 나쁘다고 할 수밖에. 그 이후로도 백번이 넘는 테스트를 했는데 그런 기미도 보이지 않아. 게다가 차폐 장치도 이제 달았으니....” “그럼 다시 제대로 테스트를 할 수 있겠네요?” “이미 하고 있다. 이 녀석아.” “저..... 그럼 저.. 다시 테스트 할 수는 없을까요?” “뭐? 네가? 누굴 죽일 일 있냐? 너를 테스터로 했다간 나 죽는다. 그것도 두 번 죽는다. 한번은 대장님한테, 또 한번은 사모님께.” 곽진호는 쩔쩔매는 표정으로 처절하게 말했다. 물론 반쯤은 장난이었지만 나머지 반쯤은 진실이었다. 내심으로는 진성을 테스터로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곽진호였다. 수많은 테스트와 10명의 테스터 중에서 발군의 기록을 나타낸 사람이 바로 진성이었다. 그런 케이스를 제대로 연구할 수 있다면 상당히 빨리 밀리터리 아트의 단점과 개선해야할 것들을 처리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곽진호는 약간은 시무룩한 진성에게 웃으며 말했다. “진성 이 녀석아, 네가 못해도 다른 사람이 할 테니까 옆에서 잘 보기나 해라. 현준이 녀석이 테스터를 할 모양이니 너는 당분간 자중해라.” “.......네...” “현준아 준비됐냐?” “네, 준비됐습니다.” “그래, 탑승해라.” 현준은 옆에 서 있는 진성을 한 번 쳐다본 후에 PVR-2에 탑승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조진철 팀장의 진행에 따라 헬멧을 쓰고 DJ(Dynamic Jewel)로 불리는 작은 구슬이 PVR-2를 가득 채웠다. 약간 당황했던 현준의 몸이 정상을 찾자 밀리터리 아트가 로딩되었다. 진성은 가상현실에서의 현준을 여러 모니터들을 통해 볼 수 있었다. 자신이 처음에 있었던 그 끝없는 들판에 있다가 곧 자신처럼 높은 산꼭대기의 공터로 옮겨간 현준을 볼 수 있었다. 진성은 그런 현준을 보며 웃었다. “곽팀장님, 이번에는 누구입니까?” “뭐? 누구라니?” “지난번에 저는 류였잖습니까? 이번에 현준을 상대할 캐릭터는 누구입니까?” “아.... 그것? 네가 보면 깜짝 놀랄 거다.” 진성은 이번에 누가 나올까 기대했다. 스트리트 파이터의 캐릭터라면 보기 좋게 깨지는 현준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때 공간을 가르며 뭔가가 나타났다. “아.... 저것은.........” 진성이 본 것은 바로 자신의 모습이었다. 가상현실에서 공간을 가르고 나타난 캐릭터는 바로 진성 자신이었다. “어.. 어떻게....” “네 녀석이 지난번에 테스트 했던 것을 가지고 모델링해서 만든 거야. 거의 네가 가상현실에서 움직인 속도나 힘과 같다고 보면 될 거다. 아주 재미있을 것 같지 않냐? 프로 게이머 스키피오와 한신의 대결이라니... 하하하하..” 곽진호는 마구 웃어댔다. 현준은 자세히 보면 모자란 부분이 눈에 띄었지만 전체적으로 현실감이 대단한 가상현실에 놀라고 있는데 공간을 가르고 뭔가가 나타나자 긴장했다. 이미 진성으로부터 그 대단함을 들었기에 현준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곧 놀라다 못해 웃고 말았다. “.... 지..진성?” “현준아, 진성이다. 진성이 지난번에 테스트 했을 때의 데이터로 모델링 했으니까 열심히 한 번 해 봐라. 스키피오와 한신의 대결이다. 알겠냐? 참고로 떨어지면 그 기분 죽인다. 자, 건투를 빈다.” 현준은 조진철 팀장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자신이 싸워야 하는 것이 눈앞의 진성이라니. 자세히 보면 약간 폴리곤의 느낌이 났지만 서 있을 때의 자세나 걸음걸이가 완전히 진성의 것이었다. 그래도 진성이 말한 그 류와 같은 캐릭터와 싸우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현준은 다가오는 진성의 캐릭터를 보며 천천히 앞으로 움직였다. 상대가 진성이라면 그렇게 현준 자신이 지지 않으리라 판단했다. “윽” 앞으로 다가가는데 자신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빠르기로 진성의 발차기가 날아들었다. 엉겁결에 팔을 들어 막았지만 무의식중에 신음을 내면서 뒤로 나가떨어졌다. 고통은 없었다. 하지만 느껴지는 상대의 속도는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진성이 이렇게 빨랐나 생각하는 현준이었다. 현준은 진성의 빠른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빠른 진성이 정확하면서도 위력적인 기술들을 쓰자 현준은 제대로 막지도 못했다. 다리 후리기로 중심을 흔들어 놓은 뒤에 공중 돌려차기의 엄청나게 위력적인 발차기에 현준은 구석까지 날아가서 쓰러졌다. 몸은 약간 무거워졌지만 고통은 없었기에 현준은 일어났다. 일어나서 고개를 든 순간 자신의 가슴 바로 앞에는 진성의 발이 와 있었다. “퍽 퍼퍽!” 오른 발에 가슴을 맞고 날아가는 현준을 진성은 다시 한번 공중회전하며 날아가 왼발로 찍어버렸다. 연속으로 크게 맞은 현준은 바로 절벽밑으로 떨어졌다. “..........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현준이는.......... 정말 우렁차군...” 밖에서 보던 곽진호는 현준이 떨어지며 내지른 비명 소리에 한마디 했다. 밀리터리 아트를 가장 많이 테스트 해 본 사람이 바로 곽진호였다. 곽진호는 이 때까지 사람 중에서 현준의 비명이 가장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곧 현준이 게임기에서 나왔다. 땀으로 끈적끈적한 몸을 제대로 씻고 나오는 현준을 보며 다들 한마디씩 했다. “현준아, 비명 소리 정말 끝내주더라.” “..... 네가 지금까지 테스터 중에서 가장 비명을 크게, 오랫동안 지른 사람이다. 기록이다.” “.........” 현준은 할 말이 없었다. “현준아 어때? 재미있지?” 진성은 난처해하는 현준에게 재빨리 말할 기회를 주었다. “어, 정말 끝내주더라. 그 절벽에서 떨어질 때의 그 느낌이란.. 정말 번지점프로 하는 것보다 더 겁나더라.. 휴.... 그런데 진성이 너 왜 그렇게 세냐? 정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끝나버렸다.” “.... 아까 보니까 대단한 기술을 사용하던데... 그런 기술을 사용할 수 있도록 했으니까 그런 거겠지...” 현준의 말에 진성은 자신이 느낀 그대로 말했다. 보통 평범한 사람과 다름없는 현준과 달리 게임 내에서 모델링 된 캐릭터 진성은 그야말로 무술 고수처럼 보였다. “진성이의 말도 맞지만 현준이의 말도 맞다.” 곽진호 팀장이었다. “.... 무슨 말씀이신가요?” “그 캐릭터 진성의 기술은 우리가 주입시킨 것이지. 하지만 그 기술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힘과 속도는 진성의 능력 그대로야. 현실에서의 능력이 아니라 그 가상현실에서의 능력이지. 지금까지 테스트 한 사람 중에서 진성의 능력이 단연 발군이거든. 조금 있으면 지원이 되겠지만 PVR-2 두 개 붙여 놓고 대전 게임을 할 수 있다면 진성이 충분히 현준을 이길거야.” 진성과 현준은 곽팀장의 말을 이해했다. 진성은 생각이 난 것이 있어서 물었다. “.... 그러면 밀리터리 아트라는 게임은 자신이 가상현실로 들어가서 그냥 싸우는 건가요? 그러면 그 가상현실에서 잘 적응하는 사람이 이기겠네요. 게다가 기술도 없다면 그냥 막 싸움이 되고 말텐데.......” “그런 것이라면... 당연히 우리도 생각했지. 지금은 테스트 중이지만 나중에 실제로 출시되기 전에는 실제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그 능력을 평균화해서 처음에는 무조건 같은 힘과 스피드를 갖게 만들 거다. 그리고 기술은 우리가 제공해야지. 현재 가능한 것은 여러 게임으로 나왔던 것과 태권도, 합기도 정도야.” 진성은 곽팀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러면.... 가상현실에서 그 기술들을 익혀야 하는 겁니까?” “지금 그 부분에서 조금 고민하고 있다. 그 기술들을 가상현실 내에서 스스로 익혀야 된다면 당연히 무술을 했던 사람들이 유리하겠지? 그러면 형평성에 어긋나지. 그래서 그런 것과는 다른 기준을 마련해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몸을 움직이는 거라면 해 본 사람이 훨씬 쉽지 않겠냐?” “그렇겠네요....” “그리고 아직은 아니지만 무기도 지원할 생각이야. 전투용 나이프라든가..... 봉이라든가... 그러다가 어쩌면 무협지에 나오는 무림 고수의 대결을 연출할 수 있을지도 몰라.” 진성과 현준은 바람이 낙엽을 날리는 석양이 가득한 하늘 아래에 검과 도를 각각 든 무림의 고수가 경천동지할 대결을 벌인다는 상상을 하면서 탄성을 내질렀다. 자신들이 경험한 바로는 충분히 그런 연출이 가능할 것 같아서였다. 그 기술을 익히거나 사용하는 법에 대한 것만 제대로 된다면 엄청난 게임이 되리라 예상했다. “저......... 그 밀리터리 아트에서 기술을 익히게 하는 방법에 관한 것... 그것 이렇게 하면 안 되겠습니까?” “어떻게?” “어차피 게임이니까 처음부터 차이가 나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되겠죠. 처음 시작할 때는 같은 조건으로 싸울 수 있도록 만들고 점점 싸우는 횟수에 따라서 동작이 좀 더 원활하게 움직이도록 하는 거죠. 물론 그것도 어느 정도까지만 발전하게 만들어 한계선을 그어야겠지요. 그러면 몸 자체의 빠르기나 힘은 그렇게 차이가 나지 않지만 몸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는 그 컨트롤에서 차이가 나지 않을까요?” “그래서?” “일단 몸을 통제하는 정도를 점점 더 익숙하게 만들어 게임을 오래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어느 정도 차별을 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기술 세트를 마련해서 원하는 것을 익힐 수 있도록 만들어 놓고 오래 사용하면 할수록 그 기술을 사용할 때 조금 더 보너스 효과를 주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하면 처음 시작하는 사람과의 차별이 이루어져 게임에 대한 동기부여가 될 겁니다. 상대를 이긴다고 하는 것은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니까요.” “... 음.... 그렇다면 같은 수준의 게이머들끼리는?” “그 경우에는 많은 경험을 한 사람이 제대로 그런 경험을 실전에 발휘할 수 있다면 이기겠죠. 실제 생활에서 무술 대련을 많이 한 사람들이 유리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 반대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생활과 완벽히 같지는 않는 가상현실에서 그런 익숙함은 오히려 불편함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차이를 빨리, 완벽하게 적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재능이 아닐까요?” 조진철 프로그램 팀장은 진팀장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진팀장을 비롯한 요람의 멤버들은 밀리터리 아트의 가장 중요한 부분 중의 하나인 게임 시스템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조진철 팀장은 자신이 평소에 생각했던 것과 최근 무술가들을 테스트한 결과를 종합해서 조리 있게 말했다. 게임이라면 계속적으로 게임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동기유발이 중요했다. 아무리 스펙터클하고 화려한 영상이라도 그 안에 흡입력 있는 스토리가 없다면 단순한 다큐멘터리가 되고 만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 바로 게이머들을 끌어들이는 그 매력이었다. 조진철 팀장은 그 부분을 날카롭게 파헤쳤다. 실제 무술가들을 대상으로 한 테스트에서 오히려 현준보다 못한 결과가 나와 버렸다. 그 사람들은 수차례에 걸친 설명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중에 갖춰진 자신만의 방법이 있어서 오히려 낯선 가상현실에서의 움직임이 더 둔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성급한 일반화는 무리지만 그래도 평균보다 밑도는 그 결과는 분명했다. “그러면 예전에 논의했던 그... 기술을 외치면 기술이 자동적으로 발동되도록 하는 그 시스템은 어떻게 할 텐가?” “음... 제가 생각할 때, 단기간에 많은 사람이 즐길 수는 있어도 오래 가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게다가 무슨 삼류 무협소설도 아니고... 오히려 현실성이 떨어질 것 같습니다. 서서히 자신의 기술을 갈고 닦는 재미도 상당하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조팀장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곽진호였다. “그래? 음.... 나도 반짝 뜨고 마는 그런 게임보다는 꾸준한 스테티셀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으니까.... 그래.. 조팀장!” “네, 대장님.” “자네 의견을 좀 더 구체적으로 진행시켜봐. 다음 미팅 때, 확실하게 결정하자고. 그리고 다음으로 그... 기술들을 어떻게 정해야 좋을까? 지금... 그 스트리트 파이터하고 태권도, 합기도의 일부 기술만 지원되는데.... 어떻게 해야 좋을까? 의견들 내봐.” 진팀장은 일단 게임 시스템에 대한 것은 조팀장에게 맡기도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 다들 조용하자 진팀장은 곽진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네... 제공하는 기술들은 다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는 것 뿐 아니라 공수도나 거합도 등의 일본 무술과 우슈 등의 중국, 그리고 다른 나라의 카포에라나 토속 무술도 포함시키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 어떻게?” 진팀장은 한숨을 쉬면서 물었다. 말은 좋지만 그 많은 무술들을 다 모델링 하려면 시간과 돈이 엄청나게 들 것이 뻔했다. 제대로 된 모델링을 하려면 그 무술을 제대로 하는 사람을 최소한 열흘 이상은 붙잡아 두어야 했다. “...........” “좀 현실적인 얘기를 하게. 그 많은 것들을 일일이 모델링을 하려면... 휴... 그 방법은 최후의 방법이야. 다른 사람은 의견 없나?” “....... 저....... ” “그래, 변태수 자네가 말해 보게.” 로플팀의 테스트 전담 요원 중 한 명인 변태수가 운을 뗐다. 게임 테스트에는 일가견이 있는 전문가로 테스트의 스케줄과 테스트 항목의 점검 등을 관리하는 전문 테스트 요원이었다. 30대 중반의 나이까지 테스트 요원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런 전문가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몇 나라의 대표적인 무술 한, 두 가지만 제대로 모델링을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태권도나 택견, 일본의 공수도, 중국의 팔극권 정도면 가능할 겁니다.” “음... 그래서..?” “그렇게 한 다음에 그 모델링한 데이터를 기초로 변형시켜서 다른 권법이나 무술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어느 정도 밸런스를 조정해서 무협소설이나 무협영화에서 나오는 그런 화려한 무술이름을 붙이는 겁니다.” “.... 음... 가능할까?” “제가 무술을 조금 합니다. 깊이는 아니지만 관심이 있는 터라 폭넓게 그 이론이나 역사에 대해서는 꽤 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지금에야 많은 무술들이 발전해 있지만 그것들 모두 서로 연관성이 있게 발전된 겁니다. 그런 면에서 제대로 된 무술가에게 도움을 받는다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음.... 내가 그 쪽에 대해서 잘 모르니... 뭐라고 할 수가 없겠군. 변태수, 자네는 무엇을 했나?” “... 저...는... 팔극권을 배웠습니다.” “팔극권? 오... 우리나라에서도 배울 수 있나?” “계승되는 진짜 팔극권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운동용으로는 가능합니다.” “그렇군... 다른 사람 생각은 어떤가?” “태수씨의 의견에 저도 동의합니다. 프로그래머로서 일일이 모델링 하는 것보다 변형시키면서 밸런스를 유지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모든 무술에 장단점이 있겠지만 객관적으로 더 강한 무술이 있지 않을까요? 그럴 경우에 게임에 그 무술을 사용하려면 당연히 밸런스 조정을 해야 합니다. 이왕 그런 일을 해야 한다면 좀 더 효율적으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조진철 팀장은 변태수의 의견에 찬성했다. 그 뒤로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있었지만 쉽게 하나로 모이지 않았다. 결국 진팀장의 말에 미팅은 끝이 났다. “.... 휴... 쉽지 않은 문제구만. 역시 전문가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군. 진호, 자네가 우리에게 조언을 줄 만한 전문가를 한번 알아보게나.” 그 주의 일요일, 진팀장과 곽진호는 변태수와 같이 팔극권의 달인이라고 알려진 사람을 찾아갔다. 변태수가 다니는 무술도장의 사범을 통해 겨우 알아낸 사람으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팔극권의 정통 계승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했다. 일단 먼저 만나보는 게 목적이라서 진팀장과 곽진호 그리고 변태수는 같이 동행을 했다. “이곳입니다.” 변태수가 가리킨 곳은 그리 높지 않은 아담한 담으로 둘러싸인 고풍스런 집이었다. 고개를 빼어들면 안에 있는 정갈한 정원이 다 보일 정도였다. 정원에 깔린 돌판의 위치나 나무들, 연못이 조화를 이루어 보는 이로 하여금 시원한 느낌이 들게 만들었다. 진팀장 일행은 나무로 된 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다. 한참을 기다리니 누군지 묻지도 않고 문이 열렸다. “누구십니까?” 50대 초반의 남자가 문을 열고 물었다. “저... 혹시 유조 선생님 댁입니까?” “맞습니다만, 누구십니까?” “저희는 자소 소프트라는 회사에서 온 사람입니다. 선생님을 꼭 뵈었으면 해서 왔습니다.” “무슨 일이신지?” “말씀 드리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여기서 말씀드리기는 조금 내용이 길어서요..... ” “일단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약간 뒷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문은 다시 닫혔다. 아무래도 자동 잠금장치가 있는 모양이었다. 남자가 안내한 곳은 적지 않은 방이었는데 여러 개의 방석과 찻잔을 봐서 손님을 맞는 곳인 것 같았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남자는 정중하게 말하고는 자리를 떴다. “여기는 정말 기분이 좋게 하네요. 뭔가 청량한 느낌이 드는데요......” 곽진호는 방석에 앉아서는 코를 킁킁거리며 말했다. 진팀장이 느끼기에도 아주 시원한 것이 가득한 방이었다. 조금 있으니 그 남자가 차반을 가지고는 방으로 들어왔다. “일단 차 한 잔씩 마십시오. 조금 쌀쌀한 날씨에 좋을 겁니다.” 남자가 건넨 차를 마시자 입안 가득히 상큼한 향이 가득했다. 남자는 눈을 반쯤 감고 그 향을 음미하며 차를 마셨다. 진팀장은 유조 선생님을 만나야 했지만 앞의 남자의 근엄한 태도에 눌려 말도 꺼내지 못했다. “.... 저를 찾아오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네?” “제가 바로 유조입니다.” “네? 제가 듣기로는 70이 넘으셨다고 들었는데........” “정확히 올해 78입니다.” 진팀장 일행은 다들 놀랐다. 눈앞의 상대는 아무리 나이를 많게 쳐도 50대 후반 정도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78살이라니. “.... 정말.... 유조 선생님이십니까?” “네, 제가 유조입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아... 아.... 죄송합니다. 유조 선생님은 50대 초반으로 밖에 보이지 않아서 실례했습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나이에 맞지 않게 주책 맞지요.” “...... 아주 좋아 보이십니다.” 유조는 대답대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저희들이 찾아온 이유는,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게임 때문입니다.” 유조의 얼굴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말한 진팀장이 무안했다. “... 저... 저희들이 유조 선생님을 찾은 것은 게임 때문입니다만.....” “어떤 게임입니까?” 진팀장은 놀랐다. 자신만 해도 게임을 만들기는 하지만 그리 즐기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자신과 관련된 게임은 잘 알지만 다른 게임에는 별로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했다. 그런데 눈앞의 78살인 노인은 갑자기 찾아와 게임 얘기를 꺼내는 자신을 보고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무슨 게임이냐고까지 물었다. 진팀장은 마음을 다잡으며 말했다. “.... 일종의 대전액션 게임입니다.” “대전액션?” “상대와 무술을 겨루는 게임입니다.” “....... 모델링 때문입니까?” 진팀장 일행은 다시 한번 더 놀랐다. 무술과 관련된 게임이라는 말에 곧바로 나온 모델링이라는 단어. “혹시.... 이런 일을 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적지 않은 경험이 있습니다.” 진팀장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런 경험이 있다면 더 쉽게 말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 저... 저희를 도와 주실 수 있겠습니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 무엇인지...?” “제대로 된 모델링을 할 자신이 있습니까?” “네? 제대로 된 모델링이라뇨?” “이제껏 10년이 넘도록 다섯 번이 넘는 모델링을 했지만 제대로 내 움직임을 모델링 한 곳은 단 한 곳도 없었습니다.” “.............” 진팀장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중국 정부에서 주관하는 공인된 무술의 전승을 위해서 모델링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그야말로 영상으로 찍는 것뿐이었습니다. 가장 최근에 기대를 갖고 한 모델링은 몸에 뭔가를 잔뜩 붙이고 했는데 조금은 나아졌지만 그 형태만 나와 조금 실망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팔극권을 사장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담담한 유조의 말에 진팀장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어떤 정도를 원하는지 모르는 진팀장은 눈만 껌벅껌벅할 뿐이었다. 유조는 말을 계속 이었다. “제가 지니고 있는 것은 정통 팔극권입니다. 그리고 알고 오셨을 테지만 저는 그 정통 팔극권의 유일한 외국인 계승자입니다. 하지만 바뀐 내부 규율인 외국인에게는 전승할 수 없다는 규칙에 따라 한국인 제자를 들일 수도 없었고 이제는 시간도 그리 넉넉지 못한 상태입니다. 팔극권을 그런 모델링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그 제대로 된 형(形)만이라도 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다행히 팔극권 전승회에서도 그런 껍데기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으니까요.” 사실 팔극권 전승회에서 그런 규칙을 세우게 된 이유에는 유조에 대한 견제가 원인이었다. 유조와 맞붙어 이길 수 있을 만한 팔극권 권사가 없자 중국인 전승자들이 팔극권의 중심이 한국으로 옮겨질까 걱정해서 만든 규칙이었다. 진팀장은 유조라는 사람이 왜 무술가로서는 드물게 그런 모델링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진팀장은 자신이 그 요구를 제대로 들어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가상현실을 이용하면 단순한 움직임만을 모델링 하는 것보다 나으리라 생각했다. “..... 뭐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하신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그렇습니까?” “...저... 말씀 낮추셔도 됩니다만....” “그래도 되겠습니까?” “제가 오히려 불편합니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지. 그리고 요즘에 별로 할 일도 없으니 자네를 한번 믿어보도록 하겠네.” “네? 아.... 아... 감사합니다. 어르신.” “그렇게 기뻐할 것 없다네. 단순한 모양이면 국내에 수백 명 정도가 그 팔극권을 할 수 있으니까.......” “아닙니다. 어르신만 하겠습니까?” “이게 자네가 말한 그 가상현실이라는 것인가?” “네, 어르신. 그렇습니다. 어떠십니까?” “정말 신기하군. 이렇게까지 과학이 발전한 것인가?” 유조는 지금 PVR-2 안에 있었다. 제대로 된 모델링을 하기 위해 가상현실로 들어간 유조였다. 진팀장과 테스트 요원들을 놀라게 한 것은 유조의 가상현실 적응력이었다. 처음에 나온 유조의 수치는 테스트 한 사람들 중에서도 바닥을 헤매는 수치였다. 그러다 그 넓은 들판에서 몇 번 움직여보더니 점점 그 수치가 올라갔다. 그 다음에 산꼭대기의 그 공터로 이동해서 한 바퀴 공터를 돌았을 때는 이미 최고 수치인 진성의 테스트 결과를 초월해 버렸다. 진팀장과 테스트 요원들은 혹시 기계 오류가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지만 명백한 사실이었다. 진팀장의 지시로 조진철 프로그램 팀장은 가상현실에서 모델링된 캐릭터 중 비교적 강한 것 중 하나인 진성을 유조와 대결하게 만들었다. “뭔가? 공간을 가르면서 나오는군. 진군, 저게 도대체 무엇인가?” “어르신, 일종의 게임에 나오는 적입니다. 어르신께서 마음대로 상대하셔도 됩니다. 상대는 사람이 아닙니다. 한번 해 보시겠습니까?” “이 나이에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헐헐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유조의 목소리에는 흥분이 넘쳤다. 가상현실 속의 유조는 현실보다 더 활기 있게 보였다. 유조는 천천히 캐릭터 진성을 향해 다가갔다. “꼭 사람과 비슷하게 생겼구만.” “어르신, 시작하겠습니다.” “그래.... 시작하게나.” 곧 캐릭터 진성은 유조를 향해 재빠르게 다가갔고 유조는 가만히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진성은 곧바로 유조의 허리를 향해 태클로 달려들었다. 옆으로 미묘한 발놀림으로 물 흐르듯 피한 유조는 바로 왼쪽 어깨로 진성을 받아버렸다. “털썩” 거의 3미터를 날아간 캐릭터 진성은 충격을 받은 듯 천천히 일어났다. “와... 대단합니다. 진팀장님, 방금 저 어르신의 공격은 간단해 보여도 대단합니다. 진성의 체력을 단번에 반 이상 날려버렸습니다.” 조팀장의 떨리는 목소리는 요람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었다. 듣고 있던 현준은 옆에 앉아 있는 진성의 옆구리를 찌르며 웃었다. 유조는 놀랐다. 가상현실이라는 실제가 아닌 공간이라는 말과 상대가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람에게는 과한 공격을 가했는데 상대는 별다른 충격을 받지 않은 듯 신음소리 하나 없이 일어나는 것에 유조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렸다. 자신이 팔극권의 전승자가 된 후에 제대로 자신의 힘을 다해서 권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팔을 가볍게 떨치며 희미한 미소를 지은 유조는 다가오는 상대를 향해 팔극권 비전의 보법, 조련보(助練步)의 한 변화인 전재노수(佃栽努受)를 써서 순식간에 가상현실 내의 땅을 강하게 회전을 겸해서 박차고 앞으로 뛰어올랐다. 도저히 사람의 동작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그 빠르기는 예상을 초월했다. 캐릭터 진성의 앞으로 빠르게 날아가며 앞으로 나아가는 방향과 타격점을 일치시킬 수 있는 첨격(尖擊)을 펼쳤다. 몸은 옆을 바라본 체 앞으로 한쪽 팔을 뻗어 주먹으로 타격하는데 그 속에 숨은 뜻은 주먹의 타격시 한 점으로 그 충격을 모아서 상대를 쓰러트리는데 있었다. 유조 같은 실력자가 보통의 사람 또는 자신과 같은 고수가 아닌 무술가에게 이 첨격을 사용했다가는 한 번의 공격에 목숨을 끊게 만들 정도로 대단한 공격이었다. “..... 털썩.” 유조의 뻗은 주먹에 닿자마자 캐릭터 진성은 튕겨져 나가듯 뒤로 날아갔다. 5미터가 넘게 날아가다 내동댕이쳐진 진성은 아무런 동작도 하지 못했다. 유조는 자세를 바르게 해서 바로 섰다. “어........ 뭐지?” 유조는 상대 캐릭터가 완전히 쓰러진 것을 보고는 자세를 바로 잡다가 뭔가가 느껴져서 고개를 돌렸다. 분명히 뭔가가 자신을 지켜보는 듯했다. 유조는 감각을 완전히 끌어올렸지만 조금 전 느껴졌던 그 뭔가는 다시 느껴지지 않았다. “.... 내 착각인가? 늙으니 이런 감각이 먼저 고장나는 건가?” 유조는 중얼거리며 입고 있는 옷을 정리했다. 요람 내의 사람들은 그 장면에 말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가상현실이라고는 하지만 순식간에 4미터 정도의 거리를 도약해서 단 한번의 공격으로 강화된 캐릭터를 저리 뒤로 튕겨내고 완전히 끝장내버릴 수 있다니. 특히 조진철, 곽진호의 놀람은 대단했다. 시스템을 잘 알고 있는 둘로서는 가상현실에서 마음대로 적응할 수 있는 유조라면 현실에서도 역시 조금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대단하리라 예상했다. “와...... 정말 끝내준다.” “아....... 저런 동작이 가능하다니....” 현준의 감탄과 진성의 탄식이 이어졌다. “어르신, 괜찮습니까?” “아, 괜찮네. 오랜만에 힘을 써서 조금 근육에 무리가 갈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구만.” “아... 네.... 그건 가상현실이라서 그렇습니다. 아무튼 대단하십니다.” “허허허... 그런가....” “오늘의 테스트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그래? 그러지...” 약간 아쉬운 듯한 목소리의 유조였다. 유조가 PVR-2에서 내려 씻고 나오자 진팀장과 테스트 요원들은 유조를 둘러쌌다. “대단하십니다. 정말 멋있었습니다.” “와.. 영화 같았습니다.” “어르신,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진팀장은 준비한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유조가 자리에 앉자 진팀장 역시 그 옆에 앉았다. “어떠신지요?” “.... 생각 이상이었네. 내게는 정말 즐거운 자극이었네. 그렇게 마음 놓고 대련해 본 적이 언제인지 모르겠군.” “만족하셨다니 다행입니다. 내일은 어르신께서 어르신 자신과 싸울 수 있을 겁니다.” “... 그게 무슨 소린가?” “어르신께서 원하시는 그 모델링에 대한 테스트를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자세한 것은 내일 테스트를 하시면 알게 될 겁니다. 피곤하시지는 않습니까?” “전혀. 오랜만에 속시원하게 대련해서 그런지 오히려 조금 흥분되는데.... 아하하하하...” 유조는 기분이 좋아 크게 웃기까지 했다. 자신이 바라는 것은 좀 더 나은 모델링이었지만 진팀장이 권한 가상현실은 그것을 넘어 이미 극에 이른 자신이 느끼는 그 고독감을 해소해 주었다. 유조는 생각지도 않은 소득에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벌써부터 내일의 그 테스트라는 것이 기다려졌다. “진성아, 정말 대단하지? 그 할아버지.... 연세가 70이 넘으셨다고 하던데... 그 연세에 그런 움직임이 가능하다니.... 정말 대단하지?” “........ 직접 봤는데도 믿을 수가 없을 정도야. 그런데 그 할아버지가 또 다른 테스터인가?” “설마? 그 연세에 계속 하실 수 있겠어? 아마 엄청난 무술가시니까 잠깐 초빙한 거겠지?” “그렇겠지. 그런 분이 테스트에 참여할 정도면... 와... 밀리터리 아트 정말 대단한 게임이 되겠다. 그렇지?” “...... 저 전용 게임기 하나에 얼마 정도 할까?” “나도 꼭 하나 사고 싶다.” 유조가 진팀장과 함께 요람을 나간 지 오래 되었지만 요람 안의 열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모니터에는 유조와 캐릭터 진성과의 대결이 계속 시점을 달리해서 흘러나오고 있었고 사람들은 다른 일은 하지 않고 그 앞에서 그 대결을 보고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서 그 대결에 대해 얘기했고 특히 변태수는 약간의 과장을 보태어 유조에 대한 얘기와 그 공격에 대한 설명을 침을 튀겨가며 말하고 있었다. 진성과 현준도 매일 빠지지 않고 연습하던 문명 온라인의 연습시간이 되었지만 생각도 하지 않고 그 분위기에 묻혀 버렸다. 다음날, 로플팀의 요람 안에는 어제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예전 스키피오, 진성이 처음으로 문명 온라인 테스트 때 이후로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테스트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준비 되었네.” “어르신, 그러면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게나.” 가상현실 속의 유조 앞 공간이 일그러지면서 또 한 사람의 유조가 나타났다. “....... 진군, 이게 뭔가?” 진팀장은 유조의 약간 놀란 음성을 기대했지만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였다. “... 네, 어르신께서 어제 하신 그 대련을 모델링한 것입니다. 직접 대련해 보시면 모델링에 대해 알 수 있으실 겁니다.” “오호.... 그래? 시작하세나.” “네....” 유조는 자신에게 슬금슬금 다가오는 캐릭터 유조를 볼 수 있었다. 유조는 감탄했다. 거의 완벽한 팔극권의 동작이었다. 입신중정(立身中正)이 완벽한 자세였다. 한창 연습할 때 거울을 보며 자신의 자세를 갈고 닦았던 유조로서는 그 자세가 자신임을 알았다. 이제까지의 모델링과는 그 차원이 다름을 느낄 수 있었다. “좋군.” “어... 뭐지? 이건 확실한데?” 유조는 지난번과 비슷하게 누군가가 자신의 근처에서 자신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한번이라면 모르겠지만 유조 자신 정도의 무인이 두 번이나 잘못 알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주위를 빠르게 감각적으로 훑었다. 하지만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유조는 자신의 감각을 의심하지 않았다. 뭔가가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유조 자신이 어제 사람이 아닌 캐릭터를 단번에 보내버렸던 그 첨격을 똑같은 보법인 조련보의 전재노수를 써서 날아왔다. “헉!” 유조는 재빨리 중심을 낮추고 허리를 당기며 옆으로 비껴서 공격범위를 벗어났다. 유조는 너무 놀랐다. 그 공격의 날카로움은 어떻게 설명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평생토록 팔극권을 연마하면서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후, 처음으로 느낀 목숨의 위험이었다. 언제인지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전에 느꼈던 등줄기에 전율이 흘렀다. 자신의 기술로 자신이 자신에게 공격하다니. 유조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휴........ 이건 정말 기대 이상이군....” 제대로 마음을 가다듬은 유조에게 캐릭터 유조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일단 캐릭터 유조의 움직임은 계속 반복적이었고 특정 부분에서만 그 위력을 나타냈다. 그것은 모델링한 동작 자체가 아주 제한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유조는 너무나 흡족했다. 만약 자신이 죽더라도 자신의 팔극권은 이런 곳에서 계속 이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규칙은 자신이 무덤까지 가지고 갈 생각이었으며 자신의 기술은 팔극권과 많은 기술들을 융합시킨 자신이 나름대로 창시한 새로운 무술인 팔극신권의 이름으로 후세에 전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더욱 더 그 모델링의 결과에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자신의 감각에 잡힌 그 이상한 뭔가 때문에 약간 마음이 걸렸다. 테스트를 끝낸 유조는 진팀장과 곽진호, 조진철, 변태수와 함께 회의실로 갔다. “어르신, 어떻습니까?” “기대 이상이네. 정말 흡족하네. 진군, 정말 고맙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고마워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 물어볼 게 있네. 솔직하게 대답해 주게나.” “네, 말씀하십시오.” “지난번 첫 번째 테스트 할 때도 그랬고... 오늘도 역시 그런데... 혹시 그 가상현실 속에서 내가 싸울 때 내 근처에 뭔가 다른 것을 넣거나 하지는 않았나?”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제도 그랬고, 조금 전에도 그랬네. 조금 전에 그 또 다른 내가 공격하기 바로 전에 뭔가가 나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네. 그런데 주위를 아무리 살펴봐도 그런 것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거든. 어제도 마찬가지였네. 혹시 짚이는 게 없나?” “...... 조팀장, 혹시 무슨 일인지 알겠나?” “그럴 리는 없습니다. 아, 어르신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그 가상현실은 컴퓨터로 통제되는 것이라 그런 것이 잘못해서 나타난다고 해도 컴퓨터에 당연히 그 결과가 나와야 됩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징후를 전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음.... 아무튼 조금 이상하네. 진군, 자네가 좀 더 알아봐 주게나. 내 감각에는 틀림없이 뭔가가 있다고 말하거든. 참 그리고, 자네가 내 요구를 들어주었으니 이제 자네가 원하는 것을 말해 보게.” “저... 사실은........” 진팀장은 유조에게 자신이 유조를 찾은 이유를 설명했다. 간단히 게임에 대한 얘기와 중요한 문제인 그 무술의 기술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견을 구하기 위해서 되도록이면 노인인 유조가 알아듣기 쉽도록 설명했다. “음....... 결국 대표적인 몇 가지 무술로 많은 이름난 무술들을 파생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군. 진군, 맞는가?” “맞습니다. 어르신.” “결론부터 얘기하면 그것은 불가능하다네.” “네?” “모든 무술은 각기 영향을 주면서 발전했지만 너무도 다른 점이 많아. 태극권과 팔극권은 그 근본부터가 다르다네. 게다가 또 다른 실전권법인 심의육합권의 경우 팔극권의 진각과는 비슷한 면이 있지만 절대 팔극권의 권리로부터 심의육합권을 이끌어 낼 수는 없다네. 그건 불가능해.” “...... 그렇습니까?” “내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다네. 꼭 게임을 위해서 그런 무술을 완벽하게 모델링 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네?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게임을 통해 태극권이나 팔극권 등을 훈련시키기 위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면 꼭 정확한 태극권의 그 투로와 이치를 따라야 할 필요는 없지 않는가?” “네, 맞습니다. 게임이니까 게임에서만 각기 다른 특징을 가진 무술이면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방법이 있지. 일단 내가 알고 있는 술(術)만 해도 꽤 된다네. 그런 것들을 일단 모델링해서 정리한 후에 그런 것들을 가지고 여러 다른 많은 기술로 변형시킬 수 있다네. 어차피 게임 내에서만 사용할 테니까 적절하게 바꿔주기만 하면 되겠지.” “저.... 저희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저희 중에는 그런 일을 도와줄 사람이 없어서......” “내가 도와주겠네. 그 대신, 저... 저... 기계에 일주일에 두, 세 번 정도는 내가 이용할 수 있게 해 줄 수 있겠나? 가능하겠나?”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었던 진팀장은 즉시 대답했다. “오히려 제가 바라던 일입니다. 감사드립니다, 어르신.” “그런가? 하하하하..” 늦은 밤, 로플팀 팀원들은 모두 퇴근하고 적막한 로플팀의 요람.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요람 안은 완전히 어두웠다. 아무도 없는 요람 안에서 갑자기 항상 켜져 있는 메인 컴퓨터와 연결된 테스트 컴퓨터의 전원이 켜졌다. “위이이잉...” 같이 연결된 모니터들에 전원이 들어오고 컴퓨터로 통제되는 가상현실 시스템이 활성화되었다. 모니터에는 수많은 프로그램 데이터가 보이며 컴퓨터 스스로 데이터를 고치기 시작했다. 다른 모니터에는 활성화된 가성현실 속에 캐릭터 진성과 캐릭터 유조가 서로 대련을 하기 시작했다. 일방적으로 당하던 캐릭터 진성이 점차 캐릭터 유조의 움직임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그와 더불어 다른 모니터의 데이터를 고치는 속도는 더 빨라졌다. 점차 캐릭터 진성의 움직임이 유조의 그것을 닮아갔다. 수십 번의 대련을 더 하자 캐릭터 진성이 캐릭터 유조의 기술, 조련보의 전재노수와 첨격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굉장히 어색한 듯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익숙해졌다. 다시 수십 번의 대결을 하자 캐릭터 진성과 캐릭터 유조는 대등한 대련을 할 수 있었다. 허술했던 캐릭터 진성의 움직임은 더 이상 허점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무술의 고수인 마냥 장중함이 배어 나왔다. 어느 정도 캐릭터 유조의 움직임과 기술을 배우자 캐릭터 진성은 혼자 몇 번을 연습하더니 이윽고 공간을 가르고 사라져 버렸다. 그와 동시에 가상현실 시스템은 다시 다운되었고 켜졌던 컴퓨터와 모니터들도 완전히 침묵에 잠겼다. 아침이 되어 로플팀의 요람 멤버들이 출근했을 때는 이미 모든 시스템은 어제 밤 요람의 마지막 직원이 떠날 때와 완벽하게 같은 상태로 복구되었다. 직원 중 누구도 밤사이의 일을 알 수가 없었다. 11월 1일. 드디어 문명 온라인, 영웅 스키피오의 정식 프로 리그가 시작되었다. 모두 16개 팀이 프로팀 창단을 하고 웨스턴, 이스턴 두 개의 리그로 나누어져 리그를 치르게 되었다. 첫 프로 리그는 한 달 반 동안의 박진감 넘치는 게임을 통해 각 리그에서 상위 네 팀으로 각각 리그 우승을 가리고 마지막으로 리그 우승자끼리 펼치는 월드 시리즈를 통해 최종 프로 리그 우승자를 가리는 방식이었다. LQ 전자나 세계은행, 계룡투신 등 여러 기업들은 그 프로팀의 창단이 이미 예상되었다. 언론의 관심 가운데 리그 운영위원회는 소집되었고 프로 리그 참가팀도 거의 결정이 되었다. 가장 예상을 깨고 프로팀을 창단한 곳은 바로 삼선전자였다. 프로 리그 전체의 메인 스폰서인 삼선전자가 언론이나 다른 기업들이 전혀 모르게 프로팀 창단에 대한 준비를 해 왔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삼선전자가 창단한 프로팀의 멤버 구성이었다. 정성진, 프로 WIS 세계 챔피언. 문명 온라인 이전에 가장 인기가 있었고 아직도 그 유명세가 사라지지 않은 게임이 바로 WIS였다. 그 게임의 전년도 챔피언이 문명 온라인이라는 게임으로 프로 리그에 참여하게 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다시 한번 프로 리그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보이지 않는 삼선전자의 언론 플레이가 있었지만 그 정도 프로 게이머라면 관심이 높은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었다. 문명 온라인, 영웅 스키피오의 프로 리그의 개막식은 삼성동 코엑스 컨벤션홀에서 거행되기로 되어 있었고 그 개막식은 게임 채널에서 생중계하기로 했다. 운영위원회의 공식적인 발족과 리그에 대한 설명과 운영방법 등을 알리는 것 외에도 개막식에는 프로 리그의 첫 게임인 삼선전자와 LQ 전자와의 대결이 예정되어 있었다. 업계 라이벌인 두 기업에서 창단한 프로팀이 개막식에서 맞붙는다는 것에는 여러 의미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서로의 자존심을 위해 상대를 이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드디어 오늘이네. 진성아, 우리도 가 봐야 하나?” “매니저 말로는 당연히 가야 한다고 하던데...” 요즘 아예 로플팀의 요람으로 출근하는 진성과 현준은 아침에 출근해서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요람 안으로 들어와 마시던 두 사람은 오늘 있을 프로 리그 개막식에 대한 얘기를 했다. 게임의 제작사이기에 당연히 참석해야겠지만 참가도 하지 않는 프로 게이머가 갈 필요는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매니저 서재필은 당연히 가야한다고 못 박았다. 진성과 현준은 개막식과 같은 시간에 있을 그 팔극권의 달인 유조의 밀리터리 아트의 테스트를 더 보고 싶었다. 진성과 현준이 매일 로플팀의 요람으로 출근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달인 유조의 테스트가 매일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점점 더 자유로워지는 캐릭터 유조의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별로 무술에 관심이 없었던 진성과 현준 뿐 아니라 요람의 테스트 요원 거의 대부분이 무술을 배우고 싶을 정도로 캐릭터 유조의 동작은 뭔가 달랐다. 그 중, 현준은 시간을 내어 팔극권을 배울까 하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 사랑이 날 떠날 때 내 어깰 두드리며 보낼 줄 알아야 시작도 안다고...” “여보세요? 강진성입니다. 네? 아... 네.... 네.. 곧 내려갈께요.” “매니저?” 현준은 남은 커피를 마저 마시고 종이컵을 구석의 휴지통으로 던지며 말했다. “지금 정문으로 내려오라는데..... 가자.” “그래, 가자. 그런데 너... 그 핸드폰 벨소리 좀 바꿔라. 너무 오래 됐잖아.” “나는 이게 좋아. 내려가자.” “내가 좋은 걸로 보내 줄까?” “됐어. 네 꺼나 바꿔.” “와.... 사람 많은데... 하긴... 프로 리그 개막식이니....” “.... 오늘은 게임도 없는데 뒤에서 앉아 있다가 오면 되겠구나.” 코엑스 컨벤션홀로 온 현준과 진성은 운전기사 겸 보디가드인 이준이 주차하고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확실히 프로 리그를 시작하는 듯한 느낌이 났다. 화려한 포스터들이 눈을 가득 채웠고 모터쇼에서나 나올 법한 미녀 도우미들이 사람들을 안내했다. 확실히 자소 소프트의 출시 기념회와는 차원이 달랐다. 돈 냄새가 풀풀 풍겼다. “자, 들어가자.” 매니저 서재필을 선두로 진성과 현준이 들어가고 운전기사의 역할에서 보디가드로 바뀐 이준이 그 뒤를 따랐다. 컨벤션홀 앞에 이르자 갑자기 카메라 후레시가 여기저기서 터졌다. “... 자소 소프트의 프로 게이머 스키피오와 한신 맞죠?” “이번 프로 리그에는 참석하지 않는 것 같은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 첫 리그에는 절대적으로 유리할 텐데... 혹시 다른 계산이라도 있는 것 아닙니까?” “게이머 스키피오, 한신. 혹시 WIS 세계 챔피언이 나오기 때문에 피한 것은 아닙니까?” 진성과 현준은 당황했지만 매니저 서재필이 앞으로 나서며 담담하게 말했다. “프로 리그의 활성화를 위해서 저희 자소 소프트의 프로 게이머는 첫 프로 리그의 참여를 사양했습니다. 하지만 내년 1월쯤에 시행될 다음 프로 리그부터는 출전을 할 생각입니다. 다른 이유 같은 것은 절대 없습니다.” 할말을 마친 서재필은 취재진을 돌파했고 그 뒤를 진성과 현준이 재빨리 따랐다. 이준은 마지막으로 따라가면서 주위를 살폈다. 입장해서 미리 지정된 좌석에 앉았다. 관계자로 지정된 모양인지 거의 맨 앞이었다. “..... 아무것도 하지 않을 텐데... 뒤로 자리를 배정해 주지. 안 그래? 진성아.” “뒤쪽이 더 나을 것 같은데...” “진성, 현준아. 너희들은 프로다. 프로는 다른 사람에게 어쩔 수 없이 주목받을 수밖에 없다. 이 녀석들이 다 알면서.......” 가만히 이야기만 듣고 있던 서재필이 한마디 했다. 거의 30분 정도 지나자 사회자가 나왔다. 누구인지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문명 온라인, 영웅 스키피오 프로 리그 운영위원회의 총무 김규식입니다. 오랫동안 기다리셨습니다. 지금부터 문명 온라인, 영웅 스키피오 프로 리그의 출범식을 거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때부터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 흘렀다. 운영위원회의 위원들 소개한다며 30분이 넘는 시간을 소비하고 그 운영위원회 회장의 짧지 않은 말과 또 여러 사람들의 역시 짧지 않은 말들... 게다가 축전은 왜 그리도 많은지 시간은 흐르고 또 흘렀다. 그 다음으로 각 프로팀들의 소개와 그 게이머들의 짧은 인사와 포부가 이어졌다. 특히 삼선전자의 프로 게이머 정성진이 소개할 때에는 많은 사람들의 눈과 카메라 후레시가 터졌다. 역시 높은 인기를 알게 해 주었다. 사람들이 지겨워 할 즈음에 시간을 잡아먹은 순서들은 다 끝나고 드디어 업계 라이벌 삼선전자와 LQ 전자 사이의 첫 경기가 벌어질 예정이었다. 문명 온라인 프로 전용 게임기와 대형 프로젝트와 멀티비전들이 설치되었다. 자소 소프트의 게임센터와는 달리 컨벤션홀에서는 일일이 설치를 해야 했다. 미리 준비를 했지만 대략 20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문명 온라인, 영웅 스키피오 삼선전자배 프로 리그의 첫 경기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아나운서 김동수입니다. 해설에는 게임 평론가이자 문명 온라인의 베타 테스터였던 홍진호씨가 수고하시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네, 안녕하십니까?” “첫 경기는 삼선전자와 LQ 전자와의 경기입니다. 삼선전자의 첫 선수는 최영배 선수입니다. 최영배 선수는 나이 21살로 문명 온라인의 베타 테스터 출신입니다. 그 전에도 아마추어 게이머로서 각종 게임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던 선수이기도 합니다. 아직 경기 전적이 없기 때문에 뭐라고 말할 수 없겠죠?”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주 문명이 로마제국이라는 것으로 봐서 정공법의 플레이를 펼치는 선수가 아닐까 예상됩니다.” “네.. 그렇겠군요. 주 문명이 로마제국인 최영배 선수를 맞아 게임을 할 LQ 전자의 선수는 바로 22살의 박수민 선수입니다. 이 선수는 어떤 선수입니까?” “박수민 선수에 대한 기록이 별로 나와 있지 않네요. 하지만 LQ 전자에서 실시한 공개 테스트에서 그 많은 경쟁자들을 뿌리치고 올라온 선수죠. 충분히 기대해 볼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네... 주 문명이 그리스군요. 아, 그 자소 소프트의 게이머 스키피오와 한신의 대결을 연상시키는 데요.” “그렇죠. 로마제국과 그리스 문명과의 대결 중에 명게임으로 꼽히는 것이 바로 스키피오와 한신의 대결이었죠. 오늘은 어떤 게임이 될지 기대가 크네요.” 아나운서 김동수와 해설가 홍진호의 감칠맛 나는 게임 중계는 볼만했다. 자리에 있던 진성과 현준은 자신들의 얘기가 나오자 조금은 쑥스러웠다. “자.. 이제 게임에 들어가게 되네요. 자, 삼선전자 최영배 선수의 로마와 LQ 전자 박수민 선수의 그리스. 누가 먼저 승리의 기쁨을 누릴지... 게임 속으로 들어갑니다.” 프로젝트와 멀티비전이 일제히 켜지며 게임이 시작되었다. 자소 소프트에서 출시한 문명 온라인, 영웅 스키피오의 프로 리그가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 로마제국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로마 전체를 잇는 로마가도였다. 로마의 밀집보병군단이 위력을 발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로마가도를 이용한 민첩한 부대이동이었다. 다른 군대의 이동보다 훨씬 빠른 로마 군단의 이동은 상대의 허를 찌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을 역이용 당했을 때는 한 순간에 수도 로마가 상대 군대에 의해 둘러싸일 수 있는 위험도 존재했다. 삼선전자 최영배 선수는 아주 공격적인 게임 운영을 선보였다. 자원 분배가 군사 쪽이 압도적으로 많아 초반에 승기를 잡지 않으면 도리어 질 수도 있는 운영이었다. 또한 보통의 로마제국과는 달리 기병을 많이 양성했다. 보통 전투에서 기병은 지휘관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전술적으로 아주 중요한 부대였다. 기병은 존재를 보여주기만 해도 상대는 쉽게 행동할 수 없을 정도로 기병은 중요했다. 하지만 실제로 전투를 끝내는 것은 보통 기병이 아니라 보병이었다. 기병의 역할은 적의 지휘체계를 교란시키고 적을 관통해서 적 부대를 분리시키는데 있었다. 최영배 선수는 그런 기병을 대량으로 양성하고 있었다. 박수민 선수는 침착하게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하나로 통합했다. 그런데 그 방법이 게이머 한신이 제일 먼저 사용한 중앙집권이 아니라 도시국가들의 연방을 더욱 강화하는 방법이었다. 게임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박수민 선수의 판단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리스 문명의 경우 발전의 정도가 어떻든 간에 최대의 효과를 위해서는 초기에 완전한 왕국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이 필요했다. 박수민 선수는 그런 알려진 상식을 깨버렸다. “음... 박수민 선수의 게임 운영은 참 독특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홍진호씨.” “네, 보통 사용되는 그리스 문명의 초기 빌더와 처음부터 다르군요. 이 방법이 제대로 먹힌다면 그리스 문명에 대한 또 다른 초기 빌더가 탄생하게 되겠군요. 보통 연방으로 강화할 경우에는 초기의 모습 그대로이기 때문에 문명의 발전과 자원이라는 면에서는 더 나을 겁니다. 그렇다는 말은 아무래도 중, 후반을 노리는 전략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현준아, 저 그리스 문명 플레이 어떠냐?” 자타가 공인하는 그리스 문명의 최고수는 현재 진현준이었다. 진성 역시 그리스 문명에 대해서는 현준에게 한 수가 아닌 두, 세 수 정도는 접어 줄 수밖에 없었다. “음.... 생각중인데.... 해설자 말대로 중, 후반을 노리는 것 같다. 초반에 로마제국의 그 공격을 어떻게 막아내느냐가 문제겠지? 아마 진성 너와 저 게이머가 경기했다면 저 게이머 엄청나게 당했을 거다.” “뭐? 왜?” “너 잘 하는 것 있잖아. 그 얍실한 것...” “아.... 그것..... 연방이면 그럴 수도 있겠지...” 현준이 진성에게 말한 것은 일종의 교란 전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예전에 현준이 진성에게 된통 당한 적이 있었다. 그 때 현준을 침몰시킨 것은 진성이 보낸 인공지능 캐릭터 대(大) 카토였다. 그 생각만 하면 치를 떠는 현준은 계속 그 전략을 얍실하고 약삭빠른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저 최영배 선수의 플레이를 보면 그런 것은 없는 모양인데.... ” “아마 알아도 사용하지 않겠지. 프로 리그 첫 경기인데.. 프로다운 화끈한 경기를 보여주려고 하겠지 아마...” 조금 시간이 지나 로마의 기병 위주의 특이한 군단이 완성되자 최영배 선수는 곧바로 이미 정찰한 그리스 쪽으로 원정군을 일으켰다. 중, 후반을 노린다고 판단되는 박수민 선수는 당연히 초반이 걱정되기 때문에 적이 들어올 만한 곳은 아주 먼 거리부터 정찰병을 쫙 깔아 놓은 상태여서 곧바로 로마의 원정군을 알 수 있었다. 비교적 조용하게 진행되던 게임은 거친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갔다. 두 게이머의 외치는 소리는 군대의 이동 소리와 함께 컨벤션홀에 가득 찼다. 곧 그리스의 각 도시국가에서는 연합 방어군이 한곳으로 모였다. 박수민 선수는 각 부대를 따로 지휘했다. 각 부대를 묶어 커다란 부대로 만들어 그 전체를 하나의 단위로 지휘할 경우에 연합이라는 특징으로 인해 명령 전달이나 사기진작에 문제가 있을 것으로 판단해서 게이머가 직접 각 부대를 지휘했던 것이다. 그 방법은 아주 좋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게이머의 컨트롤이 선행되어야 했다. 단일부대의 경우 더욱 단단해지고 동료의식도 강해지지만 박수민 선수의 경우는 스스로 그런 단일부대가 아닌 연합 부대를 선택했다. 박수민 선수가 택한 방법은 각 부대를 직접 지휘하는 것이었다. “박수민 선수, 특이한 방법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아주 컨트롤에 자신이 있어야만 합니다. 동시에 여러 개의 독립 부대를 지휘하려면 그만큼 정확한 타이밍과 전체를 그릴 줄 알아야 하는 직관련이 있어야 할 겁니다. 실로 많은 게임 연습량이 있었으리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홍진호의 해설이었다. 초반에 승부를 가리려는 로마군은 지형에 익숙하지 못했지만 시간에 쫓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빠른 행군 중에도 기병을 최대한 이용하여 매복이나 배후가 당하지 않도록 만전을 기했다. 드디어 로마군과 그리스군은 넓은 평원에서 서로 대치할 수 있었다. 초반부터 준비한 로마군이 그 장비나 병력에 있어서 우세에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군은 꼭 이기지 않더라도 지지만 않으면 그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어서 더 여유가 넘쳤다. 여차하면 후퇴해서 수성전을 펼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진성은 평원에 진을 친 두 게이머의 게임 운영은 일종의 프로 리그 첫 게임이라는 이유로 좀 더 화려하게 보이기 위한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군대의 컨트롤을 지켜보니 비록 병력이나 군대 자체의 능력은 로마군이 우세하지만 전체적인 게임 운영이나 멀리 내다보는 시야가 뛰어난 박수민 선수가 전투에는 져도 전쟁에서는 이기리라고 예상했다. “매니저, 저 먼저 회사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더 이상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이 정도면 제작사의 프로 게이머로서 할 만큼은 한 것 같은데요..” “.... 나중에 대전하게 될 상대일 텐데.. 봐 두는 게 좋지 않을까?” “지금 실력이 그 때도 도움이 된다면 봐도 되겠죠. 저 먼저 가겠습니다.” 지금 보인 실력이 두 달 뒤에도 그대로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었다. 진성은 일어섰다. “현준아, 너는 있을 거냐?” “아... 같이 가자.” “...... 같이 가자. 어차피 너희 두 녀석이 없으면 우리도 있을 필요가 없으니까. 게다가 게임 플레이는 다른 곳에서도 구할 수 있으니까. 가자. 이준씨, 가죠.” 서재필의 결정에 진성, 현준, 이준이 일어나 밖으로 조용히 나갔다. 다행히 다른 사람들은 게임 화면에 집중하고 있어서 진성 일행이 나가는 것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진성과 현준의 마음은 이미 콩밭, 로플팀의 요람으로 가 있었다. 어쩌면 벌써 테스트가 끝났을 지도 모르지만 캐릭터 유조의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동작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았다. “진성아, 나 결심했다. 팔극권 배우기로 마음 먹었다.” “네.... 네가? 너 예전에 검도 한다고 했다가 한 달도 못 갔잖아.....” “...... 진성아, 그런 것은 기억 안 해도 된다. 별 걸 다 기억하네....” “................ 이번에는 한 달을 넘길 수 있을까?” “... 그래서 말인데... 진성아, 나와 같이 하자. 너와 같이 하면 한달은 넘기지 않을까?” “............................ 나는 싫다. 지금도 건강한데.... 뭐...” “너도 그 유조 할아버지처럼 움직이고 싶지 않냐? 그런 분위기, 전혀 강하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엄청난 그 강함... 그런 몸을 갖고 싶지 않냐?” “.... 그런 움직임이 한, 두 달 배운다고 된다면 나도 한다. 수십 년 해도 될까 말까일 텐데.... 난 포기다. 안 될 것 같은 것은 아예 하지 않는 게 낫다.” “............. 너.. 몸도 단련할 겸 그냥 운동으로 같이 하면 안 되겠냐?” “별 생각 없다니까. 하고 싶으면 혼자서 해. 괜한 사람 끌어들이지 말고.” “그래? 그렇단 말이지.” 현준은 끝까지 하기 싫다면서 팔베개하고 뒤로 누워버린 진성을 바라보았다. 진성과 현준이 로플팀의 요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테스트는 끝나고 달인 유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약간 실망했지만 남아 있을 그 테스트 화면을 보고 싶어 조진철 팀장에게로 다가갔다. “저... 오늘 테스트한 화면 볼 수 없을까요?” “진성이로구나. 오늘 테스트? 아, 잠깐만 기다려라. 지금 좀 확인해 볼 게 있거든..” 뒤로 잠깐 고개만 돌렸던 조진철은 기다리라는 말만 하고는 뭔가는 찾는 듯했다. 한참을 정신없이 하더니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분명... 그런 것은 없는데.... 왜 그럴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 진성은 조진철의 그리 크지 않은 중얼거림을 들을 수 있었다. 무슨 일인가 궁금했다. “문제라고 하기는 조금 그렇고.... 유조 어르신께서 테스트 하면서 처음과는 달리 상대 캐릭터가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가끔 받는다고 말씀하셔서 조금 찾아보고 있다. 그리고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 같다고 해서 확인했는데 그런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아. 그 정도의 어르신이면 절대 빈말은 하시지 않을 텐데.... 뭔가 이상이라도 있는 건가?” “네? 살아 움직인다구요?” “뭐 내가 보기에는 잘 모르겠지만 유조 어르신께서 하신 말씀이니....” “.... 그럴 수도 있나요?” “불가능하지. 꼭 그렇지 않더라도 어르신이 느낀 그 뭔가가 실제로 있다면 무슨 문제를 일으킬 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조사 해 봐야지. 아, 저 쪽 모니터에 그 화면 보여줄 테니까 저쪽으로 가봐.” 조진철은 한 쪽의 모니터에 그 테스트 화면을 보여주었다. “어...... 봉을 들고 계시네요?” 가만히 보던 현준은 조진철 팀장에게 물었다. 이제까지는 맨손이었는데 오늘은 봉을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어르신은 거의 대부분의 병기는 다 사용할 수 있으신 모양이야. 아주 자연스럽게 몇 번 다뤄 보시더니 아주 자유자재로 사용하시던데... 당분간은 저런 무기를 가지고서 그 무기에 맞는 동작을 하실 것 같아. 정말 대단하지?” “와....” 봉을 들고 마치 춤을 추는 듯한 동작과 부드럽게 이어져 나가다가 갑자기 끊어서 공격하는 움직임이 절묘하게 조화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제 한 열흘만 있으면 대강의 기초 동작들은 모델링이 끝나거든. 그 다음에는.... 기다리던 무술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너희들도 한번 그 이름 생각해 봐라. 봐서 마음에 들면 내가 무술 이름으로 쓸 테니까. 알겠지?” 진성과 현준은 조팀장의 말은 듣지도 않고 모니터 속에서 나타난 캐릭터로 유조와 싸우고 있는 유조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같이 팔극권을 배우라구요?” 진팀장에게로 불려간 진성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 내밀 듯 던지는 진팀장의 말에 놀랐다. 뜬금없이 갑자기 팔극권을 배우라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요즘 현준이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거의 움직이지 않잖아. 요람 속에서 계속 앉아 있던가 아니면 그냥 왔다 갔다 할 뿐이잖아. 지난번에 그 사고도 그렇고 평소에 좀 더 몸을 건강하게 해 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게다가 올해가 지나면 바빠서 많은 시간을 낼 수도 없을 테니까....” “.... 그런데... 아저씨, 하필이면 팔극권을.... 팔극권을 배우려면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릴텐데요....” “그것은 걱정하지 마라. 두 달 정도 기본만 배우면 나머지는 내가 해결해 주지. 하하하하...” “..........” “믿지 못하다 본데.... 팔극권이라면 걱정 안 해도 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팔극권에 정통하신 분이 계시는데... 사실, 그 때쯤이면 우리가 만든 가상현실도 더욱 개선될 테고 아마 팔극권은 모델링이 끝났을 거다. 그러면 도장에 가지 않더라도 테스트 하면서 팔극권 수련도 할 수 있겠지. 물론 가상현실에서 배워서 현실에서도 연습을 해야겠지만... ” 진성은 이제야 진팀장의 의도를 알았다. 건강과 테스트를 한꺼번에 잡으려는 의도였다. 계속되는 강행군 속에서 개발 팀원들의 건강도 유지하고 가상현실을 통해서 팔극권을 배웠을 때의 그 수준을 알게 되면 가상현실의 또 다른 효용가치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마도 요람 내의 모든 사람에게 팔극권을 배우라는 이야기를 했으리라 추측했다. 팀장실 밖으로 나온 진성은 요람으로 직행했다. “.... 저 조팀장님, 혹시 팔극권 배우십니까?” “어, 어떻게 알았냐? 대장님이 한번 해 보라고 하시던데.... 생각해보니 건강에도 좋을 듯 하고... 혼자서도 재미있을 것 같아서 한다고 했는데... 왜 그러냐?” “........ 요람 멤버들 모두 다 같이 팔극권을 배우나요?” “아니... 그것은 모르겠는데.......... 잠깐만... 이봐들... 자네들 모두 팔극권 배울 생각이 있나?” “네.... 변태수씨와 대장님이 적극 권하던데요......” 주위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팔극권을 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진성은 자신의 예측이 틀리지 않음을 알았다. “휴.... 빠져나갈 구멍이 없겠군.” 진성 자신도 팔극권을 배워야 할 운명임을 직감했다. 다음날, 아침에 출근한 뒤에 평소대로 로플팀의 요람으로 들어와 조팀장에게 말해 특별히 받은 캐릭터 유조의 영상을 자기 자리에서 보고 있던 진성은 호들갑을 떨면서 자신에게 달려온 현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진성아, 소식 들었냐?” “무슨 소식?” 조금은 퉁명한 진성의 목소리였다. “그 어제 있었던 그 프로 리그 첫 경기 말이야...” “아, 삼선전자와 LQ 전자? 누가 이겼대?” “삼선전자가 2:1 로 이겼대. 그런데 그게 문제가 아니야.” “그럼 뭐가 문제야...?” “그 있잖아.... 괌에서 만났던 그 탤런트의 오빠라는 사람...” “정성진? WIS 세계 챔피언?” “그 사람이 어제 플레이한 문명이 바로 아틀란티스래....” “그래? 실력이 좋은 모양이지. 프로 게임에서 아틀란티스는 사용하기 쉽지 않을 텐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니까. 그 사람이 어제 아틀란티스로 게임 하면서 옛날 베타 테스터들을 통해서 공개된 너와 베타 테스터와의 경기를 재연했다니까.”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옛날에 아틀란티스로 해서 그 비공정과 투척 폭탄 만든 적 있지? 그것과 정말 비슷하게 게임을 끝냈다니까. 그것도 프로 선수를 상대로...” “와... 대단하네. 그런데 그게 뭐?” “.... 게임이 끝난 뒤에 그 정성진이라는 사람이 기자들에게 뭐라고 선언한지 알아?” “.........” “자신이 프로 첫 리그에서 삼선전자를 우승시키고 자신은 리그 MVP가 된 후에 자소 소프트의 게이머 스키피오에게 도전하겠다고 한 거야. 그리고 첫 게임은 그것을 하기 위한 뜻으로 연출했다는 거야. 그 어려운 아틀란티스를 .... 그것도 일부러 연출을 했다는 거야... 대단하지 않냐? 그리고 너한테 도전하겠다니........” 진성은 조금 놀랐다. 출전도 하지 않은 자신을 상대로 도전하겠다니... 충분히 이슈가 될만한 내용이었지만 일부러 연출했다는 말에 얼굴을 찌푸렸다. “..... 대단하신 양반이군. 그런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어제 그 정성진이라는 사람과 대전했던 프로 게이머는 지금쯤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겠군....” 싸늘한 진성의 목소리였다. 진성은 뭔가를 과시하기 위해 상대를 이용한 정성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정당당하게 이겨서 그런 얘기를 하더라도 충분히 기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었을 텐데.... 프로 첫 게임에서 그런 연출된 경기로 치욕을 받은 상대를 생각하니 정성진이라는 만나 보지 않은 상대에 대한 인상이 좋을 수가 없었다. 진성의 작은 중얼거림을 듣지 못한 현준은 걱정스레 말했다. “진성아, 우리도 조금씩은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몰랐으면 모르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우리를 의식하고 있으니 우리도 조금은.....” “현준아, 내가 그 아틀란티스로 게임을 한 지는 벌써 오래야. 그 때의 실력이 지금 그대로라고 봤다가는 큰 코 다치지. 물론 상대도 그런 것을 알겠지만 너와 나의 실력이면 아직 다른 사람들이 따라오기에는 차이가 있다고. 그리고 기분 나쁘게 듣지 마. 그 정성진이라는 사람이 리그 MVP가 되어 내게 도전한다고 해서 내가 받아줄 생각은 절대 없어. 그 때는 프로 게이머 한신이 그 콧대 높은 정성진이라는 녀석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줄 거야.” “뭐? 내가?” “내가 보장하지. 정성진이라는 녀석과 네가 붙으면 열에 일곱, 여덟은 네가 이겨.”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알아?” “.... 사실 어제 밤에 인터넷을 뒤져 그 정성진이라는 녀석의 게임을 봤거든. 확실히 잘하긴 해도 네 플레이에 말리면 서서히 침몰할 거야. 넌 어느새 젖어서 삼켜버리는 물이거든, 아니 바다야.” “.... 그럴까?” “걱정하지마. 그 때 쯤에는 우리도 당연히 연습하고 있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지금도 매일 한 게임 정도는 계속 하고 있잖아.” “그래도.....” “왜 매니저가 우리가 제대로 연습하지 않아도 가만 두는 줄 알아? 아직은 그 실력차가 많이 벌어져 있어서야. 뭐, 조금 있으면 아마 연습하라고 압력이 들어오겠지만..... 그런 것은 나중에 걱정해도 된다고...... 아, 그리고 나 팔극권 배우기로 했다.” “팔극권? 안 배운다며?” “네 아버지가 배워야 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잖아. 오늘 오후부터 시작한다고 하던데... 그리고 로플팀의 요람 멤버들은 다 팔극권을 하기로 했다니까 아마 심심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래? 와... 다행이다. 모르는 사람보다는 아는 사람이 많으면 좋지..” 점심시간이 지나고 로플팀의 요람 멤버들은 대거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진성과 현준이 끼어 있었고 진팀장마저 뒤따랐다. 사람들이 간 곳은 지하의 게임센터였다. 게임 센터의 넓은 대기실을 도장처럼 꾸민 것이다. 바로 진팀장의 아이디어였다. 많은 사람이 회사의 업무시간에 회사를 떠나는 것은 모양새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바로 아직은 이용하지 않는 게임 센터의 대기실이었다. “... 생각보다 괜찮네.” 가벼운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진팀장이 약간은 부드러운 도장 바닥을 밟아 보면서 얘기했다. “대장님, 누가 오십니까?” 곽진호였다. 자신도 모르게 이런 준비를 다 마친 진팀장에게 누가 팔극권을 가르칠지 궁금해서 물었다. 혹시 그 유조 어르신이 직접 가르치지 않을까 조금은 기대하기도 했다. “... 조금만 기다려..” 사람들이 모두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도장 안으로 들어왔을 무렵 앞쪽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들어왔다. 들어온 사람은 유조와 또 다른 사람 하나였다.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사람으로 유조와는 달리 강인한 느낌이 풍겼다. 진팀장이 앞으로 나가 유조에게로 다가갔다. “어르신, 이제 오셨습니까?” “내가 조금 늦지는 않았나 모르겠군.” “아닙니다, 어르신.” “이 사람이 바로 내가 소개하는 사람일세.” “진민수입니다.” “최철훈이라고 합니다.” “최군은 팔극권과 심의육합권의 고수라네.” “선생님도... 제가 고수라니요.. 그저 형(形)만 알고 있을 뿐이지요.” “진군, 최군은 국내에서 알아주는 무술가라네. 아마 기초는 아주 잘 잡아 줄거야. 뭐, 예전의 그 전승대로 가르치면 이 중에서 한 명이라도 제대로 따라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요즘은 그래도 일반인을 위해 격하게 하지는 않으니까.. 최군 부탁하네.” “걱정마십시오. 선생님.” “진군, 나는 먼저 가네.” “네, 살펴 가십시오, 어르신.” 유조가 나가자 진팀장과 최철훈은 조금 더 얘기한 후에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이 분은 유조 어르신께서 소개시켜준 분으로 팔극권과 심의육합권의 달인입니다.” “달인이라뇨... 그저 조금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최철훈이라고 합니다. 유조 어르신의 소개로 오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두 달간 팔극권의 기본 투로를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짝짝짝..” 간단하게 인사를 마친 최철훈은 사람들에게 줄을 바로 서라고 한 뒤에 천천히 몸을 푸는 동작부터 가르쳤다. 역시 오랫동안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뻣뻣한 곳이 많았다. 최철훈은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고 천천히, 천천히 사람들을 편하게 가르쳤다. 이와 비슷한 경험이 많았기에 최철훈은 친절하게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세심하게 대답을 했다. “얼마 정도 연습을 해야지 유조 어르신과 비슷한 그 움직임을 보일 수 있나요?” 요람 멤버 중 한 사람이 던진 질문에 최철훈은 어떻게 대답할까 걱정했다. “예? 아... 음... 제 나이가 지금 38입니다. 거의 30년 정도 무술을 했습니다. 팔극권은 27년을 했고 심의육합권은 20년 정도를 했습니다. 그런데도 유조 어르신의 그 움직임은 아직 꿈도 꾸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제가 죽기 전에 유조 어르신과 손을 섞을 만한 실력이 될지도 의문입니다. 답변이 되었습니까?” “네?..... 와....” 사람들은 유조 어르신의 그 실력이 자신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았다. 국내에서 알아주는 무술가의 30년 수련에 비하면 자신들이 한, 두 달 정도 하는 것은 그야말로 건강체조 밖에 되지 않음을 알았다. “..... 두 달 정도 해서는 별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팔극권의 끝을 보겠다는 생각을 하시면.. 당연히 불가능하지요. 하지만 팔극권에 내재된 그 이치를 깨닫고 그것을 몸으로 행하시면 또 다른 세계를 볼 수 있을 겁니다. 아, 그런 눈 하지 마세요. 저도 유조 어르신께 들은 얘기니까요.” “......와...” “자, 감탄은 그만하고 저를 따라해 보십시오. 이것이 팔극권의 가장 기본적인 투로인 팔극본결(八極本訣)입니다.” 원래 팔극권을 제대로 수련하려면 마보(馬步)를 중심으로 일단 제대로 서는 법을 배워야 했다. 하지만 그 수련방법이 워낙 힘들어 운동 삼아 익히는 사람들을 위해서 대중적으로 만들어진 투로가 바로 팔극본결이었다. 팔극권의 비전 권보에는 당연히 이런 팔극본결이 존재하지 않았다. 팔극본결을 유조와 같은 달인이 펼친다면 그 위력은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보통 사람에게는 건강체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최철훈의 시범에 따라 도장에 모인 사람들이 어설프지만 열심히 땀까지 흘려가며 따라했다. 산을 흔들 수는 있어도 팔극권사를 흔들기는 불가능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팔극권의 동작은 안정, 그 자체였다. 동작과 동작이 연결되는 가운데에서도 전혀 흐트러짐이 없고 그 균형이 튼튼해 보였다. “이리로 나오십시오.” 앞에 있던 진성은 갑자기 최철훈이 나오라는 소리에 잠깐 놀랐다가 앞으로 나갔다. “여러분이 하고 있는 그 동작에 담긴 뜻을 잠깐 보여 드리겠습니다. 저,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강진성입니다. 사범님.” “하하하하.. 오랜만에 사범이라는 소리를 듣네요. 지금부터 제가 팔극본결을 펼칠 때니까 언제라도 좋으니 저를 밀어 보세요. 아니, 발로 차도 좋고 몸으로 부딪쳐도 좋으니 저를 중심을 잃어 넘어지게 만든다고 생각하세요.” 최철훈은 곧 팔극본결을 펼치기 시작했다. 진성은 옆에 있다가 몸이 앞으로 이동했다가 옆으로 무게 중심이 바뀌는 동작으로 연결되는 그 순간에 두 팔에 힘을 줘서는 최철훈의 뒤에서 밀어버렸다. “어.....” 분명히 움직인 사람인데 미는 순간 느낌이 벽을 미는 듯했다. 진성은 곧 다시 지켜보다 또 기회를 봐 몸으로 부딪쳤다. “어... 이...이런..” 이번에는 벽과 같은 단단함에 약간의 반탄력이 느껴졌다. 정말 신기했다. 분명히 움직이고 있는데, 쉽게 넘어지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요동도 하지 않았다. 진성은 축이 되는 다리 아래 부분을 움직이는 순간에 발로 걷어찼다. “아악!” 발로 찬 진성이 보기에 순식간에 천장과 바닥이 뒤바꿨다. 최철훈은 동작은 멈추고는 떨어지기 직전의 진성을 낚아챘다. “휴..... 휴.....” 진성은 너무 놀랐다. 자신이 발을 찼는데 어느 순간에 자신의 몸이 공중에서 뒤집혀 있다니.. 다행히 최철훈이 잡아 주었기 때문에 망정이지 큰일 날 뻔 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진성은 최철훈을 보며 말했다. “... 어떻게 된 것이지요? 뭔가 튕긴 것 같은데....” 최철훈은 진성을 보며 웃으며 돌아서서 멍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조금 전에 보신 것이 여러분과 같이 해 본 팔극본결입니다. 아주 대단하지요? 팔극권은 수련에 따라서 그 위력이 달라집니다. 여러분이 당장 이런 동작을 소화할 수는 없지만 이 움직임 자체가 단순한 건강체조라고는 생각하지 말아 주십시오. 단순해 보이는 동작에도 깊은 뜻이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수고해 주신 우리 강진성군에게 박수 보내주십시오.” 최철훈이 말하며 손으로 진성을 가리키자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진성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삼선전자가 리그 선두지?” “쌍룡은행에게 한번 진 것 빼고는 전승이니까....” 진성과 현준은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문명 온라인 프로 리그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아직 정해진 게임의 70% 정도밖에 소화를 하지 못했지만 대략적인 결과는 나오고 있었다. 삼선전자를 제외하면 절대 강자도 절대 약자도 없었다. 다들 물리고 물리는 가운데 삼선전자만이 쌍룡은행에 한번 진 것을 제외하면 한번도 지지 않아 리그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 삼선전자.. 말 뿐이 아니었구나.” 삼선전자는 리그에 참여하면서 우승을 장담했다. 그 확신은 정성진이라는 탁월한 프로 게이머가 가세하면서 더욱 힘을 받았다. 그 결과가 시간이 지나면서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진성아, 왜 매니저가 연습하라는 소리를 하지 않지?”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냐? 그래도 하루에 두 게임은 하니까 그런 걸까?” 현준의 바짝 달아오른 행동에 진성과 현준은 하루에 두 게임씩 대결을 했다. 진성의 승률이 60% 정도로 높기는 하지만 연습에 대한 열의는 현준이 더 높았다. 진성은 문명 온라인보다도 최근에 허락을 받은 밀리터리 아트의 테스트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현준에게 예전보다 많이 졌지만 현준은 알고 있었다. 진짜 진성이 마음먹고 제대로 집중해서 하면 자신은 아직 진성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오늘이 바로.. 바로 그 날이다.” “진성아, 너 정말 기다렸구나. 네가 이렇게 흥분한 모습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그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 그것, 생각만 해도 오싹한걸.” “그래? 나는 몇 번 해 보니까 그런대로 적응이 되던데?” 문명 온라인팀의 요람에서 현준과의 연습 게임을 끝낸 진성은 커피 한잔 마시고는 곧바로 로플팀의 요람으로 달려갔다. 로플팀의 사무실을 거쳐 요람으로 들어온 진성은 테스트를 보고 있던 진팀장을 만날 수 있었다. “오늘은 가능하겠지요. 팀장님?” “..... 그래. 어디 한번 테스트 해 보자.” 진팀장은 사고 후에 회복된 진성이 하루가 멀다하고 자신을 찾아와 테스트를 할 수 있게 해달라는 집요한 부탁에 다음 달에 들어준다는 말을 무의식중에 해버리고 말았다. 진성은 그런 진팀장의 약속을 잊지 않고 찾아온 것이었다. 사실 진성의 테스트는 로플팀으로서는 당연히 필요했다. 보통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달인 유조를 제외하고 평범한 사람 중에서는 진성의 적응력이 단연 압권이었다. 심지어 팔극권 사범인 최철훈마저도 진성의 적응력을 능가하지 못했다. 보통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할 게임이기 때문에 진성의 데이터는 상당히 가치가 있었다. 진팀장 개인적으로 별로 달갑지 않았지만 그 후 수백 번의 테스트에도 아무 이상이 없었기 때문에 반대할 이유도 없었다. 진팀장은 요람 멤버들에게 지시했고 오래지 않아 모든 준비는 완료되었다. “진성아, 너무 무리하지 마라.” 아직 걱정스러운 듯 진팀장은 진성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당부했다. “걱정마세요.” 진성은 능숙하게 PVR-2에 탑승했다. 자신이 한 번 해 봤고 워낙 다른 사람들의 테스트를 많이 봤기 때문에 진성에게는 아주 익숙했다. 헬멧을 쓰자 그 구슬 같은 것이 내부를 가득 채웠다. 곧 시야가 어두워졌다가 밝아졌다. “아...!” 옛날과는 확실히 달라졌다. 바람 자체가 아주 자연스러워졌다. 풀들의 움직임도 그 바람에 리듬을 맞추는 듯 느껴졌다. 모니터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것을 진성은 볼 수 있었다. 손을 들어 바람을 느꼈다. 손끝에 스치는 그 기묘한 감촉. 진성은 마음 속 깊이 탄복했다. “정말... 이..이런.. 정말, 정말로 대단해요!” “진성아, 많이 변했지?” “조팀장님? 네, 정말 자연스러운데요.” “예전에 네가 세미나에서 발표한 것, 그것을 조금 바꿔서 적용했거든. 계속 조금씩 더 자연스러워질거다.” “네? 그러면 스스로 학습하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인가요?” “간단하게 얘기하면 그렇지? 그 사고 일어나고 나서 어느 정도 안정이 되고 난 뒤에 테스트를 겸해서 모듈로 설치했는데 아주 결과가 좋아. 특히 그 배경을 만드는데 프로그래머가 일이 거의 반 정도는 줄어들었다니까.” “아, 그렇군요.” “아직 놀라기에는 이르다고. 조금만 기다려라.” 진성은 이번에는 또 무엇일까 기대했다. 그 순간에 진성이 있던 공간이 완전히 바뀌었다. 옛날에는 높은 산의 봉우리였는데 바뀐 공간은 전혀 달랐다. 하지만 익숙했다. “아... 아니, 여기는.. ” “맞다. 거기다, 거기. 어때? 진짜 같지?” “와.. 정말 대단한데요. 이 감촉까지.” 진성은 정말 탄복했다. 바뀐 공간은 건물 지하 게임센터의 대기실로 만든 도장이었다. 진성은 마치 자신이 그 도장에 있는 것처럼 이곳저곳으로 왔다 갔다 하다가 문을 열었다. “아... ” 대기실 밖의 광경까지 완전히 같았다. 게임 센터를 통째로 옮겨온 것 같았다. “설마..” 진성은 빨리 게임 센터 밖으로 나갔다. “이..이런.. 엘리베이터까지...” “진성아, 놀라지 마라. 자소 소프트의 빌딩은 거의 완벽하게 거기다 재현했으니까. 심지어 이 곳인 요람도 거기에 만들어 놓았다.” “어.. 어떻게.. 정말 대단하네요.” “네가 그런 말을 해서는 곤란한데. 네 아이디어를 이용했기 때문에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이런 배경을 만들 수가 있었거든. 아마 네 이름으로 그 아이디어가 지금 특허 출원 중 일거다. 역시 대장님이라니까, 너한테 말 한마디도 없이 일을 처리하시다니.” “네?” 진성은 너무 놀랐다. 자신이 소 뒷걸음치다가 생각한 아이디어로 이런 엄청난 배경을 만들 수 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진성은 다시 도장으로 돌아오면서 바닥의 느낌과 놓여 있는 의자를 만졌다. 정말 의자가 있었다. 보이는 것에 비해 약간은 투박했지만 확실하게 그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거의 완벽한 가상현실이었다. “조팀장님, 정말.. 정말 가상현실이네요.” “가상현실은 가상현실이지.. 하지만 그 정도의 공간을 만드는 것이 현재 한계다. 그 이상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조금 더 컴퓨팅 기술이 발전하면 모르겠지만 여러 가지 기술의 한계로 우리의 가상현실은 아쉽지만 더 커지지는 못할 것 같다.” “네.....” 진성은 조팀장이 말하는 그 한계라는 것을 대강은 이해했다. 이 정도의 공간을 리얼하게 만드는 것도 대단한 것이다. 진성은 다시 도장으로 돌아왔다. 도장으로 들어온 진성은 비록 가상현실이지만 도장으로 왔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팔극본결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미 이주일이 넘도록 배운 팔극본결이라 그 모양만큼은 처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체계가 잡혔다. 특히 최철훈 사범의 성격상 젊은 사람들에게는 좀 더 확실한 것을 요구했기에 진성과 현준은 같이 배운 사람들 중에서도 항상 제일 앞에서, 제일 열심히 해야만 했다. 진성은 몸에 베인 팔극본결을 천천히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어.. 이게 뭐지?” 밖에서 모니터로 상황을 보고 있던 조팀장은 공간이 약간 이그러지는 듯한 광경에 놀랐다. 옆에서 보고 있던 진팀장 역시 그것을 보고는 곽진호를 불렀다. “진호, 이것 좀 보게.” “네? 아... 조팀장, 이게 무엇인가?” “아...?” 진팀장은 눈앞에 나타난 영상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가상현실이라고는 하지만 그 속에 접속한 사람은 현실에서의 사람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수백 번에 걸친 테스트로 이미 어느 정도 현실과 비슷하게 조율이 된 가상현실이었다. 현실에 적용되는 물리 법칙이 가상현실에서도 거의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하지만 보이는 현상은 그런 사실을 무시했다. 진성이 팔극본결을 펼치자 처음에는 별다른 것이 없었다. 하지만 곧 주변의 공간이 서서히 뿌옇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냥 흐려지는 것이 아니라 진성의 동작에 따라서 공간이 뒤로 밀리기도 했다가 앞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눈을 감은 진성은 아마도 그런 현상을 모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진성아, 진성아!” 진팀장은 급히 진성이를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예전의 그 사고가 떠오른 사람들은 일제히 자신이 맡은 부분들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진성이의 몸 상태는 정상이었다. 또한 나머지 부분들도 정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불러도 대답이 없는 진성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가상현실 내의 진성이 점차 바닥에서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투명한 바닥 위에서 팔극본결을 펼치는 듯했다. 떠오른 채 여전히 중심이 튼튼한 팔극권의 동작을 펼치는 모습에 다들 멍하니 쳐다보았다. 진팀장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서 곽진호에게 눈치를 줬다. 접속한 진성의 몸 상태에 이상이 생기면 곧바로 접속을 끊기 위해서였다. “이...이..이런..” 진성의 몸동작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팔극본결이 아니라 팔극진결(八極珍訣)을 비롯한 유조가 모델링한 팔극신권(八極新拳)의 동작들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놀란 진팀장은 우두커니 서서 화려하면서도 장중한 진성의 동작에 눈을 떼지 못했다. “.... 유조 어르신?” 그야말로 달인 유조의 동작이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달인 유조의 캐릭터가 진성에게 흡수된 듯한 모습에 진팀장을 비롯한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진성아! 강진성!” 조진철 팀장은 있는 힘을 다해서 진성이를 불렀다. 그 순간 진성의 동작을 따라서 움직이는 공간은 순식간에 원상태로 돌아왔고 진성은 바닥으로 서서히 내려왔다. 바닥에 닿자 곧 진성의 눈이 떠졌다. 갑작스런 변화에 모니터하던 사람들은 일순간 침묵에 빠졌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듯한 고요함이었다. “아, 상쾌하다! 팔극본결을 한 뒤에 이렇게 상쾌할 줄이야. 몸이 날아갈 것 같다.” 진성의 쾌활한 목소리가 그 고요함을 깨뜨리고 요람을 울렸다. 상쾌한 아침의 활기찬 목소리였다. 순간 진팀장과 사람들은 패닉상태에 빠졌다. “조팀장님. 저 어땠습니까? 이제 팔극본결이 폼 나지 않습니까?” “.......” “조팀장님? 조팀장님?” “.....” “어. 진팀장님? 곽팀장님? 아무도 안 계시나요?” “.......” “설마 식사하러 가신 것은 아닐 텐데. 도대체 다 어디 간 거지?” “지...진성아, 너 괜찮냐?” 진팀장이 겨우 말문을 열 수 있었다. “진팀장님? 어디 가셨어요?” “.... 너 몸은 괜찮냐? 어디 이상한 곳은 없냐?” 급한 목소리로 몸 상태를 묻는 진팀장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지는 진성이었다. “아주 좋은데요. 이제 팔극본결이 제대로 몸에 배인 모양인데요..” “너... 조금 전에 뭘 했는지 기억하냐?” “조금 전에요? 팔극본결 했잖아요. 조금 오래한 것 같은데.. 이렇게 상쾌해 본 적은 처음이에요. 가상현실이라서 그런가?” “진성아, 일단 테스트 끝내자.” “네? 벌써요?” “일단 끝내고 할 얘기가 있다.” 아쉬운 진성이었지만 뭔가 있는 듯한 분위기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테스트를 끝내야만 했다. 진팀장의 요란한 메티컬 체크를 받은 진성은 씻기 위해 요람 내에 설치된 샤워실로 갔다. 샤워를 하던 진성은 왠지 몸이 가뿐해졌다는 것을 느꼈다. 몸에 힘이 넘친다고 해야 할까? 진성은 가상현실에서의 이런 운동이 몸에 좋은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내심 생각해 보기도 했다. 씻고 나온 진성은 뭔가 이상한 분위기가 요람 전체를 감싸고 있음을 느꼈다. 진성은 자신의 몸에 생긴 좋은 변화에 대해서 말하려다가 그 분위기에 눌려서 진팀장에게로 다가갔다. “진성아, 나를 따라오너라. 진호, 조팀장도 같이. 나머지 사람들은 이번 일에 대해 절대 함구하도록.” 굳은 표정을 지은 진팀장이 회의실로 앞장서자 곽진호와 노트북을 든 조팀장이 따라나섰다. 진성은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진성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오자 서 있었던 조팀장이 문을 닫고는 마지막으로 앉았다. “진성아, 솔직하게 말해 주기 바란다.” “네? 네..” 진성은 심각한 분위기에 뭐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더구나 무슨 상황인지 모르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진성아, 혹시 팔극본결 말고 팔극진결이나 다른 팔극신권을 배운 적은 없나?” “네? 진팀장님도 아시잖아요? 게임 센터 도장에서 배운 팔극본결도 겨우 배웠는데 제가 어떻게 그런 어려운 것을 배워요?” “정말 배운 적이 없냐?” 진지한 목소리에 진성은 곽진호와 조진철을 둘러보았지만 역시 장난은 아니었다. “정말 없습니다. 배운 것은 팔극본결 뿐입니다.” “그래......” “진팀장님, 왜 이러십니까? 제가 뭐 잘못이라고 했습니까?” “기억이 없군. 조팀장.” 진팀장의 짧은 말에 가져온 노트북을 프로젝트에 연결한 조팀장이었다. 곧 조팀장은 조금 전의 영상을 비추었다. “저건... 조금 전 제가 테스트한 것이잖아요.. 정말 무슨 문제라도 있었나요? 정말인가요?” “진성아, 일단 끝까지 보고 나서 얘기하자.” 진성은 조용히 영상을 봤다. 팔극본결을 펼치기 전까지는 자신이 알고 있는 그대로였다. 하지만 곧 서서히 진성의 얼굴 색깔이 달라졌다. 점점 시간이 흐르자 왜 진팀장과 다른 사람들이 이토록 진지한지 알 수가 있었다. “이...이게.. 정말 사실인가요?” “사실이다. 나 말고도 10명이 넘는 사람들이 지켜봤으니까.”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겁니까?”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진성아, 혹시 가상현실 안에서 그 팔극본결을 할 때 뭔가 느낀 것은 없냐?” “저는 평소보다 조금 길게 팔극본결을 펼친 것 밖에는 없습니다. 저런 동작은 제가 할 수도 없습니다. 지금 제게는 그런 기억도 없습니다.” “.. 그래.... 휴... ” 진팀장은 난감했다. 조금 더 분석해 보면 알겠지만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이런 일을 하면서 가장 피하고 싶은 문제 유형이었다. 절대 나와서는 안 되는 결과가 나와 버렸다. 이런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계속 나오면 결국 어쩔 수 없이 프로젝트 전체를 접어야 할지도 몰랐다. “진팀장님, 제 몸이 조금 좋아진 것 같습니다. 아까 샤워하면서 느낀 건데 저는 팔극본결을 가상현실 내에서 펼치니 그 효과로 몸이 좋아진 줄 알았습니다. 혹시 이것은 관계가 없겠습니까?” “그래? 진호, 어떻게 생각하나?” “.... 제 의견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가상현실을 통해 지식을 받을 수는 있어도 직접적으로 몸이나 근육이 좋아질 수는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제 말은 왠지 상쾌하고 몸이 가볍고 기분도 좋아졌다는 말입니다.” “음... 그렇다면 그것은 실제로 그렇게 된 것보다는 심리 효과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무튼 제 말은 결코 가상현실에서 운동한다고 해서 그게 실제 몸이 좋아진다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휴....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진팀장은 한숨을 내쉬고야 말았다. 진팀장과 조진철 프로그램 팀장, 곽진호 하드웨어 팀장 그리고 진성은 그날 밤 늦게 다시 요람의 회의실로 모였다. “다 같이 알아둘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이렇게 모이게 했다. 조팀장?” “네, 저희 팀이 그 테스트 결과를 계속 분석했는데요... 그나마 가장 근접할 것 같은 원인을 생각해 냈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바와 마찬가지로 확실한 원인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습니다. 저는 그런 현상이 바로 가상현실 시스템에 채용한 인공지능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했던 진성의 그 세미나 기억나시죠? 그 때의 그 참신한 아이디어를 저희 팀에서 구체화 시켰거든요. 물론 대장님은 알고 계시겠지만요. 그 인공지능으로 인해서 프로그래머의 수고가 대폭 줄어들었습니다. 프로그래머로서 아주 좋았지요.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오히려 그 부분에서 문제의 소지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공지능이 여러 자극과 반응을 이용해서 스스로 고쳐나가는데 그 부분은 프로그래머가 제대로 알 수 없는 부분입니다. 다시 말해 어느 정도 프로그래머의 통제를 벗어난 부분인 것입니다. 직접적인 이유는 모르겠지만 진성이 가상현실 내에서 팔극권의 팔극본결을 펼치자 그런 인공지능이 활성화되어서 진성의 그 동작을 좀 더 완벽한 동작으로 바꾸고자 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 가능한 얘기인가?” “제 판단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현재로서는 가장 이치에 가까운 원인입니다.” “음....” “게다가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아마 깜짝 놀라실 겁니다.” “또 뭔가? 이제 더 놀랄 일은 없을 것 같은데...” “가상현실이 확장되었습니다.” “뭐? 뭐라고? 가상현실이 확장되었다고?” “네, 분명히 그 테스트 전에는 이 건물만 가상현실 세계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 “그런데?” “그 곳이 꽤 특이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기 힘듭니다.” “도대체 어디야?” “놀라지 마십시오. 쥬신 대학입니다.” 진팀장과 곽진호, 진성은 다시 한번 놀라고 말았다. 아무런 작업도 하지 않았는데 가상현실이 확장되고 그 확장된 곳이 하필이면 쥬신대학이라니. 진팀장과 곽진호, 조진철은 일제히 진성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테스트를 한 사람도 진성이었고 모인 사람 중에 쥬신 대학과 관계있는 사람은 진성 뿐이었다. 진성 스스로도 절대로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컴퓨터를 전공한 사람으로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만도 놀라운데 그 장소가 바로 자신의 학교인 쥬신대학이라니. 진성은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이런 일은 절대로 인공지능으로 일어날 수 있는 성질의 일이 아닙니다. 인공지능의 특성상 없는 것을 있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음..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다?” “현재로서는 한 가지. 진성의 머리를 통해서 그 쥬신 대학이 가상현실로 추가된 것 같습니다.” “저.. 조팀장님, 가상현실은 이 건물만으로도 그 한계에 도달했다고 했잖습니까?” 진성이는 뭔가 생각이 나서 재빨리 조팀장에게 물었다. “그랬지.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런 일들이 생겼는지는 아직 알 수가 없다. 프로그래머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결과만 볼 수 있지 내부를 들여다 볼 수가 없다. 다른 부분은 괜찮은데 새로 생긴 가상현실 공간은 마치 블랙박스 같아서 내부는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다만 가상현실로 보면 그 공간이 존재하는 것을 알 뿐이다. 휴...”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일들이 생겨서 진팀장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특히 소프트웨어의 책임자인 조진철 팀장으로서는 일정 부분 자신의 제어를 벗어난 시스템의 한 파트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할 수 없었다. 프로그래머로서의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많은 논의 끝에 조진철 프로그램 팀장은 계속 시스템 분석을 하기로 했고 곽진호 팀장은 가상현실 하드웨어 시스템에 대한 베이스 상태에서의 점검에 들어가기로 했다. 진팀장은 다음날 그 영상을 가지고 진성과 함께 달인 유조를 찾아가기로 하고는 늦은 밤의 회의를 끝마쳤다. “진성아, 정말 몸은 괜찮은 거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운전하던 진팀장은 조수석에 앉은 진성을 보며 물었다. 요람에서 했던 메디컬 체크에 아무런 이상이 없어서 내심 안심하기도 했지만 그런 검사에는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었기에 노파심에서 물었다. “저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다만 오늘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조금 피곤하네요.” “나도 마찬가지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인지... 어쩌면 가상현실이라는 자체가 건드려서는 안 되는 판도라의 상자인지도 모르겠다. 휴...” “아저씨, 잘 될 겁니다.” “잘 되어야지. 여기에 들인 수고와 노력과 돈이 얼만데... 아까워서라도..” “아저씨, 오늘 그 사건은 비밀이에요. 현준이도 모르고 있을 테니까..” “그 말은 내가 하고 싶었다. 괜히 걱정시킬 필요는 없으니까. 그나저나 너 아까 그 속에서 팔극권 그 동작들 정말 멋있었다. 마치 유조 어르신의 모습을 보는 듯했으니까.” “제가 봐도 멋있던 걸요.” “혹시 진성이 너, 할 수 있지 않을까?” “설마요.... 사실 아까 해 봤는데......” “그런데?” “안되더라구요. 당연히.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데 뭘 할 수 있겠어요.” 진성은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추월해 가는 차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진성은 말했다. “.... 제가 테스트 할 때마다 일이 벌어지네요. 아저씨.” “정말 대형사고가 터지는군. 다음번에는 어떤 사건이 일어날지 기대되는 걸. 진성아, 네 잘못은 하나도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아, 아니 네 잘못이 하나 있기는 있다.” “네?” “수백 번의 테스트 중에 딱 두 번 대형사고가 터졌는데 어떻게 그 두 번이 모두 진성이 네가 테스트 할 때냐? 아마도 네가 재수가 없어서 그런가 보다. 재수 없는 것도 죄다, 죄!” “아저씨!” “하하하하... 오늘 일은 잊어라. 어차피 터질 일이 우연히 오늘 터졌으니까. 자, 가자.” 많은 차들이 자신의 차를 추월해서 가자 진팀장은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우연이 아니라는 자신의 직감을 애써 떨치려고 더욱 더 힘껏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어서 오게나, 진군. 오늘은 손님이 한 명 더 늘었군. 일단 안으로 들어가세.” 진팀장은 진성과 같이 달인 유조를 찾았다. 진팀장 자신은 가상현실 속에서 진성이 보인 그 움직임이 달인 유조의 그것과 같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전문가인 유조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어쩌면 가상현실 시스템의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그 껍데기를 진성의 몸을 통해서 보여 주었는지도 몰랐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진팀장과 진성은 유조를 따라서 예의 그 손님을 맞이하는 곳으로 들어갔다. 진팀장은 마음이 급해 빨리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유조는 손을 들어 막았다. “너무 급해 보이는구만. 일단 차 좀 들고 얘기 나누지.” 약간은 쌀쌀한 날씨에 쌉싸름하면서도 따뜻한 차는 그 향과 더불어 가히 일품이었다. 진팀장 뿐 아니라 진성 역시 긴장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한 모금의 차는 그런 당겨진 몸과 마음을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자, 이제 얘기를 들어볼까?” 진팀장은 어제 있었던 얘기를 빠짐없이 유조에게 털어놓았다. 되도록이면 이해하기 쉽도록 말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시간은 많이 걸렸다. 다 이야기하고 나서는 가져온 노트북을 켰다. “어르신, 들으셔도 실감이 나지 않으실 겁니다. 한 번 보시는 게 나을 겁니다.” 진팀장은 유조에게로 그 노트북을 돌렸다. 자신과 진성은 신물이 날 정도로 봤던 영상이 노트북을 통해서 흘러나왔다. 진팀장의 이야기를 들어도 별반 반응이 없었던 유조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공중에서 팔극신권의 절초들과 비전들을 그야말로 최고의 경지에서 구사하는 진성의 모습을 본 유조는 평소의 여유롭고 자연스러운 유조가 아니었다. 너무 놀랐기 때문일까? 실소를 터트리는 유조였다. “허허허허...... 이런..” “왜 그러십니까? 어르신.” “이 아이가 그 아이구만. 진군 맞나?” “네, 맞습니다. 그래서 데려온 것입니다.” “아이야, 이름이 무엇이냐?” “강진성입니다, 어르신.” “그래. 그 요람인가 하는 곳에서 몇 번 보기는 했다만 직접 말해 보기는 처음이구나. 혹시 팔극권을 배운 적이 있느냐?” “저는 최철훈 사범에게 팔극본결 만을 배웠습니다.” “허....... 그래. 다른 무술은 배운 적이 없고?” “네, 처음으로 배운 무술이 바로 팔극권입니다.” “그래? 알았다. 그거야 해 보면 알 수 있으니까. 진팀장, 우리 잠깐 자리를 옮길까? 그리고 저 진성군을 내게 잠시 빌려줄 수 있겠나?” “네?” 진팀장과 진성은 유조를 따라서 정문 근처의 객청이 아니라 점점 중지로 들어감을 느꼈다. 더욱 더 청량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한참을 따라가서야 어떤 건물 앞에 멈췄다. 안으로 들어가자 굉장히 고풍스런 느낌을 주는 도장이었다. “진성군, 이 옷으로 갈아입게나.” “네? 아.. 네.” 진팀장은 도장의 한 쪽에 양반다리로 앉아 있었고 진성은 유조에게서 받은 도복으로 갈아 입었다. 유조 또한 이미 도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진성군, 자네의 무술 정도를 파악하려면 이 방법이 가장 확실하고 정확한 방법일세. 자 나를 공격해 보게나.” 진팀장과 진성은 유조의 의도를 알았다. 가상현실에서 훈련한 것이 100% 현실에서도 반영이 된다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던 것을 가상현실에서 펼칠 수 있다는 것 역시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진성은 팔극본결도 혼자서 연습하는 투로였지 대련은 단 한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어떻게 공격을 해 볼 수가 없었다. 기껏해야 한다면 우격다짐일 것이다. 진성은 난감했다. “내가 들어가지.” 유조는 그리 빠르지 않게 다가왔지만 진성에게는 마치 허깨비 같은 느낌이었다. 분명히 눈에 선명하게 보였고 잡으려면 잡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지만 뭔가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 말로는 할 수 없었지만 진성은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조는 진성에게로 다가오면서 자신을 공격할 수 있게끔 자신을 보여주면서 안으로는 비전의 보법인 지허보(地虛步)를 펼쳤다. 지허보를 펼치면 그 동작 자체는 느리지만 실제로 공격을 하려면 뭔가 타이밍이 어긋나게 만들어 오히려 허점이 드러나도록 만들어 수비와 동시에 공격을 할 수 있는 팔극권의 권리에 들어맞았다. 유조는 진성이 앞으로 나올 듯, 나올 듯 하다가 참는 모습을 보고 내심 감탄했다. “오... 진성군, 조금 전에 공격하고 싶었는데 왜 참았지?”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뭔가 거슬리는 것이 있었거든요. 게다가 어르신 정도면 그리 쉽게 다가갈 수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 이제 진짜 들어가지.” 조금 전의 지허보와는 전혀 다른 굉장히 폭발적이고 빠른 보법인 천쾌보(天快步)를 펼쳤다. 몸의 발경을 한데 모아 그 폭발력으로 순식간에 상대와의 거리를 좁혀 상대의 거리로 들어가 한번의 공격으로 상대를 무릎 꿇게 만드는 역시 비전의 보법이었다. 평소의 유조라면 초보자에게 이런 기술을 보일 까닭이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본 그 영상에는 정말 자신조차 감탄할 만한 움직임을 보인 사람, 진성이 있었다. 진성이 알아채기도 전에 진성의 코앞으로 다가온 유조는 진각을 밟으며 몸을 비스듬히 만들며 오른 주먹을 앞으로 뻗어 첨격을 펼쳤다. 팔극권의 타격 방법 중에서도 아주 빠르고 그 발경이 집중되어 그 위력이 탁월한 것이 바로 첨격이었다. 평소와는 달리 진각을 약하게 밟은 유조는 이미 그 움직임에 있어서 공격과 멈춤, 수비와 움직임이 자유스러웠기 때문에 진성이 맞을 것 같으면 중간에 멈출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진성은 알 수가 없었다. 한 순간에 자신 앞에 허깨비처럼 나타난 유조가 자신의 가슴을 향해 주먹을 뻗자 진성은 순간 가상현실에서의 유조와 캐릭터 진성의 대결이 떠올랐다. 물론 그 결과까지. 지금의 결과 역시 그와 비슷할 것이라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윽..?” 진팀장조차 그 장면을 보며 손에 땀을 쥐었다. 유조의 첨격이 진성의 가슴에 닿을 순간이었다. 진성은 눈을 꾹 감고 이를 악물고 있었다. 유조는 그 모습에 자신의 공격을 멈추려고 했다. “아니.. 용형파(龍形把)?” 진성이 가만히 있었다면 유조는 당연히 공격을 멈추고 시험을 끝마치려고 했지만 진성의 몸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오른 팔의 첨격을 부드럽게 흘려버리고는 물 흐르듯 반대쪽으로 회전해서 가까이 다가온 유조의 옆을 등으로 강하게 부딪쳤다. 바로 용형파였다. 이 용형파는 유조 자신이 만든 팔극신권의 비전 중 하나였다. 이 기술은 팔극권에는 없는 기술이었다. 깜짝 놀랐지만 유조는 강력한 용형파의 경력을 거스르지 않고 옆으로 흘러버렸다. 그리고 곧바로 강력한 진각을 밟으며 팔극일심파(八極一心把)의 동작으로 강한 진력을 앞으로 뻗었다. 진성은 자신의 몸이 한순간에 제멋대로 움직이자 깜짝 놀랐다. 그러다 앞으로 보니 유조 어르신이 자신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하는 것이 아닌가. 진성은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아앗!” 유조는 진성이 자신의 공격을 피하거나 아니면 흘려버릴 줄 알았다. 조금전의 그 용형보의 시기적절한 사용과 그 부드러움의 완숙함을 볼 때 절대 하수가 아님을 알았다. 자신의 용형보를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린 나이와 초보라는 마음은 이미 버렸었다. 하지만 곧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알게 되었다. 진성은 눈을 뜬 채 유조를 보며 머릿속이 완전히 하얗게 변하고 말았던 것이다. 유조는 진성의 눈을 보면서 뭔가 잘못됐음을 알았다. 그리고 곧바로 진각을 했던 발을 들어서 공격의 방향을 바꿔버렸다. 유조가 팔극일심파를 비틀어 옆으로 돌리자 진성은 자신의 옆으로 뭔가 강한 바람 같은 것이 지나감을 느꼈다. 유조는 숨이 가쁜지 연신 숨을 내뱉었다가 들이마셨다. 놀란 진성 역시 선 그대로 눈만 껌벅이며 유조를 쳐다보기만 했다. “휴... 큰일 날 뻔 했군.” 이윽고 몸을 다스린 유조는 여전히 서서 놀란 그대로인 진성에게 다가가 몇 군데 경락에 기를 흘려 몸을 편하게 해 주었다. 진성은 그제야 숨을 제대로 쉬며 유조와 진팀장을 바라보았다. “진성군, 편하게 앉게. 그리고 편하게 숨을 쉬는 게 좋을 거야. 진군도 이리로 오게. 이야기를 마저 해야겠군.” 유조의 목소리는 어느새 평소의 그 담담한 목소리로 바꿨다. “내가 생각할 때,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성군의 몸은 분명히 팔극신권을 익히고 있네. 그것도 아주 고급이라네. 창시자인 나와 맞먹을 정도로. 아까 봐서 알겠지만 진성군의 그 절묘한 공격은 용형파라고 내가 만든 기술이라네. 이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기술이지. 그 기술은 훔쳐본다고 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네. 진군, 자네가 설명해 줄 수 있었으면 하는데....” 유조의 말에 진팀장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곽진호의 확고한 의견이 깨져버린 것이다. 가상현실에서의 훈련이 현실에서 이렇게나 영향을 주다니. 이것은 단순한 운동효과가 아니라 가상현실을 통한 고급 무술의 일방적인 전승과 같았다. “네,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이.....” 진팀장은 차근차근 얘기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내에서라면, 그리고 확실한 원인은 아니지만 대강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한참을 듣던 유조는 얼굴이 굳어졌다.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까지 그 테스트를 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팔극권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건가?” “그건 아직 모르겠습니다. 진성이의 경우도 자신은 모르는데 무의식중에 쓴 것 같으니까요.” “음.... 어쩌면 내가 했던 그 모델링은 다 폐기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이런 무술은 비인부전이라네.” 진팀장은 유조 어르신의 그 경지를 알았기에 별다른 수련도 없이 몸만 강해진다면 그것은 오히려 재앙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진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르신 말씀이 맞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휴.....” “내일 내가 자네 회사 그 도장으로 가겠네. 모든 테스트를 한 사람을 다 불러주게나. 내가 직접 사람들을 테스트 해 봐야겠네. 가능하겠나?” “예? 아,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진팀장은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고 진성은 아직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진성에게는 자신이 죽을 뻔했다가 살아난 그 사고보다 조금 전의 그 놀람이 더했다. 달인 유조가 직접 테스트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거의 2시간이 넘게 시험한 바로는 오직 진성만 팔극권과 팔극신권을 경지까지 몸에 익힌 것으로 드러났다. 다른 사람들의 경우 가상현실을 통해서 조금의 진전은 있더라도 그것은 단지 몸을 조금 더 움직인 정도였다. 하지만 진성의 경우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팔극신권의 절초마저 몸이 스스로 시전할 정도여서 진성 자신 뿐 아니라 진팀장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테스트가 끝나고 진팀장과 곽진호, 조진철, 진성 그리고 유조가 회의실에 모였다. “유조 어르신, 저희들도 어떤 이유인지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의 결과는 진성 혼자만 그런 일이 일어났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무슨 이유로 그렇게 된 것인지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 말고는 더 이상 나온 것이 없습니다.” 진팀장의 말에 유조는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이왕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그 원인도 중요하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 어떻게 할지가 더 중요할 것 같네.” “네, 어르신 말씀이 맞습니다. 수십 명의 사람 중에서 진성이만 유일하게 그런 일이 일어나다니.. 음.. 일단 가상현실 시스템의 전반적인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현상이 일어나야 합니다. 어쩌면 아주 적은 확률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데 그 일이 진성이에게 일어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조팀장,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겠나?” 진팀장은 시스템 프로그램 팀장인 조진철 팀장을 지목해서 물었다.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지만 통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 프로젝트는 마땅히 폐기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반대로 이런 불가사의한 일로 인해서 우리가 한계로 삼았던 것이 깨졌습니다. 그것을 제대로 이용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제대로 된 가상현실을 창조할 수 있게 됩니다.” “음... 그렇다면 가상현실과 현실과의 관계는?” “아직 좀 더 테스트를 해 봐야겠지만 원칙적으로는 진성에게 일어난 일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저희가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을 다 예상한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안 되는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진성의 일은 예외로 인정하고 그 원인을 철저히 추적하면서 동시에 지금의 가상현실을 분리해서 게속 일을 진척시켰으면 합니다. 좀더 튼튼하게 가상현실의 프레임을 정비해서 비슷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철저하게 막는 겁니다. 그리고 유조 어르신의 팔극신권에 대한 모델링 자료는 가상현실에서 제거하도록 할 것입니다. 보통의 기술들은 그대로 두되 팔극권과 팔극신권에 대한 모델링은 모두 시스템에서 분리시키도록 할 예정입니다.” “그래? 그것도 한 방법이겠지. 진호?” “저는 진성의 일을 사실 믿기 힘듭니다. 하지만 이렇게 눈앞에 그 증거가 있으니... 제 생각은 일단 진성의 몸을 의학적으로 정밀하게 검사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가상현실이 실제 몸에 영향을 준 첫 번째 케이스입니다. 철저하게 알아둘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조팀장의 말처럼 가상현실 시스템을 완전히 두개로 분리해서 하나는 지금까지의 일을 진척시키고 다른 하나는 진성이가 전적으로 테스트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서 동시에 개발을 하는 겁니다.” “그래.... 음....” “내가 한마디 해도 되겠는가? 진군.” 가만히 듣고만 있던 유조가 진팀장에게 넌지시 말했다. “네, 물론입니다, 어르신.” “진성군을 내게 맡겼으면 하는데.........” “네? 어르신께서 맡으신다는 말씀은..?” “나는 자네들이 말하는 그 가상현실이라든가 뭐, 시스템이라든가 하는 말들을 잘 모르네. 하지만 자네들은 자네들 일의 관점으로 보는 것 같은데... 맞나?” “네? 아,네.. 맞습니다.” “나는 자네들의 그 일에 대해 충고할 만한 지식은 없다네. 단 한 가지,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진성군을 이대로 내버려두면 안 된다는 거지. 진성군의 몸에는 정말 사람을 일격에 죽일 수 있는 무기가 이번 사고로 인해 달렸다고 봐도 무방하지. 그것도 통제할 수 없는 상태로. 저러다가는 지나가던 사람이 무심코 부딪쳤을 경우에 어쩌면 몸이 스스로 움직여서 상대를 일격에 죽일 수도 있다네. 모든 사람이 나와 같지는 않을 테니까.” 진팀장은 그제야 또 다른 위험성을 알게 됐다. 진성의 아버지를 자처하면서도 그런 것을 생각하지 못한 자신이 한심했다. “... 어르신께서 맡으시면 그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음, 확실하게 딱 잘라서 할 수 있다, 할 수 없다의 문제가 아니야. 노력해 볼 수밖에 없다는 말이 정답이지. 내가 가진 무예는 자네들이 생각하는 정도를 넘는다네. 조금 과장하면 그야말로 일당백 정도는 되지. 하하하하... 그런데 내가 그런 강함을 가지고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거나 폭주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지. 왜냐 하면 그런 강함에 대한 두려움과 그 두려움을 억누를 그릇이 이미 완성되어 있기 때문이지. 아주 안전한 그릇이거든. 그런데 진성군의 경우는 아주 작은 그릇에 강물과 같은 세기의 물이 담겨진 거라네. 지금이야 잘 모를지도 모르지만 시간이 점점 흐르면 점점 그 물이 세어질 걸세. 그릇이 깨어지기란 시간문제야.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저 녀석의 그릇을 조금 단단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선배로서 충고하는 것, 그 것 뿐일세.“ 진성은 자신에 대해서 얘기하지만 도저히 끼어들 수가 없었다.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을 뿐이었다. “결론을 내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조팀장과 곽팀장의 말처럼 일단 가상현실 시스템을 두 개로 분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돈이 많이 들겠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한쪽에는 지금과 같은 개발을 하되 팔극권과 팔극신권 등의 모델링은 다 분리시킬 겁니다. 하지만 진성이 이용할 가상현실에는 지금과 같은 환경으로 꾸며서 테스트를 해 봐야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2,3일은 진성이 유조 어르신 댁으로 가서 어르신께 가르침을 받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어르신, 어떻습니까?” “그렇게 하세나.” “진호, 조팀장은 어떤가?”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네, 찬성합니다.” “진성아, 네가 그렇게 좀 수고를 해야겠다. 유조 어르신께 가르침을 받는다면 너도 나쁘지는 않을 테니까. 어떠냐?” “어쩔 수가 없죠. 휴...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진성의 뜻과는 별로 상관없이 결론은 내려졌고 진성은 그런 결정에 반대할 이유도 없었고 반대할 수도 없었다. 다만 문명 온라인 프로 게이머로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할까 걱정이 되었다. 게다가 갑자기 자신이 팔극권의 달인 유조 어르신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니 정말 당황스러웠다. 함부로 가르칠 수 없다고 들었던 유조 어르신이라 더욱 그랬다. “그 자세로 내가 그만이라고 할 때까지 움직이지 말고 마치 땅이 나를 떠받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버텨 봐라.” 문명 온라인의 프로 게이머, 진성은 결국 주중에 한 번, 그리고 주말에 두 번을 유조 어르신 댁으로 찾아가야 했다. 점점 프로 리그의 끝이 다가오는지라 진성과 현준은 연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더욱 바빠진 주중에는 몸을 뺄 수가 없어서 특별히 이팀장과 진팀장의 배려로 수요일 오전 시간을 허락받았다. 아침에 바로 유조 어르신 댁으로 출근해서 점심 먹고 회사로 가기로 한 것이다. 약간 싸늘하지만 높고 푸른 하늘과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토요일의 오후, 다른 사람들은 늦은 단풍구경을 한다, 교외로 소풍을 간다하지만 진성은 유조 어르신 댁으로 와서 하루 종일 마보(馬步)를 취해야 했다. 진성의 몸 자체는 마보나 궁보(弓步) 등을 취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지만 유조는 진성의 마음을 단련하기 위해서 하루 종일 마보를 취하게끔 만들었다. 아무리 단련된 몸이라고 해도 하루 종일 마보 자세를 취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유조가 바라는 것은 그 불가능을 인내하는 수련이었다. “헉... 헉..헉..헉... 털썩.” “휴... 헉헉...헉...” 진성의 옆에는 한참 동안이나 버티던 현준이 쓰러지고 말았다. 몸에 쥐가 났는지 연신 일그러진 얼굴로 팔을 다리 쪽으로 뻗었는데 닿지 않아서인지 고통스러워했다. 의자에 앉아 햇빛을 쬐면서 책을 보고 있던 유조는 현준에게로 다가가 가볍게 등과 다리 몇 군데를 쳤다. 그제야 조용해진 현준이었다. 진성에게서 대강의 사정을 들은 현준은 굉장히 놀랐다. 그리고 진성이 유조 어르신 댁으로 가는 동안 자신도 따라나섰다. 진팀장은 유조 어르신에게 폐를 끼친다며 반대했지만 유조는 친구 사이가 보기 좋다며 허락했다. 하지만 곧 현준은 그런 자신의 결정에 후회막심이었다. “휴... 내가 왜 이것을 한다고 따라왔을까?” 평소 현준 자신과 진성은 체력적으로 별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마보를 취하자 곧 판가름이 나 버렸다. 유조의 지시대로 제대로 마보를 서자 현준은 3분도 버티기 힘들었다. 마구 다리가 후들거리고 몸은 땀으로 범벅이었다. 하지만 진성은 별 어려움 없이 3분을 넘어 10분이 넘도록 흔들림이 없었다. 더구나 더 놀라운 것은 진성은 그 상태에서 눈을 감아버린 것이다. 현준이 보기에 진성이 그 자세 그대로 잠들어 버린 것이 아닐까 의심할 정도였다. 그 정도로 편안해 보였다. 기분이 나빴던 현준은 유조 어르신의 눈을 피해 마보 자세의 진성을 밀어버렸다. 하지만 진성은 그야말로 철벽이었다. 여러 번 밀어보던 현준은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진성을 흔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 산은 흔들어도 팔극권의 권사를 흔들기는 어렵다.” 여전히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나직하게 말하는 유조였다. 유조는 눈을 들어 진성을 보면서 놀라움과 기쁨이 교차함을 느꼈다. 처음 진성을 시험했을 때 그 용형파로 인해 놀랐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자리에서 여러 번 봤는데 젊은이답지 않게 참 진중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뭔가 사연이 있으려니 생각했지만 그 당시에는 물어보지 못했다. 유조 자신의 집으로 몇 번 왔을 때에야 물어봤는데 역시 자신의 예상대로 어릴 때 부모를 잃고는 혼자 살아왔음을 알았다. 진군과 그 아들이 친구로서 잘 대해줬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평생 혼자 살아온 유조로서는 그것만으로 부모의 그늘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단지 무술을 논할 때 진성의 몸은 그리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나이가 있으니 더욱 더 힘들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성격이나 마음가짐은 무도를 가기에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한 유조였다. 게다가 지금 마보 하나만 보더라도 절정의 팔극권사와 비교해서 오히려 뛰어나면 뛰어났지 모자라지 않았다. 유조는 내심 팔극문에서 쫓겨나더라도 제자를 받아볼까 생각하기도 했다. 이제까지 그 규칙 때문이기도 했지만 마음에 드는 제자를 만나지 못했기에 문인을 들이지 않았었다. “휴.. 나도 갈 때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나를 기억해 줄 사람 하나 정도는 두고 가야 하는 것 아닐까?” 유조는 산처럼 변함없는 진성의 마보를 보면서 흐뭇하게 웃었다. “자, 준비 다 됐습니다.” “조팀장?” “저 역시 준비 됐습니다.” “다들 정신 차리고, 진성아 수고해라. 너무 무리는 하지 마라. 뭔가 이상하면 곧바로 말해라. 알겠지?” “네, 걱정 마세요.” 진성은 로플팀의 요람에서 새로 진성만을 대상으로 꾸며진 가상현실 시스템을 테스트하기 위해 PVR-2로 향했다. 다가온 첫 프로 리그 정규 시즌의 마지막과 다음 시즌을 준비하기 위해 더욱 더 문명 온라인에 신경 써야할 진성으로서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테스트를 할 수 있었다. 오늘이 바로 그 첫 테스트였다. 며칠에 걸쳐서 한 정밀검사에서 아무런 이상이 없던 진성은 흔쾌히 테스트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진성은 능숙하게 PVR-2에 탑승하고 헬멧을 쓰고는 심호흡을 했다. 이제껏 PVR-2를 두 번 탔지만 그 두 번 모두 대형 사고가 터졌다. 진성은 긴장해서 세차게 뛰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눈을 감았다. 섬광이 밝아오더니 눈앞이 환해졌다. 처음에 대기하는 그 끝없는 들판이었다. 예전과 다른 점은 하늘의 움직임이었다. 바람에 하늘의 구름이 움직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제 곧 비가 올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기분 탓일까? 손가락과 얼굴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속에 비의 기운이 있는 것 같았다. “진성아, 이동한다.” 조팀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공간은 바뀌었다. “여기는....” 진성의 눈앞에는 쥬신 대학 공대 3호관과 그 앞의 연못 유레카였다. 지난번에 쥬신 대학이 완전히 모델링 되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정말 자신이 오랜만에 쥬신 대학으로 온 것 같았다. 대학을 1년 반 동안 다니면서 이렇게 고요한 적은 처음이었다. 항상 학생으로 북적이는 대학이 이렇게 조용하자 을씨년스러웠다. 천천히 둘러보고 있는 진성에게 조팀장의 음성이 들렸다. “진성아, 거기 편한 곳에서 지난번과 같이 팔극본결을 한번 펼쳐봐라.” 조팀장의 말에 진성은 연못 유레카 근처의 잔디밭으로 들어가 심호흡을 한 뒤에 눈을 감고 팔극본결을 펼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거의 5분 동안 아무런 변화가 없자 진팀장과 사람들은 지난번의 그 일이 우연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그 생각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진성의 동작에 서서히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거의 무아의 상태인 진성은 지난번과 달리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그 동작에 공간은 당겨졌다가 밀려나갔다를 반복했다. 그리고 조금 더 있으니 진성의 동작이 바뀌었다. 역시 팔극권과 팔극신권의 여러 움직임들이었다. 진성의 동작에 모니터에는 조팀장이 시스템에 덧붙인 모듈에서 진성의 동작에 따른 팔극권과 팔극신권의 절초 이름들이 계속 나왔다. “와...이..이런.. 못하는 게 없잖아..” 멍해서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자각이 없는 곽진호 팀장이었다. 진성은 가상현실 속에서 다시 한번 그 춤사위를 풀어 나갔다. 한 순간 진성의 손에는 봉이 들려 있었다. 한 순간에 공간이 갈라지며 봉이 나와서 진성의 손에 잡혔고 진성은 아주 화려하면서도 안정적인 봉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진성의 움직임에 따라 기술이름이 계속 나오던 모니터에는 곧 ‘확인불가’라는 말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이게..” 진성의 봉술은 이제까지와는 달리 처음 보는 동작들이었다. 점점 달라지면서 화려한 동작들이 단순하면서도 물 흐르듯 부드러운 동작으로 바뀌었다. 그러다 점점 천천히 움직이더니 진성은 동작을 멈추었다. 눈을 뜬 진성은 자신이 들고 있는 봉을 쳐다보았다. “진성아, 괜찮냐?” “네, 괜찮습니다.” 지난번과는 달리 진성은 자신이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몸이 팔극본결이 아니라 팔극권과 팔극신권, 심지어 봉술까지 하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몸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을 보았던 그 영상과는 전혀 달랐다. 자신의 몸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고 자신의 몸을 관통하는 거대한 힘을 느꼈다. 하지만 그 힘을 제어할 자신이 없었다. 진성은 그런 힘이 멈출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유조 어르신이 자신에게 한 그릇에 대한 얘기와 단단하게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얘기를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 힘에 휩쓸린다면 자신은 여울속의 나무처럼 조각조각 부숴질 것임을 확신했다. “휴....” 진성은 다른 여러 테스트를 하고는 곧 PVR-2에서 나왔다. 지난번과는 달랐지만 그래도 사람들을 둘러싼 분위기는 그렇게 좋은 것이 아니었다. 특히 진성 자신에게 계속 일어나는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일에 기뻐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성은 아직도 아련하게 느껴지는 그 거대한 힘을 생각하며 샤워실로 향했다. “이것으로 진성에게만 특별하게 그 현상이 일어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조팀장, 어떻게 생각하나?” 진팀장은 고개 숙인 진성을 보며 조팀장에게 물었다. 진팀장은 조팀장, 곽팀장 그리고 진성은 또 다시 회의실에 모였다. “확실히.... 이유는 모르겠지만 진성이에게만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사실일 것 같습니다. 더 확실히 하려면 한번 더 테스트를 해 보면 알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게다가.. 지난번과 비슷한 현상이 생겼습니다.” 조팀장은 약간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며 진성과 진팀장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무슨 현상 말인가?” “지난번의 그 테스트로 가상현실에 쥬신 대학이 추가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이해할 수 없지만 새롭게 추가된 공간이 있습니다.” “정말 사실인가?” “네, 제가 직접 확인했습니다. 적지 않은 공간이 그야말로 순식간에 생겨났습니다. 제가 확인을 했지만 믿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공간인가?” “.... 믿기 힘드시겠지만 섬입니다.” “섬? 그렇다면 바다도?” “네, 사실입니다. 지금 현재 가상현실 속에는 회사 건물과 쥬신 대학, 그리고 그 둘을 둘러싼 바다와 그 건너편의 섬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공간의 제한이 있어 수평선이 보이지만 실제로 그렇게 넓은 바다는 아닙니다. 하지만 모델링 한 적이 없는 바다가 거의 완벽하게 생겨났습니다. 어떤 섬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사실적으로 모델링 된 것이나 다름없을 정도입니다. 저는 도무지 할 말이 없습니다.” “... 섬이라... 진성아, 혹시...” 진팀장은 지난번의 그 쥬신 대학도 그렇고 이번에 새로 생겼다는 섬이라는 얘기를 듣자마자 진성이 자주 가는 그 섬, 호도를 생각했다. 뜬금없이 나타난 섬이라는 말에 진팀장은 진성을 바라보았다. “호도라면....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잠깐만 기다려라. 내가 그 영상을 가져올 테니까.” 조팀장은 진성의 말에 곧 회의실을 나갔다. 확인해야 되겠지만 이미 진팀장은 그 섬이 호도라고 확신했다. 진팀장은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머리만 아팠다. 회의실에는 말없는 침묵이 흘렀다. 조팀장이 돌아올 때까지 숨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진성아, 여기를 봐라.” 조팀장이 노트북을 가지고 오자 진성은 일어나 그 옆으로 다가갔다. 자신이 아는 그 호도가 아니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그 화면은 진성의 기대를 무너뜨렸다. “............ 마.맞습니다. 호도가 맞습니다.” 섬의 윤곽에서부터 여객선이 닿는 방파제의 끝부분까지 같았다. 진성은 순간 다리에 힘이 빠져 넘어질 뻔했다. 겨우 자리에 앉은 진성은 온갖 감정이 섞인 목소리로 진팀장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지만 아무도 대답할 수 없었다. 가상현실은 수십 명의 테스터 중에서, 수백 번의 테스트 중에서 오직 진성에게만 이상한 반응을 했다. 진성이 테스트를 하면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고 심지어 가상현실의 공간 중에 진성이 아는 공간이 추가되는 사건까지 일어나고 말았다. 프로그래머의 솜씨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잘 모델링 된 공간이었다. 심지어 그냥 옮겨 놓았다고 표현해도 될 정도였다. “휴...... 조팀장, 이러면 진성의 경우에만 이런 현상이 벌어진다고 봐도 무방할까?” “지금은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똑같은 가상현실 시스템인 다른 시스템에서의 테스트에서는 하루에 평균 20번의 테스트를 하는데 이런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수백 번의 테스트 가운데 세 번의 사고가 났는데 모두 진성과 관련된 것입니다.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조팀장의 말은 더욱 더 분위기를 가라앉게 만들었다. “.. 저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진성이로 인해서 저런 현상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그런 현상을 진성이가 어떻게 통제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가 걱정하는 그 통제 불가능의 상황도 해결될 수 있을 테고 왜 진성에게만 반응하는지에 대한 설명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침울한 면마저 있는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곽진호 하드웨어 팀장의 힘 있는 목소리였다. 그 원인을 이용하면 그 결과를 통제할 수 있다는 지극히 당연한 논리였지만 이 상황에서 그런 생각을 쉽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야했다. 곽팀장의 말은 진팀장에게 약간의 희망을 주었다. 이 상태 그대로 계속 개발을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품안에 둔 것과 같은 상태일 뿐이다. 진팀장은 조팀장을 바라보았다. 조팀장은 조금 생각하더니 이윽고 대답했다. “휴... 그 방법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일어난 사건이 이해 불가능한 것이기에 어쩔 수 없이 곽팀장님의 말씀대로 진성이가 계속 테스트하하며 어떻게 해서 새로운 공간이 추가되는지, 어떻게 해서 진성에게만 가상현실에서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지 꼭 알아내야 할 것 같습니다.” “정말 막다른 골목이군. 진성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저 역시 그 방법 밖에 없다면 해 봐야 한다고 봅니다. 어쩔 수 없잖습니까?” “그래, 미안하다. 문명 온라인 프로 리그 일정에 차질 없도록 할 테니까 일주일에 한번은 도와주기 바란다.” “네...” 심각한 상황에서도 억지로 웃는 진성이었다. 12월 14일. 드디어 정규 리그가 끝났다. 각각 웨스턴 리그와 이스턴 리그의 상위 4개팀이 정해졌고 운영위원회에 의해 정해진 개인 타이틀도 다 정해졌다. 각 리그의 상위팀은 각 상대와의 전적을 통해서 우열을 가렸다. 만약 승수가 동률이면 세부적으로 들어가 어느 팀이 패한 게임수가 적은지로 그 우열을 가리고 그것도 동률이면 재 경기를 갖기도 했다. 개인 타이틀로는 다승왕, 승률왕, 리그 MVP 가 있었는데 삼선전자의 프로 게이머 정성진이 다승왕과 리그 MVP를 독식했다. 승률왕은 쌍룡은행에서 혜성같이 나타난 프로 게이머 김한석이었다. 김한석은 베타 테스터 출신으로 초보자들의 문명이라는 비아냥을 받았던 이집트 문명을 수준급으로 끌어올린 게이머로 초보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게다가 문명 온라인의 전설적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게이머 스키피오, 한신과 같은 학교 같은 과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더욱 주목을 받았다. 결정적인 것은 스키피오의 아틀란티스로 유명한 그 게임의 상대가 바로 게이머 김한석이란 사실에 가히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 게이머 김한석의 스타일은 일면 게이머 한신과 비슷했다. 물과 같이 스며드는, 하지만 김한석의 스타일은 마치 끈적끈적한 늪으로 빠지는 듯했다. 김한석과 대결한 많은 게이머들이 인터뷰에서 김한석을 늪의 사신(死神)으로 말하는 바람에 닉네임이 사신으로 굳어져 버릴 정도였다. 다승왕 정성진조차 김한석의 벽을 넘지 못했다. 일각에서는 정성진의 방심으로 인한 결과라고 말했고 정성진 자신도 인터뷰 때 상대를 얕본 것이 결정적인 패인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김한석이 삼선전자에 있었다면 다승왕, 승률왕, 리그 MVP를 독식했으리라 예상할 정도로 탁월한 게임 운영을 자랑하는 게이머였다. 단지 쌍룡은행의 다른 두 선수가 비교적 약한 바람에 많은 게임을 치르지 못해 승률 100%라는 기록을 세우며 승률왕을 차지했을 뿐이었다. 다승왕이자 리그 MVP인 정성진의 플레이 스타일은 독특했다. 정해진 문명이 없다고 봐야할 정도로 거의 모든 문명을 수준급으로 운영했다. 정성진의 문명을 모르는 상대 게이머로서는 소극적인 플레이를 할 수밖에 없었고 상대적으로 정보 우위의 정성진은 그런 상대를 농락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베타 테스터 출신의 많은 전문가들은 그런 정성진이 그래도 나간다면 다음 시즌 리그에서는 그다지 빛을 보지 못할 거라고 예견했다. 지금은 그런대로 아직 각 문명에 대한 이해가 무르익지 않았지만 다음 리그 정도가 되면 선수들의 이해도가 급격하게 올라가 저런 변칙적인 플레이로는 이길 수 없으리라 장담했다. 그런 점은 정성진 자신이 누구보다도 더 잘알고 있기는 했다. 운영위원회는 당초의 계획대로 각 리그의 1위와 4위, 2위와 3위가 붙는 코퍼 시리즈를 그 다음주 월요일부터 갖는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그 주의 주말에 각 리그의 우승을 다투는 실버 시리즈를, 그 다음주에는 대망의 우승을 가리는 골드 시리즈의 계획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리고 운영위원회는 또 하나의 이벤트로 각 개인 타이틀의 타이틀 홀더와 제작사 자소 소프트의 프로 게이머간의 이벤트 매치를 한 해가 끝나고 또 한 해가 시작되는 12월 31일 밤에 갖는다고 발표했다. 리그 초기, 정성진의 요구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은 물론 삼선전자의 메인 스폰서로서 행사할 수 있는 압력 때문이기도 했다. 처음의 반짝한 인기의 리그가 아니라 게임이 진행될수록 더욱 많은 사람들이 임시로 마련한 코엑스를 찾았고 지방의 사람들은 TV를 통해서 스펙터클한 게임 화면을 조금이나마 즐겼다. 그런 인기는 점점 높아졌고 그 결과는 정규 시즌 다음에 펼쳐질 각 시리즈를 공중파가 중계하기에 이르렀다. 공중파의 게임 중계는 있어왔지만 이렇게 생중계로 시리즈를 다 중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각 공중파 방송사는 자체 조사한 자료를 토대로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서 각 시리즈의 경기를 서로 나눴다. 다른 시리즈에 대해서는 충분히 협의를 해서 나눌 수 있었지만 12월 31일의 그 이벤트 경기에 대해서는 방송사들이 양보를 하지 않았다. 결국 추첨을 통해 운영위원회에 속하기도 한 KBC 방송국이 그 중계권을 따냈다. “흡.........” 진성은 문명 온라인 팀에서 현준과 연습을 하다가 잠시 쉬는 틈을 이용해서 진각을 하지 않은 채 팔극진결을 연습하고 있었다. 가상현실에서 여러 번 테스트하는 동안 그 엄청난 힘에 대한 컨트롤을 아주 일부분이나마 할 수 있게 되었다. 거대한 강이라면 시냇물 정도의 물줄기를 자기 마음대로 바꿀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발전은 유조의 가르침에 대한 꾸준한 생각과 적용이 겹치면서 상승효과를 발휘해 나타난 결과였다. 유조 역시 그런 진성의 노력과 천성에 기뻐하면서 본격적으로 팔극진결을 가르쳤다. 팔극진결은 그야말로 팔극신권의 바탕이 되는 것이어서 굉장히 중요했다. 진성은 그런 중요한 보물을 그 창시자에게 직접 사사 받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확실히 팔극본결과 비교할 수 없는, 차원이 달라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기묘함이 흘러 넘쳤다. 유조와의 수많은 대련 속에서 단 한번도 유조의 공격 한번을 넘기지 못해 스스로의 실력을 잘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진성의 실력은 그 나이에 비해서는 가히 넘친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타고난 진성의 성격과 유조의 가르침으로 힘의 남용은 진성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그 오묘한 움직임 속에서 자신을 찾으려는 그 구도의 자세가 서서히 진성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그런 진성의 내적 변화는 프로 게이머로서의 능력에도 영향을 끼쳤다. 빠른 상황 파악과 대담한 결단이 장점이었던 진성에게 특별한 약점은 없었지만 굳이 꼬집는다면 느긋하게 기다리는 면이 부족했다. 하지만 진성의 변화된 마음은 그런 결점마저 사라지게 만들고 말았다. 또한 자신에 대한 자신감은 좀더 객관적인 시야를 가져다 줘서 오히려 열심히 연습한 현준을 예전보다 더 능가할 수 있었다. “...... 자. 너, 별로 연습도 하지 않는데 어떻게 더 강해질 수 있냐?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다.” 팔극진결을 마치고 땀을 닦는 진성에게 다가가 음료수를 주고는 퉁명스러운 어조로 현준은 말했다. 옛날에도 제대로 하면 이기기 힘들다고 느꼈지만 그 때의 진성이 마치 맹렬한 바람이라면 지금은 밀어도 꿈쩍도 않는 웅장한 산처럼 느껴졌다. 이래서야 어떻게 해 볼 맛이 나지 않았다. 여전히 빠른 컨트롤과 상황판단은 진성의 특기였지만 계속 연습을 같이 해 온 현준으로서는 뭔가 변했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진성은 음료수를 마시며 웃기만 했다. “요즘 네가 열심히 하는 그 팔극권, 그것 열심히 해서 그런가? 진짜 그런 거야?” “하... 음료수 시원하다.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별로 변한 것은 없는데. 단지 운동을 해서인지 모르겠지만 게임을 할 때에 마음이 굉장히 편해. 이제까지 살아온 생활이 매우 긴장의 연속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편해. 그렇다고 무슨 도를 닦는 것은 아니니 오해 하지는 마. 뭐랄까. 기분 좋은 바람을 맞을 때의 그 기분이랄까. 아무튼 그래. 너도 중간에 포기하지 말고 같이 하지 그랬어?” 몇 번 유조 어르신 댁에 가서 진성과 같이 수련하던 현준은 곧 포기하고 말았다. 처음부터 유조의 가르침이 진성을 기준으로 했기에 현준이 따라하기에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현준은 그 포기가 일생일대의 사건으로 여겼다. 마치 자신이 친구를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하지만 현준은 몸은 정직했다. 현준은 진성의 실력이 부러웠지만 다시는 그 유조 어르신의 집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가끔 꿈속에 나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포기다 포기. 제발 너한테 제대로, 기분 좋게 이겼으면 좋겠다. 휴... 이러다가 그 이벤트 게임에서 형편없이 지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아, 그 녀석 게임 봤는데 정말 잘 하더라. 꼭 붙어 봤으면 좋겠다.” 현준이 말한 상대는 바로 과 친구이자 쌍룡은행의 프로 게이머 김한석이었다. 사신이라는 닉네임으로 더 유명한 게이머로 한신과 비슷한 스타일이라 더 원하는지도 몰랐다. “현준아, 그건 불가능할 걸.” “왜?” “내가 한석이와 게임할 테니까. 예전에 내가 말했지. 너는 그 게이머 정성진과 해야 된다고.” “....... 그 쪽에서는 너를 지목했잖아.” “내가 하기 싫으면 안해. 이미 팀장님께도 말씀 드렸는데.. 그렇게 하자고 하시더라. 이번 이벤트에서는 네가 정성진과 붙고 내가 한석이와 게임을 하게 될 테니까 너는 그 정성진이라는 게이머나 잘 분석해라. 알겠냐?” “너...?” “나는 절대 네가 진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후회하지 않을 게임만 한다면 충분히 네가 이겨. 내가 보장한다니까.” “.......” “나, 로플팀에 테스트하러 가야하니까 혼자서 연습해라. 아니, 동진이 형과 연습하면 되겠다. 그리고 저녁에 유조 어르신께서 부르셔서 가야하니까 밤에 연습하다가 알아서 퇴근해라. 집에서 보자.” 진성은 현준이 대답하든 말든 상관없이 툭 말을 던져 놓고는 요람을 빠져나갔다. “저 왔습니다.” “그래. 진성이 왔구나. 조금만 기다려라.” 한참 계속 테스트를 하는 가상현실 시스템과는 달리 진성이 전용으로 꾸며진 가상현실 시스템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진성이의 테스트를 위해서는 원래 하고 있던 시스템을 두고 멤버들이 모두 이동해야만 가능했다. 동시에 두 개의 가상현실 시스템을 세팅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예 없었다. 그 동안의 테스트로 어느 정도 가상현실과 진성과의 관계를 추측할 수 있었다. 이제까지의 테스트 결과로도 유추할 수 있었지만 가상현실은 진성에게만 반응했다. 진성이 접속하면 100% 이상현상을 일으켰고 다른 사람이 접속할 경우에는 100% 통제 가능했고 안정적이었다. 게다가 어느 정도 테스트를 하자 진성의 의지대로 공간을 생성하고 사라지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런 것을 의식적으로 제대로 하기는 힘들었지만 여러 방법을 동원해서 진성의 의지로 공간 확장이 가능함을 밝혀냈다. 또한 공간 확장과 마찬가지로 진성만 가상현실 시스템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진성외의 사람들에게는 그 전보다 훨씬 더 안정적인 가상현실 시스템이었다. 진팀장과 조진철, 곽진호가 주목한 것은 진성의 의지나 의도가 가상현실 내에서는 신기하게도 그대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었다. 이미 어느 정도 조율되어 접속한 누구도 그 공간을 벗어나거나 공간 안에서 다른 무엇인가를 만들 수 없었다. 현실과 마찬가지로 누구도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진성은 그 모든 것에서 예외였다. 진팀장과 연구원들이 내린 결론은 처음 일어나서 진성이 식물인간이 될 뻔 했던 그 때의 그 사건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진성과 가상현실 시스템 사이에 특별한 인터페이스가 생긴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그 처음의 사고를 제외하고는 진성이 한번도 위험에 노출된 적도 없었고 오히려 도움이 되는 경우였다. 아직 더 많은 테스트가 필요했지만 일단은 그렇게 결론을 내린 연구진이었다. 로플팀에서 진성은 이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버렸다. 만들어진 공간에 생기를 불어넣는 작업은 프로그래머가 할 수 있었지만 공간 자체의 생성이나 소멸은 진성만 할 수 있었다. 진성은 이제 테스터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프로그래머이자 시스템 관리자였다. 가상현실 시스템의 어떤 부분은 진성이 아니면 접근조차 불가능하기도 할 정도로 진성은 더욱 깊숙이 가상현실에 개입되었다. 진성이 오늘 해야 할 일은 만들어진 세계에 대한 물리법칙의 조정이었다. 로플팀에 속한 게임 기획자들이 요구한 것 중에 하나가 판타지의 도입이었다. 현실과 똑같은 가상현실도 좋지만 게임은 꼭 그럴 필요가 없고 어떨 경우에는 현실과 달라야 더 인기를 끌 수 있다는 이유였다. 이미 인기를 끌고 있는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 속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마법이라는 개념을 실제 가상현실에서 구현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오늘의 목적이었다. 기존의 물리학은 이제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에 기획팀의 의견과 실제 테스트 멤버들과의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서 몇 가지 가능할 수 있는 이론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나머지는 가상현실에서 진성이 해야 할 부분이었다. “준비되었습니다.” “저도 준비되었습니다.” “좋아, 진성아 가보자.” “네.” PVR-2에 탑승한 진성은 곧 익숙한 과정을 거쳐서 가상현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뒤에 펼쳐진 산과 앞에 흐르는 강, 그 사이에 펼쳐진 현대의 도시. 그 도시에는 물론 쥬신 대학과 자소 소프트의 빌딩도 존재했다. 호도는 어색한 듯해서 진성이 삭제해 버렸다. 진성은 한모금 숨을 들이키고는 내뱉었다. 아직도 조금은 산위에서의 그 상쾌함과 거리가 있었다. 진성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말했다. “어떻게 할까요?” “뭐 일단 마법이 가능한지 알아야 하니까 미리 말한대로 해 보면서 어떻게 마법을 구현할지 한번 알아서 해봐.” 현실에서 전혀 불가능한 마법이었기에 조팀장도 뭐라고 할 수 없었다. 현실을 모델로 마법을 구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진성은 알아서 해 보라는 말에 기가 찼다.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을지 몰랐다. 마법이라는 것, 진성 자신이 알기로 뭔가 주문을 외면 불덩어리가 나가고 순간이동을 하고 변신하는 그런 것이었다. 일단 진성은 손을 앞으로 내밀어 손 위에 불덩어리를 상상했다. “화르르..” 진성의 손 위에는 불덩어리가 순식간에 나타났고 마치 진성은 공기로 된 장갑을 낀 것처럼 불덩어리를 잡더니 앞으로 던져버렸다. “휘이익.... 꽝!” “와... 대단한데...” 진성은 자신이 던진 불덩어리를 보고 자신이 놀랐다. 사람크기 만한 넓이에 무릎 정도의 깊이로 구덩이가 패였다. “조팀장님, 이 정도면 됐나요?” 공간 확장에 대해 알고 있던 사람들도 진성의 불덩어리 묘기에 또 다시 놀랐다. 진성은 다시 한번 불러서야 조팀장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진성의 노력에도 마법은 그 개념부터 문제가 있음을 알았다. 진성의 경우 자신의 의지가 가상현실에 통했기 때문에 그런 방법이 가능했지만 보통 사람의 경우에는 그 자체가 불가능함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에 대한 해결책은 의외로 테스트 요원 변태수가 내놓았다. “.... 저를 이상하게 보지 마십시오. 저... 사실 판타지 매니아이기도 하거든요. 평소에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하는데 그 마법에 대해서도 이런 저런 궁리를 했습니다. 조금 전에 떠오른 아이디어인데 무술과 비슷하게 만드는 겁니다. 무술의 경우에는 유조 어르신께서 수고하셨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마법을 만들 수 있는 마법사가 있습니다. 그 마법을 모델링해서 보통 사람들이 쓸 수 있도록 만드는 겁니다. 뭐 복잡한 인터페이스 같은 것은 모르겠지만 보통 게이머로서 그런 것은 알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오호... 좋은 생각이기는 한데.. 어떻게 마법을 사용하지?” “무술은 익히는 거지만 마법의 경우에는 익히는 것과 더불어 그 주문을 외우는 겁니다. 여러 가지로 설정하기 나름이겠지만 마법사용을 하려면 손으로 기하적인 무늬를 완성해야 한다든지 해서 물리적으로 익히게 만들고 또한 입으로 정확하게 그 주문을 말해야 마법이 완성되도록 하는 겁니다. 그 밸런스는 조팀장님이 적절하게 하시면... 어쩌면 마법과 무술을 공존시킬 수도 있을 겁니다.” “오.. 나쁘지는 않는데... 조팀장 어떻게 생각하나?” “가능할 것은 한데.... 일단 진성이 그만한 시간을 낼 수 있을지.. 그리고 그 모델링이 끝난 후에도 많은 밸런싱 조정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가능하다는 말이지. 좋았어. 태수, 자네가 기획안을 만들어 보게. 진호, 좀 도와주게나. 시간이야 우리에게 얼마든지 있으니. 안 되면 무술만 지원되는 것으로 먼저 시장에 내놓고 돈 좀 벌고 나중에 마법까지 포함된 걸로 내놓으면 되지 않겠나? 조팀장, 한번 태수와 같이 진행해 보게나.” “예, 알겠습니다, 대장님.” 몇 가지 더 논의한 후에 테스트에 대한 회의를 끝낼 수 있었다. 진성은 유조 어르신 댁으로 가기 위해 요람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진성아, 잠깐 나 좀 보자.” 진팀장이 부르는 소리에 진성은 엉겁결에 대답했다. “예? 예.” “요즘에도 병원에 계속 가기는 하냐?” “.......” “테스트 하는 조건은 분명 병원에 가서 일주일에 한 번 검사를 받는 것이었다. 당장 병원에 가서 검사 받아라. 그렇지 않으면 다음부터 테스트는 없다.” 원래 테스트를 개인적으로 반대하는 진팀장과 진성은 서로 약속을 했다. 진팀장이 허락하는 조건으로 매주 진팀장이 잘 아는 의사가 있는 병원으로 가서 검사를 받겠다고 진성은 말하고 말았다. 하지만 몇 주 지나자 귀찮아진 진성이었다. “.... 예, 알겠습니다. 테스트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장은 그렇고 내일 오전에 받도록 하겠습니다.” “왜, 무슨 일 있나?” “유조 어르신께서 저를 부르셔서요. 지금 가봐야 할 것 같은데요..” “그래? 무슨 일로?”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오라고 하셔서...” “그래. 그럼 내일 오전에는 꼭 병원에 가서 검사 받아라.” “예. 알겠습니다.” 한동안 진팀장을 피해 다녔던 진성은 꼼짝없이 병원으로 가서 검사를 받아야했다. 진성은 유조 어르신 댁으로 와서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 문을 열어주자 곧바로 거침없이 건물 사이의 길을 통해 중지의 도장으로 갔다. 외부사람에게는 전혀 공개하지 않는 곳이 바로 도장이었다. 평소와는 달리 도장 밖에는 붉은 종이들이 달려 있었고 안에도 온통 붉은 종이가 여기저기 붙여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평소의 차림이 아닌 흰색의 깔끔한 도복을 입고 있는 유조 어르신을 볼 수 있었다. “할아버지, 무슨 특별한 일이 있으신가요?” “진성아, 당연히 오늘 특별한 일이 있다.” 오랜 동안 같이 지내다 보니 진성은 편하게 할아버지라고 불렀고 유조는 진성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진성은 무슨 일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좋은 일인가요? 혹시 할아버지 생신이신가요? 아닌데... 할아버지 생신은 봄이시잖아요. 어떤 일인가요?” “하하하하.. 내게도 좋고 네게도 좋은 일이다. 조금만 기다리거라.” 진성은 몹시도 궁금했지만 단호하고 말하고는 뒤로 돌아서 정좌를 하고 앉은 할아버지 유조에게 뭐라고 묻기도 그랬다. 진성은 테스트를 하고 와서 그런지 약간 몸이 피곤해서 도장의 뒤로 가서 팔극진결을 펼쳤다. 도장이라서 자신이 마음껏 진각을 구르며 팔극진결을 펼쳤다. 요람은 고층이라서 있는 힘껏 진각을 하면 조금은 위험했다. 진성은 곧 눈을 감고서 팔극진결을 펼쳤다. 조용한 가운데 기세가 일어나고 기세가 일어나면서도 진중하고 그러면서 바다처럼 움직이는 동작이 진성의 몸에서 일어나 그 주위를 감쌌다. 얼마인지도 모를 시간이 흘렀다. “어르신, 대단한데요. 이 친구가 그 친구입니까?” “맹방효, 자네구만. 맞아 이 녀석이야.” 거구의 중년남자의 물음에 어느새 일어나 돌아서 있는 유조가 대답했다. 거구의 중년남자 옆에는 귀밑이 희끗희끗한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노인도 있었다. “유형, 이제 편히 눈 감아도 되겠군.” “송형도 왔구료.” 그 뒤를 이어서 마른 체형의 중년인 최황과 진성의 사범을 했던 최철훈, 강인한 인상의 정철현이 들어와 유조에게 인사했다. “어르신, 축하드립니다.” “다들.. 고맙다네. 아, 이제 저 녀석이 깨어나는구만.” 유조의 말이 끝나자마자 몇 번인지 모르게 반복한 팔극진결의 마지막 부분을 하고서는 곧 눈을 떴다. 갑자기 눈앞에 사람들이 있자 순간 자신이 어디 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은 진성이었다. “아... 맞다. 어르신?” “이 녀석아, 진결을 펼칠 때 꼭 그렇게 몰입을 해야 하겠느냐?” 유조의 말속에는 잔뜩 자랑스러움이 가득했다. 뭔가를 할 때 몰입하기란 쉽지 않았다. 더욱이 팔극진결은 대단히 복잡해서 몸에 완전히 익히지 못하면 그 펼치는 순간에 조금 정신이 흐트러져도 꼬여 버릴 수도 있었다. 진성은 그냥 익힌 단계를 넘어선 것이다. “진성아, 인사해라. 내 친구이자 나를 도와준 분들이시다.” 진성은 일일이 가서 인사를 했다. 그 중에는 사범 최철훈도 있었다. 인사를 하면서도 진성은 사람들이 왜 이렇게 모였을까 생각했다. 도무지 자신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진성아, 저 쪽 방으로 가서 이 옷으로 갈아입고 오너라.” 진성은 유조 어르신이 다가와 자신에게 준 옷을 보았다. 보니 유조 어르신이 입고 있는 옷과 같았다. 왜 입어야 하는지 몰랐지만 진성은 옷을 들고는 밖으로 나가 갈아입고 다시 들어왔다. “자, 지금부터 팔극권의 달인이시자 정통 계승자이시며 팔극신권의 창시자이신 극권 유조, 그 제자가 될 강진성의 배사지례(拜師之禮)를 거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진성이 안으로 들어오자 맹방효의 크고 엄숙한 목소리가 도장 안에 울려 퍼졌다. 도장 안에는 제일 앞에 유조가 앉아서 진성이 있는 쪽을 보고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두 줄로 그 앞에 통로를 만든 채 마주 보면서 앉아 있었다. 어리둥절한 진성을 본 최철훈은 자신의 옆으로 앉혔다. “앉아 있다가 네 이름을 부르면 밖으로 나가서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저.... 이게 무..무엇인가요?” “뭐? 뭔지 몰라? 하하하.. 어르신도 참 대단하시군. 너 어르신이 혹시 제자가 될 생각 없냐고 묻지 않으셨나?” “며칠 전에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워낙 지나가는 말씀으로 하셔서..” “제자가 된다고 말했지?” “....네..” “그렇게 된 거다. 오늘 부로 너는 유조 어르신의 직계 제자가 되는 것이다. 아마 이 사실을 알면 전국에 퍼져 있는 많은 무술가들이 너를 부러워할 게 자명하다. 사실 나도 지금 네가 부러우니까. 자, 정신 차려라. 아주 중요한 의식이다.” 진성은 최철훈의 말을 듣고는 정신을 쉽게 차릴 수가 없었다. 제자라니. 물론 유조 할아버지의 제자라면 그리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너무 갑작스러웠다.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귀뜸을 주셨으면.... “....... 제자 강진성.. 구배지례(九拜之禮).........” 뭔가 많은 얘기를 하는 중에 자신의 이름이 들리자 진성은 일어나서 앞으로 갔다. 맹방효는 크고 부리부리한 눈으로 진성을 바라보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일배(一拜).” 무슨 말인지 몰라 가만히 있던 진성은 최철훈의 절하라는 제스처를 보고야 큰 절을 유조에게 올렸다. “이배(二拜)” ..... “구배(九拜)” 9번의 절을 하고서야 진성은 풀려났다. 그 뒤에도 조금은 이상한 물을 마셔야 했고 다시 한번 더 9번의 절을 해야만 했다. 거의 한 시간 반 정도의 시간이 지나서야 배사지례는 끝이 났다. 진성은 완전히 지쳐버렸다. “진성 이 녀석아, 놀랐지? 이제 네 녀석은 빼도 막도 못한다. 진성아 너는 이제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제자가 된 것이다. 기쁘지 않냐?” “기쁘긴 한데.. 미리 말씀 좀 하셨어야죠.” “혹시 네 녀석이 하기 싫다고 할까봐 미리 일을 벌린 거지. 하하하하... 너도 조금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즐겨라. 오늘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날이니까.” 사람들은 정원으로 나와 이미 준비된 음식을 마시며 서로 아는 사이인지 떠들어댔다. 진성과 유조는 곧 옷을 갈아입고는 그 사람들 속에 끼어서 먹고 마셨다. 진성은 오늘 또 다른 세계를 접하게 되었다. 하지만 진성은 달인 유조의 직계 제자라는 이름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실감하지 못했다. 코퍼 시리즈의 경기들은 공중파 방송으로 15%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방송사들을 흐뭇하게 했다. 게임 전문 채널의 경우도 시청률이 10%가 채 나오지 않는 것을 감안하면 대단한 인기였다. 이것은 인터넷을 중계된 것을 본 사람을 제외한 것이기에 인기는 더욱 컸을 거라 추측했다. 이스턴 리그에는 삼선전자와 동부증권, 제일전자, 삼일이동통신이 올라왔고 웨스턴 리그에는 LQ 전자와 쌍룡은행, 계룡투신, 선린종합상사가 올라왔다. 코퍼 시리즈를 통해서 이스턴 리그에는 삼선전자와 동부증권이 웨스턴 리그에는 LQ전자와 쌍룡은행이 맞붙게 되었다. TV 방송을 통한 인기는 스포츠 신문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연예인의 스캔들이나 스포츠 스타들의 근황이 주를 이루던 12월의 스포츠 1면을 드디어 코퍼 시리즈와 곧 이어질 실버 시리즈의 명승부와 각 리그의 유명 게이머들의 사진이 차지한 것이다. 인기의 상승효과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아직 시리즈 중임에도 불구하고 인기 팀인 삼선전자와 LQ전자 쌍룡은행의 프로 게이머들은 각종 인터뷰와 버라이어티 쇼의 게스트 섭외 0순위였다. 그 여파는 쉬고 있는 자소 소프트의 게이머 진성과 현준에게도 미쳤지만 까다로운 매니저 서재필에 의해서 원천봉쇄 되고 말았다. 게다가 그 옆에 붙어 있는 이준의 존재감도 한몫 단단히 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연습을 해야 할 것 같다. 진성아, 진팀장님, 이팀장님과 논의했는데 네게 일주일에 토요일 오후, 일요일 그리고 수요일 오전만 특별히 시간을 준다. 그 외에는 철저하게 내 통제에 따라라. 그리고 현준이, 너는 이제부터 1분도 내 통제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 그럴 경우 이준씨의 철퇴를 맞게 될 것이다. 불만 있냐?” 드디어 매니저 서재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겨우 열흘 정도 남겨둔 시점에서 그 이벤트를 위해 총력전을 펼치기 위해서였다. 진성의 경우 토요일과 일요일은 팔극신권의 계승자로서 유조 어르신을 만나야했기 때문에, 그리고 수요일 오전은 로플팀의 테스트에 참석해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만 현준의 경우에는 그런 것이 없기에 100% 자신의 지시를 따라와 주기를 요구한 것이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실제 그 통제라는 것이 열심히 연습하고 몸을 관리하는 거라서 별 반대는 없었다. 진성과 현준은 당연히 찬성했다. 몸의 밸런스를 유지하고 집에까지 차로 태워주는 등 여러 가지로 신경 써 준다는데 반대할 사람은 없었다. 보디가드 이준은 진성이 자신도 여러 사람을 거쳐 들은 그 달인 유조 어르신의 직계 제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굉장히 놀랐다. 자신이 알기로 진성은 운동을 아예 못하는 그런 고문관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재능이 뛰어난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 마음에 진성에게 도전했다가 단 한방에 기절하고 말았다. 이준은 한동안 진성을 피했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쪽팔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도장에 가서는 자신이 그 유명한 달인 유조 어르신의 직계 제자와 손을 섞어 보았다고 자랑하기까지 했다. 드디어 실버시리즈가 시작되었다. 실버 시리즈부터는 삼선전자가 돈을 아낌없이 쏟아 부어 만든 슈퍼 센터에서 하기로 결정되었다. 슈퍼 센터는 7천여 명의 관객들이 대형 스크린을 통해서 마음껏 프로 선수들의 게임을 볼 수 있게 만든 게임 전용 센터였다. 특히 삼선전자가 독자 개발한 대형 비전을 설치함으로 게임의 여러 화면 뿐 아니라 게임기 안의 게이머의 표정까지 잡아내어 관객들이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TV 중계와는 완전히 차별화시켜 젊은 게이머들이 슈퍼 센터로 오도록 만들었다. 또한 입장을 무료로 함으로 완전히 게임 팬들을 매료시켰다. 실버시리즈의 전 경기에 슈퍼 센터는 매진이었다. 가득 차서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팬들은 삼선 전자의 배려로 외부에 설치된 큰 화면을 통해 게임을 즐기기도 했다. 공중파 TV의 위력, 스포츠 신문의 선전 그리고 삼선전자의 과감한 투자로 인한 효과 등이 맞물려서 실버시리즈의 시청률은 탄력을 받아 23%를 넘었다. 주말 23%라면 대단한 시청률이었다. 방송 관계자들은 이런 수치라면 골드 시리즈의 경우 잘하면 30%를 넘을 수도 있겠다면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프로 야구가 끝나고 프로 농구 시즌이 한창일 때지만 크리스마스와 맞물려서 그리 시청률에서 호재가 없었는데 문명 온라인, 영웅 스키피오의 프로 리그는 이 시기에 딱 들어맞는 새로운 화제였다. 특히 재계의 라이벌이 어쩌면 대결을 벌일 수도 있다는 기대감에 더 흥미진진해 관심이 더욱 커졌다. “휴... 정말 너와 게임할 맛이 안 난다.” 진성과 게임을 해서 또 져버린 현준은 땀으로 젖은 머리를 털면서 한 숨 쉬듯 내뱉었다. 현준은 진성이 새로운 전략을 해서 지는 경우가 아닌 이상 거의 이겨보지를 못했다. 조금 전에도 이겼지만 로마제국을 모두 기병으로 바꿔 버리는 진성의 기행 때문에 이길 수 있었다. 그것도 완승을 거두지는 못했다. 진성의 게임은 옛날보다 더 끈적끈적했다. 언제인지 모르게 젖어버렸다. “진성아, 그 늪의 사신이라는 닉네임.. 너한테 딱 맞다. 아마 한석이도 너와 게임하면 골치 아플 거다. 휴..” 현준은 자신 역시 노력하는데도 진성에게는 통하지 않자 한숨만 푹푹 쉬었다. 99%의 노력과 1%의 영감이라고 했는데... 지금의 자신과 진성을 보면 99%의 노력과 1% + 알파의 영감처럼 느껴졌다. 도저히 그 알파를 넘지 못하겠다고 느끼는 현준이었다. 현준은 부쩍 한숨이 많아졌다. 현준의 실력 역시 최고 수준이었지만 매일 상대하는 사람이 진성이라 상대적 박탈감이 상당했다. 그 때, 이 상황을 해결한 사람은 바로 매니저 서재필이었다. “진성아, 현준아. 인사해라. 우리 팀에 새로 들어오게 된 프로 게이머 성진규다.” “안녕하세요. 성진규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는 19살입니다.” “진규는 베타 테스터 출신인데 이제까지 문명 홈페이지에 굉장한 양의 전략, 전술을 올린 그야말로 노력파인데다가 재능도 갖추었다. 실력이야 한번 해 보면 알 것이고..” “19살? 와... 어리네. 10대라니. 나는 10대였을 때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현준의 너스레는 서재필의 한마디에 무너졌다. “10대? 나는 20대도 가물가물하다, 이 녀석아.” “하하....” “형이 스키피오죠? 저... 형 팬이거든요.” “그..그래? 아무튼 잘 해보자.” “크하하하하하하하하...” 현준이 폐부 끝까지 짜내어 웃음을 터트리는 이유는 오랜만의 연승 때문이었다. 성진규도 나름대로 아마추어들 사이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사람이었지만 프로의 벽은 높았다. 7전 전패라는 성적이 그것을 증명했다. 진규는 아마추어 게이머들과 베타 테스터들 사이에 작은 스키피오라고 불릴 정도로 판단이 빨랐고 컨트롤도 좋았다. 하지만 그것은 아마추어의 수준이었다. 진규는 자신이 질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완벽하게 질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미 게이머 스키피오와 한신의 플레이를 분석도 해 봤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진규는 그 영상이 문명 온라인이 출시 되기 전, 알파 테스트 단계였음은 고려하지 않았다. 현준은 의기소침한 진규와는 달리 너무 기분이 좋았다. 마치 십년 묵은 체증이 한순간에 풀리는 듯했다. 이제까지 진성에게 받은 그 보이지 않는 스트레스도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하지만 진규는 예전 현준이 느낀 그 참담함을 느끼게 되었다. 아니, 그보다 더 큰 벽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진규에게 다가간 사람은 바로 진성이었다. “진규야, 기운 내라.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 다 처음에는 지면서 시작하는 거다. 너는 이제까지 어떻게 게임을 분석하고 전략을 세웠는지 모르겠지만 나와 현준은 정말 오랜시간 동안 꾸준히 이 게임을 해 왔다.” 진성은 진규를 보면서 자신이 정리했던 전략 노트를 보여 주었다. 진규는 메모로 가득한 노트를 보며 놀랐다. 자신이 꼼꼼하게 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게... 정말인가요?” “나와 현준은 같이 병법까지 공부했다. 그리고 그것을 실전에 사용하기 위해 노력을 했지. 그 결과가 이 노트야. 그리고 어차피 상대 게이머도 사람이기 때문에 그 심리에 대해서 잘 알게 되면 이길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지. 내 경우에는 그 심리에서 조금, 아주 조금 우위에 있기 때문에 승률이 조금 좋은 편이지.” 진규는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알았다. 하지만 왠지 활력이 솟았다. 자신도 노력하면 이 사람들처럼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저... 저와 게임 좀 해 주실 수 있겠어요?” “게임? 아.... 그러지 뭐.” 하지만 진규는 상대를 잘못 택했다. 진규는 그 뒤 진성에게 21전 20패 1무를 기록했다. 물론 그 1무란 진성이 로플팀의 호출을 받고 게임을 중단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멍한 진규에게 다가간 사람은 바로 현준이었다. “진규야, 네 맘은 내가 안다.” “네?” “나도 최근에 저 진성이에게 제대로 이겨본 적이 없거든.” “정말이세요?” “내가 왜 너를 붙잡고 놀리겠냐? 정말이다.” 그 순간부터 진규와 현준은 ‘타도 스키피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열심히 연습에 돌입했다. 현준의 한숨도 사라졌고 멍했던 진규의 모습도 사라져 결국 매니저 서재필의 의도대로 활기가 넘쳐흘렀다. 인기리에 끝난 실버 시리즈에서 이스턴 리그에서는 예상대로 삼선전자가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웨스턴 리그에서는 이변이 일어났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LQ전자의 승리를 점쳤다. 쌍룡은행에 김한석이라는 승률왕이 있었지만 나머지 두 선수가 약해서 LQ전자에 객관적으로 뒤질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승부는 해 봐야 아는 것이라는 옛말이 전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선봉으로 나온 LQ전자의 조진수 선수는 쌍룡은행의 김현철 선수를 그리 어렵지 않게 이겼다. 하지만 두 번째로 나온 쌍룡은행의 전주환 선수가 LQ전자의 전수철 선수를 극적으로 이기자 분위기는 반전되었다. 이유는 쌍룡은행의 나머지 한 선수가 무패의 승률왕 김한석 선수였기 때문이었다. 김한석은 그 분위기를 깨지 않고 박수민 선수를 이겨서 쌍룡은행이 웨스턴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결국 각 리그의 우승자끼리 대결하는 골드 시리즈는 이스턴 리그의 삼선전자와 웨스턴 리그의 쌍룡은행의 대결로 좁혀졌다. 사람들은 개관적 전력의 우위에 있는 삼선전자였지만 삼선전자의 유일한 팀 패배가 바로 쌍룡은행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뚜껑을 열어봐야 결과를 알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 중에서 가장 관심을 끈 것은 바로 다승왕 정성진과 승률왕 김한석의 재대결이었다. 정성진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복수전을 겸한 것이어서 말 만들기 좋아하는 스포츠 신문들은 그것을 집중 부각시켰다. 운영위원회은 12월 23일 저녁에 골드 시리즈를 슈퍼 센터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24일로 하려다가 크리스마스 이브인 관계로 하루 당겨서 23일 저녁에 골드 시리지를 열기로 해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외로운 싱글들이나 게임 폐인들은 그런 결정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휴... 언제 1승을 해 보려나?” 조금 전까지 현준에게 68전 65패 3무를 기록 중인 진규는 한숨을 푹푹 쉬었다. 얼마 전 현준 모습 그대로였다. 타도 스키피오를 외쳤지만 날이 가면 갈수록 그 실력 차이를 실감하게 되자 자신이 따라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진규는 괜히 프로 게이머가 된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 진성과 현준에게는 아직 미치지 못하지만 그 컨트롤이나 가끔 나오는 독특한 전략은 분명 진규에게 재능이 있음을 알게 해 주었다. 진규는 내년에 바로 시작된다는 프로 리그 생각에 밥맛도 없고 심지어 기운마저 빠졌다. 진규는 요람을 나와 복도 한 곁에서 자판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야, 너 여기서 뭐해?” “현준이 형, 저... 점점 더 자신이 없어져요.” 진규는 힘이 빠진 소리로 대답했다. 눈마저 힘이 없었다. “뭐가? 제대로 하지도 않았잖아?” “저도 저 나름대로 했다구요. 진성이 형이 준 그 노트는 이제 보지 않아도 완전히 외울 정도가 되었다니까요.” 현준은 진규의 대답을 듣더니 멍했다가 박장대소하기 시작했다. “뭐? 그 노트로 연구했다고? 하하하하... 네가 왜 이렇게 나한테 맥없이 무너지나 했더니만 그 노트를 봤구나. 이 녀석아, 그 노트 백날 봐야 날 이길 꿈도 꾸지 못할 거다.” “네? 진성이 형은 그 노트 좋다면서 저한테 복사까지 해 줬는데요..” “이 녀석아 생각 좀 해 봐라. 그 어깨 위에 있는 것은 어디다 써 먹을 거냐?” 현준은 자신이 평소에 그나마 많이 들었던 말을 진규에게 써먹었다. “........” “아, 답답해. 야, 이 노트 누가 만들었냐?” “그야 당연히 형하고 진성이 형이 만들었잖아요.” “그러면 그 책으로 연구한 너와 그 책을 만든 우리들이 붙으면 누가 이기겠냐?” “아!!” “아마도 예전에 너와 실력이 비슷한 녀석한테는 충분히 이길 수 있을지 몰라도 그렇게 해서는 나와 진성을 이길 꿈도 꾸지 마라. 휴.... 제대로 노력 좀 하고 짜증을 내던가, 그리고 나서 기운이 빠져도 빠져라. 그래야 안 쪽팔리지. 너 지금 진성이 찾아가 봐라. 도대체 그 녀석이 뭘 하는지.... 그것 보면 네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거다. 내가 아무리 해도 정말 이기기 힘든 녀석이 바로 진성이니까.” “네.....” 진규는 힘없이 대답했다. 야단 맞고 기분 좋은 사람은 세상에 없다. “야! 성진규! 기운 내라. 빨리 가 봐라.” 현준의 호통에 진규는 뛰어서 요람 안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에 앉아서 뭔가를 읽고 있는 진성에게로 쭈뼛거리며 다가갔다. “저.... 진성이 형...” “왜? 뭐 물어볼 것 생겼냐?”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 뭐하세요?” “지금 뭐하냐고? 그걸 네가 왜 물어?” 뭐하냐는 이상한 질문에 진성은 진규를 보며 물었다. 진규는 그런 진성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자신이 기운이 없어 복도에 있는데 현준이 자신에게 호통을 쳤고 현준의 말대로 진성이 뭐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왔다는 얘기를 하자 진성은 피식 웃고 말았다. “.... 현준이 녀석이 너를 많이 신경 쓰는구나. 내가 뭐하고 있냐고? 봐라.” 진성은 읽고 있던 책을 진규에게 보였다. “어? 로마사 논고? 아니.. 마키아밸리?” 진성이 읽고 있는 책은 리비우스의 로마사에 대한 자신의 평을 적은 군주론의 저자 마키아밸리의 논평이었다. 진규는 책 제목을 보더니 진성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왜 이런 걸 읽느냐고? 실제 로마에 대한 얘기니까. 이런 것을 뒤지면 의외로 많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거든. 정해진 전략으로는.. 필승은 힘들어. 풍부한 전략적인 사고를 가져야지.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다양한 게임 경험과 함께 게임에 적용할 수 있는 다양한 상황에서의 다양한 아이디어를 평소에 많이 연습해야 돼.” “아...” “너도 나와 현준이 하루에 두 번씩 연습하는 것 알지? 나는 그 때마다 다른 전략으로 현준과 붙으려고 노력하지. 그런 아이디어들을 이런 책들로부터 얻는 거야. 문명 온라인에서 표현된 로마제국은 그야말로 역사서에 나타난 로마제국과 일견하기에는 비슷한 점투성이니까. 물론 안으로 들어가면 다르지만, 로마를 선택한 내게 이런 참고할 책들이 많다는 것은 행운이지. 현준의 그리스와는 달리 로마 사람들의 저서나 로마의 사고는 아주 합리적이니까. 어쩌면 현준이 내게 지는 이유가 이런 아이디어의 차이일지도 몰라.” “아... 이런 것까지 읽어야 하나요?” 진규는 질린 듯한 눈 반, 감탄한 눈 반으로 진성을 바라보았다. “아니, 자신이 필요하면 읽는 거지. 확실히 알아두어야 할 것은 게임을 하는 사람은 바로 너야. 다른 사람의 것은 참고할 수는 있지만 네 것은 아니야.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절대로 네 것이 있어야 돼. 너만의 전략, 너만의 문명에 대한 이해.... 그런 것을 다른 사람보다 깊이 갖추려면 공부 좀 해야 될 거야.” 진성은 강조해서 말했다. “그.. 그런가요?” “내게도 왔으니까 현준이에게 가던가, 아니면 현준이 책상을 한번 살펴봐라. 도대체 무슨 책을 읽고, 무슨 문서를 보면서 연구를 하는지. 아마 보면 놀랄 거다.” “예...” “진규야, 힘내라. 내가 보기에 네게는 재능이 있다. 너, 별명이 작은 스키피오라며? 네 재능에 노력만 더해지면 충분히 스키피오가 될 수 있다. 힘내라!” 진규는 진성에게 처음 듣는 칭찬에 놀라면서도 가슴 한 곳에는 기쁨이 흘러넘쳤다. 자신의 우상에게서 확인한 자신의 재능에 대한 자신감은 다시 한번 불타오를 것이다. “감사합니다. 진성이 형!” 인사하고 재빨리 현준을 찾는 진규의 등 뒤에 진성은 한마디 더 붙였다. “그래, 수고해라.” 12월 23일 오후 6시, 문명 온라인 영웅 스키피오의 첫 프로 리그의 대망의 챔피언팀을 가리는 골드 시리즈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이스턴 리그의 우승팀 삼선전자와 웨스턴 리그의 우승팀 쌍룡은행 간의 마지막 골드 시리즈 챔피언을 놓고 격돌하게 되었다. 슈퍼 센터에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7천여 명의 관객들로 가득 찼다. 많은 사람들이 몇 시간 전부터 기다려서 입장을 할 정도로 그 인기는 굉장했다.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추운 날씨 때문에 끼리끼리 모여서 근처의 TV를 볼 수 있는 따뜻한 곳으로 몰려갔다. “안녕하십니까? 그 동안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문명 온라인 영웅 스키피오, 삼선전자배 프로 리그의 대망의 골드 시리즈가 곧 시작되겠습니다. 아나운서 김동수입니다. 해설에는 홍진호씨가 수고하시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날씨가 추워졌습니다. 홍진호입니다.” “많이 추워졌죠? 그런데 홍진호씨, 오늘 예상은 어떻습니까?” “음...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 나올 게이머의 순서, 오더입니다. 일단 객관적으로는 삼선전자의 우위를 점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LQ 전자를 무너뜨릴 때처럼 쌍룡은행의 승률왕 김한석 선수와 정성진 선수가 맞붙게 되고 나머지 두 선수가 게임을 하게 된다면 의외의 결과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일단 정성진 선수가 얼마전에 김한석 선수와 정면대결을 한다고 밝혔지만 삼선전자에서 어떻게 나올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아, 그렇군요. 삼선전자의 선수 오더에 아주 영향을 많이 받겠군요.” “네, 그렇습니다.” “자, 지금 삼선전자의 라커룸에 리포터가 나가 있습니다. 김희수 리포터?” 화면에는 예쁘장하게 생긴 리포터가 마이크를 들고 서 있었다. “네, 저는 삼선전자 선수들이 대기하고 있는 라커룸에 나와 있습니다. 여기 라커룸에는 조금의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크리스마스 캐롤이 연주되는 등 아주 밝은 분위기군요.” 리포터는 마이크를 들고 대기하고 있는 선수에게로 다가갔다. “정성진 선수, 지금 기분과 컨티션은 어떻습니까?” “아주 좋습니다. 기대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쌍룡은행의 김한석 선수와 대결을 원하셨는데?” “그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하지만 경기는 팀이 하는 겁니다. 감독님과 팀이 원한다면 어떤 위치에서도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아, 그렇군요. 오늘 열심히 최선을 다해 주세요.” 리포터는 다른 선수들과의 인터뷰를 끝내고 감독을 만났다. “어떻게 오늘 어느 정도 자신하시는 지요? 객관적으로는 우위에 있다고 전문가들이 예상하는데요?” “경기는 해 봐야 압니다. 하지만 이제까지 노력했던 대로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김동수 아나운서?” “네, 잘 들었습니다. 지금 또 쌍룡은행의 라커룸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박현정 리포터?” 김동수 아나운서는 곧바로 쌍룡은행의 라커룸에 있는 리포터를 호출했다. “네, 박현정입니다. 여기는 쌍룡은행의 선수 라커룸입니다.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김한석 선수, 컨디션은 어떻습니까? 오늘 어떨 것 같습니까?” “컨디션은 좋습니다. 오늘 저희 팀이 승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삼선전자의 정성진 선수는 팀의 선수 오더에 따른다고 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약간 미묘한 질문에 김한석은 시선을 리포터와 맞췄다. 리포터의 의도가 궁금한 김한석이었다. “우리는 프로입니다. 팀의 결정에 따르는 것이 일단은, 옳다고 생각합니다.” 김한석은 일단이라는 단서를 붙였다. “네, 일단이라 그렇군요.” 나머지 선수들에 대한 인터뷰를 끝으로 화면은 김동수 아나운서로 바꿨다. “선수들의 표정이 조금은 굳어 있지 않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오늘의 게임으로 두 달 동안의 시간과 노력에 대한 결과가 결정되니까요. 긴장할 수밖에 없죠. 이 긴장을 어떻게 적절하게 대처하느냐가 바로 감독과 팀 매니저의 역할이 아닐까요?” “네, 그렇겠군요. 자, 광고 듣고 난 뒤에 곧 문명 온라인 영웅 스키피오, 삼선전자배 프로 리그 최종 골드 시리즈를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더럽게 오래 끄네.” “조금 있으면 시작하겠지?” 그 시간에 문명 온라인팀의 요람에 있던 현준은 계속된 쓸데없는 말과 광고에 고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옆에서 유조 사부님에게 제대로 배운 팔극신권의 청개연산(晴介嚥山)이라는 절초를 진각 없이 연습하고 있던 진성은 현준의 말에 별 감정 없이 말했다. 가만히 있던 진규가 한마디 했다. “....... 왜 우리는 저기 안 가죠?” 며칠 전에 매니저 서재필은 진성과 현준에게 그 골드 시리즈 하는 곳에 갈 것인지 물었다. 진성과 현준은 정말 똑같은 타이밍으로 똑같이 말했다. “안 가!” 그 때 아무 말도 못했던 진규는 내심 가고 싶었다. 그런 마음에 은근하게 진성과 현준에게 물었다. “가고 싶냐?” “.............네..” “그럼 가지 그랬냐?” “네?” 현준의 예상 못한 말에 진규는 당황했다. “네가 가고 싶으면 매니저에게 데려다 달라고 하면 될텐데.. 아마 자리도 좋은 곳으로 구해 줬을 텐데.. 말하지 그랬냐?” 현준의 거침없는 말에 진규는 말문이 막혔다. 말했다면 당연히 보내 주었을 거라는 말에 진규는 후회막급이었다. “정말인가요?” “당연하지. 나와 현준은 저런 번잡한 곳에 별로 가기도 싫고 가 봤자 별 도움 되는 것도 없으니까 안 가는 거지만 넌 그렇게 생각 안했다면 가면 되는 거야. 지금은 늦어 안 되겠구나. 다음부터는 꼭 네 생각을 바로바로 얘기해라. 그렇게 살면 너만 손해야. 알겠지?” 쏟아져 나오는 현준의 말에 진규는 대답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그나저나.... 정말 더럽게 광고 오래 하네.” “아, 이제 시작하네요.” 진규의 말에 팔극신권을 연습하던 진성과 커다란 비전 앞으로 와서 앉았다. 매니저가 미리 사다준 먹을거리를 잔뜩 앞에다 놓고는 천천히 먹으며 시작되는 골드 시리즈를 보았다. 좀더 편한 관람을 위해서 세 사람은 의자를 가장 편하게 만들어 거의 눕다시피 했다. “뭐야?” 현준의 어이없다는 목소리였다. 삼선전자의 선수 오더를 보니 첫 번째가 다승왕 정성진이었다. 보통 가장 강한 선수가 마지막을 맡는 것에 비해 이번 삼선전자의 오더는 그 반대였다. 가장 강한 정성진이 선봉이라니. 삼선전자의 눈에 보이는 계략이었다. 쌍룡은행에 비해 선수들의 수준이 고르게 높은 삼선전자의 필승전략이었다. 쌍룡은행은 대장으로 승률왕 김한석을 내놓았기 때문에 기대했던 강한 대장끼리의 대결은 무산되었다. “.... 이것 뭐야? 설마 한석이를 피해 간 건가?” 현준은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목소리에 그대로 드러났다. “예상했지만 결과를 보니까 씁쓸하네.” 그 목소리 뒤로 진성의 담담한 목소리가 이었다. 진성은 이미 삼선전자가 이기기 위해서 이런 방법을 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말도 안돼. 정성진이라는 녀석과 한석이 녀석이 붙는 것을 보고 싶었는데.... 뭐야 이거?” “말이 왜 안돼? 프로니까. 프로니까 가능하지. 이겨야 하는 게 프로니까.” 역시 흥분한 현준의 목소리를 담담한 진성의 목소리가 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이것은 너무 뻔하잖아?” 결국 골드 시리즈는 선수 오더가 발표된 시점의 예상 그대로 끝나고 말았다. 삼선전자의 선봉 정성진은 상대를 여유 있게 꺾었다. 그리고 삼선전자의 두 번째 선수 최영배 선수는 쌍룡은행의 전주환 선수를 어렵지 않게 이겼다. 마지막 게임은 해 보지도 못하고 끝나고 말았다. 문명 온라인 공식 게임 사이트의 게시판과 베타 테스터들이 만든 공식 팬 사이트 그리고 삼선전자의 프로팀 홈페이지에는 삼선전자의 노골적인 선수 오더를 성토하는 분위기로 가득했다. 특히 삼선전자의 프로팀 홈페이지는 5시간 정도 서버가 다운되기도 했다. 게시판의 분위기는 처음에 삼선전자 프로팀의 감독과 책임자들을 비난하는 분위기에서 점차 선수들, 특히 정성진 선수를 비난하는 글들로 바뀌어 갔다. 게임 전 정성진 선수의 인터뷰 내용을 패러디한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더욱 더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다. 국회의원 정성진 - 우리 지역의 복지를 위해 일하겠습니다만 그것은...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정치는 당이 하는 겁니다. 총재님과 당이 원한다면 제가 어떤 위치에서도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벤처사장 정성진 - 제가 우리 회사를 위해 일하겠습니다만 그것은..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기업은 정치가와 같이 하는 겁니다. 정치자금이 필요하다면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마련하겠습니다. 연예인 정성진 - 거짓말을 하지 않겠습니다만 그것은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인기는 포장하고 선전해야 얻을 수 있습니다. 인기를 위해서라면 저는 어떤 것이라도 할 겁니다. . . . 며칠 만에 ‘정성진 신드롬’이라고 불릴 정도인‘정성진 패러디’를 본 사람들은 자신이 또 새로운 패러디를 지어서 인터넷에 퍼트렸다. 그야말로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퍼져 삼선전자 관계자들은 노심초사 걱정했다. 이기기 위한 회사 분위기로 인해 무리했던 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이루어 삼선전자 프로팀 홈페이지에는 아예 프로팀을 해체하라는 극단적인 얘기까지 나오고 있었다. 12월 24일, 모든 연인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는 날, 바로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하지만 모든 싱글들이 저주하고 저주하는 말 또한 바로 그 날이었다. 게다가 눈이라도 온다면 그 강도는 더욱 더 심해지는 날이었다. 한창 문명 온라인 프로 리그 뒤에 있을 이벤트 매치 때문에 바쁘기도 했고 또 팔극신권의 창시자인 달인 유조의 직계제자가 되었으며 로플팀의 밀리터리 아트의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하다보니 시간이 없어진 진성은 하나를 못 본지 거의 한달이 되었다. 가끔 사무실이나 휴게실에서 차를 마시며 간단하게 대화한 적은 있어도 밖에서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내심 미안했던 진성은 하나와의 데이트를 계획했지만 모든 싱글들의 저주는 진성에게도 미쳤다. 싱글들의 저주를 몰고 온 장본인은 바로 김제동이였다. 원래 있었던 스케줄이 빵구가 나는 바람에 서울 자기 혼자 집에서 있게 된 제동은 동생인 진성을 불렀고 그에 따라 현준과 진규가 따라 붙었다. 진성은 어쩔 수 없이 하나를 데리고 제동의 집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하나씨 미안해요. 오랜만에 밖에서 만나려고 했는데.....” “아니에요. 이렇게 사람들끼리 모여서 있는 것도 좋은데요..” 약속장소에 모든 사람들은 다들 현준의 차를 타고 제동의 집을 찾아 나섰다. 당연히 뭐라도 사가야 했기에 제일 연봉이 높은 진성이 먹을 것을 잔뜩 샀다. 사면서 자신의 신용카드가 어떤 것인지 오랜만에 확인한 진성이었다. “춥지? 빨리들 들어와라. 그런데 너희들 설마 빈손으로......... 온 것이 아니군. 빨리 들어와라.” 제동은 물을 열어 주면서 들어오라고 하다가 아무도 손에 쥔 것이 없자 뭐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 순간 제일 뒤에서 진성이 뭔가를 잔뜩 들고 들어오자 높아진 목소리를 귀신처럼 낮추어 아주 반갑게 맞이했다. “춥지? 이쪽으로 와서 몸 좀 녹여라.” “제동이 형, 배고파. 뭐 좀 밥으로 먹을 게 없을까?” “현준아, 총각 혼자 사는 집에서 먹을 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런 것은 사 갖고 와야지. 진성아, 너 잔뜩 뭘 사온 모양인데 거기 먹을 것은 없냐?” “사오긴 했는데........ 술안주와 과일... 아, 케익도 사왔다. 케익이나 먹을까?” “진성아, 아서라. 한국 사람이 밥을 먹어야지.” 제동은 한마디 하고는 전화기를 붙잡았다. “여보세요. 나 제동. 올 때 맛있는 밥 좀 마련해 오면 안 되나? 음... 여기 나 말고 네 명 더 있으니까 형이 고려해라. 누구냐고? 와서 보면 안다. 알았지? 지금 다들 배고프니까. 술? 술은 필요 없는데. 그래.... 집에 다 있으니까..... 절대 밥이야 밥! 어설프게 빵 같은 것 사왔다가는 집 안으로 들어올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을 걸. 알겠지? OK, 빨리 와.” “제동이 형, 누구에요?” “아, 너희들도 잘 아는 사람이다. 오면 소개하지. 어, 저 친구는 처음 보는데? 하나씨 안녕하셨어요?” “네, 제동... 오빠.... 도요...” “케케케케케.. 진성아 드디어 하나씨가 나한테 오빠라고 하는구나... 나 결심했다. 오늘 내로 하나씨에게 말 놓을 거다. 케케케케케....” 사실 제동은 최근에 하나와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야말로 우연한 기회였는데 하나를 만난 제동은 같이 저녁식사를 하고는 하나에게 다음에 만나면 꼭 오빠라고 부르라고 반협박을 하고는 헤어졌다. “제동이형, 이 녀석은 우리팀에 새로 들어온 프로 게이머인데요.. 진규야, 이 사람 알지? 그냥 큰 형으로 대하면 되니까. 인사나 해라.” 현준의 귀찮은 듯한 말투였지만 진규는 잔뜩 얼어서 제동 앞에서 거의 고개를 90도 정도까기 꺾어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성진규라고 합니다.” “그래? 어려 보이는데? 몇 살이냐?” “19입니다.” “와.... 나랑 딱 10년 차이네. 이야.... 아, 내 이름 알지? 나 김제동이다. 저 녀석 둘은 내 의동생이니까 너도 나를 형으로 불러라. 아저씨라 불렀다가는......... 죽음이다. 알겠지?” “네... 제동이 형.” “역시 젊어서 그런지 빠릿빠릿하네.” 제동은 TV를 털어놓고 진성이 사온 안주거리와 과일들을 먹으며 그 동안의 얘기를 했다. 진규는 TV에서 나오는 대단한 입심과 활달한 이미지와 평소의 이미지와 너무 다름을 알았다. “제동이 형, 평소와 TV에서 나올 때와 너무 다르네요.” “그렇지? 나 원래 약간 내성적이거든. 그런데 TV나 콘서트 사회 볼 때는 그에 맞게 변해야지. 그래야 살아남지.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오해한다니까. 처음 만나면 아는 사람이 같이 있지 않는 이상 잘 친해지기 힘든데 그 사람들은 내가 무슨 스타라는 착각에 빠져 사는 줄 아니까. 그 부분이 조금 힘들지...” “제동이 형, 진성이 형하고 현준이 형은 어떻게 만났어요?” “아, 그것...... 말하자면 웃기지..” 제동은 궁금한 진규에게 문명 온라인 출시 기념회로 코엑스 컨벤션홀에서 사회를 볼 때 진성과 프로 게임기로 할 기회가 생겼는데 그 때 심시티를 했다는 둥, 그러다가 진성에게 된통 깨졌다는 둥.. 감칠 맛나게 얘기했다. 진규가 장단을 맞추며 신나게 듣고 있을 무렵 초인종이 울렸다. “야... 드디어 밥이 왔다. 기대해라.” 제동은 모두에게 외치며 문으로 달려갔다. “들어와라. 먹을 것은?” “형이 좀 나와 봐. 나 혼자서 들고 가기 힘들다니까.” 낯선 목소리가 밖에서 들렸다. 제동은 슬리퍼를 끌고는 밖으로 나갔다. TV를 보고 있던 현준은 진규를 보며 말했다. “진규야, 네가 여기 막내지?” “네, 그런데요..” “그럼 빨리 나가봐. 제동이 형에게 그런 것을 꼭 들려야겠냐? 빨리!” “........” 배 깔고 누워서 자신더러 밖으로 나가서 짐을 받아오라는 현준의 말에 뭐라고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진규는 애써 참으며 파카를 입고는 신발을 구겨 신고는 밖으로 나갔다. “아..... 강호동?” 김제동이 먼저 들어와 외투를 벗었다. 그 뒤를 양손에 짐을 잔뜩 들고 들어온 진규가 보였고 그 다음으로 들어온 사람은...... 바로 강호동이었다. 방송계에서 김제동과 아주 친하다고 소문이 난 사람이 바로 강호동이었다. 강호동은 문을 닫고는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하고는 안으로 들어와 파카를 벗었다. 처음에 느꼈던 덩치보다는 훨씬 작았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얼굴은 커보였다. “호동이 형, 이 녀석 둘이 내 동생이다. 나머지는 같이 온 사람들이고.” 제동은 호동이 옷을 벗어 한쪽에 걸어 두자 곧바로 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진현준이라고 합니다.” “.....” “강진성입니다.” “.....” “성진규입니다.” “.....” “김하나라고 합니다.” “강호동이라고 합니다. 저 아시죠?” 강호동은 다른 사람이 말할 때는 근엄한 표정을 유지하다가 하나가 인사하자 곧바로 그 큰 얼굴로 웃음을 지으며 하나 앞으로 달려갔다. “호동이 형, 장난 좀 치지 마라. 이러니까 장가를 못 가지.” “제동아, 장가 얘기는 꺼내지도 마라. 연말에 내가 집에 안 가는 이유가 바로 그거다. 그런데 하나씨는 어쩐 일로 여기를? 설마 제동이 보러 오신 것은 아닐 테고...” “호동이 형, 좀 진지해 봐라. 아이들 앞에서 무슨 짓이고?” 제동이 짐짓 화를 내자 그제야 호동은 제동이를 바라보며 심각한 표정을 짓다가 한마디 했다. “.... 재밌는 노오오리~~” “..............” 그 큰 몸집의 남자가 귀여운 척 하며 재밌는 놀이라고 말하자 방안은 온도는 높지만 순식간에 얼어버리고 말았다. 이미 제동이 수습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섰다. 강호동은 자신의 비기(秘伎)가 통하지 않자 얼굴을 굳히며 파카를 집어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커다란 고목에 매미 네 마리가 달려서야 고목은 멈췄다. “형, 왜 이래?” “............ 쪽. 팔.리.자.나.” “푸훗..” “푸하하하하...” “호호.. 강호동씨 정말 재미있으신 분이네요..” 마지막 하나의 말 한마디에 다시 부활한 강호동이었다. 그날 크리스마스 이브를 다 같이 거의 밤을 새다시피 하면서 놀았다. 여러 명이서 워낙 재미있게 놀아서 싱글들의 외로움을 느낄 수도 없었고 현준과 제동, 호동의 철저한 하나와 진성의 분리정책은 밤 내내 성공해서 커플 하나와 싱글 떨거지가 아니라 화려한 싱글 6명이 되어 신나게 놀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지났지만 약간 들뜬 분위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런 분위기와 한해의 마지막 며칠이라는 말은 술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들마저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런 들뜬 분위기는 문명 온라인 영웅 스키피오의 프로 리그에 찬물을 끼얹은 삼선전자의 그 행동에도 불구하고 12월 31일에 예정된 이벤트 매치에 관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28일 발표된 매치 플레이의 선수 이름을 보고 사람들의 관심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리그의 승률왕, 다승왕이 다 출전하고 리그에서 참가하지 않았지만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수로 인정받는 게이머 스키피오와 한신이 참가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각 홈페이지의 게시판은 들끓었다. 특히 오랜만에 게이머 스키피오의 플레이를 보게 된다는 설렘을 가진 팬들은 온통 인터넷을 뒤집고 다녔다. 매치는 게이머 스키피오, 강진성과 게이머 사신, 김한석이 붙고 게이머 한신, 진현준이 멀티 플레이어 정성진과 게임을 벌이기로 예정되었다. 리그 초기에 정성진이 원했던 것은 게이머 스키피오와의 일전이었지만 실제 이루어진 것은 한신과의 대결이었다. 그와 관련된 일화가 인터넷에 올라 또 한번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누가 적은 것인지 모르는 그 글에는 게이머 스키피오가 정성진의 실력이 자신에게 미치지 못함을 알고 자신 대신 한신이 정성진을 맡도록 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확인할 수 없는 내용이라 흐지부지 되었지만 스키피오의 팬들은 그 글에 자신의 의견을 적어 인터넷으로 계속 퍼트렸다. “드디어 내일이네. 정말 제대로 된 첫 프로 데뷔전이군.” “진성아, 우리 잘 할 수 있겠지?” “형들은 잘 할 수 있어요!” 걱정하는 듯한 현준과 진성에게 진규가 힘 있게 말했다. 그 모습을 본 현준과 진성은 서로 보며 피식 웃었다. 걱정이라기보다는 어떤 설렘이 더 큰 두 사람이었다. 이미 정성진과 김한석의 게임 화면을 입수해 다 분석한 상태였다. 정성진과 김한석은 이미 드러난 상태여서 그런 점에서는 진성과 현준이 유리했다. 하지만 다양한 게임을 통해 실전 감각이 최고로 올라간 상대에 비해서는 다양하지 못한 경기 경험은 도리어 단점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진성과 현준은 이제 뚜껑을 열어 봐야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안녕하십니까? 전국에 계신 팬 여러분. 오늘 드디어 올해의 마지막 이벤트, 문명 온라인 영웅 스키피오의 특별한 이벤트. 이벤트 매치 플레이를 이곳 슈퍼 센터에서 생중계 해 드리겠습니다. 아나운서에 김동수입니다. 해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홍진호씨가 해 주시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네, 안녕하셨습니까?” “오늘은 정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게임이지 않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문명 온라인 영웅 스키피오. 게임 타이틀의 부제가 될 정도로 게임의 활성화에 영향을 준 테스터이자 프로 게이머인 게이머 스키피오와 그와 함께 자타가 공인하는 또 하나의 게이머 한신이 각각 올해의 승률왕, 다승왕과 경기를 갖게 됩니다. 그야말로 최고 중의 최고를 가리는 경기가 될 것입니다.” “정말 빅게임이 될 예정입니다. 잠깐 뒤에 빅 매치가 시작될 겁니다. 채널 고정해 주십시오.” 라커룸에서 기다리며 TV를 보고 있던 현준은 그다지 흥분하지 않은 목소리로 진성에게 말했다. “진성아, 설마 여기에 인터뷰 하러 올까?” “올지도 몰라. 뭐 비슷하겠지? 컨디션이 어떠냐, 기분이 어떠냐? 그 정도?” “그딴 것 하기 싫은데.” “싫으면 진규 시키든가.” “준이 형, 아무도 라커룸 안으로 못 들어오게 해 주세요. 특히 리포터는 더욱 들어오지 못하게 해 주세요.” 현준은 라커룸 입구 쪽으로 가서 이준에게 당부의 말을 하고는 자신이 대기하던 자리로 돌아왔다. 현준이 자리에 앉자마자 밖은 소란스러워졌다. 안 된다는 이준의 말과 안으로 들어가야 된다는 고음의 여자 목소리가 어우러져 묘하게 듣는 사람을 거슬리게 만들었다. “.... 지금 선수들은 아주 긴장된 상태입니다. 인터뷰는 경기 끝나고 해 주십시오.” “지금 들어가서 인터뷰를 해야 된단 말이에요. 당신 도대체 뭐예요?” “당신? 어허.. 아가씨가 이런 막무가내 짓을 많이 해 본 솜씨네요. 저는 두 선수의 보디가드입니다. 더 이상의 소란은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인터뷰 하시려면 하고 싶은 사람이나 하세요. 저희 두 선수는 지금 이벤트 매치에 정신을 쏟고 있습니다. 미안하지만 지금 인터뷰는 할 수 없습니다.” 이준의 담담하면서도 조리 있는 말에 리포터는 흠칫하더니 목에 핏대를 올려가며 속사포같이 말을 쏟아냈다. “아니, 당신들 프로잖아요? 프로라면 당연히 팬들의 알 권리를 보장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이런 간단한 인터뷰조차 거절하다니 도대체 팬을 어떻게 보고 이런 짓을 하는 건가요? 지난번에 있었던 그 골드 시리즈에서도 이런 식의 인터뷰 사절은 없었어요. 혹시 보디가드라고 하는 당신이 마음대로 이런 짓을 하는 거 아니에요? 일단 문부터 열어봐요. 안으로 들어가서 확인은 해야 할 것 같으니까.” 칼이나 무기를 들고 덤벼드는 녀석들에게는 그런대로 자신이 있었지만 이렇게 틱틱거리는 여자는 이준 자신이 감당하기에 힘들었다. 이준은 품안에서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매니저? 나 이준인데... 여기 인터뷰 한다는 아가씨가 징징거려서... 응, 지금 조금 긴장이 되나봐.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하던데... 그래. 좀 와서 처리해. 여자는 딱 질색이라고... 빨리 와.” 리포터는 어이가 없었다. 자신을 앞에 둔 상태에서 징징거린다느니, 처리하라느니, 여자는 딱 질색이라느니 이런 말을 하는 상대의 그 자신만만함에 할 말을 잃었다. 제정신을 차리고 그에 대해 따지려는 순간 누군가가 나타났다. “아, 김희수씨, 아닙니까?” “네? 아.. 네, 맞습니다만.” “저는 자소 소프트 프로팀의 매니저를 맡고 있는 서재필이라고 합니다. 인터뷰를 하시려는 모양이신데 경기 후에 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것은 제가 보장해 드리죠. 어떻습니까?” “네? 경기 후에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나요? 저는 꼭 지금 하고 싶은데요.” 리포터 김희수는 자신을 알아본데다가 조금은 저자세로 나오는 매니저를 보며 강하게 나갔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인터뷰를 하게 될 텐데 처음에 잘 잡아야 함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서재필을 모르고 한 얘기였다. “지금은 힘들 것 같네요. 일단 경기가 끝난 후에 다시 찾아오셨으면 하는데....” “이 아저씨가 말길을 못 알아듣네. 저는 지금 인터뷰를 해야 한다구요. 저쪽 라커룸에는 이미 리포터가 들어갔는데 왜 이 곳은 들어가지 못한다는 거죠? 이것은 말이 안 된다구요. 매니저, 빨리 문 열어요.” 기막힌 서재필은 문 앞에 서 있는 이준을 보았다. 이준은 어깨를 으쓱이며 알아서 하라는 포즈를 취했다. 알아듣게 말했는데도 안 된다며 말도 함부로 하는 이 싸가지 없는 리포터가 무슨 배경이 있길래 이런 막무가내의 행동을 하는지 궁금했다. 리포터라면 베테랑 기자는 아닐 것이다. “리포터 아가씨, 혹시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여기는 프로팀 라커룸입니다. 프로는 게임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선수들이 긴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인터뷰를 사양한 거고 그 인터뷰는 경기 후에 하게 될 겁니다. 그런데 무슨 권리로 지금, 바로 지금 인터뷰를 해야 한다는 겁니까? 계속 이러면 앞으로 당신이 하는 인터뷰는 모두 보이콧 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못할 것 같습니까? 저는 프로팀의 매니저이자 감독입니다. 제가 그렇게 한다면 하는 겁니다. 이런 큰 소리 칠 수 있는 배경이라도 가지고 있습니까?” “...............” 서재필의 말에 아무 말도 못하는 리포터였고 서재필의 뒤에는 이준이 박수를 치는 제스처를 하고 있었다. 확실히 말로는 서재필을 당할 수 없다고 생각한 이준이었다. “나중에, 경기 후에 오십시오. 그 때는 인터뷰에 응해 드리겠습니다.” “이...이.... 두고 보세요. 절대 가만히 넘어가지 않을 테니까. 배.. 배경이라고.... 당신들 사람 잘 못 건드렸어!” 리포터는 홱 몸을 돌리더니 반대편으로 가 버렸다. 서재필은 그런 리포터를 보면서 이준에게 말했다. “녹음해 뒀어?” “당연하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 밖에 없잖아요.” “그래.... 이 꼬맹이 아가씨야, 어디 한 번 해 봐라. 세상에는 자기 마음대로 안 되는 것도 있으니까.” 서재필은 이제야 그 리포터가 누구인지 알았다. 그리고 가만히 넘어가지 않겠다는 말이 빈말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일에 대비해 미리 이준에게 언질을 주어 대화를 처음부터 끝가지 녹음해 뒀기 때문에 상대가 도발하면 철저하게 박살내 버릴 작정이었다. 평소 특이한 행동과 유유자적했지만 대외 활동이나 뭔가 장애물이 생기면 엄청난 기세로 달려들어 해결하곤 하는 서재필이었다. 어쩌면 김희수라는 리포터는 사람을 잘 못 본지도 모를 일이었다. 드디어 네 명의 전사들이 슈퍼 센터 무대로 올라왔다. 이벤트 매치는 먼저 게이머 스키피오와 게이머 사신이 경기를 갖고 그 뒤에 게이머 한신과 정성진이 경기를 가진 뒤, 양 게임의 승자가 최후의 승자를 가리기 위해 다시 한번 게임을 펼치기로 되어 있었다.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프로 리그가 아닌 문명 온라인 영웅 스키피오의 최고 게이머를 가리는 승부였다. 무대에 네 명의 게이머가 서자 7천여 명으로 가득 찬 실내는 함성으로 진동했다. 특히 무대와 가장 가까이 있는 곳에는 스키피오와 관련된 피켓이나 포스터를 들고 있는 여자, 남자 팬들이 굉장히 많았다. 꽃미남 가수들의 경우 10대 소녀팬들의 열화 같은 응원과 비슷했지만 그 연령대가 일단 틀렸다. 스키피오를 응원하는 많은 사람들이 20대였다. 대다수가 20대 초반이었다. 그리고 여성팬들은 그 응원하는 사람들의 반 정도였다. 약간은 투박하지만 강한 필체로 쓴 남성팬들의 피켓도 여러 개 보일 정도였다. 물론 그 반 정도의 소녀팬들과 아가씨팬들이 대부분의 포스터를 만든 사람들이었지만. 그리고 뭔가를 만들어 온 사람은 대부분이 스키피오의 팬 사이트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었다. 압도적인 스키피오의 인기 사이에는 한신을 응원하는 남자팬들이 꽤 많았다. 특히 한쪽에 모인 남자팬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응원을 했다. 다 같이 외투를 맞춰서 입고 온 모양인데 그 옷을 뒤집어 입고는 앞에 있는 사람의 북소리에 맞춰서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TV에서는 그런 특이한 응원을 크게 잡았다. TV를 통해 보는 사람들은 그런 분위기를 집에서도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자, 지금부터 게이머 스키피오와 게이머 사신의 이벤트 매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와....와.....” 드디어 스키피오, 진성과 늪의 사신, 한석이 게임 상에서 맞붙게 되었다. 김한석에게는 어쩌면 그 베타 테스터 이벤트 동안의 패배를 설욕하는 복수전일지도 몰랐다. 무대의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지고 슈퍼 센터 안의 곳곳에 설치된 초대형 비전에는 게임의 시작을 알리는 문명 온라인 영웅 스키피오의 화면이 나왔다. 환호성 소리는 점점 줄어들었고 곧 게임은 시작되었다. 게이머 스키피오는 당연히 로마 문명을 선택했고 게이머 사신은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이집트 문명을 선택했다. 사신은 이때까지의 게임으로 자신은 초반 방어전을 위주로 탄탄한 게임 운영을 한다고 계속적으로 밝혀 왔다. 그에 반해 공개된 게임은 몇 없지만 스키피오의 경우는 장기전보다는 단기전을 선호하고 상대 게이머의 수읽기에 밝은 전략적인 게임으로 유명했다. 서로의 대결은 비공식적으로 단 한번 밖에 없었지만 워낙 인터넷에서 유명해진 플레이라 관객의 대부분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게임에서 스키피오의 문명이 아틀란티스였기 때문에 진정한 실력이 아니었고 또한 사신 역시 그 당시에는 단순한 베타 테스터일 뿐이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박빙의 승부를 예상했다. 원정 전쟁이 나은가, 아니면 적을 기다려서 전쟁을 벌이는 것이 나은가 하는 점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그래서 한 마디로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성질의 질문이었다. 원정 전쟁의 경우, 장점은 상대의 진영으로 가기 때문에 본국의 피해는 전혀 없고 상대 진영에서의 약탈은 곧바로 상대 자원의 고갈로 이어지기 때문에 충분한 능력만 있다면 과거 로마를 유린한 한니발과 같은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길어진 보급로가 끊기기고 상대 진영 속에서 둘러싸여 운신하기조차 힘들 경우에는 최악의 경우 고사당할 지도 모른다. 적을 자기의 영토로 불러 들여 전쟁을 하는 경우도 각각 장, 단점이 존재했다. 게이머 사신은 상대가 스키피오라는 사실에 조금은 꺼려지는 면이 있었다. 자신이 승률왕이고 리그를 통해 진 적이 단 한번도 없다는 사실은 자부심으로 이어졌지만 베타 테스터 시절 스키피오와의 대전에서 느낀 그 실력차는 여전히 사신의 무의식 속에 남아 있었다. 엄청나게 정교한 군대의 컨트롤 능력과 비공정 타레도와 투척 폭탄 포르투를 등장시킬 정도의 노련한 경기운영은 사신의 목표였다. 사신은 자신을 믿었다. 그 동안 엄청난 연습량을 소화하고 자신 나름대로의 노력에, 노력을 더한 이집트 문명의 분석과 자신만의 전략을 개발해 왔다. 자신의 감정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을 더 믿고 싶은 사신이었다. 일단 먼저 문명의 상태를 점검했다. 초기에 주어지는 문명의 상태에 따라서 그 전개 방향은 아주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사신은 빠르게 전체와 그 안을 보고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상대인 스키피오의 경우 문명이 발달할수록 더욱 더 큰 위력을 발휘함을 느꼈다. 몇 게임 되지 않은 스키피오의 플레이 화면을 분석했을 때, 비슷한 병력의 숫자와 전력을 가진 군대라면 거의 스키피오가 이긴다고 봐도 무방했다. 특히 군대의 능력이나 문명의 기능 중에 뭔가 전쟁 수행에 결정적인 승부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을 시기적절하게 가장 잘 쓸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게이머 스키피오라고 느꼈다. 다른 선수와 비슷하게 컨트롤 하면서도 비장의 카운터 펀치를 날릴 수 있는 게이머 스키피오. 사신은 부딪쳐 봐야하겠지만 그 때 이후로 엄청나게 발전했을 스키피오의 실력을 정면승부로는 쉽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도 자신의 실력 역시 아직 정점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신은 일단 오늘은 정통의 방어전과 더불어 뭔가 변칙적인 플레이가 필요하리라 생각하고는 곧 실천에 옮겼다. 스키피오, 진성은 같은 과 친구인 한석과 게임을 한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예전에도 프로 게이머와 베타 테스터로서 같이 게임을 한 적이 있지만 그 때의 경기는 지금 아무 의미가 없었다. 자신 뿐 아니라 상대 역시 그 때의 실력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것이다. 스키피오는 편하게 게임을 진행하리라 생각했다. 게다가 요즘 자신의 가장 큰 발전이라 생각하는 부분도 조금은 적용해 보리라 마음먹었다. “음.. 그다지 뒤쪽의 문명은 아니네. 지금까지의 한석이라면 분명히 방어전으로 나올 텐데...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진성 역시 빠르게 문명을 점검하면서 앞으로의 발전 방향과 군대의 양성 계획에 대해 생각했다. 상대가 아무리 이제까지 방어전 위주로 나왔다고 해도 허를 찌르는 전략이 없으리라고 볼 수는 없었다. 상대의 예상을 뒤집는 것이야말로 전투에서 승리하는 지름길이었다. 진성은 착실히 문명을 성장시키며 군대를 준비했다. 게이머 스키피오, 진성이 가장 중요시한 것은 군대의 훈련도 중요했지만 각 군단장의 사령관이 될 군인들의 교육이었다. 리비우스의 로마사를 유심히 살펴본 진성은 유능한 장군은 군대를 유능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았다. 비록 훌륭한 군대가 그렇지 않은 군대를 이길 가능성이 훨씬 높지만 거기에 유능한 장군, 지휘자가 있다면 필승의 결과가 생기게 된다. 진성은 자신이 직접 세운 몇 가지 원칙으로 지휘자를 교육시켰다. 스키피오가 이런 의외의 일을 하리라 예상한 사람은 딱 한 사람 밖에 없었다. 바로 게이머 한신, 현준만이 이런 전략의 위력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강한 녀석이 저런 수를 쓰니까 이길 도리가 있어야지....” 대기석에서 기다리며 화면을 보고 있던 현준은 나지막한 소리로 불만을 토로했다. 현준은 몇 번이나 진성의 그와 비슷한 방법에 당했지만 그런 방법을 그래도 자신의 문명에 적용할 수가 없었다. 진성의 경우 거의 정확하게 역사를 통해 볼 수 있는 로마와 게임 속의 로마를 알고 있었다. 그 차이점을 충분한 연습과 오랜 사고로 메웠기 때문에 자신의 플레이 스타일과 맞물려 상승효과를 일으킨 것이다. 현준의 그리스 문명에 그와 같은 방법을 쓰기란 불가능했다. 손 쓸 도리가 없는 연패는 현준으로 하여금 고대 그리스 역사책을 뒤지게 만드는 좋은 효과도 물론 있었다. 관객들은 스키피오가 소수의 장군들을 통해서 군단을 훈련시키지 않고 대규모 부대로 모아 훈련을 시키면서 장군들을 직접 교육시키자 생소한 그 방법에 궁금증이 일어났다. 지금까지 모든 프로 게이머들은 개인이 아니라 부대를 중심으로 훈련을 했다. 군대라는 전체에서 개인은 아주 작아 무시할 정도여서 그렇지 않아도 컨트롤할 대상이 많은 게임인 문명 온라인에서 프로 게이머들은 당연히 부대 단위로 유기적인 움직임을 연습했다. 최초로 장군들 하나하나에게 뭔가를 주문하고 요구하는 스키피오의 모습은 대단히 신기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시간에 다른 것을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스키피오를 걱정하기도 했다. “.... 저런 방법이 가능한 건가?” “스키피오가 오랜만의 게임이라서 실전감각을 잃어버린 거 아냐?” “저래서는 다른 부분이.....” “아니야, 스키피오에게 무슨 생각이 있어서겠지...” 걱정을 하지 않는 사람은 자소 소프트 프로팀 사람뿐이었다. 게이머 사신은 튼튼히 방어전을 준비하고 전쟁터가 될 자신의 영토 안을 샅샅이 조사했다. 사신은 지형의 이점이 전쟁 초기부터 끝까지 이어짐을 알았다. 그리고 자신이 준비한 카드를 꺼내 들었다. 사신은 그리 크지 않은 수송선에 3000여명의 잘 훈련시킨 군인과 500여명의 정보부대를 실어 로마의 북부로 향하게 만들었다. 그들 모두는 로마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고 로마인들 사이로 들어가도 그리 쉽게 찾아내기 힘든 로마와 이집트의 혼혈아였다. 사신은 이집트 문명으로 오래 게임을 하면서 두 문명이 그리 멀지 않을 때 각각의 문명권에 상대 문명권과의 교류가 적지만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 생각은 그런 발견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소수의 별동대는 로마의 국경선을 넘지 않은 채 국경 밖에서 있다가 로마의 원정 대부대가 이집트로 떠나게 되면 수도 로마로 들어가 일종의 교란 공작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3500명은 그야말로 적진의 한가운데에서 상대의 마음을 괴롭히는 것이다. 사신, 한석은 진성이라면 직접 원정군을 이끌고 오리라고 예상했다. 그렇게 되고 시기만 맞아 떨어진다면 3500명의 군인으로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을 터였다. 3000명의 군인이 소란을 일으키면 500명의 정보부대가 미리 준비한 근거가 있지만 완전하게 사실은 아닌 소문을 여기저기에 내고 민심을 혼란케 만들어 어쩌면 원로원을 일시간이지만 움직이게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특히 무리한 원정을 준비하면 당연히 그것을 못마땅해 하는 세력이 있게 마련이었다. 원정대가 출발한 시점에 좋지 못한 소문이 감돌면 어쩌면, 사신이 원하는 바지만, 쿠데타가 일어날지도 몰랐다. 시간이 흐르자 전쟁의 기운은 무르익었다. 로마의 원정부대는 이미 완성되었고 사기는 충천했다. 대규모 수송선은 이미 건조를 마쳤고 스키피오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 30만의 대부대가 이동하는 대규모 원정이었다. 스키피오는 각 군단의 군단 사령관을 불러서 각 군단의 진격로와 진격 계획에 대한 회의를 했다. 회의라고 했지만 게이머 스키피오의 일방적인 생각이었다. 스키피오는 15개의 군단을 3개로 나누어 이집트를 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 진격로는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게 만들어 철저하게 이집트 영토 내에서 지나가는 모든 곳을 소거시켜버리기로 작정했다. 원정부대의 이점을 최대한 이용하기로 생각했다. 스키피오의 선택 중에 가장 관객들의 탄성을 자아낸 부분은 바로 스키피오 자신의 로마 잔류였다. 관객들에게는 스키피오가 이미 상대인 사신의 작전을 간파한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정확하게 게이머 자신은 로마에 남겠다는 선언을 하자 역시 스키피오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스키피오의 원정군은 어느 정도 정해진 틀 속에서 원정 사령관의 통제와 지시에 따라서 전쟁을 수행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신은 그런 대담한 스키피오의 결정을 알지 못했다. “그래.. 원정군이 출발했단 말이지. 음... 원정군이 본토에 도착하면 그 때 로마의 수도에 잠입을 시도한다.” 인근 바다에 띄워 놓은 정찰선으로부터 로마 대규모 원정군이 머지않아 도착한다는 보고를 받은 게이머 사신은 곧바로 로마의 북부 부대에 명령했고 오래지 않아 로마 잠입이 시작될 것이다. 게이머 사신은 아무리 수도 로마에서의 공작이 성공한다해도 이집트 본토로 들어온 원정군에게 당해서야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특기인 방어전과 상대의 심리를 역이용하는 방법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여러 방어선이 있으면 그 방어선 중에 특정 부분만 일부러 방어가 취약하게 만들어 그 곳을 중점적으로 상대가 공격하도록 만들게 해서 상대 부대의 손쉬운 승리라는 미끼로 그 부대의 대열이나 군기를 조금씩 흐트러뜨리게 할 작정이었다. 그런 것을 전선을 넓혀 동시 다발적으로 사용하면 아무리 스키피오라고 해도 대부대를 동시에 컨트롤 할 수는 없으리라 판단했다. 또한 원정부대의 가장 큰 단점인 보급에서 압도적으로 자신이 유리하기 때문에 원정부대만 제대로 막아낸다면 마지막에서 웃는 사람은 사신 바로 자신이라 확신했다. “이게...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게이머 사신은 당황했다. 30만이라는 대군이 10만의 세 군대로 나누어 졌지만 그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다. 거의 옆으로 나란히 해서 앞으로 천천히 마치 땅따먹기 하듯이 나오고 있었다. 사신을 당황시킨 것은 각 부대에 스키피오라고 해도 완벽하게 간파해서 피해를 줄이기 힘들다고 판단한 자신의 계략을 30만의 군대 전체에 사용했는데도 전혀 효과를 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일부러 방어를 취약하게 한 곳을 조직적으로 공격하는 바람에 더욱 더 나빠진 상황이었다. “이런.... 스키피오의 컨트롤이 이 정도란 말인가? 이게 말이 돼?” 게다가 세 부대로 나눠서 진군해 오는데 각 부대가 전혀 계략 같은 것이 통하지 않았다. 심지어 매복을 했는데도 각 부대는 각각의 임무가 따로 있는지 번갈아 가면서 아예 매복조차 쓸어버릴 정도로 기계적인 행군을 했다. 사신은 그런 스키피오의 군대에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다. 더한 것은 점점 더 중앙으로 오면서 만나는 도시 뿐 아니라 근처의 도시가 있을 경우에는 완전한 진지를 갖추고 난 다음에 부대 하나만 이동해서 그 도시를 완전히 초토화시켜버렸던 것이다. 완벽한 소거였다. 소멸이었다. 그 전리품과 물자는 로마 군대를 더욱 풍족하게 만들었다. 게이머 사신은 절대적으로 불리하다고 생각했던 원정부대를 이토록 강하게 만든 스키피오에게 정말 탄복했다. 하지만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음을 알았다. 처음부터 계략이 아닌 엄청난 보병과 전차를 동원했다면 이토록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계략이 상대에게 먹히지 않자 오히려 생각보다 더 큰 손실을 입고 말았다. “휴... 이제는 정말 요새 방어전으로 가야겠군. 로마에서 뭔가 좋은 소식이 왔으면 좋으련만...” 게이머 사신은 아직도 스키피오가 로마에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스키피오는 이집트 본토에서의 승전보를 들으며 자신은 로마의 장악과 빠른 문명의 발전을 위해서 노력했다. 방어전에 강한 상대 사신을 생각하며 이차 원정군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차 원정군에는 전차부대가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발달된 문명과 축적된 부로 인해 대규모 전차부대가 가능해진 것이다. 그리고 투석기를 대거 제작했다. 아무래도 공성전이 된다면 투석기가 필요할 것이다. 공성탑이라면 원정지로 가서 만들 수도 있기에 일단 투석기의 제작은 이루어지고 있었다. 스키피오는 또한 각 국경의 방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연습할 때 현준에게 졌던 대부분의 게임들이 자신 나름대로 자신 있어 하는 전략을 펼쳤을 경우 헤이해진 틈을 탄 기습이 패인이었다. 공식경기에서 그런 틈을 용납할 스키피오가 아니었다. “오호... 이런 수를 숨기고 있었군.” 스키피오는 국경을 통과해서 남하하고 있는 일단의 무리들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곧이어 그 부대가 이집트의 혼혈아부대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일단 잠입하면 단기간에 찾아내기 힘들어 어쩌면 생각보다 더 큰 심리적인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다. 스키피오는 잠시 생각하다 곧 다른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스키피오는 각지에서 올라온 군대를 군단장을 통해서 훈련시켰다. 이번에는 시간도 없고 자신이 해야할 일이 있기 때문에 1차 원정군과는 달리 군단장을 개인적으로 모으지 않았다. 오히려 군단장에게 군단의 훈련을 책임지게 만들었다. 스키피오는 오래지 않아 10만이라는 2차 원정군을 만들 수 있었다. 이제 국경을 책임지는 1,2개 정도의 군단을 제외하고는 모든 군단을 이집트로 보낼 작정이었다. 물론 스키피오 자신도 이집트로 직접 갈 생각이었다. 스키피오는 로마에 이집트의 혼혈아 부대가 잠입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스키피오는 곧바로 명령을 내렸다. “수도 로마에서의 병력 총동원령을 내린다. 이 명령은 실제 상황이다. 정해진 대로 로마의 각 언덕 병력동원장으로 모이지 않는 남자들은 처벌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혼혈부대가 어떤 공작을 펼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스키피오는 곧바로 로마의 총동원령을 내렸다. 군인이 될 만한 남자라면 누구라도 로마의 주거지인 각 언덕에 마련된 병력 동원장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그리고 거기서 서류를 통해서 자신이 가야할 곳을 지명 받아서 정해진 날짜 안에 도착해야 했다. 스키피오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혼혈 부대를 일망타진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잠자코 있었던 것이다. “뭐? 혼혈부대가 전멸했다고? 어떻게? 어떻게 알 수가 있었지? 설마 스키피오의 스파이가 들어온 건가? 아닌데...... 그럴 리가 없을 텐데... ” 사신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로마에는 기본적인 컨트롤만이 가능할 텐데.. 거기다 시간적인 딜레이도 존재할 거고. 그런데 어떻게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고 자신이 노린 혼혈부대를 쉽게 막을 수 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곧 다시 들어온 보고는 사신을 이해하게 만들었지만 또 다른 면으로는 더욱 미궁에 빠트렸다. “스키피오가 로마에 있었다고? 로마에? 아.... 그렇다면 말이 되는데... 그러면 원정군에는 도대체 누가 있는 거야? 도대체.... 저렇게 통제가 되고 엄정한 군기를 가진 부대가 설마 NPC가 지휘하고 있는 것은 아닐 텐데..” 사신은 도대체 어느 쪽이 거짓인지 알 수가 없었다. 스키피오가 로마에 있었다면 원정군의 그 전쟁 수행 능력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스키피오가 이 곳 이집트에 있었다면 로마에서의 그런 기민한 대처 역시 불가능했다. 사신은 어느 쪽을 믿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혼란스러운 사신에게 그 고민을 해결해 주는, 하지만 더 큰 고민을 던져주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이런.........” 사신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자신이 상대의 진을 빼거나 상대의 약점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것이 보통의 게임 운영인데 자신이 이렇게 철저하게 당하기는 정말 프로 게이머가 된 이후에 처음이었다. 사신이 받은 보고는 로마의 2차 원정대의 본토 도착이었다. 거기다 스키피오가 그 2차 원정군과 같이 도착했다는 보고는 사신의 고민을 깨끗하게 해결했다. 스키피오는 로마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거의 피해가 없는 30만의 1차 원정군과 10만이지만 전차부대와 투석기 등으로 무장한 2차 원정군이 본토로 들어왔다는 말은 승부가 한쪽으로 기울었다는 것을 알게 했다. “하하하하하... 정말.. 정말.. 대단하네. 어떻게 원정군을 저렇게 강하게 만들 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지.” 관객들은 스키피오에게 거의 농락당한 게이머 사신이 자신의 패배를 직감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려는 모습을 보이자 박수를 치며 격려했다. 스키피오의 1차 원정군과 2차 원정군은 안전하게 합류했다. 40만이라는 엄청난 군대는 거대한 진지를 구축하고는 하루 간의 휴식을 했다. 1차 원정군의 피로를 풀어주고 2차 원정군에게는 한숨을 돌리기 위한 배려였다. 2차 원정 때 가져온 물자를 풍족히 푼 스키피오는 멀지 않은 마지막을 생각했다. 다음날, 스키피오의 원정군은 그야말로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1차 원정군의 화려한 전과에 대한 얘기는 2차 원정군의 사기를 높였고 풍족한 물자와 2차 원정군이 가져온 전차와 투석기 등의 한층 강화된 전력에 1차 원정군은 더욱 더 승리를 확신했다. 스키피오는 이런 작은 심리적인 면에까지 계산을 했고 적절한 성공을 이끌어 냈다. “이제.... 끝을 봐야지.” 스키피오, 진성은 전 부대의 진군을 명령했다. 곧 40만이라는 대부대가 대오를 갖추어 행군하는 엄청난 화면이 슈퍼 센터의 초대형 비전을 가득 채웠다. 전쟁할 때가 아니라 행군할 때의 그 엄정한 기세가 느껴지는 듯하자 관객들은 탄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전쟁과는 또 다른 멋이 있었던 것이다. 게이머 사신은 절대 스키피오와 평원으로 나가 싸울 생각은 없었다. 40만의 정예 로마 군단과 싸울 정도로 정신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누구라도, 프로 게이머 누구라도 40만의 정예 로마 군단에다가 지휘관이 게이머 스키피오라면 절대 평원에서의 전투는 고려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사신은 자신의 장점대로 방어전, 수성전을 펼치기로 했다. 관객들은 스키피오의 엄청난 공격력인 창과 사신의 강력한 방어력인 방패와의 엄청나고 격력한 모순(矛盾)을 기대했다. 스키피오, 진성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전력을 이용한 정면 승부를 택했다. 이미 승부는 가려진 상태였기에 이런 상황에서의 다른 선택은 관객과 상대를 배려치 않는 것이라 생각했다. 수십 개의 공성탑을 만들고 투석기를 이용해서 성안을 공격했다. 스키피오가 마지막 사신을 치러 올 때까지의 그 가공할 이집트 본토 소거 작전은 이집트 군대가 로마 군대에 대해 공포심을 가지도록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스키피오의 군대의 막강한 전력이 정면으로 승부하자 게이머 사신은 있는 힘을 다해서 막았지만 군인 하나하나에 배인 공포심을 그 급한 상황에서 막을 수는 없었다. 성을 둘러싸고 수십 개의 대형 공성탑이 성에 걸쳐지고 투석기에서 날아가는 큰 돌은 이집트 군대를 위협했다. 40만의 로마 대부대가 성을 향해 돌진하는 모습과 성안에서 방어하는 이집트 군대의 전투 장면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승부를 떠나서 그 치열함과 그 장관 앞에 관객들은 말을 잃었다. 보통 프로 게이머 사이에는 생각과는 달리 국지전이 전체 승부의 향방을 가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어떤 대규모 전쟁이라 하더라도 그 컨트롤은 정말로 어려웠기 때문에 군대를 나누어서 통제했다. 그래서 이런 대규모 전투는 그리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이런 대규모 공성전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무리 40만이라는 정예 병력이 있더라도 공성전에 이렇게 무작정 정면 승부를 하는 게이머는 없다. 단지 이미 승부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스키피오였기에 이런 어쩌면 프로로서의 서비스인 대규모 공성전을 벌인 것인지도 몰랐다. 물론 거기에는 상대인 게이머 사신의 존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승부는 쉽게 나지 않았다. 처음의 엄청난 장관에서 치열하면서 비참한 전장터로 바뀌어갔다. 그런 소모전은 한 쪽의 성벽이 무너지면서 일단락이 되었다. 무너진 곳으로 병력이 몰리자 승부는 곧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이집트 군대인 그 특징인 탁월한 신앙심으로 공포심을 이긴 마지막 저항은 적지 않은 피해를 로마군에 입혔다. 스키피오와 사신은 대면했다. “정말... 정말 대단하다. 내가 졌다.” “....... 늪의 사신. 너 역시 대단했다.” 사신과 스키피오의 길지 않은 말을 끝으로 첫 번째 이벤트 매치는 그 명성 그대로 스키피오의 완승으로 끝났다. 하지만 보통 완승으로 끝날 때의 시시한 게임은 절대 아니었다. 상대를 속이기 위한 계략과 상대보다 강한 장점을 더욱 크게 만드는 정통 전략이 어우러진 대단한 게임이었다. 무엇보다 경기 종반에 이루어진 대규모 공성전 장면은 옛날의 그 비공정 타레도와 투척 폭탄 포르투 이후에 스키피오와 사신이 만든 새로운 명장면으로 기록될 정도로 대단한 광경이었다. 두 게이머가 게임기에서 나와 서로 악수하자 슈퍼 센터는 또 한번 발을 구르며 환호하는 관객들의 소리로 가득찼다. 두 게이머는 환호를 받으며 대기실로 나란히 걸어갔다. “진성아, 휴..... 너 정말 대단하다. 도대체 어떻게.. 그 원정군들이... 그렇게 강하냐?” “..... 그거? 내가 군단장들을 조금 교육시켰거든.... 하하하..” 대기실로 가면서 한석은 궁금한지 진성에게 물었지만 진성의 묘한 대답만 들을 수 있었다. 그 게임 후로 문명 온라인 영웅 스키피오에서 갑자기 로마 문명의 강세가 나타났다. 그것은 바로 진성의 그 군단장을 교육하는 방법을 제대로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아마추어 게이머는 물론 프로 게이머까지 그 방법을 그대로 이용하거나 변형해서 급기야 나중에는 자소 소프트 측에 로마 문명의 상대적 약화를 내용으로 하는 패치를 발표하게 만들었다. 다른 문명의 아마추어 게이머와 프로 게이머들은 그와 비슷하게 자신의 부대 사령관들을 교육시키고 그로 인해서 비슷한 효과를 거두려고 했지만 게임 내의 문명에 대한 이해와 군인들의 사상, 문화 등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스키피오와 같은 탁월한 효과를 거둘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 때문에 들인 시간과 노력이 다른 곳의 부족으로 나타나 더욱 쉽게 상대에게 패하기도 했다. 많은 게이머들을 로마 문명으로 이끌어 들인 게이머 스키피오의 ‘군단장 교육’이라는 실제 문명과 게임 내 문명의 이해를 전제로 한 탁월한 전략은 다른 문명에 대한 열의를 불러 일으켜 문명 온라인 영웅 스키피오라는 게임이 다른 게임과는 달리 ‘고급 게임’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아무도 예상못했다. 곧 두 번째 게임, 게이머 한신과 게이머 정성진과의 한 판 대결이 벌어졌다. 게이머 스키피오와 사신의 게임에 관객들은 발을 구르며 환호했다. 확실히 문명 온라인 영웅 스키피오라는 게임의 최정상급 선수들의 대결이라고 할만한 게임이었다. 특히 로마 문명을 주 문명으로 가진 팬들은 스키피오의 전략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어떻게 게이머가 없는 원정군이 저런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게임 버그라고도 볼 수 없었다. 버그라면 당연히 게이머 사신 측에서 뭔가 항의를 했을 텐데 아주 조용한 걸 보면 버그가 아니라 게이머 스키피오가 새로 찾아낸 로마 문명만의 군대 강화법이라 할 수 있었다. 관객들이 조용해질 무렵 김동수 아나운서의 말이 제대로 들리기 시작했다. “정말 대단한 게임이었습니다. 정말 손에 땀을 쥘 수밖에 없는 게임입니다. 홍진호씨, 어떻게 보셨습니까?” “굉장합니다. 탄탄한 방어를 바탕으로 상대의 허를 찌르는 게이머 사신의 전략, NPC를 이용한 대담한 원정, 상대의 전략을 꿰뚫어 본 듯한 대처, 2차 원정군이라는 확실한 카드를 선택한 게이머 스키피오의 전략. 둘 모두 정상급 선수라고 말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역시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수 스키피오의 벽은 높은 것 같습니다. 승률왕 게이머 사신도 그 벽을 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아, 게이머 사신의 첫 번째 패배군요.”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스키피오의 게임 운영 중에 그 군단장들을 모아서 따로 훈련시킨 것은 아무래도 파급효과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아직 확실하게 단정 지어서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로마 문명으로 게임을 즐기는 팬들은 저 방법을 통해 아무래도 조금 더 강해지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저런 방법이 로마에만 해당할지 아니면 다른 문명에도 동일한 효과가 나타날지 모르겠습니다. 로마에만 효과가 있다면 당분간 로마 문명의 강세가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효과까지 있을까요?” “아무래도 많은 게이머들이 로마 문명으로 게임을 하기 때문에 오래지 않아 그 효용에 대한 결론은 내려질 겁니다.” “네, 그렇군요. 이제 다음으로 게이머 한신과 게이머 정성진과의 두 번째 이벤트 매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잠시 광고 듣고 계속 중계해 드리겠습니다.” “진성아, 일.단.은. 축하한다.” 현준은 진성에게 약간은 삐딱하게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현준은 진성의 플레이에 말려드는 게이머 사신, 한석을 보면서 진성에게 계속해서 연패를 당한 자신의 게임이 생각이 나서 기분이 나빠진 것이다. “일단은? 기뻐해 주려면 똑바로 해라.” “진성이 형, 정말 멋있었어요. 정말 최고예요.” 진규는 마치 자신이 이긴 것 같이 진성 주위를 맴돌며 계속 같은 말을 반복했다. 매니저 서재필과 이준도 라커룸에 있으면서 진성의 첫 공식전 승리를 축하했다. “현준이 형, 왜 그래요? 기분 나쁜 것 있어요?” “..... 저 녀석이 상대 게이머를 이기는 그 방법 때문에 내가 저 녀석을 이겨본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진규는 그제야 왜 현준이 투덜댔는지 알 수 있었다. “그게 그렇게 대단한가요?” “네가 진성이와 직접 제대로 붙어 보면 안다. 절대 같은 병력으로는 못 이긴다. 내가 장담한다. 게다가 진성이가 제대로 지휘하면 두 배의 병력을 가지고도 이기기 힘들다고 봐야 한다. 그냥 똑같은 명령으로 부대를 보내서 싸우게 만들면 거의 100% 진다. 저 녀석이 업그레이드를 시켜 부대 자체의 능력이 떨어지니 안 그래도 이기기 힘든데 더....... 어휴.. 말도 하기 싫다.” 진규는 그런 말을 들어도 잘 몰랐다. 하지만 그리 오래지 않아 진성이가 구사하는 작전의 위력을 여실히 체감하게 되었다. “현준아, 툴툴거리지 말고 그 녀석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라.” “쳇.... 걱정 마라. 진성이 너한테는 져도 다른 녀석에게는 안 진다.” 현준은 대기실 밖으로 나가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지금부터 두 번째 이벤트 매치인 게이머 한신과 정성진 게이머와의 게임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밝아졌던 조명은 천천히 어두워졌고 그와 동시에 초대형 비전에는 문명 온라인의 게임 시작 화면이 떠올랐다. 게이머 한신의 문명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그리스였다. 초기 도시국가 통합 빌더 오더를 처음으로 만든 게이머로도 유명하기 때문에 한신의 문명이 그리스라는 것은 문명 온라인 유저라면 누구든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게이머 정성진은 한 문명을 정해 놓은 것이 아니라 거의 랜덤으로 선택했기 때문에 게임 화면이 제대로 나와야지만 알 수 있었다. “아..... 아틀란티스?” “아틀란티스잖아!” “와.. 그리스 대 아틀란티스라...” 정성진의 문명은 아틀란티스였다. 리그 초기에 정성진이 프로 게이머를 상대로 예전 스키피오를 흉내 내었던 문명이 바로 아틀란티스여서 관객들은 멋진 게임이 되리라 예상했다. “능하면서 무능하게 보이고 가까우면서도 멀게 보이고 멀면서도 가깝게 보이며, 미끼로 유인하고 , 혼란하게 만들어 기세를 빼앗고, 상대가 튼튼하면 나도 방비하고, 강하면 피해라. 격동시켜 판단을 흐리게 만들고, 틈을 보여 상대를 방심하게 만들고, 편안하지 못하도록 괴롭히고, 평안에는 이간질하고, 상대의 틈과 생각지 못한 허를 찌른다. 이게 바로 전쟁이다.” 게이머 한신, 현준은 평소 자신이 게임 시작해서 문명을 조사하고 점검할 때 외우던 손자의 전쟁에 대한 의견을 나름대로 정리한 구절을 읊었다. 마음의 일었던 파도가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많은 관중 앞에서 게임을 하게 되어서일까, 현준은 자신의 말소리가 관객들에게 전달된다는 것을 잠깐 잊었다. 밖에서 현준의 나직하면서도 힘 있는 ‘전쟁론’을 들은 관객들 중 한신의 팬들은 난리가 났다. 게다가 상대인 정성진이 게이머들에게 좋지 못한 평판이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신을 응원했다. 게이머 한신은 생각도 못했지만 오래지 않아서 문명 온라인 하는 사람치고 한신의 전쟁론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간첩 소리를 들을 정도로 유명해질 정도였다. 특히 문명 온라인의 초보들에게 소개하면서 하는 얘기 중에는 이 전쟁론이 빠지지 않았다. 한신의 약점은 상대의 문명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한신은 초반을 아주 안정적으로 가져가면서 정찰을 광범위하게 보냈다. 비록 자신이 진성에게는 아직 힘들다고는 해도 진성 아닌 다른 사람에게 패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 중 하나인 초기 도시국가의 통합을 이루었다. 한신은 자신이 진성과의 대결 속에서 찾아낸 문명의 발전을 좀 더 효율적으로 꾀할 수 있는 방법인 스파르타의 리쿠르고스의 법률을 수정해서 통합된 그리스 전역으로 그 범위를 넓혔다. 스파르타쿠스의 리쿠르고스의 법률은 실제 있었던 법으로 거의 800년 이상을 한번의 개정도 없이 지속된 법률이었다. 물론 한신 자신의 거듭된 노력으로 적지 않은 내용을 바꾸고 생략해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보이지 않고 그 일부만 지시를 내렸지만 결코 가벼운 내용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역량 있는 도시국가의 안정된 통합에 이어 다른 문명의 발전보다 조금은 더 빠른 발전이 가능한 방법이었다. 진성이 쓴 방법이 로마군대의 획기적인 효율성의 극대화라면 현준이 찾아낸 것은 문명 자체의 보다 빠른 발전을 위한 방법이었다. 현준이 찾아낸 방법을 아무리 써도 진성의 그 군대 강화방법과 더불어 다른 몇 가지의 업그레이드 전략에 당해내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 효과가 있는 방법이었다. 보통 문명 온라인의 각 문명에서 초보자들을 괴롭히는 것 중에 하나가 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변경해줘야 하는 규칙, 법률이었다. 세세하게 하나하나를 바꾸어줄 필요는 없었지만 전체적인 면에서 분명히 게이머가 해 줘야 할 일은 존재했다. 아니, 손대지 않아도 되지만 그럴 경우 수동으로 조정한 게이머를 당해내기 힘들었다. 고수와 하수는 이런 귀찮지만 꼭 필요한 컨트롤을 얼마나 적절하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으로 구별할 수 있었다 . 게이머 한신의 방법은 이런 컨트롤 상의 귀찮음을 현저하게 줄일 수 있었지만 거의 최적화 된 것과 마찬가지의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에 따른 단점은 스파르타의 방식으로 게임을 운영해야 하기 때문에 다양한 응용을 하려면 굉장한 노력이 필요했다. 또한 이 방법은 장기전보다는 중, 단기전에 더 적합하다고 현준은 스스로 판단했다. 어차피 문명의 일정 단계까지의 발전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차이가 적어지기 마련이다. 보다 현저한 차이가 있을 때 결판을 내는 것이 훨씬 이익이었다. 정성진은 예전에 보였던 아틀란티스의 빌더를 그대로 사용했다. 자신이 새롭게 개발한 것이 아니라 예전에 있었던 게이머 스키피오의 플레이를 나름대로 분석해서 자신에 맞게 수정한 것이었다. 게다가 거의 모든 문명을 다룰 줄 안다는 말은 한 문명에 대해서 깊이 알지 못한다는 말과 같았다. 정성진은 어떻게 해서든 장기전에 승부를 걸 수밖에 없었다. 아틀란티스는 장기전에 가장 강한 문명이었다.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여론에 떠밀려 ‘정성진 패러디’가 생길 정도여서 그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았던 정성진은 관객들의 반응을 통해 여전히 냉담함을 알았다. 감독의 결정에 따른 것뿐인데 자신에게 비난의 화살이 꽂히자 너무 힘이 들었다. 또한 자신은 게이머 스키피오와의 대결을 원했는데 결과적으로 게이머 한신과 붙게 되자 왠지 모욕을 당한 듯한 기분도 들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게이머 한신의 비디오 파일을 구해서 본 정성진은 아주 안정적인 게임 운영을 하는 것을 알았지만 결정적인 무엇이 부족함을 대번에 알아챘다. 정성진은 그나마 그런 한신의 스타일에 자신이 강함을 알게 되어 위안을 삼았었다. “.... 이제 겨우 군대 양성을 할 수 있겠구나.” 정성진은 어렵기로 소문난 아틀란티스의 초반 문명을 설정하고는 군대를 양성하기 위해서 이리저리 바쁘게 컨트롤하기 시작했다. 아틀란티스의 군인은 초반에 있어서는 가장 강한 군인이었다. 실전 경험이나 군기 같은 보이지 않는 요소를 제외하고 군인 하나하나의 체력이나 전투력은 모든 문명을 통틀어서 최강을 자랑했다. 그로 인해 다른 문명과의 균형을 위해 초기의 군인 수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일단 초반 문명 설정을 끝마치면 당연한 수순으로 군대를 양성해야 했다. 아틀란티스의 군대 양성 사례 중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한 경우는 이상하게도 로마 문명의 전문가 게이머 스키피오였다. 그의 초반 군대를 해체하고 처음부터 다시 군대를 만들어가는 오더가 거의 대세로 굳어졌다. 초반의 시간은 조금 잡아먹지만 컨트롤도 훨씬 편해지고 군인 하나가 아닌 부대로서의 군대 능력은 훨씬 더 탁월했다. 하지만 그 오더에도 분명히 단점이 존재했다. 하나는 초반에 그렇지 않아도 약한 아틀란티스에 힘의 공백을 가져오게 만들었다. 잠깐이지만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상대가 공격하면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게이머들은 스키피오의 초반 전략에 변칙적인 수정을 가해서 사용하기도 했다. 다른 하나는 군대의 실전 경험 부족이었다. 이것은 전쟁을 통하지 않는 이상 쉽게 얻기 힘든 것이어서 군대를 잘 정비한 게이머도 적과 조우한 후의 전투에서 어이없게 패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것을 위해서는 완벽한 조건에서 적을 유린한다던가, 아니면 지휘관인 게이머의 컨트롤이 좋아야 했다. 이로 인해 초보자들은 난색을 표하는 문명으로 제일 많이 꼽는 것이 바로 아틀란티스였다. 정성진은 상대 게이머 한신이 스키피오와 연습 게임을 많이 했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상대는 당연히 스키피오의 아틀란티스 전략을 알고 있으리라 확신했다. 정성진은 미리 생각한대로 상대의 생각을 역이용하기로 했다. 변칙적인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었지만 그럴 경우 컨트롤과 시간에 손해가 있었다. 정성진은 상대가 뻔히 알고 있는 방법을 사용함으로 상대의 허점을 파고들기로 결심했다. 정성진은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빠른 방법으로 비공정 타레도와 투척 폭탄 포르투의 제조가 가능하도록 문명의 발전을 유도했다. 그 때문에 많은 컨트롤이 필요해서 어쩔 수 없이 지상 군대는 방어전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성을 쌓기도 힘들어 성이 아닌 일종의 방어벽 정도만 설치할 수 있었다. 정성진은 많은 정찰병을 풀어서 상대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한편, 자신은 빨리 문명의 발전에 모든 힘을 쏟았다. 한신은 초기에 자신의 감을 믿고 상대가 있을 만한 곳에 집중적으로 정찰을 해서 오래지 않아 발견했다. 그리고 곧바로 잠입해서 상대의 발전 상태를 알아오게 했다. “뭐야? 이것은.. 스키피오의 아틀란티스잖아? 이런.... 나를 바보로 보는군. 장기전으로 가고 싶으시겠지? 좋아. 그렇게 원한다면... ” 아틀란티스가 후반, 장기전에 얼마나 강한지 게이머 한신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게이머 중에 스키피오, 진성 만큼이나 아틀란티스를 잘 컨트롤하는 사람도 없다고 생각하는 한신은 평소의 연습게임에서 스키피오의 아틀란티스가 후반까지 버티는 경우 난데없이 하늘을 새까맣게 덮으며 날아오는 비공정들에게 혼이 난 경험이 있었다. 상대는 분명 게임을 후반전까지 끌고 가기를 원할 것이다. 한신은 그렇게 순순히 끌려갈 만큼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한신은 한 눈에 스키피오, 진성의 아틀란티스라고 바로 알아챘다. 그런 전략이 상대의 허를 찌르는 것임을 알았지만 직접 당해보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한신은 상대가 원하는대로 장기전까지 갈 생각을 했다. 물론 상대를 그대로 두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한신은 초, 중반에 상대를 괴롭힐 목적으로 안정적이면서 빠른 발전을 하는 문명과 넘쳐나는 재정으로 엄청난 군대를 모집했다. 이미 스파르타 체제로 모든 도시국가들을 통합했기 때문에 모인 군인들은 모두 다른 문명과 비교해 비교적 정예일 수밖에 없었다. 원래의 스파르타 군인들과는 비교하기 힘들겠지만 실제 전쟁에서 이긴다면 그 경험과 기세로 충분히 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또한 한신은 상대가 장기전을 예상하고 있음이 확실해지자 자신 할 수 있는 것은 해 보기로 했다. 그리스 문명의 특징에서 천문학이라는 분야가 있었다. 단기전으로 승부가 많이 갈려서 쉽게 보기 힘들었지만 천문학은 발전시키면 미래의 사건들을 암시적으로 또는 명시적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확실하게 들어가는 돈과 시간에 비해서 불확실한 결과가 천문학을 개발하지 않게 만들기도 했지만 한신은 개의치 않고 넘치는 돈으로 개발을 명령했다. 한신은 천문학과 더불어 그리스 문명의 양대 학문이라는 기하학이라는 분야도 개발을 명령했다. 수에 약한 그리스는 수가 필요 없는 도형의 집합이라는 기하학을 선호했고 거기에 시간을 많이 투자했다. 그리스 문명에서 일정 궤도 이상의 기하학이 발전하게 되면 문명 전체에 플러스 효과가 나타났다. 일단 군대의 진형이 훨씬 복잡할 수 있었고 일정 교육을 통해 그 군진에 대한 군인 개인의 소화 능력도 향상이 되었다. 또한 문명의 발전 속도도 빨라지고 재정 부분도 좋아졌다. 하지만 천문학처럼 많은 게이머들이 기하학을 제대로 신경 쓰지 않는 이유는 가시적으로 그 효과가 나오려면 거의 종반에 가까워야 가능했다. 또 다른 기피대상이 된 이유는 그리스 문명 자체가 그리 약한 문명이 아니기에 보통 그 전에 승부가 갈라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한신의 경우는 이런 기하학에 신경 쓸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있었다. 처음에 조치한 법으로 한결 쉬워진 컨트롤의 여력을 다른 것들을 개발하는데 쓴 한신은 아틀란티스를 공략하기 위해서 군대를 끌어 모았다. 군대 양성을 하면서 동시에 시작된 수송선의 건조 역시 거의 완료된 시점이어서 통합 그리스의 자유민으로 구성된 정예 군인이 모두 원정길에 오르는데 큰 문제가 없었다. 한신은 아직 그리스 각 부대의 지휘관을 스키피오처럼 교육시키는 데는 실패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원정길에 올라야 했다. 한신이 처음에 실행한 법으로 인해 원정으로 가서도 문명과 사회의 발전에는 그리 차질이 없을 것으로 예상했다. 한신은 마지막으로 여러 필요한 설정들을 하고는 원정을 명령했다. “뭐? 하긴 올 때도 됐지.” 정성진은 조금 전에 그리스의 원정군이 아틀란티스로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지금 상황에서 바다에서 그리스 원정군과 접촉할 수는 없었다. 한신의 그리스 원정군은 쉽게 상륙해서 30만이라는 군대가 해안에서 조금 떨어져서 엄청난 진지를 구축했다. 원래 진지에 가장 엄격하고 가장 튼튼하게 짓는 군대는 로마군대였다. 로마군대는 이동하다가 멈추면 바로 진지 구축에 들어갔다. 어떻게 보면 매일 성을 쌓는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로마군대의 진지 구축은 아주 엄격해서 그 진지 구축 방법이 책으로 나와 지휘관들에게 배포될 정도였다. 한신은 스키피오 덕분에 그 진지에 대한, 미처 하지 못했던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스 원정군의 진지는 그 특성상 로마군대와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원래의 그리스 군대와는 다르게 탄탄한 진지를 자랑했다. 정성진의 입장에서 정면대결은 절대 피해야 했다. 상대 역시 컨트롤이 나쁘지 않기 때문에 잘못했다가는 경험이 없는 자신의 군대가 오합지졸로 변해버릴 소지가 다분했다. 상대 군대를 분리해서 확실한 승산이 있을 경우에만 압도적인 전력 차이로 에워싸서 섬멸해야 했다. 정성진은 자신이 양성한 8만의 군대를 천천히 진군시켰다. 8만이라는 군사 역시 적지 않았지만 상대 30만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수가 적다는 말은 기동성은 우월하다는 말과 같았기 때문에 정성진은 8만의 둘로 나누어 게릴라전을 벌이기로 했다. “어... 두 부대? 10만도 안 되어 보이는데..” 한신은 정찰병들을 통해서 합쳐서 10만이 채 되어 보이지 않는 두 부대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30만의 군대를 공격할 때 10만으로도 힘들지만 그 부대를 반으로 나눈 것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게릴라전으로 괴롭히는 것이 목적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한신은 군대를 이끌고 천천히 아틀란티스의 중추로 갔다. 그리 여유로운 편은 아니었지만 정찰을 통해 지형을 완전히 파악하고 지도를 만들면서 갈 정도로 신중했다. 물이나 높은 산이 있는 곳은 의도적으로 피했다. 사실 30만이 움직일 곳이라면 그런 곳은 당연히 피할 수밖에 없었다. 한신은 30만의 군대가 절대 그 진형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모든 힘을 쏟았다. 곧 정성진의 두 부대가 공격을 가했다. 한신은 절대 추격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에서 활을 이용해서 견제하고 묵묵히 정해진 길을 천천히 행군했다. 30만이라는 대군이 추격을 통해서 그 부대의 진형이 흐트러져 길어진다면 4만의 부대로 충분히 돌파가 가능하게 된다. 하지만 단단히 뭉쳐 있는 군대는 뚫기도 힘들 뿐 아니라 처음에 뚫고 들어간다고 해도 그 속에서 전멸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한신은 이런 점을 잘 알았다. 원래 게이머의 컨트롤이 없다면 30만 대군이 4만의 군대에 공격당하면 당연히 응수를 해서 추격전에 나서게 만든 것이 문명 온라인의 인공지능 중 하나였다. 그것은 어쩌면 군대라는 조직의 고유한 특징일지도 몰랐다. 정성진은 그런 자극이 계속해서 군대가 상대 게이머의 컨트롤을 벗어나기를 바랬고, 한신은 그런 도발에 자신의 부대가 넘어가지 않도록 30만의 군대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통제하기 시작했다. 정성진은 점점 더 안으로 들어갈수록 자신이 불리함을 알았고 한신 역시 원정군으로서 보급의 부담을 완전히 떨치기는 힘들었다. 정성진은 두 부대 중 하나는 그대로 30만의 대군을 상대로 야밤에만 기습을 감행하는 등 게릴라전을 펼쳤고 나머지 한 부대는 한신의 보급선을 끊기 위해서 수송선이 있을 해안으로 부대를 보냈다. 하지만 해안에 도착한 부대는 지키는 군대는 물론 수송선마저 없음을 발견했다. “보급은 어떻게?” 30만의 군대가 이동하면서 보급품을 가지고 간다면 정성진이 모를 리가 없었다. 분명히 그 진지에 30만이 사용할 만한 보급품은 보이지 않았다. 정성진은 한신의 부대가 어떻게 보급을 해결할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 그런가? 이..이런...” 정성진은 급히 해안에 있는 부대를 다시 불러 들였다. 한신은 처음부터 보급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정성진은 한신이 원정 와서 현지에서 보급을 할 작정임을 알았다. 조금 전의 그 게이머 스키피오도 이집트에서 원정군의 전체 보급은 아닐지라도 상당부분 약탈과 소거를 통해서 물자를 얻었다. 정성진은 아틀란티스에 들어온 한신의 30만의 군대가 어떻게 행동할지 눈에 뻔했다. 한신은 어느 정도 내륙으로 들어와 근처의 지형을 대강 파악하자 곧 군대를 세 부대로 나누었다. 그리고 아틀란티스의 핵심인 수도 아틀란티스를 제외하고는 두 부대는 확실하게 아틀란티스의 도시들을 잿더미로 만들고 나머지 한 부대에 한진 자신이 지휘해서 자신의 뒤를 따르는 4만의 부대와 분명히 보급로를 끊기 위해 수송선으로 간 또 하나의 부대를 맡기로 했다. 자신이 10만의 군대로 정성진의 군대를 막고 있는 동안 다른 두 부대는 배후의 걱정 없이 마음껏 상대 도시들을 유린할 수 있을 것이다. “......... 세 부대로? 어쩔 셈이지?” 정성진은 곧 한신의 부대로 10만의 세 부대로 나누어졌음을 알았다. 8만의 군대에 10만의 군대 셋이 아니라 30만의 군대 하나가 더 위력 있는 법이었다. 그런데 한신은 그런 이점을 버리고 세 부대로 나눴다. 고민하던 정성진은 곧 상대 부대들의 이동을 보고받고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이런...” 한 부대는 이제껏 게릴라전을 벌이던 자신의 부대와 돌아오고 있는 부대를 기다리는 듯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있었지만 다른 두 부대는 아틀란티스의 수도를 제외한 중요한 두 도시를 향해 진군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성진은 상대의 정교한 컨트롤과 탄탄한 전략에 어쩔 줄을 몰랐다. 자신이 두 부대로 한신의 그 도시를 향한 두 부대를 쫓으면 분명 남아 있던 그 부대에게 뒤에서 공격을 당할지 몰랐다. 전투를 벌일 때 가장 유의해야할 점 중 하나가 바로 배후를 내주지 않는 거였다. 정성진은 자신의 영역에서 이렇게 상대에게 휘둘릴 줄은 생각도 못했다. 게다가 왜 수도 아틀란티스가 아니라 다른 도시를 향해서 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물론 보급 문제겠지만 수도는 그나마 방어력이 있기 때문에 차라리 그렇게 되었다면 정성진 자신으로서는 시간을 벌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었다. 점점 한신의 실력이 예상 밖임을 인정해야 했다. 비록 수도 아틀란티스를 통해 비공정과 투척 폭탄을 제조할 수 있다고 해도 나머지 도시들이 완전 소거된다면 기껏 개발해 놓은 비공정과 투척 폭탄을 제조할 재정이 사라지게 됨을 정성진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물자보급과 재정의 황폐화의 두 마리 토끼를 노리고 있는 한신의 의도는 알지 못했다. 정성진은 부대를 하나로 만들어 남아 있던 상대 부대를 공격했지만 오히려 피해를 입고 쫓기게 되었다. 이제까지 자신이 가졌던 기동력의 우월이라는 장점은 사라지고 전력의 열세라는 단점이 나타나 쫓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정성진은 상대 부대에 게이머 한신이 있음을 알았다. 약탈과 소거는 다른 두 부대의 NPC에게 맡기고 자신은 스토퍼 역할을 하고 있는 게이머 한신을 보며 정성진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당장에는 자신을 뒤쫓고 있는 저 10만의 부대를 떨쳐야 했다. 다행히 원정군보다는 지형에 익숙했기 때문에 퇴각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약탈당하고 있는 도시를 향하기만 하면 어김없이 상대의 부대가 나타나 도무지 접근할 수가 없었다. 둘로 나누면 한 쪽은 갈 수 있겠지만 그 도시에도 10만의 부대가 있는데 4만으로 10만을 이기기는 쉽지 않았다. “4만의 부대로 나눈다!” 정성진은 곧 결정을 내렸다. 4만의 부대로 나눠서 양쪽으로 흩어졌다. 정성진의 결정은 어느 정도 도박이었다. 상대는 자신이 어느 부대에 있을지 모른 채 두 부대로 나눈 자신의 군대 중 하나를 쫓게 되거나, 아니면 한신의 부대 역시 둘로 나누어 쫓게 될 것이다. 어떤 경우든 정성진 자신이 지휘하는 부대가 한신이 지휘하는 부대만 만나지 않는다면 어느 정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도박이었다. 게다가 그 효과조차 확실하지 않은 도박이었다. “두 부대로? 오호.. 손해가 클 텐데.. 뭐, 내가 상대 입장이었더라고 해도 비슷한 일을 했겠지만..” 한신은 자신의 부대를 도시로 쳐들어간 부대 중 하나로 진군시키면서 다른 부대에 전령을 보냈다. 전령을 받는 즉시 본대로 최대한 빨리 행군해서 복귀하라는 내용이었다. 한신은 이제 다시 부대를 합쳐서 30만이라는 대군으로 만들 작정이었다. 이번의 도시 공략으로 어느 정도의 물자를 확보했으니 당분간은 30만으로 이동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제는 30만의 대부대로 상대의 가지를 칠 시기라 생각했다. “게이머 정성진, 바쁘겠는걸.” “뭐라고 이동해? 어디로?” “이런... 정말.. 정말 대단하군.” 기껏 쫓아온 정성진은 상대의 군대가 벌써 이동했다는 것을 알았다. 4만으로 10만을 전멸시키는 것은 어렵지만 그 10만의 부대에 게이머의 지휘가 없다면 충분히 승산은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약탈하던 도시를 팽개치고 본대로 가버린 것이다. 자신이 나눈 두 부대 모두 한신이 이끄는 군대의 공격이 없어서 이상하다고 여겼는데 이런 수를 쓰다니. 정성진은 허탈했다. 게다가 반대쪽으로 간 자신의 나머지 부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조금 있으면 30만이 될 대군을 4만의 NPC가 건드리기에는 너무 버거웠다. 한신은 30만을 모아서 ‘순회공연’을 나섰다. 수도를 제외하고 아틀란티스의 전역을 다니면서 철저하게 파괴를 했다. 그 사이에 정성진의 발 빠른 대처로 각 도시들에서 사람들이 떠나는 인공적인 소거작전이 실시되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남은 건물들은 완파될 수밖에 없었다. 한신의 목적에 아틀란티스의 황폐화가 있다는 사실은 한참 나중에 깨달은 정성진이었다. 단순한 원정군의 보급문제를 해결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아무리 문명 자체는 발달해도 그 재정 자체를 무너뜨리려는 의도는 30만의 대군이, 대군이 가기에는 험한 곳을 진군해서 문명의 발전에 필요한 주요 건물들을 남김없이 파괴시키는 것을 보고서야 알았다. 한신의 원정은 긴 시간이 걸렸다. 적 본대와의 전면전이 아니라 계속 적의 가지만을 쳤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 시간이 길어졌다. 그런 오랜 시간 동안 각 도시에서 벌어진 시가전 등의 저항으로 인해 거의 8만의 군사를 잃었지만 아직도 22만의 군대는 그 위용을 자랑했다. 게다가 시간이 흐름으로 인해 이제 문명의 발전은 그 종반에 이르렀다. 정성진은 수도에서 그리 많지 않은 재정으로 비공정 타레도와 투척폭탄 포르투를 생산했다. 투척폭탄 포르투를 대량 생산할 재정이 부족한 관계로 차라리 비공정 타레도를 중심으로 생산했다. 포르투는 일회용 소비 무기지만 비공정 타레도 같은 경우에는 지속적으로 그 안에 군사를 태워 상대를 괴롭히고 공격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직도 20만이 넘는 상대의 대병력을 상대할 유일한 수단은 비관적이지만.... 바로 비공정이라 생각했다. 한편, 한신의 그리스 문명도 궤도에 올랐다. 특히 천문학과 기하학의 발달 역시 이루어졌다. 천문학의 발달로 어느 정도 기상이나 재난 등의 이변이 예상 가능해졌다. 100%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유리함은 전투에 큰 요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기하학의 발달과 수송선으로 들어온 전문학자들의 유입과 교육으로 위력이 강한 군진과 그 실행 능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이 정도라면 스키피오, 진성이 지휘하는 로마군대와의 대적도 그리 어렵지 않게 느껴졌다. 아틀란티스의 중앙에서 서쪽으로 약한 치우친 곳에 위치한 고원 고르도니아. 고원이라고 하기에는 그리 높지 않지만 주변 지역을 잘 볼 수 있고 교통의 요지라서 누가 보더라도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임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 고원을 앞에 두고 22만의 원정부대와 14만의 아틀란티스 군대가 진을 치고 있었다. 합해서 30만이 훨씬 넘는 군대가 진을 칠 곳은 당연히 평원밖에 없었다. 이때까지 약간은 지루하게 느껴진 전투를 보아온 관객들은 이제 곧 펼쳐질 전투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아틀란티스가 불리하게 느껴졌지만 비공정의 존재와 자기 영토라는 점, 게다가 상대는 오랜 원정으로 지쳐 있다는 점에서 승리를 자신하는 정성진이었다. 한신은 그리스 본토에서 20만이 넘는 병력이 대기하고 있음에도 2차 원정군을 부르지 않았다. 오랜 동안의 전투로 인해 피로는 쌓였지만 그 많은 경험으로 인해 노련한 군대가 되어 버린 20만의 군대는 그야말로 한신 자신이 원하는 군대였다. 뻑뻑한 새 자동차 아니라 오랜 운전을 통해서 길들인 것처럼 자신의 조그만 운전 동작에도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노련함을 보여서 한신은 이 부대로 끝을 보기로 결심했다. 한신은 20만이 넘는 부대를 2천명의 부대로 편제를 바꾸었다. 보통 조직된 군대의 편제를 바꾸면 혼란이 생겨서 실전에서 사용했다가는, 어쩌면, 그것으로 인해 구멍이 생겨 자멸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노련한 군대는 며칠 가지 않아 새로운 편제를 이용한 능숙한 군진을 보여주었다. 한신은 그 2천명의 부대를 하나의 단위로 삼아 자신이 직접 지휘를 할 수 있는 소부대로 정했다. 거의 100개가 넘는 부대를 자신이 일일이 컨트롤해야 하기 때문에 부담됐지만 아무리 노련하다고 해도 그 피로도는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고육지책으로 어쩔 수 없었다. 드디어 두 군대가 천천히 진군하다가 양쪽 지휘관의 공격이라는 외침에 점점 더 빨라서 두 개의 거대한 파도가 서로를 덮치려 가는 형상으로 곧 맞붙었다. 확실히 일대일 능력에서는 정성진의 아틀란티스 군인이 월등했다. 하지만 경험 없는 군대와 노련한 군대의 차이는 곧 드러났다. 게다가 한신이 2천의 소부대를 직접 컨트롤하자 20만의 대부대는 순식간에 흩어져 예전 스키피오가 보여 주었던 전설의 백인대 컨트롤과 비슷한 정교한 움직임을 보여 주었다. 관객들은 흥분하며 환호하기 시작했다. “와... 저... 마치 스키피오의 군대가 발전한 것 같다.” “정말 대단하다. 어떻게 저런 컨트롤이 가능하지?” “적어도 수십 개의 부대가 서로 얽혀서 싸우는 것 같다. 이야... 끝내 준다.” 그 때는 스키피오의 군대가 아틀란티스였지만 지금은 그 반대였고 게다가 병력도 한신이 우세했다. 그러다 보니 잠깐 만에 한신의 파도가 상대 정성진의 파도를 집어 삼키는 형상이었다. 이러다가는 정성진의 본진마저 두 동강날 판이었다. 그 때, 고르도니아 고원에서 뭔가 떼를 지어 날아왔다. 수십 대의 비공정 타레도였다. 하나의 비공정마다 수십 명의 군사들이 타고 있었는데 곧 많은 비공정이 날아와 한신의 부대를 향해 투척 폭탄 포르투를 던졌다. 그 포르투는 많지 않았는데 그것은 일종의 상대에게 심리적인 충격을 가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성진의 예상대로 포르투가 낙하한 주위의 군대는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곧 수십 대의 비공정 타레도에서 쏟아내는 화살들은 아래에 있던 군사들에게는 속수무책이었다. 방패를 들어서 방어를 할 수는 있지만 어떻게 상대를 공격해야 할지 몰랐다. 그 틈을 타서 정성진의 아틀란티스 보병들이 힘을 내기 시작했다. 점점 밀리던 형세가 회복되었다. 한신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자신이 직접 지휘하는 2천명의 부대를 통제해서 상대 보병의 틈으로 돌격하게 만들었다. 타레도가 나타난 이상 모여 있는 것은 불리했다. 한신의 부대는 다시 힘을 얻어 강한 파도가 아니라 부드러운 파도가 되어 상대 보병과 섞여 버렸다. 정성진은 그런 기민한 상대의 컨트롤에 감탄하고 말았다. 하지만 게임은 감탄만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정성진은 타레도를 이용해서 상대를 괴롭혔지만 도망가는 군인 하나 찾기 힘들었다. 수십 척의 비공정 타레도에 아무리 많이 태워도 만 명을 넘기기는 힘들었다. 고작 수십 대의 타레도의 역할은 소규모 부대의 섬멸과 대부대의 지휘체계 교란이었다. 그런데 처음 보는 것이 분명할 타레도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한신의 부대의 동요는 적었다. 정성진은 그 전쟁 경험이라는 보이지 않는 ‘요인’을 간과했던 것이다. 그 순간 한신의 부대는 한신의 명령을 들었다. “전군 전장을 벗어나라. 전장을 벗어나서 제 2 진지로 모여 집결하라. 전장을 벗어나라. 빨리 벗어나라.” 2천의 소규모 부대는 여전히 부대로서의 진형을 갖춘 채로 엄청난 속도로 전장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각 부대가 같은 방향이 아니라 마치 뭔가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원을 거리며 빠져 나갔다. 정성진은 다 이긴 전투를 포기하고 상대의 군대가 모두 철수하자 왜 그런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의 타레도가 여전하기는 했지만 그 타레도로 20만을 섬멸하기는 불가능했다. 정성진이 뭔가가 있을가 싶어 고민하는 순간 이미 한신의 부대는 전장의 이탈을 완료했다. 그 순간이었다. “꽈르릉 꽈꽝! 쩌어억!” 고르도니아 고원 아래에 있던 평원 전체가 흔들리며 그 땅이 쩌억 갈라지기 시작했다. 땅이 흔들리고 고원에서 커다란 바위들이 평원을 향해 떨어지는 등 갑작스런 재앙에 정성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이.. ” 말도 할 수 없었다. 천재지변, 지진이었다. 게다가 고원에 가까웠기 때문에 고원에서 떨어진 집 채 만한 바위들은 아틀란티스 보병들을 유린했다. “어..어떻게.. 지진이 일어나는 줄 알았지? 아, 천문학!” 대부분의 문명을 할 줄 아는 멀티 플레이어답게 곧 상대가 이 곳을 전장으로 선택한 이유와 이렇게 승기를 잡고서도 전장을 이탈해버린 이유를 알았다. 정말 철저하게 당한 것이다. 원래, 고르도니아 고원 근처가 요충지이기도 했지만 한신의 부대가 돌아서 그 곳으로 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전장이 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한신이 그 곳을 전장으로 삼았고 정성진이 그에 동의한 셈이었다. 극에 이른 천문학으로 재앙을 예상해서 정확하게 그곳을 전장으로 삼다니.. 정성진은 허탈했다. 상대가 너무 강했다. 아니 자신이 너무 약함을 알았다. “휴.... 정말 저렇게 한 문명을 깊이, 오랫동안 연구한 사람에게는... 휴... 어렵구나..” 정성진은 한숨 섞인 말을 내뱉었다. 한신의 입장에서는 조금은 도박이었다. 지진이 일어날 거라는 것은 알았지만 신빙성은 그리 많지 않았다. 게다가 그 규모 역시 ‘커다란 땅의 갈라짐’ 정도여서 쉽게 판단하기 힘들었다. 어쩌면 동귀어진이 될 수도 있었다. 동귀어진이라면 차라리 낫지만 아예 지진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상대의 숨통을 트여 주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런 도박이 성공하자 한신은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밖에서 보던 관객들도 그런 전투의 흐름에 빠져 들었다. 대규모 전투장면과 비공정 타레도의 등장, 반격하는 아틀란티스,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공격하는 한신의 군대 그러다 갑자기 전장을 이탈하는 한신의 군대.... 엄청난 지진! 그야말로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장면들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느 정도 지진이 멈추고 참혹한 장면과 게이머 정성진의 한숨 섞인 목소리를 듣자 그제야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한신과 정성진의 게임 시간은 1시간 38분으로 프로 리그 공식 경기 사상 최장 플레이 시간을 기록했다. 하지만 관객들은 마지막의 그 강렬한 인상을 남긴 전투로 인해 전혀 지겹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정성진은 자신의 패인을 문명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돌렸다. 리그를 거치면서 점점 그런 자신의 약점을 느꼈지만 한신과의 대결에서는 거의 한번도 주도권을 잡아보지 못한 채 끌려가다가 지고 만 꼴이었다. 정성진은 그런 점을 깨닫고 프로 리그가 쉬는 기간 동안 자신 나름대로의 철저한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성진과 한신이 흐르는 땀을 닦으며 게임기에서 나오자 7천여 관객들은 기립 박수로 그 게임에 대한 화답을 했다. 정성진과 한신이 악수를 하자 그 환호성은 더욱 커졌다. 곧 둘은 대기실로 내려갔다. “정말 대단했습니다. 한신. 오늘 정말 감탄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게임 부탁합니다. 다음에는 이렇게 쉽게 지지 않을 겁니다.” “네?... 아... 네..” 한신은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았던 정성진이 진심으로 한 말을 듣자 선뜻 뭐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단지 자신이 사람을 편견으로 본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휴... 오늘 너무 힘들었네요. 올해의 마지막 날인데... 아무래도 골아 떨어져 잘 것 같습니다. 게이머 한신.. 아니 진현준씨, 오늘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네..... 저두요.” 정성진이 자신의 대기실로 들어가자 우두커니 서 있던 현준은 정성진에 대한 보통 사람의 생각이 틀렸음을 확신하고는 천천히 자신의 대기실로 향했다. 새해의 첫날에 마치 한 해를 잘 보내라는 듯 하늘에서 눈이 내렸다. 밤늦게 들어와 잠이 든 진성이었지만 어쩐 일인지 7시도 되기 전에 잠에서 깼다. 침대에서 일어나 그 옆의 창문을 통해 밖으로 본 진성의 입에서 탄성이 새어 나왔다. “아! 눈이다!” 세상은 온통 흰 눈으로 덮여 있었다. 아침 일찍 누군가 지나간 모양인지 발자국이 군데군데 나 있었지만 그야말로 순백의 세상이었다. 진성은 외투만 걸치고는 아래로 내려갔다. 여러 번 왔던 눈이었지만 새해 첫 날의 눈에는 뭔가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서인지 진성은 계단으로 내려갔다. “진성이구나, 빨리 일어났네. 피곤하지 않니?” 부엌에서 뭔가를 준비하던 현준 어머니는 진성을 보고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라도 아침에 가장 활기찬 사람은 현준 어머니였다. “네, 아주머니. 아주 잘 잤어요. 그런데 밖에 눈이 왔던데요..” “그래, 밤늦게 눈이 내린 모양이더구나. 지금도 내리고 있으니 아마 꽤 쌓이겠지?” “저, 잠깐 정원에 나갑니다.” “그래. 추우니 오래는 있지 말거라.” “네.” 현관문을 열고 나오자 싸늘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뽀드득 밟히는 소리가 너무 좋았다. 진성은 손을 뻗어 눈을 한움큼 집었다. 손에서 녹는 눈의 차가움이 약간은 몽롱한 정신을 완전히 깨웠다. 진성은 정원에 마련되어 있던 탁자와 의자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었다. 걸어가면서 들리는 뽀드득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의자와 탁자에도 눈이 쌓여 앉기는 불가능했다. 생각보다 빨리 일어난 진성은 외투를 벗어 근처 나뭇가지의 눈을 털고는 거기에 걸었다. 그리고 곧 숨을 크게 쉬면서 팔극신권의 팔극진결을 펼치기 시작했다. 기분 좋은 싸늘함이 몸을 감쌌지만 몇 번 움직이자 몸은 서서히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한번 처음부터 끝까지 팔극진결을 펼친 후에도 계속 동작을 이었다. 진성의 팔극진결에 처음과 끝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끝내면 그 부분이 끝인 것이다. 강한 힘이 있어 보였지만 거칠지 않았고, 부드러운이 느껴졌지만 결코 약하지 않은 동작이었다. 진성은 점점 그 동작 안에서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점차 자신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만 안 채 눈마저 감았다. 자신이 팔극진결을 펼치는 지도 모르게 되었다. 그런 상태로 시간이 흘렀다. 몸에 기분 좋은 땀이 조금 흐르자 진성은 천천히 동작을 마무리했다. “휴......... 아니?” 마지막 한숨을 쉬고는 뒤를 돌아봤을 때 진성은 현준 아버지와 현준이 밖에 나와 캠코더를 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그런데... 웬 캠코더? 설마..” “그래. 네 녀석 그 동작이 너무 좋다고 현준 엄마가 그러기에 내가 좀 찍었다. 그런데 너 30분을 계속 그러고 있었다. 춥지도 않냐? 빨리 들어가자. 아침 다 됐다고 하더라. 으... 춥다.” 진성이 들어오지 않자 현준 어머니는 정원으로 나왔다. 그러다가 눈을 맞으며 우아하면서도 힘찬 동작을 계속하는 진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보기 좋아서 현준 아버지를 깨워 저 장면을 녹화하라고 말한 것이다. 물론 현준 아버지는 당연히 현준을 깨워서 현준에게 캠코더로 찍으라고 했지만. 안으로 들어온 현준 아버지, 진성, 현준은 아침답지 않은 아침에 놀랐다. 새해 첫 아침답지 않게 아주 풍성했다. 탕수육을 비롯해서 홍어찜, 녹두전, 더덕구이, 쇠고기 전골, 돼지 갈비, 각종 나물과 김치들로 가득 찬 식탁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곧이어 내려온 현준의 동생 현석이도 그리 다르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 엄마, 이게 도대체....” “당신... 이...이게..” “부담 갖지 말고 드세요. 어제 아주 중요한 행사를 치렀잖아요. 진성아, 현준아 수고했다. 나도 너희들 게임을 봤는데... 게임에 대해서 모르는 나도 정말 긴장될 정도로 재미있더구나. 내가 거의 일주일 전부터 너희들에게 이것 해 주려고 준비했단다. 많이 먹어라.” “아.... 감사합니다. 아주머니.” “와... 엄마.. 웬일이에요?” “자, 먹어라. 양은 충분하니까.” “엄마!!!!!!!!” “나 귀 안 먹었다. 왜 그러냐? 우리 막내!” “엄마는 내가 시험 칠 때도 이런 것 신경도 쓰지 않더니.....” 현석은 고3으로 시험 때에도 이런 거창한 식단을 보지 못한 것이 불만이었다. “현준아, 내가 너 고3때 뭐 해 준 적 있었냐?” “음.... 도시락도 겨우 싸 주셨잖아요.” 현준에게 묻고 대답을 들은 현준 엄마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현석을 쳐다보았다. 현석은 그런 엄마의 표정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하하하하.. 현석아 그냥 먹어라. 오늘은 새해 첫날이니까 그렇다고 생각해라. 알겠지?” “...... 네..” 현석이 약간 힘이 없어하는 소리를 하자 옆에서 더덕구이를 먹던 진성이 한마디 했다. “현석아, 오늘 나 따라갈래?” “진성이 형, 어디? 어디?” “내가 오늘 사부님께 갈 건데.. 같이 갈래?” “사부님? 아, 그 할아버지? 좋지.” “밥 빨리 먹고 같이 가자.” 조금 전의 그 불만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현석은 부지런히 젓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새해 첫날이기도 했고 그 이벤트 매치 때문에 한 동안 조금 신경을 쓰지 못한 것 같아 진성은 아침에 일찍 사부님께 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며칠 전에 매니저를 통해 구입한 다도 세트를 가지고 갈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자신에게는 한번도 없었던 할아버지를 만난 듯한 느낌을 매번 사부님을 만날 때마다 느끼는 진성이었다. “사부님, 현준이 동생입니다.” “오.. 닮은 구석이 있구나.” “어르신, 진현석이라고 합니다.” 제법 어른스럽게 말하는 현석이었다. 현석이가 집에서 나서기 전에 한참 동안이나 아버지 진팀장에게 교육을 받았다. 어른을 만났을 때 하는 법에 대해 마스터한 후에야 출발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녀석.. 말은 잘 하는구나. 할아버지라고 불러라.” “네? 네, 할아버지.” 현석이 따라온 이유는 자신은 이름만 들어본 적이 있는 팔극권의 정통 계승자인 진성의 사부님을 만나 보기 위해서였다. 진팀장과 현준이 집에서 유조에 대한 이야기를 꽤 했기에 현석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직접 본 현준은 조금은 실망했다. 그냥 약간 젊은 할아버지일 뿐이었다. 아니, 그냥 조용한 늙은 아저씨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또한 자리에서 가만히 앉아서 차를 마시고 조용히 대화를 하는 진성과 그 사부인 유조를 보면서 괜히 따라왔다고 후회까지 하는 현석이었다. 그런 현석을 구해준 것은 다름 아닌 현석의 형, 현준이었다. “할아버지, 조금 따분한데 몸 좀 풀까요?” “허허허허.. 녀석, 그래.” “오늘은 뭘 가르쳐 주실건데요?” 현준은 유조 어르신 댁으로 올 때마다 뭔가 하나씩 배웠다. 정통의 팔극권이나 유조 자신의 무술을 종합한 팔극신권과 같은 것은 아니지만 몸에 좋은 동작이나 호신술 비슷한 것을 하나씩 배워갔다. “음... 일단 도장으로 가자.” 일어나다가 다리에 쥐가 나서 늦은 현석과 같이 도장으로 향했다. 도장에는 뭔가 기분 좋은 향내가 났다. 자극적이지는 않지만 은근히 좋은 향기가 났다. “할아버지, 여기는 좋은.. 왠지 좋은 향이 나네요.” “좋지? 이 향은 절대 지겹지 않아. 질리지 않는 향이지. 이 도장 전체를 백향목으로 지었기 때문에 향이 난단다.” “아.... 네... 백향목....” 백향목은 전세계적으로 몇 군데에서 밖에 자라지 않는 최고의 건축자재 중 하나였다. 나무에서 은은한 향이 나고 재질이 아주 좋아 그것으로 집을 지으면 벌레가 들지 않고 건강에도 좋아지는 효용이 있었다. “이것은 뭐라고 할까? 첨수(沾手)라고 하는데 이런 식으로 손가락을 부드럽게 두고서 상대가 공격하면 상대의 공격 부위에 손을 얹고는 상대의 중심을 흩트려서 반격의 기회를 잡는 거란다. 현준아 공격해 봐라.” 현준은 자신이 어떻게 해도 자신은 물론이고 유조 역시 다치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래서 마구잡이지만 자신의 힘을 다해 돌진해서 다리를 뻗었다. 그러자 유조는 가만히 있다가 그 다리가 다가오자 그 신발위에 손을 얹고는 살짝 옆으로 밀었다. 강한 힘으로 달려오던 현준은 발끝이 살짝 벗어나자 순간적으로 힘이 사라짐을 느꼈다. 그 순간 자신의 몸은 공중에 돌면서 떨어지고 있었다. “아아악!” 현준은 바닥에 그냥 떨어지고 말았다. 유조는 현준이 떨어져도 받아주지 않았다. “.. 으으윽... 할아버지!” “..허허허... 나도 이제 힘이 없구나.. 허허허허..” 현준은 유조의 말이 농담임을 알았지만 자신도 있는 힘껏 했기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진성아, 현준아, 어제 게임은 잘 봤다. 정말 재미있더구나. 영화 보는 것처럼 재미있었다.” 진성과 현준은 자신들의 게임을 봤다는 말에 약간은 놀랐다. 진성이 알기로 사부님이 사는 집 어디에도 TV하나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TV 하나 큰 걸로 샀다. 어제는 TV 사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라. 허허허허..” “아....” “내가 너희에게 말해 주고 싶은 것이 있다. 나는 그 게임에는 문외한이지만.. 현준아, 너는 내가 보기에 전체적으로 강(强)에 좀 더 치중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네 성격은 시원시원하고 어떨 때는 아주 거칠 때도 있는데 네 게임은 그렇지 않더구나. 네 성격과 같아도 문제지만.. 허허허허... 너무 떨어지면 네가 오래 게임을 하기 힘들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잘 생각해 보거라.” “아!... 네...... 할아버지.” 현준은 자신이 게임을 할 때마다 조금은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이야기를 듣자 그 이유에 대해 확실히 알게 되었다. 자신의 게임 내용 중에서 그 스타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랬던 것이다. “진성아....” “네, 사부님.” “너는 정말 잘하더구나. 어떻게 말할 곳이 없을 정도로....” “아닙니다. 과분한 칭찬입니다.” “나는 그게 네 단점이라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무의 완성이란 빈틈이 없는 것이 아니란다.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무,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포용하는 것이 이긴단다. 나는 네가 너 자신 안에만 쌓아 두지 말았으면 한다. 너의 강함에는 강과 유가 적절히 조화되었지만 너무 완벽한 것은 다른 완전하지 못한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게임이나 무술 뿐 아니라 앞으로 많은 시간을 살아가면서 네가 첫 번째로 해야 할 것은 너 자신을 깨는 일이다.” “........” “어려운 말일게다. 네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으면서 마음속에 쳐 버린 벽을 비롯해서 어떤 강함과 완벽함에 익숙해져 버린 네 자신을 언젠가는 깨어야만 더 성장을 할 수 있을게다. 뭐, 지금 당장은 이런 충고가 필요 없지만 나이가 들다보니 쓸데없는 걱정만 늘어나는구나. 허허허허..” “네, 알겠습니다. 사부님.” 진성은 뭔가 와 닿을 듯 하면서도 알기 힘든 사부 유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속에 새겼다. 그렇게 새해 첫날은 지나가고 있었다. 문명 온라인 영웅 스키피오의 첫 프로 리그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참가한 16개의 프로팀은 그 자체로 많은 팬들을 모을 수 있었다. 그 중에서 아주 인기가 좋은 쌍룡은행, LQ 전자 등은 팬클럽을 만들 정도로 인기몰이에 성공했다. 평판이 좋지 않았던 삼선전자의 정성진도 문명 온라인에 공식적으로 낸 사과와 자신의 심정을 올린 글로 인해 어느 정도 심적인 부담을 떨칠 수 있었고 팬들 역시 그런 용기에 박수를 보냈다. 문명 온라인 영웅 스키피오의 아마추어 버전의 국내 판매는 250만장을 넘어 300만장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런 기록은 일년도 되지 않는 단기간의 국내 게임 사상 기록이었다. 더욱 더 큰 경사는 해외 시장에서의 호평이었다. 미국에서 140만장, 유럽에서 98만장, 아시아권에서 780만장이 팔려 엄청난 반향을 가져왔다. 특히 아시아권 중 일본과 중국에서 600만장이 팔려 자소 소프트를 기쁘지만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런 아마추어 버전의 폭발적인 판매와 더불어 해외 시장에서의 프로 리그에 대한 갈망이 더욱 커졌다. 프로 리그 전 경기를 인터넷으로 볼 수 있게 만든 운영위원회의 결정은 그런 갈망에 불을 지폈다. 그리고 있었던 이벤트 매치 경기마저 인터넷으로 본 외국 게이머들은 프로 리그가 해외에도 생기기를 바라는 마음에 운영위원회 게시판에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원래 2월부터 새로운 프로 리그를 시작하려던 운영위원회는 일단 현실적으로 프로 리그가 가능하다고 판단한 일본과 중국을 엮어서 세 개의 나라가 벌이는 삼국 프로 리그의 창설을 가시화하기 위해 한 달의 기간을 더 두어서 3월 초에 프로 리그를 시작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그런 결정은 한국의 게이머들 뿐 아니라 일본과 중국의 게이머들을 흥분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아직 참가할 각 나라의 팀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는 결정되지 않았지만 세 개 나라가 참가하는 프로 리그를 창설하기로는 합의된 상태였다. 그 소식에 가장 기뻐한 사람은 진규였다. “와... 정말 다행이다. 연습할 시간이 한 달이 더 생겼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할 정도로 걱정이 많던 진규는 프로 리그가 확장되어 세 개 나라가 참여한다는 사실보다 리그의 시작이 한 달이 더 뒤로 연기되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옆에 있던 현준이 그 순간을 빠질 리가 없었다. “이 녀석아, 연습이나 열심히 해라. 너 그렇게 생각하다가 2월 말에 가도 계속 그러면 큰일이다. 그리고 너.. 도대체 어떤 문명을 선택할거냐?” 진규는 요즈음 거의 모든 문명을 플레이했다. 그야말로 가리지 않았다. “저요? 헤헤헤헤.. 그냥 올라운드 플레이어가 될까요?” 진규의 말이 장난인 것은 알았지만 현준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올라운드? 한 우물만 파라, 한 우물만.” “...예..” “내가 정성진에게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따지고 보면 그리스 문명이라는 하나만 붙잡고 늘어졌기 때문이다.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어도 진성의 로마제국을 제외하면 나도 누구에게 진다고 말하기는 싫다. 하나만 제대로 해도 충분하다. 알겠냐?” “예.. 그런데.. 그렇게 하면 그 이벤트 매치 마지막 경기 같은 경우에는 어떻게 해요?” “............. 뭐야?” “아차,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뭐? 이벤트 매치? 이.녀.석.이!” 현준 앞에서 그 이벤트 매치 얘기를 꺼내는 것은 일종의 금기였다. 현준은 그 이벤트 매치의 마지막 경기를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평소 그리스 문명 외에는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그 움직임만 알고 상대 문명의 오더 정도만 알던 현준에게 그런 방식은 그야말로 죽음이었다. 이벤트 매치에서 첫 번째에서는 게이머 스키피오가, 두 번째에서는 게이머 한신이 이기자 관객들은 둘의 승부를 몹시도 궁금해 했다. 하지만 같은 팀이고 로마제국과 그리스 문명으로 둘의 게임 장면이 있었기에 스키피오와 한신은 랜덤 문명으로 붙기로 합의했다. 관객들은 조금 실망했지만 최고 실력자들의 랜덤 플레이를 기대했다. 게이머 스키피오는 한국이 걸렸고 게이머 한신 역시 한국이 걸렸다. 한국 대 한국은 프로 리그 후로 단 한번도 없었던 게임이었다. 이런 이색적인 대결에 관객들은 숨소리마저 죽여가며 경기를 관전했다. 하지만 경기는 싱겁다고 할 만큼 게이머 스키피오의 완승으로 끝났다. 아니 완승이 아니라 어부지리였다. 게이머 스키피오의 한국 문명 컨트롤 자체는 좋았지만 한국 특유의 전략을 제대로 살리지는 못했다. 관객들은 좀 지루해지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시작한지 10분도 되지 않아 쿠데타로 끝나버린 게이머 한신의 어이없는 패배와 그 패배를 실감하지 못한 한신의 멍청한 얼굴이 초대형 비전을 가득 채우자 웃어버리고 말았다. 프로 리그 사상 처음으로 쿠데타로 게임에서 진 선수가 탄생해버렸다. 게임기에서 나온 한신은 고개를 들지도 못했다. 그런 모습에 관객들은 한신, 현준이 무안할 정도로 환호를 보냈다. “하하하하.... 그리스 문명 스페셜리스트의 탄생이다!” “힘내요, 한신! 너무 완벽해도 안 되잖아요.” “하하하.. 언제 저와 한국으로 게임 한번 하시죠.” “저두요!!” “그 다음은 저요. 그리고 축하해요!”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관객들은 세 번의 게임으로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가슴을 채울 수 있었다. 12월 31일의 그 시간을 투자한 것 이상을 얻은 느낌이었다. 특히 마지막 그 게이머 한신의 멍청한 얼굴을 기억해 낸 관객들은 키득키득 혼자 웃을 정도였다. 관객들과 시청자들에게는 아주 유쾌한 일이었지만 정작 본인인 현준은 한동안 고개를 들지도 못할 정도의 일이었다. 하지만 현준은 하룻밤 만에 그런 마음을 털어버렸다. 물론 자신 앞에서 그런 말을 꺼내는 사람을 처절하게 응징했다. “대강 이 정도의 계획을 가지고 있다. 어떠냐?” 진팀장과 조진철 프로그램 팀장, 곽진호 하드웨어 팀장 그리고 진성이 회의실에 모였고 진팀장은 밀리터리 아트에 대한 앞으로의 타임 라인에 대해 설명했다. “음.. 조금 시간이 촉박한 것 같습니다만 PVR-2는 이제 게임에 별 문제가 없을 것 같고 가상현실도 어느 정도 현실성을 갖추었습니다. 두 가지만 해결되면 게임 출시를 현실화해도 될 것 같습니다.” “조팀장, 두 가지라니?” “일단 PVR-2의 가격 다운입니다. 지금 프로토 타입은 대당 가격이 오천만원이 넘는데 누가 그걸 사겠습니까? 그 정도로 비싼 게임기를 살 사람이 없지는 않겠지만 대중화 될 수는 없습니다. 또 한 가지는 온라인화입니다. 많은 데이터가 왔다 갔다 해야 할 텐데 그 정도의 데이터 대역폭을 현재의 인터넷이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조팀장의 말을 들은 진팀장은 곽팀장을 보며 물었다. “진호?” “그 PVR-2는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면 오백만원 수준까지는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그 이하로는 저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인터넷 문제는 현재로서는 인터페이스를 최적화해서 최대한 인터넷을 타고 다니는 데이터를 줄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소프트웨어적으로 해결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곽팀장은 진지하게 말하면서 은근히 프로그램 팀장인 조진철에게 일을 미루었다. 그 말에 조팀장은 곽진호를 도끼눈으로 쳐다보았다. “음... 그래. 인터넷 대역폭이라.. 그것은 좀 더 생각해 봐야겠군. 일단 조팀장, 곽팀장 둘 모두 1월 말에 열리는 동경 게임쇼에 참가할 준비하게. 이번에 큰 건 터트려 보자고.” “네? 그건 계획에 없었잖습니까? 그리고 춘계 동경 게임쇼는 5월 쯤에 하지 않습니까? ” 조진철 프로그램 팀장은 갑작스런 월말의 동경 게임쇼라는 말에 입이 튀어나와 되물었다. “내가 조금 전에 말했으니 이제 계획에 있는 거다. 그리고 이번 동경 게임쇼는 특별 게임쇼니까 따지지 마라. 월말에 동경으로 날아갈 거고 이미 부스 신청까지 마쳤으니까 차질 없도록 해야 한다.” 조용히 있던 곽팀장이 진팀장의 말에 뭔가를 생각하다가 말했다. “... 시연회는 어느 정도까지 하는 겁니까?” “음... 일단 화려한 배경의 가상세계에서 격렬한 격투가 제일 좋겠지. 너무 많은 것을 보여 주지는 말자고. 됐지? 질문?” “...... 저도 가야합니까?” 진성은 눈치를 보다가 물었다. “당연하지. 진성아, 너도 이제는 어엿한 이 밀리터리 아트의 개발자다. 그것도 메인 개발자 중의 하나다. 네 이름도 당연히 게임 타이틀에 올라갈 거다. 하하하. 마땅히 가야지. 안 그래? 진호?” “네, 당연하지요. 진성이는 당연히 가야지요.” 이럴 때는 죽이 맞는 두 사람이다. 거기다가 조팀장이 확인사살을 했다. “테스터이자 유일한 관리자인 진성이 안 가면 저도 안 갑니다!” 진성은 가상현실에 문제가 생겼을 때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물론 조팀장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진팀장은 모두를 한번 보더니 가지고 있던 다이어리를 덮고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며 뭔가를 잊은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 여기 있는 사람과 로플팀의 요람 멤버는 통째로 동경으로 간다. 아, 그리고 내가 말 안했는데 2월 초에는 E3(Electronic Entertainment Expo)가 열리는 미국 LA에도 가야 하니까 미리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라.” 자신의 말만 해 버린 진팀장은 곧장 문을 닫고 나갔다. 하지만 회의실 안에서 들리는 소리를 막지는 못했다. “대장님!” “팀장님!” “..팀장님!!!” 새해의 첫날이 지난 지 며칠이 되지 않아 조용하던 문명 온라인팀의 요람은 스포츠 신문 하나로 시끄러워졌다. [한창 뜨고 있는 M 게임의 프로 리그의 이벤트 게임에서 모 방송국의 K기자가 리포터로 C 프로팀의 라커룸으로 인터뷰를 요청하다 C팀의 매니저와 보디가드 그리고 프로 게이머들에게 둘러 싸여 봉변을 당할 뻔하다. 시청자들의 알 권리를 위해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고 인터뷰를 요청했는데도 경기 전의 날카로움 때문인지 K기자와 카메라맨에게 물리적인 방법으로 위협을 가한 매니저와 보디가드, 프로 선수들. 공인으로서의 자질이 의심스럽다! - 천하 스포츠 신문 김태환ㅌ 기자.] “뭐야? 이거! 도대체 무슨 기사를 이렇게 쓴 거지?” 1면 톱에 자신과 진성의 사진이 흐릿하게 인쇄된 스포츠 신문을 여러 번 읽은 현준은 신문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게임 전에 라커룸으로 들어온 외부인은 단 한명도 없었는데 이런 기사가 나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씩씩거리던 현준은 조용히 바닥에 떨어진 신문을 펼쳐서 읽어보던 진성이 여전히 조용하자 불만이 가득해 갈라지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진성아, 이게 말이 돼? 어떻게 사실 확인도 없이 이런 기사를 써?” “현준아, 이제 우리도 연예인인가 보다. 이런 엉터리 기사도 다 나고.. 이거 잘못하다가는 스캔들이 날 수도 있겠다.” 웃으며 말하는 진성의 모습에 현준은 자신이 화내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화 안 나?” “이렇게 스포츠 신문에 난 프로 게이머 봤어? 그것도 이렇게 큼지막하게? 보통 스포츠 신문 1면에 난 기사의 대부분은 과장한 것이거나 근거가 없는 것이야. 한마디로 흥미 위주지. 음, 조금 심한 부분이 있지만 그런 것이야 매니저가 알아서 하겠지.” 논리적이다 못해 여유롭기까지 한 진성의 말에 현준은 마구 화를 낸 게 도리어 무안해질 정도였다. “화 안 나? 나는 이런 기사 보면 화가 나는데....” “화 내 봐야 별로 도움도 안 되잖아. 참는 게 낫지.” 현준은 순간 유조 어르신이 진성에게 말한 그 완벽함이 생각났다. 정말 진성은 이런 감정에서조차 거의 허점이 없었다. 약점이 없는 게 도리어 약점이라. 현준은 어쩌면 진성의 약점이 이런 부분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어떻게 말로 표현하기는 힘들어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 때 매니저 서재필과 보디가드 이준이 안으로 들어왔다. “아, 너희들도 봤구나. 이거 참..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진성아, 현준아 얘기 좀 하자.” 매니저 서재필의 말에 세 명은 서재필을 따라 회의실로 들어갔다. 일단 인터뷰를 거절한 것부터 그 뒤의 끝가지 녹음된 테이프를 진성과 현준에게 들려주었다. 진상을 알게 된 현준은 절대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난리를 쳤고 진성은 조용히 생각하고 있었다. 서재필은 가만히 있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 때 그 리포터가 누구인 줄은 알았는데 이런 식으로 글을 써대다니... 생각도 못했다.” “아는 사람인가요?” 차분한 진성의 목소리였다. 의외로 가라앉은 목소리에 이준은 진성을 보았다. 진성에게 흥분이란 찾아볼 수가 없었다. 20대 초반의 혈기왕성한 나이에 저런 침착함이라니. 이준은 평소에도 차분한 진성이었지만 이 순간 더 확실하게 보였다. “...... 천하 스포츠 사장 딸이다. 방금 들은 그 김희수라는 여자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역시 진성이었다. 또한 역시 별 감정이 없는 목소리였다. “어떻게 할까?” 서재필은 흥미롭게 진성을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그냥 단순한 기사라면 별로 상대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상대가 의도를 가지고 한 이상 가만히 있더라도 저 쪽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오호... 진성이 네 게임 속에서의 재능이 이런 곳에서도 발휘되는구나.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가만히 있으면 얕보고 더욱 엄청난 거짓말을 써 대겠지? 그래서 본때를 보여줄 생각이다. 아마도 이미 인터넷에서는 난리가 났을 거다. 저런 기사가 났으니. 나와 이준씨가 온 것은 너희들이 이런 기사 보고 흔들리지 말라는 말을 하려고 왔는데.... 하하하 그럴 필요조차 없겠구나. 현준이 녀석도 진성이 너 옆에 있으면 그리 달아오를 것 같지도 않으니. 너희들은 나만 믿어라. 회사에서 내게 매니저를 맡긴 이유에는 이런 부분도 있으니까. 내 솜씨 한번 구경해라. 열심히 연습하고 건강 관리나 잘 해라. 알겠지? 아, 진성이 너, 1월 말에 동경 간다며? 나와 이준씨도 따라가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라. 자, 간다.” 서재필은 자신이 할 말을 다 한 모양인지 일어서서 나가며 손을 흔들었다. 그 뒤를 이준이 따라나섰다. 현준은 이제까지의 그 신문기사에 대해 열받은 것은 까마득히 잊고는 진성을 다그치듯 물었다. “너 동경에는 왜 가? 혼자 가는 거냐?” “동경? 아.. 그거 뭐라고 하더라. 아, 맞다. 동경 게임쇼가 있다고 하더라. 그래서 거기 참가하려고 동경에 가는 건데..” “네가 거기 왜 가?” 현준은 마치 취조하듯 흥분하며 말했고 진성은 그런 현준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거.. 나도 가기 싫은데, 로플팀에서 개발하는 게임을 그 동경 게임쇼에서 시연하는 계획이 잡혀 있대. 거기에 테스터 겸 개발자로 참가해야 한다는데 뭐 내가 반대할 이유가 있어야지. 그러니 뭐 어쩔 수 없잖아.” “아, 그 밀리터리 아트라는 게임?” “응, 바로 그 게임이야.” “진성아, 나도 어떻게 좀 같이 갈 수 없을까?” “음... 네 아버지한테 말해봐. 그게 제일 빠를 걸.” “.........” 아버지에게 물어보라는 말에 조용히 입을 다물고 한숨만 푹 쉬는 현준이었다. 서재필은 녹음테이프를 여러 개로 복사해서 따로 보관한 뒤에 하나를 가지고는 천하 스포츠 신문사로 찾아갔다. 일을 더 크게 만들기는 싫었지만 참을 생각도 없었다. 그런 서재필 뒤로 이준이 역시 따라갔다. “사장님, 계십니까?” 로비에서 안내 데스크의 여직원에게 묻자 여직원은 바로 대답했다. “약속하셨습니까?” “아닙니다만 자소 소프트의 프로팀 매니저가 왔다고 말씀드려 주십시오.” “죄송합니다만 예약을 하지 않으셨다면 곤란합니다.” “음... 그러면 비서실로 자소 소프트의 프로팀 관계자가 왔다는 말만 넣어 주십시오. 그런 뒤에도 안 된다면 어쩔 수 없겠지요.” “네, 잠깐만 기다리세요.” 데스크의 여직원은 전화해 보더니 바로 말했다. “올라가세요. 14층입니다.” “수고해요. 이준씨 갑시다.” 웃으며 인사까지 한 서재필은 돌아서서 엘리베이터로 올라갔다. 14층에서 내리니 누가 나와 있었다. “저는 비서실 대리 장도식입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서재필과 이준은 말도 없이 따랐다. 비서실에 딸린 작은 회의실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니 40대 중반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아, 어서 오십시오. 비서실장 전조열입니다. 이리 앉으십시오.” “서재필입니다.” “이준입니다.” 서재필과 이준은 일단 비서실장 전조열의 반대쪽에 앉았다. “무슨 일로.....?” 아무 일도 모르는 것처럼 시침 떼는 그 표정에 서재필은 그 얼굴에다가 정말로 토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스포츠 신문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에 대해서 의논할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아, 그 기사요? 네, 일단 말씀해 보시지요.” “그 기사 어느 선까지 책임질 수 있습니까?”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 기사를 이 신문사 사장이 보장할 수 있는 겁니까?” “아.... 서매니저가 뭘 잘 모르시나 본데... 그런 기사는...... ” “저, 기자 출신입니다. 그리고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웬만하면 이런 기사에 이렇게 일일이 반응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단순한 기사가 아닌 것 같아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이준은 서재필이 기자출신이라는 말에 약간 놀랐다. 그런 기색은 단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비서실장 전조열은 표정을 바꾸더니 말했다. “오호... 그런데 기자라면 그런 가십 기사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는 한 오히려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면 더 손해인 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저도 압니다. 아주 잘 압니다. 그런데 제가 왔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시는지 알겠죠?” “......... 그 증거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소?” “사장을 만나게 해 주십시오.” “......” “저는 그 K 리포터가 사장 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 말의 의미를 아실 텐데요..?” “.... 조금만 기다리시오.” 서재필과 이준은 10분도 되기 전에 사장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삼면이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어 전망이 좋았고 가구들도 고급이라 상당히 멋있는 사무실이었다. “앉으시오. 무슨 할 말이 있다고 하던데?” 천하 스포츠 사장 김강철은 60대 중반으로 고매한 인격의 배를 가진 전형적인 나이든 신문사 사장이었다. 사업적인 수완은 좋았지만 인간적으로 평판은 그렇게 좋지 못한 사람이었다. 일단 상대를 판단해서 됐다 싶으면 자신 할 말만 해 버리는 사람으로도 유명했다. “자소 소프트 프로팀 매니저 서재필입니다.” “이준입니다.” “그래, 무슨 할말이 있으신가?” “사장님의 딸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조금 움찔한 사장의 모습을 놓치지 않은 서재필이었다. “그 기사..... 철회 및 사과 기사를 실어 주십시오.” 서재필은 강하게 말했다. 그런 말을 듣던 사장은 잠깐 놀란 표정이었다가 곧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하하하하하... 자네 코미디하나? 스포츠 신문의 기사를 가지고.... 철회 및 사과 기사라? 이 신문이 무슨 조선일보라도 되는 줄 아나?” “제 말이 아주 가볍게 들리시는 모양입니다.” “이 사람아, 자네도 참.......” 서재필은 그런 사장의 말을 중간에 끊고 얘기했다. “그렇게 해 주시지 않는다면 제가 가진 증거물을 인터넷에 공개하고 소장을 접수시키겠습니다. 아마도 따님은 어쩌면 공개적으로 매장될 지도 모릅니다.” 착 가라앉아서 나직하게 내뱉는 서재필의 말에 사장은 그제까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웠다. “자네, 내 앞에서 지금 내 딸을 가지고 협박을 하는 건가?” “협박이라뇨? 오해하지 마십시오. 잘못된 기사를 고쳐 달라는 겁니다.” “.......... 그 증거가 무엇인가?”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서재필은 품안에서 소형 카셋트 재생기를 꺼내 틀었다. 곧 사건의 처음부터 끝가지 녹음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사장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휴... 사과 기사면 충분한가?” “네, 그리고 한 가지만 더 따님이 저희 자소 소프트로 와서 정중하게 사과하는 겁니다. 아마도 따님이 이런 기사를 쓰도록 종용했겠지요. 누가 글을 썼던 그 원인은 따지고 보면 따님이잖습니까? 정중하게 사과하면 없던 일로 만들겠습니다.” “알겠네. 테입은?” “모든 것이 끝나면 제가 사장님께 보내 드리겠습니다. 저는 조중일보 기자였던 서재필입니다. 제 말은 믿으셔도 좋습니다.” “아.... 회장님이신.. 그...” “약속은 지킬 겁니다.” 서재필은 재빨리 말을 끊었다. “알겠네. 내 자네 말대로 하지.” 며칠 뒤에 스포츠 신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천하 스포츠 신문은 일면 톱기사에 대한 정정기사와 오보에 대한 사과문을 게재했다. 그 뒤로도 인터넷에서는 한동안 시끄러웠지만 오래지 않아 사그라들었다. 새해라 새로운 각오를 한 모양인지 진규는 밥 먹을 시간도 아껴 가면서 연습에 몰두했다. 새벽같이 회사에 출근해서 밤늦게 퇴근하다가 언제부터인가 아예 회사에서 살기 시작했다. 주위 사람들이 그런 진규의 모습에 걱정했지만 오히려 밤에 더 잘 된다는 진규의 말에 역시 젊음이 좋다는 격려의 말을 하곤 했다. 진규의 열심에 오히려 피곤해진 사람이 있었다. 진규의 연습 상대를 해 주던 현준이었다. “진규야, 연습도 좋은데 배고프다. 밥 먹고 하자.” “아니에요. 현준이 형, 한판만 더 하고 밥 먹어요. 그리고 제가 형 것까지 다 챙겨 놓았으니까 걱정 마세요.” “뭘 챙겨? 너.. 설마?” “빵이요. 오늘 아침에 잠깐 나가서 빵 사왔거든요.” “........... 나 빵 싫어하는 거 알지?” “뭐 시켜다 드릴까요?” “........... 나 나가서 먹을 거다. 따끈따끈한 걸로.” “말씀만 하세요. 제가 시켜 드릴께요. 물론 따끈따끈하게.” “...........” 열심히 연습한다는 진규를 심하게 뭐라고 할 수도 없었던 현준은 왜 자신이 진규에게 연습 상대가 되어준다는 말을 했는지 자신의 입이 미워졌다. 현준은 점심을 먹고 요람으로 들어오는 진성을 보며 더욱 배고픔을 느꼈다. “진성아, 잘 왔다. 나 배고파서 그런데 밥 좀 먹고 오게 이 녀석 연습 상대 좀 해 줘라.”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듯한 현준의 다급하면서도 끈적끈적하게 빠져나올 수 없는 말이었다. “연습 상대? 나 지금은 안 되는데..” 하지만 진성의 대답은 그야말로 면도날이었다. “왜? 밥 먹고 무슨 일이 있냐? 치사하게 친구사이에 그러기냐?” “지금 바로 로플팀 테스트 하러 가야 되는데...” “그런데 너 여기는 왜 왔냐?” “너 데리러!” 잔뜩 뿔따구가 난 현준에게 진성은 정말 뜬금없는 말을 했다. “나를? 왜?” “너 동경 가고 싶다고 했잖아. 그래서 내가 조팀장님에게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 대전 게임을 벌이면 더 효과가 크지 않을까 말씀 드렸더니 그게 좋을 것 같다는 결정이 내려졌거든. 게다가 내가 그 테스터로 너를 추천했지. 어때?” 진성의 말에 불만서린 표정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정말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현준이 나타났다. “와! 정말? 정말?” “자, 빨리 가자.” “OK! 진규야, 형은 지금 바빠서 안 되겠다. 나중에 하자. 너 혼자서 궁리 좀 하고 있어라.” 현준은 배고픔은 사라졌는지 웃음을 흘리며 나가는 진성을 따라갔다가 후다닥 요람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진규 옆에 있던 비닐봉지 속에서 빵을 하나 들더니 씩 웃고 밖으로 다시 나가 버렸다. “현준아, 너 이거 한다고 그 문명 온라인 프로 게이머에 영향 없겠냐?” 진팀장은 진지하게 물었다. 평소 문명 온라인 팀장인 이팀장에게 진성을 밀리터리 아트의 개발자로 빼 쓰는 것만 해도 미안했는데 현준마저 이렇게 테스터로 만들기에는 조금 마음이 그랬다. “네, 실력은 지난번에 보셨잖습니까? 프로 리그 다승왕을 제가 이겼으니까요. 하하하하..” “너 요즘 진성이에게 좀 어떠냐?” 진팀장의 적나라한 질문에 뜨끔한 현준이었다. 현준은 바로 대답을 못했다. “.......... 올해 들어 한번은 이겼어요.” “몇 번 했는데?” 정말 잔인한 질문이었다. “.........9.....번이요” “그래서 되겠냐? 연습을 더 해야 하지 않겠냐?” “진성이에게 이기려면 단순히 연습해서는 안 돼요. 뭔가 특별한 것이 필요해요.” 현준은 그 때부터 주저리주저리 자신이 동경에 가야함을 역설했다. 나중에는 그 자신도 무슨 뜻인지 모르는 말까지도 다 동원했다. “휴..... 그래 일단 해 보자. 하지만 이팀장이 딴지를 걸면 그 순간 즉시 현준이 너는 제 자리로 돌아간다. OK?” "네, 알겠습니다.“ “좋아, 곽팀장. 준비하지.” 현준은 그야말로 오랜만에 밀리터리 아트의 테스트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현준은 기대했다. 진성이로 인해서 그야말로 가상현실에 생기가 부여되었다고 말하는 그 가상세계를 직접 체험할 수 있다는 마음에 설레기도 했다. 12월 말에 이미 개발된 두 테스터의 일대일 대결은 어느 정도 개발을 마친 상태였다. 세부적으로 조정해야 하는 부분은 있지만 테스트에는 문제가 없었다. 두 대의 PVR-2를 가상현실 시스템에 연결되어 있는 곳은 굉장히 복잡했다. 진성과 현준은 PVR-2에 탑승했다. 몇 가지 과정을 거쳐 곧 가상현실로 접속했다. “와...................... 이거 정말이야? 꿈은 아니지? 와...” 현준은 눈앞이 어두워졌다가 갑자기 밝아지면서 나타난 세상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이것은 정말로, 정말로 대단했다. 예전의 그 칙칙한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서늘한 바람이 부는 것까지. 현준의 눈앞에는 자신이 1년이 넘도록 다닌 대학교, 쥬신 대학이 펼쳐져 있었다. 자신은 나무로 뒤덮인 길에 서 있었고 뒤를 돌아보니 나무 사이로 공대건물이 보였다. 현준은 옆으로 걸어가 나무를 만졌다. 촉감이 진짜 나무와는 달랐지만 그 정도만 해도 대단한 것이다. 현준은 떨어진 잎을 주웠다. 약간은 까끌까끌한 게 정말 같았다. “대단하지?” 갑자기 들린 소리에 뒤를 쳐다보니 진성이 서 있었다. “진성아, 너무 엄청나다. 정말 굉장하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맞아,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자, 더 재미있는 곳을 보여줄께.” “재미있는 곳?” “잠깐만, 조팀장님? 요람으로 부탁합니다!” “요람? OK!" 진성이 조팀장을 부르며 요람이라는 말을 하자 곧 울리는 소리로 조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공간 자체가 바꿔 버렸다. 뭔가 흐릿해지더니 다시 선명해진 것이다. 현준은 뭔가 싶었다가 갑자기 변한 공간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여기는....?” “맞아, 여기는 바로 로플팀의 요람이야. 신기하지?” 현준은 믿을 수가 없었다. 조금 전에 자신이 테스트를 하기 위해서 분명히 접속기 PVR-2에 탑승했는데 자신이 바로 그 곳에 있으니 이러다가는 뭐가 현실인지 알 수 없을지도 몰랐다. 자세한 것은 조금 달라 보였지만 그래도 이건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 이렇게 계속 발전하다가는 현실과 구분이 안 갈지도 모르겠다.” “그럴지도 모르겠지. 자, 이제 테스트하러 가야지. 조팀장님, 도장으로요.” 진성의 말이 끝나자마자 바로 공간이 바꿔서 도장으로 변했다. “자, 여기서 대결을 해 볼까?” “대결? 아..” “일단 현준아 너를 위해 내가 준비한 무술이 있는데... 예전에 내가 얘기했지? 무술이름 하나 지으라고. 현준아 네 무술 이름은 뭘로 할래?” 조팀장은 약간은 장난기가 감도는 어투로 현준에게 물었다. 몇 가지 정도의 무술은 모델링과 유조의 감수가 있었기에 사용이 가능했다. “그래요? 어떤 종류인데요?” “어...... 일단 권법이 2가지, 검법이 2가지, 창법이 1가지 그리고 기타 등등 1가지...” “검법으로 하지요. 그런데 어떻게 써요? 검법이라 해봐야 제가 하기도 힘들 것 같은데...” “그건 걱정하지 마라. 아주 친절하게 가르쳐 줄 테니까. 흐흐흐.” 조팀장이 흘린 마지막 웃음에 걱정이 되는 현준이었다. “저는 독고구검으로 하겠어요.” “독고구검? 그건 좀 그런데.....” “예? 이름은 마음대로 아닙니까?” “독고구검은 많이 알려졌잖아. 그런데 막 아무 검술에다가 그 이름을 붙이면 욕먹을 텐데....” “... 그런가요?” 현준은 한참이나 생각해서 독고구검이라 말했지만 조팀장의 반대에 바로 꼬리를 내렸다. 또 고민하는 현준을 보자 옆에 있던 진성이 한마디 했다. “팔극검법!” “팔극검법?” “사부님께서 만드신 거니까!” “아, 그렇겠네. 좋았어. 팔극검법으로 하자. 조팀장님, 팔극검법으로 이름 붙여 주세요.” “알겠다. 잠깐만 기다려라. 그리고 진성이는?” “저도 결정해야 하나요? 저는 그냥 팔극신권으로 하면 안 될까요?” “너도 어차피 게임 속에서 테스트를 해야 하니까 하나 정도는 자신의 기술을 가지는 게 좋지 않겠냐?” “음........ 권법은 어떤 건가요?” “이름은 아직 없지. 넌 팔극신권 배우니까 권법은 필요 없을 것 같은데..” “그렇겠죠? 저도 검법으로 하죠. 음... 이름은 아.. 현준아 나와 검법 바꾸자. 아무래도 내가 그 팔극검법으로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진성은 잠시 생각하다가 현준을 향해 말했다. “그럼 나는?” “너? 음..... 그냥 독고구검 해라!” “그거 유명하다며?” “어차피 게임인데 뭘 그래?” “그럴까?” 진성의 말에 독고구검도 괜찮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현준이었다. “야, 너희들 거기서 장난 치냐? 진성이 너 팔극검법, 현준이 너는 그대로 독고구검이라고 해라. 자 너희들 앞에 자신만 보이는 반투명한 창이 뜰 테니까 그것 보면서 알아서 해 봐라. 그리고 목검을 사용하고. 아, 목검은 진성이 네가 만들어 써라.” 결국 가만히 듣고 있던 조팀장이 나서서 교통정리를 확실하게 했다. 밀리터리 아트의 경우 완벽한 가상현실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었고 일 대 일이나 다 대 다의 대전 액션을 지향했기 때문에 실제로 아이템 같은 것을 물리적인 가방에서 꺼낸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가상현실 속에서 반투명 창을 이용하기로 했다. 괜히 시스템에 부하를 줄 필요는 없다는 판단이었다. 게다가 환경설정이나 게임에 대한 옵션을 반투명 창으로 만들어 게이머 자신만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진성은 목검 두 자루를 만들어 하나는 현준에게 주고 하나는 진성 자신이 가졌다. 곧 현준과 진성의 앞에서 반투명의 창이 떠올랐다. 창의 타이틀은 무술이었다. 현준은 내심 참 작명센스도 없다며 투덜거렸다. 현준의 앞에 떠오른 반투명 창에는 독고구검이라고 쓰인 책이 있었다. 현준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다가 진성이 하는 것을 보고는 손으로 그 책에 가져다 댔다. 그러니 반투명 창의 내용이 바꿨다. 꽤 많은 글이 있었다. 대강 읽어 보니 마치 무협 소설의 비급처럼 나는 누구인데 후인을 위해서 이런 비급을 남긴다는 별 말이 되지 않는 내용이었다. 뭐라 한마디 하려다가 일단은 다음으로 넘겼다. 그 다음을 보니 대략 적혀 있는 기술에 대한 설명과 그 시범, 연습이라는 선택 항목이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현준은 설명을 손으로 눌렀다. “..... 이 기술은 공격하는 적의 공격을 막으면서 적의 빈틈을 노리는 것으로......” 어디서 많이 들은 듯한 목소리로 된 설명이 나왔다. 조팀장의 목소리였다. 현준은 재빨리 시범을 눌렀다. “와....” 눈앞의 공간에서 어떤 마네킹 같은 사람이 불쑥 나오더니 현준 앞에서 그 기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정말 유려하고 멋있게 기술을 반복해서 펼쳤다. 정말 신기했다. 현준은 그 다음에 있는 시범을 눌렀다. “아아악!” 자신의 몸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기 멋대로 움직이자 너무 놀란 나머지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자세히 보니 조금 전에 봤던 그 기술을 펼치고 있었다. 정말 신기했다. 조금 반복하니 대강 기술이 어떤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시범을 멈춰야 할지 몰랐다. 몸이 멋대로 움직여서 다른 것을 누를 수가 없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몸은 여전히 그 기술을 행하고 있었다. 현준은 어쩔 수 없어 진성을 불렀다. “진성아, 이거 시범 어떻게 멈추냐? 계속 지 맘대로 몸이 움직인다.” “그거? 익혀야 돼. 기본만 익혀도 멈춰. 그러니까 몸의 동작을 보면서 어떤 동작인지 확실하게 살펴봐. 그거 원하는 정도까지 안 되면 안 멈춰질걸. 나중에 고치기로 했는데 지금은 아마 안 될 거야.” “뭐? 이 기술을 처음 봤는데 도대체 어떻게 익혀?” “몸의 움직임을 봤다가 잘 따라해 봐. 그러면서 익히는 거야. 어느 정도 익혀서 움직임을 따라할 정도면 아마 멈출 걸.” 진성의 별 성의 없는 대답에 현준은 성질이 났지만 일단 멈추고 볼 일이었다. 현준은 계속 움직이는 몸을 저항할 생각은 버리고 움직이는 법을 기억하고 몇 번 뒤에는 따라하기 시작했다. 절대로 쉽지 않았다. 어느 정도 따라하자 점점 요령이 생겼다. 요령이 생기니 재미있었다. 정말 시간가는 줄 모르고 한참을 하다 보니 자신의 몸을 자신이 움직인다는 것을 알았다. 현준은 슬쩍 몸을 멈췄다. “와.. 멈췄다!” “....... 너 삼십분 동안 그거 했다!” 옆에서 목검을 휘두르던 진성이 현준의 환호에 퉁명스레 말했다. “휴.... 다행이다. 나 이거 정말 안 멈추는 줄 알았다니까. 그런데 정말 대단하다. 이렇게 연습하면 현실에서도 가능할까? 가능했으면 좋겠는데...” “가능하겠지만 아마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걸. 도장 가서 배우는 게 더 빠를 거야.” “..... 그런가?” “그나저나 현준이 너 이렇게 오래 걸려서야 그 게임쇼까지 제대로 기술하나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너 이제 기술 하나, 그것도 기본만 했잖아.” “나름대로 노력했는데...... 그런데 이렇게 한 게 단순히 그냥 기본이냐?” “목검 잡고 아까 그 기술 한번 펼쳐봐.” 진성의 말에 현준은 도장 중앙으로 나가 목검을 잡고 아주 폼을 잡으며 기술을 펼쳤다. “어... 이상하네. 조금 전 연습할 때와는 움직임이 다르네. 하지만 처음보다는 나은 것 같은데..” “기본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 연습하면 할수록 기술에 대한 이해도와 숙련도가 늘어날 거야. 어느 정도가 넘어가면 몸에 착 달라붙을 거야. 그 때가 되면 네가 그 동작을 펼치려고만 하면 거의 몸에 배어서 펼치게 될 거야. 뭐 자세한 얘기는 안 해도 되겠지?” “자세한 얘기가 뭔데?” “사실 너와 내게 할당된 학습형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각각 있는데 그 프로그램이 기술에 대한 이해도와 숙련도를 담당해서 어느 정도가 되면 마치 몸 스스로가 기억한 것처럼 해 주는 뭐... 그런 얘기....” “아, 그런 얘기는 당연히............ 할 필요 없다.” 현준은 말을 자르고는 다시 자기 앞에 있는 그 시범 버튼을 누르고는 연습을 계속했다. 진성은 그런 현준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진성 자신도 연습을 시작했다. 사실 진성은 자신의 몸과 연결된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제거한 상태였다. 진성의 경우는 정말 자신의 몸으로 익힐 수가 있었기 때문에 한 기술을 익힐 때마다 실제 몸이 익힌 것과 같았다. 정확한 이유는 진성 자신도 잘 몰랐는데 아마도 팔극권과 팔극신권을 몸이 저절로 익힐 때와 같은 현상이라 생각했다. 진성은 그다지 어렵지 않게 팔극검법을 처음부터 끝까지 마스터는 아닐지라도 기술을 대강은 펼칠 수 있게 익혔다. 거의 한 시간이 지나자 조팀장의 말이 들렸고 현준과 진성은 가상현실에서 나와야 했다. “와.. 정말 재미있다. 기술 익히는 게 조금 까다롭지만 그것도 정말 재밌다. 와...” “그런데 현준이 너 그렇게 기술을 익히면 시간이 조금 부족하지 않겠냐?” 이야기하고 있는 진성과 현준에게로 조팀장이 다가왔다. “현준아, 너 기술 익히는 속도가 좀 느린데... 테스트 할 수 있겠냐? 문명 온라인 연습도 해야 되잖아?” “........” 현준 역시 그런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었지만 꼭 동경에 가고 싶었다. 현준은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진성을 바라보았다. 진성이라면 뭔가 말을 해 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너... 밤에 문명 온라인 연습하고 낮에 밀리터리 아트 연습해라. 밤에는 아직 테스트 중인 밀리터리 아트 접속기 작동할 수 없으니까. 게다가 밤에 문명 온라인 연습상대인 진규가 회사에 있잖아.” “..... 나더러 밤에 회사에서 지내라고? 말도 안돼!” “꼭 하고 싶다면 그렇게라도 해야지. 그렇다고 문명 온라인 연습 안할 수도 없잖아.” “그래도... 하루에 한 시간만 하면 안 될까?” 현준은 이 가상현실 접속을 하루에 한 시간만 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 그럼 너 점심시간에 해라. 점심시간 1시간동안 빵이나 아니면 간단한 걸로 떼우고 연습하면 되잖아? 괜찮지?” 역시 조팀장이 정리했다. “그게 좋겠네요. 그렇게 하지요.” 밤에 회사에 남아 있기 싫은 현준은 냉큼 대답했다. “..... 팔극소검(八極小劍)...” 목검을 천천히 자신의 가슴까지 올렸다가 앞으로 강하게 뻗었다. 완전히 찌르고 난 뒤에 몸을 회전하면서 동시에 목검을 돌려서 비스듬히 사선으로 내려쳤다. 하지만 검의 회전은 끝나지 않았다. 무릎을 들었다 앞으로 도약하며 검을 유연히 휘둘러쳤다. 팔극소검의 검로는 전체적으로 부드럽게 이어지는 것이 특징이었다. 진성이 팔극검법이라 이름붙인 검법에는 두 가지 검의 운용법을 모아 놓은 검무(劍舞)가 있었다. 차라리 검무라기보다는 검결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팔극소검은 계속 이어져 언제가 시작이고 끝인지 알 수 없도록 느껴질 정도여서 검을 자신의 몸처럼 여길 수 있도록 만드는 데 가장 큰 효용이 있었다. 팔극대검은 실전검으로 상당한 기세를 느낄 수 있어서 상대를 순식간에 제압하기에 용이했다. 진성은 사부인 유조의 집에 있는 도장에서 목검을 붙잡고 자신이 대충 몸으로 익힌 팔극검법을 연습하고 있었다. “진성아, 무엇을 그리 연습하느냐?” 유조는 진성의 동작을 보고는 곧 알아챘지만 진성에게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부님, 회사에서 테스트 하면서 익힌 것입니다. 사부님께서 만든 것이라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랬지. 그것을 네가 익히다니.. 하하하하...” 갑작스런 사부의 웃음소리에 진성은 무슨 뜻인지 일시지간에 알 수는 없었다. 사부가 웃음을 그치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거기에는 두 가지 검결이 있을 텐데.... 네가 방금 한 것은 첫 번째 검결이로구나.” “네... 제가 편하게 팔극소검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팔극소검? 하하하... 팔극이라.. 좋은 이름이구나.” 왠지 사부의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진성아, 그 다음 검결을 보여 줄 수 있겠느냐?” “네, 사부님. 하지만 아직 익숙하지는 못합니다.” “그래, 괜찮다. 한번 풀어 보거라.” 진성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곧 도장의 중앙에서 목검을 들고 숨을 들이키더니 엄청난 속도로 검을 앞으로 찔렀다. 가만히 있던 몸이 순식간에 앞으로 튕겨나가며 검의 속도를 더욱 빠르게 만들었다. 무엇인가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났고 진성은 그 뒤로 연속적으로 뛰어 오르고, 땅으로 낮게 몸을 움츠리기도 하고, 심지어 구르면서까지 검무를 끝마쳤다. 팔극소검이 검을 인지하는 단계라면 팔극대검은 검의 사용을 그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검결이었다. 진성은 아주 희미하지만 어렴풋하게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잘 했구나. 얼마나 연습했느냐?” “이제 삼일입니다.” “그 정도를 삼일? 하하하하.. 하긴 너라면.... 처음 동작은 좋았다만 그 뒤는 아직 많이 미숙하구나. 하지만 삼일만이라.... 진성이, 네게는 두 손, 두 발 다 들어야겠다. 이 두 검결을 하면서 느끼는 점은 없었느냐?” “어렴풋이 뭔가 있는 것 같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모르는 게 당연하지.” “사부님, 오늘은 조금 기분이 좋아 보입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좋은 일이라.. 어쩌면 좋을 수도 있지.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진성아 네가 이제 걸음마를 시작한 그 검법은 사실 내가 알고 있는 검법의 일부분이란다. 그 두 검결은 내가 알고 있는 네 개의 검결과 아홉 개의 절초로 이루어진 검법의 처음 두 개 검결의 변형이다.” “네? 일부라니요?” “네게는 나중에 얘기하려고 했지만 내게는 또 하나의 사문이 있었단다. 이 세상에서 오직 나와 내 사부만이 알고 있지. 지금이야 그 사부도 돌아가셨을 테니까 나 혼자만 알고 있다고 봐야지. 그 사문에서 배운 것이 바로 그 검법이다. 내게 검법을 가르친 사부는 내게 자신의 이름 뿐 아니라 검법의 이름조차 말해 주지 않았지. 그냥 나중에 가르칠 만한 사람에게 가르치라는 말 밖에는.” “......” “나는 네게 팔극권과 팔극신권만을 가르치려고 했다. 이 이름 없는 검법은 나 역시 일정 부분 이상에서 벽을 만났기 때문에 내가 펼치지 못하는 것을 가르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했다. 휴.... 나는 내가 그 검법을 왜 제대로 익히지 못할까 생각하다가 깨달은 것이 바로 팔극권과 그 검법 사이에는 미묘한 뭔가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어쩌면 서로 무리(武理) 자체가 다르다고나 할까? 팔극권을 한다면 그 검법에서 성취를 얻기란 쉽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지. 그런데 너 역시 그 검법에 손을 대다니... 하하하.. 이 어찌 공교롭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유조는 자신과 비슷한 전철을 밟고 있는 진성을 보며 꽤나 즐거웠다. “.... 검법을 그만 두어야 할까요?” 별로 좋지 않은 이야기임을 안 진성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진성아, 그 검법을 네가 직접 익힌 것이 아니라 그 가상현실 속에서 익혔지?” “네, 사부님.” “그렇다면 소용없다. 어차피 네 몸이 익혀 버렸을 테니까. 이것도 어쩌면 인연일지도. 이왕 이렇게 된 것 너는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그 검법과 팔극권, 팔극신권을 동시에 수련해라. 검법과 권법을 잘 조화시킬 수 있다면 새로운 것을 볼 수 있겠지. 네게는 아직 시간이 많이 있으니까.” 진성은 자신이 괜한 짓을 한 게 아닌가 걱정했다. 사부님께 묻지도 않고 이런 검법을 익혀버렸으니 저런 말을 들어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사부님, 제 잘못입니다. 사부님께 먼저 여쭈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진성아, 그 말은 맞는 것 같구나. 이제 더 이상 다른 무술은 몸에 배지 않도록 해라. 그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아직 검을 이용해서 대련은 금해라.” “네, 알겠습니다, 사부님.” “어느 정도 팔극권과 팔극신권이 궤도에 올라 네가 스스로 수련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면 그 검법에 대해서 제대로 배워 보자꾸나. 그 때까지는 그 두 검결 중에서 첫 번째 검결만 연습하도록 해라. 알겠느냐?” “네, 사부님.” “그리고 네게 해 줄 말이 있다. 진성이 네가 내 제자가 된 것을 중국과 대만에 있는 내 사형과 사제들이 알아버렸다. 뭐 당장이야 별다른 일은 없으리라 생각하지만 나중에 조금 다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너는 내 제자지만 그 정통 팔극권과는 상관없이 팔극신권의 계승자이기 때문에 그런 일에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알겠냐?” “네, 사부님.” 진성은 사부의 말에 그저 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불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얍!” 목검은 점과 점 사이의 가장 짧은 거리인 직선을 타고는 원하는 곳으로 약한 파공음을 내면서 찔러 들어갔다. 공격 후의 약점은 고려하지 않은 과감한 찌르기였다. 하지만 그 하나의 공격으로 제압할 만한 진성이 아니었다. “윽!” 도리어 진성에게 거리를 내줘서 현준 자신에게 파고든 진성의 이단 연타를 경험해야 했다. 가슴까지 파고든 진성이 진각을 밟으며 오른쪽 팔꿈치로 가슴을 치고 들어왔다. 다급한 현준은 거리를 벌렸지만 완전히 벗어나지 전에 팔꿈치 공격 후의 오른 주먹에 의한 첨격에 정확하게 가슴을 얻어맞고 말았다. 실제 고통은 없었지만 맞는 순간 신음이 나왔다. 현준은 도장의 끝까지 날아가 버렸다. 곧 일어난 현준은 자신의 체력을 보더니 한마디 했다. “어떻게 한 방에 체력이 반 이상이 나가 버리냐? 사기다! 사기!” “안 맞으면 되잖아.” “그게 말이 되냐? 그리고 검술을 배웠으면 검술로 해야지. 치사하게.” “치사? 하하하. 검을 든 사람과 맨 손인 사람이 싸우는데 맨 손인 사람이 치사해? 그런 논리가 어디 있냐?” “............... ” 진성과 현준은 가상현실 내에서 대련을 하고 있었다. 현준은 자신이 지칭한 독고구검을 열심히 해서 어느 정도 몸에 배여서 대련이 가능했다. 하지만 진성은 팔극검법 중의 팔극소검만을 연습했고 사부로부터 실전에는 사용하지 말라는 말을 들어서 어쩔 수 없이 검을 든 현준에게 맨손으로 상대했다. 검사끼리의 대결도 멋있지만 검사와 권사의 대결도 볼만했다. 보통 검사가 유리하다고 했지만 진성의 경우 워낙 특이하기 때문에 진성의 완승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레벨 조정을 해서 기본적인 힘과 스피드를 비슷하게 조정한 뒤의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진성이 현준에게 확실하게 지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박빙이었다. 이제까지 진성보다 상대적으로 가상현실에서의 적응력이 떨어져 고생했던 현준에게는 희소식이었다. 진성은 능력치가 하향 조정되었고 현준은 반대로 상향조정되었다. 현준은 기술을 배우기도 더욱 쉬워졌고 그 동안의 노가다로 익힌 기술이 더 몸에 잘 배여 쉽게 펼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레벨 조정 후의 첫 테스트에서는 그야말로 호각의 승부였다. 무르익지는 않았지만 가끔 날카로운 공격을 하는 현준과 능력치 하향 조정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리는지 약간은 고전하는 진성이었다. 현준은 날이 갈수록 더욱 능숙해졌다. 현준의 독고구검은 전혀 아홉 개의 검식도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이름도 바꿔가면서 애착을 가진 탓인지 현준에게 꼭 맞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진성이 제대로 적응을 하고 대련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팔극신권을 사용하자 상황은 달라졌다. 전제적으로 검을 든 현준이 공격을 주도했지만 단 한번이라도 빈틈을 보였다가는 진성의 한 방에 대련이 끝나버리는 경우도 생겼다. 현준은 그런 진성의 일격필살의 공격이 사기라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런 진성의 한방을 염려하며 대련을 펼치는 현준의 검술은 더 짜임새가 생겼다. 그 전까지는 단 한번의 공격은 아주 보기 좋은 검술이었지만 그 다음은 마구잡이인 부분이 꽤 많았다. 어쩌면 그런 부분들로 인해 검술 시합이 아니라 동네 싸움으로 변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진성의 일격을 조심하는 노력에 점점 둘의 대련은 더 진짜 무술 대련처럼 변해갔다. 외부로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문명 온라인 영웅 스키피오의 운영위원회는 3개국이 참여하는 프로 리그에 대한 대략의 계획은 세워놓은 상태였다. 일본과 중국의 영향력 있는 기업이 메인이 되어 자국의 프로 리그 운영 위원회를 만들고 각기 자신들의 프로 리그를 출범시킨 후에 프로 리그를 시작한 뒤에 확실하게 정해지지 않았지만 각국 프로 리그 상위 몇 개 팀만이 3개국이 출전하는 메이저 프로 리그에 출전해서 최종 승자를 가리는 방식이었다. 일본은 대표적인 전자 브랜드 소나가 메인으로 나섰고 중국은 중화그룹이 나섰다. 둘 모두 이 프로 리그의 성공 가능성을 다 따져 본 후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다른 나라의 회사가 아니라 자국의 회사가 나서자 각국의 정부는 그리 어렵지 않게 프로 리그를 허락했다. 물론 거기에는 수많은 네티즌들의 영향력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각 국의 프로 리그 규모는 달랐다. 중국의 경우, 그 넓은 땅에 어울리게 수백 개의 참가팀이 프로 리그 참가를 신청했다. 일본 역시 중국에 비하면 작았지만 한국보다는 규모가 컸다. 그런 프로화 진행과는 별도로 아미 수백만 장이 팔린 문명 온라인 영웅 스키피오로 인해 한국의 프로 리그 최정상급 프로 선수들은 중국과 일본에 굉장한 팬들을 자신들도 모르게 보유하고 있었다. 특히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수로 알려진 게이머 스키피오는 팬 사이트만 해도 수십 개가 될 정도로 그 인기가 폭발적이었다. 게다가 스키피오의 신상내력이 공개되어 그 부모가 고아 출신이고 또한 스키피오의 고등학교 때 부모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신데렐라 효과와 맞물려 일본과 중국 내에서 특급 스타를 방불케 하는 인기를 가져왔다. 게이머 한신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전쟁론으로 인해 그 원문이 실린 손자병법은 순식간에 그 전의 수십 배에 달하는 양이 팔려 나갔다. 그 전쟁론은 광고의 카피로 사용될 정도로 그 인기가 높았다. 또한 최고의 스타 스키피오, 강진성의 친구이며 친구를 배려해 같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인기는 급상승했다. 그 외에도 한신을 좋아하는 팬들은 스키피오가 개인으로서 완벽하다면 한신은 약간은 허술하면서도 정이 든다는 말을 하곤 했다. 스키피오와 한신 외에도 늪의 사신 김한석, 게이머 정성진을 비롯해 많은 한국의 프로 선수들이 중국과 일본에 알려져 또 다른 한류 열풍을 몰고 왔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잘 다녀오너라. 일본에 가면 음식이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 “아주머니, 저 아무거나 잘 먹잖아요. 다녀올께요.” 인사를 마친 진성은 여행용 가방을 들고 먼저 나간 진팀장과 현준을 따랐다. 이제 회사에 들러서 가져갈 것만 챙기면 바로 일본으로 출발해야 했다. 이미 요람 멤버 중의 반은 동경에 도착해서 전시회장에서 세팅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진팀장과 현준, 진성과 더불어 이제 나머지 요람 멤버들이 곧 출발하게 될 예정이었다. “다 챙겼지? 다들 준비 다 됐냐?” “예, 대장님. 준비 끝났습니다.” “...... 그래. 자 가자.” 거의 일주일이 넘도록 동경에 머물 예정이었기 때문에 진팀장은 콜밴을 여러 대 불렀다. 자가용을 가져가 공항 장기 주차장에서 일주일만 세워 놓으면 그 주차비용이 장난이 아니었기에 그냥 콜밴을 부른 것이다. 개인 짐과 꼭 가져가야 하는 짐들을 차곡차곡 쌓은 후에 공항으로 향했다. 모든 준비는 다 되어 있었기에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비행기에 탑승하기 전에 게이트 입구에서 모인 사람들에게 진팀장은 한마디 했다. “자, 가서 게임 보러 온 녀석들을 깜짝 놀라게 해 주자.” “네, 대장님.” 진팀장은 말을 한 후에 가방을 끌고는 비행기 입구로 갔고 그 뒤로 요람 멤버들이 자신에 찬 걸음걸이로 따랐다. 진성과 현준은 제일 마지막으로 비행기를 탑승했다. 오른쪽 날개 뒤의 창가 자리였다. 진성이 창가였고 현준은 그 옆이었다. 서서히 떠오른 비행기는 구름을 뚫고 위로 올라가 일본으로 향했다. “와... 와...... 자소 소프트다..... 와...... 진짜다..” “스키피오, 이쪽을 봐 줘요.” “오빠, 여기요, 여기!!!” “아악, 밀지 마요. 여기요, 여기!!!!!” “강진성 오빠! 진현준 오빠!!!!!!!” “한신! 한신! 한신!” 입국검사대를 거쳐 게이트를 통해 나오던 진팀장을 비롯한 요람 멤버들은 들리는 엄청난 환호 소리에 놀랐다. 발음이 이상했지만 스키피오라는 말이었다. 혹시나 했지만, 속으로 일본의 인기 있는 연예인 스타 중에 그와 비슷한 사람인가 하며 마음에 두지 않았다. 곧 게이트 밖으로 나오자 진팀장과 사람들은 엄청난 사람들이 피켓과 포스터를 들고는 환호하는 볼 수 있었다. 그 글을 보자 알았다. 바로 스키피오, 진성과 한신, 현준을 환영하는 사람들이었다. 일본말로 뭐라고 해서 정확하게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는 힘들었지만 환호성의 대부분은 스키피오와 한신이었다. 진성과 현준은 제일 뒤에 있었기 때문에 아직 사태 파악을 하지 못했다. 진팀장은 재빠르게 같이 온 곽팀장에게 말했다. “진호, 뒤로 돌아가 진성이와 현준이 못 나오게 해. 지금 나왔다가는 아수라장이 될 것 같다. 빨리.” “네, 대장님.” 진팀장은 곽팀장이 사라지자 요람 멤버들을 천천히 이동시켰다. 마치 엑스레이 검사를 당하는 듯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꽂혔다. 멤버들과 함께 나간 진팀장은 마중 나왔을 사람을 찾았다. “어, 조팀장! 이게 무슨 일인가?” 조진철 팀장은 요람 멤버들을 이끌고 며칠 전에 동경에 와 있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진성이와 현준이가 테스터로 온다는 사실이 유출된 모양입니다. 아마 같은 게임 회사다 보니 그래서 사람들이 눈치 챈 것 같습니다. 좋은 일 아닙니까? 이 정도면 많은 홍보 효과가 있을 것 같은데.. 그런데..... ” “지금 저 안에 갇혀 있네. 진호더러 진성이와 현준이 나오지 못하도록 막으라고 했거든. 자네 일본어 좀 하지?” “네, 의사 소통은 됩니다만.....” “공항관리자들도 사태를 알고 있을 테니 자네가 가서 얘기하게. 진성이와 현준이가 그냥 나왔다가는 불상사가 날지도 모를 것 같으니. 자, 빨리.” 조팀장은 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신과 같이 온 여러 명의 사람들과 같이 공항 관계자를 찾았다. 곧 당황해 있는 공항관계자와 만나 얘기를 했지만 그 전에 사고는 터지고 말았다. 진성과 현준은 뒤에서 화장실 갔다가 오는데 급히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곽진호 팀장을 볼 수 있었다. “곽팀장님, 어디 가세요? 아, 화장실?” “아니다. 너희들 지금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 밖에 나가면 큰 일 난다.” “예? 무슨 큰 일요? 누가 저희들 잡으러 왔나요? 하하하..” 현준은 정말 놀랐다는 듯 얼굴을 찡그려가며 과장된 표정을 했다. “너희들.... 일본에서 그 인기가 장난이 아닌 모양이다. 밖에 너희들 나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일본 팬들이 적어도 수백 명이다. 수백 명!” “예? 일본 팬?” “그래, 여기서 너희들이 많이 알려져 있는지 아주 난리다 난리!” “그럼 저희는 어떻게 하죠?” “대장님이 무슨 수를 낼 테니까 여기서 기다려라.” “팬들이라면 얼굴이라고 비춰야 하지 않을까요? 그게 스타로서의 예의인데... 하하하..” 아직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한 현준은 기분이 좋은지 웃어댔다. “내가 다시 대장님 만나보고 올 테니까 너희들은 여기서 꼼짝 말고 있어라.” “네, 곽팀장님.” 현준은 시원스레 대답해 놓고는 곽팀장이 사라지자 게이트 출구로 걸어가면서 진성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자, 가자고. 팬들이 기다린다는데 당연히 가야지..... ” “어딜 가? 거기 갔다가는 정말 사고가 날지도 모른다.” “걱정 마. 그리고 우리가 좋아서 공항까지 왔는데 어떻게 코빼기도 안 보일 수 있냐? 게다가 우리는 그런 특급 스타는 아니라고. 이제 처음 일본에 왔는데..... 가자, 진성아!” 현준은 진성이의 팔을 붙잡고는 출구로 향했다. 점점 출구가 가까워지자 환호성이 들렸다. 자세히 들으니 정말 스키피오와 한신이라는 외침을 들을 수 있었다. “이런데도.. 안 나가면 우리는 팬을 가질 자격도 없는 나쁜 놈이다. 자 가자.” 진성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 후에 가방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와!!!!!!!!! 스키피오다!” “한신 오빠! 한신!” “스키피오, 스키피오. 스키피오.” 한신과 진성은 자신들의 생각과는 달리 엄청난 사람들의 무리가 자신들을 보고 고함을 지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사람들이 팬들이구나 하는 생각에 한신은 오른 손을 높이 들었다. 한신의 제스처에 모인 팬들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현준은 진성을 보며 웃었다. “이런 게... 쇼맨십이야.... 하하하하..” 그 순간이었다. 게이트 앞에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만든 보호대가 순식간에 무너지면서 팬들이 나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공항 관계자들까지 밀치고는 안으로 파도처럼 밀려들어왔다.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그야말로 한순간에 팬들에게 완전히 둘러싸일 지경이었다. “다... 네가 판 무덤이다. 나중에 보자.” 나직한 진성의 목소리가 현준의 귓가에 들렸다. 현준은 곧 주위를 살폈지만 진성은 사라지고 없었다. 현준이 사방을 볼 무렵 온갖 카메라 후레시가 터지고 자신을 만져보려는 팬들의 밀고 당기는 것으로 인해 몸조차 가누기 힘들었다. 진팀장은 조팀장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순간 엄청난 환호를 들었다.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때 요람의 멤버 중 하나가 와서는 급하게 말했다. “출구로 현준이와 진성이 나왔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뭐?” 진팀장이 놀랄 무렵 조팀장과 공항 관계자들이 달려왔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현준이와 진성이가 나왔다는군.” 진팀장과 조팀장을 위시한 사람들은 수백 명이 둘러싼 진성과 현준을 그야말로 구하기 위해 그 환호성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진팀장 일행은 거의 세 시간 후에야 공항에서 나올 수 있었다. 먼저 요람 멤버들은 엑센터라고 불리는 거대한 창고 옆에 있는 엑센터 호텔로 먼저 떠났다. 엑센터는 Exhibition Center을 맘대로 줄인 말이었다. 엑센터는 서울 코엑스와는 달리 거대한 창고였다. 여러 전시관으로 나눠진 코엑스와는 달리 약간은 이런 곳에서 세계 3대 게임 쇼라는 동경 게임쇼가 열릴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엑센터는 조금 후졌다. 조팀장이 미리 준비한 차에는 진팀장과 현준, 진성 그리고 곽진호 팀장이 타고 왔다. “현준아, 다시 한번 그런 일을 했다가는 정말 가만 두지 않을 거다. 좀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해라!” “네.......” 현준의 몰골은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있었고 왼쪽 무릎 아래의 바지는 뜯겨져 나갔다. 뿐만 아니라 입고 온 외투와 라운트 티의 왼팔 부분도 사라졌다. 다행히 여권과 지갑을 바지 주머니에 넣어서 잊어버리지는 않았다. 진팀장도 그런 모습의 현준에게 더 이상의 말은 하지 못했다. “진성, 너...... 정말 그렇게 혼자 도망칠 수 있냐? 어떻게 친구를 버리고... 으..으...” 현준은 아직도 아픈 머리를 손으로 기댄 채 진성에게 말했다. 진성은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진성은 다가오는 사람들을 보자마자 현준에게 한마디 말하고는 곧장 지허보(地虛步)를 써서 줄행랑을 놓았다. 지허보는 넓은 거리에서는 그 효과가 적었지만 좁은 범위에서 많은 적들에게 둘러 싸였을 때 움직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보법이었다. “그러기에 내가 나가지 말자고 했잖아. 너는 당해도 싸다 싸!” “으.. 아퍼... 그런데 어떻게 도망갔냐? 그 많은 사람들이 에워쌌는데....” “내가 사부님께 제일 먼저 배운 것은 몸을 통제하는 것이고 두 번째로 배운 게 바로... 하하하... 피하고 도망가는 법이거든. 그 다음으로 공격하는 법을 배워서 아직 공격은 별 자신이 없지만 도망가는 것은 사부님께 철저하게 당해서 그런대로 자신 있지....” “......... 네가 공격을 못한다고?” 기분이 나쁜지 따지고 드는 현준의 말에 진성은 곧바로 진팀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 진팀장님, 지금 어디로 가는 겁니까?” “강진성! 말 돌리지 마! 으..... 아퍼...” 오래전에 예약한 호텔에 여장을 풀고는 곧 일행은 게임 쇼가 열릴 엑센터로 향했다. 진성과 현준은 거대한 창고를 보며 놀랐다. “이런 곳에서 게임 쇼가 열리다니..... 너무 한 거 아냐?” “..... 확실히 코엑스와는 차이가 나네.” 하지만 곧 안으로 들어가자 다른 의미로 놀랐다. 이미 안은 많은 사람들이 각각 자신의 부스에서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그 규모가 정말 엄청났다. “와... 이게 다 게임이란 말인가? 정말 많다.” 엄청난 크기의 비전과 여러 캐릭터들이 실제 사람 크기와 비슷하게 만들어진 것을 비롯해서 각종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위한 것들로 그 거대한 창고는 가득 찼다. 일본 특유의 미소녀 캐릭터를 비롯해서 서구 취향의 실사 인물과 비슷하면서도 강인한 인상의 캐릭터들이 밝은 색깔과 어두운 색깔의 대비를 자랑하면서 곧 열릴 개막을 기다렸다. 진팀장 일행은 자신들의 부스로 이동했다. “.... 이런 그림이라니..... 이런..” “............” 현준은 어이가 없어서 말을 잇지 못했고 진성은 아예 말을 할 수 없었다. 자소 소프트의 밀리터리 아트 부스에는 초대형 포스터가 엄청나게 높은 천정에 연결되어 아래로 늘어져 있었는데 거기에는 두 사람의 파이팅 포즈를 취한 멋진 모습이 있었다. 문제는 그 두 사람이 바로 진성과 현준이라는 사실이었다. “진성아, 현준아. 너희들하고 참 많이 비슷하지? 그렇지?” “.........” “.........” 진팀장의 눈 가리고 아웅 하는 말에 진성과 현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대신 눈빛만 살벌해졌다. “하하하하.... 내가 얘기하려고 했는데... 바빠서.. 하하하..” 어쩔 수 없이 진성과 현준이 참아야 했다. 이제 와서 되돌릴 수 있는 거도 아니어서 씩씩거리기만 했다. 진팀장은 진성과 현준을 되도록이면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부스에는 이미 PVR-2와 가상현실 시스템이 완전히 설치되어 있었다. 날렵한 PVR-2는 완전히 새 단장을 했다. 코팅을 했는지 색깔부터 화려했다. 정말 뭔가 있어 보였다. 부스 전체가 하나의 무대처럼 꾸며졌고 그 위에 두 대의 PVR-2가 비스듬히 마주 볼 수 있게 놓여져 있었다. 그 뒤로 실제와 거의 유사한 진성과 현준의 또 다른 파이팅 모습을 한 캐릭터가 있었다. 목검을 들고 있는 현준과 늠름하게 서 있는 진성의 모습. 게다가 검은 도복의 현준과 하얀 도복의 진성이 대비되어 인상이 아주 강렬했다. “진성아, 현준아. 한 번 테스트 해 볼까?” “그럴까요?” 진성과 현준은 곧 PVR-2에 탑승했다. 그 동안의 테스트로 탑승하는 것부터 가상현실로 접속할 때까지의 모든 과정이 아주 자연스러웠다. 진성과 현준은 어두워졌다 섬광같이 밝아진 곳을 보았다. 도장이었다. “현준아, 진성아. 진짜 시연이라고 생각해라. 지난번에 준 대본대로만 하면 된다!” 조팀장의 목소리였다. 진성과 현준은 조금 난감했다. 시연에는 당연히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며 자신들에게 준 스토리에는 정말 제정신으로는 하기 힘든 대사가 있었다. “...정.......의의 ..이...름으로 너를 처....단한다!” “..정..의가 밥... ...먹여 준다더냐? 나는 내 힘을, 내 ....검...을 믿는다!” “내 오늘 너를 죽여 ...이 땅..에.. 정...의...가 있음을 알리리라.” “..무...림...의 정의는 바로 ..힘...이다. 덤벼라. ..단...칼에 베어 버리리라.” 진성과 현준은 정말 하기 싫은 것을 참고 더듬거리면서 일단 대사를 하기는 했다. “진성, 현준아. 지금 장난 하냐? 다시 해라! 될 때까지 한다!” 정말 얄밉게 들리는 조팀장의 목소리였다. 어쩔 수 없이 진성과 현준은 정말 자신이 무림의 협객과 낭인이 된 듯, 외치기 시작했다. “정의의 이름으로 너를 처단한다!” “정의가 밥 먹여 준다더냐? 나는 내 힘을, 내 검을 믿는다!” “내 오늘 너를 죽여 이 땅에 정의가 있음을 알리리라.” “무림의 정의는 바로 힘이다. 덤벼라. 단칼에 베어 버리리라.” 가상현실에서도 그런 부끄러움이 적용되는지 현준과 진성의 얼굴은 약간 붉어졌다. 곧 현준과 진성의 격돌이 시작되었다. 그 대결은 무대를 감싸는 멀티비전과 무대 위 3m에 매달아 놓은 초대형 비전을 통해서 볼 수 있었다. 현준의 날카로운 검의 찌르고 베는 동작에 이어 최소한의 몸 움직임으로 검을 피하고는 돌진하는 진성의 움직임이 어우러졌다. 몸의 중단을 찔러오는 목검을 양손으로 감싸듯 하면서 오히려 접근하는 진성의 몸놀림은 가히 영화를 연상케 했다. 게다가 그 시야의 절묘한 앵글은 조팀장의 솜씨였다. 멀티비전과 초대형 비전에는 그런 장면들이 정말 화려하게 보였다. “와.. 영화인가? 아니면 게임 오프닝 영상인가? 끝내주는데....” “저 정도 게임이면... 저게 게임이라면 어떻게 조종 하냐?” 옆의 부스와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 대결을 보면서 감탄했다. 특수효과가 전혀 쓰이지 않고도 저렇게 박진감 넘치는 장면을 연출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음을 전문가로서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 때, 조팀장의 목소리가 부스에 울려 퍼졌다. 물론 진성과 현준에게는 따로 한국어로 말을 했다. “진성아, 현준아. 너희들이 싸우는 모습을 구경하시는 분들이 있다. 인사해라.” 그러자 곧 비전에서 싸우던 두 사람이 멈춰 서더니 웃으며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당황했다. 저런 화면이 실제 게임이라니... 게다가 저런 섬세한 동작을 할 수 있다니. “저.... 설마... 저게 지금 게임입니까?” “에이.... 아닐거야.... 말도 안 돼!” “저 화면은 지금 진행되는 게임 화면입니다. 게이머가 진짜로 자신의 몸을 컨트롤 할 수 있는 차세대 게임입니다.” 조팀장의 설명에도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아니 믿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사실이었다. 하지만 곧 PVR-2에서 비전의 그 두 사람이 나오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직도 계획된 조작이 아닐까 의심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화면은 상당했다. 사람들은 자소 소프트의 밀리터리 아트라는 이름을 기억하면서 흩어졌다. “조팀장님, 왜 그랬어요?” “이런 곳에서도 기선제압이 중요하거든. 하하하하.... 그 사람들 이게 가상현실인지 알면 정말 놀랄 거다. 하하하하..” “다들 잘 들어라. 우리 말고도 일본에서 가상현실 게임을 개발 한 것 같다.” “네? 정말이십니까?” “아니..... 그럴 리가?” “사실입니까?” 갑자기 사람들을 모아서 폭탄발언을 해 버린 진팀장이었다. “나도 조금 전에 알았다. 나 역시 놀라서 잠깐 알아봤는데 우리와는 타입 자체가 다르다. 다르기도 하지만 우리의 초기 모델과 비슷한 것 같다. 게임 화면을 봤는데 게이머가 직접 움직이기는 하지만 그 반응이 조금 늦고 게임도 아주 단순한 것이었다. 게임 자체의 내용은 그냥 생활하는 것인데 그것을 가상현실 상에서 직접 할 수 있으니까 어른들도 관심이 높은 모양이다. 아무튼 우리가 훨씬 나은 게임 시스템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리고 내가 매번 말하지만 보안은 생명이다. 알겠나?” “예, 대장님.” 다행히 그 게임이 가상현실의 초기라니 마음이 놓였지만 그래도 생각도 못했던 일이라 사람들은 조금 당황했다. “이 사람들아, 우리가 개발하면 다른 사람들도 개발할 수 있다는 걸 알아야지. 일본 녀석들이 따라오려면 따라오라고 해. 우리는 그만큼 더 앞서 가면 되니까. 자, 일들 하라고!” 조팀장과 곽팀장이 어수선한 사람들의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애썼다. 특히 조팀장은 일본 뿐 아니라 미국, 유럽 모두가 가상현실을 개발한다고 해도 무서울 게 없었다. 아무리 개발을 하고 또 해도 현재 기술의 한계를 알고 있는 조팀장으로서는 걱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밀리터리 아트의 가장 큰 장점인 학습형 인공지능과 섬세한 배경이 합쳐진 가상현실 시스템은 도저히 흉내 내기 힘들거라고 확신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다른 나라나 개발사에게는 강진성이라는 존재가 없기 때문임을 조팀장은 알고 있었다. 아직 그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진성은 그 가상현실 내에서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가상현실에서 레벨 조정을 통해 각 개인의 능력을 평균적으로 수정했지만 진성의 경우는 예외였다. 시스템의 결정이 아니라 진성 자신의 마음먹기에 달렸던 것이다. 처음에 조팀장이 진성에게 먼저 레벨 조정 테스트를 했을 때 처음에는 조금 이상해 하던 진성이 조금 있으니 그 자신에게 가해진 조정을 별 노력도 없이 무력화시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게임 상의 형평성을 위해서 진성 역시 현준과 같게 레벨 조정을 받아들였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선택이었다. 동경 게임쇼의 첫날은 비지니스 데이라고 해서 많은 참가 개발사들이 특이할 만한 사항을 발표하는 날이었다. 게임쇼의 첫날에 발표된 소식들은 게임쇼를 기대한 많은 사람들을 들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제껏 네트워크 게임의 강세였는데 이번 게임쇼의 최대 이슈는 ‘가상현실’이 될 것임을 첫날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가상현실을 도입한 게임은 모두 3개가 전시되었다. 진팀장 예상보다 1개가 더 추가되었다. 일본의 난텐도에서 개발한‘가상현실의 나’, 한국의 자소 소프트에서 개발한 ‘밀리터리 아트’, 미국의 마크로소프트에서 개발한 ‘리얼 골프'. 이들 세 게임이 각축을 벌일 것으로 예상되었다. 난텐도의 ‘가상현실의 나’는 일종의 육성 게임과 비슷했다. 자신이 직접 생활을 하면서 아기자기한 퍼즐게임도 풀고 집도 꾸미고 자동차 같은 것도 돈을 벌어서 사는 등 생활을 하는 것이 게임의 내용이었다. 게이머가 컨트롤을 하지만 아직 초기라서 간단한 동작 위주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게임을 한다는 느낌은 들 정도여서 나름대로 기대를 모으는 게임이었다. 마크로소프트의 리얼 골프는 실제로 자신이 골프 코스를 돌면서 골프 라운딩을 할 수 있는 게임이었다. 걷고 뛰는 것은 아직 불안한 구석이 있었지만 골프 스윙만은 정말 제대로 된 느낌이 들 정도여서 골프 게임과 골프 매니아들에게 인기가 있으리라 예상했다. 가상현실에서 가장 발전했다는 평가를 받는 게임은 바로 자소 소프트의 밀리터리 아트였다. 다른 가상현실 게임이 기본적인 걷기와 뛰기 조차 조금은 어색했지만 밀리터리 아트의 경우는 게이머가 실제로 가상현실 속에서 격투를 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표현이 되어 게임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더욱 놀란 사실은 밀리터리 아트가 가상현실 대전 게임이라는 것이었다. ‘가상현실의 나’와 리얼 골프는 모두 혼자 해야 하는 싱글 게임이었다. 그에 반해 밀리터리 아트는 상대 게이머와 가상현실 속에서 대결을 할 수 있는 게임이었다. 최초의 가상현실 멀티유저 게임이었다. 가상현실이라는 개념이 모호해 서로 자신이 가상현실 최초의 게임이라는 주장이 많은 시기였지만 밀리터리 아트가 최초의 가상현실 멀티유저 게임이라는 말에 토를 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자소 소프트의 부스에는 사람들이 차고 넘쳤다. 특히 하루에 4차례 가지기로 한 진성과 현준의 대련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가상현실 게임이라는 이슈와 더불어 테스터가 그 유명한 스키피오와 한신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바람에 자소 소프트의 부스는 또 다른 골치를 겪게 되었다. 스키피오와 한신의 팬들이 몰려 왔다가 갈 때 부스에 붙어 있는 진성과 현준의 포스터를 죄다 떼 가버린 것이다. 요람 멤버들은 하루에 적어도 네 번은 다시 그 포스터를 붙여야 했다. 하지만 그것도 이틀이 지나자 포스터가 다 떨어져 겉모양만은 전시관에서 가장 초라한 부스가 되어버렸다. 게임쇼에 와서 게임 구경도 하고 즐겁게 있다가 갈 생각을 했던 진성과 현준은 부스 밖으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 이미 얼굴이 완전히 알려져 있었고 도처에 스키피오와 현준의 팬들로 넘쳐서 나갔다가는 공항의 그 사태가 생길 게 뻔했다. 진팀장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진성과 현준은 알아서 자제했다. 특히 현준은 다시 한번 그런 꼴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현준은 괜히 따라왔다며 후회했다. 자신이 점심시간도 아껴가며 연습한 시간과 그 동안 설렜던 마음이 너무 아까웠다.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갇혀서 게임쇼를 지내버릴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휴... 진성아, 정말 괜히 따라왔다. 이럴 줄 알았다면 안 올걸.” “정말 힘들다. 그런데 점심은 안 주나?” “아, 맞다. 우리 아직 점심도 안 먹었잖아. 곽팀장님, 우리 점심 안 먹어요?” “점심? 참 편한 소리하네. 조금 전에 간단히 먹을 것을 사러 갔으니까 조금만 기다려라. 그리고 15분 있다가 대련해야 하니까 준비해라.” 잠깐 진성과 현준을 바라본 곽팀장은 빠르게 말을 하고는 바쁜 듯 민첩하게 움직였다. “..... 진성아, 설마 빵은 아니겠지?” 현준의 말에 진성은 빵이라고 확신했다. 일본에 와서 현준은 정말 재수가 나빴다. “진성아, 자냐?” “....... 아니.” 현준은 하루 종일 있었던 일을 생각하다보니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있어도 잠이 오지 않아 옆 침대에 있는 진성을 불렀다. 아침부터 저녁이 다 되도록 부스에서 갇혀 있던 일, 4번의 대련을 통해서 파김치가 되어 PVR-2에서 나왔던 일, 빵으로 아침과 점심을 해결한 일, 화장실 갔다 오다가 팬들에게 잡힐 뻔했던 일..... 하루 동안에 이렇게 일이 많았나 싶은 현준이었다. “오늘 참 일도 많고 피곤한데... 잠이 안 온다.” “나도 그래. 너무 피곤해서 그런가?” 현준은 눈을 감고는 옛날 일을 생각했다. 자신은 순전히 진성이를 따라서 게이머가 된 것 뿐이었다. WIS는 자신도 즐겼지만 아마추어 대회에서 국내 5위를 차지할 정도의 실력이 된 것은 순전히 진성이와 게임을 즐겼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스스로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계기는 진성이었다. 자소 소프트의 문명 온라인 영웅 스키피오의 프로 게이머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진성이 덕분이었다. 처음에 아버지를 졸라서 아르바이트생으로 들어왔지만 그 때만 해도 프로 게이머가 되면 좋겠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자신감도, 능력도 없었다. 자신이 기분이 나빠 진성에게 틱틱거리며 거칠게 대했어도 진성은 자신의 마음을 알아 비록 조건이 붙었지만 프로 게이머의 길을 열어 주었다. 현준은 진성과 같이 병법들을 연구하며 같이 게임을 했던 그다지 멀지 않은 과거 기억이 불현듯 떠오르자 피식 웃고 말았다. “.... 잠도 자지 않고 피식 웃냐? 뭐가 그렇게 재미있냐? 나도 같이 웃자.” “아.. 나 처음 프로 게이머 된다고 했을 때, 너와 그 병법들, 전쟁사 같은 책들 붙잡고 씨름하며 게임했잖아. 그 때가 생각이 나서..... 진성아, 고맙다!” “............. 자식, 싱겁긴...” “아무리 생각해도 네게 도움을 받은 것밖에 없는 것 같다.” “야! 친구잖아, 친구. 그만 해라. 1절만 해라. 그리고 내가 말 한마디 하긴 했지만 다 네가 잘나서 그렇게 됐잖아.” “맞다. 다 내가 잘 나서 그렇지. 아하하하하...” “잘난 네가 맥주하고 안주 좀 사와라. 잠도 안 오는데 간단하게 맥주 한 잔 어때?” “아하하하하.... 좋지. 잠깐만 기다려라..” 현준은 말도 잘 통하지 않는 곳으로 무작정 나가 캔맥주 4개와 마른 안주를 사왔다. 진성과 현준은 기분 좋게 얘기하며 맥주를 마시고는 아주 편안한 밤을 보냈다. 게임쇼의 마지막 날이었다. 게임쇼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은 굉장히 많았다.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다른 날보다 훨씬 많았다. 게다가 코스프레 복장을 한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유명 게임의 캐릭터나 애니메이션의 인물들을 흉내 내어 비슷한 옷을 입고는 전시회장을 누볐다. 이런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코스프레를 펼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던 현준과 진성은 부스 안에서 그것을 보면서 일본이라는 나라가 참 다양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만화의 나라, 섹스의 나라, 미신의 나라인 일본. 누구에게나 친절하지만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는다는 일본인. 자기 나라가 아닌 신부와 결혼하겠다면 어떤 나라의 여자와 결혼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부동의 1위인 일본. “확실히 우리나라보다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게다가 할 일 없는 사람도 훨씬 더 많은 것 같다. 하지만 저 정도로 게임과 만화에 열광하는 것을 보니 일본이 왜 만화 강국, 캐릭터 강국인지 알겠다. 케켁~~” 오랜만에 진지하면서도 무게감 있는 얘기를 했던 현준은 곧 사레가 걸렸다. 옆에 있던 진성은 입을 막으며 웃었다. 역시 현준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게임쇼 내내 진성과 현준을 인터뷰하기 위해 많은 기자들이 접근했지만 모두 뒤 이어 따라온 매니저 서재필과 보디가드 이준에게 제지를 당했다. 불만이 많은 기자들을 모아서 진팀장이 대신 미니 기자회견을 열어 무마시켰다. 서재필과 이준은 진성과 현준에게 한 시도 눈을 떼지 않고 따라다녔다. 지금은 문명 온라인의 프로게이머이기도 했기에 서재필과 이준은 철저하게 붙어 다녔다. 그런 이준에게 현준이 투덜대기도 했지만 그리 감정 섞인 것은 아니었다. 현준이 말한 것은 왜 필요할 때는 없고 이렇게 필요 없을 때는 따라다니냐는 말이었다. 현준은 그 공항에서의 사건에 마음에 한이 맺힌 모양이다. 진팀장은 무사히 게임쇼가 끝난다는 생각에 이제까지 긴장했던 마음을 몰아서 한숨으로 내뱉었다. 진팀장과 조팀장, 곽팀장은 게임쇼 내내 진성과 현준과는 다른 의미로 바빴다. 내노라 하는 게임 개발사의 개발자들이 그 가상현실에 대해서 엄청난 질문공세를 하는 바람에 심지어 도망가기도 했다. 게임 개발자들에게 가상현실 시스템은 꿈의 시스템으로 알려질 정도여서 그 알고자 하는 욕구는 대단했다. 특히 일본과 미국의 가상현실 개발자들도 합세해서 어떻게 저런 퀄리티의 배경과 인물의 움직임을 구현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맹렬하게 질문했다. 진팀장은 오직 ‘내부 기밀’이라는 말로 모든 것을 무마시켰고 곽팀장과 조팀장은 진팀장을 전혀 모르는 사람인 마냥 도망 다녔다. “이제 끝나가는구만. 그 동안 수고 했네. 조팀장, 곽팀장.” “아, 저희가 한 일이 뭐가 있다고..... 하하... 대장님이 수고하셨지요.” “하긴 그야 그렇구만. 하지만 자네들도 도.망.다.닌.다.고. 수고 했지 않는가?” “............. 대장님도 언제 적 얘기를....” “어제라네.” “........ 이제 게임쇼도 끝나 가는데.. 꼭 기억하실 필요가...” “한국으로 돌아가면 아무래도 업무 분담을 새로 짜야 할 것 같다. 두 사람 모두 기대해도 좋아! 하하하하...” “........” 조팀장, 곽팀장은 우려했던 가장 최악의 말을 듣자 아무 말도 못했다. 게임쇼가 끝나자 진성과 현준은 조금 편해졌다. 모였던 인파가 사라지자 숨통이 트였다. 여전히 남아 있던 팬들도 있었지만 게임쇼 때와는 달리 그리 많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직 마음대로 나다닐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금 자유스러워지자 마치 어디 매였다가 풀려난 듯했다. 진성과 현준은 매니저를 닦달해서 구해온 모자와 선글라스를 끼고는 여기저기 다니기 시작했다. 호텔에서 체크 아웃하면 곧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호텔 근처만 돌아다닐 수 있었지만 확실히 말이 통하지 않는 곳이라 신기한 것이 꽤 많았다. “저.... 게이머 스키피오 맞습니까?” “.......” “강진성씨 아닙니까?” “......” 자기를 보고 뭐라고 묻는 일본인 젊은 남자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진성과 현준은 길을 가르쳐 달라고 하는 줄 알고는 자신은 모른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저는 야마모토 겐죠라고 합니다.” “........” “저도 곧 프로 게이머가 될 생각입니다. 어쩌면 진성씨와 게임을 할 수도 있겠지요.. 하하하...” “........”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는 진성과 현준을 향해 듣던 말건 말을 해대는 야마모토 겐죠도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런 어색한 상황은 뒤따라온 매니저 서재필에 의해 해결되었다. 서재필은 곧바로 유창한 일본어로 말했다. “인터뷰는 하지 않습니다.” “인터뷰? 아, 아닙니다. 인터뷰 할 생각 없습니다. 저도 조금 있으면 문명 온라인 프로 선수가 될 겁니다. 야마모토 겐죠라고 합니다.” “아... 그럼?” “네, 지금 연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게이머 스키피오와 한신이 게임쇼에 왔다길래 찾아왔습니다. 이제껏 스키피오와 한신에게 말을 걸어 보려다가 저기 오시는 분에게 세 번이나 쫓겨났습니다.” 서재필은 야마모토 겐죠라는 사내의 시선을 따라가니 이준이 걸어오고 있었다. “저도 돌아가려다가 우연히 저 두 분을 만났습니다. 게이머 스키피오, 한신 맞죠?” “네, 맞습니다.” “그런데 저 두 분, 아무 말씀도 안 하시던데요...” “일본말을 못 알아듣거든요. 한국인이잖습니까?” 상당히 멍청한 질문을 하는 겐죠에게 서재필은 무안할 정도로 냉정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때까지도 진성과 현준, 그리고 곧 이어 온 이준은 꿀 먹은 벙어리 마냥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서재필은 곧 진성과 현준에게 대강의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제야 아 라고 말하며 겐죠를 보는 진성과 현준이었다. 뭔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말이 통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저는 야마모토 겐죠입니다. 나중에 게임 같이 한번 했으면 합니다. 저... 잘 전해 주십시오. 이만 갑니다.” 야마모토 겐죠는 자기 할말만 하고는 곧 뒤돌아 가버렸다. 뭔가 얘기를 하려던 현준은 갑자기 뭐라고 말하더니 사라져버리는 상대에 당황했다. 뭐 저런 녀석이 다 있냐 라는 표정이 가득했다. “이름이 야마모토 겐죠라는데... 나중에 게임에서 한번 만났으면 좋겠다라고 하는데....” “야마모토 겐죠?” “겐죠......” 진성과 현준은 일본에서도 프로 리그가 시작된다는 얘기를 얼핏 들었지만 실감하지 못했다. 하긴 문명 온라인과 자신들의 인기도 모르고 있었으니. 이런 곳에서 일본 프로 리그의 프로 게이머를 만날 수 있었다니. 진성과 현준은 처음 만나 단 한마디도 나눠보지 못했지만 왠지 친근함을 느껴지는 녀석이라 생각했다. “자, 가자. 준비가 다 됐다니까 출발해야지.” “네, 가죠.” 진성은 일본 뿐 아니라 중국도 이와 비슷하게 프로 리그가 시작됨을 생각했다. 두 번째의 프로 리그이자 진성과 한신의 프로 리그 데뷔는 어쩌면 삼국지를 방불케 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팀장 일행은 무사히 일본을 출발해서 한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긴장 했던 시간이 길었던 만큼 그 만큼 더 피곤했다. 진팀장과 요람 멤버들이 공히 결정한 것은 LA에서 열리기로 예정된 E3쇼에는 불참하기로 결정한 점이었다. 동경 게임쇼에서 원하는 만큼의 목적을 이루었다는 자체 판단 때문이기도 했지만 누구도 LA까지 가고 싶은 사람이 없어서 만장일치라는 좀처럼 쉽지 않는 의견일치가 이루어졌다. 며칠 지나지 않아 로플팀은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진팀장과 요람의 멤버들은 여전히 밀리터리 아트의 작업을 하면서 본격적인 알파 테스트 계획을 세우기도 했고 게임 출시 시기를 놓고 서로 의견 차이를 보이며 회의를 하기도 했다. 현준은 그 동안 부족했던 문명 온라인의 연습을 부쩍 실력이 좋아진 진규와 같이 했다. 진규는 처음으로 현준에게 이기자마자 곧장 로플팀의 요람에 있던 진성에게로 달려와 드디어 이겼다며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진성은 그런 가운데 주말과 수요일의 오전에는 사부에게로 가서 계속 정식 계승자로서의 가르침을 받았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현준과 한 게임, 진규와 두 게임의 문명 온라인 연습을 계속 했다. 가끔 로플팀의 요람으로 가서 진팀장과 조팀장, 곽팀장과 함께 확고부동한 개발자로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기도 하고 테스트에 참가하기도 했다. 회사에서 가끔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했던 하나는 머리로는 진성을 이해했지만 마음은 점점 더 이해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더욱 힘든 것은 진성이라는 사람에게 자신이 들어갈 만한 마음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막고 다른 사람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진성은 속이 꽉 차 더 이상 다른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것과 비슷했다. 다른 사람들과 재미있게 잘 지내지만 그 뿐이었다. 그런 면에서 하나는 현준이 더욱 가깝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다고 바쁘게 지내는 진성에게 다가가 그런 말을 꺼내기도 어려웠다. 프로 게이머로, 게임 개발자로 그리고 팔극권의 달인이라는 유명한 무술가의 정통 계승자로 바쁘게 뛰어다니는 사람에게 힘을 주지는 못할망정 불만만 토로하는 자신은 싫은 하나였다. 하지만 점점 더 쌓여가는 마음속의 응어리는 커져갔다. 진성은 사부 유조에게서 정식으로 경(勁)과 력(力)에 대해서 배우기 시작했다. 진성은 자신이 팔극본결이나 다른 절초를 사용할 때 무의식적으로 경력이 발생함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세기를 제대로 조절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폭주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생각보다 많은 경력이 들어간 경우는 아찔하기도 했다. 그런 상태에서 제대로 된 경력에 대해서 배우게 되자 진성은 다행이라고 내심 생각했다. “진성아, 경과 력이 무엇인지 아느냐?” “...... 잘 모르겠습니다.” “내 손을 잡아 보아라.” 진성은 사부 유조가 내민 손을 오른손을 내밀어 잡았다. “내가 움직이지 않고 너를 공격해 볼 테니까 한번 막아 봐라.” “네? .....으윽!” 유조는 손을 내민 상태 그대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진성은 뭔가 크게 충격을 받은 듯 뒤로 튕겨나갔다. 하지만 유조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진성아, 네 경도 상당하구나. 하마터면 내가 흔들릴 뻔했다. 하하하하...” “사부님,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방금 내가 너를 공격한 힘이 바로 경이다. 그리고 네가 그 힘에 대항한 것도 바로 경이다.” “.......... 도대체 경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하기는 힘들구나. 음... 뭐라고 해야 할까? 수련에 의해 얻는 힘이라고 하면 될까?” “수련?” “진성아, 네 몸은 이미 고급의 무술을 익히고 있다. 그런데 왜 너는 지금 내게 배우고 있느냐?” 사부 유조는 진성에게 갑작스런 질문을 했다. 진성은 자신의 생각대로 대답했다. “저는 그 힘을 제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힘으로 인해 아무도 다치지 않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맞다. 네가 몸에 익힌 것은 일종의 결과다. 그 결과를 통제하기 위해서 배우는 것이지. 진성아, 네가 만약 그 힘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거냐?” “..........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천천히 생각해 보거라. 그리고 나는 네게 단지 통제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를 주고 싶구나. 그 힘을 통제하고 있다가는 언젠가는 터져 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네가 그 힘에서 자유롭게 된다면 훨씬 낫겠지?” “......... 사부님, 어떻게 해야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 “팔극권을 비롯해서 고급 무술의 최종 목적은 어떤 도(道)를 이루기 위해서다. 그 도라는 것은 개인마다 다르겠지. 내게는 그 힘으로부터의 자유였지만 너는 어떨지 모르겠구나. 자유롭다라..... 말로는 쉽지 않구나. 너는 일단 기(技)의 정점에 올라가야 그 다음이 보일 것 같다.” “기의 정점?” “일단 제대로 배우고 나서의 다음 얘기겠지. 평소에 생각나면 한번씩 되새겨 보거라. 아, 경과 력에 대해서 얘기했지. 경은 수련의 힘이라고 하고 력은 보통 신체의 힘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경은 오래 쌓은 사람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물론 올바른 방법으로 제대로 수련을 해야겠지만 같은 조건에서는 거의 무조건 오래 쌓은 사람이 월등하다. 하지만 력은 타고난 부분과 훈련으로 개선할 수 있다. 지금 너와 나의 력에서는 내가 한참이나 모자라지. 하지만 실제로 대련을 해 본다면 아직까지는 내가 진성이 네게는 지지 않을 거다. 그 이유는 내게 모자라는 력을 월등한 크기의 경이 채워주기 때문이지.” “아....” 진성은 몸으로 느끼지는 못했지만 경을 대강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 사부님, 그런데 경은 어떻게 수련하는 겁니까?” “보통 고급 무술에는 이런 경을 제대로 수련하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그 방법을 아는 사람은 정말 드물지. 바로 비전이거든. 진성아, 내가 네게 이제부터 전해주는 것은 나중에 네가 네 제자에게 전해 줄때 사람을 가려서 전해야 한다. 형(形)과 용(用) 역시 비인부전이지만 이 경과 관련된 것은 그야말로 사람을 가려야 한다. 알겠느냐?” “예, 알겠습니다. 사부님.” “경은 네가 이미 배워서 어느 정도 익숙해진 팔극진결로서도 수련이 가능하다. 자 내가 가르쳐 주는 대로 호흡을 하고 마음을 두고 중심을 이동한다고 생각하거라.” 진성은 사부 유조로부터 이전의 팔극진결과 동작은 같지만 그 동작마다의 뜻과 그 뜻에 맞는 호흡법 그리고 몸의 중심 이동과 그 때의 마음 상태에 대해 자세히 가르침을 받았다. 예전의 그 팔극진결과 동작 자체는 같았지만 그 내부는 완전히 달랐다. 진성은 권보나 검보로 절대 고수가 될 수 없다는 이유를 알았다. 이런 것이 비전이라면 거의 절대 책으로는 제대로 된 무술을 전할 수 없을 것이다. 거의 몇 시간이 지나서야 한번의 팔극진결을 마칠 수 있었다. “휴... 나도 힘이 드는구나. 대강 기억할 수 있겠느냐?” “........... 앞부분은 기억하겠는데...... 저.. 중간부터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너무 걱정하지마라. 네가 나보다는 나으니까. 나는 그 팔극진결만으로 꼬박 사부님께 1년 동안 배웠다. 1년 동안. 아, 물론 1년 만에 극에 달하도록 익힌 것이 아니라 기본만 일년 동안에 배운 것이다.” “1년 동안이나요? 그렇게 어려운 것인가요?” “네 경우는 별로 상관이 없을 것 같다. 너도.... 그리 평탄한 삶을 살기는 힘들 것 같구나... 하하하하... 일단 기억하는 대로 연습하고 절대 남에게 함부로 가르쳐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모르는 부분은 절대 억지로 수련하지 말아라. 완벽하게 몸이 기억하고 마음이 기억할 때까지는 반복뿐이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아라.” 진성이 비전의 팔극진결을 어느 정도 익히자 사부 유조는 발경에 대해 가르치기 시작했다. 진성은 이때까지 아주 여유 있던 사부가 최근에 한꺼번에 많은 것을 가르치자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워낙 사부인 유조가 밝았고 가르침을 받으면서 사부의 대단한 무술 경지에 탄복했기에 애써 그런 느낌을 지웠다. “진성아, 발경이 무엇이냐?” “수련으로 쌓은 경을 외부로 내보내는 것입니까?” “일단은 맞구나. 하지만 발경은 물 흐르듯 부드럽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댐이 폭발했을 때 물이 날뛰며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릴 때의 그 강력함이다. 발경은 경을 모아서 일시지간에 작은 타격점을 통해 상대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는 타격법이다. 너는 어느 정도 몸이 경의 수련을 한 것과 다름이 없으니 시험을 해 봐도 무방하겠구나. 진성아, 움직이지 말아라.” 사부 유조는 진성을 앞에 세우더니 늦지도 빠르지도 않게 주먹을 내뻗었다. 진성은 사부를 믿고는 가만히 있었다. 사부 유조의 주먹이 명치 부근에 닿자 진성은 주먹이 아니라 뭔가 다른 것이 자신의 가슴 언저리에 닿는 듯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가슴에서도 그와 비슷한 무언가가 일어나 자신은 자연스럽게 뒤로 밀려났다. 전혀 아픔도 고통도 없었다. “..... 사부님, 이게 발경입니까?” “이것은 발경 중에서도 장경(長勁)이란다. 단순하게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주먹을 뻗어 진성이 너의 가슴을 칠 때까지의 동작에는 발경을 하는 묘리가 숨어 있었다. 이처럼 비교적 먼 거리에서 어떤 움직임을 통해서 경을 만들어 내거나 경을 모아서 발하는 법을 장경이라고 한다. 자, 내 말을 잘 들어라.” 사부 유조는 장경의 일반적인 방법에 대한 예를 들면서 호흡법과 동작의 중심에 대한 설명과 그 뜻에 대해 설명했다. “아... 이것은 팔극진결의 부분과 비슷한데요. 사부님?” “당연하다. 팔극진결에는 그 모든 발경의 부분이 다 들어가 있다. 팔극진결을 얼마나 노력해서 수련했느냐에 따라서 어쩌면 장경 뿐 아니라 다른 발경의 위력이 결정된다고 봐도 이상할 것 없다. 진성이 네 경우는 어느 정도 경을 몸이 익히고 있지만 팔극진결을 부지런히 익힌다면 그런 것의 통제 뿐 아니라 어쩌면 발경의 끝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자, 연습해 봐라.” 진성은 발경의 끝이라는 말에 궁금해서 물어보고 싶었지만 지금 당장 장경에 대해 제대로 익혀야만 했다. 진성은 그 특별한 호흡법과 더불어 몸의 중심과 각 부위의 당김 등을 망라한 비전의 장경을 이용해서 도장 안에서 팔과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경은 아주 천천히 움직여도 그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부의 설명에 비록 자신이 체험했지만 신기함을 새삼 느꼈다. 진성은 팔극진결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난 후에 조금의 시간이 날 때마다 진각 없는 팔극진결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펼치기 시작했다. 특히 비전의 호흡법과 그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팔극진결의 위력은 진성에게 자신의 몸이 가진 경의 위력을 알게 해 주었다.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던 경이 진성의 팔극진결에 의해 모이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로 급속도로 몸에 경이 충만해짐을 느꼈다. 심지어 사부 유조조차도 그런 변화에 놀라워했다. 진규는 그런 진성의 수련에 예기치 않은 피해자였다. 문명 온라인의 요람에서 뭔가 문제를 해결하려다가 복잡해지자 잠시 쉴 요량으로 팔극진결을 펼친 진성에게 진규는 다가갔다. 쉬고 있는 진성에게 뭔가를 물어보고 연습 게임 한번 하기 위해서였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천천히 움직이는 진성은 멈출 줄 몰랐다. 진규는 진성의 몸에 손을 대며 말하려고 했지만 말할 틈도 없이 뒤로 튕겨나가고 말았다. 진규가 진성의 등에 손을 댄 시점이 공교롭게도 팔극진결 중에서도 가장 경이 등 부분에 활발한 시점이었다. 진규는 마치 뭔가 맞은 듯 위로 거의 2m 가량 떴다가 떨어졌다. 큰 소리가 났기 때문에 요람에 있던 사람들이 다 그 장면을 보았다. 정말 영화 속의 한 장면이었다. 기절한 진규는 병원으로 실려 갔지만 다행히 단순한 기절이라는 말에 한숨을 쉰 진성이었다. 그 뒤로 사람들은 진성이 무언가를 수련하기 시작하면 그 옆 반경 2m 내로는 다가가지도 않았다. 진규는 아예 진성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버렸다. “오늘은 촌경(寸勁)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자.” 장경을 배운지 며칠 되지도 않아 사부 유조는 진성에게 촌경에 대해 가르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빠른 속도였다. “사부님, 무슨 일이 있습니까? 예전과 너무 다릅니다.” 사부 유조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그다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사실 얼마쯤 뒤에 대만의 사형이 나를 찾아온다는 연락이 왔단다. 지난번에 말한 것과 같이 아마도 내가 제자를 들인 일에 대해 말하려고 오는 것 같다. 명색이 내 제자인데... 팔극문 직계는 아니라도 사부의 사형을 만나는데 기본은 해야 하지 않겠냐? 게다가 어차피 진성이 네게 가르칠 거라서 빨리 가르치는 것뿐이란다.” “사부님의 사형이라면.... 그 팔극문의....” “맞다. 별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라. 너는 내가 가르치는 것을 최대한 흡수할 생각만 하거라. 알겠느냐?” “네, 사부님.” 진성은 사부 유조가 조금 이상함을 느꼈지만 꼭 집어 말할 수 없기에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곧 사부 유조의 말이 시작되었다. “촌경은 단경(短勁)의 일종이다. 장경이 멀리서 여러 가지 움직임을 통해 경을 모아 터트린다면 촌경은 그야말로 아주 짧은 거리에서 발경을 하는 것이다. 열 번 듣는 것보다 한번 경험하는 게 낫지.” 사부 유조는 진성에게로 다가가 명치 위의 오른쪽 가슴께로 손바닥을 펴서 대략 새끼손가락 하나 굵기 정도만 간격을 벌렸다. 그리고는 가볍게 가슴을 눌렀다. “..... 으윽!” 진성은 뒤로 튕겨 버렸다. 그야말로 아주 가벼운 가슴 밀기가 엄청난 위력의 발경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부 유조의 배려로 진성은 거의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와... 사부님, 정말 대단한데요....” “그래....... 이 촌경은 장경과는 달리 수련의 힘이 절대적이다. 장경은 어떻게든 경을 모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지만 단경인 촌경은 그야말로 수련으로 쌓은 경을 터트리는 것이다. 자 나를 따라해 보거라.” 진성은 사부 유조의 세심한 말을 귀담아 들으면서 천천히 따라하면서 촌경을 배워나갔다. 진성은 사부 유조가 너무 서두르는 것 같아 조금은 불안했지만 그 대만에서 오신다는 분 때문임을 알고는 자신이 더욱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을 굳히고는 뭔가를 생각했다. “뭐? 휴가를 달라고?” “네, 5일이면 됩니다.” “진성아, 무슨 일이 있냐?” 이팀장은 한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바쁜 걸로 알고 있었던 진성이 갑자기 나타나 휴가를 달라는 말에 상당히 놀랐다. 또 무슨 사고가 난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 하지만 곧 진성의 설명에 이해는 했지만 상당히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곧 다가오는 프로 리그의 시작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는데 이런 시점에서 진성에게만 휴가를 주기도 조금 형평성에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거의 반년이 되도록 단 한번의 휴가도 없었기에 무작정 안 된다는 말도 하기 힘들었다. 이팀장은 진성의 간곡한 부탁에 휴가를 허락하고 말았다. 물론 그 자리에는 매니저 서재필도 참석해서 진성의 휴가를 공식화 시켜주었다. 진성은 휴가 동안 현준 가족에게 동의를 구한 후에 짐을 싸들고 아예 사부 유조의 집으로 갔다. 5일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사부 유조에게 제대로 배우고 제대로 연습하기 위해서 휴가를 낸 것이다. 그런 진성의 모습에 사부 유조는 흐뭇하게 웃었다. 진성은 그런 사부 유조에게서 5일 동안 발경 중의 고급 기술인 침투경(浸透勁), 암경(暗勁), 냉경(冷勁)에 대한 체험을 하는 동시에 세심한 가르침을 반복해서 들으며 조금은 시전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하지만 결코 쉽지 않았다. 진성 자신은 팔극진결의 수련으로 인해 자신의 몸의 경을 제대로 컨트롤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침투경 등의 고급 기술을 사용하면서 느낀 것이 경이 제멋대로 움직인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점을 고치기 위해 진성은 팔극본결 뿐 아니라 명상을 통해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고급 기법까지 사부 유조에게서 흡수했다. 진성의 팔극신권과 무술에 대한 이해는 단기간에 급속도로 수준이 높아졌다. 뼛속까지 무인인 사부 유조와는 달리 진성은 그리 무에 집착을 하지 않았지만 요즘의 집중적인 가르침과 휴가 기간 동안의 반복된 연습으로 인한 몸의 변화를 스스로가 느낄 수 있게 되자 무술에 대한 새로운 생각이 들었다. 점점 자신의 삶에서 무술이 떨어질 수 없는 존재로까지 느껴졌다. 3월 8일, 중국, 일본, 한국에서 동시에 문명 온라인 영웅 스키피오의 프로 리그가 개막됨을 각국의 운영위원회가 알렸다. 그리고 같이 발표된 내용은 많은 게이머들을 흥분시켰다. 일단 각국의 프로 리그는 자국에서 치르기로 했다. 그 규모나 프로 리그에 참여하는 프로팀들의 수는 각 국의 운영위원회가 결정하도록 했다. 또한 곧 모집될 3국의 운영위원회들의 대표위원들을 모은 최고 운영위원회를 구성해서 3개월 동안의 자국 리그가 끝난 뒤에 최고의 프로팀들을 모아서 메이저 리그를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각국 공히 4개 팀을 선발해서 총 12개 팀이 리그와 토너먼트가 혼합된 독특한 경기 방식를 거쳐서 최종 우승을 가리는 메이저 리그의 소식은 인터넷을 들끓게 만들었다. 모두 합해 장장 5개월 대장정의 프로 리그를 열기로 합의한 것이다. “여기가 한국인가?” “네, 사부님.” “이곳에 유사제가 살고 있다니.....” 인천국제공항에서 빠져나와 택시를 타고 서울로 들어오던 맹가위는 자신의 제자인 오전현과 함께 서울의 야경을 보고 있었다. 날씨도 대만과는 사뭇 달랐다. 서울의 날씨가 건조하게 춥다면 대만은 습기가 많으면서도 온도가 낮았다. 기온 자체는 서울이 더 낮았지만 오히려 춥다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맹가위는 자신의 한국인 사제인 유조를 생각했다. 자신 역시 사형으로서 사제를 감싸주지 못했다.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팔극권의 계승자로서 살아왔던 사제를 제자까지 받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 그 말도 안 되는 규칙에 비록 자의가 아니었다고 해도 자신 역시 동조했기에 아무런 책임도 없다고 할 수 없었다. 더구나 이제는 한국인 제자를 받았다고 해서 그 경위를 조사하러 가게 되자 마음은 더욱 착잡했다. 자신의 사제인 유조 뿐 아니라 자신도 이제 곧 있으면 갈 때가 가까운데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에 매여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기도 했다. 하지만 맹가위 뿐 아니라 팔극문의 정통 계승자들의 자부심은 그 모든 것에 우선했다. 오랜 동안의 형제의 정을 나누었지만 그 자부심과 정통성이라는 말에 맹가위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거의 15년이 넘어서 처음 만나게 될 사제의 모습에 한편으로는 반갑고 한편으로는 지금 당장 다시 대만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오전현은 곧 팔극문의 차기 계승자 중 하나로 내정된 상태였다. 오전현은 젊었을 때 본 적이 있는 한국인 유조 사숙을 만나러 간다고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했다. 유조 사숙은 비록 한국인이었지만 팔극권의 실력 뿐 아니라 인품 또한 고매해서 자신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따랐다. 여러 가지 요인으로 유조 사숙이 대만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오전현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팔극문에서 가장 강한 무술가였던 유조 사숙이 왜 한국으로 가야하는지 이해 못했다. 나중에 나이가 들면서 여러 역학관계에 눈을 뜬 후에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과연 옳은 것인가 의구심마저 들었다. 사부 맹가위의 마음 역시 오전현은 알고 있었다. 더구나 이렇게 왜 제자를 받았냐고 따지러 가야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좋을 수가 없었다. 맹가위는 한국어를 그런대로 할 수 있었다. 오전현의 경우 조금 알아듣기는 해도 그리 잘 하지는 못했다. 맹가위는 유조에게서 한국어를 배웠다. 읽고 쓰기는 잘 못해도 듣는 것과 말하는 것은 그런대로 잘했다. 보통의 수행과는 달리 한국으로 왔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을 사부인 맹가위가 처리했다. 택시비를 지불한 맹가위는 제자 오전현과 함께 일단 호텔로 가서 하룻밤을 지내기로 했다. “자, 전현아, 가자.” 호텔을 나선 맹가위와 오전현은 곧바로 유조의 집으로 향했다. 미리 연락하려다가 좋은 일로 가는 것도 아니어서 맹가위는 그냥 가기로 했다. “음.... 집이 아주 좋구나. 이런 곳에 이런 집이 있다니..” 맹가위가 보기에 유조의 집은 그 주변의 집들과는 너무 달랐다. 땅도 넓었지만 집 전체가 숲 같은 느낌을 주었다. 집 앞에 선 맹가위는 초인종을 눌렀다. 한참을 누르니 사람이 나왔다. “..무슨 일로......... 사..... 사형?” 유조는 연락도 없이 나타난 사형 맹가위를 보고는 굉장히 놀라서 평소 거의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유사제!” “사형이구려. 들어갑시다.” 어느새 유조는 평소의 담담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15년 동안 떨어져 있었어도 기쁨의 상봉을 기대할 수 없음을 알고 있던 맹가위였다. 하지만 싸늘한 유조의 모습에 조금은 섭섭했다. 맹가위와 오전현은 유조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유조는 두 사람을 데리고 손님을 대접하는 객청으로 갔다. 싸늘한 아침 기운은 객청 안으로 들어오자 누그러졌다. 유조는 말없이 두 사람을 두고 밖으로 나가 따뜻한 차를 준비해서 다시 들어왔다. “..........” 아무 말 없이 차를 따라서 두 사람에게 준 유조는 자신 역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숨을 고른 뒤에 말을 했다. “사형, 어떻게 오시었소?” “유사제....” 맹가위는 안타까운 듯 냉정하게 말하는 유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유조는 그런 맹가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 여전히 담담하게 할 말만 했다. “어차피 어긋난 길, 다시 되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너무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휴.... 어쩔 수가 없네. 하긴, 자네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위선일지도...” “.......” “듣기로는 자네에게 제자가 생겼다고 하던데...” “맞습니다, 사형. 제 제자지요.” 유조 역시 무슨 일 때문에 온 것인지 알고 있었다. “유사제, 자네는 그 규칙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지 않나? 게다가 거의 이십 년이 다 가도록 그 규칙을 지킨 자네가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모르겠군...” 맹가위는 될 수 있는 한 부드럽게 이야기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부드러운 어조로 말해도 그 내용은 변하지 않는 법이다. “...... 규칙이라.. 하하하.. 저는 규칙을 분명히 지켰습니다.” 유조의 담담한 어조는 변하지 않았다. “자네.... 제자를 들이지 않았는가?” “그렇지요. 하지만 팔극문의 제자는 아닙니다.” “뭐? 자네 제자가 팔극문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소린가?” “제 제자는 팔극권이 아니라 제가 새로 만든 팔극신권을 배웠습니다. 저는 그 녀석에게 팔극권은 전수하지 않았습니다.” “팔극신권?” “제가 아는 모든 무술을 가지고 새로 만든 무술입니다. 아직은 아주 미흡하지만요.” 맹가위는 떨어져 있는 동안 사제 유조가 새로운 무술을 만들었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유조의 그 실력과 경지가 대단한 것은 알았지만 무술을 만들었다니. 쉽게 인정할 수가 없었다. 무술을 새로 만들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무술의 종사라 인정받는 것과 다름없었다. 유조가 예전부터 많은 무술을 집대성하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새로운 무술이라는 말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 자네, 그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는가? 무술을 새로 만들다니....” “보시면 압니다. 제자를 불렸으니 조금 있으면 올 겁니다.” 유조는 궁금해 하는 맹가위를 앞에 두고 눈을 감고는 차를 마셨다. 더 이상의 말을 하지 않겠다는 표시였다. “인사드려라. 사부의 사형이시다.” “안녕하십니까? 강진성입니다.” 보통의 인사에 맹가위는 눈살을 찌푸렸다. 사문의 사숙에 대한 인사가 아니었다. 게다가 제자라는 사람이 이렇게 어린 사림인 줄은 몰랐던 맹가위로서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런 젊은 사람을 정식 제자로 들이다니 맹가위는 점점 유조에 대한 작은 호의마저 사라짐을 느꼈다. 아무리 못해도 20년 이상의 수련은 해야지 그 경과를 볼 수 있는데 이제 20살 정도의 청년에게 무엇을 바란단 말인가? 앞서 들었던 새로운 무술이란 말도 허무맹랑하게 들렸다. “험험.....” “사형, 저 녀석은 팔극문이 아니라 새로운 무술인 팔극신권의 정식 후계자입니다. 그래서 팔극문 특유의 사문의 존장에 대한 예나 기타, 다른 것들은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이해하십시오.” 유조는 사형 맹가위의 심정을 아는지 단단히 못을 박았다. 이해해 달라는 말이 아니라 이해하라는 일종의 선언이었다. 몇 마디 얘기를 나눈 후에 유조는 진성에게 팔극신권의 팔극진결을 펼쳐보라고 주문했다. 진성은 고개를 가볍게 숙이고는 도장 가운데로 나가 천천히, 그리고 익숙하게 팔극진결을 하나하나 풀었다. 가벼운 듯 하면서도 무겁고, 거친 듯 하면서도 부드러운 묘미가 숨어 있는 팔극진결의 처음 부분이 지나자 본격적인 동작이 누에에서 실을 뽑듯 풀려 나왔다. “아.... 이것..은....” 한참을 보던 맹가위는 팔극진결을 보면서 말을 더듬었다. 맹가위는 유조를 쳐다보았다. 유조는 맹가위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제자 진성의 움직임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게 오래지 않아 진성의 팔극진결 시연은 끝이 났다. 마지막 자세를 끝으로 진성은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에 유조에게로 걸어왔다. “사형, 어떻습니까?” “자.. 자네... 이것을 어떻게 만들었는가?” 맹가위는 당황했다. 일견 팔극권과 비슷했지만 그 내부의 경을 다루는 것이라든지 호흡이라든지 하는 다른 것들이 현저하게 달랐다. 그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절대 팔극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할 일이 없어지니까 이런 취미가 생겼지요.” 공식적으로 제자를 들일 수도 없었고 제대로 도장을 열어서 기술을 전할 수도 없었던 유조였기에 자신의 기술을 갈고 닦고, 그 기술을 종합해서 새로운 기술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유조는 어쩌면 팔극문의 그 규칙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팔극신권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여기기도 했다. “... 그... 그런가.... 음... 이건 뭐라고 할 수가 없겠군.” 맹가위는 이런 정도라면 팔극문 전체가 들고 일어나서 문제 삼는다고 해도 어느 정도 무술의 눈을 뜬 사람 눈에는 분명 다른 무술로 보일 것이 자명했다. 게다가 맹가위는 이제 겨우 20살을 넘었다고 생각한 유조의 제자의 경지가 상당함에 놀랐다. 태어나면서 수련했다고 해도 불가능한 경지였다. 아직 부드럽지 못하고 자연스럽지 못한 면이 있지만 그런 부분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유사제, 자네 제자의 경지가 놀랍구만.” “네, 저도 가르치면서 아주 재미있어 하고 있습니다.” “.... 그렇군. 자네가 왜 늘그막에 제자를 들였나 했더니 이런 제자였구만. 자네, 정말 팔극권은 전하지 않았나?” 맹가위는 팔극신권에 대해서는 뭐라 할 수 없지만 확실하게 팔극권에 대해서는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대답은 의외였다. “전했습니다.” “뭐?” “하지만, 비전이 아니라 단순한 형(形)입니다. 그리고 그 안의 내용은 조금 전에 보신 팔극신권입니다. 저는 팔극문의 일원임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비전의 팔극권은 전하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팔극문이지만 제 제자는 팔극문이 아님을 확실히 아시기 바랍니다.” 유조는 여전히 담담하지만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맹가위는 유조의 말에 더 이상 뭐라고 할 수 없었다. 유조의 말은 옛날부터 그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팔극문 내부의 갈등과 자존심으로 인해서 생긴 오래된 상처가 이제는 완전히 갈라져 어쩌면 팔극권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킬 수 있는 기술이 떨어져 나간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아쉬웠다. “유사제, 만약에 말일세. 팔극문이 자네 제자를 정식 제자로 인정한다면 어쩌겠나?” 팔극신권의 훌륭함을 눈으로 본 맹가위는 개인적으로는 팔극권 내에서 흡수할 수는 없을까 생각해서 은근히 유조에게 물었다. “...... 정식 제자로 인정한다? 아마 불가능할 겁니다. 게다가 제 제자는 이미 팔극문과는 연관이 없습니다. 억지로 만든 인연은 나중에 꼭 말썽을 일으키게 되지요.” 유조는 이미 그 이름 모르는 검법까지 전수해 줄 마음을 먹은 터라 팔극문의 인정이라는 것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진성에게 짐만 될 뿐이라 생각했다. “......... 그런가?” 맹가위는 한국으로 온 목적은 다 이루었다. 꼬투리 잡으려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팔극권이 아닌 다른 기술을 전해줄 제자라면 자신 뿐 아니라 팔극문 전체가 뭐라고 할 일이 못됨을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 급한 사부의 연락을 받고 급히 달려온 진성은 사부의 사형과 그 제자가 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진성은 혹시나 심각한 다툼이 되지 않을까 조바심이 났다. 사부의 사형으로 보이는 사람 역시 대단한 사람일 것이고 그런 사람과 사부가 같이 대련을 한다면 한쪽이 크게 다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둘 모두 언성이 높아지지 않고 내용을 모르면 정겨운 친구의 담소로 들릴 정도여서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진성 자신은 팔극문이니 팔극신권이니 그런 것에 별 관심이 없었다. 단지 배워서 몸에 익힐 때의 성취감과 그 동작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을 때의 그 기쁨, 사부님의 기대에 부응한다는 자부심이 좋았을 뿐이었다. 무술을 배운다는 사실 자체가 좋았다. “유사제, 자네의 얘기는 내가 팔극문에 공식적으로 전하겠네. 그 팔극신권에 대한 얘기도 포함해서 말일세. 아직은 내 눈썰미를 의심할 만한 사람은 없으니까, 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걸세. 하지만 아마도 차기 계승자들이 아마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 같아. 그 녀석들에게는 어쩌면 자네의 제자가 약간은 거슬릴 지도 모르니까.” 맹가위는 유조에게 자신이 이번 일을 책임진다고 말했다. 맹가위 정도라면 팔극문에서도 그 위치가 절대 낮지 않았다. 근래 들어 팔극문에서도 행정능력이 우선되는 분위기가 나타나서 조금 밀리는 분위기였지만 그래도 맹가위의 실력이나 안목을 문제 삼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맹가위가 새로운 무술이라 인정했다면 다른 사람들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였다. “사부님, 유사숙님의 제자와 대련을 해 보고 싶습니다.” 계속 듣기만 했던 오전현이었다. 한국말을 완벽하게 듣지는 못했지만 사부 맹가위의 말 중에 눈앞의 젊은 사람의 경지가 대단했음은 들을 수 있었다. 게다가 자신이 그 시범을 보면서도 나이에 비해 대단한 성취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팔극문과 관계가 없다는 말을 들었지만 사부가 칭찬하는 팔극신권이라는 무술의 계승자라는 말에 맞붙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뿐 아니라, 오전현의 속마음은 팔극문의 정통 계승자의 제자가 팔극문을 버린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실이야 어떻든 그것은 팔극권보다 팔극신권이 더 훌륭한 권법인지 아닌지 가릴 필요가 있을 정도로 팔극문의 문인들에게는 민감한 문제였다. 더구나 자신이 차기 팔극권의 계승자 중 한 사람인데 이런 것을 보고 지나칠 수 없는 문제였다. 유조와 맹가위는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오전현 역시 그 정통 계승자 중의 한명이 될 후보라는 것을 곧 깨달았다. 이런 자존심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허허.... 전현아, 참을 수 없더냐?” “사부님, 저 역시 팔극문의 제자입니다. 팔극권보다 강한 권법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아니 팔극권을 버리고 다른 권을 따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 맹가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유조를 바라보았다. 듣기만 하던 유조는 오전현을 쳐다보며 말했다. “전현아, 네가 보기에는 내 제자가 얼마 동안 수련을 한 것 같으냐?” “...... 적어도 15년 이상은 제대로 수련한 것 같습니다.” 유조는 공손한 오전현의 대답에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너는 얼마나 수련했느냐?” “........... 30년이 넘었습니다.” “너는 정말로 정당한 대련이 되리라고 생각하느냐? 아무리 생각해도 두 배 정도의 차이는 나는데 그런 상황에서 대련이 의미가 있을 것 같으냐?” “..........” “내 제자는 아마도 네 제자와 그 나이가 비슷할 것이다. 물론 나이에 비해서 그 수련이 높은 상태지만 그래도 세월을 속일 수는 없다. 네가 굳이 대련을 원한다면... 하하하.. 내가 나설 수밖에.” 유조는 진성이 팔극신권을 제대로 연습한 기간이 일년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숨기는 동시에 자신이 대련에 응한다는 말로 상황을 무마시키려 했다. 실로 오랜 경륜이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오전현은 사리에 맞는 사숙 유조의 담담한 말에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분명 상대는 20대 초반의 젊은이일 뿐이었다. 40대인 자신이 억지 주장으로 대련해서 이긴다고 해서 얻을 것은 없었다. “.... 유사숙님, 제가 성급했습니다.” “아니다. 팔극문의 자부심은 대단한 것이니까.” 유조의 말은 비난인지 진심인지 구별을 할 수 없었다. 오전현은 한 발자국 물러섰지만 완전히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이야 어떻게 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기회가 되면 꼭 팔극문, 팔극권의 훌륭함을 보여주고 싶었다. 더 이상 할말이 없어진 맹가위와 오전현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를 한 후에 유조의 집을 나섰다. 어차피 꼬인 관계를 한순간에 돌리기란 불가능했기에 맹가위는 깊은 한숨을 쉬며 오전현과 같이 숙소로 돌아갔다. “진성아, 어땠느냐?” 맹가위와 오전현이 돌아간 후, 도장으로 온 유조는 진성에게 물었다. “...... 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 팔극문이라는 것이, 팔극권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까?” 진성은 가만히 듣고 있기는 했지만 저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자신만 딴 세계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음.. 너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을지도 모르겠구나. 그 사람들에게는 팔극문에 대한 자부심이 바로 그들의 생명과 같단다. 개인을 욕하는 것은 참을 수 있어도 팔극권에 대해서나 팔극문 전체를 싸잡아 비난한 행동에는 철저하게 복수를 하는 것이 바로 그 자부심 때문이다. 조금 전에 사형의 제자인 오전현이 네게 대련을 청한 이유도 바로 그 이유에서다. 팔극문 정통 계승자의 정식 제자가 팔극문을 떠난 적은 단 한번도 없었거든. 게다가 새로운 무술의 계승자가 된다는 것은 더더욱 없었지.” “무술에 그렇게까지 의미를 두는 것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 그럴 테지. 지난번에 내가 물어 본 적이 있을 게다. 네가 원하는 그 힘의 통제를 완벽하게 할 수 있게 되면 그 때는 무엇을 할지..... 내 사형과 그 제자 같은 사람들에게는 무술이 바로 삶의 과정이자 목표다. 삶의 모든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무술을 통해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만들고 무술을 통해서 삶을 바라보고 무술을 통해서 죽음을 생각한단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그것이 일종의 믿음일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도 그렇지만.” 유조는 목소리에 전혀 떨림도 없이 담담하게 진성에게 풀어 설명했다. “믿음.......” “진성아, 네가 평생을 통해서 프로 게이머를 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다. 내 말이 어떠냐?” “........ 네, 맞습니다. 평생 직업은 아닐 겁니다.” “그러면 너는 무엇을 하고 싶으냐? 네가 진짜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 “............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그저.......” “ 단지 할 수 있는 직업을 찾고 결혼하고....... 그래서 그냥 살지 않을까? 그것으로 좋을까?” “........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평범한 생활도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성아, 나도 네 말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넌 팔극신권의 계승자다. 네 경우는 네가 가진 그 기술과 그 수련의 가치를 잘 모르고 있다. 내가 사형에게 15년의 수련을 말했지만 적어도 너 정도의 수준이 되려면 30년 이상의, 그것도 제대로 된, 고련이 필요하다. 확실하게 그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일단 결과적으로 네가 가지게 된 것은 단순히 도장에서 돈을 내고 배울 수 있는 쓰레기가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다.” “.........” “네게 어떤 강요 같은 것은 하고 싶지 않지만 엄청나게 비싼 보물을 주워서는 창고에 처박아 놓는 일은 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내 솔직한 심정이다. 그렇다고 너에게 무술가로서의 인생을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싶지는 않다. 네가 하고 싶은 일을 결정할 때가 될 때, 그 때 네가 가진 이 보물을 너무 무가치하게 생각하지 말았으면 한다.” “... 사부님....” “처음에 너를 본 이유는 네가 가진 그 힘에 휘둘리지 않게 하기 위한 인간적인 배려였다. 그러다가 네게서 무술가로서 육체적인 장점이 아닌 정신적인 면을 발견했다. 너 정도의 나이로 무술가의 길을 처음 시작하는 것은 정말 힘들고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네 몸은 이미 어느 정도 육체적인 수련을 뛰어 넘었더구나. 나는 그런 네 몸과 네 마음을 여러 번 생각해서 너를 내 제자로 받아들였단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가진 기술이 사장되는 것이 아깝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너를 통해서 내가 생각했던 무(武)의 경지가 사실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사부 유조는 조금 흥분한 듯 자세히 들으면 알 수 있을 정도로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무의 경지라면?” “말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너에게 말했지만 내가 추구한 것은 바로 무술 수련을 통한 자유였다. 힘을 추구하면서 힘에서의 자유라... 어찌 보면 아주 모순적인 말이지만 나는 그것을 위해 노력했었다. 나름대로 얻은 것도 많았다. 하지만 갈수록 그 자유라는 것이 절대 이탈의 의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고기가 물을 벗어나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물에서 살면서도 물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자유가 아닐까, 하늘의 새가 자유로운 것은 새 자신이 자신들이 특별한 힘으로 날고 있다는 자각을 하지 못해서이지 않을까. 아예 잊어버리는 것이 진정한 자유가 아닐까?” “.............” 귀에 들리는 말과 머리 속에서 받아들이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진성은 무슨 말인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여러 가지 다른 생각들을 낳더구나. 무지와 잊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어느 쪽이 지혜로운가? 하하하하.. 어려운 얘기지. ‘모르는 것이 약이다’는 속담이 어쩌면 진리일지도.. 하하하..” “..... 사부님...” 진성의 얼굴은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가득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그런 경지가 있다면 나는 네게 그런 기대를 걸어본 것뿐이다. 너무 딱딱하고 어려운 얘기인가? 하하하... 진성아, 너무 큰 부담은 갖지 말고 이제까지 했던 것처럼 네가 맡은 일에 열심을 내고 네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라. 내가 네게 해주고 싶은 말은.... 인생은 선택이라는 말이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다.” “네, 사부님.” 사부 유조는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는 말로 끝을 맺었지만 유조의 말은 진성의 마음을 흔들었다. 아직 어린 나이, 대학도 졸업하지 않은 채 프로 게이머로 사회에 뛰어든 진성 자신은 미래에 대한 생각을 진지하게 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특히 최근에는 더욱 더 바빠진 하루하루의 생활로 인해 그런 진지한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지금은 게이머로서 한 회사에 속해서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지만 게이머라는 것에 목 메달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싶기도 했고, 현준의 집에서 살면서 조금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시작한 일이었다. 물론 현준 아버지인 진팀장의 말도 상당 부분 작용했었다. 자신이 무술가라는 생각을 한번도 해 보지 않았던 진성으로서는 사부의 사형과 그 제자를 만난 일을 쉽게 넘겨 버릴 수만은 없었다. 진성은 무술을 통해서 살고 무술을 통해서 죽음을 본다는 사부의 말에 조금은 충격을 받았다. 도대체 사부가 말하는 그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자신은 알 도리가 없었지만 뭔가 끌리는 부분도 있었다. 그런 것들이 자신을 한순간에 진정한 무술가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진성은 그런 세계를 인정해야만 했다. “휴..... 복잡한 게 삶이라더니.. 선택이라... 선택이라...” 뭔가 명쾌하게 이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할수록 미궁인 듯한 느낌에 진성은 회사로 돌아가며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사부의 말처럼 열심히 하다 보면 뭔가 보이겠지 생각한 진성이었지만 그 마음속에 던져진 화두로 인해 점점 잔잔했던 수면에 물결이 일어나게 되었다. 밀리터리 아트의 출시계획은 연기되었다. 2사분기내 출시를 계획했지만 아직 비싼 접속기 PVR-2, 까다로운 네트워크 요구 속도로 인해 연기되었고 당분간은 자체적인 알파 테스트와 인터페이스의 압축, 최적화 작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프로화를 먼저 진행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로플팀의 입장은 보는 게임이 아니라 직접 하는 게임을 원했고 진짜 밀리터리 아트의 장점은 게이머가 가상현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진팀장은 그런 이점을 포기하면서까지 출시를 서두를 이유는 없다고 결론 내렸다. 조진철 프로그램 팀장이 인터페이스 관련의 일의 책임자였지만 가상현실 인터페이스의 접근 한계가 있어 어쩔 수 없이 그 작업에 진성이 투입되었다. 이미, 로플팀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개발자로 자리매김 한 진성은 기존의 코딩 작업이 아니라 가상현실을 통해서 프로그래밍을 하는 새로운 프로그래밍 기법을 선보였다. 예전에 진성이 시도했던 가상현실 내에서의 프로그래밍을 거의 완벽하게 성공시켜 보였다. 이로 인해 그 효율과 접근 방법의 패러다임이 바뀔 정도로 파급효과가 크리라는 예상이 있었지만 유일하게 진성만이 가능하다는 이유로 외부로 발표하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에 대해 별 반응이 없었지만 조진철 팀장은 거의 열광적으로 진성을 앉혀 놓고는 진성만이 가능한 그 프로그래밍 기법의 훌륭함에 대해서 일장연설을 하곤 했다. 조팀장에 따르면 진성의 새로운 프로그래밍 방법은 게임의 개발 뿐 아니라 운영 체제나 업무용 프로그램, 대단위 네트워크 서버 프로그램을 포함한 대부분의 프로그램 개발에 아주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었다. 가상현실 시스템이 또 다른 시스템을 개발하는 개발도구로 사용될 수 있음을 조팀장은 어렵지 않게 간파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그렇구나 생각했던 사항을 먼저 깨달았던 조팀장은 진팀장을 닦달해서 진성과 프로그래머로서의 다년 계약을 맺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펼쳤다. 조팀장의 광적인 주장은 진팀장 뿐 아니라 곽팀장, 진성까지 나서서야 겨우 말릴 수 있었다. 자소 소프트는 2차 프로 리그가 시작되기 전에 소속 프로 게이머와의 계약을 갱신했다. 아직 반년 가까이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그 실력 뿐 아니라 이름 자체의 가치가 워낙 커서 프로 리그 시작 전에 반드시 계약 갱신을 통해서 안정적인 프로팀 운영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만들었다. 게이머 스키피오, 진성과는 계약금 10억 플러스 알파에 연봉 5억을 제시했고, 예상을 깨고 게이머 한신, 현준에게도 진성과 동일한 조건을 제시했다. 게이머 작은 스키피오, 진규는 계약금 2억원에 연봉 1억원의 좋은 조건을 제시했다. 자소 소프트가 세계적인 개발사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해 준 문명 온라인 영웅 스키피오는 그 명성 뿐 아니라 재정적인 면에서도 엄청난 가치를 창출했다. 자소 소프트는 그런 성과에 큰 영향을 끼친 소속 게이머에게도 엄청난 투자를 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진성과 현준에게 제시한 플러스 알파는 자소 소프트가 새로 무상 증자를 통한 주식 확장 때 일정분의 주식을 게이머 진성과 현준에게 준다는 것이 그 골자였다. 그로 인해 게이머의 회사에 대한 소속감을 높이고 동반자라는 생각이 들도록 만드는 일석이조의 계약이었다. 또한 아직 검증되지 않은 신인인 진규에게도 계약금 2억과 연봉 1억으로 계약해서 상대적 박탈감을 조금은 느끼지 않도록 배려했다. “내가.. 내가.. 이런 큰 돈을 받는다니...” 진규는 아직도 꿈에 젖어 있었다. 계약한 지, 이틀이 다 됐지만 아직도 그 감동이 남아 있었다. 그런 진규 옆에는 역시 현준이 진규와 비슷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현준 역시 자신이 그처럼 대단한 대접을 받을 줄은 몰랐다. 대부분의 돈이 자신의 어머니에게로 직행하겠지만 현준이 기분이 좋은 이유는 돈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처음으로 진성과 같은 대접을 받게 된 것이었다. “하하하하..... 맞아. 이번에 정말 회사가 통 크게 투자한 것 같다. 아직 게임 경험도 없는 네게도 그렇게 투자를 많이 한 것 보면.....” 어떻게 보면 기분 나쁘게 들릴지도 모르는 말을 서슴없이 뱉는 현준이었지만 듣는 진규는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도리어 기대 이상이라서 얼떨떨할 뿐이었다. 진성과 현준의 모든 계약금과 연봉을 비롯한 모든 돈은 현준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관리하기로 했다. 특히 진성의 돈은 신탁회사에 맡겨서 관리하기로 했다. 진성과 현준에게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용돈으로 일정 돈과 신용카드만 주어졌다. 평소 돈에 대해서 별로 생각이 없던 진성은 불만이 없었지만 현준은 용돈을 올려달라고 데모까지 했다. 진성의 생활은 여전했다. 주말에는 거의 사부 유조의 집에서 살다시피 했고 주중에는 문명 온라인팀의 요람에서 현준과 진규와의 연습 게임과 로플팀의 요람에서 밀리터리 아트의 인터페이스 정리와 확정을 위한 팀미팅과 알파 테스터로서 테스트에도 참가해야했다. 전보다 조금은 바빠졌지만 진성의 표정에는 여유가 넘쳤다. “여.... 진성! 오늘은 유난히 얼굴이 밝은데?” “예? 그런가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오늘 테스트는?” “지난번에 말한 것과 같은 거야. 대장님과 조팀장이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가 볼까.” 요람의 테스트 장비가 있는 곳에서 진두지휘를 하고 있던 곽팀장은 요람으로 들어온 진성과 얘기를 나누고는 같이 회의실로 갔다. 회의실에는 이미 진팀장과 조팀장이 들어와 있었다. “진성이 왔구나. 앉아라.” 곽팀장과 진성이가 자리에 앉은 뒤에 진팀장이 곧 말을 시작했다. “지난번에 잠깐 언급한 대로, 아마도 올해 내로 그 밀리터리 아트의 출시가 획기적인 타개책이 없는 한 힘들 것 같다. 하드웨어의 가격은 둘째 치더라도 온라인화에는 문제가 많을 것 같다. 조팀장이 설명하지?” “네. 방금 팀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인터페이스 문제 때문에 상당기간 출시가 늦어질 것 같습니다. 현재 아무리 줄여도 지금 현재 깔려 있는 인터넷 백본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들다는 결론입니다. 아직 최적화할 여지는 있지만 속도 차이가 너무 많이 나기 때문에 당분간은 힘들 것 같습니다.” 진팀장은 조팀장을 말이 끝나자 바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게임을 싱글 패키지 게임으로 출시할 생각이다. 요즘의 게임은 네트워크 게임이 되지 않으면 거의 승산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새로운 타입의 게임이니 그리 많은 사람들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밀리터리 아트의 유저 층은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기존의 대전 액션과 새로운 임무 완수 액션이다.” “임무 완수 액션?” 진성은 처음 듣는 임무 완수 액션이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듣겠지. 당연하다. 나와 조팀장이 만든 것이니까. 그냥 간단히 일대일 대전 액션만 가지고는 조금 약하다는 판단에 게임을 두 단계로 나누기로 했다. 첫 단계는 당연히 알고 있는 대전 액션으로 그 곳에서 어느 정도의 실력을 쌓아야지만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다. 다음 단계란 바로 임무 완수 액션인데 그것은 일종의 잠입 액션이라고 봐도 상관없다. 조팀장!” 진팀장의 부름에 조팀장은 조명을 어둡게 하고는 프로젝트를 켰다. 화면에는 가상현실 세계가 나타났다. “화면은 다 알겠지만 이 빌딩이다.” 화면에 나타난 건물은 자소 소프트 건물이었다. “예를 들어 이 회사 18층의 한 방에 테러리스트들이 폭발물을 설치했고 그 폭발물은 1시간 이내로 제거하지 못하면 건물은 몽땅 날아가 버린다고 할 때, 게이머는 그 요구 조건 안에서 건물의 입구에서 출발해서 제한 시간 내에 주어진 임무를 완수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건물 내에는 다양한 적들이 직접 게이머를 찾아 나서기도 할 것이고 일부는 매복을 할 수도 있다. 게이머는 처음에 주어진 무기로 건물 속으로 들어가 적을 없애고 적의 무기를 탈취하든지 아니면 건물 내부에 숨겨져 있는 것을 찾아내든지 해야 한다. 시간 내에 성공하지 못하면..... 폭파해 버린다.” 진팀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화면속의 자소 소프트 빌딩은 창문이 일제히 밖으로 박살이 나면서 빌딩 자체가 무너져 내렸다. 원래는 18층 정도에 하나의 폭탄으로 저런 효과를 내기는 어려웠지만 극적인 효과를 위해 조팀장이 손을 본 것이다. 한동안 진성이 다른 일로 바쁠 때 로플팀이 새로운 준비를 한 결과였다. “..... 와... 대단한데요. 그러면 그 임무를 완수하기 빌딩으로 들어가서 만나는 적은 인공지능입니까?” 진성은 정말 감탄했다. 폭파 장면도 대단했지만 그런 게임에 대한 기획과 그것을 단기간에 실행할 수 있는 로플팀의 저력에 더 감탄했다. 대전 액션 게임에서 잠입 액션이라니. 진성은 진지하게 물었다. “일단은 그렇게 봐야지. 그리고 적의 난이도를 조정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겠지.” “무기는 어떤 것을 사용합니까?” 폭파 장면이 나올 정도라면 게이머나 그 적들이 사용하는 무기 역시 검 정도는 아니리라 생각한 진성은 무기에 대해서도 물었다. “.....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처음에는 옛날처럼 칼과 단도, 암기 등만으로 하려고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다양하면서도 효과 있는 총기류를 원하더군. 당연히 총과 그와 같이 사용할 수 있는 많은 아이템이 준비될 예정이다.” 예상대로 총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니. 진성은 이제껏 가상현실에서 총을 사용한다는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었다. 총을 사용한다니. 그런 다양한 준비가 된다면 비싼 게임기에도, 싱글 패키지임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단한데요. 총이라니. 게다가 이런 잠입 액션이라면... 정말 대단하겠는데요.” 놀라는 진성의 반응에 진팀장은 조팀장과 곽팀장을 보면서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게이머에게서 좋은 반응이라면 당연히 게임 자체에 매력이 있다는 얘기였다. “아직 확실한 결정은 하지 않았지만 꼭 총기류의 무기를 사용할 필요는 없도록 할 예정이다. 자신 있다면 검 하나만 가지고 최고의 테러리스트를 상대할 수 있도록 만들 생각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잠입 액션에 익숙하고 그 실력이 인정되면 자신이 스스로 무기를 개조할 수 있는 능력이나 함정을 팔 수 있는 능력, 크리티컬 공격 등의 스스로 알 수 있는 레벨 업이 가능하도록 만들어 꾸준히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들면 게임으로서 충분히 그 승산이 있다고 믿는다. 어떠냐?” “와... 놀라서 말도 안 나옵니다. 그런 게임이라면 아마도 게임을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려고 안달일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의 그 가상현실에서 그런 액션과 미션 플레이가 가능하다면 와.... 정말 끝내주겠는데요.” 진팀장은 보기 드문 진성의 흥분하는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그래? 백문이 불여일견이지. 자, 테스트 해 보자.” “진성아, 준비 됐냐?” 조팀장의 목소리에 진성은 대답했다. “네, 준비됐습니다.” 곧 어두워졌다가 밝아진 곳은 자소 소프트 빌딩의 지하 도장이었다. 도장은 도장인데 그냥 빈 도장이 아니었다. “아니.......” “마음대로 골라라. 일단 연습부터 해야지.” 진성의 눈앞에는 무기 거치대가 있었다. 많지는 않았지만 반질반질한 빛이 나는 진짜 권총을 비롯해서 개인 화기가 진열되어 있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과 같았다. 진성은 앞으로 나가 한번 힐긋 쳐다보고는 작은 것 중에 각 손에 하나씩을 골랐다. “와.... 정말 진짜 총 같잖아. 그런데 생각보다는 가볍네.” “진성아, 네가 고른 것은 KAR-5 와 MTI5KA 다. 요즘에도 사용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실내용으로는 충분히 괜찮겠지. 하긴 나도 그 총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까. 자, 연습 사격 한번 해 볼까? 앞에 표적이 나타날 테니까 한번 맞춰봐.” 조팀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반대쪽 도장의 벽에 사람 모양의 사격 타겟이 생겼다. 진성은 곧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어.... 발사가 안 되네. 조팀장님?” “....... 장전은 했냐?” “어떻게 하는 건데요?” “..........휴.. KAR-5 중심부근에 옆으로 뛰어나온 검은 강화 플라스틱 있지? 그거 찰칵 소리가 날 때까지 뒤로 당겨. 그래. MTI5KA 도... 그렇지. 그래. 이제 한번 사격해 봐.” 진성은 조팀장의 설명에 따라 장전한 뒤에 오른손에 KAR-5를 들고는 목표물을 향해 조준하고는 방아쇠를 당겼다. “타타타 타타타......” 순식간에 총구가 위로 향하자 진성은 급히 방아쇠에서 손가락을 뗐다. 처음 두, 세 발 빼고는 모두 과녁을 벗어났다. 하지만 진성은 손에서 느껴지는 탄환이 발사될 때의 그 떨림을 잊을 수가 없었다. 진성은 다시 오른손을 들어서는 과녁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타타타 타타타 타타타...” 역시 총구는 곧 위로 들리고 말았다. 이번에는 알고 있었기에 힘을 줬지만 총구가 위로 올라가는 순간적인 힘은 대단했다. 탄환을 다 사용했는지 총알은 더 이상 나가지 않았다. 총을 쏠 때는 몰랐지만 옆으로 튕기는 탄피가 생각난 진성은 정말 영화와는 비교가 되지 않게 실감나는 것을 느꼈다. “와....... 이 느낌.. 끝내주는데요.” 냄새는 나지 않지만 왠지 화약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진성은 곧바로 MTI5KA를 왼손으로 들고는 과녁을 맞추고는 방아쇠를 당겼다. “타타타타타타타타타타타타타타타!” “이야.... 와....” 순식간에 탄환이 다 발사되어 버렸다. 진성은 놀랐다. 앞에 사격했던 총은 세발씩 끊어서 나갔는데 뒤의 총은 그야말로 한꺼번에 드르륵 하며 다 나가버렸다. 놀랐지만 여전히 손에 남아있는 그 발사할 때의 반동 느낌과 튕겨 나가는 탄피를 보며 정말 기분이 좋았다. 총 쏘는 것 자체가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조팀장님! 끝내줍니다. 와.... 정말 대단한데요.” 처음 사격을 해 본 진성은 정말 총을 쏜다는 게 얼마나 박진감 넘치는 지, 이제야 이런 경험을 했다면서 아쉬워했다. 조팀장은 그런 진성을 보며 한편으로는 가상현실에서의 총의 구현이 성공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에서의 그 총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에 이르자 약간은 씁쓸해졌다. “진성아, 총을 여러 개 바꿔가면서 연습해 봐라. 아무 곳이나 총을 쏴도 상관없으니까. 모르는 게 있으면 총을 가지고 ‘도움말’이라고 말하면 아마도 총의 이름이나 총을 사용하는 방법등을 알 수 있을 테니까 사용하고. 오늘은 총에 대한 적응 테스트를 하기로 하고 내일이나 실제 미션 플레이를 해 보자. OK?" “네, 조팀장님.” 진성은 곧 이 총, 저 총을 들고는 계속 도움말을 외치며 보다가 옆에 쌓인 탄창을 설명대로 갈아 끼우기도 하면서 도장을 벌집으로 만들었다. 몇 가지 되지 않는 총이었지만 탄창을 계속 갈아가며 사격을 하자 벽에는 총탄이 박힌 자국으로 도장은 몸살을 앓았다. 진성은 한참을 흥분 상태에서 총을 난사한 후에야 사격이 얼마나 손에 무리를 주는지를 알게 되었다. 진성은 테스트를 끝내면서 내일 있을 실제 미션 플레이가 기다려졌다. 저런 무기들을 사용할 수 있다니. 그런 생각을 하다가 만약 실제로 그런 총이 나돌아 다닌다면 정말 위험하겠다는 생각까지 미쳤다. “이야... 대단하기는 하지만...... 휴....” 그리고 내심 자신이 무술을 배워도 이런 총을 든 사람에게는 어쩔 수 없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사부 유조는 어떨지 궁금했다. 제 2차 프로 리그의 개막 일정이 결정되었다. 이미 발표되어 있었지만 운영위원회는 공식적으로 다시 발표했다. 이번 프로 리그의 메인 스폰서는 LQ 전자로 결정이 났다. 또한 리그 규모가 늘어나 웨스턴, 이스턴 양 리그 공히 10개 팀으로 구성되어 5월까지 열띤 경기를 펼치게 되었다. 1차 리그와 같이 각 리그 당 상위 4개 팀을 가려서 토너먼트를 통해 리그 우승을 결정하고 이어서 골드 시리즈를 통해 최종 우승을 결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최종 우승팀과 준우승팀, 리그 준우승 팀 두 팀이 중국, 일본과 같이 하게 될 메이저 리그에 진출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일단 공식적인 발표가 나자 한동안 잠잠하던 문명 온라인 관련 인터넷 사이트들은 엄청난 히트수를 기록하며 다시 들끓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지난해 특별 이벤트 매치의 우승과 준우승자가 소속된 자소 소프트의 프로팀이 참여하기로 해 특히 게이머들의 관심을 끌었다. 게임 타이틀에 게이머의 닉네임이 들어갈 정도인 게이머 스키피오와 그의 유일한 라이벌이라고까지 칭해지는 한신의 리그 참가는 많은 반향을 몰고 왔다. 그 중에서도 지난해 승률왕과 다승왕이 공히 각각 스키피오와 한신에 대한 복수전을 선언해 더욱 더 열기를 달궜다. 개막이 일주일 남짓 남았기 때문에 진성과 현준은 문명 온라인 영웅 스키피오의 연습에 열을 올렸다. 지금까지의 전략 연구를 점검하기도 했고 새로운 상황에 대한 새로운 대처법을 서로 의논하기도 했다. 진성과 현준은 프로 리그가 시작된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긴장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진규는 하루하루 프로 리그의 개막이 다가오자 밥맛을 잃어버리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등 긴장 때문에 컨디션 조절도 어려웠다. “진규야.... 너 요즘 많이 긴장 되냐?” “.....네, 현준이 형.” “너도 실력... 많이 좋아졌잖아.” “........ 그래봐야 현준이 형, 진성이 형에게 제대로 이겨보지도 못하잖아요.” “뭐? 이 녀석이 정신을 못 차렸네. 나와 진성이는 작년 최종 승자라고. 나와 진성이가 문명 온라인 연습한 지 8개월째인데... 이제 석 달 정도 연습한 네가 그리 쉽게 따라오리라고 생각했냐?” “저는 정말 열심히 했다구요. 정말요..” 진규의 열심히 했다는 말에 현준 역시 인정해야했다. 현준 자신은 진규에 비하면 정말 놀면서 연습했다고 봐야 하니까. 진성이라는 걸출한 연습 상대와 같이 전략을 연구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면 현준 자신 역시 그리 실력 좋은 게이머가 아니었으리라. 현준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진규에게 말했다. “진규야, 네가 열심히 한 것은 인정한다. 네가 아직 나와 진성이를 제대로 상대할 만한 실력이 안 되지만 그것은 상대적이다. 네가 나와 진성이를 잘 알지만 그만큼 나와 진성이도 너를 잘 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알겠냐? 그만큼 네가 우리를 이기기 힘들다는 말이다. 내가 보장한다. 너한테 쉽게 이길 상대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알겠냐? 그렇게 풀죽어 할 필요는 없다. 게다가 초반에 조금 지더라도 걱정마라. 나와 진성이 있는 한 초반에 그리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마음 편하게 먹고 네 실력만 제대로 펼치면 아마 사람들은 자소 소프트에 또 다른 실력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테니까. 알겠지?” 현준은 진규에게 힘내라는 말을 하면서 예전에 진성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내가 보장한다는 말을 다시 중얼거린 현준은 피식 웃고야 말았다. 그 때 진성의 마음이 지금 자신의 마음과 비슷하리라 생각했다. 새삼 진성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준비 됐냐?” “예, 물론입니다.” 진성은 로플팀의 요람으로 와서 밀리터리 아트의 미션 플레이 테스트를 시작했다. 모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체크가 끝난 뒤에 PVR-2에 탑승해서 곧바로 가상현실로 접속했다. 눈앞에 보이는 곳은 빌딩의 외부였다. “어.... 와....” 진성 자신의 복장이 바뀌었다. 정말 군인과 같은 옷에다 군화까지. 군화는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투박한 모양에도 불구하고 나쁘지는 않았다. 자신이 고른 총 KAR-5 와 MTI5KA도 옆에 놓여 있었다. 탄창은 군복 위에 입은 조끼에 꽤 많은 양이 들어가 있었다. 탄창의 무게만도 굉장했다. 진성은 몰랐지만 원래는 쉽게 탄환을 자동 장전되게 만들려고 했지만 이왕 현실적이니까 탄창까지도 제대로 구현하기로 했던 것이다. KAR-5는 길이가 대략 35cm 정도여서 굉장히 짧았다. 9mm 탄환을 쓰고 무게는 2kg을 넘지 않았다. 탄창 하나에 15발이 들어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탄환이 부족할지도 몰랐다. 삼점사가 기본 설정이어서 5번 방아쇠를 당기면 탄창 하나를 바꿔야 했다. 이런 점을 감안해서 탄창 하나에 30발을 넣은 탄환도 준비되어 있었다. 총신이 짧은 만큼 반동에 약하고 조준해서 맞추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실내 근접용에서는 그 편리함과 분당 1000발에 달하는 발사속도로 인해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다. MTI5KA는 KAR-5보다 더욱 짧아 30cm도 채 되지 않았다. MTI5KA의 가장 장점은 가볍고 다양한 환경에서도 작동이 용이하고 웬만한 충격에도 잘 견디는 점이었다. 역시 실내 근접전에서 그 위력을 발휘했다. “진성아, 오늘의 미션은 건물 내에 있는 테러리스트들의 완전 소탕이다. 제한 시간은 1시간이다.” “네? 완존 소탕이요? 한 시간 만에 할 수 있을까요?” “네 왼쪽 건빵 주머니 한번 봐라.” “네? 건빵 주머니?” “아.... 왼쪽 주머니 밑에 커다랗게 달린 주머니 그 안에 뭔가 있을 거다. 그래.. 그거..” 진성이 꺼낸 것은 위치 추적기였다. 시간의 절약을 위해 테러리스트들의 대략의 위치를 가르쳐 주는 장치였다. 하지만 대략적인 위치라서 그대로 믿었다가는 오히려 당할 수도 있었다. 조팀장은 이런 저런 점들을 진성에게 하나하나 가르쳐 주었다. “상대 테러리스트들의 난이도는 하급이니까 그리 걱정하지 말고 실력 발휘 한번 해 봐라.” 진성은 위치 추적기를 조끼에 있는 주머니에 넣고는 양 손에 총을 들고 천천히 입구로 걸어갔다. 추적기를 꺼내 대략적인 위치를 확인한 후에 안으로 돌입했다. 아무도 없는 1층을 거쳐 2층으로 계단을 통해 올라갔다. 가상현실에서의 움직임 자체가 게이머 자체의 체력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기에 계단을 빠르게 뛰어서 올라갔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와는 달리 그리 심한 부담은 아니었다. 추적기를 꺼낸 진성은 2층에 여러 명이 있음을 알았다. 양 손의 총을 장전해서는 언제라도 쏠 수 있도록 사람 높이로 총을 겨누면서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머리는 현실이 아니라는 신호를 계속 보냈지만 몸은 그렇지 않았다. “휙.. 타타탕 타타타, 타타타타타!” “털썩!” 뭔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자 곧바로 진성은 사격을 개시했고 바로 땅으로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진성은 다가갔다. 테러리스트였다. 그런데 정말 사람과 비슷했다. 상처 자체는 그리 커 보이지 않았지만 진성은 자신이 정말 사람을 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정말 사람을 죽인 듯했다. 그 순간이었다. “타타타 타타타 타타타, 타타타타타타타타타” 자기 옆의 벽에서 불꽃이 튀었다. 진성은 생각도 하지 않고 옆의 사무실로 뛰어들었다. 보통의 사무실이어서 각 개인마다 시스템 책상들이 놓여 있었다. 어느 정도 은폐할 수 있었다. 진성은 몸을 보았지만 다행히 상처 같은 것은 없었다. 더 이상 사람을 죽였다는 생각은 진성의 머리에 있지 않았다. 단지 지금 상황이 좋지 않다는 생각만을 했다. 사무실의 출구를 향해 분명히 테러리스트들은 총구를 겨누고 있을 테고... 그러면 이 사무실에서 빠져 나가기가 힘들 것이다. 진성은 한동안 고민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 순간이었다. “데구르르르.... 피쉬이익!” 뭔가 새는 소리가 나더니 온통 연기로 가득했다. 진성은 영화에서 테러 진압하는 경찰 특공대의 대응할 때 이런 장면이 나왔음을 기억했다. 게다가 조명도 나가버렸다. “.... 이런.. ” 조금 있으니 레이저 사이트를 단 테러리스트들이 한 둘 보이기 시작했다. 진성은 자신이 마치 무슨 테러리스트고 상대가 진압부대처럼 느껴졌다. 테러리스트들은 아주 조직적이어서 숫자를 줄이기도 힘들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아무 힘도 쓰지 못하고 당할 것 같았다. 레이저 사이트를 보면서 진성은 소리를 내지 않고 옆으로 이동했다. 밖에는 모르겠지만 안으로 들어온 테러리스트들은 모두 4명이었다. 앞에 두 명이 수색하는 범위를 둘로 나누었고 뒤의 두 명은 앞의 두 명을 보호하면서 그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다. 진성은 조금씩 뒤쪽으로 돌아서 다가갔다. 그리 넓은 사무실이 아니었기에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진성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옆으로 점프하며 양손의 총으로 사격을 시작했다. “타타타 타타타.. 타타타.. 타타타타타타타타타...” 다행히 사격으로 1명이 다친 듯했다. 하지만 진성의 위치는 완전히 드러나서 집중 사격을 받았다. “타타타 타타타 타타타, 타타타타타타타 타타탕..... 타타타타!” 진성은 급히 탄창을 갈아 끼웠다. 그리고 바로 장전했다. 진성은 위치가 알려졌기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진성은 총을 자신이 이동할 수 있는 오른쪽으로 던졌다. 그리고 몸에 경을 모아서 단거리지만 아주 빠른 속도를 자랑하는 천쾌보(天快步)를 펼칠 준비를 했다. “턱.. 쿵.. 타타타 타타타 타타타타타타 타타타... 타타타...” 총이 떨어지는 소리가 나자 테러리스트들은 일제히 그 방향으로 총을 쏘았고 진성은 앞으로 총을 쏘면서 엄청난 속도로 돌진했다. 남은 3명중 한명이 역시 총에 맞았고 진성은 그 순간 그 공격거리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회전하면서 어깨와 등을 이용한 용형파로 한 명을 완전히 날려버렸다. 그리고 끝나지 않은 회전력을 살려서 팔꿈치로 남아 있던 마지막 상대의 옆구리를 강타해 버렸다. 일격필살이었다. 진성은 숨을 내쉬었다. 정말 대단했다. 이런 서바이벌이나 진압 작전 같은 것을 영화를 제외하고는 직접 본 적도 없었던 진성에게는 정말 압권이었다. 하지만 진성은 내쉬던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측면 6m 떨어진 곳에서 한명의 테러리스트가 레이저 사이트로 자신의 가슴을 비추며 조준하고 있음을 보았다. 숨이 턱 막혔다. 어떻게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순간에 뭔가 자신의 가슴을 꿰뚫고 지나감을 느꼈다. 총성은 그 다음에 들렸다. “탕! 으윽!” 점점 어두워지는 듯한 시야. 정말 죽음이 생각났다. 갑자기 밝아진 시야에 진성은 눈을 떴는데 도장이었다. “진성아, 너도 힘들구나. 하하하하..” 조팀장의 말소리에는 기쁨이 가득 묻어났다. 진성은 자신이 그 미션에 실패했고 게다가 죽었다는 것까지 알았다. 정말 기분이 더러웠다. “진성아, 어떠냐?” 다 같이 회의실에 모인 가운데 진팀장이 진성에게 물었다. 진성은 그 후에도 몇 번 도전했지만 제일 높이 올라간 것이 5층이었다. 그리고 매번 미션을 실패할 때마다 진성은 가상현실에서 죽었다. 특히 마지막에는 머리에 총을 맞았다. “..... 정말 어려운데요. 너무 어려워요. 하지만 그만큼 재미는 있습니다. 와... 정말.. 그 정도가 하급 난이도라면 상급은 얼마나 어려울 지.... 정말.. 대단해요.” “... 하급이라고? 무슨 말이냐? 네게는 특별히 상급으로 테스트 했는데.... 뭐, 물론 최상급의 난이도도 있지만.” 진성은 진팀장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팀장을 봤지만 조팀장은 진성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진성은 더 이상 조팀장을 보지 않고 말했다. “.... 음.. 다른 것은 좋은데 너무 리얼한 지 처음에 진짜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게임으로 인해서 살인이나 총을 쏘는 것에 대한 간접 경험이 되어 사회 문제가 되지 않을지. 게임에 몰입하다 보니 그런 것은 조금 지나니 별 상관없었지만 나이 어린 학생들이 이런 게임에 심취한다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맞다. 우리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바로 이 게임기의 보안 강화와 판매 대상의 연령을 제한하는 방법이다. 제대로 된 성인이라면.. 충분히 가능하겠지?” 진팀장이 말한 보안강화란 게임기의 구입자만이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 그런데.. 이 정도의 게임을 정부가 인정할지? 이런 특수부대나 다름없는 실전을 방불케 하는 게임인데....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진성아, 이 게임의 내용은 정부에서도 알고 있다. 게다가 어떻게 들었는지 가상현실을 이용해서 여러 상황을 설정해 놓고 직접 특수부대원들이 그 상황에 대한 훈련을 하면 좋겠다는 군의 요청이 있어서 약간의 테스트를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가상현실 시스템은 군이나 다른 실전 부분에 있어서 득이 아니라 손실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진팀장은 말을 하다가 곽팀장을 바라보았다. 그 눈짓에 곽팀장이 그 다음 말을 이었다. “정부에서도 알고, 군대에서도 알고 있지만 가상현실의 가상성 때문에 전격적인 도입을 할 수가 없게 됐다. 보통 사람의 경우에 가상현실에서의 적응력은 현실에서의 힘과 스피드의 신체 능력과 별 상관이 없다. 확실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현실의 신체 능력과 가상현실에서의 신체 능력은 다르다. 자신을 거의 완전히 컨트롤할 수 있는 유조 어르신 같은 경우와 너를 예외로 치면 모든 테스터들이 자신의 육체적 능력과는 별 상관이 없는 가상현실 적응력을 가졌다. 이 말은 현실과 가상현실 내의 몸은 서로 다르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 상황에서 가상현실에서 이런 환경을 통해 특수부대 부대원의 실전을 연습한다는 말은 실제 몸으로 움직여야 하는 상황에서의 대처 능력을 오히려 떨어뜨리고 만다. 몇 명의 특수부대원들을 대상으로 실험했는데 어느 정도 가상현실에서의 작전능력이 향상되자 현실에서의 작전 능력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이런 이유로 군대에서의 관심이 시들어 버렸지. 물론 가상현실에서의 그 능력치를 조정할 수 있지만 그것은 단순한 수치적인 조정이거든. 그런 조정이 세세한 신체의 밸런스까지 조정해 주지는 않으니까.” 곽팀장의 설명에 진성은 이해했다. 하지만 곧 다른 의문이 생겼다. “그러면........ 보통 유저에게도 문제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런 문제가 있다면 당연히 군인 뿐 아니라 실제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도 영향이 미칠 것이다. “그렇지. 하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육체적 능력을 그렇게 극한까지 끌어올릴 필요가 없기 때문에 이런 게임을 한다고 해서 평소 생활하는데 문제가 생길 리는 없지. 오히려 활력이 생기지 않을까? 그 문제는 여러 연구기관에 의뢰해 봐야할 문제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리 위험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결국 밀리터리 아트의 가상현실은 현실의 유저 자신이 그대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가상세계에 또 다른 자신이 생기는 것과 같았다. 유저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일종의 아바타의 발전형이라고 봐야했다. 진성은 그제야 밀리터리 아트가 게임으로서 제대로 탄생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걱정도 있었다. 자신과 유조 어르신은 어떻게 된 원인인지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그 현실과 가상세계의 벽을 허문 존재였다. 특히 자신은 벽을 허문 정도가 아니라 아예 벽이 없었고 가상세계에서는 가히 모든 것을 할 수가 있었다. 원인을 모르는 것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두려움을 가져다 줄 뿐이다. 진성은 사부 유조에게로 가면서 생각에 잠겼다. 요즘은 정말 생각할 거리가 많았다. 전혀 다른 세계인 무술가들의 세계, 사부 유조의 선택에 대한 말, 그냥 흘려버릴 수 없는 자신과 가상현실과의 특이한 관계. 진성은 밀리터리 아트의 미션 플레이 테스트를 하면서 느낀 총을 가진 사람과의 대결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사부 유조의 집으로 가면서 골똘히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제 곧 시작되는 프로 리그에 전념할 생각이지만 마음의 호수에 던져진 돌로 인한 파문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음... 네가 알고 싶은 것은 결국 총을 가진 자와의 대결에서 어떻게 하느냐는 말이냐?” “네, 그렇습니다, 사부님.” “하하하하... 이제 네가 정말 별의 별것을 다 물어보는구나. 그래, 네가 총을 든 누군가와 싸웠느냐?” 사부 유조는 진성의 말에 박장대소 웃으며 말했다. 유조는 뜬금없이 나타나서는 총을 가진 사람에게는 어떻게 이기냐는 소리에 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진성은 진지했다. “사실, 게임 테스트 하면서 그 가상현실 속에서 총을 든 상대와 대치했는데... 그 순간 맨몸이라면 어떻게 할 수 있을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진지한 진성의 목소리에 그제야 사부 유조는 웃음을 그쳤다. “진성아, 네가 무술을 배우는 것은 누군가를 이기는 것이냐?” 유조는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진성에게 물었다. “........ 이기기 위한 것도 배우는 이유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해서 좋구나. 물론 제압당하지 않기 위해서지. 대답은 여러 개가 있겠지. 그 중에 가장 좋은 것은 무술의 수련을 통해서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이겠지. 상대와의 조화를 통하거나, 아니면 상대를 완전히 제압해서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는 거지. 하지만 일단 그런 상황이 발생했다면....” “.... 했다면?” “... 항복해야지. 하하하하하...” “네?” 침까지 삼키며 기대했던 진성은 맥이 딱 풀렸다. 항복이라니. 이런... “진성아, 무술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란다. 무술은 다른 사람들과 조화롭게 살아가고 자신 스스로를 갈고 닦기 위한 것이지 모든 사람과 모든 상황 속에서 상대를 이길 수 있는 만능이 아니다. 항복해야한다면 항복해야지. 알겠느냐?” “네, 사부님. 만약에 도저히 항복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진성은 미련이 남는지 사부 유조에게 물었다. “항복할 수 없는 상황이라..... 좋다. 진성아, 도장으로 가자꾸나. 네게 보여줄 게 있다. 그 정도면 아마 항복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모면할 수 있을 게다.” 진성은 사부 유조와 함께 도장을 갔다. 도복으로 갈아입은 뒤에 도장의 가운데에 서 있었다. “진성아, 네가 오른손으로 총의 방아쇠를 쥔다고 생각해봐라. 그리고 언제라도 네가 원하는 순간에 나를 겨누어 손가락으로 발사해라.” 진성은 사부 유조가 무엇을 할지 몰랐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사부의 지시에는 뭔가 이유가 있었음을 기억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따랐다. 진성은 오른손을 앞으로 뻗어 마치 권총을 쥔 모양을 취했다. 그리고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사부 유조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아니.....”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사부 유조는 진성의 조준에서 한걸음 벗어나 있었다. 진성은 놀랐지만 다시 조준해서 발사했다. 여전히 쏘기 직전 사부 유조는 한걸음 조준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 타이밍이 절묘했다. 진성은 계속 사부 유조를 향해 쐈다. 하지만 단 한번도 사부 유조를 맞출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사부님, 어떻게.. 어떻게 된 겁니까?” “아.. 이거.. 그냥 네가 총을 쏘겠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그냥 한걸음 옆으로 옮긴 것뿐이다. 하하하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사부님?” 이것은 무슨 무술의 경지가 아니었다. 자신의 의지를 알다니. 자신이 직접 하지 않았다면 사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 궁금하냐? 진성아?” “네, 사부님.” “좋다. 어차피 해야 할 공부였으니까. 오늘 청경(聽勁)에 대해서 배워 보자.” 사부 유조는 진성에게 다가와서 겨우 50cm 정도 떨어지게 해 놓고는 어떤 방법으로든 공격해 보라고 했다. 머뭇거리던 진성은 사부를 믿고서는 오른손 하나만으로 공격했다. 하지만 곧 자신의 공격이 사부에 의해서 간파되고 있음을 알았다. 왼손까지 동원했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모든 움직임을 사부는 완전히 읽고 있음을 알았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까지 공격했지만 정말 허공을 상대하는 것 같았다. “휴... 허헉... 헉헉... 이게.. 바로 청경입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신기하냐?” “휴..... 휴... 신기합니다, 사부님.” “청경은 말 그대로 경을 듣는다는 말이다. 경이라는 것은 수련의 힘을 말하기도 하지만 상대 그 자체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상대의 움직임을 듣고 보는 것이 바로 청경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 그 청경을 익힐 수가 있습니까?” “하하하... 익힌다라... 청경은 어떤 기술이 아니란다.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야지. 일단 좋은 방법은 있지. 자 팔을 들어 내 팔에 대 보거라.” 사부 유조는 자신의 오른팔을 들더니 진성이 팔에 대어 교차시켰다. “이제 그 팔을 밀어 봐라.” 진성은 사부의 팔에 갖다댄 팔에 힘을 줘서 밀었다. 하지만 끄덕도 하지 않았다. 벽을 미는 느낌이 아니라 힘을 줄 때마다 뭔가 힘이 사라짐을 느꼈다. “아..... 아니.. 이런..” “알겠느냐? 나는 조금 전에 네 팔에 내 팔을 대고 경을 읽어서 그 경을 방해한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 굉장히 신기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진성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조금 전에는 청경과 더불어 화경(化勁)을 쓴 것이다. 화경과 청경은 배우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하니까 그리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아라. 보통 청경이라면 직접 닿아야만 가능하지만 어느 정도 경의 수련이 극에 다다르면 일정 범위 내에서는 상대의 움직임을 알 수가 있다. 내가 네 움직임을 알 수 있었던 것도 그 청경 덕분이었다. 상대가 총을 가지고 나를 겨누고 있을 때 나는 상대의 움직임을 알기 때문에 쉽게 맞지 않겠지. 그러면 상대하기란 어렵지 않겠지. 하지만 전쟁처럼 엄청난 화력이라면...... 생각해 볼 것도 없이 항복해야지. 하하하하.....” 그 후로 진성은 화경과 청경에 대한 기본부터 배웠다. 특히 팔극진결 상의 수련에서 화경에 대한 부분이 있어 그곳을 집중적으로 연습했고 사부 유조와의 실전으로 물리적인 화경의 의미는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청경은 어려워 아직 그 기본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약간 실망하는 진성에게 사부 유조는 그 청경을 제대로 익힌 사람을 자신이 평생 살아오면서 5명도 채 보지 못했다는 말로 다독거렸다. 무릇 모든 것이 마찬가지겠지만 이런 무술의 경우에는 더더욱 급히 익힌 것은 제대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사부 유조는 진성이 제대로 된 기초를 닦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점점 시간이 지나자 자신보다 강한 상대의 공격을 어렵지 않게 흘려버릴 수 있을 정도로 화경을 익힐 수 있었고 신체가 닿는다면 상대의 공격 방향이나 힘의 세기 등은 간파할 수 있을 청경을 익힐 수는 있었지만 사부 유조처럼 총을 피하는 수준은 요원했다. 더구나 진성은 평소 차분한 자신의 성격과는 달리 무술에서는 공격을 아주 좋아했다. 발경 중에서는 단경인 촌경과 고급 기술인 침투경을 아주 좋아해서 사부 유조가 그런 기술은 절대 사람에게 쓰면 안 된다는 말을 하게 만들 정도였다. 드디어 2차 프로 리그 개막일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프로 리그 개막은 새로 개관한 LQ전자의 게임센터이자 전시관인 게임큐브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리그 개막과 더불어 첫 게임은 작년 우승팀인 삼선전자 프로팀과 올해 처음으로 프로 리그에 참여하는 한국전자 프로팀의 대결이 예정되었다. 삼선전자의 게임 센터인 슈퍼 센터보다 규모 면에서 거의 2배인 게임큐브는 관객 입장이 만 2천여 명이 가능했고 대형비전과 더불어 부대시설이 잘 되어 있어 가족들의 주말 나들이 장소로도 손색이 없었다. LQ 전자는 레포츠로서의 성공을 위해 처음부터 게임큐브를 디자인했던 것이다. 모든 프로팀의 프로 게이머들은 긴장했다. 이제 곧 3개월간의 대장정이 될 프로 리그가 시작된다고 하니 마냥 편할 수만은 없었다. 특히 처음 리그에 참여하는 프로 선수들은 그 정도가 더 심했다. 청룡 열차와 같은 놀이기구처럼 실제 겁나는 부분은 최고 높은 곳까지 천천히 올라갈 때였다. 선수들에게 프로 리그가 시작되지 직전이 가장 긴장되는 시간이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마지막 남은 점들을 점검하면서 곧 시작될 제 2차 프로 리그의 개막을 기다렸다. 3월 8일 저녁 6시, LQ 전자의 게임 센터인 게임큐브에서 문명 온라인 영웅 스키피오의 제 2차 프로 리그 개막식이 있었다. 참여가 결정된 프로팀들이 다 참석했을 뿐 아니라 유명한 연예인들도 다수 참석해서 자리를 빛냈다. 입추의 여지도 없이 꽉 찬 게임큐브의 관중석은 변함없는 문명 온라인의 인기를 짐작케 만들었다. 관중석의 좌석 하나의 크기와 그 공간을 크게 만들어 쾌적한 관람을 용이하게 만든 LQ 전자의 배려에 구경하러 온 사람들은 크게 기뻐했다. 운영위원회의 처음 계획과는 달리 지역 연고제는 채택되지 못했다. 아직 수도권에서의 인기가 다른 지방보다 월등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중간에 여러 게임들을 미리 준비한 지방의 도시들을 돌며 투어 게임처럼 치를 예정이어서 앞으로 지역 연고제를 위한 운영위원회의 의지를 느끼게 했다. 특히 자타가 공인하는 제2의 도시 부산은 유일하게 지방 기업으로 프로 리그에 참여한 부산유업으로 인해 그 인기가 급상승했다. 부산시의 도움과 폭발적인 시민들의 협조로 지방 최초로 게임 센터가 부산유업에 의해 세워짐으로써 가장 빨리 연고지로서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 가시적인 움직임은 아니었지만 부산에서의 게임 센터 건립은 다른 지방을 자극했고 운영위원회의 적극적인 지원에 점차 분위기는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프로 게임은 일주일에 3일 정식 게임을 치르는 날을 정했다. 수요일, 금요일, 일요일의 삼 일을 공식 게임 데이로 정해서 프로 리그의 게임의 대부분을 이 날에 소화하기로 결정했다. 수요일과 금요일은 저녁시간에, 일요일은 오후에 게임을 해서 관람하거나 시청하는데 문제가 없도록 만들었다. 2차 프로 리그는 1차와 마찬가지로 입장료를 받지 않았다. 운영위원회는 2차 프로 리그가 끝난 뒤 한국, 일본, 중국을 돌면서 치를 메이저 리그부터는 입장료를 받기로 공식 결정해서 발표했다. 어느 정도 유료화에 대한 이야기는 꾸준히 흘러나왔던 터라 그리 많은 반대는 없었다. 게다가 게임 센터에서 게임을 보는 것과 프로 선수들을 직접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해했다. 밋밋하게 끝날지도 몰랐던 프로 리그 개막식은 신생팀이 거함 삼선전자를 물리치는 파란을 일으킴으로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삼선전자의 강자이자 지난 리그의 다승왕이었던 게이머 정성진은 자기의 몫을 다 했지만 나머지 두 선수가 모두 한국 전자의 프로 선수에게 지고 말았다. 삼선전자는 1차 리그 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대단한 전력을 자랑했는데 첫 게임부터 신생팀에게 패배의 고배를 마시자 삼선전자, LQ 전자, 쌍룡은행, 자소 소프트의 4강을 점치던 전문가들을 긴장시켰다. 이어진 첫 주의 게임에서 자소 소프트를 제외한 나머지 2강인 LQ 전자와 쌍룡은행 마저도 뼈아픈 일격을 당함으로 문명 온라인 영웅 스키피오의 2차 프로 리그가 드디어 전국시대로 돌입했음을 알렸다. 신생팀들은 후발주자로서의 단점을 알고 있었기에 유능한 게이머를 데려다가 문명 온라인을 연습시키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문명 온라인의 숨은 고수들을 유심히 찾았고 그에 성공했기에 이런 초반 파란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각종 문명 온라인과 관련된 사이트에서 프로 선수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특히 사람들의 관심을 끈 것은 최초로 여성 프로 게이머의 출현이었다. 승률왕 게이머 사신인 김한석 선수가 있는 쌍룡은행에서 전격적으로 여성 게이머인 최유나를 발표함으로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게이머 최유나는 게이머 스키피오의 팬 사이트에서 우연히 쌍룡은행의 프로팀 관계자에 의해 픽업된 게이머여서 더욱 화제였다. 많은 프로 게이머가 각종 팬사이트에서 많이 영입이 되었는데 그 양이나 질을 볼 때 단연 으뜸은 스키피오 팬 사이트였다. 게다가 스키피오 팬 사이트 출신들은 그 게임 운영의 방법이 조금은 스키피오와 비슷한 두뇌 플레이를 했기 때문에 물량 중심인 게이머들보다 더 인기가 좋았다.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각 소속팀에 들어가 상대로 만나면 당연히 싸워야하는 프로 게이머들의 처지는 생각하지 않고 스키피오를 중심으로 스키피오 팬 사이트 출신인 게이머들을 모아 ‘스키피오 사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처음에는 팬 사이트를 중심으로 퍼진 스키피오 사단이라는 말이 점점 더 퍼지면서 방송 중계에서도 사용되기 시작해서 많은 사람들이 스키피오 사단이라는 말에 익숙해졌다. 게임이 진행되면서 새로운 스타 선수들이 나타났는데 대부분이 아마추어 문명 온라인을 통해 전체 게임의 운영에 관한 자신만의 전략을 정립한 후에 프로로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는 자소 소프트의 기린아 소(小) 스키피오 성진규도 포함되어 있었다. 진규는 초반 몇 게임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많은 관중들이 보고 있다는 부담감 때문에 이긴 게임도 놓친 경우가 있었다. 물론 그런 때에도 뒤에 워낙 막강한 듀오 게이머 스키피오와 한신이 있었기에 팀 승리에는 영향이 없었지만 진규 개인으로서는 힘이 빠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몇 게임 후에는 점점 적응을 하더니 소 스키피오라는 닉네임이 붙을 정도로 관중에게 어필을 할 수 있는 게임을 보여줌과 동시에 승리를 따내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일단 마수걸이 승을 따낸 뒤의 진규는 파죽지세였다. 가끔 고전해서 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현준의 웬만하면 지지 않는다는 말이 사실임을 진규는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 동안의 게임도 아주 즐겼지만 다가오는 금요일에 열리는 빅매치를 기대했다. 작년 이벤트 매치 이후에 가장 기대를 모으는 게임이었다. 바로 현재 양대 리그 통합 승률 1위인 자소 소프트와 1차 리그 전체 준 우승팀인 쌍룡은행의 맞대결이 바로 금요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양 팀 모두 선수 오더를 사전에 발표함으로써 예전 삼선전자의 과오를 방지했다. 두 팀 모두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게이머 스키피오와 게이머 사신이 마지막에 게임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팀 경기라서 세 번의 게임 중 두 번을 먼저 이기면 마지막 결과에 상관없이 승리가 결정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첫 경기인 소 스키피오 성진규와 유일한 여성 게이머인 최유나와의 대결에 관심을 가졌다. 그 게임에서 소 스키피오 성진규가 이긴다면 그 다음 게이머 한신에게 이길 쌍룡은행의 상대는 없었다. 사람들은 게이머 최유나가 성진규를 이기기를 간절히 바랬다. “이게 말이 돼? 내가 왜 져?” 진규는 스포츠 신문에 간략하게 난 기사를 보고는 화가 났는지 언성을 높였다. 현준은 슬며시 기사를 보더니 이해가 됐는지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당연하지. 네가 져야만 진성이와 그 게이머 사신 김한석의 대결을 볼 수 있을 테니까. 음.. 사람들은 내가 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네. 하하하하..... 진규야 네가 좀 져줘야 겠다. 하하하하..” 안 그래도 화가 나는데 옆에서 기름을 끼얹는 현준의 말에 진규는 한번 째려보고는 나가버렸다. 현준은 그런 진규의 모습에 배를 붙잡고 웃었다. 스포츠 신문에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라고 전제한 뒤에 게이머 스키피오와 게이머 사신의 빅매치를 보기 위해서는 게이머 성진규가 희생해야 된다는 논조의 짤막한 기사가 실렸다. 자신과 관련된 기사가 나면 어김없이 스크랩을 하던 진규는 그 기사를 보고는 화가 났던 것이다. “진규야?” “아, 진성이 형.” “음료수 먹을래?” “네...” 복도에서 음료수를 먹던 진성은 밖으로 진규가 씩씩거리며 나오자 음료수를 뽑아주었다. “뭐 기분 나쁜 일 있냐?” “사실은.....” 진규는 약간의 과장을 보태 스포츠 신문의 만행과 현준의 비인간적인 처사에 대해 한참동안이나 일러 바쳤다. 한참을 듣던 진성은 씨익 웃더니 말했다. “네가 이기면 되잖아. 보기 좋게 네가 이겨 버리면 되잖아. 뭘 그렇게 화를 내?” “네? 그래도.............” “나는 네가 져서 게임을 하기 원하지 않아. 사실 이번 리그 동안 한번도 게임을 안 했으면 좋겠다. 알겠냐? 그런 고민할 시간 있으면 연습 좀 해라. 내가 해 보라고 했던 것, 다 해 봤냐?” 진성은 자신과 같은 로마 문명을 하는 진규를 위해 아직까지도 다른 사람들이 완벽하게 소화해 내지 못하는 자신만의 기법인 군대강화법에 대한 몇 가지 비결을 가르쳤다. 말로는 간단하지만 여러 상황에서 그것을 정확하게 구사하려면 엄청난 연습이 필요했다. “...저.. 아직.. 다...” “이 녀석아, 그런 거나 열심히 해 놓고는 고민해라. 사실, 프로 게이머이지만 요즘은 다른 곳에 더 신경이 쓰인다. 하하하하.. 제발 내가 게임하지 못하게 만들어라. 알겠냐?” “네, 진성이형.” 진성은 장기 레이스인 프로 리그가 열리는 수요일, 금요일, 일요일 때문에 일주일에 한번 유조 어르신 댁에 월요일에 갔다. 그리고 예전에는 일주일에 두, 세 번은 했던 밀리터리 아트의 테스트도 한 번으로 줄였다. 원래는 프로 리그 중 테스트는 하지 않기로 했지만 진성의 고집으로 한번은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것은 매니저 서재필과의 조건을 건 약속이었다. 그 약속이라는 것은 바로 지지 않는 거였다. 진성은 일단 어느 정도 경지에 들어섰다고 생각해서 계속하는 연습이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비슷한 실력에서는 연습량이 승부를 가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진성의 연습은 경기 감각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진성의 관심과 적극적인 참여로 인해 밀리터리 아트의 미션 플레이의 개발은 힘을 받았다. 특히 진성 만이 할 수 있는 가상공간의 추가로 3개의 미션 플레이를 할 수 있는 고층 빌딩, 항구, 공항의 공간을 만들어 어느 정도 미션 플레이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고층 빌딩과 항구, 공항에서의 전투를 꽤나 많이 클리어한 진성은 자신도 모르게 베테랑 특수부대 부대원과 다름없는 실력을 쌓게 되었다. “진성이 형, 나 잘 할 수 있겠지?” “자신을 가져라. 네 연습 상대가 누구냐? 비공식 문명 온라인 랭킹 1위, 2위가 바로 네 연습 상대다. 알겠냐? 그리고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된다. 알겠지?” 진규는 진성에게 물었지만 대답은 뒤에 있던 현준에게서 나왔다. 현준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너스레를 떨며 진규의 마음을 추스르게 만들었다. “네, 현준이 형.” 진성과 현준, 진규는 이준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는 게임큐브로 향했다. 이제 4시 30분이지만 미리 가서 게임기의 상태나 현장 분위기를 익혀 놓는 것도 꽤 게임에 간접적으로 도움이 되었기에 보통 한 시간 반이나 두 시간 정도는 미리 오는 것이 보통이었다. 가는 길에 진규는 사람들이 더 주목하는 게임이라서 그런지 평소보다 조금 더 흥분한 듯했다. 옆에 있는 사람을 붙잡고 하고 싶은 말을 하고서야 조금 진정된 듯했다. 확실히 게임큐브는 그 규모가 대단했다. 만 2천여 명의 관객이 입장할 수 있는 게임 센터는 게임큐브가 유일했다. 라이벌 회사인 삼선전자에 뒤지지 않으려는 LQ 전자의 자존심의 결과일지도 몰랐지만 팬들은 아주 좋아했다. 최신의 시설과 여러 명이서 같이 본다는 그 느낌, 직접 선수들을 볼 수 있다는 장점은 많은 사람들을 게임 센터로 불러 모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게임큐브에 들어가 선수 대기실로 바로 들어갔다. 아직 관중 입장은 안 된 상태였다. 진성과 현준, 진규는 가운데 설치된 무대로 올라갔다. 위에는 많은 조명들과 큰 비전으로 가득했다.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는 다시 선수 대기실로 돌아갔다. “진규야, 네가 이기면 진성이에게 가지 않으니까 최선을 다해라. 소 스키피오라는 그 별명값을 해야지. 안 그래?” “네, 현준이 형.” 진규는 자신의 상대가 프로 선수 유일의 여자인 최유나 선수임을 알고 있었다. 몇 게임의 최유나 선수 플레이 화면을 봐서 실력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실력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었다. 게임 플레이에 성격이 들어간 듯 여성 특유의 꼼꼼한 플레이를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발목을 잡아서 대담한 승부수가 필요한 곳에는 조금 약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탄탄해서 일단 말리면 쉽게 빠져 나오지 못해서 늪의 사신으로 불리는 게이머 김한석이 있는 팀 출신답다는 칭찬과 스키피오 사단 치고는 전략적인 면에 약하다는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쌍룡은행의 게이머 최유나는 문명을 일본으로 삼았다. 일본은 그리 약하지도 강하지도 않은데다가 감정의 앙금이 남은 이유로 프로 게이머들이 거의 선택하지 않은 문명이었다. 하지만 최유나는 그런 희소성의 일본 문명을 택함으로써 차별화에 성공했다. 게다가 상대적으로 연구가 적게 되었다는 장점을 업고 게임 성적에서도 나쁘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일본 문명의 특징은 다이묘로 대변할 수 있었다. 원래는 일본 전국시대 때 지방의 성주나 영주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문명 온라인에서는 일본 문명 전반에 아주 중요한 개념으로 다이묘를 사용했다. 그리스 문명이 초기 도시 국가로 시작한다면 일본 문명은 지방의 다이묘가 상당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리스 문명이 여러 국가라면 일본은 기본적으로 한 나라에서 왕권이 약해 중앙집권적인 힘이 집중되지 못했다. 그래서 초기 컨트롤이 조금 어려웠지만 아틀란티스보다는 나았다. 하지만 인구수 대비 군사의 규모가 가장 컸고 기본적인 대인 전투 능력이 발달한 상태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무력은 상당히 강했다. 그리고 평지가 아닌 지형이 험한 곳에서의 전투에 굉장히 익숙했기 때문에 변칙적인 공격에 아주 능했다. 또한 일반 백성을 제외한 사무라이라는 무사계급이 있어 사무라이 계급에 대한 컨트롤을 잘 한다면 문명의 발전이 아닌 초기에 아주 막강한 군사력을 가질 수 있었다. 또한 일본 문명을 선택한 게이머의 컨트롤이 없더라도 일본 문명의 일부 백성들이 해적이 되어 초기에 상대 국가를 찾아내고 끊임없이 상대를 약탈하고 괴롭히기 때문에 초반의 정찰에 대한 컨트롤과 시간 낭비를 줄일 수 있었고 해적을 잘만 이용하면 상대의 정보를 손쉽게 빼낼 수 있었다. 반대로 상대 게이머로 하여금 끊임없는 해적으로 인해 해안의 경비를 강화한다든지 초반에 해군을 양성한다든지 해서 자신의 빌더 오더를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보통 서양과 동양의 전쟁사에는 차이가 있었다. 또한 대부분의 전쟁사는 서양의 것을 다루었다. 그 주된 이유는 역사로서 다루기 위해 필요한 사료가 절대적으로 서양의 것이 많았다는 점이었다. 서양은 군대의 병력과 보급 등의 세세한 기록에서부터 승리의 요인 등을 서술하는 자료들이 많은 데 비해 동양은 단순히 어떤 장군이 승리했다는 기록 정도로 남아 있어서 재구성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런 면에서 문명 온라인의 여러 문명 중 비교적 동양권 문명이 약간 허구적인 면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한국과 일본 문명이 상대적으로 열세인 전력 차이를 줄이기 위해서 약간의 픽션이 추가된 것이다. 서양과 동양의 전쟁의 기질적인 면에도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보통 서양의 경우 전쟁 참여를 아주 명예로운 것으로 여기거나 그렇게 여기도록 만드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강했다. 특히 전쟁에서 겁이 나 도망치는 것은 엄청난 비겁자로 몰리는 이유였다. 그런 기질은 전술에도 영향을 미쳐 고대 서양의 전투는 여러 전법들이 존재했지만 그 일관된 점 중에 하나는 정면승부였다. 계략을 써 측면을 돌파할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일단 전투가 시작된 후 기병이나 다른 특수부대의 역할이었고 전투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보병으로 처음에는 정면 대결로 시작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막강한 밀집 중보병의 결집력과 돌진력이 강한 로마가 그 패권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런 결과로 서양에서 가장 중요시된 무기는 창과 검류였다. 하지만 동양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서양이 갑옷과 방패, 창 등을 들고 맞부딪쳐 싸우는 정면대결을 선호했다면 동양은 경보병이 화려하고 정교한 전법을 사용함으로 상대를 기만하거나 농락해 유인한다거나 먼 거리에서의 장거리 무기를 애용했다. 그래서 동양의 경우 최고의 무기는 활이었다. 물론 역사를 천편일률적인 하나의 결론으로 모으는 것은 대단히 위험스런 일이지만 문명 온라인은 그런 가정을 기본으로 삼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이제 곧 문명 온라인 영웅 스키피오 LQ 전자배 프로 리그의 3주차 경기, 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던 그 경기, 바로 쌍룡은행 대 자소 소프트의 경기를 중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아나운서 김동수입니다. 역시 해설에는 홍진호씨께서 수고해 주시겠습니다. 안녕하세요, 홍진호씨.” “네, 안녕하십니까?” “오늘 경기 참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빅 매치입니다.” “그렇습니다. 작년 이벤트 매치 이후에 처음으로 대결하게 되는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수 게이머 스키피오와 1차 리그 승률왕이었던 게이머 사신의 경기가 예상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렇군요. 예상은 어떻게 하시는지?” “오늘의 경기는 팀 경기입니다. 아시다시피 세 번의 게임 중 두 번을 먼저 이기면 게임이 끝나기 때문에 첫 경기가 굉장히 중요할 것 같습니다. 자소 소프트에는 게이머 스키피오와 게이머 한신이라는 걸출한 선수가 있기 때문에 제 생각이지만 승부는 자소 소프트가 유리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첫 게임에서 승리하고 승률왕 게이머 사신이 최고수 스키피오를 꺾는다면 쌍룡은행으로서는 다시 한번 도약이 가능할 겁니다. 하지만 첫 경기인 게이머 성진규와 최유나의 경기에서 최유나 선수가 진다면 게이머 사신까지 가기도 전에 승부가 끝나버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첫 경기가 전체 승부의 향방을 좌우할 것 같습니다.” “네, 오늘의 첫 경기, 바로 소 스키피오로 알려진 게이머 성진규와 유일한 홍일점 게이머 최유나 선수의 경기를 잠시 광고 듣고 생중계해드리겠습니다.” 오래 지나지 않아 게임이 시작되었다. 게임큐브 내의 조명은 어두워졌고 대신 접속기가 있는 무대와 초대형 비전들만이 빛을 냈다. 예상대로 로마 문명과 일본 문명이었다. 로마 문명이 많이 연구되었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상당히 강했지만 그만큼 상대도 많이 알고 있는 대표적인 문명이었다. 반면에 일본은 프로 게이머 중에서 거의 사용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지만 상대 역시 대처법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아 약간은 까다롭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있었다. 진규는 게임 시작되자 게임에 몰입할 수 있었다. 약간 들뜬 기분이었지만 문명의 초기 상태를 점검하면서 빠르게 게임 운영을 시작했다. 진규가 가장 시간을 많이 들이고 컨트롤에 신경쓰는 부분은 단 한번의 게임으로 게이머 스키피오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 버린 군대강화법이었다. 작년 이벤트 매치 이후로 로마 문명의 상대적인 우위를 가져온 전략이었지만 수많은 상황 속에서 제대로 그 효과를 내기란 쉽지 않았다. 더구나 효과가 없다는 말은 그 강화법을 위해 들인 시간과 컨트롤이 낭비였다는 것과 같아서 상대에게 열세가 되는 빌미를 제공했다. 진규는 군대강화법을 만든 사람에게 저자 직강을 들을 수 있어서 상당히 빨리 익혔지만 완성을 위해서는 아직도 많은 연습이 필요한 상태였다. 진규는 거의 모든 전투에서 효과를 볼 수 있는 군대강화법을 완성시키기 위해 서둘렀다. 또한 상대가 일본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초반 정찰에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게이머 최유나는 지도, 지형 자체가 완전히 다른 것임을 간파한 후에 재빨리 지방의 다이묘들을 불러 모아서 이것저것 지시하기 시작했다. 정찰 같은 것은 저절로 되는 일이라서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최유나는 상대 로마 문명이 완전히 정비가 되기 전에 기습을 한다는 생각으로 많은 군대가 아닌 한 군단 정도의 사무라이 부대의 양성을 준비했다. 일본은 상대적으로 초반 군대의 모집과 모집된 군대의 질적인 면이 아주 좋았다. 군대로 본다면 경보병 격인 사무라이들이 빠르게 로마로 진입해서 잘 정비된 도로로 엄청난 기동력으로 괴롭힌다면 상대의 컨트롤에 지장을 줄 수 있으리라고 최유나는 판단했다. 최유나는 정면 대결을 극도로 자제하고 철저하게 험한 지형으로의 유인을 통한 기습을 고집했다. 사무라이를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면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초반 상대 진영으로 가서 나중에는 죽게 되겠지만 어느 정도 로마 문명의 발전을 묶어 둘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 시간 동안에 최유나는 인구의 증가와 군사 훈련을 통해 그렇지 않아도 인구수 대비 병사 수가 가장 높은 일본의 장점을 극대화하기로 했다. 하지만 너무 무리한 경우는 오히려 역효과가 나기 때문에 단기전을 펼쳐야 하는 제약도 존재했다. “이야... 일본 문명은 거의 보지 못했는데...... 잘 한다..” “맞아. 나도 일본 해 봤는데.. 저 정도면 정말 잘하는 거야.” “그래도 로마 문명이 이기지 않을까? 조금 있으면 막강한 군대가 나올텐데......” “그렇겠지. 아무리 그래도 로마인데.....” 관람객들은 초반의 잠깐 소강상태에 빠지자 서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며 뭔가 일어날 것 같음을 느끼며 화면을 주시했다. “뭐지?” 진규는 시작하자마자 곧 바다를 통해 올라와 약탈을 하는 해적을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그러던 진규는 지방 도시 하나가 습격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군사적이나 경제적으로 요충지는 아니었지만 수도 로마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적 군대가 출현했다는 사실은 진규를 바짝 긴장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습격한 군대는 곧 사라졌다는 말에 진규는 곧 그 근처의 군단을 지방 도시로 보냈다. 좀 더 확실한 정보가 필요했다. 로마를 정복하려면 한니발처럼 로마 안으로 들어가 싸워야 한다는 말을 진성에게서 심각하게 들었던 진규는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빠르게 컨트롤하기 시작했다. 각 도시와 군의 요충지에 방어를 튼튼히 할 것을 지시한 진규의 발 빠른 대처에 그리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지만 자국 영토로 들어와서 마음대로 게릴라전을 펼치는 소규모 부대에 아주 감탄했다. 하지만 이런 소규모 군대라면 당연히 게이머가 없을 것을 예상했고 일본 문명에 군대강화법이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한 진규는 미리 예상한 몇 지점으로 적의 소규모 부대를 유인했다. 진규의 판단 자체는 아주 좋았다. 게이머와 NPC의 싸움이라면 게이머가 월등히 유리했다. 하지만 진규가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어서 생각 외로 피해가 늘었다. 바로 그 부대가 사무라이로 이루어진 부대라는 점이었다. 수가 적다는 점을 제외하고 일대일 능력에 있어서 가히 최강을 자랑하는 사무라이로 이루어진 부대. 진규는 예상보다 큰 피해에 조금은 동요했다. 게다가 군대강화법도 조금은 영향을 받아 평소 자신의 최고 효율에 미치지 못 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영토내의 불안 요소를 그대로 둘 수 없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진규는 사무라이를 이 정도로 초반에 빼내어 공격했다면 상대 선수도 약간은 무리수를 둔 것이라 판단했다. “정말 신경 쓰이네.” 진규는 계속 해안으로 밀려오는 왜구들의 움직임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가랑비에 옷 젖듯, 왜구들의 약탈을 처음에는 가만 두었지만 이제는 그대로 둘 수 없을 정도였다. 진규는 군단을 해안으로 전진 배치시켰다. 어느 정도 군대강화법도 끝난 시기였기에 약간의 여유가 생겨 해안선으로의 전진 배치는 그리 부담되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참았던 동안의 피해는 예상 밖이었다. 게다가 정찰을 통해서 상대의 위치를 알았지만 그 내부 상황을 알 수 없었다. 초반에 약간 시간이 뒤처졌다고 생각한 진규는 방어전이 먼저라고 결정했다. 해안에 방어벽을 쌓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여러 군단을 해안 근처로 보내 주둔시킴으로써 왜구가 쉽게 발호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곧 빠른 병력 이동을 위해 주요 해안으로의 도로를 정비했다. 수도 로마 근처에 주둔하는 군단들이 일이 생기면 바로 해안으로 갈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진규는 대규모 수송선을 비밀리에 만들었다. 수송선은 많이 만들었지만 실제 상대 영토로 갈 군대는 5, 6개 군단으로 할 작정이었다. 군대강화법이 완성된 지금, 10~12만 정도의 군대가 일본 문명으로 들어가 원하는 만큼의 분탕질을 한다면 초기에 당한 정도 이상은 충분히 타격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기대한 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사무라이 부대가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한 최유나는 모든 부대를 모으고 있었다. 여성 게이머로서의 실력은 이런 규모 있는 여러 부대를 지휘할 때의 그 섬세한 컨트롤이었다. 빠뜨리는 것 없이 세세하게 컨트롤해서 거의 틈을 보이지 않는 것이 바로 여성 게이머 최유나의 장점이었다. 게이머 최유나는 군대를 배에 싣고는 해적을 통해서 알아낸 상대의 영토로 서서히 원정길을 떠났다. 진규는 25만명 정도를 실을 수 있는 수송선에 12만명을 싣고는 일본으로 원정을 보냈다. 당연히 자신이 직접 가는 것이 아니라 군대강화법을 적용한 군단장 여러 명을 보냈다. 진규는 많은 부대가 원정하는 것처럼 상대에게 보여 상대가 쉽게 움직일 수 없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허장성세(虛張聲勢), 수상개화(樹上開花) 의 방법이었다. 25만의 병력이 상륙을 감행한다면 초반 공략을 준비 중이었던 상대는 절대 가만히 두지 못할 것이다. 진규는 확실히 처음의 손해를 이자까지 쳐서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작전이 오히려 발목을 잡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출발.” 게이머 최유나는 거의 모든 군대를 이끌고 원정길에 올랐다. 지금까지 모아서 훈련시킨 군대를 총동원한 최유나는 기본의 섬세하고 여성스러운 경기에서 조금은 탈피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이면에는 스키피오 사단과 스타일이 다르다는 약간 비난 섞인 말들에 대한 반론이라는 의미도 있었다. 최유나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는 원정길에 올랐다. 하지만 곧 선택의 기로에 설 수밖에 없었다. “뭐? 아니....” 최유나는 대략 25만명의 병력으로 추정되는 상대 군대가 상륙을 위해서 북서쪽 방면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25만이라면 자신이 총동원해서 가는 군대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무사히 상륙해서 어느 정도 내륙으로 들어오게 된다면 정말 게임 전체를 좌우할 정도가 되리라 생각했다. 이미 떠난 원정을 포기하고 다시 돌아가 그 로마군 25만을 상대해야 할지 아니면 이대로 로마로 떠날지 선택해야 했다. 만약 원정을 시작하기 전이었다면 당연히 25만명의 로마군을 상대했겠지만 지금은 바다 위였다. 최유나는 빨리 판단을 내려야했다. 최유나는 로마로의 원정 강행을 선택했다. 아니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절묘한 타이밍으로 로마군대가 북서쪽 방면으로 접근했기 때문에 지금 되돌아간다고 해도 시간상으로 로마군이 앞서서 쉽게 격퇴하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내부로 깊숙이 들어가 버리면 엄청난 피해가 예상되었다. 25만의 로마 정예군이라면 정말 힘듬을 알고 있었다. 최유나는 처음의 승기를 놓치지 않으려면 어쩔 수없이 이대로 원정으로 가야 된다고 생각했다. 특히 25만이 상륙했다면 로마에는 많은 군대가 없다는 생각에 원정을 선택했다. 게이머 최유나의 결정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어리석은 일이었다. 25만의 로마군이 일본을 유린한 뒤에 다시 돌아오면 당연히 최유나의 군대는 그 배후가 위험했다. 하지만 일이 공교롭게도 25만의 수송선에서 실제 부대는 12만이었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최유나는 모든 군대를 이끌고 원정을 그대로 떠났고, 역시 사정을 모르는 진규도 12만으로 적을 교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는 문명의 발전을 위해서 전력을 쏟아 부었다. 진규는 초, 중반이 아니라 중, 후반을 승부처로 생각했다. “이..이게.. 어떻게 된 거지?” 진규는 깜짝 놀랐다. 정찰부대에서 들어온 보고는 대규모 원정군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분명 12만명을 보냈고 더구나 외견상 보기에는 25만명에 육박하는 원정군을 상대는 무시하고 그대로 쳐들어온 것이다. 진규는 예상하지 못했던 사태에 급히 다른 곳으로 돌렸던 군단을 예상 상륙 지역으로 모았다. 하지만 시간상 상륙 자체를 막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진규는 자신의 예상만으로 모든 것을 문명의 발전을 목적으로 전환시킨 것이 실수였다고 깨달았다. 생각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진규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방어선을 치기 시작했다. 아직 남아 있는 모든 군대를 모았다. 상륙을 너무 쉽게 허용하는 상대 로마를 보면서 최유나는 자신의 판단이 옮았다고 생각했다. 최대한 상대에게 빠른 시간에 타격을 입혀야 하기 때문에 최유나는 곧바로 35만이 넘는 대부대의 행군을 명했다. 10만에 달하는 사무라이들과 25만의 경보병으로 이루어진 부대는 엄청난 속도로 이동했다. 로마 군대의 행군 속도도 보통의 군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지만 보통 산과 같은 험한 지형에서 훈련을 받아온 사무라이들과 일본의 경보병들은 길이 잘 닦인 로마의 도로에서는 거의 날다시피 했다. 이 행군속도는 또 한번 게이머 성진규의 뒷통수를 치는 꼴이 되었다. 원래 빠른 기동력에다 진규가 만들어 놓은 해안까지의 도로가 그 경이적인 기동력의 원동력이 되었다. 최유나는 35만의 부대를 휘몰아쳐 수도 로마와 이틀 거리에서 주둔하고 있던 군단 2개 부대를 각각 섬멸했다. 로마 군대의 진지는 아주 튼튼했지만 그 대상이 보통 기병이나 중보병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10만의 사무라이들이 들이닥치자 오히려 좁은 진지는 방해만 될 뿐이었다. 넓은 벌판이 아닌 좁은 곳에서 사무라이들을 이길 가능성은 애초부터 없었다. 최유나는 자신의 문명이 25만의 로마 군대에서 유린당할 것을 알고 있었다. 이왕 그렇게 된 것, 확실하게 로마 역시 파괴하리라 결심했다. 최유나는 정면 승부와 기습을 적절하게 섞으며 수도 로마로 계속 접근했다. 진규는 방어선을 제대로 구축하기도 전에 예상 방어선을 통과해 버린 상대의 기동력에 정말 놀랐다. 자신이 만든 도로 때문이라고는 생각도 못한 채, 일본 군대의 그 신속함에 혀를 내둘렀다. 게다가 수도 로마로 오는 관문을 막고 있던 2개의 군단이 전멸됐다는 소식에 당황했다. 13개의 군단 중에서 6개는 원정을 나간 상태였고 2개의 군단이 전멸됐으니 이제 5개의 군단 밖에 없었다. 상대는 35만에 육박하는 대군이었다. 로마 군대가 밀집 보병 중심이라서 쉽게 지지는 않지만 2개 군단의 전멸을 보더라도 쉽게 물리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진규는 남은 7개의 군단을 수도 로마로 집결시켰다. 어떻게든 12만의 원정군이 돌아올 때까지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방어벽이 존재하는 로마에서의 수성전이라면 시간을 벌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최유나는 군단을 섬멸하자마자 곧바로 행군에 들어갔다. 확실히 시간 싸움임을 알고 있었다. 관객들은 그런 게이머 최유나를 보며 다소 의아해했다. 평소의 땅따먹기 스타일이 아니라 단번의 공격으로 승부를 지으려는 스타일에 조금은 놀랐다. 최유나는 수도 로마를 차지해야 그나마 승부를 뒤집을 기회가 생기리라 여겼다. 그런 마음에 최유나는 35만명의 군대를 세차게 몰아쳤고 군대 역시 자신의 가족들이 있는 곳에 로마 군대 25만명이 마음대로 유린하고 있는 것 때문인지 기세가 대단했다. 진규는 10만의 군대를 모아 수도 로마의 수성에 준비를 다했고 곧 멀리서 엄청난 수의 부대가 다가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바로 게이머 최유나의 부대였다. “... 드디어 온 건가?” 진규는 여러 컨트롤을 하면서 가끔 상대의 진영에 대한 보고를 들었다. 이상한 것은 상대가 진지를 만들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숙영지에 대한 최소한의 준비가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 순간이었다. “뭐... 뭐야?” 최유나는 수로 로마에 도착하자 자신의 판단에 미스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앞서 있던 척후병의 보고로 적의 군대가 물경 10만에 육박한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최유나는 자신이 정말 큰 실수를 했다고 여겼다. 25만이 아니라 어쩌면 10만도 되지 않는 부대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 속임수에 본진을 버리고 이렇게 모든 군대를 이끌고 적의 영토로 들어왔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35만이면 대단한 병력이지만 보통 공성전에서 여유 있게 이기려면 병력이 거의 3배는 넘어야 했다. 병력은 충분했지만 상대는 로마 정예 병력이었다. 거의 군대가 없으리라 예상했던 터라 약간 당황했던 게이머 최유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피곤이 쌓였지만 눈앞의 적들을 보고 흥분한 군대를 독려해서 곧바로 진격했다. 보통 성과는 달리 수도 로마의 성벽은 성벽이라기보다는 방어벽이라는 말이 옳았다. 게다가 완벽하게 지어진 상태가 아니아서 어느 정도 우회를 할 수 있었다. 요충지와 취약지역은 로마 군대가 지키고 있었는데 25만의 경보병이 한곳을 집중적으로 뚫기 위해 노력했다면 사무라이 부대는 다른 부대가 증원되지 못하도록 여러 곳으로 부대를 나누어 공격하지 시작했다. 게이머 최유나의 두 개의 창에 로마군대의 넓지 못한 방패는 곧 뚫리고 말았다. 진규는 놀랐다. 피로로 인해 이틀 정도는 전쟁이 없으리라 예상했는데 상대는 뻔히 보는 가운데 전면전을 걸어왔던 것이다. 진규는 점점 상대에게 말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25만명으로 위장한 것을 간파해내고, 자신을 안심시킨 후에 이렇게 빠른 기동력을 이용한 돌파, 게다가 피로함에도 불구하고 전열을 정비할 시간을 주지 않으려는 대범함. 진규는 상대의 실력에 아주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게이머 최유나의 절박한 심정은 이해하지 못했다. 최유나는 두 개의 주력부대로 나누어 방어벽을 뚫기 위해 노력하다가 결국 10만의 사무라이 부대가 방어선을 뚫었고 곧 로마로 난입할 수 있었다. 시가전과 같은 은폐, 엄폐물이 있고 좁은 곳에서는 사무라이 부대가 압도적인 전투력을 보였다. 조직적인 대응이 힘든 시가지에서 로마군은 처참할 정도로 쉽게 무너졌다. 최유나는 최대한 피해를 주기 위해서 경보병으로 하여금 도시 소거 작전을 시작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최유나는 게임을 끝내기 위해 상대 게이머를 찾기에도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인만큼 쉽게 잡을 수는 없으리라 생각했다. 진규는 수도 로마로 난입된 상대의 엄청난 병력을 보고는 패배를 예감했다. 이렇게 상대에게 쉽게 질 줄은 자신도 몰랐다. 하지만 아직은 끝내고 싶지 않았다. 골몰히 생각하다가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아직 남아 있는 군대 전부를 퇴각시켰다. 그리고 자신도 수도 로마에서 군대와 같이 남동쪽으로 내려왔다. 최유나는 수도 로마가 불타는 모습을 보면서 승리에 대해서 기분이 좋았지만 상대 게이머가 로마 군대와 함께 퇴각하는 것을 보면서 입이 썼다. 따라가서 잡고 싶었지만 피곤에 지치고 도시 약탈로 인해 흩어진 지휘체계를 정비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또한 곧 올지 모를 적의 원정군 생각을 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진규는 군대를 정비했다. 남은 병력은 4만이었다. 10만의 군대가 투입되어 수도 로마를 지키지도 못하고 6만의 병력이 희생된 최고의 이유는 자신의 방심이었다. 아니, 상대의 대담한 전략이었다고 생각했다. 진규는 아직도 최유나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최유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진규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4만의 병력이라,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할 12만의 원정군을 다 합쳐도 16만이었다. 상대는 적어도 25만은 넘을 군대였다. 게다가 지금까지 관찰한 바에 의하면 그 25만 중에서 7만 이상은 무사 계급인 사무라이였다. 수도 로마를 빠져 나오면서 생각해 둔 것이 있지만 그것은 최후의 방법이었다. 진규는 일단 도망쳐서 원정군을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기다리는 원정군은 도착하지 않고 기운을 차린 게이머 최유나의 일본 군대가 점점 다가오자 진규의 로마군대는 어쩔 수 없이 몰릴 수밖에 없었다. 진규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원정군과 연락이 제대로 되지 않자 어쩔 수 없이 최후의 결정을 내렸다. 진규는 남동쪽 항구에 군대를 집결시키고 남은 수송선을 이용해서 바다로 나갔다. 4만으로 30만을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이머 최유나는 상대가 배를 이용해 바다로 나가자 항구 자체를 소각시켜 버렸다. 사람들은 피난시켰지만 다시는 항구로 사용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렸다. 게이머 최유나는 완파되어 버린 수도 로마는 그대로 두고 가까이 있는 도시인 다레도를 거점으로 삼고 일단 살아 남기 위해서 도시를 정비하고 여러 곳으로부터 정식적인 물자를 상납 받았다. 로마 전역에 로마 군대가 완전히 사라지자 급속하게 강력한 군대를 가진 새로운 지배자에 두려움이 확산되었지만 게이머 최유나의 통제로 약탈과 방화가 금지되고 기존의 노예들을 대거 해방시키면서 원래의 지배자가 백성들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소문까지 돌자 일본 군대를 조금은 인정하는 분위기가 생겼다. 뒤쫓아갈 생각도 했지만 30만이라는 군대에 필요한 보급이 여의치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최유나는 어쩔 수 없이 일단은 적지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을 굳혔다. 게이머 최유나는 거기에 멈추지 않고 군대를 동원해서 해안까지 건설된 도로를 완전히 파괴시켜 로마 원정군이 오더라도 시간을 벌 수 있도록 만들었다. 또한 수도 로마를 중심으로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하자 아예 이 로마를 이용해서 살아남기로 작정했다. 군대는 일본 문명이지만 그 물자를 공급하는 것은 적인 로마였다. 간간이 첩자를 통해 본토의 상황을 보고 받던 진규는 돌아가는 상황에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상대가 충분히 취할 수 있는 선택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실제 일어나자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진규가 볼 때, 게이머 최유나는 바다로 나와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사태를 보는 자신을 좇을 생각은 없었고 수도 로마를 중심으로 통제력을 키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다시 말하면 로마를 지배하기 위해 움직인다는 뜻이었다. 시간이 흘러 완전히 통제가 가능하면 자신의 영토였음에도 불구하고 진규 자신이 어쩌면 원정군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휴.... 이렇게까지 되다니....” 곧 진규가 기다리던 원정군과 바다에서 합류할 수 있었지만 해안에서의 빠른 도로가 끊는 등 상대는 이미 많은 준비를 하고 있었다. 피로가 심한 16만의 군대를 이끌고 30만의 군대를 상대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진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시간이 흐른다는 말은 더욱 더 상대의 로마 통제가 강해진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게다가 원정군이 이렇게 늦게 온 것은 일본 특유의 다이묘 때문이었다. 로마 제국이 중앙집권이어서 중앙에 모든 권력이 집중되어 있다면 일본은 다이묘들도 어느 정도 권력이 있어 사병이 어느 정도는 존재했다. 그런 것들이 모이자 적지 않은 세력이 되었다. 게다가 일본의 지형에는 로마의 도로와 같은 교통 통로는 기대할 수 없었고 험한 지형이 많아 상대적으로 고충을 겪었던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좋아. 가자 일본으로.” 진규는 어쩔 수 없이 16만의 군대와 같이 무주공산인 일본으로 갔다. 프로 리그 사상 처음으로 상대의 진영을 탈취해 게임을 하게 된 순간이었다. 밖에서 지켜보던 관객들은 엎치락뒤치락 하는 게임 전개에도 감탄했지만 로마를 지배하는 게이머 최유나와 일본을 지배하는 리틀 스키피오 성진규의 플레이에 너무나 놀라면서도 재미있어했다. “이야... 이런 게임이 되다니... 생각도 못했다.” “이러면... 서로 문명이 바뀌는 거잖아...” “누가 이길까?” “음.... 최유나가 유리하지 않을까? 로마라면 거의 누구나 하는 거니까...” “그럴지도 모르겠네. 그런데... 제한 시간이 있잖아...” “아, 맞다. 제한 시간...” 두 게이머는 본격적으로 상대 진영으로 게임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둘 모두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확보된 무력으로 차근차근 해결해 가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플레이 타임은 굉장히 길었지만 프로 리그 게임 사상 처음으로 나온 장면에 관객들은 지루한지도 모르고 화면을 보고 있었다. 게이머 최유나는 새롭게 로마군 군대를 조직하다가 하마터면 쿠데타로 게임 오버가 될 뻔했다. 새롭게 조직한 로마군의 수가 적을 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병력수가 되자 기존의 일본군과 마찰이 생겼고 그것이 심화되었을 때는 쉽게 진정시키기 힘들었다. 30만이나 되는 일본군을 한 곳에 둘 수 없어 여러 곳으로 분산시킨 것이 그 마찰을 더 가속시켰다. 수가 비슷하다 보니 무력 충돌까지 생겼고 그 와중에 최유나의 중도적인 조치는 양쪽 모두에게 버림을 받을 뻔한 절박한 상황까지 몰리게 만들었다. 다행히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 기지를 발휘해 상황을 복구해서 로마군과 일본군을 분리했지만 그 앙금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게이머 리틀 스키피오 성진규도 그에 뒤지지 않는 어려움을 겪었다. 일본의 제일 문제는 다이묘였다. 일본 문명에 대한 실제 플레이 경험이 거의 전무한 진규로서는 다이묘들을 어떻게 다루는지 몰라 힘으로 압박하다가 그것이 터져 내전이 생겨버렸다. 다이묘들끼리 이합집산을 하는 모습까지 보게 된 진규였지만 워낙 압도적인 병력이었기에 진화가 가능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조화로운 통제는 불가능했고 항상 뒤를 조심해야 하는 긴장된 상태가 만들어졌다. 관객들은 객관적으로 게이머 최유나가 유리함을 알았다. 30만의 병력에 로마 문명의 특성상 이민족에 별다른 거부반응이 심하지 않아 통치에 많은 힘이 들지 않았다. 게다가 모든 게이머들의 기본 교범과 같은 로마 문명에 대한 지식이 게이머 성진규의 일본 문명에 대한 지식보다 월등했기 때문에 통제 뿐 아니라 문명을 이용하는 것 역시 훨씬 나았다. 객관적으로 게이머 최유나가 유리했지만 게임 플레이 제한시간에 걸려 무승부가 되고 말았다. 게이머 성진규로서는 최선을 다해서 최선의 상황을 만들어 낸 셈이다. 관객들은 두 시간의 짧지 않은 경기였지만 재미있으면서도 특이한 게임에 대한 감사로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관객들은 첫 승부가 두 시간에 걸친 긴 승부인데다가 무승부가 되자 기뻐했다. 그 이유는 마지막 게임인 게이머 스키피오와 게이머 사신의 대결을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사상 처음으로 상대의 문명으로 플레이한 두 게이머들의 선전에 박수도 치고 앞으로 펼쳐질 최고의 대결을 기다리는 관객들이었다. “수고했다. 애썼다.” “.......... 저.. 제가 진 경기였어요.” “맞다. 네가 진 경기였다. 그런데 너는 정말 멋지게 무승부로 바꿨잖아. 이기지도 못했지만 지지도 않았으니 그렇게 낙심하지 마라.” 풀 죽은 진규에세 현준은 어깨를 치면서 위로했다. 그런 진규에게 진성이 다가가 한마디 했다. “.... 너도 알겠지만 불확실한 것을 확실하다고 믿은 것이 네 패인의 원인이다. 게다가 그 해안으로의 도로 건설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차갑고 단호한 진성의 말에 진규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하지만.. 오늘의 그 군대강화법은 내가 지금까지 본 것 중에 제일이다. 수고했다. 나머지는 현준이와 내게 맡겨라.” 이어진 진성의 말에 진규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들썩이는 어깨를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도록 애만 쓸 뿐이었다. 하지만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은 그런 진규의 마음을 다 알고 있었다. “진규야, 잘 봐라. 네 복수는 아니지만 내가 시원하게 이기고 올 테니까. 기대해라.” 현준은 진규에게 말하고는 대기실을 나가 대회장으로 향했다. 현준은 어렵지 않게 이겼다. 상대는 로마 문명이었는데 현준에게 있어 로마 문명은 가장 상대하기 쉽기도 했지만 가장 상대하기 싫은 상대이기도 했다. 스키피오, 진성이라는 로마 문명 최고수를 상대로 연습하니 로마 문명이라면 치를 떠는 현준은 로마를 가장 싫어했다. 하지만 그런 경험이 진성을 제외한 로마 문명의 프로 게이머와 만나 한번도 지지 않는 기염을 토했다. 그런 현준이었기에 상대가 로마 문명이라는 사실은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지고 경기에 임하게 해 주었다. 현준은 중반까지 가지 않고 진성의 군대강화법에 맞서기 위해서 다듬고 있는 문명 강화법을 시험하면서 가볍게 이겼다. 이미 예상된 경기 결과여서 관객들은 다음 게임을 더욱 기다렸다. “자, 봐라. 쉽게 이겼지?” “네, 현준이 형. 정말 대단해요.” “대단? 하하하... 사실 저 녀석, 진성이한테 어떻게든 이겨보려고 노력하다 보니까 로마 문명에게는 자신이 있거든. 하하하.. 당연히 진성이는 아직......” 현준은 진성이에게는 아직 힘들다는 말을 하려다가 멈췄다. “.... 진성이 형에게는 아직 이길 수 없나요?” 진규는 그런 현준의 마음도 모르고 꼭 집어 물었다. “............... 그런 질문은 하는 게 아니다.” “네.” 현준과 진규의 대화를 들으면서 진성은 나갈 준비를 했다. 같은 과 친구이자 문명 온라인의 베타 테스터, 하지만 작년에는 승률왕이었던 게이머 사신, 김한석과의 경기를 앞둔 진성은 재미있는 경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진성아, 시간 된 것 같은데...” “OK!” “이겨라!” “당연하지. 지는 것은 별로 기분이 좋지 않잖아.” “하하하... 그렇지.. 평소에도 그런 생각을 상대방의 입장에서 자주 생각 좀 해라.” 현준의 농담이었다. “그럴까? 하하하..” “형, 힘내세요!” 진성이 주먹을 한번 쥐었다가 펴면서 경기장으로 나갈 때였다. “진성아!” 급박한 목소리, 뭔가 일이 터진 듯한 급한 목소리였다. 매니저 서재필이었다. 멀리서 들리는 소리였다.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보니 뛰어오는 듯 했다. “진성아! 진성아!” “무슨 일이지?” 곧 매니저 서재필이 대기실로 들어왔다. 서재필의 얼굴은 잔뜩 심각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얼굴이 굳은 채로 뛰어 들어온 매니저 서재필은 진성을 바라보며 한마디 말을 어렵게 했다. “.... 유조 어르신께서 ... 쓰러지셨다.” 서재필의 한마디 말은 대기실의 시간을 멈추게 만들었다. 모두들 진성에게 유조 어르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었기에 아무런 말도 못했다. 제일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진성이었다. “..어... 어떻게.. 어디 계십니까?” 진성의 목소리는 평소와는 다르게 떨리고 있었다. “강북 성모 병원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아마도 지병이 있으셨던 모양이다. 진성아...?” 매니저의 물음에 잠시 생각하던 진성은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매니저 형이 잘 좀 해 주십시오.” “그래, 그래야겠지? 내가 이준씨에게 부탁해서 밖에 차 대기시켰으니까. 빨리 가 봐라.” 진성은 다른 사람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현준에게 고개를 돌렸다. 현준은 평소 보기 힘든 진성의 슬픈 표정에 고개만 끄덕이고는 진성에게로 향했다.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진성의 눈빛의 의미를 알았다. “매니저 형, 저도 진성이와 같이 갑니다. 형이 다 알아서 해 주세요.” “뭐? 휴..... 알겠다. 빨리 가 봐라.” 현준도 같이 간다는 말에 매니저 서재필은 한숨을 쉬었지만 평소 보아온 두 사람과 지금의 모습을 보니 반대해 봐야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빨리 가라는 말로 대신했다. 진성은 곧바로 밖으로 뛰어나갔고 그 뒤를 현준이 따랐다. 현준은 앞서 가는 진성이 눈물을 흘린다는 것을 알았다. 진성을 만난 이후에 한번도 눈물 흘리는 것을 보지 못한 현준은 마음이 쓰라렸다. 현준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대기하던 차에 다가와서야 진성에게 다가가 가지고 있던 손수건을 건넸다. 진성은 말 대신 한번 쳐다만 봤다. 현준은 그런 진성에게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진성과 현준이 차에 타자 이준은 말도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가는 동안 내내 차 안에서는 대화가 없었다. 무거운 정적만이 차안을 가득 채웠다. 평소 이런 분위기라면 가만히 있지 않을 현준도 그 순간만은 가벼운 표정을 짓지 못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느낌이 들어서야 차는 병원에 도착했다. 아무 말 없던 진성은 차를 박차고 내려 병원 안으로 뛰어갔고 현준이 그 뒤를 따랐다. 진성과 현준은 응급실로 갔다. 응급실로 들어가자 곧 얼굴이 벌건 진팀장을 볼 수 있었다. “왔구나....” “아저씨, .... 어..어떻게 되셨습니까? 아니, 사부님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진성은 거의 울부짖듯이 진팀장에게 매달리며 물었다. “진성아, 진정해라. 유조 어르신은 괜찮다.” 괜찮다는 말을 하는 진팀장이었지만 얼굴은 전혀 괜찮은 얼굴이 아니었다. 진성은 진팀장 뒤쪽에 누워 있는 사부 유조를 찾을 수 있었다. 오면서 말라버렸다고 생각한 눈물이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사부 유조는 응급실의 침대에 편안하면서도 생기 있는 얼굴로 누워 있었다. 사부 유조의 모습을 본 진성은 그제야 눈물을 닦고는 정신을 차렸다. “진성아, 나 좀 보자.” 가만히 있던 진팀장이 진성이를 불렀다. 진성이는 잔뜩 굳은 진팀장의 얼굴에 뭔가 불안함을 느꼈다. 아니 거의 확신이었다. 진성은 진팀장을 따라서 응급실 밖으로 나갔다. 봄이지만 저녁에는 제법 쌀쌀했다. 길 옆의 화단으로 들어가 털썩 주저앉은 진팀장은 진성에게 말했다. “앉아라.” 진성이 앉자 진팀장은 평소 잘 피우지 않던 담배를 꺼내 물더니 불을 붙였다. “아니... 담배 안 피시잖아요?” “조금 전에 샀다. 지금은 이게 필요하더구나.” “....” “너는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말한다. 유조 어르신이 네게는 비밀로 해 달라고 하셨지만 나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진성아, 잘 들어라. 유조 어르신은 지금...... 암을 앓고 계신단다.” “네? 암이라구요?” “그래, 암이다. 휴......... 치료는 불가능하다고 하더구나. 뭐 정밀 검사를 받아봐야 하겠지만 유조 어르신의 말씀으로는 이미 치료할 단계는 지난 지 오래라고 하시더구나. 이미 5년 전에 병원에서는 3개월 내 사망이라는 사형선고를 내렸다고 하니....” “....암......암.....?..” 진성은 귀가 윙윙거리고 눈앞의 진팀장이 빙빙 도는 것을 느꼈다. 암이라니, 거기다 사형선고라니.. 5년전...? “5년 동안 유조 어르신은 암을 가진 몸으로도 보통 사람과 다름없는 모습을 보여 주셨다. 어르신 말씀으로는 자신이 가진 무술로 그렇게 버틸 수가 있었다고 하셨다. 이제는 그 한계에 도달했다고 하시니..... 자신의 몸은 자신이 더 잘 안다고 하시더라. 진성아, 네가 가시는 마지막 길을 잘 보살펴 드려라. 실려 오시고 나서 잠깐 동안에 내게 말씀을 하셨다. 너를 보면서 후회를 하셨다고. 조금 빨리, 5년이라도 빨리 만났으면 좋았을 것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 사부 유조는 진성에게 있어서 그야말로 친 할아버지와 다름이 없었다. 사부 유조 역시 진성과 비슷하게 속마음을 겉으로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어서 살가운 정은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진성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사부 유조 역시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무술을 배우면서 인생까지 가르쳐 주는 사부 유조에 대한 마음은 더욱 깊어졌다. 지난번에 대만에서 사부의 사형이 오기 전, 서두르는 사부 유조의 가르침에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단순히 사부의 사형 때문이라고 단정 지었다. 진성은 그런 자신이 부끄럽고 미웠다. 조금만 더 생각해 봤다면... 조금만 더..... 후회는 아무리 빨리 해도 늦은 것이다. “진성아, 네가 슬퍼하는 모습을 어르신께 보이지 마라.” “..........” “휴....... 곧 있으면 깨어나실 시간이다. 자, 들어가 보자.” “..........” 진성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일어나서 그야말로 힘없이 응급실로 들어갔다. “진성아, 여긴 어쩐 일이냐?” “사부님, 사부님이 쓰러지셨는데 제자가 안 오면 누가 찾아옵니까?” 힘없던 진성은 이미 사라졌고 사부 유조에게 말하는 진성의 목소리에 생기마저 느껴졌다. “하하하하... 그렇지. 그래. 하하하하...” “사부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몸? 하하하하... 당연하지. 요즘 조금 무리했더니.... 이렇구나. 역시 몸은 젊을 때부터 가꾸어야 한다니까...” 티를 내지 않으려는 것은 그 사부에 그 제자였다. 게다가 너무 어설픈 연기 역시 그 사부에 그 제자였다. 진성은 사부 유조를 모시고 사부의 집으로 같이 왔다. 거하는 방까지 부축해서는 이부자리도 봐 드리고 편히 눈을 감고 주무시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밖으로 나왔다. 진팀장과 현준은 그때까지 도장 한켠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주무십니다.” “그래..... 휴.......”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람이라면 어차피... 어차피.. 한번은 겪는 일입니다.” 진성은 약간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 그렇겠지.” 현준은 한마디 말도 못했다. 뭐라고 진성에게 위로해 주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평소 여유로운 모습이 아니라 전신이 굳은 진성에게 별 소용이 없는 자신이 너무 못나 보였다. “아저씨, 저.... 당분간 이 곳에서 있어야겠습니다.” “음... 그래.. 그렇게 하도록 해라. 집사람에게는 내가 말해 놓을 테니까.” 현준은 이때다 싶어 말했다. “아버지, 저도 여기 있겠습니다.” “.......... 음.....” “현준아 그럴 필요 없다. 네 마음은 고마운데..... 이번에는 그렇게 할 필요도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될 것 같다. 이번 한 번만 날 이해해라.” “.......” 진성의 딱 끊는 말에 현준은 말을 잊었다. “그래, 현준이는 집에서 지내라. 현준이가 진성이 필요한 것 갖다 주러 자주 들리면 되겠다. 휴...... 그래 진성아, 수고해라. 현준아, 가자.” 진팀장 말을 마치고는 천천히 밖으로 향했다. 현준은 아버지를 뒤따르다가 진성을 보며 말했다. “내일.... 출근 할 거지?” 대답을 들리지 않았지만 진성의 가볍게 끄덕이는 고개를 볼 수 있었다. 현준은 고개를 돌려서는 밖으로 나갔다. 그 때에서야 진성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 아버지, 어머니에 이어서 이제는 사부님이라니.... 하하하하하.... 아하하하.. 으하하하.. 으아아아아... 으아아아악!!” 호탕하게도 느껴지는 웃음이 점차 발악이 되어 버렸다. 진성은 도저히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도저히.. 도장으로 뛰어 들어가 마구 몸을 움직이면서 괴성을 질러댔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으아아아아... 아악!! 아아악!! 으아아................” 있는 대로 힘을 다해서 공기의 파공음까지 들려 도장 안은 기이한 소리로 가득했다. 그 때였다. “진성아...”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동작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 진성은 도복을 입은 사부 유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부님.......” “하하.. 이 녀석아... 네 녀석이 사실을 알았나 보구나. 아까도 조금 느낌이 이상하다더니. 그 진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구나. 하하하하..... 네 말이 맞다. 어차피 겪을 일이다. 어차피.” “사부님, 누워 계시지..... 왜 일어 나셨습니까?” “이 녀석아, 너도 내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나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시간 낭비할 수는 없지 않느냐? 너도 도복으로 갈아입고 오너라.” 너무도 당당한 사부 유조의 말에 조금 쭈뼛거리던 진성은 도복으로 갈아입고 왔다. 도장에 들어온 진성은 사부 유조에게는 뿜어져 나오는 기세에 놀랐다. “네 녀석에게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고서는 내가 눈을 감을 수가 없다. 죽을 각오로 배워라. 아니면 내가 죽인다.” 살벌한 말이었다. 하지만 진성의 대답은 달랐다. “..... 대강대강 배워서 사부님이 눈을 감지 못하도록 만들겠습니다......” “하하하하.. 이 녀석아... 사부의 눈은 감겨 주도록 해야지. 조금 전에 본 것이 기세다.” 사부 유조는 웃음을 터트리며 자신의 남는 시간을 다해 진성에게 가르치기 시작했다. 육합에 대해서, 실전에서의 마음가짐, 발경의 끝, 청경의 단계, 그리고 아직 확실하지 않은 경의 확장에 대한 이론까지 진성 앞에 풀어 헤치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음에 안타까워 하나라도 더 가르치려는 사부와 단 한 마디의 가르침이라도 머릿속에, 가슴속에 새겨서 들으려고 애쓰는 제자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도장에서 구르고 굴렀다. “이제 곧 오늘의 마지막 경기인 게이머 스키피오 대 게이머 사신의 대결을 곧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아, 급한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여러분, 안타깝지만 오늘의 마지막 경기는 자소 소프트의 기권으로 쌍룡은행의 승리가 결정되었습니다. 아직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게이머 스키피오, 강진성군의 할아버지께서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병원으로 갔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아, 아쉽습니다.” 아나운서의 설명이 있자 관객들은 난리가 났다. 메인 경기인 스키피오와 사신 간의 대결이 무산이 되다니. 격해진 관객들은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한바탕 난리가 났다. “혹시.... 게이머 스키피오, 사신이 두려워서 도망간 것 아니야?” “뭐? 당신 그것을 말이라고 하셨습니까? 최고수 스키피오가 무엇이 두려워서 사신을 피한답니까? 방송도 못 들었습니까? 할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졌다지 않습니까?” “그것을 어떻게 믿어? 실력이 안 되어 질 것 같으니까 도망갈 수도 있지.” “아니, 이 사람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쯧쯧..” “뭐? 이 새끼가.....” “새끼? 이 잡놈이........” 특히 사신을 응원하는 사람과 스크피오의 팬들 사이에 난투극이 일어날 정도여서 대기하고 있던 몇 명의 경찰들이 투입되어야 했다. 다행히 개인 사이의 난투극으로 끝나 경찰의 마음을 안심케 했다. 자소 소프트의 프로팀은 공식적으로 팬들에 대해 사과 방송을 했고 또한 홈페이지를 통해서도 자세한 경위에 대해 설명했다. 한동안 그 동안 인기가 좋아 안하무인이라느니, 콧대가 높아졌다느니 하는 말들이 많았지만 솔직한 대응에 그런 말은 점점 사라졌다. 자소 소프트는 프로 리그 후, 처음으로 게임에 패했다. “진군, ..... 가능하겠나?” “.........” “부탁일세.”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한 가지만, 진성이 녀석 말고는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말았으면 하네. 진성이가 요청하면 그 기록을 모두 없애 줄 수 있겠나?” “알겠습니다. 원래 진성이를 위한 것이니까, 당연히 그래야지요.” “.... 진군, 고맙네.” 진팀장은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 유조 어르신을 보고는 놀랐지만 그 위에 이어진 말에 더 놀랐다. 유조는 진팀장에게 옛날에 자신이 테스트 했던 그 공간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기록해서 진성에게 보여 줄 수 있는지 물었다. 유조는 진성에게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모든 것을 가르친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이것은 진성의 자질의 문제가 아니었다. 유조가 가진 것들은 시간이라는 조력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진성도 안타까워했지만 유조는 더욱 더 그랬다. 유조는 예전에 진성이 비정상적으로 팔극신권을 익힌 것을 생각해 내고는 거기에 기대를 걸었다. 아직 다닐 만한 몸은 아니었지만 유조는 고민 끝에 진팀장을 찾았고 진팀장은 결국 승낙하고 말았다. 뒤늦게 알게 된 진성의 반대가 있었지만 사부 유조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진팀장은 몇 몇 사람에게만 사정을 얘기했고 모든 요람 멤버들이 퇴근한 후에 그 작업을 하기로 했다. 일반적인 테스트와 상관없었지만 테스터인 유조가 워낙 약한 상태라 걱정도 많았다. 진성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사부 유조를 바라봤지만 유조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어르신, 시작하겠습니다.” “그러게나.” 유조는 곧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지는 시야를 느낄 수 있었다. 눈을 뜨니 정말 또 하나의 세상이었다. 옛날과는 완전히 달랐다. 한참 주변 환경을 살펴보니 큰 목소리가 울리면서 들렸다. “어르신, 준비 되었습니다.” “.... 그래...” 유조는 몇 걸음 앞으로 가더니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잔잔한 바다의 작은 흔들림과 같이 작은 파문이 점점 폭풍처럼 커지기도 했다가 다시 잦아들었다. 다리를 굳건하게 땅에 박은 고목나무처럼 절대 넘어지지 않을 것 같다가도 바람만 불면 휘어질 것 같이 부드럽기도 했다. 혼신을 다한 팔극신권의 팔극진결이었다. 진성은 한눈에 자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경지를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부족하기에 사부 유조가 이런 일을 한다는 것을 깨달은 진성은 주먹을 으스러지도록 쥐었다. 유조의 움직임은 달라졌다. 마치 검을 든 것 같은 동작이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유조의 손에 찬란한 빛을 발하는 검이 생겼다. “아....” 사람들은 놀랐다. 진성이라면 이해가 됐지만. 진팀장은 조팀장을 바라봤지만 조팀장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진성은 몇 동작을 보자마자 알았다. 그 이름 없는 검법이었다. 유조는 천천히, 그러다가 빠르게 몇 번을 반복했다. 또 유조의 움직임은 달라졌다. 눈을 감은 채 자신이 알고 있는 여러 경지들에 대해서 말하면서 하나씩, 하나씩 풀어 나갔다. “경이란......... 쌓인 힘과 같아서......... 그것을 터트려 줄 계기가....... 청경은........ 육합에서 정이란........ 일격필살의 타격이란........ ” 움직이는 몸과 더불어 계속되는 말에 진성은 한마디도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했다. 비록 나중에 다시 이것을 듣고 볼 수 있겠지만 지금 진성에게는 그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진성의 눈에는 사부 유조의 혼신을 다한 동작과 그 음성이 들릴 뿐이었다. 유조는 계속 몸을 움직이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진성을 위해서 내놓았다. 몸의 움직임, 이론적인 가르침을 망라해서 거의 무아지경에 이를 정도였다. 유조의 움직임은 거의 3시간이 다 되어서야 멈췄다. PVR-2를 나온 유조의 거의 탈진 상태였다. 진성은 그런 사부 유조를 앉고는 준비한 의자에 편하게 앉혔다. 일단 조금 쉬고 난 뒤에 집으로 가기로 했다. 잠시 후, 사부 유조가 정신을 차리자 진성은 사부 유조를 안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 날 이후, 진성은 날카로워졌다. 사람들이 건드리기 힘들 정도의 기세를 풍겼고 매서운 눈빛을 보였다. 이팀장과 진팀장, 매니저 서재필은 진성에게 최대한 시간을 보장했다. 얼마 남지 않은 유조 어르신과 진성에 대한 배려였다. 진성은 그런 도움에 감사했지만 여전히 차가운 바람을 날렸다. 하지만 주위의 우려와는 달리 진성은 프로 리그 게임에서도 엄청난 집중력으로 인터넷에서 시작된 괴소문을 일축했다. 예전의 스타일과는 달리 초반에 몰아쳐 상대를 정신차리지 못하게 만들어 끝내버렸다. 항간에는 스키피오가 달라졌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현준은 그런 진성의 변화를 이해하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사부의 가르침을 소화하지 못하는 자신, 아직도 해야 할 것이 너무 많은 때에....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진성은 잠도 자지 않고 자신을 몰아쳤다. 현준은 그런 진성을 보면서 마음이 좋지 않았지만 자신이 어떻게 해 줄 수 없었다. 단지 자신에게는 가끔 말을 거는 진성에게 고마울 뿐이었다. 진성은 시간 날 때마다 PVR-2로 가상현실에 접속해서 사부 유조의 움직임을 따라했다. 확실히 진성 자신은 그것을 익힐 수가 있었지만 그것은 거의 대부분이 기초였다. 겉만 따라할 뿐이었다. 그 안의 경의 움직임이나 호흡도 대충은 알 수 있었고 몸에 저절로 익혀지는 부분도 있었지만 아무리 해도 자신의 사부 유조의 움직임과는 격이 틀렸다. 진성은 포기하지 않고 잠도 자지 않으며 낮에는 로플팀의 요람에서 밤에는 사부 유조의 집, 도장에서 수련에 수련을 거듭했다. 거의 열흘 동안을 잠을 자지 않은 진성은 깊은 밤 수련을 하다가 쓰러져 잠이 들고 말았다. 새벽녘에야 정신을 차린 진성은 갑자기 달라진 도장 안을 느낄 수 있었다. 뭔가 상쾌한 느낌이 가득했고 뭔가 명확하고 밝다는 기분이 들었다. 꼬집어서 말할 수 없었다. “도대체..... 이게 뭐지?” 수련할 때는 답답했고 자신이 생각하는 만큼 진전이 되지 않아 괴로워했는데 이렇게 쓰러졌다 일어나니 상쾌한 기분이라니. 진성은 피곤한 몸이 휴식을 취하자 기분이 좋아졌다고 생각하고는 수련을 계속했다. 수련의 처음은 항상 팔극진결이었다. 사부 유조의 가르침대로 팔극진결을 시작하는데 뭔가 이상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팔극진결을 가볍게 했다가 두 번째부터는 정말 온몸의 경을 다 끌어 올려서 시전 했다. “아......” 팔극진결을 펼칠 때 입을 벌려 말을 하는 것은 원래 금기였다. 하지만 진성은 갑자기 확실하게 자신의 몸에서 느껴지는 경의 움직임에 너무 놀라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마치 공기가 흔들리는 것과 같은 움직임이 자신이 경을 올려 팔극진결을 시전할 때 몸의 각 부위에서 나타났다. 진성은 신기한 마음이었지만 마음을 다스려 계속 팔극진결을 펼쳤다. 한참을 펼치고 나서 눈을 뜨니 누군가가 뒤에서 다가오는 것이 어렴풋하게 느껴졌다. 진성은 뒤를 쳐다보았다. “아, 사부님!” “허허허... 진성아, 네가.... 청경을... 후유.. 청경을 깨우쳤구나....” 이제껏 사부가 몰래 들어올 때 그 기척을 한번도 알 수 없었던 진성은 사부 유조의 말을 듣고는 이것이 바로 그 청경임을 알았다. 아직 기본이겠지만 이제 자신도 사부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하나로도 기뻤다. “허허허허허...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된단다. 네게는 아직 시간이 많이 있으니까. 진성아, 내가 밥을 준비 했으니까 같이 먹도록 하자꾸나.” 진성은 사부 유조의 말에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자신이 이렇게 정신을 빼 두고 있는 동안 사부가 음식을 마련했다니. 하지만 사부 유조의 강권에 진성은 사부가 마련한 음식을 먹었다. “어떠냐? 내 솜씨가?” “맛있습니다.” “허허허... 그렇지? 그래... 그렇고 말고.... 진성아!” “네, 사부님.” “내가 네게 몇 가지 말하고 싶은 게 있는데 들어 줄 수 있겠느냐?” 진성은 순간 이 말이 사부의 유언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말씀하십시오, 사부님.” “그래... 허허허.... 먼저 지금 이 순간부터는 사부라고 부르지 말고 할아버지라고 불러라.” “네? 사부님?” “할아버지!” “네... 할.... 아버지.” “좋다. 그래야지. 너는 이제 내 제자이자 내 손자다. 내가 가진 것을 네게 물려줄 테니 네가 좋은 일에 알아서 쓰도록 해라. 그리 많지는 않지만 네가 살아가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부터 너는 팔극신권의 유일한 계승자다. 이름을 세상에 떨치든 말든 그것은 네가 알아서 하도록 하고 단지 괜찮은 아이가 있다면 그 기술을 알려주어라. 기술만이 아니라 그 속에 깃든 마음까지도. 알겠느냐?” “네... 할..아버지.” “허허허.... 그리고 아마도 내가 죽으면 대만에서 사형과 사람들이 올 것이다. 팔극문에는 팔극문의 정식 계승자들이 묻히는 곳이 따로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구나. 네가 나를 지켜라. 알겠느냐?” “네? 네..... 할아버지.” “네가 법적으로는 내 손자니까... 허허허... 손자가 싫다는데.. 다른 사람들이 어찌하겠냐? 하하하.....” “네, 제가 정말 목숨을 걸고 지키겠습니다.” “그래. 그래.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네게서 그 이름 모를 검법과 팔극신권의 끝을 봤으면 좋겠구나. 비록 살아서 보지 못한다고 해도...... 하지만 무술에 목숨 걸라는 것으로 오해하지 마라. 내가 예전에 말했던 것을 기억해라. 무술을 하면서도 그 무술을 잊어버릴 수 있는 경지. 어쩌면 모순되고 불가능한 경지일지도 모르겠구나. 매일매일 연습한다고 이루어지는 경지가 아니다. 어쩌면 너처럼 다른 일을 하는 가운데 그 깨달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바라는 것은 네가 무술을 버리지도 말고 그 속으로 들어가지도 말라는 것이다. 지금처럼, 지금처럼 단지 무술을 좋아하고 그 수련하는 동안의 깨달음을 기뻐하도록 해라.” “네....” “내가 한 말을 알겠느냐?” “네, 할아버지.” 한 번 더 다짐을 하듯 물은 사부 유조는 앉은 채로 그대로 눈을 감았다. 진성은 아무런 말도 없고 움직임도 없는데다가 자신의 감각에 식어가는 사부 유조가 느껴져 깜짝 놀랐다. 진성은 사부에게로 다가갔다. “아................. 사부님, 아니 할아버지. 안녕히... 안..녕히... 가십..시오..” 유조의 장례식이 끝난 뒤에 진성은 여전히 사부 유조의 집에 있었다. 텅 빈 듯한 눈빛에 힘이 없는 몸짓은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진성의 마음을 보여주었다. 해가 지기 직전의 노을이 가장 아름다운 것처럼 사부 유조의 마지막 삶이 진성에게는 화려한 노을보다 더 선명하게 마음속 깊이 마치 사진처럼 찍혔다. 진성은 힘을 내기 위해 안간힘을 다 썼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진성을 떠날 때와는 달리 마지막 유언까지 남겨 주고 가신 사부이자 할아버지인 유조가 너무나 고마웠다. 자신을 잊지 않겠다는 말과 같은 그 유언을 제대로 가슴 속에 새길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기뻤다. 하지만.... 마음은 아팠고 몸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 사부님... 할아버지....” “진성아, 이제....... 가자.” 현준은 진성의 옆에 서 있었다. 현준은 장례식 내내 상주인 진성을 도왔다. 공식적으로 상주가 혼자여서 현준 역시 상주 노릇을 했다. 일단 장례식이 다 끝나자 진성은 혼자서 사부 유조의 집에서 살기 원했지만 현준 아버지, 어머니의 간곡한 설득과 현준의 단호한 반대에 진성은 현준의 집에 살면서 사부 유조의 집에 가끔 오기로 결정했다. 현준은 예전에 진성으로부터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아주 말썽꾸러기였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때는 그런 얘기를 흘러버렸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만큼 큰 사건이어서 진성의 성격이 바꿨다는 말로 들렸다. 현준은 자신이 아는 진성이 계속 남아있기를 바랬다. 아니 원한다기 보다는 그런 변화가 진성을 뒤흔들어 놓지 않을까 걱정했다. 현준은 진성이 어떻게 변한다 하더라도 자신은 결코 그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현준의 조심스러운 말에 중얼거리며 흐느끼던 진성은 천천히 일어났다. “그래... 그래.. 가자...” 현준은 어지러운 듯 약간 비틀거리는 진성을 부축해서 차에 태우고는 자신의 집으로 천천히 차를 운전하기 시작했다. 회사에서는 진성에게 추가로 삼일간의 휴가를 허락했다. 진성은 장례식 다음날 하루 종일 방안에서 나오지 않아 현준 어머니를 긴장시켰다.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가자 해가 중천에 밝도록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진성을 본 후에야 현준 어머니는 안심을 했다. 그 다음 날은 현준 어머니와 따뜻해져 오는 정원에서 커피를 마시며 못 다한 얘기를 할 정도로 회복이 되었다. 진성의 밝은 웃음 이면에 숨겨진 무거운 감정들을 읽지 못할 현준 어머니는 아니었지만 일부러 밝은 부분만을 보려고 노력했다. 진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시간임을 현준 어머니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삼일 째 되는 날에 진성이 사라져서 한바탕 난리가 났다. 엄마의 연락을 받은 현준은 사부 유조의 집에서 진성을 찾을 수가 없자 곧 차를 몰고 회사에는 달랑 전화 한 통 하고는 서해안으로 내달렸다. 현준은 충남 대천 근처의 보령으로 갔다. 하루 밤을 샐 각오를 하고 내려온 현준은 하루에 두 번 밖에 없는 마지막 배로 나오는 진성을 볼 수 있었다. 현준은 그런 진성을 보며 밝게 웃었다. “하하하... 어떻게 알았냐?” “네가 갈 곳이 여기 아니면 어디 있냐? 잘 있더냐? 그 섬..” “당연하지. 휴우...... 조금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 아, 여기 있을 게 아니라 뭐 좀 먹자. 배고프다. 아, 우리 조개 구이 먹으러 갈까?” “좋지...” 현준과 진성은 평소 잘 먹지 않는 소주까지 한잔 하면서 거나하게 저녁을 먹었다. 현준은 한참 저녁을 먹을 때 걸려온 엄마로부터의 전화로 한바탕 혼났다. 사람 걱정하는데 연락도 안했다며 엄청나게 꾸지람을 들었다. 현준과 진성은 저녁을 잘 먹고는 대천 해수욕장으로 이동했다. 고운 모래와 밤바람이 시원했다. “할아버지께서 내게 그래도 커다란 선물을 남겨 주고 가셨다.” “........ 선물?” 한참 동안 바다만 쳐다보고 있던 진성은 옆에 앉아 있는 현준을 보지도 않은 채 말을 꺼냈다. “사실, 내가 아버지와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가장 슬펐던 것은..... 그 분들의 마지막 말을 내가 들을 수 없었다는 것이었거든. 아무리 생각해도 돌아가셨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거든. 아마도 그래서 내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편하게 해 드리지 못한 것 같아. 그런데 할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내게 할 말씀을 다 하시고 아주 편하게 가셨거든. 아주 슬펐지만..... 슬펐지만... 너무 할아버지가.. 할아버지가 고마워........” “..........” 현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할아버지가 내게 유언까지 남겨 주셨다니까. 하하하하... 그 생각만 해도 나는 기분이 좋아. 너무 이상하지? 장례식 끝난 지 며칠이라고... 이렇게 기뻐하는 손자라니.. 하하하하.. ” 진성은 웃었지만 현준은 그 웃음이 더 마음을 파고 들어와 찔렀다. “고등학교 때 혼자 살면서 정말.... 정말... 죽고 싶었던 때도 많았고.... 그랬는데.. 현준이 너를 만나서 호강하며 살고 있잖아. 그런데다가 할아버지까지 만나고.... 할아버지의 유언까지 들을 수 있었다니... 나는... 행운아야... 행운아....” “진성아.......” 현준의 걱정스러워하는 말에 진성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안 해도 된다. 진심으로 나는 행운아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둘도 없는 친구인 네가 내 옆에 있어서 얼마나 든든했는지 모른다. 아주 좋았지. 게다가 지금은 내가 열심히, 즐겁게 살아야할 이유가 생겼으니... 이제 내가 기뻐하는 이유를 알겠지?” “그래.. 그래...” “잘 살아야지..... 하하하하... 할아버지... 안녕히 가세요....” 진성이와 현준은 오랜만에 하나와 함께 식사를 같이 하기로 했다. 그 동안 너무 바쁜 일들이 많아서 서로 잘 보지도 못했다. 진성은 몸이 세 개라도 시간 내기 어려울 정도로 여러 일들을 했고 현준 역시 진규를 제대로 된 선수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고 자신도 프로 게이머로서 연습하고 리그에 참가하다 보니 시간이 없었다. 가끔, 아주 가끔 회사에서 지나가면서 몇 마디 주고받는 것이 다였다. 장례식 일도 자기 일처럼 도움을 많이 준 하나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려는 진성에게 현준은 주말에 같이 식사하자고 제의했다. 진성과 현준은 하나를 초대해 주말을 맞이해 유조 어르신 댁을 청소도 할 겸해서 먹을거리를 사서 해 먹기로 했다. 진성과 현준은 거의 처음으로 재래시장을 찾아서 이것저것 샀다. 낚지도 샀고 돼지고기 삼겹살도 샀다. 남자 두 명이 계획성 있게 장보기를 할 턱이 없었다. 진성과 현준은 서로 보고 괜찮다 싶은 것은 모조리 사서 미리 진성이 본가라고 부르는 유조 어르신의 집에 도착한 하나에게 보였다. 당연하게도 하나에게 한소리 들었다. “뭐예요? 이거?” 하나의 매서운 말에 현준은 찔끔하며 말하다 진성을 찾았다. 조금 전에만 해도 옆에 있던 진성은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먹을 것 대충 샀는데......” “도대체 이것을 누가 다 먹어요?” “그냥 진성이와 이것저것 사다 보니까..... 이 정도...다 못 먹을까?” 현준의 진지한 말에 하나는 웃고 말았다. “어떻게 다 먹어요? 세 명이서? 10명은 먹어야 될 양이에요. 10명!” “10명씩이나?” “그래요. 게다가 낚지나 이런 나물들을 조금만 지나면 상해서 먹지도 못해요.” “......” “어쩔 수 없네요. 현준씨, 덕만씨와 동진씨.... 불러요. 그리고 아는 사람도 좀 부르구요. 어차피 이 집에서 살 것도 아니니 오늘 다 해치워야지요.” 한숨을 쉬며 하나는 현준에게 다른 사람들을 불러서 같이 먹자고 했고 현준은 자신의 잘못이 있어서 재빨리 핸드폰을 들고 이리저리 전화하기 시작했다. “동진이 형? 저 현준인데요. 아직 저녁 안 드셨지요? 네.. 네... 여기 진성이 본가거든요. 네... 유조 어르신 댁... 지난번에 오셨잖아요. 네.. 저녁 준비하고 있거든요... 네... 그러니까 꼭 오세요. 기다릴께요. 네? 당연하지요. 두 손은 묵직하게!” “덕만이 형, 저 현준인데요. 여기 지난번에 그 유조 어르신 댁이거든요. 저녁 6시까지 와요!” 동진에게는 자세히 말하고, 상대의 의사도 존중했지만 덕만에게 현준은 통보하듯 말하고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쌀쌀맞다고 생각하겠지만 현준과 덕만은 그 동안의 장난 아닌 장난에 서로 친해져서 그 정도의 말로도 충분했다. 하나는 힘들어하는 진성을 보면서 자신이 진성에게 힘이 되어주지 못해서 너무 미안했다. 특히 잠도 자지 않고 사부 유조에게 조금이라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살았다는 얘기를 현준에게서 들었을 때는 자신은 그 때 무엇을 했나 싶었다. 유조 어르신이 돌아가시자 하나는 용기를 내어 진성의 옆에서 장례식 일을 많이 도왔다. 그런 일에 익숙하지 못한 하나여서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오히려 더 편했다.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낸 사람치고는 아주 밝고 강한 진성에게서 가끔 보이는 그 외로움과 슬픔을 봤을 때 하나는 아무도 몰래 눈물을 흘리곤 했었다. 장례식 때문에 며칠간 거의 유조 어르신 댁에서 같이 지내게 된 하나는 가끔 진성과 얘기할 시간이 있었지만 자신보다는 친구인 현준과 같이 있을 때 더 편하고 더 솔직한 말을 하는 진성을 볼 수 있었다. 하나 자신이 조금은 내성적이라 너스레를 떨고 활달하게 이끌어 주는 것을 잘 못하는 것에 비해 현준은 그런 면이 장점이었다. 하나는 그런 현준에게 조금은, 질투의 감정마저 가졌다. 하지만 하나는 곧 진성과 현준의 관계를 인정했다. 그만큼 같이 지낸 시간과 그 시간 동안의 깊이는 무시할 수 없었다. 자신이 보는 진성보다 더 많은 진성을 현준은 보아왔을 것이다. 매주 같이 본가로 와서 손질도 하고 청소도 하기로 한 진성과 현준의 사이에 하나는 용기를 내어 끼어들었다. 평소 일하는 부분이 완전히 달라 만나기가 쉽지 않은 진성이어서 하나는 이런 조그마한 만남도 중요하게 여겼다. “와... 이게 뭐야? 냄새 좋은데.... 이야.... 이거 다 하나씨가 한 겁니까?” “두 말하면 잔소리. 여기 하나씨 말고 요리할 사람, 아무도 없잖아.” 현준의 전화에 나타난 공동진과 김덕만은 너스레를 떨며 정원에 마련된 정자로 오르면서 나지도 않는 요리 냄새 타령을 했다. 터줏대감처럼 편한 자세로 앉아 있던 현준이 그 둘을 보고는 툭 말했다. “나지도 않는 냄새 얘기를 하다니... 음식은 조금 더 있어야 되는데... 그런데 생각보다 빨리 왔네..” 곧 하나가 정갈한 소반에 차 세트를 가지고는 정자로 왔다. “차 한 잔씩 드세요.” 정자에는 하나와 현준, 동진과 덕만이 앉아서 연두색에서 녹색으로 변하고 있는 정원을 보면서 차를 마셨다. 차를 한 모금 마신 동진은 현준을 보며 물었다. “현준아, 진성이는?” “진성이는.... 지금 도장에서 수련하고 있어요. 궁금해도 절대 가면 안 됩니다. 그 사건 아시죠? 안 됩니다.” 진성이가 도장에서 연습하고 있다는 말을 하던 현준은 동진의 눈에 호기심이 비치자 곧바로 말을 바꾸어 절대 가면 안 된다고 못 박았다. 현준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동진과 덕만은 그 사건, 진규가 병원에 실려 간 그 사건을 기억했다. 서로 쳐다보더니 어색한 웃음만 지었다. “진성이는 좀 괜찮냐?” 덕만은 진지한 목소리로 진성의 안부를 물었다. “너무 괜찮은 것 빼고는 다 좋아요.” 약간 삐딱한 현준의 대답이었다. “하나씨가 고생이네요. 지난번 장례식도 수고 하셨어요.” “뭘요......” “하나씨, 진성이가 너무 목석이죠? 마음을 조금은 열어도 될 텐데....” “........” “현준아, 배 고프다. 밥 먹자.” 덕만은 갑자기 현준에게 말했다. “왜 나한테 얘기해요. 내가 뭘 한다고...?” “내 말은..... 네가 진성이 좀 데려오라는 얘기야. 진성이가 안 오면 하나씨가 우리에게 밥이라도 주겠냐? 현준아 빨리 뛰어라.” 도장에서 연습을 마치고 온 진성과 현준, 동진과 덕만 그리고 하나는 10인분 정도는 될 음식들을 다 해치웠다. 낚지 전골, 쇠고기 볶음, 돼지 삼겹살 구이, 각종 산채 나물을 마치 걸신 들린 것처럼 해치웠다. 덕만이야 원래 많이 먹기로 소문이 나 있었지만 의외인 것은 현준과 진성이 2인분 정도는 가볍게 해치운 것이었다. 입이 짧은 동진과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먹는 모습만 구경해도 배가 불렀다. 한동안 슬럼프에 빠지리라 예상했던 게이머 스키피오, 진성은 전혀 그 영향을 받지 않은 듯 프로 리그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수의 명성을 여실히 증명했다. 오히려 게임 스타일이 아주 적극적으로 바뀌어 한번 잡은 기회는 거의 놓치는 법이 없어 한 단계 성장했음을 알렸다. 거기에 가장 기분이 나빠진 사람은 당연히 한신, 현준이었다. “뭐야? 도대체? 슬럼프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것은.. 너무하잖아? 야, 강진성, 조금은 힘든 기색 좀 해라. 이게 뭐냐? 5전 5패. 게임 시간이 80분도 안 되다니.... 야, 강진성, 게임하는 상대도 좀 배려하라고 했잖아?” 현준은 진성과의 연속 연습 게임 5번을 80분도 걸리지 않고 참패를 당하고 나서 분통을 터트렸다. 친구로서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예상외로 더 엄청난 실력을 보이자 속에서 뭔가가 욱 하고 치솟았다. “너무해? 떫으면 너도 잘 하면 되잖아?” “뭐?” 확실히 예전과 조금 달라진 진성이었다. 조금 활기가 더 생겼다고나 할까? 좀 더 적극적으로 변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조금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너무 자연스러워 오래 지나지 않아 다들 적응했다. 확실히 진성의 생활에는 무언가 정확하게 말할 수 없는 활기가 넘쳤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문명 온라인 영웅 스키피오의 2차 프로 리그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웨스턴 리그와 이스턴 리그로 나누어 게임을 했지만 인터리그 게임도 많았기 때문에 리그가 달라도 적어도 한번은 서로 게임할 기회가 있었다. 2차 프로 리그의 양상은 확실한 1강과 물고 물리는 관계가 있는 7개 프로팀과 나머지 팀들로 나누어졌다. 자소 소프트는 두 명의 게이머가 특수한 상황에서 이탈해 어쩔 수 없이 기권패를 한 경기를 제외하고는 단 한번도 지지 않아 개발사 프로팀의 저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작년 우승, 준 우승팀인 삼선전자와 쌍룡은행은 많은 준비를 한 후발 주자들에게 질 때도 가끔 있어 다소 아슬아슬한 우위를 가지고 있었다. 리그가 막바지에 이르자 2차 프로 리그의 최종 우승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그 다음 메이저 리그에 참여할 프로팀에 대한 예상도 많아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소 소포트, 삼선전자, 쌍룡은행과 나머지 팀들 중에 하나가 메이저 리그에 진출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아직 리그가 끝나기 전이라 그런 예상들은 조금 이른 것이었지만 그런 말을 완강히 부인할 수만도 없는 일이었다. 2차 프로 리그를 통해 많은 이슈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최초의 여자 프로 선수가 탄생했다는 점이었다. 쌍룡은행의 최유나 선수는 홍일점으로서 게임 성적도 나쁘지 않아 앞으로 여자 프로 선수들이 늘어나리라는 예상을 하게 했다. 또한 시즌 중 게이머 스키피오와 게이머 사신의 맞대결이라는 빅 매치가 있었다. 그런데 스키피오의 기권으로 게임은 흐지부지 되었지만 그로 인해 팬들끼리의 난투극이 일어났고 인터넷에서는 서로를 향해 헐뜯는 양상까지 나타났다. 일각에서 스키피오가 사신을 겁나해서 도망간 거라고 몰아붙이면서 더욱 더 들끓었다. 하지만 돌아온 스키피오가 예전보다 더 안정된 실력으로 승수를 쌓아가고 시즌 중, 후반에 만난 지난 리그 다승왕 정성진과 승률왕 게이머 사신, 김한석을 어렵지 않게 휘몰아쳐 이긴 후로는 그런 소문은 완전히 사라졌다. “최강석?” “그래 나 강석이다. 잘 있었냐?” “왜 안 하던 전화를 다하고... 무슨 바람이 부셨소이까?” “장난하지 마. 너, 그 소식 들었어?” “무슨 소식? 또 무슨 재미있는 게임이라도 발표 됐냐?” “아니, 그게 아니라 문명 온라인 패치가 곧 발표된다고 하던데... 못 들었냐?” “패치? 왜? 문명 온라인은 버그 없기로 유명한 게임이잖아. 버그 같지 않은 이스터 에그 같은 것은 있지만 패치라니...? 무슨 일이 있나?” “확실히는 모르겠는데 그 패치가 그냥 단순한 패치가 아닌 모양이더라.” “단순하지 않다니?” “패치는 패치인데.... 그 내용이나 용량이 거의 확장팩 저리 가라할 정도라고 말들이 많아.” “확장팩?” “응.... 일단 문명 온라인 공식 사이트에 가 봐야겠지... 이만 끊는다. 너도 한번 들어가 봐라.” 문명 온라인 패치 발표 예정일과 그 내용이 공식 사이트에서 공개된 날 문명 온라인의 광팬이라고 자처하는 많은 게이머들은 서로 빨리 확인하라는 전화까지 하며 문명 온라인 공식 사이트의 하루 최고 히트수를 갱신해 버렸다. 문명 온라인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 중에 가장 큰 것은 바로 ‘팀플레이 & 멀티플레이 지원’이었다. 그 동안 1:1 밖에 할 수가 없어 멀티플레이에 대한 욕구가 강했던 팬들로서는 자소 소프트가 발표한 패치 내용에 멀티플레이가 들어가 있어서 아주 만족해했다. 게다가 여러 명이 하나의 문명을 컨트롤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팀플레이까지 포함되어서 역시 자소 소프트라는 인식을 강하게 심어 주었다. 이런 대대적으로 공개될 예정인 패치는 아마추어 버전용이었다. 어차피 프로의 경우에는 게임 접속기까지 업그레이드할 예정이라 공개할 필요가 없었다. 거의 게임이 완전히 바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패치였다. 어떤 사람들은 그야말로 ‘패치를 가장한 확장팩’이라는 이름을 붙여 인터넷에 뿌릴 정도였다. 보통의 게임이 그 반대인 ‘확장팩을 가장한 패치’인데 반해 문명 온라인은 기존에 구매한 게이머들을 배려해서 새로이 확장팩으로 내 놓아도 손색이 없는 게임을 패치로 발표해서 주머니가 가벼운 게이머들의 환호를 받았다. 이 발표로 인해 차기 3차 프로 리그에서는 다소 변화가 있으리라 예상되었다. 팀플레이와 멀티플레이가 생겼기 때문에 기존의 팀 리그는 팀플레이가 주가 되고 멀티플레이와 개인플레이는 따로 대회가 생길 것이라는 전망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또 하나 주목해야할 사실은 팀플레이와 멀티플레이가 지원됨과 동시에 기존의 1:1 게임에서의 지도도 커져 주위의 땅이 텅 비어있지 않고 중립 성향의 국가가 들어서 무작정 상대의 배후를 치기 위해 중립국으로 쳐들어갔다가는 큰 봉변을 당하게 되어 더욱 더 게임에 현실감을 부여했다. 그런 설정으로 인해 지금까지 그리 선호되지 않았던 외교 플레이가 붐을 일으키리라 예상되었다. 주변의 중립국들을 자신의 동맹국으로 삼으면 엄청난 이득이 있기 때문에 병법에서의 이간책 등도 실제 문명 온라인 게임에서 연구되고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패치에는 또 다른 팬들을 놀라게 할 만한 것이 들어가 있었다. 바로 문명 제너레이터와 밸런스 레귤레이터였다. 기존의 8개 문명 뿐 아니라 유저가 자신이 원하는 문명을 여러 가지 조건과 이름으로 창조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문명 제너레이터였고 그 문명과 다른 유저가 만든 문명을 이용해서 게임을 할 때 밸런스를 조절해 주는 것이 바로 밸런스 레귤레이터였다. 그로 인해 팬들은 8개의 문명이 아니라 수백, 수천, 수만의 문명들을 창조해서 서로의 문명을 통해 기량을 겨룰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밸런스 레귤레이터는 일반적인 밸런싱을 해 주는 것으로 완벽한 밸런스 조절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런 자신만의 문명을 창조해서 그것을 게임으로 플레이 해 볼 수 있다는 자체가 즐거움이었다. 자소 소프트는 팬들이 만든 문명 중에서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얻는 문명들을 제대로 밸런싱 작업을 거쳐 다시 팬들에게 공개하는 문명 재창조 코너를 문명 온라인 홈페이지에 마련해서 그런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킬 예정이었다. 이런 패치에 대한 테스트에 자소 소프트의 프로팀 프로 선수들은 관여하지 않았다. 그 동안 제기되었던 프로 선수의 알파 테스트 문제와 관련해 다른 프로팀들의 민감한 반응에 이번 패치는 따로 알파 테스터들을 구해서 테스트 했기에 진성과 현준, 진규 역시 그 패치 내용만 들어서 알고 있을 뿐이었다. 로플팀의 밀리터리 아트는 싱글 플레이의 완성 단계에 접어들었다. 일정한 알파 테스트 동안 아무런 문제점도 발견되지 않았고 게임 내용도 아주 좋다는 평가가 많아 로플팀은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의외의 곳에서 태클이 들어왔다. 밀리터리 아트가 게임으로서 대중들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인체에 무해하다는 일종의 증명서가 필요했다. 그래서 여러 연구기관에 의뢰했는데 예상과는 달리 유해하다는 결과가 나와 버렸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주된 이유는 너무 현실성이 강하다는 것이었다. 게임에 몰입하면 현실과 게임을 혼동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 그 주요 골자였다. 로플팀으로서는 정말 맥 빠지는 일이었다. 그렇게 현실성을 부여하려고 노력했는데 이제는 그 현실성이 문제가 되다니. 결국 게이머를 제외한 적을 조금 마네킹과 비슷하게 만들고 피를 붉은 색이 아닌 녹색으로 처리하고 심지어 무기류도 다소 제한한 후에야 검열을 통과할 수 있었다. 로플팀은 이왕 수준을 낮추는 것, 청소년들도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서 성인 개인용으로 판매하는 것과 더불어 게임 스테이션이나 보통 오락실의 업소용 게임으로도 공급하기로 결정했다. 그와 관련된 것들은 자소 소프트의 다른 팀에서 해 주었다. 로플팀의 팀장인 진팀장의 입김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그리 큰 문제는 없었다. 자소 소프트는 인터넷에 밀리터리 아트 공식 홈페이지를 만들어 게임에 대한 정보를 공개했다. 최초의 본격적인 가상현실 게임이라는 소개와 더불어 게임의 구체적인 장르와 단계에 대한 얘기도 빼놓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홈페이지를 방문했는데 일단 자소 소프트에서 만든 게임이라는 것에 기대를 건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동경 게임쇼에서 보인 진보된 가상현실 게임 밀리터리 아트의 시연을 뉴스나 직접 본 사람들의 말에 따라 알게 된 사람들로 아주 매니아적인 성향이 강했다. 문명 온라인 영웅 스키피오만 하더라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지금도 끌고 있었지만 얼마 전에 발표된 문명 온라인의 패치와 새로운 가상현실 액션 게임인 밀리터리 아트가 소개되자 사람들의 자소 소프트에 대한 인식이 더 좋아졌다. 자소 소프트가 만든 게임은 뭔가 다르다는 이미지가 사람들의 뇌리에 박히게 된 것이다. 거기에 밀리터리 아트의 테스터 중에 게이머 스키피오와 한신이 참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기존의 문명 온라인의 공식 사이트의 폐인들과 스키피오, 한신의 팬사이트 회원들이 대거 밀리터리 아트 홈페이지를 방문해서 엄청난 히트 수를 기록했다. 뒤이어 밀리터리 아트의 게임 화면이 공개되자 인터넷은 그야말로 들끓었다. 동경 게임쇼에서의 시연도 뉴스를 통해 보도되었지만 게임쇼라서 뭔가 편집이나 여러 가지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게임 팬들도 자소 소프트에서 한 가지 게임을 여러 앵글에서 잡은 화면으로 상세하게 보여주고 확실하게 게임 화면이고 전혀 다른 손질은 한 적이 없다고 확실하게 말하자 점점 믿는 눈치였다. 그런 작은 믿음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밀리터리 아트의 공식 홈페이지는 연일 게임 출시와 다른 게임 화면에 대한 문의가 줄을 이었다. “이제 곧 출시인가?” 진팀장은 마치 잘 키운 딸을 시집보내는 듯한 기분이었다. 철저한 알파 테스트 후에 베타 테스트 없이 바로 출시를 결정했기 때문에 생각보다 빨리 출시가 결정되었고 진팀장에 그에 따라 더 마음이 허전했다. 출시한다고 해도 여전히 밀리터리 아트와 최종 목적인 로플의 개발과정이 남아 있지만 사람 마음이 그리 쉽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진성의 할아버지이자, 사부인 유조가 숨을 거둔지도 벌써 한달이 넘은 상태였다. 걱정을 많이 했던 진성은 오히려 예전보다 더 힘차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진팀장과 주변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마음가짐이 달라져서인지 문명 온라인의 프로 게이머로서도 대단한 역량을 발휘했고 밀리터리 아트의 개발자로서도 단순히 자신의 의사만 알리는 소극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전체 게임의 기획이나 각 파트의 커뮤니케이션 등에도 아주 활발하게 참여할 정도였다. 그런 덕분에 예정보다 밀리터리 아트의 싱글 버전 출시일이 당겨져 결정되었다. “대장님, 무슨 한숨을 그리 내 쉽니까?” “한숨? 아... 밀리터리 아트 출시한다니 조금 아쉬워서.. 그렇지. 진호, 자네는 아쉬운 마음이 있지 않나?” “아쉬워요? 아주 개운한데요. 그 동안 고생해서 그래도 이 정도 만들었으니.. 이제는 나가서 밥벌이 해 줘야지요. 그래야 우리가 로플을 마음 놓고, 편하게 개발하지요. 안 그렇습니까?” “하하하... 진호, 자네 말이 맞기는 맞지....” 밀리터리 아트는 예약 판매를 하지 않았다. 워낙 게임기 자체가 고가여서 일단 출시 후에 주문을 통해 판매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출시와 동시에 서울 근처의 게임 스테이션에 게임기를 깔아 그 반응을 살펴보기로 했다. 대박을 자신하고 있었지만 꼭 그렇게 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잘 되겠지? 잘 되어야지. 잘 될 거야.” 진팀장은 혼자 중얼거리며 얼마 남지 않은 출시일 준비를 서둘렀다. 진성의 생활은 거의 일정했다. 아침에 출근해서 문명 온라인 팀의 요람에서 현준, 진규와 같이 연습 게임을 두, 세 게임 한 후에 로플팀의 요람으로 자리를 옮겨서 밀리터리 아트의 막바지 작업을 같이 했다. 점심 식사 후에 로플팀의 요람에서 여전히 밀리터리 아트의 테스트와 사부 유조가 남긴 것을 가상현실을 통해 몸에 익힌 후에 다시 문명 온라인팀으로 와서 현준, 진규와 연습 게임을 가졌다. 일이 있을 때는 저녁을 먹고 나서 회사로 들어와 일을 마저 했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빨리 퇴근해서 본가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런 생활 자체의 리듬은 비슷했지만 진성은 새로운 것들을 하나씩 시도했다. “Listen and repeat. My watch always gains 10 minutes a day.” “My watch always gains 10 minutes a day.” “아아아아압.... 진성아, 너 안 피곤해?” 하품을 늘어지게 하면서 현준은 옆에 있는 진성에게 나지막하게 물었다. 늦게 자지는 않았지만 7시까지 학원으로 나와 강의를 들으려니 쏟아지는 잠을 주체할 수 없는 현준이었다. 진성이 영어 학원에 다니기로 결심하고 곧바로 실행에 옮길 때 옆에 있던 현준 역시 동참했다. 하지만 매일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서 학원으로 와야 된다는 것은 너무도 큰 부담이었다. 게다가 10명도 되지 않는 사람이라서 제대로 졸기도 힘들었다. 그야말로 돈 내고 고생하는, 사서 고생하는 꼴이었다. 자신보다 더욱 바쁘게 살고 피곤할 진성이 참고 열심히 강의를 들으려는 모습에 질 수 없다며 열심히 해보려는 현준이었지만 마음만 앞설 뿐이었다. “Hey... you!!! You look so..... You didn't sleep a wink last night? really?” 현준은 외국인 강사에게 딱 걸렸다. 엉거주춤 일어난 현준은 자신에게 뭐라고 말하는 강사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현준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확실히 아는 영어를 했다. "OK!" "OK? What?" "Just OK!" "..........." 강사는 포기한 모양인지 손짓을 해서 다시 앉으라고 한 뒤에 계속 강의를 진행했다. 현준은 그런 강사의 제스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번 하품을 한 뒤에 진성에게 물었다. “너, 정말 대단하다. 안 피곤해?” “............” 진성은 현준을 한번 쳐다본 뒤에 다시 강사의 말에 집중했다. 진성은 새벽에 영어 회화 학원을 다니기로 결심하고는 바로 실행에 옮겼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영어는 필수라는 생각에 없는 시간을 쪼개 영어를 익히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자신이 익힌 팔극신권이 팔극권과 중국 무술과 정통 한국 무술에서 나왔기 때문에 나중에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무술에 대한 진지한 생각과 그 기술의 원류와 근거를 찾을 때 중국어가 필요하다는 판단이어서 중국어를 배우려다가 한자를 어느 정도 읽는 것은 된다는 마음에 일단 영어부터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 진성이었다. 그런 결정에 따라하려다가 고생한 사람은 현준이었지만 현준의 아버지, 어머니는 스스로 뭔가를 하려는 진성과 현준의 시도에 기분 좋아했다. 또한 진성은 프로그래머로서, 게임 개발자로서 기본적인 것들에 대해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다. 공부할 시간은 없었지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일단 시작은 한 상태였다. 진성이 비록 밀리터리 아트의 게임 개발자라고 하지만 그것은 가상공간에서의 진성의 능력 때문이었다. 실제 컴퓨터를 이용한 제어에는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가상공간에서의 진성에게는 그런 작은 제어와 관련된 것은 알 필요가 없었지만 사람들 간의 커뮤니케이션이나 좀 더 쉽게 사람들을 설득하려면 당연히 있어야 했다. 진성은 그런 점들을 인정했기 때문에 자신의 부족한 부분들을 채우기 위해 애썼다. 그런 면은 문명 온라인 프로 게이머로서의 진성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쳤다. 진성은 한동안 밀리터리 아트에 대한 관심에 약간은 문명 온라인을 경시했다.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순간순간 생긴 전략의 포인트를 되는대로 현준과 진규에게 시험했고 그런 것으로 게임을 이끌어왔다. 하지만 진성은 그런 면들이 프로에게는 허용되지 않음을 깨닫고 다시 병법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실제적인 전투 기록이 많이 남아 있는 서양 전쟁사를 공부함으로써 이론 뿐 아니라 실제에 대한 지식까지 섭렵했다. 하지만 책으로 얻은 것은 지식일 뿐이지 지혜가 아니었다. 진성은 그런 지식을 꾸준한 연습을 통해 서서히 지혜로 바꿔 나갔다. 진성의 이런 변화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진성의 처음부터 시작하는 병법 연구는 특히 진규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아직 진규는 자신만의 독특한 전략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런 진규에게 병법과 전쟁사의 지식에서 보물과 같은 지혜를 어떻게 캐낼 수 있는지 진성은 하나하나 가르쳐 주었다. 진규는 그야말로 물고기가 아니라 물고기를 낚는 방법을 어렴풋이나마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현준 역시 진성과의 연습으로 자연스럽게 다양한 전법에 대해 적응할 수가 있었다. 문명 온라인 영웅 스키피오, 제 2차 프로 리그의 정규 시즌이 끝나고 곧이어 웨스턴 리그와 이스턴 리그의 코퍼 시리즈와 실버 시리즈, 그리고 대망의 골드 시리즈가 이어질 예정이었다. 웨스턴 리그에서는 각축을 벌인 끝에 자소 소프트, LQ 전자, 쌍룡은행, 선린상사가 코퍼 시리즈에 진출했고 이스턴 리그에서는 삼선전자, 삼일이동통신, 고려상사, 한신제약이 각각 올라왔다. 그래서 자소 소프트와 선린상사, LQ 전자와 쌍룡은행이 맞붙게 되고 삼선전자와 한신제약이, 삼일이동통신과 고려상사가 각각 코퍼 시리즈에서 대결하게 되었다. 정규 리그가 끝나자 각 팀들의 성적이 나왔는데 2차 리그임에도 불구하고 자소 소프트에서 각종 상을 휩쓰는 쾌거를 거뒀다. 정규 리그 우승에 다승왕과 승률왕도 자소 소프트에서 나왔다. 모든 전적 동안 두 번 밖에 지지 않은 게이머 한신이 다승왕에 올랐고 단 한번 졌지만 경기수에서 부족해 승률왕에 오른 게이머 스키피오가 그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2차 프로 리그의 경향은 웨스턴 리그의 강세였다. 이스턴 리그보다 전체적으로 웨스턴 리그 소속 프로팀들의 성적이 좋은 편이었다. 그래서 웨스턴 리그에서 5위로 아깝게 코퍼 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한 팀들이 조금 불만을 터트리기도 했다. 그 이유는 웨스턴 리그의 5위가 이스턴 리그의 3위보다 성적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운영위원회도 그런 점을 인정해서 다음 프로 리그에 그 성적을 반영해서 리그를 짜고 또한 다른 제도를 도입해서 그런 면들을 줄이기로 합의했다. 6월 초로 예정된 메이저 리그의 일정 전에 골드 시리즈까지 치러야 했기에 그리 넉넉한 시간은 아니었다. 운영위원회의 발표에 따라 각 리그의 4위팀까지는 또 한번 열띤 대결을 펼쳐야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승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고 준우승과 나머지 메이저 리그에 진출할 두 팀이 어떻게 결정될지에 큰 관심을 두었다. 코퍼 시리즈에서 선린상사와 맞붙게 된 자소 소프트는 게임 대회장인 슈퍼 센터에 게임 시작 두 시간 전에 도착했다. 대회장을 둘러본 뒤에 대기실로 들어온 진성, 현준 그리고 진규는 자리에 앉은 뒤, 게이머 옷으로 갈아입었다. “사람들이 다 우리가 우승할 거라고 하니까 더 부담된다. 그런 것보다는 차라리 전력이 약한데 그 틈을 비집고 올라와서 우승하는 게 더 멋있는데...... 진성아, 그렇지?” “.... 그렇긴 하지. 세 번 게임 해서 두 번 이겨야 하니까. 내가 생각할 때, 그 날의 컨디션에 따라 결과가 갈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럴 때 지면 정말..... 기분 더럽겠지?” “현준이 형... 저 정말 긴장 되거든요....... 막 손이 떨려요.” 긴장했는지 얼굴까지 조금 창백한 진규는 손바닥을 비비면서 심각하게 현준에게 말했다. 하지만 현준은 그런 진지한 질문에 진지하게 대답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자신은 다 안다는 표정으로 현준은 진규에게 선언하듯 말해버렸다. “손이 떨려?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 평소에 술, 담배 좀 끊으라고. 응? 말 좀 들어라.” “........ 저 술, 담배 안 하는데요...” 갑자기 술, 담배를 끊으라는 말에 진규는 영문을 몰라 가만히 있다가 대답했다. 진규는 현준에게 자주 당했지만 아직도 그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진규와 현준의 말을 들은 진성은 또 그러냐는 눈빛으로 피식 웃었다. “수전증 아니야?” “예? 현준이 형!!!!” 자신의 말을 다 듣고서야 농담인 줄 알게 된 진규의 반응에 현준은 마구마구 웃었다. 너무 웃어서 얼굴까지 벌겋게 달아오르자 그제야 웃음을 멈췄다. 진규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자 현준은 웃으며 말했다. “진규야, 이제 손 안 떨리지?” “네? 아....... 네...” “다, 긴장해서 그래. 긴장해서. 저 괴물 같은 진성이 녀석 말고는 나도 경기 전에는 떨리니까. 손이 떨리는 게 정상이야. 하지만 너무 심한 것은 안 되겠지.” 갑자기 진규 옆으로 다가가 귀에 대고 나름대로 소곤소곤 대는 현준이었지만 조용한 대기실에서 충분히 들을 수 있도록 말했기 때문에 진성이 못 들을 리가 없었다. “현.준.아. 뭐? 괴물?” “하하하하... 들었냐?” “그렇게 크게 얘기하는데 어떻게 못 들을 수가 있냐? 괴물?” “꼭 그런 것은 잘 들어요. 그나저나 오늘 우리가 선린상사를 이기면 누가 올라올까?” 현준은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고 진성 역시 어물쩡 넘어가 주었다. “음... LQ 전자 아니면 쌍룡은행이 아닐까?” “나는 쌍룡은행이 올라 왔으면 좋겠다. 게이머 사신 김한석과 붙어보고 싶거든.” “한석이와? 음... 아마도 불가능할 걸. 우리 정신 차린 진규가 예전처럼 쉽게 지지 않는데다가 그 일본에 대해서도 많이 연구했으니 지지는 않을 것 같고, 한석이는 보통 마지막에 하니까 내가 중간에서 이겨버리면.... 너는 한석이와 게임할 기회도 없을 텐데...” “... 뭐야? 그렇게 되나?” “쌍룡은행이 오더를 바꾸지 않는 한, 너 뿐 아니라 나도 한석이와 붙을 기회는 없을 거야. 뭐, 쌍룡은행이 초반에 지고 싶지 않다면 한석이를 앞으로 배치하겠지만. 어쩌면 거기에 기대를 걸 수도 있겠지.” “음.... 한석이와 꼭 한번 붙어보고 싶었는데...” “그거야 일단 쌍룡은행이 올라 와야지. LQ 전자도 만만치 않으니까.” “안녕하십니까? 아나운서 김동수입니다. 오늘 웨스턴 리그의 코퍼 시리즈 중 첫 경기를 중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해설에는 역시 홍진호씨입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어떻습니까? 오늘 첫 경기는 어떻게 전망하고 계시는지요?” “네, 2차 프로 리그 최강팀인 자소 소프트와 웨스턴 리그 4위인 선린상사와의 대결인데 일단 객관적으로는 자소 소프트가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리그 최고의 더블 스토퍼가 존재하는 자소 소프트는 그야말로 철옹성과 다름없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 관계로 리틀 스키피오 성진규 선수를 이기지 못하면 마지막 게임까지 가기도 힘들기 때문에 선린상사는 첫 게임에 신경을 많이 쓸 것으로 봅니다.” “그렇군요. 조금 있다가 웨스턴 리그 코퍼 시리즈 첫 경기를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진규야, 열심히 해라. 오늘 지면.... 알지?” “............” 게이머 리틀 스키피오를 찾는 방송이 나오자 막 정신을 집중했지만 여전히 떨리는 손을 하고 대기실을 나가려는 진규에게 현준은 웃지도 않고 살벌하게 말했다. 농담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긴장해서 경기 나가려는 사람에게 저런 말을 하다니. 진규는 고개를 돌려 진성이를 바라보았다. “진규야, 이겨라. 무조건 이겨라. 나 오늘 게임하기 싫다.” “...........” 진규는 괜히 진성이를 봤다는 생각을 했다. 막내인 자신이 큰 경기에 처음으로 나서는데 위로는 못해 줄망정 부담만 팍팍 주는 두 선배를 보던 진규는 대기실을 나가다 옆에 앉아 있는 매니저 서재필을 힐끗 쳐다보았다. “지면........... 방출이다.” “...........” 진규는 할 말이 없었다. 그냥 나가려는데 옆에서 또 말이 들렸다. 매니저 옆에 있던 보디가드 이준이었다. “지면........... 안 태워준다.” “...........” 진규는 밖으로 나가며 이를 갈았다. 자신과 같은 팀이라는 사람들이 모두 자신이 지기를 바라는 듯했다. 서러운 마음에 정말 이를 악물었다. 기필코 이기리라는 생각을 마음속에 가득 채웠다. 떨리던 손이 멈췄다는 사실은 모른 채 마음속으로 네 사람을 계속 욕하면서 대회장으로 나갔다. 진규는 로마 문명으로 시작했고 상대는 그리스 문명이었다. 진규는 상대가 그리스 문명인 것을 보자 현준을 생각했다. ‘뭐? 열심히 해라. 지면 알지?.... 두고 보자.’ 진규의 주된 문명 상대가 바로 현준이었기에 그리스 문명을 상대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엄청난 각오를 해서인지 진규의 컨트롤에는 비장감마저 감돌았다. 머리로는 장난이라는 게 이해됐지만 마음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진규는 상대를 마치 현준이라고 생각해서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자소 소프트는 게이머 스키피오가 나서기도 전에 2승으로 먼저 실버 시리즈에 진출하게 되었다. 진규는 첫 포스트 시즌에서의 승리에 조금 들뜨기도 했지만 네 사람의 차가운 말에 상처를 입었는지 말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 상태는 네 사람이 진규를 앞에 두고 박장대소하며 웃는 바람에 더 심각해졌다. 자신 말고는 어느 누구도 그런 심각함을 알아주지 않았기에 진규는 스스로 기분을 푸는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한강 둔치에 처절하게 스트레스를 푸는 괴성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쉽게 올라간 자소 소프트와는 달리 LQ 전자와 쌍룡은행은 피 튀기는 접전을 벌렸다. 특히 마지막 게임은 게이머 사신과 게이머 조전수가 비기는 바람에 재경기까지 가서 결국 게이머 사신이 승리해 어렵게 실버 시리즈에 진출함으로써 자소 소프트와의 대결을 앞두고 있었다. 쌍룡은행은 그와는 별도로 이미 확보된 메이저 리그 진출 자격에 더 기뻐했다. 4개팀이 메이저 리그로 진출하도록 결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각 리그 우승, 준 우승팀이 그 출전자격을 가지게 되어 있었다. 자소 소프트와 쌍룡은행은 이미 메이저 리그 진출권을 획득한 상태였다. 이스턴 리그는 예상대로 삼선전자와 삼일이동통신 간의 실버 시리즈가 결정되었다. 두 팀 또한 메이저 리그 진출권이 확보되어 아직 리그 우승이나 골드 시리즈 우승이 결정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기뻐했다. 한편 리그의 메인 스폰서였던 LQ 전자는 코퍼 시리즈에서 쌍룡은행에 분패해 죽 쒀서 개 준 꼴이 되고 말았다. 이스턴 리그의 실버 시리즈가 삼선전자의 우세가 점쳐져 싱거운 게임이 되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웨스턴 리그의 실버 시리즈는 모두가 기대하는 빅게임이었다. 게다가 양 팀이 합의를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두 팀 모두 최고의 선수를 선봉으로 내세웠다. 쌍룡은행의 게이머 사신, 자소 소프트의 게이머 스키피오가 선봉으로 나서 대결을 벌일 예정이었다. 객관적으로 자소 소프트의 우세가 예상되지만 많은 사람들의 관심은 우승팀보다는 게이머 사신과 게이머 스키피오의 대결이었다. 시즌 중에 처음에는 스키피오의 기권이었고 그 다음에는 게이머 사신의 패배였다. 그 뒤로 스키피오와 사신의 대결 자체가 없었기에 사신의 복수전으로 봐도 이상할 게 없었다. 분위기가 프로 리그도 중요하지만 그 다음 메이저 리그에 관심이 가 있는 상황에서 팀 승리보다는 프로 게이머 개인의 대결을 사람들은 더 기대했다. 진성은 자신이 갈고 닦은 초기의 빠른 군대강화법을 쓰기 위해 컨트롤하면서 상대의 위치를 알기 위해 빠른 정찰을 보냈다. 상대의 문명이 이집트임을 알기 때문에 진성은 초반 정찰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부분은 문명 온라인의 일반적인 게임 운영 방법 중 하나였다. “초반에 승부를 걸어올까? 아니면 방어전일까?” 이집트 문명은 초반에 병력 운용이 쉬워 극단적인 초반 공격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 반대로 축성 기술이 좋아서 문을 철저히 닫고 방어전을 이용할 수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초보용 문명이라고 놀려대지만 진성은 절대 게이머 사신이 운영하는 이집트가 만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슬금슬금 가랑비에 젖듯 모르는 가운데 휘말리는 경우가 많아 주의해야했다. 진성은 상대 진영의 분리를 처음부터 계획했다. 상대가 초반에 공격에 나선다면 튼튼한 방어와 꾸준한 발전으로 상대를 압박하고, 상대가 방어전으로 간다면 NPC 군단을 여러 개 보내 상대를 일단 봉쇄할 생각이었다. 상대를 압박하면서도 봉쇄하기란 쉽지 않았다. 게다가 게이머를 상대로 NPC가 제대로 버텨내기란 쉽지 않았다. 진성은 그 타이밍을 잡기 위해 노력했다. 정찰 결과, 상대는 방어전이었다. 진성은 최대한 빨리 2개 군단을 초기에 만든 수송선에 태워 이집트로 보냈다. 더 이상의 병력도 없었거니와 이미 만들어진 배를 총동원했기 때문에 굉장히 빠른 시간에 원정을 나설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병력으로 절대 적을 섬멸할 수는 없었다. 진성은 몇 가지 명령만 원정군에게 내려 출발시킨 후에 여전히 문명의 발전과 군대강화법을 완성시키기 위해 바삐 컨트롤을 했다. 사신은 초반에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상대가 자신보다 초반에 약한 로마 문명이지만 게이머 스키피오가 워낙 상대 수읽기에 능하고 초반에 이집트 문명 뺨치게 강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안정적인 방어전으로 돌입했다. 이집트 문명은 방어전으로 가닥을 잡은 뒤, 일정 시간이 지나면 그야말로 뚫기 힘든 방어력이 생겼다. 수십만 명이 공성무기를 통해 성을 공략해야 가능했다. 물론 여러 가지 계략으로 정면대결의 공성전을 피할 수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공성전은 아주 힘든 것이었다. 그렇다고 보급을 끊지 않은 채로는 고사작전을 펼치기도 힘들었다. 게다가 원정군의 불리함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는 법이다. 여러 가지 요인들을 종합한 결과 사신은 방어전을 선택했고 적절한 요충지에 앞선 축성기술을 통해 성을 쌓기 시작하는 한편 전차 부대 역시 양성하기 시작했다. 사신은 일단 수송선과 같은 이동수단에 대해서는 신경을 끊었다. 사신 자신이 로마로 쳐들어가서 끝장을 내는 것이 아니라 이집트 내로 들어온 모든 군대를 전멸시킴으로서 상대를 고립, 자멸시키기로 작정했다. 아무리 강한 군대, 사회라도 계속된 전쟁에서 패하면 쿠데타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자신의 군대가 상대에게 타격을 주었다고 판단되면 그 때는 직접 원정을 갈 생각이었다. 사신은 자신의 유리함에 상대의 불리함을 갖추게 해 놓고는 상대와 싸우기를 원했다. 게이머 스키피오가 초반에 보낸 4만여 명의 군대는 아주 빨리 이집트에 도착했다. 게이머 사신은 그 사실을 알았지만 4만의 군대를 먼저 보낸 스키피오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아무리 강병이라고 해도 4만으로 10만의 병력에, 지어지고 있는 성벽이 완성되는 이집트를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사신이 그런 생각을 할 동안 미리 명령을 받은 로마 군단은 엄청난 속도로 행군을 실시했다. 로마 군대의 가장 큰 특징인 기동력이 여실히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기마병보다는 느렸지만 보병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혹사하면서 행군했다. 사신은 그런 행동을 전혀 예상 못했다. 4만의 군대는 요충지에 거의 완성된 성으로 향했다. 성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이집트의 대부분의 군대는 그 요충지에 쌓는 성이 아니라 그 외곽에서 기동훈련과 여러 기본적인 진에 대한 훈련을 실시하고 있었다. 로마 군대가 빠르게 이동하자 게이머 사신이 그 외곽의 군대에 명령을 내렸지만 로마 군대는 그 명령이 도달해서 이집트 군대가 제대로 정비한 후에 움직여 요충지의 성으로 도달하기 전에 먼저 완성 직전의 성을 탈취해 버렸다. 게이머 스키피오는 그 간의 게이머 사신의 플레이를 분석하면서 방어전일 경우에 특히 성을 짓는 패턴을 알기 위해 노력했다. 정확한 패턴은 쉽게 보이지 않았지만 자신이 상대라면 어떻게 할까 생각하니 의외로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사전 정보와 빠른 정찰로 스키피오는 상대의 성의 위치를 대략 알고 있었고 빠른 시간 내에 그곳을 탈취함으로 상대의 예상을 엎어버렸다. 사신은 놀랐다. 4만의 병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직은 시간, 거리적으로 여유가 있다는 자신의 방심이 불러일으킨 결과임을 여실히 깨달았다. 요충지의 성에 4만 명의 적군이 들어가 농성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4만명 병력을 10만이 넘는 병력으로 평지라면 쉽게 제압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런 경우 10만의 이집트 자신의 군대가 공성전을 해야 했다. 보통 공성전을 하려면 세 배의 병력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사신은 이런 저런 계산을 했다. 제일 좋은 방법은 고사 작전인데 그 때까지 게이머 스키피오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고 판단했다. 사신은 일단 계속 양성되고 있는 군대를 그 요충지의 성 너머 거리를 둔 곳에 주둔시켜서 얼마 있지 않아 올 스키피오의 부대와 성안의 4만의 부대가 만나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 혹시나 모를 배후의 습격을 방지하기 위해 5만의 군대를 성 가까운 곳에 주둔시켰다. 그리고 그 5만의 군대는 언제든지 자신이 지휘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그런 후에야 사신은 안심하고 이집트 문명과 전차부대를 양성할 수 있었다. 스키피오는 빠르게 발전시키며 군대를 모으는 대로 수송선을 만들었다. 이번 전략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스키피오는 서둘렀다. 4만의 군대가 고사당하면 아무 의미가 없었다. 시간에 늦지 않도록 재촉했다. 스키피오는 15만의 군대를 수송선을 태우고 자신도 같이 출발했다. 출발하기 전에 교육받은 군단장을 세워 3차 원정군의 계획을 알려주고 그 상륙할 지점까지 일일이 지정했다. 그런 모든 조치를 취한 후에야 스키피오의 2차 원정군은 출발할 수 있었다. 이집트에 도착한 스키피오는 자신의 예상대로 이집트 군대의 배치가 이루어졌음을 알았다. 스키피오가 처음부터 계획한 것은 4만의 병력으로 상대에게 어떤 압박이나 공격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지휘관인 게이머와 주요 병력을 떨어뜨려 놓는 것이었다. 요충지의 성을 공격하기에는 초기에 너무 많은 시간과 병력을 소모할 게 뻔한지라 분명히 고사작전으로 나올 거라고 스키피오는 예상했다. 게다가 4만의 병력 자체는 그리 크지 않지만 원정군과 만나 성까지 얻게 되면 그야말로 문제라고 생각한 사신이 성 너머로 대규모 군대를 주둔시키고 중앙에서 성에 가까운 곳에 5~7만 정도의 병력을 두어 억제력으로 사용할 것임을 스키피오는 정확하게 예상하고 있었다. 거의 하나도 틀리지 않는 상황에 스키피오는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실제 역사에서도 그랬지만 문명 온라인에서도 지휘관이 없는 군대는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그런 것을 강화하는 방법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게이머가 있는 부대가 훨씬 강했다. 게이머 사신은 25만에 달하는 부대를 성 너머에 주둔시킴으로서 15만 정도밖에 되지 않는 로마군대를 억제할 목적이었다. 25만을 15만으로 쉽게 공격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물론 로마 군대의 군대강화법이 아주 효과를 발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른 문명도 그와 비슷한 효과 있는 강화법을 발견했다. 스키피오의 방법에 비해 약간 효용이 떨어지지만 두 배의 군대로 지는 일은 거의 벌어지지 않았다. 확실히 25만의 군대에 15만으로 정면 대결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한 사신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게이머 사신의 판단착오였다. 그런 것은 둘 모두 게이머, 지휘관이 있을 때였다. 사신은 초반에 들이닥친 갑작스런 로마군의 성 점령에 당황한 나머지 절대 피해야 하는 주요 병력의 직접적인 통제를 허술하게 관리한 것이다. 15만명의 로마군대가 한참을 쉬었다가 빠르게 25만의 군대에 접근하는 것을 본 후에야 사신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하지만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다. 6만의 자신이 직접 지휘할 수 있는 군대가 있었지만 성안에서 자신들을 지켜보는 4만의 로마군대를 무시할 수 없었다. 상대를 억제하려고 했던 것이 오히려 상대로 인해 발목을 잡히고만 꼴이었다. “지휘관 있는 군대보다는 지휘관 없는 군대가 더 쉽지.” 스키피오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고는 15만의 유기적인 로마 정예병 전체를 가운데는 약하게 만들고 양 날개를 강하게 만들었다. 숫자의 우위를 보이는 이집트 군대는 정면 승부를 했기 때문에 가운데를 돌파하려고 애를 썼다. 그런 상황에서 점점 이집트 군대의 중앙은 로마군의 중앙으로 들어갔다. 이집트 군대는 그런 우세한 형세에 환호를 지르며 공격을 했지만 그것은 조금 뒤에 있을 패배의 전주곡이었다. 스키피오는 숨긴 발톱의 날개를 빼 들었다. 스키피오의 신호가 있자마자 양 날개는 강하게 앞으로 나오며 이미 로마군의 중앙으로 들어오면서 지휘체계가 흔들린 이집트 군대를 삼켜버렸다. 지휘관이 없던 이집트 군대는 한순간의 전세 역전에 민첩한 대응을 하지 못한 채, 급격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상대의 진영이 무너지는 것을 본 순간 스키피오는 얼마 되지 않는 기병이지만 기병을 출동시켜 상대의 마지막 남은 숨줄기를 확실히 끊어버렸다. 사신은 스키피오의 발 빠른 움직임에 감탄했다. 자신의 실수가 있었지만 생각해 보니 처음부터 스키피오가 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 그렇게 빨리 성을 점거한 이유가 바로 병력을 분리시키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자 사신은 스키피오의 진정한 실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상대의 패턴을 파악하고 빠른 정찰을 통해 상대의 행동을 치밀하게 예상한 다음 NPC를 이용한 대담한 초반 전략, 그것을 나중의 큰 승리로 이끄는 대담하면서도 빈틈이 없이 맞물려가는 전략. 사신은 스키피오라는 거대한 산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빌더를 가지고 상대의 반응에 대비하는 것과는 달리 상대의 행동반경과 전략에 대한 분석으로 모든 것을 자신의 손바닥 안에서 해결해 버리는 능력. 사신, 김한석은 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스키피오 실력의 진면목을 본 듯했다. 운이라고 볼 수도 있었지만 그 운을 실제 결과로 접목시키는 것은 실력이었다. 사신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는 이런 사람과 게임을 할 수 있어 기분이 좋았고 자신 역시 한동안 답보상태였던 터라 앞으로의 길에 대해 서광이 비치는 듯도 했다. 곧 게이머 사신의 항복으로 게임은 끝이 났지만 관객들은 잘 짜여진 듯한 한편의 영화를 본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특히 게임 도중에 말한 스키피오의 나직한 문장 하나를 놓고 관객들끼리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스키피오가 모든 것을 다 계산해 놓은 뒤에 게임을 끝냈다는 말을 했고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다보니 좋은 기회가 생긴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 경기를 본 프로 게이머들은 게이머 스키피오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리그에서도 최고수급으로 손꼽히는 게이머 사신을 상대로 저런 퍼펙트 플레이에 가까운, 손 써볼 방법조차 없는 게임 운영에 당분간 게이머 스키피오의 독주를 예상하기도 했다. 국내 프로 리그가 끝난 이상 저런 게이머가 있다면 메이저 리그에서의 우승도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웨스턴 리그, 실버 시리즈 첫 경기는 게이머 스키피오의 승리로 끝이 났다. 게이머 스키피오가 게이머 사신을 이기고 나자 이미 분위기는 자소 소프트로 흘렀다. 그런 분위기에서 나온 게이머 한신은 쌍룡은행의 선수를 가볍게 이기고는 웨스턴 리그 우승을 결정지었다. 관객들은 이미 앞에서 기대한 것 이상의 재미있는 게임을 본 터라 리그 우승을 차지한 자소 소프트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평소 상대의 수를 읽기에 능하다는 말을 듣는 게이머 스키피오의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경기여서 스키피오의 팬들은 오랜만에 옛날의 그 얼굴 없는 게이머를 연상할 수 있었다. 웨스턴 리그에 이어서 이스턴 리그도 삼선전자가 2:0으로 이겨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양 리그의 우승팀과 준 우승팀이 가려지자 이제 관심은 양 리그의 우승팀끼리 붙는 골드 시리즈로 모아졌다. 웨스턴 리그에서 게이머 사신과 게이머 스키피오가 아주 재미있고 감탄을 자아낼 만한 게임을 한다면 이번 골드 시리즈에서는 게이머 한신과 게이머 정성진의 대결이 눈에 띄였다. 작년 이벤트 매치에서 한신에게 패한 정성진의 도전이라고 볼 수 있었다. 두 팀도 미리 오더를 통해 첫 대결을 정성진과 한신으로 발표해 더욱 더 그 관심에 불을 당겼다. “어때? 기분 좋아?” “당연히 좋지. 정성진과는 한번 다시 붙고 싶었는데 잘 됐지....... 그 사람도 많이 연습했을 테니까. 하하.. 잘 하고 올께. 진규야, 응원해라.” 진성의 물음에 활기차게 대답한 현준은 약간 떨어져 있는 진규에게 응원하라고 가볍게 말했다. 진규는 기다렸다는 듯이 목소리를 일부러 깔고는 말했다. “..... 형.... 지면 알죠?” 진규는 그 때의 일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었다. 진규는 자신의 말이 현준에게 부담으로 작용하리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 뭐? 지면 뭐?” 현준은 말도 안 되는 소리 한다는 표정으로 진규를 봤다. 진규는 너무도 당당한 현준의 말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찾았다. “형 지면... 방출이에요.” “방출? 하하하.. 누구 맘대로...” 진규는 매니저 서재필을 봤지만 서재필은 고개를 돌려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진규는 마지막 희망의 말을 내뱉었다. “지면... 차 안 태워줄 거예요.” “네가 준이형이냐?” 뭔가를 바라는 눈빛으로 이준을 바라보았지만 진규는 역시 고개를 돌려버리는 이준의 행동에 아무런 말도 못했다. “............” 그런 진규를 보며 웃음을 참지 못한 현준은 나가면서 진규의 가슴을 후벼 파는 말을 했다. “하하하하.... 진규야... 내가 지면...다 너 때문이다! 알겠지? 다 너 때문이야. 아이고 배야... 저 녀석, 정말 개그맨해도 되겠다.. 하하하하... ” 게이머 한신은 상대의 문명 역시 그리스라는 사실을 알고는 조금 의외라 생각했다. 그리스 문명의 스페셜리스트인 자신에게 그리스 문명으로 맞서다니. 하지만 한신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게임이 시작되자 곧바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침착하게 적용해 나가기 시작했다. 초반 그리스의 도시국가 통합은 일종의 대세로 굳어졌다. 초반에 약간 느린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 부분이 지나면 많은 게이머들의 경험을 통해 아주 확연하게 강해진 그리스 문명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해 거의 대부분의 프로와 아머추어 게이머들이 그리스 문명으로 플레이할 경우에는 초반에 아주 비슷했다. 그 초기 도시국가 통합을 만든 사람이 바로 게이머 한신이었고 한신은 역시 만든 사람답게 아주 노련하게 통합해서 통제했다. 그리스는 기병이나 궁병보다는 보병에 의존을 많이 했다. 다른 서양 문명 대부분이 그렇지만 최고의 부대는 보병이었다. 그리스의 지형 자체가 험한 산들이 많기도 했지만 그리스 군인들은 평원에서의 대결을 더 선호했다. 한신은 그런 것을 알고 있었다. 게이머 정성진은 작년 이벤트 매치에서 게이머 한신에게 시종 끌려다니다가 힘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패한 이유를 깊이가 없는 전략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는 2차 프로 리그 전까지 그리스 문명을 선택해서 굉장한 연습과 더불어 유명한 그리스 문명의 전문 게이머들의 게임 플레이를 분석했다. 특히 그 중에서도 탁월한 게이머 한신의 플레이 스타일과 특이한 것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 결과 게이머 정성진은 어느 정도 그리스 문명에 대한 이해를 가질 수 있었고 그것을 기반으로 자신만의 전략과 스타일의 개발에 몰두했다. 그런 노력이 1차 리그와는 전혀 다른 게이머 정성진을 만들었다. 그리스 문명만으로 반년이 넘도록 연습해 온 한신을 쉽게 능가할 수는 없어도 WIS에서의 게임 경험으로 정성진은 다른 게이머와는 달리 엄청나게 빠른 성장을 보였다. 그래서 1차 리그에 이어 2차 프로 리그에도 골드 시리즈에 팀을 끌어올리는 쾌거를 이룬 것이다. 정성진은 초반 전략으로 한신과 마찬가지로 초기 도시국가 통합 빌더를 사용했다. 한신이 초기에 발표한 것과 큰 틀에서는 같지만 세부적으로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하지만 정성진은 이런 방법만으로는 한신에게 조금의 타격도 주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자신 있는 방법을 상대가 쓴다면 그것보다 더 이기기 쉬운 경우도 없을 것이다. 정성진은 빠르게 도시국가 통합을 이룬 뒤에 보통의 한신과는 다른 전략을 쓰기 위해 여러 가지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게이머 한신은 안정적인 게임 운영을 추구했다. 정찰도 초반에 하지 않고 어느 정도 군대와 문명이 궤도에 올랐다고 판단하고 나서야 상대 진영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상대 역시 그리스였기 때문에 취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한신은 밀집 중보병을 중심으로 군대를 모으되 도시국가마다 그 특성을 달리했다.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군인을 절대 한 곳에 두지 않았다. 스파르타가 선봉에 서서 적의 진영의 돌파를 장기로 한다면 아네테의 군인은 그 뒤를 받치면서 돌진력이 사라지지 않도록 추진력을 불어 넣는 역할을 하게 만들었다. 전통적으로 내려온 차이점 때문에 한신은 그런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고 컨트롤했다. 이런 점들은 그리스 문명으로 게임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느끼는 것이었지만 그 컨트롤이 너무 힘들어 대부분이 편법으로 어느 정도 생략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한신은 많은 연습량과 실전 같은 대결로 이런 컨트롤을 어느 정도 완성시킬 수 있었고 조금씩 그런 기술을 실전에 선보이기 시작했다. 한신의 게임 운영이 느리면서도 탄탄한 내실이라면 게이머 정성진의 플레이는 군대의 날카로움을 극대화해서 평소 한신의 스타일인 방패를 뚫어 버리는 창과 비슷했다. 정성진은 중보병과 함께 경보병도 육성하면서 보통의 그리스 군보다 기병의 비율을 조금 높였다. 기병 자체로만 전투를 치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지만 기병이 위력을 발한 타이밍에 적당한 병력이 전투에 투입되면 그야말로 전투의 승기를 한순간에 잡을 수 있었다. 기동력과 돌진력을 중시한 게이머 정성진은 그와 함께 정찰을 통해서 전장의 선택에도 만전을 기했다. 평지가 아니거나 평지 중에서도 늪지가 많은 곳이라면 기동력을 살리기 힘들기에 정성진은 하나부터 열까지 꼼꼼하게 챙겼다. 또한 병력의 수가 줄어드는 것을 감수하면서 궁기병의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궁기병은 쉽게 키우기도 힘들어 소규모여서 전술적으로 사용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정성진은 빠른 기동력에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소규모의 부대로 상대 부대의 지휘 체계를 어느 정도의 시간만 흩트리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 순간에 기병과 경보병 그리고 중보병이 그 틈을 뚫어버리면 승산이 보이리라 확신했다. 한신은 상대의 진영을 정찰했다. 그 보고를 보면서 한신은 약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초반이 거의 지나가는데도 상대는 단 한번의 공격도 없었다. 이제까지의 게이머 정성진의 플레이는 상대의 초반 공략에 성공해서 그 이점을 끝까지 잃지 않고 밀고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100%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아주 확실하면서도 간단한 방법임에는 틀림없었다. 상대 군대의 진영이 약간 규모가 작을 뿐, 보통의 그리스 군대와 거의 같았다. 게이머 한신은 몰랐지만 정성진이 직접 양성하고 있는 궁기병과 경보병 등은 일체 그 보안 유지를 생명으로 했다. 그래서 한신으로서는 뭔가 규모가 예상보다 작은 군대를 보면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다른 전략이나 꿍꿍이가 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 군대의 특징은 중장 밀집 대형의 군진이었다. 방진이라고도 하는 이 밀집 대형은 그야말로 변화무쌍한 진이 아니라 정말 돌과 같은 단단함이 그 장점이었다. 모든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서로의 기술과 힘을 겨루던 그리스의 전통에 따라 그리스 군대 역시 정정당당하고 남성적인 힘을 겨루는 방진을 군대의 기본 전법으로 사용했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 군대는 복잡한 군진보다는 방진과 같이 간단하면서도 서로 협동할 수 있는 진을 선호했고 더 잘 싸웠다. 그 속에는 절대 물러서지 않는 정신과 지나칠 정도로 엄격한 군률이 그리스 인이라면 같이 공유할 수 있는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런 이유로 그리스 군대는 통상 평원에서의 정면 대결에 상당히 강했다. 초반은 관객들의 기대와는 달리 거의 충돌이 없이 지나갔다. 양 측의 군대 자체는 거의 갖추어진 상황, 아직 여러 가지 문명과 사회의 발전 단계는 많이 남아 있었지만 군대의 규모는 어느 정도 완성되었기 때문에 관객들은 이제 뭔가 일어나리라 예상하며 마음을 졸였다. 자신의 생각대로 날카로운 창을 완성한 정성진은 서서히 군대를 북동쪽에 있는 국경으로 모았다. 어차피 전면전에다 총력전이기 때문에 다른 곳에 군대를 둘 필요는 없었다. 패치가 적용되고 나면 상대 게이머 뿐 아니라 주변의 나라들에게도 신경을 써야 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정성진은 앞에 일반적인 중보병과 약간의 기병을 배치했고 그 뒤로 은밀하게 궁기병과 기병, 경보병을 뒤따르게 만들었다. 정성진 자신은 앞의 중보병과 같이 북동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정찰 보고로 드디어 상대가 움직인다는 것을 알게 된 한신은 자신의 군대 역시 남서쪽의 국경 쪽으로 집결시켰다. 한신은 워낙 많은 군대라 한꺼번에 전투를 하기는 어렵다고 봤다. 30만이 넘는 두 부대가 제대로 싸울 평원은 거의 없다고 봐야했다. 그리고 도합 60만이 싸우면 어느 정도 시간 이상은 통제가 불가능함을 알았다. 한신은 그런 사실을 상대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고는 군대를 분리할 준비를 시작했다. 자신은 도시국가별로 군대를 양성했기 때문에 독립부대로서의 역할로 충분히 기대할 수 있었다. 한신은 상대가 자신의 국경까지 접근하기를 기다렸다. 어차피 전쟁을 한다면 상대를 기다려 격퇴하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었다. 성을 쌓지는 않았지만 주요 길목과 요충지를 선점했기 때문에 한신은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한신은 게임을 하면서 상대 정성진이 작년과는 정말 판이하게 다름을 더 잘 알 수 있었다. 비디오 플레이를 통해서도 오직 그리스 문명만으로 상대를 처리하는 것을 보았지만 직접 상대해 보니 확실히 게임에 천재라는 소리를 들을 만했다. 접근하는 방법이 자신과 진성이 쓰는 것과는 달랐지만 확실히 감각 하나만큼은 인정해야했다. 하지만 그런 상대이기에 한신은 더욱 질 수 없다고 뇌까렸다. 한신은 정면대결이 아닌 다른 편법을 사용할 만한 곳을 미리 철저하게 막았다. 사회 혼란을 방지하기 위한 대책도 이미 세워서 실행시켰고 쿠데타는 소리도 나오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다른 면들을 어느 정도 마음에 들도록 컨트롤하고 나서야 한신은 국경에서 중보병 중심의 군대를 이끌고 서서히 남서쪽으로 내려갔다. 군대의 생명인 보급은 일단 병사들에게 넉넉하게 풀었다. 게이머 한신의 움직임을 안 정성진도 변칙적인 방법은 배제하고 자신이 미리 정한 전장으로 향했다. 정성진은 한신을 자신이 유리한 곳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행군 속도를 조절했다. 어떨 때는 이틀을 조금도 움직이지 않다가 어떨 때는 하루 종일 행군하기도 했다. 한신은 그런 정성진 군대의 움직임에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 내막을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정성진의 부대와 조우할 즈음이 되자 한신은 정성진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그 주변에서 가장 넓은 지역이었다. 그야말로 건곤일척의 대규모 전투가 가능한 지역이었다. 한신은 정성진이 엄청난 대규모 병력의 총동원이나 아니면 기동력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는 전법을 쓰리라 예상했다. 게이머 정성진 역시 상대인 한신이 평원에 들어올 때 조심스런 행동을 보이자 곧 자신의 의도를 상대가 간파했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승부는 정면승부에서 결정된다는 것을 정성진 뿐 아니라 한신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한신이 아직 정성진의 날카로운 창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지만 확실한 것은 이 평원에서 게임의 승부가 난다는 사실이었다. 게이머 한신의 35만의 대부대, 게이머 정성진의 27만의 대부대가 진을 진 대평원은 한신이 처음 봤을 때와는 달리 그리 광활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30만이 하나의 진지를 구축하는 장면만 해도 정말 대단한 광경이었다. 많은 군인들이 동원되었기에 그리 오래지 않아 진지는 완성되었다. 가운데 널찍한 전투장소를 제외하고 양쪽에서 진을 친 대부대의 위용은 말로 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웬만한 소도시보다 결코 작지 않은데다가 반듯반듯한 구획정리까지 깔끔해서 한나절도 되지 못해 인간이 만든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한신과 정성진은 그런 대부대의 맨 앞으로 나와 상대 진지를 보고 있었다. 서로를 알아 볼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지만 한신과 정성진은 서로를 알아보았다. 게다가 서로 상대의 군기를 눈이 아닌 몸을 통해서 볼 수 있었다. 진지를 이루는 군인들이 만들어내는 무형의 힘, 군기. 그런 기세가 한쪽으로 기울어진다면 전투는 하나마나 한 것임을 두 지휘관은 잘 알고 있었다. 보통은 기습이나 상대의 허를 찌르는 전술을 사용했겠지만 서로 상대를 의식했기에 그런 작은 것보다는 다음날 있을 보다 큰 전투가 중요함을 인식했다. 두 지휘관의 예비 전투 명령이 떨어지자 수십만의 군대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휘관의 명령이 떨어진 후부터 군대는 군인으로 된 진이 아니라 군대라는 하나의 생물이 되었다. 군인은 개인적인 존재가 아니라 군대라는 생물의 세포였다. 생물이 죽으면 당연히 그에 속한 세포는 죽기 마련이다. 이제는 군대를 위해 싸워야 할 세포였다. 군대의 기세가 이동으로 인한 먼지를 통해 나타났다. 서로 접근해 오는 상대를 보면서 전의를 다졌다. 어느 정도 접근해서는 오와 열을 정비했다. 군기의 첫 번째 요소는 엄격한 규율을 통한 일체감이었다. 두 부대는 그런 면에서 단 한사람의 돌출 행위 없이 전투를 앞두고 진을 완성시켰다. 통상 그리스 군대의 방진은 8열 횡대대형으로 유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단단한 결집력이었다. 그것으로 인해 엄청난 파괴력이 나오는 것이었다. 지휘관의 공격 명령을 나타내는 신호가 떨어졌다. 지금까지 거의 같은 모습을 보여주던 두 부대의 모습이 이제부터 확연히 달라졌다. 한신의 부대는 7개의 부대로 나눠지면서 그 공간을 압축해서 더 결집되었다. 그리고 7개의 부대가 가운데 세 부대가 횡대로 서고 양 날개에 두 부대씩 종대로 위치했다. 가운데를 조금 약하게 하면서 날개를 강화해 마음 놓고 중앙을 도모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정성진의 부대는 조금 색달랐다. 왼쪽에 극단적으로 많은 부대가 모였고 중앙에서 오른쪽으로 갈수록 병력이 적은 마치 쐐기를 반쪽으로 가른 듯한 모양이었다. 상대적으로 한신의 부대보다 적은 병력인데다가 이런 평범하지 않은 진형을 짠 정성진의 부대에 한신은 고민에 잠겼다. 뭔가 상대의 노림수가 있음을 알았지만 그것을 알 수가 없었기에 한신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한신은 일단 양 날개의 종대로 선 부대 중 뒤쪽 부대에 대한 작전 지휘를 즉각적으로 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한신의 부대가 부드럽게 상대를 적시는 듯한 움직임이라면 정성진의 부대는 그야말로 반쪽의 쐐기모양으로 상대를 밀어버리는 듯한 강력한 움직임이었다. 한신의 부대는 자연스럽게 오른쪽의 부대가 강력한 상대의 지역적으로 압도적인 병력을 맞아 약간 밀렸지만 방진으로 단단한 진이 쉽게 뚫리지 않았다. 또한 한신의 부대 역시 상대의 강력한 방진을 쉽사리 공략할 수도 없었다. 확실하 강한 상대라면 전투는 길어질 것이다. 한신은 약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라면 상대가 그렇게 자신 있어 할 이유가 없었다. 뭔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한신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상대의 왼쪽 부대로 인해 자신의 부대가 조금씩 오른쪽으로 몰리는 것을 보았다. 당연하게 더 뭉치는 모습이었지만 그로 인해 조금 지휘에 혼선을 빚게 되었다. 한신은 그런 진형을 보면서 순간 떠오른 것은 모루였다. 상대의 왼쪽으로 찌그러진 극단적인 병력이 일종의 모루라면 자신의 흐러트지는 군대는 모루 위의 두들겨야할 쇠붙이였다. 한신은 그때야 알았다. 상대는 모루를 두드릴 망치를 숨기고 있음을 그제야 알았다. 한신은 재빨리 처음에 조치했던 양날개의 두 부대를 반대쪽인 왼쪽으로 보내어 상대의 약한 부분을 순식간에 뚫도록 지시한 뒤에 곧바로 전 부대의 통제를 위해 빠르게 컨트롤을 시작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지휘체계가 살아 있다면 해 볼만했다. “..... 역시..” 한신의 지시가 있고나서 곧 적의 뒤에서 기병이 보였다. 이제 망치가 나타난 것이다. 자신이 조금 잘 생각했으면 미리 알 수 있었을 것이라서 조금 입이 썼다. 보병과 기병의 기동력 차이는 엄청나서 한신의 지시에 따라 부대가 완전히 이동하기 전에 기병이 먼저 약해진 한신의 왼쪽을 돌파해버렸다. 게다가 뒤이어 따라온 경보병이 흩어진 한신의 방진의 틈을 타서 달려들자 급격하게 붕괴가 시작되었다. 한신은 그런 상황을 보면서도 담담했다. 곧바로 명령을 내려 조직적인 후퇴를 하달했다. 방진을 최대한 유지한 채, 조금씩 뒤로 물러갈 동안 부대의 정비가 가능해서 모루 위의 쇠붙이 신세는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병들, 특히 수는 많지 않지만 궁기병의 존재는 퇴각하는 한신의 부대를 괴롭혔다. 한신은 침착하게 부대간의 거리를 줄이고 방패를 통해서 원거리 공격을 막으며 뒤로 이동해서 진지로의 퇴각을 마쳤다. “휴..... 단 한번의 전투로 8만이 희생당했다니.... 휴.... 대단하군..” 게이머 한신은 부대 정비를 한 후에 진지의 앞으로 나와 상대 진지를 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날의 전투는 끝이 났다. 한신은 이런 전투에서 비겁한 기습은 없으리라 판단하고는 다음날의 혈투를 대비했다. 상대의 전법을 안 이상 그에 대응하는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첫 날의 전투로 8만의 병력을 잃은 게이머 한신 진영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전투에서 진 것 이상으로 사기를 떨어뜨리는 것은 없었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소규모 전투를 일으켜 거기에 승리함으로 사기를 끌어올리는 방법이 있었지만 그런 소규모 전투가 생기는 조건은 대부분이 기습이었다. 하지만 한신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자존심일지도 모르겠지만 상대의 정당한 대결에 그런 방법을 사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한신은 자신이 방심일지도 모르지만 상대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았고 또한 자신의 부대의 특성에 맞는 전법을 취하지 않는 것에 패인이 있다고 분석했다. 그런 생각을 다음날 실제로 옮기기 위해 컨트롤을 시작했다. 기병이 부족한 상태에서 첫 날의 전투로 보병의 수가 비슷해지자 게이머 정성진의 우세가 점쳐졌다. 8만의 보병이 단 한번의 전투로 사라지자 양군의 사기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전력상으로도 게이머 정성진이 훨씬 더 유리했다. 게이머 한신으로서는 뾰족한 수가 없어 보였다. 첫 전투도 한신이 못해서가 아니라 게이머 정성진의 준비가 아주 철저했고 적절한 타이밍에 기병을 투입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게이머 스키피오를 제외하고는 최고수로 꼽히는 한신의 저력을 관객들은 믿고 있었다. 게다가 아직 게임이 절대적으로 밀리는 것도 아니었다. 아직은 게임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두 부대는 오전에 다시 들판으로 진을 펼쳤다. 부대의 규모는 비슷했지만 정성진의 진영에는 기병과 궁기병이 존재했다. 한신의 진영에도 기병이 있었지만 정성진의 부대와 비교해 그 수가 절반을 조금 넘어설 정도였다. 기병끼리의 전투는 한신으로서는 피해야 했다. 한참을 소리만 지르면서 있던 두 부대는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서서히 앞으로 움직이면서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정성진의 전략은 첫 전투와 대동소이했다. 한쪽의 병력을 모아서 상대의 진형 자체에 충격을 주고 그 틈을 타서 기병들이 활약하는 방법이었다. 확실히 검증되었고 상대가 쉽게 피할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기에 정성진으로서는 바꿀 이유가 없었다. 게이머 한신은 다소 의아한 결정을 내렸다. 상대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기병을 전부 보병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한신의 부대는 전부가 다 보병이었다. 그런 결정에 관객들을 술렁이기 시작했다. 예상외의 진행이었기 때문이다. 말을 이용한 기동력을 주무기로 하는 기병이 상대가 더 많은데도 그나마 있는 기병을 말에서 내리게 해서 보병으로 사용하다니. 하지만 한신은 그런 반응은 알지도 못한 채 자신만의 컨트롤에 집중했다. 한신은 등자 없는 기병이 그 돌진력이 없어지면 보병의 밥이 되고 만다고 생각했다. 물론 노련한 기병이라면 문제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마저도 보병 사이에 갇히게 되면 그 때부터 기병은 보병보다 못하게 되고 만다는 게 한신의 생각이었다. 게다가 기병을 부리는 그 컨트롤을 완전히 없애고 보병 부대의 컨트롤에만 온 신경을 쏟기 위해서 기병 자체를 없애버린 것이다. 한신은 숨을 한번 내쉬고는 바로 다음 컨트롤을 시작했다. 정성진의 부대가 한쪽의 병력이 많아지고 다른 쪽의 병력이 상대적으로 적어지는 것을 보자 한신의 부대는 돌진했다. 전날의 그 천천히 흐르는 물이 아니라 거친 파도처럼 빠르게 몰려갔다. 그런 상대를 보던 정성진은 당황하지 않고 부대 변환을 빨리 했고 기병을 준비시켰다. 오히려 더 큰 충격을 상대에게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어...?” 하지만 정성진은 곧 상대 한신의 부대 진형의 변화를 보고는 놀랐다. 자신의 부대와는 반대쪽의 병력이 아주 질서정연하게 많아졌다. 마치 두 부대가 서로 짝이 맞듯이 부대 진형의 변화가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나 버렸다. 게다가 한신의 부대는 어느 정도 앞으로 돌진하다가 상대적으로 병력이 적은 오른쪽 부대의 속도는 줄어들고 왼쪽으로 갈수록 그 속도가 빨라서 마치 원심력을 이용한 것 같았다. 놀라던 정성진은 순간 기병의 투입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한신의 부대, 그 중에서도 왼쪽에 집중 배치한 강한 스파르타군은 엄청난 돌진력으로 정성진 부대의 약한 부분을 돌파해버렸고 그 뒤에서 돌진력을 살리지 못하고 있던 정성진의 기병을 순식간에 덮쳤다. 제자리에 서 있다가 보병들에 순식간에 둘러싸인 기병들은 그야말로 보병보다 못했다. 움직일 수 있는 자리가 없는 기병들은 보병의 밥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궁기병의 화살도 일정 거리 내에서는 그 위력이 약했고 보병들은 어제의 전투를 기억해서인지 더 악을 썼다. 한신의 우익 부대의 속도를 줄인 것은 상대의 좌익 부대의 강력함을 조금이나마 버티고자 함이었다. 게다가 그런 속도를 줄여서 회전의 축 역할을 함으로써 한신의 좌익 부대의 돌파력을 배가시킨 것이다. 게이머 정성진의 부대가 정직하게 앞으로 밀어붙이는 것이었다면 한신의 전법은 거기에 회전력을 더한 것이다. 정성진은 자신의 전법과 같은 모양에다 그와 같은 응용을 한 한신의 부대 운용과 전투법을 보자 할말을 잃었다. 상대 부대를 첫 날에 8만이나 줄여서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던 정성진은 한신이나 스키피오 같은 게이머에게는 같은 전법이 두 번 통하리라는 것 자체가 방심이라는 것임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하하하.........” 게이머 정성진은 한바탕 웃더니 곧 부대를 후퇴시켰다. 더 이상의 전투는 그리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대략 점검해 보니 기병과 궁기병의 대부분이 전멸했고 보병도 12만이 사라져버렸다. 그야말로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꼴이었다. 정성진은 곧 미련 없이 항복을 선언했다. 그 순간 밖의 관객들은 난리가 났다. 확실한 열세에서 경기를 뒤집은 것은 아니었지만 상대의 전법을 이용해서 상대를 패퇴시키는 장면에서 전율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첫 날의 전투로 인한 불확실함에도 불구하고 게이머 한신은 정확하게 계산했고, 그 컨트롤을 위해서 기병을 과감히 버린 점, 상대의 전법을 이용하되 군대를 마치 창을 휘두를 때처럼 오른쪽을 회전 중심으로 두고 왼쪽의 돌진력을 강화시킨 것은 그야말로 감탄을 금치 못할 경기 운영이었다. 수십만 명의 군대가 커다란 하나의 생물처럼 접전을 하는 모습에 이미 감탄했던 관객들은 확실한 전법의 우세로 경기의 승부를 뒤집어 버린 한신의 실력에 박수를 보냈다. 또한 그리스 문명에서 한번도 나오지 않았던 전법을 들고 나와 그리스 문명 최고수를 당황시켰던 게이머 정성진에게도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게임기에서 나와 무대의 가운데로 온 두 게이머가 서로 악수를 하자 관객들의 환호성은 극을 달했다. 땀범벅인 두 사람은 나란히 무대 뒤의 대기실로 걸어갔다. 정성진은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지 전혀 게임에 진 사람 같지 않았다. 오히려 호기롭게 어깨를 펴고 걸어서 잘못보면 현준이 게임에서 패한 사람으로 볼 수도 있는 분위기였다. “진현준, 완전히 져버렸다. 이거... 확실히 연습한 시간은 무시 못하나보다.” “.... 정말 애먹었습니다. 진성이 말고는 이렇게 고전해 본 적은 처음입니다. 제가 생각하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한 게 적중한 것뿐입니다.” “진성이? 아, 강진성. 게이머 스키피오?” “네, 그 녀석에게는 정말 두 손, 두 발 다 들었죠.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너도 수고했다. 반말해도 기분 안 나쁘지? 다음에 보면 형이라고 불러라. 아, 내 동생이 네 안부 묻던데...... 다음에 보자.” 정성진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는 대기실로 가버렸다. 현준은 뒷부분의 말은 듣지 못하고 다음에 만나면 형이라고 부르라는 소리까지만 들었다. 첫인상보다 좋은 사람이라고 느낀 현준은 피식 웃으며 자소 소프트의 대기실로 들어갔다. “와.. 현준이 형. 정말 대단해요!” “현준아, 수고했다.” 진규의 열광적인 반응과 수건을 가지고 일어선 매니저의 말을 들으며 현준은 눈을 거만하게 내리깔고는 말했다. “뭐..... 당연한 걸 가지고....” “뭐? 당연해. 너 질 뻔 했잖아. 다른 사람 눈은 속여도 내 눈은 못 속인다!” 뭔가 분위기를 잡으려던 현준은 전혀 열광적이지도 않는, 담담한 진성의 대답에 무너지고 말았다. 진성이 기차 바퀴가 네모라고 하면 그렇다고 대답할 사람이 진규였기에 좋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정말이요? 현준이 형....... 그거 어쩌다 그렇게 된 거죠? 그렇죠?” “......... 그런 말은 하는 게 아니다.” 현준은 심각하게 말하고는 매니저에게서 수건을 낚아채 땀으로 가득한 목과 얼굴을 닦기 시작했다. 진성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 상태에 자신이 있더라도 저렇게 좋은 전략을 세울 수 있었을까 생각했다. 결론은 가봐야 한다는 것. 진성은 조금은 삐진 현준을 보며 웃었다. “..... 왜 웃어?” 역시 좋은 말이 나오지 않는다. 진성은 그런 현준을 보며 다시 웃었다. “왜 웃어?” “하하하... 웃을 이유가 있으니 웃었지.” “뭐?” “하하하... 아주머니가 지금 너를 보면 아주 기분 좋아하셨을 텐데...” 진성은 저렇게 삐진 모습을 아주머니가 보면 옛날 생각이 나서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다. “무슨 소리야?” “그냥 그렇다는 거지. 그리고 조금 전에 만약에 내가 현준이 너와 같은 상황이었으면... 그런 전략을 생각해 낼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생각했는데?” “음..... 그건 가봐야 알 것 같다. 내가 당해봐야 생각할 수 있을지 아니면 상대에게 당할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냐? 내가 너였으면 어쩌면 게이머 정성진에게 질 수도 있었단 말이다. 휴.... 네가 그만큼 잘 했다는 말이다!” 진성은 자신의 말에도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얼굴만 쳐다보는 현준을 보며 계속 설명했다. 그 다음으로 나선 리틀 스키피오 진규가 삼선전자의 게이머를 이기는 바람에 진성은 아예 나서지도 않았다. 그 경기 역시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게임이었지만 앞서 있었던 경기가 워낙 스케일과 그 전략적인 면에서 최상급의 게임을 보여 주었기에 조금 그 빛에 가렸다. 진규는 그런 것에는 전혀 상관치 않고 자신이 이김으로써 프로 리그 전체 우승이 결정됐다는 사실에 매우 기뻐했다. 우승했다는 기쁨도 또 다른 시작 앞에서 그 의미가 희미해졌다. 메이저 리그라는 3개국에서 총 12개 팀이 참가하는 대회가 임박했기 때문이었다. 2차 프로 리그를 마친 한국의 프로팀들의 독주가 예상되었지만 중국과 일본의 게이머들의 플레이 동영상을 본 전문가들은 무조건적인 예상은 힘들다는 말을 내놓았다. 인터넷에 공개된 화면에서는 일본과 중국의 선수들이 수준 낮은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국내 리그보다 월등히 그 프로팀 수가 많아서인지 선수 한명, 한명의 실력이 고르게 좋았다. 한국의 프로팀들은 그나마 오랜 된 프로 기간과 개발 국가라는 자존심을, 중국의 프로팀들은 엄청난 경쟁을 뚫고 올라왔다는 자부심이, 일본의 프로팀들은 그동안 게임에서 한국에게 밀렸던 것을 만회하기 위한 마음으로 각각 메이저 리그를 준비했다. 평소와 같이 새벽에 일어나 정원에서 팔극진결을 천천히 펼친 후에 목검을 이용해서 그 이름 없는 검법, 무명검(無名劍)을 연습했다. 자신이 붙였던 팔극검법이라는 이름이 적절하지 않은 듯해서 진성은 무명검이라 불렀다. 사부 유조가 숨을 거둔 후, 진성은 상당한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 자신도 아직 그 이유를 확실하게 알 수 없었지만 침식을 잊을 정도의 수련과 마음의 응어리를 조금은 풀 수 있어 성격 자체가 조금 변한 것이 그 원인이 아닐까 생각하는 정도였다. 진성은 자신의 몸, 이곳저곳에 숨어 있다가 자신이 고급 발경인 침투경 등을 시전할 때 방해가 되던 통제되지 않던 경들을 제대로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수많은 지류들이 하나의 강으로 모이게 되자 강은 더욱 더 넓어지고 그로 인해 더 많은 것들을 나를 수 있었다. 진성은 그제야 사부 유조가 말한 경지 중의 하나를 조금은 맛볼 수 있었다. 경의 움직임과 마음의 일어남이 일치가 되자 자신이 노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청경은 스스로 성장해 버렸다. 단순한 기척이 아니라 자신의 몸 주위로 그 집중함에 따라 눈을 감고도 상대의 이미지를 그릴 수가 있어 진성 스스로도 아주 놀랐다. 진성의 청경은 상대가 움직임에 따라 그 소리의 기척을 느끼는 것과는 달랐다. 마치 제 6의 감각이 새로 생긴 것과 같이 움직이지 않는 것도 보는 것처럼 알 수 있었다. 청사진을 순간순간 찍는 것 같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하지만 진성은 그런 감각에만 의지해서는 안 됨을 알고 있었다. 사부 유조가 진성의 앞을 미리 내다보면서 무인이라면 그런 감각과 같은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되는 이유에 대해 매우 자세히 가르쳤기 때문이었다. 연습할수록 기세가 강해졌던 팔극진결은 점점 부드러워졌다. 예전의 불완전한 경의 움직임이 사라짐에 따라 팔극진결을 시전하는 진성의 몸을 만져도 예전의 진규 사태는 더 이상 벌어지지 않게 되었다. 경을 모으고, 풀어 버리고, 회전시키고, 끊어버리는 일련의 동작들이 모두 진성 내부로 숨어들어가 강한 기세가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진성은 겉으로 드러나는 그런 경지에 대한 증거를 통해 사부 유조가 말한 단계 중에 하나임을 알 수 있었다. 진성은 드디어 사부 유조가 말하는 무술이 아닌 무도에 들어선 것이다. 진성은 자신이 젊은 나이로는 절대 불가능한 경지에 들어선 것을 기뻐한 게 아니었다. 사부 유조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일보 전진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기뻤다. 팔극신권의 계승자로서 사부 유조의 이름에 먹칠하지는 않을 수 있다는 것 또한 진성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무명검 또한 진성의 무의 경지가 올라가자 조금 바뀌었다. 무명소검, 무명대검의 시전이 아주 자유자재였으며 연습하는 동안 점차 무명소검과 무명대검의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조언이 아니라 진성은 연습을 통해서 무명소검과 무명대검이 다른 검로가 아님을 확신했다. 겉보기에는 부드럽고 느린 무명소검, 패도적이고 거친 무명대검이 자유로운 경을 이용한 시전에서는 전혀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사부 유조는 진성에게 무명소검, 무명대검 뿐 아니라 무명비검(無名飛劍), 무명기검(無名奇劍), 무명9절초에 대해서도 가르쳤기 때문에 진성이 다음 단계도 넘어갈 수 있었지만 진성은 여전히 무명소검과 무명대검의 수련에만 시간을 투자했다. 진성은 사부 유조의 집이자 이제는 자신의 집인 본가로 날아온 한통의 편지를 보고는 걱정에 잠겼다. 사부 유조의 유언 중 하나에 대한 문제의 시작을 알리는 편지였다. 대만의 팔극문 맹가위, 사부 유조의 사형으로부터 온 글로 팔극문의 정통 계승자인 유조의 이장을 행해야 된다는 일방적인 통고문이었다. 진성은 어느 정도 예상했기 때문에 별로 놀라지는 않았고 법적으로 자신이 사부 유조의 손자로 되어 있기 때문에 유언을 지키는 것 자체는 별 어려움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팔극문과 연관되지 않으려는 진성의 의도와는 달리 이런 문제로 얽힌다면 사태가 복잡해져 그 늪 속으로 빠지지 않을까 우려했다. 보통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그런 무술가 사회에 대해 사부 유조에게 적지 않게 들었던 진성은 팔극문의 사람들이 자신을 무술가로 생각한다면 일이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도착 날짜를 보니 며칠 남지 않았다. 메이저 리그가 곧 펼쳐지는데 이런 일까지 겹치니 조금 곤란할 지도 몰랐다. 진성은 조용히, 그리고 빨리 한국으로 올 사람들을 이해시키는 수밖에 없다고 결론 내렸다. 그리고 사부 유조가 만든 팔극신권에 대한 궁금함이 있을 것 같아 진성은 그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조금 잠을 줄여서 팔극신권에 대한 수련에 시간을 더 투자하기도 했다. “예, 준비되었습니다.” “그래. 오늘도 잘 해 보자.” 진성은 조팀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곧 시야가 어두워졌다가 밝아짐을 느꼈다. 도장이었다. 진성은 도복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익숙하게 도장 중앙으로 나갔다. 가볍게 숨을 내뱉고는 팔극진결을 펼치기 시작했다. 기세가 전혀 느껴지지 않아 마치 나이 든 사람들이 건강을 위해 배운 태극권을 펼치는 것과 같았다. 조금 뒤에 눈까지 감아버린 진성은 한참을 팔극진결을 펼쳤는데 어느 순간 자신이 아니라 몸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진성은 그런 움직임을 자세히 느꼈다. 사부 유조의 몸 움직임과 같은 지금, 평소 자신의 동작과 비교하기 시작했다. 진성 자신의 동작에서 기세는 사라졌지만 사부 유조와 같은 부드러움 가운데의 그 위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진성은 자신의 경지가 예전에 비해 발전했음을 알았지만 여전히 규칙적으로 가상현실에 접속해 사부 유조가 남긴 무의 정화를 익히기에 여념이 없었다. 사부 유조의 움직임을 느끼는 것과 그것을 자신의 몸으로 익히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진성은 조바심을 내지 않고 천천히, 꾸준하게 할 수 있을 일을 해 나갔다. 밀리터리 아트의 출시는 연기되었다. 문명 온라인 영웅 스키피오의 프로 리그의 백미인 3개국 메이저 리그가 펼쳐져 게이머의 관심이 그게 집중되자 괜히 관심을 분산시킬 필요는 없다는 판단에 밀리터리 아트의 출시가 메이저 리그 폐막 이후로 결정되었다. 진팀장은 그런 결정을 한 후에 조금 더 완벽하게 만들 수 있는 시간이라 기뻐했지만 요람의 멤버들은 아직도 밀리터리 아트 작업을 해야 하냐며 불만을 터트렸다. 하지만 누구도 진팀장 눈앞에서 대놓고 말하는 사람도 단 한명도 없었다. 인터넷으로 공개된 게임 화면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끈 밀리터리 아트의 출시 연기 소식에 또 한 차례 홈페이지가 몸살을 앓았다. 그만큼의 관심이 많은 것이어서 자소 소프트로서는 싫지 않은 현상이었다. 문명 온라인의 팬 중에서 밀리터리 아트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그런 호기심은 다가올 메이저 리그에 점점 더 집중되었다. “안녕하십니까?” “........” 대만에서 왔다는 사람들의 연락을 받고 진성은 바로 본가로 갔다. 그 전에 받은 편지에 언제 도착하는지에 대한 내용도 있었지만 진성은 편지를 받았다는 자체를 잊고 살았다. 그렇다고 해서 전화를 받았던 진성이 놀란 것은 아니었다. 약간 의외라는 생각을 하고는 바로 본가로 갔다. 미리 본가 정문 앞에 도착해 있던 여러 사람들을 보고는 진성이 인사를 했지만 사부 유조의 사형이라는 사람을 비롯해서 옆에 있던 사람들은 진성의 몸을 위, 아래로 쳐다보기만 했지, 말이 없었다. 정문 앞에 있던 사람들은 노인 두 명과 40대 중반 한 명 그리고 20대 후반 두 명이었다. 약간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던 사람들을 문 안으로 들어오게 해서 객청으로 안내했다. 객청으로 이동하는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은 채 조용하게 걷기만 했다. 진성 역시 걷는 동안 별로 할 말이 없었다. 객청으로 들자, 진성은 곧 차를 준비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한 잔씩 드시지요.” “.......” 다섯 명의 사람들은 아무 말도 없었다. 가타부타 말도 없자, 진성은 은근히 화가 나기 시작했다. 솔직히 생각해서 이렇게 집안으로 들인 것도 잘못한 게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다. 진성은 차를 몇 모금 마시면서 상대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기를 기다렸다. 자신의 말을 무시한다니 상대의 말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조용한 정적 가운데 차만 마시던 사람들 가운데 지난번에 진성이 보았던 사람, 맹가위가 입을 열었다. “유사제는... 편안히 갔는가?” “예, 사부님은 편안히 가셨습니다.” “허허.... 먼저 갔구먼. 안타깝네..... 안타깝군...” 맹가위는 알고 있었지만 직접적으로 유사제의 죽음을 알자 마음속에 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확실한 보장은 없었지만 어쩌면.. 그 새로운 무술을 팔극권으로 흡수해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맹가위는 눈을 감고는 안타깝다는 소리를 반복했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검버섯이 눈에 띌 정도로 난 노인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울리며 말했다. “네..가.. 네가 사형의 제자인가? 어찌.. 그런데 존장에 대한 예의를 하지 않지? 사형이 교육을 잘 못 시킨 건가?” “........” 갑자기 호통을 치는 노인의 말에 진성은 순간 아무 말도 못했다. 맹가위의 연륜 있는 행동에 맞추었던 진성이라 무턱대고 호통부터 치는 검버섯 노인에게 순간 적응하지 못했다. “너는 내 말이 들리지 않나?” “노인장, 저는 팔극문이 아닙니다.” 진성은 약간의 화를 누그러트리고 나직하지만 힘있게 말했다. “.... 노인장? 이 녀석이..... 네 녀석의 사부가 팔극문의 계승자니.. 네 녀석도 팔극문이 아니더냐?” “저 분, 어르신께 듣지 못하셨습니까? 저는 팔극문의 제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제게는 노인장을 연장자로서가 아닌 사문의 존장으로 대접할 이유도 없고 그럴 의지도 없습니다. 계속 이러시면.... 더 이상의 대화는 없을 겁니다.” 진성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강하게 나갔다. 대만에서는 무술가 사회가 보장받는지 몰랐지만 여기 한국에서는 그런 여지가 없었다. 법이 우선이었다. “뭐? 뭐? 이 녀석이........ 사형!” 검버섯 노인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진성을 뚫어지게 노려 보았지만 진성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옆의 사형, 맹가위를 쳐다보았다. “..... 사제, 젊은이의 말이 맞네. 휴... 유사제가 살아 있었다면, 그래서 앙금을 풀고 다시 돌아왔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유사제가 직접 저 젊은이는 팔극문과 관계없다고 말했다네. 어쩔 수가 없지.” “그.. 그래도...” “휴....... 참 안타까운 일이라네.” 맹가위는 허공을 응시하며 몇 번 중얼거리다 진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젊은이, 우리가 왜 온 줄 알고 있을 거네. 바로 말하지. 우리는 팔극문을 대표해서 유사제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 왔다네. 팔극문의 정통 계승자들이 묻히는 곳이 따로 있다네. 유사제 역시 그것을 원할 테니까. 도와 줄 수 있겠는가?” “......... 그것은 불가합니다.” 불가하다는 진성의 말이 떨어지자 말자 검버섯 노인과 그 뒤에 있던 세 명의 눈빛이 사나와졌다. 맹가위는 약간 뜻밖이라는 듯, 말을 이었다. “... 불가라? 왜 그런가?” “사부님의 유언 중에 하나가 바로 자신은 이 곳에서 묻히고 싶다고 하셨고 그것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 유언을 지켜야 합니다.” “유언? 유사제가? 정말인가?” “네, 정말입니다.” “음... 하지만 분명 유사제는 팔극문의 계승자로 계승자들의 묘인 신묘로 갈 의무가 있다네.” “저 역시... 유언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게다가 저는 사부님의 제자이기도 하지만 사부님의 손자이기도 합니다. 물론 한국의 법적으로 공인된 손자입니다.” “손자? 분명 유사제는 결혼을 하지 않았는데..... 아, 그렇구만... 휴....” 맹가위는 사제 유조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제자를 손자로 만들어 자신을 지키라고 유언을 할 정도로 팔극문이 싫었던 것일까? 아니면, 이 한국이 좋았던 것일까? 평소 사제 유조를 한국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맹가위였지만 이제야 알게 되었다. “맞습니다. 친손자는 아닙니다.” “그래... 그렇군. 젊은이 혹시나 해서 묻는 말인데... 자네 팔극문으로 들어오지 않겠나? 팔극문은 자네 사부의 사문이야. 혼자서 무술을 익히는 것은 정말 외로운 길이라네. 팔극문은 자네를 원한다네. 어떤가?” 맹가위는 옆에 있는 검버섯 노인이 발작하려는 것을 매서운 눈빛으로 막고는 말을 끝마쳤다. 진성은 그 말을 들었지만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자신이 팔극문에 속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고마운 말씀이지만 저는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뭐? 이 녀석이.......” “노인장, 더 이상의 말씀은 이 집에서 더 머물기 싫다는 뜻으로 생각하겠습니다.” 명백한 조용히 하지 않으면 쫓아내겠다는 말에 검버섯 노인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변해버렸다. 붉은 얼굴에 떨리는 음성으로 검버섯 노인은 말을 제대로 잇지도 못했다. “이.... 이...... 이...” “사제, 조용하게. 우리는 이 곳에 손님으로 왔고 저 젊은이가 주인이니까.” “...........” “젊은이,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 함세.” “네, 말씀하십시오.” “자네가 그 팔극신권에 대한 시범을 보여 내 사제와 저 뒤의 녀석들에게 조금 납득을 시켰으면 하는데... 어떤가?” 은근한 맹가위의 부탁이었다. 진성은 이것을 마지막으로 팔극문에 대한 인연을 끊어버리려고 결심했다. “음......... 네, 좋습니다. 저를 따라 오시죠.” 진성은 사람들을 이끌고 도장으로 들어갔다. 도장 안에 들어서자 그 특유의 냄새가 진성의 마음을 가라앉혔다. 가볍게 몸을 풀고는 도장의 가운데로 가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사부님이 만드신 팔극신권의 팔극진결입니다.” 진성은 천천히 한번 팔극진결을 풀고는 다음에 조금 더 빨리 팔극진결을 펼쳤다. 전혀 경력이 보이지 않는 체조 같은 동작이었지만 맹가위는 눈빛을 반짝였다. 그 옆의 검버섯 노인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40대의 중년은 뭔가 헷갈린다는 표정이었고 20대 후반의 두 명은 약간 실망했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진성은 그런 상대의 표정이나 기색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팔극진결에 집중했다. 이미 경이 내부로 들어온 지 꽤 되었기에 더욱 능숙해진 팔극진결이어서 펼칠수록 몸 내부가 더 깨끗해지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예전에는 몸의 피곤이 풀어지고 상쾌했지만 지금은 뭔가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진성은 한참을 움직인 후에야 동작을 멈췄다. 그리고 사람들을 바라보니 나이에 따라 표정이 달랐다. “.. 젊은이...... 이....게 그 팔.....극..진결인가?” 맹가위의 목소리는 약간씩 떨리기까지 했다. “네, 팔극진결입니다.” 진성의 대답을 들은 맹가위는 한숨을 길게 내뱉고 말았다. “휴....... 동(銅)인줄 알았는데..... 그게 금(金)이었다니... 하하하..” 맹가위는 예전에 보았던 팔극진결이 팔극권의 오랜시간 동안 갈고 닦은 투로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경에 대한 이해나 여러 면에서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기에 팔극신권을 흡수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조금 전에 본 팔극진결은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물론 시전자가 아직 완성된 무인이 아니어서 조금 투박한 면이 있었지만 그런 것을 고려하면 그야말로 대단한 무술이었다. 투로 하나에 강과 유가 함께 숨어 있다니. 맹가위는 강권인 팔극권에는 부족한 유의 권이 접목된 팔극신권을 볼 수 있었다. 검버섯 노인은 맹가위보다 더 놀랐다. 사형 유조가 확실히 대단한 무술가라고 인정은 했지만 새로운 무술을 만들 정도의 대종사라고는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 권법을 인정하기도 싫었는데 실제로 본 그 팔극신권의 움직임에 검버섯 노인은 정말 놀랐다. 팔극권의 정수가 녹아 있는데다가 팔극권에는 없는 부드러움의 극치까지 같이 숨쉬는 동작이 끝없이 이어지자 눈을 비비기까지 했다. 더 놀란 것은 경을 내부로 흡수할 정도의 경지를 이제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녀석이 성취했다는 사실이었다. 자신이 알기로 정식 제자로 삼은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그 전에 정식 제자가 아닌 상태에서 아무리 오랫동안 가르쳤다 하더라도 이런 성취라니. 검버섯 노인은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중년의 남자는 검버섯 노인의 제자로 맹가위의 제자 오전현과 같이 팔극문의 차기 계승자로 내정된 사람이었다. 중년의 남자는 새로운 권법을 시전하는 젊은이의 움직임을 처음 볼 때는 그 나이에 비해서 아주 절제되고 부드러운 동작으로만 생각했다. 처음 무술을 하게 되면 정확한 동작에서 점점 더 육체적인 힘을 붙이게 되는데 어느 정도 그런 단계를 제대로 수련하면 그 다음으로 어느 순간 힘을 빼야 하는 벽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중년의 남자는 시범을 보이는 젊은이가 20대 초반으로 보았는데 벌써 그런 단계를 넘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육체적인 힘을 붙여 가는 데는 타고난 천재가 있었지만 그런 천재들은 대부분 힘을 빼고 경을 제대로 익히는 단계로 나갈 때 많은 고생을 했다. 그런데 20대 초반으로 힘을 빼는 단계에 이르렀다니. 쉽게 보기 힘든 경우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점점 빨라지는 시범을 보는데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냥 봤을 때는 몰랐지만 자세히 보니 힘을 뺀 것이 아니라 동작 자체에 부드러움이 살아 있었다. 힘을 넣지 않은 것이 아니라 힘을 넣어도 그 부드러움이 유지되는 움직임이었다. 중년의 남자는 당황했다. 자신의 눈이 본 것이 확실하다면 저 경지는 경을 익히는 험하고 멀고도 먼 경지를 넘어 경을 유하게 만드는 단계였다. 자신도 아직 경을 제대로 익혔다고 말할 수 없는데... 20대 초반의 젊은이가 그것을 뛰어 넘었다니.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보면 또 힘을 뺀 듯한 동작 같기도 해서 중년의 남자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두 노인과 중년의 남자에 비해 20대 후반의 두 남자는 시범을 보면서 약간은 따분해했다. 처음의 흐느적거리는 듯한 느린 시범이 시간이 갈수록 빨라졌지만 그 움직임에 어떤 기세나 강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20대 후반의 두 남자는 중년 남자의 제자로 견문을 넓힌다는 취지로 따라왔는데 그 견문을 넓힐 좋은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자신의 사부와 사조를 보면서 뭔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자신들이 보기에는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일 뿐이었다. “어떠셨습니까?” 진성은 살짝 흐른 땀을 닦고는 맹가위와 그 일행을 한번 훑어보고는 말했다. “휴.......... 대단하군. 그런데 자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실력이 늘 수가 있지. 사별삼일이면 괄목상대라지만 자네의 경우는 그 정도가 심하구먼. 대단하군. 대단해.” 맹가위는 지난번 한국에 왔을 때, 진성의 시범을 본 적이 있었다. 맹가위 자신이 팔극신권을 동으로 본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진성의 경지 때문임을 간파했다. 그 당시가 진성에게는 바로 경을 수련하는 시작단계였다. 그런 이유로 맹가위는 팔극신권의 본래의 위력을 알 수가 없었고 그 점은 어느 정도 유조가 원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다시 보니 경의 수련을 돌파해서 그 다음 단계라니... 맹가위는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태어나서 수련만 했다고 해도 불가능한 경지임을 맹가위 자신이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믿음이 송두리째 뽑히는 그 증거가 눈앞에 있자 조금은 마음이 어지러워졌다. 정말 무술에서도 상식을 무시하는 저런 천재가 존재한단 말인가. 맹가위는 한숨만 내쉬었다. “젊은이.... 정말... 자네가 경의 단계를 돌파했는가?” 검버섯 노인은 이제까지의 말과는 달리 진성에게 자네라는 말을 하며 반말을 하지도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말이 바꿨지만 노인 스스로도 모르고 있었다. 검버섯 노인은 단지 눈앞에서 땀을 닦고 있는 젊은이가 정말 경의 단계를 돌파했는지 알고 싶을 뿐이었다. “노인장께서 말씀하신 경의 단계가 경을 수련해서 외부로 드러내게 하는 경지라면..... 네.. 경이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 가버렸습니다.” 진성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묻는 노인에게 솔직하게 대답했다. “내부로 들어가 버렸다? 하하.. 맞겠지. 그게 맞지. 젊은이 정말... 하.. 믿을 수가 없구먼.” 검버섯 노인은 진성의 대답을 듣고는 막 웃어댔다. 진성은 그런 노인의 예측 못할 변화에 가만히 있었다. “사부님, 정말 저 젊은이의 단계가 경의 단계를 돌파한 것입니까?” “휴.... 사실이야. 저 젊은이는 내가 볼 때 유의 단계라네. 그것도 몸이 유의 단계를 거의 완전히 익힌 것을 보인다네...” 검버섯 노인은 중년 제자의 물음에 대답했다. 검버섯 노인은 진성의 시범을 보면서 느낀 것이 특이하게 진성의 움직임이 생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마음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이었다. 보통 자신의 움직임을 어느 정도 자신이 생각해서 움직이게 마련인데 진성의 경우는 너무도 몸이 자연스럽게 움직여서 의외라고 생각했다. 진성 자신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과 비슷하리라고 은연중에 생각했지만 어느 누구도 몸이 먼저 무술을 배우고 그 다음에 무술의 내부를 제대로 배운 사람은 없었다. 진성이 유일했다. 그 점을 검버섯 노인은 간파했다. 중년의 남자는 사부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자신도 어느 정도 그런 생각을 했지만 도무지 불가능한 생각이라고 치부했었다. 사부의 말이라면 정확할 것이다. 20대 초반에 유의 단계라니... 거의 평생을 수련해야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단계가 바로 유의 단계였다. 경이 있지만 나타나지 않는 단계. 팔극문에서 이제 단 세 명이 경지에 올라 있는 단계. 중년의 남자는 눈앞의 젊은이를 바라보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부의 말을 믿지 않을 수도 없었지만 여전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젊은이를 보면서 그대로 믿기도 힘들었다. 20대 후반의 두 남자는 사조와 사부의 놀람과 대화를 들으면서도 믿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다. 20대 초반에 사조들의 인정을 받을 정도인 경지라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그것을 밖으로 드러낼 수도 없었다. 어떤 숨겨진 사정이 있을 것이라고만 여겼다. 호들갑이라니... 가당찮은 일이라 생각했다. “젊은이, 대단하구먼. 어떻게 그 경지에 이르렀는지 물어보면 실례가 안 될지 모르겠네.” 맹가위는 20대 초반의 젊은이를 한 명의 완성을 향해 가는 무인으로 인정했다. 사문과 서열도 중요했지만 무술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실력이었다. 저 정도의 경지라면 어디에서도 충분히 달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세월의 무게가 주는 그 위력으로 아직 맹가위 자신과 사제에게 대련에서는 힘들겠지만 저런 경지라면, 저런 경이적인 성장속도라면 20년도 되지 않아서 자신들의 경지를 넘어설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된다면, 어쩌면, 한 단계 더 높은 경지에 진입할 지도 몰랐다. 맹가위는 그런 생각에 이르자 순수한 무의 열정이 불끈 솟아오름을 느꼈다. 살만큼 살았다고 생각했던 평소의 마음도 바뀌어 저 젊은이의 성장을 더욱 더 보고 싶다는 욕구도 생겼다. 맹가위는 진성에게 ‘실례’라는 말까지 써가며 물었다. “어르신, 사실 저는 사부님의 건강이 너무나 악화됨을 알고는 돌아가시기 전에 사부님의 경지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고자 했기 때문에 거의 잠도 자지 않고 수련을 했습니다. 그러다 사부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사부님께 얻은 큰 선물인 정신적인 여유를 가지고 이제껏 연습했는데 어느 순간에선가 예전과는 달리 모든 것이 부드러워지고 기세마저 사라진 것을 느꼈습니다. 그 때, 사부님이 말씀하신 경지가 생각이 나서 기뻤습니다. 그 외에는 어떤 특별한 이유는 없는 것 같습니다.” 담담하게 말하는 진성의 대답에 맹가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필사적인 노력은 꼭 이뤄야할 목표가 있어야 생긴다. 그런 것은 맹가위 자신도 오랜 세월을 통해 경험했던 진리였다. “그래도... 젊은이의 경지는 정말 대단하네. 젊은이 이름을 물어도 되겠는가?” 검버섯 노인 역시 자신과 같이 무를 추구하는 한 사람의 무인으로 진성을 인정했는지 점잖게 이름을 물었다. 그에 따라 진성 역시 무게를 갖추고는 대답했다. “어르신, 강진성이라고 합니다.” “진성군, 하하하.... 너무 기분이 좋다네. 자네 같은 천재가 있다니. 하하하... 나는 자네가 팔극문이 아니라는 사실에 조금 섭섭하지만 그래도 자네를 보니 좀 더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이 든다네....” 검버섯 노인은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진성을 천재라고 치켜세우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 뒤를 맹가위가 이었다. “사제, 자네가 나와 같은 생각을 했구먼. 나도 자네처럼 좀 더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네. 하하하하..” “하하하... 그렇지요.......” 자신의 사부와 사백이 새파랗게 젊은 녀석에게 반공대를 하면서 경지 어쩌구, 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 어쩌구 하자 중년의 남자는 기분이 상했다. 그 동안 최선을 다해 팔극문의 차기 계승자가 되었을 때도 이렇게 기뻐하지 않았던 사부였기에 더욱 그랬다. 게다가 자신은 확실히 젊은이의 경지를 인정하지 않았다. 어쩌면 늙으신 사백과 사부의 오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중년의 남자는 생각을 하다가 곧 자신이 그 젊은이와 대련을 해 봐야겠다고 결론 내렸다. 자신이 나서려고 하다가 옆에 있던 자신의 두 제자의 불만어린 표정을 보자 좋은 생각이 떠올라 한발 앞으로 나가 사부에게 말했다. “사부님!” “왜 그러냐?” 검버섯 노인은 평소에 잘 보이지 않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제자에게 대답했다. “저... 유조 사백님의 제자인 저 젊은이와 제 제자와의 대련을 한번 했으면 합니다.” “뭐? 그게 가당키나 한 말이냐? 대련이란.. 수준이 비슷해야 가능하지. 그게 대련이냐?” 가차 없는 검버섯 노인의 말에 20대 후반의 두 남자는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 제가 말을 잘못한 것 같습니다. 아직 제 제자 녀석들이 저 젊은이의 경지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으니 조금.... 견문을 넓히는 취지에서 가르침을 받게 하는 것이 어떨지...” “음.... 그래.. 너와 저 녀석들을 데려온 이유가 바로 견문을 넓히려는 것이니까.... 진성군, 내 부탁인데... 저 녀석들에게 잠깐 가르침을 주지 않겠나?” 갑자기 자신에게 가르침을 빙자한 대련을 신청하자 약간 경계했지만 확실히 검버섯 노인의 말은 진심으로 한 부탁이었다. 진성은 검버섯 노인이 약간 괴팍했지만 계략을 꾸밀 사람은 아니라고 판단하고는 공손하게 받아들였다. “가르침이라니요....? 오히려 제가 가르침을 청해야 합니다.” “아닐세.... 자네라면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있어. 아무튼 고맙구먼.” 진성은 꼼짝없이 두 사람의 팔극문 제자와 대련을 해야 했다. 평소 사부 유조 외에는 거의 대련을 해 본적이 없어서 진성은 조금 떨렸다. 하지만 몸의 힘을 풀고 마음을 편하게 먹으려고 애쓰자 곧 몸과 마음이 일치되면서 편안한 자세가 되었다. 맹가위는 그런 진성을 보면서 또 한번 탄성을 터트렸다. 실력과 마음가짐은 연결은 되어 있지만 같은 것은 아니었다. 실력이 있어도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하수에게도 질 수 있었다. 경지의 차이로 진성이 곧 있을 대련에서 지는 일은 벌어지지 않겠지만 그 마음을 다스리는 진성의 비상한 능력은 단시간에 갈고 닦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맹가위는 어쩌면 저런 점이 경이적인 성장의 바탕이 아닐까, 사제 유조가 제자로 삼은 이유가 아닐까 생각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 진성의 말에 상대방은 제대로 대답하지도 못했다. 단지 이를 악문 모습이었다. 진성은 그 사정을 몰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단지 마음을 더욱 가라앉혀 상대를 담담하게 쳐다보았다. 20대 후반의 남자는 그런 담담한 눈빛에 더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 눈빛은 마치 상대도 안 된다는 들리지 않는 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너무 위험하지 않게 하게나.” 맹가위의 말이 끝나자 곧 진성과 상대 젊은 남자는 천천히 움직였다. 대련에서 선제공격은 아주 중요했다. 특히 팔극권과 같은 일격을 중시하는 강권의 경우는 그 중요도가 더했다. 상대는 진성을 향해 어떤 패턴의 걸음을 밟으며 다가왔다. 사실, 사부 유조는 맹가위에게 진성이 팔극권을 배우지 않았다고 했지만 진성의 몸은 팔극권을 배운 상태였다. 하지만 팔극신원을 제대로 익히는 바람에 그런 팔극권의 움직임이 팔극신권으로 흡수되어 버렸기에 맹가위로서도 팔극권의 흔적을 진성에게서 찾을 수가 없었다. 상대는 진성에게로 빠르게 다가가 진각을 밟으며 강하게 왼손을 뻗어 주먹으로 진성의 가슴을 노렸다. 진성은 상대의 움직임이 빠르다고 생각했지만 사부 유조의 움직이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움직이는 그런 허깨비 보다는 상대하기 쉬우리라 판단했다. 공격의 직선에서 반보 왼쪽으로 비껴서면서 진성은 왼손을 들어 상대 왼손 손목을 잡고는 앞으로 한순간 당겼다. 상대가 그 움직임에 놀라 힘을 일으켜 반대로 당기자 그 힘을 거스르지 않고 진성은 뒤로 자신의 경을 보태 밀어버렸다. 강한 힘으로 타격한 것이 앞쪽으로 쏠리자 균형을 잡기 위해 몸을 추스르던 상대는 자신에게 몰려드는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힘에 공중으로 붕 떠버렸다. 하지만 강한 힘으로 내리꽂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워 스스로 공중에서 뛰어내린 것보다 더 가볍게 착지할 수 있었다. 공격한 20대 후반의 남자는 난감했다. 상대는 자신의 주먹이 거의 가슴에 닿기 전까지는 움직이지도 않았다. 마지막 순간에 옆에서 비껴서 손목을 잡고는 당겼다가 풀어주면서 자신을 날려버린 것이었다. 그 전까지 있었던 투지가 눈 녹듯 사라져버렸다. 자신과는 그 경지 자체가 완전히 다른 것을 실감했다. 하지만 곧 이렇게 외유를 나온 이유가 이런 경험을 위해서라는 생각이 떠오르자 그 때까지의 자존심을 버리고 하나라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하리라 마음먹었다. 순간 분위기가 바뀌었다.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상대를 자신보다 어린 사람이 아니라 뭔가 배울 점이 있는 고수로 생각하자 자세부터 바꿨다.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방법으로 상대하기로 결심하고는 곧바로 행동에 옮겼다. 힘을 모아 몸을 웅크렸다가 단번에 거리를 줄이는 비전의 보법인 전비보(箭飛步)로 상대인 진성의 거리로 내로 들어가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진각을 밟으며 오른 주먹을 내질렀다. 진성은 그런 모습에 반보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것으로 공격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상대는 다시 한보 앞으로 몸을 회전하며 진각을 밟더니 왼쪽 주먹을 내질렀다. 진성은 상대의 연속적인 공격에도 별로 당황하지 않았다. 옆으로 한 발짝 벗어났다가 앞으로 질풍같이 들어가 상대의 옆구리로 접근했다. 진성의 상대는 그런 갑작스런 움직임에 몸을 옆으로 뺐지만 진성은 그 움직임에 맞게 같이 움직였다. 그리고는 옆구리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진성은 진심인 상대에게 걸 맞는 뭔가를 보여주기로 생각했다. “단경인 촌경입니다.” 진성은 한 치도 떨어지지 않는 손바닥을 이용해 상대에게 약간 쓰라릴 정도의 충격을 주었다. 상대가 아직 경에 대한 자연스러운 방어가 안 되는 것을 알았기에 진성은 땀을 흘려가며 그 위력을 줄여서 타격했다. “아... 감사합니다.” 촌경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던 듯 상대는 진성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하하하... 진성군, 땀을 흘리는구먼. 경을 그렇게 약하게 조절하기가 더 어려웠지? 내 자네 맘을 다 이해한다네. 나도 가르칠 때 그런 점이 조금 힘들다네... 하하하...” 일단 상대를 인정한 검버섯 노인은 진성에게 아주 살갑게 대했다. 진성은 검버섯 노인이 까다롭지만 뒤끝은 없는 전형적인 무인이라고 느꼈다. 진성은 그 다음으로 나온 젊은 사람을 팔극신권의 비전 중 하나인 용형파의 위력을 죽여 사용해 대련을 끝냈다. “진성군, 조금 전 그것은 기술 같은데..... 어떻게 하는지 조금 가르쳐 줄 수는 없겠나?” “예? 이것은 용형파라고 비전인데요....” “...... 그래도.... 어떻게 좀.. ” 검버섯 노인은 그 기술에 대해 말해 달라고 했고 진성은 약간 난처함을 표했다. 비전을 가르쳐 달라니. 진성은 어이가 없어 피식 웃고 말았다. 중년의 남자는 자신의 두 제자가 정말 쉽게 젊은이에게 제압당하자 그 경지가 자신보다 절대 아래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중년의 남자 역시 무인이었다. 저 정도의 실력자와 겨룰 기회가 쉽게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팔극권이 아닌 다른 권의 고수이기에 그 기회는 더욱 적었다. 중년의 남자는 잠깐 고민하다가 곧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사부님, 저도 대련을 하도록 해 주십시오.” “뭐? 네가?” 검버섯 노인은 한참이나 진성에게 비전인 용형파를 가르쳐 달라고 조르다가 제자의 말을 듣고는 돌아보았다. 제자의 진지한 모습에 그 마음을 알 수는 있었지만 젊은이를 상대로 이렇게 차륜전을 벌이는 것은 그 목적이 어떻더라도 좋게 보일 수가 없었다. “진정 대련을 원하느냐?” “네, 그렇습니다. 사부님!” “진성군, 어떻게 하겠는가? 한번 더 수고를 해 주지 않겠는가?” 진성은 이제 끝났다 싶었는데 또 부탁을 해 오자 조금 고민했지만 진성 역시 자신의 경지를 확인하고 싶은 열망이 있었기에 흔쾌히 허락했다. 진성은 곧바로 대련을 하려고 했지만 검버섯 노인은 그것은 예의가 아니라며 잠깐 휴식한 뒤에 대련을 갖자고 말했다. 진성은 무인들의 사회가 어떤 곳인지는 몰랐지만 맹가위와 검버섯 노인을 보면서 아주 정당한 뭔가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젊은이, 무리한 부탁이었지만 들어줘서 정말 고맙네.” “아닙니다. 저 역시 원해서 하는 것입니다.” 중년 남자와 진성은 서로 인사를 하고는 곧바로 대련에 돌입했다. 두 사람의 대련은 확실히 팔극권의 권사들의 그것과 비슷했다. 산을 흔들어도 팔극권의 권사는 흔들지 못한다는 말처럼 정말 안정감이 넘치는 느낌이 가득한 대련이었다. 진성은 사부 유조와의 대련이 아닌 다른 사람과의 대련을 통해 처음으로 선제공격을 했다. 살짝 한걸음 나서면서 천쾌보를 이용해 상대의 사각으로 접근해서는 옆으로 비껴나는 상대의 그 축이 되는 방향으로 돌진하면서 팔극신권의 몇 안 되는 퇴법 중 하나인 맹거퇴(猛遽腿)를 펼쳤다. 맹거퇴는 발을 상대 무릎 높이까지 들어올리며 가격해 상대의 무게 중심을 흩트린 다음 바로 진각으로 이어질 수 있는 강맹한 퇴법이었는데 연환기로 쓰일 뿐 아니라 그 자체의 위력도 결코 작지 않았다. 중년의 남자는 상대의 빠른 접근에 긴장해서 물러서는데 갑자기 자신의 거리 안으로 들어와 예상치 못하게 발을 들어올리자 바로 피하지 못했다. 대신 힘을 흘리기 위해 타격을 받으면 바로 뒤로 물러설 요량으로 몸의 중심을 뒤로 돌렸다. 거기에는 상대의 경지를 시험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으윽..” 하지만 그 충격이 정말 예상했던 것과는 달랐다. 강력한 진각도 없이 단순한 발을, 그것도 무릎 정도의 높이로 들어올린 퇴법. 눈앞에 있는 젊은이의 처음 보는 동작에 주의해서 뒤로 힘을 흘리려는 노력도 부딪치는 순간 뭔가 회전하는 상대의 힘에, 힘 자체를 흘릴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자신이 공중에 떠버린 것을 알았다. 높이 1미터로 거의 3미터 정도를 뒤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팔극권의 권사가 그리 강해 보이지 않는 상대의 퇴법 하나에 3미터나 뒤로 날아갔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수치였다. 팔극권의 권사는 상대의 타격에 지는 것보다 상대에 의해 몸이 공중에 뜨는 것을 더 모욕으로 생각해 왔다. 중년의 남자는 사부와 사백이 인정하는 눈앞의 젊은이를 인정해야 함을 깨달았고 자신이 상대를 시험하기 위해 제대로 피하지 않은 점을 고려해도 자신의 실력으로 젊은이를 이기기는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런 좋은 기회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진성군, 이번에는 내가 먼저 공격하겠네.” “그러십시오.” 중년의 남자는 진성을 한번 보더니 몸의 경을 다 사용해서 몸을 웅크렸다. 진성은 그런 상대를 보자 뭔가 거슬리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약간 상대의 눈빛에서 반보 옆으로 벗어났다. 그러자 조금 나아졌다. 상대가 조금 움직이자 또 그런 느낌이 들었다. 진성은 반대로 반보 움직였다. 진성은 몇 번을 하고서야 상대의 노림수라고 느꼈다. 확실히 알기 위해서는 상대의 공격을 제대로 받아야했다. 진성은 약간 거슬리는 느낌에도 가만히 있었다. “사형, 진성군이.... 저 공격을 받을 수 있을까요? 중지시켜야 하지 않을까요? 아직 실전 경험이 없는 듯한데.....” “음... 자네 말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진성군이 자네 제자의 그 공격의 기세를 알아차리는 것 같네. 아마도 청경을 제대로 익힌 게 아닌가 싶은데....” “네? 청경을요? 하...이런... 하하하하....” 검버섯 노인은 진성이 걱정되는지 옆에서 같이 보고 있던 맹가위에게 말했지만 맹가위는 진성이 청경을 익혔음을 꿰뚫어 보고 있었기에 말리지 않았다. 그 순간 중년 남자의 순식간에 제자리에서 엄청난 속도로 진성을 향해 달려들었다. 느낌이 처음에 대련했던 사람과 비슷했지만 그 속도나 막기 힘든 방위 등 모든 면에서 완전히 다른 기술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엄청난 돌진력이라니. 그냥 몸통 공격만 해도 충분히 위협이 될 듯했다. 진성은 자연히 일어나는 몸의 반발력을 느꼈지만 오히려 반발력을 잠재우고 팔극신권 비전 중 하나인 허유조령(虛柳眺領)을 의식적으로 생각했다. 아직 실전에서의 경험이 부족해서인지 몸이 저절로 움직이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진성의 장점은 이런 곳에서 빛을 발했다. 허유조령은 일종의 상대를 끌어들이는 기술로 화경의 진수였다. 허하면서도 부드러운 버들의 움직임으로 상대를 끌어들여 상대의 힘과 경을 흘려버리는 부드러운 방어의 진수였다. 몸을 비스듬히 튼 채 오른 주먹을 뻗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공격을 가하는 중년 남자를 맞이하는 진성은 여전히 가만히 서 있었다. 자신의 거리 안으로 중년의 남자가 들어오자 진성은 몸을 공격의 타격점과 일직선이 되도록 만들면서 부드러운 경력을 끌어올렸다. 가슴 위로 그 경력을 부드러운 실을 쌓듯 쌓고는 상대의 타격이 이르기를 기다렸다. 중년의 남자의 엄청난 경력이 몰려오자 먼저 진성의 가슴 앞에 있는 부드러운 경력과 부딪쳤다. 하지만 전혀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진성은 어깨를 몇 번 흔들면서 경을 흩으려 노력했고 동시에 왼손으로 상대의 손목을 잡아 버렸다. 확실히 20대 후반의 남자와는 달리 반탄경이 있었다. 하지만 진성은 그런 반탄경을 부드럽게 무시하고는 손목을 잡아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와 동시에 진성의 가슴을 압박하는 거대한 경은 순식간에 흩어져 버렸다.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상대의 공격 자체를 지연시켰다가 아예 막아버림으로 공격 자체를 무용지물로 만들고 상대의 손목을 잡음으로 상황을 역전시켜버렸다. 원래 허유조령이란 자신의 부드러운 경을 이용해 상대의 공격에 틈을 만들고 그 틈을 이용해서 상대의 경을 약화시켜 흘려버리는 기술이었지만 진성은 거기에 한 가지 더해서 기술 뒤에 상대의 허점을 이용해서 반격을 할 수 있게 조금 고친 상태였다. 어설픈 구석이 있지만 처음 그 기술을 본 상대였기에 적중했다. 진성은 손목을 잡은 상태에서 상대를 끌어들이며 자신은 빠르게 상대의 거리 안으로 들어가서 반대쪽 손으로 상대의 목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 빠르지 않아 상대는 피했지만 손목이 잡혀 있어서 그리 움직임이 자유롭지가 않았다. 그 상태에서 진성은 바로 뻗은 팔을 굽히며 팔꿈치 치기를 했다. 중년의 젊은 남자는 한쪽 팔이 봉쇄된 중에도 어렵지 않게 다른 팔을 들어 팔꿈치 치기를 막았다. 진성은 예상했다는 듯 굽힌 팔을 펴면서 이제까지와는 달리 움직임 속에 유의 경지를 넣어 주먹이 아니라 손바닥으로 상대의 얼굴을 쳐 버렸다. 어쩔 도리가 없이 얼굴을 가격당한 중년의 남자는 손바닥으로 당한 것 같지 않은 느낌이 났다. 마치 뭔가 부드러운 것이 타격이 아니라 그냥 자신을 뒤로 민 듯한 느낌이 들었다. 중년 남자는 이런 부드러운 경도 있을 수 있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곧 상대인 젊은이가 자신을 배려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진성은 마지막 타격을 통해 자신의 경지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 그리고 타격을 하면서 손에 부드러운 경을 감싸 상대가 다치지 않고 단순히 뒤로 밀려나도록 조절했다. 진성은 상대가 약간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자신도 그에 답했다. “하하하하... 역시. 내 눈은 정확했군. 정확했어. 이 녀석아, 어떠냐?” 검버섯 노인은 자신의 제자가 졌는데도 별로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원래 타류 권법에 지게 되면 동문 전체가 벌떼처럼 일어나서 상대하기도 하는데 검버섯 노인에게는 팔극신권 속에서 조금은 다르지만 팔극권의 핵심 무리(武理)를 볼 수 있었기에 그렇게 치욕적으로 졌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게다가 개인적으로 맘에 들기까지 했다. “휴.... 사부님.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저 젊은이의 실력은 굉장합니다. 손 쓸 틈도 없이 당했습니다.” “하하하... 그럴 게야. 저 정도면... 내가 상대해도 이길 수는 있겠지만 쉽게 제압하기는 힘드니까..” “네? 정말이십니까? 사부님?” “이 녀석아, 매일 거짓말만 들었냐? 나 뿐 아니라 사형도 경륜과 수련의 차이만 있을 뿐, 그 경지 자체는 진성군과 그리 큰 차이가 난다고 할 수는 없다. 알겠느냐?” “아.....” 사실 검버섯 노인의 말은 맞기도 했지만 틀린 점도 있었다. 어떤 벽을 통과하는 듯한 경지로 친다면 진성과 검버섯 노인, 맹가위가 같다고 볼 수도 있었지만 50년 이상 차이가 나는 수련과 그 연륜은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아무리 강한 타격도 맞지 않으면 소용이 없고, 청경 역시 피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소용없는 것이었다. 팔극권과 같은 고급 권법의 접근 기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라서 청경을 익혀도 제대로 실전경험이 없다면 붙는 즉시 무너지고 만다. 진성의 사부 유조에게는 이기지 못했던 검버섯 노인과 맹가위였지만 진성에게는 거의 20수내로 이길 수 있는 실력자였다. 자신이 제자에게 훈계조로 말한 검버섯 노인은 자신의 말에 뭔가를 생각한 듯 눈빛을 반짝이며 진성을 보았다. 이미 사형 유조의 이장 문제나 팔극문의 입장 같은 것은 검버섯 노인의 머리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사형 유조의 묘도 찾아가야 하겠지만 지금 이 순간에 검버섯 노인은 진성을 바라보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성군, 자네는 그 무술로 어디까지 익힐 생각인가?” “.... 사부님은 이 팔극신권과 또 하나 전수해 주신 검법의 끝을 보라는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검법? 끝?” “네, 검법은 팔극문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우연히 배운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음... 그래? 놀랍구먼. 유조 사형이 검법을 배웠었다니. 그건 그렇고, 진성군은 어떻게 유조 사형의 유언대로 팔극신권의 끝을 보려는가?” “네? 음...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제게 시간은 그런대로 많이 있으니까요.” “그래? 내 자네에게 해 줄 이야기가 있네.” “어르신, 귀를 씻고 듣겠습니다.” “허허허... 자네가 아까 내게 축객령을 한 그 젊은이가 맞는가?” “어르신이... 제게 막말을 하셨던 그 분이 맞습니까?” “하하하하...... 그래.. 내가 졌다네. 내가 졌어. 아, 그렇지. 내가 해 줄 얘기가 뭐냐면.. 말이지.. 조금 전에 들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자네와 나, 그리고 저기 있는 사형의 경지가 기본적으로는 같다는 말이야. 팔극문에서는 유의 단계라고 하는데 나와 사형, 그리고 또 다른 사형 이 세 사람이 현재 팔극문에서는 최고수라고 할 수 있지. 그 밑을 경의 마지막에 걸쳐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 둘, 셋을 포함하면 조금 더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 정말이십니까?” “내가 자네에게 왜 거짓말을 하겠나? 내가 해 주고 싶은 이야기는... 이제 자네는 많은 시간을 통한 수련 외에는 다른 사람을 통해 어떤 발전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일세. 자네 역시 피라미드의 정점에 서 있기 때문일세. 이것은 내 경험이니 확실한 이야기지.” “......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검버섯 노인은 진성의 이런 대답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있었다. “음... 내가 생각해 봤지만 길은 두 가지 정도가 있을 듯 한데.........” 검버섯 노인은 운만 떼고는 눈마저 감아버리고 입을 다물었다. “어르신, 그 길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입니까?” 결국 진성은 눈 감은 노인에게 물었다. “.... 음... 그 중 하나가 바로 대련일세!” “네? 대련이요?” “그래. 바로 대련이라네. 비슷한 경지의 무인들끼리 정기적으로 자신의 성과와 다른 무인의 성과를 비교해서 자신에게 부족한 점을 조금씩 채워나가다 보면 길이 보일 수가 있다네. 특히 자신과 다른 무술의 고수와 대련을 하면 서로 다른 점들이 자극이 되지. 그런 결과가 모여서 실력이 된다네.” “.... 또 하나는 무엇입니까?” “음... 자신의 무술 외에 다른 무술을 배워보는 거지. 물론 제대로 배워야겠지.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자신과는 거의 반대의 무술을 배우면서 그 무술만의 특징을 알게 되면 좀 더 무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지 않겠나?” “.......” 진성이 생각하기에 둘 모두 자신에게는 어려웠다. 팔극문에서도 세 명 정도밖에 없는 경지라면 그리 쉽게 만날 수도 없거니와 대련은 더더욱 힘들 것임이 분명했다. 게다가 다른 무술을 배우다니. 확실히 팔극신권이라는 훌륭하다고 자부하는 권법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만한 무술을 찾기도 힘들고 찾았다고 하더라도 정식으로 제대로 된 권법을 배울 확률은 없다고 봐야했다. 진성은 그런 점을 알았기에 의기소침해 질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듣지 않은 것보다 못했다. 그런 진성의 표정을 확인한 검버섯 노인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에 대한 해결책이 있기는 한데.......” “네? 해결책이라니요?” 진성은 아주 기대했지만 검버섯 노인의 표정에 뭔가 노림수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너는 저 녀석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 있어라.” 진성의 물음은 무시하고 검버섯 노인은 제자를 시켜 진성과 자기 사형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는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음... 그러니까.. 말일세..... 그러니까.... 하.. 그러니까... 자네가 우리 그룹에 들어오는 거라네.” “사제, 무슨 소리인가? 그룹이라니...? 설마..?” 가만히 듣기만 하던 맹가위는 그룹이라는 얘기가 나오자 대경질색을 하며 사제에게 물었다. “사형, 맞소. 진성군이라면 자격은 되지 않습니까?” “자격이야.....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맹가위는 머뭇거렸다. “나와 사형이 찬성하면 될 듯한데. 어떻습니까?” “휴.... 나야 찬성이기는 하지만.” “일단은 해 봅시다. 하하하.... 사형의 제자가 우리 그룹 유맹으로 들어오다니.” 진성은 무슨 소리인지 몰라 듣기만 하고 있었다. 무슨 그룹 얘기가 나오는 것 같았지만 확실하지 않은 것이라 아예 신경을 끊고 있었다. 한참 동안 사형 맹가위와 얘기하던 검버섯 노인은 진성을 쳐다보고는 말했다. “자네에게는 타류 무술과 수준 높은 대련이 필요한데 내가 그 해결책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디 한번 도전해 보겠는가?”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도전이라니. 무슨 도전을 해야 하는지 진성은 알 수가 없기에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일단 말은 해야겠지. 진성군, 자네가 사문을 배신할 필요도 없고 다른 사문에 속할 필요도 없다네. 자네는 자네가 원하는 무술을 배울 수 있고 또 원한다면 고수와의 대련도 가능하다네. 어떤가? 분명 말로는 괜찮은 듯 했지만 자신이 알 수 없는 것을 대뜸 승낙할 진성이 아니었다. 확실한 대답 대신 진성은 궁금한 것을 물었다. “제가 무엇을 해야 하단 말씀입니까?” “아, 중요한 것 빼먹었구먼. 나와 사형이 가입해 있는 어떤 조직이 있는데... 오해하지 말게나. 절대 무슨 폭력조직 같은 것은 아니니까. 그냥 단순히 친목도모를 위한 조직이지. 아무튼, 그런 조직이 있는데 그 조직에 자네가 들어온다면 자네가 원하는 대련도 할 수 있고 원한다면 다른 무술도 제대로 배울 수 있다네. 중국의 무술 뿐 아니라 일본의 유명한 무술의 달인도 포함되어 있으니까. 멤버가 다 동양에서 아주 탁월한 무인들이지.” 진성은 놀랐다. 그런 조직이 있다니. 게다가 그런 조직에 자신더러 가입하라니. “그런 대단한 조직에.... 저를... ” “자네는 자네의 경지를 제대로 모르고 있는 모양이군. 하하하.. 그럴지도.. 자네가 가입한다면 사상 최연소일 테니까.” “..... 그런데 그 조직은 무슨 일을 합니까?” “무슨 일? 아, 조직에 속해서 무슨 일을 하는 것은 아니라네. 단지, 날을 정해서 다같이 모이거나 서로 원하는 사람들끼리 만나 대련을 하거나 서로의 무술을 가르쳐 주기도 하지. 아, 단 한 가지 규칙이 있는데... 조직에 대한 절대적인 비밀 엄수, 그것은 꼭 지켜야 한다네. 그래서 내 제자 놈을 밖으로 내보낸 거지.” 진성은 확실히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조직이 어느 정도 고수들이 서로의 실력을 대련을 통해 확인하고 자극을 받는 정도, 거기에 서로 무술을 알려주는 모임이라고 정리했다. 그러다 의문이 생겨 검버섯 노인에게 물었다. “어르신.... 저는 사부님이 전수해 주신 제 무술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아, 그것도 문제가 없네. 자신이 전하고 싶지 않으면 가르쳐 주지 않아도 되거든. 아마도 자네가 가입하면 서로 자네를 가르친다고 난리가 날 걸세. 하하하하.. 어떤가? 좋지?” 자신의 질문에 흔쾌히 대답하는 걸로 무슨 장난은 아닌 것 같았지만 알지도 못하는 조직에 덜컥 가입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자신은 메이저 리그가 얼마 남지 않은 프로 게이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성은 조금 흔들렸다. 프로 게이머는 오랫동안 할 일이 아니었지만 사부이자 할아버지인 유조의 유언은 평생 동안 지켜나가야 할 중요한 일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진성은 그나마 조금 더 믿음이 가는 사부의 사형, 맹가위에게 물었다. “어르신, 제가 그 조직에 가입한다고 해도 제 사부님께 아무런 누를 끼치지 않는지요?” “그런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네. 일종의 친목조직이니까.” “그리고..... 저는 지금 하는 일이 있는데... 바쁠 것 같아서..” “그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지금도 바쁜 사람은 모임을 건너뛰니까. 이 모임은 그야말로 자유야. 하지만 나이가 들어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는 일을 쉽게 포기하는 친구들은 거의 없다고 봐야지. 자네가 들어오면 아주 재미있을 거야.” 자신에게 말을 다 듣고는 갑자기 사형에게 물어보는 진성의 행동에 발작을 일으키려던 검버섯 노인에게 진성은 아주 적절한 타이밍을 맞춰 말했다. “이...” “어르신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뭐? 아.. 그래. 그래. 아주 잘 생각했네. 처음 가입 시에는 간단한 시험이 있지만 자네라면... 하하하.. 막내가 조금 고생하겠군. 아, 그리고 이 모임은 평생 탈퇴가 불가능하네. 탈퇴하고 싶으면 그냥 잠적하기만 하면 되니까. 하하하하..” 진성의 가입하겠다는 대답을 듣자 검버섯 노인은 평생 탈퇴 불가라는 말을 꺼냈다. “어르신, 그런데... 그 조직 이름이.....” “아, 내가 얘기 안했나? 안했구먼. 우리는 조직이라고 안 부르지. 그룹이라고 부른다네. 그룹! 이름은 유맹(游氓)이라고 하네. 유협(游俠)과 같은 뜻이라고 생각하면 되네. 무협소설의 그 의기 있는 무림인이라고나 할까? 하하하... ” “유맹....” “공식적인 것은 아니지만... 우리 그룹 유맹은 묵가(墨家)의 사상을 암암리에 따른다네. 최초의 유협이 묵자라는 소리도 있으니 틀린 것은 아니지. 유가(儒家)가 인애(仁愛)를 주장한다면 묵가는 겸애(兼愛)를 주장하지. 아, 이것은 입문 자격과도 관계가 되니 꼭 알아두는 게 좋을 거야.” “인애? 겸애?” “친목도모가 목적이기도 하지만 각기 어느 정도 명성과 함께 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활동도 하고 있다네. 묵가를 따르는 표시 정도밖에 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묵자처럼 전쟁을 막으러 전장으로 뛰어다니지는 않으니 오해는 말게나. 하하하하..” 예전 병법의 연구를 통해서 묵가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진성이었지만 인애와 겸애, 유가와 묵가의 기본 차이에 대한 것은 언뜻 떠오르지 않았다. “유맹은 일년에 많으면 4번, 적으면 2번 정도 모임을 가진다네. 그런 전체 모임 말고도 가까운 사람들끼리는 자주 만나기도 하지. 아, 한국에도 유맹 멤버가 있지. 아마 자네는 모르겠지만 아주 대단한 사람이지.” “그런가요?” “그래.... 일단 차기 모임 일자가 정해지면 자네에게 내가 연락을 하지.” “저.. 그런데.. 저는 당분간 두 달 정도는 시간이........” “그런가? 그리 급히 하지 않아도 된다네. 우리야 시간이 없지만 자네는 남는 게 시간이니.. 하하하하하... ” 진성은 두 노인, 맹가위와 검버섯 노인에게 알고 싶은 것들을 하나하나 물어봤고 두 노인은 그에 대해 상세하게 가르쳐주었다. 진성은 그런 대화를 통해 자신의 선택에 확신을 가졌고 곧 연락처와 하고 있는 일을 두 노인에게 말했다. “뭐? 자네가 무슨 그 오락 선수라고?” “.............. 프로 게이머인데요....” “그게 그거 아닌가?” 검버섯 노인의 막무가내에 진성은 뭐라 마땅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 “자네, 그거 가지고 먹고 살 수 있겠나? 오락 선수라니... 그러지 말고 자네의 그 실력으로 팔극신권 가르칠 수 있는 제대로 된 도장 세우면 사람들이 몰릴 텐데.... 내가 좀 도와줄까?” “........” 진성은 기가 막혀 말을 못했지만 검버섯 노인은 사정이 있거나, 부끄러워 말을 못하는 줄 알았다. “어려워 말게나. 나도 도장 하나 열어줄 돈은 있으니까..” “어르신, 이 집이 제 이름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제 연봉이 5억입니다.” “아.. 그렇지. 이 집이 있었지.... 뭐? 5억이 넘어... 5억이면... 아.. 오락 선수가 그렇게나 돈을 많이 받아?” 단위가 틀려서인지 잘 알지 못했던 검버섯 노인은 5억이라는 돈의 가치를 알고는 놀라 버렸다. 진성이의 분위기를 봐서 거짓말로 보기는 힘들었지만 그대로 믿을 수도 없었다. 검버섯 노인은 궁리 끝에 먹고는 살 수 있을 정도는 번다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허허.. 그래... 혹시라도 힘들면 이야기하게나. 그룹에서 도와줄 수도 있으니까. 하하하....” 그 뒤로도 계속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마음대로 생각해버리는 노인을 두고 진성은 더 이상의 시도는 쓸데없는 짓임을 알았다. 그 때, 생각이 났다. “어르신, 이번에 제가 어쩌면 중국으로 갈지도 모르거든요.” “중국? 자네가 왜?” “그.... 오.락.하러요. 오락 대회가 중국에서도 열리거든요. 그 때 연락드릴 테니 한번 오시겠습니까?” 진성 역시 원활한 대화를 위해서 프로 게임 리그를 단순히 오락 대회라고 격하시켜 버렸다. “... 오락대회를 중국에서? 정말인가? 요즘은 오락대회도 나라를 옮겨 가면서 하는구먼. 음.... 나는 오락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자네가 말하면.. 중국 멤버들 모아서 한번 가 볼까나....” 진성은 검버섯 노인이 문명 온라인 영웅 스키피오의 게임 화면을 보고는 얼마나 놀랄지 상상하고는 피식 웃었다. “자네, 왜 웃는가?” “아.... 그게... 저... 하하하... 어르신,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진성은 난감한 순간을 기지로 대처했다. “아, 그렇구먼. 아직 이름도 이야기 안했네. 나는 왕현추라고 하네. 음.. 자네는 내게.. 음...... 그냥 왕아저씨라고 부르면 되네.” 쑥스러운 이야기인지 잠깐 뜸을 들이더니 왕현추는 진성에게 자신을 아저씨라고 부르라고 말했다. 가만히 있던 맹가위가 그 말에 끼어든 것은 불문가지였다. “이 사람아, 왕아저씨라니. 저만한 손자가 있는 사람이... ” “사형, 알았소. 진성아, 사형도 맹아저씨라고 불러 드려라.” 진지한 표정으로 거리낌 없이 말하는 왕현추의 당당한 태도였다. “........” 맹가위는 아무런 말도 못했다. 진성 역시 아무런 말도 못했지만 내심 하기도 싫었다. 12개 팀이 최종적으로 결정된 메이저 리그는 3개국의 미리 정해진 경기장을 돌면서 게임을 치르기로 메이저 리그 운영위원회에서 결정했다. 정확한 경기일정과 함께 일정 기간 동안 3개국을 돌다가 마지막 월드 시리즈는 한국에서 하기로 합의했다. 메이저 리그의 정확한 리그 운영 계획이 발표되자 자소 소프트를 비롯해서 메이저 리그에 진출한 한국 국내의 프로팀들은 그에 맞춰 게임을 치르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다른 나라에서 메이저 리그에 진출한 프로팀들의 경기를 녹화한 테입을 보면서 상대를 공략할 수 있는 방법이나 상대의 약점 등을 찾기 위한 분석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 사정은 일본과 중국의 프로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한국의 프로팀들에 대한 대비는 더욱 더 철저했다. 문명 온라인 영웅 스키피오의 개발국이자 2차 프로 리그를 치뤘다는 것은 상당한 프리미엄이어서 일본과 중국의 프로팀들은 일차 목표를 한국 프로팀들을 꺾는 것으로 둘 정도였다.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수 게이머 스키피오에 대한 분석은 그 중에서도 최고로 중시했다. 게이머 스키피오를 꺾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문명 온라인 영웅 스키피오의 최고수가 된다는 것과 동일했기에 그 상징성이 가볍지 않았다. 일본과 중국의 프로팀과 운영위원회는 그 상징성이 곧 명예이며 돈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보다 늦게 시작된 프로 리그였지만 분위기를 반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리라 생각했다. 메이저 리그 운영 위원회에서 정한 것 중에 한 가지가 일본과 중국, 한국의 프로팀들을 반발을 샀다. 바로 문명 온라인 영웅 스키피오의 패치를 메이저 리그에 적용하겠다는 말이었다. 어차피 팀플레이는 할 수 없기 때문에 1:1로 플레이 하는 것은 같은데 문제는 이제까지 무주공산으로 비어 있던 땅덩어리가 다른 국가들로 채워져 마음대로 진군했다가는 엄청난 피해와 함께 상대에게 어부지리를 얻게 해 줄지도 모를 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이는 메이저 리그의 운영위원회 중 다수인 일본과 중국 위원들의 한국 프로팀들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현재 나온 분석으로는 한국의 프로 게이머 스키피오와 한신의 더블 스토퍼를 막을 프로팀이 없다는 결론이어서 부득불 약간의 억지를 동원해서라도 비슷한 조건을 만들 속셈이었다. 전혀 생소한 것이라면 어차피 세 나라의 모든 프로팀에게 공통된 조건이었기에 상대적으로 한국의 프로팀이 불리하리라 생각한 결과였다. 한국의 프로팀들은 반발했지만 메이저 리그 운영위원회가 원래부터 다수결의 협의체였기에 어쩔 수 없었다. 문명 온라인 영웅 스키피오의 패치 버전이 적용되어 메이저 리그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이 알려지자 한국의 프로팀을 비롯해서 중국, 일본의 프로팀들은 패치 버전을 받아서 일초라고 아끼며 연습을 해야 했다. 그것은 자소 소프트 프로팀이라고 해서 다를 리가 없었다. “그게 아니라니까. 진규야, 잘 봐. 여기서 이렇게 진격하면 저, 고르디아라는 부족이 가만히 있겠냐? 아무리 급해도 그쪽으로 가면 안 되지. 만약 가려면 그 전에 동맹을 맺어 뒀어야지. 잘 봐. 이쪽으로 미리 병력을 모아 두었으면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잖아. 그래, 그렇게. 그리고 이쪽도 마찬가지야. 동맹도 맺지 않은 나라 국경 앞에다 대규모 병력을 두면 어쩌자는 얘기야? 상대를 자극하는 것밖에 안 되잖아. 그럼 상대도 당연히 국경에 병력을 모으게 될 거고. 그런 상태에서 동맹이 체결될 것 같아? 이렇게 병력을 나누면 유사시에 동원하기도 쉽고 동맹도 훨씬 쉽게 체결할 수 있겠지. OK?" 현준은 입에 침까지 튀겨가며 뽑아 놓은 가상 지도에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는 이곳저곳을 짚으며 조목조목 진규에게 설명했다. “네... 현준이 형. 그런데 현준이 형은 이 패치 버전 이미 해 봤어요?” 자신과 같이 패치 버전을 시작한 현준의 능수능란한 게임 운영과 설명에 진규는 의심이 생겨 물었다. “패치 버전? 아.. 이거 어제 받았는데... 20번 정도 게임 했나...?” “네? 정말이요?” “내가 거짓말 할 이유는 없잖아. 그런데 왜?”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잘 하세요?” “아........ 그것은 다 이유가 있지.” “무슨 이유인데요?” “맨 입으로.....?” 진규는 얼굴이 일그러지면서도 자동적으로 요람 밖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곧 음료수를 뽑아 친절하게 뚜껑까지 따 현준에게 내밀었다. “자, 여기...” “음... 시원하다. 사실 진성이와 나는 병법을 가지고 연구하면서 실제 게임에 적용시켜 왔거든. 그런데 병법에서 상당히 중요한 것이 뭐냐면 싸움을 하지 않고 상대를 굴복시키는 방법이야. 군사를 일으켜 서로 피해를 입으며 상대를 굴복하게 만드는 것보다 싸움을 하지 않고 상대로 하여금 꼼짝도 못하게 만드는 게 사실 병법의 진수지.” “그래서요?” 진규는 한마디라도 놓칠 새라 귀담아 들었다. “진성이와 나는 그런 병법을 가지고 계속 보면서 게임에 적용시켜 왔다. 실제로 공부한 것 중에서 게임에 적용시킨 것은 실제 전투가 일어났을 때를 가정한 거지. 그런데 이번 패치로 어쩌면 병법의 대부분을 적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어떻게 보면 진성이와 나는 상당히 유리하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겠지. 어떤 사람이라도 만들어진 전략이나 다른 사람들의 플레이를 통해 익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진성이처럼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병법이나 전쟁사를 통해서 게임을 익혔다면.. 아마도 이번 패치로 이익을 볼 수도 있겠지.” “아..... 그럼 진성이 형도?” “진성이 녀석은 원래의 문명 온라인으로도 이간책이나 선동책을 쓰는 녀석이야. 아, 너 한번도 안 당해봤겠군. 나는 진성의 로마에게 싸움 한번 못해보고 진성이가 보낸 NPC로 인해 생긴 쿠데타로 죽어서 게임 오버된 적도 있었다. 그 NPC가 아마도 대(大)카토였지. 휴.. 그 때 한 동안 게임을 못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지.” “와..... 대단하네요.” “좋아할 일이 아니야. 한번 당하면 정말 허탈하다니까.” “그런가요?” “그나저나 네가 어느 정도 실력이 올라가야 하는데... 휴.. 아마도 처음에 다른 사람들의 전략이나 만들어 놓은 것을 위주로 게임 실력을 쌓았다면 조금은.. 힘들어질 게 뻔한데...” “누가 그러던데요... 중국하고 일본이 한국 프로팀이 너무 잘해서 그거 막아보려고 패치 버전 적용하자고 했다던데요..” “나도 듣기는 들었는데... 나와 진성이는 오히려 조금은 더 유리하니 쩝.. 누가 그런 생각했는지 몰라도 판단을 잘못한 것 같다.” 현준은 알 수 없는 그 누군가를 생각하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진성은 곧 있을 메이저 리그에서 문명 온라인의 패치 버전을 적용하겠다는 발표를 듣자마자 다른 프로팀의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패치가 적용된 게임으로 연습을 시작했다. 무엇이든지 처음이면 두려움이 있게 마련이다. 진성 역시 처음이라 두려움 반, 설렘 반이었다. 하지만 몇 게임 연습을 해 보니 오히려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더 늘어났음을 알 수 있었다. 팀플레이는 할 수 없었기에 1:1 게임을 하는 것은 당연했지만 상대와의 완전한 1:1이 아니라 주변에 인공지능 국가들이 있었기에 그만큼 더 많은 변수가 존재하게 됐다. “음.... 이거 오히려 잘 된 건가?” 한국 프로팀들을 경계해서 내려진 결정이라는 것이 한국 게이머들이 메이저 리그 운영위원회의 결정에 대한 대부분 사람들의 결론이었다. 진성 역시 알고 있었지만 더 높아진 현실감과 자유도로 인해 지금처럼 병법의 일부를 떼 내 부단한 연습을 통해 하나의 전략으로 만드는 것보다는 더 게임 준비가 쉽다고 느꼈다. “네? 그게 사실인가요?” “......... 사실이다.” 현준은 이팀장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팀장은 진성과 현준, 진규를 불러서는 놀랄만한 사실을 말했다. 문명 온라인 영웅 스키피오의 아마추어 패치 버전이 발표되기 직전에 모든 프로팀들에게 프로 버전의 패치 역시 보냈다는 말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일본과 중국의 프로팀들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만으로 전혀 놀랄 일이 아니었지만 문제는 일본과 중국의 프로팀은 메이저 리그에서 패치 버전이 적용될 줄 알고 미리 연습을 해 왔다는 사실이었다. 한국의 프로팀만이 그런 것을 모른 채, 패치 이전의 문명 온라인으로만 모든 준비를 한 것이다. “최근에서야 일본과 중국의 꿍꿍이를 알게 되었다. 아마도 지기 싫어서였겠지만, 휴... 이런 일이 생길지는 생각도 못했다.” 게임 개발사로서 새로운 패치가 나와서 그것을 보낸 것은 잘못 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각본을 짠 듯 미리 패치 버전을 연습하고 메이저 리그를 준비한 것은 전혀 예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일본과 중국은 자국 리그도 중요했지만 메이저 리그를 위해 패치 버전으로 연습을 계속했다고 인정해야 했다. 이팀장의 말에 따르면 이번에 메이저 리그에 진출한 나머지 세 팀도 아주 난감한 상태였다. 당연히 게임의 전략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기존의 문명 온라인에 적응된 상태로서는 아주 힘든 것이 당연했다. 게다가 일주일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을 아껴서 연습을 한다고 해도 절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요....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진규 역시 현준의 마음과 같았다. “이팀장님, 각 프로팀들은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잠자코 듣고 있던 진성은 이팀장을 보면서 물었다. “음.... 서재필 프로팀 팀장이 지금 다른 프로팀 관계자를 만나고 있으니까 무슨 말이 나오겠지. 하지만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지금 상태 그대로 대회를 치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런 일은 캐내기도 힘들고 캐내봤자 별로 좋은 꼴을 볼 수도 없으니까....” “이 상태로 메이저 리그에 돌입하면......” “잘못하면 한국 프로팀들의 참패로 이어지겠지... 하지만 초반 2,3주 정도만 잘 버티면 가락이 있으니 잘 할 수 있을 거다.” “결국 초반이 문제군요.” “그렇지.....” “쌍룡은행과 삼선전자 삼일이동통신은 난리가 났다. 아마도 선수들이 패치 적용 버전으로 게임을 해 보고는 힘들다고 말한 모양이다. 완전히 게임 자체가 다른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와는 다른 전략을 준비한 쪽이 절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에 어떻게 할지 고민 중인 상태다. 하지만 메이저 리그에는 참석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최대한 대회전까지 패치 버전으로 연습을 해서 그 격차를 줄일 수밖에 없으니. 지금 거의 밤을 새면서까지 연습을 하고 있는 중일 거다.” 매니저 서재필은 세 프로팀 관계자와 만나서 얘기한 결과 극단적인 메이저 리그 보이콧과 같은 단체 행동은 지양하고 정상적으로 리그에 참여하기로 했다는 말을 전했다. “... 그래도 항의는 해야 하지 않습니까? 이런 일을 그냥 두고 넘어가면... 다음 리그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지 않겠습니까?” 현준은 조금 흥분한 듯, 침을 튀기면서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서 말했다. “메이저 리그 운영위원회가 현재 한국, 일본 그리고 중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다수결이라서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게다가 어떤 유착관계가 있다고 해도 다른 나라의 단체를 조사해볼 권한 자체가 없다. 만약에 그런 방법이 있다고 해도 리그에 비리가 있다면 결국 손해는 다 같이 입을 수밖에 없다. 이번에는........ 어쩔 수 없는 듯하다. 이런 일을 예상하지 못한 우리가 조금 어리석었다고 볼 수밖에.” “.........” 냉철하면서도 날카로운 매니저이자 프로팀 팀장인 서재필의 말에 현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매니저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그렇고.... 너희들은 연습 잘 하고 있냐?” “연습이요? 일본, 중국이 패치 버전으로 연습했다는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자신 있었는데 지금은.. 조금.. 그러네요.. 그리고 진규는 지금부터 잠을 재워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서재필의 물음에 현준은 평소와 달리 목소리를 낮게 깔고 뭔가 중요한 내용이라도 말하는 듯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 말을 들은 진규의 얼굴색이 약간 변했다. “현준이와 저는 그런대로 적응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진규가 조금 걱정이네요. 시간만 있으면 좋겠지만, 지금 제일 부족한 게 시간이니까요.” 현준의 말이 믿음이 가지 않는 듯, 서재필은 진성에게로 고개를 돌렸고 진성은 크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와 현준이는 괜찮겠냐?” 그래도 걱정이 되는 서재필은 다시 확인했다. “저와 현준이는 처음부터 어느 정도는 실제 상황에 맞게끔 여러 가지를 공부했다가 그런 것에서 일부분을 떼 내 문명 온라인에 맞춰 왔습니다. 오히려 그 때가 조금 더 힘들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몇 게임 해 보니 확실하게 유리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패치 전보다 많이 불리할 것 같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호... 그래? 그나마 다행이네. 현준아, 네가 진규 책임지고... 만들어라. 알겠지?” “네, 알겠습니다. 진규야.. 하하하... 기대해라.” 매니저의 말에 얼굴색이 하얗게 변한 진규는 현준의 말에 사색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오늘부터 일본으로 출국하기 전날까지 모두 이 회사에서 숙식을 같이 한다. 물론 나와 이준씨도 같이 있을 테니까 너희들도 마음 단단히 먹고 제대로 연습해라. 알겠지? 먹을 것은 내가 최고로 준비해 줄 테니까.” “네!” “진규야, 잘 들어라.” 현준과 번갈아 가면서 진규에게 달라진 실전에 대해 도움을 주던 진성은 그런대로 자신의 군대강화법을 어느 정도 수준급으로 컨트롤하는 진규를 보고는 그 다음 단계를 알려줘도 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이제까지의 로마 제국의 군대강화법은 군대라는 생물의 머리에 어느 정도의 훈련을 통한 지능을 부여한 것과 같다. 왜 그렇지?” “....... 아마도.. 군단장을 교육, 훈련시켰기 때문 아닙니까?” “맞다. 바로 군대의 지휘관을 교육시켰기 때문이지. 그것으로 인해서 원정군의 전력이 상승했고 작전수행능력 또한 높아졌지. 이제까지 이 군대강화법 연습한다고 고생했지?” “네, 매번 달라지는 문명의 상황에 맞춰서 군대강화법을 쓰려니... 정말 처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는데 이제야 조금 실전에 써먹을 수 있을 정도는 된 것 같은데요..”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조금 더 유연한 대처가 필요하겠지만 어느 정도는 궤도에 오른 것 같다. 진규야, 축하한다.” “네? 아.... 아.... 진성이 형, 고마워요.”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내가 네게 그 다음 단계를 알려주려고 하는데... 들어 보겠냐?” “그 다음 단계도 있나요?” 진규는 다음 단계라는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음.. 아마 현준이만 알고 있을 걸. 현준이와의 연습 게임 말고는 써본 적이 없으니까.” “와.... 진성이형이 그렇게 말하니까 정말 기대되는데요.” 평소 진규 자신이 보기에 대단한 것도 그리 대수롭지 않게 말해왔던 진성이 조금은 자랑스러운 듯 말하자 진규는 기대감으로 넘쳤다. “네가 어느 정도 컨트롤할 수 있는 군대강화법이 군대라는 생물의 머리를 강화시키는 방법이라면 이제 내가 말해 주고 보여줄 방법은 그 군대라는 생물의 세포 하나하나의 전력을 업그레이드 하는 방법이다.” “네? 세포 하나하나?” “말로만 해서는 힘드니 연습 게임 한번 해 보자.” 진성과 진규의 로마 문명 대 로마 문명의 게임이 시작되었다. 랜덤의 지형이 아니라 진성이 이미 서로 알고 있는 대륙형 지형을 선택했기 때문에 바다에 대해서는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진규는 자신이 자신 있는 군대강화법을 이용해서 군대 양성에 들어갔다. 연습은 실전처럼 해야 한다는 것이 진성과 현준의 평소 생각이었기 때문에 진규 역시 최선을 다했다. 진성은 기본적인 군대강화법 뿐 아니라 조금은 색다른 컨트롤을 내리기 시작했다. 수도 로마 뿐 아니라 지방 도시의 근본적인 불안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실업자들과 하층민들에게 어느 정도의 자족할 수 있는 땅을 거의 무상으로 나눠주는 법을 통과시키는 동시에 부유한 소수의 계층에게 세금을 많이 거뒀다. 그런 조치는 로마의 중, 하층민의 지지를 받았지만 권력층에서는 아주 불만이 가득했다. 진성은 적절하게 귀족들의 요구 중에서 작은 것을 들어주기도 하고 평민 중에서도 중, 하층민의 고충을 해결해 주면서 전체적으로 자신의 재산을 가진 중산층의 비율이 많아지도록 유도했다. 그 과정에서 보통의 군대강화법이나 다른 유명한 빌더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컨트롤이 필요했다. 어쩌면 양 계층 사이에서 시소게임을 벌이는 것과 같았기에 매우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진성은 그리 흔들리지 않고 확실히 눈에 띌 정도로 중산층의 인구를 늘려갔다. 게다가 이런 방법은 주기적으로 필요한 컨트롤이 많았다. 그 다음으로 진성은 또 확실한 조치를 취했다. 이제까지 실업자들을 이용한 직업 군인의 비율이 많았는데 그 비율을 줄인 것이다. 이 조치는 그리 반대가 없었다. 이미 실업자들과 하층민들이 중산층으로 대거 편입이 되어가는 중이라 당연한 조치였고 오히려 반기는 듯한 여론이었다. 그로 인해 진성의 로마 군대는 대다수가 시민군으로 이루어졌다. 자족하는 중산층의 증가는 개개인의 무장에도 영향을 미쳤고 군의 사기 또한 대단했다. 그런 상황에서 시민군인의 중용은 사기를 더욱 높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런 복잡하고 컨트롤이 많이 필요한 경기 운영으로 진규의 군대가 15만이 넘어갔을 때 진성의 군대는 10만이 채 되지 못했다. 진규는 진성의 경기 운영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군대의 규모는 알 수 있었다. 평소 자신이 아는 진성의 경기 운영이 아니었지만 초기의 이런 기회를 놓칠 진규가 아니었다. 진규는 미리 동맹을 맺어둔 이오니아를 지나 진성의 국경 바로 앞으로 군대를 이동시켰다. 물론 진규 자신도 군대와 같이 움직였다. 진성은 진규의 군대가 오는 것을 보고 어느 정도 만족할 만큼 훈련이 끝난 군대 10만 정도를 모아서 국경으로 보냈다. 전투에서 전술이 중요하다고 해도 기본적으로는 전력의 차이가 어느 정도 승부를 결정한다고 봐야했다. 적은 수가 많은 수를 이긴다는 것은 전장의 선택, 날씨, 전술의 우위 등 결정적인 승리 요인이 있다는 말과 같았다. 그런 것은 자신의 역량도 중요하지만 상대의 방심 역시 필요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전력이라는 것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진규도, 진성도 그런 점을 알고 있었다. 진규는 자신의 전력이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진성의 유혹이나 노림수에 넘어가지 않으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진성이 자신에게 정면 승부는 노리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하지만 그런 판단은 곧 무너져 내렸다. 여러 군단으로 나누어져 일사분란하게 정면 대결을 원하는 듯한 진성의 군대 진형을 보고 진규는 약간 혼란에 빠졌다. 15만대 10만. 진성의 군대강화법이 아주 대단한 것은 분명하지만 진규 자신의 군대 역시 그리 결정적으로 처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런 전술도 없이 정면 대결을 하면 당연히 15만의 군대가 이기는 법이었다. 양익의 부대 진형도 없는 그야말로 밀집 중장 보병의 단단한 정면 대결을 위한 진형이었다. 혹시 다른 함정이나 계략이 있지 않을까 살폈지만 자신에게 뭔가를 보여 주겠다고 한 터라 그런 것은 없으리라 판단한 진규는 자신의 군대 역시 로마 전통의 군진을 해서는 서서로 전장으로 들어갔다. 서로를 바라봐서 얼굴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는 위치에 선 두 군대는 엄청난 환호를 지르며 상대를 향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패와 투창을 들고는 단단하게 뭉쳐져 있어 어떻게 뚫을 수 있을까 생각하게 만드는 두 부대의 전투는 마치 방패와 방패의 대결 같았다. 진규는 그 때까지도 진성의 의도가 무엇인지 몰랐다. 이런 단순한 전투는 그야말로 군대의 고유 역량만 드러날 뿐이었다. 같은 로마 문명에, 비슷한 스타일의 게임 운영이기에 군인 하나하나의 차이는 거의 없다고 봐야했다. 진규는 진성이 왜 이런 게임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 뭐지? 이게 뭐야? 이럴 수가....” 진규는 곧 뭔가 이상함을 알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생각했지만 도저히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분명히 같은 밀집 중장보병끼리 부딪쳤다. 서로의 진형은 거의 같았고 마니프레스라는 중대와 센추리라는 백인대 중심의 세부 진형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처음에는 몰랐지만 서서히, 하지만 확실하게 진규 자신의 부대가 밀리기 시작했다. 특히 중앙이 아닌 진의 양끝이 그야말로 짓밟힌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패퇴해서 흩어져 버릴 정도였다. 중앙 부분도 처음에는 견디다가 전세를 아는지 점점 뒤로 밀렸다. 15만의 군대가 10만의 군대에게 그야말로 힘 싸움에서 밀려버린 것이다. 진규는 이것이 바로 진성이 의도한 것임을 알았지만 어쩐 일인지 몰랐다. 확실히 군단장의 어떤 판단도 끼어들 수 없는 단순한 진형의 육박전이라 군대강화법과는 다름을 알았다. 진규는 10만의 군대에게 쫓겨 전장을 이탈하는 15만의 자신의 군대를 볼 수 있었다. “휴.... 도대체 어떻게 한 거예요?” 진규는 흐르는 땀을 닦으며 진성에게 궁금해서 물었다. “... 맨입으로?” “..........” 점점 현준과 닮아가는 진성의 말에 진규는 할말이 없었고 몸은 이미 요람을 뛰어 나가고 있었다. 재빨리 음료수를 뽑아온 진규는 역시 뚜껑을 따서는 진성에게 바쳤다. “휴... 시원하다. 진규야, 느낌이 어떻더냐?” 음료수를 거의 반 정도는 마신 진성은 그제야 진규에게 게임에 대해서 물었다. “느낌이요? 음... 완전히 힘 싸움에서 밀렸어요. 15만이 10만에게 밀렸다라.... 이유는 모르겠지만 전술이 아닌 정말 힘에서 밀렸어요.” “네 말이 맞다. 힘에서 밀렸지. 아까 내가 뭐라고 했지?” “아.... 군대 강화법이 머리를 강화시킨 거라면.... 아.. 세포 하나하나? 그럼?” “맞아. 군인 하나하나의 능력을 업그레이드 시키는 방법이다.” “...... 그게 가능한 건가요?” “방금 봤잖아. 컨트롤이 무지 힘들지만 일단 성공만 하면 거의 무적이지. 사실 나는 이 방법이 문명 온라인의 구조적인 버그라고 생각해서 현준과 이팀장님에게만 말하고 실전에 사용할 생각이 없었거든. 어떻게 보면 치트를 쓴 것과 비슷할 정도의 효과를 내니까. 내가 10만으로 20만의 현준의 그리스 정예병을 박살낸 적도 있으니까. 그 때는 물론 내가 조금 전술적인 면에도 신경 썼지만. 그 때 현준 분해서 죽으려고 했거든.... 하하하하..” “와.... 그렇게 대단한 건가요?” “대단하긴 하지. 아마 다음에 있을 패치에는 이런 방법이 금지될 거다. 방법 자체는 당연히 아무런 하자가 없지만 그 효과가 게임의 밸런스를 무너뜨릴 정도로 좋으니까. 그런데 이번에 일본과 중국의 얘기를 들으니까 우리도 그렇게만 당하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거 배우면 아마 이번 메이저 리그에서만 가능할 거다. 손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컨트롤과 게임의 시야가 좋아져서 전체적으로 게임 능력도 성장하겠지.” “우와.....” “이것은 어떤 특수한 빌더 오더는 아니다. 내가 한 것은 한마디로 하면 ‘시민군의 양성’이다.” “시민군?” “직업군의 반대라고 할 수 있지. 내가 한 것은 직업군의 비율을 줄이고 군단의 대다수인 병사를 시민군으로 대체한 것뿐이다. 직업군이 좋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지킬 것이 있는 시민군의 절대 물러나지 않는 그런 정신에는 미치지 못하거든. 조금 더 심오한 이야기가 있지만 그런 것은 생략.” “네? 그래도 직업상비군이 더 전력이 좋지 않은가요?” “그것은 시민군이 제대로 훈련이 안 된 경우지. 어느 정도 훈련만 된다면 훨씬 더 강해지는 것이 시민군이다. 내가 수십 번 테스트 해 본 결과니 아마 확실할 거다. 적어도 문명 온라인에서는. 직업군인이 돈에 의해서 움직인다면 시민군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움직인다. 역사에서는 그런 차이가 상당히 중요한 결과적 차이를 만들었거든.” “아.... 진성이 형,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어요?” “음.... 실제 역사에서 고대 그리스가 어떻게 대 제국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지지 않을 수 있을까 생각하다보니..... 자유 시민군의 역량이 느껴지더라. 그래서 그것을 로마 문명에 적용해 봤는데.... 기가 막히게 들어맞았을 뿐이다. 어쩌면 문명 온라인이라는 게임이 역사를 나름대로 철저하게 구현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 진규는 진성의 설명에 할말을 잃었다. 진성은 진규에게 계속 설명했고 진규는 그 설명을 머리에 확실히 새겼다. 확실히 어느 정도 방법이 나와 있는 전략이 아닌 어떻게 보면 사회의 구조에 대한 적절한 수정이었다. 진규는 진성의 설명을 통해 그 컨트롤의 위험을 알았다. 위험과 불안 요소인 실업자와 하층민, 권력층인 귀족들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외줄타기였다. 진규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함을 알았다. 진성의 확실한 말에 그 위력은 탐이 났지만 잘못하면 위험에 빠질 수 있어서 진규는 망설였다. “진규야, 지금 당장 이것을 연습해서 사용하라는 게 아니다. 메이저 리그 처음에는 아마 우리나라 프로팀들이 대부분 고전할 거다. 너도 고전하겠지. 초반에는 나와 현준이 어느 정도는 해 줄 테니까 너는 아무 걱정 말고 실력을 키워서 중, 후반을 목표로 해라.” “그래도....”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이번 메이저 리그를 통해서 일본과 중국의 프로팀들을 완전히 박살을 내버릴 거다. 다시는 그런 비겁한 짓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보여줘야지. 다음 패치에는 이런 방법이 소용없을 테니 마음껏 사용해도 문제도 없다. 현재로는 절대 버그가 아니니...” 진성은 이번 대회를 같은 위치에서 기량을 제대로 겨루는 경기가 아니라 생각했다. 미리 연습한 일본과 중국의 프로팀이라니. 물론 프로 선수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잘못한 것은 아니겠지만 어차피 진성과 대결하는 사람은 프로 선수였다. 현준과는 다르게 차갑게 흥분한 진성은 자신이 발견한 게임 밸런스를 깰지도 모르는 방법을 동원해서 일본과 중국의 프로팀들의 자신감을 박살내어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진규는 그래도 망설였지만 진성을 믿고는 그 ‘시민군 양성’이라는 버그 전략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열릴 메이저 리그의 대회장은 진성과 현준이 와 본 곳이었다. 동경 게임쇼의 전시회장으로 쓰였던 엑센터가 바로 메이저 리그 대회장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었다. 동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했기 때문에 교통도 좋았고 원래 게임 쇼를 치른 경험도 있기 때문에 숙박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곳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엑센터는 대회장으로 전혀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엑센터가 텅 빈 커다란 창고라 진성과 현준은 조금은 썰렁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야...... 완전히 다른 곳 같잖아?” “확실히 바꿨네.” 예전의 텅 빈 전시관이 아니었다. 어떻게 했는지 쉽게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내부는 화사했고 제대로 된 좌석까지 구비되어 대회를 치를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한국의 게임 큐브와 같은 전문적인 게임 센터는 아니었기에 조금은 아쉬움이 남았다. 매니저 서재필을 선두로 진성, 현준, 진규 그리고 이준과 코디 둘을 비롯한 프로팀 멤버들 전원이 근처 쿠쉬야끼가 유명하다는 음식점으로 식사를 하기 위해 이동했다. 서재필은 이제까지 다른 전문 업체와 계약을 해서 프로 선수들의 무대 코디와 대중 앞에 나설 때의 옷을 관리했는데 많은 이동이 예상되고 앞으로 계속 필요할 것 같아서 전문 메이크업 코디 한 명과 패션 코디 한 명을 고용했다. 의상협찬은 쇄도해 온 많은 업체 중에 2~3 군데와 적절하게 계약했고 패션 코디가 있었기에 진성과 현준, 진규는 평소 입지 않던 스타일의 옷도 입어볼 기회가 생겼다. 메이크업 코디인 최현숙은 나이 25의 여자로 활달하고 수수한 옷차림으로 편하게 다가오는 사람이었다. 절대 최현숙 앞에서는 메이크업 코디가 아닌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불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대답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악물고 아티스트로 불러주기로 했다. 패션 코디이자 스타일리스트인 한소희는 23살로 일에 대해서는 자기주장이 강했지만 그 외에는 전형적인 한국 여자라고 여겨질 정도로 자신의 의견을 잘 내지 않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경우가 많았다. 메이크업 코디인 최현숙은 그런 한소희를 보며 내숭이라고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매니저를 포함한 전 멤버가 한소희의 원래 성격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재필 오빠, 쿠쉬야끼가 뭐야?” 팀으로 들어와서 하루 만에 나이를 기준으로 자신보다 높으면 무조건 오빠, 낮으면 동생으로 통일시켜버린 현숙은 팀장이나 매니저인 서재필에게도 오빠라는 말을 아주 천연덕스럽게 했다. 특히 여자에게 약간은 콤플렉스가 있는 듯해 보이는 이준에게도 살갑게 대해서 완전히 적응했음을 알렸다. “쿠쉬야끼? 꼬치음식이야.” “꼬치음식? 꼬치구이?” “꼬치구이라고 봐도 되지. 자, 들어가자.” 매니저 서재필이 들어간 곳은 그리 깔끔해 보이지도 않았고 밖에서 보니 몇 명 들어가면 꽉 찰 정도로 작아보였다. 하지만 서재필은 아무 걱정이 없다는 듯 문을 열고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고 나머지 사람들도 안으로 들어갔다. “아....” “와........” 뒤따라 들어온 사람들은 널찍한 내부와 깔끔한 실내에 놀랐다. 번쩍번쩍하고 매끈하게 돈을 많이 들인 인테리어는 아니었지만 일본풍이 물씬 느껴지는 소재를 사용해서인지 왠지 더 정감이 가는 듯했다. “와우...... 끝내주네.” “아.....” 제일 나중에 들어온 메이크업 코디 현숙과 패션 코디 소희의 반응이었다. 사람들은 그 반응만 봐도 누구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자, 여기 자리 둘 붙이면 다 같이 앉을 수 있겠지. 자, 현준아, 잡아 봐라.” 서재필은 현준과 같이 테이블 하나를 당겨서 붙이고는 다 같이 앉을 수 있게 만들었다. 7명이 앉기에는 충분했다. 자리에 일단 다 같이 앉은 일행은 일본어가 유창한 서재필을 쳐다보았다. 주문하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뭐 먹을래?” “꼬치음식이라면서요?” 현준은 당연한 말을 하는 서재필을 보며 반문했다. 너무도 당당한 현준의 태도에 서재필은 자신이 잘못한 것만 같았다. “....... 꼬치음식에도 여러 가지가 있거든. 오징어 꼬치, 소세지 모음꼬치, 새우꼬치, 버섯꼬치, 오뎅 꼬치, 은행꼬치, 쇠고기 꼬치..... 그 수가 장난이 아니니까. 진성아, 뭐 먹을래?” “그런 것 다 조금씩 들어가 있는 모음 꼬치 없나요?” “모듬 꼬치? 잠깐만... 있다. 그거 먹을까?” “그게 낫지 않을까요?” 진성의 말에 찬성하는 현준, 현숙의 막무가내 의남매의 동의로 모음꼬치구이를 시켰다. 성은 달랐지만 평소 하는 행동이 비슷해 서로 죽이 잘 맞는 현준과 현숙은 급기야 의남매를 맺어 주위의 기대를 만족시켰다. 자기들은 한 사람이 없어 역사상의 도원결의를 하지 못했다며 아쉬워했지만 주위 사람들은 막무가내 의남매나 덤앤더머로 알아들었다. 물론 당연히 현준과 현숙 앞에서 그런 말은 절대 금물이었다. “내일 추첨이잖아요? 누가 될까요?” 진규였다. 프로팀 멤버들 중에서 가장 게임 리그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이 바로 진규였다. 먹을 것 생각만 하고 있다가 갑자기 들린 추첨 이야기에 그제야 추첨이 내일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 사람들이었다. 일본에서 추첨을 통해서 4개의 조를 짜고 각 조에서 서로 상대와 한 게임씩 하도록 계획이 잡혀 있었다. 결국 일본에서 한 팀당 2 게임이 예정되어 있는 셈이었다. 4개의 조에는 서로 다른 나라의 프로팀으로 구성되게 만들었다. 이런 조구성은 극단적인 경우에는 한 나라의 프로팀이 모두 결선리그에 출전하게 될지도 모르는 위험성이 있었지만 메이저 리그 운영위원회에서는 받아들여야 한다며 강행했다. “음... 일본 리그 1위가 소냐전자니까 소냐전자는 피하면 좋겠지? 음... 꼴찌인 세가 소프트면 좋겠지? 중국도 꼴찌인 차이나 모터스면 금상첨화. 하하하... 바램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진규의 말에 대답한 사람은 현준이었다. 평소 신경 쓰지 않는 듯했지만 이럴 때보면 그래도 조금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일본이나 중국에서 올라온 프로팀 중에 꼴찌라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우리나라가 프로 리그 안에 두 개의 리그가 있다면 중국에는 5개 이상, 일본에는 4개가 있었으니까. 게다가 결과도 엎치락뒤치락해서 4팀이 거의 비슷하다고 봐야한다.” “그런...가요?” 잔뜩 분위기 잡으며서 진규에게 말했던 현준은 서재필의 말에 한순간 무너져 내렸다. 그렇다고 해서 얼굴이 구겨져서 구석으로 가서 쭈그리고 앉아 알아볼 수 없는 그림이나 그릴 현준은 절대 아니었다. “진규야, 매니저 형의 말대로 추첨과는 상관없이 우리 실력만 확실하면 문제가 없다니까. 하하하하하..” “호호호호, 우리 동생 말이 맞아. 당연히 맞지.” 무슨 말인지도 제대로 모르는 현숙은 현준의 말이라면 거의 무조건, 막무가내로 옳다고 우겼다. “......” 진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은 저 덤앤더머에 포함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곧 음식이 나왔고 일행은 다양한 꼬치구이를 맛보았다. 확실히 국내리그와는 다름을 느꼈다. 이렇게 일본까지 오고. 특히 진규는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하는 셈이라 더 그 느낌이 진했다. 자신을 아는 사람에게 명함까지 내밀며 프로 게이머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연봉과 이렇게 일과 관련해서 해외여행까지 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진규는 감동했다. 게다가 이런 꼬치구이라니. 진규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꼬치를 먹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다섯 명의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진성 일행이 들어왔을 때 이후로 거의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기에 다섯 사람이 들어오자 서재필을 비롯한 일곱 쌍의 눈이 일제히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자 다시 맛있어 보이는 꼬치로 눈길을 돌렸다. “아.... 게이머 스키피오!” 들어온 다섯 명의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이 진성을 가리키며 외쳤다. 약간의 소란스러움이 다섯 명 사이로 묻어나왔다. 서재필을 제외하고는 일본어를 잘 몰랐지만 약간 발음이 다른 스키피오라는 말에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진성은 이런 음식점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미리 준비했던 선글라스와 모자를 쓰고 다녔지만 음식점에 들어와서까지 할 수가 없어 벗어 두었는데 이런 일이 생기자 난감했다. 스키피오라고 말한 그 사람이 진성에게로 달려오더니 말했다. “안녕하세요. 또 만났네요. 저 아시죠? 야마모토 겐죠라고 합니다.” “.......” “지난번에 만났잖아요. 저 모르시겠어요?” “.........” “저, 지난번 동경 게임쇼 끝나고 나서 이 근처에서 만났던... 기억 안 나세요?” “........” “정말 기억 안 나세요?” “........” 진성에게 계속 뭐라고 말하던 야마모토 겐죠는 실망했다.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정말 어리둥절하기만 하는 게이머 스키피오를 보면서 조금은 실망했다. 어쩌면 자신은 기억할 가치조차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화가 날 정도였다. 그 때였다. “야마모토씨, 실례지만 게이머 스키피오는 일본어를 하지 못하는데요.” “.......네? 정말인가요? 하하하...” 겐죠는 그제야 동경 게임쇼 끝나고 만났을 때도 자신만 신나게 말하고는 사라졌음을 기억했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도 않았으니 자신을 기억하지 못함도 당연했다. 그런 사람을 상대로 바보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자 쥐구멍이라고 찾고 싶었다. 어색한 웃음으로 무마했지만 같이 들어온 네 명의 사람들이 바닥을 떼구르르 구르면서 웃자 어색한 표정이 점점 홍당무처럼 변했다. “파하하하하... 저 녀석... 스키피오와 인사했다더니... 하하하하..” “하하하하... 겐죠 너 때문에 나 죽겠다.. 아하하하...” 게다가 그 때까지 무슨 일인지 몰랐던 진성과 일행은 자세한 서재필의 설명을 듣고는 역시 발을 구르며 웃기 시작했다. 특히 현준과 현숙, 덤앤더머는 여기에서도 빛을 발했다. “아하하하하... 저 녀석, 바보 아니야? 하하하하하.... 아 배 아프다..” “오호호호호.. 오호호호.... 멀대 같이 생겨갖고는.... ” 키도 크고 얼굴도 미소년처럼 생긴데다가 얼굴도 하얀 관계로 일본 게이머 중에서 가장 소녀 팬들이 많던 야마모토 겐죠는 순식간에 바보에 멀대로 불리고 말았다. 얼굴이 붉어진 채로 석화되어 버렸던 겐죠를 웃다가 지친 나머지 네 명이 둘러메고는 구석진 자리로 가고 나서야 정리가 되었다. 진성 일행은 정말 즐겁게 마저 꼬치음식을 먹고는 가볍게 음식점을 나설 수 있었다. 진성 일행 중 아무도 같이 웃었던 상대가 일본 게이머들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 사실을 예전에 유일하게 들었던 매니저 서재필조차 잊어버렸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같이 웃었던 네 명의 일본사람들과 한 명의 바보 멀대는 진성의 팬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바보 멀대와 그 일행을 오래지 않아 만날 수 있었다. 관객들이 빽빽한 가운데 대회장에서는 곧 메이저 리그 전체의 판도를 좌우할 추첨이 열릴 예정이었다. 예상보다 많은 관객들이 들어와 일부는 앉고 일부는 서 있었다가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자 앉아 있는 사람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관객들의 삼분의 이는 십대로 보였다. 특히 소녀 팬들이 굉장히 많았다. 한국 내에서도 그런 분위기가 있기는 했지만 문명 온라인이라는 게임 자체가 몰입도는 강하지만 어느 정도 프로 게임을 보면서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지식이 필요했기에 20대 초, 중반에게 적합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20대 초의 젊은이들이 매니아 층으로 성장해서 문명 온라인의 절대적인 지지층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로 인해서 프로 선수들에 대한 인기가 그 사람 자체를 좋아하는 면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 선수의 게임 스타일과 전략을 좋아했다. 잘 생긴 선수를 좋아했지만 그런 것도 그 선수가 실력이 있을 경우였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문명 온라인의 주 팬 층이 10대였고 그 중에서도 소녀 팬들의 비율이 상당히 높았다. 일본 프로 리그의 선수들은 순식간에 소녀 팬들의 우상이 될 정도였다. 특히 게임에서는 조금 뒤떨어져도 소녀 팬들에 의해 인기몰이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20대 초, 중반의 팬들은 그런 소녀 팬들의 무조건적인 지지를 비판하면서 프로 선수 개개인의 전략과 전술에 대한 비판을 가하면서 전체적으로 한국의 프로 게임과 비교해 그 수준이 낮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그런 비판은 대세에 묻히고 말았다. 일본 프로팀의 선수들이 대회장에 도착해 대기실로 들어가는 동안 밖에서 기다라고 있던 소녀 팬들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가 지나가면 옷이라도 한번 만지고 싶어 했기 때문에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 프로팀 선수들이 지나갈 경우에는 그냥 박수만 쳤다. 그런 현상은 한국 프로팀의 경우에는 그리 변하지 않았지만 네 명의 선수는 예외였다. 바로 게이머 스키피오, 한신, 사신, 정성진이었다. 이 네 사람의 게임 플레이 화면이 인터넷으로 일본으로 들어와 확산되면서 그 인기가 급상승했던 것이다. 20대 초, 중반의 오타꾸적들이 일본 프로 리그의 수준을 비판했던 그 잣대가 바로 이들 네 사람의 플레이와 관련이 있었다. 이런 게임으로 인해서 그 잣대의 수준이 높아져 버렸던 것이다. 20대 초, 중반의 팬들은 이 네 사람간의 게임을 거의 광신적으로 여기고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10대의 소녀 팬들도 멋있는 닉네임과 확실히는 알 수 없어도 손에 땀을 쥘 정도의 게임을 느낄 수는 있었다. 네 사람의 한국 게이머는 일본에서 게임층의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십대와 20대 초, 중반의 인기를 동시에 받고 있었다. “와.... 스키피오다!” “꺄악.... 게이머 한신이다.” “아.... 꺄악... 게이머 사신, 늪의 사신. 파이팅!” “정성진 힘내라!” 4팀의 한국 프로팀들이 같이 들어왔기 때문에 그 함성과 비명소리는 엄청났다. 심지어 일본 프로 선수들도 그런 반응에 놀랄 정도였으니 그 함성의 원인인 진성과 현준, 김한석, 정성진은 많이 놀랐다. 진성과 현준은 예전 동경 게임쇼 당시 공항에서의 사건으로 조금은 알고 있었지만 게이머 사신, 김한석과 정성진은 생각지도 못한 듯했다. “현준아, 너 인기 정말 끝내준다.” “누나, 나도 걱정이야. 이렇게 인기가 좋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하하하..” “내가 네 그 인기를 유지할 수 있도록 멋지게 메이크업 아티스트로서 최선을 다해주지. 호호호호...” 대기실로 들어온 현준과 현숙의 대화였다. 그런 닭살 돋는 대화를 예상해서인지 그 주변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 반대편으로 몰려가 있었다. “지...진...진성아.. 이 옷 한 번 입어 보... 볼래?” “하하하.. 소희 누나, 편하게 말하세요.” 패션 코디인 소희는 검은 색의 세미 정장을 가지고는 진성에게로 다가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원래 소희는 진성 뿐 아니라 진규에게도 말을 놓지 않았다. 진성씨, 진규씨로 부르며 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씨를 붙였다. 그런 것을 보고 있던 현숙, 절대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소희를 데리고 나가더니 1시간 후에 들어왔고 소희의 얼굴은 붉게 변해 있었다. 현숙은 이제부터 소희 역시 자신처럼 나이에 맞게 확실하게 말할 테니까 그렇게 알라고 선언해 버리고는 소희를 윽박질러 모든 사람에게 한번씩은 다시 말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 이후로 소희 역시 현숙처럼 말을 놓기는 했지만 조금은 꺼려서인지, 부끄러워서인지 말을 조금씩 더듬었다. 진성은 소희에게서 세미 정장을 받았다. “진..진성아, 이것을 아래에 받쳐 입으면 더 좋아 보일거야.” 소희는 진성에게 하얀색 셔츠를 내밀었다. 단순했지만 촉감이 좋은 셔츠 역시 진성은 받아들고는 간이 탈의실로 갔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진성을 본 소희는 평소 잘 보여주지 않는 함박웃음을 배어 물었다. “진성아, 정말 잘 어울린다. 거울 좀 봐봐.” 소희는 자기가 권한 옷이 잘 어울리자 신이 난 듯, 전혀 더듬지도 않았다. 진성은 거울을 보니 평소의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옷 하나로 이렇게 분위기가 달라지다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데요..” “진성이는 이런 세미류가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이미지도 음... 뭐랄까? 약간은 차가우면서도 뭔가 열정이 있는 그런 느낌의 스타일이 확실히 잘 맞는 것 같아. 한번 돌아볼래?” 진성은 소희의 주문대로 그 자리에서 돌았다. 소희는 여러 가지 주문을 했고 진성은 그리 어렵지 않게 소화해 보였다. “이야... 강진성. 죽이는데? 와... 귀공자 같은데... 오.. 좋았어. 오늘 진성의 컨셉은 귀공자다. 귀공자!” 소희의 주문대로 입고서 거울 앞에 서 있던 진성을 본 현숙은 다가와서는 너스레를 떨었다. 현숙이 보기에도 진성은 확실히 세미 정장이 잘 어울렸다. 작지 않은 키에 균형 잡힌 몸매, 거기에 조각 같은 외모는 아니지만 약간 싸늘한 느낌이 나는 마스크, 현숙은 그 정도가 확실히 꽃미남보다 더 매력 있어 보임을 알고 있었다. “현숙이 누나, 나는?” “너? 음.... 너는... 음... 소희야 우리 현준이는 어때?” “혀.. 현..준아.. 이것 입어 봐.” 소희는 현준에게로 가서 옷을 건넸다. 현준이 받아서 입은 옷은 진성과 완전히 반대였다. 까만 셔츠에 하얀 색의 정장. 혼자 서 있을 때는 조금 그랬지만 진성과 같이 서 있으니 그럴 듯했다. “소희 누나, 저는요?” 가만히 있던 진규는 소희에게로 가서 물었다. 검은 색과 흰 색의 조화라 보기에 좋았지만 자신 역시 프로 선수로 무대에 나가야 되는데...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 너..도... 무대에 나가니?” “..........” 역시나... 소희의 얼굴이 붉어졌고 진규는 고개를 푹 숙였다. 너무도 진지한 소희의 되물음에 진규는 말할 기운조차 사라짐을 느꼈다. 약간 떨어져 있던 현숙은 그 대화는 듣지 못했지만 갑자기 고개를 숙이는 진규와 얼굴이 붉게 변해 어쩔 줄 모르는 소희를 보면서 뭔가 있음을 알았다. “진규야, 왜 그래? 소희야, 무슨 일 있어?” 진규를 닦달해서 사태의 진상을 알아낸 현숙은 한바탕 웃고 난리가 났다. 무슨 일인가 싶어 모인 사람들 역시 사실을 알고는 배꼽을 잡고 웃어댔다. 정작 진규와 소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특히 소희는 진규의 의상을 숙소에 놓고 왔기에 더욱 안절부절 못했다. 현숙이 실수했다면 매니저 서재필부터 진규까지 한바탕 구석으로 현숙을 몰아놓고 막말도 했겠지만 소희에게는 그런 것이 불가능했다. 오히려 현준이 붙어 위로를 해야 할 지경이었다. 소희는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한 자신을 정말 리얼하게 자책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조금 심한 말을 했다가는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갈 듯한 소희에게 나무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강심장을 가진 사람은 자소 소프트 프로팀 내에는 없었다. 결국 진성과 현준 역시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진규와 같이 평범하게 나가기로 했다. 그리고 그런 평상복에 화려한 메이크업 역시 어울리지 않다는 생각이어서 맨얼굴로 나가기로 합의를 봤다. 일리가 있는 말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손대면 톡하고 터질 것만 같은 소희의 얼굴에 현숙이 소희를 달래느라 메이크업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프로로서 당연히 보여줘야 할 부분이 있는데 일이 이렇게 되자 내심 쓴소리를 하려고 했던 서재필도 피식 웃고 말았다. 곧 추첨이 시작되었다. 각 프로팀에서 팀장이나 매니저와 프로 선수가 무대 위로 올라갔다. 같은 나라의 프로팀이 같은 조가 될 수 없게 추첨을 했다. 다른 프로팀들이 정장을 하거나 화려한 옷을 입은데 반해 한국의 자소 소프트 프로팀만이 평상시 입던 옷을 그래도 입고 나와 눈길을 끌었다. 관객들은 평상복을 입고 나온 게이머들이 한국의 자소 소프트 팀인 줄 알고는 환호성을 질렀다. 패션 코디 소희의 실수가 오히려 득이 된 꼴이었다. 먼저 한국 프로팀이 추첨해서 각 조를 정했다. A조부터 D조까지 있는데 자소 소프트는 D조로 결정되었다. 쌍룡은행은 A조, 삼선전자는 B조, 삼일이동통신이 C조로 속하게 되었다. 뒤이어 중국의 조 추첨이 있었다. “진성아, 차이나 모터스가 됐으면 좋겠다.” 사이드에 있던 현준은 진성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그게 쉽게 되겠냐?” “그래도.....” “자, 차이나 모터스부터 추첨하도록 하겠습니다. 자, 앞으로 오십시오.” 차이나 모터스의 프로 선수 한명이 무대 가운데로 나왔다. 그리고 추첨을 했다. 그 결과를 사회자가 보더니 크게 말했다. “중국의 차이나 모터스 프로팀은 한국의 자소 소프트와 같은 D조가 되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중국과 일본의 나머지 프로팀들의 표정이 밝아졌고 차이나 모터스의 추첨을 한 프로 게이머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와... 내 말이 맞지? 차이나 모터스! 이번에는 세가 소프트다!” “.......” 진성은 환호에 찬 현준의 목소리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C조에 중국 리그 최고팀 중화그룹이 속했고 B조는 차이나넷, A조는 e차이나로 결정되었다. 바로 일본팀의 조 추첨도 시작되었다. 일본 프로팀 중에서 세가 소프트가 제일 먼저 앞으로 나왔다. 긴장된 순간이었다. 대표로 나온 게이머가 추첨을 하자 사회자가 외쳤다. “세가 소프트는 한국의 자소 소프트, 중국의 차이나 모터스와 함께 D조입니다.” 아직 추첨을 하지 않은 일본의 세 팀들은 얼굴이 밝아졌다. 하지만 추첨을 한 게이머와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세가 소프트의 다른 두 게이머와 매니저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와... 이게 무슨 일이냐?” “너... 정말 대단하다. 우리가 이번에 우승할 수 있겠냐?” “음.... 당연하지. 우승이다. 우승!” 진성은 현준의 예측이 맞아떨어지자 놀라면서 우승에 대해 물었고 현준은 조금 생각하는 듯하더니 웃으며 대답했다. 추첨은 계속되어 B조에 소냐전자, A조에 미쯔바시, C조에 도시버가 결정되었다. 추첨 결과 우려했던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3개국의 프로 리그 최종 우승팀이 한 개조로 몰린다면 그야말로 죽음의 조가 되기 때문에 조금 염려했지만 고르게 분산되어 결선리그로 가서야 그 기량을 겨룰 수 있게 되었다. 일본에서의 예정된 대회 기간은 13일이었다. 13일 동안에 모든 게임을 끝내고 3, 4일 정도 쉬었다가 중국에서 그와 비슷한 일정을 소화해야했다. 기간은 13일이지만 각 팀에 배정된 경기는 두 게임 뿐이어서 게임만 끝나면 바로 대회장에서 철수해서 본국으로 돌아가도 무방했기 때문에 서로 먼저 게임을 하려고 했지만 그것 역시 미리 정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운영위원회가 미리 정할 때 그런 게임 일정을 조를 기준으로 짰기 때문에 불만을 토로할 수 없었다. 추첨 전에 D조가 제일 먼저 게임을 하기로 했다. 추첨의 행운으로 자소 소프트, 차이나 모터스, 세가 소프트가 그 첫 게임을 하게 되었다. 차이나 모터스와 세가 소프트를 제외한 일본과 중국의 프로팀들로서는 과연 한국 프로팀 중에서 최강인 팀의 전력이 어떤지 보고는 나머지 팀들의 실력 역시 가늠해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일본과 중국 프로팀들이 미리 패치 적용 버전을 연습한 사실을 알고 있던 한국의 다른 프로팀들은 일본과 중국의 전반적인 수준에 대해서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런 관계로 첫날의 게임에는 추첨일과 마찬가지로 모든 프로팀의 게이머들이 모두 참석해서 자소 소프트와 차이나 모터스, 자소 소프트와 세가 소프트, 차이나 모터스와 세가 소프트와의 게임을 지켜보게 되었다. 하루 뒤에 드디어 메이저 리그 첫 경기로 한국의 프로팀인 자소 소프트와 중국의 프로팀 차이나 모터스와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3개국에 생방송될 뿐 아니라 각 국에서 온 기자들로 인해 경기장으로 나오던 프로 선수들에게는 후레쉬 세례가 퍼부어졌다. 곧이어 선수들의 입장을 알게 된 관객들의 우뢰 같은 함성은 메이저 리그의 시작을 알렸다. 프로 선수의 오더는 두 팀 모두 미리 공개했다. 자소 소프트의 경우 첫 게임은 리틀 스키피오 진규가 나섰고 그 다음은 게이머 한신, 현준이 출전하고 마지막으로 게이머 스키피오, 진성이 마무리 짓는 순서였다. 차이나 소프트는 선봉으로 장자방으로 불리는 주료, 그 다음은 여포 이주방, 마지막이 귀곡자 정택효였다. 주료의 별명인 장자방은 한 고조 유방의 공신으로 자가 자방이어서 장자방이라고 불렸다. 그 책략이 뛰어나 그 후부터 책사로 뛰어난 사람을 장자방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여포는 삼국지의 맹장으로 이주방 역시 저돌적이면서도 확실한 게임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여포라는 이름이 붙었다. 귀곡자는 전국시대 초나라의 사상가였다. 귀곡자로 인해 시작된 합종책은 전국시대의 국제 외교의 주요한 방법이었다. 정택효는 전투 외의 방법에 두루 뛰어나 그런 별명을 얻었다. 첫 게임은 미리 예정된 대로 리틀 스키피오 성진규와 장자방 주료의 대결이었다. 차이나 모터스의 프로팀 선수들의 특징은 모두 다 중국 문명을 선택해서 플레이한다는 점이었다. 보통 한 팀에서 세 명이 모두 같은 문명이면 그 팀을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비교적 그에 강한 문명이나 여러 문명을 이용하면 조금은 유리하기 마련이었다. 그런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차이나 모터스의 세 선수는 모두 중국 문명이었다. 처음부터 로마 문명과 중국 문명과의 충돌이 불가피했다. 게임이 시작되었다. 한 대륙의 남서쪽에 로마 문명인 게이머 리틀 스키피오가 있었고 반대쪽인 북동쪽에 게이머 장자방의 중국 문명이 존재했다. 그 사이에 유목민족의 국가인 키타이와 공화정이면서 상업 중심인 이오니아, 왕정인 코린트, 종교의 힘으로 국가가 탄생한 토련이 놓여 있었다. 마치 샌드위치 안에 들어간 샐러드와 고기처럼 로마 문명과 중국 문명 사이에 놓여 있었다. 거란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민족의 영어식 발음이 바로 키타이였다. 유목민족이었기에 군대로 본다면 기병의 비율이 굉장히 높았고 기병은 등자 없이도 굉장한 위력을 발휘했다. 이오니아는 옆의 키타이와 코린트, 토련 사이에서 중계 무역으로 번영한 작은 도시국가였다. 상인의 영향력이 컸고 공화정이었다. 코린트는 왕정이었고 상당히 호전적인 국가여서 옆에 있는 토련과 아주 대립이 심했다. 토련은 토련이라는 종교를 기반으로 세워진 국가로 그 단결력이 정말 대단했다. 군사적으로는 코린트에, 경제적으로는 이오니아에 상대도 되지 않았지만 어떤 나라도 토련을 얕볼 수 없을 정도로 토련의 한 사람, 한 사람이 군인이었다. 게임이 시작되자 리틀 스키피오 진규는 곧바로 문명의 확인 작업을 하면서 외교 쪽 감각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몇 몇 관련 지위의 사람들을 적은 숫자의 군사와 함께 주위 나라들로 인사차 보냈다. 패치가 적용되고 나서 게이머들이 초기에 해야 할 일들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어느 정도 인공지능이 커버를 해 주기도 했지만 프로의 세계에서는 너무 안일한 방법이었다. 게임 시작 후 곧바로 자신의 문명에 대한 상태를 파악해야 했고 그와 동시에 패치로 인해 생긴 주변 국가들의 체제나 상황에 대해 알려줄 적당한 사람들을 보내어 정보를 얻어야했다. 그런 일을 하면서 군대와 문명의 발전에 대한 컨트롤도 잊지 말아야했다. 이런 많은 일에 프로 게이머들은 모두 다 한 목소리로 게임기에 키보드처럼 어느 정도 정형화된 입력 패턴들은 제공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자소 소프트 역시 그런 요구를 알고 있었기에 개발을 시작했고 거의 완료 직전에 도달했다. 기술적인 어려움이 아니라 어떤 명령을 정형화해서 만들어 넣을 지가 문제여서 시간은 그리 걸리지 않았다. 진규는 거의 쉬지 않고 게임을 컨트롤했다. 군대강화법의 일부분을 시작하자 로마 문명을 둘러싸고 있는 각 나라에 대한 정보가 들어왔다. 각각의 보고를 가져온 군인에게 공식적인 사절을 딸려서 보냈다. 뒤따라 간 사절은 앞서 간 인물의 안내로 각국의 핵심 위치에 있는 존재와 접촉하게 될 것이다. 처음 간 인물이 각 나라의 전체적인 부분에 대한 조사를 한다면 사절은 각 나라의 핵심적인 위치에 있는 인물들에 대한 조사를 맡았다. 이 방법은 현준이 개발한 방법이었다. 누구나 생각은 할 수 있지만 그것을 다른 컨트롤에 병행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진성 역시 현준의 방법을 로마 문명에 수정해서 사용할 정도였다. 밖에서 보고 있던 일본과 중국의 프로팀, 한국의 프로팀들은 놀랐다. 특히 일본과 중국의 프로팀들은 더욱 더 크게 놀랐다. 자신들이 메이저 리그 시작 한달이 넘도록 연습에 연습을 통해 자신 있게 개발한 방법 중 하나를 아주 유연하게 사용하는 한국의 프로 선수를 보면서 어쩌면 자신들의 생각보다 더 대단한 한국 선수들의 실력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마저 가졌다. 진규는 군대강화법을 하면서 진성이 가르쳐 준 ‘시민군 양성’도 손을 댔다. 가장 위험하면서도 아슬아슬한 컨트롤의 순간들이 바로 시민군 양성이었다. 진규는 머리와 등에 땀이 맺혔다가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면서 조심스럽게 컨트롤을 했다. 보고 있던 각국의 프로팀들은 리틀 스키피오, 진규의 완전히 다른 게임 진행에 의아해했다. 엄청난 컨트롤에 대해서는 놀랐지만 사회에 분열을 만드는 것 같아 어쩐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보통이라면 자멸 행위라고 치부할 수도 있었겠지만 최고 요주의 선수 스키피오와 한신이 속한 팀이라 뭔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각 팀의 선수들과 매니저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장자방 주료 역시 처음의 진행은 진규와 비슷했다. 각 국의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사람을 보내고 자신은 문명을 확인하고 발전을 위해 평소 했던 컨트롤을 취했다. 주료의 게임 스타일은 방어전 중심이었다. 하지만 철벽의 방어가 아니라 날카로운 창을 가진 방어였다. 그래서 어느 정도 자신이 생기면 공격으로의 전환 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노(弩)는 석궁과 상당히 비슷한 모양이었다. 기본적으로 보병용 무기였고 보통의 활보다는 그 연사능력이 뒤떨어졌지만 활과는 달리 그 숙달하는 기간이 짧아 기병에 대항하기 위한 보병용 무기로 많이 사용되었다. 하지만 활보다 구조가 복잡했기 때문에 만드는 시간과 비용에서 활과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컸기 때문에 활과 같이 많은 병력이 무장할 수는 없었다. 활은 기본적으로 무장시킬 수 있는 군대 규모가 비용에 비해 컸기 때문에 많이 이용되지만 중장보병인 경우에는 그 단단한 갑옷으로 인해 효과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대량의 노를 사용하는 보병부대의 존재는 주료로서는 꼭 필요했다. 장자방 주료는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문명의 발전을 서둘렀다. 중국 문명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하나는 월등한 인구에서 나오는 막강한 군사력이었다. 기본적으로 큰 땅덩어리에 많은 도시와 인구로 인해 초, 중반 이후로 엄청난 군 병력이 나왔다. 그 많은 병력을 로마의 중장보병처럼 무장시키기는 불가능했지만 엄청난 병력은 확실한 장점이었다. 또 하나는 발전된 군진이었다. 손빈의 팔진법과 십대진법 등의 진법이 발달되어 사용할 수 있는 진법이 상당히 많았다. 이로 인해 중국 문명은 많은 병력의 군대를 잘 다루게 되면 부분적으로는 상대의 허를 찌르는 기습을 하면서 전체적으로 상대 병력을 감싸며 궤멸시킬 수 있을 위력을 지닐 수 있었다. 하지만 두 가지의 특징이자 장점은 또한 단점이기도 했다. 많은 병력은 잘 다루면 득이 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해가 되는 양날의 검이었다. 많은 병력으로 탁월한 효과를 낼 수 있다면 좋지만 그 많은 병력으로 인해 지휘에 혼선이 생기고 서로 움직임에 방해가 된다면 차례차례로 로마의 정예병에 의해 전멸하고 말 것이다. 진법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용할 수 있는 진법이 있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훈련과 지휘관의 적절한 전술이 없다면 그 역시 책 속의 동물에 대한 설명을 보고는 동물을 사냥하는 것에도 능통하리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과 같았다. 오히려 말도 안 되는 적용으로 군 병력을 사지로 보낼 수도 있었다. 그런 점으로 인해서 대부분의 아마추어 중국 문명의 유저들은 초기에는 쓸모 이상의 병력대신 문명의 발전을 통해 무기의 업그레이드를 시키고 많지 않은 병력의 철저한 진법 훈련에 시간을 투자했다. 주료 역시 그런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노의 개발을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동시에 각 주요 성의 보수를 서둘렀다. 많은 병력을 널찍한 곳에서 제대로 컨트롤해서 싸우기는 쉽지 않아도 성에서 수성전을 한다면 그 많은 병력은 엄청난 도움이 되어 쉽사리 점령할 수 없는 성으로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너무 수성 쪽으로만 치우치면 제대로 된 공격을 할 기회도 없을 뿐 아니라 병력들의 평원에서 발휘되는 능력 역시 줄어들기에 균형을 잡아야 했다. 이오니아와 코린트, 토련에서는 우호적인 대답을 들었지만 키타이에서는 다소 의외의 반응이었다. 이오니아는 무역 국가였기에 처음부터 아무런 반대도 없었다. 대신 로마와도 무역을 원한다는 조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진규 역시 바라마지 않았다. 코린트는 로마 문명과 비슷한 군대로 인해 생긴 호감과 적절한 사절단의 대처로 인해 조금은 운 좋게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었다. 토련의 경우 그 종교를 인정해 주겠다는 말 한마디로 준 동맹과 비슷한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키타이의 경우, 조금이라도 국경에 군대를 접근하면 침략행위로 간주한다는 살벌한 대답이었다. 진규는 키타이의 반응이 의외였지만 그래도 조사한 바로 2, 3개의 공격루트가 마련되었기에 그리 마음에 두지 않았다. 진규는 이제 조금 있으면 끝날 군대강화법과 한창 진행 중인 시민군 양성에 마음을 두는 동시에 꾸준히 군대를 늘려갔다. 시민군 양성이 무르익을수록 소지주 중장보병의 비율이 높아져 로마 군대의 전체 역량은 커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진성이 정한 일정 비율이 되면 그야말로 버그, 사기와 비슷할 정도로 부대로서의 로마군은 최강이었다. 주료 역시 코린트 하나를 제외하고는 그런대로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었다. 특히 키타이의 경우 아주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낼 수 있었다. 조금 대가가 크기는 했지만 원할 경우 기병의 원군이 보내주겠다는 정도여서 주료 자신이 놀랐다. 주료는 정찰을 통해서 상대 로마 문명의 상황을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연구했던 여러 로마의 전략과는 사뭇 달랐다. 게다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어서 난감했다. 그렇다고 해서 모르는 전략을 펼치는 상대를 먼저 쳐들어가기도 조금 꺼림칙했다. 주료는 조금 기다려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는 조금 있으면 개발이 끝날 노의 무장을 위한 준비를 진행시켰다. 시민군 양성의 단계가 막바지에 이르자 진규는 흥분했다. 실제 현준, 진성과의 게임에서 단 한번도 제대로 시민군 양성을 이루지 못했는데 이렇게 실전에서, 그것도 첫 게임에서 막강한 로마군의 위력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절로 들떴다. 하지만 진규는 시민군 양성이 다 끝나지 않았음을 간과했다. “집정관 중 한 명을 중산층으로 출신자로.” 진규는 아직 현재 상황에서 힘든 무리한 명령을 내렸다. 곧 바로 깨달았지만 이미 일은 커지기 시작했다. 원로원에서 들고 일어나고 귀족층의 반대가 극심했다. 이를 바로 철회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점차 그런 이야기가 많이 나돌자 잔뜩 힘을 길렀던 중산층에서 반대하는 귀족들을 향해 불만의 목소리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로마 문명은 그 내부에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쩐 일이지? 분열이라니... 역시 그것은 어떤 전략이 아니었나?” 주료는 로마가 분열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는 골몰히 생각했다. 상식에 맞지 않는 컨트롤을 하던 상대 로마 문명의 분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뻔히 그 끝이 보이는 곳으로 컨트롤을 하다니. 무슨 노림수가 있지 않는 이상 그런 일을 할 상대가 아니었다. 스키피오나 한신과는 조금 격이 달랐지만 리틀 스키피오라는 이름도 절대 가볍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주료는 상대가 그 노림수를 완성하기 전에 공격을 해서 그 분열을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이제까지 진법의 훈련을 마친 18만의 군대와 5천의 노를 무장한 병력을 모아 키타이를 통해 로마로 진격을 시작했다. 예비로 12만의 군대가 있었지만 진법의 훈련이 되지 않았기에 일단 수비를 위해서 남겨 두었다. 확실히 하기 위해 키타이의 기병 1만을 빌렸다. 그 대가로 상당한 재정에 타격이 있었지만 지금은 확실히 상대를 무너뜨릴 순간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과감하게 결정했다. 18만의 군대와 5천의 노로 무장한 부대 그리고 1만의 키타이 기병이 로마의 국경을 향해 다가갔다. 진규는 들려온 소식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키타이 국경을 통해 물경 20만의 대부대가 접근한다는 소식이었다. 18만이 넘는 중국의 군대와 1만의 키타이 기병의 혼합군대였다. 중국의 진군에도 놀랐지만 더 놀란 것은 키타이 기병의 합세였다. 진규는 키타이 기병이 왜 중국에 합체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이유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안 진규는 분열을 잠재우기 위해 노력했다. “어...” 그렇지 않아도 힘든 마당에 코앞까지 적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에 힘이 쫘 빠진 진규는 갑자기 분열이 내전으로까지 가려던 분위기가 사라짐을 느꼈다. 어쩐 일인지 몰랐지만 조금 여러 가지를 확인해 보던 진규는 만면에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내전으로 치닫던 로마 문명의 분열은 국경까지 다가온 중국의 군대로 인해 종결된 것이었다. 귀족과 중, 하층민의 대결이 공통의 외적이 생기자 빠른 속도로 사라졌고 그 고양되었던 에너지는 급속도로 시민 양성계획을 완성시켰고 더 뻗어나가 적에 대한 증오심에 불을 질러 군의 사기를 드높였다. 진규는 빠른 컨트롤로 꾸준히 양성하던 15만의 정예부대와 추가로 5천의 기병부대를 전장이 될 국경지역으로 이동시켰다. 진규는 상대 게이머가 구세주로 느껴졌다. “뭐? 어떻게 된 일이지?” 키타이로 들어서 국경으로 향하고 있을 때만도 로마의 분열 소식에 내심 흐뭇했던 주료는 로마의 정예 군대가 국경을 행해서 오고 있다는 소식에 놀랐다. 그런 극심한 분열 와중에도 그런 병력 동원이 가능한 게 신기했다. 하지만 그 다음 소식에 주료는 당혹했다. 바로 그 엄청난 분열이 눈 녹듯 사라졌다는 보고였다. 주료는 어쩌면 상대의 함정에 빠진 것인지 모른다고 판단했다. 특히 상대의 그 전략이 주료 자신을 꾀어내기 위한 것이라면 정말 대성공한 것이다. 그런 것이라 단정한 주료는 상대의 전략에 감탄했다. 전략 자체는 적을 속이는 것이지만 그 정도로 치밀하게 아군까지 속이면서 최후까지 참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프로팀 팀장에게 들은 한국의 게이머들이 생각보다 약할 것이라는 말과는 전혀 달랐다. 원정인데다가 보급 문제도 있었기에 되돌아갈 생각도 했던 주료였지만 키타이의 1만 기병이 발목을 붙잡았다. 지금까지 서로에게 피해를 준 적이 없었기에 주료 자신과 상대 게이머와는 서로 간의 차이는 거의 없다고 봐야했다. 주료는 자신이 즐기지 않던 선제 원정 전투와 익숙하지 않은 지형을 가지고 싸우고 싶지 않았지만 그대로 돌아간다고 해도 키타이에게 막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렇게 되면 바로 로마 쪽이 훨씬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다. 한참을 저울질 하던 주료는 어쩔 수 없이 국경에서의 전투를 결심했다. 어느 정도 로마군에게 타격을 줘야만 키타이 기병을 빌린 대가와 상쇄할 수 있을 것으로 계산한 주료는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비기거나 피해를 입는다면 게임에서의 승산은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진규는 15만의 정예 부대와 기병 5천을 추가한 군대가 국경에 도착하자 곧바로 진지를 건설하게 만들었다. 중국의 군대는 원정임을 알고 있던 진규는 튼튼하고 확실한 진지를 구축했다. 이런 진지의 구축은 중국보다 로마가 월등히 앞섰다. 중국은 축성술이 비교적 로마에 비해 발달한 반면에 군대의 이동과 주둔에 대한 기술에는 로마에 뒤졌다. 충분히 휴식을 취한 진규는 중국 군대가 널찍한 평원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정면 대결을 할 모양이었다. 엄청난 규모의 보병과 기병이었다. 하지만 진규는 조금도 두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연습 게임을 통해서 이 시민군 양성이 얼마나 그 효과가 대단한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 아찔했던 분열의 단계를 지나 시민군의 양성이 완료된 시점이었기에 진규는 앞으로 벌어질 일방적인 경기 결과를 알고 있었다. 바로 자신이 진성에게 2배의 병력으로도 무참히 깨졌던 그 많은 기억들이 그 결과를 예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국의 대규모 군대와 로마의 정예 군대는 평원의 가운데로 오와 열을 맞추어 진을 갖추었다. 서로의 군기를 보여주는 것이어서 엄정한 규율이 엿보였다. 주료는 양익에 기타이 기병과 자신의 기병을 반으로 나누어 배치했고 가운데의 맨 앞에 노로 무장한 5천의 군대로 적의 예봉을 무디게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전개될 전투에서는 9개의 부대로 나누어 구요성궁진(九曜星宮陣)을 펼칠 작정이었다. 십대진법 중 아홉 번째인 구요성궁진은 한꺼번에 몰아치는 힘은 다른 강력한 십대진법에 비해 비교적 약했지만 끊임없이 상대의 공격에 대항해서 옭아매는 기능과 아군끼리의 상승작용을 요체로 하는 진법이었다. 주료 자신이 상대의 계책에 말렸지만 병력면에서는 우세했고 진법에도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타격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상대 군이 진형을 제대로 갖추자 진규 역시 기병을 날개에 배치하되 한쪽으로 배치했다. 그리고 자신이 오랫동안 연습했던 것을 실전에서 사용해볼 요량으로 각 군단장과 지휘관들을 모아 미리 지시했던 것들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곧 중국 군대가 환호를 지르며 전진하자 로마 군대도 전진했다. 주료가 신호를 보내자 소리 나는 화살 명적(鳴鏑)이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그 순간 중국군대는 엄청난 환호를 더했고 그 순간 앞에 있던 부대에서 노를 발사했고 곧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는 화살들이 단단하게 진군하던 로마의 선봉을 덮쳤다. 그 장면을 본 진규는 재빨리 돌진을 명령했다. 하늘에서 날아오는 화살들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정예병들은 방패를 앞세우며 앞으로 점점 속도를 늘여나며 나왔다. “턱! 핑핑! 턱!” 노에서 발사된 화살들의 관통력은 보통의 화살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중갑을 입은데다가 방패까지 들었던 로마 정예 선봉은 생각보다는 적은 피해를 입었다. 주료 역시 직접적인 피해보다는 일종의 공포심과 예봉을 무디게 하려던 것이었다. 피해를 입은 로마 정예 선봉은 물러나기는커녕 오히려 전의를 불태우며 부상자나 전사자의 자리에 또 다른 병사가 채워 넣으며 앞으로 단단하게 전진했다. 그와 동시에 로마의 진형에 변화가 생겼다. 기병이 있던 한쪽 날개로 갈수록 병사의 수가 현저하게 줄고 반대쪽으로는 많은 군인들이 모였다. 특히 기병 반대쪽은 여러 겹으로 싸인 중장보병 대열이 있어 그 방어가 대단했다. 마치 움직이는 성과 같은 느낌을 줄 정도였다. 주료 역시 노 부대를 뒤로 물리면서 기병의 돌격과 보병을 이용해 구요성궁진을 발동시켰다. 어지러이 돌아가는 18만의 부대들로 인해 중국의 부대는 요란하게 움직여 로마군대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진규는 그런 움직임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진규는 로마 시민군의 위력을 믿었다. 아니, 사실이었다. 진규의 확신은 구요성궁진의 한쪽을 강력한 로마 정예 시민군이 들이닥치자 곧 사실로 드러났다. “아.... 이....이...” 주료는 놀랐다. 아무리 로마의 정예부대라지만 그 정도가 심했다. 그야말로 망치로 너울을 만들던 개울가의 물을 친 것과 같이 단 한번의 충돌로 구요성궁진의 한축이 무너져 버렸다. 이래서야 돌고 돌아 서로 보충해 주는 묘리가 어긋나버리고 말게 된다. 주료는 빨리 십대진법의 팔괘금쇄진(八卦金鎖陣)으로 바꾸려고 했지만 구요성군진이 발동중인지라 시간이 부족했고 그 시간을 로마 정예 시민군이 허용하지 않았다. 게다가 노로 무장한 부대가 노를 발사할 시간을 제대로 주지 않고는 완전히 궤멸시켜 버렸다. “이...이런...... 말도 안돼!” 로마의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진 한쪽의 날개에 있던 정예 보병들은 그야말로 구요성궁진의 18만의 중국 보병을 유린했다. 망치로 두부를 깨는 것과 같았다. 한쪽 날개에 있던 중국 군대의 기병과 키타이 기병은 로마의 기병과 접전을 벌이고 있었으며 다른 한쪽은 강력하면서도 단단한 중장보병을 공략할 수가 없었다. 배후로 돌아가려고 노력했지만 소규모 밀집 중보병이 그런 시도를 방해했다. 그 사이에 중국의 본진이 와해되자 키타이 기병들은 도망가고 말았다. 원래 용병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와 동시에 로마의 기병들이 지휘체계가 완전히 무너진 중국의 보병을 유린하기 시작했고 18만은 순식간에 오합지졸로 변해 서로 전장을 벗어나기 위해 오와 열을 버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주료는 멍했다. 순식간에 18만의 훈련된 보병이 사라졌다. 너무나 어이없었다. 이렇게 강력한 로마의 정예 보병이라니. 주료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음을 알았다. 주료는 멍하게 있다가 게임의 패배를 선언했다. 밖에서는 관객들의 요란한 환호소리와 더불어 각국의 프로팀들의 놀라운 표정들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일본과 중국의 프로팀 관계자들은 너무나 강력한 로마 정예 군대에 놀랐다. 외교적인 면에서도 그리 뒤지지 않는데다가 열세를 극적으로 반전시키는 그 능력에 더욱 놀랐다. 한국의 자소 소프트에는 절대 한신과 스키피오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 리틀 스키피오 성진규의 능력에 대한 평가가 틀렸다는 것을 일본과 중국의 관계자들은 인정해야했다. 그로 인해 다른 한국의 프로팀에 대한 평가 역시 달라질 필요가 있다고 추측했다. 한국의 프로팀 역시 열세로 끝나리라 예상한 게임에서 엄청난 위력의 군대를 선보이며 파죽지세로 이겨버린 게임을 보고는 놀라버렸다. 상당한 고전이 예상되리라 생각했는데 자소 소프트의 선봉, 리틀 스키피오 성진규가 중국의 게이머를 시원하게 이기자 자신들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게이머 한신과 차이나 모터스의 두 번째 선수 여포 이주방과의 게임은 너무 쉽게 그 승부가 갈렸다. 닉네임답게 돌진과 파괴력에 있어서는 탁월한 면이 있었던 이주방이었지만 문명 온라인은 돌격부대만으로 이길 수는 없었다. 때에 따라 수성도 필요하고 상대의 허를 찌르는 기습은 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좋을 수는 없었다. 단단한 방어를 구축했지만 정면 대결을 선호하는 여포 이주방의 단순한 게임 운영은 물 흐르듯 유연하면서도 폭풍처럼 몰아칠 때는 그 파워가 엄청난 게이머 한신의 플레이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평원에서의 대규모 전쟁에서 박살이 난 여포 이주방은 수성전으로 돌입했지만 전술적인 면에서 그 소화 능력이 월등한 그리스 정예보병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한국의 자소 소프트가 가볍게 2:0으로 중국의 차이나 모터스를 제압하자 일본과 중국의 프로팀들은 아주 긴장했다. 예상과는 너무 달랐다. 패치 버전은 상당히 그 전 버전과는 차이를 보였다. 그런데 일주일 정도밖에 되지 않는 기간으로 이 정도까지 해 낼 수 있다니. 같은 한국의 프로팀이라 생각할 때, 중국과 일본의 프로팀들은 앞으로의 리그가 그리 쉽지만은 않으리라 생각했다. 2:0으로 게임이 끝나는 바람에 게이머 스키피오와 귀곡자 정택효간의 대결은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그 게임을 가장 기대했던 팬들이지만 그렇다고 리틀 스키피오나 한신이 패하는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진규야, 어떠냐? 기분이 끝내주지?” “와... 아직도 몸이 다 떨려요. 알고는 있었지만 그 정도의 위력이라고는 하.....” 진성은 아직도 얼굴이 상기된 채 주먹을 꼭 쥐고 있는 진규에게로 가서 어깨를 가볍게 치면서 물었고 진규는 손을 들더니 떨리는 것을 단단히 잡으면서 말했다. “정말 아슬아슬했다. 그 때 상대 부대가 쳐들어오지 않았다면.. 너도 알지?” 진성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진성은 그 때 상당히 위험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헤헤... 역시 형을 속이기는.... 휴... 그 때 제 실수로 갑자기 분열이 생겼는데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정말 메이저 리그 첫 경기에 이렇게 꼴사납게 전투 한번도 못해보고 지는구나 생각했죠. 그런데 갑자기 그런 분열이 사라진 것 있죠. 알고 보니.... 하하하하.. 그 때만큼 상대 게이머로 고맙게 느껴진 적은 단 한번도 없었어요.” “그래.. 그래도 이겼으니 다행이다. 더 연습해야 할 것 같은데...?” “당연하죠. 휴.... 오늘은 제가 거의 진 게임이었으니까요.” “그 마음만 잊지 않으면 된다.” 차이나 모터스를 멋지게 이긴 자소 소프트의 프로팀은 조금 멀리 떨어진 곳까지 밴을 타고는 유명한 음식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게임이 끝난 후에 대회장에서 모든 마무리를 하고 밖으로 나와 숙소로 들어오려는데 패션 코디 소희의 제안에 다들 동의했다. 자신의 실수를 자책하던 소희는 현숙의 말에 따라 저녁을 사겠다고 일행에게 말했고 소희의 마음을 안 일행은 그 말에 동참했다. 호텔에서 20분 정도 차를 타고 가다가 내린 곳은 역시 그다지 외관상으로는 좋아 보이지 않았다. 다들 일본의 음식점들은 그런가 보다 하고 안으로 들어갔는데 역시 실내는 공간이 넓었고 깔끔한 분위기였다. 일행 중에 제일 먹는 것에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바로 매니저 서재필이었다. 자칭, 타칭 미식가인 서재필은 일본에 온 경험이 많아서 일본 음식에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이 허름하게 보였던 음식점도 서재필의 안내를 받아 찾게 된 일행은 넓은 곳의 탁자에 둘러앉았다. “여기는 다꼬야끼로 유명한데.... 음.. 뭐라고 해야 하나? 문어빵? 아무튼 문어가 들어간 빵과 비슷한 건데... 전혀 빵 같은 느낌이 들지 않고 맛있으니까. 그리고 이 집에는 정통 일식 우동도 잘 하니까 다꼬야끼와 우동을 같이 먹으면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다.” “문어빵? 빵에 문어가 들어가나요? 재필 오빠?” 아양을 떠는 25살의 그다지 귀엽지 않은 현숙의 모습에 서재필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 현숙아, 너무 닭살 돋게 말하지 마라. 힘들다. 뭐라고 그랬지? 아, 문어빵에 문어 들어 가냐고? 하하하... 붕어빵에는 붕어 안 들어가지만 다꼬야끼에는 문어가 들어간다. 확실한 문어지. 아주 맛있어.” 서재필이 다꼬야끼와 우동을 적당한 양으로 주문하자 현준이 리그 얘기를 꺼냈다. “재필 형, 생각보다 중국 프로팀하고 그 연습량에서 차이가 그다지 많이 나지는 않는 것 같던데요.” “음... 조금 걱정했었는데 오늘 진규와 현준이 네가 그렇게 이겨 첫 출발이 아주 좋아 안심이다. 다른 한국 프로팀들도 자신들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할 걸.” “진규는 잘 했지만 저 같은 경우는 상대가 조금 자멸하는 듯했거든요. 그 정도라면 그렇게 리그가 어렵지 않을 것 같기도 해요.” “그 정도라면 그렇지. 하지만 다 그 정도가 아닌 게 문제지. 차이나 모터스에서 가장 약한 선수가 바로 현준이 너와 게임했던 선수고 마지막 순서였던 게이머가 가장 잘하는 선수지. 하긴, 진성이도 가장 마지막이었으니. 아직 한 게임 밖에 하지 않았으니 조금 기다려 봐야 알겠지. 그런데 진규의 그 로마군은 엄청나더라. 진규, 평소에도 잘 했지만 오늘은 정말 대단하더라.” “저야.... 진성이 형이 가르쳐 준 대로 게임을 했으니까요.” 진규는 진성이 만든 방법을 부단한 연습을 통해 아직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익힌 자신의 노력을 숨겼다. “아, 그 시민군 양성이라는 방법? 그런데 그 방법이 노출되었으니 다른 사람들도 사용하지 않을까?” 시민군 양성이라는 방법에 대해 알고 있었던 매니저 서재필은 약간 걱정스레 말했다. “제가 만든 것은 맞지만 그 방법이라는 것이 정말 어려워서 아마도 저와 진규 밖에 쓰지 못할 겁니다. 잘못하다가는 그야말로 스스로 게임 오버를 선언하는 것과 비슷하니까요. 사용한다고 해도 제대로 효과를 보려면 오랜 연습이 필요해서 아마 메이저 리그 동안은 힘들겠지요. 진규는 정말 빨리 익힌 겁니다. 뭐, 아직 제대로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진성은 진규의 메이저 리그 첫 승리에 대한 어떤 성취를 빼앗을 생각은 절대 없었다. 위험한 순간이 있긴 했어도 아주 침착하게 상대한 진규의 게임 운영은 칭찬 받아 마땅했다. 진규는 진성의 말에 더욱 더 기분이 좋아짐을 느꼈다. “가이드 여기 맞소?” “네, 여기 맞습니다. 여기 음식이 끝내주게 맛있지요. 자, 안으로 들어가시죠.” 차이나 모터스는 한국의 프로팀 자소 소프트에게 2:0으로 져서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한국 최강의 팀인 것은 알았지만 객관적으로 유리한 입장에서 완전히 박살이 나자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이틀 뒤에 있을 일본의 세가 소프트와의 게임을 제대로 준비할 수 없을 것 같아 차이나 모터스 프로팀 팀장은 통역이자 가이드인 사람에게 부탁해 근처에 맛있는 음식점을 부탁했다. 가이드는 게이머 3 명과 세 명을 항상 따라다니는 두 명의 남자와 함께 자신이 잘 아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좋아 보이지는.... ” “일본 음식점은 다 이렇습니다만, 실내는 전혀 다르지요. 여기는 다꼬야끼가 아주 유명합니다. 아주 맛있습니다. 자, 안으로 들어가시죠.” 통역이자 가이드인 다카무라 준이치는 땀을 흘리며 선수들과 팀 멤버들을 안내했다. 진성 일행은 누군가 들어오자 눈이 다 들어오는 사람들에게도 날아가 박혔다. 지난번과는 달리 확실히 아는 사람이었다. 쿠쉬야끼 먹으러 갔을 때 만난 사람들이 일본 프로팀인 도시버 소속이었다는 것은 나중에 추첨 때에야 알게 되었다. 진성은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바로 오늘 자신들에게 패한 차이나 모터스라는 것을 알았다. 조금 껄끄러워지리라 생각했다. 들어오던 차이나 모터스의 프로팀 사람들도 안에 한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고 곧바로 한국의 프로팀 자소 소프트라는 것을 알았다. 약간 당황했다. 그 중에서도 통역이자 가이드인 준이치는 이제까지 흘리던 땀을 두 배로 흘리면서 재빨리 앞으로 나와 차이나 모터스의 사람들을 자소 소프트 사람들의 반대쪽으로 안내했다. 약간 어색했지만 그런 분위기는 곧 사라졌다. 어차피 각각 음식을 먹으러 왔을 뿐이었다. 진성 일행은 현숙이 분위기를 주도하면서 왁자지껄 잔치집 분위기가 났다. 게다가 타이밍도 정확하게 음식이 나오자 환호성을 지르면서 재미있어 했다. “조용히 합시다.” 아주 낮으면서도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목소리는 떠드는 가운데에서도 거슬리는 것이 아주 잘 들렸다. 진성 일행은 그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차이나 모터스였다. “아.... 같이 식사하는데... 조금... 네.. 조금 소리가 큰 게 아닌지...” 차이나 모터스의 젊은 사람의 목소리에 통역이자 가이드인 준이치는 빨리, 그리고 부드러운 어조로 자소 소프트 사람들에게 말했다. 서재필은 그 얘기를 듣자 상대의 기분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저희가 저희 생각만 했습니다. 실례했습니다.” “아닙니다. 소리를 조금만 낮춰주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준이치는 그래도 상대 책임자로 보이는 사람이 경우가 있어서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통역, 당신 저 사람에게 도대체 뭐라고 했지?” 이주방이었다. 게임 스타일 뿐 아니라 평소에도 그 저돌적인 성격이었다. 확실히 20대 초반의 게이머가 30대 초반의 통역에게 이런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되지만 이주방은 아주 자연스러웠다. 이주방은 게임에서 너무 쉽게 져서 그 분풀이를 하고 싶었다. 준이치 역시 평범한 일본인답게 최대한 참아 넘기려고 애썼다. “네? 아, 좀 조용히 해 달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렇게 비굴하게 할 필요가 있어?” 이주방은 싸늘한 미소를 흘리면서 말했다. 비굴하다니. 준이치는 순간 주먹을 쥐었지만 한숨을 크게 내쉬면서 주먹에 들어간 힘을 풀어버렸다. “오호.... 통역 아저씨, 비굴하다는 말에 열 받았나보지. 하하하.. 일본인들은 어떻게 해도 화를 낼 줄 모른다더니... 아저씨도 그래?” 상대가 약하게 나오자 이주방은 더 세게 나갔다. 이제는 거치는 것이 없는 듯, 목소리는 가게 안을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다꼬마끼의 맛에 감탄하면서 우동과 같이 먹던 자소 소프트의 사람들은 그 예의 없고 싸가지 없어 보이는 이주방의 말투에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상대의 기분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만히 있었다. “혹시 우리가 일본어 하지 못한다고 해서 저 사람들에게 우리 험담한 거 아냐?” “...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단지 같이 사용하는 음식점이니 조금 조용히 해달라고 했지 저쪽에서도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알아? 저 쪽의 저 재수 없는 녀석들하고 당신이 우리를 비웃었는지 아닌지.... 흐흐흐..” 막 나가는 이주방의 말에 준이치는 게이머 중에서 그래도 자신이 보기에 말이 통할 듯한 정택효를 바라보았다. 정택효는 빙긋 웃더니 고개를 돌려버렸다. 준이치는 그제야 알았다. 이 새파랗게 젊은 게이머들은 자신을 상대로 스트레스 해소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던 것이다. “...........”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얼굴이 빨갛게 변했지만 준이치는 억지로 입을 다물었다. 한번 터지면 자신도 제대로 제어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꾹 눌러 참았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너무 좋지 않은데...... 이런... 기분 나쁘네. 재수 없는 녀석들이라고....” 잠자코 듣고 있기만 하던 서재필은 뭐라고 혼자 중얼거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서 천천히 차이나 모터스 쪽으로 이동했다. 서재필의 얼굴은 서리가 앉은 듯 냉막, 그 자체였다. “어이, 젊은 친구. 말이 지나치군.” 이제까지 중국말을 알아듣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서 막말을 했던 이주방은 자소 소프트에서 그나마 나이든 사람이 일어나 자신에게 다가와서 유창한 북경어로 말하지 놀랐다. “... 중국어를......” “자네, 나이도 많지 않은 것 같은데... 말이 지나치군. 뭐? 재수 없는 녀석들이라고? 허.. 내 나이도 그리 많지는 않지만 30년이 넘도록 살아오면서 그런 얘기를 그렇게 큰 소리로 들은 것도 아.. 기억이 가물가물하군.” “........ 그래서?” “그래서? 하하하... 어이, 이 친구야 좋게 말하니까 말이 말 같지 않냐? 너, 차이나 모터스 회장 손자지? 그래서 이렇게 막무가내냐?” 서재필은 이주방의 정체를 바로 찔러서 말했다. 서재필은 이주방이 어떻게 이런 행동을 보일 수 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대강은 추측하고 있었다. 단지 추측인데 이주방은 그런 예상을 확신으로 바꿔 주었다. “........ 어.. 어떻게?” “다 아는 수가 있지. 지금까지 대화 내용을 다 녹음해 놓았는데 어쩔래? 잘못했다고 제대로 사과할래, 아니면 내가 녹음한 테입을 공개할까?” 서재필은 이주방에게 말하면서 뒤를 돌아 이준에게 손짓했고 이준은 휴대용 녹음기를 손에 들고 흔들며 보여 주었다. 이주방은 그런 서재필의 능청스러움에 화가 났다. 뭐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일단은 저 녹음기를 빼앗아야 했다. “아대, 아소, 저 녹음기를 가져와라. 방해하면 손 봐줘도 된다.” 옆에서 가만히 있던 정택효가 날렵한 몸의 아소와 거구의 아대에게 낮게 지시했다. 분위기는 험악하게 돌아갔지만 서재필을 제외한 자소 소프트 사람들은 영문을 몰랐다. “진성아, 이것 가지고 있어라. 나는 저기로 가봐야겠다.” 이준이 가지고 있던 휴대용 녹음기를 진성에게 넘기고는 서재필에게로 달려갔다. 그와 동시에 차이나 모터스의 게이머 세 명 뒤에 있던 날렵한 사내와 거구의 사내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날렵한 사내는 서재필에게로 다가갔고 거구의 사내는 진성에게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진성은 무슨 일인지 몰랐지만 험악해지는 분위기를 보며 옆에 있던 진규와 다른 사람들에게 뒤로 물러나라고 했다. 현숙과 소희는 진성에게 위험하다고 했지만 현준이 뜯어 말리며 뒤로 두 여자를 데려갔다. 현준은 진성의 실력을 완전히는 몰라도 싸움에서 지는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진성은 휴대용 녹음기를 품안으로 넣은 뒤, 거구의 사내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 녹음기를 내놔라.” “........” “다치고 싶지 않다면 빨리 내놓는 게 몸이 좋을 거다.” “.......” “내 말이 우습냐?” “.......” “이...이.... 마지막이다. 녹음기를 내 놔라.” “.......” “...이...이...아아악!” 진성은 혼자서 알아듣지도 못하게 뭐라고 말하다가 핏대를 올리더니 급기야 고함을 지르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거구의 사내를 담담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진성은 달려오는 남자의 움직임을 보고는 조금 놀랐다. 막무가내는 아니었다. 확실히 뭔가 배운 흔적이 있었다. 이제까지 많은 무술을 접해보지 못했던 진성으로서는 흥미가 생겼다. 거구의 사내는 앞으로 오더니 커다란 주먹으로 윙하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만들며 진성을 후려쳤다. 진성 역시 작은 키가 아니었지만 거의 2미터에 육박하는 거구의 사내에 비해서는 아주 작아 보였다. 주먹이 다가와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던 진성은 순식간에 옆으로 비켜서더니 왼손을 올려 손목을 잡아 버렸다. 진성은 약하지만 확실히 반탄경을 느꼈다. 상대는 고수는 아니더라도 경의 초입까지는 들어선 인물이었다. 진성은 상대를 앞으로 당겼다가 뒤로 밀면서 경의 더해 변화를 주었다. 두 가지 경을 한꺼번에 밀어 버렸는데 위쪽은 강한 경, 아래쪽은 부드러운 경으로 밀었다. 그로 인해 가슴 언저리가 갑자기 압력을 받아 답답하게 느껴지며 뒤로 날아가는데 아래쪽은 전혀 이상함이 없는 것을 느낀 거구의 사내는 공중에서 빠르게 회전하면서 뒤로 처박혔다. “꽝... 꽈당!” 탁자 하나를 완전히 박살낸 거구의 사내는 겨우 일어났다. 자신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내동댕이쳐졌는지 알 수가 없던 거구의 사내는 천천히 진성에게로 다가갔다. 형의권을 배운 거구의 사내로서는 이렇게 완벽하게 당하기는 처음이었다. 상대 역시 무술의 고수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이제 겨우 20대 초반의 어린 아이가 그런 수준을 가졌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진성은 상대가 조금 머뭇거리자 슬며시 웃고는 하체에 경을 모아 순식간에 상대의 사각으로 돌진하는 천쾌보를 시전했다. 허허로운 기운이 많은 지허보와는 달리 천쾌보는 마치 번개가 치는 듯한 호쾌하면서 상대 시야의 사각을 이용해서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을 보여주는 보법이었다. 상대 거리 안으로 들어간 진성은 옆으로 피하려는 상대의 축이 되는 다리를 향해 맹거퇴를 펼쳤다. 무릎 정도 높이로 차는 맹거퇴는 겉보기로는 무슨 퇴법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까 했지만 직접 당해보면 그런 소리가 절대 나오지 않는 퇴법이었다. “퍼퍽!” 거구의 사내는 갑작스레 나타난 상대를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빼려고 했지만 순식간에 다리를 당하고 말았다. 상대의 퇴법이 단순함을 보고는 충격을 흘리려 했지만 곧 불가능함을 알았다. 거구의 사내는 뒤로 날아가지 않았다. 아니 뒤로 몸을 빼려고 했지만 상대의 발에 맞는 순간 몸에 있던 경이 순간적으로 흩어짐을 느꼈다. 경 자체가 사라진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일순간 흩어지자 몸은 축 늘어지고 말았다. 거구의 사내는 이제야 상대인 젊은이가 엄청난 고수임을 알았다. “아... 아.... ” 마지막 신음을 끝으로 거구의 사내는 기절해 버렸다. 그 장면을 보던 소희와 현숙은 정말 놀랐다. 평소 약간 차가우면서도 배려하는 마음이 있어서 앞으로 아주 멋진 남자가 될 거라 생각했던 현숙과 부담스런 동생 정도로 생각했던 소희는 눈앞에서 엄청난 거구의 사내를 손쉽게 처리하는 진성의 강한 모습을 보자 마음이 설레고 말았다. 현준은 자신의 생각이 옳았음을 알았고 진규는 얼어 버렸다. 진성이 어렵지 않게 거구의 사내를 요리한 데 비해, 서재필과 이준은 날렵한 사내를 맞아 위태위태한 상황을 연출했다. 진성과 일행은 그 장면을 보고 놀랐는데 그 이유는 서재필의 싸움 실력이 예사롭지 않다는 점이었다. 이준은 도장도 여러 개 운영할 만큼 무술이 뛰어나고 보디가드였기 때문에 그렇다 쳐도 바람 소리가 윙하며 들리는 서재필의 돌려차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서재필과 이준이 같이 덤벼도 날렵한 사내는 여유롭게 피하면서 간간이 위협적인 공격을 했다. 그러다 날렵한 사내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거구의 사내를 보면서 눈빛을 반짝였다.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진성을 노려보았다. “사제가 녹음기를 빼앗으면... 그만 두려고 했더니만 숨은 고수가 있었구먼.” 날렵한 사내는 위협적인 다리 후리기와 공중 돌려차기를 한 뒤에 곧바로 진성에게로 달려갔다. 어차피 이번 싸움은 녹음기만 확보하면 유야무야 넘어갈 일이었기 때문에 날렵한 사내는 진성을 향해 빠르게 다가갔다. 서재필과 이준은 순간적으로 상대를 놓쳤다. 이상함을 알아챘을 때는 이미 날렵한 사내가 진성 근처로 다가간 후였다. 진성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날렵한 사내를 보면서 담담한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날렵한 사내는 젊은 애송이가 자신을 바라보면서 웃자 기분이 나빠진 듯 담담한 얼굴 표정이 차갑게 바뀌었다. “흡!” 날렵한 사내는 진성에게로 빠르게 접근했다. 순식간에 접근한 날렵한 사내는 손목을 붙이며 쌍장을 만들어 진성의 허리를 공격했다. 굉장한 속도였다. 진성은 두 걸음 뒤로 물러났지만 날렵한 사내의 공격은 그치지 않았다. 발을 구르며 회전해서는 뒷발 축으로 진성의 가슴을 세차게 찼다. 진성은 손을 올려 다가오는 발이 닿자마자 회전시키며 힘을 풀어 버렸다. 그런 동작이 컸기 때문에 날렵한 사내는 공중에서 돌다가 떨어지고 말았다. “어엇!” 안전하게 착지한 날렵한 사내는 진성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의 공격을 이렇게 쉽게 풀어버리는 사람이 20대 초반의 젊은이라니. 게다가 한국인이라니. 이해할 수 없는 눈치였다. “나는 형의권을 배운 곽심이다.” “.........” “너는 누구냐?” “........” 아무 대답도 없는 상대에게 날렵한 사내가 화를 내려는 찰나 서재필이 끼어들었다. “이 친구는 중국어를 할 줄 모릅니다.” 그리고는 재빨리 진성에게 말을 전했다. 진성은 그제야 이제까지의 상황과 상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대의 잘못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었기에 진성은 이런 말도 안 되는 경우에 화가 났다. 더군다나 상대는 형의권인지 뭔지를 배운 무인이었다. 제대로 된 무인인지는 몰라도 진성의 눈빛이 달라졌다. “제가 누구인지는 알 필요가 없을 것 같네요. 그런데 무술을 가지고 이렇게 사람을 핍박하나요?” 서재필이 중간에서 말을 통역했다. “....... 그 녹음기만 주면 아무 일 없이 끝날 수 있다.” “.... 잘못은 그 쪽에서 했지 않습니까?” “그런 것은 모른다.” “어쩔 수 없군요. 이제는 제가 당신과 그 뒤에 있는 사람들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네게 그런 능력이 있을까?” “당신에게는 따끔한 충고가 필요할 것 같군요.” 진성은 상대의 말을 기다리지도 않고 상대에게 천천히, 하지만 거리낌 없이 걸어갔다. 진성은 상대의 공격을 무시하는 듯 시종 여유로운 태도였다. 오히려 서재필과 다른 사람들이 걱정할 정도였다. 날렵한 사내 앞 1 미터 정도에서 선 진성은 다시 말했다. “저 역시 무인으로서 당신이 앞으로 제대로 생각해서 몸을 움직였으면 합니다.” 자신의 말에 어이없어 하는 날렵한 사내가 알아채기도 힘들게 움직인 진성은 이미 상대의 거리 안으로 들어와 상대의 가슴에 팔극권의 정심절을 제대로 가격한 상태였다. 자신의 말이 끝나자마자 움직인 진성의 공격에 날렵한 사내의 얼굴은 얼굴이 하얗게 변하면서 뒤로 날아가 벽에 부딪쳐서 바닥에 떨어졌다. 조금 괴로워하더니 기절하고 말았다. 마치 영화와도 같은 장면에 음식점 주인을 비롯해 보고 있던 많은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진성은 천천히 이 모든 일의 원인인 이주방에게로 다가갔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팔...극권? ...팔극...문인가?” 이주방은 떨면서도 하고 싶은 말은 했다. “팔극문이라면 어떻고 아니라면 또 어떻습니까?” “...........” 진성은 말없이 이주방을 향해 손을 펴서 앞으로 내미는 동시에 옆으로 반보 피했다. 그 순간, 진성의 목이 있던 곳으로 비침 몇 개가 지나갔다. 진성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옆으로 순식간에 움직이면서 정택효에게로 다가가 그 등에 손바닥을 댔다. 이주방은 가만히 있다가 뭔가에 당한 듯, 천천히 쓰러졌다. 숨은 정상이었지만 기절한 모양이었다. “위험한 장난입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 장난....이었습니다.” 정택효는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진성을 향해 말했지만 진성에게 그런 말이 통할 리는 만무했다. 정택효는 이제까지 가만히 있다가 진성의 빈틈을 노린 것이었다. 진성은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기세를 올려 정택효를 압박했다. “목의 급소를 노리는 암기가 장난입니까? 당신도 제 장난을 받아보십시오.” 진성은 가볍게 경을 상대에게로 밀어 넣었다. 털썩하고 정택효마저 쓰러진 후에 서 있던 주료와 가이드인 준이치를 향해 진성이 말문을 열었다. “다들 잠깐 기절시킨 것뿐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앞으로 이런 일이 한 번 더 생긴다면 그 때는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저기 저 두 녀석은 제 나름대로 고통을 줬으니 세 달 동안은 절대 힘을 쓰지 못할 겁니다. 이런 얼굴 붉히는 일은 다시는 없었으면 합니다.” 진성은 서재필과 이준과 같이 자리로 돌아왔고 자소 소프트 사람들은 계산을 치르고는 밖으로 나왔다. 준이치와 주료는 쓰러진 사람들을 수습하느라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와... 진성이 형! 끝내줘요. 와... 정말 대단해요!” “역시 진성이야!” 진규와 현준이었다. 현숙과 소희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서재필의 실력도 대단했지만 그냥 봐도 상대가 되지 않는 진성의 실력에 말을 할 수 없었다. “진성이는 팔극신권이라는 대단한 무술의 정통 계승자입니다.” 현준의 설명에 그제야 현숙과 소희는 진성의 실력의 근거를 알 수 있었다. 눈앞에서 영화와 같은 장면을 보자 들뜬 마음을 쉽게 가라앉힐 수 없었던 현숙과 소희는 여전히 조용했다. 이준은 조금 부끄러웠다. 명색이 보디가드인데 지켜야할 사람에게 도움을 받다니. 하지만 그 대상이 대상이니만큼.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준은 자신의 생각보다 더 월등한 진성의 실력에 부러움과 동시에 자극을 느낄 수 있었다. 진성의 활약에 묻혔지만 제일 의외였던 것은 서재필이었다. 유창한 중국어 실력과 함께 녹녹치 않은 격투 실력까지. 하지만 그런 면은 빛나는 진성의 활약에 묻히고 말았다. 약간 더워오는 날이었지만 밤은 그 전날에 있었던 일로 인한 기쁨, 언짢음, 귀찮음, 짜증 등 모든 감정의 찌꺼기를 삼켜버렸다. 그래서인지 아침에 일어난 진성은 무척이나 상쾌함을 느꼈다. 옆 침대에서는 현준이 몸을 뒤척인 탓인지 이불을 둘둘 말아서는 그대로 자고 있었다. 가볍게 일어나 몸을 푼 진성은 늘 하던 습관대로 팔극진결을 펼치기 시작했다. 날이 아직 어두운 가운데 진성은 진각을 전혀 하지 않은 채 부드러움을 강조해서 팔극진결을 풀었다. 몇 번 진결을 펼치니 확실히 몸을 움직일 때마다 몸 내부가 더 깨끗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단지 상쾌함이 아니라 뭔가 정화되는 느낌이어서 내심 멈추고 싶지 않았고 몸 역시 그런 움직임이 싫지 않은 듯 무의식중에서 진성은 너풀너풀 춤을 추었다. 눈을 뜨면서 동작을 멈추니 이미 날은 완전히 밝아 있었다. 크게 숨을 들이쉰 진성은 가볍게 기합을 내지르고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한 뒤에 밖으로 나왔다. 그 때까지 현준은 여전히 이불을 몸으로 말아서 엎드려 자고 있었다. “야, 일어나! 밥 먹으러 가야지?” 진성은 머리를 말리면서 현준을 깨웠지만 현준은 요지부동이었다. 현준과는 꽤 같이 방을 썼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하는 그 고질적인 습관이 있음을 진성은 알고 있었다. 일회용인 수건을 욕실 구석으로 던져 놓고는 진성은 현준의 침대로 다가갔다. “셋 셀 때까지 안 일어나면 기술 들어간다. 하나, 둘, 세..” “우우웅~~ 하아암~ 무슨 기술?” 절묘하게 셋의 가운데를 뚫은 현준의 대답이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가끔 하품을 늘어지게 하면서 은근히 사람을 열 받게 만드는 구석이 현준에게는 있었다. 그것도 꽤 많이. “........”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진성은 움직였다. 갑자기 조용해지자 뭔가 눈치 챈 현준은 움직이려고 했지만 둘둘 말린 이불로 인해 버둥버둥 거리기만 했다. 얼굴을 돌려 사방을 봐도 진성은 없었다. “펑! 퍽! 아아악!” 진성이 공중으로 붕 떴다가 떨어지며 등으로 현준의 침대 위로 떨어졌다. 직접 부딪친 것은 아니지만 진성의 몸놀림으로 침대는 이상하게 진동했고 그 여파로 현준은 이불을 몸에 만 채로 바닥에 퍽 소리를 내며 떨어졌고 곧 비명을 질렀다. “아, 허리야... 정말 허리 아프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오늘 나, 게임 지면 다 네 책임이니까 그렇게 알아라. 으윽...” 호텔에서 숙박과 함께 제공되는 아침 식사를 하고 있던 현준은 입안 가득 넣은 것을 씹어 삼키고는 진성에게 말했다. 허리를 잡는 폼이 침대에서 떨어져 바닥에 부딪칠 때의 그 충격이 작지 않은 듯했다. “그러게 누가 사람 열 받게 만들래? 아침에 미리미리 일어나면 좀 좋아?” “그렇다고 어떻게 그렇게 무식하게 사람을 내동댕이치냐?” “뭐? 내가? 아... 내가 한 게 아니라 침대가 너를 튕겨낸 거야. 괜히 생사람 잡지 마라.” 진성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는 그럴 의도가 없었지만 침대가 이상해서 그렇게 됐다는 그다지 믿기지 않는 말로 일관했다. “진성이 형, 오늘 게임 끝나면 우리는 서울로 돌아가는 건가요?” 진규 역시 입에 잔뜩 넣은 것을 억지로 삼키고 물을 마신 후에 진성에게 물었다. “아마도 그럴 걸. 이제 게임도 없으니. 그리고 다른 프로팀들 간의 게임 플레이는 우리 매니저가 다 구해 줄 테니까.” “.... 그러면 중국에서 경기하기 전까지 거의 일주일 이상 시간이 남는 거네요.” “그렇지. 그러니 진규 너는 회사로 돌아가도 열심히 해야 한다. 알겠냐?” “네... 당연하지요.” 진성을 비롯해 진규와 현준은 아침을 부지런히 먹고 있었다. 매니저 서재필과 이준은 벌써 식사를 마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두 코디는 여자라 그런지 아침에 항상 늦었다. 일이 있는 아침에는 칼같이 나타났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정말 기다리는 사람 열 받도록 늦었다. “아, 맞다. 현준이 형, 오늘 오더 아세요?” 진규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오더? 경기 오더? 나는 잘 모르겠는데...” “진규 네가 첫 번째, 내가 두 번째, 현준이가 마지막일 걸.” 막 만든 듯한 고소한 빵을 조금씩 먹으며 진성이 대답했다. “뭐? 내가 마지막? 왜?” “내가 매니저 형에게 부탁했거든. 나도 경기는 해 봐야 감각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니까 흔쾌히 그렇게 하라고 하던걸.” 진성과 진규, 현준은 양껏 먹고 일어서려고 했지만 아주 정확한 타이밍에 현숙과 소희가 오는 바람에 잡혀서 현숙과 소희가 식사를 마치는 동안 기다려야했다. 게임은 오후에 있었기 때문에 오전에는 그런대로 자유시간이었다. 그렇다고 어디 멀리 놀러갈 수 있는 긴 시간은 아니었기에 호텔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어제 차이나 모터스와의 게임에서 승리를 해서인지 진규와 현준은 그런대로 여유가 있었다. 진성과 현준, 진규는 호텔 뒤뜰에 있는 곳으로 내려가 시간을 보냈다. 어느 정도 시간이 되자 매니저 서재필이 사람들을 모았고 곧 게임 대회장인 엑센터로 출발했다. 경기 시작 2시간 정도 전에 도착할 수 있도록 넉넉하게 출발했지만 밴에서 내려 엑센터의 선수 대기실로 들어가는 곳은 이미 일본 팬들로 가득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환호를 받은 진규와 현준, 진성은 손을 흔들고는 대기실로 들어갔다. “오늘 상대는 일본 프로팀인 세가 소프트다. 다들 전력 분석을 했겠지만 세가 소프트의 선수들 역시 만만찮다. 철권 테루, 얼음공작 유스케, 신기(神伎) 히카루. 모두 대단한 선수들이니까... 왜 웃냐?” 한바탕 비장하게 분위기 잡고 말하려는 서재필이 일본 선수들을 말하자 현준으로부터 시작해서 나중에 소희와 진성까지 웃게 만들었다. 이상하게 일본 선수들의 닉네임은 조금은 유치했다. 철권 테루, 얼음공작 유스케, 신기 히카루. 이미 알고 있었던 이름들이지만 서재필의 비장함과 어울리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크하하하... 웃기지 않아요? 철권, 얼음공작, 신기... 크크크..” 현준은 웃음을 제대로 참지 못했다. “푸하하하하.. 얼음공작? 우리 진성이는 얼음왕자인데.” 당연히 이런 말을 할 사람은 현숙이었다. 서재필 자신도 웃긴 지 스스로 참아가며 하고 싶은 말을 다했다. 요약하면 상대도 대단하니까 신경 써서 꼭 이겨라 한 마디였다. 그런 말을 20분 가까이 하는 서재필도 상당한 재능의 소유자임에 틀림없었다. 경기가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긴장을 없애기 위함인지 진규와 현준은 말이 많았고 현숙은 그런 마음을 아는지 너스레를 떨며 대기실의 분위기를 밝게 만들었다. “어....” 진규는 메이크업을 받다가 물을 마시기 위해서 현준에게서 받은 유리컵이 힘도 주지 않았는데 눈앞에서 금이 가는 것을 보았다. 떨어뜨리지도 않았고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금이 가다니. “어... 이 유리컵 금이 갔네요. 신기하네. 세게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금이 가다니..” “뭐? 컵에 금이 가? 봤어?” 메이크업을 하던 현숙의 말에 진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좋은 징조는 아닌데... 불길해.... ” “네? 정말요? 안 좋은 건가요?” 현숙은 혼잣말로 했지만 바로 앞에 있던 진규가 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진규가 정색을 하면서 말하자 현숙은 당황하며 얼버무렸다. “아.. 아니... 옛날에는 그런 얘기가 있었는데... 요즘에 그런 게 어디 있냐? 그 유리컵, 그 전에 누가 떨어뜨렸나 보지. 안 그래?” “.....” 현숙은 수습했지만 진규는 마음속에서 더욱 커져가는 불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불안했다. 식은땀이 흐르고 게임에 자신이 없어졌다. “진성이 형, 제가 이길 수 있을까요? 유리컵에 금도 가고.. 오늘 너무 불안해요. 이러다가 지는 것 아닌지 모르겠어요.” 진규는 갈수록 불안한 지 진성에게로 와서 하소연했다. 유리컵이 금이 간 게 어떤 징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더욱 커졌다. “진규야.. 뭐가 불안해? 너 열심히 했잖아. 불리한 상황에서도 네가 할 만큼 최선을 다 했잖아? 진규야, 너 열심히 했지?” “네, 그렇지만..” “네 자신의 실력, 네가 했던 그 연습량을 믿어라. 네가 가진 노하우를 믿어라. 한국 최고의 팀에서 최고의 선수들과 같이 한 그 연습을 믿어라. 네가 그런 것만 제대로 알고 게임을 하면 지더라도 진 게 아니다.” 진성은 진규의 마음을 아는지 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노력한 것을 믿으라고 말했다. “휴.... 네...” “두려워해서 어쩌다 이기는 것보다 당당하게 지는 게 났다. 지면 왜 졌는지 그 이유는 아니까 고칠 수 있잖아. 진규야, 알겠냐?” “네, 진성이 형. 얍!” 조금은 힘이 났는지 기합을 질렀다. 그리고 힘차게 대회장으로 걸어 나갔다. 일본의 프로팀, 세가 소프트의 첫 선수는 철권 테루였다. 로마 문명을 사용하는 테루는 확실히 선봉으로 상대팀의 기선을 제압하는 역할을 많이 했다. 일본 프로리그에서 철권이라는 닉네임이 붙은 이유는 지더라도 상대를 물고 늘어져 세가 소프트가 절대 만만한 프로팀이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로마 문명의 최강자이자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수 게이머 스키피오에게는 스스로 미치지 못한다고 말하는 테루는 그 밖의 다른 로마 문명의 게이머에게는 절대로 지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할 정도로 자신감이 강한 선수였다. 리틀 스키피오 진규와 철권 테루는 서로 인사를 하고는 게임기에 탑승해 곧 경기 시작을 알렸다. 관객들은 환호를 보내며 몇 시간 동안 기다린 고생을 완전히 날려버렸다. 곧 게임은 시작되었다. 진규와 테루는 비슷한 오더를 보였다. 어차피 처음에는 거의 비슷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 곳으로 정보원 겸 사신으로 적합한 인물들을 보낸 후에 문명을 점검하고 초반 군대 양성을 하는 것은 거의 비슷했다. 하지만 곧 발전 방향에 있어서 진규와 테루는 갈릴 수밖에 없었다. 리틀 스키피오 진규는 군대강화법과 시민군 양성이라는 두 개의 커다란 전략을 시작했다. 군대강화법은 그런대로 컨트롤에 어렵지 않고 단지 시간이 든다는 것이었지만 시민군 양성은 그야말로 게임 전체를 걸어야 할 만큼 힘겨운 방법이었다. 진규는 한번의 성공으로 인해 자신감을 얻은 듯, 대담하게 자신이 아는 대로 컨트롤을 하기 시작했다. 곧 주변 정세에 대한 보고가 들어왔다. 진규는 자신이 있는 곳이 커다란 섬이라는 것을 알았다. 로마 문명 말고도 인공지능 국가인 이집트가 있음을 알았다. 진규는 초기에 주어진 소규모 배에 정찰 병력을 실어 상대가 있을 만한 곳으로 보내고는 해야 할 컨트롤에 신경을 썼다. 바다가 가운데 놓여 있다면 초기에 승부를 내기는 힘들 것이다. 진규는 상대가 아니라 자신의 문명에 더 신경을 써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컨트롤과 동시에 이집트로 사절을 보내 대립이 아닌 화해를 원하는 동맹을 요청했다. 원정을 갈 때 이집트의 지원을 받기는 힘들겠지만 공격을 받을 때 이집트가 차지한 곳으로는 절대 상대 병력이 상륙해 올 수 없도록 만들 수 있다면 훨씬 공격 받을 범위가 줄어들어 유리했다. 그런 점을 감안해서 진규는 빠른 시간 안에 동맹을 체결하기를 원했고 그런 후에 상대 로마 문명을 둘러싼 다른 나라에 대해서 이간책을 사용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길 것으로 예상했다. 테루는 문명의 발전을 중심으로 게임 운영을 했다. 무기의 업그레이드와 군대 양성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었기에 많은 병력이 잘 무장되어 전력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그로 인해 주변 국가와의 외교에 조금 소홀한 면이 있었지만 그런 부분들은 초반에 빠른 동맹을 체결하는 방법으로 해결했다. 테루는 남서쪽에 스파르타와 북서쪽에 이오니아가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확실히 상대와의 사이에 바다가 끼어 있음을 알았다. 테루의 장점은 초반에 강력한 군대의 양성이었고 단점은 후반으로 갈수록 전체적인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아 총력전에 약한 면을 보이는 것이었다. 스스로 그런 점을 알고 있었기에 테루는 곧바로 수송선의 건조를 지시했다. 초, 중반에 승기를 잡아야했다. 테루는 한 가지 실수를 했다. 바로 스파르타와 이오니아의 관계였다. 실제 역사와는 관계없이, 테루가 정보원을 통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두 나라가 대립적인 관계에 있었고 특히 스파르타는 자존심이 세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절단 하나를 보내 이오니아에 먼저 들린 후, 스파르타로 가게 했다. 그런 점이 스파르타의 자존심을 건드려 이오니아와는 우호적인 동맹을 체결했지만 스파르타와는 전쟁을 치를 정도의 대립은 아니었지만 만족한 결과를 얻을 수는 없었다. 테루는 그런 실수를 가지고 연연할 성격이 아니었다. 그렇게 후회한다고 해서 실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기에 오히려 더 대담한 게임 운영이 더 도움이 됨을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진규는 상대의 진영에 대한 어느 정도의 정찰을 통해 스파르타와 관계가 좋지 않음을 발견했다. 생각지도 않은 성과여서 진규는 어느새 불안한 징조에 대한 생각은 완전히 잊어버렸다. 진규는 스파르타를 이용해 상대에게 타격을 줄 생각으로 군대의 규모를 좀 더 키우게 만들고 수송선도 건조했다. 그리고 비밀리에 스파르타로 향할 사절을 소규모 수송선을 통해서 급파했다. 진규는 일이 잘 풀리는 듯해서 너무 기분이 좋았다. 진규의 로마 문명은 큰 섬의 서쪽에 있었고 이집트는 동쪽에 있었다. 그런 지형으로 인해 진규는 동쪽 부분의 방어는 신경 쓰지 않았다. 동맹을 맺은 이집트가 있었기에 자신이 예상하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상륙하기도 쉽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테루는 우직하게 수송선을 만들고 만족할 만큼 훈련을 마치는 부대부터 원정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테루의 전략은 단순했다. 하지만 단순한 만큼 컨트롤이 어렵지 않아 오히려 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테루는 상대 문명 옆에 이집트가 있고 서로 동맹을 체결한 것을 알았다. 그렇게 되면 동쪽으로 상륙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만약에 무시하고 이집트에 상륙했다가는 2:1의 협공을 받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테루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원정군을 모아서 곧바로 상대 진영에 상륙할 생각으로 계획을 검토했다. 어느 정도 원하는 만큼의 병력이 모이자 테루는 곧바로 원정에 나섰다. 그 전에 필요한 조치를 취했지만 단순한 전략이었기 때문에 필요한 조치도 그리 많지 않았고 게이머가 본 진영을 떠나도 그리 위험하지 않았다. 테루는 8만 정도의 병력은 두고 25만의 로마 정예 군단을 이끌고 수송선을 타고 원정길에 올랐다. 군대강화법, 시민군 양성, 스파르타와의 교섭, 군대 병력증가, 수송선 건조 등을 한꺼번에 해결하려는 진규는 점점 컨트롤이 힘들어지고 뭔가 삐걱거리는 것을 느꼈다. 진규 자신은 자신의 능력을 초과한 전략을 한꺼번에 진행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단지 조금씩 뭔가가 어긋나고 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 때 수면 밑에 가라앉아 있던 그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눈앞에서 갈라지던 유리컵 생각이 났다. 숨이 가빠지고 등골에서는 서늘한 무엇이 감돌았다. 진규는 거의 무아지경에 들어선 채로 컨트롤을 해 나갔다. 밖에 있던 사람들은 진규의 끊이지 않는 컨트롤에 감탄했다. 마치 일어날 상황을 모두 예측하는 듯한 신들린 컨트롤이었다. 하지만 정작 진규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제대로 모르는 상태였다. 무아지경에서 깨어난 진규는 자신이 컨트롤 했다는 것만 알았지 어떻게, 무엇을 했는지 자세히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확인해 보니 군대강화법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고 스파르타와의 교섭도 성공적이었다. 군대도 원하는 만큼 늘어났고 수송선도 군 병력을 실을 만큼은 만들었다. 시민군 양성은 아직 진행형이었지만 다른 것들이 거의 끝나가는 관계로 컨트롤에는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한번 떠오른 불안함은 오히려 진규를 더 짙게 감싸고 있었다. 진규는 왠지 모르게 이상함을 느꼈다. 아무리 봐도 잘 해나가고 있는데 알 수 없는 예감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아 더 불안했다. 진규는 애써 무시하면서 10만의 군 병력을 수송선에 실은 채, 스파르타로 보냈다. 스파르타를 지나서 상대 코앞에 10만의 군대가 나타나면 심리적인 압박감 외에도 성이 아닌 주변 도시를 공략하면 실질적으로도 타격을 줄 수 있으리라 진규는 확신했다. 다 잘 되어가고 있다고 마음속으로 말하면서 진규는 빠르게 게임을 진행시켰다. 진규는 상대 게이머가 25만의 병력을 이끌고 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어차피 동쪽으로는 오지 못하기 때문에 진규 자신이 예상한 곳으로 상륙할 것이다. 진규는 방어전을 준비했다. 이미 끝난 군대강화법과 조금 있으면 끝이 날 시민군 양성이 완료되면 지금 있는 8만의 병력으로 이기지는 못해도 지킬 수는 있으리라 판단했다. 진규는 공성전에서 이기려면 3배의 병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8만의 로마 시민군 정예 군대라면 충분히 방어할 수 있고 시간을 끌면 이미 출발한 10만의 로마 군대가 상대 진영을 공격해서 상대가 군대를 물릴 수밖에 없으리라 확신했다. 하지만 일은 진규가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았다. 섬의 오른쪽으로 접근해서 상륙하려던 테루는 평소 자신의 전략과는 달리 두 부대로 나누었다. 하나는 우회에서 상대 로마 문명의 아래쪽으로 공격하고 자신은 위쪽으로 상륙할 작정이었다. 일본 프로리그에서 우직한 스타일을 보여 주었던 테루였기에 조금은 변칙적인 플레이가 필요하다는 같은 소속 게이머들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두 개로 나누어졌다는 보고를 받은 진규는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방어전을 계획했기 때문에 두 부대가 다시 모이려면 시간이 걸려서 진규는 자신이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뭐야? 도대체... 이게....” 아무런 징후도 없이, 그 어떤 신호도 없이 진규의 로마 문명에 갑자기 쿠데타가 일어나 버렸다. 곧 있으면 시민군 양성도 끝나는데 이런 시점에서 쿠데타라니. 진규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떠오른 것은 바로 정체모를 그 불안감이었다. 여러 가지 로마에 부담을 주는 계획들을 한꺼번에 실행함으로 조금씩 삐걱거림이 나타났었다가 그것이 숨어버렸던 것이다. 일정 단계에서의 역량을 너무 과도하게 사용함으로 권력층 뿐 아니라 중산층 역시 그 삐걱거림에 동조했다. 그런 어긋남이 외적의 침입으로 인해 점점 더 커져 결국 게이머에 대한 반란으로 이어졌다. 첫 날 외적의 공격으로 인해 두 계층이 하나가 되던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로마라는 문명 전체가 게이머에 반대하는 쿠데타였다. 어떻게 막을 방법이 없었다. 무엇인지 모를 불안함이 그 정체를 나타낸 순간이었다. 진규는 많지 않은 호위병을 거느리고 빠르게 로마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을 정도로 움직여 북쪽의 항구로 향했고 도착하자마자 배를 이용해서 스파르타로 떠났다. 테루와 밖에서 보고 있던 모든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또 한번 리틀 스키피오의 엄청난 역량을 볼 수 있는 게임이라고 확신했던 게임 관계자들과 이제 상륙해서 공격하려는데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테루는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단 한 사람, 진성만이 진규의 실수 아닌 실수를 눈치 챘을 뿐 다른 사람들은 문명 온라인 게임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며 의아해했다. 북쪽으로 배로 이동하던 진규는 여전히 불안함에 시달렸다. 아직도 왜 쿠데타가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쿠데타가 일어날 때까지 전혀 그 분위기를 몰랐을 정도로 완벽하게 당했다. 상대 게이머의 계략이라고 보기에도 힘들었다. 그리고 그 일사분란함을 볼 때 로마의 대부분의 세력이 그 쿠데타에 동조한 것이라 확신했다. 마지막 탈출 때 배를 구하지 못해 억지로 빼앗아 타고 올 정도였다. 이미 로마는 진규의 로마가 아니었다. 진규는 마지막으로 스파르타로 가서 아직 소식을 듣지 못한 원정군에 합류할 생각이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게임 오버를 하려는 순간 진성의 말이 생각났던 것이다. 지더라도 그 이유를 알고 지는 게 어쩌다가 이기는 것보다 훨씬 낫다. 진규는 최선을 다하리라 마음먹었다. 자신의 로마 문명이 공격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테루는 알고 있었지만 상대의 군대가 10만이라는 보고에 알고도 무시했다. 평소라면 원군을 보내야 했지만 이렇게 상대 로마의 문명이 쿠데타로 끝장 나버린 이상 테루는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단단한 방어를 10만의 병력으로 깬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테루는 왜 상대 게이머가 게임 포기를 하지 않는지 의아했다. 비록 쿠데타로 인한 게임 오버가 프로 게이머에게 치욕스럽기는 했지만 그래도 결과에는 승복해야 했다. 진규는 스파르타에 도착해 상대 로마 진영으로 넘어가서야 10만의 원정군과 합류할 수 있었다. 적어도 7~8만의 병력이 남아 있는 단단한 방어를 10만의 병력으로 깨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쿠데타가 성공한 마당에 주변 도시를 공략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단단한 방어를 공략할 수 있다고 해도 10만이 진규가 가진 모든 병력이라서 조금의 피해가 치명적이었다. 진규는 이 10만의 병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게임 포기를 하는 면이 나을 것 같았다. 진규는 일단 쿠데타가 성공한 자신의 로마 문명의 대표자에게 연락을 했다. 일단 왜 쿠데타가 일어났는지 알아야 했고 그곳의 사정을 알아야 혹시라도 있을 반전의 기회를 놓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연락이 오고갈 동안 진규는 높은 구릉에 단단한 진지를 구축하고는 일체 전투 행위를 금지시켰다. 진규는 보고를 받고는 허탈해졌다. 자신이 열심히 한 컨트롤이 오히려 역효과였다니. 원로원의 이름으로 온 서신은 진규를 힘 빠지게 만들었다. 너무 과도한 정책을 많이 겹쳐서 했기 때문에 재정적, 행정적으로 무리가 가는 동시에 각 계층이 그러한 급진적인 개발에 불안함을 느꼈다는 것이 쿠데타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진규는 할 말이 없었다. 엄청나게 노력해서 겨우 그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쿠데타의 불씨는 그때부터 자라고 있었다니. 진규는 할 말이 없었고 곧 게임 오버를 선언했다. 진규의 게임 플레이를 바라보던 다른 사람들, 특히 게임 관계자들은 이런 처음 보는 쿠데다의 형식에 놀랐다. 보통 게이머가 너무 전쟁에만 치우쳐서 문명 개발을 하지 않거나 사회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경우, 또는 너무 심시티적인 게임 운영에만 열을 올려 엄청난 군부의 불만이 표출된 경우, 세금이나 기타 개인적인 것을 위해서 마구 갈취하는 말도 안 되는 경우, 상대의 이간책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았을 경우 등과 비슷한 사례를 제외하고는 쿠데타는 일어나기 힘들었다. 게다가 자신들이 보기에 리틀 스키피오 성진규의 게임은 손에 땀을 쥘만한 외줄타기 컨트롤을 성공시켰고 그 와중에 사회 뿐 아니라 군대의 양성도 신경을 써 전혀 쿠데타의 위험이 없어보였다. 그런데 정작 게임 결과는 쿠데타로 인한 게임 오버라니.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진성은 진규의 게임 플레이에 대한 문제점을 알고 있었다. 진성 자신이 그런 오류에 한참 동안이나 슬럼프 아닌 슬럼프에 빠졌었기 때문이었다. 한 때, 현준과 10번 해서 4번 이상 졌던 경험이 있었는데 그 4번 중 적어도 3번은 쿠데타로 인한 자멸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며 찾아낸 대답이 바로 ‘역사’라는 단어였다. 진성이 판단하기로 문명 온라인 영웅 스키피오는 게임이지만 어느 정도 역사라는 살아 있는 기록에 충실했다. 문명 시뮬레이터를 돌려서 그 결과를 이용할 정도였다. 그런 게임에서 한 사람의 게이머가 모든 흘러가는 역사를 뛰어넘는 정책을 펼칠 때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그런 정책이 실패하면 상관없지만 오히려 보기 좋게 어려운 난관들을 헤치고 성공했을 때 ‘역사’라는 게임의 본성이 그런 완벽한 오버 히스토리적인 완성된 사회에 철퇴를 가하는 것이다. 진성은 진규의 수준으로 볼 때, 그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막상 실제 게임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자 진규가 자신의 판단보다 더 뛰어난 게이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너무 어이없게 져서 그런지 대기실로 들어가려던 진규는 힘이 없었다. 대기실 문 앞에서 너무 힘이 없어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데 누군가 옆에서 부축했다. “수고했다. 현준이만 괴물인 줄 알았는데... 너도 괴물이구나.” 진성이었다. 진규는 진성의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너도 알거다. 현준이가 바로 베타 테스터 알바 하다가 프로 게이머가 된 사실을. 처음에 프로 게이머가 되기 위해 노력했는데... 정말 그 때 게임에 대한 전략과 관계된 모든 것을 마치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는 현준의 모습에 나는 소름이 돋았거든. 지금도 대단하긴 하지만 그 때는 정말 문명 온라인을 위해 태어난 듯한 느낌이었다.” 진성은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얘기를 처음으로 얘기했고 그 대상은 진규였다. 진규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눈만 멀뚱멀뚱 했다. “너도 마찬가지다. 오늘 네가 진 것은 네가 잘 못해서가 아니라 너무 잘 했기 때문이다. 나도 한 때 너처럼 계속 쿠데타나 이상한 걸로 자멸한 적이 있었는데 오늘 네 게임이 그랬다. 정말 수고했다. 진규야, 오늘은 정말 네가 자랑스럽다.” 진규는 확실한 내용은 몰랐지만 이 말도 안 되는 패배를 자신이 존경하는 진성이 형이 인정하고 진성이 형도 그런 경험이 있다고 말하자 온 몸에 힘이 돌아왔다. 게다가 자랑스럽다는 말을 듣자 눈물이 핑 돌았다. “진성이 형....” “나중에 자세하게 얘기하자. 아무튼 수고했다.” 진성은 진규의 어깨를 감싸고는 대기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이, 성진규. 그게 뭐냐? 꼴사납게 쿠데타로 지냐?” 진규가 대기실 안으로 들어오자 현준이 한 말이었다. 다른 사람이 같은 말을 했다면 기분 나쁠 수도 있었겠지만 평소에 너스레를 많이 떠는 현준이었기에 진규는 오히려 더 마음이 편해짐을 느꼈다. 그랬기 때문일까. 진규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묻어나왔다. “이거, 이거.. 하늘같은 선배가 추상같은 위엄으로 말하고 있는데 웃어? 이거 안 되겠네.” “진현준, 그만해라. 진규야, 수고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진 거냐? 내가 보기에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이던데... 문명 온라인 버그는 아닐 테고...” 지켜보고 있던 매니저 서재필은 현준의 너스레를 말리면서 진규에게 물었다. 게임에 정통한 것은 아니지만 매니저 일을 하면서 게임을 모를 수가 없기에 자신도 문명 온라인 아마추어 게임은 즐기는 편이었고 프로 게임은 계속 봐왔기 때문에 진규의 패배에 대한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진규 역시 열심히 하다보니... 너무 열심히 해서라는 말을 쉽게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게 왜 쿠데타로 연결되었는지도 잘 설명할 수가 없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러면서 진규는 슬며시 진성을 쳐다보았다. 현준과 서재필을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도 진성을 바라보았다. “.... 진규가 진 이유는 너무 잘 해서입니다.” “........ 켁켁...” “.......뭐?” “그게 말이 돼? 너무 잘해서 지다니?” 진성은 소란이 가라앉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이윽고 조용해지자 다시 말을 시작했다. “문명 온라인은 역사를 이용한 게임입니다. 실제 역사든 아니면 새로운 역사든, 정교한 문명 시뮬레이터를 통해서 구현된 것입니다. 아마도 이팀장님에게 물어보면 확실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일종의 한계라고 보시면 됩니다.” “한계?” 서재필은 진성의 말에 되물었다. “게임이 설정한 역사의 단계가 있습니다. 그 역사의 단계부터 게이머가 조금씩 발전방향을 수정하고 그로 인해 사회가 변하고.... 그러면서 게임진행이 됩니다. 그런데 만약에 사회 근간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을 어떤 조치와 여러 가지 정책을 같이 사용해서 게임에서 취할 수 있는 다음 단계가 아닌 전혀 다른 사회가 완성이 된다면 그 때는 게임 자체가 그런 완성된 사회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 그게 무슨 소리냐?” 서재필의 이해 안 된다는 말에 진성은 현준을 보며 물었다. “현준아, 너 기억하지? 내가 너한테 한동안 승률이 낮았을 때가 있었잖아?” “승률이 낮아? 아... 그 때? 그렇게 승률이 낮지는 않았는데......” 현준은 분명히 그 때에도 자신에게 6할의 승률이 있었던 진성을 기억해 냈다. “그건 넘어가고. 그 때 내가 왜 졌지?” “그걸 꼭 얘기해야 되냐? 흠흠... 네가 무리하게 하다가 쿠데타나 별 이상한 걸로 다 졌잖아?” 현준의 말을 들은 진성은 매니저 서재필을 보며 말을 이었다. “제가 현준에게 꽤 많이 진 적이 있는데 그 패인이 대부분 쿠데타나 자연재해 등 이상한 현상들이었습니다. 그 때 여러 방법으로 원인을 찾았는데 제가 찾은 것은 바로 문명 온라인이 역사 게임이라는 사실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과 같이 게임의 한계를 게이머의 역량으로 돌파한다면 그 때부터 게임은 게이머의 적이 되는 겁니다.” “적?” “한계를 돌파해? 그럼 진규 역시?” “네, 저도 진규가 그렇게 잘 해 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사실 이런 얘기도 그래서 사전에 진규에게 하지 않았던 것이고요. 그런데 오늘 보니까 정말 굉장하던데요.” 사람들은 진규를 다시 보았고 진규는 그런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홍당무가 되고 말았다. 무아지경에 빠져 게임 컨트롤을 했었지만 진규의 게임 운영임에는 틀림없었다. 진규는 진성의 말을 듣고서야 확실치는 않지만 대강 자신이 패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조금은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진규였다. 하지만 일본 세가 소프트와의 첫 게임에서 패한 것은 되돌릴 수 없는 결과였다. “진규야, 너무 걱정마라. 내가 하는 경기 잘 봐라. 아마도 배울 점이 없지는 않을 테니까.” 친구 만나러 가는 듯한 담담한 목소리에 아주 당당한 모습으로 대기실을 나가던 진성은 진규에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의 잘하라는 소리를 들은 진성은 자신감이 배어 나오는 미소를 지은 후에 대기실을 나와 대회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진성의 상대는 얼음공작 유스케였다. 일본 신세대 중에서도 아주 탁월한 꽃미남인데다가 평소 말을 절제하고 웃음을 잘 보이지 않는 유스케에게 팬들은 얼음공작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확실히 진성이 보기에도 무대에서 만난 유스케는 아주 잘 생겼다. 정말 조각 같은 외모였다. 하지만 분위기랄까, 컨디션은 오히려 진성이 훨씬 나아 보였다. 누구와 만난다고 해도 주눅 들지 않을 것 같은 마치 산 같은 기세가 진성에게서 나와 유스케를 압박하는 꼴이었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난 뒤에 각각 게임기에 탑승했다. 이제 자소 소프트의 게이머 스키피오와 세가 소프트의 게이머 얼음공작이 벌이는 두 번째 게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유스케의 문명은 그리스였다. 보통 연예인 뺨치게 잘 생긴 것 뿐 아니라 게임 실력에서도 유스케는 전혀 빠지지 않았다. 게다가 세가 소프트에서 유스케의 역할은 그야말로 자소 소프트에서 스키피오, 진성의 역할과 비슷했다. 한마디로 ‘믿을 맨’이었던 것이다. 게임 관계자들이 놀란 점은 세가 소프트에서 발표한 선수 오더였다. 보통 상대가 강하면 자신의 약한 것을 상대에 내주고 자신의 강한 것으로 상대해야하는데 세가 소프트는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유스케를 한국 최강인 게이머 스키피오와 정면 대결을 시킨 것이다. 팬들은 아주 좋아했지만 승산은 오히려 줄어들었다고 봐야했다. 3개국 리그를 통틀어 기권패를 제외하고 아직 무패인 선수는 스키피오, 진성 밖에 없었다. 유스케의 그리스는 한신, 현준의 그리스와는 달랐다. 공격과 수비에 능란해서 마치 잔잔한 물과 같은 부드러움과 엄청난 파도의 공격력을 동시에 겸비한 대표적인 게이머로 알려진 한신과는 달리 유스케의 그리스는 공격 일변도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 세세한 컨트롤에도 일가견이 있었기 때문에 전체적인 게임 운영은 공격이 주를 이루었지만 내부 컨트롤은 아주 훌륭해서 안정적으로 보이기까지 만드는 재능의 소유자가 유스케였다. 진성에게 유스케와의 경기는 메이저 리그 첫 경기였다. 진성은 확실하게 보여줄 생각이었다. 진규가 아주 잘 했지만 게임 속에서 도사리고 있는 함정에 발목을 잡혀 지게 된 이 마당에 진성 자신이 뭔가 확실한 것을 보여줘야 된다고 생각했다. 버그, 사기 플레이로까지 불릴 수 있는 시민군 양성과 그로 인한 시너지 효과를 최대한 다른 사람들, 특히 일본과 중국의 게임 관계자들에게 화끈하게 보여주리라 결심했다. 어쩌면 상대 게이머인 유스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상대 역시 프로라는 생각을 하고는 마음을 다잡았다. 진성은 초반에 주변의 정찰을 보내고는 곧바로 군대강화법은 생략한 채 시민군 양성에 들어갔다. 극초반에 시민군 양성을 하기 힘든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문명의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고는 그 위험한 외줄타기는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진성은 상식을 무시한 듯, 군대강화법은 무시하고 바로 시민군 양성에 들어갔다. 진성의 끊임없이 나오는 컨트롤은 눈을 떼지 못하고 지켜보고 있던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탄성을 지르게 만들었다. 화면을 통해 게임을 보고 있던 진규는 걱정스런 마음이 들었다. 지금 진성이 하고 있는 것은 자신보다 더 엄청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게임이 게이머의 적이 된다는 말, 그 말의 의미를 안 지금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면에 있어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진성이었기에 뭔가 다른 수가 있으리라 여기고는 마음을 편히 하고 경기에 집중했다. 진성은 그 동안의 수많은 연습으로 인해 문명 온라인, 게임의 한계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진성이 하는 것은 확실하게 오버 히스토리적인 사회를 인위적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진성은 그런 전략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 변칙적으로 운용했다. 그 게임의 한계를 완전히 넘어가지도 않고 그 경계에서 왔다 갔다 하는 위험한 줄다리기를 했던 것이다. 시민군 양성을 위해서 중산층에 힘을 실었다가도 적당한 타이밍에 권력층인 귀족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노력했다. 한쪽으로 힘이 쏠리지 않게 만들면서 군병력 양성도 권력층인 귀족에게 힘을 실어줄 때만 만들도록 하는 등 여러 사회 정책에서 두 계층에 대한 배려를 포함시켰다. 그런 방법은 컨트롤에 엄청난 압박을 줬지만 진성은 마치 같은 조건, 같은 문명에서 엄청난 연습을 한 것과 마찬가지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상하면서 했기에 보는 사람들은 쉽게 컨트롤을 하고 있는 것으로도 보였다. 군대강화법을 하지 않은 점도 진성의 컨트롤에 조금의 여유를 주었다. 진성은 주변 국가에 대해서만 정보를 수집했을 뿐 상대 게이머의 문명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도 않았다. 적당하게 상호 불가침 정도의 조약만 체결한 진성은 모든 역량을 시민군 양성에 쏟아 부었다. 유스케는 상대 스키피오의 명성을 알았다. 또한 스키피오의 엄청난 게임 실력도 알고 있었다. 평소 자신의 스타일도 공격적이었지만 상대가 워낙 강했기에 중반 이후로 가면 승산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이제까지의 경기 결과를 분석해 본 결과 스키피오와 같은 군대 병력이나, 같은 조건으로는 거의 이기기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병력 수가 많아지면 보통 게이머들은 대규모 병력 컨트롤에 한계를 드러내지만 스키피오는 그런 면도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약점이 거의 없지만 굳이 찾는다면 초반 밖에 없었다. 중, 후반으로 갈수록 대규모 병력 이동이 많은데 그런 것을 제대로 해 낼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고 아쉽게도 유스케 자신은 그런 쪽에는 탁월한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다. 유스케는 보통 상대의 허점을 파고드는 것을 장기로 했다. 상대의 틈을 파고 들 때 그 과감함과 대담함이 유스케의 장점이었는데 스키피오에게 그런 점은 기대하기 힘들었고 혹시나 그런 점을 발견한다고 해도 그 네임밸류 때문에 함정인지, 아닌지 판단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런 면을 고려해 볼 때 유스케는 초반 승부가 가장 적합하리라 생각했다. 유스케의 플레이는 어떤 면에서 차이나 모터스의 여포 이주방과 비슷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유스케의 플레이는 세심하고 정교한 컨트롤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막무가내 공격이 아니라 상황을 제대로 판단해서 상대의 약점을 치고 들어가는 그런 공격적인 게임 운영이어서 이주방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라 할 수 있었다. 비록 첫 번째 게임에서 자소 소프트의 선봉, 리틀 스키피오 성진규의 실수로 인한 게임 패배로 세가 소프트의 사기가 올랐지만 게이머 스키피오라는 이름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유스케는 신중하면서도 정교한 게임 운영을 했다. 정찰을 통해 상대의 상태를 알게 된 유스케는 당황했다. 게이머 스키피오의 게임 운영이 조금 전 쿠데타로 게임을 패한 리틀 스키피오와 거의 흡사했다. 조금 덜 요란해 보였지만 그 기본은 같았다. 사회 계층의 인위적인 조절이라니. 유스케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게임을 하기 전에 차이나 모터스와 자소 소프트 간의 게임을 분석했을 때, 리틀 스키피오의 어려움을 극복했을 때의 그 강력한 로마 군대에 대해서 설명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중국이 개개인의 전투력이 낮다고 해도 그렇게 쉽게 상대를 유린할 수 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유스케를 비롯한 세가 소프트의 사람들이 게임 화면을 통해 본 것은 사실이었다. 혹시 리틀 스키피오의 그 이상한 전략이 설명할 수 없이 강한 로마 군대의 원인이 아닐까 했지만 말이 되지 않았다. 아니, 그런 전략 자체가 어떤 효과가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경기를 시작했는데 리틀 스키피오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똑같이 그 이상한 전략 같지 않은 전략을 사용하다가 쿠데타로 패배하고 말았다. 유스케는 뭔가 있음을 알았다. 계속 그 이상한 전략을 고집할 이유는 없었는데 계속 시도한다면 노리는 뭔가가 있음이 분명했다. 그런 때에 스키피오의 게임 운영 역시 리틀 스키피오와 그다지 다르지 않고 그 이상한 사회 구조를 바꾸려는 전략을 사용하자 유스케의 마음에 꺼림칙한 뭔가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유스케는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고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더욱 빨리 컨트롤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리틀 스키피오의 그 첫 게임에서 나왔던 그 막강한 로마 군대가 또 등장한다면 자신에게 승리의 가능성은 없기 때문에 그 전에 승부를 봐야했다. 유스케는 불안한 마음을 추스르며 군대를 준비했다. 시민군 양성이 어느 정도 끝나가자 진성은 이제야 제대로 된 정찰을 시작했다. 주변국 뿐 아니라 그 다음에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상대 문명에 대한 자세한 정찰을 지시하고는 진성은 군대강화법을 시작했다. 진성이 시작한 군대강화법은 기존의 방법과 조금 달랐다. 기본은 비슷했지만 시민군 양성이 완료된 시점이어서 기존의 것과는 달라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수정된 군대강화법의 핵심은 소지주 정예 보병 지휘관에 대한 교육이었다. 백부장, 천부장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이어서 그 규모가 상당했지만 한꺼번에 모으는 게 아니라 군단장의 교육을 통해서 일선 백부장과 천부장에게까지 그 효과가 전달되도록 만들었다. 진성은 이 방법이 시민군 양성과 맞물려서 그 효과가 극대화 되리라고 확신했다. 진성은 시민군 양성이 완성되기 전까지 정말 필요한 병력 외에는 거의 양성하지 않았다. 시민군 양성이 끝난 후에 군대를 만드는 게 훨씬 낫다는 판단이었다. 그래서 진성은 빨리 군대 양성에 들어갈 필요가 있었다. 진성은 군대 양성과 군대강화법을 동시에 실행했고 혹시나 모를 게임의 한계점 돌파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상대에게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게임 자체가 적으로 변해 버린다면 승산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유스케는 병력을 모았다. 지금 상대를 제대로 공략하지 못하면 기회는 다시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야말로 건곤일척의 승부를 유스케는 생각했다. 40만의 군대를 모은 유스케는 동맹국을 통해 원정길에 나섰다. 어차피 전장은 상대 스키피오의 로마 국경선 부근이 되리라 예상했다. 유스케는 40만의 부대를 둘로 나누어 처음에 20만을 먼저 보내고 나중에 원군으로 시간차를 둬서 합류하도록 만들었다. 상대 진영의 정찰로 그리 많지 않은 군 병력이 있음을 안 유스케는 20만을 보내 상대와 전투를 벌이도록 만들다가 그 옆으로 20만의 병력이 휘돌아서 스키피오의 병력을 전멸시킨다는 구상이었다. 그래서 특별히 20만의 군대는 은밀하게 이동할 필요가 있었다. 보통 원정을 가더라도 수비할 병력은 남겨 놓는데 반해 유스케는 3, 4만 정도의 군 병력만 남겨놓고는 대부분의 군대를 이끌고 원정을 떠났다. 유스케 자신은 선발부대를 지휘했고 일정한 거리 간격으로 나머지 20만의 부대가 따라오고 있었다. 20만의 군대가 국경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스키피오는 잘 훈련된 로마 정예 시민군 13만을 국경으로 보냈다. 물론 스키피오 자신도 같이 갔다. 이제까지의 위험한 컨트롤의 위기는 지나갔다. 로마는 새롭게 안정되었다. 스키피오는 이제 내부 문제보다 외부의 적에 신경 쓸 단계라 생각했다. 13만의 정예 부대는 행군을 위한 종대대열로 진군했다. 국경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까지 확실한 도로가 건설되어 있었기 때문에 행군은 어렵지 않았다. 스키피오는 전혀 빨리 가야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6개 군단과 스키피오 자신이 만든 기병 군단병력이 오와 열을 맞추어 엄청난 대열로 이동했다. 국경에서 가까운 평원으로 들어서기 전에 스키피오는 이미 상대 게이머의 20만 부대가 고지에 진을 치고 있음을 알았다. 전장으로 선택된 곳은 중앙의 거대한 평원과 그 주변을 둘러싼 숲, 숲과 연결된 평평한 고원이었다. 스키피오는 상대의 20만 군대가 전쟁이 시작되면 밑으로 내려오며 공격할 것으로 예상했다. 스키피오는 평원의 가운데가 아니라 고지 반대쪽 숲 근처에서 진지를 구축했다. 2만의 군단 병력에는 기본적으로 2천의 기병이 존재했다. 그 기병은 군단병력에 속했다. 스키피오가 만든 1만의 기병과는 다른 병력이었다. 역사 속의 로마 군단은 기병보다는 월등히 보병을 중요시했다. 로마 시민이 기병일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동맹국가로부터 기병을 통째로 빌리곤 했다. 문명 온라인 속의 로마 기병은 동맹국 기병이 아니라 로마 시민으로 이루어진 기병이었다. 그 숫자는 당연히 로마 시민과 관계가 있었다. 중산층이 늘어나면서 기병도 증가시킬 수 있었지만 스키피오는 그 대부분을 보병으로 돌렸다. 막강한 보병이 승리의 열쇠라고 스키피오는 확실하게 믿었다. 로마의 3개 군단이 먼저 평원의 가운데로 진군했다. 그 다음으로 5천의 기병이 움직였고 이어서 3개의 군단이 움직였다. 마지막으로 스키피오가 5천의 기병 독립부대를 이끌고 평원의 가운데로 이동했다. 스키피오의 정예 소지주 정예 군대는 기민했다. 이동을 위한 종대대형에서 순식간에 전투대형으로 바뀌었다. 각 군단은 많이 떨어지지 않았는데 그 속에 포함된 기병으로 서로 구분이 되었다. 스키피오의 군대는 사기가 엄청났다. 이제까지의 훈련에 자신감이 높았고 원정도 아니었기에 피곤함도 거의 없었다. 게다가 로마 시민으로 편입된 군인들이 많아서 전체적인 사기가 급상승했다. 스키피오는 완전히 전투대형을 갖춘 뒤에 약간 무리일 수도 있는 고지 공략을 명령했다. 최강의 군대라 자부하는 정예 로마 시민군의 위력을 확실하게 보이기 위해서였다. 스키피오는 선봉으로 군단 하나를 정하고 그 다음으로 마치 쐐기처럼 군단의 배치를 했다. 그리고 군단장에게는 어느 정도의 자유 지휘권을 보장했다. 곧 스키피오의 공격 명령이 전 부대에 하달되자 스키피오의 12만 부대는 고지를 향해 전진했다. 일사분란하게 방패와 투창, 칼을 든 정예보병의 이동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평원에 남은 1만의 기병을 제외한 군단 소속 기병들은 모두 말에서 내려 보병과 같은 무장으로 군단에 편입되어 고지 공략에 나섰다. 한 방향이 아닌 세 방향을 동시에 공략하는 로마 정예 군대, 스키피오는 그 사이에서 전체적인 지휘명령을 내리고 보고도 받기도 했다. 유스케는 놀랐다. 20만의 병력으로 고지에 진을 치면 쉽게 공격해 오지 못하리라 생각했었는데 나타난 로마 군대는 12만의 병력으로 20만의 유리한 위치에 있는 자신의 그리스 정예부대를 공격하기 위해 올라오고 있었다. 정신 나간 공격임에 분명하지만 상대는 스키피오였다. 아직 공식전에서 패한 적이 없는 게이머, 스키피오였다. 유스케는 방어전 준비를 했다. 20만이면 12만의 아래에서 공격해 오는 것을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유스케는 아직 더 시간이 있어야 도착할 나머지 20만의 군대를 기다리며 일단 방어전을 했다가 한꺼번에 상대 로마군을 쓸어버릴 작정이었다. 군대의 진지 구축에 있어서는 아무도 로마를 따라갈 문명이 없었다. 축성술이라면 중국과 이집트가 그 이름을 나란히 하지만 진지 구축에 있어서는 로마보다 한참 아래였다. 그리스 역시 로마와 비교할 수 없었다. 20만의 부대가 진지를 구축했지만 그리 단단하지 않고 단순한 캠프와 비슷했다. 유스케는 진지 안에서의 방어가 아니라 고지 전체 방어를 결정했다. 진지 안에서 방어했다가는 오히려 화공과 같은 공격에 당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지 전체의 방어는 20만의 병력을 흩트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유스케 역시 그런 점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위에서 상황을 보고 잘 컨트롤 한다면 문제없으리라 생각했다. 한쪽에 약한 부분이 생기면 그 부근에서 도와주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드디어 20만의 고지를 선점한 유스케의 그리스 군대와 12만의 로마 정예 시민군이 충돌을 일으켰다. 엄청난 화살 공격과 여러 지형, 지물을 이용한 방해에 로마 정예 시민군은 초반에 고전했지만 쐐기의 끝부분이 그리스 군대와 조우하자마자 상황은 반전됐다. 로마 정예 시민군은 상대 그리스의 군대가 열세를 보완하기 위해 서로 모이려는 시간을 주지 않고 바로 넓게 퍼진 그리스의 방어선을 뚫어버렸다. 그 시간은 순식간이었다. 그 한번의 공격으로 유스케 뿐 아니라 밖에서 보고 있던 사람들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특히 백부장, 천부장이 지휘하는 군단 소속 소규모 부대들의 선전에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전장이 협소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공격과 수비를 하던 두 부대 모두 지휘 체계에 문제가 생겼다. 그런데 공격을 하던 로마 정예 시민군의 경우 전체적으로는 지휘 체계가 사라졌어도 백부장과 천부장을 중심으로 그리스의 두텁지 못한 종심 방어를 단숨에 뚫어버리는 괴력을 발휘했다. 스키피오의 수정된 군대강화법이 그 위력을 드러낸 것이다. 일단 한번 뚫린 방어선은 쉽게 복구되지 못했다. 쐐기의 날카로운 앞부분이 뚫고 들어가자 그 뒤로 엄청난 기세의 군대가 밀고 올라왔다. 기세의 차이가 전투력을 차이를 더욱 크게 만들었다. 그리스 방어선의 내부로 완전히 들어간 1개 군단은 그리스 군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리스 진지를 불로 태우기 시작했다. 특히 군량이 쌓인 보급물자가 있는 곳은 모조리 태워버렸다. 순식간에 연기로 고지는 가득 찼고 그 혼란된 순간을 통해 다른 두 곳의 그리스 방어선도 뚫려 버렸다. 그 때부터는 그야말로 혼전이었다. 전술이 없는 각 소규모 부대간의 전력으로 결정되는 피비린내 진동하는 전장이었다. 유스케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 20만의 부대를 12만이 이렇게 유린하다니. 유스케는 처음에 뚫고 올라온 그 로마 정예군의 전투력을 보고는 역시 리틀 스키피오와 스키피오의 그 이상한 전략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전투력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의 전투였다. 유스케는 무너져 내리는 방어선을 보면서 후퇴 명령을 내렸다. 어쩔 수 없었다. 어떻게 보면 넓은 고지 전체를 방어하려다 종심을 얇게 만든 자신의 실수인지도 모른다고 자책한 유스케는 빨리 전장을 벗어났다. 오래지 않아 도착할 20만의 후군과 빨리 만나야했다. 유스케의 후퇴 명령으로 그리스 군은 고지를 내려왔다. 진지로 돌아가 자신의 보급품을 가져갈 엄두는 내지도 못한 채 몸만 전장을 빠져 나온 군인이 대부분이었다. 악귀 같은 로마 정예 보병을 피해서 도망쳐 내려온 그리스 패잔병들은 다시 한번 지옥을 봐야했다. 아래에는 1만의 로마 기병이 도망가는 그리스 보병들을 그야말로 학살하고 있었던 것이다. 밀집되지 못해 도망가는 보병에게 기병은 그야말로 하늘의 저주였다.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었다. 운이 좋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어느 정도 전장이 정리되자 스키피오는 자신의 정예부대를 정비했다. 1만의 기병은 거의 손실이 없었고 12만의 보병 중에서 1만의 손실이 생겼다. 스키피오는 엄청난 전과에 기분이 좋았지만 곧 1만의 손실에 대한 적절한 보상과 정책을 챙겼다. 고지의 그리스 진지에 있던 모든 물자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아 불태워버린 스키피오는 숲 앞쪽에 마련했던 자신의 진지로 되돌아갔다. 스키피오의 로마 군대는 그 엄청난 승리에 환호성과 함께 고지에서 내려와 엄정한 군기를 드러내며 진지로 들어갔다. 유스케는 20만의 후군과 만났다. 20만의 선발대에서 빠져나온 병력은 3만이었다. 유리한 고지에서 20만의 그리스 정예병이 고지로 올라오며 공격한 로마 군대 12만을 맞이해 방어전을 펼친 결과가 보급물자와 17만 정예군의 희생이라니. 유스케는 믿을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상대 게이머 스키피오에게 묻고 싶었다. 유스케는 3만의 병력을 격리시켜야했다. 후군으로 온 20만 병력의 사기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여파는 이미 퍼져 유스케의 모든 군대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특히 살아나온 선발대 군인들의 로마 군인에 대한 묘사는 공포심마저 조장했다. 악귀 같다느니, 악마라느니, 절대 사람이 아니라는 말은 점점 퍼져 유스케의 군대가 술렁이게 만들었다. 유스케는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유스케는 이런 사기로는 전투를 제대로 해 보기도 전에 무너질 것으로 판단했다. 유스케는 두 가지를 동시에 실행했다. 하나는 기병 위주의 독립부대를 운용해서 상대 스키피오에 대한 기습을 퍼부어 어느 정도의 전과만 생긴다면 그것을 부풀려 할 수 있다는 마음을 불어넣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다른 하나는 잔인하지만 3만의 패잔병 가운데 처음에 방어선이 뚫린 부대 출신 2500여 명에게 그 당시 최고의 처벌인 10명당 1명의 사형 결정이었다. 역사적으로는 로마 군대에서 사용했던 방법이기도 했다. 유스케는 당근으로 기병 기습부대를 이용하고 채찍으로 2500여명의 패잔병 중 250명을 무작위로 사형시켜 버렸다. 유스케의 그런 단호하면서도 확실한 처벌은 군기에 영향을 미쳤다. 도망치는 것에 대한 철저한 처벌과 할 수 있다는 의지가 생기자 군대의 사기는 급속도로 회복되었다. 뒤늦게 20만의 부대에 대한 보고를 받은 스키피오 진성은 유스케의 속마음을 손바닥 보듯 알고 있었다. 자신이 유스케의 상태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이었다. 확실한 결과를 보여주기 위해서 스키피오는 진지 방어를 의도적으로 소홀히 해서 상대 기병부대에게 피해를 입도록 어느 정도는 방치했다. 그런 작은 손해가 막대한 이익이 된다는 것을 스키피오는 알았다. 스키피오의 예상대로 오래지 않아 스키피오의 로마 군대가 진지를 치고 있던 그 평원으로 20만의 대부대가 서서히 들어왔다. 스키피오 역시 진지에서 군대를 이동시켜 적당한 곳으로 이동해서 전투 대형을 유지했다. 처음과는 달리 양익에 기병 5천씩 두고 군단소속 기병은 일단 뒤로 물린 상태였다. 유스케의 20만 부대 역시 스키피오의 부대 맞은편에 전투 진형을 만들어서는 엄정한 군기를 보이며 대열을 정비했다. 말의 투레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전장은 고요했다. 약간의 조용한 침묵 뒤에 양 지휘관의 공격 명령 소리에 군대는 보이지 않는 진동을 일으키며 서서히, 하지만 점점 빠르게 부딪쳐가기 시작했다. 힘 대 힘의 대결이었다. 스키피오는 전술을 배제했다. 스키피오, 진성이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바로 로마군의 진정한 힘이었다. 일본과 중국의 관계자들에게 전하는 일종의 메시지였다. 20만의 그리스 정예 보병의 사기 역시 로마에 뒤지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는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파도처럼 앞으로 전진하는 로마의 단단한 밀집대형이면서 자유로운 백부장과 천부장이 지휘하는 군대조직은 단단해 보이는 그리스의 대형을 순식간에 무너뜨렸다. 압도적인 힘이었다. 정면 대결하는 전쟁에서 이런 장면의 거의 보기 힘들었다. 보통 정면 대결하는 보병들 간의 확실한 우열이 아니라 측면이나 우회해서 배후를 파고드는 기병이나 경장보병, 중장보병의 유린으로 대열이 혼란스러워져 무너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야말로 정면대결에서 확실하게 밀리는 그리스였다. 유스케는 전투를 보다가 눈을 감고 말았다. 이것은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는 게임이었다. 유스케는 스키피오의 그 이상한 전략이 이런 결과를 만들었다고 확신했다. 유스케는 졌다는 결과보다 왜 졌는지에 대한 이해가 더 중요했다. 유스케의 머리는 그 겉 뿐 아니라 속도 헝클어져 있었다. 20만의 그리스 군대는 평원의 끝까지 밀리다가 흩어져 버렸다. 로마 군대의 양익에 있던 기병은 흩어진 그리스 보병을 손쉽게 잡는 역할만 했을 뿐 전투는 로마 정예 보병이 끝낸 셈이었다. 지켜보던 많은 사람들은 이 광경에 넋을 잃었다. 이제까지의 본 경기 중에 가장 강력한 로마군의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게임 관계자들은 자소 소프트의 리틀 스키피오와 스키피오가 쓰는 그 이상한 전략에 뭔가 이유가 있다는 눈치를 챘다. 게임 오버를 선언한 유스케는 땀이 가득한 모습으로 게임기에서 나왔고 반대쪽에서 나온 진성과 무대 가운데에서 만나서 악수하고 관객들에게 인사했다. 관객들의 환호에 손을 흔든 후, 뒤로 돌아 선수 대기실로 돌아갔다. “.... 그 이상한 전략과 그렇게 강한 군대와 관계가 있습니까?” “.......” “정말 관계가 있는 것 아닙니까?” “.... 저는..... 일본...어를... 할.. 줄 모릅니다.” 자신에게 진지하게 뭐라고 물어보는 유스케를 향해 진성은 매니저 서재필에게 배운 말을 어렵게 했다. 서재필은 일본어 할 줄 모른다는 말만 가르쳐줬다. “...아... 실례했습니다.” 자신의 목소리가 컸다는 것을 안 유스케는 고개를 숙여 사과했고 진성 역시 웃으며 고개를 같이 숙였다. 유스케는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대기실로 갔다. “진성이 형, 너무 대단해요. 나... 너무 감동했어요!” 진규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너무도 강한 로마군의 진정한 모습에 로마 문명을 플레이하는 게이머로서 감동한 모양이었다. “.... 너의 플레이를 보면 소름이 돋는다. 이제 좀 그만 약해질 때도 됐는데...... 이 괴물아!” 현준이었다. 저런 플레이를 하는 게이머와 매일 박빙의 연습 게임을 하는 자신 역시도 녹녹치 않는 게이머라는 사실을 항상 잊고 사는 현준이었다. 진성은 그런 현준의 말에 그냥 웃었다. “내가 괴물이면 너도 당연히 괴물이다. 그렇지, 진규야?” 진성은 현준의 괴물이라는 말에 담담하게 말한 뒤에 진규를 보며 물었다. “네, 현준이 형도 충분히 괴물이에요. 괴물!” 진규는 진성의 말에 바로 받았다. 진규는 진성이 했던 말 중에 현준 뿐 아니라 진규 자신도 그 괴물에 속한다는 말을 기억했다. 진규의 말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한번 지고, 한번 이긴 상태에서 게이머 한신, 현준이 출전해서 어렵지 않게 상대인 신기(神伎) 히카루를 이겼다. 바로 전 경기처럼 엄청난 장면은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철옹성처럼 단단한 게이머 한신의 플레이를 다시 확인할 수 있는 경기였다. 게임을 보러 온 사람들은 자리를 떠나며 두 번째 게임이었던 게이머 스키피오의 엄청난 플레이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말하곤 했다. 자소 소프트로서는 일본에서의 일정을 마친 셈이어서 홀가분했다. 다음으로 중국에서의 리그 게임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일주일 정도의 여유가 있었기에 마음을 놓을 수가 있었다. 진성 일행은 게임 후에 지친 몸을 이끌고 숙소인 호텔로 와서 그날 저녁은 푹 쉬었다. 다음 날, 아침부터 매니저 서재필의 재촉에 밀려 자소 소프트 프로팀 멤버들은 모두 한국으로 돌아갈 채비를 갖추었다. 이미 모든 항공권이나 필요한 것들은 매니저 서재필이 다 구비한 상태여서 개인적인 것들만 챙긴 후에 호텔에서 시간 맞춰 공항으로 가면 아무 문제가 없었다. 자소 소프트 일행은 모두 다 짐을 다 들고 호텔 로비로 와서 각 호실의 열쇠를 반납하고는 체크아웃을 완료했다. 다시 한번 각자의 여권이나 기타 꼭 필요한 것들을 확인했다. 모두 이상이 없자 서재필을 선두로 호텔을 빠져 나가 대기시켜둔 벤으로 향했다. “끼이익!” 호텔을 빠져나가는 자소 소프트의 일행 앞에 고급 승용차가 빠르게 오다가 소리를 내며 정지했다. 갑작스런 대형 고급 승용차의 등장에 일행은 일제히 눈을 돌려서 차를 바라보았다. “아, 벤츠잖아. S 클래스인가? 이야... 직접 본 것은 처음인데 정말 크긴 크구나. 이런 것은 억대가 넘어가겠지? 어떤 놈이 이런 것을 타고 다닐까?” 현준은 차를 부러운 듯이 바라보며 투덜거렸다. 차를 유난히 좋아하는 현준은 차를 바꾸고 싶어도 연봉이나 다른 수입이 바로 자신의 어머니에게로 가기 때문에 엄두도 못 냈다. 갖고 싶은 스포츠카가 있었지만 어떻게 살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이제는 포기한 상태였다.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이런 고급 승용차를 보자 내심 꼬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일본에서 이런 고급차를 타고 있을 능력이 있는 사람과 친분이 있을 만한 사람이 진성 일행 중에는 없었기에 다른 볼일이 있나보다 하고는 대기하고 있는 벤으로 갔다. “강진성씨!” 벤츠에서 내린 젊은 사람이 진성의 이름을 불렀다. 한국어였다. 그에 반응해 진성 일행은 동시에 다 고개를 돌려서 목소리가 들린 곳을 보았다. 그곳에는 아주 맵시 있게 세미정장을 입은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하지만 일행이 전혀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일행은 이제 눈을 돌려 진성을 바라보았다. “... 저도 처음 보는 사람인데요..” 사람들의 시선에 진성은 대답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런 사람을 자신이 알 리가 없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 뒤에 벤츠에서 내리는 사람은 확실히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강진성, 오랜만이군. 하하하하....” 이주방이었다. 가슴 아래 부분에 손을 대고 있는 이주방은 억지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진성은 무슨 말인지는 잘 몰랐지만 눈빛은 금방 싸늘해졌다. 일행도 알고 있는 이주방의 등장에 놀랐다. 그 때 매니저 서재필이 나섰다. 서재필은 이준과 함께 일이 벌어진 다음 날, 차이나 모터스 프로팀에 찾아가서 원만한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 서로 좋은 일이 아니었기에 그 음식점에 대해서 어느 정도 보상을 해주고 양쪽에서 조금씩 물러서는 것으로 그 일은 없던 것을 하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이렇게 나타나다니. 서재필은 일단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로 했다. “무슨 일입니까?” “아, 당신이군. 매니저라고 했지. 우리 사이에 묵은 일이 있는 걸 잊었나보지?” 나이도 어린 이주방은 매니저 서재필에게 반말로 일관했지만 서재필은 표정하나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웃으며 이주방을 보았다. “그 때의 일은 다 없던 것으로 하기로 했잖습니까?” “그랬던가?” “음..... 쓰레기군.” 서재필은 여전히 웃으면서 말했다. 내용만 다르다면 친한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릴 지도 모를 어투였다. “뭐?” 이주방은 자신에게 존대하다가 갑자기 욕을 하는 서재필을 보고는 화가 났다. 누구도 자신에게 욕을 하지 않았는데 아무것도 아닌 프로 게임팀의 매니저가 자신에게 욕을 하다니. 이주방은 참을 수가 없었다. “한 번 더 들려줄까? 이 쓰레기야! 왜 기분 나빠? 이 쓰레기야! 쓰레기보고 쓰레기라고 하는데 뭐가 기분 나빠? 이 쓰레기야! 너는 쓰레기라고 부르는 것도 아까워!” 한번 터진 서재필은 이 싸가지 없는 어린 녀석에게 쓰레기라고 부르는 것도 아까웠다. “뭐? 이... 이.....” 막 얼굴이 붉어지며 발작하려는 이주방을 말린 것은 먼저 벤츠에서 내린 20대 후반의 남자였다. 이번에 그 남자는 유창한 중국어로 말했다. “너무 흥분하셨군요. 조금 가라앉히시지요.” 이상하게도 깔끔하게 생긴 그 남자의 말에 이주방은 아무런 말도 없이 고양이 앞의 쥐 마냥 조용해졌다. 서재필은 그런 이주방을 보며 신기해했다. 서재필은 처음부터 화가 나지는 않았다. 단지 어린놈에게 세상이 간단하지만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 어쩐 일입니까?” 서재필은 찾아온 이유를 눈앞의 절제된 남자에게 한국어로 물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이 일의 주재자는 세미 정장의 남자였다. 게다가 다른 일행들도 알 필요가 있을 것 같아 한국어로 물었다. 남자는 한국어로 대답했다. 아주 자연스러웠다. “아, 그렇군요. 갑자기 찾아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군요. 이거 실례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저기..... 강진성씨를 제가 모시고 가야할 것 같아서요.” “네?” 아주 정중하게 진성이를 모시고 가야한다는 상대의 말에 서재필 뿐 아니라 일행은 모두 어이가 없었다. 이제 곧 출국해야하는 사람을 이렇게 말 한마디로 데려갈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게다가 같이 온 사람이 이주방이라니.. 서재필은 대강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네.” “야쿠자입니까?”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서재필은 심각하게 물었다. “네? 야쿠자? 하하하하... 아, 오해하셨습니다. 저는 강진성씨에게 무슨 원한이나 그런 것은 전혀 없습니다. 저는 단지 심부름으로 왔습니다. 강진성씨께서 가 보시면 알 겁니다.” 진지한 서재필의 물음에 사내는 배를 잡고는 웃어댔다. 사내 혼자 왔어도 모르는 사람에게 진성을 동행시켜 보낼 수가 없었던 서재필로서는 이주방까지 같이 온 이상 당연히 불가였다. “아주 당황스럽네요. 이렇게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데려가겠다니. 아주 웃기는군요. 저희는 공항으로 가야합니다.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이만.” 서재필은 사람들에게 눈짓했다. “아, 잠깐만요. 진성씨에게 이것을 좀 전해 주시겠습니까?” 사내는 서재필에게 급히 말하며 품안에서 무슨 봉투를 꺼내들었다. 서재필은 사내의 얼굴에 단 하나의 변화도 생기지 않자 봉투를 받았다. 서재필은 봉투 안을 보려다가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네, 보셔도 됩니다.” 서재필은 봉투 안에서 카드 같은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꺼내어 읽었다. “.... 강진성씨를 초대합니다..... 유맹... 요시히로 데카츠?” “네, 그대로 입니다. 진성씨에게 꼭 전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서재필은 카드의 앞 뒤를 다 살펴보았지만 단 두 줄밖에 없었다. 이상하다 생각하며 서재필은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는 진성에게로 다가갔다. “자 받아라. 일단 읽어봐.” 진성은 카드를 받아들고는 읽어보았다. “아... 유맹? 요시히로 데카츠?” 진성은 유맹이라는 말에 놀랐다. 유맹이라니. 검버섯 노인 왕현추에게 일본에도 유맹 회원이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느닷없이 나타날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런데 왜 이주방과 같이 왔을까 의문이 생겼다. 진성은 고민하다가 유맹이라는 말에 자신이 직접 가보기로 결심했다. “매니저 형, 아무래도 저는 저 사람을 따라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평소 현준에게 말고는 농담을 전혀 하지 않았던 진성이기에 이런 중요한 순간에 허튼 소리를 하지는 않을 것을 서재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허락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중요한 일이냐? 지금 공항으로 출발해야 하는데도?” “죄송합니다. 하지만 꼭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게다가 저기 저 녀석도 마음에 걸리고요.” 진성은 눈짓으로 이주방을 가리켰다. 서재필 역시 이주방이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나오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뭔가 있다는 얘기인데 이런 것을 어물쩡 넘어가면 나중에 크게 돌아오는 법이다. 서재필 역시 고민했다. 고민은 길었지만 결정은 빨랐다. “그래, 좋다. 대신 나도 같이 간다.” “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서재필의 말에 진성이 되물었다. “이준씨가 있으니까, 게다가 저 사람들이 바보냐? 공항 가서 출국해서 한국으로 돌아가면 되는데.. 그것도 못할 것 같으냐?” 서재필은 진성의 말도 듣지 않고 이준에게로 가서 이것저것 꼭 알아야 할 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준은 요즘에 거의 매니저 조수로 일하고 있는 것과 비슷했다. 이준은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남으려고 발작하려는 현준을 무릎치기 한방으로 잠재우고 진규를 단 한번의 눈 부라림으로 고분고분하게 만든 후 일행을 벤에 밀어 넣은 후 공항으로 출발했다. “이제 가실까요? 강진성씨?” 진성과 서재필은 벤츠의 뒷좌석에 탔다. 아주 승차감이 좋았다. 정말 이런 좋은 차를 타고 싶어 하는 이유를 알 수 있게 된 진성이었다. 모르는 곳으로 가고 있는데도 두려움이 진성에게는 없는 듯했다. “매니저 형, 이런 차는 얼마 정도 하나요? 승차감이 진짜 좋은데요..” “뭐? 아... 2억 5천은 족히 넘을 걸. 아마도..” “2억 5천? 와.... 정말 비싸네요.” “진짜 비싼 차는 스포츠카야. 엔초 페라리인가 하는 놈은 20억도 넘는다는 말이 있으니까.” “20억? 와...” 사내와 서재필이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 이주방은 몰랐다. 게다가 서재필과 진성이 왜 얌전히 따라가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주방 자신이 예상하기로는 저 두 사람이 반항을 하고 운전하는 이 사내가 완전히 박살을 낸 후에 끌고 가야했는데.... 이주방은 뒷좌석에서 편하게 말을 주고받는 서재필과 진성을 보고는 속이 상했는지 툭하고 말을 뱉었다. “지금은 웃어라. 웃을 수 있을 때 웃는 게 좋겠지?” 서재필은 이주방의 말을 알아들었지만 궁금해 하는 진성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성이라면 1:1로는 쉽게 지지 않겠지만 세상일이라는 것이 힘으로만 해결할 수만은 없었다. 서재필 자신이 따라온 이유는 바로 그런 점이 생긴다면 해결해 주기 위해서였다. 세미정장의 사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운전만 할 뿐이었다. 거리가 꽤 되는지 거의 1시간 30분이 지나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시계를 보던 서재필은 한숨을 쉬었다. 이래서야 오늘 한국으로 돌아가기는 틀린 것이다. 차에서 내린 진성과 서재필은 보통의 일본 집과는 달리 굉장히 넓은 뜰과 3층으로 된 집을 볼 수 있었다. 일본 전통의 집이라고 하기도 이상했지만 그렇다고 현대식의 양옥도 아니었다. 약간 퓨전이라고 하면 맞을까? 아무튼 집 자체도 아주 신기했다. 한국말을 유창하게 잘하는 사내의 안내로 진성과 서재필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내부는 외부를 봐서 상상했던 것과는 너무 달랐다. 외견상 동양적이라고 볼 수 없었기에 내부 역시 약간은 서구적이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들어가자마자 보인 것은 깔끔한 도장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나가는 작은 문이 열려져 있었고 그 작은 문과 이어진 자그마한 뒤뜰이 보였다. 일행은 모두 신발을 벗었다. 진성은 뒤뜰로 나 있는 작은 길로 가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도장 옆으로 나 있는 계단을 통해 위로 올라갔다. 진성과 서재필은 아무소리도 내지 않고 묵묵히 따라 올라갔다. 2층에도, 3층에도 긴 복도가 있었다. 사내의 안내로 한참을 가니 보통 문과는 약간 색깔이 다른 문이 있었다. “여깁니다. 강진성씨, 들어가십시오.” 진성이가 들어가자 사내는 서재필과 이주방을 막았다. “두 분은 이 쪽에서 기다려주십시오.” 사내는 그 맞은편의 방을 가리켰다. 웬일인지 이주방은 사내의 말에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서재필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무슨 일로 이렇게 오라고 한 겁니까?” “제게 심부름을 시키신 분께서 진성씨를 혼자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실례지만 잠시 기다리시면 될 겁니다.” 이제까지와 달리 진지한 표정을 짓자 확실히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이는 사내였다. 서재필은 일단 지켜보자는 심정으로 맞은편의 방으로 들어갔다. 사내는 들어오지 않고 진성이 들어간 방 밖에서 마치 지키는 듯, 경계하며 서 있었다. 서재필은 그런 사내의 행동에 더 이상함을 느꼈다. 안으로 들어간 진성은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지 않았는데 문이 닫히자 의아해했다. 게다가 여기까지 안내해 온 사람까지 들어오지 않자 더 이상했다. 주위를 살펴보는데 커다란 방과 그 방 다음으로 연결된 작은 방이 있었다. 진성이 들어온 커다란 방에는 특별한 조명이 없이 촛불이 켜져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신비스러운 느낌마저 일었다. 촛불이 흔들림에 따라 그림자가 움직여 마치 살아 움직이는 뭔가가 있는 듯했다. 작은 방은 그런대로 밝은 편이었다. 큰 방과 작은 방 사이에는 발이 내려져 있어 작은 방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진성은 천천히 작은 방으로 다가갔다. “이리 가까이 오게나.” 확실히 한국어였다. 그것도 아주 자연스러웠다. 진성은 놀랐다기보다는 예상외라서 천천히 목소리가 들린 작은 방으로 발을 걷고는 들어갔다. 안에는 체구가 크지 않고 단정하게 처음 보는 형식의 도복을 입고 앉아 있는 노인이 있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해서인지 인자한 느낌도 들었다. “어르신께서 저를 부르셨습니까?” 진성의 목소리는 평소의 별로 다른 점이 없었다. 아직도 잔잔한 호숫가의 물이었다. 노인은 그런 진성의 목소리를 듣고는 이채를 띠었다. “자네는 내가 누구인지 아는가?” “요시히로 데카츠 어르신 아닙니까?” 진성은 카드에서 읽은 이름을 그대로 말했다. 목소리는 여전히 별 변화가 없었다. “허허허... 내 말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느냐는 말일세.” “오늘 처음 들었습니다.” “그런데 자네 목소리는 아주 편하게 들리는구먼. 자네는 내가 왜 자네를 부른지 아는가?” “둘 중 하나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겠지만요.” “허허... 그래 그 두 가지가 무엇인지 물어봐도 되겠는가?” “하나는 어르신께서 유맹의 회원으로 저를 보시고자 하신 것이겠지요.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주방이라는 사람에 대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허허허허.... 자네는 굵고 짧구먼. 그래 맞지. 맞아.” 그 때 진성이 전혀 몰랐던 곳에서 문이 열리면서 중년의 여성이 아담한 소반에 차를 가지고 왔다. 정갈한 향내가 물씬 풍기는 차를 내려놓고는 곧 중년의 여성은 사라지고 향내만 남았다. “자, 일단 들게나. 내가 아주 아끼는 차일세. 보통 사람들은 절대 맛볼 수 없지. 그런 면에서 자네는 아주 특별해.” “감사합니다. 차향이 아주 좋습니다.” 진성은 차를 몇 번 향을 느끼면서 마셨다. 진성이 찻잔을 내려놓자 데카츠는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친구인 왕현추로부터 연락을 받았다네. 그 친구, 흥분된 상태에서 내게 연락을 했더군. 우리 유맹 역사상 최연소 그룹 멤버가 탄생할 거라고 하길래 내가 궁금해서 어떤 사람이냐고 하니까... 뭐라더라.. 아... 오락선수라고 하더구먼. 오락 선수가 뭔지 알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그 친구에게 좀 자세하게 얘기하라고 했더니 자네 얘기를, 내가 보지는 못했지만, 입에 침을 튀겨가며 말하더군.” “네...” 진성은 오락 선수라는 말에 하마터면 찻잔을 쏟을 뻔했다. “20대 초반이라는 말에 나는 그 친구가 농담하는 줄 알았지. 말이 돼? 20대 초반이라니. 사실 나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 허허허.. 내 평생에 이런 일이 생기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네. 아... 내가 어디까지 얘기 했지? 그렇지. 오락 선수라고 하길래 자세히 물어봤지. 그리고 내가 아는 아이에게 좀 알아보라고 하니 아주 유명한 선수더구먼. 게다가 오락 선수가 아니라 프로 게이머라고 부른다는 것도 알았네. 실례인 줄 알면서도 내 자네를 한번 보기 위해서 내가 아는 아이를 자네에게 보냈다네. 자네가 이해를 하게나.” 데카츠는 조금 전 진성이 앉을 때 기(氣)를 이용해서 진성을 시험했는데 상대인 진성은 그런 시험을 느끼지 조차 못한 듯했다. 데카츠는 속으로 감탄했다. 확실히 왕현추의 그 흥분한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진성은 유맹이란 것을 보고는 바로 이런 사실은 예상했다. 하지만 한 가지가 남아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 그 이주방이라는 사람은....” “아, 그것도 해결해야 할 문제라서 자네를 불렀네. 이주방이라는 녀석은 무술을 제대로 배우지 않고 중간에 그만 둔 게 상당히 많다네. 어쩐 일인지, 그 녀석 할아버지는 아주 대단한 무술 고수이지만 이주방은 완전히 무인으로서는 실격이지. 내가 그 녀석 할아버지와 친분이 있거든. 그런데 이 녀석이 어디를 다친 모양인지 가슴을 붙잡고 내게 와서 막 막무가내로 상대를 혼 좀 내 달라고 하지 않겠나. 기가 막혔는데 그 녀석의 가슴을 척 보니 경에 당한 것이더군. 아주 능숙하게 경을 조절해서 일정 기간 동안만 고통을 주고 영구적인 피해는 주지 않도록 한 아주 정교한 솜씨더군. 하지만 나는 조금 화가 났지. 이런 실력의 고수가 저런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에게 경고차원이지만 이런 벌을 준 게 못마땅했지. 이 정도라면 적어도 60대 후반이나 70대는 되어야 가능한데 그렇게 경륜이 있는 사람이 이런 아이와 토닥거리다니.. 그런데 그 녀석이 하는 얘기가 상대는 자신과 비슷한 나이라고 하더군.” “사람을 시켜서 싸우지도 못하는 사람을 공격하는 것을 보고 조금 화가 나서... 죄송합니다.” 진성은 이주방이 아니라 눈앞의 노인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아니야. 자네 나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게다가 그렇게 조절해서 한 것을 보면 자네는 그렇게 많이 화가 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어르신 말씀이 맞습니다.” “그래... 젊은 사람들끼리 뚝딱거릴 수도 있는데 문제는 저 녀석 할아버지야. 그 녀석 할아버지도 한 성깔 하거든. 아마 자기 손자가 맞았다고 하면 자네하고 대련이라도 할 양반이야. 뭐 지금 봐서는 자네에게 조금 힘들 것 같다고 보지만. 허허허..” “네....” “그래서 내가 자네를 부른 거라네. 내가 이번 일을 중재하면 이주방 그 녀석과 그 녀석 할아버지도 다른 말을 할 수는 없을 테니까.” “아... 감사드립니다. 어르신.” 그제야 모든 의문이 풀린 진성이었다. 진성은 진심으로 그 배려에 감사했다. “자네는 아직 유맹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나 간단한 규칙 같은 것은 듣지 못했나 보군.” 데카츠는 웃으며 진성에게 물었고 진성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네? 네... 나중에 유맹에 가입할 때 왕어르신이 가르쳐 주신다고...” “그래? 그래. 그 친구라면 그렇게 했겠지. 하긴 나중에 배워도 되겠지.” “저.... 어르신. 어르신은 한국어를 어떻게...?” “아, 이거... 허허허.. 이것은 비밀이라네. 나중에 자네가 그룹에 들어오면 자연히 알 수 있을 거네. 허허허.. 다른 손님들이 기다리겠군. 자, 만나러 가 볼까?” “네, 어르신.” 데카츠가 일어섰고 진성 역시 그 뒤를 따랐다. 보통의 검술이 칼을 뺀 상태에서 시작하는 싸움을 위한 기술이라면 거합도는 칼이 칼집에 들어있는 상태에서부터 시작하는 검술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거합도에서 상당히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발도였다. 발도와 동시에 날카로운 단 한번의 공격으로 적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는 것이 바로 거합도의 기본이었다. 데카츠는 맞은편의 방에서 서재필과 이주방을 데리고 나온 후에 진성과 세미정장의 사내와 같이 1층의 도장으로 내려갔다. 데카츠는 일언반구 아무 말도 없이 일단 내려 가자고만 말하고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이주방은 데카츠에게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분위기가 무거워 도저히 쉽게 말문을 열수가 없었다. 1층 도장으로 내려온 데카츠는 세미정장의 사내에게 말했다. “히데끼, 연습은?” 필요한 말만 하는 데카츠였다. “곧 시작될 겁니다.” “그래? 좋아.” 세미정장 사내의 이름은 히데끼였다. 히데끼는 잠시 사라지더니 곧 도복으로 갈아입고는 모습을 드러냈다. 세미정장일 때는 조금은 약해 보이기도 했던 사람이 도복을 입으니 완전히 달라보였다. 도복이 정말 히데끼에게 잘 어울렸다. 히데끼가 도복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곧 밖에서 비슷한 도복을 입은 젊은 사람들이 도장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20명 정도의 젊은 사람들이었다. 왼쪽 허리춤에 칼을 찬 사람들이었다. 진성과 서재필은 무슨 영문인지 몰랐다. 단지 지켜볼 뿐이었다. 요시히로 데카츠가 현관의 반대쪽 벽 앞에 단정히 앉자 왼쪽으로 비스듬히 히데끼가 자리를 잡았고 그 앞에 간격을 넓게 해서 두 줄로 젊은 사람들이 아주 조용하면서도 민첩하게 자리를 잡았다. 이주방은 히데끼 옆으로 가서 앉았다. 진성과 서재필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진성군, 이쪽으로 와서 앉게나. 이것은 우리 무신류 거합도의 손님 맞는 일종의 의식이라네. 마음 편히 하고 앉게나.” 진성과 서재필은 데카츠의 말에 데카츠의 오른쪽으로 가서 앉았다. 진성의 눈에 약간 당황하는 듯한 이주방의 모습이 들어왔다. 어느 정도 사정을 데카츠로부터 알게 된 진성은 그런 이주방의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오늘은 나 요시히로 데카츠에게 아주 중요한 손님이 오셔서 이 화객(樺客)을 열려고 한다. 나에게 중요한 손님이니 너희들도 그렇게 알고 대하기 바란다. 알겠느냐?” “네, 검가(劍家)님!” 진성은 검가라는 생소한, 처음 듣는 말이었지만 대답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깃든 존경심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어서 대강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진성은 확실히 규율이 뛰어나 보이고 한사람, 한사람이 흐트러짐을 찾을 수가 없자 감탄했다. 어쩌면 이 곳이 단순한 도장이 아니라 거합도라는 무술의 종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성의 이런 생각은 적중했다. “손님에게 무신류 거합도의 기본 검로를 보여 드려라.” 데카츠의 낮으면서도 울리는 말에 히데끼가 잠깐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더니 일어나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오른쪽에 있는 한 젊은이를 가리켜 말했다. “카오루, 무신류 거합도 본결 일장을 보여드려라.” “네, 검사(劍師)님!” 짧게 깎은 머리에 180이 약간 못 되어 보이는 젊은 남자가 가운데로 나왔다. 한쪽 무릎을 꿇고 다른 무릎은 세운 자세를 취했다. 서 있다가 무릎을 땅에 대었을 때는 잘 몰랐지만 자세를 잡자 곧 전신에서 기세가 일어남을 진성은 알 수 있었다. 허점이나 미흡한 점들이 없지 않았지만 기세로 따져서는 상당한 실력이었다. 진성은 감탄했다. 팔극권이나 팔극신권에서 저만한 나이라면 몸의 힘을 기르거나 아니면 반대로 완성된 형에서 힘을 뺄 시기였다. 가만히 무릎을 꿇고 칼자루를 쥐고 있던 카오루의 오른손이 순식간에 허공을 갈랐다. 오른손의 연장선인 칼은 그와 함께 허공에 번쩍이는 검광을 수놓았고 이어서 탄력을 이용해 순식간에 일어나 앞으로 나선 카오루는 몸을 반만 회전하고는 칼을 중단으로 휘둘렀다. 칼의 빠름은 그야말로 전광석화였다. 휘둘러진 칼을 회수하는 대신 그 회전력을 이용해서 계속 공격을 가했다. 진성은 이 본결 일장이라는 것이 여러 가지 공격법을 하나로 묶은 것임을 알았다. 거기에 거합도라는 것이 여러 번의 공격을 날카롭게 이어서 위력을 증대시키는 것이 아닌 단 한번의 휘두름을 추구하는 무도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검로라서 그런지 끊이지 않고 이어졌지만 어느 정도 그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었던 진성이 보기에는 여러 가지 위력적이면서 단속적인 공격의 연속임을 알 수 있었다. 한참을 위력적인 칼춤을 추던 카오루는 갑자기 누군가가 잡은 것처럼 멈추더니 데카츠를 향해 인사하고 다시 히데끼를 향해 인사하고는 자리로 들어갔다. 카오루가 자리로 들어가 앉기 전에 다시 인사를 하자 다른 젊은이들도 다 같이 고개를 숙였다. 진성은 이런 것이 겉으로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 규율을 이루는 규칙 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했다. “무신류 거합도의 손님을 맞는 예(禮)에는 먼저 기술을 보여주라는 말이 있습니다. 조금 전에 저희의 기술을 보여 드렸습니다. 이제 손님의 기술을 보여주실 차례입니다.” 히데끼의 말에는 조금의 장난도 들어 있지 않았다. 장소도 장난을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진성은 자신을 쳐다보는 히데끼의 눈에 고개를 살짝 틀어 데카츠를 바라보았다. 데카츠는 슬쩍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성은 얼핏이지만 데카츠의 얼굴에 약간의 장난기가 섞여 있음을 보았다. 하지만 정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진성은 하는 수없이 일어나서 도장 가운데로 걸어 나갔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나이 어린 진성이 나오자 비슷하거나 약간 나이가 많은 젊은이들 사이에 의아함이 가득했다. 그 옆의 서재필로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제가 배운 무술은 팔극권의 정통 계승자이신 스승님께서 새로 창안하신 권법으로 팔극신권이라고 합니다. 팔극신권의 진결 중 일부를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진성 자신의 말을 히데끼가 일본어로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하기를 마치자 진성은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요즘 느림의 미학을 깨달아 느리게 진결을 풀곤 했던 진성이었지만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라 조금 역동적인 면을 강조했다. 굳건한 두 다리와 안정된 상체를 기반으로 하는 팔극권의 강함과 동작과 동작 사이의 유연함이 곳곳에 가득 배여 있는 팔극신권의 특징을 여지없이 보여 주었다. 강하게 진각을 밟을 때의 쩌엉하고 울리는 소리, 장(掌)을 내뻗을 때의 공기가 압축되면서 터지는 충격소리, 퇴법이 거의 없는 가운데에서 펄럭이는 바지의 소리를 듣게 해 주는 맹거퇴, 맹거퇴에 이어서 곧바로 진각에 들어가며 펼쳐지는 위력적인 팔꿈치 공격 단심절(單心節), 강함과 유함이 가득한 묘한 보법에 이어서 마지막으로 회전력을 더한 진각에 양 손바닥을 반대쪽으로 뻗는 쌍맹장(雙猛掌)을 펼치자 도장 안은 쩌엉하는 소리로 진동했다. 표정 하나에도 전혀 흐트러짐이 없던 젊은이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도(刀)가 아닌 권으로 하는 무술에 이런 힘과 기백이 있을 줄은 잘 몰랐던 젊은이들이라 더욱 더 놀랐다. 작지 않은 도장 전체가 울릴 정도의 진각과 따라가기 힘든, 어지러운 보법 뿐 아니라 강맹한 장(掌). 또 다른 세계를 본 것과 같았다. “허허허... 역시. 너희들은 오늘 아주 대단한 것을 견식한 것 같구나. 히데끼, 어떠냐?” “네, 손님의 자격으로 넘칩니다.” “그렇지? 내 그럴 줄 알았다.” 무신류 거합도의 화객의 의식에는 위험한 규칙이 있었다. 손님으로 온 사람의 기술을 시험하는 것이다. 먼저 무신류 거합도의 기술을 보여 준 뒤에 손님의 기술을 보는데 만약 손님의 기술이 미흡하다면 그 자리에서 대련을 빙자한 결투를 하게 된다. 요즘에는 그런 일이 거의 없지만 옛날에는 목숨을 걸 정도였다니 그 기세가 대단했다. 하지만 손님의 기술이 뛰어나다면 그제야 무신류 거합도의 사람들은 제대로 손님으로서 인정하는 것이다. 데카츠와 히데끼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던 진성은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너희들도 보아서 알겠지만 손님의 기술은 절대 범상치 않다. 조금 전에 봤던 그 시범만 제대로 마음에 새겨서 스스로 묻고 수련한다면 적지 않은 성과가 있을 거다.” 히데끼의 말이 끝나자 이제까지 절대 허리에서 놓지 않았던 손을 놓음과 동시에 칼을 허리에서 빼서 옆에 있는 바닥에 내려놓는 젊은이들이었다. 이제야 제대로 손님으로 인정을 받음과 동시에 손님에 대한 예의로 칼을 몸에서 떨어뜨린 것이다. 진성은 확실히는 몰랐지만 옆에 있던 서재필의 설명과 사람들의 하는 행동을 보고는 아주 약간은 알 수 있었다. “손님, 소개를 해 주십시오.” 히데끼의 말에 진성은 자리에서 주춤거리며 일어났다. “한국에서 온 강진성이라고 합니다. 팔극신권의 계승자입니다.” 히데끼는 그런 진성의 말을 다른 젊은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리고는 진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진성씨, 저는 토이마루 히데끼라고 합니다. 아까는 조금 실례였습니다.” 그 이후로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게 바뀌었다. 히데끼가 진성을 데리고 다니며 젊은이들에게 소개도 시켜주고 말도 하는 바람에 도장이 약간은 소란스러워졌다. 데카츠 역시 그런 모습에 웃으며 어느새 앞에 놓인 찻잔을 들고 있었다. 서재필은 갑작스런 분위기 반전에 놀랐지만 나쁘지는 않은 듯 데카츠처럼 차를 들고 있었다. 오직 한 사람만이 그런 분위기를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뚱한 표정을 넘어서 불만이 부풀어 올라 터지기 직전이었다. “데카츠 할아버지! 할아버지!” 짜증 섞인 목소리의 주인공은 당연히 이주방이었다. 이주방은 데카츠 옆으로 다가갔다. “할아버지, 저 녀석 혼내 준다고 해 놓고선 이게 도대체... 이게 도대체 뭐예요?” “저 녀석, 아... 그랬었지? 내 정신 좀 봐라. 그런데 이걸 어떻게 하냐? 나도 저 젊은이를 이기기는 힘들 것 같은데.” “네? 할아버지가요? 거짓말 하지 마세요. 할아버지가 누구에게 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데요.” 생긋 웃는 데카츠의 얼굴에 이주방은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큰소리쳤다. “이 녀석아, 내가 거짓말 하는 것 봤느냐?” 이주방은 순간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확실히 눈앞의 데카츠는 자신이 뭐라고 해도 되는 일은 된다, 안 되는 일은 절대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이주방은 아무리 그래도 저 젊은 녀석을 자신이 알기로 세상에서 제일 강한 데카츠가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무술 고수인 친 할아버지도 데카츠에게는 상대가 안 된다는 인정하는 터라 더욱 그랬다. “할아버지, 저 녀석과 무슨 관계라도 있는 건가요? 왜 저렇게 손님으로 환영까지 하는 거죠? 저는 이해가 안 돼요. 아직도 가슴이 아려서 제대로 말도 못하겠어요.” 할 말은 다 하는 이주방, 가슴이 아프다는 말로 데카츠에게 억지를 부렸다. “이 녀석아, 너는 네 할아버지한테 내가 가입하고 있는 모임에 대해서 들은 적이 없느냐?” “네? 음.... 아, 우리 할아버지가 그렇게 가입하고 싶어 했는데 자격이 안 된다며 가입 할 수 없었던 그 모임이요? 당연히 듣다마다요. 할아버지 입만 벌리면 그 얘기를 하는데... 하지만 절대 그 모임 이름은 얘기 안하는 것 보면 신기해요. 그런데 왜 갑자기...” “사실, 비밀이지만 네가 저 녀석이라고 부르는 저 젊은이가 다음 모임에서 그 모임에 가입될 예정이란다. 아마도 거의 결정될 것 같다. 나도 별로 반대할 생각이 없으니까.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지?” 이주방은 놀랐다. 차이나 모터스의 회장이자 유명한 무술고수인 자신의 할아버지조차 자격미달이라는 이유로 가입할 수 없었던, 이름은 알 수 없는 그 모임에 자신과 비슷하거나 더 어린, 게다가 프로 게이머인 사람이 가입하다니. 말도 안 되는, 아니 절대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이주방은 데카츠를 뚫어지게 보았지만 데카츠의 그 진지함에 이주방은 점차 자신감을 잃었다. “주방아, 너와 저 녀석 사이의 일에 대해서는 내가 좀 알아보았다. 들으니 네가 잘못한 부분이 있더구나. 이쯤에서 서로 화해를 하는 게 어떠냐?” “화해요? 저는 맞아서 이렇게 가슴이 아프다구요. 그런데 화해라니요?” “.... 이 할아버지가 이렇게 부탁을 해도 안 되겠느냐?” 이주방은 데카츠에게서 처음으로 부탁이라는 말을 들었다. 말이 무겁기로 소문난 데카츠였기에 더욱 그랬다. “........” “네 녀석이 잘못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이 일로 계속 그렇게 한다면 어쩔 수 없이 내가 네 할아버지를 만나서 담판을 지어야겠다. 네가 어릴 때부터 쭉 너를 보아왔지만 요즘의 너는 내가 생각하는 한계를 넘어섰다. 계속 그렇게 막무가내로 나온다면 어쩔 수 없지. 그리고 내가 말하는 담판이 무엇인지는 알겠지?” 이주방은 데카츠가 말하는 담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마음속에 억울함은 남아 있었지만 자신으로 인해서 데카츠와 할아버지의 사이가 벌어지는 것도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이주방은 데카츠에게서 아무 도움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어쩔 수 없었다. “... 데카츠 할아버지. 이 일은 제가 잊겠습니다.” 이주방은 믿었던 데카츠에게 배신을 당한 것 같아서 더 기분이 나빠졌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데카츠라면 절대 말을 번복하는 일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이주방은 화가 치밀어 올라 아무 인사도 하지 않고 도장을 빠져나가버렸다. 이주방은 도장을 나서기 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진성을 바라보면서 중국에서 두고 보자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런 이주방을 보던 데카츠는 한숨을 내쉬었다. 친한 친구사이지만 저런 녀석의 행동을 보면 친구인 이장령이 교육을 잘못 시켰구나하는 생각만 앞섰다. 나가는 꼴을 보아하니 마음을 접은 모습이 아니었다. 진성은 데카츠 옆에서 뭐라고 말하다가 기분 나쁘고, 불만 가득한 얼굴로 나가버리는 이주방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한숨을 쉬는 데카츠까지 보고는 그 사이에 있었을 대화에 대해서도 조금은 추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진성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여러 가지 말을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히데끼의 날카로운 기합소리가 들리자 젊은이들은 모두 자기 자리로 돌아갔고 도장안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평상시의 규율이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 내었다. 히데끼는 정리된 분위기에서 데카츠를 향해 말문을 열었다. “검가님, 이렇게 오랜만에 손님도 오셨는데, 유투(柔鬪)를 여는 게 어떨지?” “유투? 허허허... 히데끼. 네 몸의 피가 들끓는 모양이구나.” 히데끼의 말에 데카츠는 기분이 좋은 듯 웃었다. “네.... 저도 무인이니까요.” “허허허허.... 그래, 그렇지. 그러자꾸나.” 유투는 거합도에서 일종의 자유 대련을 말하는 것이었다. 보통의 자유대련과는 달리 자신이 대련하고 싶은 상대를 지목할 수 있어서 평소 자신이 대결해 보고 싶었던 상대와의 대련이 가능해 수련에 대한 자극이 되어 가끔 여는 수련의 또 다른 방법이었다. 이 경우에는 그 장소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대련 신청이 가능하기 때문에 가르치는 사람과의 대련 역시 가능했다. 히데끼가 유투를 열자는 말을 한 이유는 바로 진성 때문이었다. 진성의 무술 시범을 본 히데끼는 거합도의 차기 후계자로 결정될 자신이 권법의 고수라고 여겨지는 상대와 제대로 된 대련을 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히데끼의 속마음을 알았던 데카츠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유투를 허락했다. 갑자기 변한 분위기에 유투인가 뭔가를 연다는 데카츠와 히데끼의 말에 진성은 또 무엇을 하는지 궁금했다. 이미 한국으로 가기도 힘든 상황이라 마음 편히 먹기로 했다. 옆에 있던 서재필 역시 데카츠와 히데끼가 진성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음을 안데다가 유일하게 마음이 걸렸던 이주방이 뭐 씹은 얼굴로 후다닥 뛰어나가는 것을 보고는 마음을 놓았다. 결코 평범하다고 할 수 없는 서재필은 이런 상황을 즐겨보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이 컨트롤할 수 없다면 즐겨라. 서재필의 좌우명 중 하나였다. 곧 이어진 히데끼의 설명에 진성은 유투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상대를 지목할 수 있는 자유대련이라. 진성은 골치가 아파옴을 느꼈다. 왜 이런 유투를 하는지 진성은 곧바로 알았다. 히데끼는 그런 진성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핏대를 올려가며 유투의 배경과 그 역사를 설명했다. 진성은 이미 피하기에는 늦었다는 것을 알았다. 약간 불만인 얼굴로 데카츠를 바라봤지만 이미 데카츠는 그런 기색을 느꼈는지 찻잔을 들고는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휴...... 한바탕 해야겠군.” 하지만 진성의 속마음에는 새로운 무술과 만난다는 즐거움도 있었다. 이주방의 일도 어느 정도 해결된 것 같았고 이왕 하는 것 뭔가 배우리라는 마음이 생기자 몸에 적당한 활기가 감돌았다.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설명을 마친 히데끼가 큰 소리로 선창을 하자 젊은이들이 크게 복창했다.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유투는 거합도에서 일종의 의식과 같았다. 그래서 의식답게 그 시작과 마지막은 철저하게 지키는 규칙이 있었고 히데끼가 먼저 외친 말 역시 유투 때 꼭 해야 할 의식 중에 하나였다. 조금은 복잡해 보이는 것을 다 하자 히데끼는 유투의 시작을 알렸다. 유투의 시작을 선언하자마자 젊은 무사들이 진성에게로 달려왔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진성과의 대련을 원했던 것이다. 어차피 자신들끼리는 언제라도 할 수 있는 대련이었지만 생소하면서도 막강해 보이는 권법 고수와의 대련은 쉽지 않음을 다들 알고 있었던 것이다. 히데끼는 그런 점은 예상 못했는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히데끼는 자신이 진성과 맞붙고 싶었는데 이런 일이 생기자 얼굴에는 예상 못했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진성씨, 이거 미안한데요.” “....... 하하하.. 너무 많은 것 같지 않은가요?” “음.. 그렇네요. 그러면 저들 중에 5명만 상대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히데끼는 진성의 말에 5명과 대련해 달라고 말했다. 진성은 잠깐 생각한 후에 승낙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히데끼는 그 말에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는 20명의 젊은이들을 모아서 진성의 말을 전하는 동시에 5명만 뽑으라는 말을 했다. 5명은 금방 결정이 났다. 젊은이들은 일본에 퍼져 있는 무신류 거합도의 여러 도장에서 자질 면에서 뛰어나고 거합도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 무신류 거합도의 종가로 와서 여러 테스트를 통과한 이를테면 엘리트였다. 하지만 무술의 경우 대단히 선, 후배 관계가 엄격하기 때문에 5명을 뽑는 것은 바로 그 선배 5명이 결정된 것과 같았다. 나머지 사람들이 고개를 숙인 채 자리로 돌아갔고 다섯 명의 젊은이가 가운데로 나왔다. 히데끼는 날이 없는 도를 가지고 와서 5명의 무사 중 한 명에게 가져다주었고 도를 받은 무사는 도장의 가운데로 나왔다. 진성은 그 모습을 보고는 손과 발의 긴장을 풀면서 도장 가운데로 다가갔다. 히데끼는 다시 한번 주의사항을 말했고 대련은 곧 시작되었다. 진성은 아무런 자세를 취하지 않고 그대로 자연스럽게 서 있었다. 칼자루에서 전혀 칼을 뽑지 않은 채 마치 화살을 시위에 먹인 것처럼 팽팽한 느낌의 무사는 지면을 스치듯이 천천히 움직였다. 진성은 상대의 움직임을 알 수 있었다. 거합도의 시범을 본 진성은 일단 거합도라는 것이 일격필살의 팔극권과 통한다는 생각을 했다. 거합도 역시 단 한번의 발도에 이은 기술로 상대를 곤궁에 빠뜨리는 것을 기본으로 했다. 진성은 가만히 있는 듯했지만 상대의 공격선이 정해지면 약간씩 몸을 비틀어서 상대에게 무언의 압박을 가했다. 확실히 공격이 가능한 범위에 왔어도 상대는 진성의 거의 느낄 수 없는 움직임에 거슬리는 듯 선뜻 공격을 못했다. 약간의 소강상태 이후, 상대는 공격을 결심했는지 기세를 끌어올리며 살짝 앞으로 나왔다. 진성은 이번에는 가만히 서 있었다. “윙..” 공기를 가르는 칼이 순식간에 뽑혀서 진성에게로 거리를 줄이면서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진성은 이미 어느 정도 완성된 청경과 상대의 움직임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서인지 속도는 빨랐지만 오히려 칼끝에서부터 상대 몸의 움직임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칼이 거의 눈앞에까지 다가오자 왼다리를 축으로 옆으로 회전하며 칼을 피했다. 확실히 처음의 기세는 대단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피한 공격 뒤에는 허점이 존재했다. 진성은 공간을 순식간에 줄이는 보법인 영보(影步)를 펼쳤다. 영보는 팔극신권의 비전으로서 보통 경을 폭발적으로 사용해서 공간을 줄이는 천쾌보와는 달리 부드러운 경을 이용해서 경의 회전을 통해서 이루는 보법으로 허깨비 같은 움직임이 그 특징이었다. 지허보가 먼 거리를 신묘하게 움직이는 것이라면 영보는 그야말로 순식간에 멀지 않은 거리를 줄이는데 쓰이는 상대의 사각을 이용한 보법이었다. 진성의 사부 유조는 평소의 움직임에도 그 영보의 움직임이 섞여서 가끔 움직임이 보통 사람 같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진성의 경우 아직 평상시의 움직임에 자연스럽게 배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실전에서 상대의 허점을 공략할 경우에 이 영보가 탁월함을 알고 있었다. 진성이 영보를 통해 순식간에 상대의 빈 겨드랑이 아래로 다가가자 공격한 무사 뿐 아니라 보고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 감탄성이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다가간 진성은 팔극신권의 팔꿈치 공격중 하나인 정추(正錐)를 펼쳐서 상대의 허리 윗부분에 정확하게 가격했다. 상대의 실력을 감안해서 부드러운 경으로 감쌌기에 상대는 거의 2미터 이상 높이 뜨면서 뒤로 날아갔지만 떨어질 때의 충격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타격 때의 충격으로 무사의 생명인 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사람이 단 한번의 공격으로 2미터 이상 높이 떴다가 뒤로 4미터 가량 날아가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런 모습은 검도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걱정스런 눈빛의 사람들이었지만 정작 뒤로 날아갔다가 떨어진 당사자는 어렵지 않게 일어났다. 하지만 칼을 놓쳐서인지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칼을 주워서는 진성에게 졌다는 예를 표시했다. 그제야 보고 있던 사람들은 환호했다. “너희들도 보아서 알겠지만 권사들의 수련이 어느 정도 경지까지 올라가면 저와 같은 위력을 보일 수가 있다. 조금 전, 진성씨께서 배려를 해서 뒤로 나가떨어진 쯔메루가 다치지 않을 수 있었다. 만약에 제대로 힘을 줬다면 단 일격으로 쯔메루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거다. 자, 다음!” 히데끼의 설명이 끝난 다음에 다른 무사가 칼을 칼자루에 넣은 상태로 무대 가운데로 나왔다. 진성은 여전히 가만히, 자연스럽게 서 있었다. 조금 전의 상황을 본 모양인지 상대는 그리 쉽게 공격을 하지 않았다. 진성은 앞으로 상대할 사람이 세 명이나 더 있음을 알고는 선제공격에 나섰다. 진성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서 상대의 공격 범위 안에 살짝 발을 걸쳤다. 몸을 살짝 구부려 긴장을 준 진성은 순식간에 경을 터트리며 천쾌보의 방법으로 상대와의 거리를 한순간에 줄여버렸다. 그리고 오른팔을 뻗어 손바닥으로 상대의 얼굴을 가격했다. 주의하던 상대는 옆으로 겨우 피했다. 너무 엉겹결이라 반격은 생각지도 못했다. 진성은 공중에서 발이 땅에 닿자마자 몸을 회전시키면서 옆으로 부딪쳐 몸통 공격인 용형파(龍形把)를 시전했다. 옆으로 겨우 피했던 상대는 진성의 회전에 이은 강력한 몸통 공격인 용형파를 맞고는 바로 튕겨져 보고 있던 다른 젊은이와 부딪쳤다. 하지만 진성의 배려로 인해 다친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진성에게 공격하지 않고 방어를 해도 거의 순식간에 대련이 끝나자 그 다음부터 나오는 무사들은 기다리지 않고 가장 자신 있는 기술로 승부를 걸어오기 시작했다. 상대의 능력을 알았기에 자신의 기술이 얼마만큼 상대에게 통하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실력의 차이가 너무나 극명하게 나타나 기술을 사용하지 않은 채 칼을 타고 들어가 간단하게 팔을 붙잡거나 던지기 기술인 솔법(摔法)을 이용해서 진성은 대련을 간단하게 끝내버렸다. 다행히 아무도 다친 사람이 없었고 젊은이들은 진성을 향한 존경심을 표했다. 이제 대련이 끝났구나 싶은 진성은 자리에 앉으려고 했지만 들려오는 소리에 앉을 수가 없었다. “진성씨, 한 명이 더 남아 있는데요.” “네? 그게 무슨? 아까 다섯 명이라고...” “아, 그건... 저 아이들 중에서 다섯 명이지요.” “그러면..?” “네, 제가 진성씨와 대련을 해 보고 싶어서요.” 히데끼는 진성의 대련 모습을 보고 자신이 진성에게 상대가 되지 않음을 알았다. 화가 나기도 했지만 새로운 자극이었다. 이런 사람이 존재하다니. 자신 역시 무에 대해서는 나이 차이를 무시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뒤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으로 자신과 비슷한 나이, 자신보다 어린 사람 중에 자신을 확실히 능가하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히데끼의 몸 안에는 무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히데끼의 말에 진성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자신이 대련했던 사람들이야 배우는 사람들이라고 쳐도 히데끼는 가르치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이 무신류 거합도에 도전한 사람으로 비춰지는 것 같아 걱정된 진성은 데카츠를 바라보았다. 데카츠는 아주 흥미롭게 보고 있다가 진성이 바라보자 순식간에 고개를 돌려버렸다. 진성은 유맹에 가입한 노인들이 제정신이 아닌 것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아저씨라고 불러달라던 왕현추와 왜 데카츠가 친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한숨을 푹 쉬던 진성은 어쩔 수 없이 도장 가운데로 나갔다. 5명을 상대했지만 힘이 든 것은 아니었기에 진성은 바로 대련을 하자고 말했다. 진성이 가운데로 움직이자 히데끼 역시 가운데로 나왔다.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검술 스승인 히데끼와 엄청난 무력을 선보인 진성과의 대련이라 숨을 죽이며 지켜보았다. 진성은 20대 초반의 제자를 둔 20대 후반의 스승 히데끼를 바라보았다. 보통 스승이라면 보통 한 세대 정도는 차이가 났다. 이렇게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 스승이라면 스승이 대단한 실력임에 분명했다. 확실히 진성의 감각이나 시야를 히데끼의 칼이 은근히 방해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대련해 봤던 왕현추 어르신의 제자가 선보인 수련보다는 그 나이 차이 때문인지 부족해 보였다. 히데끼의 칼이 자루를 빠져 나오면서 엄청난 가속력을 보이며 진성에게로 휘둘러졌다. 진성은 확실히 거합도의 장점인 이 발도술에 대해서는 상당히 감탄을 했다. 좁은 공간이나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에 비례해서 일격 후의 위험성 역시 존재했다. 진성은 히데키의 칼에서 풍기는 기세를 느꼈지만 두렵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뒤로 피하는 대신 앞으로 접근했다. 접근하는 만큼 속도감이 커져 더 피하기 어려울지도 몰랐지만 팔극신권에서는 팔극권과 비슷하게 공격이 바로 방어였다. 방어 후에 공격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공격과 방어가 일치되는 것이 기본 무리(武理) 중 하나였다. 피하는 것도 선택 가능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왠지 정면으로 부딪쳐 보고 싶었다. 진성은 사선으로 비스듬히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는 칼을 보고는 순간적으로 돌진하는 속도를 줄여 버렸다. 관성의 법칙으로 인한 힘을 내부의 경으로 흡수해버린 진성은 돌진하는 속도에서 정지했다가 옆으로 순식간에 이동해서 마치 잔상의 효과를 보였다. 순간적으로 상대를 놓친 히데끼는 당황했다. 눈앞이라서 그 효과는 더했다. 그런 틈을 진성은 영보를 이용해 파고 들어갔고 히데끼가 진성의 공격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막으려고 거합도 특유의 보법을 밟으려고 했지만 공격하고 있는 자세에서 단번에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단지 찢어지는 듯한 근육의 아픔을 무시하고 휘둘렀던 칼을 되돌려 상대의 공격인 강력한 팔꿈치 타격을 막으려했다. “턱! 챙! 후두둑!” 팔꿈치 공격인 양소파(攘掃把)였다. 양소파 역시 팔극신권의 비전이었는데 팔극신권 팔꿈치 공격의 특징인 좁은 면의 집중된 타격이 아니라 좁은 면에서 넓은 면으로의 면타격과 점타격 둘 모두를 소화할 수 있는 공격이었다. 그대로 제대로 경을 실어 공격하면 상대가 제대로 막을 수 없어 보여 진성은 부드러운 경을 이용했다. 원래 부드러운 경과 단단하면서 강력한 경을 섞어서 그 타격력을 증가시키는데 진성은 부드러운 경으로만 양소파를 펼쳤다. 그로 인해 막았던 칼은 맞은 부분을 중심으로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져 바닥으로 떨어졌고 히데끼는 엄청난 힘으로 뒤로 내동댕이쳐졌다. 하지만 부드러운 경은 단단한 칼을 파괴해버렸지만 히데끼의 신체에는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고 오히려 떨어질 때 몸을 보호했다. 사람들은 검사인 히데끼라면 어느 정도 대결일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단번에 칼까지 조각나면서 히데끼가 뒤로 날아가 버리자 도장 가운데에서 여전히 굳건하게 서 있는 사람의 실력이 월등함을 알았다. 영화에서처럼 여러 번의 대결이 아니라 고수와의 대결에서는 단 한번의 맞부딪힘으로 승부가 결정 나는 것을 직접 볼 수 있었다. 히데끼는 칼이 순식간에 박살이 나면서 강력한 힘이 자신을 뒤로 밀치는 것을 느꼈는데 다행히 떨어질 때 별다른 충격이 없자 진성이 힘을 제대로 쓰지 않았음을 알았다. 평소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었던 지라 이런 일방적인 패배는 처음이었기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히데끼, 너무 자책하지 않아도 된다. 믿기 힘들지 모르겠지만 저 젊은이의 수준은 이미 나와 비슷하니까. 허허허허..” 그런 히데끼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데카츠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자신보다 어린 상대에게 일격에 꺾인데다가 다시 붙어도 이길 수 없다는 마음이 들자 마음은 더욱 무거웠다. 하지만 그 반대로 뭔가 발견한 기쁨도 있었다. 복수를 위한 마음이 아니라 뭔가 새로운 경지에 대한 선망이었다. 자신의 나이에서 이 정도면 최고라는 생각을 은연중 했던 히데끼로서는 진성의 존재와 그 무의 경지는 확실한 자극이며 채찍질이었다. 데카츠는 그런 히데끼를 보면서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아직 정식 제자로 들이지는 않았지만 그 나이 또래에서는 최고인 히데끼를 보며 어떤 단계에서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경험에 비춰 봐도 말로해서는 불가능함을 알고는 은근히 이런 기회를 묵인했던 데카츠로서는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에 더 기분이 좋았다. 또한 대강은 예측했지만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더 대단한 진성을 보면서 왕현추의 흥분했던 모습이 생각이 났다. 내심 실력으로는 비슷하지만 저 젊은이, 진성이 자신의 제자가 된다면 거합도가 한 단계 더 발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허허허... 이 나이에 이런 욕심이라니... 하긴, 내가 그렇게 했다가는 그 친구가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테니..” 왕현추를 생각하던 데카츠는 웃으며 작은 소리로 뇌까렸다. 진성은 대강 훈련이 끝나 훈련받는 사람들이 다 나가고 히데끼와 데카츠, 서재필만 남자 데카츠를 넌지시 불렀다. 평소 자신이 궁금했던 것 중에 검에 관한 것이 있었기에 기회를 엿보던 진성이었다. “저, 어르신...” “응? 진성군 무슨 할 말이 있는가?” 진성의 말에 데카츠는 뭔가 하며 물었다. “사실, 제가 검법 하나를 알고 있는데....” 진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데카츠는 말허리를 잘랐다. 그만큼 진성이 검법을 알고 있다는데 대해 데카츠는 호기심이 무럭무럭 생기고 있었다. “뭐? 검법? 오호.. 권으로 그 실력에 검법이라니.. 자네가 알고 있다고 말할 정도면 예사 검법이 아닐 것 같은데. 이름이 뭔가?” “말씀드리기 조금 그렇지만.... 저는 제가 알고 있는 검법의 이름을 모릅니다. 제 사부님도 역시 그 이름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제게 알려주셨습니다.” 진성의 말은 진지했다. 이름이 없기 때문에 무명이라는 이름까지 붙인 검법. 무명검법이었다. “이름을 몰라? 자네 사부라면 팔극권 계승자인 유조님이 아닌가?” 왕현추의 사형인 유조는 데카츠도 만나본 사실이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데카츠 역시 유조가 숨을 거두었다는 소리를 듣고는 안타까워했던 사람 중에 한사람이었다. “네, 사부님도 팔극문이 아닌 다른 분에게 검법만 전수받았는데 전수받을 때 검법의 이름을 듣지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오... 다른 사문? 게다가 이름이 없다? 일단 한번 보면 뭔가 알겠지?” 데카츠는 시범을 보면 된다며 진성에게 직접 펼쳐 보이라는 무언의 압력을 가했다. 진성은 데카츠의 말에 날이 없는 검을 받아서 도장 가운데로 걸어갔다. 권의 고수인 진성이 검법까지 알고 있다고 하자 히데끼는 더욱 더 자극이 샘솟음을 느꼈다. 그 옆에서는 서재필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진성을 보고 있었다. 진성은 숨을 가다듬고는 가볍게 검을 들어 올렸다. 가볍게 보법을 밟으며 무명소검(無名小劍)을 펼치기 시작했다. 부드러우면서도 끊이지 않는 무명소검 특유의 분위기가 오래지 않아 진성의 동작에서 뿜어져 나왔고 점점 쌓여 도장 안을 가득 메웠다. 실전에서 통할까 싶을 정도로 부드럽고 느린 검법이었다. 히데끼는 보기에는 확실히 좋을지 몰라도 실전에는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다. 진성은 무명소검을 연달아 두 번을 펼치고는 곧바로 무명대검(無名大劍)을 펼쳤다. 빠르고 패도적이며 거친 무명대검을 펼치니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휘두르는 검에서 나는 공기를 가르는 소리로 인해 완전히 깨졌다. 무명대검을 펼치는 진성은 무명소검과 달리 굉장히 빠르면서도 거친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히데끼는 검이 완전히 바뀐 것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렇게 정반대 성향의 검법을 같이 연습하다니. 히데끼는 이런 반대 성향의 검이 같은 검법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무명대검은 무명소검에 비해 공격적이었지만 뭔가 부드러움이 배제된 듯한 느낌이어서 투박했다. 진성은 무명대검 역시 두 번을 연속으로 펼치고는 멈추었다. 사부 유조로부터 형과 그 구결, 그리고 각 움직임에서의 주의할 점과 경지에 이를 때의 징후만을 배우고 연습을 제대로 하지 않았던 무명비검(無名飛劍)과 무명기검(武名奇劍), 무명9절초에 대해서는 시범을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잘 모르는 것이었기에 진성은 검을 내리고 멈추었다. 히데끼는 약간 땀이 맺힌 진성에게 수건을 건넸다. “오호.... 아주 독특하구나. 그리고 대단하구나.” 히데끼의 단순한 생각과는 달리 데카츠는 아주 골몰히 생각하고 나서 내린 결론이었다. 진성은 매우 궁금했지만 데카츠의 입이 열릴 때까지 기다렸다. 데카츠는 자신이 말을 하고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부께서 이 검법을 어디에서 배웠다는 말씀은 하지 않으시더냐?” “네, 사부님께서도 모르시는 눈치셨습니다.” 진성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음... 그래? 그렇단 말이지.” 또 다시 데카츠는 생각에 잠겼다. 히데끼가 발작을 하기 직전 데카츠는 말했다. “내가 독특하다고 한 이유는 이런 서로 다른 검의 성향을 하나의 검법으로 모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처음에는 다른 검법이라고 생각했지만 보법과 검을 다루는 기본을 자세히 살펴보니 아무래도 추측이지만 같은 검법인 것 같다.” “네, 앞에 펼친 것이 무명소검이고 뒤에 펼친 것이 무명대검입니다. 이름은 제가 편하도록 붙였습니다.” 데카츠의 추측에 진성은 그 추측에 대한 확인을 했다. “무명소검, 무명대검이라..... 허허허.. 꼭 맞는 이름이구먼.” “검가님, 그런데 대단하다 하심은?” 가만히 듣고 있던 히데끼는 때는 이때다 싶어 끼어들었다. “이것도 추측이지만 무명소검과 무명대검이 검법의 끝이 아닌 것 같은데?” 질문은 히데끼가 했지만 데카츠는 확인을 진성에게 했다. “아.. 맞습니다. 그 다음 단계의 수련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군. 내가 볼 때 이 무명소검과 무명대검으로 검을 신체와 일치 시키고 그 후에 기술을 제대로 익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 다음 단계가 무엇인지 알려 줄 수 있겠는가?” “다음이 무명비검, 무명기검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단계인지는 모르겠지만 무명9절초도 있습니다. 원래 비검, 기검, 9절초였는데 제가 이름을 무명이라 붙였습니다.” “그래... 비검, 기검, 9절초라... 진성군 조금이라도 펼칠 수 있겠는가?” 데카츠는 뭔가 생각하는 게 있는지 진성에게 그 다음 단계에 대해서 펼칠 수 있는지 물었다. “형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만...” “한번 해 보게. 내가 약간 오락가락 하는 게 있어서 말이지.” “네, 그럼.” 진성은 무명비검과 무명기검을 천천히 펼쳤다. 원래 무명비검은 검을 날리듯 하는 부분이 많았다. 이름은 비검이라 ‘나는 검’이었지만 실제 검을 손에서 떨어뜨리지는 않고 검법을 제대로, 빠르게 펼치면 마치 손에서 검이 떨어져 원하는 대로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검법이었다. 기검은 상대가 예측하기 힘든 검로의 검법이라는 의미였다. 진성으로서는 그 검법의 완성형을 본 적이 한번도 없었기에 자신이 배운 검로대로 차근차근 시범을 보였다. 무명비검과 무명기검을 보던 데카츠의 얼굴이 점점 심각해졌다. 처음 무명비검을 볼 때만 해도 고개를 갸우뚱 거렸지만 무명비검의 중간 부분이 넘어가자 혹시나 하는 표정이었고 무명기검의 중간을 넘기자 얼굴이 굳어져 있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고 심지어 당황하는 표정도 있었다. 히데끼는 자신이 보기에 어떤 비범함을 발견하기 어려운 검법의 시전을 검가인 데카츠가 너무 과대평가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 휴우.....” 자신의 시범을 본 데카츠가 한숨을 쉬자 진성은 의아해 했다. “제가 혹 실수라도?” “아닐세. 이 검법을 내 생전에 또 볼 줄은 상상도 못했군.” 데카츠의 얼굴에는 세월의 무게가 서려 있었다. 데카츠는 옛날을 생각했다. “네? 무명검법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보기만 한 줄 아는가? 직접 당하기도 했다네.” “정말이십니까? 어르신?” 직접 당했다는 데카츠의 말에 진성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이지. 어쩐지 점점 낯이 익더라니. 이런.... 내가 이 검법을 잊고 살았다니. 허허허..” “이 검법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도 모른다네. 나 역시 상대에게 뼈아픈 패배를 했을 뿐, 그 이상은 모른다네. 아니, 알 수도 있는 사람이 있지.”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진성의 목소리에는 뭔가 알 수 있다는 기대가 묻어났다. “당연히 알지. 당연히 알고말고.” “저.. 어르신, 그 분께 저를 소개시켜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진성의 목소리에는 기대를 넘어서 집착을 느낄 정도였다. “소개? 음.... 이왕 이렇게 된 것 점심 먹고 좀 쉬었다가 나와 같이 가세나.” 시각은 벌써 1시가 넘었다. “허허허.. 오늘은 점심이 조금 늦는구먼. 자, 다들 식사하러 갈까?” 바깥의 햇빛은 강해 보였지만 도장 안은 약간 서늘함마저 느낄 정도로 시원했다. 그렇다고 에어컨을 켜 놓은 것도 아닌데 진성은 약간 신기함마저 느꼈다. 데카츠는 히데끼와 진성, 서재필을 데리고 도장에서 뒤뜰로 연결된 작은 오솔길로 안내했다. 처음에 도장으로 들어왔을 때는 오솔길이 그다지 크지도 길지도 않고 단순한 길로 보였지만 실제로 걸어보니 아주 정취가 있었다. 집안에 이런 아담한 뜰을 만들어 그 사이로 작은 길을 만든 사람의 성격이 드러나는 듯했다. 작은 연못이 여러 개 있었고 그 주변으로 그다지 크고 높지 않은 나무들로 덮여 있어서 약간은 보통의 한국 정원과 다른 맛이 느껴졌다. 오솔길로 가니 정자와 비슷한 건물이 나왔다. 사방이 탁 트여 있고 그 너머로 큰 연못이 있어서 아주 시원해 보였다. 데카츠는 일행을 그곳으로 안내했다. 데카츠와 일행이 그 곳에 앉자 곧 몇 명의 중년 여자가 상을 내오더니 이어서 여러 음식들을 가지고 왔다. “어?” 서재필과 진성은 나온 음식을 보고는 조금 놀랐다. 일본 음식을 예상했지만 예상 밖으로 한국 전통 음식이 나왔다.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노인과 젊은 사람. 그렇게 생각하면 한국 음식도 충분히 나올 법도 했다. 하지만 여기는 일본이었다. 진성과 서재필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게다가 숟가락과 젓가락도 완전히 한국식이었다. “무엇을 그리 생각하나? 어차피 음식인데... 자 들게나.” 데카츠의 말과 함께 식사가 시작되었다. 마치 종갓집 같은 그런 정갈함이 배여 있는 음식이었다. 확실히 김치 하나하나에도 맛이 있었다. 이런 맛을 이런 곳에 와서 경험할 수 있으리라 생각도 해보지 못한 진성과 서재필이었다. 하지만 일단 시장했기 때문에 동치미 국물부터 떡갈비까지 가리지 않고 음식을 들었다. 담백한 산나물과 시원한 국물, 쫄깃한 갈비와 고소하게 구운 생선까지 한상 가득한 음식을 해치울 쯤 되자 다들 배가 부른 듯 젓가락과 숟가락을 놀리는 속도가 줄어들었다. “휴... 어르신 잘 먹었습니다. 일본에 와서 이렇게 잘 먹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서재필이었다. 직접 데카츠와 제대로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서재필은 스스럼없이 데카츠에게 말을 했고 데카츠는 그런 서재필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보고는 물었다. “허허허.. 그래 맛있게 드셨다니 다행이오. 그런데... ” “아, 실례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누구인지도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저는 진성군의 프로 게이머 팀의 팀장입니다. 책임자라고 보시면 됩니다.” “아, 그렇구려. 사실 내가 소개할 시간을 주지도 않았으니. 자네라고 불러도 되겠지? 그래 자네가 책임자라. 허허허.... 자네도 대단하군.”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따라와서 한바탕 대련만 하는 것을 본 후에, 아무 말도 없이 식사만 맛있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그런 상황에서 대뜸 누구인지 물었을 때 저렇게 잘 대처하는 사람을 데카츠는 처음 보았다. 아니, 서재필 나이 또래에서는 처음 보았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서재필은 그 대단하다는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단지 고개를 가볍게 숙여 예의를 표했다. 데카츠 역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진성씨, 제가 뭐 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네, 물어 보십시오.” 물을 마신 후에 진성은 질문한 히데끼에게 대답했다. “진성씨는 아직 20대 초반인 것 같은데 어떻게 그렇게 강해질 수 있었습니까?” 히데끼의 의문은 하나였다. 바로 도무지 불가능해 보이는 진성의 강함의 이유였다. 나이로 봐서 아무리 수련을 했다고 해도 특별한 방법이 없는 이상, 이런 강함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진성은 그런 이유에 대해 묻자 난감했다. “하하... 사실은 저도 확실히는 모릅니다. 제 사부님의 사제 되시는 분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처한 환경이 특수했기 때문에 그 환경 속에서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이런 결과가 생긴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환경이라는 게?” “사실, 제 사부님이 얼마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저에게 많은 것을 남겨 주시기를 바라셨습니다. 하지만 제가 너무 미흡해 그런 기대를 이루어드리기에 역부족이었죠. 저는 사부님의 상태를 안 이후부터 거의 잠도 자지 않고 수련에만 몰두했지요. 이유는 단 한 가지. 사부님 돌아가시기 전에 사부님께 조금이라도 성장한 제 모습을 보여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제가 성장한 것을 느낀 것은 사부님께서 돌아가신 후, 혼자 연습할 때였습니다. 제가 드릴 말은 이것 밖에 없네요.” 진성의 말이 끝나자 갑자기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히데끼는 그런 분위기를 느낀 듯 재빨리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말을...” “아닙니다. 시간도 지났고 어차피 사람은 죽게 마련입니다. 사부님의 경우, 많이 아쉽지만 그것을 부정해 봤자 사부님의 뜻에 반하는 것뿐입니다. 게다가 사부님께서는 제게 귀중한 유언을 주셨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아...” 히데끼는 진성에게서 단단한 무언가를 느꼈다. 아니, 단단하기 보다는 깊고 든든하다는 느낌이 적당했다. 어린 나이에 저런 깊은 면이 있다니. 어릴 때부터 무술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났다든가, 아니면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뭔가가 있을 줄 알았던 히데끼로서는 의외의 말이었다. 분위기가 가라앉자 데카츠가 히데끼에게 물었다. “히데끼, 진성군과 직접 손을 섞어 보니 느낌이 어떻더냐?” “네, 언제 공격해 올지 그 타이밍을 제대로 맞추기가 힘들었고 음... 지금 생각해 보니 내 공격이 읽힌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히데끼는 잠깐 생각해보더니 진성과의 대결에 대해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솔직하게 말했다. “그래, 맞다. 히데끼 네 공격은 이미 읽힌 것과 같다. 청경이라고 들어본 적이 있느냐?” “청경? 검가님, 청경이 무엇입니까?” “음.. 청경이라.. 일종의 기를 읽는 것과 같은 것이다. 경이라는 것부터 알아야 되는데 뭐랄까? 수련의 힘이라고나 할까. 기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무리가 없겠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진짜 권의 고수들은 경과 기가 조금 다르다고 하더구나. 아무튼, 청경이란 그런 경을 통해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한단다. 아, 예측이라는 말보다 경을 통해서 상대의 움직임을 본다고 하는 편이 더 낫겠다.” “그러면 제가 무엇을 할지 미리 알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히데끼 네가 무엇을 하려고 마음먹는지는 몰라도 실제로 움직이기로 작정했다면 알 수가 있지.” “네? 그게 가능한 얘기입니까?” “이를 테면, 발도를 하기 직전에 온 몸에 힘을 주기 때문에 근육이 순간 긴장을 하게 된다. 만약에 그런 근육의 압축을 알 수 있다면 당연히 움직임을 아는 것과 같지.” 데카츠는 몸을 움직여 가면서 설명했다. “근육의 압축? 그런 것까지 가능하나요?” “세세하게 아는 게 아니라 그런 것을 기미, 기척으로 느끼는 거다. 아마 내 생각에는 진성군이 청경을 어느 정도 마스터 한 걸로 보이는데..?” “어르신의 말씀이 맞습니다. 청경에 신경을 많이 쓴 탓인지 청경의 수련에는 성과가 있었습니다.” 청경에 대한 얘기를 듣고 있다가 데카츠가 자신에게 질문을 하자 솔직하게 진성은 대답했다. “역시.... 알겠느냐? 히데끼.” “네, 검가님.” 데카츠를 비롯한 네 명은 서로 궁금한 것을 묻고 대답했다. 상은 내어가고 가져온 차를 천천히 마시며 이야기를 했다. 히데끼는 주로 진성의 강함과 팔극신권에 대해서 물었고 서재필은 데카츠에게 진성과의 관계에 대해서 물었다. 데카츠와 진성은 주로 듣고 대답하는 입장이었다. 데카츠는 서재필에게 그룹에 대한 간략한 소개만 했다. 물론 이름이나 멤버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았다. 한참동안을 이야기하던 중에 데카츠가 진성에게 말을 던졌다. “진성군, 그 무명검법의 연원을 알게 되면 어쩔 텐가? 자네는 이미 권으로 경지에 올랐는데. 게다가 그 정도면 손에 칼이 있으나 없으나 별로 상관이 없을 것 같은데 무명검법에 그렇게 깊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는가? 내가 보기에 그 무명소검과 무명대검은 어느 정도 수련의 깊이가 있어 보이는데?” “어르신의 말씀이 맞습니다. 사실은 사부님의 유언 중에 제게 남겨주신 팔극신권과 무명검법의 끝을 보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또한 저 자신도 처음과는 달리 팔극신권과 무명검법의 끝을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강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시작한 것이기에 어느 정도 만족할 수 있는 끝을 보고 싶을 뿐입니다.” “오호... 그래? 유언이라... 음... 그렇군. 그럴 수도 있겠지.” 진성은 솔직하게 대답했고 데카츠는 그 대답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진성의 경지라면 이미 누구보다 강해지겠다는 생각은 없다고 봐야했다. 그 때는 다른 사람과의 경쟁이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데카츠는 그런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진성의 솔직한 대답에 걱정이 되기도 했다. 자신의 완성을 향해 가는 것도 쉽지 않은데.... 그 험난한 권과 검의 완성이라니. 데카츠 자신이 보기에 무명검법은 단순한 검법이 아니었다. 철저하게 검의 밑바탕에서부터 검을 만들어가는 검법이었다. 그런 검법의 끝을 보겠다니. 너무 큰 목표를 둔 진성이 조금은 안타까웠다. “어르신, 무명검법을 아신다는 그 분은 어떤 분이십니까?” “아.. 그 분? 음.. 직접적인 내 스승은 아니지만 내가 많이 신세를 졌던 분일세. 지금 90이 넘으셨는데도 너무 정정하셔서 탈이지. 허허허허..” “90? 대단하시네요.” “일본을 통틀어 그 검법을 제대로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그 분밖에 없을 것 같네. 한국에는 몇 명이 더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분은 평생 검으로 살아오신 분이지. 밝은 쪽으로 나오지 않으셔서 그렇지 나오셨다면 아마도 일본 최고 고수 반열에 오르셨을 정도로 그 경지는 대단하지. 내가 목표로 하는 분이라네.” 데카츠의 목표가 될 정도의 사람이 존재하다니. 진성은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을 알았다. 데카츠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 분이 일생에 단 한번 패한 적이 있는 걸로 아는데 그게 바로 자네가 말하는 그 무명검법의 검수에게 패한 거라네.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그 무명검법의 고수와 대결 후에 친해지신 걸로 아는데 그래서 아마 무명검법에 대해서 아시는 게 있을 듯 같네.” “어르신은 언제 무명검법을 쓰는 사람과 실력을 겨루셨습니까?” “나? 음... 젊었을 때지. 막 30대 초반 정도가 되었을 때인가? 한창 오만할 때였는데 어쩌다가 시비를 붙은 다른 도장 사람들과 시합을 하게 됐는데 그 때 내가 조금 잘 나갔거든. 그래서인지 상대를 심하게 몰아붙이고 있는데 어떤 노인이 끼어들었지. 그 노인으로 인해 산통이 깨지자 나는 노인에게 달려들었지. 허허허... 지금 생각하면 웃음만 나오는 젊은 시기의 혈기였지만 당시에는 물불 가리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허허허... 단 한번의 공격에, 단 한번의 찌르기에 노인의 목검의 끝이 내 목에 닿아 있더군. 너무 황당했지. 그래서 계속 덤볐는데 상대의 목검에 내 검이 단 한번도 닿지도 않고 나는 넘어졌다 일어났다 하기를 반복했지. 그러다 이를 악물고 덤볐는데 머리에 목검을 맞고는 그 자리에 뻗어버렸지. 허허허.. 지금 생각하니 그다지 나쁘게 만은 느껴지지 않는 추억이군.” 진성은 데카츠의 얘기를 귀담아 들었지만 어떤 실마리를 찾기에는 너무 막연한 얘기였다. 한 가지, 데카츠와 대결을 벌였던 그 노인이 어쩌면 사부에게 무명검법을 가르친 사람인지도 몰랐다. 지금은 시간이 없지만 어쩌면 나중에 그 노인에 대해 찾아야 할지도 몰랐다. 진성은 누구인지 모르지만 곧 만날 사람이 무명검법에 대한 사실을 알고 있기를 바랬다. 진성만 데리고 가려던 데카츠는 자신도 꼭 가야겠다는 히데끼와 서재필의 강력한 의지에 밀려 같이 가기로 했다. 데카츠는 진성과 함께 히데끼, 서재필을 데리고 차로 한참을 달려서야 어떤 산의 입구에 도착했다. 데카츠는 차에서 내려서 산위로 올라가는 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 이쪽으로 오게나.” 데카츠는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산을 오르는 걸음걸이나 그 빠르기가 젊은 사람 못지않았다. 아니, 젊은 사람을 능가할 정도였다. 일행 중에서 제일 그런 산행을 힘들어한 사람은 당연히 서재필이었다. 의외의 싸움 기술을 보여주었던 서재필이었지만 전문적으로 수련을 한 사람들에게는 체력적으로 미치지 못했다. 서재필의 몸이 땀으로 번들거리고 하늘이 노랗게 변하기 직전, 데카츠의 말이 들렸다. “이제 거의 다 왔네.” 데카츠는 위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아니라 옆으로 빠지는 샛길로 일행을 인도했다. 잘 살펴보지 않으면 옆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음을 쉽게 눈치 채기 힘들 정도로 길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조금 그 길을 따라 내려가니 사람의 손으로 정리한 듯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이번에는 오히려 내려가는 길이어서 올라오면서 흘렀던 땀이 가시는 걸 느꼈다. 이제 다 왔다는 데카츠의 말과는 달리 30분가량을 더 가서야 집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진성과 서재필, 히데끼는 집의 특이한 모양에 놀랐다. 처음 봤을 때는 2층 정도의 높이였는데 집이 있는 곳이 아주 가파른 곳이었다. 자세히 보니 아래쪽은 3, 4층 높이인 것 같은데 위쪽은 2층 높이인 것이다. 저런 곳에다 집을 지었다니. 데카츠가 집으로 다가가자 일행 역시 그 뒤를 따랐다. “어르신, 계십니까? 요시히로 데카츠입니다.” 아무 대답이 없었다. 집은 사람이 사는 듯했다. 장시간 사람이 살지 않고 집을 방치하면 대번에 알 수 있게 된다. 비탈진 면에 지어진 집은 확실히 사람의 흔적들이 있었다. “여... 데카츠로구먼.”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머리가 완전히 하얗게 변해 버린 노인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보니 머리 뿐 아니라 눈썹까지 하얗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90이 넘었다는 말과는 달리 이제 60대 후반 정도의 외모와 첫 인상에서도 충분히 그 활기를 느낄 수 있었다. “네, 데카츠입니다. 어르신.” “자네가 이런 시간에 웬일인가?” 백발노인은 의아하다는 듯, 데카츠와 그 뒤에 서 있는 일행을 쳐다보았다. 데카츠가 이곳을 찾아오는 시간은 거의 오전이었다. 오전에 왔다가 볼일을 보고 원하는 가르침을 받았다가 오후에 돌아가곤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오후, 그것도 약간 늦은 시간에 왔던 것이다. “어르신께 여쭈어 보고 싶은 게 있어서 왔습니다.” “혼자가 아니구먼. 오호... 저 젊은이는 정말 대단한데......” 데카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백발노인은 데카츠의 뒤를 보다가 진성을 발견하고는 탄성을 터트렸다. 백발노인은 한눈에 진성이 그 나이에 이룬 경지를 눈치 챘다. 알고 싶은 게 무엇인지는 전혀 묻지 않고 백발노인은 일행을 집 안으로 안내했다. 집안은 밖에서 보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집안에 비탈진 면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진성과 서재필, 히데끼는 안으로 들어가자 보통의 집보다 더 크고, 더 넓어 보이는 대신 집 구조 자체는 그리 다르지 않아 놀랐다. 집은 경사면에 세워졌지만 땅을 파서인지 집 내부에서는 외부의 그 광경을 그리기가 쉽지 않을 정도였다. 백발노인은 일행을 잠시 기다리라고 해 놓고는 사라졌다가 차를 내어 왔다. 단아하면서도 품격이 있는 방에 앉아서 일행은 차를 음미했다. 몇 번 찻잔에 입을 댄 후에야 데카츠는 말문을 열었다. “어르신, 오늘 찾아온 이유는 지난번에 말씀하신 그 검법에 대해서 알고자 온 것입니다.” “검법?” 찻잔을 손에 들고 있던 백발노인은 검법이라는 말에 호기심을 나타냈다. “어르신께서 유일하게 대결을 해서 진 적이 있다는 그 검법 말입니다.” “아, 그 검법? 그런데 그걸 왜?” “여기 이 젊은이가 그 검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뭐?” 백발노인은 손에 들었던 찻잔을 바닥에 떨어뜨리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놀랐다. 그런 반응에 데카츠 역시 조금은 놀랐다. 데카츠는 백발노인이 마음을 추스르길 기다렸다가 확실하게 대답했다. “네, 사실입니다.” “음.... 이쪽으로 따라오게.” 잠시 생각하던 백발노인은 먼저 일어서면서 일행에게 말했다. 백발노인을 따라서 간 곳은 지하였다. 정확하게 지하라고 말하기는 힘들었지만 집에서 아래로 내려갔으니 지하라고도 할 수 있었다. 집은 절벽위에 세워져 있었다. 그 집에서 아래로 향한 통로로 내려가니 커다란 공간이 있었는데 도장이었다. 믿을 수 없는 것은 도장의 전면에 커다란 창이 있었는데 그 창으로 계곡의 모습과 산자락, 게다가 멀리 마을까지 보였다. 처음에는 무슨 실제 사진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나무의 흔들림이라든가 새의 움직임을 본 후에 그 창이 진짜 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데카츠를 제외한 일행은 이 곳이 바로 절벽에 맞닿아 있고 창밖은 바로 절벽 밖이라는 것을 알았다.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이런 곳에다 집을 지어 살다니. 이런 절벽에 집을 지은 것 자체도 대단했다. 히데끼는 창으로 가까이 다가가 아래쪽을 보았는데 적어도 30미터 정도는 되어 보이는 높이였다. “젊은이, 그 검법에 대해 시범을 보여줄 수 있겠는가?” 백발노인의 청명한 목소리에 데카츠가 통역했고 진성은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도장 끝자락에 놓여져 있는 검 하나를 가져와 도장 가운데로 나섰다. 진성은 숨을 가다듬고는 천천히 무명소검과 무명대검을 차례차례 펼치기 시작했다. 부드러우면서도 끊이지 않는 무명소검, 강하고 빠르지만 약간은 거친 무명대검이 진성의 몸에서 흘러나왔다. 곧 진성의 시범은 끝이 났다. “휴.......” 백발노인은 한숨을 쉬면서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눈을 가렸다. 진성을 비롯한 일행은 그런 백발노인의 반응에 아무 말도 못하고 기다리기만 했다. “휴.... 정말 그 검법이군. 저 젊은이 이름이?” 기쁨인지 회한인지 모를 감정이 백발노인 얼굴에 가득 떠올랐다. “어르신, 강진성이라고 합니다. 한국 청년입니다.” “그렇지. 그랬을 게지.” 데카츠의 대답에 백발노인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진성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하자 옆에 있던 서재필이 상황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래.. 그런데 저 젊은이가 어떻게 저 검법은 알고 있는 건가?” “어르신, 저 젊은이의 사부되는 사람이 그 검법을 전수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사부는 저 젊은이에게 다시 전수해 준 것입니다.” 데카츠는 덧붙여 백발노인에게 진성의 사부 유조에 대한 이야기와 진성이 배운 검법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설명했다. 백발노인은 들으면서 어떤 부분에서는 놀랐고 또 다른 부분에서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 검법이 전승되고 있었다니... 허허허.. 하긴... 그랬을 테지.” 진성은 서재필에게서 백발노인의 말을 전해 듣고는 입이 말랐다. 마음은 별로 긴장하고 있다고 느껴지지 않았지만 몸은 정직했다. 하지만 진성은 기다렸다. 어차피 해 줄 말이라면 들을 수 있을 테고 그렇지 않다면 애간장을 태워봤자 헛수고일 게 뻔하기 때문이다. “어르신, 그 검법에 대해서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데카츠가 진성을 대신해서 백발노인에게 물었다. “당연히 말해야지. 당연히.” 백발노인은 옛날을 생각하는지 잠시 눈을 감았다가 이내 눈을 뜨고는 말을 시작했다. “꽤 오래 전이지. 언제인지는 나도 기억이 잘 나지 않네.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 분과 단 한번의 대결을 해서 내가 무참하게 패했고 그 후로 그 분에게 그 검법에 대해서 조금 배우고, 조금 들었다는 것 정도야. 내가 중년일 때 그 분을 만났으니 시간은 꽤 오래 됐지? 처음에 만났을 때 그 분의 자세와 기세를 봐서 백전백승을 자신할 정도로 나는 대결의 승리를 확신했지. 그 때 나는 여러 도장을 다니면서 검술 시합을 하곤 했는데 우연히 그 분과 만나게 됐지. 그분이 나보고 그러더군. 검은 곧잘 쓰는 것 같기도 한데 움직임이 형편없다고. 나는 화가 났지. 지금 생각해보면 웃을 수밖에 없지만 그 때 나는 꽤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거든. 그런데 형편없다는 말을 들었으니. 나는 곧바로 대련을 요청했고 그 분은 웃으며 흔쾌히 받아들었다네. 허허허.. 그 때는 그 분의 웃음도 무척이나 거슬렸지. 아무튼, 그래서 그 분과 검을 섞었는데.. 결과는 정말 비참했지.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저 친구, 데카츠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단 한번도 검을 부딪쳐 보기도 못하고 온 몸을 난타 당하다가 쓰러지고 말았네. 일어나 보니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움막이더군. 그 분이 나를 데리고 갔던 게지. 강함을 숭상하던 나는 곧바로 그 분에게 기술을 가르쳐 달라고 말했다네. 그 분은 웃으며 나에게 말씀하셨지. 뭐라고 말씀하신 줄 알겠나? 몸도, 마음도 기(氣)도 갖춰지지 않았는데 기술만 원한다며 한탄하셨지. 허허허.. 몸과 마음이라... 하지만 그 때에 그런 것을 알 수 없었던 나는 억지로 그 분 옆에 붙어 있었다네. 마치 거머리처럼. 그래서 그분에게서 그 대단하게 느껴지는 검법에 대해서도 듣고 한, 두 수 쯤은 배우기도 했다네. 지금 생각하면 염치없는 일이지만 그 때에서 목숨 걸고 했으니까. 나중에는 거의 형제처럼 지내기도 했었지.”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데카츠 역시 백발노인에게 들었던 것은 그 검법의 고수에게 패한 적이 있고 그 뒤에 친해졌다는 말 뿐이었기에 백발노인의 말을 정신을 모아서 들었다. “그 검법의 이름은 십허(十虛)라네. 굳이 붙이자면 십허검법이겠지.” “십허?” “무슨 뜻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물었더니 그 분이 그러시더군. 지금 이 검법은 열 가지가 비어 있다고. 그래서 십허라고. 나는 무엇이 비어 있냐고 물었지만 그 분은 가만히 웃으시기만 하셨다네. 나는 열 가지의 빈 것을 채우면 되는 줄 알았지만 오래지 않아 그 반대라는 것을 알았지. 그 분이 혼잣말로 하시는 것을 언뜻 들었는데 그 때의 말이 이랬다네. 내가 죽기 전에 이 십허를 백허로 바꿀 수 있을까?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니 그 분이 진정으로 바라던 것은 열 가지의 빈 것이 아니라 백가지의 빈 것이었다는 것을 알겠더군.” “빈 것이라니요?” 데카츠는 빈 것이라는 말에 무슨 소리인지 몰라 물었다. “그 검법은 기본적으로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검법이야. 십허가 백허가 되고, 백허가 천허, 만허가 되고 그 다음으로 계속 나가는 검법이라는 얘기지. 천허가 정말 천 가지를 비운다는 뜻은 아닌 것 같고 그만큼 무엇을, 어떻게 비워야 하는지 고민해야 된다는 뜻이겠지.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네. 나 역시 그 비운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네.” “아.....” “그 분이 떠나기 전에 했던 말이 기억이 나는군. 어느 따뜻한 봄날, 아주 날씨 좋은 날에 그 분은 고향으로 돌아가시겠다고 하시고는 짐을 챙기셨지. 나는 옆에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네. 따라가려고 했지만 그 분은 허락하지 않으셨지. 지금도 그 때 따라갔더라면 하고 후회는 가끔 하지만. 아무튼, 그 때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지. 이제 나는 내 검을 잊기 위해, 아니 내가 검법을 배웠는지, 익혔는지도 스스로도 알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길을 떠난다고. 지금은 그 말씀에 어렴풋하게는 뭔가 깊은 내용이 있다고 느끼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모른다네. 허허허...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지.” 진성은 서재필에게 말을 전해 듣고는 깜짝 놀랐다. 백발노인이 말한 그 무명검법의 고수의 마지막 말이 사부 유조가 얘기하는 그 경지와 같았다. 물고기가 물속에 있는지를 느끼지 못하는 경지. 진성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검법의 이름이 십허라니. 진성은 뭔가 손에 잡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이 정도라네. 그 분에게 가르침을 받기는 했지만 그 십허라는 검법에 대해서는 거의 말씀을 하지 않으셨고 내가 가진 검법에 대한 장점과 단점에 대해서 하나씩 짚어 주셨지. 그래 데카츠, 이 정도면 도움이 되었는가?” “아... 네, 어르신.” 데카츠는 옆에 앉아 있던 진성을 바라보았다. 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성은 사부님의 유언인 그 경지, 그리고 팔극신권과 무명검법의 끝이라는 것이 사부님만의 말이 아니라 그 무명검법의 고수 역시 같은 경지를 추구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데카츠 어르신, 저 한 가지만, 그 검법의 끝이 있다면 어떤 경지인지 한번 여쭤봐 주십시오.” “음.. 그래... 어르신, 그 십허라는 검의 끝이 있다면, 그 검법의 끝이 있다면 어떤 경지이겠습니까?” 데카츠는 진성의 말을 듣고는 백발노인에게로 눈을 돌려서 물었다. “끝이라.... 음.. 지금 생각해 보면 끝은 없다네. 검의 마지막에 가까이 갈 수는 있어도 결코 그 끝에 도달할 수는 없지. 아무리 검술이 발전해도, 아니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일평생 검에만 매진한다 하더라도 절대 검의 끝을 볼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게야.” “그 끝에 가까이 가는 경지라면 어떻습니까?” 데카츠는 물러서지 않고 백발노인에게 조금이라도 더 들을 수 있을까 싶어 물었다. “음... 내가 볼 때는 검사가 검을 버릴 경지랄까? 그 분의 마지막 말씀이 그 답이 아닐까 싶은데...? 저 젊은이가 궁금해 하는 내용인가?” 백발노인은 그 고수의 마지막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네, 사실은.....” 데카츠는 진성의 사부와 그 사부의 유언에 대해서 자세히 말했다. 또한 그 중에 팔극신권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진성의 지금 경지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 친구..... 제자에게 너무도 큰 짐을 남겨두고 갔구먼. 허허허.... 그래도 저 젊은이의 경지는 나도 정말 놀라우이. 어쩌면 저 젊은이라면 검의 끝에 자네보다, 나보다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것 같네. 허허허허..” 백발노인은 진성을 바라보면서 한편으로는 안타깝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견한 눈빛을 했다. 그럴 만큼 진성의 나이에 비해 이룬 경지는 대단했다. 백발노인은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삶을 생각해보면서 후배라고 할 수 있는 진성이 자신이 생각하는 경지를 뛰어넘는다면 그것도 기분 좋은 일이라 생각했다. “저도 그런 생각이 들어 제자로 꼬셔볼까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하하하하..” “그래? 음... 그렇다면 나도....” 데카츠의 말에 백발노인은 약간 장난스런 표정을 떠올리며 말했다. “예? 어르신도? 하하하하..” 진성은 백발노인과 데카츠의 말을 서재필에게 전해 들으며 식은땀을 흘렸다. 원래 땀과는 거리가 먼 진성도 자신을 아저씨라 불러 달라는 왕씨 성의 70대 노인과 정신연령이 같아 보이는 두 노인을 앞에 두고 담담할 수만은 없었다. 진성과 서재필, 히데끼 그리고 데카츠는 백발노인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날이 서서히 저물고 있는데다가 내려가는 길도 그리 쉽지 않았기에 그 날 내려가는 것을 포기했다. 점심을 워낙 잘 먹었지만 먹었던 것이 등산을 하면서 다 소화시킨 네 명은 백발노인의 집에서 또 포식을 했다. 저녁을 먹고 난 뒤에 잠시 차를 마시며 쉬던 일행에게 백발노인이 다가왔다. “내가 저 젊은이에게 뭔가 전해주고 싶은 게 있는데 자네들도 같이 해 보겠는가?” 백발노인의 말에 데카츠는 쌍수를 들고 환영했고 나머지는 이미 정해진 분위기대로 다시 지하로 내려가 그 커다란 창이 있는 도장으로 향했다. “내가 그 분께 배운 것은 단 한가지라네. 다른 것들은 대부분 내가 가지고 있던 기술을 그 분이 고쳐주시고 조언해 주신 것이지. 자, 자네들도 배우고 싶으면 잘 기억해서 수련해 보게나. 하지만 아마도 어려울 게야.” 백발노인은 도장의 가운데 쪽으로 이동했고 진성과 나머지 사람들도 같이 움직였다. 데카츠 뿐 아니라 히데끼와 서재필도 따랐다. 백발노인의 말은 진성에게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데카츠든, 히데끼든 누구든 배우고 싶으면 배우라는 얘기였다. 백발노인의 경지를 아는 데카츠 뿐 아니라 히데끼 역시 고수의 기술이라는 말에 흥분했다. “내가 배운 것은 축지법(蓄地法)이라네.” 잠깐 뜸을 들이던 백발노인은 이윽고 말을 했다. 하지만 그 말의 내용인 축지법을 들은 데카츠는 너무 의외라서 놀라 버렸다. 검법의 정묘한 이치나 새로운 검법일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난데없이 축지법이라니. 축지법은 그야말로 영화에서나 나오는 것으로 땅을 포개면서 이동하는 방법이었다. 누구도 이 축지법이 실제로 있음을 밝히지 못했다. 그런데 검의 고수 중의 고수라 불리는 이 백발노인의 입에서 축지법이라는 말이 나올 줄이야.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네? 어르신... 축지법이라면...” 데카츠는 혹시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확인했지만 백발노인은 정확하게 확인시켜 주었다. “맞아, 자네가 생각하는 그 땅을 접는 듯 가는 그 축지법이야.” “축지법이 실존했던 겁니까?” “내가 알기로는 확실히 실존하고 그 효과도 있다네.” “정말이십니까?” 데카츠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도저히 믿기 힘든 사실 때문이었다. “이 나이에 젊은 것들을 모아 놓고 농담이나 할 것 같은가?” “... 아니 그것은 아니지만...” “자네 마음은 이해한다네. 나도 그 분의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절대로 이런 축지법이 있다고 믿지 않았을 테니까.” “그러면 그 분이 직접 축지법을 펼치는 것을 보셨습니까?” “봤지. 봤으니 내 입으로 이런 축지법이 있다는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 게지.” “아....” “내가 저 젊은이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려고 하는 이유는 그 십허에 이 축지법이 원래 포함되어 있었다네. 내가 아까 저 젊은이의 그 시범을 보니 아마도 젊은이가 배운 검법에는 이 축지법의 일종인 보법이 빠져 있는 것 같던데....” 백발노인의 말을 통역한 데카츠의 말을 듣고 진성은 대답했다. “제가 배운 검법에는 그런 보법은 없었습니다.” “그래. 내가 보기에도 그렇더군. 자네가 이왕 검의 끝을 보려고 한다면 이 축지법도 배워 두는 게 좋을 거야.” 데카츠는 확실히 왜 이 축지법을 진성에게 가르쳐 주려는지 그 이유를 알았다. 그리고 축지법이라고 불리는 이 대단한 보법이 단지 하나의 검법에 속한 보법이라니. 그 십허라는 검법에 대한 궁금증이 가득 솟았다. 도대체 그 십허라는 검법의 완성된 형태가 어떤 것이길래 이런 보법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을까. 백발노인은 도장 가운데에서 뒷짐을 지고는 걸음을 뗐다. “어....?” “와...” “이...이런...” 그 어떤 묘한 걸음걸이도 아니었다. 단지 걷고 있을 뿐이었다. 보통 공원에서 산책 나온 노인들이 걷는 것과 비슷했다. 아니 더 천천히 걷는 백발노인이었다. 그런데 마치 중간 화면이 끊어지는 TV 방송처럼 순식간에 이동했다. 너무도 이상해서 다시 봐도 마찬가지였다. 몸 자체가 빠르다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백발노인의 몸만 보고 있으면 분명히 천천히 걷는 노인의 모습이었다. 백발노인은 천천히 걷는데 그 주변이 빨리 지나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데카츠를 비롯해서 사람들은 백발노인의 축지법이라는 말에 내심 믿지 않았지만 직접 보니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다지 빨라 보이지는 않았지만 정말 신기했다. “정말.... 축지법이 있긴 있었군요.” 백발노인은 그런 데카츠의 놀란 반응에 부드러운 웃음을 보였다. “이 방법은 아주 기초 중의 기초야. 뭐 나는 거의 수십 년 동안을 했지만 이 정도가 그 한계라네. 그 분은 그야말로 눈 몇 번 껌벅거릴 시간에 사라져 버리더구먼. 허허허허.. 한번 배워 보겠나?” “아.... 네.....” “축지법은 보통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달라. 정말 하늘을 날아다니고, 수십 킬로미터를 순식간에 공간을 가르는 그런 말도 안 되는 것은 절대 아니라네. 조금 전에도 봤겠지만 그 정도가 내가 수십 년을 꾸준히 훈련한 결과일세. 사람마다 다르고, 젊은 때 하면 더 좋을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서 축지법을 배워 차를 타지 않고 다닐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아. 아마도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테니까.” 차분하게 설명을 하는 백발노인의 말을 들은 일행은 모두 웃었다. 확실히 영화나 소설에서나 나오던 그런 축지법과는 달랐다. 하지만 진성은 어차피 먼 거리나, 짧은 거리나 줄인다는 점에서는 똑같은 게 아닌가 생각했다. 일단은 축지법을 배워볼 일이었다. 백발노인은 먼저 축지법에 대한 얘기를 먼저 했다. 축지법이 보통의 보법과 다른 점들을 설명했고 어떻게 공간을 끌어당기는 효과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나머지 사람들에 비해 서재필은 공간 어쩌구 하는 말에 너무나 신기해했다. 축지법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말도 그랬지만 그것을 지금 자신이 배우려고 한다는 사실은 스스로도 믿기 힘든 것이었다. 축지법의 요체는 마음과 몸과 기의 조화였다. 확실하게 그 이치를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마음과 몸의 단련과 함께 기 또는 경의 조화를 이루면서 축지법을 꾸준히 연습하게 되면 어느 순간 마음과 몸, 기의 일체감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 오게 된다는 설명이었다. 그런 일체감은 보통 한 순간이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 또한 꾸준한 수련으로 얻을 수 있는데 그런 일체감이 늘어나고 마음과 몸, 기의 균형 잡힌 성장과 함께 축지법의 수련이 경지에 오르면 제대로 된 축지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축지법은 확실히 신법이나 보통의 보법과는 달리 어떤 특별한 패턴의 보법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걷는 방법이었다. 축지법을 이용해서 특수한 보법을 밟으면 그 본래의 보법 효과에 축지법의 효과가 더해지는 꼴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마음과 몸, 기의 일체가 흔들릴 가능성이 많았다. 검으로서 고수의 반열에 오른 지 오래인 데카츠조차 마음과 몸, 기의 조화에 난감함을 느꼈다. 명경지수 같은 마음을 위해서 각고의 수련을 했지만 백발노인이 요구하는 기본 중에 단 한가지로도 제대로 해 내지 못하자 조금은 실망했다. 그렇다고 그런 것이 데카츠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데카츠가 쉽지 않았던 결정적인 이유는 너무 늦었다는 단 한 가지였다. 많은 나이가 데카츠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히데끼는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이제 기세를 줄여서 기를 수련하는 단계로 들어가던 히데끼였기에 몸과 마음, 기의 조화라는 말이 피부에 와 닿지 않았다. 대신 한 자라도 빠뜨리지 않고 마음에, 머리에 담았다. 백발노인은 처음부터 가르쳐 주려던 진성에게 각별히 신경을 썼다. 너무 나이가 들어도 곤란했고 기나 경의 수련이 일정 경지가 되지 않아도 불가능했다. 게다가 마음 역시 자신이 스스로 다스릴 수 있어야했다. 백발노인은 젊은 나이, 믿을 수 없는 경지를 확인했지만 나머지 한 가지 그 마음을 잘 몰랐기에 조금은 회의적이었지만 진성은 백발노인의 예상을 뛰어넘어 백발노인이 말한 기본 중의 기본이라는 마음과 몸, 경의 일체감을 순간적이나마 맛볼 수 있었다. “오호..... 자네는 정말... 타고 났구먼.” 그런 일체감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있었던 백발노인은 눈을 감은 채 그 여운을 느끼고 있는 진성을 보며 감탄하면서도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마치 손자를 보고 있는 할아버지의 웃음과 같았다. 진성의 일체감은 순간을 버티다가 깨져 버렸다. 하지만 진성은 그 순간 있었던 포만감의 여운을 느끼고 있었다. 백발노인의 적절한 충고와 확실한 도움이 있었기도 했지만 결정적으로 진성의 마음이 준비가 되었기에 가능했다. “허허허허... 자네의 그 경지에 이런 축지법의 일체감이 스며든다면 허허허... 호랑이에서 용이 될 거야. 용이 말일세.” 백발노인은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자신은 보통 사람이 뛰는 것보다 약간 빠른 정도로 걷는 속도이지만 어쩌면 이 젊은이는 자신의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백발노인은 흐뭇했다. 진성이 정신을 차리자 백발노인은 진성에게 축지법에 대한 더욱 자세한 얘기를 전했다. 자신이 그 검법의 고수에게 들었던 것과 자신이 그 동안 수련하면서 느꼈던 것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털어서 눈앞의 가능성 높은 젊은이에게 아낌없이 주었다. 백발노인의 열정이 전염된 탓인지 진성 역시 통역해 주는 데카츠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축지법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끝마치고 몇 번의 일체감을 수련하는 방법에 대한 실제 시범과 훈련을 다 끝내자 백발노인은 진성에게로 다가와 가볍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젊은이... 너무 그 목표에 매이지 말고 열심히 수련하고, 열심히 살다보면 그 실마리가 보일지도 모른다네. 주위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고, 도와주면서 살면 나중에 좋은 일이 있을 걸세. 아, 그리고 꼭, 그 축지법을 어느 정도 수련했다 싶으면 내게로 와서 보여주게나. 이 늙은이의 죽기 전 소원이라네. 어떤가? 들어줄 수 있겠는가?” 데카츠의 통역을 들은 진성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자신에게 잘 대해 주시는 이유를 쉽사리 짐작하지 못했다. “네, 어르신. 알겠습니다. 꼭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자네는 나와 어쩌면 가족관계일 수도 있다네. 내가 그 분과 거의 의형제를 맺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그 분의 제자의 제자인 자네와 나는 당연히 그만큼 가까운 사이지. 허허허.. 어려워하지 말고 앞으로도 내가 죽기 전까지 물어볼 게 있다거나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오게나. 자네는 언제라도 환영이야.” “아.... 네, 감사합니다. 어르신.” 진성의 공손한 대답과 행동이 마음에 들었는지 백발노인은 좀 더 살갑게 진성을 대했다. “어르신이라는 말이 조금 그렇구먼. 아저씨는 조금 그렇고... 이제부터는 할아버지라고 부르게. 그리고 자네 일본어도 좀 공부하고. 이 나이에 내가 한국어를 공부할 수는 없잖는가?” “예? 하하하... 예, 알겠습니다. 할아버지.” 통역을 통해 들은 진성은 아저씨라는 말에 잠깐 식은땀을 흘렸다가 냉큼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허허허허...... 데카츠, 자네보다 내가 빨랐네. 사부는 되지 못하더라도 할아버지는 되지 않았나? 허허허..” “예? 하하하.. 어르신도 참....” “야! 강진성!” 일본에서 돌아와 이팀장, 진팀장 등에게 먼저 인사를 한 뒤에 문명 온라인 팀의 요람으로 들어온 진성을 본 현준의 외침이었다. 현준은 영화의 멋진 액션마냥 책상을 날렵하게 한손으로 짚고 뛰어 넘어서 진성에게로 달려갔다. 평소 현준의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 사람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영화의 한 장면을 즐겼다. “너 어떻게 된 거냐? 그렇게 사라져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이.” “아.. 그것? 음... 아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이 부르셨거든. 그래서...” 진성은 어떻게 대답할지 막막해서 대충 얼버무렸다. “뭐? 아는 분? 내가 모르는 사람 중에 네가 아는 분이 있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 분이 도대체 누군데?” 속일 사람을 속이라는 표정의 현준이었다. “....음.... 너는 몰라도 돼.” “...........” 현준의 얼굴 표정이 바뀌었다. 약간 처량해 보이면서도 불쌍한 눈빛에 고개를 살짝 비틀어 애절한 느낌까지. 진성의 포커 페이스는 바로 무너졌다. “아.. 아니... 그게... 나중에 얘기해 줄께.” “......... 그래. 내가 참지. 이따 집에서. OK? OK!" 평소의 얼굴로 원상 복구된 현준은 자기가 물어 놓고는 대답도 자신이 해 버렸다. 현준의 너스레에 진성은 웃고 말았다. “매니저 형은?” “이팀장님 만나러 들어가셔서 안 나오시는데..”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냐? 그 싸가지 없는 녀석과 같이 가버리다니. 진규, 이 녀석이 야쿠자가 아닐까, 살인청부업자라는 둥 온갖 말로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단 말이야. 아... 물론 내가 가만히 있지는 않았지. 정의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응징해 주었지. 하하하하..” 현준은 주먹을 힘껏 쥐어 앞으로 내밀면서 말했다. 진성은 진규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마음으로는 느낄 수 있었다. “진규 연습은 잘 되어가냐?” “연습? 음... 그런데 네가 가르친 그 시민군 양성, 한국으로 돌아와서 10번도 넘게 했는데 도무지 가능성이 없어 보이던데... 모조리 쿠데타로 다 망했으니까. 진규 녀석, 메이저 리그 공식 경기에서 어떻게 그런 식으로 멋지게 게임을 장식했는지 지금 보면 이해가 안 돼.” “그래? 하긴 어떻게 보면 운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까.” “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네게는 거의 100%인 운이 있다는 얘기냐? 하하.. 내가 너를 위해서 특별한 전략을 준비했지. 한판 어때?” 현준은 아주 자신있게 목소리로 진성을 흘겨보며 말했다. “진짜? 그러면 내가 시민군 양성 확실하게 사용해도 괜찮아?” “물론. 당연히 안 돼지! 절대 안 돼! 시민군 양성은 제외하고! 확실히 제외! 어때?” “.............” 진성은 할 말이 없었다. 저런 말을 요람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외칠 수 있다니. “일본에서는 잘 했다고 들었는데..... 몸은 어떠냐?” 조팀장은 로플팀의 요람으로 들어온 진성을 보고는 반가워하며 물었다. 진성은 간단히 대답했다. “좋습니다.” 로플팀이 기대하고 있는 밀리터리 아트의 싱글 버전은 거의 준비가 완료된 상태였다. 베타 테스트는 할 필요가 없다는 자체 판단이 있었기에 출시일만 기다리는 중이었다. 또한 출시 발표 이후로 높아진 열기를 그대로 이어가기 위해서 진성과 현준이 테스트 한 게임 화면을 적당하게 편집해서 홈페이지를 통해 주기적으로 공개하고 있었다. 그래서 항간에 문명 온라인의 최고수 게이머 스키피오가 이번 메이저 리그를 끝으로 문명 온라인에서 손을 떼고 밀리터리 아트라는 새로운 종목으로 옮겨갈 예정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밀리터리 아트 공식 홈페이지에서 그런 소문을 근거 없는 소문으로 공식 발표했지만 네티즌들은 자신들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면서 소설을 쓰고 있었다. 밀리터리 아트 싱글버전에서는 더 이상 진성이 담당해야할 부분은 없었다. 대부분의 게임이 완성된 상태여서 특별한 하자나 긴급히 보수해야 할 곳이 아니라면 진성으로서는 별로 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정기적인 개발자 미팅에서 꼭 참석해서 밀리터리 아트 싱글버전 뿐 아니라 다음 버전인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과 최종 목표인 로플의 개발에 대해서 논의를 해야했다. 진성이 바쁜 와중에도 로플팀의 요람을 들린 이유는 바로 개발자 미팅 때문이었다. 시간이 흘러 미팅 시간이 되자 회의실로 개발 관련 사람들이 자리했다. 평소의 소규모가 아닌 전체적인 개발자 미팅이라서 15명을 훌쩍 넘었다. 진팀장이 안으로 들어오자 회의실 문은 닫혔다. “자, 오늘은 조금 의논해야 할 게 많으니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조팀장부터 먼저 말해 봐.” “네, 팀장님. 곧 출시하게 될 밀리터리 아트 싱글 버전의 개발은 일단 완료된 상태입니다. 기술적으로는 문제가 없고 게임 시스템의 구조적인 버그도 해결되었습니다. 청소년 층에 맞게 출시하기 위해 제기된 문제들도 다 해결이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저희 프로그램 팀에서는 밀리터리 아트 싱글 버전의 개발 완료를 말씀드립니다.” 조팀장의 말에 나머지 사람들은 박수를 치고 환호를 했다. 원래 이런 말을 하기 전에 모든 관련 사람들을 모아서 성대하게 해야 했지만 진팀장은 그런 파티는 출시 후에 하자고 밀고 나갔기 때문에 이렇게 회의실에서 책임자급 사람들만 모인 자리에서나마 사람들은 박수를 치고 기뻐했다. 하드웨어와 접속기 부분은 이미 밀리터리 아트 버전의 PVR-2 개발을 끝내고 차기 버전인 PVR-3를 위해 뛰고 있는 중이어서 소프트웨어의 개발 완료라는 말은 곧 게임 개발 완료라는 말과 같았다. 사람들은 한참 동안이나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험험..... 이제 밀리터리 아트 싱글 버전이 완료되었기 때문에 차기 계획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우...” 조팀장의 차기 계획이라는 말에 사람들은 악의 없는 비난을 했다. 군중심리인지 한 사람이 하니 다른 사람들도 따라했다. 조팀장은 곽팀장을 바라봤는데 곽팀장마저 자신을 비난하는 그 행동에 동참하고 있자 난감하면서도 화가 났다. 조팀장은 진팀장을 보았다. “어이, 어이, 비난은 개인적으로 하고. 일단 말을 들어보자고.” 진팀장이 조기 진화에 나섰다. 그 뒤를 조팀장이 이었다. “........ 다음 버전은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 버전입니다. 현재 가장 힘든 부분은 네트워크 속도입니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인터넷 망으로는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이 부분은 우리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단은 자체 개발한 특수 케이블을 이용해서 2:2 또는 3:3의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 버전을 개발할 생각입니다. 2:2가 가능하게 되면 3:3이나 4:4이상의 대결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조팀장의 말이 계속되자 환호와 비난의 분위기는 사라졌고 사람들은 가지고 온 프로젝트 노트에 조팀장의 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현재 1:1이 성공되었기에 복수간의 대결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만 그것을 인터넷과 비슷한 망에서 테스트를 해 본적이 없기 때문에 당분간은 특수 케이블과 이상적인 인터넷 망을 이용한 테스트에 시간을 할애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음.... 시간은 얼마 정도로 예상하나?” 진팀장은 조팀장의 말을 듣더니 날카롭게 물었다. “복수 대결을 다 포함하면 3, 4개월은 충분히 걸리고도 조금 모자랄지도 모릅니다.” “그래. 어차피 우리에게 시간은 있으니까. 곽팀장?” 진팀장이 부르자 곽팀장은 반사적으로 일어났다. “예, 대장님. 하드웨어 쪽은 지금 PVR-3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PVR-2에서 그 크기를 획기적으로 줄여서 비용을 절감하는 것을 우선적인 목표로 삼고 그 다음으로는 조금 더 현실적인 체험이 가능하도록 연구, 개발 중입니다.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어느 정도까지 현실적으로 표현하느냐는 가이드라인을 정하는 작업입니다. 밀리터리 아트 싱글 버전과 같이 너무 현실적일 경우에는 혼란이 생기지 않을까 우려가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PVR-3의 경우, 완전히 사실적으로 갈지, 아니면 조금 만화적인 면을 강조할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이 점은 하드웨어에서 고민을 시작했지만 전 개발팀에서 다뤄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사실적이다, 현실감 있다는 말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었다. PVR-2를 이용한 밀리터리 아트 싱글 버전의 경우 초기에 완성된 버전의 경우 그 피 튀기는 현실감으로 인해 오히려 부적격 판정을 받기도 했으니까. 더 현실적이 된다면 어쩌면 몸이 현실과 게임을 구분 못하게 되는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게 된다. 곽팀장의 말은 확실히 고려해야할, 다뤄야 할 문제였다. 진팀장은 그 문제에 대해서는 각 팀에서 생각해보고 나중에 다시 거론하자며 다음으로 넘겼다. 그 다음으로는 테스트 관련 팀을 맡은 변태수가 입을 열었다. “테스트와 관련해서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현재 진성군과 현준군이 테스트를 많이 했는데 지금 문명 온라인 프로 리그로 인해 바쁜 상태입니다. 앞으로 더 바빠질 지도 모르는데 제 생각에는 진성군과 현준군이 아닌 다른 테스터를 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프로 게이머로서가 아니라 단순히 테스터로서입니다.” “음.. 일리가 있군. 테스터가 없어서 테스트 스케줄이 밀린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태수, 계획은 있나?” “네, 제가 생각해 봤습니다. 어차피 밀리터리 아트와 같은 게임의 경험자는 전무한 상태기 때문에 마땅히 전문 테스터는 없다고 봐야합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게임에 관심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테스터를 뽑는 게 어떨까요? 밀리터리 아트의 공식 홈페이지에서 공식적으로 밀리터리 아트와 관련된 테스터를 모집한다고 하면 폭발적인 반응이 오지 않을까요? 게다가 그런 것을 이벤트처럼 한다면 밀리터리 아트에 대한 홍보도 되고... 일석이조가 아니겠습니까?” “음.. 좋은 계획인데..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지. 태수, 자네가 기획안을 마련해서 올려보도록.” 변태수에 이어 게임 음악 담당인 주희진 팀장이 말을 이었다. 주희진 팀장은 30대 중반으로 게임 음악에 대해서는 베테랑이었다. 로플팀 소속이었지만 문명 온라인 음악 작업에도 관여했다. 물론 밀리터리 아트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음악 역시 주희진 팀장의 손을 거친 것은 당연했다. “밀리터리 아트 싱글 버전은 그렇다 쳐도 온라인 버전과 나중에 있을 로플에서의 음악을 어떻게 하실지 궁금한데요.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에는 어느 정도 음악이 들어간다고 해도 완전 가상현실인 로플에서는 배경 음악이라는 게 있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주희진 팀장의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액션이나 어떤 전략처럼 미션이나 목적이 있는 플레이라면 배경음악으로 인해 게임에 더욱 몰입하게 되고 게임을 더욱 재미있게 즐기는데 도움을 주겠지만 완전한 가상현실을 표방하는 로플에서 음악이 어떻게 사용될지 주희진 팀장은 몹시 궁금했다. 음악의 배제라면 자신이 이 로플팀에서 있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주팀장, 몸이 달았구먼. 절대 자네가 로플팀에서 나가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 말이 나왔으니 로플 기획단계에서 나온 얘기를 잠시 해 주지. 로플에서의 게임 음악은 완전히 그 기본 개념부터 달라질 거야. 단순한 배경 음악이 아니라 로플이라는 세상 안에서 현실의 음악을 듣는 것처럼 들을 수 있는 커다란 구조를 바로 로플팀의 음악팀에서 만들어야 한다고.” 진팀장이 대답했지만 그 내용을 아는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잘 이해하지를 못했다. 원래는 주팀장의 위치라면 기획회의에 참석해야 했지만 주팀장은 기획단계가 지나고 나서 로플팀에 합류했기 때문에 그 내용에 대해서 잘 모를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하면 로플이라는 하나의 세상에서 유저들이 들을 수 있는 모든 음악의 틀을 바로 자네와 자네 팀원들이 만들어야 돼. 무슨 말인지 알겠나? 물론 어느 정도 틀만 있으면 그 틀을 이용해서 유저들이 직접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고 부를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그 로플이라는 가상세계의 음악의 틀은 바로 자네 팀에서 만들어야 해. 자네 팀이 악기의 구조와 악기의 음색, 그 연주방법에 대한 정의, 어느 정도까지 유저들의 음악에 대한 능력을 설정할 것인가, 음악과 관련된 직업이나 그 양성기관의 규모는 전체 유저에서 어느 정도의 비율로 생각할 것인가 등이 모두 자네 팀과 관련된 일이야.” “.... 그.. 그럼 바이올린과 같은 악기의 모델링을 저희 팀이 해야한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지. 물론 하지 않아도 돼. 유저 중에서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알아서 하겠지. 하지만 그걸 기다리자면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 자네 팀은 기본적으로 음악과 관련된 작업을 해서 현실에서 음악을 좋아했지만 시간이나 환경 때문에 제대로 즐기거나 공부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줄 수 있겠지. 그래도 할 일이 없다고 할 건가?” “... 그... 그걸 저희 팀이 다 할 수 있겠습니까?” “하하하.. 물론 할 수 없지. 지금은 조금 바쁘지만 진성군이 도와줄 거네. 진성군이 개발에 투입되면 아마 일이 조금 줄어들거야. 지금은 일단 기획적인 면에서부터 어떤 방향으로 이끌고 나갈지를 결정한 후에 자세하게 시스템을 완성해 보게.” 어머어마한 얘기를 들은 주팀장은 그 엄청남에 질려하면서도 오히려 웃었다. “호호호... 정말 쉽지 않는 일이네요. 하지만 정말 해 보고 싶은 일인데요. 저와 제 팀이 한 세계의 음악적인 기본 틀을 만들게 된다니..” “아마 아주 재미있을 거야.” “호호.. 그럴 것 같네요.” “나머지도 마찬가지야. 로플은 또 하나의 세상이라는 것을 명심해. 이용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 수도 있지만 우리가 기본적인 것을 만들어 주면 더 좋겠지. 하지만 자신이 하나하나 만들어 가는데서 기쁨을 느끼는 유저들도 적지 않으니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 사이에 균형을 잘 잡는 것이야. 무슨 소리인지 알겠지?” 진팀장은 명확하게 각팀에서 해야 할 일에 대한 것과 유저, 게이머가 하고 싶어하는 일에 대한 경계선을 잘 그으라고 말했다. “네, 팀장님.” “네, 대장님.” 회의에 들어온 사람들은 진팀장의 말을 듣고는 자기 나름대로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진성은 다른 사람들의 말이 다 끝나자 진팀장에게 손을 들어 발표 기회를 얻었다. “진성이..?” “네, 저도 로플에 대해 한 가지 이렇게 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 있어서 말씀드립니다.” “그래? 편하게 말해봐.” 진팀장의 허락이 떨어지자 진성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생각했던 것을 말했다. “아시다시피 저는 문명 온라인의 프로 게이머인 동시에 밀리터리 아트 싱글 버전의 테스터이자 개발자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로플을 보니 좀 다른 시야에서 보게 되더군요.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로플이 완성된다면 그 로플을 일종의 플랫폼, 다시 말해 기본적인 틀로 생각하고 그 토대 위에 기존에 있던 게임을 접목시키는 겁니다.” “오호... 예를 들면?” 진팀장은 약간 발상이 다른 진성의 말에 호기심을 보였다. “제 생각에 로플이 탄생되면 사람들은 덩그러니 커다란 세상에 내동댕이쳐질 겁니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아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기존의 온라인 게임처럼 즐거움을 위해, 가상 세계에서의 어떤 우월감을 위해 사냥을 한다거나 여러 직업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겠죠. 하지만 그런 것은 단지 아는 사람들끼리 또는 그다지 넓지 못한 경험만 제공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말씀드리면 문명 온라인의 게임 시스템을 로플 내에서 구현해서 로플 내에서 문명 온라인과 같은 대규모 전쟁이 가능하게 하는 겁니다. 로플에 성공적으로 접목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의논과 고려할 점들이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보통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경험할 수 없는 것을 가능하도록 하면 어떨까요? 그렇게 된다면 현실의 연장으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으로서 로플을 받아들이지 않을까요?” 진성의 제안은 약간 파격적인 면이 있었다. 이제까지 모든 게임들을 단계는 있었지만 개별적으로 생각했었던 진팀장과 개발 멤버들이었다. 진성이 말한 것은 로플이라는 커다란 시스템 위에 문명 온라인과 같은 게임을 구현해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만들자는 얘기였다. “만약에 그런 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제 말은 무조건, 일방적으로 그런 경험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로플이라는 커다란 세상에서 유저의 선택에 따라 문명 온라인이 벌어지는 그런 세계, 밀리터리 아트와 같은 것을 경험할 수 있는 세계도 필요하다는 얘기입니다.” “음..... 마음이 가기는 하지만 하나의 세상에 여러 목적을 가진 사회를 성공적으로, 조화롭게 구성할 수 있을까? 이것은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라 가능이냐, 불가능하냐의 문제로 보이는데..” 진성의 말에 진팀장은 그 핵심 문제를 지적했다. “그 점은 충분히 인정합니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일단 문명 온라인과 비슷한 세상을 로플 내에 만들어서 유저가 그 세계로 가 일반 병사에서부터 시작해서 부대를 이끄는 장군, 더 나아가서는 나라를 움직이는 왕이 되는 것도 괜찮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음...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유저의 수가 모자란다면? 그런 대단한 것이라면 못해도 수십만 명의 유저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진팀장의 딴지는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인공지능 캐릭터를 사용하는 겁니다. 10만의 군사 중에 인공지능 캐릭터와 유저가 같이 섞여 있는 겁니다. 유저가 점점 많아지면 인공 지능 캐릭터를 유저가 대신하는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음... 일리는 있지만 동의할 수는 없군. 현재 너무 멀리 보기는 힘들 것 같다. 지금은 또 하나의 세상인 로플을 만드는데 주력을 해야 할 때다. 하지만 진성아, 네가 생각했던 것들을 정리해서 나한테 가져와 봐라. 충분히 검토해 볼 가치는 있는 듯하니까. 자 다른 사람?” 진팀장은 진성의 얘기를 빠르게 정리한 뒤에 지금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할 수 있는 일을 명확하게 나누었다. 그리고 진성에게는 그것을 위한 기획을 맡긴 셈이었다. “.........” “없으면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끝내자. 아, 조팀장, 곽팀장, 진성이는 좀 남아라.” 사람들이 아무 말도 없자 진팀장은 회의를 종결시켰다. 사람들은 다 회의실 밖으로 나갔고 회의실 내에는 네 사람만이 남았다. 진성은 왜 남으라고 했는지 몰랐기에 멀뚱히 가만히 앉아 있었다. 진팀장의 얼굴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곽팀장과 조팀장은 알고 있겠지만 한 번 더 같이 머리를 맞대보자는 의미로 부른 거네. 진성아, 사실 며칠 전 요람에서 이용하던 가상현실 시스템 둘 중에서 하나가 잠깐 접속 불능상태가 된 적이 있었다. 지금까지 가상현실 시스템의 작동을 확신하고 나서 단 한번도 없었던 일이라서 철저히 조사했는데 아무런 원인이 나오지 않고 있다. 그 뒤로 계속 테스트를 하고는 있는데 전혀 원인이 될 만한 게 없다. 그 다음은 조팀장이 설명하지.” “네, 팀장님. 진성아, 접속기는 정상이었고 별 다른 이상이 없었는데... 내가 보기에는 가상현실이 접근을 거부한 것 같다. 10분 정도 있다가 원상태로 복구 되었지만 분명히 10분 정도는 어떻게 해도 접근조차 할 수 없었거든. 며칠 동안 아무리 찾아보고 찾아봐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현재 나와 프로그램 팀은 손을 든 상태다. 곽팀장님과 하드웨어팀도 도저히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진성이 네가 그 가상현실에 접속해서 뭔가 이유가 될 만한 것을 찾아봤으면 하는데...” 진팀장의 부탁에 진성은 망설였다. 다른 사람들이 못 찾는 것이라고 자신이 찾을 리는 만무했다. “저... 그런데 제가 그런 것을 찾을 수 있을까요?” “지금 현재 가상현실의 모든 부분을 다 보고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너 뿐이거든. 가상현실에서 프로그램 하는 것처럼 가상현실 자체를 한번 검사 좀 해 봐라. 출시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니.... 어쩌면 출시 자체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진성이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조팀장이 확실하게 말했다. 가상현실 시스템에서 진성만이 접근 가능한 영역이 존재했다.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에 출시를 결정했는데 이런 문제가 생기자 난감해 진 로플팀이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저녁 먹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저녁 먹고? 괜찮지. 오히려 그게 나을 수도 있지. 그렇게 하도록 하자고.” 문명 온라인 팀 요람에서 현준을 깨끗하게 밟아준 진성은 저녁을 간단하게 먹고는 로플팀의 요람으로 갔다. 낮에 약속했던 가상현실 시스템을 체크하기 위해서였다. 진성이 로플팀의 요람으로 들어서니 안에는 이미 모든 준비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요람에는 평소와 달리 핵심 멤버들만이 있었다. 이런 일은 많은 사람이 알수록 좋지 않은 일이었다. “여기는 준비 다 됐다.” “저도 준비 됐습니다.” “그럼 시작하자.” 진성은 오랜만이지만 능숙하게 PVR-2 접속기에 탑승했다. 시야가 어두워졌다가 밝아졌다. 익숙한 회사 지하의 도장이었다. 지금은 다른 용도로 바뀌었지만 가상에서는 여전히 도장으로 남아 있었다. 진성은 몇 번 움직여서 확실히 몸이 익숙해지는 것을 느꼈다. “진성아, 체크해 봐야 할 항목들을 지금 다운로드 해 줄 테니까 잘 봐라.” 조팀장의 말이 도장 안을 울렸다. 곧 진성 앞에 반투명 창이 뜨더니 거기로 조팀장이 말한 항목들이 일목요연하게 떠올랐다. 10초 정도가 지나니 다운로드가 끝났다. 진성은 항목 중에 맨 위에 있는 것을 손을 올려 가져다 댔다. 눌러지는 듯한 움직임이 있더니 곧 커다란 화면으로 변하면서 여러 가지 도형으로 된 그림들과 그 설명들이 나와 있었다. 조금 읽어보니 가상현실의 구조 중에서 확인해야 할 부분들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진성은 자신이 보통 가상현실에서 프로그램 할 때처럼 스스로 공간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진성은 이런 도장처럼 갇힌 공간이 아니라 자신이 일하기 편한 공간을 스스로 만들곤 했었다. 잠시 숨을 들이쉬더니 진성의 몸이 떠오르다가 픽 하고는 사라졌다. 사라진 진성은 아무것도 없는 공간으로 들어와 있었다. 의지로 여러 가지 모니터링 화면을 자기가 편한대로 만들었고 자신은 아무런 힘을 주지 않아도 공중에 떠 있을 수 있게 했다. 공간에 떠 있는 진성 주위로 커다란 화면들이 즐비했고 진성 앞에는 익숙한 키보드가 공중에 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키보드와 음성이 가장 적절한 입력수단이라 생각했다. 보통 공간을 만든다던가 하는 것은 의지로 할 수 있었지만 실제 프로그램의 일부를 고칠 때는 그에 관한 지식에 맞게 고쳐야 했기 때문에 진성으로서도 키보드가 필요했다. 진성은 왼쪽 화면 앞에 조팀장으로부터 다운로드 받은 항목들을 나열해 놓고는 하나씩 확인해 나갔다. 항목들은 20가지가 넘었다. 하지만 진성의 속도로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진성은 차례차례 체크를 했고 반이 넘은 12항목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13번째 항목에서 뭔가 이상함을 발견했다. 13번째 항목은 가상현실과 가상현실에 접속한 유저들 사이를 담당하는 인공지능 인터페이스 프로그램에 대한 체크였다. 이제까지의 모든 테스터들을 각각 담당했던 모든 인공지능 인터페이스 프로그램을 확인했는데 다른 사람들 것은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유독 진성 자신의 인터페이스 프로그램이 이상했다. 유저 한 명당 두 개의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할당이 되는 것이 기본이었다. 하나는 유저의 행동과 반응을 적절히 확인하고 해석하면서 성장하는 프로그램이고 다른 하나는 해석된 자극을 가상현실 시스템에 전달하는 프로그램이었다. 확실하게 두 프로그램의 하는 일은 달랐고 달라야 했다. 그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진성의 경우 그 두 프로그램이 하나로 합쳐져 있었다. 불가능한 현상이었다. 외부적으로 봤을 때는 분명히 하나로 합쳐져 있었고 두 프로그램을 합친 크기보다 거의 5배가 넘는 크기로 커져 있었다. 진성은 어쩌면 이것이 바로 자신이 이 가상현실에서 특별한 이유가 아닐까 생각했다. 옛날 처음 이상현상이 일어났을 때는 이런 이상한 부분이 없었다. 그 뒤로 이 부분은 진성 말고는 확인할 사람이 없기에 더욱 그런 의심이 들었다. 이렇게 뚜렷하게 다른 점이 있다면 의심해 보는 것이 당연했다. 진성은 일단 건너뛰고 다른 항목들에 대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 진성은 드디어 원하는 것을 발견했다. 19번째 가상현실 시스템의 방어벽 역할을 하는 프로그램을 확인하는 항목에서 접근불가의 원인이 될 만한 것을 발견한 것이다. 원래 독립적인 방어벽 프로그램에 다른 프로그램이 연결되어 있었다. 진성은 그 프로그램을 따라갔다. 한참을 따라갔는데 그 결과는 예상 외였다. 바로 자신의 그 비대한 인공지능 프로그램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까지 다 확인한 진성은 일단 조팀장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새로운 화면 하나를 만들었다. 진성이 이런 공간에 있을 때, 조팀장은 진성을 부를 수가 없었다. 진성이 조팀장을 부를 때에만 대화가 가능했다. “조팀장님, 찾았습니다.” “뭐? 찾았어?” 진성은 기뻐하는 조팀장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진성은 곧 그 이상한 부분만을 복사해서 조팀장에게로 전송했다. 전송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조팀장님, 저는 그 도장에서 연습 좀 하고 가겠습니다. 30분 뒤에 꺼내 주십시오.” “그래? 그래라. 좀 이따 보자.” 진성은 자신의 힘으로 도장으로 돌아갔다. 공간을 가르며 도장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요람의 모니터에 뚜렷이 붙잡혔다. 진성은 도장으로 나와 가볍게 몸을 움직이다가 팔극진결을 한번 펼쳤다. 확실히 팔극진결은 몸을 가볍고, 상쾌하게 그리고 깨끗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진성은 일본에서 백발노인에게 배운 축지법을 연습했다. 몸과 마음 그리고 경을 일치시키려 몸을 편안히 하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경을 천천히 끌어올렸다. 진성은 일본에서 여러 번 연습했는데도 그리 쉽지 않음을 느꼈다. 도무지 그 균형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휴......” 크게 숨을 쉰 진성은 서서히 자신의 몸이 몰입해 감을 느꼈다. 진성은 쉽지 않음을 느꼈지만 어떻게든 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확실히 가상현실에서 더 마음이 진정됨을 느꼈다. 진성은 눈을 감고 서서히 자신의 마음속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밖에 있던 조팀장과 핵심 멤버들은 진성이 보내준 코드들을 확인하느라 분주했다. 그래서인지 모니터를 통해 보이는 화면의 변화를 알지 못했다. 서 있던 진성의 몸 주위에서 빛 무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진성 자신도 그런 변화를 알지 못했다. 진성은 그 순간 몸과 마음과 경의 일체를 느꼈다. 일본에서 직접 백발노인의 지도를 받을 때도 순간만 지속할 수 있었던 그 일체감을 진성은 계속 맛볼 수 있었다. 진성은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도 모른 채 푸근한 일체의 느낌을 즐겼다. 진성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옮겼다. 진성이 한 발자국 옮길 때마다 공간이 휘어졌다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진성이 몇 걸음 옮기자 진성은 이미 도장의 벽을 박차고 공간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진성은 축지법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전혀 그런 것을 느낄 수도, 알 수도 없었다. “어? 진성이, 이 녀석 어디로 갔지?” 30분 후에 접속을 끊기 위해 진성을 찾은 조팀장은 모니터 속에 진성이 보이지 않자 여러 모니터를 통해 찾았지만 보이지도 않았고 검색해도 나타나지 않았다. 분명 조팀장 자신이 볼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린 것이다. “이 녀석, 어디로 간 거야?” 조팀장이 뭐라고 할 때, 진성은 무의 공간에서 여전히 일체감 속에서 눈을 감은 채 자신도 모르게 축지법을 쓰고 있었다. 뭔가가 없었기에 축지법이라는 것 자체가 별 의미가 없었지만 진성의 몸은 축지법을 쓰고 있었다. 진성은 얼마 지나지 않아 깨어났다. “음... 여기는?” 깜깜한 곳에서 눈을 뜨자 진성은 이상해했다. 분명히 도장에 있었는데... 진성은 이상함을 느끼며 곧 몸을 도장으로 이동시켰다. “강진성! 너 어디 갔다 이제 오냐?” 한참 걱정하던 참이라 조팀장은 갑자기 나타난 진성을 보고는 역성을 냈다. 진성은 무슨 이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시계를 보고는 자신이 잘못 한 셈이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진성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접속을 끝마쳤다. 진성이 가상현실 공간에서 전송한 프로그램 코드를 분석한 결과 조팀장과 팀원들은 단순한 버그로 단정했다. 거의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코드를 분석해 보니 아주 작은 가능성은 존재했다. 그런 가능성이 진성의 경우였다는 것은 그야말로 낮은 확률이 실현된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조팀장 역시 방어벽 프로그램과 진성의 인터페이스 프로그램이 연결된 또 다른 버그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두 가지가 우연히 같은 프로그램에 연결되었다는 말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러나 눈앞에 버젓이 그 결과가 놓여 있었기 때문에 조팀장은 단순한 프로그램 버그라고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진팀장과 요람 멤버들을 괴롭혔던 비공식적인 비상사태는 일단락되었다. “현준아, 병무청에서 입영통지서가 왔단다.” 늦게 집으로 돌아온 진성과 현준을 반기는 현준 어머니는 현준에게 우편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확실한 입영통지서였다. 현준은 진성을 한번 쓰윽 쳐다보고는 봉투 안에서 통지서를 꺼냈다. “하하... 신검에서 1급이 나왔으니 당연히... 전방 부대겠지?” 통지서를 확인하기 전, 현준은 너스레를 떨었다. 진성이 현준의 손에 들린 통지서를 빼앗아 대신 읽었다. 확실히 통지서였고 입영일자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어차피 학생이기 때문에 연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입영 통지서가 나오니 정말 군대에 가는 느낌이 실감나게 다가왔다. 현준의 얼굴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지만 속으로는 많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진성은 고아였기 때문에 이런 입영 통지서에 대해서는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진성아, 너는 군대갈 필요가 없지?” “그렇지.” “휴.... 일단 입영연기는 해야겠지?” “당연하지.” 현준은 진성에게서 통지서를 받아 들고는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런 뒷모습을 보던 진성은 현준의 어머니께 인사하고는 현준의 뒤를 따라 올라갔다. 방에서 옷을 갈아 입은 진성은 현준의 방으로 갔다. 현준은 들어왔던 그대로 책상에 앉아 있었다. 통지서를 몇 번이나 곱씹어 본 모양이다. 진성은 현준의 옆으로 가서 침대에 앉았다. “마음이 심란하지?” “.........” “다 가는 게 군대인데... 안 그래? 아, 나는 안 가는구나. 하하하... 고아라는 게 이럴 때 도움이 되다니..” “진성아... 나랑 군대 같이 가자!” 진지하게 뭔가를 결심한 듯 현준은 진성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뭐? 군대? 같이? 내가 왜? 나는 군대 안 간다니까.” 당연히 손을 뿌리치며 진성이 대답했다. “지원하면 되잖아! 그러니까 나랑 같이 군대 가자!” “........ 밖에서도 할 일 많아. 거기다 군대갈 생각 전혀 없는데. 해 본 적도 없다니까.” “친구잖아. 친구따라 강남 간다잖아.” “군대가 강남에 있냐? 괜히 나를 끌어들일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걸...” “너.... 내가 형으로 모실 테니까 우리집에 양자로 들어와라. 그래서... 같이 군대가자!” “뭐? 야, 말이 되는 얘기좀 해라. 나, 군대 절대 안 간다. 다들 안 가려는 군대를 내가 왜 가냐? 현준이 너는 어차피 가야 되니까 잘 고생하고 와라. 하하하하... 지금 당장 군대가는 것은 아니겠지만 나중에 가면 내가 면회 자주 갈께.” “너.... 나 진심이다. 같이 가자. 혼자 가는 것은 너무 무서워..” “나.... 진심이다. 절대 안가!” 현준의 끈질긴 말에도 진성은 절대 흔들리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2년이 넘는 시간을 그냥 버리기는 너무 아까웠다. 진성은 현준에게 군대가는 날 입영 열차에 탈 때, 열렬히 손은 흔들어 주겠다고 말했다. 현준은 친구도 아니라며 씩씩거렸지만 진성에게 통할 리가 만무했다. 한참을 얘기하다가 현준이 말이 많아지고 활달해지는 것을 본 진성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어차피 군대는 2, 3년 후의 일이다. 진성은 방으로 들어와 부드러운 클랙식 음악을 틀어 놓고는 계속 읽어나가고 있는 중국의 현대 작가 단편선을 펼쳐 들었다. “음... 나중에 현준이와 같이 군대 갈까?” 현준의 울부짖음이 느껴졌는지 진성은 문득 자신도 모르고 입에서 새어나온 말을 들었다. 그러다 피식 웃으며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흘러버렸다. 진성은 새벽같이 일어나 정원으로 나와 평소 하던대로 팔극진결을 수련했다. 몸 내에 있는 좋지 않은 것들을 배출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팔극진결을 수련하면 몸이 가뿐해지고 정화되는 듯했다. 또한 몸안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던 경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진성이 팔극진결을 수련할 때마다 조금씩 경이 성장하고 있음을 알았다. 실제 생활에서 경을 이용한 타격이나 공격의 기회는 전혀 없는 것과 같았지만 경의 성장과 함께 청경의 범위가 그 정확도가 점점 늘어나자 진성은 자신의 기이할 정도로 빠른 성장을 눈치 챌 수 있었다. 또 진성은 무명소검, 무명대검 뿐 아니라 본격적으로 무명비검(武名飛劍)의 수련에 돌입했다. 목검이 무명소검과 무명대검으로 인해 손에 어느 정도 붙는 느낌이 나자 무명비검을 연습했는데 확실히 무명소검과 무명대검을 제대로 하지 않고서는 무명비검을 수련하기 힘듬을 알 수 있었다. 진성은 무명비검의 완성을 목표로 두지 않고 그 움직임을 하고 나서의 좋은 기분을 즐기려했기 때문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었다. 진성에게는 그 뿐 아니라 또 하나의 수련이 늘어났다. 바로 축지법에 대한 수련이었다. 몸과 마음, 경의 조화 또는 일체를 기르는 훈련이었는데 진성은 이전보다 축지법이 더 쉬워졌음을 느꼈다.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공간을 접으며 걷는다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조금씩 일체감을 느끼는 순간에 도달하기 쉬워졌고 일체감을 점점 더 오래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진성 자신이 어려웠던 축지법이 이렇게 갑자기 쉬워진 이유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예전에 사부 유조의 죽음 후로 한순간에 높아진 경지에 대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은 천천히 성장하는 게 아니라 계단처럼 성장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 이유로 진성은 자신의 성장 역시 그런 것으로 이해했다. 수련이 늘어나자 아침 연습 시간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고 진성은 잠을 줄여야 했다. 하지만 수련이 늘어남으로 몸의 균형도 더 좋아져 잠을 덜 자고도 더 상쾌한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진성은 시간을 두고 잠을 줄이기로 결심했다. “이야, 오늘 아침은 아주 시원한 올갱이 국이로구만. 와.. 시원한데.... 이거 정말 올갱이 국 맞아?” 아침상에 올라온 올갱이 국을 맛본 현준 아버지의 아부성 섞인 말이었다. 현준 아버지는 평소에 할 수 있는 대로 이렇게 약발을 쳐 놓으면 나중에 돌아온다는 말을 여러 번 진성이와 현준이에게 하곤 했다. 현준 어머니 역시 그런 현준 아버지의 생각을 알고 있었지만 칭찬에 기분 좋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호호... 그래요? 오늘 저녁에는 당신 좋아하는 대하탕이라도 조금 해 볼까요?” “대하탕? 하하하... 좋지. 좋아. 오늘은 빨리 퇴근해야겠는걸... 하하하..” 현준은 자신의 아버지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분명 어제 자신의 입영 통지서가 온 것을 알고 있을 아버지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현준이 말을 꺼냈다. “아버지, 저 어제 입영 통지서가 왔는데요....” “뭐? 아, 그것. 그래서?” 알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아니라는 투로 말하는 아버지의 말에 현준은 정색했다. “네? 그래서라니요? 아버지로서 뭔가 할 말씀 없으세요?” “너, 당장 군대 갈 거냐?” “아니오.” “3년 정도 뒤에 군대 갈거지?” “아마도..” “그런데 지금 왜 걱정해? 그것 말고도 걱정할 게 많단다. 진성아, 이 올갱이 좀 팍팍 떠 먹어라. 아침에 이런 올갱이 국이 얼마나 몸에 좋은지 아느냐? 그래. 그렇지. 밥에 팍 말아서 먹으면 든든하지.” 현준 아버지, 진팀장은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는 투로 현준에게 말하고는 진성이를 닦달해서 올갱이 국에 밥을 말도록 만들었다. 현준은 아무도 자신을 생각하지 않는 것을 알았다. 당연하다는 것은 자신도 알았지만 그래도 서운한 것은 서운한 것이다. “형, 내가 형 맘을 잘 알지. 마음이 싱숭생숭하지?” 동생 현석이었다. 현석이 역시 형인 현준이, 진성이와 같은 쥬신 대학에 합격해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현준은 그런 현석의 대답에 조금 반가웠지만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을 듣고는 더 기분이 나빠졌다. “나도 조금 있으면 신검 받아야 되는데.... 형처럼 1급 나오면 어쩌지? 나는 딱 4급 정도 나와서 집에서 군대 다녔으면 좋겠는데..... 하하하..” “너.... 분명히 1급이다. 게다가 군대가면 특수부대로 차출될 거다!” 현준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군대 가기 싫어하는 현석에게 저주에 가까운 말을 했다. “현준아, 군대는 대한 민국 남자, 사내라면 누구나 가는 거란다. 현석이도..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것은 아주 좋은 거란다. 이 아버지도 아주 자랑스럽게 군복무를 마치고 왔지. 하하하하....” 현준 아버지가 너무 오버하자 앉아서 밥을 먹던 현준 어머니가 한 마디했다. “당신, 병역 특례라서 4주 훈련 받고 군복무 끝났잖아요.” “........... 여.. 여보..” 현준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목소리에서 한순간 낮고 가는 목소리로 바꿨다. “네? 아버지..... 병역 특례? 하하하하.... 4주 훈련.. 아하하하하....” “............” 현준 아버지는 국에 말았던 밥을 마셔버리고는 바로 출근해 버렸다. 부족함을 느끼고 있던 진규는 맹렬한 연습을 했다. 그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같이 하게 된 현준, 그리고 현준, 진규와 연습하면서 가끔 로플팀으로 가서 팀 미팅이나 머지 않아 어느 정도 기획단계를 벗어날 로플에 대해 논의하는 진성은 시간의 빠르기를 제대로 느끼지 못한 채 중국 북경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탈 시간을 맞이했다. 진규는 수십 번의 시도 중에서 단 두 번만 로마 문명의 시민군 양성 전략을 성공시켰다. 진규 자신도 그 때 자신이 스스로 시민군 양성을 성공시켰으나 게임의 한계로 인해 패배했던 그 게임을 믿을 수가 없었다. 무아지경에서의 컨트롤이라니. 스스로 믿기 힘든 것은 당연했다. 진규와 현준, 진성은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는 드디어 공항으로 가야했다. 두 시간 정도 후에 매니저 서재필과 보디가드 겸 운전사인 이준, 두 코디 현숙과 소희와 함께 세 게이머는 중국 북경행 비행기를 탔다. 북경 국제공항에 도착한 일행은 택시를 나눠타고 미리 예약한 쿤룬호텔로 향했다. 공항에서 30분도 걸리지 않는데다가 교통도 나쁘지 않은 위치에 호텔이 위치했고 호텔 자체도 상당히 고급 호텔이었다. 호텔에 도착해서 짐을 미리 정한 숙소에 풀고는 다시 모였다. 첫 번째로 해야하는 것은 당연히 게임 대회장 확인이었다. 현지에서 따로 밴과 운전하는 사람을 구했기에 이준은 완전히 보디가드로 돌아갔다. 매니저 서재필이 중국어에 아주 능통했기 때문에 그리 어렵지 않게 게임 대회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게임 대회장은 북경 시내에 위치했기 때문에 역시 반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게임 대회장은 중국 프로 리그의 메인 스폰서인 중화그룹이 만든 중화 게임 센터였다. 확실히 한국의 게임 큐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큰 건물이었다. 매니저 서재필의 말로는 3만여명의 입장이 가능한 대형 게임 센터였다. 서재필이 앞서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 뒤를 따르며 게임 센터로 들어갔다. 진행 요원이 있는 듯, 막았지만 서재필이 설명하고 증명이 될 만한 것을 보여주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간 일행은 그 규모에 놀랐다. 말이 3만명이지 그런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서 게임을 관람한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게다가 서재필이 중국은 이미 유료 관중이며 대부분의 게임에서 만원이라는 말을 했을 때 또 한번 놀랐다. 한국은 메이저 리그부터 유료를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중국의 경우는 워낙 사람이 많은 것이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었다. 대회 무대를 본 일행은 대기실로 갔다. 확실히 깨끗해서 신경을 쓴 흔적이 있었다. 대충 필요한 것들을 모두 보고는 나오는데 게임 센터의 정문 바로 앞에서 낯익지만 결코 맞부딪치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 만났다. “어... 저 사람들은....” 현숙의 목소리가 크게 울리자 서재필과 나머지 사람들도 그제야 다가오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중국 프로팀, 차이나 모터스였다. 지난번의 그 사건 때문에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위서형씨.” 서재필은 그 사건으로 알게 된 차이나 모터스의 팀장 위서형에게 인사를 했다. 서재필 자신의 판단에 따르면 위서형은 그리 막힌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원만한 일처리를 원했기에 더 말이 잘 통했음을 서재필은 기억할 수있었다. “아, 서재필씨, 안녕하세요.” 양 쪽의 사람들은 냉랭한 가운데 서재필과 위서형만 서로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는 등 살가운 관계를 보였다. 특히 차이나 모터스의 이주방은 진성을 노려보고 있었다. 진성은 자신을 향해 뚫어지게 보는 이주방을 보며 일본에서의 모습이 떠올라 빙긋 웃었다. 이주방은 그 웃음의 의미를 아는 듯, 얼굴이 붉으락 했다. 서재필과 위서형의 인사가 끝나자 두 팀은 서로 마주 지나쳤다. “강진성, 두고 보자. 이번에는 절대 가만히 넘어가지 않을 거다. 하하..” 자소 소프트 프로팀의 마지막에 있었던 진성과 차이나 모터스의 끝에 있었던 이주방이 스쳐 지날 때 이주방은 한 껏 차가움을 담아 진성에게 으러렁 거렸다. 하지만 진성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 여전히 빙긋 웃고 있었다. 아니, 그 분위기로 봐서 두고 보자는 얘기일 거라 생각했지만 그냥 웃고 싶었다. 이주방은 그런 진성의 모습에 더 화가 났는데 씩씩거렸다. 진성과 일행은 호텔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KFC를 찾았다. 중국음식을 많이 경험한 서재필이 앞장서서 KFC로 데려갔다. 서재필은 한동안 중국음식만 먹었던 시절이 있었는데도 적응하기 힘들다고 투덜대며 먼저 KFC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를 잡고 각자 양껏 주문해서 고소하고, 매콤한 닭다리를 뜯었다. “이런 곳까지 와서 이런 패스트 푸드 음식을 먹어야 한다니. 재필 오빠, 이게 말이나 돼? 왜 중국 음식 안 먹어? 나, 평소에 중국 음식 먹고 싶었다니까. 이런 닭다리는 서울 가도 실컷 먹을 수 있잖아?” 역시 현숙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매니저인 서재필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어도 현숙은 절대 조용히 넘기지 않았다. 현숙의 불평, 불만을 한동안 듣고만 있던 서재필은 뭔가 중대한 결심이라도 한 것인지 현숙에게 말했다. “그러면.... 내가 중국 전통 음식을 먹을 수 있게 해 주면.... 절대 후회하지 마라. 알겠냐? 그리고 절대 남기면 안 된다!” “뭐? 후회? 남기면 안 된다고? 나 최현숙을 그렇게 보다니. 내가 뭐 먹는 것 남기는 것 봤어? 진규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렇게 생각하잖아!” “예? 아... 예...” “당연하지요. 먹는 것을 남기면 천벌 받지요.” 진규는 윽박지르는 현숙의 당당한 태도에 억지로 대답했고 덤 앤 더머 커플인 현준은 당연히 현숙의 말에 무조건적인 동의를 보냈다. “그래? 그러면 오늘 저녁에는 전통 음식 잘하는 곳으로 갈 테니까. 그렇게 알아라. 나머지는 어쩔래?” 서재필은 진규, 현숙, 현준을 제외한 소희, 이준, 진성을 보며 물었다. “저..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소희는 저와 같이 전통 음식 먹으러 갈 겁니다.” 현숙이 소희의 말을 이어서는 바로 결정해 버렸다. 소희로서는 그런 현숙의 말을 들으면서 자신은 당연히 전통 음식을 먹어야 된다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현숙이 진성을 쳐다보기 직전 진성이 먼저 선수를 쳤다. “저는 준이형과 같이 그냥 간단히 이 근처에서 먹을께요.” 현숙의 무시무시한 눈빛을 견뎌낸 진성은 이준을 끌여들였다. 서재필의 식성을 알고 있던 진성은 그런 서재필이 마다할 정도라면 결사적으로 피해야 된다고 생각해서 평소에는 좋은 게 좋은 거다로 일관했던 태도를 버리고 이준을 끌어들일 정도로 적극적으로 변했다. 이준 역시 진성과 같이 호텔 근처에서 간단히 먹기로 했다. 서재필을 따라 전통 음식을 주로 하는 골목으로 들어간 일행은 온통 붉은 색으로 치장된 화려한 음식점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서재필이 시키는 것을 호기심 있게 지켜보았다. 중국말이라 잘 몰랐지만 어쩐지 맛있는 음식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정작 나온 것은 아주 기겁할 만한 것이 포함되어 현숙, 현준, 진규, 소희를 깜짝 놀라게 했다. 커다란 원형 탁자의 가운데에 떡하니 커다란 자라의 등껍데기가 놓여 있었다. 게다가 어른의 팔뚝만한 물고기를 통째로 요리한 것, 새까만 닭의 머리까지 들어간 탕, 색깔이 요상한 나물들.. 보는 순간 식욕이 사라짐을 느끼는 일행이었다. “으..... 이런 걸 어떻게 먹어?” “이 자리에 있는 것 남기면 절대 안 돼! 특히 최현숙 너 남기면 나중에 한국에 돌아갈 때, 여기 두고 간다. 내 말 농담 아니니까. 자, 다들 잘 먹어. 나는 근처에서 간단하게 먹고 올 테니까.” 현숙의 말에 서재필은 싱긋 웃으며 말하고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서재필이 나가버리자 현숙을 비롯한 네 명은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잠깐의 침묵이 지나자 현숙은 나무로 만든 젓가락을 들어서 물고기를 통째로 요리한 음식을 공략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이상해 보이는 것은 건들지도 않고 안전해 보이는 것만 먹었다. “어.... 우... 우욱... 컥..” 하지만 일행은 곧 알 수 있었다. 음식의 색깔이나 형태만 보고는 절대 맛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한국에서 먹었던 시금치와 비슷해서 집어 먹었던 진규는 호된 경험을 했다. 시금치가 아니라 마치 썩은 미나리를 먹은 듯했다. 냄새는 하수구에서 풍기는 악취 같았고 맛은 약간 쏘는 듯하면서도 썩은 것 같아 속에서 먹었던 것들이 올라왔다. 결국 진규는 화장실을 향해 뛰어갔다. 그러자 나머지 사람들의 기피 음식에 그 시금치와 비슷한 음식도 추가되었다. 소희가 붉은 버섯 같은 음식을 먹고 또 달려나가자 역시 그 음식도 기피대상에 추가되었다. 점차 사람들이 먹는 음식 가지수가 줄어들었다. 진규와 소희는 돌아오고 나서는 기본적으로 나온 차를 홀짝거리기만 할 뿐 음식에 일절 손을 대지도 않았다. 결국 먹은 음식은 물고기 요리와 돼지고기 조림과 비슷한 요리 그리고 돼지 수육 같은 요리였을 뿐이어서 반도 먹지 못한 셈이었다. 여전히 테이블 위에서 자라의 등껍질과 까만 닭머리가 둥둥 떠 있는 탕이 있었다. 현숙은 한참을 보다가 현준에게 말했다. “현준아, 저 등 껍데기 한번 들춰봐.” “누나가 해요. 저 안에.. 으....” “그러지 말고 네가 해 봐라.” “누나가 해요. 누가가 여기 오자고 했잖아요.” “뭐? 내가 오자고 했다고? 같이 오기로 한 거잖아. 남자가 쫀쫀하게 그런 것을 가지고...” “쫀쫀? 어쨌든 누나가 해요. 뭐든지 잘 먹는다면서요?” “뭐? 이게......” 순식간에 현준과 현숙의 말싸움이 붙었다. 소희와 진규는 그 불똥이 자신들에게 튈까봐 조바심을 낸 채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두 사람이 다투니 그 말싸움 자체도 소희와 진규에게는 예술이었다. 한참을 싸운 뒤에 결국 현준이 뒤집고 현숙이 그 안에 것을 먹어 보기로 했다. 현준이 껍데기를 뒤집어 꺼내자 안에는 뭔가 검갈색의 요리가 있었다. 고기 같기도 하고. 하지만 분명히 자라 고기인 것은 확실했다. 현준이 껍데기를 옆으로 치우고는 현숙을 바라보자 현숙은 이를 꽉 물고는 젓가락을 들어 그 이상한 고기 요리를 아주 조금 들어서는 떨면서 입으로 가져갔다. “... 우.. 우욱.. 우우욱!” 입안에 넣고 씹으려는데 뭔가 미끈했다. 게다가 풍기는 냄새는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고약한 냄새였다. 마치 고기를 삭힌 냄새에다 겨자와 여러 톡쏘는 양념을 해서 다시 삭힌 듯한... 고약한 냄새. 이제까지 참았던 현숙은 자리를 박차고 뛰어 나갔다. 그 뒤로는 아무도 테이블 위의 음식에 손대지 않았다. 현숙까지 무너진 바에야 이제 아무도 없는 것은 당연했다. 진성은 이준과 함께 근처를 배회했다. KFC는 먹었기 때문에 그와 비슷한 패스트 푸드나 아니면 간단히 먹을 거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북경은 상당히 치안이 좋은 지역이었다. 공안이라고 불리는 경찰들이 많기도 했지만 특히 수도라서 더 신경을 쓴 탓인지도 몰랐다. 진성과 이준은 편한 복장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맥도널드를 발견했다. “준이 형, 저기 맥도널드... 괜찮죠?” “당연하지. 그래도 먹을 수는 있으니까.” 이준은 대강 서재필이 데려간 사람들이 제대로 된 음식을 먹기는 힘들 걸로 예상했다. 그래서 그런지 평소 햄버거를 즐기지 않았던 이준은 맥도널드도 반가웠다. 배불리 먹은 이준과 진성은 남은 콜라를 마시며 북경의 거리를 걸었다. 낮은 날이 조금 더워서인지 밤에 사람들이 더 많았다. 어두워지는 거리에 사람들이 많으니 낮보다 훨씬 더 활기가 느껴졌다. 기분이 좋아서인지, 배가 불러서인지 진성과 이준은 천천히 걸었다. 하지만 모르는 길을 걸어서인지 조금은 으슥한 곳까지 오고 말았다. 진성은 생각보다 번화가와 이런 으슥한 곳이 멀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어... 북경에 이런 곳도 있었네.” 이준의 말처럼 약간 어둡고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인지 우범지역으로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한 무리의 사내들이 접근하고 있었다. “어이, 하고 있는 꼴을 보니... 하하하.. 이 녀석 둘이 우리에게 적선을 해 주신다는군...” 한 남자의 말에 다른 사람들은 막 웃었다. 진성과 이준은 중국어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기에 가만히 있었지만 그 분위기를 모를 리가 없었다. 이준은 한발짝 앞으로 나서며 손바닥을 보이면서 중국어를 모른다고 표시하며 웃음을 지었다. “어.. 이 새끼가 웃네. 어이... 우리들을 모욕하는 거다. 어차피 우리말을 알아듣지도 못하는 것 같은데... 하하하.. 이 녀석 둘, 혼 좀 내주라는 말이 없었더라도 하하... 웬지 일석이조인 것 같은데... 어때? 이 녀석들 혼도 좀 내주고 게다가 부수입도 있으면... 좋지?” “하하하... 당연하지요.” 대장으로 보이는 한 사람과 나머지는 10명이 약간 넘어 보이는 사내 무리였다. 진성과 이준은 막 웃고 떠드는 중국 사내들의 말을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 지는 알 수 있었다. 이제 그냥 넘어갈 수는 없을 것이다. “어쨋든 밟고 시작하자. 자, 얘들아.” 두목으로 보이는 사내의 외침에 열 명이 넘는 중국 사내들이 진성과 이준을 둘러쌌다. 진성과 이준 역시 그런 움직임에 대응했다. 등을 맞대고 있던 진성과 이준은 서로 한번 보고는 떨어졌다. 둘 모두 싸움에는 자신이 있었기에 불편할지도 몰라 일부러 떨어진 것이다. 어쩌면 배후를 걱정해야 한다는 점에서 더 힘들게 될지도 모를 결정을 두 사람은 단 한번의 눈맞춤으로 간단하게 해치웠다. 진성이 오른쪽 앞으로 나서자 이준은 왼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진성은 주위 건물을 보고는 이상함을 알았다. 멀리 거리의 끝을 본 후에야 원래 사람이 뜸한 게 아님을 알았다. 분명 거리의 반대쪽에 젊은 사내들 여럿이서 들어오는 사람들을 돌려보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뭘 달라는 것도 아니고 바로 에워싸다니. 그렇다면 진성 자신과 이준을 노린 것으로 봐야 되는데. 진성은 생각하기를 그만 두고 자신을 향해 짖쳐 들어오는 상대에게 집중했다. 이제까지 무술의 고수들과 대련을 많이 했던 진성으로서는 다가오는 거리의 투사들의 움직임이 단조롭게까지 느껴졌다. 빠르기는 여전히 빨랐지만 아무리 빨라도 그냥 다 피할 수 있는 것 같아서 실감이 나지 않았다. 몇 번 피하니 처음에는 한, 두 명이 덤볐던 것이 이제는 떼거지로 덤볐다. 진성은 오래 시간을 끌었다가는 사람들이 오는 것을 막던 사내들까지 달려오리라 생각하고는 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성의 오른쪽 다리를 차려는 상대의 발을 간단히 피한 후에 옆으로 다가가 몸통으로 공격했다. 진성의 공격을 받은 상대는 튕겨 나갔다가 일어나지 못했다. 진성은 차분히 상대를 보면서 빠르게 움직였다. 주먹을 내밀면 손목을 잡았다가 밀어 버렸고 발차기를 하면 피했다가 강력한 몸통 공격을 했다. 2, 3명이 나가 떨어지니 남은 몇 명이 품 안에서 칼을 꺼냈다. 그 순간 진성의 눈이 차가워졌다. 이미 상대가 자신과 이준을 목표로 공격한 것임을 알았기에 진성은 더 냉정해졌다. 칼을 휘두르면 휘두른 팔의 뼈를 부러뜨렸다. 칼을 찌르면 찌른 손에 경을 사용해 뼈를 부숴버렸다. 5명 정도가 몸의 한 부분이 부러진 채 바닥에 나뒹굴자 힘겹게 상대하던 이준은 숨통이 트였다. 곧 진성에게로 달려간 3명 중 2명이 한순간에 바닥에서 뒹굴자 길 끝에 있던 사내들은 뛰어왔다. 진성과 이준은 오는 사람을 맞이하려고 준비했다. 하지만 뛰어던 사내들은 누군가가 공안이라고 외치자 모두 순식간에 달아났다. 진성과 이준 역시 경찰로 보이는 복장의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벗어나 비교적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가서 사람들의 무리에 섞여 버렸다. 달려온 공안은 바닥에서 신음을 흘리고 있는 10명 가량의 폭력조직의 조직원을 볼 수 있었다. 일단 위험에서 벗어난 진성과 이준은 거리에서 다행히 한국인 유학생을 만나서 오래지 않아 호텔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진성은 돌아오면서 그 사내들이 의도적으로 그런 일을 벌인 것을 생각했다. 이준과 자신만 있어서 오히려 다행이었다. 만약에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면 누군가는 다쳤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진성은 어쩌면 서재필 일행이 위험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걱정이 되어 마음은 급했지만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어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었다. 이준 역시 진성의 말을 듣고는 누군가 자신들을 노린다는 심증을 굳혔다. “이거..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아직 무슨 문제가 있다고 확신할 수 없으니까 지금 당장은 신고하기 힘들다. 일단은 기다려 보자. 어쩌면 너와 내가 예민한 것인지도 모르니까.” 이준은 스스로 그렇기를 바라며 말했다. 진성은 생각했다. 이제 도착한 자신들이 중국 사람들에게 무슨 원한이나 금전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일을 했을 리가 없었다. 진성은 자꾸만 중국에서의 메이저 리그와 연결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단순한 강도는 아니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어떤 고리가 연결되는 듯했지만 진성은 애써 눌렀다. 시간은 흘러 일행들이 와야할 시간이 지났다. 이준과 진성의 마음은 더욱 더 급해졌다. 호텔 밖으로 나와 서성이던 두 사람은 고급 승용차 두 대가 호텔 앞에 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진성은 곧 신경을 끊고 그 너머의 길을 둘러 보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더 짙어져 가는 마음속의 의심이었다. 서재필이 화려한 음식점에 도착했을 때에는 막 화장실에서 현숙이 나오던 때였다. 현숙은 자신의 그 성격에 꼭 먹어야 된다면서 검은 닭 머리가 들어있는 탕도 먹었다. 하지만 생각외로 괜찮은 맛에 탄력을 받은 듯 남아 있던 음식들을 혼자서 처리하기 시작했다. 진규가 두 손 들어버린 시금치처럼 생긴 것도 척척 먹었고 자라로 만든 것도 코를 잡으며 먹었다. 그런 모습에 소희, 진규, 현준은 되도록이면 현숙이와 떨어졌다. 그런 엄청난, 불도저 같은 식성도 오래가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자극이 심한 많은 음식을 먹었던 탓인지 현숙의 배에서 엄청난 요동이 일어났고 현숙은 화장실을 들낙날락 해야 했다. 현숙이 어느 정도 참을 만 했을 때에야 서재필이 들어왔던 것이다. “어.... 와... 이렇게나 많이 먹었어?” 서재필은 테이블 위의 많은 음식들이 그대로일 줄 알았는데 제법 많이 먹어치운 듯한 모습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래서 둘러봤는데 진규, 현준, 소희의 눈이 다 배를 만지고 있는 현숙에게로 쏠렸다. 서재필은 단숨에 알았다. “... 설마.. 현숙이 너 혼자 이 많은 것을 다 먹은 것은 아니겠지?” 절대 현숙 혼자 다 먹은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음식을 먹었다라는 진규, 현준, 소희의 눈빛에 서재필은 순간을 눈을 감았다가 떴다. 속으로 이렇게 무식한 여자가 다 있냐고 투덜거리는 서재필이었다. 서재필은 이미 계산은 다 했기 때문에 현숙을 부축하고는 음식점을 나왔다. 중국 음식이라고 다 입에 맞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향료를 많이 썼다거나 전통 음식에 가까울수록 다른 나라, 특히 발효음식을 많이 먹는 한국 사람의 입에 맞지 않았다. 서재필은 일부러 소문난 전통 음식점에서 음식을 사주었다. 하지만 이런 무식한 결과가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서재필은 자신의 잘못도 있기에 배탈이 났는지 힘이 없어하는 현숙을 부축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그 뒤를 진규와 소희, 현준이 따랐다. 대기시켜둔 밴을 타고는 호텔로 돌아가려고 했다. 당분간은 고급 호텔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한참을 가는데 갑자기 승용차 하나가 밴 앞을 가로 막았다. 현지 운전사는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았고 그에 따라 서재필은 물론 일행 모두 앞으로 쏠렸다. 서재필은 앞으로 튀어나온 승용차를 보고 한바탕 욕을 하려고 했지만 승용차에서 내리는 거칠어 보이는 사내들을 보고는 순식간에 욕이 들어가 버렸다. 하지만 밴을 운전했던 사람은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난 모양인지 거칠게 차문을 열고는 승용차의 운전석으로 다가갔다. “아니.. 운전을 이따위로 해? 무슨 이런 녀석이 다 있어? 이렇게 했다가는 사람.... 퍽!” 하던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운전석에서 내린 날렵한 사내의 수도에 목을 가격당한 운전사는 정신을 잃어 기절해 버렸다. 그 모습을 본 서재필은 밴에서 재빨리 내렸다. 노련한 서재필은 일단 흥분하지 않고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하하하.. 무슨 일이냐고? 너희들이 우리가 가는 길을 막았잖아. 그래서 화가 나서 차에서 내린 것 뿐이야.” 우락부락한 거친 사내의 말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지금 차가 놓여 있는 것만 봐도 밴이 가는 길을 승용차가 막고 있는 꼴이었다. 서재필은 그런 상대의 대답을 듣고는 시비 거는 것임을 바로 알았다. 이럴 때는 상대가 원하는 것을 아는 게 중요했다. 진성이나 이준이 있었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텐데... 서재필은 늦었지만 후회를 했다. 보디가드를 남겨 두고 오다니. “무엇을 원하십니까?” 서재필의 목소리는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운적석에서 내린 날렵한 사내는 그런 서재필을 보고는 놀라운 얼굴을 했다. 자신들이야 이런 일이 본업이지만 보통 사람들이 이런 대담함을 보이는 경우는 이제껏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하하.. 대단하군요.” 반말의 거친 말로 응수했던 사내와는 격이 다른 듯, 아마도 그 중에서 조금 지위가 있는 날렵한 사내의 부드러운 말이었다. 서재필은 자신이 말을 해야 할 상대가 날렵한 사내임을 알았다. “이런 일을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하하하.. 정말 대단하시군요. 이런 상황에서 그렇게 침착하게 말하다니. 놀랍습니다. 저, 사실은 저와 같이 가주셨으면 하는데요. 당연히 저 밴안에 계신 분 모두.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 반항해 봤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듯 합니다만.” 서재필은 상대가 타고 온 승용차가 상당히 좋은 차임을 알고는 절대 강도나 돈을 노리는 것은 아님을 알았다. 하지만 자신들을 납치하려는 줄은 생각도 못했다. 서재필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자신들이 사라지면 좋아할 사람들. 개인적이 아닌 이렇게 전체를 상대로 한 것이라면... 당연히 메이저 리그와 관계된 사람들일 것이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 것이지만... 누가 시켰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서재필은 상대가 말이 통하는 상대여서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질문을 던졌다. 역시나 날렵한 사내는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역시. 제가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는 것도 아시겠죠? 제가 그 쪽이 맘에 들어서 한 마디만 말씀드리죠. 저로서도 잘 알 수 없는 높은 곳에서 당신들에 대한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당신들이 무슨 일과 연관되어 있는지는 제 알바 아닙니다. 자, 이제 저희를 따라 가 주시죠.” “그것은 안 될 말입니다. 현준, 진규! 차에서 내리지 마라.” 부드러운 날렵한 사내의 말에 서재필은 칼로 자르듯 단호하게 대답했다. 게다가 여차하면 차에서 내릴 작정이었던 현준과 진규에게 경고까지 날렸다. 그러자 날렵한 사내의 사람좋은 얼굴에 서리가 끼였다. “하하하... 말씀을 잘 알아들을 줄 알았는데... 마지막에 가서 실망이네요. 형적, 해결해라.” 그러자 처음에 거칠게 소리쳤던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서재필은 밴 뒤를 봤지만 그 곳에도 승용차 한대가 막고 서 있었고 4명의 사내가 서 있었다. 서재필 혼자라면 어떻게 도망쳐 보겠지만 지금 밴 안에는 현준, 진규와 소희, 현숙이 타고 있었다. 서재필은 혼자 버텨 보다가 안 된다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평소 북경의 치안 상태를 믿은 자신의 실책임을 알았다. 가만히 서 있던 서재필에게 약간 덩치가 있는 거친 사내는 돌진하며 주먹을 휘둘렀다. 윙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서재필은 여유 있게 피했다. 생각보다 상대가 민첩하지 못함을 안 서재필은 천천히 옆으로 돌았다. 첫 공격을 상대가 쉽게 피해내는 것을 본 거친 사내는 양손을 뻗어서는 다가왔다. 돌진이 아니라 상대와 맞붙기 위해서였다. 서재필은 가만히 서 있었다. 자신의 실력이 거친 사내보다는 났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가까이 다가온 거친 사내가 오른손을 손바닥 채로 서재필의 얼굴을 향해 날리자 서재필은 옆으로 슬쩍 피했다. 하지만 거친 사내의 오른손은 서재필을 따라갔다. 서재필은 팔을 들어올려 힘을 흘리면서 발을 굴려서 몸을 회전시켰다. 가까운 거리였기 때문에 돌려차기가 아닌 몸돌려 무릎차기가 되어 버렸다. 근접거리에서 회전력이 가해진 서재필의 무릎에 거친 사내의 얼굴이 정확하게 가격당하자 단 한방으로 거친 사내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생각외의 솜씨에 날렵한 사내마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역시.... 뭔가가 있으니까 그렇게 딱딱하게 나오셨군. 아주 대단하긴 한데... 우린 말이야. 1:1만 하는 게 아니거든. 얘들아.” 날렵한 사내의 지시에 밴의 앞쪽에서 3명, 뒤쪽에서 4명이 서서히 서재필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서재필은 바로 상황 판단을 했다. 서재필은 앞의 세 명을 향해 돌진했다. 어떻게 해서든 숫자를 줄여야 좀 더 오래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나간 서재필은 땅을 박차고 도약해서 크게 돌려차기를 시도했다. 큰 동작에 상대는 피했다. 서재필 역시 그 돌려차기로 상대를 쓰러뜨리지는 못하리라 예상했다. 바닥에 착지하면서 그대로 회전력을 살려서 뒤에서 접근하는 상대를 팔꿈치로 끝장내 버렸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숙여서 다리 후리기로 한 명을 쓰러뜨리고 다시 한번 굉장히 빠른 끊어치는 듯한 돌려차기로 세 명중 마지막 한명의 얼굴을 날려버렸다. 순식간에 세 명이 쓰러져서 일어날 줄을 모르자 날렵한 사내는 흠칫 놀랐다. 상대가 강함은 어느정도 알았지만 이렇게 빠른 판단과 그 판단을 활용할 수 있는 실력을 갖췄는지는 예상도 못했다. “이거. 이거.. 정보가 틀렸군.” 날렵한 사내는 가볍게 말하고는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들리지 않게 몇 마디 하고는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았다. 날렵한 사내는 숨을 몰아쉬는 서재필을 향해 말했다. “계속 해 봐. 당신을 상대할 녀석들을 20명도 넘게 남아 있으니까. 좀 쉬었다가 할까? 하하하하.” 서재필은 방금 날렵한 사내가 전화한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서재필은 갑자기 움직인 탓인지 힘든 듯 숨을 몰아쉬면서도 뒤에서 다가오는 네 명의 사내들에게서 신경을 놓지 않았다. 서재필은 자신이 기습을 했기에 이겼지 정면으로 붙었다면 자신이 세 명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날렵한 사내는 그런 상대를 보면서 비웃었다. “하하하.. 그러기에 처음부터 조용히 따라갔으면 이런 꼴을 당하지 않지. 하하하... 당신 이런 것은 예상하지 못했지? 하하하하..” 뭐가 그리 웃긴지 막 웃어대는 날렵한 사내의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허허허.. 이런.. 이거 근래에 찾아보기 힘든 활극이구먼. 허허허.. 그런데 아무래도 이 독사 녀석이 나쁜 놈인 것 같군. 허허허” 날렵한 사내는 갑자기 등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너무나 놀랐다. 자신이 무술의 고수는 아니었지만 정식으로 무술을 배운데다가 오랜 실전으로 어느 정도 감각은 있다고 자부했는데 등뒤에서 소리가 들리다니. 게다가 지금도 등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자신의 감각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날렵한 사내는 앞으로 튕겨나가며 뒤로 돌았다. 뒤를 보니 검버섯이 얼굴에 난 노인이 한 명 서 있었다. 주위를 살펴봐도 검버섯 노인 밖에 없었다. 날렵한 사내는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노인이 내게 말하셨소?” “허허허... 그래도 귓구멍은 막히지 않았구먼. 독사 녀석이 사람 말길을 알아 듣는구먼. 허허허.. 신기하군. 신기해.” 평소 날렵한 몸과 얼굴로 인해 독사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듣기 싫었기에 아무도 자신 앞에서는 그런 별명을 부르지 않는데 눈앞의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한 노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독사라는 말을 하자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노인, 말을 가려 하십시오.” “허허.. 이제는 독사가 사람에게 훈계까지 하는구먼. 허허.. 말세야. 말세.” 날렵한 사내는 노인에게 점점 말려드는 듯해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고수에게서 느껴지는 어떤 기세도 느끼지 못했기에 날렵한 사내는 자신의 방심으로 생각했다. “노인, 그만 가보시오. 괜히 이런 일에 끼여서 봉변 당하지나 말고.” “허허.. 어른을 공경할 줄 아는 독사라니.. 허허.. 오래 살고 볼 일이로고.” 계속된 검버섯 노인의 말에 날렵한 사내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다. 평소 노인과 아이들에게는 손을 대지 않았던 자신의 신조가 서서히 무너짐을 느꼈다. 노인과 아이들을 제외하고 여자에게까지 남자와 똑같이 잘못하면 주먹으로 응징했던 날렵한 사내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스스로 협객이라 생각하는 터라 더욱 그랬다. “어르신, 여기는 위험하니 저 쪽으로 가십시오. 네?” “오호.... 자네도 사람이었구먼. 그런데 저렇게 한 사람을 여러 명이서 공격하는 것은 사람이 할 일이 아니지. 암.. 그렇고 말고.” 날렵한 사내의 호칭이 어르신으로 바뀌자 검버섯 노인의 호칭 역시 독사에서 자네로 바뀌었다. 날렵한 사내는 노인이 비켜날 생각을 하지 않자 무시했다. 어차피 자신은 저 한국에서 온 사람들을 데려가기만 하면 된다. “야, 빨리 끝내라.” 날렵한 사내의 말이 들리자 뒤에서 있던 사내들이 일제히 서재필을 둘러싼 후 공격을 시작했다. 완전히 막을 수 없었던 서재필은 확실히 타격을 클 것으로 생각되는 것만 막았다. 그러다 보니 상처가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밴 안에서는 배탈로 인해 반 기절한 현숙, 활극을 보고는 바로 기절한 소희를 제외한 현준과 진규가 무서웠지만 그래도 서재필만 저렇게 당하게 내버려 둘 수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차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 나왔다. 그리고는 서재필을 공격하는 두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퍽, 퍼퍽!” 용기에 비해 실력이 받쳐주지 않아서인지 한방에 나가떨어졌다. 허리와 다리를 각각 맞은 진규와 현준은 비틀거리면서 일어났지만 사내들은 서재필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허허허.... 이런.. 이런.. 그냥 지나가려고 했더니만 안 되겠구먼.” 검버섯 노인은 날렵한 사내가 말릴 틈도 없이 서재필에게로 다가갔다.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것만 같았던 노인인지라 날렵한 사내는 소리쳤다. “어르신, 그쪽으로 가지 마십시오. 위험합니다.” “허허허.. 저 녀석 완전히 썩은 녀석은 아니군, 그래.” 검버섯 노인은 뒤에서 들리는 날렵한 사내의 말을 무시하고는 서재필에게로 다가갔다. 네 명은 한창 서재필을 공격하고 있었기에 누가 다가오는 것도 잘 모르고 있었다. 서재필의 정면에서 공격하던 사내는 허리 부근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뒤로 돌아볼 수 없었다. 화끈거리는 순간 사내는 정신을 잃어 버렸다. 검버섯 노인은 천천히 움직였지만 사내들은 믿을 수 없게도 노인이 몸 일부에 손만 대면 그 순간 무너져 내리며 기절하는 것이었다. 마지막 남은 사내는 노인을 피하려 했지만 어쩐지 타이밍이 맞지 않아 도망도 칠 수 없었다. 팔로 뿌리칠려고 했지만 겨드랑이 아래에 노인의 손이 닿자 역시 곧바로 정신을 잃고는 무너지고 말았다. 서재필은 갑자기 나타난 검버섯 노인의 등장에 놀랐지만 적이 아님을 알고는 마음을 놓았다. 게다가 자신이 그토록 고생했던 상대를 손바닥 뒤집는 것과 같이 쉽게 처리하자 너무도 놀랐다. “어르신은?” “허허허... 지나가다 조금 도와준 것이니 너무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네. 허허허...” 검버섯 노인은 서재필을 잠깐 보더니 밴 앞의 승용차 옆에 서 있는 날렵한 사내를 보고는 말했다. “이 녀석아, 왠만하면 오늘은 그만 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떠냐?” 날렵한 사내는 검버섯 노인의 움직임을 보고 부하들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실력자가 수십명이 있어도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자신에게 떨어진 명령이었다. 최선을 다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연락했기 때문에 조금 있으면 20명이 넘는 부하들이 달려올 것이다. 날렵한 사내는 저 노인에게 전부 다 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최선을 다하리라 결심했다. 그 때였다. “어이, 젊은이 왠만하면 오늘은 그만하는게 좋을 것 같은데...?” 또 다시 바로 등뒤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렵한 사내는 힘이 없어 풀리려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며 버텼다. 그리고는 뒤로 돌았다. 이번에는 머리에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대머리 노인이었다. 날렵한 사내는 미칠 것 같았다. 분명히 이 노인도 대단한 사람임에 분명할 것이다. “어.. 맹현?” 검버섯 노인은 대머리 노인을 보더니 대뜸 말했다. “현추 형님, 이렇게 혼자 재미 보시다니요. 허허허... ” “허허.. 그런가? 젊은이들 사이에 끼면 젊어 진다더니 그런 것 같구먼. 자네도 끼게.” 날렵한 사내는 자신을 무시하고 북치고 장구치는 두 노인의 모습에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날렵한 사내에게 청천벼락 같은 소리가 들렸다. “어이, 지렁이. 천지회 화천극이 시키던가?” 날렵한 사내는 중국 대륙 전체에 뻗어 있는 폭력단이자 지하조직인 천지회의 북경지부 소속이었다. 천지회의 노른자 격인 북경과 상해 등 여러 대도시에서 활동하기란 쉽지 않았다. 평소 그런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지만 천지회의 규칙에 절대 천지회라는 것을 드러내지 말라는 것이 있어서 조심해 왔다. 그런데 이렇게 곧바로 천지회라는 이름을 말하다니. 게다가 천지회 종주인 화천극의 이름을 말하다니. 날렵한 사내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허허허.. 이 지렁이 녀석이 눈을 부라리네. 천극이 이 녀석이 부하들 교육을 잘 못 시켰구먼. 허허허.. 이번에 만나면 단단히 교육을 시켜야겠군.” 날렵한 사내는 대머리 노인이 말하는 내용을 듣고는 너무도 놀랐다. 천지회 종주인 화천극의 이름을 마구 부르면서 교육 운운 하다니. 날렵한 사내로서는 도저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그 실력으로 봐서 헛소리나 할 노인은 아니었기에 더욱 그랬다. “천극이 뭐라고 이야기하면 맹현 어르신이 그만 두라고 했다고 말하면 아무 문제 없을 거다. 허허허.. 천극 이 녀석, 따끔한 맛을 보여 줘야겠군. 어이, 안 가?” “예? 아...” 대머리 노인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날렵한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대답을 하고 말았다. 게다가 저절로 높임말이 나왔다. “어르신 두 분은 어떤 분이십니까? 제가 돌아가도 말을 해야 하기 때문에.....” “허허... 나는 조맹현이라고 하고. 저 쪽에 있는 형님은 왕현추라는 분이시네. 천극 그 녀석이 자신의 부하가 왕형님을 공격했다는 사실을 알면 아마 땅을 치고 후회할 걸세. 허허허.. 재미있겠구먼. 허허.. 자네는 빨리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예, 알겠습니다. 어르신. 저는 이만.....” 날렵한 사내는 자신에게로 달려오는 부하들을 달려가 만나고서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사내들이 다 사라지고 나서야 서재필은 완전히 마음을 놓았고 허리와 다리에 손을 가져다 댄 채 일어서 있던 진규와 현준은 바닥에 주저 앉고 말았다. 서재필은 억지로 몸을 움직여서 검버섯 노인에게로 다가갔다. “어르신 덕분에 이렇게 곤란을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허허허... 말을 참 듣기 좋게 하는구려. 그런데 저런 녀석들이 노린다면 무슨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서재필은 왕현추의 물음에 자신이 생각했던 것을 차분히 풀었다. 왕현추는 서재필의 설명 중에 게임 리그라는 말을 듣고는 말허리를 자르고 물었다. “혹시.. 그 게임 리그라는게.. 여기 북경에서 열린다는 것 맞소? 그리고 한국에서 온 것도?” “네, 어르신. 여기에 저희 소속 사람 두 명이 빠지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허허.. 그렇구먼. 그런데 혹시 강진성이라는 오락 선수를 아시오? 아, 모른다면 할 수 없지? 하긴 그 녀석이 그렇게 유명할 리는 없겠지만.. 허허허..” 왕현추는 그 때까지도 진성의 말을 악의 없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예? 진성이를 아십니까? 진성이는 저희 팀 소속입니다.” “.... 정말이오?” “네, 그렇습니다. 아마 지금쯤 호텔에서 저희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허허허... 이런 일이.. 허허... 진성이에게 잘 보일 기회가 생겼군. 허허허... 사실 나는 진성이 사부의 사제 되는 사람이오. 왕현추라고 하오.” “아... 그렇습니까? 그러면 유조 어르신의 사제 되십니까?” “유조 사형을 아시오?” “진성을 통해서 몇 번 뵌 적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군. 그나마 다행이오. 허허허... 지나가다 재미로 도와주었는데.... 이거 오늘 정말 잘 했구먼... 허허허... 어이, 맹현. 이리 오게. 이 사람들이 진성이와 같이 온 사람들이라고 하는데... ” “예? 정말입니까? 이야... 이런 일도 있네요.” “허허.. 그러게나 말일세. 아, 그러면 그 호텔이 어디오?” “쿤룬 호텔입니다.” “아, 그 호텔? 음... 맹현, 우리도 그 호텔로 갈까?” 서재필과 얘기하던 왕현추는 조맹현을 보고는 말했다. “형님도 두 말하면 잔소리지요. 지금쯤 제자놈의 차가 오고 있을 테니 그 차 타고 가면 되겠네요.” “그래. 그러면 되겠군. 허허허허...” 서재필과 다른 사람에게는 묻지도 두 사람은 호텔을 정하고는 서로 조금 전에 있었던 얘기를 나누었다. 바로 옆에 있었던 서재필은 정말 무안함을 느꼈다. 서재필은 눈앞의 두 노인의 하는 행동을 보고 아까 날렵한 사내의 심정을 똑같이 느꼈다. 두 노인이 악의적으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지만 한순간 서재필은 자신이 이 두 노인에게는 투명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들 정도였다. 천지회의 종주인 화천극은 소림권의 고수로 알려져 있었다. 물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화천극이 고수라는 것 정도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화천극이 유맹이라는 그룹에 가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은 거의 아는 사람이 없는 사실이었다. 유맹이라는 존재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어느 정도는 알려질 수밖에 없는데 우연히 그 존재와 그 멤버를 안 화천극은 유맹의 멤버들을 개인적으로 찾아다니면서 그룹의 가입에 대해 물었지만 아직까지 그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유맹의 규칙상 적어도 두 명의 추천이 있어야 했고 두 명의 추천이 있더라도 테스트를 통과해야 가능했다. 화천극은 그 두명의 추천 자체를 받을 수가 없었다. 이유는 단 한가지. 실력 미달이었다. 화천극은 말도 안 된다며 반항했지만 유맹의 가장 어리고 가장 약하다는 조맹현에게 흠씬 얻어맞고서야 자신의 실력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에 포기하지 않고 계속 쫓아다니고 있었다. 화천극이 유맹을 쫓아다니는 이유는 자신의 실력을 높이기 위해서나 어떤 모임의 위력을 빌려는 뜻이 아니었다. 단지 그 그룹이 유(遊)와 협(俠)을 숭상하는 것과 그 멤버들이 하나같이 화천극 자신이 배울 만한 인품과 실력의 소유자여서였다. 화천극 말고도 또 하나 유맹의 회원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차이나 모터스의 회장인 이장령이었다. 이장령은 육합권(六合拳)의 고수였는데 역시 비슷한 이유로 유맹의 가입을 원했지만 역시 비슷한 이유인 실력 미달로 거절당했다. 그런 이유로 둘이 같이 유맹의 멤버들을 만나기도 했다. 고급 승용차 두 대가 오자 두 노인과 서재필 일행은 각각 나눠타고 호텔로 출발했다. 정신을 잃고 있었던 두 여자는 왕현추가 몇 번 몸을 주무르자 곧 정신을 차렸고 특히 현숙은 체증까지 깨끗하게 사라졌다. 대머리 노인인 조맹현이 한 여자는 자신에게 맡기라고 했지만 형인 왕현추의 눈빛 하나에 찌그러지고 말았다. “어?” 다가온 고급 승용차에서 서재필이 내리자 이준과 진성은 동시에 놀란 소리를 입밖으로 냈다. 그 뒤로 진규와 현준 그리고 소희와 현숙이 내리자 아무 말도 못하고 이준과 진성은 서로 쳐다보고만 있었다. 무슨 영문인지 몰랐다. 게다가 더 놀란 것은 서재필이 누군가에게 당한 듯 멍이 든 곳도 있었고 옷이 뜯어진 흔적도 보였다. 진성은 그 다음에 차에서 내리는 두 노인을 봤는데 그 중 검버섯 노인을 보고는 탄성을 발했다. “아....” “진성아, 잘 있었냐?” “아.... 왕 어르신... 아니... 왕.. 아..저씨..” 왕현추의 찌르는 듯한 눈빛에 진성은 말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래... 허허허허.. 잊지 않았구나. 허허허..” 왕현추의 얼굴 두꺼움은 그 누구도 따라가지 못하는 듯, 인자한 노인의 얼굴로 순식간에 돌아가버렸다. “그런데 어떻게....”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자. 늙으니 다리가 아프구나.”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천연덕스럽게 한 왕현추는 조맹현과 함께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진성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호텔의 휴게실에 모여서야 진성은 있었던 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진성과 이준의 예감이 맞아 떨어져 상당히 위험한 상황이 연출되었지만 다행히 그곳을 지나가던 왕현추와 조맹현에 의해 도움을 받았던 것이다. “왕... 아..저씨는 어떻게 그곳을 지나가게 되셨나요?” 진성은 아직도 검버섯이 난 노인에게 아저씨라는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내가 북경에 오면 꼭 가는 음식점이 그 근처에 있거든. 이번에 네가 오락선수로 여기 온다고 해서 이 친구와 같이 그 음식점에 들러서 입맛 좀 끌어올리고 오려고 했지. 그러다가 저 젊은이를 만났고.” 왕현추는 서재필을 보고 젊은이라 칭했지만 진성은 그 젊은이라는 호칭이 어색했다. 30대 초반이라... 70대 노인에게는 젊은이겠지만. 아무튼 진성은 무척이나 다행임을 느꼈지만 무슨 이유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진성은 매니저 서재필에게 이준과 자신이 당했던 일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했다. 서재필은 어느 정도 예상을 한 모양인지 곰곰이 생각만 하고 있었고 옆에서 듣던 왕현추가 싸늘하게 한마디 했다. “화천극 그 녀석이 미쳤군.” 왕현추는 정말 화가 났을 때는 오히려 겉모습을 차가워졌다. 잘못하면 이번 일로 유맹과 천지회의 마찰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조맹현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 큰 천지회의 조직을 다 이용한다고 해도 유맹이라는 친목조직을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유맹 자체는 몇 사람의 모임이지만 그 한사람, 한사람이 각 무술계의 태두와 같은 위치여서 그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면 천지회에서도 상당히 힘들 것은 당연했다. 왕현추는 진성과 서재필에게 이런 일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 물었다. “젊은이, 내가 보기에 누군가 천지회에 이번 일을 부탁한 모양인데 짚이는 게 없소? 북경에서 이런 일을 벌일 정도면 맘 먹고 제대로 했다는 얘기인데. 진성아, 너는 뭐 생각나는 것은 없냐?” 서재필은 진성을 쳐다보고 진성은 서재필을 향해 바라보았다. 둘은 서로의 생각이 일치함을 알았다. 서재필은 한숨을 쉬면서 일본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했다. “어르신, 이 게임 리그가 처음에는 일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장황하지만 설득력있는 서재필의 설명이 끝이나자 왕현추는 대강의 일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얼굴에는 서릿발이 서 있었다. 서재필이 한국어로 설명했기 때문에 왕현추 옆에 있던 대머리 노인 조맹현은 무슨 말인지 몰랐다가 왕현추가 짤막하게 설명해 주고 나서야 조맹현은 왕현추가 왜 그토록 화가 났는지 알 수 있었다. 한마디로 얘기하자면 아이들 싸움에 어른이 끼인 꼴이었다. 그것도 그냥 어른이 아니라 차이나 모터스의 총수인 이장령과 천지회의 종주인 화천극이 이주방이라는 어린 아이의 응석을 받아준 꼴이었다. 이장령과 화천극 둘 모두 유맹의 존재를 알고 가입하려고 안달을 내는 사람이어서 왕현추는 더 화가 난 것이다. 아이들의 일을 제대로 분간할 줄 모른다니. 일단 왕현추는 일의 경과도 알았고 일의 해결점도 알 수 있었다. 이 일은 이장령과 화천극이 그 일의 중심에 있는 진성의 위치를 알게 되면 바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이장령과 화천극으로서는 땅을 치고 후회할 일임에 틀림이 없었다. 왕현추는 거기에 더해서 이장령과 화천극에게 따끔하게 혼줄을 내 줄 생각이었다. 아이의 말에 흔들리는 부화뇌동의 꼴이라니. 요즘 화천극의 정성에 조금씩 열리려던 마음이 완전히 돌아섰다. “진성아, 이 일은 내가 해결하마.” 깊이 생각한 왕현추는 진성과 서재필에게 자신에게 이 일을 맡기라는 부탁 같지 않은 부탁을 했다. 진성과 서재필 역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을 느꼈다. 눈치를 보아하니 상대를 잘 아는 것 같고 단 한번의 호통에 폭력단이 물러가는 것을 봤으니 믿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진성은 아직 유맹이라는 단체를 노인들의 여흥에 겨운 친목 단체로만 여겼지 그 멤버들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인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차이나 모터스, 천지회의 총수가 가입하고 싶어하는 그룹 유맹. 진성에게는 단지 대단한 고수들의 시간이 남아돌아 만든 친목계와 다름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각자 자기 방으로 가고 왕현추와 조맹현 그리고 진성만 따로 자리를 가졌다. 왕현추는 다른 사람들을 배제한 상태에서야 제대로 된 얘기를 시작했다. “아까는 사람들이 많은 관계로 얘기를 하지 않았다만 너는 알고 있어야 할 것 같다. 그 일본에서 마찰이 있었던 그 차이나 모터스의 총수는 이장령이라는 늙은이다. 아니지. 아직 70도 안 되었으니 중년이라고 해야지. 허허허.. 아무튼 이장령이라는 녀석인데 그 녀석이 천지회 우두머리인 화천극에게 부탁한 것 같다. 공안천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북경에서 대담하게 그런 일을 저리른 것을 보면 단단히 마음 먹은 것 같다.” “이장령? 화천극?” “내가 이장령과 화천극을 그나마 잘 아는 이유는 그 녀석 둘이 최근 몇 년간 그룹 유맹에 들어보려고 노력을 하는 관계로 몇 번 만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실력도 안 되는 것들이 유맹에 가입하려고 온갖 짓을 다 하기에 나는 조금 마음이 움직이려고 했다만 이번의 일을 보니 싹수가 노랗다. 내 생각에 이번일을 가장 원만하게 해결하는 것은 그 두 녀석에게 네가 차기 모임에서 유맹에 가입하게 될 것을 알리는 방법이다. 아무리 두 녀석이라고 해도 유맹을 우습게 보지는 않을 테니까. 허허허..” “아... 네...” “아, 맞다. 이 녀석 소개도 해야지.” 멀쩡하게 있던 사람을 이제 발견한 왕현추는 진성에게 조맹현을 소개했다. “이 사람은 이름이 조맹현인데... 나이가.. 얼마더라.. 맹현, 네 나이가 얼마냐?” “.... 73이요.” “73이란다. 아직 어리군. 허허허... 내가 75이니까. 조맹현은 유맹에서 유일하게 그 특기가 신법(身法)이다. 자신은 거의 대부분의 무술을 다 할 줄 안다고 하지만 내가 볼 때 제대로 된 것은 신법 밖에 없다. 유공술(柔空術)이라는 독특한 공부인데 나중에 네가 직접 견식할 기회가 있을 거다.”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진성의 깎듯한 인사에 조맹현은 기분이 좋았다. 조금 드러나는 진성의 경지를 본 조맹현이었지만 아직은 왕현추에게 들었던 그 실력을 제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젊은 나이에 그런 경지 가까이 왔다는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그런데다가 이렇게 깎듯하게 인사를 하니 더 기분이 좋아졌다. 조맹현은 진성이 제대로 유맹에 가입하기를 바랬다. 그러면 지금까지 막내로서 겪었던 그 설움이 몽땅 다 날아가버리기 때문이었다. “허허허... 그래 내가 조맹현이다.” 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아서인지 쉽게 말을 하기는 힘들었다. “진성아, 내가 예전에 유맹에 가입하려면 테스트가 있다고 했지?” “네, 왕... 아..저씨..” “허허허... 아저씨란 말이 그렇게 기분이 좋을지 몰랐구먼. 아, 테스트. 그 테스트를 담당할 사람이 바로 조맹현, 이 친구란다. 규칙으로 정해진 것은 없지만 유맹의 나이순으로 봤을 때 가장 어린 사람이 그 테스트를 맞기 때문에 이 친구 조맹현이 이번에 너를 테스트할 것이다.” “네? 가장 어린 사람이요? 그럼 저 분이?” “그래. 현재 유맹 최연소 가입자지. 허허허.. 네가 들어오면 아마도.. 거의 50~60년 동안은 막내 생활을 해야할 거다. 유맹이 어떤 조직이 아니기에 들어온 순서가 아니라 그야말로 나이순으로 하기 때문이지. 허허허.. 후회해도 소용없다.” “네? 어르신... 아니.. 아..저씨..!” 진성과 한참을 얘기하던 왕현추는 지금 생각났다는 듯 급하게 물었다. “일본에서 데카츠 형님을 만났다며?” “네.. 그 분께 조금 신세를 졌습니다.” “자세히 좀 말해봐.” 시간이 늦어 약간 피곤한 진성이었지만 얼굴을 눈앞에 들이대고 나름대로 초롱초롱한 눈빛을 반짝이는 주책 영감 왕현추를 보자 피곤해서 먼저 자야겠다는 말을 도저히 꺼낼 수가 없었다. 진성은 어쩔 수 없이 데카츠를 처음 만난 것에서부터 이름 모르는 산으로 가서 백발노인에게서 십허검법에 대해서 배운 것을 자세히 얘기했다. “뭐? 아... 사형이라면.. 음.. 그런데 축지법? 그게 정말 가능하냐?” “네, 제가 직접 봤거든요. 그 분도 수십 년동안 수련했지만 그다지 빠르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분명히, 마치 공간이 접히는 듯 걷는 모습을 봤어요.” “이야... 대단하군. 축지법이라. 그런 게 실제로 있을 줄을 생각도 못했구먼. 진성아, 나에게도 좀 가르쳐 줄 수 있을까?” “가르쳐 드릴 수는 있지만 아마 쉽지 않을 걸요. 데카츠 어르신도 포기했는 걸요.” “뭐? 데카츠 형님이? 음... 그 양반 무(武)에 대한 욕심은 나 못지 않은데...” 한참 동안이나 붙잡혀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를 들어야 했던 진성은 늦은 밤 2시가 넘어서야 방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진성은 방으로 돌아와 간단히 씻고는 바로 잠에 들었다. 늦게 잤지만 새벽에 눈을 뜬 진성은 평소처럼 팔극진결로 몸을 풀고, 경을 수련했다. 또한 목검을 쥐지는 않았지만 목검을 가진것처럼 십허검법, 무명검법의 무명소검에서 무명비검까지 차례로 연습했다. 어느 정도 몸이 달아오르고 마음이 상쾌해지자 진성은 축지법을 수련했다. 진성은 확실히 몸, 마음, 경의 일체를 더 쉽게, 더 오래 느낄 수 있었다. 다른 수련보다 훨씬 더 그 속도가 빨랐다. 진성은 거의 한시간에 가까운 축지법의 수련을 통해서 가만히 앉아 있는 상태에서 10분 가량 일체감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일체감을 유지하면 유지할 수록 진성은 더욱 더 몸과 마음이 날아갈 듯한 해방감을 맛볼 수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마지막으로 축지법을 연마했다. 몸이 착 가라앉는 느낌이 들면서 신경이 곤두섰다. 긴장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주위의 공기의 흐름까지 느껴지는 듯했다. 그 눈을 뜨고는 자신도 모르게 한발자국 내딛었는데 진성은 놀라버렸다. 자신의 짧은 한 걸음에 객실의 출입문이 자신을 향해 갑자기 다가온 것이다.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니 자신은 객실 출입문 바로 앞에 서 있었다. 거의 8미터가 넘는 거리를 단 한 걸음에 건너 뛴 것이다. 아니 단 한 걸음의 거리로 8미터가 접혀진 것이다. 진성은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런 느낌이라니. 순식간에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이 느낌. 너무도 생생했다. 게다가 진성은 축지법을 제대로 펼치면 신경이 곤두서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평상시와 같다면 진성은 아마도 출입문에 부딪쳤을 것이다. 공간을 접는 만큼 그에 맞게 감각도 빨라야 함을 알았다. 진성은 그 느낌이 너무 신기해 다시 해 봤지만 도저히 그런 느낌에 도달할 수가 없었다. 몇 번 해 보고는 다음에 또 되겠지 하며 가볍게 생각한 진성은 욕실로 들어갔다. 북경에서 열리는 메이저 리그에 참가한 팀들은 잠시 동안 쉴 수 있었던 기간에 하나의 전략에 고심하며 시간을 투자했다. 바로 진성의 전략이었다. 어떤 사람은 버그 플레이가 아니냐라고 했지만 곧 자소 소프트의 공식 발표가 있었다. 버그라고도 할 수 있었지만 어떤 오류에 의한 버그가 아니라 구조적인 성질이었으며 다른 문명도 그와 같은 효과를 가질 수 있다는 발표였다. 게다가 그 전략은 게이머 스키피오 본인이 직접 발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른 문명에서도 그런 플레이가 가능하다는 자소 소프트의 공식 발표에 로마 문명으로 플레이 하는 선수는 물론이고 많은 선수들이 로마 문명으로 녹화된 게이머 스키피오와 리틀 스키피오의 게임 화면을 보고는 따라하기도 하고 분석해 보기도 했다. 그리스나 중국, 일본 문명도 그런 효과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시간을 들여 분석했지만 결과는 하나였다. 가능은 했지만 너무 확률이 낮다. 가능하다는 것은 각 팀의 선수들 중에 컨트롤과 게임 센스가 있는 사람들이 한, 두 번 불완전하지만 성공했던 경우로 인해서 알 수 있었다. 확률이 낮음은 컨트롤과 게임 센스를 겸비한 사람들도 혀를 내두를 만한 극악의 난이도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로마 문명이 주 문명이 아닌 선수들은 게이머 스키피오가 개발해 낸 시민군 양성 전략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또한 로마 문명이라고 해도 쉽게 시민군 양성 전략을 실제 경기에 사용하기는 상당히 힘듬을 느꼈다. 상대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멸할 가능성이 높아 실제 게임에서는 사용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했다. 그런 가운데 일단 자소 소프트에게 당장 이기기는 힘들다는 판단을 내리고 다른 팀들에 대한 전력분석에 더 힘을 기울였다. 그런 판단은 일견 합리적이었지만 두 팀에게는 그다지 좋은 결정이 아니었다. 차이나 모터스, 세가 소프트는 자소 소프트와 같은 조인 D조에 속해 있어 어차피 한 팀만 올라가는 결승리그에 가만히 있다가는 어떻게 해 볼 도리도 없이 탈락할 판이었다. 특히 차이나 모터스는 일본에서의 두 게임 모두 패배를 해서 궁지에 몰린 형편이었다. 자소 소프트가 한 번이라도 이기면 차이나 모터스는 희망이 없었다. 반면에 세가 소프트는 이번에 차이나 모터스와 자소 소프트를 이긴다면 본선 진출을 바라볼 수 있었다. 차이나 모터스는 자력으로 결승리그 진출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다른 조의 경우에 자국 리그에서 강팀인 프로팀이 각 조에서도 강한 모습을 보였다. A조에서는 쌍룡은행, e차이나, 미쯔바시가 공동으로 1승 1패로 물리 물리는 형국을 나타냈다. B조는 소냐전자가 2승, 삼선전자가 1승 1패, 차이나넷이 2패로 몰렸다. C조는 중화그룹이 2승으로 치고 나갔고 도시버가 1승 1패, 삼일이동통신이 2패의 결과였다. 2승인 팀은 소냐전자, 중화그룹, 자소 소프트로 세 나라의 프로 리그 우승팀이었다. 중국에서의 일정도 일본에서와 같았다. 단지 경기 일정이 A조부터 시작된다는 점만 다를 뿐이었다. 거의 이주 정도에 걸쳐 펼쳐지는 중국에서의 메이저 리그는 중화그룹의 홍보 전략이 주요해서인지 대단한 인기를 모았다. 매 게임 이미 예약으로 인해 매진이 된 메이저 리그는 A조의 경기를 시작으로 그 열기를 이어갔다. D조에 속한 자소 소프트의 선수인 진규, 현준 그리고 진성은 주최측인 중국과 또 다른 참가국인 일본 프로팀들의 견제를 느낄 수 있었다. 원래 메이저 리그에서는 실제 경기가 치르지는 게임 센터 뿐 아니라 각 프로팀들이 연습을 할 수 있는 간이 게임 센터를 설치하게 되어 있었다. 중화 게임 센터에도 총 4개의 게임 룸이 들어서 있었고 그 주변에도 간이 게임 센터가 있어서 경기가 없는 날이라도 컨디션 조절이나 새로운 전략의 검토 등을 할 수 있었는데 자소 소프트의 경우 그 배정된 시간이나 장소가 상당히 나빠 매니저인 서재필이 공식적으로 항의를 할 정도였다. 이용시간이 저녁 10시 넘어서 가능하다는 것과 대결 게임인데 하나의 게임기만 빌려줄 수 있다는 등 그 견제가 심했다. 매니저 서재필의 탁월한 수완으로 어느 정도 연습을 할 시간과 공간을 확보했지만 시작된 견제는 끊이지 않았다. 메이저 리그 게임은 각국의 프로 리그 강팀들이 역시 강세를 보였다. A조는 물고 물리던 일본에서의 접전과 달리 쌍룡은행이 2승으로 일찌감치 결승 리그에 이름을 올리고는 다음 게임 장소인 한국으로 떠나버렸다. e차이나와 미쯔바시 역시 탈락의 아픔을 가지고 북경을 떠났다. 경기는 계속 되었고 계속 될 수록 희비가 엇갈리는 희극과 비극을 연출했다. “그래, 자네가 그 일을 시켰단 말이지?” 차가움이 뚝뚝 떨어지는 왕현추의 말이었다. 왕현추 앞에는 천지회의 우두머리인 화천극이 얼굴을 제대로 들지 못하고 서 있었다. 아직은 흰 머리보다 검은 머리가 더 많고 얼굴 역시 나이에 비해 젊어보이는 키가 170 정도의 노인이 바로 화천극이었다. 거대 조직의 총수답지 않게 수수한 옷차림을 해도 은은히 드러나는 평소의 카리스마가 지금은 온데간데 찾아볼 수가 없었다. 화천극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가 여전히 얼음장 같은 얼굴, 차가운 눈초리의 왕현추를 보고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화천극은 이미 북경에서의 그 일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왕현추, 조맹현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뭔가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하지만 왜 그 날, 그 때에 두 노인이 그 곳에 있었고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는 알수 없었다. 이제까지의 들인 노력이 한순간에 무너진 것은 아닌가 생각한 화천극은 서릿발 같은 왕현추의 분위기에 얼굴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있었다. “네? 그 일이라니요?” “자네가 북경에 있는 부하놈들에게 한국에서 온 사람들을 납치하라고 하지 않았나?” “....” 그것이 왕현추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사실 화천극은 그 사람들을 없애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한 일주일이나 이주일 정도 잘 데리고 있다가 나중에 보내줄 생각이었다. 부탁은 그 중에 어떤 젊은이를 혼내달라고 했지만 할 일이 있고 해서는 안 될 일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어르신... 저, 그런데 그 일이..?” “자네는 그 일의 전모를 알고 한 일인가? 아니면 이장령 그 녀석이 부탁한 일만 한 것인가?” “....네? 아....” 화천극은 놀랐다. 그 일을 이장령이 부탁한 것은 천지회의 조직에서도 몇 명만 아는 비밀인데 왕현추가 너무도 확실하게 지적하자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 내용을 들으니 그 일에 무슨 다른 사연이 있는 듯했다. 어쩌면 자신이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르신, 그 일이라는 게 어르신과 관계 있는 것입니까?” “..... 자네는 이장령 그 녀석이 무엇 때문에 자네에게 그 일을 부탁했는지 알고 있는가?” “저.. 확실치는 않지만 이장령 개인적인 일이라고 하고.. 꼭 들어줬으면 한다는 말에..” “뭐? 확실치 않아? 이장령 개인적인 일이라고? 사람을 납치하는 일을 지시해 놓고는 확실치 않다니.. 게다가 개인적인 일로 사람을 납치해?” 왕현추 역시 천지회와 같이 지하 조직이면 돈을 위해서, 조직을 위해서 법을 어기는 일도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좁은 의미에서는 나쁜 일이지만 넓은 의미로 봐서는 천지회와 같은 거대 조직이 있다면 오히려 그 좋지 못한 일들을 상대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무조건적인 반대의 입장은 아니었다. 오히려 천지회가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변질만 되지 않는다면 어느 정도 찬성하는 왕현추였다. 하지만 그런 거시적인 일도 아닌데다가 그 청탁의 이유를 확실히 확인한 것도 아닌, 그리고 개인적인 부탁을 아무 생각없이 지시했다는 것은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왕현추였다. “.............” “내... 자네의 그 열심을 보고는 마음이 조금 움직였다네. 내가 보장해 줄 수는 없지만 그래도 다른 멤버들에게 자네의 장점에 대해서 말해줄 수는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자네의 모습을 보니 그 동안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군. 화천극, 다시는 나를 볼 생각 하지도 말게.” 왕현추는 영문도 제대로 모르는 화천극을 몰아붙이고는 바람을 펄럭이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화천극은 앉아 있다가 순식간에 나가는 왕현추에게 말도 걸어보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그렇게 멍한 화천극에게 말을 건 사람은 조맹현이었다. “자네, 이번 일은 정말 생각 없이 한 모양이군.” “어르신, 어떤 일이 있었길래 왕어르신이 이렇게 화가 나신 겁니까?” 이유를 모르던 화천극은 조맹현에게 급히 물었다. 뭔가 이유를 알아야 대책을 세울 수 있었다. “자네 일을 어떻게 그 따위로 처리하는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쯧쯧....” 조맹현은 화천극에게 일본에서 있었던 이장령의 손자 이주방과 진성과의 일을 설명했고 그로 인해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배경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말했다. 다가올 유맹의 모임에서 유맹 멤버로 가입할 사람이 현재 20대의 젊은이라는 말에 놀라고 그 사람을 자신이 납치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화천극은 들을 수 있었다. 모든 일을 다 들은 화천극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이장령 그 녀석이 자네에게 손자에 대한 얘기는 안 한 모양이지만 무턱대고 일부터 저지른 자네에게도 책임이 있으니.. 뭐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일단 앞으로 더 이상의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자네가 나서서 이장령과 얘기를 잘 하게. 그 후의 일은 그 다음에 생각하고. 알겠나?” “예, 어르신.” 자신과 비슷한 처지여서 서로 친해진 이장령의 부탁을 들어준 대가가 이럴 줄은 생각도 못한 화천극이었다. 멀리 빌딩 숲이 보이는 상하이의 고층 빌딩 스위트품에서 화천극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노인 같지 않은 노인에게 말했다. “장령, 내게 이럴 수 있나?” “무슨 말인가?” “지난번에 부탁했던 그 일, 장령 자네 손자와 관련된 일이라면서? 게다가 그 상대는 한국인이고.” “그래서? 그런 일, 어차피 자네의 천지회에서 많이 하는 일 아닌가?” “..... 문제는 자네가 혼좀 내주라고 말한 그 사람이 차기 유맹 가입자라는 말이야. 이 사람아!” “뭐? 하하하..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내가 알기로는 이제 20대 초반인데.. 무슨 유맹 가입자야. 하하하.. 자네 어디서 그런 이상한 소문을 듣고는 믿는 건가?” “.... 왕 어르신이 직접 말씀하셨네.” 이장령의 말도 안된다는 반응에도 화천극은 따라 웃거나 화내지 않았다. 대신 가슴이 울릴 만한 낮은 떨림으로 왕어르신이라는 말을 내뱉었다. “.... 뭐?” “게다가 자네 손자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화천극은 거기에 한 술 더 떴다. “뭐라고? 정말인가?” “내가 할 일이 없어서 자네를 찾아와 이런 아무 쓰잘데기 없는 농담을 할 사람으로 보이는가? 왕 어르신께 불려가서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는 말까지 들었다네. 자네, 어쩔 텐가?” 평소 화통하지만 싱거운 사람은 아닌 화천극이 이 곳, 상하이까지 이렇게 급히 와서 심각하게 한 말을 이장령은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자신의 손자가 자신을 속이다니. 아니 그것보다는 이제 아들과 전문 경영인에게 회사를 물려주고 자신은 은퇴할 생각이었던 이장령에게 있어 유일한 개인적인 목표인 유맹의 가입에 큰 문제가 생긴 꼴이었다. 간단히 포기한다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만 무술을 하는 사람으로서 그 정점에 다다를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된 유맹의 가입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화천극의 얼굴을 쳐다볼 수도 없었던 이장령은 대신 한숨만 내쉬었다. 그러다 화천극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할 방법이 없겠나?” “일단, 자네 손자를 잘 단속하게. 아무래도 그 이야기를 들으니 자네 손자가 이번 일의 화근이야. 화근!” 손자가 화근이라는 말을 들어도 이장령은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작은 일을 크게 벌인 것은 손자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장령은 핸드폰을 들어 곧바로 지시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잘못하면 완벽하게 유맹이라는 무술인으로서의 꿈을 저버려야 할 지도 몰랐다. 경기 시작도 하기 전에 호된 경험을 했던 자소 소프트의 프로팀은 중국에 있는 내내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지만 아무런 위험 요소를 찾을 수가 없었다. 식사나 외출을 할 때도 철저히 보디가드인 이준과 진성이 동행할 정도로 신경을 써서인지 그 후로는 다른 사소한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진성 역시 내심 걱정했지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A조에 이어 B조, C조, D조의 경기결과도 나왔다. B조는 삼선전자와 소냐전자가 각축을 벌인 가운데 소냐전자가 결승 리그 진출권을 따냈다. C조는 예상을 뒤엎고 중국의 중화그룹을 제치고 일본의 도시버팀이 결승 진출을 확정했다. D조는 조금 이상한 일이 있었다. 북경까지 와서 준비를 했던 차이나 모터스의 프로팀이 갑작스럽게 기권을 하고는 상하이로 돌아가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라 그 배경을 짐작하지 못했지만 대부분 자소 소프트와 세가 소프트의 힘에 밀려 미리 포기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차이나 모터스의 기권으로 D조는 자소 소프트와 세가 소프트의 정면 대결로 진출권을 가리게 되었는데 자소 소프트의 게이머 리틀 스키피오가 체증에 걸려 경기를 할 수 없는 상황에도 더블 스토퍼 게이머 스키피오와 한신의 승리로 세가 소프트를 물리치고 대망의 결승 리그 진출을 결정지었다. 일본과 중국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결승 리그의 진출이 확정된 네 팀은 일주일간의 휴식기간을 가진 후에 한국, 서울에서 마지막 결승 리그와 최종 우승을 가리는 경기를 가지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각 프로팀은 상대에 대한 전력 분석과 전략 검토에 열을 올렸다. 자소 소프트 프로팀도 중국에서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데 한 사람 진성만이 중국에 남게 되었다. 왕현추의 간곡한 부탁으로 서재필은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 서재필은 마지막 결승 리그 전까지 남은 기간이 중요해서 되도록이면 왕현추의 부탁을 거절하려고 했지만 왕현추의 도움으로 차이나 모터스의 도발이 더 이상 없었던 점과 차이나 모터스의 기권 역시 왕현추의 어떤 보이지 않는 압력이 있었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허락하고 말았다. 진성 혼자 남는다는 말에 발작을 일으키려던 현준을 다시 한번 이준이 무릎치기로 잠재우고는 진성을 제외한 자소 소프트의 프로팀은 모두 짐을 싸서 한국으로 떠났다. 남아 있던 진성은 극구 아저씨라고 부르지 않으면 절대 대답을 하지 않으려는 괴짜 노인 왕현추를 따라서 비행기를 타고 상하이로 이동했다. 빌딩숲은 이곳이 중국인지 헷갈리게 만들었다. 진성은 중국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에서 너무도 많이 벗어난 상하이의 모습에 어리둥절했다. 게다가 왜 이곳으로 왔는지도 모르고 그냥 가자는 대로 왔기 때문에 마음이 더 이상했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고급 승용차에 조맹현, 왕현추와 같이 탄 진성은 그냥 노인으로 봤던 대머리 조맹현과 검버섯 왕현추 노인이 힘없는 단순한 노인이 아님을 알았다. 가는 곳마다 최고급의 대접을 받으니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다. 굉장히 높은 빌딩 앞에 도착한 진성은 역시 왕현추와 조맹현이 거침없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어쩔 수 없이 따라 들어갔다. 실내 분수치고는 너무나도 엄청난 10미터가 넘는 분수가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는 아주 화려한 건물의 로비였다. 이미 연락이 되어 있었던 듯, 중국 전통 의상과 현대 의상이 섞인 듯한 퓨전 옷을 입은 비서로 보이는 여자와 수완이 있어보이는 남자가 왕현추와 조맹현, 진성을 알아보고는 깍듯하게 안내했다. 진성은 거의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밖으로 비치는 상하이의 전경에 감탄했다. 곧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내렸는데 눈앞에 펼쳐진 것은 환상이었다. 가운데의 수영장과 그 주변에 만들어진 열대 야자수들이 이런 건물내에 있다니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크지는 않지만 아주 아담하게 잘 꾸며진 수영장을 지나서 위로 난 계단을 올라가니 널찍한 공간에 화려한 쇼파가 놓여져 있는 현대적인 응접공간이 나왔다. 그 옆으로 연결된 복도로 여러 문들이 있었는데 수완 좋은 남자의 설명으로는 그곳이 침실이라고 했다. 가구 하나하나가 아주 세련되고 편의시설이 아주 잘 갖추어진 공간이었다. 진성은 왜 이런 곳으로 왔는지 전혀 몰랐다. “왕 어르.. 아저씨, 여기는 왜 온 겁니까?” 어르신이라는 말에 노려보는 왕현추의 눈빛에 진성은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허허허... 진성아, 그 동안 고생했으니 조금은 쉬어야지.” 왕현추의 말에 진성은 의아해했다. 진성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고생한 것은 거의 없었다. 이틀 정도 적응하니 중국음식들 중에서 입에 맞는 것을 골라 먹을 수 있었고 패스트 푸드 점이 많아 먹는 것은 불편하지 않았다. 게다가 마지막 즈음에 한 게임해서 이긴 것 빼고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 "진성아, 너를 만나보고 싶다는 사람이 있어서 이곳으로 왔단다. 그러니 아무 생각말고 편하게 즐겨라. 그리고 여기는 공짜니까. 허허허허..“ 맥주캔을 하나 들고 마시던 왕현추는 진성의 표정을 읽은 듯 활기차게 말했다. 진성은 이렇게 좋은 곳이 공짜라는 말도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무술의 고수라는 사람이 맥주를 마시자 조금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술은 운동하는 사람들의 적이라는 얘기를 알고 있었던 진성이어서 더욱 그랬다. 한참이 지나도 왕현추와 조맹현은 가벼운 옷차림으로 여기 저기를 왔다 갔다 하며 편히 쉬고 있을 뿐이었다. 특히 왕현추는 손에서 맥주캔이 끊이지 않았다. 진성은 한동안 지켜보다가 아래로 내려갔다. 잘 만들어진 수영장을 보자 수영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수영복도 없고 그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더 강했다. 오면서 얼핏 보였던 통로로 들어가 보니 그렇게 크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좋은 체육관이 나왔다. 농구할 수 있는 반코트짜리 농구대도 마련되어 있었고 도장처럼 쿠션이 제대로 된 공간도 있었다. 체육관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농구공도 있고 여러 운동도 할 수 있게 잘 마련되어 있었다. 진성은 옷을 조금 풀어 편하게 하고는 신발을 벗었다. 혼자 운동할 수 있는 도장 같은 자리로 올라간 진성은 편하게 몸을 풀었다. 팔을 위로 뻗고는 허리를 돌리며 몸을 풀었다. 몸이 어느 정도 더워지자 진성은 천천히 팔극진결을 펼치기 시작했다. 진성에게 있어서 팔극진결은 하루라도 빠지면 허전한 습관과 같았다. 이제는 완전히 몸에 배여 버린 동작이어서 어떤 동작을 행하고 그 다음 동작을 생각하는 절차가 필요없이 그냥 팔극진결을 시작하면 몸이 저절로 진결의 순서대로 움직였다. 몸 내부의 호흡과 그 가운데에서의 마음가짐도 처음과는 달리 그렇게 엄격하게 따지지 않더라도 경의 수련은 어김없이 이루어졌다. 한참을 펼친 팔극진결을 멈추자 진성은 시원함을 느낄 수 있었다. 진성은 주위를 둘러봐서 혹시나 목검이 있을까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손에 검을 잡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무명검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십허검법이라는 이름이 있었지만 진성은 그냥 무명검법으로 불렀다. 십허검법이라고 하니 웬지 느낌이 이상했다. 특히 사부 유조가 전수해 준 검법에는 무명검법이 더 잘 어울리는 듯했다. 무명소검과 무명대검에 이어 무명비검을 연습하던 진성은 한동안 연습하다가 누군가가 체육관 안으로 들어왔음을 느꼈다.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지만 최근에 수련으로 그 경지가 올라간 청경과 수련하는 중이라서 더 예민한 감각이 누군가가 몰래 들어왔음을 알렸다. 아무런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말은 상대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말과 같았다. 진성은 일단은 모른 채 했다. 무명비검의 수련을 끝낸 진성은 축지법의 수련에 들어갔다. 축지법은 그야말로 몸, 마음, 경의 일체감을 추구하기 때문에 더욱 더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청경으로 인한 느낌은 더욱 더 자세해졌다. 진성은 움직이지 않는 사람의 존재를 알았지만 무시했다. 진성은 점점 축지법의 수련에 집중했다. 북경의 호텔에서 있었던 그 실제적인 축지법의 체험 이후에 일체감을 이루고 난 뒤에 지속 시간은 길었지만 너무 그 곳에 신경을 쓴 나무저 축지법을 제대로 경험해 보지를 못했다. 진성이 의도적으로 걸을려고 하면 일체감이 깨져버린 것이다. 진성은 자신의 경지가 모자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급한 마음을 최대한 없애고 천천히 수련했다. 이장령은 비서를 통해 기다리던 사람들이 도착했음을 알았다. 건물의 최상부에 있는 공간에서 쉬고 있을 두 노인과 젊은이 하나를 만나기 위해 자신도 처리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위로 올라갔다. 이장령은 비서를 통해 두 노인은 자신이 파라다이스라고 이름 붙인 공간의 2층에 있고 젊은이는 1층의 체육관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장령은 이미 자신의 손자로 인한 마찰은 잊었지만 자신이 그렇게 가입하고 싶어했던 그 유맹에 자신의 손자뻘이 되는 젊은 사람이 가입한다는 말을 듣고는 속이 쓰렸다. 화천극과 마찬가지로 실력 미달이라는 직선적인 말을 들은 바 있는 이장령으로서는 20대 초반의 젊은이가 실력으로 유맹에 가입한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히 유맹의 멤버 중 하나와 연관이 있다고 여겼다. 그런 생각이 마음 속에 은연중에 있었는데 비서를 통해 젊은이가 체육관에 혼자 있다는 말을 듣자 은근히 한번 테스트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젊은이가 이장령 자신보다 실력이 떨어진다면 유맹의 멤버들도 자신을 실력 미달이라고 내칠 수는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이번 일이 잘 된 것이 아닌가 하며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이미 자신이 청탁을 통해 젊은이에게 좋지 못한 일을 했다는 사실은 잊어버린 상태였다. 이장령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체육관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상대 젊은이는 자신이 들어온지도 모르고 있었다. 이장령은 그런 젊은이의 실력에 만족했다. 이제 이 젊은이에게 따끔한 실력행사의 충고를 하기만 하면 자신이 실력 미달이라는 말을 유맹의 멤버들이 하기는 힘들 것이다. 특히 왕현추를 생각하는 이장령은 마음이 뿌듯해지는 듯했다. 이장령은 천천히 다가가서 가만히 서 있는 젊은이에게 빠르지만 그리 위험하지는 않는 공격을 해서 놀래켜 주려고 했다. 가만히 있던 사람이 천천히 진성 자신에게로 다가오더니 한순간 도약해서 진성의 왼쪽 어깨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아주 빠른 공격이었다. 진성은 그 공격에 당황했다. 너무 빠른 공격이어서가 아니라 가만히 있길래 체육관에 운동하러 온 사람인 줄 알았는데 자신을 공격했다는 사실 그 자체로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진성의 몸은 침착하게 공격의 범위에서 벗어났다. 진성은 그 공격을 한 상대를 쳐다보았다. 흰색의 중국 전통옷을 입은 노인이었다. 머리는 까맣고 얼굴에는 생기가 있었다. 진성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상대를 쳐다보았다. 상대의 공격은 정말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런 공격을 왜 했는지 진성은 궁금했지만 그 대신 말없이 바라보았다. “허허허.. 자네는 내가 왜 공격을 했는지 묻지도 않는군.” 자신이 공격해 놓고도 전혀 미안한 눈치가 아니었다. 노인의 말은 약간 어색했지만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는 한국말이었다. 진성은 간단히 대답했다. “말씀하시려고 하셨다면 하시겠죠.” “..... 허허허허..” 진성의 담담한 대답에 노인은 체육관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웃어댔다. 한참 동안을 웃던 노인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진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가.... 새로 유맹에 가입하려는 그 젊은이인가?” 유맹이라는 말이 나오자 진성의 눈빛 역시 날카로워졌다. “..... 누구십니까?” “나? 허허.. 자네도 알 텐데.... 북경에서 곤란한 일이 있었지 않나?” 노인은 유들유들 웃으며 진성에게 북경이란 말을 꺼냈다. 진성은 북경이란 말에 곧바로 대답했다. 북경에서의 곤란한 일이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천지회입니까?” “천지회에 일을 맡긴 사람이지.” 노인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진성은 그 말에 떠오른 이름 하나가 생각났다. “..... 이장령?” “허허.. 젊은 사람이 나이든 사람의 이름을 마구 부르다니.. 허허..” 노인은 간접적으로 시인했다. 진성은 갑작스러운 말에 다시 확인했다. 물론 제대로 대접해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장령..... 맞습니까?” “맞다네. 허허..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구먼. 자네 부모는 어떤 사람인가? 자네 교육이 영 시원찮아..” 이장령은 자신은 그냥 말로 부탁한 일이 직접 당한 상대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대신 연장자로서의 대접을 원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상대의 입장을 고려했다면 그런 당당함이 배여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장령은 유맹에 대한 집착과 눈앞의 상대가 나이 어린 젊은이라는 사실에 평소 자신의 행동과는 달리 이성적이지 못했다. 부모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말에 진성의 기도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진성은 눈앞의 상대에 대해 뚜렷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단순한 다툼을 가지고 사람을 납치하려고 했다니. 게다가 지금의 그 부모에 대한 말로 인해 진성은 한순간에 온몸의 경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또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동안의 수련으로 인한 몸과 조금은 여렸던 마음이 아닌 철의 마음, 그리고 강력한 경으로 인해 단숨에 축지법의 한 단계를 돌파했다. 진성도, 백발노인도 모르던 축지법의 단계 중 하나인 지단축(地短蓄)을 달성해 버린 것이다. 이장령은 갑자기 달라진 진성의 분위기에 놀랐다. 진성이 수련하는 것을 지켜본 이장령은 그 진정한 경지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채 자신 정도면 충분히 혼내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니, 다음 유맹 가입자로 어느 정도 내정된 상대인지라 혼을 내줘서 스스로 유맹 가입을 포기하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원래 화천극의 말에 프로팀을 소환하는 등 가까스로 급한 불을 끈 이장령은 화천극을 통해 왕현추와 조맹현 그리고 문제의 강진성을 초대해서 더 이상 일이 커지지 않게 하기 위해 이런 기회를 마련한 것이다. 하지만 막상 자신에 비해 실력이 떨어져 보이는 나이 어린 사람을 보니 아무래도 자신의 유맹에 대한 가입에 실력 미달이라는 이유를 붙인 왕현추를 비롯한 다른 멤버들의 결정이 억울했다. 그래서 아무리 유맹 가입 예정자라고 해도 이장령 자신에게 완전히 지고 나면 부끄러워서라도 유맹에 가입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런 다음 자신이 유맹의 멤버들에게 요청하면 실력 미달이라는 말을 할 수 없을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이장령의 실수는 진성의 본 실력을 보지 못한 안목의 부족이었다. 또한 진성의 마음을 건드리는 말을 함으로 자신도 모르게 진성에게 있어 또 하나의 경지를 이루게 한 셈이었지만 도리어 자신에게는 엄청난 불운으로 다가올지 예상 못한 것도 실수 중의 하나였다. 이장령은 얼음장 같은 진성의 기세에 반발짝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이장령은 어린 아이의 기세에 물러난 자신을 탓하며 진성에게 호통을 쳤다. “아무리 어린 아이라 해도 어른이 얘기를 하는데 이렇게 눈을 부라려? 정말 인간 교육이 안 됐구만....” 이장령은 상대방이 느끼는 감정을 이해하려고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이장령의 말이 끝나자마자 진성이 움직였다. 하지만 이장령은 진성의 몸이 흐릿해지는 것만 느꼈을 뿐이었다. 그리고 상대의 손바닥이 자신의 턱을 아래에서 위로 강타한 후에야 자신 앞에 상대가 서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장령은 신음소리와 함께 뒤로 3미터 가까이 날아간 후에야 떨어졌다. 진성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마음은 분노로 불타올랐지만 머리는 도리어 차가워졌다. 진성의 몸이 흐려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일어나려는 이장령의 앞에 나타났다. 나타나자마자 강력한 팔극신권의 맹거퇴를 이용해 일어나는 이장령의 왼쪽팔을 차 버렸다. “우두둑!” 단 일격에 고수의 왼쪽팔이 부러져 버렸다. 이장령은 아픔이 심했지만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진성은 이미 원래 자신이 있던 자리로 돌아가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이장령은 진성의 오고감을 조금도 볼 수 없었다. 진성 자신도 자신이 상대에게로 가고자 하면 순식간에 가고 오고자 하면 순식간에 온 것을 알았지만 왜 그런지는 몰랐다. 이를 악물고 일어난 이장령에게 진성의 차디찬 목소리가 들렸다. “노인의 손자와 잠깐 다툼이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끝난 줄 알았는데 북경에서 좋지 못한, 노인의 말대로 곤란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일은 모두 왕 어르신께 맡기고 저는 생각의 찌거기를 털어 버리려 애썼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왕 어르신께서 같이 갈 데가 있다고 해서 왔는데.. 하하하... 그리고 가정교육이 잘못 됐다구요? 하하.. 돌아가신 제 아버지와 어머니가 웃고 계십니다. 남의 집 가정교육 운운하지 말고 손자나 잘 간수하십시오.” 진성은 화가 더 났음에도 불구하고 더 진지하게 그리고 논리적으로 노인에게 쏘아붙였다. “이...이...” 이장령은 뭐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입을 열면 아픔의 신음소리가 날 것 같아 꾹 참았다. “손자에게 말해 두십시오. 이제부터 제 눈에 걸리면 절대 가만 두지 않는다구요.” 진성은 그 말을 끝으로 뒤돌아섰다. 마주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장령은 나이 어린 녀석에게 당했다는 수치심과 유맹에 대한 집착, 익숙하지 않았던 육체의 고통으로 인해 잠시 정신을 잃었다. 이장령은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이를 악물고 진성을 향해 던졌다. 그 기세가 무시무시했다. 진성은 이미 이장령이 품속에 손을 넣는 것부터 알고 있었다. 지금의 진성은 거의 무적과 다름 없었다. 진성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날아오는 뭔가를 잡았다. 확실히 손에 무리가 갈 정도로 강한 힘이 실려 있었다. 진성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손으로 잡았던 금전표는 이미 진성의 경에 의해 오그라든 상태였다. “이런 것을 던지는 오른팔.... 앞으로는 조심하십시오.” 진성의 몸이 흐릿해지더니 순식간에 이장령의 눈앞에 나타났다. 이장령은 미칠 것 같았다. 이 어린 것이 눈의 착각도 아닌데 거의 6미터가 넘게 떨어져 있다가 한순간에 자신에게 다가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자신이 던진 금전표는 그 위력이 굉장한데 손바닥으로 그냥 잡아버렸다. 하지만 이장령은 더 이상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바로 앞에 나타난 진성의 공격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진성은 상대의 오른팔을 부수어 놓을 작정으로 팔극신권의 장법중 상대의 상태를 고려치 않는 쇄심장(碎心掌)을 펼쳤다. 상대의 부위에 손바닥을 타격함과 동시에 강맹한 경으로 타격을 강화하는 장법이었다. 진성은 거기에 부드러운 경을 섞어 쉽게 아물지 않도록 뼈를 잘게 부숴버릴 생각이었다. 진성의 강력한 쇄심장이 이장령의 오른팔에 적중되기 직전 진성의 귀에 큰 소리가 들렸다. “그만!” 왕현추였다. 아래로 내려간 진성이 너무 조용하자 혹시나 하고 내려와 본 왕현추는 체육관에서 진성과 이장령이 싸우는 것을 보았다. 왕현추가 처음 본 장면은 바로 뒤로 돌아선 진성에게 이장령이 뭔가를 던지는 순간이었다. 그것을 잡은 진성이 순간적으로 사라졌다가 이장령 앞에 나타나서는 강력한 장을 이용한 공격을 하자 왕현추는 온힘을 다해 외쳤다. 진성은 그 순간 이제까지 유지되었던 그 강력한 몸과 마음, 경의 일체가 깨져 버렸다. 그와 동시에 진성 자신도 쇄심장의 경을 풀어버렸다. 왼팔을 부러뜨린 것만 해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성은 경을 풀고는 뒤로 물러서려고 했는데 자신의 가슴을 향해 다가오는 상대의 강맹한 장(掌)을 볼 수 있었다. 진성은 막으려고 했지만 일체감이 깨진 바로 다음에 있었던 약간의 틈으로 인해 타이밍상 늦어버렸다. 게다가 진성이 느끼기에 이장령이 충분히 멈출 수 있을 텐데.. 온힘을 다한 것을 보고 이장령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장령은 진성의 몸이 망가지기를 원했던 것이다. 최대한 부드러운 경을 끌어올리고 몸은 뒤로 튕겨나갈 준비를 순간적으로 마쳤다. “터텅!” 진성은 차디찬 눈빛 대신 담담한 눈빛으로 상대 이장령을 한번 쳐다본 다음 뒤로 거의 6미터가 넘도록 날아가 떨어졌다. “털썩!” 보고 있던 왕현추는 진성에게로 달려갔다. 가슴에 강력한 육합장을 맞은 터라 굉장히 위험함을 느꼈다. 이곳 저곳을 확인한 왕현추는 다행히 별다른 이상이 없이 충격만 받은 것을 확인했다. 왕현추는 진성의 몸 이곳 저곳을 만졌다. 왕현추는 뒤로 돌아 이장령을 쳐다보았다. “이... 장령!” “.........”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지? 사과한다고.. 용서를 빌기 위해 오라고 한 것이 아니었던가? 이런 짓거리를 하기 위해서 오라고 했나? 그런 건가?” “........” 이장령은 도저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허허.. 말이 나오지도 않는구먼. 자네는 나 왕현추를 이리도 가볍게 봤는가? 허허허허..” “어르..신.....” “일단 이유나 들어보지.” “어르신, 저... 사실.. 제 손자와 관련된 일은 잊었습니다. 단지.....” “단지?” “단지.. 저 젊은 친구가 유맹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지 시험해 보려고 했는데... 그만 이렇게 마찰을....” “허허.. 누가 자네더러 자격에 대한 시험을 부탁했는가?” “...... 어르.. 신..” “하나만 더 묻겠네.” “예, 어르신.” “자네는 왜 마지막 순간에 손을 거둘 수도 있었는데 오히려 힘을 더 넣은 이유는 뭔가? 내가 잘못 본 것은 아닐 텐데...?” “어르신, 말도 안 됩니다. 저 젊은이의 공격이 너무나 위협적이어서 제가..... 어쩔 수 없이.. 어르신...” “허허.. 내 눈을 속이겠다 이거군. 허허허.... 알겠네. 자네의 마음을.” 왕현추는 이장령의 말을 듣고는 곧바로 이장령의 마음을 알았다. 왕현추는 그나마 남아 있었던 긍정적인 면까지 모조리 사라짐을 느꼈다. 화천극이 이 일에 얼마만큼 관여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왕현추는 개인적인 일이 아닌 유맹에 이 일을 널리 알려야 할 필요를 느꼈다. 왕현추는 진성을 가볍게 안아 들고는 체육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잠시 섰다. “이 녀석아, 언제까지 기절한 척 하고 있을래?” 왕현추의 말을 듣자마자 진성은 웃으며 일어났다. 진성의 웃음에는 감사의 마음이 들어가 있었다. 진성의 몸은 별다른 충격을 받지 않은 상태였다. 강맹한 경을 부드럽게 흘리면서 스스로 몸을 뒤로 날렸기에 더욱 그랬다. “무슨 일로 싸웠냐?” 왕현추의 물음에 진성은 자신이 체육관에 들어간 것부터 이야기를 했다. 체육관에 들어가서 수련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장령이 암습한 일부터 대화와 실력행사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얘기했다. “뭐? 진성이 너, 부모님이 안 계시냐?” 왕현추는 이제까지 진성에게 부모님이 계시지 않다는 사실을 몰랐다. 왕현추의 기준에서 보면 사부는 부모와 비슷한 위치여서 그 정도로 사부를 위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긴 것이다. 왕현추는 그런 사실을 처음 듣고는 진성을 다시 봐야 했다. 어린 나이에 친척도 없이 친구집에서 이렇게 살아온 녀석이 이토록 곧게 자랐다니. 왕현추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화가 난 왕현추는 돌아가서 이장령의 두 다리를 마저 부러뜨리려고 했는데 진성이 말려서 겨우 그만 두었다. “그런데 진성아, 너 아까 내가 잘못 본 것은 아닌데... 갑자기 사라졌다가 이장령 그 녀석 앞에 스윽 하고 나타나던데... 그건 뭐냐? 설마...?” “사실 저도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 설마가 아닐까요.. 아까 그 이노인이 암습했을 때가 축지법 수련하고 있었거든요. 아마도 그 때 무슨.. 일이 있어서.......... 그렇지 않을까요?” 자신을 아주 냉정하게 말하는 진성의 모습에 왕현추는 놀랐다. 그 정도의 움직이라면 누구도 막을 수 없을 빠르기였다. 공간을 접어서 간다고 하니 빠르기라고 말하기도 힘들 것이다. 왕현추는 어쩌면 자기가 원하는 경지를 넘어서 진성이 그보다 더한 곳까지 올라갈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현추 자신도 아까의 그 공격이라면 속수무책일 것으로 생각했다. “저.. 그런데 왕.. 아..저씨.. 그 이장령이라는 사람 한국말을 조금 어색했지만 잘 하던데요...” “아, 그 녀석 사부가 한국 사람이었다. 물론 중국사람으로 귀화했다가 늙어 죽었지만. 쯧쯧.. 그 사부는 좋은 사람이었는데... 제자란 놈이 사부 이름에 먹칠을 하다니. 허허..” “아... 그래서....” “아무튼 그 녀석 이장령. 내가 절대 가만 두지 않을 거다.” 왕현추는 뒤에 쫓아온 조맹현에게 모든 사실을 설명했다가 이장령을 찾아가 요절을 내려는 조맹현을 뜯어말려야 했다. 왕현추는 조맹현과 진성과 함께 재빨리 그 건물에서 나와 대기하는 차를 타고는 공항으로 가서 진성은 서울행을, 왕현추와 조맹현은 대만행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수속을 한 진성은 택시를 타고는 곧바로 회사로 갔다.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오후여서 곧 퇴근할 시간이 가까웠다. 진성은 일단 이팀장과 매니저를 먼저 만나서 잘 돌아왔음을 알렸고 곧이어 진팀장에게도 잘 돌아왔다고 인사를 했다. 인사를 마친 진성이 문명 온라인 팀의 요람으로 들어오자 현준이 제일 먼저 반겼다. “강진성, 이번에는 무슨 영화를 찍고 오셨나?” 이미 진성에게 일본에서 있었던 일에 대강 들었던 현준이기에 내심 꼬인 심정을 나름대로 표현했다. 진성은 그런 현준에게 상하이 공항 면세점에서 사온 스포츠 손목 시계를 내밀었다. 검푸른 색의 세련된 스포츠 시계는 복잡한 단추들이 붙어 있었지만 현준에게는 문제도 아니었다. 현준의 얼굴이 밝아졌다. 순식간에 현준의 목소리에 비꼬는 투가 사라졌다. 카멜레온이 따로 없었다. “진성아, 수고했지? 음료수 하나 뽑아 줘? 야, 진규야! 진성이 목 마르다고 하니까 빨리 음료수 하나, 아.. 내것도... 알지?” 진성은 변하지 않는 현준과 진규의 모습에 마음이 편해짐을 느꼈다. 상하이에서의 일로 인해 약간은 마음이 복잡했던 진성이었다. 진성 스스로 조금 놀랐던 것은 어떤 말을 해도 자신은 흥분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는데 부모님에 대한 말이 나오자 순식간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로 분노했던 기억이었다. 스스로에게 그런 열정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느낀 진성은 약간 어색함을 느꼈는데 요람으로 들어와 현준과 진규를 보자 마음이 풀렸다. 정말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저..... 저는요?” 뭔가 기대하는 눈치로 묻는 진규의 말에 진성은 무슨 소리인지 몰라서 되물었다. “뭐? 너? 너도 생일이냐?” “네? 그럼 현준이 형이?” “내 생일이라고? 잠깐......... 아 맞다! 내 생일이 이번 주 토요일이다!” 자신의 생일도 기억못했던 현준은 뭔가를 꼽아 보더니 말했다. 현준은 순간적으로 진규에게 고개를 돌렸다. “진규야, 너는 뭐 없냐? 음.... 나는 노트북이 하나 필요하긴 한데....” 노트북이라는 말에 진규의 얼굴은 굳어짐과 동시에 절대 안 된다는 항전의 각오가 서렸다. 절대 안 된다는 말을 하려는 순간 현준이 웃으며 선수를 쳤다. “하하하.. 농담이다. 노트북이 얼만데....... 네가 안 해줘도 우리 진성이가 이런 선물까지 주고... 하하하하... 그런데, 진성아 너는 어떻게 이런 것까지 다 기억하냐?” “친구잖아....” “아.... 친구.. 친구! 하하하.. 좋았어. 진성아, 오늘 내가 쏜다!” 진성은 진규, 현준이와 한참 동안 수다를 떨고는 매니저 서재필의 호출에 소회의실로 이동했다.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봐서 웬만해서는 호출을 하지 않는 서재필이라 진성과 진규, 현준은 조금 긴장했다. “조금 전에 전해 들은 소식인데.. 일본의 소냐전자에서 진성의 그 시민군 양성에 대응할 수 있는 전략을 발표했다.” 서재필의 말은 의외였다. 시민군 양성 전략에 맞춘 전략을 개발을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발표하다니. 발표하면 그로 인해 완전히 공개되어 알려지기 때문에 진성 역시 그에 대비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공식적으로 발표를 하다니. 게다가 경기가 일주일 정도 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말이 되지 않는 소식이었다. 다들 의외의 말에 어리둥절했다. “아무래도.... 소냐전자의 의도는 자신들이 전략은 개발했지만 다른 팀에서 진성을 꺾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 아닐까? 진성이 쓸 수 있는 전략이 시민군 전략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 위험부담을 다른 팀에게 돌리려는 지도 모르지.” 냉철한 서재필의 분석이었다. “음.....” “게다가 일본의 또 다른 팀 도시버에서도 시민군 양성에 대한 전략을 인터넷에 발표했다. 둘의 전략은 조금 방향은 다르지만 어느 정도 시민군 양성 전략에 영향을 줄 수는 있을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또 다른 진출팀인 쌍룡은행에서도 다른 전략을 발표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진성이 보인 그 시민군 양성 전략은 일단 성공하면 승리하는 것과 진배 없으니까.” “.........” “하지만 우리는 그 전략을 보고 대비하면 될 테니까 어쩌면 우리에게 더 유리한 지도 모르지.” “매니저 형, 어쩌면 그 전략 말고도 다른 숨겨둔 것이 있지 않을까요? 아무리 그래도 모든 것을 인터넷에 공개하는 것은 너무 무모하지 않나요?” 진성은 또 다른 가능성을 제기했다.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사실에는 뭔가 숨겨진 것이 있게 마련인 것을 진성은 문명 온라인 게임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알고 있었다. “음...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아무튼 진성이 너와 진규는 대 시민군 양성 전략에 대응하는 발표된 전략을 가지고 어느 정도의 효과가 있을지 그 대처방법은 어떻게 할지 생각좀 해 봐라.” 메이저 리그 결승 리그에 진출한 4팀은 일본의 소냐전자, 도시버 그리고 한국의 자소 소프트와 쌍룡은행이었다. 서로 1번씩의 대결을 통해 성적을 내고 그 성적으로 1위와 4위, 2위와 3위간의 시리즈를 벌이고 최종적으로 메이저 리그 전체 우승을 가리는 방법으로 한국에서의 게임 일정이 정해졌다. 그리고 게임장소는 게임큐브였다. 현준의 팬들이 생일 파티를 열어주겠다는 것조차 나중으로 돌릴 정도로 자소 소프트의 프로팀 역시 아주 바쁜 날들을 보냈다. 확실히 다른 팀에서 발표한 시민군 양성 전략에 대한 대응 전략이 효과가 있었다. 진성은 어차피 시민군 양성이라는 것도 여러 가지 전략 중 하나로서 게임에 따라 쓸 수도 있고 쓰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게임을 이끌어간다는 부분에서 여전히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상대에게 대응전략이 있다는 말은 진성 자신의 플레이에 따라서 상대의 플레이가 결정되기 때문에 진성이 보다 더 쉽게 원하는 게임 운영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그것은 다른 프로팀들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로 인해 다른 프로팀들은 게이머 한신과 리틀 스키피오에게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세가 소프트와 상대할 때, 리틀 스키피오 성진규가 배탈로 인해 경기가 불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최강의 스토퍼 게이머 스키피오와 게이머 한신의 플레이로 세가 소프트를 2:0으로 이겼던 사실은 다른 팀들로 하여금 리틀 스키피오와 한신의 게임 분석을 집중적으로 하게끔 만들었다. 지금까지 한신이 스키피오를 공식전 뿐 아니라 인터넷에 공개된 게임에서 이긴 적이 단 한번도 없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스키피오를 최고수로 인정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소 소프트를 이기려면 리틀 스키피오와 한신의 틈을 공략해야 승산이 있다고 결승리그에 진출한 다른 프로팀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노림수로 이제까지 준비했던 스키피오에 대한 전략을 인터넷에 공개하면서 자소 소프트로 하여금 그에 대한 대응을 준비하도록 만들어 시간적 여유를 줄이고 가능하면 다른 팀들이 스키피오를 꺾어주면 더 좋다고 여기는 이른바 일석이조의 차도살인이었다. 진성은 인터넷에 발표된 몇 가지의 시민군 양성 대응 전략을 확인했다. 확실히 효과는 있었지만 불완전해서 완전한 시민군 양성 전략이 성공하면 별 효과를 보지 못함을 알았다. 게다가 그 대응전략 역시 시민군 양성 만큼이나 모 아니면 도인 극단적인 전략이어서 그것을 상대 선수가 대담하게 선택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진성은 몇 번 테스트를 해 보고는 바로 그 대응전략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진성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들은 서재필 역시 확실히 대응전략에 대한 것은 제외하고 덜 바쁜 현준에게 진규의 확실한 교육을 부탁했다. “하나씨, 잘 지냈어요?” 진성은 문명 온라인 팀 요람을 나와 사무실 밖으로 나가려다 들어오던 하나와 마주쳤다. 그동안 아주 바빴던 진성이었기에 한동안 밖에서 만나지도 못했고 회사 내에서도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여서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 진성씨....” 하나의 얼굴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진성은 그런 하나의 그늘진 얼굴에 걱정이 되어 물었다. 평소와는 느낌이나 분위기가 달라보였다. “무슨 일이 있나요?” “예? 아... 아니에요. 이제 곧 메이저 리그가 시작하겠네요?” 하나는 화제를 바꿨다. “네, 곧 끝나겠지요.” 진성의 대답에 하나는 일부러 미소를 지어 보였고 곧 밝게 말했다. “진성씨, 열심히 하세요! 응원할게요.” 그리고는 사무실로 걸어가는 하나였다. 진성은 웬지 하나의 얼굴과 태도에서 예전과 다름을 느꼈다. 뭔가 다른 일이 있는 걸까? 하지만 진성은 그런 것을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같은 회사인데다가 메이저 리그가 끝나면 예전과 같이 편하게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진성은 하나와의 관계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만나면 편했기도 했고 현준과 같이 어울리기에도 너무 좋은 상대였기에 그냥 여자로서가 아니라 굳이 찾자면 친구와 비슷한 사람으로 하나를 생각하는 진성이었다. 그래서인지 진성은 하나의 이상함을 깊게 생각하지 않고 넘어갔다. 권력은 두 가지 기초 위에 서 있게 마련이다. 하나는 무력, 또 다른 하나는 재력이다. 무력이란 일반적으로 권력을 국가 권력으로 생각했을 때, 군대라고 볼 수 있다. 군대는 전쟁 수행의 당사자이기도 했지만 그 군대를 가진 사람에게 권력이라는 힘의 원천이다. 그런 군대를 가진 사람들만이 권력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그 군대라는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재력 역시 무시해서는 안 되는 요인이다. 상대보다 우위에 서 있는 무력을 위해서는 우위에 서 있는 재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재력과 무력은 절대로 같은 것은 아니었지만 긍정적인 순환관계에 놓여 있었다. 재력이 풍부하면 무력을 얻기가 쉬웠고 강한 무력이 있다면 재력이 따라오고는 했다. 하지만 재력이 풍부한 사람이 무력을 가진 자에게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길 수도 있고 무력이 강한 자가 재력이 강한 자의 밑으로 들어가 2인자 생활을 할 수도 있었다. 문명 온라인에서는 그 대결이라는 입장에서 무력이라는 면이 월등히 중요했다. 재력이 있다고 해도 무력이 강한 상대에게는 쉽게 깨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경기의 승부를 결정하는 조건과 무력이 관계가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재력이 일견 눈에 띄지 않는 것이라면 무력은 경기의 결과를 좌지우지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그래서 짧은 시간에 승부를 내는 게이머들로서는 무력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분위기는 아마추어와 프로 모두 비슷했는데 그로 인해 전략 역시 문명의 발전이나 경제적인 것 자체를 위하는 것보다 궁극적으로 강한 군대를 양성해서 상대 진영을 공격하는 쪽으로 개발될 수밖에 없었다. 진성은 지금까지의 전략이 모두 무력에 집중되어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진정한 문명 플레이를 실현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했기에 단기간의 전략을 위한 게임은 당연히 무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진성 자신도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시민군 양성 역시 사회 구조를 바꾸어 결국에는 군대, 즉 무력의 획기적인 강화에 그 목적이 있었다. 진성은 조금 더 나은 전략, 또는 조금 색다른 전략은 없을까 고민하다가 권력에 대한 의문에까지 나아갔고 그로 인해 재력 즉 경제력에 대한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진성은 시민군 양성이 군대의 역량을 최대로 발휘하기 위한 방편이었다면 경제적인 면에서도 그와 유사한 방법이 있지 않을까 고민했다. 사실 시민군 양성이 위태위태하고 아슬아슬한 위기가 계속 연출되는 이유를 따지고 보면 경제적인 역량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었다. 귀족과 중, 하층민 사이의 갈등은 그 안으로 파고 들어가면 소유에 대한 서로의 입장차이였는데 그 소유의 절대량이 늘어나면 그만큼 갈등은 줄어들 수 있었다. 물론 욕망은 그런 것을 상쇄할 수 있는 힘이 있었지만 그래도 계층간의 갈등은 줄어들 가능성이 높았다. 진성은 동시에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노력했다. 하나는 시민군 양성 전략을 좀 더 편하고 안전하게 할 수 있기 위해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경제적인 면에서 좀 더 빠르게 성장시키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문제가 어렵다면 답도 어렵기 마련이었다. 진성은 여러 번 다양한 아이디어를 이용해서 시도했지만 시민군 양성과 자신이 새로 생각하는 전략이 긍정적으로 서로 도움을 주어 시너지 효과가 일어나리라는 원래의 의도와는 달리 같이 전략을 사용하기 때문에 더 실패가 많아지고 그 유형도 다양했다. 유형이 고정된다면 그에 따른 대책을 취해 점점 다듬어 갈 수도 있었지만 유형이 너무 다양해 그런 시도도 하기 힘들었다. 진성은 자신의 생각이 틀린 게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지만 이미 시작했기 때문에 계속 시도했다. 일주일 간의 쉬는 기간이 끝나고 한국의 서울에 일본의 소냐전자, 도시버 그리고 한국의 쌍룡은행과 자소 소프트가 결승 리그에 진출했다. 가장 많은 프로팀의 리그가 펼쳐진 중국에서 단 한 팀도 올라오지 못한 것이 의외였지만 올라온 프로팀들의 경기력이 결코 실망을 주는 수준이 아니었기에 앞으로의 결승 경기들을 팬들은 기대했다. 한국으로 온 소냐전자와 도시버의 프로팀들은 미리 마련된 숙소와 숙소에 설치된 간이 게임룸에서 컨디션을 조절했다. 쌍룡은행과 자소 소프트는 자신들이 연습하는 곳이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경기 당일 게임 큐브로 시간에 맞춰 가면 되었기에 심적인 면에서는 조금 유리했다. 원래 계획된 대로 처음에는 각 팀당 세 경기씩 총 여섯 게임을 치르고 그 결과에 따라 1위와 4위, 2위와 3위간에 경기를 해서 승자끼리 메이저 리그의 우승을 놓고 건곤일척의 승부를 가리기로 했다. 전문가들은 자소 소프트의 강세와 나머지 세 팀의 경쟁이 치열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리고 최종 결승전에는 자소 소프트와 일본 프로 리그의 우승팀인 소냐전자의 승부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발표까지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 하는 게임인지라 그 날 당일의 컨디션이 승부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만약에 예상이 틀렸을 때의 보험도 들어놓는 발언까지 확실하게 했다. 중국에서는 자국의 프로팀이 결승 리그에 올라가지 못해서인지 조금 조용했지만 일본과 한국은 메이저 리그가 굉장힌 인기몰이를 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프로 리그의 유료화를 진행했던 한국의 운영위원회는 이미 결승전까지의 예매 좌석분이 모두 매진이 되자 상당히 유료화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이 정도라면 남아 있는 당일 판매분을 확보하기 위한 팬들이 판매 전날부터 진을 치고 기다릴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진성아, 누가 찾아왔다는데?” 한참 연습하다가 잠시 쉬고 있는 진성에게 현준이 요람으로 들어오면서 말했다. “누구?” “나도 몰라. 사무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니까. 진성이 너를 찾아올 사람이 있다니. 어, 그런데 어떻게 로비를 뚫고 올라왔지? 요즘에는 잘 들여보내 주지 않는데...” “누구지?” 진성은 자신을 찾아온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사무실 밖으로 나가니 복도 끝에 설치되어 있는 간이 휴게실에 매니저 서재필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옆에 아주 잘생긴 남자가 서 있었다. 어디서 본 것도 같은데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아... 스키피오, 게이머 스키피오. 반갑습니다.” “........” “저 모르시겠어요? 저, 지난번에 일본에서.. 그.....” “........” “아, 맞다. 일본어 모르신다고 했죠?” 잘생긴 남자는 도시버 게이머 야마모토 겐죠였다. 진성이 동경 게임쇼에 갔을 때, 지난번 메이저 리그 때문에 일본에 갔을 때 만났던 그 선수였다. 하지만 진성은 잘 기억하지 못했다. 옆에 있던 서재필이 진성과 겐죠 사이를 통역하자 진성은 어디서 봤다고 느끼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아... 도시버.. 소속의 그..” “예, 도시버!” 겐죠는 진성의 말 중에 도시버라는 말만을 듣고는 반갑게 소리쳤다. 진성은 상대가 누구인지는 알았지만 왜 왔는지는 몰랐다. 자신에게 별다른 볼일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저를 왜 찾아오셨는지?” 서재필이 중간에서 통역했다. “아, 사실은 제가 스키피오 선수의 팬이라서 경기 전에 만나 보고 싶어서요. 사실 나중에 게임 끝나면 만나기가 그렇잖아요. 하하하..” “.... 그런가요? 저도 뭐 그냥 사람인데요... 뭘..” “아니오. 스키피오 선수의 전략을 보면 어떨 때는 정말 전율이 느껴져요. 정말 대단해요. 정말.. 사실 저는 스키피오 선수의 그 플레이를 보고는 문명 온라인에 빠져들었고 그 때문에 이렇게 프로 선수까지 되었으니까요. 하하하..” “아... 그런가요?” “저 말고도 일본 프로 선수 중에 꽤 있어요.” “예....” “어떻게 그렇게 게임을 잘 할 수가 있죠? 어떨 때는 정말.. ” “.........” 진성과 겐죠는 중간에 있는 서재필의 도움으로 꽤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음료수도 뽑아서 마시면서 한동안 얘기를 나누다가 시간이 흐르자 겐죠는 진성에게 만나서 반갑다는 인사를 했다. “스키피오 선수,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오. 저도 겐죠씨를 만나서 기분이 좋은 걸요.” “제가 감사해서 정보 하나 가르쳐 드리죠. 지난번에 저희 프로팀에서 가지고 있던 그 시민군 양성에 대한 대응전략을 공개한 적 있지요?” “네, 기억합니다.” “그것은 단지 여러 이유를 위한 미끼였고 진짜는 따로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 팀 뿐 아니라 소냐전자와 어쩌면 쌍룡은행에서도 그런 방법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팬으로서 말씀드리면 조금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오늘 감사했습니다.” 자기 할 말만 해버린 겐죠는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는 서재필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버렸다. 통역했던 서재필도 얼떨떨했지만 그 얘기를 들은 진성은 겐죠라는 사람이 뭐하러 왔을까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 때의 그 발표가 미끼였고 진짜는 따로 있다? 진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쉽게 믿을 수 없는 얘기였지만 그렇다고 상대가 프로 선수인 이상 쉽게 무시하기도 어려웠다. 겐죠를 배웅하고 온 서재필 역시 그 얘기에 조금 마음이 쓰이는지 진성과 같이 의논했다. 하지만 결국 게임을 직접 해야만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판가름할 수 있을 테고 미끼라는 말 외에는 다른 말을 듣지 못했기에 지레 짐작으로 걱정한다고 해서 나아질 상황이 아니라고 결론내렸다. 어차피 게임 해보면 될 일이었다. 진성은 겐죠의 말에 별로 신경쓰지 않고 자신이 생각했던 전략의 완성을 위해서 노력했다. 첫날의 게임은 가장 기대를 모으는 경기로 바로 자소 소프트와 소냐전자와의 한판 승부였다. 한국의 프로 리그 우승팀과 일본의 프로 리그 우승팀이 최초로 대결하는 경기여서 그 관심은 지대했다. 게다가 두 팀에는 한국과 일본의 최고수라 불리는 게이머 스키피오와 폭풍의 준이치로가 있어서 더욱 더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게이머 스키피오가 전형적인 전략적이면서도 냉철한 예상을 전제로 한 게임 플레이에 강점을 가지고 있다면 폭풍의 준이치로는 그야말로 상대를 몰아치는 폭풍과 같은 플레이를 통해 화끈한 승부를 결정짓는 게임 운영이 특징적이었다. 그런 개성은 일반적인 경향일 뿐이지 게이머 스키피오의 몰아치는 경기도 없지 않았고 폭풍의 준이치로 역시 전략적으로 완벽한 게임을 보여준 적이 있었기 때문에 게임의 진행에 대한 예상이 쉽지 않았다. 확실하게 예상할 수 있는 것은 두 선수간의 경기가 자소 소프트와 소냐전자와의 승부를 결정지을 수 있는 커다란 게임이라는 사실이었다. 자소 소프트와 소냐전자는 정면승부를 택했다. 양팀 모두 선수 오더를 미리 발표했고 어느 정도 의견조율이 있었던 모양인지 첫 경기에 가장 강력한 게이머 스키피오와 폭풍의 준이치로가 맞부딪치게 되었다. 첫 경기가 가장 인기를 모은다면 그 다음 경기인 게이머 한신과 강철의 유우지와의 대결은 그야말로 가장 유연한 플레이로 손꼽히는 게이머 한신과 가장 강한 플레이의 게이머 중 하나인 선수와의 대결이어서 또 다른 의미로 관심을 모았다. 그야말로 유와 강의 대결이었다. 전문가들은 게이머 한신이 조금 우세하지 않을까 예상했지만 게이머 한신은 상대적으로 드러난 입장이었고 상대인 강철의 유우지는 그 반대였기 때문에 박빙의 승부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했다. 반면에 마지막 대결인 럭셔리 히데아키와 리틀 스키피오 성진규의 대결은 대등한 실력이어서 게임 자체는 볼만하다고 평해졌지만 앞의 두 게임이 워낙 스포트 라이트를 받아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받았다. 하지만 앞의 두 경기의 결과에 따라서 최고의 집중을 받을 지도 모르는 게임이었다. “진성이 형, 어때? 자신 있어?” “그냥 하는 거지.” 진규의 물음에 담담하게 진성은 대답했다. 진성은 게임 전에도 거의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긴장해서 물을 들이키지도 않았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하지도 않았다. 그냥 앉아서 마음을 가다듬고 몸이 조금 아니다 싶으면 팔극진결로 몸을 풀 정도였다. 진규는 그런 면에서 진성을 부러워했다. 평소의 실력을 100% 이상 발휘할 수 있는 진성의 그런 면이 부족했던 진규는 그 대담함을 배우려 했지만 타고나는 부분이 많아서인지 쉽게 터득할 수는 없었다. “진성아, 완전히 KO 시켜 버려라.” “KO? 그게 어디 쉽냐? 어쩌면.... 나 오늘 질지도 모른다.” “뭐? 그게 정말이냐? 네가 진다고? 농담이지?” “정말이야. 뭐... 상대에게 져서 지는 게 아니라... 자멸이겠지만..” “뭐? 아... 너... 또 이상한 전략 쓰려고 하는 거지?” “일단... 예선에서는 조금 져도 순위만 뒤쳐지지 탈락하지는 않으니까. 게다가 이런 경기에서 전략을 테스트하면 확실히 그 단점이나 고쳐야 할 부분들이 보이거든. 어쩔 수 없지....” “매니저 형이 그런 얘기를 하긴 했지만... 진짜로 그렇게 할 거냐?” “이번이 아니면.. 다시는 쓸 수 없는 전략일지도 모르니까.” 진성은 서재필과 의논해서 결승 리그의 리그전에서는 진성이 생각하는 전략을 시험해 보기로 했다. 경기 결과가 좋지 않아도 어차피 4위 안에는 들기 때문에 리그인 세 경기에서 전략을 어느 정도 가다듬을 수만 있다면 최종 시리즈에서 그 효과가 들어날 것이다. 서재필과 진성은 겐죠의 그 진의를 알기 힘든 말 뿐 아니라 다른 프로팀들의 이유없는 자신감을 느끼고는 어려운 결정을 했다. 진성이 승부가 아니라 테스트 모드로 들어감에 따라 자소 소프트의 전력은 한신과 리틀 스키피오 성진규로 좁혀졌다. 진성은 무력과 재력, 그 둘을 아우르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현재 문명 온라인에서 최고의 전략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어쩌면 한동안 팬들을 근심시킬 수 있는 결정을 했다. 물론 매니저 서재필과 조건을 걸어 리그전인 세 경기에서만 테스트를 하고 결실을 보지 못하면 시리즈에서는 제대로 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진성 자신이 그 세 경기의 선봉으로 나서기로 했다. 손에 잡힌 그 무언가를 제대로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지만 게임의 한계에 번번이 걸리거나 균형이 깨어져 자멸하는 현상이 계속되어 진성은 마지막 노력을 다해 보리라 결심했다. “갔다 올께.” 진성은 진규와 현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반대쪽에 있는 매니저 서재필과 보디가드 이준 그리고 코디 현숙과 소희를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진성은 자신있는 걸음걸이로 대기실을 나와 엄청난 환호소리가 들리는 무대위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폭풍의 준이치로는 폭발적인 환호성을 들으며 무대위로 올라왔다. 반대쪽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최강의 상대인 게이머 스키피오가 올라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준이치로는 이 순간이 너무도 감격스러웠다. 준이치로 역시 겐죠와 마찬가지로 스키피오의 게임에 매료되어 원래 다른 게임의 프로 선수로 활동하던 것을 그만두고 많은 사람들의 우려섞인 걱정을 뒤로한 채 문명 온라인에 뛰어들었다. 다행히 뛰어난 게임 센스로 폭풍의 준이치로라는 이름을 얻을 정도로 인기가 좋을 수 있었다. 하지만 준이치로가 원하던 그런 게임을 하는 창조적인 게이머는 일본에 없었다. 아니, 있다고 하더라도 준이치로의 마음에는 이미 상대가 스키피오로 정해져 있었다. 그런 마음이었기에 점점 거리가 가까워지자 자신도 모르게 긴장되는 준이치로였다. 준이치로는 무대 가운데에서 스키피오와 만나 악수를 나누고는 자신의 게임기로 와서 탑승했다. 나직하게 한마디 한 준이치로는 눈을 감았다. “드디어........” 폭풍의 준이치로의 문명은 그리스였다. 이번 메이저 리그를 통해서 더욱 확연히 드러났던 사실 중 하나는 각 국의 선호하는 문명의 차이였다. 전체적으로 로마 문명을 가장 많이 선호했지만 각국별로는 다른 경향이 나타났다. 중국은 중국 문명을 상대적으로 많이 선택했다. 한국은 그야말로 전체적으로 봐서 고르게 선택한 편이었고 일본은 그리스 아니면 로마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편중된 현상을 보였다. 준이치로는 폭풍이라는 닉네임처럼 몰아치기에 능하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섬세한 플레이도 전혀 여느 게이머에 비해 뒤지지 않을 정도로 탁월한 컨트롤을 지녔다. 그런 기본 실력 위에 막강하게 몰아붙이는 개성이 더해지자 그 위력은 배가되었다. 오래지 않아 게임이 시작되었다. 준이치로는 빠르게 문명의 상태를 파악하면서 곧바로 주위로 정찰 겸 미니 사절단 역할을 할 인물들을 보내고 기본적인 컨트롤을 계속했다. 그리스의 가장 특징적인 방진형 중보병의 양성을 서두르면서도 군 체제에 대한 세세한 컨트롤 역시 잊지 않았다. 확실히 준이치로의 컨트롤에는 비범한 면이 있었다. 아주 간략하면서도 정확한 컨트롤이 물줄기가 끊임없이 쏟아지는 폭포수와 같이 줄기줄기 이어졌다. 준이치로의 빠른 컨트롤이 계속될 무렵 게이머 스키피오 역시 바쁘게 움직였다. 준이치로와 마찬가지로 적절한 인물들을 보내고는 곧바로 빠른 컨트롤에 들어갔다. 스키피오의 게임을 지켜보던 많은 관객들과 프로팀 관계자들은 스키피오가 선보였던 시민군 양성 전략을 이번 경기에 사용할 것인가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아.....!” 스키피오가 그 아슬아슬한 외줄타기의 전략을 시작하자 관객들 사이에서 탄성이 나왔다. 또 한번 기적의 전략이라고까지 불리는 시민군 양성에 도전하는 스키피오의 용기에 대한 감탄이자 이어질 대단한 전투를 기대하는 마음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않았다. 스키피오의 컨트롤에 이상한 것들이 조금씩 섞이자 서서히 동요하는 사람들이었다. “저게..... 뭐지? 저런 것도 있었나?” “야.. 저것 좀 봐... 저거 시민군 양성 전략 맞어?” “어.... 아닌 것 같은데.... 업그레이드 버전인가?” 관객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다양해지면서 알고 있던 시민군 양성 전략과는 다른 컨트롤에 의아해하면서도 자신 나름대로 해석했다. 그런 사정은 프로팀 관계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폭풍의 준이치로와 게이머 스키피오의 대결을 보러 왔던 타팀 게이머들조차 무슨 영문인지 모를 정도였다. 어쩌면 게이머 스키피오가 그 짧은 기간 동안 시민군 양성이라는 전략을 새롭게 업그레이드 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적잖이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진성은 밖에서의 그런 반응은 전혀 알지 못한 채 자신이 하고 싶은 컨트롤을 계속했다. 진성이 하는 컨트롤에는 두 개의 전략이 하나로 녹아 들어 있었다. 무력의 극대화를 위한 시민군 양성 전략과 재력 즉 경제력의 극대화를 위한 경제구조 조정이라는 거창한 전략, 두 전략을 한꺼번에 펼치고 있는 진성이었다. 진성이 원하는 경제구조의 조정은 어떻게 보면 문명 구조의 재조정이었다. 시민군 양성을 위해서 문명의 구성원인 사람의 계층에 대한 조정을 가했다면 재력의 극대화를 위해서 진성은 도시와 농업을 위주로 한 지역으로 나누어진 세밀한 지역을 직접 컨트롤했다. 도시를 성장시키는 컨트롤과 농업을 주로 하는 덜 발달되고 인구가 적은 지역을 발전시키기 위한 컨트롤을 분리시켰다. 문명의 대표적인 기술들은 도시들에서 개발되지만 문명의 기반을 공고히 할 수 있는 식량과 기타 물자에 대한 공급은 인구가 상대적으로 적은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지역에서 이루어진다. 진성은 그런 점을 컨트롤에 포함시켜 버린 것이다. 진성은 거기에 머물지 않았다. 군대의 빠른 이동을 위한 도로를 적극적으로 물자의 이동에 이용함으로써 그 이용효과를 극대화시켰다. 로마 전체를 몇 개의 큰 지역으로 나누어 그 사이의 도로를 개선했다. 세세하게 하나하나를 다 컨트롤로 지정할 수 없었지만 어느 정도 큰 지역의 개선으로도 그 효과는 상당하리라 예상했다. 또한 진성은 여러 대표적인 도시들에 대한 컨트롤에 변화를 줌으로 각 도시마다의 진성 자신이 정한 개성을 가지게 만들었다. 어떤 도시는 새로 모집된 군단의 장비와 그 훈련을 담당하게만 만들었고 다른 곳은 그 주변 지역의 물자를 모으고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일에 충실하도록 만들었다. 이른바 도시마다 나눌 수 있는 기능의 분화를 컨트롤로 실현한 것이다. 이런 진성의 전략은 일견 그냥 보기에는 굉장히 부자연스럽고 너무 어지럽게 보였다. 이곳 저곳을 왔다갔다 하는 컨트롤에 무슨 의도를 가진 것인지도 모를 정도였다. 그 이유는 진성이 하나의 전략이 아닌 시민군 양성 전략까지 동시에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대기실에서 보고 있던 진규까지 너무 산만한 컨트롤에 걱정의 눈길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정작 진성의 이상한 전략에 가장 늦게 놀란 것은 바로 상대인 폭풍의 준이치로였다. 준이치로는 빠른 성장과 함께 상대 진영의 정찰을 시도했는데 그 결과를 보고는 당황해 버렸다. 준이치로는 이해불가인 그 전략에 도대체 무슨 전략인지 몰라 고민했다. 하지만 이런 전략이라 생각하면 그와 반대되는 컨트롤이 보여 도저히 짐작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준이치로를 더욱 답답하게 만든 것은 그 전략을 펼치는 게이머가 바로 스키피오라는 사실이었다. 일본에서의 경험으로 스키피오가 군단 전체를 바다에 쳐 넣어도 이유 있는, 그럴 듯한 전략이라는 믿음이 생길 정도로 스키피오라는 이름값은 절대 작지 않았다. 준이치로 역시 그 때문에 더 고민했고 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 자멸하던 리틀 스키피오의 로마 문명을 오히려 공격함으로 도와주었던 어느 게이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전략에 대한 두려움은 상상외로 컸다. 준이치로는 참고 있지만 모르는 전략의 상대를 빨리 공격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이... 이런... 휴... 다행이군.” 진성이 예상했던 쿠데타가 일어났다. 초기에 경제구조의 조정에 재력이 많이 들어갔기 때문에 초반에 쿠데타가 예상되었다. 다행히 진성이 충분히 예상한 범위여서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진성은 그런 바쁜 와중에도 쿠데타가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을 특정 범위에 쉽게 해줘서 오히려 곪아 터지는 것을 유도해 상처를 치료하는 방법을 택했고 보기좋게 성공했다. 일단 자신이 원하는 대로 첫단계가 지나자 내심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연습 게임으로 봐서 절대 안심할 수 없었다. 진성은 앞으로 많이 남은 난관을 생각하며 자신이 준비해 온 것들을 풀어 놓기 시작했다. 이제부터가 진짜라고 중얼거리며 컨트롤을 다시 빠르게 하기 시작했다. 쿠데타 소식을 들은 폭풍의 준이치로는 여전히 고민했다. 작은 쿠데타였고 조기에 진압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쿠데타 자체가 바로 그 내부에 삐걱거림이 표면 위로 올라왔다는 말과 마찬가지였다. 준이치로는 자신의 컨트롤을 마음을 다잡으면서 계속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스멀스멀 커져가는 불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조금 더 참아야 한다는 마음과 지금이 아니면 시민군 양성의 업그레이드 버전이 완성되어 참패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준이치로의 내부에서 싸우고 있었다. 준이치로는 주변의 동맹국들과의 관계를 튼튼히 함과 동시에 군대의 양성에도 박차를 가했다. 준이치로의 판단에 스키피오의 로마는 군대의 양성에 그다지 역점을 두지 않았다. 준이치로는 자신의 약점으로 상대의 강점을 치는 대신 자신의 강점을 먼저 키우는 것을 선택했다. 마음 속에서는 여전히 두 가지 마음이 대립하고 있었지만 준이치로의 경험은 조금 더 기다리라고 말했다. “으... 이... 이...이런... ” 진성 자신이 생각했던 경우 중에서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경우가 발생했다. 두 전략, 시민군 양성과 경제구조 조정으로 인해 비교적 초반에 동시에 피해를 보는 계층은 돈 많은 귀족층이었다. 어느 정도의 기간만 지나면 오히려 더 상황이 나아질 텐데 그런 것을 예상할 수 없었던 부유한 귀족층이 한 도시에 모여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더구나 그 도시에 소속된 군단이 2개나 되어 가뜩이나 병력이 없는 상황에서 아주 난감한 진성이었다. 진성은 빠르게 중도적인 인물을 보내어 그 귀족들에게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 설명하는 등 상대적으로 유리한 조건들을 내걸었지만 돌아온 것은 무력시위 뿐이었다. “휴.... 이게 한계인가?” 진성은 한숨을 쉬었다. 두 전략을 동시에 할 수는 없는 것인가? 진성은 고민했다. 로마의 내전 소식은 빠르게 준이치로에게도 전해졌다. 자신의 강점을 키우기 위해서 기다렸던 준이치로였지만 내전 소식에 그 마음 속의 불안함이 오히려 승리에 대한 자신감으로 바뀌면서 원정을 결심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준이치로의 경험으로 인한 이성적인 면이 살아 있어서 많은 군대가 아닌 기습의 의미를 가지는 5만의 군대만 원정을 보내기로 했다. 준이치로 자신이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5만의 원정군을 재빨리 편성해서 제일 빠른 길로 로마로 보낸 준이치로는 어떤 반응이 올지 고대하고 있었다. 확실히 로마 문명의 몰락을 나타나는 내전인지 아니면 그 내전조차도 게이머 스키피오가 만든 전략의 일부분인지 곧 알게 되리라 확신했다. 반란으로 난감해 하던 진성은 어쩔 수 없이 무력 진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그 반란에 동조하는 세력이 많아질 게 불 보듯 뻔했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병력을 일으켰다. 진성은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아직 시작도 제대로 하지 못해 얼마 있지도 않은 군대를 진압하러 그 반란을 일으킨 도시를 향해 출발하려고 했다. “뭐? 아... 음... 5만이라... 어쩌면...” 진성은 출발하기 직전에 5만의 상대 게이머의 원정군이 국경으로 다가온다는 보고를 받았다. 진성은 어쩌면 이것을 이용해서 반란을 무마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진성은 곧 보고를 그 도시에게로 빠르게 보냈다. 외적이 나타나면 보통 내부의 문제를 잊기 마련이었다. 게이머 진규의 위험한 순간을 도와준 것은 로마 내부의 요소가 아니라 상대 게이며였던 것이 기억났다. 하지만 진성은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바로 원정군이 5만이라는 적은 병력이라는 것이었다. 진성이 생각하기에 20만, 30만이 넘는 대군이라면 반란군은 어쩌면 진성 자신이 아닌 상대 게이머에게로 붙을지 모른다고 여겼고 10만이라면 진성과 같이 내부의 문제를 잠시 잊고 싸울 것이고... 5만이나 그보다 작으면 오히려 반란군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격퇴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진성의 생각은 얄밉게도 그리 벌어질 일과 다르지 않았다. 진성이 보낸 보고를 들은 반란군은 그 원정군을 자신들로도 막을 수 있다며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진성은 다시 한번 자세한 상황과 적의 부대는 훨씬 더 엄청남을 역설했지만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진성은 이것으로 다음 경기 때는 자신 뿐 아니라 귀족층들에게도 상대에 대한 정보를 개방해야겠다는 귀중한 하나의 수정 컨트롤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5만의 상대 게이머 폭풍의 준이치로가 보낸 원정군이 국경을 넘고 반란의 상태가 오래 가자 다른 도시에서도 또 다른 반란이 일어났다. 그 기운은 로마의 중심부까지 이어졌다. “휴.... 끝인가? 그래도.... 두 가지를 건졌군. 의외의 소득인데....... 역시 이렇게 경기 중에 하는 게 훨씬 낫군.” 로마의 중심부에서 대규모 쿠데타가 일어나자 진성은 곧바로 게임 오버를 선언했다. 5만의 원정군이 로마의 국경안으로 들어간 후에 보고가 올라오기도 전에 폭풍의 준이치로는 상대 게이머 스키피오의 게임 오버 선언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준이치로 자신이 한 것은 상대의 반응을 보기 위한 5만의 원정군을 보낸 일밖에 없었다. 게다가 가벼운 교전도 전혀 없었다. 준이치로는 스키피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나름대로 명승부를 기대했던 준이치로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흥분했던 머리가 식자 어쩌면 스키피오가 자신을 상대로 새로운 전략을 시험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은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사실로 다가왔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쉽게 자멸할 리가 없었다. 준이치로는 화가 났다. 자신은 이 게임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상대의 연습 상대가 되어버리다니. 화가 나서 미칠 것만 같았다. 준이치로는 게임기에서 나와 무대 가운데로 나오면서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화가 더 났다. 무대에서 관객들에게 인사를 했지만 관객들도 어리벙벙한 지 별 반응이 없었다. 준이치로는 스키피오와 무대 뒤로 내려가면서도 화가 식지 않았다. “스키피오, 당신을.. 정말 당신과 게임을 하기 원했는데... 이렇게 할 수가 있는 겁니까?” “........?” “정말로 이럴 수가 있습니까? 아무리... 나를 연습상대로 보다니...” “.......?” “아... 준이치로씨, 스키피오는 일본어를 알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잠깐만요.” 무대 뒤에는 서재필이 나와 있었다. 서재필은 준이치로의 말을 듣고서는 대번에 상황을 알았다. 그것은 서재필 자신이 미리 나와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진성의 제안을 들었던 서재필은 다른 면들은 다 인정했지만 상대 게이머를 너무 무시하는 게 아닌가 하는 측면에서 조금은 꺼렸다. 하지만 진성이 말하는 것도 일리가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그런 진성이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채워 주리라 마음 먹었던 것이다. 자신의 생각대로 사태가 벌어지자 서재필은 일단 준이치로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진성에게 대강의 정리를 해서 말했다. 진성은 그 말을 듣더니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확실히 자신만 생각한 처사였다. 자신이 상대였더라도 기분이 나빴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 제가 잘못했다고 전해 주십시오. 그리고 리그가 끝나고 시리즈가 시작되면 다시 한번 붙어 제대로 된 실력을 보여 준다고 전해 주십시오. 정말 실례했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진성의 진심어린 표정과 서재필의 확실한 설명을 들은 준이치로는 조금 화가 그침은 알았지만 그래도 기분 나쁜 것은 가시지 않았다. 준이치로는 진성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약속해 주십시오. 리그 전에서는 누구에게도 이기지 마십시오. 저와 똑같이 해 주십시오. 그리고 시리즈가 시작되면 저와 경기를 하기 전에는 누구에게도 지지 마십시오. 약속해 줄 수 있겠습니까? 스키피오?” 서재필의 통역을 들은 스키피오 진성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진성은 상대의 배려에 감사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 약속 꼭 지키겠습니다.” 준이치로는 그런 진성의 얼굴을 바라보다 손을 내밀었다. 진성은 준이치로의 내민 손을 잡으며 악수했다. 진성은 미안함이 앞섰고 준이치로는 자신의 잘못을 확실히 인정하는 화끈한 진성을 보자 화가 가라앉음을 느꼈다. 서로 꽉 손을 잡은 손을 풀면서 준이치로가 앞으로도 두 번의 져야할 게임이 남았다는 농담을 하고는 대기실로 먼저 사라져 버렸다. “매니저 형....” 진성은 자신의 잘못을 알았기에 서재필을 보며 말했다. “너도 이제 조금은 알았지? 게임도 중요하지만 어떨 때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 “네..... 감사합니다.” 진성은 매니저 서재필이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는 이유를 알았다. 진심으로 고마웠다. “하지만.. 그 녀석 자신에게 졌다고 나머지 두 명에게도 지라고 하다니...... 맹랑한 걸... 게다가 자신과 만나기 전에는 지지 말라고? 지가 무슨 영화의 주인공으로 착각한 거 아니야?” 서재필은 미안해하는 진성을 쳐다보지도 않고 준이치로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서 너스레를 떨었다. 서재필은 진성의 어깨를 잡고는 자소 소프트의 대기실로 천천히 향했다. 자소 소프트의 패배 소식은 한국 뿐 아니라 일본, 중국에서도 이슈가 되었다. 특히 선봉으로 나선 게이머 스키피오의 석연치 않은 패배는 많은 구설수에 오를 정도였다. 게임 화면 자체만 봐서는 절대로 스키피오가 장난스레 게임을 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엄청난 컨트롤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탄성을 지를 정도로 대단했기 때문에 스키피오가 일부러 져 주었다는 일부의 주장은 그리 큰 신빙성이 없었다. 하지만 단 한번의 공격이 있지도 않았는데 자멸한 것은 게이머 스키피오 답지 않다는 말이 많았다. 전문가들과 대부분의 문명 온라인 팬들은 스키피오의 패배를 새로운 전략의 실패라고 여겼다. 분명히 스키피오의 컨트롤은 시민군 양성과 처음 부분은 비슷했지만 갈수록 컨트롤의 양 뿐 아니라 방향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그런 부분이 시민군 양성 전략의 업그레이드를 너무 성급하게 게임에 적용한 게 아니냐는 목소리가 힘을 받게 되었다. 게이머 스키피오의 패배 다음에 나온 한신이 상대를 접전 끝에 이기기는 했지만 마지막 선수인 리틀 스키피오의 뼈아픈 실책으로 인한 패배로 거함 자소 소프트는 침몰하고 말았다. 리틀 스키피오의 경기는 아쉬운 점이 많았다. 결과적으로 봤을 때의 이야기지만 리틀 스키피오는 다 잡은 승기를 한순간의 실책으로 인해 상대를 놓쳤고 그것이 빌미가 되어 결국 게임까지 내주게 되어 자소 소프트의 침몰을 기정사실화 시켰다. 자소 소프트의 패배는 이슈가 되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팬들은 자소 소프트의 실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프로 게임이라는 경쟁에서 언제라도 패할 수는 있었다. 문제는 그것이 고정되느냐 아니냐라는 점이었다. 그런 면에서 팬들은 자소 소프트가 곧 회복해서 전의를 가다듬으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자소 소프트는 리그 세 게임에서 1승 2패의 성적을 거두어 네 팀 중에서 4위를 기록해서 많은 팬들을 걱정하게 만들었다. 특히 게이머 스키피오의 3연패는 처음 보는 것이기에 더욱 더 팬들은 마음을 졸였다. 게임 내용이 절대적으로 밀리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변의 동맹국을 향해 쳐들어가는 등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시도를 해서 자멸하는 꼴이었다. 그러자 항간에는 게이머 스키피오가 너무 무모한 게 아니냐는 비난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특히 인터넷에서 스키피오를 열광적으로 좋아하던 일부 팬들은 오히려 그 열정을 비난에 쏟아붓기 시작하자 스키피오에 대한 성토가 줄을 이었다. 네 팀 가운데 1위는 의외로 일본의 도시버, 2위는 소냐전자, 3위는 쌍룡은행, 4위가 자소 소프트였다. 게이머 스키피오에 대한 비난은 어떤 면에서 1, 2위를 일본팀에 내준 이유도 포함되어 있었다. 스포츠나 이런 레포츠에서 일본에 지기 싫어하는 감정은 여전했다. 게이머 스키피오는 여러 가지 이유로 많은 사람들의 걱정, 비난을 불러 일으켰다. “진성아, 다른 것들에는 전혀 신경 쓰지 마라... 그런데 이제 그 전략은 어느 정도 사용할 만 하냐?” 서재필은 진성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여러 가지로 쇄도하는 좋지 않은 것들을 사전에 다 막고 있었다. 게다가 자소 소프트 회사의 위쪽에서 내려오는 압력 역시 서재필이 모두 막고 있었다. 서재필은 진성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다. 지금까지 보아온 진성이라면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게다가 이제 시리즈가 시작되기 때문에 진성 역시 자신의 본 실력을 드러낼 테니 비난 같은 것들은 곧 사라질 것이다. “네.. 아직 위험성이 있기는 하지만 제가 생각한 만큼은 된 것 같습니다.” 진성은 매니저 서재필이 자신 때문에 겪지 않아도 될 수고와 고생을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더 열심히 했고 지금은 자신이 스스로 만족할 정도는 되었다. 그런 진성의 자신 있는 듯한 모습에 서재필은 웃었다. “그래.. 이제 제대로 한 번 해 보자. 하하.. 이제 뭐라고 하지 않겠지?” “네.....” 결승 리그 1위인 도시버와의 격돌은 3일 뒤에 있을 예정이었다. 자소 소프트 뿐 아니라 도시버 역시 이제는 지면 짐싸야 되는, 꼭 이겨야 되는 게임을 앞에 두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 중이었다. “강진성, 이제 제대로 할 거지?” 요람으로 들어와서 진성 옆으로 다가온 현준이 툭 내뱉었다. 현준은 진성 덕분에 같이 욕을 얻어 먹고 있었다. “당연하지. 이제까지 져서 기분 나빴는데.... 이제 다시는 그러고 싶지 않다.” “너는 인터넷 안 들어가봤지? 휴우... 장난 아니다. 너 뿐 아니라 나와 진규도 싸그리 도매급으로 욕 얻어먹고 있다.” “하하하.. 그럴만도 하지. 아무튼 이제 두 게임만 남았는데... 확실하게 해야지.” “제말 그렇게만 해 다오. 그런데 그 전략은 확실하냐? 또 하다가 자멸하면?”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해야지.” “성공할 확률은 어느 정도냐?” “음..... 보통은 반반..” “뭐? 반반? 50%? 그러면 실제로 못 쓰잖아?” 현준은 50%라는 말에 기겁했다. 그렇다면 없느니만 못했다. “보통 때는 반반이지. 아마.. 최종 경기에서는 100%가 되지 않을까? 하하..” 메이저 리그는 마지막 세 경기를 남겨놓고 있었다. 1위인 도시버와 4위인 자소 소프트, 2위인 소냐전자와 3위인 쌍룡은행이 맞붙어 그 승자끼리의 마지막 결승전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속에 다가오고 있었다. 예상밖의 부진을 한 자소 소프트가 1위인 도시버와 대결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자소 소프트라면 뭔가 보여주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특히 이번에 예전의 그 날카로운 경기를 보여주던 모습을 회복했으면 하는 스키피오에게 관심이 집중되었다. 어쩌면 스키피오가 그 실력을 제대로 발휘해 준다면 어렵지 않게 이기리라 생각할 수 있었다. “여기는 곧 메이저 리그의 최종 결승 리그가 끝나고 토너먼트 시리즈가 펼쳐질 게임 큐브 현장입니다. 저는 아나운서 김동수이며 해설에는 홍진호씨가 수고해 주시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네, 안녕하십니까? 홍진호입니다.” “오늘은 두 경기가 있을 예정입니다. 2위팀인 소냐전자와 3위인 쌍룡은행, 그리고 1위인 도시버와 4위인 자소 소프트간의 승부, 어떻게 예상하십니까?” “일단 2위와 3위팀은 현재 서로 선수 오더를 발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선수 오더에 승부의 변수가 상당히 크리라 생각됩니다. 서로간의 전력차가 크지 않기 때문에 그만큼 어떤 선수들이 서로 부딪치느냐는 대세를 가를 수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상대의 허를 찌르기 위한 오더의 구상을 마치지 못한 듯합니다. 그리고 1위인 도시버와 4위인 자소 소프트간의 대결은 아주 흥미롭습니다. 결승 리그에서 예상치 못한 부진을 보여준 자소 소프트와 의외로 1위를 차지한 도시버 두 팀의 대결은 이미 한번 도시버가 이겼지만 리그전이었기에 오늘의 경기가 진검승부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 거기다가 자소 소프트가 발표한 선수 오더가 리그전과는 다릅니다만..” “맞습니다. 리그 전에서 항상 선봉으로 나오던 게이머 스키피오가 마지막 대장을 맡았습니다. 일각에서는 리그전은 일종의 연막작전이고 이제야 그 제대로 된 실력의 스키피오를 보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도시버와 다른 프로팀들도 스키피오의 그 이상한 컨트롤에 무언가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아직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도 그 선수 오더의 변경은 단순한 변경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요. 아무튼, 스키피오 선수의 선전을 기대해 봅니다.” 2위인 소냐전자와 3위인 쌍룡은행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경기가 시작되고 나서야 관객들은 물론 중계 방송을 듣고 있던 시청자들이 선수 오더를 알 수 있었다. 소냐전자는 선봉의 역할을 맡았던 폭풍의 준이치로를 뒤의 대장으로 돌렸다. 소냐전자의 선봉은 강철의 유우지였고 그 뒤를 럭셔리 히데아키가 맡았다. 소냐전자의 오더는 평소의 오더와는 사뭇 달랐다. 쌍룡은행 역시 보통 때와는 다른 오더를 준비했다. 쌍룡은행의 선봉은 게이머 사신으로 유명한 김한석이 맡았고 그 다음이 전주환, 김현철로 이어지는 오더였다. 쌍룡은행의 오더는 초반 사신으로 기선을 제압하고 중반의 게이머 전주환으로 시리즈를 끝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쌍룡은행으로서는 마지막인 김현철까지 이어지면 상당히 위험했다. 아니, 위험이 아니라 가장 약한 선수를 상대의 가장 강한 선수와 부딪치게 되기 때문에 꼭 전주환에서 끝을 맺어야 했다. 그런 설명은 해설가 홍진호로 인해 방송을 탔고 많은 사람들이 두 팀의 대결에 더욱 집중을 하게 만들었다. 한편으로 게이머 사신과 폭풍의 준이치로 간의 정면대결을 기대했던 팬들은 실망을 금치 못했다. 리그전과 달리 단 한번의 패배가 탈락과 직결되었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선수 오더를 유리하게 구성하는 것도 프로팀의 역량이었다. “아..... 아쉽습니다. 소냐전자의 강철의 유우지. 강력한 공격을 했지만 게이머 사신의 방어가 더 대단했습니다. 25만의 병력이 대규모 공성전을 했지만 피해가 속출한 채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김동수 아나운서의 아쉬움 섞인 말이었다. 로마 문명인 강철의 유우지와 이집트 문명인 게이머 사신의 대결은 사신의 우세로 점쳐졌지만 초반 게임을 이끌고 나간 것은 강철의 유우지였다. 대규모 원정군을 이끌고 이집트로 들어온 유우지는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왔다. 그 와중에 이집트의 많은 부분이 파괴당했다. 그런 관계로 한눈에 보기에도 이집트의 열세가 예상되었지만 게이머 사신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강력한 방어라인이 형성되었고 튼튼한 성벽을 이용한 수성전은 상대 원정군의 보급이라는 약점을 파고들었다. 25만의 병력이 펼치는 어마어마한 공성전이었지만 16만의 병력은 튼튼한 방어력을 보여주었다. 시간이 흐르자 원정군이라는 압박감과 보급에 대한 문제가 생겼다. 약탈을 통한 보급을 하려고도 했지만 이미 소개작전이 끝나 모든 물자는 방어라인 안쪽으로 모여 있었기 때문에 유우지의 군대는 방어라인을 넘지 못하는 이상 본토에서 보급이 와야할 판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이 문제였다. 유우지의 17만 병력이 서서히 후퇴했다. 이집트의 변방으로 후퇴하는 때에 방어라인이 열리면서 8만의 이집트 전차부대가 출현했다. “와... 드디어 나왔습니다. 이제까지 적은 병력으로 수성만 하던 게이머 사신이 감추어 두었던 비장의 카드, 전차병. 물경 8만은 되어 보입니다. 강철의 유우지의 군대의 후미를 급습합니다. 기동력의 차이로 인해 후퇴하는 군대는 속수무책입니다. 지휘라인과 제대로 통제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김동수 아나운서의 설명은 화면을 보는 사람들에게 더 감칠맛 있는 방송을 느끼게 했다. 강철의 유우지의 군대는 부족한 물자로 인한 사기저하와 실속없는 공성전을 그만 두고 후퇴하려는 정확한 타이밍에 후미를 덮친 게이머 사신의 전차부대로 인해 적지 않은 피해를 입고 겨우 퇴각할 수 있었다. 13만으로 줄어버린 유우지의 군대는 해안가에서 진을 치고는 2차 원정군과 보급을 기다렸다. 유우지는 공성전 초반에 밀어버리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만의 실수가 아니라 상대의 그 튼튼한 방어 때문이기도 했다. 유우지는 점점 늪에 빠지는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 “게임 오버입니다. 2차 원정군과 더불어 보급을 제대로 한 강철의 유우지의 군대가 다시 한번 방어라인을 두드렸지만 게이머 사신의 방어는 철벽입니다. 오히려 때리다가 지친 유우지의 군대가 게이머 사신의 전차부대에 궤멸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홍진호씨?” “네, 그렇습니다. 강철의 유우지로서는 초반 공성전 때의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경기로 수성전에서의 게이머 사신의 역량을 제대로 볼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수성전에서 게이머 사신을 따라올 선수는 아마도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아, 그렇군요. 첫 게임은 쌍룡은행의 선봉인 게이머 사신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잠시 광고 듣고 다음 게임인 게이머 전주환과 럭셔리 히데아키의 대결을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게이머 사신의 승리는 예견되어 있었다. 중요한 것은 다음 게임인 게이머 전주환과 럭셔리 히데아키의 대결이었다. 전주환은 게이머 사신과는 달리 화끈한 공격력을 선보이는 게임 운영을 주로 했다. 그래서 원래 쌍룡은행의 선봉을 맡았던 선수였다. 전주환으로서는 자신의 어깨에 커다란 짐이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꼭 이겨야 했다. 자신이 지면 탈락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임을 잘 알고 있었다. 럭셔리 히데아키는 그야말로 화려한 게임을 보여주었다. 평소 하고 다니는 복장 역시 대단히 화려한 것인데다 게임도 대규모 병력전을 좋아하는 등 화끈하고 화려한 그야말로 볼 거리가 많은 경기를 연출하곤 했다. 전주환과 히데아키의 대결은 초반부터 전장에서 그 승부를 내리라는 예상이 많았다. “으..... 휴우....” 국경 근처에서 양쪽 합해서 23만의 군대가 맞붙었다. 그야말로 타격전이었다. 양익의 기병은 부수적인 역할을 하고 몸통인 보병의 정면대결이었다. 힘 대 힘의 대결을 여실히 보여주는 한판이었다. 대결도 아주 남자다워서 하루의 대결이 끝나면 각자 자신의 진지로 돌아갔다가 그 다음날 다시 전장으로 나와 맞붙었다. 3일 동안 부딪쳐도 승부가 나지 않다가 4일 째 되는 날 드디어 한쪽이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거대한 두 개의 군대가 서로 힘겨루기를 하는데 한쪽이 조금씩 밀렸다. 처음에는 천천히, 하지만 점점 빠르게 밀리다가 순식간에 그 중앙이 뚫려 버렸다. 그 이후부터는 도망가는 상대를 따라가면서 확실하게 없애는 것 뿐이었다. “안타깝습니다. 전주환 선수, 아주 잘 했는데 상대 히데아키 선수의 선전입니다. 전주환 선수 보기 힘든 정면 대결을 보여주었지만 힘에서 밀리고 말았습니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히데아끼의 계속된 돌진으로 인해 두 번째 게임은 소냐전자의 히데아키 선수가 승리했습니다. 경기는 마지막 게임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폭풍의 준이치로와 게이머 김현철이 그 마지막을 장식하겠습니다.” 한번 밀리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이 뚫려 버린 전주환의 틈을 히데아키는 놓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잡은 승기를 놓치지 않고 상대를 몰아붙인 히데아키는 어렵지 않게 승리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해 1:1의 스코어가 되었고 승부는 마지막 게임에서 결정나게 되었다. 쌍룡은행 쪽은 굉장히 암울한 분위기였고 반대로 소냐전자는 결승 진출과 같은 환호가 있었다. 그런 분위기는 그대로 맞아 떨어졌다. 폭풍의 준이치로는 폭풍이라는 닉네임과 마찬가지로 상대를 초반부터 몰아붙였고 탄탄한 컨트롤까지 가미되었기에 경기 마지막까지 전혀 그 몰아붙이는 힘이 떨어지지 않아 완승을 거두었다. 게이머 김현철은 그렇게 일방적으로 밀릴 선수는 아니었지만 부담감으로 인해 오히려 경기력에서 손해를 본 것이다. 심적인 동요는 게임에서 여실히 드러났고 중요하면서도 대담한 판단이 필요할 때 머뭇거린 것이 일방적으로 몰리다가 패하고만 이유가 되기도 했다. 소냐전자와 쌍룡은행의 경기는 소냐전자의 2:1 승리로 결정되었고 소냐전자가 먼저 메이저 리그 최종 결승에 올랐다. 소냐전자는 도시버와 자소 소프트의 승자와 그 다음날 최종 승부를 가릴 예정이었다. “이제 다음 경기인 도시버와 자소 소프트간의 경기를 이어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홍진호씨, 선수 오더가 어떻게 됩니까?” “네, 자소 소프트의 경우 보통 때와 같습니다. 처음을 리틀 스키피오 성진규 선수가 나오고 그 다음이 게이머 한신, 진현준 선수. 마지막으로 게이머 스키피오 강진성 선수가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 상대인 도시버는 선봉이 신성(新星) 다이스케 선수, 다음이 스피드 나츠오, 대장이 컨트롤의 마술사 겐죠선수입니다. 이 중에서 겐죠 선수와 다이스케 선수가 상당히 강하다고 평가되는데 겐죠 선수와 게이머 스키피오와의 한판 대결이 기대되고 있습니다.” 2위, 3위팀간의 대결이 끝나고 곧 1위 도시버와 4위 자소 소프트간의 경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도시버의 가장 강한 선수가 겐죠였고 겐죠와 박빙의 승부를 벌이는 신성 다이스케 선수가 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경기는 마지막 대장끼리의 경기에서 승부가 날 것으로 예상했다. 리틀 스키피오가 시민군 양성이라는 천재적인 전략을 완성시킨다면 신성 다이스케를 물리칠 수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려운 경기였다. “이... 이런.. 조금만.. 더...” 리틀 스키피오 진규는 시민군 양성을 위한 전략의 막바지에 돌입했다. 확실히 평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컨트롤을 하고 있는 진규였다. 불안한 순간, 아슬아슬한 시기가 있었지만 무사히 지나가자 오히려 더욱 탄탄한 게임 운영을 할 수 있었다. 등에 땀이 흘러내렸지만 진규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모든 것을 게임에 집중했다. 모든 힘을 다 쏟아부어 시민군 양성 전략의 끝을 위해 매진했다. “휴........ 끝났다!” 리틀 스키피오 진규는 일본에서의 경기에 이어 또 한번의 기적을 일구어내었다. 그 때는 무의식 중에 컨트롤을 했다면 지금은 모든 힘을 다해서 스스로의 능력으로 시민군 양성 전략을 완성시킨 것이다. 진규의 얼굴에는 미소가 어렸다. 밖에서의 반응도 대단했다. 신성 다이스케의 방해전략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시점을 돌파해서 시민군 양성을 성공시킨 게이머 리틀 스키피오의 능력이 진짜임을 스스로 증명했다. 혹자들은 일본에서의 그 한번 있었던 리틀 스키피오의 제대로 된 컨트롤은 운이었다고 혹평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의 게임 운영은 그런 비난을 불식시키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리틀 스키피오 진규의 시민군 양성 전략은 스키피오 진성의 전략에 자신만의 수정을 가한 것이어서 더욱 뜻깊었다. 리틀 스키피오 진규는 흥분하지 않고 군대의 양성을 서둘렀다. 상대 역시 시민군 양성이 성공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것이기에 곧 대규모 침공이 있으리라 예상했던 것이다. 꾸준히 군대 양성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제까지 모여 있었던 문명의 역량을 군대 양성에 쏟아붓자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군대의 규모가 늘어났다. “하아.... 이제.. 올테면 와봐라!” 어느 정도 군대가 모이자 진규는 자신감 있게 말했다. 로마의 국경 근처에서는 16만의 군대와 27만의 군대가 서로 마주보고 진을 치고 있었다. 리틀 스키피오의 로마 군대 16만, 신성 다이스케의 그리스 군대 27만이 진지에서 나와 평원의 전장에 깃발을 나부끼며 긴장된 순간을 만들고 있었다. “공격!” 먼저 공격 명령을 내린 것은 리틀 스키피오 진규였다. 엄청난 자신감으로 가득찬 로마 군대는 마니풀루스라는 부대를 기본단위로 강력한 조직력과 유연성을 겸비하면서 상대를 향해 돌진했다. 리틀 스키피오는 적을 기만하는 책략은 쓰지 않았다. 대신 적의 책략에 당하지 않도록만 신경 썼다. 정면으로 붙으면 당연히 이기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다이스케는 상대의 공격 명령에 조금 놀랐다. 아무리 시민군이라지만 26만을 정면으로 16만이 공격하다니. 다이스케 자신이 시민군과 직접 싸워본 적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정예병을 어느 정도 믿고 있었다. 적절한 군진의 변형으로 그 돌진력을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이스케는 자신의 실력을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곧 깨지고 말았다. “이.. 이게 뭐야? 이런.... 이것은.... 이게... 말도 안돼!” 상대의 선봉의 예기와 돌진력을 충분히 차단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자신의 밀집보병 부대 팔랑크스가 단숨에 뚫린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결과였다. 단단한 방어력은 최고라 생각했던 밀집보병 부대 팔랑크스가 깨지다니. 다이스케는 이제야 왜 이 시민군 양성 전략이 버그 전략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직접 게임에서 당하는 것과 다른 게이머의 게임 화면을 보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엄청난 돌진력이었으며 엄청난 전투력이었다. 순식간에 다이스케의 그리스 부대 내로 로마의 마니풀루스가 침투해서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보통 많은 병력 사이로 들어온 적은 병력의 부대는 포위 당해서 섬멸당하기 마련이었지만 리틀 스키피오의 군대는 오히려 상대를 밀어붙였다. 그로 인해 큰 부대가 갈기갈기 찢기는 현상마저 생겼다. 다이스케는 승부는 이미 기울었다고 생각했다. 저런 군대를 상대로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결론은 필패(必敗)였다. 다이스케는 긴숨을 쉬고는 게임 오버를 선언했다. 파란이 일어났다. 일본 프로 리그에서 비공식적으로 랭킹 5위 안에 드는 최고 실력의 게이머 중 하나인 신성 다이스케가 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중량감에서 떨어지는 한국의 게이머에게 패하는 이변이 일어난 것이다. 게이머 스키피오, 한신과 같이 연습하는 리틀 스키피오의 실력이 범상치 않으리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신성 다이스케라는 이름은 그보다 더 무게를 가졌던 것이다. 이로 인한 여파는 더 심했다. 1위인 도시버의 몰락의 예견이었다. 첫 상대인 리틀 스키피오에게 져 버린 도시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게이머 한신과 스키피오였다. 최고의 실력을 가진 두 게이머가 남아 있었기에 도시버는 그야말로 벼랑으로 몰린 꼴이었다. 도시버의 대기실은 정적으로 가득했지만 자소 소프트의 대기실은 그야말로 우승과 다름없는 환호의 소리가 넘쳐났다. “이 녀석아, 수고했다. 휴... 네가 일 한번 낼 줄 알았다!” 대기실로 들어온 진규를 맞이하며 현준은 수건을 건네면서 말했다. 진규는 최선을 다해 기분이 좋은데다가 다들 기뻐해 주니 더 이상 기분이 좋을 수 없을 정도였다. “진규야, 수고했다. 네 덕분에 쉬워질 것 같다!” 진성의 말은 진규의 마음을 더욱 가볍게 만들었다. 이제야 자신이 자소 소프트의 프로팀에서 제대로 몫을 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자리에 앉았던 현준은 일어서더니 몸을 풀었다. 다음 게임이 현준이었기 때문이다. 현준은 천천히 스트레칭을 했다. “현준이 형. 꼭 이겨요!” “하하... 네 녀석이 그렇게 잘 했는데 내가 질 수 없지. 진성아, 안타깝지만 너는 오늘 게임 못할 것 같다.” “..... 어쩔 수 없지 뭐.” 진성의 대답이었다. 현준은 진규의 게임을 보고는 자극을 받았다. 확실히 어려운, 아니 극악의 시민군 양성을 제대로 해낸 것이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분명히 진규의 시민군 양성은 자신이 나름대로 고친 진규 자신만의 시민군 양성이었다. 이제 앞으로 그 성공확률이 비약적으로 상승할 것이다. 현준은 어쩌면 진규에게도 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라는 생각을 굳히면서 자신만의 게임을 보여주리라 마음먹은 현준이었다. 현준은 뺨을 살짝 때려 정신을 차리고는 대기실 문으로 걸어갔다. “자, 다들..... 회사로 돌아갈 준비나 하라고!” 호기롭게 말하고는 곧 무대로 걸어갔다. 현준은 장담은 그대로였다. 실력차이보다 훨씬 더 압도적인 승리였다. 경기 시작 10분도 되지 않아 상대의 게임 오버를 받아낸 그야말로 몰아붙이는 게임이었다. 지켜보던 많은 사람들은 놀랐다. 결승 리그의 저조한 성적으로 인해 걱정스러웠던 자소 소프트의 모습이 아니었다. 제일 약하다고 알려진 리틀 스키피오 성진규의 엄청난 게임 운영과 시민군 양성 전략, 그리고 물과 같은 부드러우면서도 강력한 게임 스타일이 아닌 엄청난 속도전을 보여준 게이머 한신 진현준의 실력은 도저히 며칠 전의 그 팀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팬들은 게이머 한신이 게임기에서 내려 무대 가운데로 오는 동안에도 함성을 내질렀다. 완전히 되살아난 자소 소프트임을 알리는 화끈한 공격력에 박수를 치고 발을 굴렀다. 한신은 예전에 친구인 진성에게 쏟아졌던 그 함성을 기억했다. “와... 이런 느낌인가?” 게이머로서 아주 기분 좋은 순간이었다. 자소 소프트는 결승에 선착한 소냐전자와 메이저 리그 우승을 두고 최후의 대결을 펼치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 단판 대결을 기다렸다. “이거 여기로 옮기면 됩니까?” “덕만씨, 거기 말고... 네.. 그 쪽으로 예, 거기 두면 됩니다.” “동진씨, 네... 모자하고 티셔츠는 저쪽에 두십시오. 그리고 샴페인은.. 네.. 거기...” 문명 온라인 개발팀 소속인 김덕만과 공동진은 자소 소프트 프로팀의 메이저 리그 우승을 예상해서 준비하는 손길이 부족하자 긴급 투입되었다. 우승 기념 모자와 티셔츠.. 파티를 할 샴페인과 그밖의 것들을 싣고 있었다. 우승 기념 경품은 이미 주문해서 시간 맞춰 경기장으로 오기로 했다. 게임 큐브에 들어올 팬들을 위해서 다양한 경품을 준비해서 마지막 경기의 열기를 더욱 달구었다. 그 뿐 아니라 우승했을 경우에 프로팀에 대박 보너스를 지급하고 문명 온라인 홈페이지를 통해서 커다란 행사를 벌일 계획이었다. 그런 계획의 대부분은 매니저인 서재필이 짠 것이었다. 그 행사의 내용은 아직 극비였지만 상당한 규모와 예산이 들어가는 이벤트였다. 메이저 리그의 결승 리그에서 부진했을 때 괜한 준비를 한 게 아닌가 했지만 단 한번의 경기로 역시 우승 후보팀다운 면모를 과시하니 벌써 우승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하지만 선수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이런 일들은 선수들이 모르게 계획되고 준비되었다. 프로팀에서 이런 일을 아는 사람은 매니저 서재필 밖에 없었다. 선수 셋과 코디, 보디가드도 이런 행사가 계획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사장인 박경락은 물론 진팀장과 이팀장도 조금 늦게 경기장에 도착할 예정이었고 더불어 문명 온라인 개발팀 모두 경기장으로 이동할 작정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던 날이었다. “휴.... 이제 마지막이다. 다들 잘 해야지?” 평소 선수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한숨을 별로 쉬지 않던 매니저 서재필이 마지막이라는 말에 긴 숨을 내뱉었다. 진성, 현준, 진규 그리고 현숙, 소희, 이준은 서재필의 말에 무언의 긍정을 했다. 현숙과 소희는 뒤늦게 들어왔지만 긴장된 순간들을 같이 겪었기 때문에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서로 눈빛을 보고는 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우와.. 오늘만 잘 하면 끝이다!” 현준이었다. 현준은 마지막이라는, 끝이라는 데 의미를 두고는 벌써부터 기뻐했다. 현준의 말에 진성은 정말 5개월 가까이 열심히 달려온 결과가 오늘의 경기로 결판난다는 실감이 났다. 3개월의 국내 프로 리그와 2개월 가량의 메이저 리그의 마지막이 조금 있으면 시작될 게임에서 결정된다는 사실은 진성에게도 두려움과 설렘으로 다가왔다. “하아.. 하아... 정말 오늘만.. 오늘만 정말 잘 하면....” 진규는 긴장되는지 연신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하면서 마음을 진정시켰다. 현준, 진성 그리고 진규는 모두 어느 정도 긴장된 상태였다. 마지막이라는 말은 그만큼 쉽지 않은 말이기 때문이었다. “열심히 하자! 절대 후회가 남지 않도록.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충분하다! 알겠지?” “네... 매니저 형.” 이럴 때 형 역할을 하는 사람은 당연히 서재필이었다. 서재필의 말에 세 선수들은 파이팅을 외쳤다. 서재필의 말이 끝나자 망설이던 소희가 입을 열었다. “..... 저는 메이저 리그 시작할 때 들어왔지만... 정말.. 오늘 결과가 좋아서.. 다 같이 기뻐했으면 좋겠어요. 정말... 후회하지 않는 경기가 됐으면 좋겠어요.” “호호호호... 현준... 지면 죽어! 진성... 널 믿는다. 진규야.. 맞기 싫으면 이겨라! 알겠지? 호호호호.....” 소희의 가느린 목소리에 이어 엄청난 협박을 해대는 현숙이었다. 현숙의 막가파식 말에 현준과 진성, 진규는 피식 웃었다. 그 내용을 알기에, 그 마음을 알기에 그냥 웃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자,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아나운서 김동수입니다. 이제 대망의 프로 리그, 메이저 리그의 결승전이 곧 열리겠습니다. 5개월 가까운 대장정의 마침표가 오늘 이 곳에서 찍힐 예정입니다. 해설에 홍진호씨가 수고하시겠습니다.” “네, 홍진호입니다.” “오랜 기간이었습니다. 3개월간 국내에서의 경기 일정을 모두 소화한 뒤에 일본, 중국 등을 돌면서 메이저 리그 예선을 치른 각 팀들이 결승 리그를 통해서 마지막 두 팀이 가려졌습니다. 일본의 소냐전자와 우리의 자소 소프트가 제 1회 3개국 문명 온라인 메이저 리그의 우승을 놓고 곧 격돌하겠습니다.” “이번 대결은 일본의 프로 리그 우승팀과 한국의 프로 리그 우승팀끼리의 대결이라는 면에서 치열한 한일전의 응원이 예상될 것 같습니다. 또한 그 실력에서도 무조건적인 예상을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결승 리그에서 자소 소프트가 소냐전자에게 진 적이 있지만 어제의 경기로 그 결과를 알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자소 소프트의 실력이 절대 녹슬지 않음을 보여주었기에 소냐전자 역시 마음을 놓을 수 없을 겁니다.” “선수 오더는 어떻습니까?” “자소 소프트는 전형적인 오더입니다. 게이머 리틀 스키피오가 선봉, 중간이 게이머 한신, 대장이 바로 게이머 스키피오로 되어 일단 선봉인 리틀 스키피오가 이기게 되면 완승 분위기가 연출될 정도여서 상대는 첫 경기부터 엄청난 부담을 안게 됩니다.” “아... 그렇군요. 도시버팀도 그런 분위기에 당했지요.”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소냐전자의 오더는 처음이 럭셔리 히데아키, 다음이 강철의 유우지, 마지막이 폭풍의 준이치로입니다. 셋 모두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게임이지만 마지막 게임인 스키피오와 폭풍의 준이치로의 경기는 그 중 백미로 꼽을 만합니다. 하지만 럭셔리 히데아키가 리틀 스키피오에게 패한다면 폭풍의 준이치로에게 스키피오와 맞설만한 기회조차 없을지도 모릅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자, 광고 듣고 곧 제 1회 문명 온라인 메이저 리그의 최종 우승이 판가름나는 결승전을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진규야, 열심히 해라. 부담만 가지지 말고 네 실력만 제대로 발휘해라. 알겠지? 꼭 네 실력만 발휘해라! 꼭! 꼭!” 현준의 말에 더 긴장한 진규였다. 진규는 곧 나가야할 시간인데도 긴장을 많이 한 상태였다. 진성이 다가가서 뭐라고 말하려다 진규 몰래 뒤로 현숙이 슬금슬금 다가가는 것을 보고는 피식 웃고는 가만히 있었다. “왁!!” “어엇!!” 현숙이 뒤에서 큰 소리로 놀래키자 진규는 심장이 덜컥했다. 현숙은 그런 진규의 등을 사정없이 치면서 절대 긴장을 풀어주는 것으로 볼 수 없는 말을 했다. “... 진규야, 지면 절대로 이 대기실로 들어올 생각하지 마라. 여기로 들어오면.. 절대 살아서 나갈 수 없을거다. 호호호... 내가 이 가위로.... 호호호.. 어떻게 요리하는지 알아보고 싶으면.. 져라. 그러고 싶다면 져도 된다. 호호호..” 오버하는 현숙의 표정과 연기에 진규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진규에게는 현숙이 말한 내용 대신 현숙의 우스꽝스러운 표정과 행동만 걸러 본 모양이다. “누나! 열심히 할께요.” 긴장이 풀린 진규는 스스로 할 수 있다는 말과 함께 대기실을 나갔다. 무대로 가까이 갈수록 더욱 더 큰 함성 소리가 들렸다. 진규는 마음을 다잡았다. “수고했다. 진규야... 수고했다.” 풀이 죽은 진규를 진성은 위로했다. 진성이 보기에 잘 했지만 조금은 운이 따르지 않았다. “..........” “진규야! 어이.. 성진규!” 말도 하지 않는 진규에게 현준이 다가가 불렀다. “네.....” “원래 그 전략은 성공하는 게 더 이상한 거잖아. 넌 최선을 다했으니까 괜한 마음 가지지 마라. 최선을 다했으니 그것으로 된 거다. 알겠냐?” “네... 하지만..” “야, 진규... 꼴사납다. 졌으면 깨끗이 승복하고... 다음으로 나갈 이 형님이 이기도록 기운을 북돋아줘야지. 그렇게 푹 퍼져 있다가 내가 나가서 덜컥 지기라도 하면.. 어쩔거야? 응?” “아....” “성진규, 어깨 펴고.. 그렇지.. 그래.. 그게 바로 사나이야. 게임에서 진 거지, 인생에서 진 게 아니잖아. 그래.. 그거라니까!” “... 현준이 형, 지면... 저하고 같이 죽어요!” 진규는 엉뚱한 결론을 내렸다. “푸후훗.. 뭐? 이 녀석이.... 그게 할 소리냐?” “ 크큭...” 옆에 있던 서재필이 웃고 말았다. “형... 지면.. 저와 같이 죽어야 되니까.. 꼭 이기세요.” “이런... 진규 너 무서워서라도 꼭 이겨야겠다. 진규 네가 이기면 진성에게 안가고 내가 이겨버려서 메이저 리그 우승이라는 스포트 라이트를 받으려고 했더니만... 진규 너.. 진성에게 뭐 먹은 거 있지? 그래서 일부러 진 거지.. 그렇지?” “형...... ” “하하.. 잘 봐라. 이 한신의 변신을.....” “현준아, 이겨라!” “강진성, 너나 필승의 전략을 생각해라. 나는... 하하하.. 눈깜짝할 사이에 끝내줄 테니까.” “나.. 눈 계속 감고 있을 테니까 꼭 이기기나 해라...” “.........” 현준은 당당하게 대기실을 나갔다. 진규와는 달리 현준은 밖으로 나가는 문 옆에 서 있는 현숙을 지나치면서 하이파이브를 하고는 나갔다. “하하하하... 이 형님의 실력을 봤느냐? 하하하.. 1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은 이.... 스피드! 하하하하..” 현준은 자신의 말대로 강철의 유우지를 상대로 엄청난 속도전을 벌였다. 이미 한번 선보였지만 현준이 조금 전의 게임에서 보인 속도전은 그야말로 체계가 제대로 잡혀 상대가 어리둥절하는 사이에 당하고 마는 전략이었다. 현준은 큰소리 친 대로 되자 대기실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웃어댔다. 하지만 진규가 그 분위기에 제동을 걸었다. “...... 현준이 형, 19분 56초 걸렸는데요...” “.... 뭐? 야, 10분대 맞잖아!” 현준의 당연하다는 말에 진규는 아무 말도 못했다. “.......” “진성아, 이제 네가 할 차례다. 지면..... 아마 진규가 너와 죽으려고 할 거다.” 진성을 향한 현준의 말에 진규는 슬쩍 말을 바꿨다. “아니에요. 진성이 형, 그냥 최선을 다하세요. 형이 지면... 저는 현준이 형과 같이 죽을거예요.” “야! 성진규, 왜 진성이 졌는데 날 붙들고 늘어져?” “...... 진성이 형보다는 형하고 죽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요..” “.........” 현준은 꿀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진성아, 수고해라. 마지막이구나.” “네, 매니저 형, 지금까지 수고하셨어요.” “진성아, 꼭 이겨라. 꼭!” “진성아....... 이겨...” 매니저 서재필과 코디인 현숙, 소희의 말을 듣고는 현준과 팔을 걸어 승리의 제스처를 한 뒤에 진성은 만면에 웃음을 띤채 대기실 밖으로 나가 무대로 걸음을 옮겼다. 가는 동안 자신이 처음 프로 게이머가 된 이후부터의 여러 순간들이 떠올랐다. 진성은 자신이 게이머가 된 것이 행운이라 생각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특히 사부인 유조와의 인연도 생겨났다. 진성은 무대로 올라가기 직전 잠깐 눈을 감고 자신이 아는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사람들을 생각하니 조금 떨리던 것도 완전히 사라졌다. 진성은 담담한 눈빛으로 무대로 올랐다. 무대 반대쪽에서 게이머 스키피오가 걸어오고 있었다. 준이치로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했다. 지난번과는 달리 스키피오는 전력을 다할 것이다. 준이치로 자신 역시 그에 최선을 다해서 대결할 생각이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찼다. 우승도 중요했다. 하지만 준이치로 개인적으로는 스키피오와의 정면 승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도 좋았다. 준이치로는 미리 준비한 말을 했다. “..... 좋은.... 승..부 부탁...합니다.” “... 어? 아, OK!" 준이치로가 갑자기 한국말로 하자 진성은 가볍게 놀랐지만 무슨 뜻인지 알고 만국 공통어인 OK로 대답했다. 서로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확인하고는 각자 자신의 게임기에 탑승했다. 게임은 곧 시작되었다. 로마의 스키피오, 그리스의 준이치로는 서로 자신의 문명을 체크함과 동시에 사절을 사방으로 보냄으로 게임의 시작을 알렸다. 스키피오와 준이치로는 하나의 대륙에 포함되었다. 로마와 그리스 모두 바다와는 접점이 전혀 없는 내륙 국가였다. 로마와 그리스의 국경은 맞닿아 있었지만 너무 험준한 지형이어서 직접적인 군대의 이동은 불가능했다. 그 외에는 다른 나라와 맞닿아 있어 간접적으로 통할 수 있었다. 준이치로는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건실한 빌더를 이용했다. 이미 알려졌지만 그리스 방진인 팔랑크스 중보병을 위주로 한 정면 타격전과 초반의 승부를 내기로 작정했다. 준이치로는 분명 스키피오가 업그레이드가 아닌 원래의 시민군 양성 전략을 사용하리라 생각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시민군 양성 전략의 가장 공략하기 쉬운 포인트는 바로 시민군 양성 전략이 성공한 순간이었다. 그 전에 공격을 하면 그 분열을 오히려 방지해 주고 준이치로 자신의 군대 역시 그 수가 모자라기 때문에 수비하는 입장에서 상대는 그리 힘들지 않을 것이다. 준이치로는 그 순간을 놓치면 시민군이라는 강력한 군대가 출현하기 때문에 승산시 없다고 느꼈다. 준이치로는 일단은 상대의 전략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문명과 군대의 위력을 증대시키는데 그 역점을 두었다. 상대가 자멸하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지만 시민군 양성 전략의 특성상 외부의 자극은 잘못하면 상대를 도와주는 꼴이었기에 준이치로는 일단 그 공략 포인트 전까지는 참기로 했다. 대신 남는 컨트롤을 주변의 동맹국들에게 쏟아 단번의 공격에 원군을 최대한 얻기로 마음먹었다. 진성은 준이치로의 예상과는 달리 두 전략 시민군 양성과 경제구조의 조정을 한꺼번에 사용했다. 이제까지의 경기로 인한 결점들을 수정했다. 특히 주위 나라에 대한 정보와 적국에 대한 정보를 올라오는 대로 귀족들과 부유한 평민 계층에게 모조리 알렸다. 아예 그런 것을 수행하는 직위를 만들어 버렸다. 수정된 시민군 양성과 경제구조의 조정을 한꺼번에 컨트롤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게다가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 산만해서 제대로 된 컨트롤이라고 보기에도 힘들 정도였다. 도로 정비, 계층간의 조정, 부의 재분배, 군대의 훈련, 특정 도시의 컨트롤, 도시가 아닌 지역에 대한 컨트롤이 뒤섞여 중구난방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진성은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서서히 그려갔다. 확실히 진성이 수정한 컨트롤은 예전보다 안정감에 있어 돋보였다. 초반의 쿠데타는 생기지도 않았다. 그만큼 탄탄한 면이 초반을 넘길 수 있게 될 정도로 진성, 스키피오의 로마 문명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것이다. 스키피오는 거의 쉬지 않고 마치 책을 읽는 것처럼 컨트롤을 했다. 컨트롤로 인한 공간의 전환이 너무나 빨라 보고 있는 사람들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주요 도시들을 거점으로 큰 지역으로 나누고 지역의 특징적인 면을 기준으로 컨트롤을 시작하다가 큰 지역 내에서도 도시와 비도시지역으로 나누어 각 지역들의 도시 지역을 하나의 컨트롤로 할 수 있도록 그룹으로 지정했고 비도시지역으로 마찬가지로 그룹으로 지정했다. 컨트롤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였다. 각 지역들간의 도로의 정비도 박차를 가했다. 로마의 문명은 그 총 재력의 크기가 급속도로 성장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진성이 한 컨트롤 중에 다른 것들은 어느 정도 관심 있는 관객들이 예전의 그 컨트롤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주변 국가들에 대한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국경과 맞대어 세 개의 나라가 있었는데 그 중 두 나라는 꽤 노력을 해서 동맹도 맺고 관계 개선과 유지를 위해 컨트롤을 했지만 한 나라와는 처음 한번의 만남 외에는 도통 친해지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동맹은 커녕 그 국경에 군대를 주둔시켜 상대 국가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노골적으로 대립노선을 걸었다. 관객들은 도무지 그런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로마의 상황은 곧 폭풍의 준이치로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예상과 달리 결승 리그 예선전에서 모두 패한 그 전략을 상대는 펼쳤다. 준이치로는 그런 모습에 이기고 지고를 떠나 스키피오의 용기에 대한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다. 5개월간의 모든 게임의 종지부를 찍는 이 순간에 위험천만의 저 전략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다니. 자신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조금의 쿠데타나 자멸할 위험이 있는 전략이라면 절대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스키피오는 태연하게, 아니 태연하게 느껴지도록 사용하고 있었다. 준이치로는 어쩌면 스키피오가 그 전략을 완성시켰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런 압박감, 부담감이 심한 경기에서 확실치 않은 전략을 사용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준이치로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상대인 스키피오의 마음을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설사 스키피오가 그 전략을 완성시켰다 하더라도 준이치로 자신은 섣불리 공격을 할 수 없었다. 준이치로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그 공략 포인트를 기다리기로 했다. 스키피오의 두 전략은 초반을 잘 견디고 중반을 향해 달렸다. 진짜 위험한 순간은 초반과 후반이어서 중반은 그런대로 편하게 컨트롤을 할 수 있었다. 초반의 집중적인 투자로 인한 효과가 서서히 드러났지만 그 정도가 미미했다. 스키피오는 그 효과를 확신했지만 그 돈의 출처인 부유층도 확신한다고 볼 수 없었다. 도로망이 정비되고 도시를 중심으로 한 지역의 특징적인 경제구조가 서서히 확립되기 시작했다. 스키피오는 서서히 마지막 컨트롤을 위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이제까지의 연습으로는 스키피오 진성은 마지막 고비인 반란, 내란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결승 리그에서 그에 대한 대비책의 힌트를 얻었지만 여전히 필요한 조건을 얻어낼 수가 없었다. 귀족과 부유층끼리 연합해서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무력으로 억압하려 했다가는 더 큰 재앙을 불러 일으켰다. 그런 방법으로 했다가는 확실한 패배였다. 필패였다. 예상대로 스키피오 진성은 반란의 조짐을 보고 받았고 곧이어 한 도시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 내란으로 발전했다. 진성은 그런 확실한 보고를 받자 마자 대립하던 주변 국가 국경에 있던 군대에 명령을 내려 그 국가의 국경을 넘어 일정 수준만큼 쳐들어가 약탈할 것을 명령했다. 컨트롤은 막가파식으로 보였지만 진성의 눈매는 여전히 담담했다. “뭐야? 저거.... 저거... 불난 데다가 기름을 끼얹다니....” “아니.. 저게.. 스키피오.. 제 정신 맞아?” “이런 중요한 게임에서... 말도 안돼!” 내란이 일어난 가운데 관계가 좋지도 않던 주변국가를 향해 침공을 지시하다니 미치지 않고서야 도저히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한 가지 내란으로도 힘든 상황을 더 힘들게 만들다니. 관객들은 술렁거렸다. 특히 일본에서 온 소냐전자의 팬과 준이치로의 팬들은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정찰을 통해 시간을 두고 보고 받은 폭풍의 준이치로 역시 반응은 다르지 않았다. 준이치로는 도대체 게이머 스키피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장난으로 게임을 하는 것이라면 이런 큰 경기에서의 패배는 엄청난 비난이 쏟아질 게 뻔한데.. 그런데 이런 컨트롤을 진짜로 하다니. 스키피오의 심장에 탄복한 준이치로였다. 진성은 밖의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다. 처음 이 컨트롤을 본 사람은 누구나 그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으니까. 현준과 서재필도 실제로 진성의 엄청난 전략으로 인한 결과를 보고서야 믿었다. 진성은 그런 반응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곧 일어날 일들에 대한 적절한 준비를 시작했다. 진성의 로마 군대의 침략으로 인해 그 대립노선을 걷던 나라에서도 군대가 동원되었다. 진성은 이미 명령을 내려 적당한 시점에서 후퇴를 하라고 했다. 거의 무조건적인 후퇴였다. 상대 중립 국가의 군대가 로마 군대에 가까이 오자 로마 군대는 철수하기 시작했다. 로마의 국경선까지 철수했다. 중립국가 군대는 그런 로마 군대를 따라서 로마의 국경을 넘었다. 로마군대는 많은 거리를 벌리지 않고 중립국가 군대가 따라올 정도로만 후퇴했다. “휴..... 이제 끝낼 일만 남았군.” 진성의 의도는 적당한 외부의 적을 만드는 것이었다. 압도적인 적이라면 반란군들은 그 적에게 붙을 위험이 있었다. 반대로 너무 적은 적이라면 반란군들 스스로가 해결할 수 있다고 여길 것이다. 진성은 적당한 중립 국가를 처음부터 이런 목적을 위해 동맹을 맺지도 않고 언제든지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으로 만들어 둔 것이다. 적당한 로마 군대의 병력수로 인해서 로마의 국경을 넘어온 중립국 군대의 병력은 12만명 정도였다. 진성이 원하던 규모의 군대였다. 진성은 발빠르게 내전을 일으킨 도시에 그 보고를 보냈고 그 뒤로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곧 올 상대 게이머인 적국에 대한 정보도 흘렸다. 진성은 보고를 여러 번 시간 순서대로 보내 부유한 계층이 모여 있는 도시로 하여금 진성 자신이 원하는 결정을 하도록 유도했다. 결정적으로 내란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말까지 전했다. “휴..... 다행이군.” 결국 진성은 성공적으로 내란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고 그것으로 두 전략, 시민군 양성과 경제구조의 조정이 공식적인 게임에서는 처음으로 성공했다. 확실히 이런 극단적인 처방은 전략의 성공시기까지 앞당겼다. 진성은 깊은 숨을 쉬었지만 현재 다가오고 있는 중립국가의 군대에 대한 처리를 해야했다. 진성은 이제부터 남아돌 국가의 재력으로 중립국가에 대한 배상을 하기로 작정하고 미리 준비한 흡족한 조건의 협상을 시도했다. 진성은 미리 이런 경우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많이 해서 그 적정한 조건을 예상했고 진성의 시도는 적중했다. 진성은 앞으로의 재력으로 중립국가에 후한 배상을 약속했다. 그로 인해 중립국가에 대한 걱정은 사라졌다. 진성은 엄청나게 확대된 문명의 역량을 이용해 대규모 군대를 동원했다. 기본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군대의 규모 자체가 달랐다. 10만 정도밖에 없었던 군대가 오래지 않아 25만 수준까지 규모가 커졌다. 그 뿐 아니라 앞으로도 20만 이상의 군대를 더 유지할 수 있을 만한 역량이 되었기에 진성은 꾸준히 군대의 양성을 시도했다. “뭐? 이거....... 이런..” 로마 문명의 몰락이 아니라면 그 시민군 양성의 전략이 끝나는 시점만을 기다리던 폭풍의 준이치로는 내란 소식과 중립국 군대의 로마 국경 진입 등을 듣고는 스키피오에 대해서 실망하면서 상대의 게임 오버를 기다렸다. 그런 실망으로 인해 로마 문명의 그 공략 포인트를 잃어버리게 만들었다. 한순간의 소홀로 인한 허술한 보고는 준이치로에게 다시 없을 소중한 기회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준이치로는 상대의 게임 오버가 없자 무슨 일인가 해서 보고를 올리도록 했는데 그 보고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내란과 다른 중립국가의 군대가 국경을 넘어서 더 혼란이 가중되리라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군대 규모가 20만이 넘어가고 계속 더 증원된다는 보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게... 말이 안돼! 도대체... ” 준이치로는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금방이라도 게임 오버를 인정해야 할 만큼 급박한 순간이었는데 단번에 이런 반전을 이루다니. 정말 버그가 아니라면 이럴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준이치로는 일단 자신이 해 왔던 것을 가지고 상대를 공략해야 했다. 최적의 공략 포인트는 잃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 불리해지는 것은 자신이라는 것을 안 준이치로는 단판의 승부를 위해 모든 군대를 동원했다. 원정군대의 규모는 문명의 재력과 직결했다. 그런 규모의 군대를 유지할 수 있는 보급은 재력의 뒷받침이 없으면 불가능했다. 억지로 귀족층의 재산을 빼앗을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된다면 오히려 뒤를 조심해야 했다. 그런 조건으로 인해 최대한 모은 준이치로의 그리스 군대는 35만 정도였다. 준이치로 자신도 전술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건곤일척의 승부를 후회없이 해 보기로 작정했다. 진성의 군대는 40만명이 넘었다. 로마의 정예 시민군이 40만명이 넘다니. 시민군의 역량과 스키피오 진성의 탁월한 전술이라면 80만의 상대도 이길 수 있는 기본 조건은 되었다. 스키피오 진성은 40만의 정예 군대를 서서히 이동시켰다. 진성은 메이저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그 동안 의심스러워했던 많은 사람들을 향해 시위라도 하듯 40만의 군대를 얼마 전에 재력으로 협상을 했던 그 중립국가로 이동시켰다. 진성의 40만의 군대는 중립국가를 쑥대밭으로 만들면서 지나갔다. 제대로 된 전투가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40만의 정예 시민군은 그 위력이 엄청났다. 전술도 거의 없이, 우회하지도 않고 도시가 나오면 도시를 짓밟고, 강이 나오면 다리를 놓아 건너서 상대인 준이치로의 그리스로 곧장 진격했다. 중립국가는 40만의 로마 군대로 인해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렸다. 진성은 40만의 군대를 움직여 그리스 국경 바로 앞에서 멈추고 진지를 구축했다. 40만의 군대가 만든 진지는 그야말로 웅장 그 자체였다. 준이치로는 기가 막혔다. 그 중립국가를 40만의 군대로 밀어버리다니. 전술도 뭣도 아니었다. 힘으로 밀어버린 것이다. 준이치로는 정보를 통해 상대의 40만 대군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었다. 스키피오의 시민군이라면 두 배의 전력으로도 어렵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시민군의 위력은 대단함을 준이치로는 알았지만... 이렇게 대단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정말 망치로 두부를 내려치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병력이 많아도 걱정이 될 판인데 35만대 40만이라니. 준이치로는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준이치로는 이런 대규모 병력의 전투에서는 그 전술과 컨트롤이 승부를 가른다고 생각했다. 아직은 포기할 단계가 아니라고 마음먹었다. 35만과 40만의 군대가 진지에서 나와 전장에서 서로 마주보고 깃발을 흔들면서 함성을 지를 수 있는 장소는 거의 없었다. 40만의 로마 군대 중 일부가 숲을 없애고 평지로 만들고 나서야 그런 전장이 탄생했다. 준이치로는 그런 장면에 놀랐다. 일사분란한 20만이 넘는 군대가 한번 지나가니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야말로 불도저였다. 35만의 그리스 팔랑크스 중보병과 40만의 로마 시민군 정예병이 서로 대치하자 그 규모는 엄청났다. 이런 거대하면서도 단단한 조직에 기병은 그 역할을 하기 힘들었다. 두 군대 모두 기병을 모두 말에서 내리게 만들어 보병조직에 포함시켰다. 특히 준이치로는 그 동안의 분석으로 스키피오에게는 기병이 별 소용이 없음을 알았기에 내린 조치였다. 곧 엄청난 군인의 무리가 서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곧 제일 선봉에 있던 최정예 부대끼리 부딪쳤다. 앞에 있는 부대가 대결을 하자 그 뒤로 밀고 들어오는 부대로 인해서 수십만의 군대의 종심이 점점 얇아졌다. 그런 압축되는 힘이 선봉으로 전해져 상대를 더욱 압박했다. 40만의 로마 시민군과 35만의 그리스 정예 중보병의 힘겨루기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워낙 힘을 집중한 병력이 많았기에 쉽게 한쪽으로 기울지 않았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치열한 전장의 접선이 서서히 그리스 쪽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눈으로 확인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속도는 빨라졌다. 어느 정도 밀리자 전장에서 소규모 로마 군대가 밀리던 그리스 중보병 사이로 난입했다. 그런 난입은 그리스의 팔랑크스를 깨뜨림과 동시에 밀리는 속도를 더욱 가중시켰다. 한번 밀리기 시작하자 준이치로의 일사분란한 지휘와 컨트롤도 소용이 없었다. 로마의 시민군은 숲을 없애버리듯 그대로 밀고 들어갔다. 소규모 부대들은 송곳처럼 그리스 보병부대를 찔러 그 조직을 와해시켜 버렸다. 준이치로는 군대 자체의 역량 차이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게이머 스키피오가 왜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수인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40만의 흩어지지 않는 군대가 밀고 들어오는 모습은 정말 장엄했다. 준이치로는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준이치로는 게임 오버 상황에서 반전시킨 스키피오의 대단한 컨트롤에 감탄하면서.... 어쩔 수 없이 게임 오버를 선언했다. “와..... 와!!! 끝내준다!” “이야.. 역시 스키피오다! 스키피오!” “이것봐.. 내 팔... 소름이 다 돋았다.” “이런 경기에서 저런 전략을 보이다니... 휴우... 정말 대단하다! 스키피오 짱이다!” “이야... 와!!” 준이치로의 게임 오버 선언에 관객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만 해도 스키피오의 말도 안 되는 컨트롤에 욕을 했던 관객들은 얼굴이 붉어졌지만 그래도 그 감동에 함성을 지르며 발을 굴렸다. 진성은 자신의 게임에 만족했다. 적당한 타이밍이었고 적당한 군대였다. 상대에게는 미안하지만 오히려 봐주는게 더 좋지 않으리라 생각해서 최선을 다했다. 진성은 게임기에서 내리자 전부 기립해서 환호와 더불어 경기장이 떠나가도록 발을 구르는 관객들을 볼 수 있었다. 진성은 천천히 내려서 무대 가운데로 나왔다. 준이치로는 무대 가운데로 가면서 반대쪽에서 오는 스키피오 진성을 볼 수 있었다. 준이치로는 자신 스스로 능동적이지는 못했지만 할만큼은 했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의 그 방심은 아쉬웠지만 자신이 못한 것이 아니라 상대가 너무 잘한 것이다. 가운데에서 만난 준이치로는 진성과 악수를 나눴다. “축하합니다.” “Thank you.” 대강의 느낌으로 준이치로의 말을 알아들은 진성은 영어로 대답했다. 준이치로는 그런 진성에게 활짝 웃고는 무대 뒤로 내려갔다. 진성은 무대에 그대로 남아 있었고 곧 장내에 자소 소프트의 우승이 발표되었고 무대에 미리 준비되어 있었던 불꽃이 점화되어 터지기 시작했다. “피휴우우 퍼퍼퍽!” 그와 함께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진규, 현준이 무대로 나왔다. 자소 소프트의 게이머 세 명이 나란히 무대 가운데에서 서자 함성 소리는 절정을 이루었다. 그와 더불어 천장에서 알록달록한 종이조각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정말 우승 분위기가 났다. 무대 뒤에서 사람들이 잔뜩 나왔다. 자소 소프트의 사람들이 무대로 올라왔다. 미리 준비했던 티셔츠와 모자를 나눠 쓰고는 샴페인을 터트렸다. 관객들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아주 좋아했다. “이번 저희 자소 소프트에서는 우승을 기념하여 관객 여러분들께 약소하지만 경품으로 보담하고자 합니다. 한분도 그냥 가시지 마시고 곧 있을 경품행사에 참석하시고 가시기 바랍니다.” 장내 아나운서의 말이 떨어지자 관객들은 더욱 더 즐거워했다. 진성을 비롯해서 자소 소프트의 사람들은 대기실로 돌아왔다. 박경락 사장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두 들어와 대기실이 좁게 느껴질 정도였다. 국내 우승 때에는 이팀장이 주도했는데 메이저 리그에서 우승하자 박경락 사장까지 찾아왔다. “수고 했습니다. 앞으로도 더욱 더 열심히 해서 회사에 도움이 되는 프로팀이 되기를 바랍니다.” 박경락 사장이 매니저 서재필에게 미리 준비한 보너스를 전달했다. 약간 거슬리는 사장의 멘트였지만 워낙 기분이 좋은지라 다들 무시하고는 즐거워했다. 사장과 임원들이 사라지자 서로들 축하하고 샴페인을 터트리면서 난장판을 만들었다. 문명 온라인 개발팀원들이 다 왔기 때문에 더욱 더 뜻깊은 자리였다. “그 동안.... 수고했다! 하하하하..... 드디어 메이저 리그 우승이다!” 매니저 서재필이 큰 소리로 웃으며 외치자 샴페인을 들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흔들어 서재필을 샴페인으로 목욕시켜 버렸다. 재미가 있었는지 진성부터 시작해서 진규까지 세 프로 게이머에게도 샴페인 샤워를 펴부었다. 대기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우승의 기쁨으로 가슴을 가득 채웠다. 늦게 잠이 들었는데도 습관적으로 눈이 떠졌다. 진성은 포근한 침대에서 오랜만에 잠을 더 자면서 아침 훈련을 건너 뛸까도 생각했지만 곧 마음을 고쳐 먹었다. 자신 스스로도 무인이라는 생각을 의식으로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뭐니뭐니해도 가장 큰 이유는 자신에게 남겨진 의무이자 할아버지인 동시에 사부님이신 유조와의 추억을 느낄 수 있는 시간 때문이었다. 이불을 박차고 운동복으로 갈아 입은 진성은 목검을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진성의 아침 수련시간은 더욱 늘어서 현준 어머니조차 아직 나오지 않은 때부터 시작했다. 현관문을 열고 잔디 사이로 난 길에 박힌 큰 돌을 밟으며 평소 수련하던 곳으로 걸어갔다. 그나마 하루 중에 가장 시원한 느낌이 나는 시간대인지 진성은 상쾌함을 느낄 수 있었다. 진성 자신이 수련을 하기 위해서 정원의 일부를 단단한 땅으로 다져 놓았다. 당연히 그 곳에는 잔디도 살 수 없었다. 가볍게 심호흡을 한 후 스트레칭을 했다. 진성은 천천히 팔극진결을 풀었다. 수련의 처음은 항상 팔극진결이었다. 몸을 풀어주고 적당히 몸을 데워줄 필요가 있기 때문에 팔극진결은 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진성은 요즘 들어서 경의 수련 속도가 조금씩이지만 침체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몸 자체는 깨끗해지는 듯했지만 수련의 힘인 경의 성장은 더 둔화되고 있었다. 이제까지 초고속 성장을 했었던 진성이었기에 그 느낌은 더 크게 다가왔다. 하지만 진성이 시기를 정해두고 수련을 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조급한 마음은 최대한 배제하면서 수련에 임했다. “휴우.... 얍... 핫...” 부드러운 팔극진결을 몇 번 펼치고 나서 기합을 넣으면서 역동적으로 팔극진결을 펼쳤다.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서로 다른 권법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만큼 달라보였다. 거친 팔극진결을 여러 번 펼치자 진성의 이마에는 땀이 배이기 시작했다. “휴우.....” 마지막으로 긴 숨을 내 쉬고는 몸을 멈췄다. 확실히 경의 성장이 둔해졌지만 그런대로 만족했다. 몸을 움직여서 팔극진결을 펼치면 확실히 기분도 좋아지고 몸의 상태도 나아졌다. 진성은 가져온 목검을 들었다. “타앗!” 날카로운 기합소리를 신호로 무명소검, 무명대검, 무명비검을 차례차례로 펼치기 시작했다. 무명소검과 무명대검은 손에 익어서 특별히 신경쓰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게다가 무명소검과 무명대검은 은연중에 진성의 경이 들어가 그 휘두르는 소리가 줄어들었다. 처음에 정확한 동작을 위해서 힘을 넣지 않았다가 점점 힘을 넣으면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커졌었다. 그런데 진성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몸에 익숙해지자 자연스럽게 몸의 경이 흘러드러가는 것이다. 휘두르는 소리가 점점 줄어들어 이제는 목검을 굉장히 빠르게 휘두른다는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소리가 작게 들렸다. 무명비검은 중간단계에서 그 성장이 멈춰 있었다. 수련량도 부족했지만 특별한 벽을 뛰어넘어야 하는 듯했다. 진성은 열심히 수련하되 급하게 모든 것을 추구하지는 않는다고 마음먹고는 느긋하게 무명검을 연습했다. 검의 수련을 다 마치자 목검을 한쪽에 놓고는 자리에 편한 자세로 섰다. 요즘에 가장 성장속도가 빠르다고 느껴지는 것은 단연코 축지법이었다. 상하이에서의 그 사건 이후로 축지법은 한 단계 이상 성장했다. 상하이 때의 그 대결처럼 마치 푹 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가공할 신법은 아니었지만 생활속에서 간간이 가벼운 걸음으로 보통 사람의 뛰는 속도보다 약간 더 빠를 정도의 축지법은 가능했다. 진성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큰 성장은 몸과 마음, 경의 일체감의 지속 시간이었다. 폭발적인 파괴력은 낼 수 없었지만 작은 부분의 일체감은 어떨 때는 몇 시간 동안 계속되기도 했다. 밥을 먹고 나서 회사에 출근할 때까지 지속되는 일체감에 진성은 너무도 신기했다. 게다가 그런 느낌은 더 활력을 주었다. 진성이 목표로 하는 것은 강한 몸과 단단한 마음, 강력한 경의 일체감으로 인한 폭발적인 변화가 아니라 작은 부분의 일체감이 진성이 잠에 들고 나서라도 계속 이어지는 상태였다. 하루종일, 24시간 내내 그 일체감이 이어지기를 원했다. 진성은 축지법 수련 시간의 대부분은 천천히 걸으면서 몸과 마음, 경의 일체감을 유지시키는 연습이었다. 확실히 가만히 있을 때가 일체감을 유지하기 쉬웠다. 움직이는 순간 그 일체감은 깨지기 십상이었다. “흐으으읍... 휴우우우...... 흐으으읍... 휴우...” 가볍게 숨을 내쉬고 들이쉬며 천천히 걸었다. 일체감이 느껴지자 사물이 달라져 보였다. 사물이 달라졌다기 보다는 진성의 감각이 예민해진 것이다. 진성은 사물을 더 자세히, 빨리 보면서 걸었다. 평소에는 먼 거리를 걸어서 가려는 이유보다는 이런 감각의 확장과 스스로의 만족, 그리고 무명검법의 수련을 위해서 축지법을 단련했다. 하지만 아직 축지법과 무명검법과의 그 연관성은 스스로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어제는 피곤했지?” 식사 준비가 되자 자리에 앉은 현준 아버지, 진팀장이 현준과 진성을 바라보면서 한 얘기였다. 밤 늦게까지 계속된 파티로 인해 그 주인공이었던 진성과 현준은 피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명 온라인 프로팀은 하루를 쉬기로 했다. 앞으로 구체적인 휴가에 대한 얘기가 나오겠지만 일단 밀린 피로를 추스를 수 있도록 하루 정도는 쉬기로 한 것이다. “아버지.. 몸도 쑤시고... 오늘 하루종일 자야겠어요. 너무 피곤해요..” 현준의 엄살 섞인 말에 현준 어머니는 툭 말을 내던졌다. “진성이는 새벽같이 일어나서 수련을 하는 것 같던데......” 뒤에 하지 않은 말을 현준이 모를 리가 없었다. “진성이는..... 사람이 아니에요. 어떻게 2시를 넘겨서 잤는데 새벽에 일어날 수 있어요? 엄마, 저는 사람하고 비교해 주세요!” “...... 할 말 없다. 오늘 아침은 설렁탕이다. 아주 잘 우려냈으니까 한방울도 남기지 말고 다 먹어라.” 아침 일찍 먼저 나간 현준 동생 현석을 제외하고는 네 명이 식탁에 둘러 앉아 여유로운 아침을 보냈다. “하하... 진성아, 수고해라. 나는 이만 올라가서 밀린 잠이나 보충해야겠다. 하하하... 수고해라! 수고!” 진성은 진팀장과 회사에 출근해야했다. 진성 스스로도 별로 피곤하다고 느끼지 않는데다가 로플팀의 중요한 회의와 밀리터리 아트 싱글버전 출시에 대해서도 논의할 게 있기 때문에 회사로 나가야했다. 현준은 그런 진성을 보면서 기지개를 늘어지게 하고서는 말했다. “현준아, 열심히 잠 보충이나 해라. 내 걱정은 하지 말고.” 현준은 진성이 조금도 반응을 보이지 않자 투덜대며 3층 방으로 올라가버렸다. 진성은 오랜만에 진팀장과 같이 차를 타고는 회사로 출근했다. 진팀장과 진성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통해서 올라와 곧바로 로플팀으로 갔다. 진성은 자신을 아는 사람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요람으로 들어갔다. “여.. 메이저 리그 우승 선수가 오셨구만...” 곽팀장은 요람으로 들어온 진성을 반갑게 맞이했다. 직접 메이저 리그 경기장에는 가지 못했지만 그 우승 순간을 요람에서 보았다. “피곤하지 않냐? 오늘 그 쪽은 쉬는 것 같더니만.... 대장님이 나오라고 해서 왔지?” “꼭 아니라고는 할 수 없네요. 그리고 저는 그리 피곤하지도 않아서요.” “하하하... 그래. 그게 사회생활 잘 하는 방법이다. 하하하...” 곽팀장의 목소리는 요람을 울렸다. 한참 작업을 하던 조팀장은 거슬리는 웃음소리에 고개를 빼들고 물었다. 그러다 진성을 발견하고는 반가워했다. “뭐가 그리 재미있습니까? 어.. 진성이 왔구나. 축하한다. 어제 그 경기는 정말 재미있었다. 우리 밀리터리 아트에 비하면 조금 못하지만.. 하하하... 아무튼 우승 축하한다.” “네, 조팀장님.” “자, 이리로 와라. 나와 차 한잔 하자.” 조팀장은 진성을 이끌고 자신이 있었던 자리로 가서 자신의 주로 마시는 우려낸 녹차를 권했다. 진성은 조팀장 근처로 가서 조팀장과 프로그램 팀원들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아, 왕 어르.. 아니, 왕 아저씨. 네... 잠깐만요.” 로플팀의 요람에서 울리는 핸드폰을 받은 진성은 상대가 누구인지 몰랐다가 한참만에 왕현추라는 것을 알고는 밖으로 나갔다. “네? 8월에 모임이 예정되었다구요? 아.. 네... 네... 예.. 저야 뭐 지금은 그 오락 대회가 끝났으니 조금 한가하죠. 예.. 알겠습니다. 네... 나중에 뵙겠습니다.” 왕현추의 전화는 유맹의 모임 일정이 확정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자세한 일정은 나중에 다시 알려준다고 말했지만 진성은 이번 유맹의 회합 장소가 한국이라는 말에 조금 놀랐다. 자신은 대만이나 중국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한국이라니. 어쩌면 자신 때문에 한국으로 정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별로 준비할 것은 없었지만 또 다른 세계에 입문한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들뜨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진성은 매니저 서재필이 자신을 부르자 의아해했다. 서재필 역시 쉬는 날인데 회사에 나왔다니. 진성은 빨리 서재필을 만나러 갔다. “진성아, 너도 오늘 나왔구나. 휴..... 이거.. 팀장이라 나오라니. 이게 말이 되냐?” 한참 동안 푸념을 널어 놓은 서재필은 진성을 부른 이유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오늘 오전에 네가 그 로플팀의 회의에 들어가 있을 때에 손님이 왔었다. 그.. 이름이 뭐라더라.. 아, 잘생긴 놈 있잖아.. 겐죠. 도시버 소속 프로 선수인 그 야마모토 겐죠라는 사람이 너를 찾아왔었다.” “네? 뭐 때문에?” “일본으로 돌아가는데 한번 만나고 가고 싶다고 하더라. 그러면서 이번에 대결 못한 것은 다음에 꼭 한번 승부를 가렸으면 좋겠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더라고.” “아... 그 선수와는 게임을 한번도 못했거든요. 아... 그래도 이렇게 찾아와서 말할 정도라니. 조금 특이한 사람이네요.” “그래도 아주 잘생겼더라.” 진성은 오래지 않아 서재필이 자신을 부른 이유가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프로팀에서 혼자 회사에 왔기 때문에 심심해서임을 알 수 있었다. 진성은 한동안 서재필의 말벗이 되어 주었다. 진성은 오랜만에 하나와 저녁 식사를 같이 하기로 약속을 잡았다. 단 둘이 만난 적이 워낙 오래 되어서 약간 어색했지만 그래도 하나와 만나면 편함을 느꼈기에 진성은 미리 하나에게 귀뜸을 해 놓았다. 하나의 태도가 약간 이상했지만 그렇다고 왜 그러냐고 직접적으로 물을 정도로 진성은 민감하지 못했다. 시내의 한정식 전문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는데 하나가 그 집을 원했다. 진성은 하나의 차를 타고 하나가 원하는 곳으로 갔다. 가는 동안 별다른 말이 없었다. 평소 하나가 말하는 편이었고 진성은 그 말에 대답했기 때문에 진성은 아주 어색하고 이상함을 느꼈다. 음식점에 도착해서 방으로 들어갔다. 병풍이 둘러있고 편안한 느낌이 드는 방이었다. 마주 앉은 진성과 하나 사이에 잠시 어색한 뭔가가 흘렀다. 진성은 정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을 꺼냈다. “하나씨, 좀 이상해요.” “예?..... 제가요?” 하나는 숨긴 것을 들킨 소녀처럼 놀라했다. 진성은 별 뜻없이 물은 말에 상대가 더 놀라니 어리둥절했다. “무슨 일이 있나요?” “아.. 아니.. 아니에요.” 확실히 평소의 하나와는 차이가 났다. 요조숙녀인 코디 소희와는 조금 달랐지만 그렇다고 왈가닥 현숙과 가깝지도 않은 성격의 하나였지만 당당한 편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진성 자신 앞에서 당황하다니. 진성은 석연치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음식점에서 자랑하는 음식들이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다. 가벼운 요리부터 시작해서 하나씩 음식이 바뀌었다. 진성은 이것 저것 열심히 먹는데 통 잘 먹지 않는 하나를 보면서 정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식가는 아니어도 잘 먹는 사람이었는데. “하나씨, 어디 아파요? 왜 이렇게 못 먹어요?” “진성씨, 저는 괜찮아요. 식사하세요. 잠깐만요.” 하나는 급히 밖으로 나갔다. 진성은 무슨 일인지 몰랐다. 그 때부터 진성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평소에도 친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진성이 편하게 느끼는 사람이었기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하나가 들어왔다. 화장을 고친 모양이었다. 진성은 하나를 쳐다보았지만 하나는 눈을 맞추려 들지 않았다. 정말 어색했다. “진성씨..... 오늘 저와 술 한 잔 안할래요?” “예? 술이요?” “네.......” “아.. 예...예.....” 하나의 이상한 분위기에 진성은 자신도 모르게 대답하고 말았다. 자신이 예상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음을 알았다. 그로 인해 아직도 들어올 음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와 진성은 음식값을 계산하고 근처의 조용한 바로 자리를 옮겼다. 하나의 차는 그대로 두고 갔다. 거의 술집에 가지 않았던 진성으로서는 이런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술집은 처음이었다. 다크 블루톤의 인테리어와 밝은 조명이 각 자리에만 있어 아주 럭셔리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진성이 잘 모르자 하나가 칵테일을 알아서 시켰다. 조금 홀짝 거리며 마시는 어색한 시간이 흐르자 하나가 대뜸 물었다. “진성씨는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콜록.. 콜록..” 진성은 칵테일을 조금 먹다가 사래가 걸렸다. 갑작스런 말에 진성은 콜록거렸다. 진정되자 진성은 하나를 쳐다보았다. 무슨 뜻인지 진성은 잘 몰랐기에 하나를 바라보았다. “저를 어떻게 생각해요?” “....... 그저.. 음.. 편한 사람으로....” “제가 여자로 느껴진 적은 없었나요?” “예? 아... 네... 아... 생각해 본 적이....” 하나는 진성의 대답에 별다른 반응도 없이 술만 마셨다. 진성은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한 게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하나는 말이 없었다. 진성 역시 홀짝 홀짝 술만 마셨다. “진성씨........” 하나의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하나를 쳐다본 진성은 깜짝 놀랐다. 하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뺨을 적시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하나씨.......” 진성은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갑자기 눈물이라니. 손수건도 없던 진성은 앞에 놓여 있는 냅킨을 집어 하나에게 내밀었다. 하나는 그런 진성의 모습을 보더니 진성의 손을 무시하고는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하나의 얼굴은 눈화장이 번져 약간 기괴한 모습이었다. 진성은 정말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진성씨.... 진성씨는 정말.. 틈이 없는 사람이에요. 틈이 없어요.” “네?...........” “제 마음을.... 그렇게 모를 수가 있나요? 어쩌면 그렇게......... ” “제가 뭘......” “흑흑... 진성씨.....” “............” 침묵이 이어졌다. 말없이 눈물만 흘리는 여자와 그 앞에서 손에 냅킨을 쥐고는 어쩔 줄 몰라하는 남자. 하나는 곧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았다. 그리고 곧 울음을 멈추더니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는 진성에게 말했다. “진성씨.... 저 다음주에 자소 소프트 미국 지사로 발령이 나요. 해외 AS 센터와 개발 연구소와 관련해서 지사가 생기는데 거기로...가게 됐어요.” “예? 왜.. 갑자기..?” “사실은.. 제가 지원을 했어요.” “.....?” “진성씨는 너무 자신밖에 보지 않아요. 아니, 진성씨 자신과 친구인 현준씨를 제외하면 다른 사람들은 보고 살지 않아요. 제가 진성씨와 만나면서 얼마나 마네킹과 같이 있는 듯한 느낌을 많이 받았는지 아세요? 진성씨에게는 보이지 않는 벽이 느껴져요. 현준씨 아니었다면 제가 진성씨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남자라는 사실과 자소 소프트의 프로 게이머라는 사실 뿐일 거예요. 노력도 했지만 도저히.. 도저히.. 진성씨에게 제가 들어갈 자리는 없는 것 같아요.” “.......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진성씨는 잘 모르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진성씨는 고민이 생겨서 다른 사람과 의논해 본 적이 있나요?” “...... 현준이나.... 현준 아버지....” “그 분들 빼구요. 다른 친구나 동료들에게 마음을 연 적이 있나요?” “..........” “저는 진성씨의 마음 속에서 김하나라는 사람을 보기를 원했어요. 하지만 너무... 힘들어요... 제가 모자라서.. 그럴 수도 있겠지요. 어쩌면... 진성씨에게 그런 마음의 여유가 없는지도 모르겠어요. 흐흑.....” 말하다 울분에 북받치는지 하나의 울음이 다시 터졌다. 또 얼마간의 침묵이 흘렀다. 진성은 하나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 자신에게 틈이 없다니. 마음을 연 적이 있냐니..... “저는... 진성씨가...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지금도 친구인 현준씨와 그 가족분들과 행복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진성씨가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스스로 가둬놓지 않기를 원해요. 휴우.... 진성씨, 저는 정말 진성씨를 좋아했어요. 나이는 어리지만 생각이 깊고 뭔가 모를 매력이 있어서 정말 좋아했어요. 그런데 짝사랑은 너무 힘들어요. 제가 포기하기로 했어요.” “하나씨...” “다음 주에 미국으로 떠나요. 그 동안 감사했어요. 진성씨.........” 하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바를 나가버렸다. 진성 역시 일어나서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가니 금방 떠나는 택시 안의 하나를 볼 수 있었다. 애뜻한 눈길로 진성을 쳐다보는 하나의 모습을 진성은 볼 수 있었다. 답답했다. 자신에게 틈이 없다니... 자신 역시 하나가 싫지는 않았지만 소설 속의 사랑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진성은 자신이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보낸 후에 마음 속에 쳐버린 그 장벽이 진성을 이렇게 만든 것을 스스로는 알 수 없었다. 진성은 하나의 말을 떠올렸다. 마음이 답답해졌다. 한참 동안이나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진성이 들어올 시간이 다 됐는데도 들어오지 않자 현준은 전화를 했다. 고수부지에 있다는 진성의 말에 심상치 않음을 느낀 현준은 곧바로 옷을 입고는 진성이 있다는 곳으로 차를 몰아 날아왔다. “....... 그래. 그랬었구나. 휴우....” 현준은 진성의 말을 다 듣고서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문명 온라인 등 게임에서는 진성을 거의 이기지 못했던 현준이었지만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훨씬 경험이 많은 고수였다. 현준은 진성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자신은 귀 기울여 듣기만 했다. 현준은 지금 진성의 마음이 답답함을 알고 있었다. 그럴 때는 자신의 입으로 하나하나 세세하게 풀어버리는 게 도움이 된다. 현준은 강물을 보면서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계속 듣기만 했다. 가끔 묻기도 했지만 그것도 진성이 말을 하도록 유도하는 말이었다. 거의 두 시간 동안이나 떠든 진성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는지 현준과 나란히 흐르는 강물을 쳐다보았다. “.. 현준아.. 내가 정말 이상한 거냐?” 진성은 진지하게 현준에게 물었지만 대답은 그렇지 않았다. “이상하기는 하지. 게임에 그렇게 비범한 재능을 가진 인간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암.. 그렇고 말고. 그 전설적인 더블 스트러티지의 마술사가 아닌가? 하하하하....” “........ 현준..” 나직한 진성의 목소리에 현준은 허리를 펴며 말했다. “음.. 험험... 진성아, 객관적으로 정상인 사람이 있을까? 나는 없다고 보거든. 어떤 사람은 감성이 풍부할 테고 또 다른 사람은 지성에서 뛰어난 재능이 있을 수 있지. 진성이 네 경우는 고등학교 때의 그 경험으로 감정적인 부분을 스스로 차단했을 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정상 또는 이상하다고 보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내가 조금 덜렁거린다고 해서 그게 이상한 사람으로 몰릴 만한 일은 아니잖아? 그 하나씨, 이상하구만. 멀쩡한 사람을... 하하하..” “...........” “진성아, 나는 네가 그런 부분을 무시하지 말고 조금씩이나마 스스로 인정했으면 좋겠다. 정신적인 장애가 있다면 그것을 인정하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고치면 되지. 일단 제일 중요한 것은 자신을 솔직하게 보는 거야. 솔직하게 보면 인정하게 되고 인정하면 변하니까. 어때?” “.....” 진성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생각만 할 뿐이었다. 가만히 있던 현준은 너무 무거운 것도 좋지 않음을 알았다. 너무 깊은 생각은 도리어 행동하지 못하게 만든다. “야! 아이고 머리야. 너무 고상한 얘기를 많이 하니까 머리가 다 아프다. 그런 얘기는 집어 치우고.. 우리 오랜만에 맥주 한잔 할까?” “........” “자, 가자. 내가 한턱 쏠 테니까. 맥주에.. 흐흐흐... 바베큐 통닭.. 어때? 군침이 다 돌지? 크크크.. 안다 네 마음. 자 빨리 가자.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셔보자. 아, 맞다. 집 근처로 일단 가야지. 술 마시면 운전도 못할 테니까. 하하하.. 가자..” 현준은 진성을 억지로 차에 태우고는 약간 오버하면서 차를 몰았다. 하나에게 얘기를 들은 후에 진성은 그리 밝지 못했다. 아니, 마음이 편치 못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이 걱정할 정도로 내놓고 드러낸 것은 아니지만 진성 스스로는 느낄 수 있었다. 분명히 찜찜했다. 뾰족한 수가 있을리 없었다. 진성은 무술과 마찬가지로 조급한 마음은 버리기 위해 애를 썼다. 회의실로 들어온 진팀장은 곽팀장을 바라보며 대뜸 물었다. “다 들어왔나?” “네, 대장님. 올 사람은 다 왔습니다.” 곽팀장이 대답했다. “그래. 그럼 시작하도록 할까?” 밀리터리 아트 싱글버전의 출시와 가상현실인 로플의 개발에 대한 전반적인 결정을 내리는 개발자 미팅이었다. 각 파트의 팀장급들은 모두 모였고 특별히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 역시 참석하는 미팅이었다. 밀리터리 아트 싱글버전의 출시가 얼마 남지 않았고 밀리터리 아트의 온라인 버전은 네트워크 문제가 해결되어야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아직 제대로 시작하지 않은 로플에 여력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일주일 정도 출시일이 남았다. 곽팀장, 전반적인 얘기부터 시작하지.” “네, 대장님. 밀리터리 아트 싱글버전이 앞으로 일주일 후에 출시될 겁니다. 그에 대해서 홍보팀과 총무팀에서 조사한 자료들, 그리고 자체적으로 조사한 것들을 토대로 정리한 것을 여러분들에게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자, 이 이 문서들을 나눠서 봐 주십시오.” 곽팀장은 미리 준비한 서류들을 한 사람에게 한 부씩 돌아가도록 나눠주었다. “간단하게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밀리터리 아트는 아시다시피 싱글 버전만 발표됩니다. 게임기는 PVR-2 타입으로 현실성을 낮춰 청소년까지도 가능하도록 만든 버전입니다. 가격은 426만원으로 잠정 결정했습니다. 현재로는 1만대 정도의 초기 수요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추가로 1만대 정도는 게임 스테이션에 공급될 것입니다. 개인용과 게임 스테이션 용은 보안 문제를 제외하고는 그 기능상 차이는 없습니다.” 곽팀장은 잠깐 멈추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밀리터리 아트는 두 개의 게임이 합쳐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대전 액션과 잠입 미션 게임이 연관이 있게 합쳐져 상당한 인기를 끌 것으로 예상합니다. 현재 게임기에 대한 AS 가능자를 훈련시키고 있는 과정에 있으며 AS 콜센터도 운영할 생각입니다. 이런 것은 외부에 아웃소싱할 예정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해외 진출도 지금 현재 진행중에 있습니다. 계약 자체는 개발팀에서 책임지는 문제가 아니지만 어쩌면 해외에 AS 센터와 게임 연구소를 세울 계획도 있기 때문에 미리 알고 계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출시와 동시에 여러 이벤트를 계획 중인데 그 중 하나가 변태수 테스트 팀장이 말한 테스터의 공식적인 영입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곽팀장은 그 외에도 각 파트별로 고려해야할 문제들을 언급했지만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의 눈꺼풀이 무너워지는 듯하자 바로 말을 멈추고는 진팀장을 바라보았다. “흠흠... 다들 대강은 알고 있으리라 믿고. 밀리터리 아트의 출시와 관련해서 의견이 있는 사람?” 진팀장의 말에 조팀장이 손을 들고는 말했다. “팀장님, 밀리터리 아트 싱글에 프로 리그 계획은 없는 겁니까?” “게임기 자체가 워낙 고가라서 프로 리그를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대중적으로 퍼져야 프로 리그를 할 수 있을 텐데.... 한 대에 400만원이 넘는 게임기가 기본인 게임을 프로 리그로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 문명 온라인처럼 아마추어 버전을 따로 발매할 수도 없는 일이고.” “그래도.. 게임 스테이션에서 접할 수 있잖습니까?” “조팀장도 잘 알겠지만 이 게임의 특징은 자신의 캐릭터를 성장시켜서 대전 액션을 소화하고 그 캐릭터를 이용해서 잠입 액션도 즐기는 것인데 그 성장이라는 개념 자체가 프로 리그와는 조금 개념이 맞지 않아. 문명 온라인과 같이 어느 정도 짧은 시간에 승부를 낼 수 있는게 아니라 자신만의 캐릭터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프로화는 힘들 것 같다.” “......... 그도 그렇군요.” “싱글 버전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단지 과도기의 부산물임을 명심하길 바란다. 우리의 목표는 로플이다. 로플. 밀리터리 아트 싱글이나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 모두 로플을 향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기 바란다.” 조팀장 이후로 아무도 말하지 않자 진팀장은 로플에 대한 의논으로 화제를 바꾸었다. “로플은 하나의 세계다. 지금까지 간간이 모여서 로플에 대한 기획 회의를 여러 번 해 온 것은 다들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또 하나의 현실로서 가상현실을 똑같이 현실처럼 만든다면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주를 이루었다. 한 사람의 말에 의해서 로플의 방향이 정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도 여러분들의 기탄없는 의견을 말해주기 바란다. 자신과 관계없는 얘기라도 로플이라는 세계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 최대한 참여하기 바란다.” 로플은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기술적으로는 60% 이상이 완료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밀리터리 아트의 공간이 확장되고 많은 유저들이 동시에 접속하게 된다면 그게 바로 로플의 시작이 될 것이다. 그런 엄청난 공간을 어떻게 컨트롤하고 다루는지는 아직 미지수였지만 기본 기술만은 확보된 셈이었다. 또한 공간에서의 상호 작용 역시 밀리터리 아트에서 대련이 가능할 정도였기 때문에 문제는 없었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 공간, 로플이라는 공간의 존재 이유였다. 로플에 담을 컨덴츠가 문제였다. 게임으로서 게이머들에게 제공될 로플은 분명히 유료화 될 게 분명했다. 이런 엄청난 규모의 게임을 무료로 할 리는 절대 없으니까. 그렇다면 게이머들이 돈을 내게 만들 수 있는 그 무언가가 필요했다. 단지 진보된 기술과 그래픽이라면 얼마 못가서 싫증이 나고 만다. 진팀장을 비롯해서 개발팀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세계에 대한 정의였다. 무조건적으로 현실과 비슷한 공간을 게이머들에게 제공하고 알아서 놀아라가 아닌 게임으로서의 매력을 부여하기를 원했다. 진팀장과 개발팀원들은 이를테면 로플의 창조자들이었다. 자신들이 만드는 세계가 단순한 현실이기만을 바라지 않았다. “기존의 온라인 게임처럼 레벨제와 경험치 등을 이용한 게임 시스템은 배제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것은 가상현실이라는 것에 별로 부합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게임이지만 정작 그 공간 안에서는 보통의 게임 요소를 보이지 않게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주희진 음악팀장의 얘기였다. 그 얘기를 들은 진팀장이 말했다. “그 부분은 이미 논의되었다네. 아주 중요한 부분이니까. 현재로 게이머들끼리 가상현실에서 상대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눈과 귀, 촉감을 통한 현실과 다름없는 방법일세. 그러니까 당연히 자신의 레벨 뿐 아니라 상대의 레벨도 알 수는 없지.” “하지만... 레벨제는 게임의 동기를 부여하는 요소 중에 하나입니다. 뭔가 자신의 노력으로 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표시가 경험치와 그로 인한 레벨의 성장입니다.” “휴우.. 예전의 얘기를 되풀이 하는군. 분명 그렇기는 하지. 하지만 그런 레벨이나 경험치로 인한 동기 부여는 오래가지 못할 것 같은데. 게임 내에서 최고의 실력자가 되기 위해서 게임을 한다?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조금 시시하지 않을까? 다른 온라인 게임들도 모두 그런 면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로플이 그런 것을 지향해야할 필요는 전혀 없지. 일단 로플은 단순한 게임으로서가 아니라 또 하나의 세계를 표방하니까. 레벨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자고. 다른 의견?” “변태수입니다. 저는 게임의 동기 부여에 대해서 더 얘기해보고 싶습니다. 대장님, 그 레벨에 대한 얘기는 아닙니다. 동기라면 뭔가를 추구하는 것인데, 동기가 있으려면 그 추구할 대상이 필요합니다. 현실을 생각하면 보통 사람들의 추구하는 것은 그 직업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로플에서도 그 직업에 대한 체계가 어쩌면 게이머들에게 지속적인 동기부여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음... 계속해봐.” 진팀장은 변태수의 말에 호기심을 보였다. “인간은 어차피 경쟁을 통해 성취감을 느낍니다. 우리는 그런 경쟁을 할 수 있는 기본적인 구조를 만드는 겁니다. 직업의 다양화를 통해서, 가질 수 있는 지위나 명예를 잘 짜면 지속적인 동기를 부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그럴까?” “대장님, 저는 꼭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인간은 경쟁 뿐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을 확인합니다. 경쟁도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살아가는 모습 중 하나일 뿐입니다. 저는 게이머들에게 어떤 소속감을 부여하는 것이 더 효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팀장이 반론을 펼쳤다. “음.... 다들 생각은 좋은데... 좀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자고. 자, 로플이라는 세계가 있는데 일단 그 문명 수준은 어떻게 할까? 석기시대? 중세시대? 근대? 현대? 미래? 기존의 게임처럼 판타지? 무림? 우주공간? 하하하... 자네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진팀장의 장난 섞인 말이었다. 사실 이런 전체적인 설정부터가 세계의 시작이었다. 아주 중요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아직 결정된 것은 거의 없다고 봐야했다. “... 저는 화약은 없는 시대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성이 있는 로플에서 총이 있다면 상대를 쉽게 해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너무 빈번하게 죽음을 맞게 되어 오히려 게임의 재미를 반감시킬 것 같습니다.” 조팀장의 말에 주팀장이 동의했다. 하지만 그 여운은 묘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일단 단번에 살상할 수 있는 무기는 없는 게 좋겠지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매력있는 요소들을 제외하면 게임으로서의 끌어들이는 힘이 줄어들지 않을까요?” “하지만 총이 있다고 꼭 위험하기만 할까요? 그 총에 대한 통제를 할 수 있는 치안이 이루어진다면 오히려 현실에서 느끼지 못한 경험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변태수는 총과 같은 살상 무기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총의 사용은 어차피 상대를 향한 것입니다. 게다가 거의 전부의 게이머가 가상현실이라고 해도 하나의 게임으로 여기기 때문에 더 상대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기 쉽습니다. 그런 분위기가 생기면 오히려 좋지 않은 영향을 주게 될 것 같은데요.” “음.... 게임에 대한 매력으로서의 살상 무기와 게임의 전반적인 방향을 깨뜨릴 수 있다는 두 의견이로군. 좋아.” 진팀장의 능숙한 회의 진행을 통해서 문명이나 기술 수준, 게임의 배경이 되는 지형과 그 국가, 직업 체계 등에 대한 토론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진성은 그 자리에 있으면서 로플이라는 또 하나의 세계에 대한 다름 사람들이 생각하는 세계를 느낄 수 있었다. 하나의 세계를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단순한 공간의 구현만으로는 힘듬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중세시대를 세밀하게 설정한다 하더라도 그 속에서 생활할 게이머들이 현대의 사고를 가졌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중세의 세계를 꾸민다고 해서 중세의 세계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롤 플레잉,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면 되겠지만 게임 상에서도 게이머는 자기가 하고 싶어하는 것을 하게 된다. 진성은 그 안에서 플레이를 하는 게이머는 절대 바뀌지 않기 때문에 더욱 더 새로운 세계의 창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현실을 재현하는게 더 나을지도 몰랐다. 밀리터리 아트 싱글 버전의 출시를 기념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이벤트가 계획되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최고의 흥행 카드인 게이머 스키피오와 게이머 한신의 밀리터리 아트 싱글 버전을 이용한 대결이었다. 이미 동경 게임쇼와 밀리터리 아트의 홈페이지로 공개된 게임 화면을 통해서 스키피오 진성과 한신 현준이 밀리터리 아트 싱글 버전의 테스터로 활동했음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출시 기념으로 두 선수의 대결은 곧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진성과 현준은 그래도 공식적인 행사였기에 연습을 통해 좀 더 박진감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로플팀의 요람으로 왔다. “어이, 진현준! 오랜만이네. 얼굴 잊어버리겠다.” “아.. 곽팀장님, 안녕하세요.” “현준이구나. 요즘 어떻게 지내냐? 한가하지?” “조팀장님, 저도 알게 모르게 바빠요!” “네가? 하하하... 지나가는 개가 다 웃겠다.” 현준은 아주 오랜만에 로플의 요람으로 왔다. 그 동안 메이저 리그에 집중하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악의 없는 악담을 많이 듣게 되었다. 현준의 성격상 그런 말 백만마디에도 꿈쩍 않을 수 있었기에 실실 웃기만 했다. 조팀장은 진성과 현준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해 놓고는 나름대로 준비했다. 곧 준비가 다 됐는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자, 준비 다 됐다. 오랜만에 진성이와 현준이의 대결을 보는구나.” 진성과 현준은 각자 PVR-2에 탑승했다. PVR-3도 있었지만 어차피 이벤트 행사 때 PVR-2로 할 예정이어서 PVR-2를 이용했다. 예전의 작은 구슬 같은 것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대신 레이저 종류의 특수한 빛과 진동을 감지하는 센서를 사용했다. 진성과 현준은 콕핏이 닫히자 조금의 빛도 없는 어둠을 느꼈다. 옛날의 헬멧 대신 간단한 마스크와 비슷한 것을 쓰고는 가상현실에 접속했다. “이야..... 오랜만에 와서인지 끝내주는데.” 현준은 한바퀴 돌아보며 말했다. 오랫동안 하지 않다가 해서인지 그 느낌이 새로웠다. 하지만 진성은 확실히 그 현실성에서 한단계 정도는 떨어졌음을 알았다. 너무 현실성이 있는 것도 부적격 판정의 원인이었다. 지금은 사라진 회사 건물 지하의 도장에 현준과 진성이 서 있었다. 두 사람의 옷은 현준이 흰색 도복이고 진성이 검은색 도복이었다. 누군가 캐릭터를 손본 탓인지 현실보다 훨씬 잘 생겼다. 진성과 현준은 도장의 가운데로 왔다. 현준은 검을 손에 쥐고 있었고 진성은 맨손이었다. “얍!” 현준이 먼저 검을 가슴 께로 끌어올렸다가 앞으로 크게 발을 내딛으며 진성의 가슴을 향해 빠르게 검을 찔렀다. 현준이 밀리터리 아트에서 연마한 검법은 이름만 독고구검이었다. 아홉 개의 검초로 이루어진 독고구검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검법이었다. 하지만 현준이 극구 우겼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독고구검이라는 이름이 붙어버렸다. 현준의 검이 전혀 흔들림이 없는 고수의 검처럼 빠르게 진성의 가슴께로 다가왔지만 진성은 확실히 예전보다 그 속도가 느림을 알았다. 빠른 검의 속도에도 불구하고 진성은 오른손을 내밀어 검날위의 몸체를 손으로 잡아버렸다. 그리고는 앞으로 한걸음 걸으면서 강한 진각을 밟으며 팔극신권의 단천령(單遷翎)의 수법으로 검면을 후려쳤다. 단천령은 화살의 파괴력을 높여주는 화살 깃대의 회전처럼 회전을 주며 순간적으로 타격을 그 내부까지 이르게 하는 팔극신권의 비전 절초 중 하나였다. 단천령에 강타당한 검면은 순식간에 자루만 남기고는 조각조각 나고 말았다. 진성은 가만히 서 있는 현준을 향해 천쾌보를 펼쳐 접근하다가 공중으로 도약해 탄소퇴(癱掃腿)를 펼쳤다. 맹거퇴와 함께 팔극신권의 몇 안 되는 퇴법 중 하나인 탄소퇴는 굉장한 강한 각력에 경을 발끝에 모아서 단번의 공격으로 상대를 전투불능으로 만들어 버리는 퇴법으로 피하지 않는 이상 웬만한 방어는 그 강력한 경에 의해서 뚫려 버리는 무서운 퇴법이었다. 현실에서 절대 사람에게 사용하면 위험한 기술이었지만 가상현실이었기에 마음놓고 사용했다. 순식간에 현준의 거리로 들어온 진성의 오른발이 세차게 다가오자 현준은 빠르게 뒤로 후퇴하면서 두 팔을 올려서 가슴을 보호했다. “빠각.. 퍼펑..” 처음의 탄소퇴는 끊어차는 것으로 힘을 그리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 다음은 힘과 경을 실었기 때문에 위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탄소퇴에 당한 현준은 그대로 도장의 벽까지 날아갔다. 벽에 맞고는 앞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충격은 거의 느끼지 못했는지 어렵지 않게 일어났다. “야.. 너무하잖아. 어떻게 한방에 에너지가 모두 사라지냐? 이거 사기다! 사기!” 미리 정해 놓은 에너지에 대한 게이지가 있었는데 현준의 체력 게이지는 진성의 한방으로 완전히 없어졌다. 원래는 힘도 없어지고 쓰러져야 했지만 테스터라서 체력 게이지는 단순한 수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현준은 투덜대면서 도장 가운데로 왔다. “진성아, 살살해라. 아프지는 않지만 맞을 때 그 느낌... 별로 안 좋다! 검이나 하나 줘.” 진성은 공간에 손을 쑥 넣어서는 검을 뽑아냈다. 그리고는 현준에게 던졌다. “강진성, 각오해라. 오늘.. 복수전이다!” 현준은 검을 회전시키며 앞으로 나왔다. 그러다가 막무가내로 돌진했다. 돌진하면서 무조건 검에 맞으라는 무모한 공격이었다. 진성은 피하기만 했다. 예전에도 잘 맞지 않았지만 수련으로 인해서 더 깊어진 경과 능숙해진 동작으로 인해 현준은 마치 허깨비를 향해 공격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현준의 검이 그 무질서한 중에서 갑자기 바람을 가르며 진성의 오른팔을 향해 다가왔다. 기묘한 방위여서 쉽게 피할 수가 없었다. 진성은 손바닥을 뒤집어 막으려고 했지만 검이었다. 게다가 날이여서 쉽지 않았다. 하는 수없이 피하려는데 검의 방위가 묘하게 꺽이며 따라왔다. “오......” 자기도 모르게 감탄이 나온 진성이었다. 현실에서 이런 공격은 절대 불가능한 현준이었지만 지금의 공격은 아주 날카로웠다. 진성은 온 몸의 경을 회전시키며 발을 굴렀다. “퍽!” 그리고 그 반동으로 뒤로 물러났다. 도복이 약간 잘릴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진성은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발을 굴러 튕기며 안으로 뛰어들었다. 거리가 멀었는데도 맹거퇴를 펼쳤다. 지금의 맹거퇴는 공격이 아니라 진각을 더욱 더 강력하게 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쩌어어엉!” 맹거퇴로 인해 강해진 진각은 도장을 울렸다. 진각의 힘을 그대로 팔극신권 쇄심장으로 연결했다. 마음을 부숴버리는 장. 증가된 위력의 쇄심장이 현준의 명치 바로 아래를 강타했고 현준은 그대로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뒤로 날아갔다. 진성은 넘어진 현준은 보지도 않고 잘려진 도복을 만졌다. “으.... 이런....” 현준이 아픈 기색으로 배를 잡으며 일어나자 대뜸 진성이 말했다. “안 아프잖아.” “그래도.... 기분은 좋지 않아.” 그 뒤로도 연출을 통해서 멋있는 장면을 각본대로 연습하기도 하고 자유대련도 하면서 쉬는 기간 동안 잊었던 것들을 되새겼다. 밀리터리 아트의 출시 기념 행사는 코엑스의 컨벤션 홀에서 열릴 예정이었고 이미 밀리터리 아트의 홈페이지를 통해서 참석할 7천여명도 정한 상태였다. 더 많은 인원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면 제대로 행사를 할 수 없다는 판단에 7천명으로 제한했다. 또한 7천명 전부에게 가상현실에 대한 체험을 하게 해 줄 수는 없었지만 즉석에서 추첨을 통해 10명의 사람들에게 직접 가상현실 밀리터리 아트를 플레이해 볼 수 있도록 해 줄 예정이었다. 진성과 현준이 출시 행사에서 해야 하는 것은 단순히 가상현실 내에서의 대련이었다. 하지만 진성은 거기에 하나 덧붙여 잠입 액션에 대한 시범을 보이기로 했다. 어느 정도의 연습은 미리 다 한 상태였다. “이야.. 사람들 진짜 많다. 거기다 이렇게 좋은 자리라니. 하하하.. 역시 나는 운이 좋아. 이렇게 바로 앞에서 볼 수 있게 되다니.” “그래... 형준아, 네 덕분이다. 하하하.. 정말 스키피오와 한신일까?” “당연하지. 너도 그 게임 화면 봤잖아?” “그거야 편집도 할 수 있는 거잖아. 어떻게 문명 온라인 프로 게이머가 이런 액션 게임 테스터까지 했을까? 나는 이해가 안 돼.” “공식적으로 발표까지 했는데 설마 다른 사람은 아니겠지. 자... 빨리 들어가자.” 김형준과 박재혁은 컨벤션 홀 밖에서 다시 확인한 대로 자신들의 좌석이 홀의 앞부분에 있음을 알고는 빨리 앞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원체 많았지만 통로 자체가 좁지 않아 앞으로 오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박재혁은 친구인 김형준에게 자신도 같이 신청해 달라고 부탁만 했는데 이렇게 당첨될 줄은 몰랐다. 자소 소프트에서는 친구 두 명이 같이 신청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에 이런 행운을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그 자리에 거의 맨 앞이어서 기쁨은 두 배였다. 문명 온라인도 재미있게 했지만 김형준은 원래 액션 게임을 좋아했다. 스트리트 파이터와 비슷한 대전 액션을 좋아했기 때문에 동경 게임쇼 화면까지 미리 구해서 보고는 완전히 밀리터리 아트에 매료되어 버린 케이스였다. 현재 돈이 없어서 밀리터리 아트 게임기 구입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지만 게임 스테이션에 보급된다는 말에 몸이 간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하루 빨리 플레이 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대략 30분 정도가 지나니 관객들의 입장이 완료되었다. 그 뒤에 제일 앞에 비워져 있던 테이블에 관계자들이 앉기 시작했다. “어.... 저 사람, 스키피오 강진성이다. 그 옆에... 와... 한신이다. 한신.. 진현준이다. 맞지? 맞지?” “어.. 진짜다. 진짜인가 보다. 이야... 저 두 사람이 나오다니... 흐흐..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다니.. 자....” 김형준과 박재혁 뿐 아니라 관객들의 손에는 소형 디지털 레코더가 들려 있었다. 카메라와 캠코더가 합쳐진 데다가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소형인 디지털 레코더는 아주 작은 크기의 메모리에 기본적으로 5~6시간 정도의 영상을 담을 수 있었다. 워낙 밝아서 후레쉬는 터지지 않았지만 관객들의 손에는 대부분 뭔가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그런 분위기를 알았는지 게이머 한신, 진현준이 손을 흔들자 관객들의 환호소리가 터져나왔다. 이어서 나이 많은 사람들이 나오자 곧 관객석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무대의 조명이 밝아지면서 출시 행사가 시작되었다. 앞의 지루하고 무거운 순서들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여러 중요한 위치의 사람들이 나와서 한마디씩 했지만 정작 관객들의 반응은 없었다. 관객들은 게임을 보러 왔지 졸음 오는 말을 들으러 온 것은 아니었다. 곧 1부가 끝나고 2부가 시작되자 작은 키의 남자가 마이크를 들고 무대 위로 나왔다. “하하.. 여러분 안녕하세요!” “........” “박수 소리도 맞아야 소리가 나는데 이렇게 반응이 없으면 진행을 못하죠. 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김제동이었다. 관객들은 박수를 치면서 인사를 했다. “하나를 가르쳐 주면 하나는 기억하시는군요. 자, 이제 곧 자소 소프트의 밀리터리 아트의 게임 출시 기념회를 제대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혹시 제가 누구인지 모를지도 모르겠네요. 여러분 제가 누굴까요?” “김제동이요..” “케케케... 아시는 분도 계시는데... 저기 왼쪽에서 세 번째 테이블에서 쥬스 드시는 분, 나중에 드세요. 그거 리필 안 됩니다. 하하하.. 사실, 제가 오늘 이 출시 기념회의 사회를 맡은 이유는 제 동생 두 명이 부탁을 해서입니다. 그 친구를 조금 있다가 소개시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저 혼자 진행하면 너무 외롭겠지요? 뭐라구요? 원래 외롭게 생겼다구요? 진행 요원, 방금 전에 말한 사람 다 합쳐서 167명입니다. 다 체크해서 내 보내세요. 하하하.. 농담 아닌거 아시죠? 하하하... 자, 원래 외롭게 생겼지만 그래도 저를 도와줄 파트너를 소개해 드립니다. 자, 나오시죠!” 김제동의 시선이 무대 뒤로 향하자 바닥까지 끌리는 하얀 드레스에 빨간 장갑을 끼고 빨간 리본을 한 미인이 걸어나왔다. “우와..... 정효진이다!” “정효진이다!” “이야.... 끝내주네..” 관객들이 먼저 알아차리고 환호를 보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은 정효진이 게이머 정성진의 동생임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얼마전에 개봉된 영화 이스케이프에서 보인 연기로 호평받고 있었기 때문에 어쩌면 정성진보다 정효진의 인기가 더 좋을 수도 있었다. “이야... 이거 사람 미치고 팔짝 뛰겠네요. 제가 나와서 인사해도 멀뚱멀뚱 하던 인간들이 이렇게 젊고 예쁜 여자가 나오니 여기에 도착도 하기 전에 함성부터 질러대다니.. 거기 그 쪽 아저씨들은 제가 보니 희망이 없으니 포기하세요. 하하하.. 진담인거 아시죠? 하하하.. 자, 정효진씨, 오랜만입니다.” “네, 김제동씨. 만나서 반가워요.” “하하하.. 미인 앞에 서니까.. 하하하.. 웃음밖에 안 나오네요.” “제동씨도 잘 생겼는데요...” “하하하하.. 여러분 오늘은 내년부터 제가 정한 국경일입니다. 달력에 빨간 줄로 그어 놓으세요. 아셨죠? 자, 이제 저와 정효진 양을 이 자리로 불러낸 제 동생 둘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자, 게이머 스키피오 강진성, 게이머 한신 진현준을 이 자리로 모시겠습니다.” 관객들은 그 말에 큰 박수로 화답했다. 앞자리에 있던 진성과 현준은 제동의 말에 무대 위로 올라갔고 정효진보다도 훨씬 더 큰 환호가 들렸다. “확실히.... 여기 모인 사람들은 개그맨보다.. 탤런트보다 게이머를 좋아하는 게임 폐인임에 틀림없습니다! 자, 이쪽으로 오시죠.” 진성과 현준은 무대 가운데로 갔다. 제동이 진성 왼쪽에 서고 정효진이 현준 오른쪽에 섰다. “문명 온라인 프로 게이머로 메이저 리그에 참여해서 우승을 거둔 걸로 아는데 도대체 언제 밀리터리 아트의 테스터로 활동할 시간이 있었습니까?” “.... 시간 나는대로 테스트를 도왔을 뿐입니다.” “하하.. 겸손하시군요. 자, 여기서 잠깐. 여러분, 오늘 여러분께 재미있는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평소 모시기 힘든 두 게이머가 왔는데 개인기를 보지 않고 지나칠 수는 없지요.” 제동은 진성과 현준을 쳐다보았고 진성은 쭈뼛거리며 앞으로 나왔다. “여러분은 게이머 스키피오 강진성이 실제 무술의 달인임은 알지 못했을 겁니다. 오늘 그 증거를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자, 기대해 주십시오.” 진성이 조금 더 앞으로 나오자 관객들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진성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며 팔극진결의 몇 부분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팔극진결은 두 다리를 굳건하게 땅에 붙이는 안정감이 있는 것이기에 안목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리 그 실력을 알기가 힘들었다. 부드러운 동작과 거칠고 힘있는 동작을 보여주다가 마지막에 경을 이용해서 공중으로 뛰어올라 바람 소리가 윙 하고 울리는 큰 동작의 깔끔한 돌려차기를 선보였다. 상당히 높은 위치에서 돌려차기를 했고 동작이 컸기 때문에 실전에서 통하지는 않겠지만 보기에는 상당히 세련되어 보였다. “이야.. 와....” 관객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밀리터리 아트라는 게임 자체가 싸움과 관계된 것이었지만 관객들은 게이머 스키피오의 깔끔한 동작에 놀랐다. 그 정도로 진성의 동작은 뭔가 있어 보였다. 현준은 개인기로 어설픈 개그를 하다가 관객들을 완전히 얼려버려서 제동이 그 분위기를 다시 회복하느라 진땀을 뺐다. 제동의 능숙한 리더와 정효진의 맛깔스러운 진행이 이어지면서 곧 관객들이 원하던 진성과 현준의 대결이 벌어졌다. 진성과 현준이 대결을 벌이는 장소는 도장이 아니었다. 굉장히 넓어보이는 평원의 한 가운데, 게다가 바람이 불어 무릎 정도까지 오는 풀들이 공터를 둘러싸면서 바람의 방향에 맞추어 흔들리고 있었다. 태양이 뉘엿뉘엿 산으로 떨어지고 있어서 하늘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진성과 현준은 듣지 못했지만 밖에서 대형 화면들을 통해서 보고 있는 관객들은 그 분위기에 맞는 음악까지 들을 수 있었다. 진성과 현준 둘 모두 검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진검이었다. 진성의 의상 컨셉은 낭인, 떠도는 무사였고 현준은 군인 이미지의 복장을 했다. 진성의 검이 약간 휘어져 있다면 현준의 검은 직도였다. 게다가 진성의 얼굴이 원래 얼굴에다가 약간 거칠어 보이게 하는 상처와 날카로운 눈빛으로 야성을 드러냈다면 현준은 확고부동한 군인의 느낌을 잘 살렸다. 관객들은 넓은 평원을 표현하는 그 엄청난 그래픽에 놀라워했다. 그 놀라움은 가만히 있던 진성과 현준이 자연스럽게 움직이면서 평원에 놓여진 공터의 가운데로 서로 다가오자 더 커졌다. 정말 사람이 움직이는 듯했다. 게임 화면이 공개되어 사람들은 이미 놀랄만큼 놀랐지만 이렇게 실시간으로 게임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아직 관객들은 가슴을 졸이면서 화면을 지켜보았다. “오랜만이군. 한신.” 날카로운 듯한 목소리였지만 조금 어색한 스키피오의 목소리에 대답하는 한신의 목소리는 비장감마저 서려 있었다. “스키피오, 너는 왜 낭인을 택했나?” “..........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는 낭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 “너야말로 둘도 없는 친구를 돕지 않고 왜 군인이 된 거냐?” “나는.... 나는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는 군인이 되고 싶었다.” “천하의 간신 엄숭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은 아닌가?” “나 역시 엄숭은 반드시 처단해야할 대상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네 방법은 틀렸다. 반란이라는 것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될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다. 스키피오, 이제 그만 해라. 희생만 커질 뿐이다.” “하하하하.. 역시. 왜 조정에서 너를 보냈는지 알만하군. 이제와서 반군을 해체하면 조정에서 나를 가만둘 것 같은가? 나와 같이 모인 반란군을 용서할 것 같은가? 아니, 한신 자네도 결코 무사하지 못할 걸.”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쩔 수 없다? 힘을 가진 자가 어쩔 수 없다고만 하니까 이 나라가 이 꼴이다. 그 때 엄숭을 처치했다면 이토록 상황이 나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 “휴... 그래, 그렇지. 너와 내가 가야할 길은 절대 다시 만날 수 없는 길이니까. 한신, 검을 뽑아라.” “.... 꼭 이렇게 해야 하겠나?” “모든 것은 검이 말해주겠지. 자!” 스키피오가 검을 오른쪽 어깨 근처로 끌어올리며 앞으로 돌진했다. 그 순간 한신 역시 검을 뽑아서 앞으로 달려나갔다. “챙. 채챙.... 챙...” 스키피오의 날카로운 사선베기는 한신의 우직한 방어에 막혔다. 한신은 방어 위주였고 스키피오는 공격 일변도였다. 조금씩 뒤로 밀리는 한신이었지만 물샐틈 없는 방어였다. 한참 공격하던 스키피오가 검을 멈추고는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한신, 검이란 상대를 죽이기 위해서다. 검을 들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 스키피오는 한신의 검에 필승의 의지가 없음을 처음에 부딪힌 것으로 바로 눈치챈 듯 말했다. “.... 어쩔 수 없군. 자...” 한신이 제대로 검을 고쳐 쥐자 스키피오 역시 검을 들어 올려 서로 돌진했다. “이야.. 저게 게임이야? 우와... 너무 대단하다. 검이 부딪칠 때 떨리는 것 봤어? 이야... 저게 400만원이 넘다니. 으....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야겠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으.... 재혁아, 너... 나와 돈 모아서 저거 하나 사지 않을래?” “.... 게임기를? 너 얼마 있는데?” “..... 음... 앞으로 410만원 더 벌어야 되는데....” “뭐야? 16만원 있다는 얘기잖아. 나는 40만원 정도 있는데... 야, 안 되겠다. 포기하자. 포기! 426만원이라니... 휴우.....” “으휴... 아깝다. 저게 정말 게임이야?” 김형준은 도저히 눈을 뗄수가 없었다. 화면 속의 스키피오와 한신의 약간은 유치하면서도 비장한 대사가 끝나자 둘은 본격적으로 싸웠는데 그 싸움 장면이 정말 실감이 났다. 서로의 검이 부딪힐 때마다 두 사람의 몸이 흔들리는 것과 빨리 움직이다 보니 먼지가 이는 것은 더욱 화면이 실감나게 만들었다. 막상막하의 움직임이었다. 가끔 현실에서는 할 수 없는 점프와 동작을 보여주기도 했기 때문에 정말 무협 영화의 한 장면으로 봐도 무방했다. 김형준 뿐 아니라 관객들은 숨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몰입되어 있었다. “이얍...” 한신의 검이 스키피오의 가슴을 향해 빠른 속도로 찔러 들어오자 스키피오의 몸이 뒤로 푹 꺼지면서 몸이 활처럼 휘며 덤블링으로 빠져 나갔다. 한신은 가만히 있지 않고 검을 휘두르며 스키피오를 따라갔다. 스키피오는 그대로 뒤돌기로 계속 피하다가 몸이 거꾸로 된 상태에서 팔에 힘을 줘서 공중으로 도약했다. 한신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공중에서 회전하는 스키피오의 가슴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아...” 많은 관객들이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고 말았다. 공중에 뜬 상태로 회전하는 스키피오의 가슴에 그대로 한신의 검이 빠른 속도로 다가가고 있었던 것이다. 가상현실이기 때문에 검에 찔린다고 해서 실제로 다치는 것은 아니다 하더라도 놀란 관객들이었다. “어.... 우와..” 다시 한번 관객들은 일제히 탄성 소리를 내뱉었다. 공중이라 어쩔 수 없으리라는 예상을 깨고 스키피오의 회전속도가 갑자기 빨라지더니 순식간에 몸이 바로 세워지면서 빠르게 쏘아져오는 검끝에 사뿐히 서 버린 것이다. 한신이 내뻗은 검, 그 검 끝에 아무런 무게감도 없이 서 있는 스키피오. 순간 화면은 멈춰버린 듯했다. 바람이 불어 주위 풀들과 한신과 스키피오의 옷자락이 펄럭거리는 것을 제외하면 완전히 멈춘 듯했다. 그 순간 스키피오가 검을 밟고 내려오며 한신을 공격했다. 한신은 검을 휘두르며 반격을 했고 그로 인해 다시 한번 접전이 펼쳐졌다. 관객들은 이제야 박수를 치며 환호성으로 홀을 가득 채웠다. 대사에서부터 모든 것을 조팀장 및 다른 사람들과 상의해서 연출한 것이기에 관객들은 더욱 더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적절한 액션과 그런 액션 사이에 적당한 긴장을 늦추지 않아서인지 거의 15분에 가까운 격투씬이었는데도 관객들은 전혀 지루해 하지 않았다. 한참을 싸운 뒤, 스키피오와 한신은 서로 거리를 두었다. 관객들은 그 느낌이 단판 승부임을 알 수 있었다. 보통 영화에서 뭔가를 기대하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 꾸울꺽....” 침 넘어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스키피오와 한신은 잠깐 서로를 노려보고 있다가 서로를 향해 뛰어들었다. 검을 꼬나 쥐고 서로를 향해 돌진하는 모습은 대형 화면에 나왔다. 그러다가 서로의 시점에서, 스키피오가 한신을 바라보는 모습과 한신이 스키피오를 바라보는 시점이 대형 화면에 동시에 나타났다. 정말 영화같은 장면이었다. “.....” 두 사람은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10초 정도의 정적이 지나간 후에 한신의 한쪽 무릎이 굽혀졌다. 그러면서 검을 땅에 박아서 쓰러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관객들은 스키피오의 승리로 생각했지만 그 순간 스키피오의 머리를 싸매던 두건이 반쪽으로 갈라지면서 스키피오가 서 있는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 “아.....” 스키피오는 검을 쥔 그대로 옆으로 넘어졌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에 무릎 꿇었던 한신이 혼신의 힘을 다해서 일어섰다. 허리를 베였는지 한쪽 허리를 잡고서는 스키피오의 옆으로 힘겹게 다가갔다. 한신은 스키피오의 모습을 보며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스키피오의 모습을 확인한 한신. “으아아악!” 고함을 지르던 한신은 으스르지도록 굳게 잡은 주먹을 하늘 높이 들면서 괴로워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검을 들어서는 앉은 자세 그대로 자신의 배를 향해 검을 찔렀다. “.. 우욱....” 검은 배를 관통해서 등으로 나왔다. 관객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떨림이 점점 멈추어 가는 한신의 모습이 클로즈업 되었다. 천천히 쓰러진 한신은 스키피오 옆에서 고개를 하늘을 보기 위해서 돌렸다. “...... 다음 세상이 있..다..면.... 그... 때...는.............” 말을 끝마치지 못한 한신의 고개가 힘없이 숙여졌다. 그 순간 화면이 천천히 까맣게 변하면서 화면은 지고 있는 태양을 비추었고 곧 완전히 암흑으로 변했다. “우와.... 이야.... 끝내준다! 우와...” “이게 게임 맞아? 우와.... 영화다. 영화!” “정말 영화다. 영화. 이야... 이것봐.. 몸에 소름이 다 돋았다.” “으.... 이게 400만원이 넘는 이유를 알겠다.. 이야...” 관객들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가상현실이라는 공간 자체도 관심을 끌었지만 그 속에서 엄청난 연출과 연기력을 보인 두 유명 게이머로 인해 그 효과는 더욱 커졌다. 원래 진성이 마지막에 죽는 장면을 연출하려고 했지만 월등히 뛰어난 연기력의 소유자인 현준이 결국 역할을 바꾸기로 했기 때문에 시범의 마지막은 현준이 장식했다. 확실히 그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는 짧은 연출이었지만 그 비장감만은 제대로 전달되었다. 정식적인 실력 대결을 보여주려다가 어차피 시범이라는 생각에 연출을 하기로 생각했던 조팀장과 진성, 현준은 이제 그 결과를 볼 수 있었다. 게임기에서 나온 진성과 현준이 무대로 나와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자 관객들은 정말 다 기립해서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김제동은 마이크를 잡지 않은 왼쪽 팔을 보여주면서 진성과 현준에게 말했다. “우와.. 저, 정말 소름이 돋았어요. 두 분이 영화계에 데뷔해도 되겠어요. 아니, 충무로에서 두 분에게 아마도 섭외가 들어오지 않을까요? 하하하.. 효진씨는 어떻게 봤나요?” “아... 저는 정말 가슴이 두근거려서.. 말도 잘 못하겠어요. 마지막에 현준씨가 말한.... 그 말이 너무 마음에 와닿아서요.. 저... 눈물이 날 뻔했어요.” 정효진은 정말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많은 말을 하지 않은 채 검으로 얘기를 한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죽은 뒤에 나머지 한 사람마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장면 후라서.. 더욱 더 감정을 자극하는 말이었다. “하하하.. 효진씨, 만약에 앞으로 이런 액션 영화에 여주인공으로 출연한다면.. 이 두 분 중에 어떤 분이 남자 주인공이 됐으면 좋겠습니까?” 김제동의 돌발질문에 정효진은 당황했지만 나직하게 대답했다. “...네? 아.. 저... 저는.. 현준씨가 조금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하는데요....” “네? 아.. 의외입니다. 관객 여러분, 여러분들은 오늘 정효진 양과 진현준 군과의 스캔들 장면을 보고 계십니다. 저는 그냥 한번 물어봤는데... 사실, 두 분다 영광이죠 이런 대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하하하... 진성씨는 버림 받았네요. 하지만 걱정마세요. 정효진 양과 영화에 출연은 못한다 해도 저와 같이 버라이어티 쇼에 출연할 수 있도록 제가 밀어드릴께요. 케케케..” 제동의 재치있는 말에 정효진의 얼굴은 홍당무가 되었고 현준은 어쩔 줄 몰랐다. 진성은 그냥 담담하게 웃었다. 관객들은 그 말에 박수를 치며 정효진과 진현준이라는 이름을 연호했다. “관객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두 개의 즐거움이 더 남아 있습니다. 하나는 바로 진성군이 대전 액션이 아닌 밀리터리 아트의 잠입 액션에 대한 시범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오늘 여러분 중에서 10분을 추첨으로 뽑아 이 자리에서 밀리터리 아트를 체험해 볼 수 있도록 할 예정입니다. 다음은 인기 가수 김효리의 무대입니다. 저는 조금 뒤에 다시 뵙겠습니다.” 김제동과 정효진은 진성, 현준과 같이 대기실로 와 있었다. 정효진은 아직도 얼굴에는 붉은 기운이 가라앉지 않았다. 진성은 다시 한번 시범을 보여야했기에 아직은 조금 긴장된 상태였다. “효진아, 네가 그 자리에서 그렇게 얘기할 줄은 몰랐다. 아마도 내일 스포츠 신문 1면을 장식하지 않을까?” “오빠! 오빠가 그냥 넘어갔으면..... 아유.. 몰라!” “크크... 효진아 좋으면서 뭘 그래? 네가 나한테 평소에 부탁한 것을 내가 오늘 해 준 것 뿐인데..... 케케케..” 김제동이 의미 있는 말을 낮게 읊조리자 정효진의 목소리가 앙칼졌다. “오.빠. 그.만.” “케케케케... 알았다. 알았어. 아, 진성아, 아까 그 장면 진짜냐? 혹시 미리 만들어 놓았다가 편집한 거 아니냐?” “제동이 형, 100% 정말 게임 화면이에요. 게다가 100% 생방송. 아, 그 내용은 저와 현준이가 연출을 했지만요. 하하.. 그런데 현준이가 이렇게 조용한 것도 오랜만에 보는데요.” 현준이는 정효진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현준 자신이 잘못한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스캔들의 원인제공자가 될 수도 있는 터였다. “그 게임기 400만원 조금 넘는다고 했지..... 음.. 나도 꼭 사야겠군.” “저두요.....” “효진이 네가? 너 게임 별로잖아?” “저 게임은 재미있을 것 같아서요.” “오호라..... 크크... 알겠다.” “오빠!” 김제동은 감을 잡았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현준과 진성은 무슨 말인지 몰라 눈만 껌벅거렸다. 곧 정효진과 제동이 먼저 나갔다. 조금 있다가 진성마저 나가자 현준만 대기실에 남게 되었다.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제 게이머 스키피오의 잠입 액션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로 게이머 스키피오는 이 잠입 액션의 주 테스터였으며 그 실력은 현재로서 최고 수준입니다. 관객 여러분들이 밀리터리 아트에 익숙해져 하루 빨리 최고수인 스키피오를 뛰어넘기 바랍니다!” 제동가 정효진의 소개와 더불어 스키피오 진성의 밀리터리 아트 잠입 액션에 대한 시범이 시작되었다. 대형 화면에는 곧 스키피오가 검은색의 약간 품이 있는 소매의 윗옷과 바지를 입고 있었다. 세련되어 보이는 군화까지 신고 있어서 군인다운 강인한 이미지가 넘쳤다. 여러 가지를 달 수 있는 군용 조끼를 입고 있는 스키피오의 뒤에는 다양한 총기류와 단도 등의 개인 무기가 진열되어 있었다. 관객들은 제대로 된 잠입액션의 게임 화면은 보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관심을 집중했다. 검은 옷에 색깔이 검은 손가락 부분은 없는 가죽 장갑을 낀 스키피오가 무기가 진열된 곳으로 가서 탄창을 입고 있는 조끼에 넣고 권총을 선택했다. “데저트 이글, 50 매그넘탄.” 스키피오는 2킬로그램이 못 되는 괴물 권총 데저트 이글 두 자루를 양쪽 허리에 각각 찼다. 도합 3.5킬로그램에 육박하는 무게라 부담이 되지만 시범이기 때문에 조금 무리하기로 했다. 게다가 어차피 약간의 현실성과 연출로 뭔가 보기를 원하는 관객들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7발 탄창 4개를 챙겼다. 섬광탄과 연막탄도 챙겼다. 수류탄과 대형 기관총은 아직 공식적으로 지원되지 않았다. 스키피오 진성은 소총 계열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SMG(서브머신건)를 하나 가져 가려다가 그만두었다. 야시경도 챙겼지만 쓸 생각은 없었다. 스키피오 진성의 경우에는 그런 것이 필요가 없었다. 스키피오는 군용 대검 하나를 챙긴 후에 건물 입구로 향했다. 양손으로 데저트 이글 하나로 조준하면서 앞으로 나갔다. 데저트 이글은 그 무지막지한 파괴력으로 인해 보통의 SMG를 능가하는 위력을 보였지만 7발 밖에 되지 않는 탄창과 연사할 경우에는 그 반동으로 인해 목표를 제대로 맞추기가 힘들었다. 그런 이유로 데저트 이글을 사용하는 사람은 당연히 그 힘이나 어느 정도 데저트 이글의 반동에도 익숙해야했다. 게다가 실제로 과거에 사용되었던 데저트 이글인 만큼 그 현실감은 탁월했다. 스키피오는 테러리스트의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디텍터를 보고는 그 위치와 대강의 인원수에 대해 알고는 빠르게 이동을 시작했다. 정말 관객들이 보기에는 영화와 같았다. 건물이 테러리스트에 의해 점거당한 상태, 그 건물에 주인공이 침투해서 쥐도새도 모르게 테러리스트를 해치우고 미션을 완수하는 것, 완전히 영화였다. 1층의 로비를 지나 2층을 계단으로 올라가던 스키피오는 다시 한번 디텍터로 확인한 후에 슬금슬금 계단을 올라갔다. 조금의 수정으로 디텍터는 도합 세 번만 확인할 수 있었다. 스키피오는 이제 마지막 한 번을 제외하고는 디텍터를 볼 수가 없었다. 2층에 테러리스트가 있었지만 스키피오는 무시하고 3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는 두 명, 3층에 네 명이 있었는데 3층에 위층과 연결되는 통신장비와 무시하기 힘든 무기가 있었기 때문에 3층부터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런 정보는 연출을 맡은 조팀장과 서로 알려준 사실이었다. 3층으로 올라간 스키피오는 텅 빈 복도를 재빠르게 이동했다. 이런 복도로 지나가다가 적과 마주친다면 그야말로 난감한 일이다. 더구나 적이 하나가 아니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분명 아까 디텍터로 확인했을 때, 3층에 테러리스트가 모인 곳이 있었다. 스키피오는 천천히 다가갔다. 발자국 소리도 나지 않은 걸음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예상했던 곳에 이르자 스키피오는 데저트 이글을 허리에 꽂고는 군용 대검을 손에 들었다. 좁은 공간에서 조용히, 그리고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해서는 이런 대검이 제격이었다. 대검을 날이 바깥으로, 대검의 자루를 거꾸로 잡은 스키피오는 테러리스트가 모여 있는 방 바로 앞에까지 들키지 않고 올 수 있었다. 섬광탄을 꺼내어 문을 열고는 안으로 던져 넣었다. 순간 번쩍하는 순간 스키피오는 안으로 들어갔다. 섬광 이후 연기가 피어 올랐지만 스키피오 진성은 테러리스트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순식간에 이동하면서 상대의 목 울대를 그어버렸다. 2명을 처리하자 나머지 두 명이 있었는데 엄폐물인 책상을 이용해서 숨어 있었다. 연기가 어느 정도 옅어지는 것을 느낀 스키피오는 책상 밑으로 숨었다. 누워서 대검을 들고는 책상아래로 살짝 보이는 상대의 다리를 향해 강하게 던졌다. “윽.. 으으악!” 한 명의 정강이 아래에 대검이 꽂히자 두 사람의 경계에 틈이 생겼다. 스키피오는 책상을 뛰어 넘어서 상대를 향해 빠르게 달렸다. 나머지 한 사람이 스키피오가 다가오는 것을 봤을 때는 상당히 가까운 거리였다. SMG인 우지로 사격하려던 나머지 한 사람보다 스키피오의 동작이 더 빨랐다. 다가온 스키피오의 멋있는 어깨찍기 한방에 무너졌다. 스키피오는 쓰러진 테러리스트에게로 다가가 대검을 뽑으며 확실하게 처리했다. 청소년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죽을 정도의 치명상을 맞으면 캐릭터가 일정 시간 뒤에 사라졌다. 또한 피의 색깔은 녹색이었다. 네 명을 아무런 소리 없이 처리한 스키피오는 통신 장비를 부숴버렸다. 그리고 우지를 집어서는 2층으로 내려왔다. 2명의 테러리스트가 있는 2층으로 내려온 스키피오는 3층과는 달리 아주 대담했다. 확실히 어디인지 모르기 때문에 천천히 이동하면서 우지로 겨누었다. 결국 2층의 테러리스트는 같은 방에 있다가 갑자기 문을 박차고 들어온 스키피오의 공격에 총알받이가 되고 말았다. 3층에서와는 달리 요란한 총소리가 났다. 총소리가 났기 때문에 5층 위의 테러리스트들이 아마도 조를 짜서 내려올지도 몰랐다. 스키피오는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키피오가 2층에서 총소리를 낸 이유는 5층 위의 테러리스트들을 흩어지게 하기 위해서였다. 스키피오는 2층의 엘리베이터에 탔다. 위로 올라가는 버튼을 누르는 대신 엘리베이터의 천장을 통해서 그 통로로 올라갔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동작으로 엘리베이터 통로를 거슬러 올라갔다. 미리 연습을 한 듯, 능숙하게 7층까지 올라간 스키피오는 힘으로 엘리베이터 문을 열고는 밖으로 나왔다. 원래 스키피오 진성이 연습했던 최상급의 난이도라면 건물 꼭대기까지 가야했지만 시범이라 그 시간과 효과를 위해서 7층에 테러리스트의 우두머리와 건물을 폭파시킬 만한 폭발물이 있는 것으로 설정했다. 스키피오는 빠르게 움직였다. 7층의 가운데에 있는 휴게실로 들어온 스키피오는 디텍터를 꺼내 마지막으로 디텍팅을 했다. “엇...... 함정이다.” 스키피오는 디텍터를 통해서 남아 있는 모든 테러리스트가 7층에 집결해 있음을 알았다. 그것도 자신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원형을 이루고 있었다. 이쯤되면 상대가 자신의 움직임을 모두 파악했다는 말이었다. 스키피오 진성은 밖의 사람들이 듣지 못할 정도로 나직하게 말했다. “.... 조팀장님이.... 나를 물먹였군.” 원래의 초급 난이도의 테러리스트라면 절대 이런 전술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적어도 중급의 난이도였다. 이런 것을 손댈 수 있는 사람은 조팀장 밖에 없었다. 스키피오는 양 허리에서 데저트 이글을 뽑아 들었다. 양손으로 잡고 사격해야만 제대로 맞출 수 있는 데저트 이글이었지만 스키피오는 그 동안의 연습과 테스터로서의 특권으로 한손으로 사격이 가능했다. 특히 스키피오 진성이 힘과 경을 조화롭게 사용하자 더욱 더 부드러운 사격이 가능했다. 스키피오 진성은 청경을 최대한 끌어올리며 양손을 펼쳐서 양방향에 대한 사격자세를 취했다. “타앙! 타앙!” 휴게실의 왼쪽 반투명 창과 오른쪽 맞은편의 문에 달린 창을 뚫고 나간 매그넘 탄환은 정확하게 테러리스트 두 명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에 반응이라도 하듯 완전히 깨진 창으로 총탄이 빗발치듯 날아왔다. “타타타타타.. 타타타타타... ” “타타.. 타타타타타...” 스키피오는 총탄을 피하기 위해서 휴게실의 테이블과 의자, 가구들을 엎어 엄폐물을 만들었다. 상대의 총이 SMG 인지 총탄의 위력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8명의 테러리스트 중에 2명이 없으졌으니 이제 6명이 남아 있는 셈이었다. 스키피오는 이제 연막탄과 같은 것을 이용한 안으로의 돌입을 예상했다. “턱.. 데구르르르.. 피슈우우..” 예상대로였다. 마치 스키피오를 제압하기 위한 대테러부대같은 모습이었다. 스키피오는 오히려 자신이 더 유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스키피오 진성은 야시경이나 적외선 스코프 등이 없어도 상대의 위치와 행동을 알 수 있었다. 스키피오는 엄페물 속에 숨어서 양손을 좌우로 폈다. 눈은 상대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타앙 타앙 타앙.. 타앙!” 네 발의 데저트 이글의 격발 소리에 정확히 네 명의 테러리스트가 쓰러지는 것을 느낀 스키피오는 옆으로 뛰었다. 스키피오가 있는 곳은 총알세례를 받았다. 스키피오는 이제 2명이 남았음을 알고는 상대의 위치를 파악했지만 상대 역시 엄폐를 이용했기 때문에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생각보다 쉽게 해결해 가는 상황에 스키피오는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어 디텍터를 꺼냈다. 이제 디텍팅은 하지 못하지만 미션 성공 요건 중 하나인 제한 시간은 확인할 수 있었다. “뭐야? 2분 35초? ...... 이런...” 겨우 2분 30여초가 남았을 뿐이었다. 스키피오 진성은 속으로 조팀장을 욕했다. 이런 일을 벌이다니. 폭탄이 터지면 단순히 게임 오버일 뿐이지만 그래도 기분 나쁜 것은 변하지 않았다. 스키피오는 천천히 바닥을 기어서 폭탄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타타타.. 타타타... 타타타..” 스키피오의 위치를 발견한 테러리스트 한 명이 자동소총을 발사했다. 재빨리 옆의 벽으로 붙은 스키피오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제 1분 50초 정도 남았을 것이다. 스키피오는 정신을 차리고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타타타타타.... 타앙!” 스키피오 자신이 가려고 하는 방향으로 대검을 던졌다. 그러자 자동소총의 발사 소리가 들렸다. 그 뒤 바로 데저트 이글의 격발 소리가 들리면서 자동소총을 발사했던 테러리스트가 쓰러졌다. 이제 1:1이다. 스키피오는 아직 탄환은 여유가 있었지만 그래도 몰라서 데저트 이글의 탄창을 교환했다. 철컥, 탄창을 갈아끼운 스키피오는 양손으로 두 방향을 겨누면서 폭탄을 향해 다가갔다. “탕탕타타타탕탕.. 타타탕탕..” 뒤에서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자 바로 바닥으로 푹 꺼져버린 스키피오의 머리 위로 그 사격소리부터 다른 소총탄이 날아들었다. 이 정도의 거리라면 두 사람 정도는 관통시켜 버릴 위력의 소총탄이었다. “타앙, 타앙” 몸을 돌리면서 상대를 향해 발사했지만 상대는 벽 뒤로 숨어버렸다. 스키피오는 상대의 동작으로 볼 때, 우두머리임을 알 수 있었다. 스키피오 역시 옆으로 움직였다. 상대의 움직임을 알 수 있었기에 스키피오는 조끼에서 연막탄을 꺼내어 핀을 뽑고 앞으로 던졌다. 엄청난 연기가 나자 스키피오는 눈을 감고는 마치 보이는 듯 엄청나게 높이 도약해서 엄폐물의 위를 가볍게 딛고 넘으면서 상대의 뒤로 넘어갔다. 그리고 가볍게 상대의 머리에 괴물 권총 데저트 이글을 겨누었다. “... 끝이다.” 테러리스트 우두머리는 총을 버렸다. 그리고 손을 천천히 들다가 스키피오가 보기 힘든 시각인 왼손으로 웃옷에 달려있던 수류탄의 핀을 뽑아 버렸다. 스키피오는 보지 않아도 그 동작을 알고 있었다. 데저트 이글로 상대의 머리를 쳐서 기절시켰다. 쓰러지기 직전에 상대의 옷에서 수류탄을 떼냈다. “뭐야? 수류탄..? 아직 지원 안 된다고... 하더니만.... 휴우....” 재빨리 복도로 나간 스키피오는 최대한 빨리, 멀리 수류탄을 던지고는 휴게실 안으로 몸을 날렸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수류탄을 폭발했지만 스키피오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이제 테러리스트는 완전히 소탕되었다. 스키피오는 수류탄을 던지기 위해 바닥에 던진 데저트 이글을 집어 들었다. 뭔가 잊은 듯했지만 미션에 성공했다는 마음에 스키피오는 복도로 나왔다. 이제 시범은 끝난 것이다. “뭔가... 뭔가... 잊은 것 같은데.... 아!!!! 이..이런..” 조금 전의 그 수류탄 폭발로 정작 설치된 폭탄을 해체하지 않았다. 스키피오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휴게실로 다시 들어가 그곳에 있는 폭탄으로 다가갔다. 제발이라는 표정이 역력한 스키피오가 폭탄에서 1미터 정도 떨어졌을 때 폭탄에서 빛이 번쩍했다. “꽈꽈꽈꽈꽝... 꽝꽈꽈꽝... 꽈꽈꽝꽈꽝!!” 순식간에 스키피오가 있던 휴게실은 밝은 빛이 감싸더니 곧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이야... 저게 게임 맞아?” “저런 폭발이라니... 저 안에 있던 스키피오.....” “당연히 죽었지. 아니, 게임 오버겠지. 그런데.. 스키피오가 그런 실수를 하리라고느 생각도 못했다. 하하하..” “하긴... 그런데 그 마지막에 건물 붕괴하는 것 너무 대단하더라.” “맞아. 정말... 정말... 사고 싶다!” 관객들은 대단한 게임 내용과 더불어 그것의 기본이 되는 가상현실에 대해서 매료되고 말았다. 다양한 무기들이 나왔지만 그런 것은 관심 있는 사람이 아니면 잘 알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런 무기들을 이용해서 싸우는 장면은 정말 영화 뺨치는 수준이었다. 게이머 스키피오의 시범은 관객들에게 엄청난 반응을 일으켰다. 조금 전의 대전 액션에 감탄했던 관객들은 또 다시 한번 탄성을 내질렀다. 밀리터리 아트 싱글 버전은 당초 예상을 뛰어넘어 일반 유저를 상대로 1만 4천여대의 예약판매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 초기의 인기로 말미암아 그 동안 밀리터리 아트의 성공 여부를 고려한 후에 게임기의 도입을 결정하려고 했던 많은 게임 스테이션의 주문으로 1만대가 넘는 추가 주문을 받았다. 자소 소프트로서는 문명 온라인에 이어 밀리터리 아트라는 게임의 폭발적인 인기로 게임 업계에서 명실상부한 메이저 개발회사로 자리잡게 되었다. 특히 문명 온라인 개발팀장인 이희철과 밀리터리 아트 개발팀장인 진민수의 이름은 게임개발 업계에서 명성을 얻었고 프로 게이머로 이름이 난 스키피오 강진성이 밀리터리 아트의 핵심 개발자 중 하나라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또 하나 팬들의 관심을 끈 사실은 밀리터리 아트 싱글 버전의 출시 기념회에서 불거진 탤런트 정효진과 게이머 한신 진현준의 스캔들이었다. 스포츠 신문 1면에 대문짝만하게 두 사람의 사진이 편집되어 나와 게임 팬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양쪽에서 그런 스캔들에 대해서 부인을 했지만 일단 한번 흐름을 탄 소문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인터넷에서는 두 사람의 데이트 모습을 목격했다는 사람들이 나오면서 더욱 더 소문은 커져만 갔다. 하지만 원래 스캔들이라는 것이 그 생명력이 짧기 때문에 오래지 않아 수그러들고 말았다. 진성과 현준은 비교적 시간이 많은 틈을 이용해 한 학기 동안의 휴학을 연장하기 위해서 쥬신 대학으로 갔다. “진성아, 일단 한 학기 휴학만 하면 되겠지?” “일단은....” “음... 나는 요즘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걱정이다. 너야 게임 개발자로 이미 이름이 났고 또 능력도 되니까 그렇다고 쳐도 나는 계속 프로 게이머로 살 수는 없는데 앞으로 어떻게, 무엇을 하고 살지 모르겠다.” “하긴... 사실, 나도 게임 개발을 하면서 살고 싶은지... 확실치 않거든. 뭐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내가 뭘 좋아하는지 잘 모르니까.” “휴.... 이제까지 벌어 놓은 돈으로 놀고 먹으며 산다고 하면... 당장 집에서 쫓겨나겠지?” “하하하... 현준아, 너답다. 확실하게 집에서 쫓겨난다. 내가 보장한다.” “그렇겠지.” 진성과 현준은 대학 정문에 차를 세워두고 안으로 들어왔다. 방학중이었지만 생각보다는 사람이 많았다. 너무나 오랜만인지 두 사람은 별로 달라진 곳이 없는 학교를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서로의 모습을 보고는 웃음을 지었다. “정말 오랜만인 것 같다. 원래 저기에 연못이 있었냐?” “현준아..... 저거 우리 입학할 때 있었잖아. 게다가 저 연못에 네가 빠진 걸로 기억하는데... 기억 안나?” “아... 그 때 술 먹고 저기 들어갈 수 있냐, 없냐로 내기했던 때.. 아.... 이제 기억난다. 그 때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오래 되지도 않았지만 진성과 현준은 전혀 다른 세계, 학생들이 아닌 돈을 받고 일하는 회사에서 있었기 때문인지 불과 1년전만 해도 학생이었던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보통의 샐러리 맨과는 달리 거액의 연봉을 받은 두 사람이었지만 확실히 학창 시절은 아니었던 듯, 감회가 새로운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학과 사무실로 갔다. “안녕하세요.” “어떻게 오셨나요?” “저.... 휴학 신청하려고 왔는데요..” “예, 둘 다? 네.... 여기 이 양식에 맞게 채워 주세요. 지도 교수님과는 면담 나누셨나요?” “이제 곧 가보려고 합니다.” 1년이라는 시간이 짧지 않은지 학과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이 바뀌었다. 진성과 현준은 휴학 신청서를 받아 들고서는 먼저 쓸 것은 쓰고서 지도 교수를 만나러 갔다. “아, 자네들이구먼. 가끔... 텔레비전에서 보고 있는데 자네 둘과 김한석 군으로 인해서 학교의 이미지가 아주 좋아졌다네. 아마도.. 내년에는 게임학과를 개설할 모양이던데.. 아, 내 정신 좀 보게나. 자네들은 어떻게 왔는가? 휴학?” “아... 네.. 교수님.” “김한석 군도 왔었다네. 한석군은 내 지도학생은 아니었지만 지나가다가 만났는데 휴학 신청을 하러 왔다더군. 자네들도... 휴학신청이겠지?” “네.... 일단 한 학기만 휴학 신청을 하려고 합니다.” “군대는 어떻게 하려나?” “아직 모르겠습니다. 저는 어쩌면 내년이나.. 아니면 대학 졸업하고 나서 가야하겠지요. 진성이의 경우는 군 면제라서... 하하하.. 내심 저 친구가 조금 부럽지요.” “허허허... 그렇겠군. 나도 전방으로 군대를 갔다왔는데 그 때는 고생이 된다고 해도 지나고 보면 다 똑같고 추억이라네.” “네.... 교수님.” 지도교수의 면담과 여러 건물에서 확인을 받은 뒤 최종적으로 학과 사무실의 학과장을 만나기 위해 다시 학과 사무실로 돌아갔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가끔 쳐다봤다. 그 이유는 학내에서 짙은 선글라스를 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래서인지 진성과 현준을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오호.... 한석군도 왔었는데.... 마치 약속을 해 놓고 온 것 같군.” “네... 학과장님... ” “그래.... 이리 줘 보게. 음.... 한 학기?” “네... 일단 한 학기 후에 군대를 갈지 아니면 그대로 학교를 다닐지 결정할 것 같습니다.” “그래? 현준군, 군대가 마음에 걸린다면 병역 특례를 생각해보게나. 프로 게이머가 거기에 해당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노력은 해 봐야 하지 않겠나? 자네 소속팀도 자네가 빠지는 것은 원치 않을 테니. 진성군은 면제지 아마?” “네, 그렇습니다.” “그래. 그래. 아, 그리고 내년에 게임관련 학과가 생길 모양이야. 아마도 자네 둘과 한석군으로 인해서 쥬신 대학하면 세 명의 프로 게이머가 연상이 되는 것 같거든. 그래서 게임 개발이나 게임과 연관된 학과가 생길 것 같네. 허허허... 자, 이제 됐네. 앞으로도 열심히 해서 학교의 이름을 드높여 주게나.” “네, 학과장님.” 진성과 현준은 학과 사무실에서 나와 정문에 있는 주차장으로 가려는데 가는 길 옆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것을 봤다. 역시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갑자기 일어서더니 진성과 현준에게로 다가왔다. 현준이 뭔가 생각이 났는지 물었다. “... 한석?” “하하하.... 역시. 어쩔 수 없이 너희들도 그렇게 선글라스 쓰고 왔구나.” 진성과 현준 뿐 아니라 김한석 역시 유명인이었기에 이렇게 선글라스를 하고 온 모양이었다. 사실 진성과 현준 뿐 아니라 김한석 역시 이렇게 혼자 다니지 못하도록 매니저들이 난리를 쳤지만 모두 남자인 데다가 별로 그런 간섭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따돌리고 학교로 왔다. 김한석은 매고 있던 가방에서 음료수를 세 개 꺼내더니 진성과 현준에게 하나씩 주고는 길옆의 연못 근처 바위에 앉았다. 우거진 나무로 인해서 그늘이 졌기 때문에 아주 시원한 곳이었다. 진성과 현준은 한석과 마찬가지로 요즘 백수 상태였기 때문에 시간에 쫓기는 일은 없었다. 아주 여유롭게 먼저 앉은 김한석의 옆으로 앉았다. “일단, 메이저 리그 우승.... 축하한다.” “뭐? 너, 설마 그 말.... 하려고 기다린 것은 아니겠지?” 현준의 격없는 말에 한석은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하.. 당연하지.” 고요한 연못을 보면서 세 명은 시원한 음료수를 들이켰다. 프로 게이머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인지 학교 다닐 때는 별로 친하지 않았던 김한석과 두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아주 잘 어울리는 듯, 어색하지 않았다. “너희들은 두 명이서 항상 다니는구나. 조금은 부럽다.” “뭐? 너희팀도 프로 게이머가 있잖아. 비슷한 나이가 아닌가?” “하하... 그렇지. 그런데 팀 분위기가 그런지 조금.... 뭐랄까... 성적이 나쁘면 바로 교체가 되거든. 국내 리그에서 게임 했었던 최유나도 큰 게임에 약한 면 때문에 바로 교체됐거든.” “맞다. 갑자기 그 여자 게이머가 안 보이더니만...” “별다른 말도 없이 연습 경기 성적이 안 좋으니까 바로 바꾸더라고. 연습 경기 결과로 그러다 보니 당연히 동료 게이머가 경쟁 상대로 의식할 수밖에 없지.” “뭐? 그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너 정도 실력이면 다른 곳에 가도 되잖아?” “....휴... 일단 계약을 했으니. 어쩔 수가 없지.” “계약기간이 얼마나 남았는데?” “10월까지.” “그러면 그 때까지 재계약 하지말고 있다가 다른 곳으로 옮겨. 아니, 너 우리 팀으로 올래? 우리 팀은 적어도 그런 연습 경기 가지고 사람 갈아치우지는 않으니까. 아, 맞다. 다음 시즌부터는 종목이 여러 개 생기잖아. 크크크.. 진성이 녀석을 개인전으로 보내버리고 너와 나, 그리고 리틀 스키피오 성진규 세 명이 팀 리그를 쓸어버리는 거야. 하하하하...” 현준의 너스레에 한석은 힘없이 대답했다. “현준이 너는 아주 편하구나. 아무튼 말이지만 참 고맙다.” “진짜야. 한번 생각해 봐. 그리고 우리 팀이 아니더라고 해도 쌍룡은행보다 나은 곳은 많으니까. 잘 생각해.” “그래.... 그나저나 너희 둘 다 계속 프로 게이머...를 할 거냐?” 한석은 화제를 돌렸다. 평소 고민하고 있었던 것을 이해해 줄 수 있는 두 사람에게 꺼낸 것이다. “나야 뭐 할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없지만 진성이는 아마도 게임 개발자로 나설 것 같다. 휴우... 너도 나처럼 생각이 많구나.” “당연하지. 게이머로 살 수는 없으니까.” 현준이와 한석은 서로 비슷한 고민을 하는지 서로 말이 잘 통함을 느꼈다. 진성이도 간간이 말을 하기는 했지만 주로 현준이와 한석이의 대화가 많았다. 프로 리그가 어느 정도 활기를 띠고 있지만 워낙 젊고 어린 선수들이 치고 올라오기 때문에 프로 게이머로서 장수하기는 힘든 실정이었다. 또한 주류를 이루는 게임이 바뀌면 그에 따라서 프로 게이머의 인기도 바뀌게 되는데 그런 변신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힘들었다. 25, 26살 정도를 기점으로 프로 게이머였던 선수들은 리그를 떠나는 실정이었다. 항간에는 삼선전자의 게이머 정성진도 은퇴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런 상황에서 한석과 현준은 서로 비슷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서 오십시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여기.... 유맹 모임이 있지 않습니까?” “아, 이리로 오십시오.” 진성은 미리 연락을 받은대로 서울 시내의 한 호텔로 약속한 시간보다 1시간 가량 빨리 도착했다. 호텔 직원의 안내로 연회장으로 안내된 진성은 원형의 커다란 테이블이 놓여진, 화려한 붉은 색으로 장식된 실내를 볼 수 있었다. 확실히 붉은색 계통의 색깔이 주를 이뤘다. 진성이 안으로 들어가자 뒤에서 누군가가 들어왔다. “아, 어르신.. 아... 아저씨.” 진성은 왕현추를 본 순간 나오던 말을 바꾸었다. “허허... 진성이로구나. 일찍 왔구나.” 왕현추였다. 검버섯이 여전한 노인으로 확실히 그 나이에 비해서 활기가 넘쳤다. 원래 유맹의 모임은 대만에서 열기로 되어 있었지만 오랜만의 새로운 멤버가 될 예정인 진성이 한국에 있고 모든 멤버들이 잘 모일 수 있는 곳을 찾다보니 한국의 서울에서 모임을 갖기로 했던 것이다. 왕현추는 대머리 노인, 조맹현과 같이 미리 모임이 열릴 연회장을 살피기 위해 일찍 왔다. “그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나야 뭐 잘 지냈지. 아, 맞다. 요즘에 그 밀리터리 아트인가.... 그거에 푹 빠져 있다. 허허허.. 정말 재미있더구나. 처음에 내 마음대로 움직이기가 어렵더니만.. 익숙해지니까 허허... 아무리 움직여도 별로 피곤함도 없고... 허허허... 다 네 덕분이다.” 북경에서 문명 온라인 게임 장면을 본 왕현추는 확실히 그 자세한 게임의 내부나 게임 컨트롤은 이해를 하지 못했지만 그 화면 하나만으로도 압도 당함을 느꼈다. 그 뒤 왕현추는 진성에게 그 게임기에 대해서 졸랐는데 진성은 그 대신 발매된 밀리터리 아트 싱글 버전의 게임기를 왕현추에게 보냈던 것이다. 하루에 정해진 일과 외에 밀리터리 아트를 즐기는 왕현추는 실제 몸으로 수련의 효과가 나지는 않았지만 마음껏 몸을 움직일 수 있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활기가 넘쳐 시간을 정해서 게임을 하는 정도였다. 진성은 그런 왕현추의 반응에 만족했지만 왕현추가 다른 사람과 게임상에서 대결을 할 수는 없는지 물을 때에는 식은땀마저 흘리며 모른척했다. 진성은 왕현추에게서 유맹 가입 절차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유가(儒家)의 인애(仁愛)와 묵가의 겸애(兼愛)에 대한 이야기와 기타 유맹의 멤버로서 지켜야할 사항에 대한 것들을 자세하게 들었다. 유가의 인애가 계급을 인정한 체제 하에서의 인간의 도리에 대한 가르침이라면 묵가의 겸애는 차별 없는 인간의 도리, 인간애에 대한 가르침이었다. 진성은 제자백가가 사라졌다는 사실, 최초의 유협이 묵자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기 몸 하나 추스르기에도 빠듯한 현대의 바쁜 생활에서 겸애를 주장한다는 것 자체가 아주 신선하게 느껴졌다. 차별 없는 인간의 도리. 진성은 계속 겸애에 대해서 되뇌였다. 유맹의 가입 절차는 생각보다 까다롭지 않았다. 특별한 사문의 입문식이 아닌, 어떤 친목 모임의 가입이었기에 아주 간소했다. 하지만 사문의 입문식과는 다른 과정이 하나 있었다. 바로 유협전이었다. 유맹의 한 회원이 새로 들어올 사람과 실력을 겨루는 대련으로 이기고 지고의 결과보다는 자신의 경지를 다른 회원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진성이 알기로 자신과 대련할 상대는 대머리 노인, 조맹현이었다. 유공술(柔空術)의 대가였다. 유공술은 일종의 신법과 보법이었다. 영화에서처럼 날아다니는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몸을 가볍게 하고 상대의 공격 범위 내에서도 자신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기술이어서 하나의 무술로 인정받을 정도였다. “왕 어... 아저씨, 그런데 그 유협전은 어디에서 합니까? 여기에서 하기에는 조금....” “아... 그 얘기를 하지 않았구나. 여기에서의 모임은 그냥 겉치레일 뿐이다. 진짜 모임은 밤 늦게 시작하지. 여기에서는 그냥 일상적인 잡담 따위나 하다가 식사 후에 자리를 옮겨서 그 곳에서 진짜 유맹 가입식을 치르게 된다. 오늘은 유맹의 유일한 한국인 멤버였던 송대천 그 친구 도장에서 하겠지. 아마도..” “아, 옛날에 말씀하셨던 한국인 유맹 멤버.. 그 분이....” “맞다. 그 사람이 송대천이지. 그 사람의 기술이 바로 멱치기고. 멱치기.” “멱치기?” “처음 들어보겠지. 일인전승을 원칙으로 한다니까. 하지만 그 위력만큼은 정말 대단하지. 허허허.. 진성, 너도 그 위력을 언젠가 볼 수 있을 테니까. 허허..” 시간이 흘러 모임 시간이 다 되자 한 무리의 노인들이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미리 와 있던 진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라고 말하기도 어려워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제일 처음에 들어오는 노인은 새하얀 백발이었고 그 다음은 진성이 알고 있었던 팔극문의 맹가위였다. 그 뒤로 붉은 얼굴에 머리 한 가운데가 벗겨진 노인, 수염을 길게 기르고 개량한복을 입은 노인이 따라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진성이 아는, 요시히로 데카츠가 들어왔다. 제일 처음에 들어온 백발 노인이 자리에 앉자 다들 자리에 앉았다. 자리의 순서도 신경을 쓴 듯했다. 진성은 그 백발 노인의 맞은편에 앉았다. “자, 오늘의 모임을 시작하도록 하자.” 백발 노인의 말을 시작으로 다들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했다. 진성은 그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지만 특별히 옆에 앉은 왕현추의 통역으로 인해 조금은 알 수 있었다. 노인들도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왕현추나 다른 노인들이 서로 통역하면서 대화를 했다. 안부인사가 끝나자 팔극문이자 진성의 스승 유조의 사형인 맹가위가 일어나서 말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특별히 우리 그룹 유맹에 새로운 멤버를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추천자는 저 맹가위와 왕현추입니다. 그리고 요시히로 데카츠와 조맹현 역시 반대하지 않는 입장입니다. 다른 분들도 사전에 이야기를 들으셨겠지만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나이에 걸맞지 않는 그 경지로 인해서 저와 제 사제인 왕현추는 상당히 놀랐습니다. 20대의 나이에 우리와 같은 경지에 오를 수 있다니. 처음에는 저 역시 제 눈을 의심했었지요. 게다가 팔극문과 인연이 닿을 수도 있었지만 운명인지 그렇게는 안 되더군요.” 맹가위는 잠시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 정도의 경지라면 가장 필요한 것은 다른 사람과의 대련과 같은 어떤 자극이나 실마리일 것입니다. 저는 이제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이 젊은이에게 유맹이라는 좋은 토양을 소개해서 우리가 꿈꾸는 그 단계까지 나가는 것을 보고 싶었습니다. 추천의 이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는 아직 그 경지에 대해서 믿지 못하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거야 유협전을 통해서 드러날 테고... 아무튼, 아직 결정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당당히 추천을 통해서 이 자리에 오게 된 강진성 군을 소개합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긴장하고 있던 진성에게로 쏟아졌다. 진성은 연습과는 달리 아주 어색하게 일어났다. “안녕하십니까? 강진성입니다.” 연습했던 것과는 달리 진성은 너무나 간단하게 인사를 마쳐버렸다. 팔극문과의 인연, 스승 유조가 만든 팔극신권의 특징을 설명하려고 했던 것은 다 생략해 버리고 말았다. 옆에서 통역했던 왕현추 역시 약간 멍청한 얼굴이었다. “허허허... 짧아서 좋구먼... 허허허..... 그래.. 자네는 겸애를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어색한 분위기는 백발노인 손주황의 웃음소리로 사라져버렸다. 손주황은 진성에게 겸애에 대한 질문을 했다. 형식적이지만 정말 가입식이 시작된 것이다. “..... 차별없는 인간의 도리입니다.” “아니, 그런 일반적인 것 말고 자네 생각을 말해 보게나.” 진성은 약간 당황했다. 겸애라는 것에 대해서 배운대로 말을 했는데 갑자기 자신의 생각을 말하라니. 통역했던 왕현추를 쳐다보니 빙그레 웃고 있었다. “.... 저.. 저는....” “그래, 젊은이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말해 보게.” “...... 저는... 겸애가 무엇이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그런 겸애라는 뜻의 말을 지금 현대에서 이렇게 입밖으로 내면서 말한다는 것 자체가 아주.... 새롭습니다.” “뭐? 새로워? 허허허... 아주 재미있는 말이구먼.” “지금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그 겸애라는 말 자체는 인정되는 분위기지 않습니까? 그 인애라는 말은 이제 통하지 않으니까요.” “허허허.. 그래... 확실히 젊은이라 다르구먼. 맹가위, 나는 이 젊은이가 유맹에 들어오는데 찬성일세. 실력도 충분하고... 허허허.. 아주 재미있겠는걸.” 손주황의 말을 시작으로 진성을 처음 본 사람들은 질문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진성 역시 처음에는 당황했었지만 점점 여유를 찾으며 노인들의 말에 공손하게 대답했다. “자.... 이제 질문은 그만하고. 자, 식사를 합시다. 든든하게 먹은 뒤에 오늘의 백미, 유협전을 보러 가야지요. 하하하..” 맹가위의 말을 시작으로 연회장으로 푸짐한 음식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다들 맛있는 음식을 즐기기 시작했다. 한국, 중국 그리고 일본 음식들이 섞여서 들어왔다. 진성은 평소와 달리 워낙 말을 많이 해서 아주 배고팠기 때문에 이것저것 집어 먹었다. “자, 이제부터 유맹의 새로운 멤버가 될 예정인 강진성군과 현 유맹의 제일 막내인 조맹현과의 유협전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지만 생사결이 아닌 대련임을 명심하십시오.” 식사를 끝낸 유맹 회원들은 모두 자리를 이동해서 서울의 변두리에 있는 송대천의 집으로 갔다. 진성의 사부, 유조의 집과 비슷한 구조로 집 내부에 도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유맹 회원들은 도장을 한켠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며 앉아 있었고 진성과 조맹현만 미리 준비해 온 도복으로 갈아입고 도장의 가운데로 나와 있었다. 맹가위의 말이 끝나자 진성과 조맹현은 서로에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후에 두 세 걸음 정도 물러났다. 이제 유협전이 시작될 순간이었다. 진성은 요즘 수련의 최대 성과인 몸, 마음, 경의 일체감을 유협전 시작 전에 이미 이루고 있었다. 하루의 상당 시간 동안 그런 경지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진성은 그 힘이나 파괴력 면에서는 상하이에서 보였던 것과 비교할 수 없었지만 그 안정감이나 의식적인 움직임에서는 훨씬 나은 상태였다. 게다가 수련으로 인해서 그 일체감의 정도를 조절할 수 있었다. 일체감을 이루자 확실히 진성 자신의 주변에 대한 감각이 훨씬 정밀해짐을 알 수 있었다. 진성은 굳건하게 그 자리에서 서 있으면서 상대인 대머리 노인, 조맹현을 바라보았다. 태산같은 굳건함이었다. “오.... 대단하군. 아까 내가 본 경지도 상당히 잘 봐줘서 그런 걸로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내가 과소평가했구먼...” 유맹의 최고 연장자인 백발노인 손주황은 진성의 모습을 보면서 감탄했다. 저 젊은 나이에 이룰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눈앞에 그 증거가 있기에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 수준은 낮았지만 손주황 자신이 생각하는 조화에 아주 가까운 느낌의 자세였기에 더욱 더 놀랐다. 손주황 뿐 아니라 두 번째 한국인 유맹 멤버라고 해서 더 관심이 많았던 멱치기의 달인 송대천은 정말 놀랐다. 아무리 잘 봐줘도 20대 중반인 젊은이의 가만히 선 자세에서 흘러나오는 그 기도는 정말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직접 대련을 하는 것이 아니었는데도 이런 압박감을 느끼다니. 송대천은 내심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비록 그 배운바가 민족 정통의 기예는 아니었지만 그 경지를 이룬 사람은 한국인, 한민족이었다. 송대천은 진성의 모습에 얼굴 가득 만족한 표정이었다. 붉은 얼굴에 가운데 머리가 없는 노인인 황상동 역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형의권의 고수인 황상동의 눈에도 어리디 어린 젊은이의 몸에서 피어나는 기세는 범상치 않았다. 자신의 제자들 중 누구도 저 젊은이의 경지에 다다르지 못했다. 아니, 자신과 비교해도 그리 많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맹가위와 왕현추의 추천에 내심 불만이 없지 않았던 황상동은 진성의 모습을 보고는 그 불만이 완전히 사라짐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그 다음 경지가 기대되는 젊은이였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문하에서 저런 청년이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지만 이미 나이가 들어서 오래 남지 않은 자신의 인생을 생각하면 저 젊은이로 인해 더 나은 경지를 보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핫!” 조맹현이 먼저 움직였다. 조맹현의 유공술은 그야말로 부드러움의 극치였다. 몸의 움직임을 예상할 수가 없었다. 어느 정도 청경의 완성을 이룬 진성이었지만 청경으로 느껴지는 감각과 눈으로 보이는 사실과 다름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청경으로 느낄 수 없는데도 조맹현은 진성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청경을 터득한 이래 처음으로 청경을 무력화시키는 상대를 만난 것이다. 정말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조맹현은 순식간에 진성의 거리 안으로 들어왔다. 진성은 그런 움직임에 어쩌면 축지법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부드러운 동작에 비해 그 몸놀림이 많아 축지법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발달된 감각으로 인해 진성 가까이로 다가오자 조맹현의 움직임을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었다. 조맹현은 진성에게로 다가와 갑자기 어깨로 진성의 가슴께를 들이받았다. 진성은 조맹현의 부드러운 동작이 그 공격 순간 틈이 생김을 단 한번의 공격으로 눈치챘다. 확실히 부드러운 몸놀림과 공격의 움직임은 차이가 있었다. 진성은 팔극신권의 지허보를 써서 왼쪽 뒤, 사선으로 물러났다. 조맹현의 공격은 실패했지만 끊이지 않고 진성에게로 다가왔다. 거리가 벌어지면 조맹현의 움직임을 예측하기 힘들었지만 진성의 거리 내로 들어오자 어렵지 않게 조맹현의 몸놀림을 감지할 수 있었다. 조맹현의 팔꿈치 공격을 예상한 진성은 그 공격이 허초임을 알았다. 진성은 내심 웃으며 뒤로 피하지 않고 앞으로 강하게 진각을 넣으며 팔극신권의 몸통 공격인 용형보를 펼쳤다. “쩌어엉!” 엄청난 진각소리였지만 진성은 장난을 칠 생각이었기에 그 진각으로 인한 경의 대부분은 흩어버리고 순수한 힘으로만 용형보를 펼쳤다. “퍽!” 의외의 몸통 공격을 받은 조맹현은 뒤로 주춤 물러났다. 다행기 그 속에 경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자신이 오히려 허를 찔린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관전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 속사정을 알고 있었기에 조맹현의 얼굴은 붉게 물들었다. “..... 대단하군.” 조맹현은 솔직하게 인정하고는 이 눈앞의 대단한 젊은이를 상대로 제대로 된 유협전을 펼치기 위해서는 자신의 진짜 경지를 드러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알았다. 절대 상대는 자신보다 아래가 아님을 마음속으로 인정했다. “자... 이 공격으로 유협전은 끝일세. 자, 잘 막아보게.” 조맹현의 말에 진성은 긴장했다. 조금 전에는 서로 진짜 실력을 감춘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조금의 이익은 대세에 절대 영향을 주지 못한다. 진성은 조절이 가능한 일체감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오래 유지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자신이 컨트롤 가능한 최고, 최대의 일체감이었다. “핏!” 순간 조맹현의 움직임이 사라졌다. 아니, 사라졌다고 느껴졌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성은 조맹현을 시야에서 놓쳐버렸다. 일체감을 끌어올리기 위한 그 잠깐의 틈을 비집고 조맹현은 그 움직임을 감췄다. 진성은 극도로 일체감을 끌어올려 감각을 개방했다. 그 순간 등 뒤에서 뭔가가 미세하게, 하지만 빠르게 다가옴을 알 수 있었다. 진성은 반사적으로 몸을 앞으로 튕겼다. “어...?” “저... 저게....” “이..이럴수가...” 진성을 제외한 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놀랐다. 공격하던 조맹현 뿐 아니라 보고 있던 유맹 회원들은 갑자기 사라졌다가 3미터 정도를 이동한 뒤에 나타난 진성을 보고는 놀라서 어리둥절했다. 조맹현은 정말 사라진 게 아니라 진성의 틈을 노려 시야의 사각을 이용했기 때문에 멀리서 보고 있던 유맹 회원들을 속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날카로운 공격을 피하기 위해 튕겨서 움직인 진성의 몸은 아무도 볼 수 없었다. 튕겨서 움직였다고 했지만 그리 빠르게 움직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진성의 몸이 공간을 뛰어넘어 나타나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진성아...” 조용한 가운데 이미 한번 축지법의 위력을 봤던 왕현추는 진성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 물음의 의미를 알고 있었던 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왕현추는 확실히 진성을 바라보며 느꼈다. 지난번과는 달리 정말 진성의 통제하에서 움직인다는 것을. “... 여러분 많이 놀랐을 겁니다. 저 역시.. 놀랐으니까요. 저 젊은이의 조금 전의 움직임은..... 축지법입니다. 데카츠 형님은 조금 알고 계시겠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축지법입니다. 저 젊은이, 진성의 축지법에 대한 경지는 정말 이해하기 힘들지만 아무튼 축지법입니다.” 왕현추의 말은 의문을 풀어주기는 커녕 오히려 더 증폭시켰다. 그 뒤를 이어 데카츠가 진성이 배운 축지법에 대해서 설명을 조리있게 했고 왕현추 역시 상하이에서의 일에 대해서 간추려 말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직접 본 일이었기에 부정할 수도 없었지만 데카츠와 왕현추의 말 그대로를 믿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서로 말을 주고 받으며 약간 소란스러워졌다. “허허허... 축지법이 존재하고 있었다니. 허허허.. 오늘은 정말 새로운 것을 많이 보는구먼. 진성군, 앞으로 잘 부탁하네.” 손주황은 그런 어수선함 속에서 진성에게로 다가가 어깨를 두드리며 정식적으로 유맹의 회원임을 확인시켜주었다. 그 뒤를 이어 맹가위, 요시히로 데카츠, 황상동, 왕현추, 송대천 그리고 조맹현이 다가와 유맹의 가입을 축하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진성은 정식으로 유맹의 멤버가 되었다. 팔극신권의 달인 강진성이라는 이름이 유맹의 회원 명부에 정식으로 기재되었다. 친목 도모가 그 목적인 유맹이었지만 그 이름의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게다가 실제로 축지법을 본 조맹현과 송대천이 미리부터 축지법을 가르쳐 달라고 끈질기게 부탁 아닌 부탁을 하던 왕현추와 합세해서 진성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일본에서 그 백발노인에게 배운 그대로를 왕현추, 조맹현 그리고 멱치기의 달인인 송대천에게 가르쳐 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진성은 최고 연장자인 손주황을 제외한 모든 다른 유맹 회원으로부터 대련 제의를 받아 당분간 절대로 유맹 정기 모임을 빠질 수 없게 되었다. 거기에 팔괘장의 최고수인 손주황이 진성에게 접근단타인 팔극신권과는 성격이 다른 팔괘장을 배워보지 않겠느나는 제의를 해서 더욱 더 모임을 빠질 수 없게 되었다. 메이저 리그가 끝난 후, 게임 팬들을 흥분시킨 것은 당연히 밀리터리 아트 싱글버전이었다. 온라인 게임이 주류를 이루던 게임계에서 거의 유일한 싱글 게임인 밀리터리 아트의 성공은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었다. 기존의 게임과 달리 게이머 자신이 가상현실이라는 공간에서 움직이는 현실감 있는 게임이 바로 밀리터리 아트 싱글버전이었다. 하지만 밀리터리 아트는 400만원이 넘는 게임기로 인해 많은 보급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대신 밀리터리 아트로 인해서 게임 스테이션이 호황을 맞았다. 밀리터리 아트 싱글버전의 게임기를 들여놓은 게임 스테이션은 그 게임기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붐볐고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게임 스테이션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수도 늘어났다. 한번이라도 밀리터리 아트 싱글버전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 게임의 재미에 대해 침을 튀기면서 설명할 정도였고 심지어 게임기를 사기 위한 젊은 사람들 사이의 계모임까지 조직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자소 소프트의 또 다른 발표는 다시 한 번 게임계를 달구었다. 자소 소프트의 문명 온라인 개발팀은 두 번째 패치를 발표했다. 그 중 가장 게임 팬들의 관심을 끈 내용은 해전의 도입과 중세 시대까지 포함되는 문명의 진화, 그리고 밀리터리 아트 싱글버전의 접속기인 수정된 PVR-2 게임기의 도입이었다. 처음 문명 온라인이 발표된 이후로 꾸준히 개발팀에게 들어온 내용이 바로 해전의 전면적인 도입이었다. 단순한 수송선이 아니라 본격적인 해전의 도입이었다. 또한 이제까지 고대의 전쟁 뿐 아니라 중세 시대를 포함하는 화약이 출연하기 전까지의 시대를 구현했다. 그로 인해 본격적인 기사가 등장할 정도였다. 그리고 PVR-2의 도입은 이제까지의 문명 온라인 프로버전이 단순히 현실감 있는 공간에서 지시하는 것에만 머물지 않고 게이머가 직접 그 현장에 뛰어들 수도 있었다. 물론 직접 상대 군인과 육박전을 할 수는 없었지만 좀 더 유연한 동작이 가능하게 되었다. PVR-2 그대로가 아니라 문명 온라인에 맞게 변형되었지만 그 느낌만은 전해질 수 있었다. 그런 분위기를 힘입어 문명 온라인의 프로 리그 운영위원회는 다음 리그에 대한 청사진을 발표했다. 바로 3개국 메이저 리그 대회가 아니라 전 세계를 포함하는 월드 리그였다. 모든 나라들이 참여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시아, 아메리카, 유럽을 포함해 명실상부한 월드 리그라고 불러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였다. 자세한 계획은 밝히지 않았지만 일본과 중국 뿐 아니라 미국과 유럽의 몇 개 나라를 포함한 게임 리그가 될 것을 언급한 비공식적인 발표였다. 3개국 메이저 리그의 성공과 그 뜨거운 열기를 기억하고 있는 게임 팬들로서는 월드 리그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한국과 아시아를 평정했다고 볼 수 있는 자소 소프트의 프로팀이 과연 월드 리그도 제패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10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예정된 국내리그와 일본, 중국 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참가를 원하는 나라들의 참여 여부를 따져서 내년 2월부터 메이저 리그의 확장인 월드 리그를 여는 것을 골자로 하는 청사진이 공개되었다. 아직 그 규모와 구체적인 계획은 나오지 않았지만 이미 문명 온라인이 미국을 포함한 북 아메리카와 유럽에 많이 판매된 관계로 그 열기는 굉장했다. 게다가 메이저 리그의 상업적인 성공을 본 미국과 유럽의 거대 기업들이 서서히 프로 리그에 대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월드 리그의 앞날은 밝았다. 매니저 서재필은 진성과 현준, 진규와 이준, 현숙, 소희를 소회의실로 불러서 회의를 진행했다. 가을에 시작될 월드 리그에서는 기존의 체제로 리그에 참여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서재필은 필요한 것들을 같은 팀원들과 의논하기로 했다. “먼저, 프로팀에 많은 사람들이 더 들어올 것 같다. 현재 프로 선수는 3명에 나를 제외한 팀원이 3명인데 프로 선수는 두 배 이상으로 늘 것 같고 지원할 사람들도 꽤 늘어야 될 것 같다. 프로 선수에 대한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코디는 두 명으로 족하지만 이제까지 내가 해 왔던 재정부분과 스케쥴 관리, 홍보업무를 분산해서 전담할 사람들이 필요하다. 이준씨는 완전히 보디가드로 바뀌고 따로 운전기사가 생길 예정이다. 나는 팀 매니저로서의 조율 역할을 주로 할 것이고 나머지는 각 담당한 사람들이 일을 처리하게 될 테니까 그렇게 알고들 있어라.” 서재필이 명령조로 얘기했지만 아무도 이의를 걸지 않았다. 어차피 그런 부분들에 신경 쓸 사람은 서재필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몇 명 정도가 늘어나는 건가요? 언제 들어오나요?” 현준은 누가 힘든 것보다 팀에 새로 누가 들어오는지에 더 관심이 있었다. 현준의 말에 서재필이 대답했다. “음.. 아직 결정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4명은 더 늘어나겠지. 나 혼자 그런 일 다 한다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너희들은 모른다.” 서재필의 말에도 팀원들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서재필은 팀원들에게 앞으로의 프로팀의 운영과 관련해서 일의 분배라든가, 각자의 역할에 대해서 한참 동안 설명했다. 그런 뒤에 정작 필요한 이야기인 프로 선수에 대한 말을 꺼냈다. “앞으로 프로 리그는 크게 종목이 두 가지로 나뉘게 된다. 미리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개인전과 팀으로 하는 단체전이다. 개인전과 단체전에 대한 설명이야 하지 않아도 되겠지? 그래서 아무래도 다른 프로 게이머를 영입하거나 실력 있는 신인을 발굴해야 할 것 같다. 예상이지만 개인전에 2~3명 정도의 선수가 필요하고 단체전에는 3~5명의 게이머가 필요하다. 현재 3명밖에 없으니까 2~5명 가량의 선수가 더 필요하다는 얘기다. 내가 스카웃에 힘을 쓰겠지만 기존의 프로팀에서도 그만큼의 선수가 더 필요하기 때문에 아마도.. 스카웃으로 좋은 선수를 데려오기는 힘들 것 같다. 너희들..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겠냐?” 개인전과 단체전 모두를 참가하려면 적어도 4명 이상의 프로 게이머가 필요했다. 조금 빠듯하게 운영하면 개인전과 단체전 모두 참가하게 만들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국내에서나 가능했다. 실제 월드 리그로 올라가면 불가능했다. 같은 날은 아니라도 하루건너 다른 대륙에서 게임을 치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 상황이었지만 제대로 프로 선수들을 구하기가 힘들었다. 이미 베타 테스터로 알려진 고수들은 프로 게이머가 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검증을 하지 못하는 이상 막무가내로 영입한다는 말은 도박이었다. “둘 중에 하나만 참가하면 되지 않나요?” 진성이었다. “우승만을 위한다면 그럴 수도 있지. 프로 리그도 대회이고 경쟁이기 때문에 이기는 게 목적이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인기라고 볼 수 있다. 우승을 원하는 것도 그로 인해 생기는 막대한 광고효과와 이미지의 향상이라는 측면에 속해 있다. 그러니 한 쪽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렇군요.” “개인전이야 한 명만 출전해도 되지만 단체전은 기본적으로 3명 이상인 데다가 5명은 있어야지 제대로 운영을 할 수 있을 것 같거든. 그러니 너희 세 명 말고도 세 명 정도는 더 필요하다는 얘기지. 나도 알아보기는 했지만 다른 곳도 비슷한 상황이다. 프로 게이머를 목표로 하는 유저들은 많은 편인데 그 중에 옥석을 제대로 가릴 수가 없는 형편이니.”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아, 재필이 형, 아마추어 문명 온라인 대회를 여는 것은 어떨까요?” 조용히 있던 진규가 입을 열었다. “아마추어?” “네. 그래서 거기에서 우승하는 사람을 영입하는 거죠.” “하지만 그 실력을 믿을 수 있을까?” “그래도 그나마 가장 객관적인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일 테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일단 한번 생각해 보자. 대회라......” 아마추어 대회 뿐 아니라 진성과 현준 그리고 성규가 문명 온라인 아마추어 버전으로 인터넷을 통해 유명다고 알려진 아마추어들과 이름을 알리지 않은 채 게임을 해서 그 중에 나은 사람을 영입하자는 의견도 나왔다. 또 진성과 현준의 팬 사이트에서 유명한 사람들을 접촉해 보자는 말도 나왔다. “그런데 누가 개인전에 참가할 건가요?” 현준이가 능글맞게 웃으며 서재필에게 물었다. 현준이는 당연히 개인전에는 진성이가 출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팀 리그에서도 충분히 진성이의 실력은 발군이겠지만 그래도 개인 능력이 우선인 개인전에 출전하면 그 우승은 따 논 당상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진성이 빠지면 팀 리그에서 현준 자신의 위치가 급상승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현준이 네 의견은?” “하하... 저야 당연히 진성이 참가해야 된다고 생각하죠. 많이 참석할 필요도 없이 진성이 혼자만 개인전에 나가도 충분히 해 볼만 하지 않습니까? 진성이의 실력이라면 개인전에서 우승도 어렵지 않다고 보는데요.” 자신의 속마음을 내비치지 않고 진성의 실력을 운운하면서 당연히 진성이 나가야 된다고 현준은 주장했다. “그럼, 단체전은 어떻게 하지?” 고개를 끄덕인 서재필은 단체전에 대한 말을 꺼내면서 힐끗 현준을 쳐다보았다. 서재필의 예상대로 현준은 오버하면서 대답했다. 현준은 전혀 서재필의 표정을 살피지 않았다. “하하... 제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진성이가 개인전으로 옮기면 네가 이 팀 리그에서 빛을 보겠다? 스포트 라이트를 한번 받아보겠다?” “.... 아.. 아니... 재필 형도 참.. 진성이 없으니 나라도 열심히 해야 겠다 이런 말이지요. 하하하..” “그래.. 그래..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떻겠냐? 잘하면 돼지. 일단 진성이 개인전에 참가하는 걸로 해 두자. 진성과 같이 개인전에 참가할 게이머 한 명, 그리고 현준, 진규와 같이 단체전에 참가할 세 명의 게이머. 합해서 네 명의 게이머를 영입해야겠다. 아마추어 대회는 조금 더 생각해보자. 너희들은 팬 사이트든 어디든 시간이 날 때 돌아다니면서 괜찮은 사람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라. 알겠지?” “네.... 하하하..” 현준은 진성이 개인전으로 빠진다는 얘기에 그저 기분이 좋았다. 이제야 만년 2인자의 설움을 완전히 벗어버릴 때인 것이다. 아주 친한 친구지만 항상 지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성은 그런 현준의 모습을 보면서 웃었다. 그 마음을 영 모르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피식 웃고 말았다. 프로팀의 미팅을 마치고 진성은 로플팀으로 이동했다. 프로 게이머로서 평소에 하는 연습을 제외하고는 시간이 남기 때문에 지금의 진성은 게이머라기 보다는 개발자였다. 밀리터리 아트 싱글 버전의 작업은 유지, 보수를 제외하면 종료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 버전도 어느 정도 기술적인 어려움이 없고 시간이 여러 산적한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기 때문에 당장에는 로플에 집중할 수 있었다. 로플(Reality of Life)은 그야말로 현실적인 가상현실을 표방했다. 문명 온라인 프로 버전에 도입된 가상현실이 제한된 가상현실이라면, 밀리터리 아트 싱글버전에 적용된 가상현실이 현실성을 떨어뜨렸다면 로플은 현실성을 추구하는 가상현실을 구현할 것이다. 로플팀에서 이미 개발되어 판매된 밀리터리 아트 싱글버전 뿐 아니라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은 모두 로플을 위한 과도기였다. 그 정도로 로플팀에게 있어서 로플은 모든 일의 종착점이었다. 이미 로플을 위한 초기 접속기 버전인 PVR-4가 개발된 상태였다. PVR-3가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을 위한 것이라면 PVR-4는 로플을 위한 접속기였다. 이제까지 개발된 밀리터리 아트와 가장 다른 차이점은 가상현실 구현 방식이었다. 이제까지는 가상현실 자체가 접속기에 포함된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혼자서도 가상현실에 접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온라인 버전이라고 해도 그 사이의 데이터가 전송되어 서로의 가상현실에서 상대를 생성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그리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로플은 거대한 가상현실 시스템을 한 곳에 만들면 각 게이머들이 그 거대한 가상현실에 접속하는 방식이었다. 로플의 접속기에는 가상현실에 접속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만 존재했다. 모든 것은 한곳에 놓인 가상현실 서버에서 구현되었다. 각 게이머들은 로플의 가상현실에 접속하지 못하면 게임 자체를 할 수 없었다. “진성이 네가 가장 늦었구나.” “죄송합니다. 프로팀 회의가 조금 길어져서..” “그래. 왔다 갔다 쉽지 않지. 자, 앉아라.” 진성이 로플팀의 회의실에 도착해 보니 한눈에 자신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들어온 것을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진팀장의 말에 진성 자신이 가장 늦었음을 알 수 있었다. 진팀장의 말을 들으며 진성은 자신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오늘은 크게 두 가지에 대해서 의논할 예정이다. 하나는 아직 시간이 이르지만 기획 단계에서 확인할 수 없는 것들을 체크하기 위한 인트로(Intro) 테스트를 시작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로플의 게임 시스템에 대한 논의다. 먼저 인트로 테스트에 대해서 얘기해 보도록 하지. 조팀장?” “네, 팀장님. 진성아.. 여기 좀..” 조팀장의 부름에 진성은 앞으로 가서 프로젝터를 준비하고 조명을 어둡게 만들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조팀장은 슬쩍 윙크를 했다. “자, 화면을 봐 주시기 바랍니다. 인트로 테스트는 외부에 공개되지 않는 일종의 실험과 같습니다. 아, 인트로 테스트는.... 흠흠.. 제가 만든 말입니다. 인트로 테스트는 문제점을 예상하고 문제점을 발견해서 해결하려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인트로 테스트를 계획한 이유는 이런 로플이라는 종류의 게임이 처음 개발되는 것인데다가 기획 단계에서 결정되지 못한 의식주에 대한 처리 방법, 가상현실에서의 죽음에 대한 정의, 기후의 도입 등을 시험하기 위해서입니다. 현재 그런 문제들에 대해서 몇 가지 해결 방안이 있지만 직접 인트로 테스트를 통해서 하나하나 좀 더 나은 방법을 찾을 생각입니다.” “조팀장의 말에도 잘 나왔지만 인트로 테스트는 문제 해결의 한 방법이라고 보면 된다. 완성이 되었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알파 테스트와는 차이가 있음을 알아두도록.” “테스터는 어떻게 합니까?” 테스트 팀장인 변태수의 말이었다. 자신과 관련된 일이기 때문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로서는 외부에서 테스터를 영입할 수밖에 없다. 어느 정도 일정한 기간 동안 합숙을 통해 한 장소에서 계속 머물면서 테스트를 해야 할 것 같다.” “기간은 어느 정도 생각하십니까?” “짧으면 1개월 길면..... 몇 년도 걸릴 수 있겠지.” “너무 긴 것 아닌가요?” “그 기간 동안 항상 테스트를 하는 게 아니라 문제가 생기고 테스트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그 때 테스트를 하는 거지.” “테스터는 몇 명 정도로 생각하십니까?” “일단은 20~30명 정도.” “그런데 지금 그런 대규모 테스트가 가능한가요?” “현재 50명 정도가 한꺼번에 접속할 수 있는 공간은 만들어져 있다네. 기술적으로 조금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30명 정도는 무리 없이 로플에 접속할 수 있지. 그 공간이 어떤 공간일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지만 그것은 테스트를 통해서 정해지겠지.” “그런 테스트를 하려면 꽤 넓은 곳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서울 근교에 부지는 이미 매입된 상태네. 처음부터 테스터들의 숙박을 고려했기 때문에 그 부지 내에 숙박시설은 완비되었고 실험 장소만 세팅되면 곧바로 시작할 수 있지.” “테스터의 위험성은 없겠습니까?” 계속되는 변태수의 질문에 진팀장은 조팀장을 쳐다보았다. 조팀장은 곧바로 대답을 했다. “지금으로서는 위험한 징후는 전혀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승인이 난 밀리터리 아트 싱글버전과 다른 것이 거의 없으니까요. 조금 더 현실성이 있지만 그런 것은 테스터를 뽑을 때 고려하면 문제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진팀장이 말뚝을 박았다. “그래서.. 우리 로플팀은 당분간 그 곳으로 짐 싸서 이사를 해야 할 것 같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조만간 그 곳이 완성되면 여기 있는 것 모두 다 가지고 가 거기서 개발을 해야겠지. 공기도 여기보다는 훨씬 좋으니까. 질문?” “..............” 미리 다 결정해 놓고 회의를 통해 논의한다는 진팀장의 억지에 나머지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평소 진팀장이 말로는 막 해도 이렇게 일을 먼저 저지르는 스타일은 아님을 다들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진팀장이 모두에게 이렇게 한다고 선언해 버리면 그대로 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꼼짝없이 서울 근교로 출근해야 할 판이었다. “자, 테스트 계획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해 두고.. 로플의 게임 시스템에 대해서 오늘 한번 얘기해 보자고.” 완전히 기정사실로 만들어 버린 진팀장은 기분 좋게 웃으며 다음 얘기를 꺼냈다. 이번에는 곽팀장도 제대로 그 진행사항을 파악 못한 듯 멍하게 있었다. “아.. 예.. 로플의 게임 시스템 중에서도 성장 시스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다들 좋은 생각이 있으면 의견을 내어 주십시오. 현재 고려하고 있는 성장 시스템은 수치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 당연히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시스템입니다. 평소 하는 일에 따라서 그에 관한 능력이 향상되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 유저가 스스로 느끼기 힘들어서 어쩌면 동기 유발에 실패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수치로는 드러나지 않아도 자신의 능력이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는 확인할 수 있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곽팀장이 질문했다. “로플에서는 보통 게임과 달리 어떤 메시지 창이나 상태를 알려주는 창은 없을 예정입니다.” “그러면 유저 개개인에게 자신의 상태를 알 수 있는 일종의 아이템을 처음부터 부여하면 되지 않을까요? 심장 박동 측정기처럼 자신의 상태를 스스로 알 수 있게 하는 아이템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 “그도 그렇군요.” “예전에 나왔던 어떤 게임처럼 유저 자신은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전혀 알 수가 없는 상태이지만 일정한 경험에 대한 확인과 그 보상으로 능력치 향상을 시켜주는 장소를 게임 내에 배치하는 것은 어떨까요? 게임에 열중하다 스스로 자신이 생기면 그런 곳으로 가서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는 것이지요.” 나쁜 의견은 아니었다. 진팀장은 이런 저런 생각을 했다. “음....” “저는 조금 다릅니다. 현실적인 가상현실에서 능력치 향상은 당연히 유저 자신이 어렴풋이 느낄 정도면 충분하다고 봅니다. 그런 것을 누가 확인시켜주지 않아도 게임 속의 전투나 대결을 통해서 스스로 알 수 있게 만들면 되지 않을까요?” 아이디어 뱅크인 변태수가 입을 열었다. 밀리터리 아트의 개발에도 좋은 아이디어를 냈던 변태수가 입을 열자 진팀장은 조금 더 주의를 기울였다. “그렇게 되면 게임에 대한 흥미가 조금 떨어지지 않을까?” “저는 오히려 그런 무작정 노가다를 통한 레벨업이나 능력치 향상이 게임에 대한 지속적인 흥미를 떨어뜨린다고 생각합니다. 로플에 그런 노가다로 인한 보상 심리보다 훨씬 더 신나는 요소들로 채우면 그런 우려는 사라질 겁니다.” “신나는 요소?” “어차피 현실과 똑같은 가상현실을 원하는 유저는 거의 없을 겁니다. 현실성이 있지만 현실과 완전히 같아서는 게임으로서의 매력이 없지요. 저는 그 대신 유저들이 현실에서 거의, 절대로 경험해 보지 못하는 것들을 제공함으로써 로플의 매력을 대신했으면 합니다.” “음.... 예를 들면?” 눈빛을 반짝이면서 진팀장이 물었다. “사냥만 하더라도 보통 사람들은 쉽지 않죠. 아, 여기서 말하는 사냥은 절대 사냥총과 사냥개로 하는 레포츠로서의 사냥이 아닙니다. 실제로 먹기 위해, 혹은 시장에서 팔기 위해 사냥을 하는 것이죠. 활을 이용해서 실제와 같은 숲속에서 사냥을 하는 경험은 현대인에게 아주 독특한 경험이 될 겁니다. 활과 화살을 이용해서 목표로 한 것을 맞출 때의 그 기분, 가상현실이지만 자신이 죽인 동물을 볼 때의 죽음에 대한 직면은 능력치 향상보다 훨씬 매력적이지 않을까요?” “그래. 그렇겠군.” “유저가 절대로 체험하지 못한 것들로 채운다면 절대 로플에 경험치나 레벨, 능력치는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고 확신합니다.” “다른 사람들 생각은 어떤가?” “이야기를 듣고 보니 뗏목을 만들어 바다로 나가는 그런 짜릿하면서도 무모한 시도를 로플에서는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하하.. 아주 좋은 생각인데요.” “좋습니다.” 다들 좋은 생각이라고 말하는 가운데 가만히 있던 음악팀장인 주팀장이 말문을 열었다. “아주 좋은 생각이기는 한데.. 그렇게 현실을 중요시 한다면, 만약 그렇다면 현대인이 그런 환경에서 제대로 적응을 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든다면 유저가 도저히 활과 화살로 자신이 목표한 것을 맞출 수가 없다면, 그리고 유저가 산속에서 굶어서 죽는다면, 그런 경우가 적지 않다면 어쩌죠? 또 유저가 자신만의 세계를 로플에서 표현한다면 로플은 너무 어지럽지 않을까요? 전체적인 질서나 방향은 있어야 하나의 세계로서 장수하지 않을까요? 게다가 그런 것들도 생활이 되어 버린다면, 반복이 된다면 매력이 줄지 않을까요?” 확실히 주팀장의 말은 날카로웠다. 현대인에게 새로운 경험이라면 당연히 그와 관련된 경험이 굉장히 어렵고 힘든 것은 당연할 것이다. 또한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서 산다면 로플은 이도저도 아닐 수도 있었다. 게다가 아무리 좋은 것도 질리기 마련이다. “주팀장의 말도 아주 일리가 있지만, 그런 것은 시간이 해결해 주지 않을까? 예로 든 활과 화살은 당연히 밀리터리 아트의 무술처럼 일정 부분은 배울 수 있도록 할 테니까 시간만 지난다면 어렵지 않게 해결될 것이고 유저들이 자신만의 세계에 갇힌다는 것도 어차피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유저 수가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자신도 잘 맞는 사람들끼리 모이게 마련이지. 사람들이 모이면 반복적인 것으로 질리지는 않겠지. 변태수, 아주 좋은 생각인데... 조팀장, 어떤가?” “좋은 생각입니다. 이제까지 논의했던 것을 아주 시원스럽게 정리한 것 같습니다.” “그래. 일단 태수의 아이디어로 밀어보자고. 테스트에 태수의 아이디어를 시험해 볼 테니까 그렇게 알고 준비들 해.” “예..” “미팅은 이것으로 끝내고... 진성이는 잠깐 남아라.” 막 일어서 나가려던 진성은 진팀장의 말에 멈춰서 있다가 다시 앉았다. 다른 사람들은 다 나가고 진팀장, 조팀장, 곽팀장 그리고 진성만 남았다. “진성아, 네게 두 가지 할 말이 있다. 아니, 의논해야 할 일이 있다.” “네? 무슨 일인데요?” “음... 둘 다 네가 도와주어야 할 일이지. 하나는 네가 조팀장을 도와서 이제까지 가상현실 내에 있었던 진성이 너 외에는 접근하기 힘들었던 부분을 완전히 분석해서 조팀장과 그 팀원들이 이해하도록 만들던지 아니면 그 접근불가 지역을 도려내어서 따로 분석 가능한 모듈로 대체해야 할 것 같다. 별로 문제될 것 같지도 않고 문제도 없었지만 로플 테스트 전에 그 부분을 명확하게 해야 할 것 같다.” 진팀장은 현재로는 문제가 없지만 앞으로도 문제가 없으리라고 확신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당연하고 일리가 있는 말에 진성은 바로 대답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조팀장이 너와 같이 그 일을 할 것 같으니까. 당분간은 그 일에 전념하면 될 것 같다.” “네, 알겠습니다. 다른 하나는?” “음.. 조금 전에 말했던 그 테스트에 너도 참가했으면 하는데....” “네?” “물론 문명 온라인 프로 리그에는 문제가 없도록 할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일주일에 하루, 2~4시간 정도만 시간을 내면 되니까. 어떠냐?” “그 정도라면 가능은 하지만 제가 꼭 참가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네가 운영자로 참가했으면 좋겠다. 가상현실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게임도 많이 접한 네가 그런 일을 하면 아주 제격일 것 같다. 물론 조팀장도 운영자로 테스트에 참가할 테니 그렇게 부담은 가지지 않아도 된다. 아, 그리고 이제까지 가상현실에 가장 높은 적응력을 보인 네가 약간이지만 달라지는 가상현실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궁금하니까.” “네... 알겠습니다.” “그래..” 진성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아직은 무더운 8월의 어느 날, 10월 첫째 월요일에 월드 리그가 한국, 일본, 중국 그리고 미국, 유럽에서 동시에 시작된다는 공식적인 발표가 있었다. 그 말은 이미 메이저 리그가 종료되기 전에 미국, 유럽의 나라들과 프로 리그에 대한 얘기가 끝났고 준비도 어느 정도 완료되었다는 것과 같았다. 한, 두 달의 준비기간으로 기존의 한국과 일본, 중국을 따라잡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전에 미리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말이 신빙성이 높았다. 아직 두 달 정도의 시간이 남았지만 규모가 커진 리그로 인해 각 프로팀들은 서서히 긴장을 높이기 시작했다. 월드 리그에 대한 발표와 같이 프로 리그에 개인전과 단체전이 포함된다는 사실도 언급되었다. 그 동안의 프로 리그와 거의 같은 방식인 개인전과 달리 여러 선수가 동시에 한 게임을 통해 역량을 발휘하는 단체전은 새로운 게임 방법으로 관심을 불러 모았다. 특히 패치로 인해서 해전이 가능하게 되고 중세 시대까지 그 시기가 늘어나자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상황으로 인해 호기심은 더욱 더 늘어났다. 그와 동시에 각 프로팀들 간의 스카웃 전쟁이 일어났다. 상대팀의 주축 선수를 스카웃 할 수만 있다면 상대팀을 무너뜨리는 동시에 전력강화를 꾀할 수 있기에 전문 스카우터들이 등장할 정도였다. 미처 대비하지 못한 프로팀들은 전력 누수를 경험했지만 많은 프로팀들이 미리 재계약을 마무리 지었기 때문에 그나마 전쟁에서 영향을 적게 받았다. 하지만 필사적인 스카웃으로 인해 법정 공방까지 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문명 온라인 최고수로 자타가 공인하는 게이머 스키피오 강진성의 경우에는 그 스카웃의 표적이 되었다. 계약금의 액수가 50억원을 넘고 연봉도 20억에 육박할 정도로 우후죽순처럼 몸값이 뛰어올랐지만 진성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게이머 한신 진현준의 경우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스카우터들은 기존의 소속팀과의 계약 여부와 관계없이 어떻게든 선을 대려고 노력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커다란 빅딜이 여러 건 성사되었다. 가장 크고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건은 바로 게이머 사신 김한석의 자소 소프트 프로팀의 입단이었다. 계약금과 연봉 모두 철저히 비밀에 붙여졌지만 결코 게이머 한신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 지배적이었다. 또한 아직 계약이 끝나지 않은 상태라서 자소 소프트로서는 상당한 액수를 이적료로 쌍룡은행에 지급했다. 하지만 삼선전자와 LQ전자의 엄청난 제의를 뿌리치고 자소 소프트로 입단한 김한석의 결정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계약금 30억에 연봉 10억이 넘는 액수와 최고 대우 조건을 뿌리친 김한석의 결정은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다. 일각에서는 월드 리그 우승에 대한 생각에서 자소 소프트를 선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김한석은 자소 소프트의 문명 온라인 프로팀 사무실로 들어왔다. 입단 후 처음으로 자소 소프트로 온 김한석은 어색했다. 미리 김한석이 올 줄 알고 있었던 현준은 한석에게로 다가가 어깨를 치며 환영했다. “이야.. 김한석! 잘 왔다. 정말로 올 줄은 몰랐다.” “뭐?....... 니가 오라고 했잖아.” 한석은 쥬신 대학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하하하.. 그랬나?” 현준과 한석은 휴학 신청하러 간 그 날 이후로 가끔 연락하는 정도로 발전했다. 서로 비슷한 고민을 가졌다는 사실은 두 사람을 친구로 묶어 주었다. “한석아, 잘 왔다. 아, 여기는 성진규, 알지?” “강진성, 한 번도 이기지 못했는데... 당분간 공식적으로 이기기는 힘들겠네. 아, 이 친구? 리틀 스키피오 맞지?” “안녕하세요. 성진규라고 합니다.” “아.. 김한석입니다.” 한석으로서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막 말을 놓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자신은 이 곳, 자소 소프트로 처음 온 사람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말 놓으세요. 현준이 형, 진성이 형 친구라고 들었는데...” “그럴까? 아무튼 반가워. 분위기나 그런 것을 잘 모르니까 진규 네가 잘 좀 도와줘.” “네! 당연하지요.” 진규는 한석의 말에 당연하다고 외치며 생각했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한석의 성격이 현준과 진성의 중간 정도일 것 같았다. 너무 활기차지도 너무 조용하지도 않은 스타일. 게다가 자신에게 도와달라는 말까지 하자 주먹까지 불끈 쥐며 당연하다고 외친 것이다. “김한석, 환영한다. 나는 프로팀의 팀장 겸 매니저인 서재필이다. 여기 이 친구가 보디가드인 이준, 저 왈가닥이 코디인 최현숙, 저 수줍어하는 아가씨가 한소희.” “제가 왜 왈가닥이에요?” 왈가닥 현숙의 당찬 물음에 서재필은 전혀 흔들림 없이 말했다. “거울이나 봐! 그리고 네 명이 더 있을 예정인데 아직은 뽑지 않은 상태고. 새로 왔는데 어때? 기분이.” “음... 잘 모르겠지만 재미있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재미있는 곳? 하하하.. 좋아. 자, 다들 오늘 밤에는 우리 한석이 들어온 기념으로 회식을 할 예정이니까 중간에 다른 곳으로 새는 일이 없도록. 저녁 7시 30분에 모두 로비로 모인다. 이상.” 게이머 사신 김한석은 자소 소프트 프로팀에 입단함으로써 안 그래도 최강이라 일컬어지는 스키피오-한신의 쌍두마차에서 스키피오-한신-사신의 삼두마차로서의 최강 체제를 완성하게 되었다. 하지만 개인전과 단체전이 분리되기 때문에 비교적 다른 프로팀들은 걱정을 덜 수 있었다. “자, 빨리 가자. 아직도 덜 챙겼어?” “아.. 조금만 기다려. 이제 옷만 입으면 돼. 잠깐만....” “기지배. 그리 난리를 치더니만 아직도 준비 안 했어?”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니까.” “유나야, 빨리 준비해!” 최유나는 옷장에서 하얀색 원피스를 꺼내어 거울 앞에 서서 맞춰 보다가 맘에 들지 않은 듯 침대로 옷을 던지고는 옷장에서 다시 붉은색 원피스를 꺼냈다. 하지만 역시 맘에 들지 않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뭘 입고 가지....” “휴우... 이리 와서 서 봐.” 친구인 장현정은 옷장에 있는 옷을 다 꺼내어 침대에 올렸다. 그리고 옷을 하나씩 유나에게 맞춰 보고 괜찮다 싶으면 앞에 두고 아니다 싶으면 침대 반대쪽으로 던졌다. 한참을 한 뒤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청치마에 하늘색 나시와 그 위에 걸쳐 입는 가벼운 셔츠로 마무리해서 유나에게 보여주었다. “어때? 괜찮지?” “... 응. 괜찮기는 한데... 조금 가벼워 보이지 않을까?” “휴우... 네 나이가 얼마인지 알아? 우리 나이에는 다 이렇게 입고 다녀! 그리고 그 오빠도 이런 스타일을 좋아할 거야.” “.... 그.. 럴까?” “시간 없으니까 빨리 입어! 밖에 나가서 시동걸어 놓을 테니까 빨리 나와. 알겠지?” “응..” 장현정은 친구 유나의 모습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게임할 때는 다른 사람같이 냉정하게 변하더니만 평소의 생활은 그야말로 백치, 그 자체였다. 어떻게 보면 청순미라고도 볼 수 있지만 장현정 자신이 보기에는 멍청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친구가 어떻게 쌍룡은행의 문명 온라인 프로팀에 들어가서 프로 게이머로 활동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은 장현정이었지만 늦은 밤 갑자기 자신을 찾아와서는 밤새도록 우는 친구의 모습에 너무도 놀랐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쌍룡은행의 프로팀에서 방출 당했고 그 순간 생각나는 사람이 장현정 자신이었다는 말이었다. 유나가 왜 방출됐는지는 장현정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던, 없던 유나는 자신의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나가 그렇게 서럽게 울던 이유가 방출 그 자체가 아니라 평소 좋아하고 있던 게이머 김한석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이라는 것을 알자 장현정은 기가 막혔다. 분명 안 된 일이고 같이 슬퍼해야했지만 도무지 그런 마음이 일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진정이 되어가는 유나를 보았지만 가끔 텔레비전에서 김한석에 대한 얘기나 기사가 나오면 눈물을 찔끔거려 자신의 마음을 뒤집어 놓아서 화를 내기도 했다. 그러던 중에 게이머 김한석이 자소 소프트로 이적했다는 소식과 자소 소프트에서 프로 게이머를 뽑기 위한 아마추어 문명 온라인 게임 대회를 개최한다는 말이 흘러나오자 유나는 흥분하기 시작했다. 쌍룡은행에서는 방출됐지만 어쩌면 자소 소프트에서는 자신을 받아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옆에서 보고 있던 장현정은 뭐라고 얘기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같은 팀일 때는 별로 김한석과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유나였지만 떨어져 보니 그리운 마음이 더욱 커졌다. 그 동안 프로 게이머 경력이 있던 유나에게 다른 프로팀과 뒤늦게 쌍룡은행에서 다시 프로 게이머를 제의했지만 모두 생각 없다고 거절하고 있던 유나는 자소 소프트의 소식을 듣자 말자 곧바로 대회 참가 신청을 했고 친구인 장현정을 닦달해서 같이 가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야! 빨리 와. 늦겠다. 빨리...” “응.. 지금.. 가...” 장현정은 유나가 이렇게 오랫동안 치장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항상 털털하게 입고 다니고 화장도 그리 신경 쓰지 않던 사람이 바로 최유나였다. 장현정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유나가 차에 타자 곧바로 출발했다. 자소 소프트까지 거리상으로는 멀다고 할 수 없었지만 교통이 그다지 편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다. “형, 잘 할 수 있을까?” “당연하지. 이런 좋은 기회를 그냥 보낼 수는 없지. 평소에 폐인 생활로 걱정시켜 드린 부모님께 보답을 해 드려야지. 암.. 그렇고 말고. 나야 별로 문명 온라인에 빠지지 않았지만 너는 정말 폐인이었다고 밖에 할 수 없으니.. 좋은 결과가 있겠지. 아니, 무조건 좋은 결과가 있어야 해!” “그렇겠지?” “범현아, 힘내라. 열심히 실력만 제대로 발휘해라. 하하하..” “... 좋았어. 아자!! 이얍!!” 자소 소프트의 지하에 특별히 설치된 아마추어 게임 대회장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이 큰 소리로 주고받는 말에 옆에 있던 사람들이 쳐다보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전혀 개의치 않고는 씩씩하게 기합을 넣으면서 대회장으로 들어갔다. 자소 소프트의 지하 게임 센터는 아마추어 게임 대회를 위해서 무대를 개조해서 넓히고 그 곳에 40대 가량의 컴퓨터를 설치해 놓았다. 이미 대회 준비는 마친 상태였고 참가하려는 사람이나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센터가 붐비기 시작했다. “와... 저기 좀 봐.. 이야.. 끝내준다.” “어디? 아..... 탤런트인가?” “아, 정효진이다! 정효진. 맞지?” “어디? 맞다. 정효진...”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오는 미인은 탤런트 정효진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정효진에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미인이 서 있었다. 곧 게임이 시작한다는 사실에 긴장했던 사람들은 정효진의 등장에 그런 긴장도 잊고 옆 사람들에게 정효진이 왔다는 것을 알렸다. 순식간에 대회장은 술렁였지만 곧 정효진이 안쪽의 대기실로 사라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 수그러들었다. “너, 정말 인기 좋다.” “나? 당연하지. 탤런트잖아. 그것도 톱 탤런트.. 호호..” “그래. 그래...” “혜연아, 그런데 꼭 프로 게이머가 되고 싶어? 너 정도면 다른 일도 할 수 있잖아. 지금까지처럼 모델일도 할 수 있고 원한다면 탤런트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정말 게임이 좋거든. 내가 왜 안경을 쓰게 된 줄 알아? 다 게임 때문이야. 게임. 그리고 집에서 나와서 혼자 오피스텔에서 사는 것도 다 이... 게임 때문이야.” 한혜연은 가족들이 다 같이 사는 집에서 혼자 나와 오피스텔에서 살고 있었다. 이유는 단 하나 집에서 혜연이 게임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정을 알고 있었던 정효진이었기에 반대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 가진 재능을 썩힌다는 것에 안타까웠다. 168센티미터의 키에 늘씬한 몸매, 얼굴도 웬만한 탤런트 저리 가라할 정도인데다가 모델 활동 경험도 있는 한혜연은 가을 하늘 같은 느낌을 주는 상큼한 여자였다. 이야기해 보지 않으면 조금 도도해 보이지만 막상 가까워지고 생활해 보면 뒤끝이 없고 같이 있기만 해도 마치 풀내음 향수를 뿌린 듯 한 사람이었다. 여자로서가 아니라 사람으로서도 매력이 있는 사람이었기에 정효진은 더욱 아쉬워했다. “아... 그런데.. 너 정말 프로 게이머가 되면... 저....” “정효진, 알았다. 절대 현준씨에게는 꼬리치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어떻게 친구 걱정은 하지 않고..” 정효진은 몇 번밖에 만나보지 못했지만 현준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다고 당장에 만날 수도 없는 현실이었지만 그래도 친구인 혜연과 이상한 관계가 되는 것은 너무 싫었다. 평소 정효진의 마음을 짐작했던 혜연은 터프하게 절대 그런 일 없을 거라고 장담했다. 탤런트 정효진과는 반대로 대회장으로 어떤 사람이 들어오자 그 사람을 본 사람들은 옆으로 엉거주춤 물러섰다. 더운 날임에도 불구하고 가죽옷을 입고 들어온 사람이었는데 머리는 스포츠 스타일이었다. 키는 얼핏 봐서 185 정도는 되어 보였고 몸도 아주 균형이 잡혀 보기에 좋았다. 하지만 얼굴에 사선으로 난 칼자국으로 보이는 상처와 왼쪽 팔의 문신과 오른쪽 팔의 상처는 처음 본 사람들을 주춤거리게 만들었다. “여긴가?” 그 모습에 걸 맞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성큼성큼 대회장 앞으로 갔다. 곧 문명 온라인 아마추어 대회가 시작되었다. 주최하는 곳이 자소 소프트이고 그 목적이 이벤트 겸 프로 게이머의 영입이라고 밝혔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참가했다. 예선전부터 시작해서 많은 게임들이 치러졌다. 어느 정도의 예선은 미리 시작되었기에 오후에는 32강의 본선이 치러질 예정이었다. 오전에 선글라스를 끼고는 몰래 대회장에 갔다 온 현준이 단체전 게임 연습을 막 마친 한석에게로 다가가서 말했다. “한석아, 아까 보니까 그 선수가 왔던데... 못 봤어?” 뜬금없는 현준의 말에 한석은 땀을 닦으며 되물었다. “누구?” “아, 그 있잖아. 쌍룡은행에 있었던 그 홍일점. 여자 프로 게이머...” “최유나? 그 얘가 왔어? 어디에?” 한석은 현준의 말에 깜짝 놀라며 물었다. 갑자기 프로팀에서 사라져서 궁금했고 연락도 안 되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었기 때문이었다. “뭘 그리 놀라? 얼핏 봤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 게이머인 것 같던데.. 그런데 아무래도 아마추어 게임 대회에 참가하는 모양이더라. 그 정도 실력에다 여성 게이머라면 어디 다른 프로팀에 소속되어 있을 텐데... 정찰하러 온 걸까?” “야! 여기가 무슨 문명 온라인인 줄 알아? 정찰이라니... 그런데 왜 왔지? 한번 알아봐야겠다.” 현준의 말도 안 되는 소리에 핀잔을 주고는 한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로 왔는지 확인은 해봐야할 것 같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반가움이 앞섰다. “어... 최유나!!” “저... 누구... 아, 한석이 오빠?” 최유나는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치면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뒤를 돌아봤다. 선글라스를 낀, 세련된 헤어스타일의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누굴까 생각하다가 자세히 보니 자신이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김한석이었다. “그래.. 나 한석이다. 여기는 조금 그러니까 나를 따라와라.” 한석은 최유나에게 가볍게 윙크하면서 말했다. 한석이 먼저 돌아서서 걸어가자 최유나는 옆에 있던 장현정에게 슬쩍 웃고는 한석을 따라갔다. 한석과 유나는 뒤로 돌아서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고 적힌 문을 통해 들어갔다. 휴게실과 비슷한 곳으로 온 한석은 자판기에서 찬 음료수를 뽑아 유나에게 주면서 말했다. “어떻게 지냈냐? 갑자기 보이지도 않고.. 어떻게 연락할 방법도 없고.. 한번 보고 싶었는데... 아무튼 오늘 이렇게 보게 되어 너무 반갑다.” “네? 네... 저두요...” 한석의 말에 당황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던 유나는 냉큼 대답했다. “그런데.. 여기는 왜?” “저.. 사실은 그 때 쌍룡은행에서 방출 당했거든요....” “뭐? 방출...? 음... 그래...” “그래서 가만히 집에만 있다가 오빠가 자소 소프트로 온 것을 보고는 나도 프로 게이머를 할 수 있을까 해서.... 그래서...” “그래? 그런데 너 정도 실력이라면 다른 곳에서도 오라고 했을 것 같은데..” “그 때는 별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어요. 또 방출 당할까봐요.” “그래.. 하긴.. 그렇겠지. 그런데 너 정말 다시 프로 게이머 하고 싶어?” “네...” “내가 힘 써 줄게. 아니, 너 정도면 자소 소프트에서도 아주 좋아할 거야. 하하하.. 재필이 형 좀 뜯어먹어야겠다. 크크.. 너, 오늘 저녁 시간 비워둬라. 알겠지? OK?” “네? 아.. 네...” 한석은 매니저인 서재필을 끌어들일 생각을 했다. 괜찮은 프로 게이머를 영입하려는 서재필에게 최유나를 소개하면 좋아할 거라고 확신했다. 분명히 저녁을 거하게 살 것이라 생각했다. 한석은 유나의 말을 듣고 그 동안의 사정을 대강 짐작했다. 다른 프로팀으로 가지 않은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자소 소프트 프로팀으로 데려올 생각이었다. 처음 자소 소프트의 프로팀으로 와서 느낀 것은 프로팀이 아주 가족적인 분위기라는 것이었다. 너무 놀면 태클이 들어오지만 대부분은 선수의 자율에 맡기는 훈련 일정과 팀 매니저인 서재필이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었다. 한석은 한동안 잘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곧 가족의 한 사람으로 스스로 자리를 잡았다. 유나에게도 이런 분위기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 그 게이머? 아, 나도 기억난다. 그런데 진짜로 그 게이머가 왔단 말이야?” “그렇다니까요. 저와 친했었거든요.” “그래? 이야.. 아주 잘됐다.” “그래서.. 오늘 저녁을 같이 했으면 좋겠는데.....” “당연하지. 그 최유나라는 게이머와 오늘 아마추어 대회 결과를 봐서 나머지 세 명의 게이머를 결정해서 다 같이 저녁식사를 하자고. 아, 이준씨와 두 코디에게도 전화해서 시간맞춰 오라고 해. 오늘 프로팀 단합대회 겸 회식을 하자. 한석아, 진규에게 잘 준비하라고 말해라. 알겠지?” “네? 아... 네!” 순식간에 간단한 저녁식사에서 팀 회식으로 바뀌었다. “흠흠.. 오늘은 새로 자소 소프트의 프로팀에 들어올 예정인 예비 프로 게이머들을 환영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정식 계약은 아직 맺지 않았지만 오늘 이 시간부로 여러분들은 같은 한 팀입니다. 일단 먼저 건배부터 하고 각자 소개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자, 게이머를 위하여!” “위하여!” 회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갈비집에 매니저 서재필을 비롯해서 새로 결정이 된 4명의 게이머와 진성, 현준, 진규 그리고 이준, 현숙, 소희까지 다 모여서 건배를 했다. 건배 후에 일행 중 가장 연장자인 서재필이 일어나 자기소개를 했다. “나부터 소개를 하도록 하지요. 저는 자소 소프트 프로팀의 팀장이자 매니저인 서재필이라고 합니다. 나이는 30이 넘은 후로 세고 있지 않습니다. 아, 물론 싱글입니다. 하하하.. 여러분들에게 어려운 일이 생긴다면 저와 상의하게 될 겁니다.” “저는... 보디가드인 이준이라고 합니다. 그냥 친한 형, 오빠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최현숙이라고 해요. 여러분들의 얼굴을 좀 더 예쁘게 해 줄 메이크업 아티스트랍니다. 호호호호..” “...... 한.. 소희라고.. 해요.. 저는 스타일리스트입니다.” 그 뒤를 이어 진성이 바통을 이어 받았다. “스키피오로 알려진 강진성입니다. 반갑습니다.” “진현준입니다. 닉네임 한신입니다. 다 아시죠? 하하하.. 제 말을 잘 들으면 앞으로 생활이 편해질 겁니다. 하하하..” “김한석입니다. 사신이라고도 불립니다만 평소에는 그런 성격이 아니니 안심해도 됩니다.” “성진규입니다. 리틀 스키피오입니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오시니 너무 좋네요. 하하...” 시선은 이제 새로 들어온 네 명에게 몰렸다. “저부터 소개하겠습니다. 이름은 조범현이라고 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정말 문명 온라인의 매니아라고 자부하는데 가족들과 친구들은 저를 폐인이라고 부릅니다. 한동안 매니아 아니, 폐인 생활을 하다가 형의 권유로 프로 게이머가 되어 사람 구실을 할 생각으로 아마추어 대회에 참가했는데 이렇게 프로 게이머로 뽑아 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조범현의 진지한 말이었지만 그 내용은 범상치 않았다. 현준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현준을 시작으로 한석과 진규로 이어져서 다른 사람들까지 웃고 말았다. 게다가 진성과 소희까지 피식 웃었다. “크크.. 크큭.. 폐인이래... ” “크하하... 정말... 이건..” “사람 구실이라니.. 푸하하하.. 현준이 너를 능가한다...” “푸하하하하하.... 하하..” “하하하... 잠깐, 너무 웃지 말라고. 하하.. 자 다음...” 서재필 자신도 웃으면서 정리를 하고 나서야 다음에 앉아 있던 최유나가 입을 열 수 있었다. “저는... 지난 국내 리그에 참여했던 최유나라고 합니다. 쌍룡은행에서 방출되었다가... 이제 다시 게임을 하려고 해서 왔거든요. 한석이 오빠가 잘 소개해 줘서 이렇게 잘 된 것 같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 드려요.” 약간 어색한 듯한 유나의 소개였지만 말하는 폼이 귀여워서 사람들은 박수를 치고 난리가 났다. 유나는 얼굴을 푹 숙이고 말았다. “곽현호입니다. 잘 해 봅시다.” 그 모습도 모습이지만 칼로 싹둑 자르는 듯한 목소리에 순식간에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가죽옷에 문신 그리고 화려하게까지 느껴지는 상처들. 못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그 분위기는 가릴 수 없었다. “한혜연이라고 해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하지만 눈에 확 띌만한 미인인 한혜연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바로 자기소개를 하자 분위기는 다시 눈 녹듯 부드러워졌다. 간단한 소개를 시작으로 식사를 하면서 가벼운 대화가 시작되었다. “으... 머리가 다 아프다. 오랜만에 술을 먹어서 그런가?” “현준아, 너 어제 얼마나 많이 마신 줄 알아? 그 정도면 머리만 아픈 게 아니라 온몸이 다 아파야 할 정도다. 좀 자제하면서 마셔라.” “우욱....” 아침에 문명 온라인 프로팀의 사무실로 출근한 현준은 같이 온 진성에게 머리가 아프다고 말하다가 입을 막고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런 모습에 진성은 어이가 없었다. 어제 그만 마시라고 했을 때 아무 문제가 없다고 큰소리치던 현준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안녕하세요.” “아, 유나구나. 어제 잘 들어갔니?” “네, 한석이 오빠가 데려다 줬거든요.” “그래? ............ 한석이는 아직 안 왔네.” 진성은 약간 어색함을 느꼈다. 이렇게 사무실에 자신과 유나만 있으니 어색했다. 괜히 한석 얘기를 한 진성이었다. 하나와 헤어진 이후에 코디인 현숙과 소희를 제외하면 만나본 여자가 거의 없는 진성이었기에 더 그랬다. 마침 한석이 사무실로 들어와서 부자연스러움은 사라졌다. “한석이 너는 괜찮냐?” “응? 아.. 속 쓰려 죽겠다. 아, 유나구나. 속은 괜찮아?” “네, 괜찮아요.” 아무리 둔감한 진성이라도 유나와 한석을 보면서 잘 어울리는 커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게다가 아무리 그 전 팀에서 같은 멤버였다고 해도 이토록 자연스럽게 잘 어울리지는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 진성은 조용히 사무실 밖으로 나가기 위해 발걸음을 뗐다. 막 조용히 문을 닫고 로플팀으로 가려는데 뒤에서 갑자기 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강진성 선배님.” “.... 아, 혜연이구나. 어제는 잘 들어갔니?” 진성이 자신이 혜연이에게 한 말이 유나에게 한 말과 완전히 같다는 것을 알고는 피식 웃었다. 그 웃음에 혜연이는 약간 이상하게 진성을 쳐다보더니 말했다. “네, 잘 들어갔어요. 그런데 왜 웃으세요? 제가 뭐 실수라도 했나요?” “아.. 아니. 그게 아니고. 사실, 조금 전에 유나를 봤는데 오늘 유나를 처음 봤을 때 말했던 것과 너무나 똑같이 네게 말해서 말이야. 나 스스로 조금 웃겨서.. 그래서 웃었어. 나는 로플팀으로 갈 테니 누가 찾으면 거기로 연락하면 된다고 전해줘. 알겠지?” “네? 아.. 네.. 선배님.” 혜연은 코너를 돌아서 급히 사라지는 진성을 보면서 조금은 화가 났다. 유나와 비교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한 진성의 말에 조금은 발끈한 것이다. 그렇다고 막 화를 내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기분 좋지는 않았다. 혜연은 고개를 돌려서 사무실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사람이 들어왔는데도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자신들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는 유나와 한석을 본 혜연은 조금 전에 진성에게서 느낀 그 이상함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혜연 역시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살며시 문을 열고는 밖으로 나와 버렸다. 밖으로 나오니 두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혜연과 어제 만난 조범현 그리고 곽현호였다. 조범현은 누구와도 친해질 수 없을 것 같은 곽현호와 어제 단 한 번의 회식으로 말까지 서로 놓을 정도로 친해졌다. 어떤 눈치도 보지 않고 자기의 속마음을 제대로 표현하는 조범현이었기에 가능했을 지도 몰랐다. 대뜸 곽현호 옆으로 다가가서 술잔을 내밀며 기분 나쁘게 생겼다느니, 왜 이렇게 분위기 잡으며 꼴깝을 떠느냐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조범현은 그렇게 했고 예상외로 곽현호는 그런 조범현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다른 사람들은 자리를 이동하면서 술을 마시기도 하고 서로 이야기를 하고는 했지만 조범현, 곽현호 두 사람은 처음 자리에서 전혀 움직이지 않고 서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술잔만 기울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 혜연씨군요. 하하하.. 어제는 괜찮았습니까?” 범현은 너스레를 떨면서 대답했다. 평소 이런 미인과 같이 일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기분은 더욱 좋았다. 속은 쓰렸지만 혜연과 같이 말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속이 다 풀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저야.. 뭐 별로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요.. 범현씨는요?” “저요? 하하하하.. 술.. 없어서 못 먹었습니다. 어제는 정말.. 정말 좋았습니다. 친구, 그렇지 않냐?” 조범현은 한참 말하다가 옆에 우두커니 서 있던 곽현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혜연은 그런 모습에 흠칫했지만 곧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하지. 없어서 못 먹는 게 술이니까.” 곽현호의 나직한 말소리는 여전히 찬바람이 쌩쌩 부는 듯 날카로웠지만 그래도 첫 인상보다는 훨씬 나았다. 게다가 농담을 하다니. 하루밖에 보지 않았지만 곽현호가 저런 농담을 하다니 혜연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범현과 현호가 프로팀 사무실로 들어가려고 하자 혜연은 막아서며 말했다. “네.. 아.. 거기는 들어가 봐야 별로 좋지 않을 것 같은데요. 우리는 휴게실로 가서 모닝 커피나 한잔씩 하시죠. 어때요?” 그 말에 범현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고 현호 역시 침묵으로 긍정을 표시했다. 자신의 외모를 이용해서 뭔가 혜택을 보려는 생각은 눈꼽 만큼도 없었던 혜연이었지만 프로팀 소속의 남자 게이머들이 자신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자 혜연은 얼굴과 옷에 신경 좀 써야겠다고 내심 생각했다. 오전 10시 쯤, 매니저 서재필의 호출에 8명의 게이머들은 회의실에 모였다. “여러분들은 이제부터 프로다. 확실히 프로라는 것을 의식하기 바란다. 프로 게이머이기 때문에 옷차림에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지만 슬리퍼를 신고 다니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 그리고 새로 들어온 사람들은 회의 후에 나와 개인 면담을 통해서 계약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알고 지금은 앞으로의 일정과 알아두어야 할 일에 대해서 논의를 해 보자.” 어제 그렇게 잘 놀고 분위기를 잘 맞추던 서재필은 온데간데 없고 확실히 맺고 끊는 팀장 서재필의 모습이었다. “알고 있겠지만 가을에 시작될 리그에서는 개인전과 단체전이 있다. 일단 진성 정도만 개인전에 참가시킬 생각만 했는데 이렇게 8명의 프로 게이머가 모였으니 다시 한 번 얘기를 해야겠지? 최대한 본인의 의견을 고려하겠지만 어차피 프로는 팀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 여러 훈련을 통해 장점을 파악해서 적재적소에 배치할 생각이니까 따라주기를 바란다.” 서재필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단체전은 5명 정도가 필요한데 모두가 다 출전하는 게 아니라 그 날의 컨디션과 상대의 문명에 따라서 다를 수가 있다. 단체전은 개인적으로도 잘 해야겠지만 다른 사람들과의 호흡이 더 중요하다. 혼자서 잘 한다고 해서 단체전에서 이기는 것은 결코 아니니까. 게다가 단체전은 상대에 따라 출전이 정해지기 때문에 전 게임에 출전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혼자서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 하지만 개인전은 그야말로 혼자서 모든 것을 책임지게 된다. 이기든 지든 혼자 책임이지. 속 편하겠지만 그만큼 경기수도 많고 쉽지 않겠지. 다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해 봐라. 꼭 개인전, 단체전에 관련된 일이 아니더라도 팀에 도움이 되는 말은 언제라도 가능하다. 음.. 현준이?” “저는 당연히... 하하하.. 단체전입니다. 개인전을 해도 상관없지만 제 게임 스타일은 단체전에 더 잘 맞는 것 같습니다.” 현준의 스타일은 물과 같아서 다른 게이머와의 조화를 쉽게 이룰 수 있다는 추측은 일리가 있었다. 서재필 역시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진성이 개인전에 출전하면 현준이 단체전에 출전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는 단체전, 개인전 어떤 곳이든 상관없습니다. 팀에 도움이 되는 결정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한석의 말에 서재필은 감탄사를 터트리며 말했다. “오... 바로 이거야! 이거! 하하하.. 한석이가 내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구나.” 한석을 단체전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서재필은 혹시 개인전을 원하면 어떨까 조금 걱정했던 차였다. 그런 때에 한석의 말은 서재필의 마음에 흡족한 것이었다. “저는 단체전으로 할래요. 개인전은 너무 압박감이 심해서.. 저는 힘들 것 같아요.” 솔직한 진규였다. 평소 게임에서 혼자 하는 것을 버거워했기에 당연한 말이었다. “...... 저도 단체전에 참가하고 싶습니다. 혼자 하는 것보다는 같이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하하.. 현호 너도 그렇지?” “... 아... 응...” “현호와 저는 단체전에 참가했으면 합니다.” 범현은 혼자서 말하다가 현호까지 끌어들였다. 워낙 순식간이라 현호는 어물쩡하다가 범현과 같이 단체전에 참가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런 말에 서재필의 눈빛이 반짝였다. “저도 단체전을 원합니다.” 혜연은 단호하게 단체전을 말했고 유나는 한석을 쳐다보다가 결국 단체전으로 말을 했다. “저는... 저는.... 저도.. 단체전을....” “그래? 휴우.... 내 생각에 개인전으로 몰릴 줄 알았는데 다들 단체전이라니. 음.. 일단 알겠다. 연습 경기를 통해서 서로의 실력과 게임 스타일을 다시 한 번 잘 파악한 다음에 최종 결정을 하자고. 그리고 가을에 시작될 월드 리그의 홍보를 위해서 한국, 일본, 중국의 리그 우승팀을 초청해서 이벤트 행사를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열기로 한 모양인지 참가요청이 들어왔다. 일단 회사 입장에서는 문명 온라인의 홍보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참가하는 걸로 가닥을 잡았다. 다들 그렇게 알고 있도록.” “그럼.. 라스베가스로 가는 겁니까? 언제 갑니까?” 제일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현준이 아니라 범현이었다. 현준은 뭐라고 말하려고 하다가 범현에게 선수를 뺏긴 듯 얼버무리고 말았다. 서재필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 웃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그래.. 보름 쯤 후에 출발할 것 같다.” “이얏호...... 라스베가스여. 나를 기다려라! 내가 간다!” 범현이 눈을 지그시 감고는 외쳤다. 서재필 뿐 아니라 진성과 진규, 한석은 이제까지 팀에서 독보적인 위치였던 현준의 그 위치가 범현에게로 넘어갔음을 알았다. 현준은 뭔가 떨떠름한 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문명 온라인의 패치로 인한 변화 중에 가장 큰 변화는 당연히 1:1이 아닌 여러 게이머들이 팀을 짜서 대결이 가능하게 된 점이었다. 이제까지 문명의 사회 통제와 발전 그리고 군대 운영과 원정 등의 복잡한 것들까지 한 명의 게이머가 담당했기 때문에 세밀한 컨트롤은 거의 불가능했다. 나머지 미흡한 부분들은 대부분 인공지능으로 대체된 상태였다. 하지만 여러 명이 팀을 이룬다면 한 게이머는 군대와 관련된 전쟁 부분을, 다른 게이머는 사회, 경제와 관련해서 컨트롤을 하고 또 다른 게이머는 문명의 발전 방향에 대한 검토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여러 명이서 같이 게임을 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더 큰 재미를 줄 게 틀림없었다. 여러 게이머가 동시에 게임을 즐길 수 있게 된 반면에 게임에 필요한 컨트롤은 더욱 더 세밀해졌다. 수동적인 주변 국가들의 태도가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인접한 게이머의 문명이 상당히 빠르게 성장하면 그런 것을 은근히 견제할 정도로 인공지능이 강화되었다. 게다가 그 부근의 관습과 다른 극단적인 문명 발전을 이룬다면 옆의 중립 국가에서 게이머의 나라를 침공할 정도로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예를 들어 중세의 봉건제가 중심이 되는 관습에서 봉건제를 역행하는 것을 너무 급하게 컨트롤하는 경우 게이머의 나라가 아닌 주위의 기사들이 대거 침략해 올 수도 있을 정도로 인공지능이 발전했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 로마의 전성시대와는 달리 중세 시대는 병력의 규모나 경제력이 상대적으로 상당히 줄어들었다. 이름 자체는 그리스, 로마 등을 계승했지만 여러 요인으로 인해서 상당히 약화되어 거대한 대제국이 갈기갈기 찢긴 상태에서 중세의 게임이 시작되기 때문에 기껏해야 3~5만 정도의 병력 이상은 동원하기 힘들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패치로 인해서 일견 게임의 전체적인 수적인 규모는 줄었지만 그만큼 직접적인 컨트롤을 요구하게 되어 게임 자체는 어려워졌다. 프로 버전의 문명 온라인의 경우에는 더욱 더 어렵다는 것이 공통인 의견이었다. 프로 버전의 경우 PVR-2 접속기의 도입으로 좀 더 유연한 동작이 가능하게 되었다. 아직 공식적인 발표는 없었지만 차후에 발표될 문명 온라인 2에서는 게이머가 발전된 가상현실 속에서 직접 전투를 벌일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하는 소문이 인터넷을 떠돌았다. 그리고 게임의 시대 선택은 그야말로 랜덤이기 때문에 게이머들은 고대 뿐 아니라 중세에 대해서도 그 대응방법을 몸에 체득하고 있어야 했다. 게다가 팀 게임으로 인해서 서로간의 타이밍에 대한 조화가 강조되어 프로팀들을 고심하게 만들었다. “그게 아니지. 거기서 그런 식으로 컨트롤을 하면 나갈 타이밍을 찾고 있던 진규는 어떻게 하라고? 그럴 때는 서로 상대의 의도를 미리 파악해야지. 그런 식으로 하면 당연히 지고 말지. 안 그래?” “네......” “그럴 때는 자신 뿐 아니라 팀원들을 고려해야 된다고 지난번에도 말했지. 유나, 너는 혼자서 하는 컨트롤은 아주 잘하는데 같이 하면 꼬이는 경우가 많아. 이번에도 그렇잖아.” “.......” 현준, 한석, 유나, 진규가 한 팀, 진성, 범현, 현호, 혜연이 또 다른 팀을 만들어 팀플레이를 했다. 현준이 속한 팀은 현준의 의견에 따라서 일단 그리스 문명으로 정했고 진성의 경우에는 로마 문명으로 했다. 시대는 비교적 고대 시대가 선택되었다. 현준과 진성이 전체 게임을 조율하는 역할을 맡았고 한석과 범현이 양 팀의 군대 관련 컨트롤을 담당했다. 유나와 현호가 문명의 발전과 사회 통제를 동시에 컨트롤 했고 진규와 혜연은 실험적으로 빠른 원군을 위한 컨트롤을 맡기로 했다. 문제는 진규가 군대를 정비해서 곧바로 원정을 가려고 하는데 유나의 사회 컨트롤로 인해 그리스의 소지주 정예보병들의 사기가 떨어져 버린 것이다. 유나가 진규의 원정 시기를 주의해서 생각했다면 당연히 정예군대가 출발한 후에 그런 조치를 내렸어야 했다. 현준은 평소와 달리 아주 호되게 유나를 야단쳤다. 유나의 컨트롤 자체는 아주 좋고, 타이밍 또한 기가 막혔다. 하지만 그것은 혼자 있을 경우였다. 이미 진규가 원정을 나서는 순간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악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현준은 유나의 실력이 보통 이상임을 알았기에 더욱 야단을 친 것이다. “... 휴우.. 좀 쉬고 다시 시작하자고.” 문명 온라인팀의 요람은 비좁아 새로 세팅한 연습실에서 한참 땀을 흘리던 현준이 휴식을 선언하자 진규와 범현이 바로 연습실 밖으로 뛰었다. 바로 음료수를 사기 위해서였다. 매니저 서재필이 냉장고를 마련해 준다고 했지만 아직 들어오지 않았기에 쉬는 시간마다 막내인 진규와 싹싹한 범현이 나섰다. 진규는 얼마든지 선배노릇을 하려고 하면 할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막내가 더 편하다며 심부름을 자처했다. “시원한 음료수 대령이오.” 너스레를 떨면서 범현은 뽑아온 캔음료를 나눠주었다. 현준은 진성 옆에 앉아서 입 안 가득 마셨다. “내가 너무 하는 건가?” “뭘?” “이렇게 연습을 몰아치면서 하는 것..” “아... 누군가는 그렇게 해야지. 8명이나 되니까 예전처럼 그렇게 편하게 만은 할 수 없잖아. 8명이 제대로 모이기도 쉽지 않은데... 게다가 팀 리그가 되다보니까 다 같이 모여야만 연습할 수 있으니까 뭐, 어쩔 수 없지. 너무 조급해 하지 마. 너도 잘 알잖아. 조급하면 오히려 그 연습 효과가 떨어진다는 것....” “그래도..” “네가 안 하면 누가 하냐? 나? 하하하.. 지나가던 개가 다 웃겠다. 와... 이거 시원하네. 범현아, 고맙다!” 진성은 현준의 마음을 풀어줌과 동시에 범현에게 말을 돌렸다. “예? 아... 뭘요.. 아하하하하..” 확실히 현준은 새로 멤버가 4명이 더 모이고 나서부터, 예전의 그 위치를 범현에게 빼앗긴 후부터 조금씩 달라졌다. 평소의 그 활달하면서 사람들을 배려하는 모습을 변하지 않았지만 연습에 대한 것을 챙긴다던가, 연습을 실전처럼 하라고 엄포를 놓는 등 약간은 카리스마가 생겼다. 한편으로는 진성이나 현준 둘 중에 한 명이 맡아야 할 짐이었는데 현준이 감당하게 되었다는 말이 옳을지도 몰랐다. 한석은 울먹이는 유나에게로 다가갔다. “유나야, 힘 내!” “흐흑..... 네.. 오빠...” 유나는 재빨리 눈에 맺힌 눈물을 손수건으로 찍어냈다. 한석에게는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유나는 억지로 나오는 서러움을 삼켰다. 하지만 한석은 그런 유나의 모습에 더욱 마음이 아팠다. “유나야.. 지금도 잘 하고 있으니까 조금만 힘 내!” 그런 모습을 본 현준은 자신이 삼류 연애 소설의 악역을 맡은 것만 같아서 조금 머쓱했다. 하지만 현준은 남아 있던 음료수를 입안에 털어 넣고는 큰소리로 말했다. “자, 다시 시작해 보자고. 이번에는 중세 시대로 할 테니까 모두 정신 차려서... OK?" “열심히 하자. 유나야, 힘 내. 자, 모두 준비해.” 현준의 독려와 진성의 맞장구로 다시 팀플레이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어..... 왕 아저씨? 웬일이십니까?” 진성은 놀랐다. 당연히 대만에 있을 것으로 알고 있던 왕현추가 아무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왔으니까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일주일에 한번 사부 유조의 집이자 이제는 자신의 집인 넓은 집을 청소 겸 정리하러 왔는데 그 문 앞에서 의외로 왕현추를 만난 것이다. 왕현추는 그런 진성의 반응이 몹시도 재미있는 듯 웃으며 말했다. “허허.. 축지법을 수련하는데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점도 있고.. 물어볼 말도 있고.. 그리고 내가 해 줄 말도 있고.. 겸사겸사 온 거지.” 진성은 왕현추의 말 중에서 해 줄 말이 있다는 부분에 주목했다. 축지법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예전에 다 마쳤고 그 이상의 자세한 얘기는 진성 자신도 하기가 힘들었다. 그 당시 그런 얘기를 충분히 했기 때문에 단순히 핑계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왕현추가 하는 말의 뉘앙스에는 뭔가 중요한 얘기를 하러 온 듯, 그런 느낌이 배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그래... 그럴까?” 진성은 왕현추를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향이 좋은 차를 내어온 진성은 단정히 앉아서 왕현추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렸다. 왕현추의 성격상 자기 자신이 참지 못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진성은 오랜만에 이렇게 앉아서 차를 마시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인지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그려졌다. “왜 갑자기 웃어?” “아.. 아니, 이렇게 차를 마신 것도 오랜만이라서...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지네요.” “그래? 허허허.. 그래.. 그런 마음만 가지면 편하게 살 수 있지. 허허허.. 진성 너는 도(道)에 가장 가까울지도 모르겠구나.” “예... ” “진성아, 내가 네게 몇 가지 해 줄 말이 있다. 모든 것에는 순리가 있고 질서가 있단다. 그런 질서나 한계를 뛰어넘으면 그에 따른 대가가 있을 수도 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냐?” 뜸금없는 왕현추의 말에 진성은 솔직히 모르겠다고 말했다. “..... 잘 모르겠는데요.” “.. 그래... 그게 당연하겠지. 휴우...... 나 뿐 아니라 유맹의 모든 멤버들은 네 나이 때의 그 경지를 보고 아주 놀랐다. 어떻게 그런 나이에 그런 경지에 들 수 있을지. 우리가 보기에 너의 그런 성취는 확실히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 정도로 네 나이에 오르기는 불가능한 경지니까. 나이를 먹을 대로 먹어 그나마 생각이라는 것을 할 줄 아는 우리 늙은이들도 이렇게 생각하는데 아직 대가리에 피가 마르지 않은 녀석들은 네 존재를 어떻게 생각하겠냐?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예상보다 반응이 격렬한 것은 사실이다.” “네?..” 진성은 무슨 말인지 뚜렷하게 감이 잡히지 않았다. “휴우...... 차이나 모터스의 이장령과 그 손자 이주방이 그 원인인지는 모르겠다만 대만과 중국의 비교적 젊은 녀석들이 네 존재를 알아차렸다. 중국 무술계에서 알아주는 이장령을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무너뜨렸다는 사실이 퍼진 모양이다. 게다가 진성이 네가 한국인이라는 것도 알려졌다. 그러니 벌떼 같이 일어나는 게 뻔하지.” “아.............” 진성은 이제야 무슨 말인지, 왕현추가 왜 한계나 질서에 대한 얘기를 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일종의 아집으로 볼 수도 있었다. 진성은 가만히 왕현추의 말을 기다렸다. “이장령이 계획한 것인지, 이주방이 독단적으로 벌인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중국의 유명한 무술가가 어린 한국인에게 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소동이 일어난 거지. 유맹의 멤버들이 진화에 나섰지만 이것은 잘잘못을 따질 수 없는 문제인데다가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서 쉽게 진정시키기 힘들 것 같다.”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가요? 저는 어떻게 하면 되죠?” 진성은 현실을 직시했다. 대만에서, 중국에서 아무리 목청을 돋우어 비난을 한다고 해도 진성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듣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왕현추가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서 이야기를 꺼낸 배경에는 뭔가 알고 있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진성은 추측했다. “... 그래. 일단 유맹의 멤버들이 나설 모양이니까 어떤 조직적인 움직임은 없을 것으로 예상한다. 하지만 젊은 녀석들은 어디로 튈지 모르니까 어쩌면 한국으로 찾아와서 다짜고짜 승부를 내자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그런 녀석들은 비겁하게 습격을 한다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까 별로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대신 그런 녀석들이 나타나면 너무 거칠게 다루지는 말아라. 젊은 혈기에서 그런 것이니까.” “네, 알겠습니다.” “문제는 이주방 녀석인데... 아직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그 녀석이 마피아와 관계를 맺은 것 같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다. 예전의 일도 있고 해서 이주방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그런 모습이 포착되자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지. 차이나 모터스의 회장인 이장령이 개입되었는지는 조만간 밝혀지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이주방 혼자 벌인 일 같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마피아... 음.. 알겠습니다.” 진성은 마피아라는 말에 사태가 쉽지 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왕현추가 불쑥 찾아올 정도라면. “한국의 치안은 그런대로 믿을 만하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왕현추는 화제를 바꿨다. 게다가 꼭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어차피 전해야 할 말이었다. “아, 그리고 손주황 형님이 네게 전해 달라는 말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으니 팔괘장을 배우고 싶으면 빨리 오라는 말이었다. 이런 말, 내가 전하지만 내가 볼 때 손주황 형님은 적어도 10년은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허허허... ” “아, 팔괘장.....” 진성은 유맹의 최고 연장자인 백발의 노인, 손주황의 얼굴이 생각이 났다. 접근단타와 다른 팔괘장을 배워보라고 하던 그 노인. “그래, 빨리 오라고 하더라. 그리고 네가 간다면 나도 같이 갈 생각이니까. 험험.. 알겠지? 잘 생각해 봐라.” “네...” 진성은 이주방과 마피아 얘기에 순간 심각함을 느꼈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세계에서도 치안이 좋은 곳으로 정평이 난 한국에서 마피아가 드러내 놓고 어떤 움직임을 보이기는 힘들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일견 진성의 생각에도 일리는 있었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축지법에 대해서 물어볼 게 있다. 오늘은 진성이 네가 시간을 좀 내줘야 할 것 같다. 허허허.. 도장으로 가자꾸나.” 핑계라고 생각했던 축지법에 대한 언급이 사실이었다. 진성은 거의 하루종일 왕현추에게 붙잡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는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네? 아... 네.” 진성은 어쩔 수 없이 왕현추를 데리고 도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진짜로 왕현추는 축지법에 대해서 물어 보러 온 것이다. 진성은 시계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후, 진성은 아침을 먹은 후 평소 출근하던 것과는 달리 현준의 차가 아니라 진팀장의 차에 탔다. 처음으로 시작되는 인트로 테스트가 오늘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로플의 요람 멤버들은 모두 서울 근교의 연구소로 이동을 완료한 상태였다. 모든 필요한 기자재와 30명의 테스터들이 숙식과 동시에 테스트를 진행시켜야 하기 때문에 준비할 것들이 많았지만 곽팀장, 조팀장을 중심으로 요람 멤버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도와서 생각보다 빨리 테스트를 시작할 수 있었다. 진성은 문명 온라인 연습만으로도 바빴지만 진성이 출전할 종목이 개인전이기 때문에 팀플레이는 부가적인 연습이었다. 게다가 아직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로플의 인트로 테스트 기간 동안 오전시간은 테스트에 운영자로 참가하기로 했다. 온라인이 아니라 곽팀장과 조팀장이 평소 아는 대학의 선배 교수들을 통해서 테스터를 모집했다. 새로운 게임에 대한 정보를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보안을 철저히 해서 새나가는 정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애썼다. 30명은 10명의 여대생과 20명의 남자 대학생으로 이루어졌다. 그렇게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비율이 자연스럽게 정해졌다. 철저한 신체검사를 통해 건강한 젊은이들을 선발한 이유는 혹시나 모를 사고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한참을 달려서야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겉보기에는 대형 물류 창고 정도로만 보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자 확실히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연구 시설이 있기에는 조금 부족해 보였다. 진성은 이상하다는 생각에 옆에서 같이 걸어가던 진팀장을 보았지만 진팀장은 슬며시 웃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성은 그런 진팀장을 아무 말도 없이 뒤쫓았다. “연구 시설은 지하에 있다. 뭐, 보안의 이유도 있지만 마침 이 곳에 지하가 있기에 조금 개조를 해서 사용하는 것뿐이다. 자, 내려가 볼까?” 창고의 중앙에는 아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엘리베이터 밖에 없습니까?” “아니, 반대쪽에 계단도 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를 주로 쓰는 편이지.”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서 지하2층으로 내려온 진성은 지하 치고는 굉장히 큰 규모의 공간을 볼 수 있었다. 가운데에 홀이 있었고 그 주변으로 온갖 시설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요람에서보다 몇 배 이상 복잡해 보였다. 눈에 익은 PVR 타입의 접속기들이 눈에 띄었다. 요람에서는 그다지 크지 않은 모니터였는데 이곳은 새로 최신 모니터들을 산 모양인지 얇은 대형 박막 모니터들이 즐비했다. “돈 좀 들인 것 같은데요.” “앞으로도 계속 쓸 생각이니까.” 공간은 굉장히 컸다. 다가와서 가운데에 있는 홀을 보니 수십 개의 PVR 접속기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아무래도 테스터를 위한 대규모 접속기인 모양이었다. 진성은 이런 대규모 테스트를 한다는 것이 이제야 실감이 났다. 이제까지 기껏해야 2명이 한꺼번에 접속했던 것과는 그 규모와 시설 자체가 달랐다. 별로 대단치 않게 생각했던 테스트가 새삼 긴장이 되는 진성이었다. “팀장님, 이제 오셨습니까? 진성이도 왔구나.” “조팀장, 어때? 문제는 없어?” “예, 어제 이미 테스터들이 다 모여서 다시 한 번 검사를 마친 후입니다. 그리고 가상현실 시스템도 준비가 거의 완료되었습니다. 예상대로 10시쯤이면 테스트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9시 정각에 간이 회의실에서 테스트를 마지막 점검하는 전체 미팅을 가질 테니까 조팀장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 주게.” “네, 알겠습니다. 팀장님.” 진팀장은 다른 볼일이 있다면서 자리를 떴고 진성은 조팀장 옆에 남아 있었다. 진성은 가만히 있다가 조팀장에게 물었다. “대강 테스트는 어떻게 진행이 됩니까?” 요즘 바뀐 문명 온라인 패치 때문에 연습을 거듭하던 터라 테스트에 대한 자세한 사항을 모르던 진성이 조팀장에게 은근히 물었다. 엄연히 개발자 중의 한명이지만 이럴 때 진성은 굉장히 난감했다. 그래도 조팀장이나 곽팀장은 그런 진성의 사정을 잘 이해해 주었기에 스스럼없이 물어볼 수가 있었다. “개발자가... 테스트 일정도 잘 몰라? 이런 안 되겠군.. 하하하.... 오전에 3시간, 오후에 4시간, 밤에 2시간... 도합 합해서 하루에 9시간의 테스트가 있을 예정이고 지금으로는 2주간으로 계획되어 있지. 하루에 9시간은 장시간이기 때문에 숙소에 헬쓰장과 기타 몸을 움직일 만한 것을 마련해 둘 정도로 신경을 썼으니까, 2주간이니까 괜찮겠지.” “2주간? 생각보다 짧네요.” “2주간은 일단 앞으로의 방향을 결정하기 위한, 테스트를 위한 테스트다. 앞으로 지겹도록 이런 테스트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아... 여기로 출근하려고 하니까 한 시간이나 빨리 집을 나서야 했는데. 으.... 아침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나와야 하다니... 게다가 멤버들이 돌아가면서 그 테스터들을 위한 숙소 사감을 맡기로 했으니 더 힘들지...” 진성은 익숙해진 조팀장의 넋두리를 삭둑 잘라버리고는 자신이 궁금한 내용을 물었다. “테스트 내용은 어떤가요?” “일단 테스트 공간은 고립된 섬에서 이루어질 예정이야.” “혹시... 그 호도?” “하하하.. 그래 맞다. 하지만 섬의 규모가 조금 커지고 그 중앙에 작은 도시가 있을 예정이지.” “그건 그렇고 도대체 무엇을 테스트 하는 건가요?” “하하하.... 사실 테스트라고 하기에는 조금 그렇지. 테스트 기간 두 주 중 첫 주에는 조금 전에 말한 그 섬에 테스터들을 그냥 가두어 두는 것뿐이거든. 그 작은 도시, 아니 마을에는 충분히 먹고 살만한 것들이 많거든. 아, 이번에 구현된 로플은 안 먹으면... 탈진까지도 하니까 꼭 먹어야 돼.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은 30명의 테스터들이 일주일간 넓기는 하지만 갇힌 공간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지에 대한 것이야. 어떤 것을 하는 게 가장 좋을지, 식량의 공급에 대한 문제, 체력, 심리적인 면들을 다각도로 관찰하는 것이 첫 주의 테스트 목표야. 그것을 위해서 유명한 각 전문가들을 초빙할 정도니까.” 정말 사람들에게 제한을 가한 뒤에 그 반응을 보는 심리 실험과 같았다. “와.... 대단하네요. 그럼 둘째 주는요?” “그 때는 무기를 준 다음에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만들 예정이지. 아, 테스터들 공통의 적인 몬스터를 풀어 놓을 계획이야. 그런 외부의 적이 30명의 테스터들의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키느냐에 대한 관찰이 그 목적이라고 봐도 무방해. 첫 주에 직접적인 외부적 요인이 없을 경우에 일어나는 30명 사이의 갈등과 서로간의 관계가 둘째 주의 몬스터의 등장으로 어떻게 변하는지.. 그걸 알아보는 거지. 물론 무기는 파괴력이 있는 총기류이지만 제한적이어서 모든 테스터가 다 가질 수는 없을 거야. 테스터 자신들은 게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런 상황이 막상 닥치면 어떻게 할 지 그것도 기대가 되지.” “정말 무슨 심리학 실험 같은데요..” “심리학 실험? 맞다. 심리학 실험.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관계와 긴장을 원하는지 알고 싶은 게 그 목적이니까. 하하하... 사실 심리학 전문가들은 이 테스트에 아주 관심이 높던 걸.....” 진성은 조팀장의 말에 여러 장면들을 그려보면서 감탄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런데.... 운영자는 무슨 역할을 하는 거죠? 지난번에 듣기로는 저와 조팀장님이 운영자라고 하던데..” “운영자? 아, 말 그대로 운영자지. 혹시나 모를 그 세계, 그 공간 자체의 버그가 생긴다면 빨리 해결해야 하는 존재지. 하하하.. 운영자도 사람이니까 가끔 변덕을 부릴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절대 테스터들의 갈등에 개입해서는 안 돼지.” “그럼 문제가 있을 때만.... 접속하는 건가요?” “아니, 그러면 너무 흥미가 없잖아. 그래서 또 하나 테스터들에게 특이한 상황을 설정해 주는 거지. 테스터들은 서로 잘 몰라. 일부러 그렇게 뽑았거든. 30명의 테스터와 2명의 운영자가 게임에 접속하게 되는데 테스터들은 누가 운영자인지 전혀 알 수가 없거든. 할 일이 없는 테스터들은 아마 운영자를 찾으려고 노력을 하겠지. 그게 무슨 이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누가 운영자인지 알면 뭔가 도움을 얻을 수도 있으니까. 안 그래?” “아.... 정말 실험이네요. 실험!” “그래.. 아, 정신 좀 봐. 미팅 있다고 연락해야지. 진성아, 저 쪽으로 가면 다른 실험실이 나오니까 거기 있는 사람들 9시까지 간이 회의실로 모이라고 전해라. 알겠지?” “네....” 조팀장은 핸드폰을 들고는 이리저리 전화했고 진성은 테스트 내용을 곱씹으면서 사람들을 찾으러 갔다. “자, 다들 잘 알겠지만 한 시간 후에 로플의 첫 테스트가 시작된다.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다들 한 번 더 점검해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비교적 긴 시간 동안 계속되는 일이기 때문에 힘들더라도 기운을 내주기를 바란다. 자, 각 파트별로 마지막 확인을 하고 곧 테스트 준비에 들어가도록 하지. 조팀장?” “네, 팀장님.” “시작하도록 하지.” “네, 가상현실 시스템 로플은 현재로 아주 양호한 상태입니다. 첫 주 동안의 날씨의 변화에 대해서도 이미 시뮬레이션을 끝낸 상태입니다. 내부에 필요한 물자들, 보급품들도 완비되었고 테스터들이 들어오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각 접속기를 통한 로플과의 접속 테스트도 문제없었고 로플 내에서의 움직임도 무리 없습니다.” 조팀장의 말에 이어 하드웨어 팀장인 곽팀장이 입을 열었다. “하드웨어 부분도 준비 완료입니다. PVR-4 는 개발 된 후에 임상실험이 이미 거친 상태이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으리라 예상합니다. 게다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PVR-4 접속기 15대가 대기 중입니다. 고장이 나면 곧바로 교체가 가능합니다.” “테스터들의 상태도 괜찮은 편입니다. 자소 소프트의 새로운 게임 테스터로 선정된 것이 아주 기분 좋은 모양입니다. 테스터들 간의 격리 조치에도 그리 불만은 없는 듯합니다. 하지만 완전 격리는 시간이 갈수록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대신 하루에 한번씩 전문가 입회하에 다 같이 모여서 서로 얘기를 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변태수였다. 변태수의 말에 진팀장이 일리가 있다며 말을 정리했다. “그래.. 그건 이미 세워 놓았던 대책 중 하나니까 그렇게 하도록 하지. 어차피 이번 테스터들의 로플에서 보이는 모습은 현실과 다를 테니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응급 수송과 기타 응급 처리에 대한 것들을 최종적으로 확인한 진팀장은 모인 전체 멤버들을 한번 바라보고는 말했다. “지금까지 고생했던 이유.. 로플이 이제 시작된다. 아직은 테스트일 뿐이지만 우리는 각 파트별로 나누어 자신의 일을 하지만 결국 또 다른 세계를 만드는 창조자다. 창조는 정말 힘들다. 이제까지 정말 수고했지만 조금 더 달려보자. 이제는 그리 멀지 않은 것 같다. 제대로 로플을 세상에 내놓으려면 제반 조건이 더 좋아져야겠지만 우리는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된다. 알겠나?” “네.. 팀장님!!” 우렁차게 대답한 멤버들은 각자 자신의 맡은 자리로 돌아가 만반의 준비를 했다. 시간은 점점 다가왔다. 이윽고 정해진 시각, 10시가 되자 변태수와 테스트 요원들이 숙소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테스터들을 데리고 왔다. 모두 편한 운동복 차림이었고 연령대는 주로 20대 초반이었다. 변태수는 미리 정해진 접속기에 테스터들을 하나하나 지정해서 탑승시켰다. 숙소에서 이미 모든 교육을 마친 후였기에 그리 어렵지 않게, 소란스럽지 않게 모든 준비를 완료할 수 있었다. 로플팀 멤버들 뿐 아니라 테스터들도 제대로 된 최초의 가상현실 온라인 게임을 체험한다는 생각에 아주 긴장된 모습이었다. 진성 역시 비슷한 복장으로 정해진 접속기에 탑승했다. 조팀장은 일단 초기의 작업들을 어느 정도 완료해 놓고 접속하기로 했다. “테스터 탑승 완료!” 변태수의 말이 끝나자 곽팀장과 팀원들이 접속기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모니터들의 수치를 일일이 확인하기도 하고 이상하다고 느껴진 부분은 직접 접속기로 가서 상태를 확인할 정도로 세밀한 검사였다. “접속기 하드웨어 검사 완료!” 곽팀장의 말이 떨어지자 말자 조팀장과 그 팀원들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가상현실 로플의 마지막 확인과 제대로 접속기가 연결되어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인터페이스 확인 완료!” 조팀장은 인터페이스 확인을 외치고는 모니터들의 숲 바로 앞에 있는 진팀장을 바라보았다. 진팀장은 자신을 바라보는 많은 눈동자들을 하나하나 확인하고는 곧 입을 열었다. “로플.. 인트로 테스트를 시작한다.” 진팀장의 말에 조팀장은 접속기를 한꺼번에 로플에 연결시키는 작업을 시작했다. 오랜 시간이 걸려서 이제야 처음으로 로플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다. 진팀장은 대형 스크린을 통해서 뿌옇게 나타나는 화면을 보며 이제까지의 고생했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이제.... 시작이군.” 진성은 어두워졌다가 밝아지는데 익숙했기 때문에 곧 자신이 길 한 가운데에 앉아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어나서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은 굉장히 맑았다. 가을의 날씨 좋은 하늘, 바로 그런 하늘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조팀장의 말과는 달리 눈에 익은 그런 섬의 모습이 아니었다. 섬이라고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아예 바다는 보이지도 않았다. 사방이 거의 산으로 둘러싸여서인지 아니면 진성이 있는 곳이 아래로 푹 꺼진 곳인지 바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나무들도 달랐다. “뭐야? 이거.... 열대 야자수잖아? 여기가 호도라고? 어....” 열대 야자수였다. 그래서 그런지 분위기가 외국의 휴양지 같았다. 건물은 그다지 높지는 않았지만 별장처럼 화려했다. 하얀 색 계열의 건물 색깔에 지붕은 붉은 색이었다. 그리고 진성은 자신의 목소리에 놀랐다. 완전히 다른 목소리였다. 오히려 현준의 목소리와 비슷했다. 진성은 목을 잡고는 가볍게 소리를 냈지만 역시 자신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조팀장님? 하하....” 곧 조팀장이 이렇게 만든 것이라 생각했따. 잠시 허탈하게 웃었던 진성은 주위를 둘러봤다. “어.... 이게 뭐야? 조진철?” 진성은 근처를 살피다가 잔디밭이 깔린 그 멋진 별장의 대문에 적힌 팻말을 보고는 어이가 없었다. 거기에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바로 조팀장의 이름이었다. 이런 곳에다가 이런 짓을 하다니. 진성은 피식 웃고 말았다. 역시 조팀장다웠다. 진성은 집안으로 들어갔다. 문은 전혀 잠겨 있지 않았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널찍한 거실과 그 뒤로 몇 개의 방문이 보였다. 진성은 어슬렁거리다가 거울을 발견하고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 이런... 뭐야?” 거울 속의 모습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진성 자신의 얼굴이 아니었다. 약간 부자연스러운 얼굴이었다. 손을 들어 얼굴을 만졌다. 확실히 이상했다. 하지만 조금 현실과 괴리감이 있는 촉감이었다. 그런대로 가상현실이라는 것을 고려해 볼 때 만족할 만한 수준이었다. “어때? 마음에 들어?”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진성은 어이가 없었다. 어설프지만 확실히 미국의 록가수 엘비스 프레슬리의 얼굴과 그 복장이었다. 진성은 자신에게 이렇게 친근하게 말을 걸 사람은 단 한사람 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다. “조팀장님?” “하하하하.... 멋지지? 얼굴이 조금 어색하기는 하지만... 이 정도도... 모델링 하느라 고생했거든... 하하하... 아무리 봐도 멋지군. 푸하하하.” “..........” 거울 보며 자화자찬하는 조팀장의 행동에 진성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머리를 한참 동안이나 뒤로 쓸어 넘기던 조팀장은 진성을 보며 말했다. “자, 이제 나가 볼까? 아마도 이 작은 도시, 아니 마을의 가운데 광장으로 다들 나올 거야. 아니, 다들 찾아보다가 그 쪽으로 오겠지. 자... 가자고. 아, 그리고 이제부터는 나를 엘비스라고 불러라. 하하하.. 여기 로플에서는 내가 특별히 진성이 네 친구 해 주지. 하하하..” 진성은 말할 기회도 잡지 못한 채 밖으로 나가는 조팀장의 뒤를 따랐다. 조팀장의 말을 듣고 주위를 자세히 살피니 마을의 광장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는 듯 건물과 도로가 배치되어 있었다. 어떤 길이든 광장으로 통하는 것 같았다. 진성은 앞서 신이 나서 걸어가는 엘비스 프레슬리를 보면서 내심 자신의 옷은 평범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 빨리 가자고.” 10분 정도 걷다가 코너를 도니까 바로 광장이 보였다. 광장에서 대략 10명 정도의 사람들이 이미 와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서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진성은 조팀장과 같이 빠르지도 늦지도 않게 광장의 가운데로 걸어갔다. 광장의 가운데에는 크지는 않지만 휴양지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분수가 물을 뿌리고 있었다. “저기 또 오네. 어... 이번에는 엘비스 프레슬리? 하하하하...” 진성과 조팀장이 다가오자 상투를 튼 조선시대 선비 차림을 한 사람이 어이가 없다는 듯 크게 웃었다. 진성 역시 가까이 다가가자 그 모인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정말 가관이었다. 조선시대 유생 차림에서부터 보통 정장 차림의 회사원 스타일도 있었다. 정말 웃긴 것은 키가 190은 되어 보이는 한 사람이었는데 농구 선수 복장이었다. 진성은 조팀장을 슬쩍 쳐다보았다. 이런 장난은 조팀장 짓이라고 확신했다. 진팀장과 곽팀장도 묵인을 했겠지만 그래도 이런 아이디어는 조팀장일 것이다. 조팀장은 당연히 진성의 시선을 피했다. 진성과 조팀장이 다가갔지만 서로 인사를 나누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유생 차림의 남자만 가까이 다가와서 조팀장에게 그 엘비스 프레슬리 복장이 멋있다는 말만 했을 뿐이었다. 모두들 테스터가 30명이라는 것은 알았기에 나머지 사람들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모두 모여야 무엇이든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진성과 조팀장은 멀찍이 떨어졌다. 계속 같이 있어봐야 좋은 일은 없기에 분수 근처에 도착하자마자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진성은 분수의 난간에 걸터앉아 주위를 자세히 쳐다보았다. 정말 사실 같았다. 넓고 높은, 파란 하늘과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높지는 않지만 푸른 산들, 아담한 마을과 이런 분수 그리고 분수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들. 진성은 손을 뻗어서 그 물줄기에 대어 보았다. “이야....” 정말 손이 물에 젖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현실이 아니라는 생각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실제로 차이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현실과는 달랐지만 진짜 같았다. 진성은 주변에 각양각색, 팔짱 끼고 서 있는 사람부터 아예 퍼질러 앉아 있는 사람들까지 하나하나 눈여겨보았다. 여자가 3명에 남자가 9명이었다. 여자들은 여자들끼리 비교적 가까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남자들은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로플에서의 시간은 현실의 두 배였다. 아니, 시간 자체가 두 배가 아니라 로플에서의 시간, 아니 시계의 빠르기가 두 배였다. 현실에서 한 시간이라면 로플에서는 두 시간이었다. 실제로 두 시간이 아니라 로플의 하루가 현실의 12시간인 것이다. 그만큼 짧은 시간에 하루가 지나가는 것이다. 시간상 저녁이 다가오는지 서서히 햇빛이 약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자 테스터의 대부분이 모였다. 하지만 다 모인 인원은 29명이었다. 한 명이 오지 않은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운영자 두 명을 빼고 한 명이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진성과 조팀장은 테스터 중에서 세 명이 오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확실히 처음부터 변화가 있었다. 곧 현실에서 보기 힘든 아름다운 저녁놀이 빛을 발하자 그 장면을 멍하게 보고 있던 사람들 중 하나가 말을 꺼냈다. “어차피, 여기에서 앞으로 시간을 보내게 될 텐데..... 이제부터 어떻게 지낼 지 이야기를 해 보지 않겠습니까? 이제 곧 날이 어두워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텐데.. 각자 혼자서 지내기는 조금 그렇지 않습니까?” 일리가 있는 이야기였다. 아무리 게임이지만 짧지 않은 시간동안 혼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완전한 어둠 속에 있는 것은 공포, 그 자체일 것이다. 그 말에 키가 크고, 농구선수 복장인 사람이 말을 받았다. “...... 일단 다 같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을 찾고... 불이 들어오는지 알아봅시다. 나머지 얘기는 그 다음에 해도 될 것 같은데....” “네, 맞아요. 그렇게 해요.” 바비 인형과 같이 깜찍한 모습의 여자가 동의했다. 하지만 서로 어떻게 무엇을 할 지 몰라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때 조선 시대 유생 차림의 남자가 나섰다. “지금 29명이 있는데.. 여자 분이 10분이니까 나머지 19명의 남자들이 흩어져 넓은 공간이 있는 집을 찾고 거기에 조명이 들어오는지 확인을 합시다. 그리고 최대한 그 곳의 시설을 확인한 후에 다시 이 광장으로 모여서 그 때 자리를 옮기도록 합시다.” 다른 사람들은 이의가 없는지 여자들은 그대로 있고 남자들은 흩어져서 마을의 여기저기로 사라졌다. 얼마 되지 않아 남자들은 다시 모였고 그 중에 한 사람이 찾은 회관과 비슷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조사한 바로는 이곳에 전기는 존재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같은 것은 눈을 씻고 찾아도 찾을 수 없었다. 단지 밝게 해 주는 전기불만 이용할 수 있었다. 테스터들은 그다지 걱정은 하지 않았다. 첫날이기 때문에 얼마 있지 않아 다시 현실로 나가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둘째 날부터는 현실 시간으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거의 9시간을 연속적으로 접속해야 하지만 첫 날은 로플이라는 세계에 대한 적응 차원에서 4시간 후에 접속을 종료하고 테스터 미팅을 가지기로 한 것이다. 게다가 하루에 9시간이라고 해도 로플에서 하루에 못 미치는 시간이었기에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버티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29명의 사람들은 회관처럼 넓은 공간에 들어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 모든 일의 주재자가 없었기에 당연히 원을 그리고 앉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앉고 싶은 곳에 털썩 주저앉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처음에 말을 꺼냈던 사람이 다시 입을 열었다. “..... 여기 정말 대단하네요. 진짜 같아요. 사실 저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제야 그동안 참고 있었던 감탄이 쏟아져 나왔다. “저도 그래요. 정말.... 정말.... 이게 게임이라니.... 아까 봤어요? 그 분수? 그 부서지는 물방울들....” 바비 인형처럼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가 말을 하자 곧 회사원 복장의 남자가 말을 이었다. “대단하죠. 저... 그런데 이 테스트 기간 동안 뭘 하면서 지내죠? 여기는 시간 보낼 게 아무것도 없는데..” “일단 각자 소개부터 할까요?” “소개할 필요가 있습니까? 어차피 모습도 다르고.. 현실에서는 서로 말도 하기 힘들 텐데... 어차피 테스트인데.. 그냥 시간 보내다가 나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래도.... 2주는 꼬박 같이 지낼 텐데.... 현실이 아니라 이 게임 안에서라도 친해지면 좋잖아요. 저는 음.......... 평강공주라고 불러주세요!” 바비 인형과 비슷한 여자는 잠깐 생각하더니 평강공주라고 자신의 이름을 지었다. 그 뒤로 다른 사람들 역시 자기의 마음에 드는 이름을 지었다. “네? 평강공주..... 하하하하..... 그러면 저는...... 온달장군이라고 불러주세요.” “예? 호호호호..” “저는..... 어차피 이런 옷이니까... 마이클. 마이클 조던이라고.... 험험험...” 농구 선수 복장을 한 사람의 말이었다. “어... 그렇게 말하면... 저는 뭐라고 합니까? 이런 옷을 입고 있는데.....” “제가 보기에 그런 옷이라면...... 음... 이름이 조금 그렇네요. 그냥 유생이라고 하죠 뭐.. 하하하하..” 모두들 자연스럽게 자신의 진짜 이름이 아닌 즉석에서 생각난 닉네임으로 서로를 부르기 시작했다. 진팀장을 비롯한 멤버들의 의도도 있었지만 확실히 이런 익명성 속에서 실제 이름이 아닌 가명을 쓰는 것이 자유로운 세대들이었다. 뭔가를 숨긴다는 부정적인 측면보다 또 다른 자신이라는 긍정적인 면에 더 친숙한 세대들이었다. 조팀장은 당연히 엘비스였고 진성은 조팀장의 농간으로 스키피오라고 불리게 됐다. 대강의 소개가 끝나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하려는 순간 건물 안으로 세 명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뒤늦게 찾아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세 사람은 아주 주저하면서 안으로 들어왔다. 미리와 있던 사람들은 의아해 하다가 세 명의 차림새를 보고는 뒤집어졌다. “아하하하하...” “푸.. 푸.. 푸하하하...” “크크... 크큭... 크하하..” 타이즈였다. 슈퍼맨, 스파이더맨, 마지막으로 등껍질을 맨 닌자거북이였다.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진성은 사람들과 같이 웃다가 맞은편에 있던 조팀장을 응시했는데 순간 윙크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마도 그 옷을 벗고 다른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 늦은 모양이었다. 새로 들어온 사람들의 이름은 당연히 슈퍼맨, 스파이더맨 그리고 닌자거북이였다. 닌자거북이는 등껍질을 벗으려고 했지만 일체형인지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옷이지만 벗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아등바등 하다가 어쩔 수 없는 듯 잠잠해졌다. “32명이니까 당연히 우리 중에 운영자가 있겠네요?” “운영자? 30명의 테스터라고 했으니까. 분명히 운영자가 끼어 있겠네요.” “크크크... 저 세 명은 절대로 운영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크하하하..” 그 말에 일제히 타이즈 삼총사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운영자 자신이 저런 짓을 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운영자님... 뭐, 테스트인데 꼭 숨길 필요가 있나요? 그냥 말씀하시지요. 베타 테스트도 아니고... 무슨 아이템을 달라고 할 수도 없는데........” “네, 맞아요. 하하하하.. 우리 심심하니까 운영자나 찾아볼까요? 재미있잖아요.” 엘비스, 조팀장이 나서서 운영자를 찾아보자고 부추겼다. 진성은 그런 조팀장을 보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운영자라는 것을 꼭 숨길 필요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굳이 찾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거 재미있겠네요. 운영자 찾으면 뭔가 보너스가 있으면 더 신날 텐데요. 그치요?” “네.. 하하.... 찾을 필요, 없습니다! 하하.. 사실 이런 말 하기는 싫었지만 제가 바로 운영자거든요. 어차피 밝혀질 것 그냥 밝히죠 뭐. 저도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테스트를 하는 동안은 테스터니까요.” 진성은 깜짝 놀랐다. 조팀장이 자신이 운영자라고 밝힌 것이다. 자신에게는 분명히 테스터들에게는 비밀로 한다고 해 놓고는 갑자기 운영자라고 밝히다니. 게다가 진성은 그 다음에 일어난 일에 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엘비스님이 운영자라구요? 하하하... 저도 운영자인데..... 그러면 엘비스님과 제가 운영자겠네요. 하하...” “어? 저도 운영자인데..... 하하하..” 조선시대 유생 차림의 남자와 마이클 조던이 말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호호호... 이상하네요. 세 분 중 적어도 두 분은 운영자가 아니에요.” “네? 그걸 평강공주님께서 어떻게 아시죠?” “호호... 제가 바로 운영자거든요. 그러니 두 분 중 한 분은 절대로 운영자가 아니죠. 그렇지 않나요?” 평강공주라 불리는 여자마저 자신이 운영자라고 말한 것이다. 진짜 운영자인 진성은 무슨 일인지 몰랐지만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평강공주는 눈빛을 반짝거리며 궁금해 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제가 증거를 대 볼까요? 이 게임은 기획된 지 3년이 되었는데 그 동안 극비리에 이런 곳에서 개발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었어요. 그리고 자금이 모자라 프로젝트를 포기하려고도 했는데 문명 온라인이 홈런을 치는 바람에 이렇게 테스트를 할 수 있게 된 거예요. 이미 나온 밀리터리 아트의 성공도 물론 거기에 영향을 주었구요. 호호...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은.... 이 게임의 기획자가 누구인지 아세요?” “네? 기획자라니요?” “호호호.... 이 게임은 바로 게이머이자 밀리터리 아트의 핵심 개발자 중 하나인 강진성의 아버지가 직접 디자인한 게임이에요. 강진성의 아버지가 일을 다 끝내지 못하고 숨을 거두자 그 아들인 강진성이 게임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거죠. 사실, 얼굴 없는 게이머였던 강진성이 문명 온라인의 프로 게이머가 되어 커다란 성공을 거두고 곧 밀리터리 아트의 개발자로 나선 것은 원래 강진성이 개발자였기 때문이죠. 어때요?” 진성은 놀랐다가 어이가 없어졌다. 자신의 이름이 갑자기 나오자 뜨끔했는데 이 여자, 평강공주는 아예 소설을 썼다. 자신의 아버지가 이 게임의 기획자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자신이 나서서 틀렸다고 외칠 수도 없었다. 평강공주는 기지로 거짓말이지만 정말 그럴 듯한 말을 재치있게 만들어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자신이 운영자라고 말한 것은 의도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일단 그렇게 말하고 보니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해서 그런 말을 덧붙인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자세한 얘기에 평강공주가 운영자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 평강공주님이 정말 운영자가 맞는 것 같군요. 그 얘기는 운영자 사이에서는 서로 다 알고 있는 사실이죠. 하하하... 평강공주님이 빠뜨린 이야기에 이런 내용이 있지요. 강진성의 친구이자 게이머 한신, 진현준 역시 곧 개발자로 변신을 하게 될 겁니다. 진현준의 아버지와 강진성의 아버지는 죽마고우였지요. 그런 관계로 어릴 때부터 강진성과 친했던 진현준은 강진성의 마음을 알고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기로 한 거죠. 그래서 둘이 같이 문명 온라인의 개발사인 자소 소프트에서 프로 게이머로 데뷔를 한 겁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아주 좋은 정보를 얻는 거네요. 하하하..” 이번에는 조팀장, 엘비스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진성 자신의 아버지와 현준의 아버지인 진팀장이 죽마고우라니. 게다가 현준이 곧 개발자로 전면에 나선다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진성을 제외한 사람들은 그 사실을 믿는 눈치였다. 그 중 평강공주만이 내심 엘비스가 운영자가 아님을 확신할 뿐이었다. 진성은 어이가 없었다. 서로 운영자라니.... <인트로 테스트 첫 주 첫째 날, 실험 일지> 1. 자기 방어기제 중 하나인 투사 현상 -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나타내지 않고 닉네임으로 자연스럽게 바꾸었음. 그런 것에 전혀 거부반응이 없었음. 하지만 젊은 세대들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 2. 자기 방어기제 중 하나인 과잉행동 현상 - 실제 운영자가 아닌 세 사람이 운영자라고 주장함. 그 중에 조팀장의 연기도 있었지만 확실한 과잉행동이었음. 테스트가 끝나고 테스터들은 각자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숙소에서의 접촉은 허락되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테스터들은 숙소의 넓은 회의실과 비슷한 곳에 모였다. 심리 전문가와 함께 허락되는 공식적으로 만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테스터들은 이제 확실히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가상현실 로플에서의 모습과 같거나 비슷한 모습은 찾기 힘들었다. 명확하게 로플에서의 모습과 현실의 모습은 전혀 매치가 되지 않았다. 의아해 하는 테스터들의 모습에 심리 전문가가 입을 열었다. “다들 어떠셨습니까?” “...........” “처음으로 로플이라는 가상현실을 경험하셨는데 느낌이 어떻습니까?” “...........”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확실히 이렇게 현실에서 서로를 확실히 볼 수 있는 상태에서는 말이 쉽지 않았다. 오히려 로플에서처럼 우스꽝스러웠지만 이미 잘 알고 있는 이미지로 덮여져 있을 때에 더 말이 쉬웠다. 자발적인 대화는 쉽지 않았다. 거의 10분 가까이 심리 전문가가 혼자 떠들고 나서야 몇 사람이 입을 열었고 그 뒤로 많은 사람들이 비교적 자연스럽게 말했다. 대화는 거의 대부분 로플이라는 가상현실에 대한 감탄과 이런 게임이 나온다면 꼭 해 보고 싶다는 말이었다. 심리 전문가는 개개인에게 시간을 들여서 질문을 하면서 그 대답하는 태도와 대답의 내용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1시간이 훨씬 넘는 시간 동안 테스터들끼리가 아닌 심리 전문가와의 대화를 나눈 테스터들은 곧 자신들의 숙소로 갔다. 그 시간 이후부터는 완전히 고립되었다. <인트로 테스트 첫 주 첫째 날, 상담 일지> 1.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2.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열등감을 느끼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3. 로플에서 분명 만났던 사람인데도 그 상대를 정확하게 알 수 없기에 처음 만나는 사람보다 더 낯설어 한다. 오히려 생전 처음 만난 사람인 심리 전문가에게 더 마음을 여는 것 같다. 첫날의 테스트가 끝이 났다. 원래 오전시간만 하려고 했던 진성은 첫날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기 때문에 끝까지 참여했다. 진성은 자신이 일정 시간만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이 테스트에 영향을 주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렇게 된다면 운영자인 것이 탄로 나지 않을까 했다. 하지만 첫날의 테스트 후에 이미 평강공주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운영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둘째 날부터는 테스터들을 분리시켜 테스트를 진행시킬 예정이었기 때문에 그리 큰 문제는 없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운영자라는 것이 알려져도 크게 영향을 줄 것은 아니었기에 조팀장은 진성에게 그리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했다. 조팀장은 로플에서 이상한 방법이었지만 이미 사람들에게 운영자로 알려져 있는 상태였다. 프로팀 연습실로 들어온 진성은 반가운 현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때? 테스트는 잘 됐어?” “응.... 로플, 정말 끝내준다. 진짜.. 대단하더라. 밀리터리 아트도 대단하지만 로플에 비하면 한 수 아래다.” 진성의 말에 현준은 다가와 앉으며 눈빛을 반짝거렸다. 진성은 현준에게 로플에 들어간 후부터 테스트 마칠 때까지의 일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진성이 설명하는 사이 진규와 범현까지 가세했고 마지막 심리 전문가와의 미팅까지 설명하고 나자 유나, 혜연, 한석, 현호까지 모두 유심히 듣고 있었다. “정말 해보고 싶은 게임이네요.” 혜원을 선두로 모두들 한 마디씩 했다. 특히 그 타이즈 삼총사 얘기에 유나와 혜연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잠시 동안 로플 테스트로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현준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다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아서 바삐 움직였다. 그 모습에 진성은 현준에게 웃으며 말했다. “다들, 기합이 들었는데... 어떻게 한 거야?” “아... 이거? 하하하.. 연습 제대로 하지 않으면 나와 1:1 연습 게임을 한다고 말했지.” “뭐? 그랬어? 하하하... 이해가 된다. 그런데 한석은 왜? 한석 정도면 너와 붙어도 그리 많이 밀리지는 않을 텐데.....” “휴우.... 바늘 가는 데 실이 안 따라가겠냐? 아니, 실 가는데 바늘이 따라가는 거지.” “아.. 하하하.. 그래. 아무튼 이제 완전히 현준이 네가 이 프로팀을 꽉 잡고 있구나. 이러다가는 재필 형이 할 일이 없어지는 거 아니야?” “설마... 자, 가자.” 현준을 비롯한 프로 게이머들이 연습하고 있는 것은 대부분 단체전이었다. 개인전의 연습은 그야말로 종목 이름처럼 개인적으로 할 수도 있었지만 단체전은 전 선수가 다 같이 연습을 해야 했기에 시간을 제대로 지켜야 연습 시간을 제대로 맞출 수 있었다. 특히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열리는 이벤트 행사에서 모든 패치가 적용된 문명 온라인으로 게임을 하기 때문에 연습에 박차를 가했다. 정식 게임을 아니었지만 한국, 중국, 일본의 최정상팀이기 때문에 자존심이 걸려 있었다. 매니저 서재필은 그런 것을 의식해서인지 은근히 연습에 대한 압력을 넣었고 현준도 그에 따라 조금 더 연습에 대한 것은 엄격하게 다뤘다. 연습은 저녁시간을 훨씬 넘겨서야 끝이 났다. 8명의 프로 게이머들은 모두 햄버거와 치킨 같은 것들로 간단히 저녁을 해결했고 한동안 휴식을 한 뒤에 곧 서로 짝을 찾아서 개인 연습에 들어갔다. 현준과 서재필이 압력을 넣는다고는 하지만 사실 자소 소프트 프로팀의 분위기는 여전히 가족 같은 요소가 많았다. 게임에 대해서는 몰아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게임만 끝나면 훈훈한 느낌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던 것이다. 다들 1:1 개인전을 대비해서 연습에 들어갔다. 8명 중에 3명은 개인전에 나갈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단체전을 원한다고 해서 준비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완전히 발표가 나기 전까지는 연습을 해야 했다. 게다가 개인전의 1:1 게임 컨트롤 연습은 당연히 단체전에도 도움이 되었기에 빠뜨릴 수 없는 연습이었다. “어.....?” 남은 사람은 현준과 진성 뿐이었다. 다들 실력에 있어서 차이가 나는 현준을 꺼려했기 때문이었다. 한석은 충분히 가능했지만 요즘에 유나에게 개인 레슨 하기에도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빴다. 나머지 게이머들은 현준이 엄격해서라기보다는 실력 차이를 많이 느꼈기에 같이 1:1 게임 하는 것을 조금 주저하고 있었다. 진성은 현준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 오랜만이네. 어때?” “하하.. 좋지. 오랜만에 복수전이다!” 진성의 말에 현준은 웃으며 말했다. 진성은 문명 온라인 프로 게이머로서 연습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바로 현준과의 게임에서 제대로 게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종 밀리다가 져버린 것이다. 이제까지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그런 자만심의 결과가 아닌가 스스로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프로로서 돈을 받는 입장인 진성은 문명 온라인에 집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진성은 로플팀을 돕는 조건 중 하나가 문명 온라인 프로 게이머 일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조건이었기에 어렵지 않게 로플의 인트로 테스트에서 빠질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로플팀에 굉장히 미안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명 온라인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테스터들은 한 명의 테스터가 일신상의 이유로 테스트를 그만 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모두 다 그만 둔 사람이 운영자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인트로 테스트가 시작한 지 채 3일도 되지 않아 테스터들의 로플에 대한 감탄은 사라지고 오히려 불만이 터져 나왔다. 아주 좋은 곳임에는 분명했지만 확실한 것은 현실이 아니라 게임 속이라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서로 친한 사이도 아닌 사람들이 아무런 목적도 없이, 즐길 것, 시간 보낼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곳에서 하루 종일 빈둥거리며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상당한 스트레스였다. 욕구불만이었다. “도대체 무슨 테스트를 하기에 이런 곳에 가둬 놓는 거지? 게임이라면 당연히 뭔가 재미있는 것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휘유... 정말 시간 죽이는 것도....” “어쩔 수 없잖아요. 어차피 아르바이트인데... 지겹기는 마찬가지지만 이런 곳이 가상현실이라니.. 대단하기는 대단하네요.” “저는 단순히 이런 것이 게임이라면..... 절대로 안 할 겁니다. 뭔가 할 수가 있어야 재미도 느끼고 이런 곳에 접속할 거 아닙니까? 접속기만 해도 상당히 비쌀 것 같은데... 그런 돈 주고 이런 곳에 들어와서 이렇게 시간만 보내야 한다면....휴... 절대 사절입니다.” 테스터로 사전에 2주간은 지시에 따른다는 계약을 했기 때문에 참는 거지 그렇지 않았다면 대부분이 테스트를 그만 두었을 것이다. 아니, 벌써 그 계약을 해지하고 테스트를 그만두려는 사람도 나타났다. “저... 저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요. 이런 곳에서... 이렇게 있으면서 돈을 받느니 차라리 밖에 나가서 일을 하겠어요. 조금 아깝기는 하지만.... 계속 이렇게 있으면 미칠 것 같아요...” 결국 말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보기에 좋은 경치더라도 계속 보게 되면 질리게 마련이다. 테스터들은 변화가 없는 하루하루에 지쳐버린 것이다. 이런 것은 미리 예견된 사실이었다. 진팀장을 비롯한 로플 개발팀은 전문가들과의 정보 교환으로 미리 이런 현상을 예상했다. 할 수 있는 일도 없이, 그렇다고 강한 동기도 없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짜증을 내는 것이 정상이었다. 진팀장은 로플의 환경에 변화를 주었다. 창창하던 하늘은 아주 무거운 구름으로 완전히 가려졌고 비가 내리고 세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3일 만에 처음으로 날씨에 변화가 일어나자 테스터들은 밖으로 나와서 그 광경을 보기 시작했다. 진짜 같은 비였다.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바람은 더욱 거세어졌다. 한참을 지나자 사람이 밖에서 제대로 걸어 다니기도 힘들 정도였다. 밤이 되자 테스터들은 모두 회관으로 모였다. 첫날 모인 것을 제외하고는 처음으로 다 같이 모였다. 단순한 비바람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정도로 날씨는 험악해졌다. 모든 것이 통제 가능한 가상현실 속에서 갑자기 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는 것은 의도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다. 바람은 점점 더 심해져서 건물 안으로 피신해 있어도 위험을 느낄 정도였다. “이야... 이거 이러다가 건물 무너지는 것 아닙니까?” 그 중 한 사람이 걱정스러운 듯 무심코 말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이런 가상현실에서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렇게나 현실적인 곳에서 그런 일은 당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하하하.. 설마 죽기야 하겠습니까? 보통 게임이라면..... 다시 시작할 텐데.. 이 게임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하하하..” 호기롭게 웃었지만 곧바로 핀잔이 들렸다. “지금 웃음이 나와요?” “게임이잖습니까? 이런 것이 위험하다면 테스트를 계속 하도록 하겠습니까? 중지시켜도 벌써 중지시켰겠지요.... 아마 별 위험이 없을 겁니다.” “번쩍!” 그 순간이었다.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졌고 섬광이 번쩍했다. 밝았던 전등이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 테스터들은 게임이라고 중얼거리면서 아무렇지도 않으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에 노출되자 천천히 게임이라는 사실이 머리에서 지워지고 있었다. 분명히 게임이지만 이런 어둠은 경험하기 싫었다. 도시에 익숙한 테스터들이 완전한 어둠을 제대로 알 수는 없었다. 벼락 한 번에 테스터들은 긴장했다. 자신도 모르게 3일 동안 그나마 친해진 사람들끼리 조금씩 모였다. 낮과는 달리 테스터들은 점점 가까이 모였다. 전등은 여전히 깜박거렸다. “번쩍!! 꺄악.” 꽤 오른 시간 후에 다시 한 번 벼락이 떨어졌다. 완전히 전등이 나가버렸다. 완전한 암흑이었다. 갑자기 비가 오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소리가 훨씬 더 크게 들렸다. 눈앞의 손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비가 오는 소리와 강한 바람에 삐거덕거리는 건물의 흔들리는 소리만 가득했다. 테스터들의 머리에는 게임이라는 사실이 완전히 사라졌다. 가상현실이라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한 채 가까이 있던 다른 사람들과 손을 잡고 있었다. 상대가 남자이던 여자이던 별로 상관이 없었다. 오직 자신이 홀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만 확인할 뿐이었다. “번쩍! 끼아악!” 다시 한 번 벼락이 떨어졌고 비명이 울리는 그 순간 테스터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보인 서로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다시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평소 이런 칠흑 같은 어둠을 경험해 보지 못했던 테스터들은 점점 발끝부터 공포에 물들기 시작했다. 확인했던 테스터들은 서로 모였다. 자신들도 모르게 테스터들은 3개의 그룹으로 모여 있었다. 인원수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확실히 모여 있었다. “삐거덕.. 삐거덕...” 바람이 더 세게 부는지 건물이 흔들리는 소리가 더 심하게 났다. 어두운 가운데 소리는 더 크게 들렸고 테스터들이 서로 잡은 손에는 힘이 더 들어갔다. 한 순간도 놓치지 않으려는 발버둥이었다. 점점 더 흔들리는 소리는 커졌고 테스터들 모두 건물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을 할 정도였다. “...... 여... 여기.. 여기에 있으면... 무너지지 않을까요?” “.. 그.. 그렇지만...” 한 사람이 힘들게 말을 꺼냈지만 단 한 사람만이 짧게 대답했을 뿐 나머지는 아예 입을 열지도 않았다. 당연히 나가야 했지만 29명의 사람들은 나가봐야 상황이 더 나아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일단 나갑시다.” 한 명이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아니, 나가기 위해서 손으로 앞을 더듬으면서 전진했다. 가끔 번쩍거리는 번개로 인해 밖으로 나가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엘비스, 조팀장이었다. 그 움직임에 엘비스가 속해 있던 그룹의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로 아무런 의논도 없었지만 거의 동시에 엘비스가 속했던 그룹의 멤버들은 일제히 움직였다. 하지만 다른 두 그룹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엘비스의 그룹이 힘겹게 기어서 밖으로 나갔다. 엘비스의 그룹이 다 나간 순간이었다. “우지끈... 꽈꽝...” 순식간에 회관의 건물이 무너져 내렸다. 갑자기 불어 닥친 돌풍으로 인해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먼저 나갔던 테스터들은 뒤의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아아악! 까아악! 으아아악!” 건물 안에서도 비명이 들렸고 밖에 있던 사람들의 고함소리도 강한 바람 소리와 같이 섞여서 들렸다. 정말 손 쓸 틈도 없이 무너져 내렸다. 한 순간이었다. 나왔던 사람들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린 무더기 앞에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많이 친했던 것은 아니지만 같은 테스터였는데 이렇게 눈앞에서 건물의 잔해에 덮여 버렸으니 넋이 나가버렸다. 테스터들에게 이 사태가 게임 속의 가상현실이라는 생각은 없었다. 그 때, 로플의 3일째 테스트는 끝이 났다. <인트로 테스트 첫 주 셋째 날, 실험 일지> 1. 처음으로 게임, 가상현실이라는 사실을 테스터 전체가 잊어버림. 2. 무의식적으로 서로 갈라진 테스터들. 3개의 그룹으로 갈라졌음. 3. 메디컬 테스트 요망. 테스터들은 눈을 떴다. 몸에는 땀으로 흥건했다. 밝은 빛과 복잡한 연구 시설에 테스터들은 현실임을 알았다. 그와 동시에 자신들의 그런 반응이 어리석었음을 느꼈지만 다시 또 그런 상황이 된다고 해도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만큼 평소에 경험하지 못한 것들은 쉽게 부정할 수 없었다. 게다가 로플에 익숙해지니 현실과 다름없는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에는 머리로 부정할 수 있어도 결국 극한의 상황이면 몸이 머리보다 앞섰다. 테스터들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테스터들은 쉬기 위해서 숙소로 안내되었다. 테스터들은 숙소로 가면 혼자라는 느낌에 공포심을 언뜻 가졌지만 현실이라는 것에 자제할 수 있었다. 테스터들은 충분한 휴식이 보장되었다. “휴우.... 정말... 대단하네요. 진짜인 줄 알았습니다. 아무리 게임이라, 가상현실이라고 머릿속으로 외쳐도 결국 몸이 움직이지 않더라구요. 밖으로 나가려는데 다리가 떨리는 것 있죠. 휴우.... 십년 감수했어요.” 조팀장은 깨끗이 씻고 나와서 진팀장과 곽팀장을 앞에다 두고 그 생생했던 경험을 말하고 있었다. 조팀장 자신도 땀을 흘릴 정도로 긴장했고 한 순간 게임이라는, 가상현실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릴 정도였다. 진팀장과 곽팀장은 조팀장의 말을 들으면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눈앞에서 그 건물이 무너지자 정말.. 그 순간.. 눈물이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나도 모르게 다리 힘이 빠져 주저앉게 되었고요. 휴우... 정말.. 대단해요. 휴우..” 조팀장은 아직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 듯 계속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휴우.. 제가 생각해 봤는데요.... 게임 상에서 이런 기후와 같은 전체적인 재난은 꼭 필요할 것 같습니다. 너무 심할 경우에는 밸런스가 깨지겠지만 우리나라에 늦여름에서 초가을까지 태풍이 오는 것과 같이 주기적이면서도 정확히 그 시기를 알 수 없도록 만들면 게임에 긴장감을 더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떻습니까?” “음.... 좋은 의견이기는 한데... 혹시 테스터들의 몸과 정신에 어떤 타격이 가지는 않을까? 내가 보기에 자네가 그 정도라면 여린 사람은 좀 충격을 받겠는걸...” “.....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만. 충분한 홍보와 실제 게임 시작 전에 강도가 약한 비슷한 상황을 만든다면 극복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가? 그래. 그 문제는 자네가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하게. 게임이 너무 실감이 나서 출시를 하지 못한다면 정말 억울할 테니까.” 문명 온라인 프로팀 사무실에는 8명의 프로 게이머가 모두 모여 있었다. 평소와는 달리 사무실에는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길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충분한 게임을 한 결과 매니저 서재필과 게이머들 자체의 상의 결과를 통해서 개인전과 단체전 출전 선수를 결정하려는 순간이었기에 흔치 않게 분위기가 조금은 딱딱했다. “이거 왜 이래? 이런 분위기 오랜만인데.. 하하하.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여러분은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되니까. 게다가 프로는 도전이라고. 도전!” “.......” 아무도 자신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지 않자 서재필은 약간 머쓱했다. 하지만 혼자 슥 웃고는 말을 이었다. “시간이 조금 남아 있지만 그래도 확실히 정해야 연습을 집중적으로 할 수 있겠지? 자, 이제 발표할 테니까 그 결과에 일단은 따라주기를 바란다. 이의가 있다면 실력으로 보여라. 알겠지?” “네..” “좋아. 개인전에 출전할 사람만 발표하면 되겠지? 먼저 강진성.” 당연한 분위기였다. 이미 진성은 개인전의 대표 주자였다. 개인전의 우승을 노리는 가장 강력한 선수임은 자타가 공인했다. 다른 게이머들이 개인전을 주저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게이머 스키피오, 강진성과의 비교 때문이기도 했다. 진성 역시 그 말에 이미 예상했기 때문에 별 반응이 없었다. “그 다음은.... 한혜연.” “네? 저요?” 혜연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조금은 예상했지만 그래도 자신은 단체전에 남기를 원했다. 예쁜 얼굴에 커다란 눈망울로 아니라는 말을 해달라는 애원을 했지만 당연히 서재필은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이럴 때 보면 은근히 여자에게 강한 서재필이었다. “다음은... 곽현호다. 이 세 사람은 이제부터 확실히 개인전 준비를 하도록.” “재필이 형! 저와 현호를 떨어뜨리면 어떻게 합니까? 저와 현호는 친구라니까요...” 서재필의 표정에 서리가 끼었다. “그래서?” 하지만 범현은 그런 서재필의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 “제가 차라리 개인전으로 가겠습니다!” 현호는 가만히 있는데 오히려 범현이 나섰다. 절대 안 된다는 결의에 찬 목소리였다. 하지만 되돌아온 대답은 싸늘했다. 그 목소리에 범현의 기세는 순식간에 꺾이고 말았다. 평소 장난치던 그런 목소리가 아니었다. “누구 맘대로?” “네? 아... 그거야....” “지금 장난해?” 나직하면서도 전혀 떨림이 없는 목소리였다. 범현은 흠칫했다. 처음 들어보는 서재필의 화난 목소리였다. “아니..... 그게....” “착각하지마. 단체전이 게임을 더 잘해서 뽑았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개인전의 진성은 현재로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수야. 개인전과 단체전은 그 게임 스타일에 따라 정한 거니까 군소리 하지 마. 그리고 조범현, 현호가 친구라는 것은 잘 알겠는데 앞으로도 계속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도 이제까지와는 달리 대할 테니까 알아둬. 너희들은 프로야 프로. 똥오줌은 가려. 알겠지?” “.......네..” 범현이 처음으로 기가 죽은 모습을 보였다. 서재필은 그런 모습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나머지 말을 다했다. 봇물 터지는 듯했다. “곧 미국으로 갈 예정이라는 것은 잘 알겠지. 만반의 준비를 하도록.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너희들은 프로야. 돈을 받고 일하는 거지. 반대로 말해 볼까? 너무한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회사에서 필요 없다고 하면 짐 싸서 나가야 돼. 너희들 뿐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야. 할 일은 확실히 해야지. 갑자기 인원이 늘어나서 요즘 그 분위기가 과도기인데 내가 봐서 안 되겠다 싶으면 내 스타일은 아니지만 제 값어치는 해야 하기 때문에 강압적인 방법도 사용할 거다. 이제까지의 분위기가 좋으면... 그것을 유지하려고 노력을 해.” “........” 갑자기 쏟아진 서재필의 말에 다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서재필은 그치지 않았다. 한꺼번에 쌓았던 말이 터져 나왔다. “말이 나왔으니 말하는데 범현아, 현호야, 유나야, 혜연아 너희들 진규에게 연습 게임에서 1:1로 해서 제대로 이겨본 적이 있냐?” 처음에 들어올 때는 진규의 존재를 그다지 인정하지 않았던 네 명이었지만 막상 게임을 해 보니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그 뒤로는 비슷한 상대를 골랐지 진규와는 제대로 게임을 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진규 역시 실력이 낮은 사람보다는 자신의 우상인 진성이나 현준을 쫓아다녔기에 더욱 그랬다. 그러니 당연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 “너희들 현준과 진성과는 아예 게임 자체를 안 하지? 그냥 피해버리지? 그리고는 너희들끼리 시간 때우기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고만고만한 실력끼리 게임을 해서 뭘 하겠다는 거야? 최소한 자신보다 강한 사람들과 붙어서 뭔가를 배워야지. 유나야, 네가 들어오고 나서 진성이나 현준이와 가장 게임을 많이 한 사람이 누구야?” “...... 진규요.” 유나는 모기 목소리로 대답했다. 확실히 누구나 기피하는 진성과 현준을 귀찮게 쫓아다니는 사람은 진규 밖에 없었다. “너희들.... 진규가 어떻게 연습을 해서 이런 실력이 된 줄 모르지? 진규가 처음 프로팀에 들어왔을 때는 한석도 당연히 없었고 달랑 현준과 진성 밖에 없었어. 그 때에도 진성과 현준은 문명 온라인에 있어서 최고의 실력을 가졌었지. 처음 들어온 진규는 너무나 큰 실력 차이에 좌절도 했지. 한동안 속 좀 썩였지만 조금 지나더니 아예 회사에서 밤을 새면서까지 연습을 시작하더라. 자신의 실력이 안 되니까 그냥 안 되는구나가 아니라 좀 더 확실하게 끌어올릴 방법을 찾았던 거다. 게다가 말도 안 되게 지는 것이 뻔한데도 저기 저 진성과 현준을 따라다녀 귀찮게 만들 정도였지. 뭐, 요즘도 귀찮게 만드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 같지만. 너희들은 지금 최선을 다해 연습하고 있다고 생각해?” 서재필은 직격탄을 날렸다. “..........” 서재필의 까발림에 새로 들어온 네 명은 제대로 말도 못했다. “김한석!” 불똥은 한석에게도 튀었다. 서재필은 얼음장 같은 눈빛으로 한석을 쳐다보았다. 한석 역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네?..네...” “연애는 밖에서 하도록. 팀에서는 팀워크가 최고다. 그것을 해친다면... 용납할 수 없다. 알겠나?” 서재필은 직선적으로 말했다. 최근 유나와의 썸씽 때문에 알게 모르게 영향이 있음을 서재필은 감지하고 있었다. “네......” “진성이와 현준, 진규에게 물어보면 알겠지만 그 세 명이 한참 게임 리그 준비를 하는 동안 내 입에서 연습을 하라던가, 이런 딱딱한 말이 나온 적은 거의 없었다. 왜냐구? 실력도 실력이지만 자신이 알아서 병법서까지 구해다 보는 녀석들을 무슨 수로 다그쳐? 너희들은 아직 모르지? 진성이와 현준, 진규의 실력이 대단한 이유는 단 한 가지, 노력이다. 손자병법은 물론이고 육도삼략을 비롯해서 서양의 고대 전쟁사까지 줄줄이 꿰고 있는 녀석들이다. 특히 진성이는 그 병법들과 전쟁사의 교훈을 직접 문명 온라인의 전략으로 만들어내었다. 다들 알고 있는 로마의 시민군 양성과 그 전설적이라고 불리는 더블 스트러티지는 단순히 운이 좋아서 만들어진 게 절대 아니다. 현준 역시 마찬가지다. 막강한 진성이의 실력을 따라가기 위해서 나름대로 엄청난 노력을 했다. 아, 너희들 혹시 현준이 우리 회사 알파 테스트 아르바이트생이었다는 거 아냐?” 서재필은 날 잡았다는 듯 현준의 얘기까지 들고 나왔다. 당연히 처음 듣는 말에 다들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네? 아르바이트생?” “.... 현준이는 처음에 정식으로 들어온 프로 게이머가 아니었다. 진성이 친구라고 해서 내부 알파 테스트 아르바이트생으로 들어왔다가 엄청난 노력으로 프로 게이머가 된 케이스다. 그리고 진규 역시 리틀 스키피오라는 닉네임을 얻기 위해서 쏟은 코피만 해도 장난이 아니다.” “........” 입에서 불을 내뿜는 서재필의 말에 새로 들어온 게이머 뿐 아니라 진성을 비롯한 게이머들도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서재필이 이런 말을 하게 된 이유에는 자신들의 잘못도 포함된 것이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너희들을 무조건 책망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최고의 팀이다. 최고의 기량을 가졌기 때문에 최고의 팀이 아니라 최고의 팀이 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최고의 팀인 것이다. 진성과 현준 그리고 한석, 이 세 사람만큼 대단한 연습 상대가 있는 팀이 어디 있겠냐? 그런 면에서 너희들은 복 받은 거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너희들이 그 복을 발로 차고 있지는 않느냐, 복에 겨워 자만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휴우..... 다시는 이런 말을 하지 않기 바란다. 이만.” 서재필은 말하다가 중간에 끊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서재필이 나간 후에도 사무실 안은 정적으로 가득했다. 그런 어색한 때에 현준이 입을 열었다. “재필이 형이 우리를 아끼니까 이렇게 말을 하는 거지. 그렇지 않았다면 막말로 짐 싸라고 했겠지? 안 그러냐?” “......” “이제 잘못한 것을 알았으니까 고치면 되지. 고치면 되는 거야. 자, 힘내라고. 조범현, 네가 힘을 내야지 다들 힘을 낼 거 아니야? 어이 현호, 한 번 웃어봐. 네 웃음보는 게 내 소원이라고. 우리 예쁜 혜연이 눈물 뚝! 유나야.. 그래.. 그래...” 현준은 내심 서재필을 욕하면서 뒷수습을 했다. 서재필이 나가고 나니 한꺼번에 터진 두 여자의 울음을 달래느라 한석과 현준이 각각 달라붙었다. 진성은 친구인 현준에게 감탄했다. 그런 분위기에 스스로 나서서 부드럽게 만드는 것을 보고 자신은 절대로 하지 못하는 일이라 스스로 인정했기에 더욱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런 마음에 진성은 범현에게로 갔다. “범현아, 열심히 하면 되지. 안 그래? 분하지?” “......... 네..” “분하면 꾹 참고 실력으로 보여줘. 네가 실력만 쌓으면 완전히 달라질 사람이니까. 아, 참고로 너, 분하다고 해도 절대 매니저에게 대들지는 마라. 개박살 날 테니까.” “네?” “아, 내가 얘기 안했었나? 매니저, 재필이 형 건달 4~5명은 거뜬하게 제압할 실력이라니까. 지난번에 중국 가서 그런 일이 있었거든. 중국 천지회라고 유명한 조직 6명을 막 날아서 제압하더라고. 현숙이 누나와 소희 누나가 그 증인이니까. 나중에 물어봐... 아무튼, 자 힘내라고.” 진성은 위로인지 아니면 아예 매니저 앞에서 꼬리를 내리라는 말인지 모를 말을 범현에게 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평소 말이 없던 진성이 하니까 적지 않게 감동하는 눈치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상황이 수습되었다. “오늘 저녁에 내가 저녁 살 테니까 다들 단합대회 한 번 거하게 하고 내일부터 정말 열심히 한 번 뛰어 보자고. OK?" 현준의 제안이었다. 한석과 진성이 그런 현준의 말에 분위기를 띄웠다. “당연하지. OK!!!! 오늘은 거하게 먹고 열심히 하자!” “그래.. 그래.. 오랜만에 현준이 사는데 다들 먹고 힘내자!” 첫 주의 인트로 테스트가 끝이 났다. 폭풍우 뿐 아니라 지진까지 나는 등 테스터들은 호된 경험을 해야만 했다. 심지어 마을을 직격하지는 않았지만 바다에 운석이 떨어지는 것까지 경험해야 했다. 실로 단 한 번도 제대로 당하기 힘든 시련이었다. 진팀장을 위시한 요람 멤버들은 테스터들이 점점 그런 자극에 적응할 줄 알았다. 아무리 실제와 같은 환경에 엄청난 환란이 일어났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의 적응을 예상했다. 실제로 그런 면도 있었지만 일정 이상의 자극은 머리가 아니라 몸이 먼저 반응을 했다. 몸이 반응했기 때문에 그 적응 속도가 너무 느리거나 아니면 적응을 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런 이유로 조팀장이 말한 의견은 설득력이 있었다. 게임이지만 현실적인 면을 보여주는 한 방법으로 기후나 환경의 변화는 충분히 가능성이 보였다. 태풍과 같은 재난, 문명을 파괴할 정도가 아닌 지진이라면 충분히 게임에 현실성을 부여할 수 있었다. 게다가 죽음에 대한 적절한 페널티가 부여된다면 더욱 더 효과가 있을 것이다. 둘째 주의 인트로 테스트를 앞두고 요람의 핵심 멤버들이 모여서 미팅을 했다. 인트로 테스트에는 중도하차한 진성도 미팅에 참석했다. 진팀장이 입을 열었다. “험험.... 한 주 동안은 다들 정말 수고했다. 모두가 노력해서인지 지난주에는 아무런 문제점도 없이 테스트치고는 아주 훌륭한 테스트였다. 정말 수고했다. 자, 다들 박수!” “.. 하하.. 짝짝짝...” 자신들 스스로를 격려 겸 축하하기 위해서 박수를 쳤다. 조용해지자 진팀장은 말을 꺼냈다. “둘째 주의 테스트에 대해서 얘기를 나눠 보자고. 조팀장?” “네, 팀장님. 둘째 주는 크게 내부적 갈등과 외부적 자극을 약간의 시간을 두고 테스터들에게 실험할 예정입니다. 이미 다들 알고 있겠지만 내부적 갈등의 주를 이룰 것은 바로 주어진 무기의 부족입니다. 그나마 다루기 쉬운 권총과 소총을 지급할 생각인데 그 파워나 개수가 충분하지 않게 공급될 겁니다. 20명의 남자와 10명의 여자로 구성된 테스터들에게 소총 15정, 권총 16정을 지급하게 됩니다. 총기 수로는 테스터와 저를 포함한 31명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 파워와 제한된 탄약으로 소총의 가치가 높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그 때 테스터들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관찰하는 겁니다.” “테스트 목적은?” “바로 게임에 필요한 적당한 긴장과 성취욕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상대적인 우월감에 대한 관찰과 게임에 공급할 적정 양의 아이템에 대한 측정입니다. 아이템에 대한 것은 한 번의 테스트로 불가능한 만큼 지속적으로 테스트가 실시될 예정입니다.” “좋아, 그 다음 외부적 자극에 대해서도 말해 보지.” “외부적 자극이란 한 마디로 말해서 테스터들에게 공통된 적을 만드는 것입니다. 누구는 공격하고 누구는 공격하지 않는 선택형 공격 몬스터가 아닌 테스터들이라면 누구나 공격하는 몬스터를 만들어 테스트 공간에 풀어 놓을 예정입니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여자 테스터들만 공격한다든가 하는 선택형 공격 몬스터도 테스트할 생각입니다.” “음.. 목적은?” “외부적이면서 공통의 적이 나타나면 앞서 나왔던 갈등이 어떤 식으로 해결되고 어떻게 서로 단결해서 공통의 적에게 대응하는지에 대한 관찰입니다. 일단 몬스터는 무리를 짓지 않고 홀로 다니는 것부터 시작해서 조직적으로 공격하는 것까지 다양합니다. 하지만 절대로 테스터들의 방어력을 능가하게 만들지는 않을 겁니다. 또한 실제 살아 있는 것 같은 동물들의 습격과 그 습격을 막아내는 과정에서 발생되는 피에 대한 반응 역시 살피게 되어 로플에서의 현실감, 특히 죽음에 대한 현실감에 대한 자료로 활용될 겁니다.” “다들 알겠지? 앞으로의 일도 적지 않지만 테스트에만 신경을 다 쓰도록 하자고.” 진팀장은 세부적인 계획으로 넘어가서 하나하나 각 파트의 준비과정을 확인했다. 회의는 거의 2시간이 넘어서야 끝이 났다. 매니저 서재필의 폭발은 프로 게이머들에게 오히려 약이 되었다. 그 동안의 어수선한 분위기에 휩쓸렸던 새로 들어온 게이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완전히 깨달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진성과 현준 그리고 한석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로 인해 연습 분위기는 더욱 더 달아올랐다. 새로 들어온 네 명의 게이머가 가장 많이 연습 경기 상대로 지목한 사람은 바로 진규였다. 아무리 열심이 있어도 진성과 현준, 한석의 경우는 그 실력 차이가 쉽게 메워질 수 없었기에 그나마 나은 진규에게 몰린 것이다. 특히 개인전에 출전할 예정인 혜연과 현호는 집중적으로 진규를 공략했다. 하지만 진규는 자신의 연습 시간이 줄어들자 울상이 짓고 말았다. 서재필은 그런 게이머들이 자랑스러웠다. 잘못한 것을 깨닫고 열심히 하는 모습과 솔선해서 팀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 애를 쓰는 현준, 진성 그리고 한석의 모습에 서재필은 이제야 제대로 된 팀이 될 조건은 갖추었다고 생각했다. 한, 두 명의 스타 플레이어로 이런 프로팀이 제대로 굴러가는 것은 절대 아님을 서재필은 알고 있었다. 오히려 이런 분위기, 이런 토양이 스타 플레이어를 길러낸다고 생각했다. 물론 진성과 현준, 한석과 같은 경우는 그 개인 능력도 상당히 뛰어남은 인정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일요일이 왔다. 그 전날 진팀장, 이팀장의 술자리에 현준과 같이 끌려가다시피 간 진성은 평소 마시는 주량의 두 배 이상의 술을 마시고 말았다. 원래는 진팀장과 이팀장이 술을 마시면 대리운전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갔지만 일단 도착하고 나서는 진팀장과 이팀장의 강권에 신나게 술을 마시고 택시로 집까지 오고 말았다. 덕분에 회사 돌아가는 이야기와 문명 온라인과 밀리터리 아트, 로플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지만 진팀장과 이팀장의 학창시절 사고 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2시가 넘어 들어왔는데도 새벽 5시가 되니까 눈이 떠졌다. 속이 조금 불편했지만 진성은 습관처럼 침대에서 일어나 컴퓨터 책상 옆에 둔 목검을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아무도 일어난 사람이 없을 시간이었다. 조심조심 내려온 진성은 시원한 냉수 한 잔 마시고는 현관문을 통해 연습하던 곳으로 천천히 발걸음 소리를 죽여서 움직였다. “휴우......” 이제 확실히 가을이 다가온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정확한 온도는 모르겠지만 체감 온도는 눈에 띄게 내려간 것 같았다. 진성은 심호흡을 몇 번 하고는 목검을 옆에 두고 팔극진결을 펼치기 시작했다. 진성의 팔극진결은 이제 동작이 끊어지지 않고 연결이 되어 굉장히 부드럽게 느껴졌다. 확실히 구분이 되었던 동작들이 서서히 합쳐져서 이제는 여러 동작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듯했다. 진성은 여전히 수련 후에 깨끗한 느낌을 주는 팔극진결을 제일 먼저 수련했다. 경의 성장이 아니라 마치 격한 운동 전의 준비 운동과 비슷하게 생각했다. 그런 진성의 생각은 발전에 대한 집착을 느끼지 않게 해 주었다. 도리어 복이 된 것이다. 한참 동안을 팔극진결로 몸을 푼 진성은 목검을 들고는 무명소검부터 차례로 펼치기 시작했다. 무명검법은 그 수련이 무명비검에서 멈춘 상태였다. 무명소검과 무명대검의 꾸준한 노력으로 인해 손에 완전히 붙어서 막대기 하나만 들어도 웬만한 건달 무리들은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실력은 되었다. 게다가 팔극신권으로 얻은 경지로 인해 싸움에 대한 안목이 굉장히 높아져 진성 스스로도 보통 사람과 손을 섞기가 두려울 정도였다. 아니, 두렵다기보다는 까다롭다는 말이 옳았다. 유맹의 멤버처럼 실력자라면 별 걱정 없이 대련을 한다고 해도 보통 사람이라면 그 힘의 조절이 꽤나 힘들었다. 무명비검에서 오랫동안 멈춘 상태였지만 그 오랜 기간이라는 것이 진성의 기준에서였지 결코 보통 무술가들의 기준은 아니었다. 오히려 평범한 무술가들의 눈에는 진성의 성장은 기이할 정도로 빨랐다. “휴우..... 역시 쉽지 않네. 정말 무명검법을 평생 동안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제대로 감이 잡히지도 않으니..” 검을 수평으로 하고 검 자체를 가슴까지 들어 올린 진성은 한숨과 함께 넋두리를 했다. 하지만 눈에는 전혀 그런 기미가 없었고 오히려 전혀 흔들림이 없는 검 끝만 노려보고 있었다. 빠른 속도록 검을 당겨 검 끝을 하늘로 세웠고 곧바로 사선으로 가르고 원래의 위치로 돌아왔다. 무명비검의 마지막에는 공간을 가른다는 표현이 나왔다. 그리고 사부인 유조도 생전에 무명비검은 공간을 자를 수 있어야 비로소 그 완성에 이른 것이라고 말했다. 진성은 공간을 자른다는 말 자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어떻게 가르고, 자른다는 말인가. 한 때는 심각하게 고민도 했지만 연습에만 몰두해 몸에 익힐 뿐 마음은 그다지 급하지 않았다. 진성의 검을 다루는 실력은 일취월장 늘어나 물샐 틈 없는 방어가 가능했다. 진짜 물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제대로 방어만 한다고 생각하면 사방, 팔방 둘러싸여도 꽤 오랫동안 버틸 수 있을 정도였다. 수련으로 거의 1시간 동안을 검과 씨름한 진성은 흐르는 땀을 닦고는 검을 한쪽에 두고는 섰다. 진성의 수련 중에 가장 신나는, 수련에 비해 그 성과가 두드러지는 것은 단연 축지법이었다. 이제는 거의 무의식중에서도 미미하나마 몸과 마음, 경의 일치를 이룰 수 있었다. 집중한 것과 그 차이는 많이 났지만 그래도 의식적이지 않은 상태라는 것에 진성은 만족했다. 그런 바탕이 되고 나자 수련의 속도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아직도 오랫동안 폭발적인 움직임은 불가능했지만 무술가로서 중요한 돌진의 순간이나 몸의 회피 순간에는 응용해서 절대 피하기 힘들다고 여겨지는 동작에서도 축지법의 응용으로 거의 완벽하게 피할 수 있었다. 그런 성과로 진성 스스로 원 실력으로는 유맹의 멤버들에게 이기기 힘들지만 이 축지법을 응용하면 싸움이라는 면에서는 또 다른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판단했다. 그 정도로 축지법은 씀씀이가 많았다. 하지만 평소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되도록 축지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정해진 공간 내에서 축지법을 끌어올린 후에 정확한 몸놀림을 위해 수련하던 중 진성은 스스로에게 의문이 생겼다. “.... 어째서 축지법이지? 몸과 마음, 경의 일치가 왜 축지법이라고 불리는 것일까? 몸과 마음, 경의 일체감.... 그 순간에 공간을 포개어 움직일 수 있으니까? 음...” 축지법의 요체는 일체감이었다. 구체적으로 다리를 움직이는 방법은 일체감에 비하면 중요하지 않았다. “...... 일체감.. 축지법....... 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어 사색에 잠겼던 진성에게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바로 이 축지법이 무명검법의 보법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진성은 왜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계속 던졌다. “왜 축지법이.. 왜 무명검법과... 왜.. 왜.. 왜....” 그 순간 진성의 뇌리를 관통하는 하나의 깨달음이 있었다. 왜 일체감이 발만을 위한 일체감인가? 왜 걷는 데만 사용하는 일체감인가? 진성의 생각은 거기에서 머물지 않았다. 발이 아닌 손이라면, 발이 아닌 청경이라면, 발이 아닌 팔극신권이라면. 진성은 스스로의 생각에 전율을 느꼈다. 일체감으로 인한 자연스런 효과로 감각이 극대화되었음은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몸과 마음, 기의 일체감은 그 자체로도 많은 효용이 있었다. 진성은 그런 일체감을 이제까지 오로지 걷는 데만 쓴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은 것이다. “아..... 공간을 자른다, 공간을 가른다..... 이제야 알겠군... 이제야... 하하하...” 또한 무명비검의 마지막인 공간을 자른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무명비검을 완전히 체득하고 그 다음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일체감이 보법인 축지법으로서만이 아닌 몸 전체가 완전히 익혀 동작 자체에 축지법의 묘미가 가미되어야 함을 알았다. “휴...... 정말.. 정말 .. 대단하군..” 진성은 한쪽에 세워 둔 목검을 잡았다. 이런 느낌이 왔을 때 최대한 몸이 익혀야 함은 이제 한 명의 무술가로서 인정을 받는 진성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진성은 온몸을 휘감고 있는 일체감을 건드리지 않고 움직임을 계속 시도했다. 확실히 발놀림에 그 초점을 맞추다 이제 팔을 휘두르는 동작을 시도하자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 미미한 효과는 곧 나타났다. 진성의 목검이 공간을 가르는 듯 보이지 않았다가 다시 나타나곤 했다. 워낙 순간적이었지만 진성이 그런 현상을 놓칠 리가 없었다. 진성은 너무나 기뻤다. 스스로 집착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그 자체도 집착일 수 있었다. 진성은 오랫동안 풀리지 않았던 수수께끼 하나가 완전히 풀렸음을 확신했다. 진성은 멈추지 않았다. 처음 축지법을 연마하던 것과 비슷한 단계였지만 부지런히 일체감을 충분히 느끼면서 목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성은 중대한 사실을 발견했다. 이 일체감을 이용한 공격법을 완성시키면 그야말로 진성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공격, 타격이 되리라 확신했다. 무명검법의 경우 상대가 검으로 막는다는 개념 자체가 불가능했다. 공간을 접으며 날아오는 검을 무슨 수로 막을 수 있겠는가? 제대로 컨트롤이 된다면 목표물 앞에서나 목표물 속에서 공간을 뚫고 나올 검을 무슨 수로 막을 수 있을까? 진성은 한편으로 너무도 대단한 것을 발견한 것은 아닐까 해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그런 정도의 컨트롤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제까지 해 왔던 수련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함을 알았다. 게다가 더욱 더 어려운 수련일 것으로 예상했다. 이전의 경지를 완전히 잃어버리지는 않겠지만 이런 공격을 가능케 하려면 그 공격 방법인 무명소검, 무명대검 그리고 무명비검을 일체감을 활성화 시킨 다음에 수련을 다시 해야 했다. 겉보기에는 같아도 일체감을 일으킨 다음의 동작은 일체감에 따라서 몸을 움직여야 했기 때문에 수련 자체를 다시 해야 했다. 진성은 어쩌면 그런 혼란으로 실력 자체는 떨어지지 않을까 예상하기도 했다. 그런 생각까지 이르자 진성은 피식 웃었다. 무엇이든지 그 대가나 노력 없이는 절대 얻을 수 없음을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무명비검의 비밀을 알아냈다는 사실과 축지법이 왜 무명검법의 보법이라고 불렸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오래된 체증이 완전히 사라진 듯, 시원함을 느꼈다. 그렇다고 모든 의문이 풀린 것은 아니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검법을 만든 거지? 무명기검과 무명9절초는 손도 대지 않았는데도 이런 위력이라니.” 진성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런 고급 무술을 만든 사람은 그 모든 것을 마스터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마음이 들자 은근히 마음에 있었던 자만심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게다가 자신의 목표, 바로 팔극신권과 무명검법의 끝, 무의 끝을 보고 싶다는 마음에도 불이 붙었다. 라스베가스로 가기 위한 본격적인 준비가 시작되었다. 제일 큰 준비는 당연하게도 라스베가스에서 열릴 한국, 중국, 일본의 프로 리그 우승팀이 맞붙는 경기였다. 개인전과 단체전을 같이 치를 예정이었다. 개인전 3명, 단체전 3명으로 그 룰이 확정되었다. 아직 공식적인 발표는 없었지만 문명 온라인 월드 리그 운영위원회 내에서도 한 팀에서 개인전의 최대 출전 선수 수를 3명, 단체전의 최저 인원수를 3명으로 정했다는 말이 있기 때문에 상식에서 벗어나는 게임 규칙은 아니었다. 개인전은 당연히 진성, 현호, 혜연이 출전하게 되었고 단체전은 상대의 문명과 그 선수 구성을 보고 탄력적으로 운영하도록 결정했다. 하지만 아직 모든 선수들의 실력이 제 궤도에 오른 것은 아니었기에 단체전은 기본적으로 현준과 한석 그리고 진규 체제로 나가기로 했다. “이야.... 일본도 가보고, 중국도 가보고... 이제는 미국이다. 하하하.” 맹렬히 연습하다 잠시 휴식 시간을 갖고 휴게실로 온 현준이 옆에 앉아서 말없이 음료수를 들이키고 있는 진성을 보면서 말했다. “너.. 미국에는 가 봤잖아.” “내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라. 내가 눈 뜨고, 기억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미국에는 한 번도 안 가 봤는데... 무슨 소리야?” “지난번에 휴가차 괌에 갔잖아. 거기.... 미국이야.” “뭐? 진짜?” “단지 관광 목적일 때는 비자 없어도 되지만.” “그래? 하지만 미국 본토가 아니잖아. 이야.. 라스베가스 가면 도박이라도 좀 할 수 있을까? 아하하하...” “그래, 맘대로 해라.” 현준 뿐 아니라 처음으로 미국에 가보는 사람들은 은근히 기대에 부풀었다. 비록 일 때문에 가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라스베가스가 바뀌지는 않으니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심지어 보디가드 이준과 코디 둘도 얼굴에 잔뜩 기대감을 내비치고 있었다. 지난번 폭풍으로 인해 무너졌던 회관 옆의 건물에 모인 테스터들은 눈앞에 놓여 있는 총기 케이스를 보면서 서로 말들이 많았다. 테스터들은 둘째 주에 이런 무기와 더불어 게임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 중 하나인 적, 몬스터의 등장을 미리 알고 있었다. 분명히 몬스터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무기가 필요했고 무기들이 자신들 앞에 놓여 있었지만 누가 어떤 무기를 가지느냐에는 말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테스터들은 간단한 총기 사용에 대한 연습에 앞서 누가 어떤 총기를 가지느냐로 의견이 분리되었다. 일단 여자 테스터들은 총기 중에서 위력이 있어 보이는 소총 소지 자격에서 제외되었다. 현실과 비슷해서 그 반동을 고려할 때 제대로 다룰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남은 21명의 남자 중에서 15정의 소총을 분배하기로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그 분배가 쉽지 않았다. 이런 환경이 가상현실임에는 분명했지만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는 동안 몸은 그 공포를 기억하고 있었다. 테스터들은 이런 죽음이나 그에 준하는 공포를 이기기 위해서 꼭 자신이 소총을 가지기를 원했다. 비록 잘 다루지 못한다고 해도 소총을 가지고 있어야 비로소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여겼다. “... 공평하게 사격을 통해서 가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게 제일 좋을 것 같습니다.” 한참을 갑론을박 하던 남자 테스터들은 결국 가장 공정하다고 여겨지는 사격을 통해서 그 소유를 가리기로 했다. 또한 여자 테스터들에게 주고 남는 권총류 6정은 사격에서 나머지 소총이 없는 남자 테스터들에게 분배하기로 동의했다. 남자 테스터들은 그 의견이 가장 타당하다고 동의했다. “탕, 탕, 탕.” “탕..... 탕, 탕.” 총기 한 정당 3개씩 주어진 탄창중 하나를 끼워서 각각 3발씩 사격을 해서 순위를 가리기로 했다. 순위는 곧 가려졌고 그대로 총기는 분배되었다. 하지만 권총을 받은 여섯 명의 남자는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분명히 약속을 했기 때문에 뭐라고 말하지는 못했지만 기분이 나쁜 것은 어쩔 수 없는 듯했다. 여자 테스터들에게도 권총이 나누어졌고 곧 남자 테스터들이 모자란 여자 테스터들에게 권총을 다루는 법에 대해서 자세히 가르쳤다. 총기를 다루는 방법도 서로 묻고 서로 가르쳐서 어느 정도 테스터들이 익숙해졌다고 또 몬스터에 대비해서 테스터들끼리 뭔가 의논을 하자 곧 몬스터들이 투입되었다. 석양이 지면서 날이 점점 어두워졌다. 테스터들이 모여 있는 건물에는 전기가 들어와 불빛이 있었다. 남자 테스터들 중에서 소총을 가진 몇 명이 창문을 통해서 외부를 경계하고 있었다. 경계는 대강 시간을 정해 돌아가면서 했다. 낮에는 비교적 안전하다고 생각했지만 밤에는 위험할지도 몰랐다. 그런 면에서 테스터들은 비교적 자신의 일을 스스로 생각해서 하는 편이었다. “... 온다!” 건물의 뒤쪽으로 난 창문에서 바깥을 살피던 테스터 유생이 나직하게 말했다. 순간 안에 있던 테스터들의 동작이 멈췄다가 빨라졌다. 손에 무기를 쥐고 있다는 것 때문인지 테스터들의 동작에는 겁먹거나 하는 기미는 전혀 없었다. 4명의 소총을 쥔 남자 테스터가 뒤쪽으로 다가갔다. 이미 테스터 유생은 바깥을 향해 소총으로 조준하고 있었다. 옆으로 다가간 사람이 물었다. “어떤 동물 같은가요?”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야생 맹수 같은데요. 아.. 저기.. 저기 좀 보세요.” 테스터 유생이 가리킨 방향에서 짐승의 두 눈만이 보였다. 몸 형태는 희미한 윤곽만 나타났지만 불빛에 반사된 짐승의 두 눈만 뚜렷했다. 텔레비전에서만 보았던 짐승의 그런 모습을 실제 눈앞에서, 그것도 우호적이지 않은 몬스터라는 사실을 안 상태에서 본 테스터들은 오금이 저렸다. “... 호랑이 아닐까요?” “늑대일지도 몰라요.” 의견은 분분했지만 곧 들려온 목소리에 조용해졌다. “여기에도 온다!” 건물 입구 근처의 창문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미리 의논한 대로 몇 명의 남자 테스터들이 앞쪽의 창문 근처로 다가갔다. 확실히 어슬렁거리는 밝은 눈동자 두 개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냥 지나가는 들짐승으로 볼 수는 없었다. 다들 사격할 준비를 했다. 권총을 쥔 여자 테스터들은 불안한 모습으로 건물의 가운데로 모여들었다. 곧이어 사방의 모든 창문을 통해서 서서히 다가오는 눈동자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행한 것은 그 숫자가 생각보다 적다는 사실이었다. “총알이 얼마정도 있습니까?” “.... 아까 사격한 것 빼면 보통 탄창 2개 정도는 있지 않습니까? 대략 30발 정도 남은 것 같은데... 저 정도면 그래도 버텨볼 만하지 않습니까?” 다가오는 짐승, 몬스터는 대략 20마리 정도였고 소총을 가진 사람이 15명, 권총을 가진 남자 테스터가 6명 정도여서 그리 어렵지 않다고도 볼 수 있었지만 아무도 실제로 이런 소총을 움직이는 목표물을 향해 쏘아본 적이 없었다. “.... 조금만 더 다가오면 다 같이 동시에 사격하도록 합시다.” “네.... 유생님이 사격 신호를 내리시죠.” 생각보다 훨씬 더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테스터들이었다. 그 동안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여자 테스터들의 대부분은 아예 권총을 제대로 잡지도 않고 있었다. 심지어 권총의 윗부분을 잡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다들 가운데로 몰려 앉아 남자 테스터들의 등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그 윤곽 뿐 아니라 몸을 어느 정도 구분할 정도까지 몬스터들은 다가왔다. 얼핏 봐서는 늑대나 이리와 비슷했다. “발사!” 유생의 소리에 사방의 창문에서 조준하고 있던 소총의 총구에서 불을 뿜기 시작했다. 낮에 밖에서 사격 측정을 위해서 했던 것과는 소리가 틀렸다. 실내라서 울리는데다가 밤이라 훨씬 소리가 크게 들렸다. “케켕...” “꺄악...” 밤이라는 조건으로 인해 확실히 자신의 목표물을 제대로 맞히지는 못했지만 그 큰 소리와 함께 몇 마리가 총탄에 맞아 쓰러지자 나머지 짐승들은 혼비백산 달아났다. 짐승의 울음소리와 더불어 남자 테스터들의 뒤에 있던 여자 테스터들의 비명소리도 섞여서 들렸다. 짐승들은 달아났지만 소총의 사격은 탄창 하나를 다 쓰고 나서야 멈췄다. 테스터들은 그다지 능숙하지는 못했지만 급하게 탄창을 갈아 끼웠다. 한 사람이 탄창을 갈아 끼우자 다들 따라서 갈아 끼웠다. 다시 습격하지는 않을까 대비하는 모습이었다. 잠깐 동안 아무런 이상이 없자 환호하기 시작했다. “와... 이야... 우리가 해냈다!” “정말 귀청 떨어지는 줄 알았다니까... 하하하하하...” “이 정도면 충분히 방어할 수 있겠는데....” “와... 정말 실감나네요. 이 정도면 게임 상에서 사냥만 다녀도 재미있겠어요. 이야..” 남자 테스터들은 자신들이 거둔 승리에 도취되었다. 압도적인 화력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였지만 한 번도 이런 무력을 이용한 통쾌함은 느끼지 못했던 터라 남자 테스터들은 너무도 기분이 좋았다. 여자 테스터들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조금 전의 그 천둥치는 것 같은 사격 소리에 얼이 나가버렸던 여자 테스터들은 남자 테스터들의 환호에 정신을 차렸다. 테스터들 사이의 분위기는 굉장히 좋아졌다. 지금까지 무의식중에 있었던 편가름은 이 순간만큼은 사라졌다. 오히려 전우애와 비슷한 동질감마저 느낄 수 있었다. 빛이 나는 듯한 눈동자들이 서서히 다가올 때의 그 긴박감, 사격 시작했을 때 총탄이 발사되면서 느껴지는 진동, 자신의 사격에 쓰러지는 짐승을 봤을 때의 만족감은 남자 테스터들을 하나로 묶어버렸다. 여자 테스터들은 남자 테스터보다는 덜했지만 자신들도 이런 환경 속에서 같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뭔가 해냈다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때 그 날의 테스트는 끝이 났다. <인트로 테스트 둘째 주 첫째 날, 실험 일지> 1. 총기 분배에 있어 합리적인 결정을 내림. 하지만 불리한 테스터들은 불만이 있는 듯함. 2. 몬스터의 등장과 그 격퇴로 급속도로 단결되는 테스터들. 3. 총기라는 믿을 수 있는 무기를 가진 테스터들의 침착함. 두 주의 인트로 테스트는 끝이 났다. 갈수록 그 수와 능력이 증가하는 몬스터들 앞에서 테스터들은 서로 단결하고 심지어 조직까지 갖추면서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게다가 그런 과정을 통해 첫 주에서 느꼈던 불만들은 완전히 사라졌고 테스터들 모두 차기 테스트가 있으면 다시 지원하겠다는 말을 할 정도로 로플의 첫 번째 테스트는 대성공이었다. 특히 테스터들이 느끼는 현실감과 현실에서 절대 경험하지 못하는 몬스터들과의 리얼한 총격전은 처음의 소극적이던 여성 테스터들까지 매료시킬 정도로 몰입감을 보여주었다. 몬스터가 강해질수록, 테스터들이 더욱 더 위험을 느낄수록 테스터들 사이의 관계는 단단해졌고 스릴도 더욱 많이 느꼈다. 특히 테스터 혼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의 협력을 통한 위기 돌파는 더욱 더 큰 만족감을 테스터들이 맛보게 해 주었다. 모든 테스트가 끝나고 테스터들끼리 오프라인에서 만나 적극적인 모임을 계획할 정도였다. 진팀장을 비롯한 팀원들은 테스트를 통해 아직은 미흡하지만 로플이라는 세계가 가져야 할 외부적인 요소들과 내부적인 요소, 자극들의 종류와 그 정도에 대한 대략적인 청사진을 만들 수 있었다.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외부적 요인과 물자의 부족으로 인한 내부적 갈등, 그리고 다시 공통의 적을 통한 단결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 테스트를 통해 충분히 로플이 통할 수 있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결정해야 할 것도 많이 남아 있었다. 특히 이번 인트로 테스트에는 총기류를 등장시켰지만 실제 로플의 세계에 적용될 무기 체계라던가 기존의 온라인 게임에서 많이 취급되는 무술과 마법의 접목에 대한 것도 결정해야 할 문제였다. 또한 각 사람의 게임 동기를 유발할 수 있는 성장 시스템과 각 직업 시스템 등을 포함한 종합적인 게임 시스템을 확립해야만 했다. 이제까지 달려왔던 길보다 앞으로 갈 길이 더 멀고 험했다. 진성 역시 인트로 테스트의 시작부터 끝까지 그 과정을 살펴보았다. 비록 로플이라는 게임의 테스트이지만 테스트의 내용은 인간에 대한 실험이었다. 사회적인 동물인 사람에 대한 사회적인 항목의 테스트인 것이다. 그런 테스트를 보면서 진성 자신 역시 어떤 자극과 동기로 인해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게이머로서 상대를 이기거나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게임을 하기 위해서 스스로 노력하는 모습들, 사부 유조의 유언과 무도(武道)라는 매력에 눈을 떠 하루도 거르지 않는 수련. 그 모두가 다 어떤 동기로 인한 행동들이었다. 진성은 어떻게 보면 로플이라는 게임은 단순한 게임 이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예전 로플팀의 팀 미팅에서 진성 자신이 말했던 의견이 떠올랐다. 로플을 하나의 틀, 프레임으로 생각해서 그 속에 밀리터리 아트와 문명 온라인을 담아낸다는 기획이었다. 그 당시에는 로플의 기본적인 구조를 잡는 것이 더 중요했기에 단순한 기획 의견으로 끝이 났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문명 온라인은 그 규모 상 쉽지 않을지 몰라도 밀리터리 아트는 로플 내에서 충분히 흡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음.... 밀리터리 아트라면.. 로플에서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아하.. 맞다. 안 되면 여러 유저들을 모아 퀘스트 형식으로 부여해도 되겠다. 음.. 그렇게 하려면 당연히 밀리터리 아트의 무술과 총기 시스템이 도입되어야 할 것 같은데... 휴우... 아직은 힘들겠군. 일단 로플이 활성화가 되어야 그런 시도를 해 보지.....” 한참을 생각하던 진성은 제일 중요한 것은 로플이라는 게임이 하루빨리 대중에게 스며들어 갈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좋아도 사람들이 즐기지 않으면 아무 소용도 없었다. 너무 한꺼번에 모든 것을 다 하려면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다. 진성은 그런 생각을 완전히 지우지 않고 머리 한켠에 잠시 밀쳐 두었다. “우지끈.” 로마의 2단 군용 갤리선이 이집트의 군선인 조립선을 들이받았다. 로마의 군용선 선수 아래에 달려 있던 단단한 충각에 부딪친 조립선의 선미 쪽 3분의 2 정도 되는 지점이 부서져 나가며 조립선은 서서히 침몰했다. 로마의 갤리선의 2단 중 상단의 노는 조립선에서 뛰어내린 이집트 군인을 때려잡았다. “둥둥!” 곧 북소리가 들리자 40개의 노가 평행이 되더니 일제히 바다 속으로 들어가 노를 저어 갤리선을 이동시켰다. 드넓은 바다에는 양쪽을 합해 거의 100척에 달하는 군선들이 혼전 양상을 띠었다. 처음의 질서 있는 움직임과는 달리 엉켜서 난전이 되고 말았다. 로마의 군인들도 해전에는 그리 능숙하다고 말하기 힘들었지만 이집트보다는 나았다. 로마는 배를 강력하게 돌진시켜 들이받거나 배를 붙여 백병전을 벌였다. 기본적으로 백인대장과 같은 소규모 지휘관이 있을 정도인 로마의 군인은 소규모 백병전에 능했다. 이집트의 경우도 강력한 왕권, 신권에 힘입은 결사적인 전투 의지가 있었지만 한 번 기울어진 양상을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이집트의 최대 장점인 전력에서의 우위를 제대로 살리지 못해 점점 이집트의 군선의 수는 줄어갔다. 한석의 가장 큰 실수는 진성이 의도한 전선의 확대를 의심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끌려간 점이었다. 방어하는 입장인데다가 정확한 정찰이 되지 않아 스키피오, 진성이 어디로 올 지 예상하지 못했던 한석은 진성의 은근한 계략에 휘말려 거의 두 배에 달하던 병력을 두 개로 나누고 말았던 것이다. 진성의 컨트롤과 상대를 읽는 재능이 빛을 발했다고도 볼 수 있었다. 진성의 로마 군선이 상륙 루트를 확보하자 뒤이어 로마의 정예 병력을 태운 수송선이 나타났다. 진성은 군선에 탄 군인들은 상륙 해안을 계속 지키기 위해서 계속 배에 둘 생각이었다. 그 대신 수송선으로 온 보병과 기병으로 하여금 이집트 내에서 치고 빠지는 전략을 사용해 상대의 컨트롤이 힘들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자신의 생각대로 상대 군선의 절 반 가량을 수장시킨 후라서 조금은 여유가 있었던 진성은 피해 상황을 살피기 시작했다. “음... 생각보다는 피해가 별로 없는 것 같다.” 최고의 해군력을 가진 그리스와는 달리 이집트의 해군은 로마와 비슷하거나 약간 떨어졌다. 물론 병력에서 앞서기 때문에 그 차이는 거의 없었지만 같은 병력이라면 로마가 약간 나았다. 그런 이유로 진성은 로마의 해군을 특별히 훈련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바다에서도 육상에서처럼 백병전 위주의 전술을 택했다. 고대에서 해전은 거의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서로 자기에게 유리한 지형을 선호하면서 대치하고 있다가 일제히 원거리 무기인 화살을 쏟아 부은 뒤에 서로 진을 유지한 채 상대를 향한 돌진으로 배를 부딪치거나 아니면 배를 붙여 백병전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이 반복되어 나타났다. 활을 이용한 원거리 공격은 대세에 그리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서로 예상해서 피하거나 막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진짜 공격은 강력한 돌진력으로 인한 상대에 대한 충격과 기세를 이용한 백병전이었다. 물론 지휘관의 강력한 통제로 인한 국지적인 병력 차이를 이용해서 이길 수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배의 성능과 배에서 무장한 군인들의 용맹함이 대세를 좌우했다. 로마와 이집트의 해군은 둘 모두 전술적인 면에서는 시간과 컨트롤을 투자하지 않은 듯했다. 라스베가스에 도착한 자소 소프트의 프로팀은 여전히 긴장을 떨어뜨리지 않고 호텔에 특별히 설치된 게임 룸에서 연습을 했다. 특히 단체전 연습이 끝난 뒤에 개인전을 연습하기 위해 진성의 상대를 자처한 한석과의 게임은 나머지 선수들의 관심을 모았다. 다들 음료수 하나씩 들고 게임 룸에 설치된 비전에서 나오는 진성과 한석의 게임을 보고 있었다. “이야... 저런 컨트롤이라니.. 역시 진성 오빠구나. 우와.....” 서재필의 폭발은 게이머들끼리 서로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호칭도 아주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혜연은 비전을 보면서 진성의 컨트롤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혜연 자신의 실력이 일취월장 늘어나자 비로소 진성의 쉬엄쉬엄 하는 컨트롤의 적절함과 그 타이밍에 감탄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혜연아, 조금 전에 한석이 군선을 둘로 나눈 것도 사실 진성의 의도로 어쩔 수 없이 넘어가버린 거다. 하하하.. 저런 정도로 감탄하면 나중에 혜연이 너 입.. 아마 너무 크게 벌려 찢어지고 말지도 모른다. 알겠냐?” 보고 있던 현준이 혜연에게 한마디 했다. 보고 있던 사람 중에서 그 사실을 조금이라도 알아챈 사람은 현준과 진규 밖에 없었다. 현준의 말에 범현이 눈을 껌벅거리며 물었다. “현준이 형, 정말인가요? 제가 보기에는 왜 한석 형이 병력이 나누어 저렇게 어려움을 자처하는지 조금.... 이상했거든요.” “그냥 보기에는 그렇겠지. 저거 지금 녹화하고 있으니까... 나중에 자세히 한 번 진성이 원정군을 이끌고 오면서 어떻게 컨트롤을 했는지 봐. 궁리하면 나올 테니까. 알겠지?” “아.. 네.. 현호야, 나중에 같이 보고 분석하자.” “... 응? 그.. 그래.” 진성의 정예군은 상륙했다. 이미 상륙을 완료한 뒤, 간단히 배를 댈 수 있는 곳을 만든 뒤에 그 근처에 진지를 구축했다. 진지에 있어서는 로마군을 따라올 군대는 없었다. 철옹의 진지를 구축한 뒤 로마군대는 움직이지 않고 휴식을 취했다. 로마의 해군은 로마에서 이집트로의 바다 보급로를 지키고 있었다. 당분간 이집트의 군선이 충원되기까지는 그리 큰 전투는 없으리라고 진성은 예상했다. 하지만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처음에 진성 자신이 쳐들어오는 위치였다면 이제는 지켜야 할 차례였다. 진성, 아니 스키피오를 상징하던 로마의 시민군 양성과 전설적인 더블 스트러티지의 그 엄청난 효과는 패치로 인해서 사라졌다. 그 전략 자체는 상당히 좋은 전략인 데다가 효과도 있었지만 그 시간과 컨트롤, 위험한 줄타기에 비해서는 미미한 편이어서 진성부터 그 두 전략 사용을 포기했다. 대신 진성은 군대강화법의 범위를 해군까지 확장시켰다. 육군 정예병에서 지휘관의 역할도 상당히 컸지만 해전에서는 그 중요성이 더 컸다.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전투를 벌일 장소의 결정이었다. 자신에게는 유리하고 상대에게는 불리한 전장의 선택은 해전에서 결정적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또한 전장에서의 자연 환경을 이용한 전술을 사용할 수 있다면 비록 패한다고 해도 어처구니없는 패배가 아닌 상대에게 어느 정도 타격을 줄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서 지휘관의 역량이 크다면 전체적인 사기 역시 올라가게 마련이다. 진성의 지상군과 해군을 통합한 군대강화법은 약간의 시너지를 얻을 수 있었다. 바로 해병으로서 아무 훈련을 하지 않은 지상의 군단을 해군으로 투입해도 그냥 군대강화법 없이 투입한 것보다 객관적으로 전투력이 높아진 것이다. 바다에서 비교적 약하다고 알려진 로마의 해군력을 조금은 끌어올린 진성의 발견이었다. “이제... 들어가 볼까?” 6만의 중장보병에 1만의 기병을 거느린 진성은 선착장으로 이용했던 곳을 완전히 초토화시키고 해군으로 하여금 적당히 대치하다가 후퇴를 우선시해서 전력을 유지하도록 하는 명령과 또 다른 명령을 내리고는 이집트의 내부를 향해 진군했다. 진성은 이미 자신의 행동을 한석이 알고 있으리라 확신했다. 진성은 낮은 산이나 구릉을 우회하지 않고 거의 최단 거리로 행군했다. 그렇다고 급속 행군이나 말도 안 되는 험한 곳을 간 것은 아니었다. 중간에 충분히 휴식을 하면서 진군했다. 로마와 이집트 뿐 아니라 문명 온라인 전체에 해군이 전격적으로 도입이 되자 전체적인 병력 운용 전략이 달라졌다. 보병과 기병에 투입하던 자금이 군선의 건조와 해병의 훈련에 상당 부분이 들어가자 예전과 같은 대규모 정예보병의 양성과 운용은 불가능했다. 해군을 포기한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것을 상대가 알게 되면 바다는 완전히 상대에게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막강한 지상군으로 잘 방어할 수 있겠지만 상대가 장기적인 고사작전을 한다면 질 수밖에 없는 게임이었다. 물론 지상군으로 승부를 낼 수 있는 맵이라면 얘기가 달라졌지만 전체적으로 해군을 무시할 수 없게 변하고 말았다. 그런 면에서 6만의 중장보병과 1만의 기병은 적지 않은 병력이었다. 게다가 그 지휘관이 스키피오, 진성이라면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부담이 되는 군대였다. 진성은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진군했다. “휴우.... 정말 진성은 상대하기 힘들다. 조금 있으면 군선은 어느 정도 보충이 되는데... 정말 쉽지 않네. 지상은 어느 정도 막을 수는 있을 것도 같은데... 왜 저렇게 천천히 오는 거지? 뭔가 다른 계획이라도 있는 건가?” 이미 한 번 당했던 한석이었기에 로마 군대의 느긋한 행군에 생각이 복잡해 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아직 확실히 진성이 해군에 있는지 지상의 군대에 있는지 확인을 못했기 때문에 한석 자신이 어디에 주력할 지 결정할 수가 없었다. 한석은 그 순간 한 가지를 알 수 있었다. “이야... 그런 상황을 이렇게 바꾸다니.” 분명 진성이 지상 군대와 같이 그 보급로의 이집트 선착장에 있었다면 한석으로서는 훨씬 결정하고 행동하기기가 쉬웠을 것이다. 게다가 진성은 분명 그곳을 지켜야할 입장이었기에 한석이 여러 방향과 전술을 이용하면 원하는 피해를 줄 수도 있을 테고 그렇게 된다면 지상군도 쉽게 움직이기 힘들게 자명했다. 그런데 진성 자신이 스스로 그 선착장을 완전히 부수고 지상군대의 진군을 빨리 명령함으로 오히려 한석이 복잡하게 생각하게끔 만든 것이다. 수세의 입장, 상대의 공격이나 의도를 파악해야만 하는 입장으로 한석을 내몬 것이다. 한석은 그런 데까지 생각이 들자 소름이 돋았다. “.... 휴우....... 설마..” 말로는 부정했지만 마음속에는 이미 불안함이 가득 차 있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진성이라면 충분하다고 무의식적으로 인정해 버리고 만 한석이었다. 보병 6만에 기병 1만이라면 적지 않지만 방어에 능한 이집트이기 때문에 한석은 자신이 직접 해군을 지휘해서 상대 로마의 해군을 이집트 연안에서 몰아낼 생각이었다. 한석은 그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이 정도면 조금은 혼란스러웠겠지?” 진성은 상대인 한석의 마음을 대충 예측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정확하게 한석이 해군을 이끈다는 것을 예상한 것은 아니지만 상대의 의도를 몰라 마음이 심란하게는 되었다고 판단했다. “전군 급속 행군! 남서쪽, 도시를 오늘 내로 도착해서 기세를 몰아 함락하고 내일은 도시에서 편히 쉬도록 한다. 행군!” 진성은 재빨리 전 군대에 명령을 하달하고 1만의 기병에게는 또 다른 명령을 전달했다. 명령이 전달되자 군대의 움직임은 빨라졌다. 1만의 기병은 먼지를 날리며 질서정연하지만 아주 빨리 앞으로 먼저 달렸고 정예보병은 오와 열을 맞추어 행군을 시작했다. 아직 아침이라 햇빛은 그리 강하지 않았지만 엄정한 군기를 보이며 행군하는 로마의 정예보병의 모습은 그야말로 차갑지만 뜨거운 장면이었다. “둥, 둥, 둥, 둥!” 섬이 적은데다가 해안선이 완만한 이집트의 연안은 지형으로 인한 전술적 이점을 보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 해군과 이집트 해군은 정면 대치를 하고 있었다. 로마의 군선과 마찬가지로 이집트의 군선도 노를 이용한 배였다. 하지만 로마의 군선이 2단이라면 이집트는 1단의 노를 젓는 배였다. 당연히 속도에서 차이가 많이 나야했지만 이집트의 군선의 노는 하나당 3사람이 붙어서 저었기 때문에 조금의 차이는 있었지만 그리 큰 차이는 아니었다. 두 군선 모두 충각을 달고 있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상대 진형의 측면을 공격하는 기회를 잡을 수 있느냐, 없느냐였다. 완벽한 승리를 하기에는 힘든 조건이었지만 상대의 측면을 제대로 공략할 수 있다면 전투의 기세를 선점할 수 있기에 한석은 차분히 전술적인 면에서 준비를 했고 확실히 조직한 군선에 명령을 하달했다. 양진영의 북소리가 빨라졌다. 이집트의 군선 중 한석이 타고 있던 배에서 붉은 기가 올랐다. 이집트의 군선 90여척은 3개로 나누어 로마의 군선을 향해 다가왔다. 이집트의 군선은 양 옆의 두 그룹 군선들의 속도가 더 빨랐다. 상대적으로 느린 중앙의 군선들로 인해 자연스럽게 항아리 모양을 만들었다. 이상한 것은 이집트의 군선이 다가옴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군선에는 북소리만 들릴 뿐, 돌진하는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한석은 이상함을 느꼈다. 이런 이상함은 당연히 상대 게이머 진성으로 인한 것임을 알았다. 하지만 한석은 하던 공격을 멈추어서는 사기에도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고는 공격 명령을 바꾸지 않았다. “어.....?” 한석은 로마의 군선들의 북소리가 맹렬하게 바뀌더니 곧바로 로마의 군선들이 뱃머리를 돌려 전장을 이탈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너무도 쉽게 도망치는 것을 보자 오히려 한석이 이상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로마의 군선들은 도망이 아니라 그야말로 후퇴였다. 질서정연하지만 빠른 속도로 이집트 연안을 벗어났다. 한석은 계속 쫓아가려도 했지만 먼 바다에서는 이집트의 해군이 로마 해군과 그 격차가 더 나리라 예상하고는 추격을 포기했다. 너무 어이가 없었다. “아..... 진성이, 해군에 없고 육군에 있었나?” “적군이다. 서쪽에서 적군이다!” 이집트의 큰 도시 중 하나인 케타의 수비군 중 하나가 성벽에서 어둠을 틈타 다가오는 군대를 확인하고는 소리쳤다. 곧바로 케타의 수비군에는 비상이 걸렸다. 수도인 룩소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성벽 공사가 다 끝나지 않았던 케타로서는 공사가 덜 끝난 부분인 서쪽에서 적군이 다가오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상대 적군은 기병이었다. 케타의 성벽 공사가 끝나지 않은 이유에는 급히 군선을 만들기 위한 재정적인 원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케타는 도시 중 비교적 컸지만 문명의 발전과 관계가 있는 중요한 도시도 아니었고 수도 룩소와는 방향이 틀린데다가 앞서 있던 정찰병을 믿었기 때문에 순식간에 정찰병을 잡고 뒤로 돌아간 로마 기병의 등장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케타는 기병의 아주 발 빠른 돌진에 빨리 대응하려고 했지만 이미 기병은 공사가 끝나지 않은 성벽 사이로 난입한 뒤였다. 1만의 기병이 도시로 난입하자 도시는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난입한 1만의 기병이 말에서 내려 대열을 갖추자 수비군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1만의 기병이 아니라 정예보병이 되어버린 로마 기병은 넓지 않은 도시 내부에서 소규모 부대를 구성해서 쓸고 다녔다. 특히 제대로 반응하지 못한 수비군의 조직을 흔들어 놓았다. 수비군의 수가 1만 7천은 되었지만 체계가 잡히기 전에 로마의 정예병과 맞딱뜨리자 도망병이 속출했다. 도망병이 생기자 조직 체계는 곧 와해되고 말았다. 진성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승리였다. 진성은 기병으로 케타 수비군의 주의를 돌린 후에 6만의 중장보병으로 승부를 볼 생각이었다. 물론 케타 정도면 성벽에 문제가 있을 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보병이 도착하기도 전에 상황을 마무리한 기병의 활약에 만족감을 느낀 진성이었다. 진성은 한석이 이런 보고를 들으면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했다. 진성은 군대에게 약탈을 허락했다. 어차피 보급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와 더불어 진성은 준비해 왔던 전술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뭐? 로마 군대가?” 한석은 조금 시간이 흐른 후에 로마 군대가 케타를 함락한 사실을 보고 받았다. 의외였다. 케타가 규모 있는 도시이기는 했지만 문명의 전체적인 발전이나 재정적인 면, 전투력 측면에서는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런 것은 상대인 진성도 충분히 알고 있을 텐데 이런 일을 벌이다니. 보급에 문제가 있으리라는 생각도 했지만 그렇게 한쪽을 공격하면 수도인 룩소 부근의 사람들은 그런 소문을 듣고 더욱 전쟁에 대비를 하게 되어 오히려 손해일 수도 있었다. 어차피 치명적인 타격을 주지 못한다면, 게다가 이집트 근해를 한석이 장악한다면 내부로 들어온 로마 군대는 고사당할 위험도 적지 않았다. 한석은 도저히 진성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그런 한 번의 국지적인 승리는 대세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런 것을 잘 알고 있을 진성이 그런 어리석은 행동을 했다니 한석은 다시금 진성의 의도를 몰라 답답해했다. 한석은 게임 시종 진성에게 끌려 다니는 자신을 알았다. 반 발짝 빨리 움직이는 진성의 게임 운영에 심리적으로 계속 끌려 다님을 스스로 알고 있었지만 늪과 같아서 헤어나기는 힘들었다. “휴우.... 정말 한 숨 밖에 안 나오네. 이겨도.. 이긴 느낌도 안 나겠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이겨도 정신적인 피로가 심해서 이겼다는 흥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한석은 그나마 자신 정도면 진성과 제대로 상대할 수 있다는 환상이 깨짐을 알았다. 확실히 한국에 있을 때의 진성은 일부러인지 아니면 진짜인지 모르겠지만 약간 한석 자신에게 우세했을 뿐 일방적인 경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진짜 경기를 앞 둔 시점에서 가진 게임에서 한석은 진성의 진정한 실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은 한 번의 기가 막힌 전략, 전술은 아니었지만 상대로 하여금 계속 예측하도록 만들고, 그 예측이 빗나가도록 만들어 어쩌면 스스로 침몰하도록 만드는 것과 같았다. 한석은 아까 느꼈던 그 소름의 원인이 정말 진성의 의도임을 확신했다. 진성이 진짜 준비한 것은 심리전이었다. 로플의 인트로 테스트에서 느꼈던 사람이라는 사회적 동물이 혼자가 아닌 조직이나 무리로 있을 때, 어떤 극한의 상황에서는 좀 더 감정적이 된다는 것과 공통의 적이 있을 때 서로를 더 잘 믿게 됨을 알 수 있었다. 진성은 군대에게 약탈을 허락하면서 동시에 도시를 빠져나가 사방으로 도망갈 이집트 사람들에게 군대의 규모와 그 강력함에 대해서 과장해서 퍼트렸다. 특히 7만의 군이 겨우 선봉대에 불과하다는 것과 케타가 겨우 3천의 로마 정예 기병에 의해 함락되었다는 사실은 은연중에 흘렸다. 또한 군인들끼리의 얘기로 남은 케타의 이집트 사람들을 모두 모아 생매장한다는 소문까지 내도록 만들었다. 그런 끔찍한 일이 케타가 처음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벌였지만 살아남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얘기까지 곁들였다. 그런 말에 케타의 사람들은 혼비백산해서 도망쳤다. 게다가 피난민들을 모아서 말한 게 아니라 군대를 통해 은근히 사실을 퍼트리자 피난민들은 사방으로 도망가면서 그 이야기를 전했다. 소문이란 입을 거치면서 더욱 더 커지게 마련이었다. 게다가 도망친 난민 중에는 로마의 첩자도 포함되어 있어서 더욱 더 빨리 그리고 과장된 사실이 소문으로 널리 퍼졌다. 특히 케타의 지배층을 붙잡아 가족들을 볼모로 한 뒤에 비슷한 사실을 강요해서 중앙 정부에 알리도록 만들어 그 소문의 신빙성을 더했다. 비록 신권이 강한 이집트여서 강직한 인물들도 있었지만 서로 다른 정보는 충분히 혼란을 일으켰다. 지휘 체계와 일반 백성들을 동원한 이중의 위장 정보에 이집트는 들끓었다. 게다가 그 시점에 한석은 바다에 있었기 때문에 쉽게 진화하기 힘들었다. 진성은 그런 상황을 예상하면서 하루를 더 쉰 뒤에 또 다시 비슷한 방법으로 별로 중요하지 않은 도시를 함락했고 또 비슷한 심리전을 유포했다. “뭐? 이..... 이런... ” 진성으로 인해 벌어진 사태를 파악한 한석은 기가 막혔다. 분명히 확인한 7만의 로마 군대가 30만이 넘는 대군으로 변해서 자신에게 보고된 것이다. 처음에는 자신도 모르는 루트로 상륙한 군대가 있는지 아차 싶었지만 아무리 봐도 30만의 군대는 불가능했다. 자세히 조사를 한 한석은 이 모든 것이 진성의 책략임을 확신했다. 하지만 이미 이집트의 모든 곳,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상태여서 어떻게 수습을 할 지 몰랐다. 일단 자신의 명령으로 군대부터 수습했다. “... 이제.. 도착할 때가 됐는데.....” 진성은 7만의 기병을 이끌고 이집트의 북쪽으로 와 있었다. 진성은 해군과 헤어지면서 정확한 날짜와 지역까지 정해서 해군과 육군을 싣고 올 수송선과의 랑데부를 명령했다. 조금 무리가 있지만 병력만이라면 완만한 이집트 해안선에서 쉽게 상륙할 수 있었다. 이집트 해군에서 눈치 챘겠지만 지금 한석은 이집트 내에서 들끓고 있을 그 소문을 없애기 위해 애쓰고 있을 것이다. “음... 이제 15만인가?” 진성은 로마의 모든 지상군을 실어오라고 명령했고 이집트 내에서 이제 15만의 정예군이 진성의 명령을 준비를 마쳤다. 상황을 정리해 보던 진성은 15만의 군대에 지금과 비슷한 심리전을 계속하라고 지시하고는 자신은 해군을 지휘하기 위해 배에 올랐다. 진성은 슬며시 웃으며 중얼거렸다. “한석아... 이번에는 어떻게 할래?” “뭐? 으....” 로마 군선이 이집트의 북쪽으로 다가온다는 보고를 받은 한석이었지만 당장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었다. 거리도 거리였지만 이미 진성이 북쪽으로 올라갔음을 알았기에 수적으로는 우세였지만 지휘관이 있는, 게다가 그 지휘관이 진성인 해군과 겨루기에는 인공지능은 너무 약했다. 한석은 어쩔 수 없이 공격을 포기하고 말았다. 지금은 일단 소문을 없애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 때, 또 다른 보고가 날아들었다. “...... 이런......... 으으으..” 로마의 군선이 진형을 갖추고 이집트의 군선이 있는 항구로 이동한다는 보고였다. 게다가 로마 정예 지상군은 이전과 같이 그 빌어먹을 심리전을 계속한다는 보고도 같이 들어왔다. 한석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 이번에는 어디에 있는 거지?” 제일 중요한 것은 진성이 육군과 해군 중 어디에 있는가 하는 거였다. 선뜻 해군으로 생각했다가 육군이라면 그 피해는 기존의 소문과 합쳐져 엄청난 기세를 탈지도 몰랐다. 하지만 무조건 육군이라고 보기에도 문제가 있었다. 한참을 고민한 한석은 결국 육군에 있다고 보고 해군은 단지 잠깐의 교전 후 후퇴하는 것으로 지시를 내렸다. 한석은 그 지시가 자신의 결정적인 패인이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 한석... 이번에도 틀렸군.” 진성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이집트 군선들을 보면서 한석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진성 자신이 퍼트린 소문이 해군에도 영향을 준 모양인지 어수선한 진형이었다. 진성은 한눈에 이집트 해군에 결사의 전투 의지가 부족함을 알았다. “.... 이제 끝내야지. 나도 힘드네..” 진성은 상대 해군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몇 가지 명령을 하달했다. “둥둥! 둥둥!” 잠시 맞붙었던 로마의 군선들은 일제히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로마의 해군은 조금의 피해를 입었다. 너무 약한 로마의 군선에 한석이 있었다면 어느 정도 조심하면서 추격을 했겠지만 훈련도 제대로 되지 않은 이집트의 해군은 추격 때 그 지휘 체계가 흔들리고 말았다. 유심히 지켜보던 진성은 이집트 해군의 대열이 길어지자 군선을 둘로 나누어 선회했다. “둥둥둥둥!” 로마의 군선들은 길게 늘어서 따라오던 이집트 군선들의 측면을 들이받으며 교전에 들어갔다. 로마 해군만의 특징 중 하나는 바로 배를 붙여서 마치 육지처럼 만들어 백병전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배에는 갈고리 모양으로 생겨 한 번 걸리면 쉽게 풀기 힘든 장치가 되어 있었다. 또한 상대 배로 쉽게 넘어가기 위해 넓은 나무 판자도 준비되어 있었다. 게다가 갑작스런 반전에 지휘 체계가 흔들린 이집트 군선들은 민첩하게 대응하지 못한 채 국지적인 열세에 놓였고 서서히 괴멸당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리스의 갤리선보다 그 속도와 돌진력에서는 떨어지지만 오나겔이라는 군선용 투석기가 있어 원거리 공격이 가능했던 로마의 군선들은 다가오는 이집트 군선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오나겔은 쉽게 다루기가 힘들었다. 그 연사 속도가 그다지 좋지 않고 움직이면서 사용하기에는 적합지 않아 확실한 우세에서 승리를 확인할 때 사용하곤 했다.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업그레이드가 되어 나중에는 움직이면서 사용이 가능하게 되지만 진성이 별로 그런 쪽에 투자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멈춰 서서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앞선 이집트의 군선들이 모조리 수장되는 모습을 본 이집트의 군선들은 쉽게 대응하지 못했다. 게다가 완전히 붕괴된 지휘 체계로 인해 뿔뿔이 흩어지는 모습까지 보였다. 진성의 로마 해군은 이집트 해군을 상대로 병력의 열세 속에도 탁월한 전과를 거두었다. 그로 인해 이집트의 바다까지도 로마 해군이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 휴우... 이제 그만 해야겠다. 힘들어서 못하겠다!” 땀이 가득한 한석은 푸념을 늘어놓으며 게임 오버를 선언했다. 예전에 서로 다른 팀에서 게임했을 때, 한국에서 연습 게임했을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늪의 사신이라는 자신의 닉네임이 부끄러울 정도의 게임 운영이었다. 정말 단 한 번도 심리적인 우세를 느끼지 못한 채 끌려 다니다가 결국 제풀에 나가떨어진 격이었다. “휴우...... 개인전 우승은 따 논 당상이군. 휴... 저런 괴물을 누가 이겨?” 한석은 게임기에서 나와 땀을 닦으며 말했다. 옆으로 다가온 현준이 맞장구를 쳤다. “그걸... 이제야 알았냐? 저 놈은 괴물이야, 괴물!” “휴우... 그래도.. 이렇게 힘들어서야... 휴우.....” “나는 저 녀석 그 시민군 양성과 더블 스트러티지 못 쓴다는 사실에 서광이 비치는 줄 알았다가 한 동안 도전했는데.. 휴우... 괴물은 괴물이지! 한 번 괴물은 영원한 괴물이다! 하하.. 그렇지?” 현준의 말에 한석은 약간 허탈한 듯 웃었다. 현준의 말이 충분히 이해됐다. “..... 하하하..” “어이, 어이. 멀쩡한 사람 괴물로 만들지 말라고.” 둘의 말에 진성이 이의를 달았다. 하지만 현준의 반격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네가 멀쩡한 사람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라. 어떻게 게임으로 이렇게 사람을 파김치로 만들 수 있냐? 그게 사람이냐?” “뭐? ........” “사실은 인정해야지. 하하하하..” 자소 소프트의 프로팀은 모두 MGM Grand 호텔에 머무르고 있었다. 5,000개가 넘는 객실을 보유한 MGM Grand 호텔은 그 규모도 대단했지만 이번에 열릴 문명 온라인의 특별 이벤트가 열리는 장소인 그랜드 가든 아레나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MGM Grand 호텔 측에서 자소 소프트의 프로팀에 대해 많은 편의를 약속했기 때문에 매니저 서재필은 MGM Grand 호텔에 머물기로 했던 것이다. 하지만 떠들썩한 분위기와 더불어 볼 것이 많은 라스베가스에서 오직 연습에만 몰두하기는 굉장히 힘들었다. 특히 프로 게이머가 아닌 두 코디와 보디가드는 머리로는 자신들이 나가서 즐기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지만 심정적으로는 동의하지 않았다. 또한 프로 게이머들도 너무 게임에만 열중하니 능률이 오르지 않는다는 말로 서재필을 졸라댔다. 한참을 고민하던 서재필은 아직 내일 하루 연습할 시간이 더 남아 있기 때문에 일행을 모두 다 데리고 MGM Grand 호텔의 자랑거리중 하나인 EFX 쇼를 보러갔다. 댄서들과 공중 곡예사가 총 망라된 사람들의 아름다운 모습과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지는 환상적인 모습이 압권이었다. 그 규모부터 진성을 비롯한 일행을 압도했다. 쇼가 모두 끝이 나자 모두들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서재필은 일행에게 못을 박았다. “... 더 이상은 안 돼! 나머지는 이벤트 행사가 다 끝나고 나서 생각해 보자. OK?" 아쉬움이 많이 남았지만 그래도 조금 전에 본 쇼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자신들은 놀러 온 게 아니라 엄연히 행사에 참가하러 온 것이다. 게다가 한국, 중국, 일본 팀 간의 경기라 이겨야 했다. 그랜드 가든 아레나의 규모는 엄청났다. 호텔에 속한 홀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대단했다. 2만여 석이 안 되어 한국의 게임 큐브보다도 작았지만 그랜드 가든 아레나의 경우는 호텔에 속해 있는 간이 경기장이었다. 이미 그랜드 가든 아레나의 자리는 꽉 차 있었다. 연령층은 다양했다. 나이 든 노인부터 아이까지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메웠다. 하지만 역시 절대 다수는 20대였다. 어디서 이런 사람들이 몰려왔는지는 몰랐지만 확실히 대단한 열기였다. 게임은 1등을 가리기는 했지만 친선 게임의 형식이었고 그 목적은 미국의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문명 온라인의 프로 게임을 보여주는 데 있었다. 게임은 폭스 TV에서 생중계하기로 되어 있었기에 기대가 컸다. “자, 최선을 다하자고. 단체전은 처음이니까 아무래도 조금 떨리겠지? 진성아, 네가 기선을 제압해라. 알겠지? 자, 가자!” 대기실로 가기 전에 서재필이 프로팀 전체를 불러 모으고는 자기 딴에는 기를 돋우기 위해 노력했다. 진성을 비롯한 게이머들은 서재필의 말과는 상관없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이제까지의 노력했던 시간의 결과를 얻기를 원했다. 문명 온라인에서 그리스는 고대 시대, 해군력에 있어서는 가히 최강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비록 중국 등의 동양과 직접적인 비교는 힘들지 몰라도 서양 문명 중에서는 최고의 해군을 지닌 나라가 바로 그리스였다. 기존의 강한 방진형 중장보병의 전통은 그대로였기 때문에 기병에서 조금 약점을 드러내는 것을 제외하면 상당히 균형 잡힌 문명이었다. 약점도 존재했다. 상대적으로 적은 영토와 도시국가로 인한 지역적 갈등이 존재했기 때문에 정확한 컨트롤을 요구했다. 아틀란티스의 최고 난이도 컨트롤의 어려움과 비교할 수는 없었지만 적은 영토는 일정 이상의 군 전력을 소유하기 힘들게 만들었기에 그리스가 문명 온라인 최고의 문명으로 등극하는 것을 방해했다. 이미 끝난 개인전에서는 예상했던 대로 진성이 전승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같이 참여한 혜연과 현호는 8위와 7위를 차지했다. 처음부터 잘 할 수는 없다고 스스로도 생각했지만 막상 결과가 9명 중에서 7위, 8위를 차지하자 두 사람의 얼굴이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꼴찌는 아니잖아? 그리고 앞으로 잘 하면 되지. 안 그래? 얼굴 펴! 너희들의 복수, 아니 복수는 조금 그렇다. 아무튼, 너희 둘을 위해서 꼭 이기고 돌아오지.” 벌레 씹은 얼굴을 하고 있는 현호와 혜연을 보며 현준이 말했다. 현준의 너스레에 그나마 억지로 얼굴을 바로 하는 두 사람이었다. 곧 이어 중국과의 단체전이 열릴 예정이었다. “나는 할 만큼 했다. 현준아, 알지?” “하하하하.. 당연히 이겨야지. 나와 한석, 그리고 진규가 게임을 하는데 당연히 이겨야지. 기대하라고. 아주 화끈한 게임을 보여줄 테니까. 하하..” 진성의 은근한 협박에 현준은 큰소리로 떠들었다. 곧 입장하라는 방송이 나오자 현준과 한석, 진규는 대기실 밖으로 나가 무대로 올라갔다. 공식적으로는 처음인 문명 온라인의 팀플레이였다. 상대는 중국이었기에 현준과 두 게이머는 당연히 중국 문명이라 예상했다. 중국은 해군과 육군이 잘 조화되었지만 보통 육군 쪽에 더 비중이 가는 짜임새가 많았다. 중국의 최대 장점은 전술적인 소화 능력이었다. 한 명의 지휘관 뿐 아니라 기본적으로 병졸에 이르기까지 다른 문명보다 전장에서의 전술을 그대로 해 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반면에 컨트롤이 힘들기 때문에 방심하거나 컨트롤 미스가 생기면 서양의 밀집보병 부대에 그대로 뚫리는 일도 일어났다. “밀리, 센터. 그리스식 군대강화법 시작해라.” “디플, 센터. 주변 지형과 국가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빨리 모아서 보고해라. 우선순위는 주변 국가에 대한 정보다.” 게임이 시작되자마자 현준의 목소리가 빠르게 울렸다. 단체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게이머들 간의 조화였다. 그 호흡을 맞추기 위해서는 당연히 의사소통이 먼저였다. 음성으로 컨트롤하는 특성상 누가 누구에게 말하는 것인지 쉽게 알 수 없었기에 현준과 한석, 진규는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자신들이 쓰기 편한 약속을 만들어냈다. 일단 세 명의 게이머는 먼저 서로의 역할을 정했다. 현준은 전체 게임의 플레이 상황을 주시하고 다른 게이머들에게 현재의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전략에 대한 지시를 내리거나 도움을 주는 역할을 맡았다. 물론 문명과 사회에 대한 컨트롤도 포함되어 있었다. 각 파트를 맡은 게이머들로부터 항상 최신의 정보를 입수해서 판단을 해야 하는 역할이어서 전체 게임에 밝은 게이머가 맡을 수밖에 없는 어려운 자리였다. 한석도 그런 능력이 있었지만 스스로 생각했을 때, 확실히 현준이 더 어울리는 자리라고 생각했다. 전체의 흐름과 세부적인 전략과의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자리, 현준의 몫이었다. 현준은 이 역할, 자리를 ‘센터’라고 이름 붙였다. 그 다음으로 외교, 정보와 관련된 모든 일을 컨트롤하는 역할은 한석이 맡았다. 현준이 맡은 센터 다음으로 임기응변의 대처가 필요한 곳이 바로 외교 부분이었다. 게임 시작한 뒤, 어떤 성향의 나라가 주변에 있을 지 전혀 알 수 없는 곳인데다가 재량권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 빠른 판단과 추진력이 필요한 역할이었다. 자소 소프트의 단체전에서 가장 어울리는 사람은 한석이었다. 한석은 이 자리를 ‘디플’이라고 정했다. 진규는 군대와 관련된 컨트롤을 맡았다. 문명 온라인 전체 게이머를 통틀어서, 군대 관련 컨트롤에 관한한 최고는 게이머 스키피오, 진성이었다. 진규는 그런 진성의 컨트롤에 가장 근접한 컨트롤을 보여하고 있는 게이머 중 하나였다. 비록 사회 통제나 다른 분야에 비교적 약했지만 군대 관련 컨트롤의 스페셜리스트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리스식 군대강화법 역시 진규의 솜씨였다. 진규는 자신이 체득한 로마의 군대강화법을 그리스식으로 만들기 위해 상당시간 노력했고 그 결실을 볼 수 있었다. 진규는 군대 관련 컨트롤을 해야 하는 자리를 ‘밀리’라고 이름 지었다. 그 외에 원정군을 직접 이끌어 전투를 지휘할 게이머를 ‘배틀’이라고 불렀지만 라스베가스의 이벤트에는 필요 없었다. 센터, 디플, 밀리, 배틀 모두 자소 소프트 프로팀 내부에서 사용하는 용어였다. 게다가 누가 말하고, 누구에게 말하는가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말의 처음에 누구에게 말하는지, 그 다음에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 먼저 밝히고 원하는 내용을 말하기로 정했다. 특히 중요한 순간에 이런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기면 안 되었기에 연습 게임에서도 정확한 사용을 중요시했다. 팀플레이시 제일 복잡하고 어려운 역할은 센터였다. 기본적으로 문명 온라인은 음성 명령 모드였기에 모든 게이머가 동시에 말할 수밖에 없었다. 서로 다른 게임기에 탑승해 있기 때문에 상대를 기다릴 만한 여유도 없거니와 그렇게 해서는 게임 진행에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서로 간의 대화를 들을 수도 있고 듣지 않을 수 있게 설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센터인 현준은 밀리인 진규와 디플인 한석의 말을 다 들어야 했다. 무엇을 하는지 알아야 어떻게 하라고 지시할 수 있기 때문에 센터는 디플과 밀리 심지어 배틀의 말까지 다 들어야했다. 상대적으로 밀리와 디플은 센터의 말만 듣기만 하면 충분했다. 센터의 사회 통제와 문명 경영에 대한 컨트롤은 들어야 했지만 상대적으로 적은 컨트롤이었기에 충분히 참을 수 있었다. 이런 문제를 알고 있었던 문명 온라인에서 두 번째 패치를 발표하면서 게이머들의 편의를 위해서 개인의 명령을 미리 정해서 명령이 아닌 일종의 가상 핸드 컨트롤러를 통해서 지시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게임 상황을 예측하기 힘들었고 저장해 둔 명령이 너무 많은 경우 급박한 상황에서 명령을 제대로 기억하기 힘들어 별로 사용되지 못했다. 게다가 위급할 경우에는 임기응변식의 생각나는 대로 컨트롤하는 것이 더 정확했고 빨랐다. 의외로 패치가 발표될 당시에는 그리 주목받지 못한 기능이었는데 진성이 발견해 내어 자소 소프트의 프로팀에서 사용된 이후 다른 프로팀들도 사용하게 된 숨겨져 있던 프로그램도 있었다. 바로 음성 명령을 조건에 따라서 처리할 수 있는 일종의 스크립트 프로그램이었다. 평소 자신의 특정 패턴을 하나의 명령 조합으로 만들 수는 없을까 고민했던 진성이 수많은 두 번째 패치 이후의 매뉴얼을 뒤져서 찾아낸 것으로 원래의 의도는 개발팀의 자체 테스트를 위해서였다. 진성은 그 스크립트를 통해서 자신만의 정교한 명령을 만들어 내었는데 기존의 가상 핸드 컨트롤러와는 달랐다. 가상 핸드 컨트롤러가 마치 키보드처럼 한정된 명령어를 그대로 맵핑시키는 수단이라면 스크립트는 프로그래밍과 같아서 명령을 지능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세세한 컨트롤이 가능했다. 진성은 단체전에서의 문제점을 스크립트 언어를 통해 수정했다. 바로 음성 명령의 처음에 특정 단어 패턴이 나오면 그 단어에 따라 다른 기능을 수행하게 만든 것이다. 처음에 ‘밀리’라는 말이 나오면 그 다음의 모든 말은 미리 ‘밀리’라고 설정된 게이머의 화면에만 메시지 창으로 나타나게 만들었다. 또한 모든 진행상황을 알아야 했던 현준은 진성의 도움을 받아 한석과 진규의 음성 명령 결과를 메시지로 볼 수 있었다. 간단했지만 실로 엄청난 대화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대는 현석, 한석, 진규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심지어 일주일 가까이 후한 대접을 받을 정도였다. 진성이 만든 게이머들을 위한 프로그램은 바로 개발팀에게 알려졌고 곧바로 각 나라의 프로팀에게도 세련되게 수정된 프로그램이 보내졌다. “센터, 밀리. 군대강화법 시작한다.” “센터, 디플. 주변 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보낸다.” 현준은 진규에게서 군대강화법을 시작했다는 메시지를 받았고 바로 뒤에 한석으로부터 주변 국가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현준은 보고서를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 호레친.. 경제력이 좋고.. 기병이 우수하다? 음... 마탈란, 산악 지형이 대부분인 나라... 경보병이 최강이다? 음... 어.. 도리아노. 바로 앞에 섬나라가 있었군. 당연히 해군이 강하겠지.” 그리스의 서쪽에는 호레친이라는 국가가 존재했다. 국토가 비옥하고 기후가 좋아 상당히 부유한 나라였고 군사력도 상당히 좋다고 보고되었다. 특히 중장기병에 걸 맞는 말이 많이 나 기병력이 우수했다. 반대쪽인 동쪽에는 마탈란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나라 전체가 거의 산악 지형이어서 날렵한 경보병이 발전한 곳이었다. 현준이 조금 놀랐던 것은 그리스의 남쪽 바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섬나라 도리아노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섬나라라면 당연히 해상무역이 발전되어 있을 테고 예상대로 해군이 강한 나라였다. 현준은 섬나라 도리아노를 최우선, 그 다음으로 호레친, 마탈란 순으로 외교 활동을 벌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디플, 센터. 도리아노, 호레친, 마탈란 순으로 외교 활동을 시작하자. 제일 먼저는 동맹을 우선시하고 나중에 원군을 청할 수 있도록 조율하기 바란다. 특히 도리아노의 해군과 더불어 잘만 하면 적의 원군이 발도 붙이지 못할 테니까. 그리고 상대인 중국의 상황과 그 주변국가에 대한 정보 역시 빨리 해 주기 바란다.” 현준은 디플, 한석에게 적당한 지시를 하고는 자신이 예전에 개발했던 문명 강화법을 시작으로 제대로 된 문명 컨트롤을 시작했다. 현준은 자신의 목소리 외에는 전혀 들리지 않자 다시 한 번 속으로 진성에게 감사했다. 처음에 연습했을 때의 그 시장판 같다면 한숨만 나올 것이다. “센터, 디플. 중국의 상황과 주변 국가에 대한 정보.” 한석으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현준은 곧 한쪽 시야를 가득 채우는 넓은 지도를 볼 수 있었다. 지도의 위쪽에 그리스를 중심으로 왼쪽의 호레친, 오른쪽의 마탈란이 보였고 약간 아래쪽에 섬나라 도리아노가 위치했다. 중국이 있는 대륙은 크게 세 개의 나라가 있었다. 그리스와 마주보는 해안선을 끼고 있는 나라는 남소라는 곳으로 전형적인 유목 민족의 나라였다. 영토의 폭은 좁았지만 해안을 포함해서 상당히 길었다. 남소 남쪽과 서쪽에 중국이 존재했고 중국의 동쪽, 남소의 동쪽에 마여진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또한 중국과 바다를 두고 마주보고 있는 섬나라 등려도 있었다. 마치 그리스와 도리아노의 위치와 비슷했다. 남소는 유목 민족의 나라로 최강의 경기병을 보여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유목 민족 특성상 말에 대한 선천적인 재능을 지녔고 민족성이 유목으로 인해 억세게 변했고 또한 강한 활을 가지고 있었기에 경기병 또는 궁기병으로 그 위력은 대단했다. 마여진은 섬나라 도리아노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었지만 도리아노가 마여진의 영토였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로 마여진은 도리아노를 복속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밀리, 센터. 현재 해군의 전력은?” “센터, 밀리. 3단 군용선 40여척, 2단 군용선 30여척 정도입니다. 근해의 방어는 가능하지만 원정은 힘듭니다.” “밀리, 센터. 5단 갤리선을 최소 50여척 정도 갖출 만한 시간은?” “센터, 밀리. 지상군의 충원 속도를 줄이면 오래지 않아 가능합니다.” “밀리, 센터. 해군력에 집중해라.” 현준은 아직 도리아노와 동맹을 체결하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바다를 장악할 필요가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중국과 그 인근의 국가가 그리 바다에 강하지 않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에 초기에 해상 장악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센터, 디플. 도리아노와는 동맹체결 완료. 호레친과는 우호적인 친선 조약. 마탈란은 아직 오리무중. 현재 마탈란을 제외하면 빠른 시일 안에 동맹 완료 가능.” “디플, 센터. 마탈란에서 문제라도 있나?” “센터, 디플. 호레친과 조금의 트러블이 있는 모양이다. 아무튼 몇 가지 방법을 통해서 회유해 볼 테니까 걱정 하지마라. 그리고 호레친은 전리품의 일정 부분을 갖고 보급을 받는 조건으로 원군, 특히 기병의 원군에 합의할 수 있을 것 같다. 기대해라.” “디플, 센터. 기대한다. 다음으로 중국의 동맹상황과 내부 상황에 대해서도 알려주기 바란다.” 주위의 국가와 군사적으로 일체감을 느끼게 되면 일단 뒤를 맞을 위험은 사라지게 된다. 현준은 마탈란과 제대로 동맹을 체결하면 바로 원정에 나설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센터, 밀리. 52척의 5단 군선 준비 완료. 하지만 아직 제대로 된 훈련은 실시하지 못했습니다.” “밀리, 센터. 원정을 갈 준비를 해라. 최대한 빨리 준비해라. 훈련은 원정 가는 동안의 기동으로 대체해라. 아, 그리고 네가 없는 동안 내가 군대 관련 컨트롤을 할 테니까. 가기 전에 코드명을 밀리에서 배틀로 바꿔라.” “센터, 밀리. OK!" 자소 소프트의 프로팀은 상당히 조직적인 체계를 만든 상태였다. 각 역할을 정리해서 어떤 게이머라도 그 역할을 담당하게 되면 기본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알 수 있도록 만들었다. 또한 조금씩은 변하지만 기본적인 기틀은 변하지 않아 밀리 역할만 한 사람도 센터 역할을 혼동하지 않고 적응할 수 있도록 만들어갔다. 현준은 밀리를 자신이 같이 컨트롤하고 대신 진규를 원정군을 지휘하는 배틀을 맡도록 했다. 진규의 부대 컨트롤은 상당했기 때문에 믿고 맡길 수 있었다. 현준은 원정군이 높은 사기로 출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사회적인 분위기와 원정군의 당위성을 여러 경로로 유포했다. 그 때, 한석으로부터 메시지가 들어왔다. “센터, 디플. 중국의 내부 상황이다.” 현준은 중국의 지도와 더불어 대략적인 상황 파악을 할 수 있었다. “어... 이거 지역으로 나누었잖아?” 중국의 세 게이머는 광대한 영토를 제대로 컨트롤하기 위해 지역을 중심으로 나눴다. 그럴 경우 장점은 각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을 거의 동시에 서로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종합적인 대책이 가능해졌다. 해안에서 적의 침략이 일어나면 곧바로 중앙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로 인해 빠른 대응과 다각도의 대처가 가능했다. 하지만 반대로 각 지역에서 서로 다른 게이머가 정치, 경제, 군대, 사회의 컨트롤을 하기 때문에 각 영역의 접한 곳은 그 차이로 인해 마찰이 생겼다. 최악의 경우 세 지역이 반목을 하다가 뜻하지 않은 봉기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이런 경우 세 게이머가 서로 비슷하게 컨트롤을 해야 하는데 그로 인해서 세 게이머 각자의 장점이 아닌 평균적인 실력으로 고정될 가능성이 높았다. 현준을 비롯해서 자소 소프트의 선수들도 그와 비슷한 지역별 컨트롤을 해 보았지만 뭔가 어그러지는 것 같은 느낌에 사용하지 않다가 나중에 가세한 진성이 확실히 지역별 컨트롤의 맹점에 대해서 한바탕 강의를 하고 나자 확실히 그 문제점을 알 수 있었다. 잘하면 좋지만 그 한계가 있었기에 현준과 다른 게이머들은 냉정하게 지역별 컨트롤을 버리고 각 게이머의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컨트롤 체계를 만들어 내었다. “음.... 의외로 쉽게 이길 수도 있겠다. 음....” 잠깐 생각을 정리한 현준은 바로 메시지를 보냈다. “디플, 센터. 중국의 내부 상황이 지역별 컨트롤이라면 당연히 그것을 이용해서 갈등을 일으켜야겠지. 어때? 첩자를 이용해서 시도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센터, 디플. 당연하지. 거기에 중국의 남쪽에 있는 등려라는 섬나라에 중국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은 것 같다. 중국 내부에 대한 갈등 조장과 더불어 등려에 대해서도 조치를 했으면 하는데..” “디플, 센터. OK! 한석이 네가 그 부분에 대해서 열심히 하라고. 조금 있으면 진규가 원정군을 이끌고 무력시위를 할 테니까 그 틈을 타면 좋겠다. 중국과 그 동맹국가의 시선을 위쪽으로 모을 때 터트리면 좋겠지. 하하하... 수고!” “센터. 디플. 너도 수고해라.” 모든 정보를 현준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외교 관련 정보만 있는 한석으로서는 당연히 현준과 의논을 해야 했다. 마찬가지로 현준도 자신이 정보를 가지고 있지만 현장의 지휘관을 무시할 만한 정보는 아니었다. 현준은 한석과 대화를 통해 주로 일을 정했고 다른 분야인 밀리의 정보를 이용해서 다듬었다. 현준은 곧 벌어질 상황을 상상하며 자신의 일을 해 나갔다. “센터, 밀리. 원정군 출발해도 됩니까? 준비는 다 되었습니다.” “밀리, 센터. 내가 뒤에 말했던 것도 준비가 끝난 거냐?” “센터, 밀리. 네, 다 포함해서입니다.” “밀리, 센터. OK! 출발해라. 건투를 빈다.” 5단 갤리선 50여척, 2단 갤리선 40여척으로 이루어진 원정군이 출발했다. 정예병을 실은 수송선단도 그 뒤를 따랐다. 현준은 거대한 군선들이 질서정연하게 무리를 지어 서서히 떠나는 것을 보고는 한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디플, 센터. 지금 진규가 원정군을 이끌고 항구를 떠났다. 예전에 상의했던 대로 정예병은 우회해서 등려로 가기로 되어 있으니까 잘 맞이해 주기 바란다.” “센터, 디플. OK!" 한석은 지금 비밀리에 등려로 가 있었다. 등려와의 조약 체결을 위해서, 그 성의를 보이기 위해 게이머 자신이 섬나라 등려로 들어갔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중국의 등려에 대한 상대적인 무시로 인한 반대급부와 외교관련 최고 직위인 게이머 자신이 등려로 들어오자 분위기는 좋아졌다. 게다가 단순한 조약을 넘어 동맹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높았다. 한석은 정확한 타이밍만 잡으면 한 순간에 중국을 무너뜨릴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이미 첩자들은 중국으로 들어간 상태였다. 북쪽의 해안선과 국경선은 아주 엄격했지만 상대적으로 등려를 통해 중국으로 스며들은 첩자들은 거의 제재를 받지 않았다. “전영노, 화서진이다. 남소에서 연락이 왔다. 북쪽에서 100여척의 군선이 접근해오고 있다는 보고다. 일단 최북단의 항구인 전홍에서 해군이 출발해야 할 것 같은데..” “화서진, 전영노다. 지금 가능한 군선은 누선 70여척과 노요 110여척이 가능하다. 누선은 그런대로 제 역할을 하겠지만 10~20명이 타는 돌격선인 노요는 대세에 큰 영향을 주지 않을 것 같다. 전홍에 있는 누선 70여척만 출발해서는 힘들 것 같다. 서류가 가지고 있는 누선 60여척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그 말에 화서진이 서류를 불렀다. 중국도 진성이 처음 시작한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서류, 화서진이다. 북쪽에서 100여척의 군선이 접근중이다. 전영노의 누선 70여척이 그 군선을 막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으니 네가 가진 60여척의 누선도 북쪽으로 보내 주기 바란다.” “화서진, 서류다. 그렇게 하겠다. 지휘는 누가 하나?” “서류, 화서진이다. 전영노가 하지 않을까?” 중국, 중화그룹의 게이머 전영노, 화서진, 서류는 분산되어 있는 중국의 해군을 모아야했다. 특히 거의 반대쪽에 있는 전영노와 서류의 경우 해군력을 모으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중국의 게이머들은 이런 체제의 문제점으로 완전히 다른 체제를 생각하기 보다는 기존의 체제를 이용해 더욱 더 발전시켜왔다. 넓은 영토로 인해 어쩌면 당연한 체제였지만 아직 제대로 갈고 닦이지 않은 듯했다. 화서진은 이런 넓은 영토로 인해 적보다 확실히 병력 수와 군대 규모에서는 우위를 점할 수 있었지만 방어해야 할 부분 또한 넓어짐을 알고 있었다. 또한 지역 위주의 체제가 지닌 문제도 어렴풋이 예상했지만 당장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공세일 경우에는 아주 강했지만 수세일 경우에는 지켜야할 부분이 많아 힘든 것이 사실이었다. 화서진은 지금 당장이 아니라 가을에 시작될 리그를 기준으로 더 많이 전략을 다듬을 필요가 있음을 절실히 깨달았다. 북쪽에서 내려오는 그리스의 군선은 중국의 정찰선의 범위에 들기 전에 그 수송선단과 분리했다. 수송선단은 중국과 그 인접국을 크게 우회해서 섬나라 등려에 도착할 요량으로 이동했다. 진규는 미리 현준에게서 들은 대로 수송선단의 안전을 위해 급히 남쪽으로 군선을 이끌고 내려갔다. 최대한 모든 관심을 북쪽으로 모아야 했다. 50여척의 5단 노로 구성된 갤리선과 40여척의 2단 갤리선으로 구성된 진규의 해군은 아주 빨리 중국, 남소의 북쪽으로 다가갔다.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졌다고 생각한 진규는 정찰선을 풀어 해역을 살폈다. “어.. 누선 70여척? 생각보다 적은데....” 잠시 생각한 진규는 곧 결론을 내렸다. 넓은 영토로 인해서 아직 다 모이지 않았다고 판단했기에 상대가 제대로 모이기 전에 일단 흔들어 어느 정도 타격을 주기로 결심했다. 이제 진규 혼자 독자적인 판단을 할 정도로 실력이 향상되었다. 진규는 90여척의 군선을 이끌고 빠르게 중국의 군선, 누선을 향해 돌진했다. 진규는 2단 갤리선을 앞쪽에 포진하고 5단 갤리선을 뒤쪽에 위치시켰다. 중국의 누선으로 된 해군은 그 위치했던 곳이 전술적으로 유리한 곳이었기에 피해야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머뭇거리며 컨트롤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게다가 게이머 전영노가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는 방심도 조금 기여를 했다. 특히 상대의 배가 2단 갤리선임을 알았기에 더욱 그랬다. 진규는 적이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대로 피하는 것도 아니고 공격하는 것도 아니어서 이상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빠르게 돌격하도록 명령했다. 거의 상대에 다다라서야 신호를 보냈다. 그 순간 2단의 갤리선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면서 양 옆으로 나뉘었고 뒤에 있던 5단 갤리선들이 빠르게 앞으로 나오면서 중국의 누선의 진형 측면을 들이받았다. 배의 규모와 돌진력에서 2단 갤리선보다 한, 두 수 정도는 위인 5단 갤리선의 위력은 대단했다. 누선이 5단 군선의 충각에 부딪쳐서 침몰하는 장면이 여기저기에서 연출되었다. 또한 로마의 정예보병만은 못해도 상당히 강한 그리스의 해병은 붙은 배 위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순식간에 분위기는 진규의 그리스 해군에게로 넘어갔다. “어.. 역시..” 진규는 우세한 공격을 하면서도 지시를 통해 그 주변을 살폈다. 역시 자신의 예상대로 중국의 누선으로 이루어진 해군이 다가오고 있었다. 진규는 빠르게 퇴각 명령을 내렸다. “둥.. 둥..” 우세를 점하고 있던 그리스의 해군은 퇴각할 때도 그 군기가 엿보였다. 별로 흐트러짐이 없어 추격을 하기도 힘든 퇴각이었다. 전영노는 한순간에 적의 5단 갤리선이 중앙을 뚫고 나오는 탓에 별다른 대응도 못하고 괴멸당할 뻔 하다가 그나마 서류가 보내준 해군으로 인해 살아날 수 있었다. 하지만 추격을 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휴우... 정말 대단하네.” 전영노는 그리스의 군대가 완전히 해역을 빠져나가지 않고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진을 치고서는 기다리고 있음을 보았다. 화가 나서 공격하려고 했지만 일단 피해 상황과 새로 온 해군을 제대로 지휘 체계에 편입시켜야 했다. 전영노는 부지런히 군대 정비에 들어갔다. “뭐? 이... 휴우.. 하긴..” 70척 중에 22척이 완파되어 수장되었고 나머지 48척 중에 24척이 기동 불능이었다. 그나마 전투가 가능한 것은 24척이었다. 새로 온 누선 60척을 합쳐도 84척이 다였다. 적은 아직도 거의 90여척에 가까운 배를 가졌다고 판단한 전영노는 적이 지금 자신을 공격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화서진, 전영노다. 서류의 해군과 만나기 전에 적과 조우해서 전투를 벌였지만 대패하고 말았다. 70척의 누선 중에 제대로 기동이 가능한 배는 24척 밖에 없다. 서류의 배와 합쳐도 84척이다. 현재로서는 적의 배를 공략하기는 힘들다.” “전영노, 화서진이다. 뭐? 그렇게? 휴우... 서류가 군선을 건조중이라니까 조금 기다려라. 일단 내가 지상군을 움직여서 상륙은 막을 테니 너도 절대 상륙은 못하도록 만들어라. 알겠지?” “화서진, 전영노다. 알겠다. 휴우.. 미안하다.” 화서진은 그리스의 해군이 강함을 알았기에 그리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넓은 영토인 만큼 50여 척 정도의 누선은 금방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절대 상륙하게 해서는 안 됨을 알았다. 일단 상륙해서 거점을 만들게 되면 그 때부터는 그리스에서 정예 지상군이 투입될 것이기 때문에 절대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자신은 남소와 마여진에 연락을 하고 자신의 군대를 움직이기까지 했다. 화서진은 섬나라 등려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의도적이지는 않았다. 지역별로 나눈 체제 때문에 그 담당이 어중간한 것도 있었지만 초기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아 그런 나라가 있다는 것도 제대로 알지 못한 분명한 실수였다. 화서진을 비롯해 전영노와 서류는 등려라는 크지 않은 섬나라가 게임의 향방을 좌우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그리스의 수송선은 크게 우회해서 안전하게 등려에 도착했다. “센터, 디플. 1차 원정군 무사히 도착했다. 2차 원정군의 출발 시기는?” “디플, 센터. 곧바로 보내주겠다. 계획대로 중국의 남부와 서부를 완전히 혼란스럽게 만든 후에 남부를 통해 1차 원정군을 투입해라. 중국의 전력이 남쪽으로 모이는 틈을 노려 서북쪽으로 2차 원정군을 상륙시킬 예정이다.” “센터, 디플. 진규는?” “디플, 센터. 현재 중국의 북쪽 연안에서 시위 중이다. 진규 녀석 참 잘한다. 준비가 다 되면 말해라.” “센터, 디플. OK!" 현준은 타이밍을 생각했다. 한석이 1차 원정군을 이끌고 중국의 남부를 혼란에 빠뜨린다면 당연히 중국의 북부와 서부는 남부를 돕기 위한 움직임이 생길 것이다. 전혀 예상 못했기 때문에 더 당황할 테고 그렇게 되면 절대 양동작전임은 눈치 채기 힘들 것이라 확신했다. 그리스의 항구 크레온에는 호레친 원정 기병 2만과 그리스 정예병 5만이 대기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미 7만의 정예병이 등려로 넘어간 상태여서 정확한 타이밍만 맞춘다면 단번에 중국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중국의 병력은 상당히 많지만 비교적 허술해 보이는 중국의 남부와 서부는 어렵지 않게 첩자들의 활동으로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중국의 북부였다. 중국과 접하는 두 나라 모두 중국의 북부와 마주하고 있었다. 게다가 조사한 정보에 따르면 남부와 서부의 스타일이 군사력 우선이라면 북부의 통치나 컨트롤 스타일은 아주 안정적인 데다가 조화롭기까지 했다. 애초에 남부와 서부를 계획에 잡은 것은 북부는 사실상 첩자로 인한 교란이 불가능하다는 예상 때문이었다. 현준은 이 게임의 관건은 바로 중국 북부의 공략이지 않을까 내심 생각했다. 화서진은 불안했다. 확실한 우위를 거둔 해전의 승리 이후에 상대의 도발이 없었던 것이다. 상대도 분명 중국 문명의 특징을 알고 있을 게 뻔한데 이런 좋은 기회를 그냥 흘리지는 않으리라 확신했다. 뭔가 일이 진행되고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화서진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게이머들이 서로 간에 대화를 통해 정보를 교환하고 있지만 확실한 구심축이 없어 제대로 정보의 핵심을 빨리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이제까지 연습 게임이나 다른 프로팀과의 친선게임에서는 막강한 전력으로 밀어붙였기에 그 약점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제 대단한 상대와 대결을 하자 리더쉽의 부재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휴우.... 영토가 넓다보니 어쩔 수는 없지만 확실히 정보를 체계적으로 공유할 방법을 찾아야겠군.” 화서진은 불안한 마음에 인접한 남소, 마여진과의 동맹관계를 공고히 했고 남소를 통해 그리스와 그렇게 좋은 사이는 아닌 마탈란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직접 할 수 없다면 간접적으로 그리스를 흔들어 놓을 수는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전영노와 서류는 재빨리 군선을 보충하려고 노력했지만 단기간에 쉽게 대형 선박인 누선을 대량으로 보충하기에는 힘이 부쳤다. 게다가 둘 모두 평소에 사회 통제나 문명의 발달에 많은 신경을 쓰지 못했기 때문에 강압적인 군선 건조에는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무리수는 당연히 사회 불만을 가중시켰고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불안이 커지는 요인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도 유유히 중국 연안을 휘젓는 그리스의 해군을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전영노와 서류는 어떻게 해서든 그리스 해군을 쫓아버릴 수 있는 해군, 군선이 필요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음... 이 정도면 가능할 것 같은데...” 한석은 중국 본토에서 들어온 첩자의 보고를 받았다. 북부를 제외한 중국의 지역에서 불만이 고조되고 있음을 알았다. 아주 좋은 기회였다. 남부와 서부 모두 해군에 주력했지 지상군은 그리 신경 쓰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센터, 디플. 지금이 적기다. 첩자들 봉기시키고 원정군 투입하겠다.” “디플, 센터. OK! 곧바로 2차 원정군 출발시키겠다. 건투를 빈다!” “센터, 디플. 물론. 두고 보라고.” 한석은 재빨리 중국의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첩자들을 향해 밀서를 보냈다. 이 좋은 기회를 그대로 둘 수는 없다. 한석은 조금 뒤에 벌어질 상황을 예상하며 원정군의 지휘관들을 불러 모았다. 마지막 작전에 대한 지시를 내려야 할 때임을 한석은 알고 있었다. “배틀, 센터. 지금 바로 해군을 이동시켜서 중국의 근해에서 멀리 떨어져 대기해라. 2차 원정군을 실은 수송선단이 중국의 서북쪽으로 갈 테니 기다렸다가 같이 합류해 상륙해라. 어차피 남은 것은 지상전이니 모든 해군의 군인들을 상륙시키고 2차 원정군을 진규 네가 맡아라. 알겠지?” “센터, 배틀. OK!" 현준이 진규에게 해군의 움직임에 대해 지시하자 진규는 곧바로 중국 연안에서 위협적인 시위를 하다가 공해상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처음의 해전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전투가 없었기에 조금은 긴장이 풀어졌던 진규는 이제 곧 상륙하게 되고 지상군의 지휘관이 되어 전투를 벌일 생각을 하니 자연스럽게 긴장의 고삐가 당겨졌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이게..” 전영노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갑자기 반란이라니. 전영노는 평소 자신이 했던 대로 했는데 갑자기 반란이 일어나자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평소 게임을 위태롭게 한다는 지적은 들었지만 그런 것을 고려해서 했기 때문에 팀 내 연습이나 친선게임을 통해서 이런 반란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전영노는 어떻게 수습을 해 보려고 했지만 반란은 더 확산이 되었다. 게다가 해군에 대한 통제력도 잃어버렸다. 화서진과 서류에게 알리려고 하다가 수습하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에 일단 재빨리 컨트롤에만 집중했다. 중국의 남부, 서류 역시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말도 되지 않게 반란이라니. 나름대로 안정시켜 보려고 했지만 반란의 규모가 너무 컸다. “뭐? 등려가?” 설상가상으로 바다를 통해 마주보고 있는 섬나라 등려가 침략했다는 보고까지 올라왔다. 갑작스런 군선의 건조로 평소 그리 외교 관계가 좋지만은 않았던 등려가 침공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등려로 사신을 보낸다.” 일단 어떻게든 동요를 막고 등려의 공격도 대화로서 풀 수 있으면 그 방법으로 해결하는 게 서류로서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서류는 이런 반란과 동시에 침공하는 등려의 모습에서 석연치 않음을 느꼈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서류 역시 급한 나머지 화서진과 전영노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을 깜박하고 말았다. “중국에서 사신이 왔다고? 하하하. 아직 상황을 모르는군. 이 틈에 대어를 낚아볼까?” 한석은 등려를 통해 중국에서 사신이 온 것을 알았다. 한석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등려를 통해 한 가지 계획을 생각했다. 일단 침공의 원인을 중국이 예상하는, 등려에 대한 평소의 홀대라는 말로 둘러대고 상대의 최고 지휘관이나 결정권자와 만나고 싶다는 말을 하도록 등려에게 충고했다. 중국의 내부 상황을 볼 때 제어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피해를 입지 않고 마무리를 한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한석은 이 기회를 통해 상대 게이머를 잡을 생각이었다. 현재 등려의 군인으로 위장한 그리스 정예병이 중국의 남부의 첩자와 호응해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기 때문에 원했던 성과는 거둔 셈이었다. 하지만 게이머를 잡는다면 그대로 중국의 삼분의 일이 무너지는 것과 같았다. 아니, 중국의 삼분의 일을 거저 얻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지금의 중국은 3명의 게이머가 각각 자신의 영토를 가지고 컨트롤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한 명의 게이머를 인질로 잡는다는 말은 바로 게이머가 가진 영토를 가진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한석은 정신을 집중해서 상대 게이머를 잡기 위한 빈틈없는 계획을 완성시키기 시작했다. “역시 무관심과 홀대가 문제였구나. 어쩔 수 없지. 이렇게 해서라도 하루빨리 정상이 된다면..” 서류는 다소 위험한 만남임은 알았지만 곧 그리스의 해군을 쫓아내기 위한 해전을 벌여야 하는 마당에 이런 집안 문제로 시간을 보낼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서류는 자신이 직접 등려의 대표자와 만나 단판을 짓고 아예 친선 조약까지 맺을 수 있다면 맺을 마음을 먹었다. “아.. 아니. 이게 무슨..” 서류는 등려의 왕과 만나기 위한 자리에 갑자기 자신을 향해 창을 들이대는 등려의 군인들의 모습에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이런 만남의 자리에서 창을 들이대다니.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NPC가 이런 일을 하다니. 서류는 등려와 그렇게 사이가 좋지 않았나 생각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지는 않았다. “안녕하신가?” 그 순간 한석은 모습을 드러냈다. 새로운 타입의 게임기라서 가능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한석의 말에 중국인 게이머, 서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아, 그렇군. 말을 알아듣지 못하지? I'm Korean gamer. You are caught.” 그제야 상황을 눈치 챈 서류였다. “.... 아......!!” 한석은 곧바로 서류를 인질로 잡아 등려로 돌아왔다. 상대 게이머는 전혀 명령을 할 수 없도록 재갈을 물린 상태였다. 이제 남부는 궤멸된 상태와 다름없었다. 등려를 이용해 남부를 장악할 생각도 했지만 그럴 경우 두 방향에서 공격을 받게 되지 않을까 우려했기에 생각 끝에 등려로 되돌아왔다. “센터, 디플. 좋은 소식이다. 상대 게이머 한 명을 인질로 잡았다. 하하하.” “디플, 센터. 뭐라고? 정말이냐?” “센터, 디플. 이 순간에 농담하겠냐? 중국 남부는 이제 끝장났다.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자.” 현준은 한석의 말에 놀랐다. 게이머를 잡다니. 현준 자신의 기억으로 게이머가 잡힌 게임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예전의 접속기에는 그런 일이 불가능했다. 새로 바뀐 타입의 게임기는 게이머를 잡는 것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연습 경기에서도 본 일이 없었다. 한석의 말대로 중국의 남부를 컨트롤하던 게이머가 잡혔다면 남부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니 잘하면 남부를 컨트롤해서 적의 병력으로 적을 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현준은 자신이 인질로 잡은 듯 기분이 좋았다. 화서진은 화가 났다. 반란이 일어났는데도 자신이 이상해서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야 알게 된 전영노와 아예 메시지조차 없는 서류의 게임 플레이에 너무 화가 난 것이다. 팀플레이인데 이렇게까지 개인플레이를 할 줄은 몰랐다. 아무리 아직 체제를 완성하지 못한 채 점점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지만 이런 게임은 너무 심했다. 화서진은 전영노와 서류가 팀플레이에 같이 출전하는 것을 내심 꺼려했다. 전투와 같은 한정된 공간에서의 컨트롤이나 플레이는 전영노와 서류를 화서진 자신이 따라가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팀플레이였다. 개인적으로 자기가 잘하는 것만 딱 하면 끝나는 게임이 아니었다. 화서진은 그런 팀플레이의 특징을 알았지만 자신의 목소리는 팀에 먹히지 않았다. 그런 마음에다가 이렇게 개인플레이까지 하니 화가 터져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게임은 게임이고 기분은 기분이었다. 화서진은 중국의 남부의 사정을 알기 위해 급히 정보 관련 인물을 파견하고 전영노의 상황을 주시했다. “뭐? 남부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고? 게다가 등려에서 침공했다고?” 화서진은 남부의 사정을 듣고는 이제까지 조용했던 그리스의 침묵이 언뜻 생각이 났다. 이렇게 공교로울 수는 없었다. 등려와 좋은 관계는 아니었지만 나쁜 관계도 아니었다. 이렇게 무턱대고 침략할 만한 이유는 찾을 수가 없었다. 화서진은 곧바로 전영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전영노, 화서진이다. 반란은 모두 그리스의 계략이다. 잘 들어라. 지금 남부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니 곧바로 군대를 동원해서 철저하게 진압해라. 모두 그리스의 계략이다.” “화서진, 전영노. 뭐? 정말이냐? 이런.... 어쩐지 징조도 없이 갑자기..... 서류는? 잘 대처하고 있냐?” “전영노, 화서진. 서류는 지금 연락도 되지 않는다. 일단, 전영노 너는 네 문제에 집중해라. 내가 서류를 도와줄 테니까. 알겠지?” “화서진, 전영노. 알겠다.” 화서진은 냉정하게 생각했다. 제일 먼저 그런 반란의 움직임이 자신이 컨트롤하는 지역에는 전혀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비했다. 그리고 각각 3만의 군대를 전영노와 서류가 컨트롤하는 지역 경계까지 진군시켰다. 안 되면 무력 진압도 불사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마탈란을 통한 그리스의 흔드는 방법을 강화할 필요가 있음을 알았다. “센터, 배틀. 이제 곧 상륙합니다.” “배틀, 센터. 수고해라. 일단 중국의 서부를 무너뜨리고 가능하면 게이머를 처리해라. 처리라고 말하니 이상하네. 아무튼 한석이가 중국 게이머 한 명을 잡았다고 하거든. 아직 북부는 건드리지 말고 서부를 무너뜨리고 나면 남부의 원정군과 합류해라. 원정군과 합류하면 바로 한석이는 돌아올 테니까 그 때부터 네가 진정한 원정군 지휘관이다. 알겠냐?” “센터, 배틀. 알겠습니다.” 진규는 게이머가 잡혔다는 말에 놀랐지만 자신이 해야 하는 일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일단 안전하게 상륙부터 해야 했다. 진규는 조심스럽게 중국의 서북 연안에 접근했다. 중국 내부의 상황 때문인지 어려움 없이 해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상륙한 다음 군선은 소수의 인원만 남겨 중국 연안에서 떨어지도록 만들었다. 진규는 호레친의 기병 2만과 정예보병 5만 그리고 보병으로 변한 해군 3만을 포함해 모두 10만의 군대를 이끌고 해안선을 끼고 아래로 내려왔다. 중간에 걸리는 곳은 모두 초토화를 시켰다. 진규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진군했다. 적이 제대로 방비하기 전에 서부를 장악해야 했다. “뭐? 서북쪽 해안을 타고 그리스 군대가 내려오고 있다고?” 전영노는 지금 반란 문제만도 골치 아픈데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그리스 군대가 오고 있다는 보고를 듣자 미칠 것 같았다. 게다가 10만이라니. 제대로 방비를 했다면 어느 정도 상대할 여력이 있겠지만 지금은 반란으로 인해 통제력을 대부분 잃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10만이라니 전영노는 절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중국을 대표하는 게이머로서 순간 판단력은 늦지 않았다. 이곳, 서부는 이미 힘들었다. 전영노는 통제 가능한 병력만이라도 빼내어 북부로 이동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화서진, 전영노다. 서북쪽에서 그리스 군대 10만이 지금 내려오고 있다.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이런 혼란을 틈탄 것 같다. 현재 내가 판단하기로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가능한 병력을 모아서 북부로 이동하겠다.” “전영노, 화서진이다. 그렇게 어렵냐? 좋다. 빨리 와라.” 전영노는 서부를 버릴 생각으로 빠르게 컨트롤하기 시작했다. 이미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전영노의 컨트롤은 거칠 것이 없었다. 또한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물자 보급이 쉽지 않도록 가지고 갈 수 없는 것은 태워버렸다. 전영노 자신도 서부 전개를 소개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는 그나마 최선을 다했다. 무주공산이었다. 진규는 거침없이 내려왔다. 어느 정도 저항이 있으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게이머가 떠나버린 서부에 진규의 그리스 군대에 저항할 세력은 없었다. 특히 그리스 군대에 약탈을 금지했기 때문에 마찰을 빚을 일이 없었다. 앞으로 충분히 보급이 떨어지기 전에 남부의 1차 원정군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에 진규는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그리 오래지 않아 남부의 1차 원정군과 합류했다. 거의 손실이 없는 1차 원정군 7만과 2차 원정군 10만을 합해 모두 17만의 대군이었다. 한석은 모든 지휘권을 진규에게 맡기고 그리스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마지막으로 등려와의 동맹을 더욱 더 공고히 했다. 그 때였다. “디플, 센터. 공격받고 있다. 마탈란의 경보병들이 국경의 산악지대를 넘어 침공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등려를 이용한 것과 같다. 다른 점은 우리는 우리 군대를 이용했다면 상대는 마탈란의 경보병을 용병으로 산 것 같다. 회군해야 할 것 같다.” “센터, 디플. 알겠다. 내가 7만의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겠다.” “디플, 센터. 그리스로 돌아오지 말고 바로 마탈란으로 상륙해라. 그게 더 효과가 있을 것 같다.” “센터, 디플. OK! 조금만 기다려라.” 그리스에는 3만도 채 되지 않는 기본적인 방어병력만 있었다. 게다가 모여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석과 진규, 현준이 등려를 이용한 계획에 신경을 쓸 때, 상대 게이머는 마탈란을 이용한 계획을 세운 모양이었다. 한석은 그 게이머가 바로 북부를 컨트롤하는 게이머가 아닐까 생각했고, 또한 확신했다. 한석은 진규에게 10만을 남겨 두고 7만의 병력을 수송선에 태우고 마탈란을 향해 출발했다. 진규는 10만의 병력을 가졌고 보급도 등려의 도움과 남부 현지 조달로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북부의 방어선은 견고했다. 진규가 서부를 통해 남부로 내려올 때 이미 중국 북부는 완전 방어 체제로 바뀐 듯했다. 게다가 컨트롤하는 게이머의 실력이 상당한지 쉽게 뚫리지 않았다. 병력을 나눌 생각도 했지만 이런 원정에서 쉽게 병력을 나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진규는 이럴 때에 진성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스스로 생각하면서 해결 방법을 모색했지만 쉽지 않았다. 현준은 아찔한 순간을 경험했다. 그리스 전역이 마탈란의 경보병 수중에 넘어가고 아테네와 코린트 두 도시만 남아 있었다. 중국보다 더한 상황이었다. 마탈란의 경보병은 마치 기병과 같은 기동성을 발휘했다. 산악지대를 무대로 하던 경보병이 평지로 내려오자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처럼 위력을 발휘했다. 현준은 마탈란을 제대로 챙기지 않은 자신의 실수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일단 막아야 했다. 현준은 1만도 채 되지 않는 군대로 5만이 넘는 마탈란 경보병을 아테네에서 막고 있었다. 현준이 뚫린다면 먼저 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중국의 특성상 삼분의 일이라고 해도 상당히 넓은 영토기 때문에 자립이 가능하게 된다. 현준은 절대 뚫리면 안 된다고 다짐했다. 위태위태한 순간에 한석의 7만 병력이 마탈란에 무사히 상륙했다. 마탈란 역시 대부분의 병력이 그리스 국경과 그리스 영토 내로 이동한 상태여서 해안의 경계가 허술할 수밖에 없었다. 한석은 7만의 병력을 지휘해서 그나마 산악지형이 없는 마탈란의 동부를 통해서 마탈란의 수도를 향해 진격했다. 한석의 7만 병력은 줄어든 현준의 7천 병력이 무너지기 전에 겨우 마탈란의 수도를 공략했고 마탈란 왕을 잡을 수 있었다. 마탈란 왕을 잡자 전세는 완전히 바뀌었다. 한석은 자신의 역할인 외교 전문가답게 마탈란 왕을 이용해 전투를 멈추게 했고 형세를 완전히 역전시켰다. 그 과정에 바다를 통해서 10만의 병력이 그리스로 오고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킴으로써 한석 자신의 원하는 바를 달성시켰다. “디플, 센터. 정확한 타이밍이다. 휴우.... 살았다.” “센터, 디플. 다행이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겠지? 안 그래?” “디플, 센터. 당연하지. 완전히 끝장을 내버려야지.” 현준은 아찔한 순간을 경험한 뒤에 상대 게이머가 보통이 아님을 확인했다. 그렇지만 그런 상대에 대한 감탄이 아찔한 순간을 잊게 해 주지는 않았다. 현준은 완벽하고,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기 위해 머리를 회전시켰다. “배틀, 센터. 조금 있으면 내가 4만의 군대와 40여대의 군선을 이끌고 거기로 갈 예정이다. 공격하지 말고 등려와 가까운 해안에서 진을 치고 기다려라. 적의 도발에 넘어가지 마라. 알겠지?” “센터, 배틀. 정말입니까?” “배틀, 센터. 이제부터 체제를 바꾼다. 한석이 센터. 디플은 없고 진규가 배틀1, 내가 배틀2다. 혼동하지 마라. 연습 때 해 본 거니까 알겠지?” “배틀2, 배틀1. 알겠습니다.” 현준은 완성된 40여대의 5단 갤리선과 수송선에 태운 3만의 병력을 이끌고 우회해서 등려로 출발했다. 한석에게는 마지막 상대의 목줄을 끊을 결정타를 준비하라고 말한 뒤에 출항했다. “휴우.... 아쉽군. 이렇게 되면 휴우.. 진짜 질 수밖에 없네.” 화서진의 탄식에 옆에 있던 전영노가 물었다. “마탈란... 실패한 모양이지?” “거의 성공할 뻔했는데, 저쪽의 대응이 빨랐던 모양이야. 중국이 영토가 넓어서 단점도 되지만 장점도 되니까. 휴우.... 아쉽다. 조금만 더 빨랐다면.” “그래도 이 정도의 영토는 있으니까 병력을 충원하고 화서진 너와 내가 있다면 충분히 해 볼만 하지 않을까?” “휴우... 한숨만 나온다. 마탈란의 병력은 어떻게 움직였는데? 다 재정으로 한 거잖아. 이제 내가 컨트롤하는 지역의 재정은 여력이 없다고. 이런 상황에서 전영노 너처럼 짜냈다가는 바로 쿠데타가 일어날 지도 몰라. 휴우.. 어떻게 하지? 이제 저쪽의 공세가 만만치 않을 텐데?” “...... 음.. 일단 막을 때까지는 해 봐야지. 그런데 서류는 왜 연락이 안 되지?” “무슨 일이 있는 건가? 그렇다면 게임이 중지되었을 텐데.. 설마 상대에게 잡힌 것은 아니겠지?” “잡힐 수도 있나? 그럼 로그아웃 된 것과 같은 건가?” “언뜻 그럴 수도 있다는 걸 들었는데.... 아무튼... 전혀 연락이 되지 않으니. 일단 우리 둘이 어떻게 해 봐야지.” 화서진은 동맹국인 남소와 마여진에게서 최대한 군대를 빌렸다. 나중에 막대한 재정이 들어가겠지만 그것은 나중 일이었다. 지금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남소의 막강한 궁기병과 마여진의 정예보병은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특히 궁기병은 그 쓰임새가 많았다. 적을 혼란에 빠뜨릴 수도 있고 치고 빠지는 전략이 가능했다. 하지만 화서진이 궁기병과 보병을 이용해서 상대의 병력을 줄여보려는데 적의 군대가 갑자기 물러나더니 거의 남부 해안선까지 물러났다. 화서진은 그런 이상함에 섣불리 공격할 수 없었다. 특히 공격할 방향이 줄어들자 궁기병의 효과도 줄어들었다. “잘 기다렸다. 하하하.. 이제 복수해야지. 아까는 정말 아찔했다.” “저는 얘기만 들었는데도 심장이 막 뛰는데요.” “이제 돌려줘야 할 때니까. 하하하.” 현준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바탕으로 생각했던 전략을 진규에게 설명했다. “지금 상대는 상당히 재정적으로 문제가 있는 상태다. 마탈란의 경보병을 용병으로 샀다는 얘기는 상당한 재정이 소진됐다는 말과 같으니까. 게다가 궁기병까지 나왔다며?” “네, 궁기병 때문에 한동안 고생 좀 했으니까요.” “궁기병은 중국 북부와 인접한 남소에서 데려온 원군이겠지. 분명 전후에 막대한 금액을 보장하고 데려왔겠지. 하하하. 일단 이 사실을 이용해서 남소와 마여진의 국경에 중국 북부의 재정 상태가 바닥이라는 소문을 내라. 그것도 아주 근거 있게 네가 알아서 그 구체적인 얘기까지 지어서 퍼트려라. 그러면 남소와 마여진이 동요하겠지?” “네, 그렇지요. 그래서요?” “뭐가 그래서야? 그러면 이제까지처럼 소규모 전투나 방어전을 할 수가 없겠지. 가만히 있으면 남소와 마여진이 병력을 달라고 하거나 그 용병에 대한 대가를 원할 테니 조만간 건곤일척의 전투를 벌이기 위해 북부에서 대군을 이끌고 나올 거야.” 현준의 설명에 진규는 탄성을 터트렸다. “아....” “이게 바로 조호이산지계(調虎離山之計)야. 호랑이가 산을 떠나면... 하하하.. 어떤 꼴이 되는지 보여주지.” “아.. 그 때 전투를 벌여서 싸워 이기는 건가요?” “그리 쉽게 이기면 안 되지. 게다가 그렇게 하면 우리 병력도 많이 소진되고 잘못하면 장기전의 빌미를 줄 수도 있지. 험험.. 지금도 장기전이기는 하지만.” “그러면?” “당연히.. 우리는 전투를 안 한다. 등려로 숨어들어가 지켜만 보는 거지. 상대가 힘이 빠질 때까지. 아, 물론 남부 해안에서 모든 선박은 다 불태워버릴 거다. 절대로 등려로 병력을 이끌고 오지 못하도록.” “예? 그게.. 무슨..” “혼수모어(混水摸魚)의 계책! 중국 북부 뿐 아니라 남소와 마여진까지 포함해서 서로 간에 갈등을 일으킨다. 그 갈등의 정점에 또 한 번, 금선탈각(金蟬脫殼)의 묘를 이용해서 남아 있는 중국 북부의 세력을 싹쓸이 해버리는 거지. 하하하. 어떠냐?” “아.......!!!” 진규는 현준의 말에 감탄했다. 듣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이런 상황에서, 특히 아테네가 함락될 뻔한 아찔하면서도 흥분할 수 있는 상황을 겪은 사람이 이렇게 빈틈없으면서도 대담한 전략을 생각하고 있었다니. 진규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이... 이...” 화서진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상대 게이머는 절대 서두르지 않았다. 화서진 자신이라도 그런 상황이고 제대로 상황파악을 했다면 상대와 비슷하게 행동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당하니 기분이 상했다. 국경 부근에서 자신의 재정 상태와 관련된 아주 정확하면서도 구체적인 소문이 퍼지고 있음을 감지했지만 대책이 없었다. 곧 남소와 마여진이 알게 되면 공식적으로 확인을 하거나 나중에 줄 액수의 일부를 미리 달라고 할 게 뻔한데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했다. “전영노, 어쩔 수 없다. 지금 병력을 총동원해서 상대를 친다. 일단 상대의 세력을 약화시켜 놓으면 서부와 남부를 회복할 수 있을 테니까. 전체를 두 개의 부대로 나누어 너와 내가 각각 지휘해서 상대를 공격한다.” “같이?” “어차피 이번 전투에서 지면 게임은 지는 거니까. 최대한 크게 타격을 줘야 한다.” “아, 그렇군. 알겠다.” 화서진은 단번의 큰 전투를 생각했고 결심했다. “으.. 으으.... 이... 이럴 수가!” 남부의 해안까지 왔지만 그리스 군대는 전혀 볼 수가 없었다. 정찰을 통해 굉장히 넓은 범위까지 확인했지만 그리스 군대는 그 흔적도 없었다. “...... 등려로 건너간 건가? 하하.. 하하하하하하.” 화서진은 너무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이렇게 당하다니. 이제 남소와 마여진의 불만을 막을 길이 없었다. 화서진은 바다를 건너서라도 등려에 가려고 했지만 배마저도 구할 수가 없었다. 화서진은 어쩔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담판을 내야 했다. 이대로 게임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화서진은 대군을 이용해서 배의 건조에 나섰다. 남부의 백성들을 착취해서라도 일단 건너갈 배가 필요했다. 화서진은 평소의 날카로운 직관력을 잃어갔다. 그와 때를 같이해서 남소와 마여진의 사신이 도착했다. 모두 그 소문에 대한 해명과 더불어 나중에 주기로 한 액수의 일부를 미리 달라는 요청이었다. 화서진은 둘 모두 해결할 수 없었다. 궁리 끝에 일단 일정 시간의 말미를 얻었다. 화서진은 사신을 돌려보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사신이 돌아오면 그 때는 끝장임을 알았다. 화서진과 전영노는 최대한 빨리 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센터, 배틀2. 준비하던 것... 그냥 두자. 이벤트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까지 하면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다. 내 선에서 해결할게.” “배틀2, 센터. 그럴까? 하긴.. 그리스의 불을 사용하는 것은 좀 그렇지?” 그리스의 불은 그리스 문명의 최종 병기와 비슷했다. 아틀란티스의 포르투가 투척 폭탄이라면 그리스의 불은 폭발은 하지 않지만 잘 꺼지지 않는 불이었다. 포르투와 마찬가지로 그리스의 불은 그 상징성이 더욱 컸다. 대량으로 생산한다면 막대한 피해를 입힐 수도 있었지만 재정적인 부담은 무시할 수 없었다. “센터, 베틀2. 그냥 내 선에서 해결한다. 알겠지? 편히 쉬어라.” “배틀2. 센터. 알겠다. 빨리 끝내라.” 현준은 원래의 계획을 변경했다. 상대를 비참하게 하려다가 같은 프로 게이머라는 생각에 빨리 게임을 끝내기로 했다. 원래는 등려에 있던 그리스 병력의 대부분을 수송선을 통해 밖으로 몰래 뺀 다음 상륙시켜 중국 북부를 초토화시킬 생각이었다. 그 과정에서 그리스의 불을 이용해 상대 게이머의 기세를 완전히 꺾을 계획이었다. 계획을 바꾸기로 한 현준은 가져온 40여척의 5단 갤리선을 등려 뒤쪽에 숨겼다. 그리고 등려의 정보력을 이용해 상대의 동향을 파악했다. 예상대로 상대는 배를 만들고 있었다. 현준은 그 북부의 게이머가 아주 날카롭지만 나머지 두 사람의 게이머로 인해 게임을 잃게 된 사정을 알고 있었다. 현준의 예상대로 넘어오기는 했지만 지금 그 게이머가 받고 있을 스트레스를 생각하니 조금은 미안했다. 하지만 게임은 게임이었다. 게임 내에서 상대의 사정을 봐줄 만한 여유를 부릴 수는 없었다. “... 이제 간다! 실패하던 성공하던 어쩔 수 없다!” 화서진과 전영노는 배수의 진을 쳤다. 이기기 힘들다는 것도 알았지만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내심 군선의 호위가 없이 수송선만으로 바다를 건넌다는 사실이 불안했지만 거리가 그리 길지 않았고 내륙인 중국 북부는 군선을 만드는데 익숙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었다. 남부와 서부가 상대에게 유린당해 통제력을 잃은 이상 군선이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오로지 상대의 군선이 없기만을 바랬다. “아!...... 휴우.. ” “어? .. 이.. 이런......” 최악의 경우였다. 화서진이 예상한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적의 군선은 수송선이 바다 한 가운데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모습을 나타내었다. 화서진은 상대 게이머들에게 감탄했다. 자신들의 실수도 있었지만 그 동안 보이지 않았던 실수를 비집고 들어와 이렇게까지 몰리게 만들다니. 대단했다. 한편으로는 감사했다. 이런 상태로 가을 리그를 준비한다면 나중에 이런 꼴을 당할지도 몰랐는데 이렇게 먼저 당하니 좀 더 열심히 잘, 준비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화서진과 전영노는 깨끗하게 단념하고는 게임 오버를 선언했다. “와... 와... 굿! 이런 게임이라니.....” “우와.. 이야......” “휴우... 내 심장이 다 뛰네.. 휴우.... 대단하다!” 멀티플레이를 처음 본 관중들의 반응은 대단했다. 1시간이 넘은 게임 시간에도 불구하고 다들 손에 땀을 쥐며 경기를 지켜봤다. 특히 중국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아테네까지 함락당할 뻔 했을 때, 마지막 중국의 수송선이 바다를 건너다 그리스의 군선과 조우할 때 관중들의 심장도 같이 뛰었다. 팀플레이는 개인전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그 매력은 충분하고도 넘치게 관중들을 매료시켰다. 라스베가스의 문명 온라인 특별 이벤트는 한국, 자소 소프트의 완승으로 끝이 났다. 개인전 뿐 아니라 단체전에서도 한국은 승리를 해 문명 온라인의 종주국다움을 확인했다. 하지만 일본이 더 강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중국이 2위를 차지했고 일본이 3위를 차지했다. 특별 이벤트로 인해 단체전, 팀플레이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되었다. 팀플레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게이머들 간의 호흡임을 실감하게 해 준 이벤트였다. 특히 일본이 팀플레이에서 약한 면을 보여 주었다. 거의 틈이 없어 보이는 한국의 자소 소프트의 팀플레이에 휘말리긴 했지만 중국의 팀플레이 역시 그 기세를 타면 엄청난 위력이 생겼다. 게다가 한국과의 게임으로 인해 더 그 조직력이 단단해졌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 개인전에서는 상당히 좋은 성적을 거뒀지만 팀플레이에서는 중국에 오래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는 이변을 연출하고 말았다. 전문가들은 팀플레이에서는 게이머들 간의 절묘한 호흡으로 인한 적절한 타이밍과 서로 간의 정보 교환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아닐까 전망했다. 10월에 열릴 프로 리그가 한 달 남짓 남은 상황에서 각 나라의 프로팀들은 서로 간에 팀플레이 친선 경기를 통해 자신들의 실력을 키워 나갔다. 특히 생각지도 않게 어이없이 패한 일본팀은 그 마음이 더 강했다. 자소 소프트의 프로 선수들은 이벤트와 관련된 모든 일정을 마친 상태였다. 모두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지만 팀장이며 매니저인 서재필이 전격적으로 이틀간의 미국 체류를 결정함으로 이틀간 자유시간과 더불어 맘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이렇게 쉴 시간도 없는데다가 서재필 개인적으로 프로팀이 커지면서 제대로 된 MT도 가지 못한 것을 고려했다. 그리고 지난번에 서재필이 언성을 높인 일을 포함해 좋지 못한 것들을 다 털어버리기 위한 시간이었다. 전날, 카지노에서 늦게까지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잠자리에도 늦게 들었다. 처음으로 해 본 블랙잭과 슬롯머신 등에 현준 뿐 아니라 진성까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큰돈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돈을 걸고 게임을 한다는 것과 굉장한 시설, 화려한 조명등이 어우러져 사람을 굉장히 흥분시켰다. 가지고 간 돈이 적었기에 그리 많이 잃지도 않았다. 매니저 서재필은 그냥 즐기기만 하라고 말하고는 돈도 적당하게 주었기에 금방 끝나고 숙소로 들어올 줄 알았는데 현준과 진성이 블랙잭에서 거의 7천 달러 이상을 벌었다. 그리고 그 돈을 다른 게이머들에게 나눠주면서 꽤 오랫동안 도박을 하면서 놀았다. 범현이 제일 눈에 불을 키면서 절대 돈을 잃지 않으려고 했지만 도박이란 게 하면 할수록 돈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수천 달러까지 가지고 있었던 진성은 그저 게임으로 생각했다. 자정이 되자 서재필은 걱정이 되어 카지노로 게이머들과 이준, 현숙, 소희를 찾으러 왔고 아직 한참인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한 사람당 두, 세 번 정도 배팅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돈을 주었기에 어떻게 이렇게 오랫동안 게임을 하는지 신기했다. 서재필은 진성이 앉은 자리 앞에 쌓여진 칩들을 보고 놀랐다. 100 달러짜리 칩들이 수십 개였다. “진성아... 이 칩들은 다 뭐냐?” “아, 재필이 형. 하다 보니까 이렇게 모이네요.” 서재필은 놀랐다. 블랙잭을 이렇게 테이블로 처음 해 보는 진성이었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뭐? 이야.. 너... 전문 도박사해도 되겠다.” “하하. 그럴까요? 하지만 곧 없어질 거예요. 다 게임이니까요.” 진성의 말대로 밤 1시가 넘어가자 진성의 앞에 있던 칩들은 빠르게 사라졌다. 하지만 여전히 진성의 앞에는 돈이 많이 쌓여 있었다. 진성의 옆에는 이미 돈이 다 떨어져 도박을 할 수 없었던 다른 사람들이 다 모였다. 진성은 시계를 보더니 시간이 늦었기에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한꺼번에 걸 생각을 했다. 딜러는 카드를 섞은 후 진성에게 두 장, 자신이 두 장을 가졌다. 진성의 카드는 클로버 에이스와 다이아몬드 5였다. 딜러의 카드 두 장 중 한 장은 다이아몬드 10이었다. 블랙잭은 자신이 가진 카드의 합이 21에 가깝고 절대 21을 넘어서는 안 되는 게임이다. 모자라는 것은 괜찮지만 넘긴다면 바로 지는 것이다. 에이스는 1 또는 11로 계산할 수 있고 그림이 그려진 카드는 10으로 계산이 되어 진성의 카드는 6 또는 16, 딜러의 카드는 10과 숨겨진 한 장의 카드로 결정될 것이다. 진성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베팅.” 진성은 자신 앞에 있던 모든 칩을 다 걸었다. 딜러는 그 모습에 진성을 쳐다보았고 진성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준과 게이머들 그리고 서재필까지 모두 진성의 결정을 기대했다. "Hit or stay?" Hit 는 딜러로부터 카드를 한 장 더 받겠다는 뜻이고 stay 는 현재 가진 카드로 끝내겠다는 뜻이었다. "Hit" 진성은 여전히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딜러가 카드를 한 장 더 뽑았다. 하트 4였다. 다 합치면 20이었다. 확실히 진성이 유리했다. 딜러가 이기려면 뒤집지 않은 한 장의 카드가 에이스여야 했다. "Hit or stay?" "Stay." 딜러의 물음에 당연히 진성은 카드 받기를 멈췄다. 진성은 마지막으로 게임을 끝내려고 했지만 20이라면 쉽게 지지 않는 카드였다. 딜러가 숨겨진 카드를 뒤집었는데 스페이드 9였다. 진성의 승리였다. 그리 긴장감 있는 게임은 아니었지만 워낙 플레이어인 진성이 담담했기에 다른 사람들이 더 긴장했던 것이다. “와.....” 진성은 의외로 집착을 끊고 게임을 끝내려고 했을 때 이렇게 쉽게 이기다니 조금은 놀랐다. 아직 칩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테이블을 옮겨서 게임을 할까 생각하다가 옆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들어왔다. 진성은 피식 웃고는 칩을 현준을 비롯한 게이머들과 서재필 그리고 이준과 두 코디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조금 더 즐기세요. 저는 먼저 올라갑니다.” “어.. 어... 그.. 그래.” “아, 고맙다. 진성아, 너 밖에 없다.” “고마워요. 진성 오빠.” 서재필 역시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데리러 왔다는 사실도 잊은 채 다른 게임을 찾으러 다녔다. 진성은 돌아보지도 않고 손만 들어 흔들고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호텔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오래지 않아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 새벽 일찍 잠에서 깬 진성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 수련을 하기에는 다른 사람들의 눈이 있었다. 운동하는 곳으로 가려다가 그 곳도 그리 좋지는 않아 진성은 결국 객실 안에서 가볍게 수련을 할 생각이었다. 팔극진결로 몸을 가볍게 푼 진성은 이제 어느 정도 감이 잡혀 수련에 진척을 보이는 무명비검을 펼쳤다. 처음에는 가볍게만 휘돌던 목검이 진성의 표정이 진지해지자 아주 가끔 목검의 검신이 살짝 사라졌다. 사라졌다가 순간 다시 나타나곤 했다. 진성은 아직까지 원하는 만큼, 원하는 정확한 타이밍에 맞도록 목검을 제어하기는 힘들었다. 정해진 투로를 따라 수련은 할 수 있었지만 대련이나 실전에 사용한다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다른 사람들을 상처 입힐 수도 있어서 사용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진성은 그리 급한 마음은 없었다. 하루하루의 수련에 집중할 뿐이었다. 검 수련을 마친 후, 진성은 축지법 수련을 했는데 그 일체감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후 진성은 축지법의 일체감을 완전히 유지시키면서 팔극진결을 수련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몸의 힘을 극대화한 상태에서 계속 유지하면서 팔극진결의 동작을 제대로 펼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굉장히 천천히 움직이기 때문에 엄청나게 힘이 들어 진성의 몸은 순식간에 땀으로 범벅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진성은 멈추지 않았고 조금씩이지만 성장도 느껴졌다. 진성은 대충 수련을 끝냈다. 예전과는 달리 마지막 수련이 가장 힘들었다. 수련이 끝나면 땀으로 목욕을 한 듯해 샤워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진성은 시원하게 샤워를 한 후에 침대에 앉았다. 냉장고에서 콜라를 꺼내 마셨다. 아주 시원하게 목을 넘어가는 느낌이 끝내줬다. “휴우... 수련하고 이렇게 마시니 정말 시원하네. 휴우....” 진성은 이제야 미국에 온 이유인 그 특별 이벤트 행사가 끝났음을 실감했다. 어제 끝났지만 그리 마음에 와 닿지 않던 것이 이제야 마음이 편해졌다. 진성은 아침의 수련으로 인해 마음이 풀린 것으로 생각했다. 땀을 많이 흘려 진성은 배가 고팠다. 현준과 나머지 사람들을 깨우려다가 분명 자신보다 늦게 잤을 게 뻔했기에 깨우지 않고 진성 혼자서 식당으로 향했다. 진성은 몇 번 외국의 호텔에서 묵었던 경험으로 아침에는 빵을 먹는 것이 가장 무난함을 알고 있었다. 진성은 갓 만든 듯, 따끈한 빵과 쨈, 신선한 우유 그리고 샐러드를 가득 담아왔다. 혼자였지만 그래도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은 진성을 기쁘게 하기에 충분했다. “어..?” 갑자기 이상하면서도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이전에 이런 기분을 느껴봤는지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로 생소했다. 역겨웠다. 하지만 무슨 역한 냄새나 이상한 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진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식당에서 빵들이 뷔페식으로 놓여 있는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식사를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창을 통해서 아침 햇살 치고는 조금 강한 햇빛이 들어올 뿐이었다. 잠깐 둘러보자 그런 느낌은 사라졌다. “도대체 뭐지? 너무 수련을 열심히 해서 그런가?” 진성은 그리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진성은 그리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편이었다. 진성은 곧 그 일을 잊고는 앞에 놓인 먹음직한 빵과 야채들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이런 일에는 전략이 필요 없었다. 오로지 돌진만 있을 뿐. 자소 소프트의 프로팀 팀원들은 모두 그랜드 캐년 관광을 즐기기로 했다. 언제 다시 이곳으로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꼭 한 번쯤은 가 볼만한 그랜드 캐년을 비행기에서나마 보기를 원했다. 그랜드 캐년은 라스베가스 공항에서 출발했는데 헬기로 가는 데만 1시간가량 걸리는 코스였다. 그래서 모두 4시간 정도가 걸리는 관광 코스였다. 현준을 비롯한 게이머들 모두와 서재필, 이준, 최현숙, 한소희를 모두 포함해서 다 같이 호텔을 나섰다. 모두 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그랜드 캐년을 본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떠 있었다. 특히 현준과 범현은 너스레를 떨며 모두의 기분을 고조시켰다. “어..?” 진성은 다시 한 번 아침의 그 기분을 느꼈다. 이번에는 더 심했다. 게다가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진성은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자신의 시야에 특별히 이상한 사람은 들어오지 않았다. 신경과민이 아닐까 여기기도 했지만 그 느낌이 너무 강렬했다. 게다가 너무 역했다. 진성은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고는 앞서 가는 일행을 쫓아 뛰어갔다. 그랜드 캐년은 정말 대단했다. 광활한 대지에 그런 틈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경이였다. 황무지에 핀 바위로 된 꽃과 같았다. 너무나 넓은 곳에 도저히 강에 의해 깎였다는 설명이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의 장엄함이었다. 헬기로 한참을 봤지만 도저히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우와..... 너무... 끝내줘요!” 이미 와 본 적이 있던 서재필도 다시금 감동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감동의 도가니 속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모두다 압도적인 자연 앞에서 섰다는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한국과는 스케일 자체가 달랐다. 정말 대단했다. “뭐? 그 녀석이 미국으로 갔다고?” “네, 그렇습니다. 미국에서의 행적은 끊겼지만 확실히 미국으로 간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홍콩의 마피아와 손을 잡았는데 다른 여러 곳에서 압력이 들어오니까 미국으로 도망간 모양입니다.” “그래? 음.. 그렇다면야 다행이지만. 미국이라.. 조금 힘들겠지만 자네가 좀 수고 좀 해 주게. 그 녀석은 어디로 튈지 몰라. 잘 좀 지켜보게나.” “네, 알겠습니다. 사부님.” 왕현추는 자신의 제자 중 한 사람으로부터 그 놈, 이주방이 미국으로 간 것을 들었다. 그 제자 역시 조직에 속해 있어서 그런 조직끼리의 일에 밝았다. 왕현추는 일단 이주방이 미국으로 도망갔다는 말에 마음이 놓였다. 마피아와 손을 잡았다는 말에 걱정해 유맹의 멤버들에게 사실을 알려 여러 방법으로 압력을 가했는데 그게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왕현추는 기쁜 나머지 진성에게 전화를 했다. 진성의 핸드폰은 응답이 없었다. “........ 어, 전화를 받지 않는군. 뭐, 바쁜 일이 있나?” 왕현추는 진성이 알지 못한다고 해도 별 상관은 없기에 그냥 넘겼다. 진성과 일행은 오랜 헬기를 이용한 관광에 흥분했지만 그만큼 피곤했다. 시끄러운 소리와 그다지 편하지 못한 곳에서 4시간 가까이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모두들 녹초가 되었다. 특히 게이머들은 이벤트 때문에 긴장했던 것과 전날 카지노에 집중하느라 신경을 많이 썼기에 더 피곤했다. 진성을 제외한 게이머들 모두 숙소로 들어가 뻗고 말았다. 서재필은 혼자 가기 심심하다며 한소회와 최현숙을 데리고 귀국하기 전에 사람들에게 줄 간단한 선물을 사기 위해 호텔을 빠져나갔다. 로비에는 이준과 진성만 남아 있었다. 이준은 별로 피곤하지 않았기에 숙소에 들어가는 것도 그렇고 해서 진성에게 제안했다. “진성아, 오랜만에 체육관에 가서.... 대련 한 번 할까? 물론 네가 봐주는 걸로. 어때?” “음... 그럴까요?” 이준은 진성에게 제대로 상대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자신 역시 무술을 하는 사람이었기에 정통의 무술을 부딪쳐 보고 싶었다. 게다가 팔극신권이라는 대단한 권법의 정식 계승자인 진성이었기에 지더라도 뭔가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 이준을 마음을 알았던 진성 역시 조금은 심심했기에 잠깐의 대련도 재미있으리라 생각했다. 이준과 진성은 곧바로 체육관으로 갔다. 모든 운동을 위한 옷들은 다 비치되어 있었기에 이준과 진성은 몸만 가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가벼운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두 사람은 체육관의 한쪽 커다란 방에 설치된 그리 크지 않은 공간의 가운데 마주 보고 섰다. 문을 닫으니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할 필요도 없었다. “진성아, 너무 많이는 봐 주지 않아도 된다. 걸어 다닐 수 있게만 하면 되니까. 알겠지?” “하하하하. 그거 힘들 것 같은데요.” 진성의 농담에 이준 역시 웃으며 대답했다. “뭐? 하하하. 좋다. 너도 조심해라.” 진성은 평소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준이 굉장히 고마웠다. 물론 돈을 받고 하는 일이지만 보디가드로서 잘 보이지 않는 궂은일도 스스로 도맡아 할 정도로 이준은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했다. 게다가 게임 외적인 부분에 신경 쓰지 않도록 작은 곳까지 배려하고 있었다. 그런 중에도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전혀 티내지 않고 묵묵히 일하는 이준의 모습에 진성은 고마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진성은 이준에게 뭔가 도움이 되는 것을 주고 싶었다. “자, 갑니다.” 진성은 가볍게 외치고는 빠르게 이준을 향했다. 진성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쾌속무비, 그 자체였다. 순식간에 이준과의 거리를 반으로 줄인 진성은 크게 외쳤다. “왼쪽 허리 위!” 진성은 앞으로 점프하면서 순식간에 몸을 돌리며 돌려차기를 시도했다. 진성은 팔극권이나 팔극신권의 기술을 펼칠 생각이 없었다. 이준의 스타일이 합기도와 태권도와 비슷했기 때문에 그와 비슷하게 나갈 생각이었다. “텅! 어엇?” 이준은 제대로 가드를 해서 막았지만 진성의 돌려차기는 단순한 차기가 아니었다. 돌려 차는 마지막 순간 엄청난 타격력이 느껴졌다. 이준은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더 빠른 진성의 차기에 놀랐다. 게다가 맞는 순간 마치 빈 통을 찬 듯한 소리와 함께 이준은 오른쪽으로 몸이 떠버렸다. 순식간에 2미터 가량 떠버렸다. 어떻게 왼쪽으로 직격했는데 그리 아픔도 없이 몸이 오른쪽 위로 뜨는지 이준은 알 수 없었다. “아니... 진성아, 이게 무슨..... 어떻게 이럴 수 있냐?” “타격 순간의 느낌을 잘 생각해 보세요. 자, 다시 갑니다.” 이준은 고민할 겨를도 없었다. 진성이 돌진했기 때문이었다. 이준은 급히 뒤로 물러났지만 진성의 몸이 훨씬 빨랐다. 진성은 순식간에 다가와 자세를 잡고는 정권으로 찔렀다. 이준은 단순한 진성의 동작이었지만 찌르는 타이밍이 절묘해 어떻게 피할지 몰랐다. 스피드만으로는 절대 이렇게까지 피하기 힘든 동작은 힘들었다. 이준은 도저히 진성의 공격 타이밍을 맞출 수가 없었다. 진성의 정권에 왼쪽 어깨를 맞은 이준은 맞는 순간 뭔가 회전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준은 또 다시 뒤로 크게 물러났다. 이번에는 공중으로 몸이 뜨지는 않았다. 이준은 확실히 타격 순간의 세차게 회전하는 뭔가를 느꼈다. 이준이 진성의 얼굴을 보는 순간 진성의 고개가 위아래로 끄덕였다. 이준은 진성이 자신에게 뭔가를 가르쳐 주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 진성아, 다시 한 번 더!” “네, 갑니다.” 진성은 이준에게 처음으로 팔극신권의 보법 중 하나인 천쾌보를 써서 이제까지와는 다른 속도를 보였다. 예전에 진성이 천쾌보를 썼던 것과는 달랐다. 진성은 자신도 모르게 완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일체감의 묘리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준은 제대로 알기도 전에 자신 앞에서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 진성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 어..” 진성은 가볍게 진각을 하면서 팔을 통해 전해진 경력을 이용해 그대로 이준을 밀어버렸다. 경을 압축해서 점으로 타격한 것이 아니라 부드러운 경을 사용해 그대로 이준을 밀어버렸다. “처어엉! 퍽!” 이준의 몸이 거의 3미터 이상 공중에 떠버렸다가 뒤로 멀리 밀려났다. 이준은 몸 자체는 전혀 이상이 없지만 이렇게나 높고 멀리 나가떨어질 줄은 몰랐다. 하지만 확실히 진성의 손바닥이 자신의 명치 아래에 닿을 때의 느낌은 기억할 수 있었다. 손바닥이 닿자 뭔가 회전하는 거대한 힘이 자신을 밀어버림을 알 수 있었다. “휴우... 진성아, 도대체 그게 무엇이냐? 그게... 기(氣)라는 것이냐? 그리고 회전하더구나?” “기라.. 음.. 비슷하지만 제가 기를 잘 모르니. 저는 경(勁)이라고 부르지요. 회전하는 것을 느끼셨으니 준이형이 가진 기술에 기와 회전을 제대로 사용하시면 최소한 두 배의 위력은 더 생길 겁니다.” “기? 기라.... 음...” “아마 배운 것 중에 기를 모으는 법이 있을 겁니다. 그것을 하루도 빠짐없이 수련하시면 아주 느리지만 기를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기는 잘 모르겠지만 경은 수련의 힘이라고도 하거든요. 한 마디로 수련을 많이 한 사람이 더 강한 힘이죠.” “아.. 그렇군. 아.....” 이준은 몸을 물리적으로 단련해서 만들 수 있는 힘에는 한계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준 자신이 그 한계점에 도달한 것도 아니었고 그 한계를 쉽게 뛰어넘을 수도 없었다. 이준은 내심 자신에게도 어떤 계기를 통해 그런 한계를 돌파했으면 하는 소원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틀렸음을 이제야 알았다. 수련, 연습만이 그런 한계를 돌파할 유일한 방법이었다. 한동안 조금은 소홀히 했던 연습을 생각했다. 게다가 확실히 기에 대한 투로가 있지만 1년을 연습해도 자신이 원하던 수준에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여서 포기하고 말았다. 이준은 다시 한 번 자신이 멈췄던 무술을 제대로 해 보리라 결심했다. “진성아, 고맙다.” “하하하.. 뭘요. 자, 마지막으로 제 기술 하나를 보여드릴게요. 아마 나중에 수련을 통해서 어느 정도, 실력이 된다면 이게 무엇인지 아실 수 있을 거예요.” “뭐? 그래?” 진성은 잠깐 떨어진 후에 몸의 일체감을 급격히 끌어올렸다. “자, 다시 갑니다.” 진성은 가볍게 움직였다. 천쾌보와는 달리 몸 자체의 움직임은 마치 걷는 것과 비슷했다. 이준은 진성이 한걸음 걷는 순간 자신의 눈앞에 나타남을 알았다. 너무 놀라 말도 나오지 않았다. 순식간에 진성의 손가락이 이준 자신의 목 앞에 와 있음을 알았다. 조금 전의 그 빠른 움직임과는 완전히 달랐다. 완전히 공간을 넘어 온 듯했다. “어... 어떻게... 어떻게 한 거냐?” “하하하. 준이 형, 숙제예요. 숙제!” 진성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이준을 두고는 옷을 둔 곳으로 걸어갔다. 자소 소프트 프로팀은 곧 공항으로 출발해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 전날 그랜드 캐년에 갔다 와서 숙소에서 쉬고는 밤늦게까지 쇼를 즐기고 라스베가스의 거리를 쏘다녔다. 그래서 또 늦게 잠을 자 늦게 일어나고 말았다. 서재필은 이리 저리 돌아다니며 재촉했다. 이미 비행기 시간은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시간에 맞춰서 가야했다. 하지만 서재필의 마음과 달리 다른 사람들은 피곤한 나머지 굼벵이가 기어가는 것과 비슷했다. “어이, 빨리 준비하자고. 시간 맞춰 안 내려오면 그대로 갈 테니까. 그렇게 알아!” 한참 애쓰던 서재필이 포기했다는 듯 시간 안에 내려오지 않으면 그냥 출발하겠다는 씨도 먹히지 않는 엄포를 놓고는 로비로 내려가 버렸다. 하지만 서재필이 내려가고 나서도 한 시간이 되어서야 모든 팀원들이 로비에 모였다. “진성아, 어디 아파? 오늘 계속 얼굴이 별로 안 좋다. 무슨 일 있냐?” 현준은 아침부터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는 진성을 보며 물었다. 현준의 기억으로 진성이 이런 표정을 계속 했던 적은 거의 없었기에 걱정은 더 컸다. “... 이상하게 어제부터 가끔 기분이 이상하고 속이 메스껍고.. 뭔가 역한 느낌이 들어. 그렇다고 뭘 잘 못 먹은 것도 아닌 것 같고.. 으... 지금은 훨씬 더 심해. 휴우... 왜 이러지? 이런 적 한 번도 없었는데....” “그래? 라스베가스 와서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아, 어쩌면 여기 물이 맞지 않아서일지도 모르겠다. 서울에서 가져온 물이 어제 다 떨어졌잖아.” 자소 소프트 프로팀은 혹시나 물 때문에 문제가 될까봐 라스베가스로 오면서 물까지 같이 공수해왔다. 그런 물이 이벤트 다음날 완전히 바닥이 나 호텔의 물을 마셔야만 했었다. 현준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모르겠다. 으.... 더 심해지는 것 같다. 그래도 걷는 데는 문제가 없으니까.. 다 내려왔지?” “응, 이제 곧 출발하겠지. 조그만 참아라. 곧 좋아지겠지? 약은?” “먹었지. 휴우.. 곧 좋아지겠지.” 진성은 몸 어디가 아픈지 알 수 없었다. 굉장히 거슬렸다. 몸이 아프다기보다는 뭔가 이상했다. 진성은 왜 그런지 알 수가 없었다. 아주 기분이 더러웠다. “자, 이제 출발하자고.” 서재필의 말에 일행은 다 같이 호텔의 로비를 통해 현관을 빠져나왔다. 사막에 걸 맞는 강렬한 햇빛이었다. 분수들이 시원하게 물줄기를 뿜는 정원처럼 꾸민 호텔 앞 광장의 끝부분 도로에 서재필이 미리 대기시켜 놓은 차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진성은 갑자기 그 불쾌함이 엄청나게 커짐을 알았다. 게다가 확실히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진성은 자신이 이제까지 연습과는 달리 자신도 모르게 일체감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고 있음을 알았다. 자신의 옆에서 같이 움직이고 있는 팀원들의 동작하나하나가 마치 보는 것처럼 선명했다. 근처의 분수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도 너무 선명하게 보였다. 진성은 자신의 머리를 찌르는 듯한 강렬한 고통에 고개를 들었다. 왼쪽으로 거의 500미터는 넘게 떨어진 큰 호텔이 눈에 띄었다. 그 순간 그 고통의 원인이 그 곳에 있음을 알았다. 진성인 계속 걸으면서도 그 호텔에 집중했다. 그 때, 진성의 순간적이지만 엄청난 집중은 청경의 단계를 깨뜨렸다. 동심원을 그리며 넓게 퍼지던 청경과는 달리 진성은 자신도 모르게 마치 바늘과 같이 날카로운 감각을 가지게 되었다. 진성은 거리가 멀고 색깔이 잘 구분이 되지 않아 잘 보이지도 않던 그 호텔의 한 부분이 순식간에 확대되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마치 망원경으로 보는 듯했다. 진성은 그 호텔의 한 객실 베란다에서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음을 확신했다. 얼굴은 확실하지 않았지만 진성은 심장이 덜컥 멈추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총이었다. 거치대까지 있는 총이었다. 게다가 권총이 아닌 총신이 긴 소총과 비슷했다. 진성은 순간적으로 깨달았다. 저격용 소총. 진성은 상대도 약간 당황함을 알았다. 상대는 이런 거리에서 정확하게 자신을 보고 있다는 느낌에 놀랐던 것이다. 진성은 그 상대가 방아쇠를 당기려함을 알았다. “모두 엎드려!” 진성은 크게 외쳤다. 자신의 외침에도 주위의 사람들이 제대로 반응할 수 없음을 잘 알았다. 진성은 몸의 경을 순식간에 그 한계까지 끌어올렸다가 한순간에 폭발시키듯 퍼트렸다. 엄청난 돌풍이 일어난 것처럼 거대한 힘이 진성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갔고 그 옆에 있던 사람들은 4미터 이상씩 멀리 날아가 버렸다. 그 힘은 그치지 않고 분수의 물을 반대쪽으로 밀어버릴 정도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리 다치지 않고 땅에 떨어졌다. 진성은 뭔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다. 피하려고 했지만 너무 빨랐다. 진성은 순간 일체감을 그 끝까지 올렸다. 그리고 옆으로 몸을 기울였다. 하지만 총탄이 더 빨랐다. “윽...” 진성은 자신의 왼쪽 가슴에 뭔가 맞았음을 알았다. 피가 튀었다. 진성은 자신이 맞았음을 알았다. 탈진했는지 진성은 하늘과 땅이 바뀜을 볼 수 있었다. 분명 자신이 땅에 쓰러졌는데도 그리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조금씩 하늘과 얼핏 보이는 건물의 색깔이 변하기 시작했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자신을 쳐다보는 현준과 팀원들이 보였지만, 계속 보고 싶었지만, 눈도 감지 않았지만 시야는 점차 어두워졌다. 결국 완전한 어둠이 진성을 점령하고 말았다. 서울 근교에 있던 자소 소프트의 로플 연구소는 저녁 시간이었다. 많은 팀원들이 식사를 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미 퇴근한 상태였고 몇 명의 사람들만 시스템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잘한 테스트들은 끝이 난 상태였고 현재는 그 동안의 테스트 결과를 반영해서 필요한 수정과 다음 테스트를 위한 준비 단계였다. "지이이잉." 조용하던 로플 연구소의 가상현실 메인 시스템이 있는 연구실에서 평소 들을 수 없는 소리가 들렸다. 빠르게 진동하는 듯한 소리였다. "파파팍. 파팍!" 게다가 연구실 전체에 스파크가 순간적으로 튀었다. 잠깐 조용하더니 다시 스파크가 발생했다. 처음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두 번째로 발생한 스파크는 가상현실 메인 시스템이 있는 곳 뿐 아니라 다른 곳으로 퍼져나갔다. "뭐... 뭐?" 처음 이상함을 발견한 연구원은 화재가 생긴 줄 알았다. 하지만 곧 CCTV를 통해 화재가 아님을 알았다. 연구원은 곧바로 다른 곳에서 모니터링하고 있는 연구원들에게 이상한 현상에 대해 알리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하다. Test-3 연구실에서 원인 모를 스파크가 나타났습니다. 아직 시스템에는 문제가 없지만 다들 전력과 기반 시스템에 대해서 체크해 보시기 바랍니다." 연구원은 곧바로 하드웨어 팀장인 곽팀장에게도 연락을 취했다. "뭐?" 설렁탕을 먹고 있던 곽팀장은 연구소에서 시스템의 변화와 다른 이상에 대해 살피고 있던 연구원으로부터 설명하기 힘든 현상에 대해 전화를 받자마자 놀랐다. 예전의 그 사건이 바로 떠올랐다. "곽팀장님, 무슨 일입니까?" 앞에서 마지막 설렁탕 국물을 마신 조팀장은 순간 얼굴색이 바뀌는 곽팀장의 반응에 의아해서 물었다. 웬만한 일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 곽팀장의 얼굴이 변하는 것은 그리 쉽게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곽팀장은 그 사태에 대한 이야기를 다 듣고는 불안해졌다. 설마 아니겠지 했지만 혹시 몰랐다. "조팀장, 예전에 그... 진성이가 인사불성 되었던 그 때, 그 사건 기억나?"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조팀장은 곽팀장의 말에 순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연구소에서 전화가 왔는데 아무래도..... 이상해.. 빨리 가봐야겠어." "네? 갑자기 무슨...... 아, 그 때... 그....?" "빨리 가자고. 계산은 내가 하지." 조팀장은 먼저 나가며 자신이 계산한다는 말에 심각한 상황임을 알았다. 이제껏 곽팀장 자신이 먼저 계산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대부분 조팀장이 가지고 있는 회사 카드를 이용해서 계산했었다. 더구나 곽팀장은 회사 카드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조팀장은 빨리 곽팀장을 따라나섰다. "그래. 전력에는 문제가 없다고? 음.. 그래 다행이군. 그래. 계속 주시해 보고 문제 있으면 바로 연락하도록." 곽팀장은 가는 동안에도 핸드폰을 놓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은 계속되었다. 다행히 그 현상은 사라졌다고 했지만 곽팀장은 자신의 불길한 마음에 급할 수밖에 없었다. 조팀장 역시 운전대를 잡고 있으면서도 소프트웨어 관련 연구원과 연결해 시스템 검사를 지시했다. "휴우... 다행히 별다른 이상은 없는 것 같군. 그래도 가서 확인을 해봐야 할 것 같다." 곽팀장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그 순간이었다. "........ 뭐? 뭐라고? 다시 나타났다고...?" 곽팀장은 그 사고가 떠올랐다. 분명 그 때도 처음에 잠깐 스파크가 생겼다가 두 번째 스파크가 생길 때 그 기억하기 싫은 사고가 일어났었다. 곽팀장은 빠르게 상황에 대해 물었다. 조팀장 역시 뭔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에 전화를 하면서도 차를 빨리 몰았다. 연구소에 도착한 곽팀장과 조팀장은 엘리베이터를 타고는 아래로 내려갔다. 이미 많은 연구원들이 소식을 들은 듯 연구소에 도착해 있었다. 곽팀장은 제어실로 들어가면서 외쳤다. "상황은?" "조금 전에 나타났던 스파크도 별 이상 없이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곽팀장은 두 번째 나타났던 스파크가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은 채 사라졌다는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아직 그 원인을 찾지 못한 단순한 사고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곽팀장은 팀원들을 재촉하면서 처음부터 제대로 원인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절대 원인 없는 결과가 있어서는 안 된다. 곽팀장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이제까지 미루었던 진팀장에게 전화를 걸어 사태에 대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얘기했다. "어... 어... 아! 다시 나타났습니다." 한 연구원의 외침에 하드웨어 제어실에 있던 곽팀장을 비롯해 많은 연구원들이 스파크가 나타난 연구실의 화면에 집중했다. 확실히 아무런 매개체도 없이 공중에 이상 스파크가 나타났다. 무슨 영문인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시스템 체크!" 곽팀장이 외치자 그때까지 멍하게 화면만 보던 팀원들이 흩어지며 각기 자기 자리에 앉아 시스템 체크를 시작했다. "메인 가상현실 시스템, 로플 기본 인터페이스 OK!" "로플, 접속기 관련 전자 테스트 OK!" "로플, 전력 관련 루프 테스트 OK!" "로플, 하드웨어 올-루프 테스트 OK!" 많은 부분들이 지난 후에 곽팀장은 가상현실 시스템 자체는 별 문제가 없음을 알았다. 로플의 시스템은 굉장히 중요했다. 곽팀장 뿐 아니라 로플팀에게 있어 메인 가상현실 시스템, 로플은 그 존재 의미가 달랐다. 단순한 코드의 집합이 아니었다. 이제까지 로플팀에서 출시했던 모든 밀리터리 아트의 싱글 버전 게임은 모두 가상현실 시스템, 로플의 복사 버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프로그램 코드 수준의 복사는 아니었다. 마치 원시 생물이 분화되듯 가상현실 시스템의 분화를 통해 모든 밀리터리 아트의 싱글 버전이 탄생했다. 상용제품이기 때문에 모든 코드에 대한 검사는 마쳤지만 기본적으로 가상현실 전체를 코드화하기도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고 그런 방법은 비효율적이었다. 진성 만이 접근 가능한 영역을 없애기는 했지만 여전히 시스템 전체를 재구성하기는 불가능했다. 그런 상태였기 때문에 메인 가상현실 시스템, 현재 로플이라고 불리는 시스템은 그것을 대신할 시스템이 없었다. 비록 현재 테스터가 직접 테스트 하는 중은 아니었지만 로플 자체도 아주 중요했기에 곽팀장과 조팀장은 절대 아무 문제가 없도록 최선에 최선을 더했다. "아.... 이... 이런...." 다시 그 원인 모를 스파크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확실히 메인 가상현실 시스템이 있는 곳이었다. 곽팀장과 조팀장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이었다. "뭐? 그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다고?" 집으로 갔던 진팀장이 들어오면서 외쳤다. 진팀장은 들어오자마자 연구소에 가득 찬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진팀장은 오면서 그래도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얘기에 안심했지만 절대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대장님, 저... 저기....를 보십시오." 진팀장은 곽팀장의 말에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스파크가 공중에서 여기저기 발생하는 모습이었다. 진팀장은 곽팀장을 쳐다보았다. "그 원인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연구원이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다가 위험할 것 같아 현재로서는 대기 중에 있습니다. 아무리 해도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로플의 상태는?" "괜찮습니다." "계속 체크해 보도록. 절대 무슨 일이 있어서는 안 되니까." "네, 알겠습니다." 진팀장의 말이 있기 전에도 곽팀장과 조팀장은 최선을 다해서 시스템을 점검했지만 연구소 외부로부터의 원인은 찾을 수가 없었다. 예전의 그 태양 흑점 활동에 대해서도 알아봤지만 전혀 비슷한 현상도 없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내부에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진팀장은 곽팀장, 조팀장과 의논해서 연구소 전체 인원의 야근을 결정했다. "정말....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진팀장의 넋두리였다. 그 때 곽팀장이 다가와서 말했다. "아무래도 팀원을 투입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내부 환경은?" "이상 없습니다. 비디오 화상 잘못이 아닐까 의심할 정도로 깨끗한 상태입니다." "좋아, 투입하도록!" 진팀장은 하드웨어 팀원들의 가상현실 시스템, 로플이 있는 곳을 향한 투입을 결정했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원인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이제 남은 것은 그 현상이 보이는 현장 뿐이었다. 로플 시스템이 있는 곳 뿐 아니라 스파크가 나타난 모든 곳에 팀원들의 투입이 이루어졌다. 긴장된 순간이었다. "꽈콰쾅.... 꽈꽝..." 팀원들이 각 장소를 향해 다가가고 있는 순간에 처음으로 목격된 Test-3 연구실에서 원인 모를 폭발이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각 연구실에서도 연쇄 폭발이 일어났고 연구소 전체가 흔들릴 정도였다. 잠깐의 고요 후에 진팀장, 곽팀장, 조팀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드웨어 팀원들 어떤가?" "로플, 가상현실 시스템 상태는?" "각 연구실 별로 상황 보고하라." 알렉스 티먼은 전문 킬러, 저격수로 살아온 20여년의 세월 중에 가장 놀란 순간이었다. 거의 500미터가 넘게 떨어진 곳에서 자신을 정확하게 쳐다보는 상대라니. 게다가 저격 순간에 보인 그 믿을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현상은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어떤 힘이 그 저격 대상의 중심으로 그와 같이 사람들을 공중으로 날려버릴 수 있을까? 티먼은 어쩌면 자신이 이제까지 극구 피했던 결코 건드려서는 안 될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시작한 조사와 목표물을 향한 현장 조사에서도 전혀 느끼지 못했던 티먼이었기에 더욱 불안했다. 이제까지 자신의 예상을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이번의 일은 자신의 능력 밖임을 알았다. 다행히 저격에는 성공했기 때문에 그런 대로 만족할 수는 있었지만 불안한 마음은 지울 수가 없었다. 티먼은 재빨리 철수하기 위해 모든 것을 깨끗이 지우며 정리하는 동안에도 뭔가 자신을 쫓는 듯한 느낌에 소름이 끼쳤다. 의식적으로 고개를 흔든 티먼은 흔적도 없이 현장에서 사라졌다. "뭐? 뭐라고?" "미국에서 들어온 소식입니다. 이주방을 주시하기 위해 미국에 퍼져 있는 조직을 통해 정보를 체크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라스베가스에서 사건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그.. 그래서.. 진성이는?" "무사하십니다. 저격을 당해 총탄이 왼쪽 가슴에 맞았지만 어쩐 일인지 총탄이 심장에 이르기 직전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현지 의료진들조차 이런 일은 처음인지라 아주 의아해하고 있습니다. 아직 의식은 찾지 못하고 있지만 생명에는 이상이 없는 것 같습니다." "휴우..... 다행이군. 이주방과의 연관성은?" 왕현추는 제자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들린 날벼락 같은 소식에 마음을 졸였던 왕현추였다. 왕현추는 진성의 안전을 확인하자 말자 곧바로 이주방에 대해서 물었다. 왕현추는 정말 화가 났다. 절대 그대로 넘겨버릴 성질의 일이 아니었다. 기적 같은 일에 대해서는 진성의 축지법을 알고 있었기에 대충은 예측할 수 있었다. "충분히 있어 보입니다만, 석연치 않은 점들이 있습니다." "뭐지?" "일단, 이주방이 미국으로 들어간 지 오래지 않아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주방이 홍콩에서 모든 일을 결정한 다음에 미국으로 갔다면 설명이 되지만 이주방의 역량으로 쉽게 그런 일을 혼자서 성사시키기는 어려운 듯합니다. 게다가 저격수의 솜씨가 프로입니다. 아니, 프로 중에서도 프로입니다. 전혀 흔적이 없는 듯합니다. 이주방이 아주 의심스럽지만 이주방 혼자서는 쉽지 않을 일입니다." "음......" 왕현추는 일이 쉽지 않음을 알았다. 이주방 혼자서 이런 일을 계획했다면 이렇게 대담하고 깨끗하게 일을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일을 미리 계획해서 실행할 준비까지 마쳤다면 굳이 이주방이 직접 미국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런 짓을 할 이유는 없었다. 왕현추는 일단 이주방에게 혐의를 두었지만 제 2의 인물도 배제하지 않았다. "이주방의 행적을 추적해라. 그리고 모든 정보력을 동원해서 세세한 사건 정보와 함께 그런 일급 저격수, 킬러들의 명단을 확보하고 내가 다른 유맹의 멤버들에게도 말해 놓을 테니 필요하다면 다른 조직에게도 도움을 요청하도록." "네, 알겠습니다. 사부님." 왕현추는 전화기를 들어 다른 유맹의 멤버들에게도 빠르게 진성의 저격 사건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왕현추는 있는 사실을 그대로 다른 멤버들에게 전했지만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그 사실과 왕현추의 숨겨진 분노를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진팀장은 망연자실했다. 그 동안 그렇게 노력을 기울인 로플의 메인 가상현실 시스템이 완전히 가동을 정지하고 만 것이다. 전혀 반응이 없었다. "곽팀장, 어떤가?" "확실히.............. 가상현실 시스템, 로플은....... 다운되었습니다. 아니, 시스템 자체의 하드웨어적인 반응이 없습니다. 이제..... 고철 덩어리일 뿐입니다." "그래..... 그래.... 조팀장?" 진팀장은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조팀장을 불렀다. 조팀장은 진팀장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고개만 가로 저을 뿐이었다. "휴우... 이제까지 노력했던 것이.... 이렇게 수포로 돌아가다니... 하하하..." 진팀장의 어깨는 축 처지고 말았다. 가지고 있는 소스 코드를 통해서 가상현실 시스템은 복구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로플이 아니다. 로플은 유일했다. 진성의 도움과 그 동안의 테스트, 수정을 통해서 확립된 하나의 살아 있는 프로그램과 같았다. 아니, 진팀장과 곽팀장, 조팀장에게는 자식과 같았다. 가지고 있는 상세한 자료를 이용해서 가상현실 시스템을 다시 꾸밀 수 있겠지만 이제까지의 시간보다는 짧겠지만 적어도 6개월 이상의 작업이 필요했다. 진팀장은 끊임없이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 뭐? 뭐라고?" 진팀장은 이제 자신이 놀랄 소식은 없다고 스스로 생각했지만 미국에서 날아온 소식에 하늘이 무너짐을 느꼈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출발하려던 프로팀이 저격을 받아 진성이 쓰러져 병원에 있다는 소식이었다. 진팀장은 그렇지 않아도 원인조차 알 수 없는 가상현실 시스템, 로플의 다운에 이어 아들처럼 생각하는 진성이 총탄에 맞았다는 소식에 앞이 깜깜했다. 진팀장은 순간 예전의 그 사건이 생각났다. 그 때도 가상현실 시스템이 이상현상을 일으킴과 동시에 진성이 그 접속기 속에서 코마, 혼수상태가 되고 말았다. 경우는 달랐지만 이번에도 가상현실 시스템, 로플이 이상이 생겼고 미국에서 진성이 총탄에 맞아 의식을 잃고 말았다. 진팀장은 우연이지만 너무 이상함을 느꼈다. "......... 진.. 진성아...." 진팀장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 고철 덩어리가 되어 버린 시스템을 그대로 두고 미국으로 가야 할지, 그렇지 않으면 다시 시작하기 위한 작업을 해야 할지... "대장님, 미국으로 가십시오. 여기는 제가 책임지고 복구하도록 하겠습니다." 곽팀장은 진팀장의 내심을 짐작하고는 나서서 말했다. 처음부터 복구한다면 어차피 진팀장이 없어도 가능했다. 게다가 복구를 시작하기 전에 원인부터 알아야 했다. 당분간은 그대로 현장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진성은 편안함을 느꼈다. 어둡지만 아예 보이지는 않을 정도의 칠흑 같은 어둠은 아니었다. 어둠은 필연적으로 공포심을 느끼게 한다지만 진성은 오히려 안도감을 느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단지 편안하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꿈인가?" 꿈이 아니고서야 이런 곳이 실제로 있을 리가 없었다. 하늘은 구분되는 듯, 약간이지만 밝았다. 바닥은 아주 시커먼 평평한 대리석과 비슷했다. 하지만 거의 빛의 반사는 없었다. "...... 휴우...." 진성은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한숨을 쉬고 말았다.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듯 싶은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뭔가 따뜻함이 느껴졌다. 이 어두운 공간에서 뭔가가 자신을 감싸는 듯 따뜻함이 쉬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둘러싼 듯했다. 진성은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그 따뜻함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질 정도였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진성 자신조차 시간을 인지할 수 없을 때, 갑작스런 변화가 일어났다. "으.. 으... 어... 어... 으아아앗" 순간 빛이 없었던 하늘이 눈부실 정도로 밝은 빛으로 가득했다. 진성은 손을 올려 눈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하늘이 밝아짐과 동시에 바닥이 완전히 사라졌다. 진성은 속절없이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끝도 없이, 아래로 아래로 떨어지는 진성이었다. "으으으으!" 진성은 비명을 지름과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으.. 으으..." 하지만 몸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 대신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진성은 눈을 뜰 수는 없었지만 자기가 누워있음을 알았다. "진성아, 진성아! 재필이 형, 진성이가 깨어났어요!" 침대 옆을 지키고 있던 현준의 외침에 밖에 있던 서재필이 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뭐?....... 정말이냐?" "예, 조금 전에 신음소리를 들었어요. 아직 눈을 뜨지는 못한 것 같은데.. 확실히 신음소리를 들었어요!" "그래? 알았다." 서재필은 병실로 들어왔을 때보다 훨씬 더 빠르게 밖으로 뛰어나갔다. 서재필이 나가자마자 자소 소프트 프로팀의 나머지 팀원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 진성 오빠, 깨어났다며?" "어때?" "진성이 형, 정말로 일어났어요? 어...?" 현준은 갑자기 몰려와 시끄러운 팀원들을 조용히 시키고는 말했다. "조금 전에 내가 신음소리를 들었거든. 아무래도..... 이제... 괜찮은 것..... 같다." 현준은 진성이 다시 눈을 감은 채, 다시 잠이 든 듯하자 들어온 사람들에게 설명했다. 하지만 현준의 목소리는 쉽게 이어지지 못했다. 아직도 현준은 진성의 가슴에서 피가 튀어 오르던 그 장면을 잊지 못했다. 진성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완전히 사방으로 밀려났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진성이 총탄을 맞는 장면을 보지 못했지만 현준은 아주 똑똑히 보았다. 가슴에서 선홍빛의 핏방울들이 공중으로 튀어 오르던 장면. 현준은 그 후, 잠을 잘 수도 없었고 잘 생각도 없었다. 현준은 다른 사람들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거의 나흘 가까이 잠도 자지 않고 진성의 곁을 지켰다. 왼쪽 가슴을 맞았기 때문에 현준은 진성이 총탄에 맞던 순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왼쪽 가슴이라니 현준은 그 순간 눈앞이 노랗게 변함을 알았다. 현준은 바닥에 떨어지자 말자 진성을 향해 뛰어갔다. 현준은 진성의 옆으로 다가갔지만 영화처럼 가슴에 안지는 않았다. 현준은 절대 진성이 죽지는 않으리라 확신했다. 혹시라도 자신의 격한 감정으로 인해 진성의 상태가 나빠질까 걱정했다. 현준은 그 순간에도 침착하기 위해 노력했다. 현준이 걱정하는 동안 서재필은 빠르게 움직였다. 호텔로 뛰어가 병원과 경찰에 연락을 취하고 곧바로 호텔에서 대기하는 의료팀을 불러달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빨리 진성이 쓰러진 곳으로 다가왔다. "만지지 마라." 서재필의 짧지만 확실한 외침이었다. 여자 게이머인 유나와 혜연은 멀찍이 떨어져 있었지만 한석과 진규, 현준은 쓰러진 진성 바로 옆에서 어떻게 할 줄 몰라 쩔쩔매고 있었다. 서재필은 빠르게 다가가 절대 손 못 대게 만들었다. 확실한 전문가가 아닌 이상 감정적으로 움직여서는 절대 좋지 않는 결과만 나올 뿐임을 서재필은 알고 있었다. 곧 호텔 내에서 대기하던 의료팀에서 진성을 응급조치를 하고 앰뷸런스를 타고 근처 병원으로 이동했다. 서재필이 대표로 앰뷸런스를 타고 병원으로 이동했고 나머지 사람들도 미리 대기한 차를 통해 병원으로 향했다. 현준은 창 밖을 통해 여전히 화려한 라스베가스의 광경을 보면서 가슴을 쓸어 내렸다. 진성을 검사한 의사들의 한결 같은 이야기는 바로 '기적'이었다. 분명히 왼쪽 가슴에 총탄이 들어간 흔적은 있는데 몸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는 이야기였다. 대신 피묻은 총탄이 현장에서 발견되었다. 그와 함께 같은 총으로 쏜 듯한 총탄 2발이 현장에서 더 발견되었다. 어떻게 된 사실인지 몰랐지만 현준은 그 사실에 감사했다. 심장도 상처를 입었지만 관통하지는 않았다. 나흘이 넘도록 정신을 차리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말에 현준은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현준과 자소 소프트의 프로팀 팀원들 뿐 아니라, 병원 관계자들 모두 진성의 상처는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라고 표현했다. 총탄이 들어간 곳은 있지만 나온 곳은 발견되지 않은, 전대미문의 기적이었다. 현준은 이제 진성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면 된다고 확신했다. 진성은 쓰러진 지 6일이 지나서야 완전히 의식을 찾을 수 있었다. 진성이 처음 본 사람은 당연히 친구, 현준이었다. "... 으... 으... " "진성아, 나다... 나.. 진현준.. 진현준이라고." "으.. 으..으으으으으......으.... 아... 혀.. 현...준..이구...나..." 사실 진성은 총탄에 의한 상처보다는 갑작스레 경을 그 한계까지 급히 끌려 올린 데다가 청경의 한 단계를 순간적으로 깨뜨려 너무도 급히 단계를 돌파했기 때문에 그 모든 충격으로 인한 쇼크가 의식불명의 더 큰 원인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안정을 찾게 된 진성은 쉽게 이어지지 않는 목소리로 현준의 이름을 불렀다. 진성은 거의 빛이 없었던 공간이 꿈이었음을 알았다. 끝도 없이 떨어졌지만 이렇게 살아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진성은 확실히 그 저격수의 존재와 다른 사람들을 경을 통해 흩어버린 일, 그리고 자신이 총에 맞은 것까지 기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제대로 의식을 찾을 수 없는 동안 그 따스한 느낌의 존재가 현준이라는 것도 직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서울 근교의 연구소에 있던 곽팀장은 아무리 검사를 하고 또 해도 그 소동의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하드웨어 자체를 하나하나 떼어 놓고 검사하면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게다가 그 이상한 스파크의 존재도 모니터로 녹화된 것을 제외하고는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곽팀장은 진팀장이 돌아오면 결정하겠지만 아무래도 로플을 포기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마음을 굳히기 시작했다. 일단 마음을 먹은 후에 그 기나긴 작업을 시작하기 위한 준비를 위해서 각 팀의 리더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하드웨어팀의 리더들 다 모이라고 해. 그 원인은 계속 찾아야겠지만 다른 팀은 또 다른 로플을 꾸밀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대장님이 미국에서 오셔야 확실히 결정할 수 있겠지만 제대로 준비는 해야겠지?” 곧 하드웨어 팀 팀원들이 모이자 곽팀장은 무게를 잡으며 말하기 시작했다. “빨리들 왔군. 모인 내용은 다 알겠지? 그러니.... 여기 이쪽 부분은... 음...” 곽팀장이 리더를 불러 일을 적절히 분배한 후에 실행하려고 말을 꺼내는데 누군가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 과... 곽팀장님!” “어이, 변태수! 무슨 일이라고 생겼나? 또 그 빌어먹을 스파크가 나타났나?” 곽팀장은 놀람이 가득한 변태수의 얼굴을 보고는 약간은 삐딱하게 말했다. 이제 더 이상 곽팀장 자신이 놀랄 일은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곧 그 확신은 사라지고 말았다. “... 곽팀장님! 로플이.. 로플이.. 되살아났습니다.” “...뭐? 로플?” “네, 로플입니다. 이상하게 아무 반응도 없던 로플이 조금 전의 마지막 테스트에 급격한 반응을 보이더니 제 생각이지만.... 거의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습니다.” 곽팀장은 변태수의 뚱딴지같은 말에 할 말을 잃었다. 며칠 동안 밤을 새면서까지 검사했어도 전혀 꼼짝도 않던 로플이 마지막 테스트에서 반응을 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이런 황당한 일을 저런 얼굴로 말할 변태수는 아니었다. 곽팀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변태수의 뒤를 따랐다. 처음에는 가볍게 걷던 걸음들이 점점 빨라졌고 급기야 다들 뛰기 시작했다. “어딘가?” 급한 곽팀장은 테스트 연구실로 들어가면서 외쳤다. 먼저 와 있던 조팀장이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다 곽팀장을 보더니 손을 흔들며 외쳤다. “여기입니다!” 곽팀장은 재빨리 조팀장으로 다가갔다. 조팀장은 여러 개의 모니터를 동시에 보면서 키보드를 조작하고 있었다. “... 어떤가?” 곽팀장의 목소리에는 미미하지만 떨리고 있었다. 조팀장은 그 떨림을 느꼈다. 게다가 그 떨림에 공명하듯이 조팀장 자신도 미세한 떨림을 가지고 대답했다. “...로플은.. 정상입니다.” “정상?” “하드웨어 테스트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소프트웨어 테스트에서는 완벽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휴우.... 좋은 일이라고 해야겠지만 이렇게 원인을 찾을 수 없는 에러가 났다가 또 원인도 모른 채 이렇게 복구가 되다니. 할 말 없습니다.” “정말로... 로플이 정상인가?” “소프트웨어적으로는...... 완벽합니다!” 곽팀장은 조팀장의 전혀 흔들림 없는 눈빛을 보았다. 곽팀장은 자신의 뒤에 서 있는 팀원들을 향해서 외쳤다. “자, 하드웨어 테스트다. 시간은 5분이다. 모든 준비를 다 마쳐라!” 곽팀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드웨어 팀원들은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소프트웨어의 검사가 정상이라면 당연히 하드웨어도 정상일 것이다. 하드웨어가 정상이고 소프트웨어가 비정상인 경우는 있지만 그 반대 경우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곽팀장은 자신이 직접 로플을 확인하고 싶었다. 곽팀장은 후회했다. 그 5분도 무척 길게 느껴졌다. “.. 5분이 아니라 1분이라고 말할걸.....” 상하이의 차이나 소프트 본사 빌딩의 고층 스위트 룸에는 진지한 얼굴의 노인 4명과 중년의 남자가 자리를 하고 있었다. 고급 소재로 만든 가구와 내부 장식이었지만 이 노인들은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이장령, 어떻게 할 생각인가?” “..... 왕대유, 제 불찰입니다. 그 녀석이 그런 짓까지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어린 시절의 단순한 감정으로만 생각하고 그냥 방치해 둔 게 이런 사태를 부른 것 같습니다. 휴우... 제가 그 녀석 조부지만.. 휴우..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유맹의 회원을 높여 부르는 호칭인 대유로 자신을 부른 이장령의 말에 왕현추 역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누구든지 가족, 특히 제 자식이나 손자라면 감싸고 도는 것은 당연하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주방은 쉽게 용서하기 힘든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일단 이주방의 신변은 내게 넘기게나. 자네가 여기서 나서서 이주방을 보호한다면 그 의도가 좋은 것이라 해도 별로 좋게 느낄 수가 없을 테니까. 이장령, 어떤가?” “왕대유, 뜻대로 하십시오.” 이장령은 하나밖에 없는 손자 녀석이 이런 짓까지 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아무리 어리다고는 하지만 그 실력으로 유맹의 멤버가 된 상대에게 시기심으로 암살을 의뢰할 줄이야, 이장령은 눈앞이 깜깜했다. 오냐오냐 키웠기에 다툴 수는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아니었다. 비록 옛날처럼 배신자나 사람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사람의 목숨을 취하는 일은 없겠지만 손자 이주방에게 가해질 고통을 생각하니 참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저격을, 그것도 홍콩에서 힘들 것 같자, 미국으로 건너가 상대를 해하기 위한 시도는 발을 뺄 도리가 없었다. 머리를 써서 흔적이 드러나지 않도록 했다면 그래도 어떻게 해 보겠지만 이주방은 미국에서 도착한 후의 행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 와중에 홍콩 마피아의 선을 통해 미국의 폭력조직에 일을 의뢰한 것도 완전히 파악되었다. 그 모든 것이 미국과 홍콩에 있는 화교들의 힘이었다. 그나마 그 진성이라는 젊은이의 생명에 이상이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기에 이장령은 거기에 희망을 걸었다. “사제, 이주방 혼자서, 그리고 그 돈으로 그런 대단한 프로를 부를 수 있나?” 가만히 사고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왕현추의 사형, 맹가위가 입을 열었다. 평소 진중하지만 일의 핵심을 꿰뚫어 보는 직관력이 있던 맹가위여서 그 말은 가볍지가 않았다. “사형의 말이 맞습니다. 만 달러가 적은 돈은 아니지만 전혀 흔적도 남기지 않은데다가 세 발의 총탄이 모두 진성의 왼쪽 가슴을 관통할 정도로 정교하면서도 대담한 저격수는 그리 흔치 않을 것 같습니다. 제가 그쪽은 잘 모르기에 이렇게 전문가를 데리고 온 겁니다.” 유맹에 소속한 멤버들, 개개인의 힘은 대단했다. 게다가 그 개개인과 관련되거나 그 제자와 관련된 조직들이 서로 정보를 공유하자 그 사건에 대한 정보를 모으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많은 중국계 시민들이 바로 정보를 제공해 주는 사람들이었다. 진성은 왼쪽 가슴에 단 한 발만 맞았지만 원래 있던 자리를 생각했을 때, 3발의 총탄은 거의 오차도 없이 왼쪽 가슴을 관통할 정도로 정확했음이 현장 조사로 드러났다. 게다가 5분도 되지 않아 출동한 경찰들의 삼엄한 경계와 봉쇄에도 저격수는 흔적하나 남기지 않았다. 왕현추의 말이 끝나자 중국의 거대 지하조직 천지회의 종주 화천극이 입을 열었다. 화천극은 자신의 일인 마냥 얼굴이 붉게 물들어 흥분한 상태였다. “.... 그런 녀석들은.. 절...대 그냥 둬서는 안 됩니다. 그런 뒤를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녀석들은...” “화천극, 그 암살자는 어떤 것 같나?” 왕현추가 화천극의 말을 끊었다. 화천극은 여전히 붉은 얼굴로 옆에 있던 중년 남자에게 고개 짓을 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중년 남자가 말을 시작했다. “... 어르신, 천지회 매풍강입니다.” “......” 중년 남자, 매풍강의 말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왕현추가 화천극을 쳐다보자 화천극이 재빨리 말했다. “천지회에서 자랑하는.... 중국 뿐 아니라 일본과 미국 등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킬러입니다. 암살에는 손 뗀지 오래지만 그쪽 정보에 밝기 때문에 오늘 특별히 이곳으로 이렇게 제가 데리고 왔습니다.” “그래? 그럼 어디 한 번 말해봐.” “네? 아.. 네.....” 매풍강은 냉철하기로 소문난 자신답지 않은 행동에 스스로도 놀랐다. 다른 사람의 말에 이렇게 당황해 보기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 순간 매풍강은 이 자리에 묘하게 불편함을 눈치 챘다. 그냥 보기에는 별 볼일 없는 노인들이 모인 자리였지만 매풍강의 날카로운 감각은 불안함을 피어 올렸다. 특히 자신과 마주보고 있는 검버섯의 노인과 백발의 노인은 절대 맞붙어서는 안 되는 상대임을 깨달았다. “... 제가 아는 한 그런 저격수는 미국에서는 특급입니다. 그 정도의 전문가에게 일을 맡기기 위해서는 100만 달러 이상의 돈이 들 겁니다. 아니,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대단한 사람입니다. 비록 사전에 저격을 알 수 없었고 저격도 실패했지만 제가 듣기로는 살아난 게 기적이라고 들었습니다.” 왕현추는 매풍강의 말에 가만히 있었다. 정말 다행히도 진성은 왼쪽 가슴에 총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났던 것이다. “... 그래? 대강 누구인지는 알겠나?” “제가 아는 녀석들 몇 명이 있지만, 확실하게 알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습니다.” “음.. 만 달러로 의뢰한 것이 100만 달러 이상을 줘도 움직이기 힘든 전문가가 손을 댔다? 매풍강, 자네가 보기에는 어떤가?” 맹가위의 갑작스런 질문에 잠시 생각한 매풍강은 나직하지만 확실하게 말했다. “..... 제 생각에는 그.... 만 달러로 의뢰한 사람은....... 희생양이겠지요.” 왕현추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이주방 혼자서는 힘들 것으로 생각했다. 공범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이주방의 행적을 조사했다. 바보 같을 정도로 행적을 흘리고 다닌 이주방이었다. 이제는 확실했다. 이주방도 진성을 해하기 위해서 움직였지만 실제 저격을 의뢰한 사람은 따로 있을 것이다. 게다가 100만 달러라니 생각보다 일이 커졌다. “매풍강, 최대한 빨리 그 저격수와 그 의뢰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봐 주게. 만약 벽에 부딪힌다면 내게 연락하게. 내가 유맹의 멤버들을 통해서 자네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으니.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매풍강의 힘찬 대답에 왕현추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장령을 보면서 물었다. “지금 이주방은?” 왕현추는 미국의 수사기관에서도 곧 이주방의 존재를 알아차릴 것을 생각했던 것이다. 이주방이 한 일은 잘못됐지만 이국의 땅인 미국에서 구류되는 것은 원치 않았다. “.... 지금 배로 오고 있는 중입니다.” 이장령은 왕현추의 질문이 고마웠다. “그래... 오는 즉시 내게로 보내게. 이장령.” “네, 왕대유.” 자소 소프트는 발칵 뒤집혔다. 미국에서 곧 시작될 문명 온라인 프로 리그의 홍보를 위한 이벤트에 참가하고 있던 소속 프로 게이머 한 명이 라스베가스에서 총탄에 맞고 병원으로 실려 갔다는 소식은 자소 소프트를 강타했다.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문명 온라인 개발팀은 그 사고로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 특히 이팀장은 직접 프로팀의 매니저인 서재필과 통화를 계속 시도할 정도로 열성을 보였다. 또한 한국의 문명 온라인 운영위원회는 미국의 운영위원회에 공식적으로 유감을 표시했다. 이벤트 행사가 미국의 라스베가스에서 하는 만큼 확실한 경호 조치는 미국이 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이런 결과는 그런 조치의 부재를 드러내는 증거였다. 특히 단순한 총기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를 노린 저격이라는 일이 알려지자 더 큰 반응이 나왔다. 한국의 게임 팬들은 흥분했다. 프로 게이머 중에서 가장 많은 팬을 보유한 게이머 스키피오가 저격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은 게임 팬들로 하여금 미국 백악관 홈페이지를 비롯해 여러 정부 기관의 홈페이지를 공격하도록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특히 게임 팬들 중에서 해킹에 재능을 가진 소수의 해커들은 조직적으로 미국의 대표적인 사이트들의 무차별 공격에 나섰다. 그들의 해킹 마크는 오직 하나 ‘스키피오’였다. 일본과 중국도 그 소식을 대서특필하면서 미국의 치안 부재에 대해서 심각하게 다뤘다. 미국의 치안 문제는 아주 심각하다는 일반적인 말과 더불어 계속 발생되는 총기 난사 사건과 더불어 이번의 일은 단순한 사고가 아닌 저격사건이어서 더 충격적이라는 보도를 연일 계속했다. 평소 그리 관계가 좋지 않던 중국은 그 중에서도 아주 공격적이었다. 미국에서도 인기를 얻을 것이 분명한 문명 온라인 프로 리그의 이벤트에 미국 시민의 눈을 모으기 위한 음모라는 별 신빙성이 없어 보이는 것에서부터 게이머 스키피오를 좋아하는 스토커의 소행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까지 흘러나왔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한국의 정부는 조심스런 태도를 보였다. 저격 사건임에는 분명했지만 일단은 사태를 지켜보는 관망의 자세였다. 국내 언론에서 그런 자세를 비판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정부의 태도는 네티즌들의 사이버 테러를 미국 뿐 아니라 국내 정부 사이트에도 가하게 만드는 빌미를 제공했다. 한국, 중국, 일본 모두 뜨거운 분위기였지만 미국의 국내 사정보다는 한 수 아래였다. 동양에서 온 젊은 프로 게이머를 별다른 이유도 없이 저격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미국의 언론은 들끓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국내 치안과 총기에 대한 문제로 시작하다가 급기야 공화당과 민주당의 정책 문제까지 그 범위가 번져 가히 언론 총력전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와 함께 시민들의 반응도 엇갈렸다. 확실한 것은 미국 시민들 거의 대부분이 별로 알려지지 않은 문명 온라인이라는 게임에 대한 말을 들은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언론은 의도적인지는 드러나지 않지만 사건 자체보다는 그 의미에 주력해서 사건의 해결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심지어 누가 그 사건을 조사하고 있는지조차 언론에서 다루지 않을 정도였다. “휴우... 뭐 좀 건진 거.. 있나?” “말도 마라. 근처를 이 잡듯 뒤졌는데도 나오는 게 하나도 없다. 휴우.... 어떤 녀석인지 모르겠지만 전문가다. 그 정도면 아마 이름깨나 알려졌을 놈일거다. 그런 놈을 우리 같은 평범한 경찰이 잡을 수 있을 리가 없지.” “맞아. 그런데 왜 우리더러 이 일을 맡으라는 거지? 이 정도의 일이라면 FBI가 와서 수사해야 하는 것 아니야? 조금 있으면 퇴직할 우리가 왜 이런 복잡한 일을 해야 하는 거지?” “..... 내 생각인데... 그 총 맞았다는 젊은 남자가 동양인이라며? 음.... 둘 중 하나겠지.” “둘 중 하나?” “왜 있잖아? 검둥이 녀석 하나가 총 맞았다고 FBI가 나서지는 않잖아. 마찬가지지. 미국 시민도 아닌 동양의 남자가 총에 맞았다고 해서 그리 큰일은 아니라는 생각이겠지.” “그래? 그건 그렇다고 치고.. 또 하나는?” “30년이 넘는 내 경찰 경력을 통해서 볼 때, 어쩌면 상부에서 이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을지도 몰라. 아직까지는 전혀 오리무중의 사건이지만 그 일을 벌인 사람이 꽤나 대단한 사람이라면... 이렇게 우리 같이 수사에 별 생각이 없는 경찰에게 이런 일을 맡길 수도 있지. 안 그런가?” “뭐라고? 자네, 소설 쓰나?” “소설? 하하하. 그래 소설. 그렇겠지?” 머리가 희끗한 두 백인 노인은 임시로 마련된 수사본부에서 한가롭게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 두 노인 중 한 명이 바로 라스베가스에서 벌어진 저격 사건의 총 책임자였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수사에 대한 의지는 찾기 힘들었다. “진성아, 이제 몸은 좀 어떠냐?” 진팀장은 침대에 누워 있는 진성에게로 다가가 걱정이 가득한 말투로 물었다. 진성은 진팀장의 말에 아직은 가슴 뿐 아니라 몸 전체가 아팠지만 밝게 대답했다. “아저씨, 저는 괜찮습니다. 아직 쉽게 움직일 수는 없어도 이 정도면 다행이죠. 총알이 가슴에 박혔는데 이렇게 살아있다니요. 안 그러냐? 현준아?” “아버지, 맞아요. 왼쪽 가슴에 정확하게 총탄 맞고 이렇게 살아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걸요. 의사도 며칠 후에는 한국으로 이송할 정도로 회복될 거라고 말했으니까요.” 진성의 밝은 대답에 진팀장 역시 조금은 밝게 말했다. “그래..... 아, 맞다. 진성아, 우연일지도 모르겠지만 며칠 전에 서울 근교에 있던 가상현실 시스템 로플이 멈춰버렸다. 예전의 진성, 네 사건처럼 이상한 스파크가 일어나더니 시스템이 멈춰버렸다. 아니, 멈췄다기 보다는 완전히 끝장났다고 해야겠지. 휴우... 그런데 오늘 연락이 왔는데 역시 이유도, 원인도 없이 그 가상현실 시스템, 로플이 되살아났다고 하더구나. 휴우... 정말 한 숨 밖에 나오지 않는다. 우연이겠지만 너와 가상현실 시스템은 정말 똑같이 사고를 친다.” 사고 친다는 말에 진성은 목소리 톤을 높여서 짐짓 화가 난 듯 말했다. “....... 사고를 치다니요? 아무 짓 하지 않고 잘 지내는 사람을 노리고 저격을 하는데 제가 어떻게 해요? 설마 제가 총 맞을 만한 짓을 했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하하하.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아무튼 이렇게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 너는 정말 운이 좋은 것 같다. 그 때도 혼수상태에 빠져 하루 만에 깨어나 의사들을 놀라게 만들더니 이번에는 왼쪽 가슴에 총탄을 맞고도 이렇게 살아 있다니. 하하하. 그 운 내게도 좀 줄 수 없겠냐?” “아저씨, 저.... 지금도 왼쪽 가슴이 아프거든요. 그리고 걸어 다니다 총 맞을 운이라면.. 아저씨가 가져가세요. 저는 총 맞기 싫으니까요.” “그게 그렇게 되나? 하하하. 그래? 하하하..” 진팀장과 현준, 진성은 너스레를 떨었다. 한참 동안 서울의 소식과 다른 이야기를 나누던 진성이 조심스럽게 진팀장에게 물었다. 누구도 해 주지 않은 일이라 직접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저.... 그 총을 쏜 사람은 잡았습니까?” “.... 아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런가요?” “경찰이 수사하고 있으니 뭔가 나오겠지.” 진성은 생각했다. 그 저격의 마지막 순간 자신의 왼쪽 가슴에서 핏방울이 뛰던 그 순간. 진성은 자신이 총에 맞고 죽는 줄 알았다. 다행히 그 때, 끌어올린 일체감으로 인해 축지법의 효과로 총탄이 심장을 관통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만약 다시 그런 경우가 생긴다면, 진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자신을 노린다면 진성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비록 이번에는 운이 좋아, 상대를 먼저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해도 다음에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게다가 진성 자신이 아니라 그 주위의 사람을 겨냥한다면 정말 아무런 방법이 없을 것이다. 진팀장이나 현준을 노린다면 진성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제일 진성이 궁금한 것은 왜 자신을 노린 것인가, 바로 그 부분이었다. 그 순간에 폭발적인 감각의 증가로 상대가 노리는 것이 자신임을 알았던 진성으로서는 그렇게 자신이 죽을 만한 이유를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무차별 살인이든 아니든 진성은 죽었다 살아났다는 기쁨에 잠시 잊었던 감정이 되살아났다. 진성은 이제까지 생각하지 않았던 분노가 서서히 마음속에서 일어남을 느낄 수 있었다. 며칠 뒤, 진성을 비롯해 자소 소프트의 프로팀 팀원들과 미국으로 날아온 진팀장을 비롯한 사람들은 모두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아직은 위험의 요소가 없지는 않지만 저격에 실패한 그 암살범이 재차 진성을 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귀국을 서두른 결과였다. 그리고 저격 사건을 조사하고 있던 미국 경찰은 목격자도 없고 제대로 된 용의자도 없이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라스베가스에서도 유명한 호텔 MGM Grand에서 동양인 청년의 저격 사건으로 인해 확실히 미국에서 문명 온라인이라는 게임에 대한 관심은 높아졌다. 굉장히 밝은 방에 커다란 마호가니 책상이 놓여 있었다. 각이 진 얼굴에 단호한 인상의 백발 백인 노인이 책상에 앉아 있었는데 의외로 그 목소리는 자상한 편이었다. “자네, 실패했더군. 허허허. 뭐, 그 결과만 보면 성공이지만.” 책상 앞에 서 있던 저격수, 알렉스 티먼은 고개를 숙인 상태였다. “.......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알렉스 티먼의 말에 노인은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밝은 곳에서 노인의 말은 묘한 여운을 남기며 사라졌고 알렉스 티먼의 태도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부동자세 그대로였다. “아니야. 그 정도가 낫겠지. 사람 목숨은 중요하니까. 허허허. 하지만 조금은 아쉬워. 그 청년이 그렇게 그 게임을 잘 한다니. 허허허.” 아쉽다는 노인의 말에 알렉스 티먼은 곧 말을 이었다. “확실하게 처리할까요?” “..음....... 동양의 어린 것 때문에 너를 잃을 수는 없지. 당분간은 조용히 있거라. 허허. 이번 일은 아주 잘했다. 그 어린 것이 살아난 것은 그야말로 운이니까. 허허허.” “.... 감사합니다.” “그래... 나가 보거라.” 알렉스 티먼의 태도는 절반의 존경과 절반의 두려움이었다. 저격수로 이름난 알렉스 티먼조차 두려움과 존경을 보일 노인은 알렉스 티먼이 나가자 손으로 턱을 받치며 중얼거렸다. “..... 일은 다 잘 된 것 같은데.. 이런 불안감이라니. 이런 불안함도 정말 오랜만이군. 하긴, 이런 스릴도 있어야 살맛이 나지. 허허허.....” 노인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조금씩 자라는 불안의 씨앗을 느끼고 있었다. 목적을 위해 대상을 정한 다음에 저격을 했고 아무런 증거조차 없어 이제 시간이 흐르면 세인들은 모두 그 사건을 잊게 될 텐데... 이렇게 근거조차 없는 불안함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낀 노인은 앞으로 다가올 위험한 시간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래. 어떤가?” 왕현추는 천지회의 화천극과 매풍강이 오자 의례히 하는 인사도 하지 않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 왕현추에게는 다른 것보다 진성의 저격 사건에 대한 사실이 더 중요했다. 화천극이 매풍강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매풍강이 말하기 시작했다. “... 지금 현재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런 수준의 저격수는 다 합치면 10명이 조금 넘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라스베가스 근처에 있었던 저격수는 오직 한 명, 알렉스 티먼입니다.” “티먼?” “나이 37세, 키 182cm에 76kg 정도. 그리고 전직 CIA 요원이었습니다. CIA 요원이 되기 전부터 저격수 일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CIA? 저격수?” “네, 그 둘을 동시에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CIA를 그만둔 상태이고 가족도 없고 연고지도 없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FBI의 수배대상에 올랐다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수배가 취소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명확한 이유 없이 수배가 취소되는 경우는 거의 없기에 아무래도 알렉스 티먼을 도와주는 누군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매풍강의 일리 있는 말에 왕현추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FBI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면 대단한 사람일 것이다. “그래? 음.... 그 사람이 누군가?” “.... 그것은 저도 알기가 힘듭니다.” 왕현추는 매풍강의 머뭇거리는 말에 고민했다. 천지회의 저격과 암살 관련 전문가가 알 수 없는 사실이라면 상대 역시 대단한 인물이었다. 평생을 권법을 수련하며 살아온 왕현추로서는 그런 인물을 상대하기 힘들다고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직접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걸 맞는 사람들을 내세우고 왕현추 자신은 내세운 사람을 도와주는 역할로 끝내야했다. “.... 화천극.” “네, 왕대유.” “힘을 다해서 이번 일의 배후를 밝혀 봐라. 물론 이것은 부탁이다. 허허허. 나 왕현추가 화천극에게 처음으로 하는 부탁이다.” 부탁이라는 말에 화천극은 깜짝 놀랐다가 대답했다. 처음으로 왕현추의 입에서 부탁이란 말을 들은 화천극이었다. “.... 알겠습니다. 꼭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왕현추는 화천극과 매풍강이 나간 후에 유맹의 멤버들에게 연락을 해서 한국의 서울에서 긴급 모임이 있음을 알렸다. 이제까지의 모든 일을 다른 멤버들에게 확실히 알리고 공동으로 그 사건에 대해 대처해 나갈 것이다. 왕현추는 아직 상대의 의도를 모르기 때문에 뭐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일단 진성을 건드렸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화천극 뿐 아니라 각 멤버들에게 그 적임자를 물색해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 어둠 속의 인물을 그냥 두지는 않을 것이다. “...... 꼭 후회하게 만들어 주지.”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한 자소 소프트 프로팀은 언론의 취재를 피해 공항 관계자의 도움으로 조용히 공항을 빠져 나갈 수 있었다. 진성은 삼선 병원에 미리 마련된 병실로 직행했고 현준이 그 뒤를 따랐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회사로 향했다. 게이머 스키피오가 인천 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하자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한국의 프로 게이머가 미국에서 저격을 당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관심을 모을 수 있었고 그 프로 게이머가 국내에서 가장 많은 팬을 가진 게이머 스키피오라는 사실은 그 관심을 증폭시켰다. 신문 뿐 아니라 TV도 게이머 스키피오의 귀국을 첫 뉴스로 장식하면서 그런 열기를 부채질했다. 그와 동시에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던 사이버 테러가 스키피오의 귀국에 맞물려 다시 전의를 다진 듯, 엄청난 공세를 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팬들의 사이버 테러는 한국 뿐 아니라 미국의 대표적인 사이트들을 폭주시켜 결국 서버 다운이라는 원하는 결과를 얻고 말았다. 진성이 입원한 삼선 병원은 관계자 외에는 절대 접근금지라는 방침을 정하고 삼엄한 경계를 시작했다. 병원 자체에서도 그런 조치를 취했지만 자소 소프트는 회사차원에서 확실한 경호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런 일환으로 이제까지 혼자 자소 소프트 프로팀의 경호원 역할을 했던 이준이 경호팀의 팀장으로 임명되고 그 밑에 8명의 경호원들이 배치되었다. 이준은 선수 한 명당 최소한 경호원 1명이 배정되어 전담 경호가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휴우.. 이제 좀 쉬어도 되겠다.” 총탄에 맞고서도 그리 아픈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던 진성은 기자들의 취재 경쟁과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더 자신을 지치게 만들고 있음을 알았다. 특히 다른 사람들은 배려한다며 이것저것 챙겨주지만 진성은 그런 것이 더 부담스러웠고 더 피곤했다. “..... 그래, 이제는 별 문제가 없겠지.” 널찍한 병실, 병실에 마련된 침대에 누워 있는 진성의 앞에는 현준이 간이 의자를 펴고 앉아 있었다. 현준의 말에 진성은 슬쩍 고개만 끄덕였다. 현준에게는 감사의 말이 필요 없음을 진성은 알고 있었다. 진성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무슨 대단한 일을 할 수는 없어도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서는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국으로 오는 동안, 공항에 도착해서 병원까지 오는 동안 귀를 열어 다른 사람들의 말을 유심히 들었다. 진성은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확실히 그 저격수는 잡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흔적조차 오리무중임을. 게다가 미국 경찰은 그 범인을 잡을 의지가 없어 보인다는 점도 알 수 있었다. 진성이 제일 알고 싶었던 것은 왜 자신을 향해 총을 쏘았을까 하는 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국에 어떤 원한이나 저렇게 총에 맞을 일은 없었다. 처음에는 무차별 살인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라스베가스의 호텔에서 정확히 자신을 맞추기 위한 것과 심장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았던 저격 실력을 보건대 보통 사람은 아님이 확실했다. 새삼 기분이 나빠졌다. 한국에 돌아왔다는 사실 하나로 조금 흥분했던 진성은 그 사건에 대해 생각하자 가슴이 차가워졌다. 진성은 더 깊이 생각해 보고 싶었지만 정보가 부족한 가운데 더 골몰히 생각하면 할수록 이상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게임과 비슷했다. 더 많은 정보가 있어야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성은 생각하기를 멈추고 몸을 다가오는 잠에 맡겼다. 문명 온라인 한국 운영위원회는 게이머 스키피오의 저격 사건은 유감이지만 월드 리그는 종전의 계획대로 시행한다고 발표했다. 10월에 리그를 시작해 다음 해 1월까지의 각국의 국내 리그와 2월부터 시작되는 명실상부한 월드 리그는 그대로 진행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또한 이와 같은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각국의 운영위원회는 자국에서 열리는 프로 게임을 위해 확실히 경호 시스템을 준비하기로 구두로 약속했다. 개인전과 단체전으로 나누어 리그를 시작하는 한국의 국내 리그는 게이머 스키피오의 부상으로 인한 리그 출장이 불투명한 가운데 미리 정했던 개인전과 단체전의 선수 구성에 대해 다시 논의하고 있었다. 이제까지 개인전은 자소 소프트의 게이머 스키피오가 워낙 당해낼 선수가 없어 개인전보다는 단체전을 위주로 준비했다. 게다가 단체전이 훨씬 더 예측하기 힘든 변수가 많다는 점도 그런 분위기를 부추겼다. 그런 상황에서 게이머 스키피오의 리그 출전이 불가능하리라는 전망이 나오자 각 프로팀은 미리 결정된 선수 구성을 바꾸는 등, 부산한 움직임을 보였다. 프로 게이머 한 명의 출전 여부가 전체 프로팀의 선수 구성에 영향을 미친 셈이었다. 다른 프로팀과는 달리 자소 소프트는 아직 확실치 않은 일인데다가 만약에 진성이 리그에 참가하지 못한다고 해도 원래의 선수 구성으로 리그에 임할 생각이었다. 한혜연과 곽현호가 개인전에 참가하고 나머지 선수들이 단체전에 참가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 진성아!” “아주머니, 저 괜찮아요.” 진성은 현준 어머니의 금방 눈물이라도 뚝뚝 떨어뜨릴 것만 같은 얼굴에 씩씩하게 대답했다.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지금 눈앞의 아주머니처럼 자신을 보며 슬퍼했을 거라는 생각에 진성은 조금 눈시울이 뜨거워졌지만 꾹 참고 막 군대에서 제대한 군인처럼 씩씩한 모습을 보였다. “뭐가 괜찮아? 얼굴이 반쪽이 다 됐네. 여기 병원에서 나오는 음식은 그리 맛이 없을 거야. 내가 준비를 좀 해야겠네. 휴우... 진성아, 너 때문에 내가 오래 못 살 것 같다.” “아니요. 아주머니는 오래 사실 거예요.” “현준 아버지가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고 해서 내가 참았지만 네 모습을 보니 제대로 된 음식이 필요할 것 같다. 내가 실력 발휘를 해야지. 진성아, 뭐 먹고 싶은 것은 없니?” “저야... 뭐, 먹는 것은 가리지 않으니까요.” “그렇지. 내가 다 알아서 해 줄 테니 너는 잘 먹고 힘내서 빨리 일어나야 한다.” “네, 아주머니.” 진성은 아주머니의 친절하면서도 막무가내의 말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냥 아는 아주머니가 아니라 마치 가까운 친척과 같은 느낌이었다. 진성은 아주머니 뒤에서 웃고만 있는 진팀장, 현준의 아버지도 발견했다. 아마, 현준 어머니를 집에서 데려 오기 위해 같이 온 것이겠지. 진성은 자신보다 더 얼굴이 좋지 않아 보이는 진팀장을 보면서 슬쩍 농을 걸었다. “아저씨, 저보다 아저씨가 몸보신해야겠는데요.” “진성아, 그것은.. 나를 두 번 죽...이는... 것이다.” “예? 아... 하하하하.” 진성은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진팀장을 노려보는 현준 어머니의 모습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이미 한 번 죽은 모양이다. 진성은 병원 자체는 생소했지만 현준과 현준의 부모님이 병실에 같이 있자 정말 집과 같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진성아, 괜찮냐?” “아, 재필이 형!” “나도 사람이다. 멀쩡한 사람이 서 있는데 없는 것처럼 만들어 버리니. 이거 원... 너 그러다 천벌 받는다.” “천벌이요? 이미 받았는걸요.” “뭐? 하하하. 그래. 액땜했다고 생각해라. 진성아, 내가 여기에 왜 왔을까?” “......... 무슨 다른 일로 오신 건가요?” “하하하. 그렇게 긴장할 필요는 없다. 손님을 모시고 왔으니까.” “손님?” “진팀장님, 모시고 와도 되겠습니까?” “그래. 그러게나.” 서재필은 깔끔한 세미 정장을 입고 있었다. 진성과 얘기할 때는 평소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지만 진팀장에게 말할 때는 아주 정중해서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진성은 서재필이 말한 손님이라는 말에 의아해 했다. 손님이라니. 서재필이 밖으로 나갔다가 곧 들어왔는데 진성은 놀라고 말았다. “왕 어르.. 아니, 왕 아저씨?” “허허허허. 진성아, 괜찮아 보이기는 하다만 정말로 괜찮냐?” “네, 그냥 참을 만한데.. 왕아저씨는 여기에 어쩐 일로?” “허허. 이거 섭섭한데. 대만에서 진성이 너를 보려고 이렇게 날아왔는데 어쩐 일로 왔다니. 그게 할 소리냐?” “아.......” “감탄은 그만 하고 또 누가 왔는지 잘 보거라.” 진성은 검버섯이 있는 왕현추 뒤로 두 명이 서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 사람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얼굴에 비해 몸이 아주 좋은 노인이었다. 바로 팔괘장의 달인 손주황과 일본 거합도의 대부 요시히로 데카츠였다. 진성은 정말 놀랐다. “아..... 손 어르신, 요시히로 어르신?” “허허허. 얼굴을 보아하니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구먼. 몸조리나 잘 하게나.” 왕현추가 손주황의 말을 중간에서 통역했다. 진성은 무슨 일인지 몰랐다. 단순히 자신을 문병하러 온 것인가? 유맹에서도 최고의 위치인 손주황이 아직 30도 되지 않은 젊은 유맹의 새로운 멤버가 침상에 누워 있다고 멀리 한국까지 날아온 것일까? 진성은 알 수가 없었다. “..어.. 어떻게?” “어떻게라니? 진성이 네가 총탄에 맞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궁금해서 찾아왔지.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와보는 게 더 좋지 않겠나?” “아.....” 손주황의 말에 진성은 정말로 이런 대단한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문병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미 80이 넘은 손주황이 몸을 움직여 비행기를 탄다는 것은 그리 쉽게 흘러 넘길 수만은 없었다. 데카츠 역시 마찬가지였다. 진성은 너무도 고마웠다. “.. 손 어르신, 요시히로 어르신, 왕 아저씨... 감..사드립...니다.” “허허허. 어려운 일을 당하면 사람의 마음이 조금은 열린다고 하더니만, 그 말이 참말이었군. 평소에 나이에 비해 너무 성숙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그래도 그 나이에 맞구먼. 그렇지 않은가? 현추?” “손 형님 말씀이 맞습니다. 저 역시 이렇게까지 당황하는 진성의 모습은 처음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이런 일 생기면 또 와봐야겠네요.” 진성의 말에 손주황을 비롯해 왕현추와 데카츠까지 농을 이었다. 지켜보고 있던 서재필부터 병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왕현추의 통역을 듣고는 만면에 미소를 가득 떠올렸다. 특히 진팀장과 현준 그리고 현준 어머니는 진성에게 저렇게 가까워 보이는 분들이 있음에 조금 놀랐지만 진성에게 좋은 일이라 기뻐했다. 진성은 너무 좋았다. 현준 어머니가 푸짐하게 음식을 싸와도 진성 자신이 먹는 부분은 얼마 되지 않지만 거의 빠지지 않고 문병 와서 여러 가지 일을 말해 주는 사람들, 진팀장과 현준, 유맹의 사람들, 프로팀 팀원들이 있어 아픈 줄도 모르고 시간을 보냈다. 저격 사건 생각을 하면 아직도 욱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누군지 모르는 그 사람으로 인해 진성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얼마나 위해 주는지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어떤 때는 심지어 그 저격범이 고맙게 여겨질 때도 있었다. “이제 모일 사람은 다 모였으니,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전에 모였던 멱치기의 달인 송대천의 집에 다시 모인 유맹의 멤버들 가운데 왕현추가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모두들 진성의 저격사건에 대한 대략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왕현추의 연락을 받았기에 알았지만 이렇게 모여서 듣는 것과는 달랐다. 자리에는 유맹의 최고 연장자인 손주황을 비롯해서 팔극문의 맹가위와 왕현추, 형의권의 고수인 황상동과 일본 거합도의 대부인 요시히로 데카츠, 유공술의 달인인 대머리 노인 조맹현까지 다 모였다. 진성을 제외한 모든 유맹의 멤버들이 다 모인 자리였다.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미국의 라스베가스에서 우리 그룹의 막내인 진성이 저격을 받아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총탄은 진성의 왼쪽 가슴을 정확히 맞았지만 천운으로 진성은 가볍지 않은 부상이지만 그래도 목숨은 건질 수 있었습니다. 진성은 한국으로 돌아왔고 지금은 병원에서 치료 중에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왜 진성을 저격한 것일까? 누가 저격한 것일까? 바로 그 점입니다.” 잠깐 조용히 있던 왕현추는 차를 한 모금 마신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결론을 얘기하면 중국의 차이나 모터스 회장 이장령의 손자인 이주방이 미국으로 넘어가 홍콩의 마피아들이 소개해 준 폭력조직과 만나 진성에 대한 암살을 의뢰한 것으로 보입니다.” 왕현추의 말에 좌중에는 조용하지만 뜨거운 열기가 치솟았다. 모두들 이장령이 유맹에 가입하고 싶어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손주황이 입을 열었다. 손주황의 말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 이장령의 개입여부는?” “현재의 상황을 봐서는 이주방의 독단적인 일 같습니다. 이장령이 전면적으로 개입했다면 그렇게 허술하게 일을 처리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계속 하지.” “처음에는 이주방의 주도와 누군가 도와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미국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런 의뢰를 할 수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진성의 저격 현장 조사로 인해 드러난 저격수의 수준이 이주방이 폭력조직에 건넨 만달러로는 불가능한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주방은 거의 2류, 3류의 의뢰를 했는데 실제로 진성에게 가해진 저격은 최고 수준, 1류였습니다.” 왕현추는 의도적으로 잠깐 말을 하지 않았다. 다른 유맹의 멤버들이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시간을 준 셈이었다. 끝부분에 앉아 있던 대머리, 조맹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 그러면 이장령의 손자가 일종의 희생양이라는 말씀입니까?” “맞다. 이주방에게도 진성을 해꼬지 할 만한 마음은 있었지만 진짜 그 의뢰를 한 사람은 따로 있다는 말이지.” “아...... 그러면 그 진짜 의뢰를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계십니까?” “아니, 다만 그 저격수가 알렉스 티먼이라는 사람이라는 것만 알고 있지.” “알렉스 티먼?” “잘 모르지만 저격에 관한한 최고라는 사람이더군.” 왕현추와 조맹현의 대화가 이어지자 가만히 있던 맹가위가 말문을 열었다. “문제는 그 알렉스 티먼이라는 사람의 신병을 확보하는 일과 누가 의뢰를 한 것인지 그리고 왜 그런 의뢰를 한 것인지를 알아내는 것이겠구먼.” “네, 정확합니다. 사실, 천지회의 화천극을 통해서 지금 알아보고 있지만 정보력의 한계가 있습니다. 게다가 상대는 FBI에게도 어느 정도 압력을 줄 수 있을 만한 위치에 있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오늘 이 자리에 오시게 했습니다.” 잠깐 생각을 한 데카츠가 궁금한 듯 물었다. “어떻게 할 생각인가?” “제 생각이지만 평생을 무술을 수련했던 우리 유맹의 멤버들이 직접 그런 인물을 상대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상대는 그런 방면의 전문가일 테니까.” “그래서, 우리도 그런 인물을 상대할 만한 전문가를 전면에 내세우고 우리들은 그런 사람에게 전폭적으로 힘을 실어주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음........ 그런 인물이라......” “너무 많은 사람이면 또 서로 간에 혼선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독자적으로 2,3 명에게 그 일을 맡겼으면 합니다. 상대는 미국인입니다. 그리고 안전한 미국에서 지금도 자신이 안전하다고 믿고 있을 겁니다. 아시아라면 별로 힘들이지 않고 상대할 수 있을지 몰라도 미국에서는 사실 많은 제한이 있습니다.” “그게.... 좋은 방법이겠군.” “되도록이면.... 미국에서 활동했거나 활동한 인물이 좋을 것 같습니다. 미국 밖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은 우리 유맹이 처리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 문제는 미국 내에서 어떻게 상대를 찾아낼지.. 바로 그 부분이니까.” 데카츠와 왕현추의 대화를 통해 나머지 유맹의 멤버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현실적으로 아시아에서 영향력이 대단한 유맹이라 할지라도 미국이라면 얘기가 달라졌다. 동양인을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밀과 정보의 취급을 동양인에게 잘 맡기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 벽을 넘어서려면 전문가가 필요했고 그 전문가는 미국에서 활동하기에 그리 어려움이 없어야 했다. 모두들 골똘히 생각했다. 자신이 아는 사람이나 자신이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사람 중에서 그런 사람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쉽게 적당한 사람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 모두들 생각을 정리하셔서 내일까지 제게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일을 제대로 하려면 정보가 필요하니 이제까지 모았던 정보를 공유하도록 조치하기 위해서입니다.” 왕현추의 말은 당연했다. 맡은 일은 상당히 저돌적으로 처리하는 왕현추의 스타일은 모두들 알고 있었다. 다른 말은 전혀 없었다. 분위기가 무겁게 느껴지자 왕현추는 자신에 찬 소리로 말했다. “미국에 있는 상대에 비해 우리는 유리한 점이 딱 하나 있습니다.” “.... 그게 뭔가?” “상대는 우리가 움직이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진성이 유맹의 멤버라는 사실은 여기 계신 분들을 제외하고는 몇 사람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유맹의 존재는 미국과 같은 곳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러니, 상대의 빈틈을 노리기가 훨씬 쉽겠지요.” 유맹의 멤버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들이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전문가를 찾기 시작했다. 더위도 한풀 꺾였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조금씩 불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황금빛으로 물든 들녘은 추수를 기다렸다. 사람들의 마음은 그런 풍요로움으로 만족하는 그런 계절이 다가왔다. 한동안 떠들썩했던 게이머 스키피오의 저격사건도 시간과 함께 조금씩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졌다. 미국에서 미궁으로 빠져버린 사건의 수사에 한국의 네티즌들은 분노했지만 그런 사이버 테러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흡!” 진성은 팔괘장의 보법을 수련하고 있었다. 병원에서 퇴원하고 나서 현준의 집으로 가려고 했던 진성은 왕현추와 손주황이 한국에 머무는 바람에 사부 유조의 집으로 가게 되었다. 팔극문의 제자인 전주륜과 손대강 그리고 오전현이 사부 유조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전주륜은 왕현추의 제자로 예전에 진성과 손을 섞은 적이 있었던 바로 그 무술가였다. 손대강은 이제 나이 19으로 전주륜의 제자였고 마지막 오전현은 맹가위가 한국으로 유조를 만나러 왔을 때 같이 왔던 맹가위의 제자였다. 하루에 한 번씩 병원에서 의사가 왕진을 다녀갔지만 진성은 빠르게 회복했다. 전문 의사의 판단이 생활은 할 수 있지만 문명 온라인의 프로 리그와 같이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해 내기는 힘들다는 소견서를 작성해서 자소 소프트의 프로팀은 진성의 리그 참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진성은 그런 결정에 할 수 있다는 생각도 했지만 손주황과 왕현추가 한국에 남은 이유가 바로 진성에게 팔괘장과 팔극권의 진수를 전수해 주기 위한 것임을 알고는 곧바로 마음을 바꾸었다. 프로 리그는 다음에 참가해도 별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손주황과 왕현추에게 배울 무술의 정수는 다시는 없을지도 모를 기회였다. 그리고 현준과 현준 어머니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진성을 찾아 조금도 외롭거나 하지 않았다. 진성은 아직 몸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천천히 움직이며 손주황이 가르쳐 주는 팔괘장의 기본 보법인 창니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원래는 3년 동안 창니보만 수련해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진성 뿐 아니라 손주황에게는 그리 긴 시간이 없었다. “발바닥은 땅에서 거의 떨어지지 않게 움직여라. 허리가 조금 올라갔다. 시선은 항상 원의 중심을 보도록 해라. 속도가 떨어졌다. 빨리 움직여라.” 수련하는 뜰에 커다란 원을 그려놓고는 진성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진흙을 걷는 느낌과 비슷하도록 움직였는데 발은 바닥에서 거의 떨어지지 않았다. 처음에 창니보를 시작했을 때, 진성은 팔극권이나 팔극신권과는 너무나도 확연하게 다른 팔괘장의 움직임에 적잖이 당황했다. 상대의 거리로 들어가 가까이 접근해서 상대의 공격을 아예 봉쇄하거나 직접적인 타격을 줘서 상대를 불능 상태로 빠뜨리는 것이 팔극신권의 공격법이었다. 하지만 팔괘장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적보다 먼저 움직이고 적이 강하면 부드럽게, 적이 오면 물러나고 적이 물러나면 나아간다. 바로 팔괘장의 요체였다. 팔괘장은 접근단타의 팔극권과는 달랐다. 마치 물 흐르듯 끊임이 없는 무술이었다. 팔괘장을 수련하면서 진성은 자신이 가진 무술인 팔극신권이 팔극권보다는 부드러웠지만 팔괘장에 비해서는 딱딱할 정도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렇다고 팔극신권이 팔괘장보다 못한 기술이라는 말은 아니었다. 단지 그 쓰임이 달랐다. 진성은 팔괘장의 창니보를 연습하면서 싸움, 전투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팔극신권이 일격필살의 고급기술이라면 팔괘장은 그야말로 끊이지 않는 공격과 동시에 수비의 연속이었다. 또한 팔괘장의 보법은 진성의 비교적 굳었던 하체를 풀어주어 조금 더 능동적이면서 유연한 동작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손주황과 왕현추는 진성의 움직임을 보면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적어도 3년은 집중적으로 연마해야 하는 창니보를 이런 단 시간에 완벽은 아니지만 그에 가깝도록 수련할 수 있다는 사실은 믿기 힘들었다. 이미 어느 정도 완성된 무인이었기에 충분히 그 오랜 시간을 줄일 수 있으리라 예상했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지, 열흘도 되지 않는 시간에 다음 단계로 넘어갈 정도로 창니보를 수련하다니. 손주황과 왕현추는 서로를 바라보며 할 말을 잊었다. “...허허. 하긴, 현추, 이곳에 와서 처음 진성과 했던 대련이 기억나나?” “아..... 그.... 대련.. 음... 그렇군요.” 왕현추는 진성의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대뜸 대련을 하자고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몸이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지만 조금 움직일 수 있게 되자 진성은 왕현추와의 말도 안 되는 대련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 보겠지만 왕현추는 말로 설득할 수 있는 부류의 사람이 아님을 진성은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출입은 제한되었고 오직 손주황만 도장에 남아 왕현추와 진성의 대련을 지켜보았다. 손주황 역시 왕현추가 아무리 봐준다고 해도 진성이 힘들 것으로 생각했다. 대련이라기보다는 간단한 수련정도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손주황을 놀라게 만들었다. 진성의 몸의 상태로 아직 달인인 왕현추의 동작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했지만 손주황 자신조차 느끼지 못했던 왕현추의 공격 타이밍을 진성이 너무도 자세하게 그리고 정확히 알고 있었다. 겉보기로는 그다지 스릴이 없었지만 손주황의 손에는 땀이 가득했다. “.....휴우... 내가 죽기 전에 이런 좋은 대련을 보기는 봤군. 허허허.” 게다가 손주황은 그 대련 같지 않은 대련을 끝낸 진성의 마지막 공격을 잊을 수 없었다. 대련이라기보다는 그냥 두 사람이 어울려 몸을 움직이는 정도였지만 진성의 마지막 공격은 왕현추 뿐 아니라 손주황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고 위에서 아래로 내리친 수도(手刀)가 왕현추의 막는 팔을 지나 가슴께에 닿았을 때, 손주황은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왕현추의 방어는 확실했다. 하지만 갑자기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진성의 공격을 막기는 불가능했다. 눈앞에서 창니보를 계속 연마하는 진성을 보면서 왕현추와 손주황은 그냥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경지를 이미 초월해 버린 젊은이의 모습을 바라보는 왕현추와 손주황의 얼굴에는 조금의 씁쓸함과 더불어 만족감, 뿌듯함이 가득했다. 진성에게 축지법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지만 불가능한 이야기이거나 그 시간과 노력에 비해 수련의 성과가 미비하다는 결론을 내렸던 손주황으로서는 새로운 세계를 본 것만 같았다. 축지법이라니. 게다가 그것을 팔극신권에 접목해 100% 막을 수 없는 타격을 할 수 있다니. 정말 꿈과 같은 무의 경지였다. 하지만 정말 손주황을 놀라게 만든 것은 진성이 이룬 무의 경지가 아니었다. “이 경지요? 음..... 그다지 만족하지 못합니다. 지난번처럼 멀리서 총을 쏘거나, 아니면 전쟁터에서 폭탄을 맞았다면 어차피 죽는 것은 같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총에 맞아도, 폭탄이 터져도 죽지 않는 인간이 되고 싶다는 것은 아닙니다. 어차피 죽는 것은 똑같으니 이런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서 그다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른 사람과 맞붙는다면 이기겠지요. 하지만 그게 다입니다. 게다가 사부님께서 남겨주신 그 유언은 제 무술의 경지가 높아질수록 더 멀어지는 것 같습니다......” 진성이 넋두리 비슷하게 말한 내용은 손주황의 머리를 강타했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경지를 이룬 손주황 자신이 생각하는 최고의 무술가가 바로 앞에 있는데 그 입에서 나온 말은 그 경지가 별거 아니라는 얘기였다. “허허허허.....” 손주황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릇이 다른 것일까? 손주황은 언젠가 왕현추가 진성을 팔극문으로, 아니 자신의 제자로 받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하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그 때는 잘 몰랐지만 지금에야 그런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진성의 사부라는 유조라는 사람 역시 보통 사람은 아니라 생각했다. 손주황은 진성을 보면서 신기함마저 느꼈다. 30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이룬 믿기 힘든 무의 경지, 그와 더불어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자신은 잘 모르지만, 프로 게이머라는 직업을 가진 유명인. 웃음이 나왔다. 보통 사람은 한 가지도 이루기 힘든데 진성은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하고 있었다. 예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직접 같이 생활해 보니 그런 마음은 더 커졌다. 손주황은 진성의 최대 강점은 어떤 일을 추구할 때, 그 일에 파묻히지도 방관하지도 않는 점이라 생각했다. 그것도 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거의 본능적으로 그런 균형감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내심 부러웠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무술, 그 하나만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온 손주황은 진성의 젊은 나이와 앞으로 더 뻗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정말로 부러웠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한 그런 경지를 죽기 전에 본 것만 해도 행운이라 여겼다. “손 어르신, 이 정도면 될까요?” 진성의 말에 손주황은 자신만의 상념에서 빠져 나왔다. 손주황은 이 젊은 천재의 몸에서 자신의 팔괘장이 멋있게 펼쳐짐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그래?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 볼까?” 새벽에 일어난 진성은 약간 서늘함을 느꼈다. 완연한 가을이었다. 진성은 보통보다 30분가량 더 일찍 일어났다. 그 이유는 바로 팔괘장 때문이었다. 팔극진결로 시작해 무명검법과 축지법으로 수련을 마쳤던 진성에게 한 가지 더 늘어난 팔괘장 덕분에 진성은 잠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진성이 깨어 있을 때, 더 피곤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어느 정도 완성되어 가고 있는 몸이었기에 그 정도의 피곤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휴.. 휴..” 호흡을 가다듬은 진성은 가볍게 팔극진결을 펼치기 시작했다. 진성에게 있어 팔극진결은 결코 뗄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은연중 진성의 평소 움직임도 팔극진결의 묘리에 따라 움직일 정도로 팔극진결은 진성의 몸에 녹아 있었다. 하지만 진성은 여전히 팔극진결을 수련했다. 이제 수련의 첫 시작은 항상 팔극진결이었다. 진성의 팔극진결은 그야말로 평범 그 자체였다. 처음의 그 격렬한 것도, 익숙해져서 너무 부드러워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동작도 아니었다. 배운지 얼마 되지 않은 초보의 움직임이라고 할 만큼 빈틈도 보였지만 그 모든 것들이 조화를 이룬 것이 바로 진성의 팔극진결이었다. “휴우... 이 정도면 되겠지.” 진성은 팔극진결을 마치고는 목검을 집어 들었다. 진성은 드디어 무명비검(無名飛劍)의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무명소검의 부드러움과 무명대검의 패도적인 기세에 경의 일체로 인한 공격을 어느 정도 자신의 의지로 제어할 수 있었다. 무명비검은 바로 그런 무명소검과 무명대검의 기예를 공간을 가르는 기예로 승화시키는데 그 완성이 있었다. 진성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부드러움과 날카로움을 조화시킬 수 있었으며 그와 동시에 공격의 타격 순간, 경의 일체를 이용해 공간을 뛰어넘어 상대의 방어를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아직, 완벽히 무명비검을 익혀 그 다음 단계인 무명기검으로 넘어갈 수는 없었지만 이제 막바지라는 것을 진성은 느낄 수 있었다. 한참을 목검으로 수련한 진성은 목검을 한곳에 두고는 가만히 서서 축지법이자 경의 일체를 느끼기 시작했다. 진성은 라스베가스의 그 사건으로 인해 자신에게 변화가 있음을 알았다. 한 가지는 축지법을 수련하다가 느낀 일정한 벽을 뛰어넘은 느낌이었다. 그로 인한 특별하고 급격한 향상은 아니었지만 진성은 스스로 벽을 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청경의 변화였다. 그 사건 이후로 그 저격 때 느꼈던 그 집중적인 감각에 대해 생각했던 진성은 아직 익숙하지 않았지만 마치 날이 선 칼과 같은 날카로운 감각을 의식적으로 재연할 수 있었다. 심지어 그 수련에 집중했을 때는 전혀 들리지 않던 바람 소리까지 들을 때도 있었다. 진성은 전과는 전혀 다른 청경에 자신이 새로운 이름, 첨경(尖勁)으로 불렀다. 진성은 한동안 고생했지만 그로 인해 얻은 것도 있어 고난 뒤에는 좋은 일이 있다는 옛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축지법 수련을 끝낸 진성은 미리 그려 놓은 커다란 원의 가장 자리에 섰다. 자세는 낮추되 허리는 세웠고, 몸은 원의 중심을 바라보지 않게 만들었지만 시선은 항시 원의 중심에 있을 가상의 상대를 주시했다. 진흙을 걷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진성은 팔괘장의 기본 무리(武理)가 바로 상대와 맞부딪치는 게 아니라 상대의 힘을 이용해 들어오면 멈추고 멈추면 나가는 것임을 수련을 통해 몸으로 깨달았다. 진성은 이제까지 자신이 치른 실전과 비슷한 대련에서 먼저 공격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 상대의 공격의 틈을 이용해 제압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교적 자신의 경지가 상대보다 높은데다가 상대의 급한 공격으로 인한 허점이 승리의 원동력이었다. 만약 자신이 경험도 없이 무턱대고 공격했다면 반대의 결과가 나왔을 수도 있었다. 진성은 팔극신권이 팔극권보다는 부드러운 면이 있지만 그 공격 자체는 직선적이어서 공격이 실패했을 때는 곤경에 처할 수도 있음을 알았다. 그에 대한 대처법이 바로 팔괘장이었다. 손주황의 팔괘장은 진성의 팔극신권을 더 부드럽게 하지만 더 강하게 만들었다. 강하기만 한 소나무가 아니라 강하면서도 유연해 쉽게 꺾이지 않는 나무가 되었다.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격이었다. 게다가 아직은 그 성과가 드러나지 않았지만 진성이 꾸준히 팔극진결과 평소의 움직임에 경의 일체, 축지법을 응용하고 있기에 어쩌면 진성은 팔극신권 자체에 축지법을 접목시켜 새로운 무술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무술을 하는 사람이라면 상상의 경지일 그런 경지에 가까이 도달한 진성이었지만 진성은 묵묵히 수련에만 전념했다. 자신의 경지에 대한 놀라움과 자만은 찾아보기도 힘들었다. 오히려 사부 유조의 유언이 더 꿈만 같아 진성은 답답해하고 있었다. 조금 더 빨리 사부가 말한 그 경지에 도달하고자 진성은 자신을 매질하고 있었다. 진성의 수련을 지켜보고 있던 왕현추와 손주황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팔괘장 특유의 기술은 아직 가르치지 않았지만 팔괘장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보법과 여러 가지 팔괘장의 고급 전투법을 가르치자 엄청난 속도로 변하는 진성의 경지에 왕현추와 손주황은 이제 당황을 넘어 경악할 정도였다. 일취월장이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눈을 씻고 봐야할 정도여서 손주황은 오히려 걱정이 되었다. 게다가 스스로 너무 재촉하는 듯한 모습도 보여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 현추, 진성의 성장 속도가 너무 빠른 것 아닌가?” “무슨 말씀입니까?” “진성은 아직 자신이 이룬 그 경지에 대한 자각이 별로 없는 것 같다는 말일세. 지금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누구도 걸어보지 못한 길을 가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아무도 충고해 줄 수 없겠지. 어느 순간인가 무에 대한 회의가 생긴다면? 아니, 스스로 성장에 대한 함정에 빠진다면?” “...... 설마 그럴까요?” “아직 어리니까.” “... 그렇군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손주황은 상식을 뛰어넘는 진성의 수련 속도에 적지 않게 걱정을 했다. 과한 것은 오히려 좋은 않는 법이다. 손주황은 진성에게 더 이상의 팔괘장 기술을 가르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진성에게도 이런 생각을 알려줘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아침 식사 후에 손주황과 왕현추는 진성과 같이 차를 나누었다. “진성아, 내가 할 말이 있는데 들어보겠느냐?” “네, 어르신, 말씀하십시오.” “허허. 너무 긴장할 필요는 없다. 그냥 늙은이의 쓸데없는 걱정일지도 모르니까. 진성아?” “네, 어르신.” “잘 들어라. 내가 볼 때, 진성이 너의 무술 수련 속도는 정말..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빠르다. 그 나이에 이런 경지에 이런 것도 기적이지만 상식을 뛰어 넘는 수련 속도는 대단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단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게 더 걱정이다. 나는 네 수준, 네 경지가 이미 나와 현추의 경지를 넘어섰다고 생각한다. 유의 경지가 아니라... 뭐라고 해야 할까? 환(幻)의 경지라고 할까? 내 추측이지만 네 무술, 팔극신권 뿐 아니라 그 무명검법과 내게서 배운 팔괘장 모두 네 안에서 변하고 앞으로도 변할 것이다. 물론 나로서는 너를 통해 이런 경지를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음이 너무도 기쁘다. 그런데 많은 나이도 아닌 네가 너무도 빠른 성장으로 인해 놓치는 게 있지는 않을까 걱정이란다. 보다 더 많은 것을 생각하고 많은 것에 의문을 가질 나이에 그 단계를 초월함으로 인해 무술의 외곬수가 되지는 않을까, 무술을 단 한가지의 면으로만 보지 않을까 걱정이다.” “.....” 진성은 손주황의 말을 알아듣기 힘들었다. 자신 역시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을 해서 지금의 경지에 이르렀기에 쉽게 인정하기 힘들었다. “... 진성 너도 노력했겠지만 나와 현추는 평생을 무술 하나만을 위해 살아왔다. 결코 수련하는 시간도 적지 않았고 하루 종일 무술에 대한 생각만 할 때도 많았지. 그에 비하면 진성, 네 경우는 하늘이 내린 재능이다.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아... 네.” 진성은 손주황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나름대로는 열심히 했지만 무술가들의 노력에는 스스로 미치지 못함을 알고 있었다. “진성아, 나와 현추에게 있어서 무술은 인생의 목표이자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도구다.” “네?” “무술의 그 정신, 그 인간의 완성과 우주와의 조화는 내 인생의 목표지만 무술의 기예와 수련 방법은 바로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진성, 네가 이룬 것의 대부분도 바로 그 도구일 뿐이다. 진정한 무술을 제대로 이루려면 그 근본에 다가서야 한다. 내 생각에는 곧 진성 너는 기(技)의 정점에 오를 것이다. 그 후에는 눈에 띄는 성장은 보기 힘들겠지. 또는 무술에 대한 회의가 생길 때, 진성아, 무술의 근본, 목표를 기억해라.” “기의 정점?” “그것이 무도(武道)다. 네가 추구해야 할 것은 무도임을 명심해라.” 진성은 사부 유조의 말이 생각났다. 기의 정점이라. 거기에 무도라는 말을 들은 진성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사부 유조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기억이 났다. 사부는 힘으로부터의 자유라고 말했다. 진성은 서서히 답답했던 마음이 사라짐을 느꼈다. 부상을 당한 후에 자신도 모르게 조급했던 마음이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진성의 상처는 많이 아물었지만 이미 진성의 리그 불참은 결정되어 있었다. 진성은 홀가분하게 집에서 상처 회복과 수련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왕현추가 그런 진성을 불렀다. “왕 아저씨, 진성입니다.” “들어오너라.” 진성은 안으로 들어갔다. 둘러보니 왕현추와 손주황이 앉아 있고 문 근처에 젊은 사람이 한 명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자세히 보니 아는 얼굴이었다. 초췌하긴 했지만 확실히 아는 얼굴이었다. “아..... 그 중국 게이머?” 바로 이주방이었다. 미국에서 돌아와서 잠깐 동안 상하이에서 머물었던 이주방이 드디어 왕현추에게로 온 것이었다. 이주방의 얼굴은 진성이 예전에 봤을 때보다 몰라보게 얼굴 살이 빠진 상태였다. 왕현추를 비롯해 유맹의 멤버들은 진성은 물론이고 자소 소프트의 관련자에게 아직 이주방의 일과 그 베일에 가려진 인물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 미국의 형식적인 수사본부는 곧 철수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고 한국의 정부도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아 사건은 흐지부지 종결될 예정이었다. 그런 상황이라 진성 역시 이주방에 대한 진실을 알 수가 없었다. 왕현추는 진성은 이 사건의 진실을 알아야 된다고 생각해서 진성을 불렀던 것이다. “이 녀석을 알겠느냐?” “네, 일본에서도 보고..... 중국에서도 본 그 게이머인데요. 이주방이라고 한 것 같은데요.” “정확하다........... 이주방!” “..네....... 어르신..” 왕현추의 추상같은 호통에 딴 곳을 쳐다보던 이주방은 깜짝 놀랐다. 왕현추는 그런 이주방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한 번 보더니 곧 진성에게 그 동안의 일과 유맹에서 조사한 것, 그리고 그 대처 상황까지 자세히 말했다.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이 바로..... 네가 저격을 당한 이유다. 뭐, 확실히 그 인물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곧 왜 그런 일을 꾸몄는지, 누구인지 밝혀질 거다. 시간문제니까.” “....... 사실인가요?” “사실이다.” 진성은 믿을 수가 없었다. 게임으로 인한 다툼이었다. 게다가 잘못은 자신이 했으면서 미국까지 와서 자신을 죽이라고 청부살인 의뢰를 하다니. 도저히 믿기 힘들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왕현추가 진지한 얼굴로 확실하다는 말을 하자 진성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이주방이 아닌 다른 인물이 있어 최고의 저격수를 동원해 중간에서 농간을 부려 자신을 해하려 했다는 사실에 진성은 소름이 돋음을 느꼈다. 진성은 도저히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 왕 아저씨, 도대체 이유가 뭔가요?” 진성의 말에 서려 있는 분노를 느낀 왕현추는 솔직하게 말했다. “아직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 단지, 이제까지 밝혀진 사실과 정황을 볼 때, 몇 가지 정도는 추측해 볼 수 있다.” “말씀해 주세요.” “휴우.... 그래. 첫 번째는 미국의 프로 리그와 관련해서 미국 내에서 그 오락, 아니 게임에 대한 홍보를 하기 위해서 이와 같은 말도 안 되는 짓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명 온라인이라는 그 게임에서 진성 네가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기에 그것만으로는 어딘가 부족하다. 두 번째는 미국의 가상현실 개발사들의 컨소시엄이 있는데 그곳에서 밀리터리 아트의 중요한 개발자이자 테스터인 진성 너를 노렸을 수도 있다. 이것 역시 그 컨소시엄의 힘이 FBI를 움직일 정도는 아니라 판단하기 때문에 역시 이유로 조금은 부족하다. 세 번째는 최근의 한국 게임 산업 뿐 아니라 한국의 첨단 산업이 미국에서 엄청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상황에 미국의 거대 기업들, 특히 첨단 군산복합체가 경고의 의미로 이번 일을 계획했을 수도 있다. 너도 생각할 수 있다시피 조금 비약이 있지. 아직까지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물론 사람의 마음은 알 수가 없기에 그 중 누군가 미쳐서 이런 일을 벌인지도 모른다.” “.... 휴우... 그런가요?” 진성은 일이 자신의 생각을 넘는 엄청난 규모로 커지는 것 같아 내심 걱정이었다. 진성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이주방을 보고는 왕현추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주방은 어떻게 여기에....” “내가 차이나 모터스의 회장인 이장령에게 이주방을 살리고 싶으면 내게로 보내라고 했지. 그리고 그 약속대로 이주방은 이곳으로 오게 된 거고. 진성아, 어떻게 할까?”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3자인 내가 이 녀석에게 뭐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네 결정에 따라 이 녀석을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말만 해라. 죽이는 것 빼고는 모두 다 된다. 허허허. 잔인한 얘기지만 네가 한 팔을 원한다면 이 녀석은 이제부터 외팔이로 인생을 살아야 할 것이다.” 진성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자신에게 팔을 자르라는 말만 하면 그대로 된다는 무서운 얘기를 하는 왕현추의 모습에 오싹했다. 진성은 아직도 이 사람, 이주방이 그런 짓을 했다는 말이 실감나지 않았다. 왕현추는 그런 진성의 반응에 말을 이었다. “진성아, 네가 내 말에 거부감이 올 수도 있지. 하지만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다. 아무리 세상물정 모른다고 해도 사람의 목숨을 돈으로 청부살인을 하려고 했다면 죽여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 비록 지금 세상에 사사로이 사람을 죽일 수는 없지만 그 잘못한 것이 가벼워질 수는 없다. 나는 이미 이 녀석의 목숨은 건드리지 않기로 약속했지만 몸의 나머지 부분도 그대로 둔다고 말한 적은 없다.” “그... 그래도.” “다른 사람의 생명이 소중함을 모르는 녀석은 그 정도도 약과다. 자신이 아파봐야 알 수 있지.” 그렇다고 해도 진성은 그에 동조하기는 어려웠다. 아니, 무척이나 화가 끊어 올랐지만 자신의 말 한마디에 한 사람의 팔이 떨어져 나간다는 것은 결코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 그냥 그 죄에 합당한 감옥으로 보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감옥? 그래, 알겠다. 하지만 진성아 잘 생각해봐라. 만약에 이주방이 의뢰해서 네가 아니라 딴 사람이었다면 그 사람이 살아 있을 수 있을까?” 왕현추는 진성의 말을 듣고는 이주방에게 말했다. 진성은 그 말을 듣고는 가슴이 뜨끔했다. 분명 자신이 살아난 것은 그 축지법 때문이었다. 만약에 현준이, 아니 팀원 중의 누구라도 총탄에 맞았다면 100% 죽음이었을 것이다. 진성은 소름이 돋았다. 비록 지금은 그 결과로 누구도 죽지 않았기에, 진성 자신의 일이기에 가볍게 생각했지만 자신이 아니라 딴 사람으로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했다. “이주방, 너는 여기 있는 진성에게 감사해야 한다.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으니까. 오전현!” 왕현추의 말에 밖에서 중년의 남자, 오전현이 들어왔다. “이 녀석을 그곳으로 보내라. 내가 다시 말할 때까지 절대로 그곳에서 못 나올 것이다. 네가 책임지고 매달 이 녀석의 상태를 나에게 보고해라. 알겠냐?” “네, 알겠습니다. 사숙.” “데리고 나가라.” “네.” 오전현은 빠르게 이주방을 데리고는 밖으로 나갔다. 이주방은 완전히 기가 죽은 채 오전현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할아버지인 이장령조차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이주방의 어깨는 더 처질 수밖에 없었다. “진성아, 이제 저 녀석은 걱정하지 마라. 적어도 10년은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곳에서 썩어야 할 테니까.” “......” 진성은 이주방보다도 그 알려지지 않은 인물에 대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어떤 이유이든 돈을 사람을 죽이려는 것도 모자라 또 다른 사람을 이용해 자신은 죄에서 벗어나려는 행위, 진성은 참을 수 없었다. 진성은 그 분노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 정도의 사람들을 자신이 상대하기 힘들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진성은 냉철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 언제쯤 그 베일에 가려진 인물에 대해 알 수 있나요?” “단언하기는 힘들지만 올해는 넘기지 않을 거다. 진성아, 네가 나설 필요는 없다. 그런 일에는 그쪽의 전문가들이 있으니까. 아마도 그 인물이든, 아니면 그 조직이든 진성 너를 건드렸다는 사실 하나로 인해 틀림없이 후회하게 될 거다.” “진성이 없으니 휴우..... 연습이 잘 되지 않네.” “저도 그래요. 진성이 형이 없으니 힘도 안 나요.” 곧 시작하게 될 국내 리그를 위해 자소 소프트의 프로 선수들은 최선을 다해서 연습하고 있었지만 진성의 공백은 생각보다 컸다. 한 사람의 선수가 아니라 은연중 팀에서 흔들리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연습을 이끌던 중심이 빠지자 그 여파는 다른 선수들에게까지 이어졌다. 매니저 서재필이 잘 다독거렸지만 단 기간에 그 공간이 메워지기는 힘들었다. 연습실에는 뭔가 나사가 하나쯤은 빠진 듯했다. “진현준, 성진규. 너희들 똑바로 못해? 이제 며칠이나 남았다고 이렇게 놀아? 또 진성이 핑계 대는 거지? 열심히 해서 못하는 것은 용서가 돼. 하지만 이렇게 제대로 하지도 않고 경기에 나가서 지면.... 나 안 참는다. 질 때도 있고 이길 때도 있지만 최선은 다해야지? 안 그래?” “네.. 그런데 힘이 안 나요.” “뭐?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려?” “......” 진규는 서재필에게 말했다가 그 노려보는 눈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서재필로서도 이런 사태는 예상하지 못했다. 진성이 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굉장히 컸지만 평소에 워낙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는 스타일이라 다른 선수들에게는 그리 큰 영향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그런 면이 팀원들에게 자극이 되었음이 분명했다. 서재필은 진성이 리그에는 불참한다고 하더라도 연습실에는 나오도록 할까 고민했다. 그 때였다. “열심히 하고 있네? 자, 이것 좀 먹고 해라.” “와. 진성이다.” “진성 오빠다.” “진성이 형!” 문을 열고는 두 손 가득 먹을 것을 들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진성이었다. 한동안 현준을 제외한 팀원들을 보지 못했고 몸도 움직일 만큼 나은 상태여서 진성은 회사로 나섰다. 물론 혼자가 아니라 당분간 진성의 경호원 역할을 하게 된 맹가위의 제자 오전현과 함께였다. 진성은 오전현과 함께 다니며 중국어를 더 확실히 배우고 있었다. 진성의 등장에 현준, 진규는 말할 것도 없고 혜연 그리고 과묵의 일인자인 곽현호까지 일어나서 달려올 정도로 뜨거운 반응이었다. 서재필은 그런 모습에 웃고 말았다. 맥 빠지는 분위기는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안녕하셨어요?” “당연하지. 이제 이렇게 다닐 정도로 몸은 괜찮은 거냐?” “게임해도 될 정도예요. 아직은 일주일에 두 번, 병원에 가야하지만 곧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요.” “그래도 조심해라. 워낙 그 부위가 부위인 만큼.” “네, 알겠습니다.” 서재필이 제일 걱정한 것은 당연히 진성의 건강이었다. 다행히 얼굴을 보니 좋아 보였다. 진성의 뒤에 누군가가 있자 서재필은 자연히 시선이 그쪽으로 갔다. “왕 할아버지께서 붙여주신 경호원이에요. 사실은 제 사형쯤 되는 분이에요.” “사형?” “네, 왕할아버지의 제자쯤 되니까요. 그리고 이 분은 바로 팔극권의 정통 계승자 중 한 분이거든요. 아저씨, 여기가 바로 자소 소프트의 프로 선수 연습실이에요. 이 분이 저희 프로팀 팀장 서재필씨에요.” 진성의 중국어도 꽤 괜찮아 보였다. 진성이 서재필에게 말하다 중국어로 말하자 오전현은 서재필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고 서재필 역시 고개를 숙여 답했다. 사람들은 진성이 가져온 먹을 것을 나누면서 그 동안의 얘기로 시간을 보냈다. 이때만큼은 서재필도 팀원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쉴 때가 있어야 열심히 연습할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 이상한 움직임이 있습니다. 이 주변에 갑자기 중국인을 비롯해서 동양인의 수가 급증했습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제 생각에 2배는 되어 보입니다.” “그래? 동양 원숭이들이 있을 곳이 없나보지. 그런 것을 꼭 보고할 필요는 없잖아. 정 걱정되면 걸어가는 한, 두 녀석 잡아서 무엇 하러 온 건지 물어봐. 그러면 쉽잖아? 괜히 일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맡은 거나 열심히 하라고.” “...네.” “자네, 오늘 여기서 무슨 모임이 있는 줄 아나?” “예? 모르겠는데요.” “당연히 몰라야지. 아주 중요한 모임이 있으니까 그런 이상한 걸로 괜히 긴장하게 만들지 말고 저기로 가서 자네가 할 일인, 손님 접대나 하라고.” 주방에서 요리를 배우며 홀 서빙도 하는 로버트는 유달리 근처에서 눈에 많이 띄는 동양인들의 모습에 이상한 생각이 들어 경비 책임자에게 말했지만 서빙이나 잘 하라는 말을 들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 짜증은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왔다. “... 콱, 무슨 일이나 생겨버려라.” 한낱 홀 서빙을 하는 웨이터인 로버트의 예언은 적중했다. 중요한 모임을 위해 비밀리에 모인 인물들의 회의가 시작되고 10분도 채 되기 전에 새크라멘토의 외곽에 있는 겉보기에 허름한 이 레스토랑은 순식간에 밀려든 복면을 한 남자들로 인해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지키고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어떻게 쓰러졌는지도 모르게 땅으로 머리를 박았다. 방어선은 단숨에 뚫리고 말았다. 레스토랑의 3층, 겉의 허름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최고급 가구들로 가득한 방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하는 말은 절대 비밀입니다. 현재 이곳, 새크라멘토에 있는 A를 신속하게 미주리 주의 스프링필드로 옮겨야 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두 분께서 이 일에 책임을 지고 처리해 주십시오.” “험험..... 알았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분들은 앞으로 시행될 계획을 위해 이제까지 시행해온 일에 대한 결과를 보고해 주시고 앞으로의 할 일에 대해 의논해 보도록 합시다.” “............” 뚱뚱하고 금발에 수염까지 기른 아론은 말로는 정중했지만 그 표정과 말의 억양에 거드름이 가득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아론의 거드름은 욕지기가 느껴졌지만 억지로 참을 수밖에 없었다. 앉아 있던 사람들은 금발의 뚱보 아론이 아부로 지금 이 자리까지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더 화가 치밀었다. “왜... 다들 안색이 좋지 않아 보입니다만...” “험..아... 아닙니다.” 아론은 사람들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한 때, 자신을 아부쟁이라면 손가락질하던 사람들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통쾌했다. 비록 자신의 등 뒤에서 욕하겠지만 아론은 개의치 않았다. 이제 입장이 바뀐 것이다. “와장창!” “모두 움직이지 마라. 움직이면 가슴에 바람구멍을 내어 버리겠다.” 문과 창문이 일제히 박살이 나면서 몇 명의 복면을 한 사람들이 눈 깜짝 할 사이에 들어왔다. 유창한 영어로 누군가가 엄포를 놓았다. 실제로 복면을 한 사람들은 권총을 들고 있었다. 말한 사람을 제외한 복면인들은 가만히 있는 사람들에게 접근해서는 모조리 무장해제 시켰다. “아론이 누군가?” “.......” “나는 참을성이 별로 없다. 아론이 누군가?” “....... 저... 저 사람입니다.” 복면인이 권총을 다른 사람의 머리에 대고 나직하게 다시 묻자 곧 대답이 나왔다. 복면인은 다른 복면인들에게 고개 짓을 했다. 그와 동시에 복면인들은 재빠르게 움직이면서 아론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을 순식간에 기절시켰다. 그다지 세게 치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방 안에 있던 사람들 중 아론을 제외하고는 모두 기절하고 말았다. “.... 누... 누구요?” “....... 조용히 시키고 데려간다.” 복면인의 말이 끝나자 곧바로 옆에 있는 복면인이 수도로 아론의 목을 치더니 빠르게 업고는 밖으로 나갔다. 15분도 되지 않아,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다. 복면인들이 사라지자 근처의 동양인들이 나타나더니 채 20분도 되지 않아 레스토랑 안과 밖에서 쓰러져 있던 모든 사람들을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레스토랑에 있던 사람들은, 요리사와 서빙 뿐 아니라 3층의 인물들까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목격자는 모두 사라졌다. TGP1(The Gamer Part 1) [157 회] 복수는 나의 것 "뭐라고? 아론과 함께 새크라멘토의 1거점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네, 그렇습니다. 연락이 되지 않기에 가 보았더니 그 거점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일만 하던 사람들까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목격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노인은 자신이 관리하는 조직에서 중대한 문제가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목격자조차 없다는 사실에 화가 나 마호가니 책상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그 소리에 앞에서 보고하던 은발의 호리한 중년 백인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말이 돼? 그렇게 많은 인원이 사라졌는데 목격자가 하나도 없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최대한 빨리 누가 그랬는지 알아봐!" "네, 알겠습니다." 은발의 중년인이 급히 밖으로 나가자 노인은 생각에 잠겼다. 한동안 특별한 문제도 없이 모든 것이 잘 돌아가는 상황에 기분이 좋았는데 이렇게 갑작스레 문제가 불거져 나오자 노인은 그 원인모를 불안감이 더욱 커졌다. "어떤 놈들이 이런 짓을 한 거지? 이 정도면 대단한 솜씨인데......" 아무리 외곽이라지만 단 한 명의 목격자도 없다는 말은 철저한 계획과 그에 걸 맞는 준비와 대담한 실행이 맞아 떨어져야지만 가능하다는 것을 노인은 알고 있었다. 노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능력 있는 인물이 생각나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을 알고도 이런 일을 벌일 만한 간 큰 사람도 그리 많이 없는데다가 그 목적을 알 수도 없었다. 인물이야 굳이 찾는다면 크고 넓은 미국에 많았지만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노인에게 알렉스 티먼의 문제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미국의 수사도 이미 종결된 상태였고 그 대상이었던 한국의 프로팀은 이미 귀국한 지 옛날이었다. 외교적인 문제도 어물쩡 넘어갔고 한국에서 압력을 가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기에 노인은 그에 관한 모든 일을 완전히 종결시켰다. 노인에게 강진성이란 존재는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었다. "깨워라." 각이 져 남자다운 힘이 넘치는 듯한 얼굴의 동양인, 스티브 황은 자신이 했던 복면을 벗은 지 오래였다. 스티브 황은 이 남자, 아론을 절대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기에 복면을 벗어버렸다. 스티브 황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사람이 기절해 있는 아론에게 얼음물을 끼얹었다. "으악... 어푸.. 어푸..." 아론은 차가운 물에 정신을 되찾았지만 순간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그 복면인들이 생각이 났다. 자신은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아론은 왜 자신을 납치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요즘에는 이미 조직의 통합이 어느 정도 이루어져 다른 조직과의 마찰도 거의 없었기에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 아는 대로 말해라." "........" "너와 관계된 곳을 아는 대로 말해라." ".... 너는 누구냐? 아.. 아니, 무슨 조직이냐?" 나직하게 말한 스티브 황의 말에 아론은 횡설수설했다. 이름과 조직을 물었지만 스티브 황의 입은 굳게 닫혀 있었다. 대신 옆에 있는 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곧바로 아론에게 몽둥이 찜질이 시작되었다. 10분도 되지 않아 아론의 입에서는 무조건 항복의 말이 새어 나왔다. "으악.... 으아악.... 그.... 그만.. 다 ... 말하겠다." 스티브 황은 믿기 힘들 정도로 자세하게 자신의 조직에 대한 내용을 모두 이야기하는 아론의 태도에 의심쩍었지만 너무 자세하고 또한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딱 들어맞았기에 믿기로 했다. 게다가 조사한 바로 아론이 어떻게 그 자리에 올랐는가를 알았기에 슬며시 조롱의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그런 세계에 살면 언제고 이런 날이 오게 된다. 각오가 없었던 것은 아니겠지?" "아... 아니... 살려 주십시오. 살려만 주시면 이보다 더 자세한 정보를..." "이보다 더 자세한? 하하. 중간 간부가 이보다 더 자세한 정보를 알 수 있나?" "........." 아론은 스티브 황의 날카로운 말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은 모두 말했기에 더 이상의 카드가 없었다. 아론은 겁에 질려 모든 것을 말한 자신을 자책했다. "...... 데려가라." 스티브 황의 말에 옆에 있던 사람은 아론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아론이 나가자 스티브 황은 주먹을 만지며 나직하게 말했다. "자, 이제 다시 시작해 볼까?" "여기 스위트 마티니 한 잔 더!" 알렉스 티먼은 복잡한 마음에 근처의 바에 들러 평소 자신이 좋아하는 마티니를 즐겼다. 보통 일을 끝내면 홀가분해서 기분이 좋아졌는데 이번에는 일이 깔끔하게 끝나지 않아서인지 이유도 없이 불안하고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티먼은 자신이 저격한 상대가 죽지 않았음을 알고는 놀랐다. 분명히 스코프를 통해 상대의 왼쪽 가슴에서 피가 솟구치는 것을 본 티먼은 저격 대상이 죽지 않았다는 소식에 혹시 그 사람의 심장이 오른쪽에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조직을 통해 알아본 결과 분명히 심장은 왼쪽에 있었고 관통했던 총탄이 중간에 사라졌다는 말을 들었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심장 앞에서 관통한 총탄이 사라지다니. 적지 않게 저격을 해 왔고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얘기를 들었던 티먼은 그와 같은 경우를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다. 이런 저런 마음에 복잡했던 티먼은 술로 심사를 달랬다. 200여 가지가 넘는 종류의 마티니가 있지만 티먼은 드라이진과 스위트 베르뭇이 2대 1 정도로 섞인 스위트 마티니를 가장 좋아했다. 티먼은 요즘 들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회의를 느꼈다. 이제까지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인다는 일 자체를 즐기지는 않았어도 어쩔 수 없는 직업으로 생각해 왔는데 요즘에는 그런 생각 자체에 회의를 느꼈다. "휴우.... 그냥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숨어 살았으면 좋겠다. 이번에는 돈보다는 조직의 명령에 따른 저격이어서 마음은 더욱 흔들렸다. FBI의 수배를 풀어주는 조건으로 조직에 매이게 된 티먼은 그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조직의 규모가 예상외로 크고 쉽게 빠져나가기도 힘듬을 나중에야 알았다. 티먼은 오랜 경험으로 자신의 이용가치가 있을 때까지는 계속 사용할 조직의 습성을 알고 있었지만 이미 때는 늦은 상태였다. 자신의 상황을 생각했을 때, 가족은 사치일 뿐이지만 이렇게 외로울 때면 가끔 예전에 사랑해서 2년간 같이 살았던 엠마가 생각이 났다. 미녀는 아니었지만 자신을 한 사람으로, 한 남자로 대해주었기에 진정으로 사랑했었다. 그 때, 자신이 조금만 마음을 고쳐먹었다면 지금쯤은 어쩌면, 푸른 잔디가 있는 집에 아들, 딸을 기르며 행복하게 살았을지도 몰랐다. 역시 때늦은 후회였지만 티먼은 그런 후회조차 행복함을 느꼈다. "휴우...." 괜히 한숨이 나왔다. 티먼은 이 고리를 끊었으면 하는 마음마저 생겼다. 하지만 당장 살 방법도 없었고 살아갈 목적조차 없었던 티먼에게 조직은 모든 것을 제공해 주었기에 마음은 있되 용기는 없는 티먼이 되고 말았다. "...... 나머지는 팁!" 100달러를 놓고 바를 나가며 티먼은 가볍게 외쳤다. 조직에 몸담고 있는 관계로 자신에게 원한이 있던 사람들도 자신을 건드리지 못하는 것과 이렇게 돈이 많다는 것은 좋은 점이었다. 티먼은 어두컴컴한 길을 걸어 자신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어..... 그 녀석들이 어디로 갔지?" 항상 자신을 따라다니며 귀찮게 만들었던 두 녀석이 보이지 않음을 알았다. 자신이 뭘 하든 상관없이 항상 변함없이 자신을 지켜보던 경호원 두 사람이 없어지자 티먼은 피식 웃고 말았다. 평소에는 그렇게 귀찮게만 느껴졌던 녀석들이 마냥 없어지자 서운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참 사람은 간사하다고 생각했다. "이 녀석들은.... 정말 사람 마음을 잘 알고... 그 반대로 행동하는군. 하하하." 평소라면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감상적인 생각이 많은데다 술까지 마셨기에 티먼은 천천히 숙소로 향했다. 그때 뒤에서 검은색 승합차가 거의 소리를 내지 않으며 다가왔다. 이미 어두워진 상태라 거리에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퍽! 으윽.." 티먼의 옆으로 다가온 승합차의 문이 열리며 내린 복면인의 목검에 정확히 맞은 티먼은 신음소리를 내며 쓰러졌고 땅바닥에 닿기 전에 복면인이 부축하며 티먼을 승합차에 태웠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고 목격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오직 달빛만이 모든 일을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을씨년스러운 바람만이 거리에 불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새크라멘토를 비롯해 그 주변의 주요 도시에 근거를 두고 있던 아론과 관계된 아지트와 관련 업체들은 모두 다 복면인들의 습격을 받았다. 검은 차에 검은 옷을 입고는 빠른 움직임으로 공격해 단 시간에 타격을 주고는 빠졌다. 어떤 곳에는 광택이 전혀 나지 않는 검을 들고 공격했고 또 다른 곳에는 총기를 사용하기도 했다. 여러 곳이 동시다발로 공격을 받게 되었다. "............. 베제트, 자네가 한 말이 가능한 소린가?" "......." "8개가 넘는 조직의 비밀 장소가 일제히 공격당했다는 것이 말이 되나? 그렇지 않아도 지난번의 그 사건으로 경비에 철저하라고 지시했는데..... 그건 그렇다고 쳐도 도대체 어떤 조직이 그런 일을 벌일 수 있는 거지? 어떤 조직이 그런 기동성을 가지고 있나? 없지 않는가?" "...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새크라멘토는 완전히 괴멸된 상태인가?" "네... 그 여파로 새크라멘토 뿐 아니라 그 근처의 도시까지 영향이 있습니다. 다른 군소 조직들의 동요도 심상치 않습니다." "그럴 테지. 자네는 더 이상의 피해가 없도록 지시한 뒤에 누가 그랬는지 꼭 알아내게. 이렇게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이번에도 목격자가 없는 것은 아니겠지?" "네.... 그런데.." "그런데?" "아직 단언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야쿠자들이 개입된 것 같습니다." "야쿠자? 일본 건달? 그들이 왜?" "목격자들의 진술에 따르면 동양인 같은 그리 큰 체구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게다가 어떤 지역을 습격한 놈들은 검의 고수였습니다. 몸이 민첩하고 검까지 사용한다면......" "으음... 간단치 않군. 동양인들이라......" 노인은 어쩌면 동양인들의 알려지지 않은 조직이 자신이 있는 지역을 노리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사라진 아론 역시 그들에게 납치되었다면 이렇게 쉽게 근거지를 공격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노인은 조사의 방향을 바꿔야 함을 알았다. 지역의 다른 군소 조직이 아니라 외부에서 온 동양인으로 이루어진, 아니면 동양인이 주축이 된 조직이 이번 일의 원인이 아닐까 생각했다. 노인은 자신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생각하고는 동료들에게 알리기로 마음먹었다. 노인의 마음에는 새크라멘토에서 사라진 알렉스 티먼의 일은 아예 들어 있지도 않았다. 워낙 그 습격 동안에 다치거나 사라진 사람들이 많아 알렉스 티먼의 일은 뒷전이었다. 그 뿐 아니라 알렉스 티먼의 용도가 끝났다고 생각했기에 노인은 아예 기억에서 알렉스 티먼을 지워 버렸다. 나중에 필요한 때가 온다면 그때 다시 기억해 낼 것이다. 노인은 나중에야 이 일을 후회했다. "자네가 알렉스 티먼인가?" 티먼은 속도 쓰렸지만 뒷골이 당기면서 아팠다. 그리고 차가운 바닥이 느껴졌다. 티먼은 어디인지 몰랐다. 어쩌면 조직에서 자신이 술에 취한 사이 다른 곳으로 옮긴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을 부른 상대가 동양인임을 보고는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 당신은 누구요?" "나? 스티브 황!" "스티브 황? 음... 들어본 적이 있는 것도 같은데..... 누구더라..." "....... 굳이 생각해 낼 필요는 없지. 당신은 그것 말고도 생각해야 할 게 너무 많으니까." ".... 누가 보냈소?" "하하하. 자네는 아직 자신의 처지를 모르는군. 알렉스 티먼." "........." "라스베가스에서 최근에 저격을 한 적이 있지?" "........" 티먼은 난데없이 동양인 남자가 자신을 무슨 동물 쳐다보는 눈빛으로 보면서 라스베가스의 그 께름칙한 저격 일을 꺼내자 무슨 말인지 몰랐다. 게다가 자신의 처지라니. 티먼은 그 때에야 그 동양인 뒤로 세 명의 다른 동양인 남자들이 서 있음을 알았다. 이렇게 동양인만 있다니. 그리고 확실히 보니 무슨 취조실 같은 분위기였다. "라스베가스에서 저격한 일이 있지?" "... 그... 그렇소만." "자네는 그 일 하나 때문에 완전히 인생이 끝난 거야." "무.. 무슨 일이오?" 사람을 직접 상대해 죽이는 게 아니라 멀리서 계획성 있게 기다렸다가 죽인 후에 흔적을 없애면서 떠나기만 하면 되기에 티먼은 이런 물리적인 압력에 익숙하지 못했다. 사람을 가까이서 죽여본 적도 있지만 자신이 당해본 적은 없었다. 동양인의 나직하면서도 소름 끼치는 뭔가가 있는 목소리에 티먼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자네는...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인물을 건드린 거야." "그게... 그게 무슨 말이오? 나는 그런 적이 없는데.." "그 때의 그 저격 대상을 잘못 정했어. 그 분을 건드린 대가를 치러야지. 일단, 자네의 말도 들어야 하니까 최대한 자세히 왜 그런 일을 했는지, 누가 시켰는지, 그리고 저격 과정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말해라." "..........." 티먼은 자신이 납치되어 왔음을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그 날 자신을 경호하는 두 명의 경호원도 보이지 않았고 자신은 뭔가에 맞아 쓰러졌음도 기억이 났다. 티먼은 자신이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진성은 손주황의 말대로 자신의 유(柔)의 단계를 지나 환(換)의 단계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수련 중에 팔극진결과 축지법을 따로 수련하는 것이 아니라 축지법, 아니 경의 일체는 모든 수련을 통해 기본적으로 일체된 상태에서 수련했다. 진성의 수련은 다시 예전처럼 세 단계로 바뀌었다. 팔극진결, 무명검법 그리고 팔괘장의 세 부분이었다. 진성은 손주황의 충고를 가슴에 새겼다. 자신에게는 시간도 많고 앞으로 넘어야 할 장애물이나 기다려야만 답을 얻을 수 있는 문제들도 적지 않으리라 생각했기에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었다. 프로 리그에는 참여할 수 없지만 진성은 마냥 집에만 있기가 그래서 회사에 나와 밀리터리 아트와 복구된 로플의 개발자로 조금씩이나마 일을 시작했다. 손주황은 대만으로 가고 왕현추는 일본으로 갔기 때문에 진성은 사부 유조의 집에서 나와 다시 진팀장, 현준의 집으로 돌아와 예전과 비슷한 생활을 시작했다. 물론 오전현은 여전히 보디가드로서 진성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오전현은 잠시 현준의 집에 머물기로 했다. "어이.... 요즘 노니까 기분이 어때?" 이제 리그가 코앞이라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며 연습에 연습을 하고 있는 현준은 편해 보이는 진성의 얼굴을 보자 괜히 한 마디 하고 싶어졌다. "현준아, 객쩍은 소리는 하지 말고 밥이나 먹어라. 먹어야 열심히 연습하고 연습해야 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지. 안 그래? 만약에 이번에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하면 신문에서 이렇게 떠들어 댈 거 아냐? 자소 소프트, 역시 게이머 스키피오가 없어 전력의 누수가 불가피해 그리 좋은 성적을 얻지 못하다! 이런 말 나오면 기분 안 좋지? 그러니 열심히 해야지. 자, 이것 좀 먹어봐." "......" 현준은 말 한 번 꺼냈다가 진성의 준비한 듯한 끊이지 않는 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말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격이었다. 진성은 그 동안의 현준의 말을 한꺼번에 갚은 듯 맛있게 식사를 했다. 그 모습에 진팀장과 현준 어머니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고 말았다. "형, 오늘은 형이 졌어." 게다가 현준의 동생, 현석까지 현준에게 KO 패라는 판정을 하고 말았다. 진성은 현준, 오전현과 함께 출근했다. 같은 차를 타고 회사까지 갔다가 현준은 문명 온라인의 연습실로 가고 진성과 오전현은 로플팀으로 출근했다. 오전현은 로플팀의 요람으로는 들어오지 않고 일단 진성이 회사에 무사히 도착하면 밖으로 나가 시간을 보내곤 했다. 진성이 아무리 이제는 경호가 필요 없다고 말해도 오전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진성은 자신의 경지에 대해서 얘기하고 대련을 통해서도 보여 주었지만 오전현은 물러서지 않았다. 진성이 먼저 항복했다. 진성은 아직 로플팀의 요람에서 테스트는 하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기에 근일 내에 진성의 테스트 계획이 잡힐 예정이었다. 자소 소프트의 프로팀으로서는 진성의 빠른 회복에 혹시나 리그 참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운영위원회에 타진했지만 역시나 참가 불가라는 선언이 떨어졌다. 프로팀들의 대표격인 운영위원회여서 게이머 스키피오의 리그 참가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얼굴이 좋아진 것 같다." "하하하. 그런가요? 총탄이 몸에 좋은가 보죠." "뭐? 하하하. 그래. 그런가보다. 나도 언제 그런 맛 좀 볼 수 없을까?" "..... 조팀장님, 저와 밀리터리 아트 1:1 한 번 하시면 아주 리얼하게 보여 드리죠." "..... 하하하." 조팀장은 진성이 좀 더 여유로워졌음을 알았다. 처음 회사에 나올 때는 흔히 사고 후에 민감해지는 그런 증상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밝고 여유로워 보여 다행이다 싶었다. 거기에 요즘은 농담까지 늘어 말상대로서도 그리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옛날의 진성이 과묵했다면 지금은 조용하지만 적당히 위트가 있는 청년이었다. "테스트는 언제 쯤 될까요?" "조만간 해야지. 병원에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니까." "뭘 하면 될까요?" "음.... 로플 쪽보다는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 쪽을 네가 맡아야 할 것 같다."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 아직 대역폭, 속도 문제 때문에 안 된다고 했잖아요?" "..... 하하하. 내가 누구냐? 그 동안 노력해서 어느 정도 문제를 해결했지. 뭐, 그래봐야 현존하는 최고의 인터넷 서비스를 받아야 가능하지만. 밀리터리 아트 게임기를 살 정도면 그 정도는 하겠지?" "와.. 그 정도까지 왔나요?" "하하. 그러니 네가 인터넷 회선을 이용한 테스트를 맡아줘야겠다. 팀장님이 말씀하겠지만 진성이 네가 이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의 개발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으면 하거든. 공식적인 책임자야 당연히 팀장님이지만 지금 다른 사람들이 로플에 투입되어 있는 상황에서 진성이 네가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의 개발과 테스트를 주도했으면 하는데.. 딱 까놓고 말하면 네가 개발팀 매니저가 되었으면 한다. 밀리터리 아트의 개발을 전체적으로 아는 사람은 나와 곽팀장님 그리고 팀장님을 빼면 너밖에 없으니까. 게다가 대부분의 문제는 네가 해결할 수 있기도 하고. 어때? 물론 혼자서 하라는 것은 아니야. 나도 있고 곽팀장님도 있지." "제가요? 아직 나이도 어린데요?" "어떤 회사에는 너보다 더 어린 개발팀장도 있다더라. 그런 걱정은 말고... 일단 생각해 봐라. 조만간 팀장님이 네게 뭐라고 하실 거다." "...... 네... " 진성은 자신이 거의 한 게임의 개발을 주도할 위치에 서게 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로플과 밀리터리 아트의 개발에 어느 정도 관여해서 개발 과정과 그 속의 문제 해결에 대한 경험은 있지만 사람을 다루는 경험은 전혀 없었다. 매니저는 다른 사람을 다루고 관리하는 일까지 포함하는 자리였다. 진성은 자신이 해 보지 못했던 일이라 호기심도 생겼지만 딱 나누어떨어지는 문제가 아니라 걱정도 많았다. 하지만 자신을 그렇게나 높이 평가해 준다는 사실 자체는 뿌듯했다. 최근에 무술의 한 단계를 돌파했을 때와는 또 다른 기쁨이었다. 무술이 개인적인 성과라면 이런 회사에서의 평가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라 더욱 기뻤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없지만 맡겨 준다면 열심히 해 볼 생각은 있었다. "... 개발팀 매니저라....." 또 다른 경험이 될 일에 진성은 기대감 반, 우려감 반이었다. "진성아, 어떠냐? 해 볼 테냐? 나로서는 네가 맡아준다면 좋겠지만 부담이 된다면 꼭 할 필요는 없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로플을 어느 정도 개발한 다음에 밀리터리 온라인을 손대려고 했는데 많은 밀리터리 아트 싱글 버전의 유저들이 온라인을 빨리 개발해 달라는 요청이 빗발쳐 어쩔 수 없이 결정을 내린 것이다. 할 수 있겠냐?" ".... 한 번 해 보겠습니다." "하하하. 그래. 그런 자세가 더 중요하지. 너한테만 맡기고 손 놓고 있지는 않겠지만 한 번 소신 있게 일해 봐라. 하하하. 진팀장은 오랜 시간에 걸쳐 진성에게 개발팀장의 위치와 해야 할 일에 대해 말했다.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의 개발을 위해 특히 신경 써야 할 점, 현재 세워진 시간 계획과 투입될 인원들, 개발과 관련된 자금 문제 등도 진팀장은 언급해서 처음 팀장을 맡을 진성의 어려움을 덜어주었다. "어이.... 강팀장!!! 하하하. 이거 딱 입에 붙는데.. 강팀장! 하하." "나와 같은 팀장이군. 강팀장! 하하. 진성이라는 말보다 강팀장이 더 좋은데.... 우리 다같이 강팀장으로 통일하자고." "좋지요." "강팀장님, 팀장이 되신 소감 한 마디!" "..........." 조팀장과 곽팀장은 진성이라는 이름 대신에 강팀장이라고 부르면서 놀리는 것인지 기뻐하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이상하게 좋아했다. 진성은 그런 말에 조금은 이상했다. 현준과 진규 등 프로팀 팀원들이 들으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나 진성은 한숨을 쉬고 말았다. 게이머의 연봉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제대로 된 직업인 게임 개발자, 그것도 개발 팀장이었기에 진성의 연봉은 몇 배로 치솟았다. 그런 것을 아는 현준과 함께 찰거머리 3총사를 이루는 진규와 범현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벌써부터 골치가 지끈 아파왔다. "어이... 친구, 아니 팀장님께서 여기는 어쩐 일로 납시셨는지?" "어... 진성이 형이 아니고.. 강팀장님.. 저 아시죠? 저 진규예요. 진규. 팀장님 되셨다고 저 잊어버리시면 안 되죠." "강진성 팀장님. 저 범현이에요. 요즘 못 봐서 기억못하실지도 모르겠지만." "........" 프로팀의 연습실에 들어서자마자 현준을 비롯해 진규와 범현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진성은 대충 예상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만히 그냥 넘어갈 생각은 아니시지요? 강팀장님!" "설마요. 우리 강팀장님이 그럴 리가 있겠어요?" "하하하. 그렇죠." "알았다. 시간만 정해라. 그런데 재필이 형이 가만 둘까? 곧 리그 시작인데?" 진성은 항복을 했지만 마지막으로 프로팀 팀장이자 매니저인 서재필을 걸고 넘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곧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어.. 이게 누구신가? 나와 같은 팀장인 강팀장 아니신가? 뭐? 강팀장이 한턱 쏘기로 했다고? 뭐라고? 하하하. 당연히 오늘 저녁에 하면 되지. 오늘 저녁은 연습을 쉰다. 모두 낮에 열심히 하고 저녁에는 우리 게이머이자 개발팀의 팀장으로 승진한 강진성 팀장님의 승진턱을 받도록 한다." "야호! 재필이 형 최고다!" "찬성!" "만세....!!!" 시간을 탁 맞춰 연습실로 들어온 서재필이 진성의 걱정을 깡그리 없애 버렸다. 놀 때는 놀아야 한다는 신조의 서재필이라 여지없었다.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진성은 어쩔 수 없이 그 날 밤, 수십 잔의 축하 술을 먹고는 평소 쓰지 않던 신용카드로 계산을 했다. 진성을 항상 따라다니던 오전현도 이 날 만큼은 같이 술을 먹고는 취하고 말았다. --------------------------------------------------------- 오늘 삭제하려는데 이 놈의 유조아... 접속이 잘 안 되네요. 내일 지우라는 걸로 알고.. ^^; 제가 한꺼번에 3개의 글을 적기에 연재가 조금 늦어지지요. 더 게이머를 중심으로 가끔 다른 글을 적고 있습니다. 글이라는 것이 잘 써질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어서 조금 정기적으로 쓰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거의 20k에 육박해서 글을 올리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조금의 양해를 바랍니다. 최대한 주기를 지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혹.시.나. 잠깐의 연중이 있다면 미리 알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재미있으면 추천을!!! 그리고 거기에 코멘을^^;; !!!!! --------------------------------------------------------- TGP1(The Gamer Part 1) [158 회] 복수는 나의 것 "이상이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고자 했던 내용입니다." 노인, 에드워드 트레이터는 자신의 구역에서 일어난 일들을 동료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상세히 설명했다. 일단, 동양인들이 개입했다고 판단했기에 혼자서가 아닌 다른 지역의 동료들의 도움이 절실했다. 트레이터는 이 사건을 조직 전체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게 만들기 위해서 일의 규모를 조금은 과장되게 알리기도 했다. 게다가 확인되지 않은 동양인 조직의 개입을 기정사실화 시켰다. 회의를 주관하는 가운데에 앉은 노인의 말에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을 내놓기 시작했다. "음.... 다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단 확실한 조사가 선행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인근 지역에서 그와 비슷한 움직임이 있는지, 항구나 공항을 중심으로 들어오고 나간 주요 인물들을 파악하는 문제와 국내에 들어와 있는 야쿠자 조직과 중국의 트라이어드의 비선을 통해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신중해야 합니다. 잘못하면 미국 내에서 조직들간의 대규모 전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겠지요. 거기에 혹시 미국의 조직이 동양인들을 고용한 것은 아닌지도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상부에 보고할 필요도 있지 않겠습니까?" 트레이터의 말에 좌중은 조용해졌다. 회의를 주관하던 검은 옷의 노인이 낮지만 확실하게 말했다. "결정적인 문제가 없는 이상, 상부에 도움을 요청하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을 겁니다. 모두들 잘 기억해 두십시오. 개인적으로 상부에 정보를 흘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임이 그런 일로 흔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트레이터씨, 무능력을 스스로 드러내는 짓을 했다가는 우리 모두 스스로의 함정에 빠지는 꼴이 되고 말 겁니다." 오랜 시간의 회의 끝에 신중한 조사를 위해 일정 시간을 기다리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트레이터로서는 원치 않았던 상황이었다. 시간이 지나도록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놈들의 움직임이 없다면 이 회의 뿐 아니라 나중에 알게 될 상부에서 트레이터 자신의 무능력으로만 볼 것이기에 더 마음이 급했다. 트레이터는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을 숨기고 그 동양인들을 향해 조직이 일어서기를 원했다. 트레이터는 그것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어라." 왕현추는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남자를 보고는 싸늘하게 말했다. 왕현추의 말에 옆에 서 있던 동양인 남자가 영어로 말했고 알렉스 티먼은 바닥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 검버섯이 나 있는 동양인 노인을 바라보았다. 티먼은 왕현추를 보는 순간 오금이 저렸다. 뱀 앞의 개구리처럼 순간적이나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티먼은 이 사람, 이 노인이 자신을 데리고 오라고 한 사람임을 알았다. 왕현추는 옆에 서 있는 사람에게 물었다. "에드워드 트레이터라고 했나?" "네, 그렇습니다." "어떤 녀석인가?" "10개가 넘는 회사를 거느린 그룹 플렉스의 회장입니다. 현재 미국 문명 온라인 프로 리그 운영위원회의 부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플렉스 아래에서 2개의 게임 관련 회사가 있는데 하나는 보통의 게임을 개발하고 다른 하나는 가상현실 게임을 개발하는데 미국에서 2, 3위 권 안에 들 정도로 실력 있는 회사입니다." ".... 그렇다면 저격의 목적은?" "저격수는 그 목적에 대해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략 예측하면 미국 내 문명 온라인 프로 리그의 전 국민에 대한 인지도와 함께 가상현실 게임 밀리터리 아트의 테스터이자 개발자인 강진성씨의 제거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 음.. 역시 그런가? 하지만...... 조금 부족한 것 같기도 한데...." "........ 아직 확인이 되고 있지는 않지만 에드워드 트레이터 역시 조직의 일원이라는 단서를 포착했습니다. 접근하기 힘들어 단언할 수 없지만 최근의 에드워드 트레이드가 움직이는 것을 고려해 볼 때, 거의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런가?" 왕현추는 확실히 그 사람, 스티브 황의 실력이 대단함을 인정했다. 이렇게 빨리 그 저격수를 잡아서 대만까지 데리고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상대 역시 만만치 않았지만 그 상대 인물 역시 조직의 일원이라는 말에 조금은 마음이 걸렸다. 왕현추는 그 에드워드 트레이터라는 사람이 조직의 최고 수뇌이기를 원했다. 그런 사람이 조직의 일원이라면 얼마나 대단할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할 말이 있나?" "......." 알렉스 티먼은 할 말이 없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닥치니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그 동양인을 저격했기에 이런 결과가 생길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 때의 그 불길함을 떠올리고는 자업자득이라 생각했다. 알렉스 티먼의 포기하는 얼굴을 본 왕현추는 차갑게 말했다. 왕현추는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에 반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 인해 피해를 본 상대가 있다면 죄를 지은 사람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확신하는 사람이었다. "그곳으로 보내고. 매일 확인해라. 이 녀석은 감시 대상 1호다." "네, 알겠습니다." 왕현추의 말이 끝나자 옆에 서 있던 남자는 알렉스 티먼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드디어 제 3차 문명 온라인 프로 리그이자 전 세계적으로 실시될 월드 리그의 국내 예선이 될 삼선전자배 문명 온라인 프로 리그가 시작되었다. 1년 정도의 기간으로 인해 웬만한 지방의 큰 도시에는 프로 경기를 관람하고 중계까지 할 수 있는 게임 센터가 마련되었다. 2차 프로 리그에서 지역을 돌며 게임을 하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경기는 서울에서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번의 3차 프로 리그는 완전히 지역에서의 경기와 연고화가 추진되어 더 흥미를 더하게 되리라 많은 전문가들이 예상했다. 많은 게임 팬들이 가장 궁금해 한 것은 각 프로팀들의 연고가 어디로 결정될지, 바로 그것이었다. 연고가 중복될 수도 있었다. 너무 많은 팀이 몰리면 오히려 과다한 경쟁으로 자신의 프로팀만을 응원하는 팬들을 잃어버릴 염려가 있었다. 특히 이번 3차 리그를 통해 약진을 하겠다는 중, 하위권 프로팀들은 연고의 선택에 신중에 신중을 거듭했다. 자소 소프트와 삼선전자, LQ 전자, 쌍룡은행 등의 인기 프로팀들은 특히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삼선전자와 LQ 전자의 서울을 두고 치열한 연고 전쟁을 벌일 거라는 예상과 달리 LQ 전자는 부산을 프로팀의 연고로 확정했다. 쓸데없는 경쟁보다는 실리를 추구하자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그로 인해 서울 연고의 경쟁에서 밀려난 게 아니라 스스로 부산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부산 팬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 탁월한 선택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쌍룡은행은 연고를 대구로 정했다. 자소 소프트와 삼선전자가 서울을 연고지로 할 경우 괜히 붙어서 피해를 보지 말고 지방을 택해 철저히 차별된 팬 관리를 한다면 대구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LQ 전자의 부산행이 성공적이라는 평가는 쌍룡은행으로 하여금 대구로 내려가게 만들었다. 자소 소프트는 당당하게 서울을 연고로 정했다. 이미 한국 뿐 아니라 중국, 일본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프로팀인 만큼 상대가 누구든 별로 걱정하지 않는 느긋함을 보였다. 반면에 서울 아니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던 삼선전자는 최고의 영향력과 함께 팬 점유율을 가진 자소 소프트의 서울 연고 선언과 LQ 전자와 쌍룡은행의 지방 대도시 선점의 좋은 결과로 인해 갈등하고 있었다. 삼선전자는 고민 끝에 서울을 연고로 정했다. 자소 소프트에 밀리는 한이 있더라도 인구수가 많고 수도권까지 겨냥할 수 있어 철저히 서비스를 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자체 판단의 결과였다. 자소 소프트로서는 팬들의 체계적인 관리와 프로팀의 지원과 그 관리에 약점이 있었기에 삼선전자의 정면 승부에 조금은 밀릴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 틈을 보완하기 위해 자소 소프트는 대대적인 조직 개편에 들어갔다. 먼저 자소 소프트의 전체 기획 파트에서 경력을 쌓아온 황태산 기획이사를 전격적으로 새로 생기는 프로 구단의 단장에 임명했고 그 아래에 운영팀, 마케팅팀, 스카우트팀, 지원팀, 경호팀, 관리팀으로 나누어져 대대적인 인사이동이 있었다. 아직 경험은 부족하지만 빠른 시간 안에 정상적인 프로 구단 운영이 될 수 있도록 자소 소프트는 자금을 아끼지 않았다. 이준은 경호원에서 경호팀장으로 승진되었다. 서재필은 운영팀과 관리팀의 팀장을 동시에 맡으며 단장인 황태산의 바로 아래인 수석 팀장으로 승진되었다. 서재필이 그렇게 바라던 자금이나 기타 모든 일정에 대한 지원을 담당하는 지원팀도 새로 생겼고 특히 선수 수급을 위한 스카우트팀도 새로 생겨 상대적으로 서재필의 일은 적어졌지만 신경 쓸 부분은 크게 늘어 책임은 따라서 늘어났다. 프로 선수들은 완전히 바뀐 연습실로 이사를 했다. 프로 구단이 새로 생겨 단장인 황태산 이사를 비롯해 새로 한 식구가 된 스텝과의 인사 외에는 그리 실감을 느끼지 못했던 현준을 비롯한 선수들은 자소 소프트의 지하, 게임 센터를 완전히 개조해 프로팀 전용 연습실을 보고 나서야 프로 구단이라는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단순한 프로 게임 연습실이 아니었다. 완벽한 방음과 맑고 시원한 공기를 공급하기 위한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었고 합숙을 위한 수면실과 여가 시간을 위한 헬스장과 25미터 길이의 수영장까지 마련이 되어 프로 선수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운영팀, 지원팀, 마케팅팀, 스카우트팀은 자소 소프트의 7층에 위치했지만 관리팀과 경호팀은 프로 선수들과 같이 지하의 새로운 연습실 한쪽에 사무실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서재필은 운영팀의 팀장이기도 했지만 필요한 일이 없을 때는 거의 항상 관리팀에서 시간을 보냈다. "자, 이제 모든 준비는 다 되었으니, 너희들은 열심히 하기만 하면 된다. 다음 주부터 당장 프로 리그가 시작되니까 다들 마지막 마무리 잘하고. 알겠지? 수영장까지 준비했는데 못하면 알지?" "... 알아요. 그런데 이렇게 해 주니까 조금은 부담되는데요!" "뭐? 조금? 많이 부담되라고 한 거다." "예?" "하하하하." 서재필은 프로 선수들을 모아 놓고 가볍게 말했다. 스스로 알아서 하지만 이런 식의 부담은 조금씩 줄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너무 흥분하는 것도 좋지 않기에 적당하게 풀어줄 필요도 있었다. 제 2차 국내리그 우승팀, 메이저 리그 우승팀이라는 명성에 걸 맞는 것은 단 하나, 국내리그 우승 밖에 없었다. 진성이 없지만 그 대신 게이머 사신, 김한석이 가세했기에 자소 소프트의 우승 확률은 가장 높았다. 서재필 뿐 아니라 소속 프로 선수들도 개인전에는 힘들겠지만 단체전의 우승은 충분하리라 생각했다. 힘들게 연습을 한 현준을 비롯한 팀원들은 모두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수영장으로 와서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서재필과 두 명의 코디, 최현숙과 한소희를 제외하고 관리팀에 새로 들어온 영양사이자 선수들의 건강까지 책임지는 바디 매니저 장필순의 말에 따라 이렇게 하루에 시간을 정해 놓고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또한 메이크업 아티스트인 최현숙 아래로 4명의 메이크업 코디들이 들어왔고 역시 한소희 아래로도 4명의 스타일리스트가 들어와 서재필은 두 사람을 최대리, 한 대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최 대리님, 한 대리님. 두 분도 들어오세요." "뭐? 아... 우리는 나중에....." "그래? 좋지. 아, 맞다. 수영복이 없다. 기다려라. 우리 수영복 가지고 올 테니까." 현준이 지나가던 현숙과 소희에게 손을 흔들며 들어오라고 하자 현숙은 머뭇거리는 소희의 손을 잡고는 수영복을 가지러 간다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현준은 역시 현숙이라고 생각했다. 갑작스레 사람이 많이 늘어 예전의 그 가족 같은 분위기는 나지 않았지만 시간이 조금만 흐른다면 어느 정도 좋아질 것이라 확신했다. "자, 다들 20분 후에 수영장에서 나와라. 너무 오래 있어도 좋지 않으니까." 장필순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성우와 같은 목소리였다. 게다가 억양도 굉장히 세련되어 굉장한 커리어 우먼다웠다. 장필순은 27세의 결혼하지 않은 바디 매니저였다. 장필순이 하는 일은 이제 완전한 공인인 프로 선수들의 몸 관리를 책임져 건강 문제로 게임에 지장이 생기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었다. 또한 팬들이 좋아할 만한 몸매를 가꾸는 것 역시 장필순이 해야 할 일 중의 하나였다. 장필순 본인 역시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얼굴과 몸매여서 최유나와 한혜연, 최현숙과 한소희를 비롯한 코디들은 모두 언니라고 부르며 그와 같은 몸매를 가꾸기 위한 열풍까지 일어날 정도였다. 한혜연 역시도 자랑할 만한 몸매였지만 계속된 연습과 밤늦게 먹는 야참으로 인해 몸매에도 신경을 써야했다. 진성이 자신의 팬 사이트에 올린 편지는 대단한 반향을 불러왔다. 진성 자신은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지만 최근의 근황을 적어 팬 사이트에 올린 글은 게이머 스키피오의 리그 불참에 대한 의혹을 인터넷에 불러일으키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제 건강에서 회복되어 경기를 참가할 수 있을 만큼 체력적으로 문제는 없지만 이렇게 리그에 참가할 수 없어서 팬들께 죄송하다, 그 대신 자소 소프트에서 게임 개발팀장으로 일하게 되었다는 말이 전체의 글 중에 삽입되어 있었는데 그 부분을 인용해 건강 문제가 아닌 다른 정치적인 이유로 게이머 스키피오가 프로 리그에서 배제되었다는 소문이 인터넷에 떠돌기 시작했다. 백만이 넘는 게이머 스키피오의 열성팬들이 움직이자 그 움직임은 대단했다.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예전에 이기기 위해 상대의 강한 선수를 피해 선수 오더를 짰던 삼선전자의 음모라는 둥, 자소 소프트를 제치고 우승 한 번 해 보고 싶어 하는 LQ 전자, 쌍룡은행, 삼선전자의 담합이라는 말까지 인터넷에서 진동했다. 특히 직접적인 판단을 내린 문명 온라인 프로 리그 운영위원회의 홈페이지는 연일 사이버 테러를 당해 당분간 홈페이지를 폐쇄할 수밖에 없었다. 부랴부랴 자소 소프트의 공식 문명 온라인 홈페이지와 진성의 팬 사이트에 그 일의 전말에 대한 장문의 글을 올렸지만 한 번 불붙은 인터넷에서의 논란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로 인해 코앞에 다가온 프로 리그까지 영향을 미칠 것 같다는 분석이 나오자 운영위원회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솔직히 운영위원회의 게이머 스키피오에 대한 리그 참가를 불허한 이유에는 쉽게 밝히기 힘든 부분도 있었다. 처음에는 그런 논란을 일으킨 장본인인 게이머 스키피오에게 징계를 내리자는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의견이 있었다는 언론 보도가 나가자 인터넷은 그야말로 뜨겁게 달아올랐고 그 의견을 낸 삼선전자의 임원은 운영 위원회에서 교체되고 말았다. 프로 리그에 대해 안티 활동을 벌이겠다는 안티운동의 서명자가 80만명이 넘어서자 운영위원회는 특단의 조치를 내리기로 합의 했다. 바로 게이머 스키피오, 진성의 복귀였다. 하지만 그 시기를 놓고 운영위원회들 사이에도 이견이 많아 쉽게 결정하기는 어려웠다. 장고의 노력 끝에 대부분의 팀들이 만족할 만한 의견이 나왔는데 바로 3차 프로 리그인 국내 리그가 아닌 내년에 열릴 월드 리그에 부상에서 회복된 진성을 특별 자격으로 출전할 수 있도록 결정한 것이다. 그로 인해 개인전의 최종 순위를 통해 5위까지 주어질 월드 리그 출전권이 4위까지로 확정이 되었다. 분석을 통해 그 5위 자리를 노리던 프로팀은 맹렬히 반대했지만 전체의 결정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게임 팬들은 그런 운영위원회의 결정에 바로 승복하지는 않았지만 바로 열릴 프로 리그와 이제 와서 모든 것을 바꾸기는 불가능하다는 내부의 의견으로 인해 서서히 그 열기가 식고 말았다. 자소 소프트로서는 월드 리그에도 참가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진성이 이렇게 참가할 수 있게 되자 청할 수는 없었지만 원하는 바였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있었다. 진성은 그 사건으로 인해 자신이 지금 현재 프로 선수로 참가하지는 않지만 얼마나 자신의 말 한 마디가 큰 의미가 되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공인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서재필에게로 불려가서 한참을 혼나고 그 다음에는 프로 구단 단장인 황태산에게도 불려가서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진성이 한 가지 놀란 것은 황태산에게로 가면서 조금은 긴장했는데 황태산이 로플팀의 곽팀장과 동기라는 사실과 현준 아버지, 진팀장을 역시 형님으로 부르는 관계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황태산은 곽팀장과 느낌이 비슷했지만 더 화끈했다. 처음 만나는 자신의 등을 반갑다며 사정없이 내려치는 모습에 이런 사람도 있구나 하고 진성은 생각했다. "다들 준비 되었습니까? 소프트웨어?" "준비되었습니다." "접속기는?" "문제없습니다." "자, 테스트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진성은 게임기 안에서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확인을 하고는 최종 테스트 지시를 내렸다. 진성은 인터넷 회선을 이용한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의 테스트를 위해 자신이 팀장이지만 테스터로서 게임기에 탑승했다. 처음에는 자신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하는 게 비효율적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문제가 생기면 바로 고치거나 표시를 할 수가 있어 오히려 예상보다 더 진척 속도가 빠르자 아예 개발자 겸 테스터로 나섰다. 진성은 익숙한 밝음 다음에 펼쳐진 대지 위에 우뚝 서 있었다. 이번 테스트의 목적은 인터넷 속도라는 한계 내에서 상대의 움직임이나 나의 움직임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상대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바로 그 적절한 조화점을 찾는 것이었다. 현실감을 떨어뜨리지 않고 회선의 속도에 맞출 수 있는 오토 레귤레이터를 위해 그에 필요한 여러 데이터를 준비해야 했다. 진성은 가볍게 앞으로 걸었다. 진성의 바로 앞에는 인터넷을 통해 되돌아온 자신의 걷는 모습이 나타났다. 확실히 그 딜레이도 느껴졌다. 이런 딜레이도 해결해야 하지만 일단은 행동의 자연스러움을 먼저 확인할 계획이어서 딜레이는 무시했다. "현수형, 밖에서 보기로 초당 프레임은 어느 정도인가요?" 조팀장 밑에서 있다가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의 소프트웨어 책임자로 온 나현수는 츄파춥스 사탕을 물고는 진성에게 마치 어려운 상사를 대하는 듯 대답했다. 나현수는 30대의 나이지만 10년은 어리게 산다는 평을 받고 평소 츄파춥스 사탕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이상한 습관을 가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게임 엔진이나 시스템에 대해서는 조팀장의 뒤를 이을 사람이었다. "네? 아... 네.. 팀장님, 90 프레임 정도는 되는데요.." "현수형, 그렇게 하지 마세요." "하하하. 농담이야. 농담. 강팀장, 90 프레임 정도니까 그리 끊어지지는 않는데..." "안에서 보면 조금 그런 느낌이 나네요. 120 프레임까지 올려 볼께요." 진성은 가상현실 안에서 자신만의 키보드와 조작을 통해 현실감을 올렸다. 가상현실 내에서는 프레임이라는 개념이 없었지만 밖에서 볼 때는 초당 화면을 보여주는 횟수인 프레임이 굉장히 중요했다. 진성은 그 밖에서 보는 프레임을 기준으로 현실감을 측정했다. "강팀장, 됐어.. 지금 130 프레임까지 올라갔다고." "네...." "그래... 그 정도가 좋은 것 같은데... 지금 대역폭 사용률이..... 음 67%니까 이 정도면 적당할까?" "..... 조금 더 낮추어야 할 것 같네요. 제가 조금 찾아볼 게 있어서 조금 있다가 말씀드릴게요." 진성은 공간을 뚫고 나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앉아서 키보드를 두드렸다. 대역폭 사용률을 60% 아래로 떨어뜨리는 게 1차 목표였다. 처음에는 94%까지 치솟았던 것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아직은 목표에 미치지 못했다. 진성은 인터페이스와 관련된 부분을 찾았다. 이미 조팀장에게 그 부분들에 대한 개념과 실제 코드에 대해 설명을 들었기에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그 부분의 모듈을 꺼내 몇 가지 중요한 변수의 값을 고치고는 다시 코드에 포함시켰다. 진성은 그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밖으로 나가려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에 접속된 상태인데다가 자신은 이 가상현실에 접속해 있으니 자신 역시 이런 상태에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진성은 그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자신의 의지와 몇 가지 조작으로 인터넷 홈페이지를 볼 수 있는 페이지를 생성시켰다. "이야.... 되는군. 이렇게 하면 훨씬 재미있겠는걸...." 진성은 공중에 그래도 떠 있는 상태에서 마우스 대신 손가락으로 자신의 팬 사이트를 보고 있었다. 진성은 그러다 이런 기능을 잘 만들어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의 유저들도 어느 정도 즐길 수 있게 만들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에 가만히 앉아 골똘히 생각했다. 밀리터리 아트 내에서 이렇게 홈페이지에 접속할 수 있고 검색도 하고 정보도 알 수 있게 만들면..... 진성의 생각은 더욱 커져 엄청난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진성은 그 생각에 스스로 흥분하고 말았다. "..... 휴우..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진성은 보고 있던 팬 사이트를 다시 살펴보았다. 자신의 생각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다 팬 사이트에서 게이머 스키피오, 강진성이 재벌가의 2세라는 말도 안 되는 글을 발견했다. 그런 글이 한 두 번이 아니라 별 뜻 없이 넘기려다 그 글을 쓴 사람이 누굴까 의문이 생겼다. 자신도 모르게 누굴까 생각해서 입으로 그 말이 나오고 말았다. "... 도대체 누구야? 이 사람?" 그 순간 자신의 눈앞에 새로운 메시지 창이 뜨면서 그 글을 올린 사람의 회원 정보와 접속한 주소를 추적한 결과까지 나왔다. "어.... 이... 이게 뭐야?" 자신의 마음에, 자신의 말에 이렇게 쉽게 팬 사이트의 회원 정보가 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다. 진성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말했다. "강진성의 회원정보!" "....... 이럴 수가?" 강진성으로 등록된 수십 명의 회원 정보가 눈앞에 수십 개의 창으로 나타났다. 진성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수 십, 수백 번도 넘게 들어갔던 이 팬 사이트의 보안이 허술할 리가 없었다. 이렇게 쉽게 뚫릴 리가 없었다. 진성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자소 소프트의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자소 소프트 홈페이지." "운영자 아이디와 패스워드." 자신의 말이 끝나고 2초도 지나기 전에 자신 앞에는 홈페이지를 완전히 무력화 시킬 수 있는 운영자의 아이디와 패스워드가 창으로 떠올랐다. 진성은 혹시나 해서 따로 접속창을 만들어 그 운영자의 아이디와 패스워드로 접속을 시도했다. "이럴 수가.....?" 진성은 믿을 수가 없어 다시 한 번 다른 곳으로 접속했다. "삼선전자 홈페이지." "운영자 아이디와 패스워드." "........."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이. 이런.....?" 진성은 1분도 되지 않아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자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삼선전자의 메인 홈페이지에 대한 완벽한 권한을 획득했다. 완벽한 해킹이었다. 진성은 아직도 실감할 수가 없었다. 진성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런 가상현실 내에서라면 그런 방어벽도 아무 소용이 없는가 싶었다. 진성은 삼선전자의 홈페이지를 닫고 뭔가를 확인하기 위해 열려 있던 자소 소프트의 홈페이지에 작은 장난을 쳤다. 밖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홈페이지의 디렉토리 안에 자소 소프트의 프로팀 우승하라는 내용의 텍스트 파일을 남겼다. "....." 진성은 아무 말도 없이 있다가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벗어나 밖으로 나와 곧 접속을 종료했다. ------------------------------------------------ 화요일이죠? 좋은 날이었기를 바랍니다. 내일도 좋은 날이었으면 합니다. 솔직한 평가와 이것은 이랬으면 좋겠다 싶은 의견은 가차 없이 코멘으로~~~~~~ 스토리와는 상관없지만 저는..... 독자 여러분들의 코멘트를 볼 때, 영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재미있으면 추천해 주세요!! ------------------------------------------------ TGP1(The Gamer Part 1) [159 회] 복수는 나의 것 "그 에드워드란 놈을 잡을 준비를 해라." 스티브 황은 옆에 있는 남자에게 지시를 내렸다. "절대 타초경사의 우를 범하지 않도록. 가장 좋은 기회를 이용해 증거를 남기지 않고 일을 처리하도록 한다. 잘하면 이번이 마지막 일이 될 것이다.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스티브 황은 이번 일의 책임자로 지목된 에드워드 트레이터를 붙잡기로 결정했다. 에드워드 트레이터가 독단적으로 그 일을 지시했는지, 아니면 그 위에 다른 사람들이 관련되었는지 확실치 않지만 일단 에드워드 트레이터를 잡기만 하면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스티브 황은 빠르게 움직였다. 이번 일의 생명은 은밀함이었다. 진성이 자소 소프트의 홈페이지 디렉토리에 파일을 숨겨둔 이유는 가상현실에서 그와 같은 해킹을 했을 때, 그 접근 경로가 추적되어 누가 그런 일을 했는지 알 수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진성은 가상현실에서 덜컥 그런 일이 일어나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성은 그런 일에 대해서 의논하기 위해 현재 로플로 바쁜 진팀장을 찾았다. "어이... 강팀장, 무슨 일이냐? 이렇게 갑자기 찾아온 것은 무슨 일이 있다는 건데..." "사실은...." 평소의 진성과 다르게 머뭇거리자 진팀장은 재촉했다. "도대체 뭐기에 그렇게 뜸을 들이는 거냐?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에 무슨 커다란 문제라도 생겼냐?" "그것은 아니지만.... 팀장님, 제가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 테스트를 하기 위해 가상현실로 들어가 이것저것 살펴보다가 그 내부에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진성의 말에 진팀장은 관심을 나타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이 그 세부적인 것은 잘 몰랐기에 일단 듣고 볼 일이었다. "오호.. 그래서?" "제가 가진 능력으로 창을 만들어 자소 소프트의 홈페이지나 삼선전자의 홈페이지에 접속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겠지. 인터넷과 연결되어 있으니까."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상한 일?" "네, 제 팬 사이트에 접속해서 잠깐 그곳에 올라온 글을 보는데 저와 관련된 거짓말을 올린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이 누굴까 싶어 그대로 말을 했는데, 제 눈앞에 그 사람에 대한 신상 정보와 아이디, 패스워드까지 다 나왔습니다." "뭐라고?" 진팀장은 진성이 하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하지만 더 확인하기 위해 진성의 말을 듣기로 했다. 진성은 진팀장에게 이어서 다른 얘기까지 설명했다. "그 뿐 아니라 삼선전자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운영자의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물어보니 해킹으로 부를 수 없을 만큼 간단하게 그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자소 소프트의 홈페이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이냐?" "제가 자소 소프트의 홈페이지 디렉토리에 작은 텍스트 파일을 하나 넣어 놓았습니다. 팀장님이 한 번 확인해 주십시오. 정말로 그런 파일이 있는지, 있다면 누가, 언제 그런 파일을 만들어 놓았는지. 특히 누가 그렇게 한 것인지 추적할 수 있는지도 확인해 주십시오." 진팀장은 진성이 한 말의 의미를 알았다. 진팀장은 진성에게 당부했다. "...... 알겠다. 진성아, 누구에게도 이런 이야기는 하지 마라. 너와 나 사이의 비밀이다. 아, 테스트 할 때 본 사람은?" "없습니다. 제가 밖에서 볼 수 없는 공간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저 혼자만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다행이다. 절대,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마라. 현준도 포함해서다. 알겠냐?" "네..." "확인이 될 때까지는 절대 말해선 안 된다." 진팀장은 하고 있던 일을 팽개치더니 곧바로 밖으로 나갔다. 진성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진성은 진팀장의 말을 이해하고 있었다. 가상현실에서 그렇게 쉽게 해킹이 된다면 이것은 정말 큰 문제였다. 진성은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가상현실 전체 문제가 아닌, 자신만의 문제일지도 몰라 더욱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진성은 그 일을 진팀장에게 보고하고 나서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골몰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진성은 그 해킹이 사실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비록 추적이 되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해킹 자체는 사실일 것이다. 진성의 머리에는 해킹에 대한 일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그 때 느꼈던 여러 가지 생각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진성은 단순히 가상의 공간, 게임 공간이라고만 생각했던 가상현실에서 해킹이 가능하자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올라 조금씩 정리하고 있었다. "...... 가상현실에.. 집을 만들어 분양하면 어떨까? 하하.." 자신의 생각에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현실과는 달라, 현실처럼 비싼 돈에 집을 팔수는 없겠지만 가상현실에 집을 지어 개인에게 준다는 것 자체가 새로운 생각이었다. 진성은 그러다 밀리터리 아트 싱글 버전 테스트 할 때, 가상공간에 로플의 요람이 구현되어 있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그 요람에서 작업을 할 수는 없을까? 음... 접속기 테스트는 못한다고 해도... 컴퓨터를 이용한 작업 정도는 할 수 있겠군." 이미 창을 띄워 홈페이지에 접속할 수 있었기에 현실에서 보통의 컴퓨터로 하는 작업은 가상현실에서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보니 가상현실 접속기 혹은 게임기 하나로 가정에 있는 컴퓨터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럴 수도 있겠네. 컴퓨터가 없어도 채팅도 하고 홈페이지에 접속할 수도 있고... 거기에 다른 게임도 할 수 있게 만들면... 아, WIS(War In Space)나 문명 온라인 아마추어 버전도 가상현실에서 할 수 있게 만든다면.. 와... 이거 대단하겠는데..." 진성은 자신의 생각에 자신이 놀라면서 계속 그 생각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다른 아이디어들을 조금씩 정리해 나갔다. 자신이 생각해도 엄청난 계획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조팀장, 본사로 들어오게." "네? 팀장님.. 곧 테스트를 시작해야 할 텐데..." "테스트, 연기다. 빨리 와." "네? 아... 네.." 조팀장은 외곽에 있는 로플 연구소에서 일정에 맞는 테스트를 준비하고 있는데 갑작스런 진팀장의 호출에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급한 일이 있다고 해도 주어진 일은 먼저 끝내야 한다는 평소 진팀장의 소신과 달리 이렇게 급히 찾는 것을 보면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오늘 테스트는 연기다. 일정에 대해서는 내가 조정해 볼 테니까, 나중에 다시 해 보자고. 하드웨어 팀은 다시 한 번 더 확인하고 소프트웨어 팀은 각 모듈별로 정해진 테스트를 한 후에 나중에 내게 결과보고 하도록." "네.. 알겠습니다." 조팀장은 우선 팀원들이 해야 할 일을 지시하고는 급히 로플 연구소를 나왔다. 회사로 들어온 조팀장은 곧 진팀장을 만날 수 있었다. "팀장님,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한 가지 묻겠는데... 가상현실에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을 때, 가상현실 내에서 해킹이 가능한가? 다른 사이트에 접속해 그 정보를 빼낼 수 있다는 말인가?" "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가상현실 시스템과 인터넷 회선 사이에는 인터넷 접속 제어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그 접속 제어 프로그램에서 허용하지 않는 한 밖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진팀장은 조팀장의 확신에 찬 이야기를 듣고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휴우... 만약 진성이라면?" "......" 조팀장은 곧바로 이번 일이 진성이와 관련된 일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진성이를 생각했을 때, 그와 같은 제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조팀장은 진팀장의 얼굴을 쳐다봤다. "진성이가 가상현실 내에서 인터넷으로 다른 홈페이지에 접속할 수 있을지 간단하게 테스트를 했다는군. 그런데 문제는 다른 홈페이지의 보안을 뚫고 그 내부의 정보를 너무도 간단하게 얻을 수 있다는 거야. 휴우.. 조금 전에 확인했는데 자소 소프트의 메인 홈페이지가 해킹 당했네, 바로 진성이에게." ".... 그럴 수가.. 메인 홈페이지라면 보안이 상당히 잘 되어 있을 텐데." "게다가 그 쪽 관리팀에 이런 사실을 알리고 추적을 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그 결론은 추적 불가능으로 내려졌네." "네? 추적 불가능?" 해킹의 흔적은 있지만 추적은 불가능하다? 최고의 해킹 프로가 아니면 힘든 일이었다. 조팀장 자신이 알기로 진성은 해킹에 그리 관심이 없었다. 진팀장은 조팀장의 말도 안 된다는 표정에 상관없이 계속 이야기를 했다. "휴우... 진성이의 말로는 삼선전자 홈페이지 운영자 권한을 획득했다고 하네. 진성이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으니..." "삼선전자까지...." 자소 소프트의 메인 홈페이지도 상당히 보안에 신경을 쓴 사이트였다. 그 뿐 아니라 세계에서 알아주는 기업인 삼선전자라면 인터넷에서의 얼굴인 홈페이지에 꽤 많은 정성을 들였을 것이다. 그런데 한 사람에게 그렇게 쉽게 해킹을 당하다니. "진성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로플팀의 요람에 있을 걸세." "이야기를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진성과 진팀장 그리고 조팀장은 로플의 소회의실에 들어와 있었다. 평소와는 달리 조금은 경직된 분위기였다. 침묵에 잠겨 있던 진팀장이 입을 먼저 열었다. "진성아, 확실히 네가 말한 그 파일은 정확히 네가 말한 위치에 있더구나. 그리고.... 그 관계자는 상대가 대단한지 추적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진팀장의 말에 진성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단지 추적 불가능이라는 말은 의외였다. ".... 그렇군요." "그래. 어떻게 보면 네게 아주 막강한 뭔가가 생겼다고 볼 수도 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그런 것이 한 사람에게 있다는 사실이 그다지 좋은 일로 보지 않는다." 진팀장은 너무 큰 능력이 아닐까 걱정했고 진성 역시 그 점을 인정하고 있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이유인지도 모르게 이런 일이 일어나고, 현재의 이런 체계를 무너뜨릴 만한 획기적인 것은 오히려 혼란만 일으킬 뿐이라 생각합니다." "그래. 그렇지. 진성이 네가 알아서 제어를 하겠지만 다시는 이런 해킹을 하지 않는 게 좋겠다. 그리고 테스트를 통해 가상현실 시스템 자체가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가상현실의 매니저인 너만 그런 것이 가능한지 확인해 봐라." "네...." 진팀장의 목소리는 걱정스러움이 가득했다. 그나마 진성이가 그런 해킹을 통한 크래킹을 하지 않으리라 단언을 했고 믿을 수가 있기에 안심이었다. "저.. 사실은 제가 생각했던 게 있어서 가상현실 내에서 그런 테스트를 해 봤습니다." "생각한 것?" 조팀장이 물었다. "네, 지금 현재로 가상현실 자체는 최첨단의 기술이지만 사용되는 곳은 간단한 시뮬레이터와 게임뿐인 것 같습니다만..." "그렇지. 현실과 가상현실 사이의 불일치 때문에 정확한 시뮬레이션은 아직 불가능하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지." "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어떻게?" 진성은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에 말을 이었다. "제가 그 가상현실 내에서 홈페이지에 접속할 수 있는지 확인한 것은 다른 사람들, 보통의 가상현실 사용자도 그런 똑같은 조건을 부여해서 인터넷 홈페이지를 볼 수 있게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된다면 현재의 인터넷 접속기인 컴퓨터를 이 가상현실 시스템이 대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뭐? 그게 무슨 말이냐?" "아직은 생각뿐이지만, 지금 현재 판매되는 밀리터리 아트 싱글 버전의 게임기가 400만원 정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 인터넷 연결을 추가해 온라인 버전의 게임기를 만든다고 해도 그리 가격이 큰 폭으로 상승하지는 않겠죠. 지금 예상보다는 많이 팔렸지만 다른 게임에 비해서는 그 가격 때문에 팔리지 않았다고 해도 그리 잘못된 생각은 아닐 겁니다." "그래, 진성이 네 말이 옳다. 그런데 대체한다는 게 무슨 말이냐?" "결과적으로 지금의 가상현실 게임기가 컴퓨터를 대체한다는 말입니다." "컴퓨터를?" "네, 그 방법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이 생각하고 노력해야겠지만 지금의 가상현실 시스템은 충분히 다음 세대의 컴퓨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음........" "게다가 가상현실 시스템이 컴퓨터를 대체할 수 있다면 현재의 홈페이지 역시 삼차원의 입체적인 사이트로 탈바꿈할 것입니다." 진성의 얘기는 그야말로 방대했다.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는 컴퓨터의 기능을 대신하는 환경으로 가상현실 시스템을 보자는 시각이었다. 진팀장과 조팀장은 진성의 얘기에서 그 거대한 가능성은 보았지만 쉽게 동의하기는 어려웠다. 그만큼 너무 큰 계획이라 한 회사가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진성의 말은 계속되었다. "아마도 차세대 컴퓨터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겁니다. 또한 지금의 컴퓨터로 할 수 있을 일을 가상현실 시스템으로도 할 수 있게 만든다면 지금 존재하는 컴퓨터는 앞으로 그다지 필요하지 않을 겁니다." 진성의 말은 완전한 대체였다. 컴퓨터와의 공존이 아니라 컴퓨터를 밀어내고 가상현실 시스템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는 급진적인 생각이었다. 진팀장은 그런 진성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휴우.. 네 생각은 잘 알겠다만, 수십 년을 쌓아온 지금의 컴퓨팅 환경을 단 기간에 한 회사가 완전히 다른 환경으로 바꿀 수는 없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지만 그 가능성은 긴 시간을 통해서만 의미가 있다. 진성이, 너와 같이 확실한 것은 아니었지만 처음에 가상현실 시스템을 기획할 때 그와 비슷한 얘기가 나온 적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 회사 혼자서는 절대로,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진팀장의 말은 사실이었다. 앞으로의 대세가 가상현실 시스템으로 컴퓨팅 환경이 이동한다고 해도 그 사이에는 굉장히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리고 자소 소프트 혼자는 절대 불가능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진성은 그런 말에도 불구하고 확신에 찬 말을 이었다. 아직 젊기에 가능한 말인지도 몰랐다. "단기간에 불가능할지는 몰라도 그렇게 오래 걸린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일단 로플의 개발이 완료된 시점부터는 그런 식의 접근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로플에 접속한다는 것 자체로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고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 프로그램을 로플에서도 사용할 수 있도록 인터페이스를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로플에 접속한 다음에 게임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할 수도 있게 만드는 겁니다. 어쩌면 로플에 접속할 필요도 없이 밖으로 연결되지 않은 가상공간을 마련해 자신만의 작업 환경을 만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진성은 자신이 그런 환경을 만들 수가 있기에 확실히 이야기할 수 있었다. 마치 하늘을 날 수 있었기에 하늘에 대해 논할 수 있는 것과 같았다. "인터페이스라...." "현실의 컴퓨터에서 실행되는 프로그램을 로플에서도 사용할 수 있게 만드는 일종의 변환 프로그램입니다. 그러면 지금의 컴퓨터를 대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진성의 얘기는 모든 것을 대체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현재 개발된 것들은 그래도 사용한다는 말이었다. 굉장히 어려운 작업이었지만 진성은 자신의 능력을 알고 있기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가상현실에서 컴퓨터와 비슷한 단말기를 제공하는 것은 진성에게는 시간은 걸리겠지만,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음....." 진팀장은 진성의 말에 가능성을 느꼈다. 모든 것을 새로 만들자는 것이 아니었기에 충분히 해 볼만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팀장의 생각은 달랐다. "... 진성아, 내가 보기에 그런 것들은 어느 정도 경쟁은 되겠지만 기본적으로 현재 있는 컴퓨터를 적극적으로 대체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지금 있는 것으로도 가능한데 왜 돈을 들여서 가상현실 시스템을 구입하려고 하겠냐? 시간이 지나, 컴퓨터에서는 불가능한, 가상현실만의 응용 프로그램이 나온다면 문제없겠지만 그 시간은 결코 짧지 않을 거다." 똑같아서는 원래의 것을 고수하려는 것이 사람의 심리였다. 조팀장은 그런 것까지 생각했다. 하지만 진성은 그 말에도 굽히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하는 겁니다. 하지만 곧.... 다른 메이저 소프트웨어 메이커들이 이 가상현실을 표준으로 소프트웨어를 만들도록 동기를 부여하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겠습니까?" 진성의 말은 쉬웠지만 그 많은 소프트웨어 제작사들에게 줄 만한 매력적인 동기는 없다고 봐야했다. 진팀장은 진성에게 그 점에 대해서 물었다. "진성아, 아무리 가상현실 시스템이 각광을 받는다고 해도 모든 소프트웨어 제작사들이 이쪽으로 넘어온다고 생각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기존의 컴퓨터 환경은 그리 쉽게 무시할 수 없다." 진성은 진팀장과 조팀장을 한 번 쳐다본 후에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만약에.......... 가상현실 기술을 공개한다면 어떨까요?" "뭐? 기술을 공개한다고?" "기술공개?" 진팀장과 조팀장은 진성의 엄청난 생각에 놀라고 말았다. 자소 소프트에서 최고로 중요한 이 가상현실 시스템과 관련된 기술을 공개한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진성아, 이 기술은 우리가 그 동안 고생고생 하면서 만든, 우리의 기술이다. 그런데 이런 기술을 공개한다고?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기술을 공개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무기를 버리는 것과 같다. 일본과 미국의 가상현실 관련 회사들은 그 기술 덕분에 거의 10년 가까이 기술 수준을 단축하게 되어 곧 우리와 그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 거다. 그런 일은 할 수가 없다." 회사로서는 당연한 얘기였다. 누가 돈을 들이고, 노력을 아끼지 않아 만든 기술을 아무 대가 없이 공개한다는 말인가? 말도 되지 않는 일이다. "이 기술을 배타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해서 시장이 넓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도박일수도 있겠지만 기술이 공개되면 아마도.... 그 기술을 이용한 시장에 선점하기 위해서 거의 대부분의 메이저 소프트웨어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뛰어들 겁니다. 이런 기술 자체가 차세대 컴퓨터 환경을 이루게 될 거라는 것은 확실하니까요. 그렇게 메이저 회사들이 움직이면 그에 따라 비교적 중, 소규모의 회사들도 순식간에 가상현실 시스템 환경으로 이동할 겁니다. 그러면 기술을 움켜쥐고 있을 때보다 훨씬 더 큰 시장이 생기겠지요." 진성의 이야기는 일리가 있지만 실제로 가능하다고 단언할 수는 없었다. "... 휴우.... 그건 그렇다고 쳐도 자소 소프트, 회사는 어떤 이익이 생기지?" "저는 우리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전문가들은 소프트웨어를 만들고 우리는 우리가 제일 잘 하는 것으로 그 거대한 시장을 선점하게 되면 지금보다 훨씬 나은 회사가 될 겁니다." "진성아, 구체적으로 말해 봐라." "일단 우리 회사는 게임 전문 회사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 거대한 시장에서 게임에 대해서만은 우리의 노하우와 기술을 따라올 회사는 단 하나도 없을 겁니다. 발 빠르게 움직여 로플의 상용화와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 그리고 차기 문명 온라인 버전을 통해 확실히 가상현실 게임 시장을 점유하는 겁니다. 저는 일단 시장만 형성되면 게임 부분에서는 우리가 석권하리라고 확신합니다." 진성은 미리 생각했던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진팀장은 쉽게 동의할 수 없었다. 그만큼 큰 계획이었다. "휴우.... 너무 엄청난 얘기구나. 기술 공개라니...." 진성은 멈추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하나 더 훌륭한 사업 아이템이 있습니다." "사업 아이템?" "네, 바로 이 로플 접속기입니다. 기술이 공개되어도 최소한 6개월 이내에는 누구도 이 로플의 접속기를 만들 수는 없을 겁니다. 단순히 기술을 통해 만들어 사람들에게 팔수는 없으니까요. 그만한 시간은 있어야 테스트를 통해 검증할 수 있을 테지요. 그러면 그 시간 동안에 우리는 지금의 이 접속기를 더 편하게, 그리고 디자인도 좋게 만들어 판매한다면 이 분야에서도 거의 독점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후발 주자들이 어느 정도 점유를 하겠지만 그 다음부터는 순전히 우리의 노력에 따라서 시장 점유율을 유지할 수 있느냐, 아니냐가 판가름 나겠지요." "............" 진성의 얘기는 꿈과 같았다. 기술 공개를 통한 빠른 시장의 형성과 그 시장에서 게임과 접속기를 통한 전략이라니. 하지만 시장만 형성된다면 충분히 그 가치가 있었고 지금의 회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회사가 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따라올 때, 우리는 가상현실 기술 개발에 더 투자를 해서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가상현실 회사가 된다면 가상현실 기술의 표준에 많은 영향을 줄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어쩌면 세계 최고의 기업이 될지도 모릅니다. 하하하. 너무 비약이 심한 걸까요?" 진성은 한참을 자신 있게 얘기하다가 자신의 이야기가 너무 과장된 것은 아닐까 싶어 웃음으로 마무리를 했다. 하지만 진팀장과 조팀장은 심각했다. 분명 시간이 지나면 다른 회사들도 지금의 자소 소프트가 이룬 수준까지 따라올 것이다. 가상현실이 어느 정도 수준이 된다면 차세대 기술로 인정을 받을 것은 거의 확실했다. 게다가 자소 소프트의 기술은 그 수준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었다. 특히 진팀장은 진성의 얘기가 커다란 줄기만 드러낸 말이었지만 심각하게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자소 소프트는 이런 일을 결정할 기로에 서 있는지도 몰랐다. 진팀장은 진성의 얘기를 그냥 흘러버릴 수 없었다. 그 기술 공개의 시기를 잘못 판단해 실패한다면 지금까지 확실한 가상현실 기술의 차이를 포기하는 셈일 것이다. 하지만 성공한다면 세계 최고를 바라볼 수 있는 기업이 될 것이다. "휴우... 너무 엄청난 얘기라... 그런데 진성아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냐?" 진팀장은 어떻게 보면 기술의 발전에 더러 있는 그 정확한 맥을 짚은 진성의 말에 의아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젊은 나이에 비록 개발팀장이라는 자리에 있지만 그 경험은 그리 많다고 볼 수 없었다. 그런데 기술 공개라는 건곤일척의 도박과 전 세계에 영향을 줄 엄청난 계획을 말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하하하. 팀장님, 처음에는 그냥 인터넷을 그 가상현실 내에서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가 그러면 게임인 로플 내에서 가상의 단말기를 통해 문명 온라인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지금은 프로 게이머들만 프로 전용 문명 온라인 게임기로 경기를 하고 있지만 로플이 어느 정도 활성화되면 보통의 유저들도 가상현실에서 프로 전용 문명 온라인 게임기와 동일한 환경에서 그 게임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 충분히 그럴 수 있지."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다보니 완전히 현실의 컴퓨터를 대신할 수도 있겠다 싶었죠. 그러다 이것저것 생각했고 나중에는 이 가상현실이 사회를 바꿔 놓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죠." "..... 휴우... 그렇겠구나." 진팀장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팀장, 어떻게 생각하나?" "팀장님, 아직 거칠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그리 오래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밀리터리 아트 싱글 버전이 이미 판매되었기에 다른 경쟁회사들이 그 정도 수준까지 올라오는 것은 오래 걸리겠지만, 단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진성의 말은 지금과 딱 들어맞는 겁니다. 단지, 그 기술 공개의 타이밍은 정확하게 예측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그게 관건이지." 진팀장과 조팀장은 제일 문제가 바로 그 기술공개의 타이밍이라고 결론 내렸다. 진팀장과 조팀장의 말이 끝나자 진성은 다시 말을 이었다. "..... 팀장님, 조팀장님. 조금 더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뭐? 더 할 얘기가 있어?" "네... 그냥 제 상상일 뿐이니까 가볍게 들어도 괜찮습니다." "그래? 어디 한 번 들어보자. 이번에는 무슨 얘기인지.... 자, 말해 봐라." "가상현실은 어떻게 보면 현실과 다를 게 없지 않습니까? 기술의 발전이 더 있어야겠지만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 그 섬뜩한 느낌도 느낄 수 있고 완전하지는 않지만 바람도 느낄 수 있지요." "그래서?" "사실, 제가 밀리터리 아트 싱글 버전 테스트할 때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서 느꼈던 것으로 생각해 낸 겁니다. 가상현실에서.... 현실의 놀이공간을 재연하는 겁니다. 현실보다는 그 놀이공간을 만드는 비용도 절감되고 절대 사고는 일어나지 않으니까 사고에 대한 염려도 없지요. 물론 그런 점이 오히려 긴장감을 떨어뜨릴 수도 있지만요. 그리고 가상현실에서 현실의 극장처럼 영화 상영을 위한 극장을 만드는 겁니다. 현실의 극장처럼 영화를 볼 수 있게 만드는 거지요." "뭐? 놀이공간? 영화?" 진팀장은 다시 놀랐다. 자신은 가상현실을 새로운 공간으로 인정하고는 있었지만 게임 공간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성은 단순한 게임 공간이 아니라 또 하나의 세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았다. 또 하나의 현실이니까 지금의 현실에 있는 모든 것이 그 가상현실에도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충분히 가능한 말이었다. 하지만 급격한 변화는 혼란을 초래하고 만다. "진성아, 네 말은 현실의 모든 것이 가상현실로 들어올 수 있다는 말이냐?" "바로 그 말입니다. 현실의 스포츠 경기도 가상현실에서 할 수 있지요. 또한 카 레이싱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단지 차이라면 절대 죽거나 다치지 않는다 정도겠지요." "..... 그렇겠지..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현실에서 놀이공간과 관련된 사람이나 극장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심각한 타격을 입지 않을까? 아니, 가상현실로 옮겨오는 모든 것으로 인해 현실의 사람들이 타격을 입을 게 분명한데...." "하하하. 제 말은 우리가 또는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사람들이 그런 일을 하자는 게 아닙니다. 지금 극장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가상현실에서 더 잘 극장을 운영하겠지요. 또한 놀이공간 관계자들이 가상현실의 놀이공간에 대해서도 더 잘 알겠지요. 제 말은 그런 사람들이 진출한 또 하나의 세계를 제공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 진성의 자유로운 생각에 진팀장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비록 꿈이나 환상과도 같은 얘기지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라고 단언할 수도 없었다. 새로운 공간이라니, 새로운 현실이라니. "어쩌면.... 제 생각인데. 기술 공개의 조건으로 그 가상현실 세상에 대한 소유권을 달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아마 운 좋으면 이런 것에 대해 잘 생각하지 않던 회사나 개인들은 소유권을 줄 수도 있겠죠. 그러면 우리 회사가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한계가 있는 땅과는 달리 거의 무한정으로 늘어날 수 있는 땅의 주인이 되는 거니까요. 생각해 보세요. 땅을 아주 싼 가격에 임대하기만 해도... 아마 우리 모두 일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진성의 말은 한술 더 떠서 가상현실의 땅을 소유한다는 내용이었다. 사이버 세계를 완전한 현실로 만들어 버리는 말이었다. 진팀장은 그런 진성의 말에 전율을 느꼈다. 진팀장은 이제야 비로소 자신들이 게임으로 만들었던 이 가상현실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한 것이다. 바로 신세계의 발견이었다. 진성은 이미 그 발견을 넘어 완전한 현실로 인지하고 있는 상태임을 진팀장은 알 수 있었다. 완전한 패러다임의 변화, 바로 그것이었다. 진팀장은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자신들이 하는 일이, 새 역사의 장을 여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마음에 비록 아직 계획도 제대로 서 있지 않지만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어려움과 난관에 봉착하겠지만 확실히 의미가 있는 일일 것이다. 진팀장은 진성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여러 전문가들과 비밀리에 그와 같은 논의를 시작할 때라고 확신했다. 어쩌면 이 일로 인해 자소 소프트, 아니 한국이 세계에 우뚝 설 지도 모를 것이다. "진성아, 오늘 나눈 얘기는 모두 비밀이다. 조팀장도 마찬가지네. 일단 우리 세 명만 알고 있기로 하세나. 조팀장은 이 결론에 대해 나름대로 분석을 해 보게. 진성, 너는 현재 하고 있는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 개발에 주력하면서 생각했던 내용을 조금씩 자세히 정리해 봐라. 나는 그 기술 공개가 가능한지, 어떤 타이밍이 좋을지 조사해볼 테니.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절대 비밀이다.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팀장님." 세상을 바꿀지도 모를 얘기가 자소 소프트의 작은 회의실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 제가 생각하는 진정한 가상현실입니다 ^^;; 어쩌면 조금 지겨우셨나요? 그러면 안 되는데... ㅜ.ㅜ; 조만간 큰 사건이 터질 겁니다. 지금은... 조금은.. 폭풍전야의 고요함이랄까요? 글 쓰는 게 쉽지 않네요. 작가가 힘들어할 때 독자가 할 수 있는 일? 과연 무엇일까요? ^^;; (퍽..... 질질질 ㅡ.ㅡ) 모두들 좋은 하루 되십시오. 아, 그리고 책 제목은 TGP1 이지만.. The Great Part 1으로 바뀌었습니다. 약자는 같으니... 그리 혼란스럽지 않겠지요. 좋은 날 되십시오. 재미있으면 추천해 주세요. 코멘트두요!! ------------------------------------------------------ TGP1(The Gamer Part 1) [160 회] 복수는 나의 것 진팀장은 진성의 생각에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 또 하나의 현실이라니. 그 생각대로 된다면..... 하나의 게임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에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되는 셈이다. 거대한 세계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진팀장은 냉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많은 난제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우선, 기술 공개라는 것만 해도 과연 회사 차원에서 결정해 줄 것인가. 회사란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단체다. 이런 단체가 앞날의 불확실한 가능성을 믿고 현재의 안정적인 이익을 포기할 리가 없다. 또한 처음부터 일정 부분 가상현실 시스템에 투자한 국내 뿐 아니라 해외의 기업들도 우선권을 내세워 열려진 가상현실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뛰어들 것이다. 전체가 아니라 일부만이 그런 좋은 조건을 얻는다면 어쩌면.... 또 다른 가상현실 세계가 열려 전체적으로 가상현실 자체가 분열될지도 몰랐다. 단기간에 어느 정도 완성된 모습을 보기 원한다면 대부분의 힘을 한 곳으로 모을 필요가 있었다. 진팀장은 일단 자신과 말이 통하고 오랜 시간을 같이 한 사람들부터 한 명씩 만나면서 이 새로운 생각에 대해 그 일부만을 말하고 공감대를 형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바꾸기는 힘들다. 진팀장은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로플의 상용화와 더불어 그 모든 것들이 시작될 수 있도록 조금씩 준비하기 시작했다. 진성은 자신이 한 말이 가져올 파장을 완전히는 예상하지 못하더라도 일정 부분은 알고 있었다. 자신은 직접 그런 세상을 상상했기 때문에 그로 인해 편해지기도 하겠지만 또 다른 면으로는 사회 문제가 될 수도 있을 만큼 큰 영향력을 발휘해 가상현실 자체가 사회 이슈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가상현실이 개발된 이상.... 언젠가는 이루어질 일이니까." 어쩌면 독이 될지도 모를 가상현실의 전격적인 도입에 부담감을 느끼던 진성은 그런 마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금은 소극적인 마음을 먹었다. 한 사람이 그 거대한 변화를 느끼고 감당할 수는 없었다. 그런 면에서 진성은 젊어서 도전적이지만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진성은 머릿속에서 그 아이디어에 대한 생각은 일단 제쳐 두고, 현재 급히 해야 할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의 개발을 위한 미팅 준비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인터넷 회선 속도 조정만 어느 정도 되면... 게임 자체를 조금 보완하고 미션을 늘리면 충분히 가능하겠지?" 진성은 개발팀의 팀장으로서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을 밀리터리 아트 싱글 버전의 확장판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기본적으로 시스템 자체는 거의 같기 때문에 배울 수 있는 무술의 종류를 늘리고 잠입 액션에서 사용될 미션의 종류와 그에 지원되는 무기도 대폭 강화할 작정이었다. 아직은 무리겠지만 진성은 그런 작업을 하면서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 시스템을 이용해서 로플이 상용화되기 전에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으로 프로 리그를 만들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에드워드 트레이터는 요즘 들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심각한 불면증이었다.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닐까 해서 병원에도 가 봤지만 의사들은 한결같이 스트레스성 불면증이라는 말만 하고 알약만 줄 뿐 불면증을 없애주지는 못했다. 에드워드 트레이터는 굉장히 불안했다.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까지 가득했다. 잠을 자지 못하자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불안함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과 그 주변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트레이터는 자신이 이제까지 해 왔던 일이 과연 무슨 일이었던가 조금씩 생각하게 되었다. 비록 자신의 구역에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발생했고 아직도 그 일이 오리무중에 있었지만 현재의 상황을 살펴보면 그리 위기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항상 이런 일은 있어왔기에 그냥 넘겨버리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스멀거리며 피어오르는 불안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불안함은 조금씩 때늦은 후회로 바뀌기도 했다. 조직의 조사는 동양인 거대 단체의 전면적인 개입을 나타내는 증거가 없다고 결론이 났다. 그 말은 트레이터 혼자서 그 일을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을 뜻했다. 트레이터는 그 일로도 마음이 상했지만 마음속의 불안한 그 무엇은 그 이상이었다. 트레이터는 조직의 정기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 일찍 떠났다. 항상 어디를 가던 자신을 경호하는 3명의 경호원들을 대동했지만 요즘의 그 불안함으로 인해 3명을 더 추가해 6명의 경호원과 같이 공항으로 출발했다. 모임은 은밀한 장소에서 시작되기에 트레이터 자신과 조직에서 나온 감독관 한 명만이 사전에 그 장소를 알 수 있었다. 트레이터는 편안한 뒷좌석에서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한적한 길이었다. 공항으로 가는 길 중에서도 제일 차들의 교통량이 적은 곳이었다. 트레이터는 이 한적한 곳을 지날 때마다 새로운 생각에 빠지곤 했다. 큰 고목들이 숲을 이루어 도로의 양쪽을 뒤덮은 이곳은 트레이터에게 영감을 주기도 한 곳이었다. 트레이터는 이 숲에 눈이 쌓이는 것을 보고 싶었다. 트레이터는 당장이라도 지금의 자리에서 물러나 이런 숲이 있는 곳에서 편히 지내면 이런 불안함과 불면증은 사라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트레이터는 조금이라도 잘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트레이터는 수석 경호원 다니엘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 다니엘, 공항에 도착하면 깨워주게." "네, 알겠습니다." 이미 트레이터와 5년 가까이 같이 지낸 경호원 다니엘이기에 트레이터는 믿고 잠을 잘 수 있었다. 예전에는 특급 저격수로 활동했던 적도 있었던 다니엘이었지만 트레이터를 만나 오히려 경호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오랜만의 숙면인지 트레이터는 깊은 잠에 순식간에 빠져들고 말았다. 하지만 주위에서 트레이터가 잠을 편히 자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쾅....!!" 앞에서 뭔가 터지는 듯하자 운전하던 기사는 순간적으로 핸들을 돌리며 잘 보이지는 않지만 위험하다고 판단된 부분을 피했다. 아무런 징조도 없었기에 더욱 놀랐다.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연기가 걷히자 앞서 가는 한 대의 차량이 파손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다니엘은 급히 차에서 내려 다른 경호원 3명이 타고 있는 차를 살폈다. 누군가 차에 소형 폭탄을 장치했던 것이다. 그 부분도 엔진 근처라 차는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행히 타고 있던 3명의 경호원들은 무사했다. 하지만 다니엘을 비롯해 6명의 경호원들은 이 사태를 만나자마자 무슨 일이 일어나리라 예상했다. "너는 먼저 지부장을 밖으로 대피시키고 저 차에도 폭탄이 설치되어 있는지 확인해라. 그리고 너는 조직에 연락해라. 너는 차에 숨겨둔 총을 다 꺼내고 무장할 준비를 해라." 다니엘은 빠르게 나머지 경호원들에게 말을 하고는 자신은 길 양쪽의 비교적 어두운 곳을 노려보았다. 상대가 자신들을 죽이려고 했다면 이미 끝이 났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자신들을 사냥감처럼 다루고 있음을 다니엘은 깨달았다. 화가 치밀어 오르는 일이다. 항상 그 반대쪽, 사냥꾼의 입장이언정 사냥감이 아니었던 다니엘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다니엘이 양쪽을 살피는 동안, 트레이터는 잠에서 깨어 사태를 잘 모른 채 방탄복을 입고는 길의 한쪽 옆으로 옮겨서 몸을 웅크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니엘의 지시를 받은 경호원은 무척 빠르게 무장을 끝냈다. 모두 방탄복을 입고 경호원들은 손에 자동화기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자신이라면 차를 멈추자마자 모든 상황을 종료했을 터인데 상대는 느긋하게 기다리는 듯했다. "연락은....?" 다니엘은 연락하라고 지시했던 경호원에게는 보고가 없자 다시 물었다. ".....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그곳 뿐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통신기기는 무용지물입니다." ".... 전파방해?" 다니엘은 상대가 정말 만만치 않음을 알았다. 이런 외딴 곳에 오게 만들어 여유 있게 무장을 하도록 기다린, 그 자신감을 엿볼 수 있었다. 전파방해까지 할 수 있다니. 아마도 이 부근에만 전파방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니엘은 곧바로 결정을 내렸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 연락을 먼저 하는 게 급선무였다. "너는 동쪽으로 최대한 빨리, 그리고 적의 감시를 피해 달려라. 어느 정도 떨어졌다 싶으면.... 조직에 연락을 해라. 그리고 연락한 후에는 가능하면 북쪽으로 우회해라.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휴우... 지금 출발해라." 다니엘은 경호원 한 명에서 자신들이 갈 방향과 반대방향으로 보내어 어떻게든 조직에 연락을 취할 생각이었다. 어떻게든 연락만 된다면 이 느긋한 놈들에게도 이런 두려움을 선사할 수 있을 것이다. 다니엘의 생각은 합리적이었지만 절대 그 느긋한 놈들은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다니엘의 지시를 받은 경호원은 뒤로 돌아 자동화기를 가지고 두 걸음을 뗐을 때, 머리가 수박 터지듯 박살이 나고 말았다. 저격이었다. 다니엘을 비롯해 다른 모든 사람들은 엄폐물 뒤로 숨었다. 트레이터를 제외하고 눈앞에 동료의 머리가 터져 죽는 것을 본 경호원들은 그다지 흔들리지 않았다. 아니, 두려움은 있었지만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 놈들은 우리 말을 듣고 있다." 다니엘은 그 정확한 타이밍에 저격을 한 것을 보고는 자신들의 몸 어딘가에 도청기가 있음을 확신했다. 다니엘과 경호원들은 옷을 샅샅이 뒤졌고, 꼭 필요한 것을 제외하면 모든 것을 다 버렸다. 구두의 굽도 빼어 조사를 했지만 도청기는 나오지 않았다. 다니엘은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자신들은 완전히 갇혀 있는데다가 상대는 자신들의 모든 것을 듣고, 볼 수 있다니. 이것은 사냥이 아니었다. 그냥 가둬 놓고 죽음의 공포만 가득 느끼게 만드는 짓이었다. 다니엘은 자신이 지시했던 일을 생각하고는 물었다. 차 한 대라도 움직일 수 있다면 어떻게든 해 볼 여지는 있을 것이다. "차에 폭탄이 있었나?" "아닙니다. 하지만 차, 어디에도 폭탄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차의 모든 곳을 다 찾아보지는 못했으니까요." 다니엘은 그 차를 최근에 구입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어쩌면 차 내부 깊숙이 그런 장치를 설치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단언할 수 없었기에 다니엘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다니엘은 말소리를 줄여 속삭였다. "일단 차로 간다. 가다가 내가 신호를 보내면 너는 달리는 차에서 내려 동쪽으로 움직여라. 네가 해야 할 가장 큰 일은 조직에 연락하는 것이다. 알겠나?" "알겠습니다." "자, 가자." 다니엘을 선두로 트레이터까지 같이 이제까지 타고 온 차를 향했다. 다행히 차에는 별 이상이 없어 보였다. 차에 탄 일행은 빠르게 앞을 향해 달렸다. 이제까지 왔던 길보다 가는 길이 더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가깝기에 다니엘은 그냥 앞으로 가는 것을 택했다. 차에는 폭탄이 없었던 듯, 별 이상이 없었다. "휴우... 다행이군.. 그런데 누구인지 모르지만 이렇게 쉽게 빠져나갈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다니엘은 상대의 실수이기를 바랬지만 이미 자신은 상대에게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다니엘은 곧 터널이 나온다는 표지를 보자마자 미리 차에서 뛰어내리라고 말했던 경호원에게 눈짓을 했다. 터널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다니엘은 손짓을 했고 경호원은 차에서 뛰어내렸다. 차는 터널 속으로 계속 들어갔고 뛰어내린 경호원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터널에서 나와 동쪽으로 길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트레이터는 이런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누가 자신을 이렇게 만든단 말인가? 트레이터는 그 동양인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목적도 몰랐기에 어떻게 대응할 방법도 없었다. 만약에 구역의 확장을 위한 것이라면 이해할 수도 있었겠지만 자신의 구역에 동양인들이 급격히 유입했다거나, 그런 조직들과의 마찰이 생긴 일은 전혀 없었다. 그 사람들은 갑자기 나타나서 일을 벌이고는 사라져버렸다. 아무런 동기가 없는 일일수록 더 예측하기 힘들었다. "도대체......." 불행히도 트레이터는 말을 끝낼 수가 없었다. "쾅!" 마음을 놓고 있던 트레이터는 갑작스런 폭발에 너무나 놀랐다. 다니엘과 나머지 3명의 경호원들도 마찬가지였다. 터널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차에서 폭발이 일어나다니. 다니엘은 급히 차에서 내려 살폈다. 엔진은 완전히 망가져버렸다. 정말 어디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니엘은 이제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 차에서 관심을 끊고 터널을 보았다. 확실히 양 옆은 막혔고 앞, 아니면 뒤로 가야 했다. 다니엘은 확실히 상대의 함정에 빠졌음을 알았다. 차라리 그 때, 한곳으로 천천히 이동하거나 그 자리에서 그대로 있었다면 나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자신의 실수라기보다는 상대가 대단함을 느꼈다. "... 완전히 잡힌 것인가?" 여전히 방탄복에 자동화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지리적 불리함과 탄약이 얼마 없었기에 완전히 당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니엘은 트레이터에게 물었다. "지부장님, 다른 조직의 표적이 된 것 같습니다." ".... 방법이 없겠나?" "연락을 제때 해 준다면.... 아마도 우리의 복수는 해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복수라....... 그렇군." 그 때, 터널의 입구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이며 다가왔다. 차에 두 사람이 타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동양인이었다. "하하. 모두 안녕들 하시오?" 유창한 영어였다. 맑은 목소리에 전혀 격의 없는 인사는 오히려 다니엘과 트레이터를 당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다니엘은 상대를 바라보았지만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 당신은 누군가?" "나? 하하하. 그거야 알 필요가 없지. 나는 다른 사람들은 필요 없어. 저, 늙은이만 있으면 되네. 나도 부탁받은 거라서. 자, 잘 해결되면 좋겠는데...." "........" 다니엘은 다행히 자신들 모두를 죽여 증거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는 말에 안도했지만 상대의 말을 완전히 믿을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다니엘은 여전히 총으로 겨누면서 말했다. "그것은 힘들겠는데..."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모두 다 죽어야지." 동양인 사내의 말은 얼음장 같았다. 너무나 차가워 시릴 정도였다. 그 말에 다니엘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당신도 같이 죽겠지?" "뭐? 하하하. 나와 같이 죽는다고... 어이, 이봐. 이 녀석이 나와 같이 죽고 싶대.. 하하하. 남자 녀석이 이렇게 같이 죽고 싶다니.... 사양하네. 나는 남자와 같이 죽고 싶은 마음은 눈꼽만큼도 없지. 적어도 눈에 확 들어올 미인이 아니면 곤란하지." "........" 다니엘은 자신이 총을 겨누고 있어도 여전히 농담을 하고 있는 상대에게 조금은 두려움을 느꼈다. 절대적인 자신감이 없다면 쉽게 총 앞에서 이런 만용을 부리기 힘들었다. 게다가 상대는 절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였다. 그런데 단 둘이서 총도 없이 나타났다는 말은 뭔가 믿는 것이 있음을 알았다. "지부장을 차에서 멀리 데려가." 혹시 차에 또 다른 폭탄이 있지는 않을까 염려한 다니엘은 차에서 거리를 띠우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본 동양인 남자는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차에는 이제 폭탄이 없지. 이제 폭탄이 있을 필요가 없거든." "....... 무엇을 원하시오?" 자신을 꿰뚫어보는 상대에게 다니엘은 힘없이 말했다. "아까도 말했잖나. 저 늙은이를 원한다고. 나는 솔직하고 정직한 사람이지. 저 노인만 넘긴다면 너희들은 모두 보내주지. 아, 내가 너희 조직들에게 전할 말만 확실하게 전해주면 다음부터는 볼 필요가 없을 거야. 하하하." 다니엘은 믿을 수 없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쉽게 자신들이 경호했던 대상을 넘길 수는 없었다. 잠시 머뭇거리는데 그 동양인 남자의 말이 들렸다. "음... 결정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것 같군. 어쩌지? 나는 시간이 없는데.. 결정하는데 도움을 주도록 하지. 하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 사람은 순식간에 다니엘에게로 다가왔다. 다니엘은 대경질색하면서 총을 발사했지만 이미 앞서 있던 동양인 남자의 손이 총구의 방향을 돌린 후였다. 동양인 남자들은 정확히 관절만을 공격해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만들었다. 이런 가까운 거리에서 총으로 어떻게 해 볼 수도 없을 정도로 빠른 동작이었다. "하하. 이제 결정을 쉽게 내릴 수 있겠지. 자, 나는 약속대로 저 노인만 데려갈 테니... 다들, 조금 아플 테지만 조금만 기다리라고. 터널 앞에서 내린 자네의 동료가 연락할 테니..... 하하하하." "...... 으윽..." 팔과 다리가 부러져 고통을 참고 있던 다니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으면서 이런 일을 벌인 상대의 말에 은연중 고통스런 신음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다니엘은 모든 힘을 끌어올려 트레이터를 데리고 멀어져가는 동양인 남자에게 외쳤다. ".... 당신은.... 누구인가?" "나? 하하. 가르쳐 주기는 싫은데, 알고 싶으면 직접 알아봐." 동양인 남자는 트레이터를 뒷좌석에 앉히고는 차를 몰고 유유히 사라졌다. 다니엘을 포함해 4명의 경호원들은 터널의 가운데에서 일어서지도 못한 채 누군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다니엘은 이런 수모는 처음이었기에 피가 나도록 이를 악물고 있었다. "... 두고 보자." 오래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왔지만 이미 아무런 흔적도 없이 동양인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 녀석이 그 에드워드 트레이터라는 놈인가?" "예,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 녀석이 그 책임자인가?" "이야기를 들어봐야겠지만 그 위의 조직은 다가가기 힘들고 이제까지의 정황으로 봐서는 이 사람이 결정한 일 같습니다." "음.... 그래. 깨워라." 왕현추의 말에 의식을 잃었던 트레이터에게 차가운 물이 떨어졌다. 순간 정신이 든 트레이터는 꽤 시간이 흘러서야 자신이 납치되었음을 알았다. 왕현추는 트레이터가 지금 이 상황을 확실히 알 때까지 기다렸다. "당신이 에드워드 트레이터인가?" 옆의 젊은 남자가 통역했다. "으.... 당신은 누군가?" "당신이 트레이터인가?" 왕현추는 트레이터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물었다. 확실히 지금 이 상황에서 누가 주도권을 잡고 있는지 트레에터에게 인식시킬 필요가 있었다. ".... 그렇소. 그런데 당신은 누구요?" "트레이터, 당신은 라스베가스에서의 저격을 명령한 적이 있나?" 트레이터는 검버섯이 난 노인의 말을 듣고는 곧 이 사람들이 자신을 납치한 이유에 대해서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 라스베가스의 일은 특이했기에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 저격은 한국의 젊은 아이였고 게다가 죽지도 않았는데... 트레이터는 그 아이가 거의 고아나 다름없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뒤탈이 없으리라 생각했었다. 뭔가 착오임을 확실히 깨달았다. "그 아이와..... 무슨 관계가 있나?" "누구의 명령인가?" 왕현추는 담담하지만 힘 있게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트레이터는 이 검버섯 노인에게서 점차 커지는 압박감을 받았다. 트레이터는 이 검버섯 노인이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트레이터는 검버섯 노인과 그 옆에 있는 동양인 남자가 얼굴을 가리지 않았음을 새삼 알았다. "말하면 살려줄 수 있는가?" "살려달라고? 허허허. 염치도 좋군. 당신의 말에 따라 고려해 보도록 하지." 처음으로 왕현추가 트레이터의 말에 대답을 했다. 트레이터는 이미 칼자루는 상대가 쥐고 있음을 알았다. 트레이터의 말투부터 바뀌었다. "..... 위에서 지시가 내려왔소. 물론 그 아이로 정한 것은 나지만....." "지시?"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여러 가지 이유일 것이오. 나는 그 지시에서 가장 적합한 대상을 찾았고..... 그 사람이 그 때, 라스베가스에서 저격을 당한 그 아이일 뿐이오." "이유에 대해 말해 보게." "..... 나를 이렇게 데려올 수 있는 능력이라면..... 그 이유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것 같은데.... 하긴, 확인은 해야겠지. 미국 내 문명 온라인 프로 리그의 활성화, 가상현실과 관련해서 한국의 독주를 막기 위한 조치, 미국 내에 있는 동양인들에 대한 경고, 거기에 앞으로 미국으로 진출할 동양인들에 대한 경고까지 포함한 것이오." ".........." 잠시 생각하던 왕현추는 물었다. "당신이 속한 조직은?" "X5 라고 하는데..... 일종의 점조직이오. 사실 나와 같은 지부장들이 몇 더 있는데 그 사람들을 관리하는 사람이 딱 한 명 있소. 그 위로도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사람은 한 사람이오." "그 사람이 누구요?" 트레이터는 이미 포기하고 있었다. 자신이 했던 일에 어느 정도는 후회했기에 오히려 검버섯 노인, 왕현추에게 충고했다. "...... 그 아이에 대한 복수라면.. 내 선에서 끝내시오. X5를 건드렸다가는 아마도 미국 내에 있는 동양인들이 많은 피해를 당할지도 모르오. 휴우.." "그것은 우리가 정할 것이니 당신은 말만 하시오." "어쩔 수가 없군. 패트릭 슈나이더요. 하원 의원이기도 하지." "패트릭 슈나이더...." 왕현추는 점점 더 일이 커진다고 생각했다. 예상처럼 이 트레이터라는 사람이 진성을 해친, 일차적인 책임이 있지만 그 조직 자체에서 그런 지시가 내려왔다니. 왕현추는 미국 하원 의원이 점조직의 관리를 하는 거대 조직, X5의 존재에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멈춰야 할 때임을 왕현추는 알았다. 트레이터의 말이 아니더라도 더 이상의 자극은 오히려 미국 내에 있는 동양인들에게 그 피해가 갈 것이다. "그곳, 구룡성으로 보내라. 하루에 한 번씩 확인해라." "예, 알겠습니다." 티먼과 아론이 먼저 가 있는 그곳, 구룡성은 홍콩에 있는 지하 감옥을 말했다. 특히 왕현추가 말하는 그곳은 그 중에서도 가장 지하에 있어 탈출 자체가 힘들었다. 게다가 각 방에는 전담하는 감시인이 있어 무엇을 하는지, 일정한 주기로 확인을 했다. 들어가면 빠져나오기 힘든 곳, 구룡성으로 가는 것이 트레이터의 운명이었다. 왕현추는 한국으로 들어와 진성에게 이제까지의 모든 일을 다 설명했다. 그 저격수와 중간 책임자 그리고 실질적인 책임자 모두 그런 다시 나오기 힘든 곳에 있다는 말을 끝으로 왕현추의 말은 끝이 났다. 진성은 생각보다 더 어마어마한 얘기에 너무 놀랐다. 하원 의원까지 연결되어 있다니. "그 X5 라는 조직이... 다시 움직이지는 않겠습니까?" "... 단언할 수는 없지만 당분간은....." "......." "진성아, 나와 유맹의 생각은 이제 이것으로 그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한다. 정말 지시를 내린 사람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지만 거기까지 파고 들어가기에는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많이 볼 것 같다. 어떠냐?" "저야... 그 사건 잊은 지 오래 되었으니까요.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그래... 그렇게 하자꾸나." 시원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상대에 대해서 알아낸 것만으로 위안을 삼자는 왕현추의 말에 진성은 흔쾌히 동의했다. 더 이상의 접근은 어쩌면 벼룩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태우는 격일지도 몰랐다. ------------------------------------------ 거창한 제목에 비해.... 끝이 ^^;; 오히려 현실적이라 생각합니다(ㅡ.ㅡ). 하지만 이게 끝은 아닌 것... 다 알고 계시죠? 곪은 것은 언젠가 터지죠... ^^ 자, 이제 다시 프로 리그로 잠시 돌아갈 겁니다. 그리고 로플의 개발도 서둘러야지요. TGP1의 마지막을 향하여~~~ (퍽... 질질..~~~~) (1월 17일 책 출간 예정입니다 ^^) 재미있다면 추천!!! ------------------------------------------ TGP1(The Gamer Part 1) [161 회] 리그 시작 한국 뿐 아니라 일본, 중국 그리고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에 걸쳐 문명 온라인의 프로 리그가 시작되었다. 모두 합쳐 10개국에 달하는 나라가 단 하나의 게임으로 프로 리그를 같은 시기에 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로 인해 문명 온라인 아시아 운영위원회와 문명 온라인 북미 운영위원회 그리고 문명 온라인 유럽 운영위원회가 만들어져서 각 대륙의 리그 운영을 책임지기로 했다. 일단은 각국의 프로 리그를 통해 일정 팀과 개인을 선발하고 그 다음에 각 대륙에서 월드 리그에 나갈 팀을 뽑을 대륙 리그를 열기로 결정했다. 원래 국내의 리그 후에 바로 월드 리그로 직행하려고 했지만 팀의 수가 많아지자 대륙 리그를 신설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프로 리그 개막식은 서울에서 열렸다. 이미 전국적으로 인기를 얻었고 다양한 팀들이 많은 지역을 연고로 했기에 야구, 축구, 농구보다 더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지역별로 자신의 연고의 프로팀들을 위한 서포터가 조직되었고 그로 인해 각 지역의 게임 센터는 굉장히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드디어 시작이네." 서울 뿐 아니라 전국에서 가장 큰 게임 센터인 게임 큐브 대기실에서 개막식이 열리기를 기다리던 현준은 옆에 있던 한석에게 말했다. 예전과 달리 이번 리그 개막식에는 게임이 없어 긴장하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그렇게 노력하고 연습했던 그 성과가 이제 드러난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잘 할 수 있겠지?" "당연하지." 한석의 말에 현준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대답했다. 다른 프로팀들도 뼈를 깎는 연습을 했겠지만 자소 소프트의 프로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소 소프트에서는 프로팀 전용 실내 수영장을 만들 정도로 투자를 했기에 자소 소프트 프로팀은 더 힘을 낼 수밖에 없었다. "자, 모두 모여 봐라." 자소 소프트 프로구단의 수석 팀장인 서재필의 말이었다. 게이머들과 관리팀원 모두 서재필을 중심으로 모였다. 그리고 그 뒤에는 경호팀까지 모여 섰다. 서재필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다 쳐다보면서 말문을 열었다. "지금까지 고생했다. 프로 게이머들은 나름대로 부담감도 있을 텐데 열심히 연습에 임해 주었고 관리팀은 그런 게이머들을 잘 돌본다고 수고했다. 경호팀도 마찬가지다. 아무런 불상사가 없는 것은 다 경호팀의 공로다. 이제 시작이다. 시작은 반이기도 하지만 나머지 반이 남았다는 말도 된다. 다들 그 나머지 반을 위해서 수고하도록 하자. 이 리그가 끝날 때까지 이 순간의 결심을 잊지 않기 바란다. 자, 나가자!" 서재필의 말에 나머지 팀원들은 큰 소리로 따라 외쳤다. 서재필의 외침에 팀원들은 큰 소리로 반복했다. "나가자" "이기자!" "이기자!" "화이팅!" "화이팅!" "자, 프로 선수들은 밖으로 나오도록!" 관리팀의 코디들이 마지막으로 선수들에게 달라붙어 화장과 옷매무새를 살핀 뒤에 선수들은 모두 대기실 밖으로 나갔다. 선수들의 앞뒤로 매서운 눈빛의 경호원들이 이준의 지시를 무선 이어폰을 통해 들으면서 철통같은 경호를 자랑했다. 서재필은 힐끔 뒤를 쳐다보았다. 확실히 모든 사람들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자, 올라간다." 서재필이 올라가자 그 뒤로 현준을 비롯해서 자소 소프트의 프로구단, 프로 선수들이 한 명씩 무대로 올라갔다. 경호원들 중에 몇 명은 입구에서 지키고 있었고 나머지 경호원들은 무대를 중심으로 그 아래에 흩어져 관중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일사분란한 움직임이었다.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먼저 제 2차 문명 온라인 국내 리그의 우승팀이자 메이저 리그의 당당한 우승팀인 자소 소프트를 소개합니다." 장내 아나운서의 리듬감 있는 소개에 관중들은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 올라가던 자소 소프트의 선수들조차 놀랄 정도였다. "와!!" "자소 소프트!!" "한신, 사신!!" "리틀 스키피오도 있다!" 자소 소프트 프로구단은 제일 먼저 올라왔다. 전년도 국내 리그 우승팀이자 메이저 리그의 우승팀인 자소 소프트의 선수들이 일제히 올라오자 장내는 환호성으로 가득했다. 서울 연고팀인데다가 한국, 아니 세계 최고의 프로팀이었기에 그 인기는 가히 최고였다. 현준을 시작으로 관중을 향해 손을 흔들자 그 환호는 발 구르는 소리로 이어졌다. 곧 이어 쌍룡은행, 삼선전자를 위시해서 다 합쳐서 16개의 프로팀들이 무대에 등장했다. 자소 소프트처럼 열광적이지는 않았지만 많은 팬들은 프로팀들의 입장에 박수로 열렬히 환영했다. 곧 프로팀들의 입장이 끝나자 장내 아나운서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부터 제 3차 문명 온라인 프로 리그의 개막식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개막식의 진행자가 무대로 나올 것입니다." 관중들은 과연 사회가 누구일지 궁금해 했다. 보통 리그 개막식의 일정이 발표됨과 동시에 그 사회자로 알려지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주관하는 곳인 운영위원회에서 철저하게 그에 대한 보안 유지를 해서 아무도 이번 개막의 사회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런 분위기여서 관중들 뿐 아니라 생중계로 그 장면을 보고 있던 많은 팬들은 관심을 집중했다. 조명이 어두워지더니 무대만 밝아졌다. 그와 함께 한 사람이 깔끔한 턱시도를 입은 채 무대의 중앙으로 나왔다. 관중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 사람의 모습에 놀라고 말았다. 바로 게이머 스키피오, 강진성이었다. 운영위원회는 과연 누구에게 개막식의 사회를 맡길까 고민했다. 예전에 그런 경험이 있던 MC 김재동이 그 물망에 올랐지만 게임을 잘 모른다는 이유로 배제되었다. 다음으로 여러 사람이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운영위원회 중 한 사람이 이번 대회에 불참하게 된 게이머 스키피오가 어떨까 하는 말을 꺼냈다. 몇 사람이 무대 진행 경험도 없는 게이머를 큰 무대에 세우기는 힘들다고 말했지만 조금 진행에 무리가 있다고 해도 게이머 스키피오라면 개막식에 온 사람들을 100% 만족시킬 수 있는 진행자라는 의견에는 동의했다. 처음 이야기를 꺼낸 사람은 게이머 스키피오 외에 충분히 진행을 매끄럽게 도와줄 사람이 있다면 상관없다는 말을 꺼내자 운영위원회는 그 의견을 채택할 수 있었다. 진성은 당연히 그런 제의를 당연히 반려했지만 워낙 몇 번에 걸쳐 이야기를 하는데다가 회사에서도 원해 진성은 어쩔 수 없이 문명 온라인 프로 리그 개막의 사회를 맡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조금 시간이 흘러 진성은 자신과 같이 사회를 보게 될 사람이 인기 탤런트 정효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나마 몇 번 안면이 있고 요즘 정효진이 여러 프로그램의 MC로 활동하고 있기기에 다행이라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게이머 스키피오, 강진성입니다." "와...!!! 강. 진. 성!!" "스키피오다." "스키피오가 사회라니.. 하하하." "최고다. 최고!" 진성의 인사말이 끝나자 관중들은 일제히 환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진성은 다음에 준비된 멘트를 할 수가 없었다. 관중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기에 더 기뻐하며 환호했다. 게이머 스키피오가 이번 리그에 참가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못마땅했던 팬들은 이런 이벤트에 마음이 풀리고 말았다. 한동안 관중들의 환호에 진행을 못한 진성은 관중들이 조금 조용해지자 말을 이었다. "여러분, 계속 그러시면 저, 다시 안으로 들어갑니다." "하하하하하하..." 스키피오, 진성의 말에 관중들은 크게 웃고는 조용히 했다. "저와 같이 진행을 하게 될 분을 한 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험험.. 브라운관의 신데렐라, 정효진 양을 소개합니다. 박수로 환영해 주십시오." "와.... 정효진이다!" "정효진? 스키피오와 무슨 사이인가?" "아.. 잘 어울린다!" 정효진은 진성이 나온 곳과 반대인 곳에서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다. 턱시도를 입은 진성과 하얀 드레스를 입은 정효진은 마치 결혼식을 연상케 했다. 그 순간, 관중 중 한 무리가 시작한 소리가 전체로 울려 퍼졌다. ".. 딴 딴따딴... 딴 딴따딴.. 딴 따따딴따따 딴 따따딴..." 독일의 멘델스존이 작곡한 '한 여름 밤의 꿈'이었다. 결혼 행진곡, 웨딩 마치가 관중들의 입에서 울려 퍼지자 진성과 정효진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코디들이 그런 의미로 컨셉을 잡기는 했지만 관중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험험... 여러분.. 오늘 왜 이러십니까?" 좀처럼 당황하지 않던 진성도 얼굴이 붉을 정도로 당황해서는 관중에게 그만하라는 말을 했지만 관중들은 그 반응에 더 재미있다는 듯, 목소리를 높여서 말했다. "하하하하. 스키피오 잘 어울립니다!" "결혼해요!!" "그냥 오늘 해치우죠!" 가만히 있던 정효진은 마이크를 쥐지 않은 왼손을 올리더니 입에 가져다 댔다. 관중들은 서서히 조용해졌다. 정효진은 그런 관중들을 보고는 처음으로 말했다. "여러분들, 저와 진성씨가 잘 어울리나요?" 정효진의 물음에 관중들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하하하. 그럼요!!" "너무 잘 어울려요!" 정효진은 잠깐 조용히 했다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걸 어쩌죠? 저는 진성씨 말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정효진의 깜찍한 폭탄 발언에 관중들은 환호를 했다. 관중들은 게임을 하지 않은 이 개막식에 온 것을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누구에요?" "정효진! 밝혀라! 밝혀라!" 관중들의 성화에도 정효진은 능숙하게 말을 돌리며 이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진성에게 순서를 진행하게 하기 위해 이름을 불렀다. "그건.. 밝힐 수 없어요. 자, 지금부터 문명 온라인의 프로 리그 개막식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진성씨?" "네? 아.. 네.. 처음으로 문명 온라인 한국 운영위원회 위원장이진 최덕규님께서 나오셔서 개막식 선언이 아니라..... 휴우... 다 같이 국민의례를 하겠습니다." "하하하하.. 국민의례.. 하하.." 진성은 그렇지 않아도 당황해 있었는데 갑자기 자신을 부르자 그 뒤에 있던 것을 그대로 읽어 관중들을 즐겁게 만들었다. 다시 당황해서 국민의례를 시작한다고 말했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하지만 관중들은 물론 시청하고 있던 젊은 사람들은 노련한 진행자보다 진성과 같이 풋풋하면서도 알려진 게이머가 진행을 하니 더 재미가 있었다. 진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은 괜찮아졌지만 처음의 그 실수를 잊을 수가 없었다. 게임이 없는 개막식에 팬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운영위원회는 조금 색다른 행사를 준비했다. 생중계는 1부까지였다. 1부인 개막식이 끝이 나고 곧 시작된 2부에서 미리 제작한 연예인과 다름없는 인기를 누리는 게이머들의 연습 장면과 개개인의 인터뷰를 대형 스크린에서 방영했다. 또한 한 사람의 리포터는 관중과, 다른 한 사람의 리포터가 대기실을 찾아가 그 게이머에게 관중이 원하는 질문을 직접 묻고 답하는 행사를 가짐으로 차별화 시켰다. 그런 운영위원회의 생각은 적중했다. 많은 관중들이 그런 모습을 디지털 레코더에 녹화하기도 했다. 특히 평소 정효진과 가깝다는 소문이 난 현준의 경우, 관중들이 대답하기 힘든 질문을 해서 현준은 꽤나 곤혹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프로 리그의 개막식은 무사히 끝이 났고 곧 치열한 프로 리그가 시작되었다. "휴우......." 새벽에 일어난 진성은 꿈에 나타난 그 '국민의례' 사건에 잠시 한숨을 쉬고는 다른 사람이 깰까봐 3층의 방에서 1층으로 살글살금 소리를 죽여서 내려왔다. 1층에 막 내려왔을 때, 뒤에서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진성이니? 이것 마시고 운동해라." 현준 어머니였다. "아... 아주머니. 벌써 일어나셨어요?" "너 때문에 일어났다. 자, 몸에 좋은 것이니까 쭉 마셔라." "예.. 고맙습니다." "진성아, 그럴 때는 그냥 잘 먹겠습니다 말하면 된단다." 현준 어머니의 말에 진성은 웃으며 말했다. "아.. 예.. 잘 먹겠습니다." "호호. 그래, 운동 잘 해라. 내가 맛있는 걸로 준비해 놓을 테니..." 진성은 목검을 들고는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가을날의 새벽은 약간 쌀쌀했다. 진성은 평소 운동하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휴우.. " 진성은 아직도 어제의 그 일이 생생했다. 평소에 부끄러운 것도 없었고 당황할 만한 일도 거의 없었던 진성은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진성 자신도 모자란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특히 개막식이 끝나고 나서 현준이 그 일을 계속 물고 늘어지면서 자신을 부를 때 계속 '국민의례'라고 부르자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한편으로는 그런 부끄러운 일이 창피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생각에 사람에게 가끔씩, 이런 일은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잠시 한숨을 내 쉰 진성은 정신을 가다듬고는 팔극진결을 펼치기 시작했다. 축지법, 일체의 묘리가 팔극진결에 조금씩 배여 날 정도로 팔극진결은 완숙미가 넘쳤다. 누구라도 진성을 단 한 번도 놓치지 않고 팔극진결을 펼치는 동안 볼 수 있을 사람은 없었다. 몸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문득 자신이 쫓고 있는 진성을 놓치는 현상이 생겨났다. 진성 자신은 잘 몰랐지만 진성의 동작은 이미 눈으로 쫓기는 힘든 경지까지 이르게 되었다. 진성에게 팔극진결은 평안함의 원동력이자 사부 유조를 추억할 수 있는 시간일 뿐이었다. 진성은 이윽고 목검을 쥐고 있었다. 진성은 아직 무명비검의 끝자락을 쥐고 있었지만 이미 무명비검을 돌파했다고 생각했다. 단지 무명비검을 능숙하게 다뤄 그로 인한 불상사가 없도록 하기 위해 시간을 들여서 무명비검을 수련하고 있었다. 무명비검을 이룬 결과로 진성에게 상대의 방어는 그리 의미가 없었다. 아니, 상대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있었다. 이제 진성은 다른 사람을 상대하는 경지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진성에게 있어 상대는, 다른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자기 자신을 말했다. 진성은 스스로를 경계해서 수련하게 되었다. 진성의 목검은 단순했다. 수평으로 천천히 휘두르거나 머리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내리는 것뿐이었다. 그 단순함 속에 때로는 공간을 뛰어넘기도 했고, 공간을 가르기도 했지만 워낙 천천히 움직였기에 그런 것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진성은 목검을 한쪽에 세워 두고는 팔괘장을 펼쳤다. 진성은 팔괘장을 통해 방어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고 있었다. 이제까지 공격을 위한 움직임으로 방어를 생각했던 진성은 진정으로 단단한 방어를 팔괘장을 수련하면서 느낄 수 있었다. 진성은 팔괘장을 연습하면서 상대를 다치지 않게 물리칠 수 있는 방법도 어느 정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경지의 차이가 많이 나면 팔극신권을 사용해도 충분히 가능했지만 비슷한 경지라면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고 싸우기가 힘들 것이다. 그런데 이 팔괘장을 통해 원의 의미와 방어의 깊은 묘리를 조금씩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특히 팔괘장을 가르쳐 준 손주황의 짧은 몇 마디에 놀랄만한 깊은 묘리가 있음을 깨달은 진성은 그 긴 시간만이 가르쳐 줄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있음을 확신했다. 진성의 마음은 더욱 더 잔잔해졌다. 진성은 팔괘장에 익숙하면 익숙할수록 팔극진결의 연습 때 팔괘장이 섞이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은 그렇게 하려고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몸이 그런 움직임으로 서서히 바뀌었다. 팔극진결을 이제 자신의 뜻이 아닌 몸이 원하는 방향으로 수련했기에 그 변화를 진성은 오히려 관찰하고 있었다. 아직 왜 그렇게 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다지 나쁜 변화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팔괘장을 한참 동안이나 움직인 진성은 몸이 한결 더 개운함을 느꼈다. 진성은 요즘 자신이 무척이나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비록 사고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었지만 이런 좋은 집에서 친구의 가족들과 같이 살고 그 가족들도 마치 자신을 한 가족처럼 잘 해 주었다. 또한 사부를 만났다가 잃었지만 그로 인해 얻은 무술로 인해 스스로의 건강 뿐 아니라 좋은 사람들과 만날 수 있었다. 하고 싶은 일인 프로 게이머로 이름도 알려졌고 지금은 게임 개발자로 일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해 볼 때, 무척이나 행복함을 알 수 있었다. 진성은 자신이 그 동안 너무 받고 살기만 한 것은 아닐까 되물었다. 진성 자신의 무공이 서서히 더 이상 다른 사람과의 투쟁이 아니라 스스로의 투쟁으로 바뀌자 그 생각도 조금씩 변했다. "이제 들어왔니? 씻고 다 같이 밥 먹게 현준이와 현석이 좀 깨워서 내려오너라." "네, 알겠습니다. 어머니." "..... 어머니?" 진성에게 간단히 말하고는 돌아서던 현준 어머니는 진성의 대답에 얼어붙고 말았다. 분명 자신은 진성의 어머니라고 생각했지만 진성에게 그런 내색도 하지 않았고 진성에게 그런 것을 원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분명 그런 것을 원했다. ".... 진성아, 방금 어머니라고 했니?" "... 어머니, 법적으로 제가 어머니의 아들은 되지 못한다고 해도... 어머니라고 불러 드려도 될까요?" "지... 진성아.. 고맙다.." "뭘요, 제가 다 깨워서 내려올게요." 진성은 쑥스러웠다. 생각난 것을 일단 저질러야 앞으로도 그렇게 생활할 수 있기에 현준 어머니께 말을 했는데 예상보다 더 좋아하시니 오히려 진성이 더 당황했다. 진성은 몇 걸음에 3층으로 올라가 현준을 깨웠다. "진현준, 일어나라. 밥먹자." "아.... 국민의례구나. 그래 밥 먹자. 밥 먹어야 국민의례도 할 수 있지. 동해물과.. 백두......... 커억!" 진성은 가볍게 공중으로 점프를 해서는 왼쪽 팔꿈치로 정확하게 현준의 배를 가격했다. 현준은 비명도 지를 수 없었다. 충격이 큰 모양인지 현준은 곧바로 튀어 일어났다. "으... 으... 지.. 진성, 너무 한 거 아니야? 으.. 죽을 지도 모르겠다.." "뭐? 죽어? 음.. 내가 다 낫게 해 주지. 이리 와봐." "으... 아니다. 밥 먹으러 가자. 으......." 현준은 손사래를 치면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진성 역시 웃으며 나갔다. "현석아, 밥 먹자." "아.. 예.. 잠깐만요." 현석은 미리 일어난 듯 곧 방문을 열고 나왔다. 현준의 찡그린 얼굴을 보자 현석은 배시시 웃으며 형을 놀렸다. "형, 진성이 형한테 개겼구나. 하하하. 내 그럴 줄 알았지. 항상 이 시간에는 일어나야 한다고. 하하하. 그게 오래 사는 비결이지. 암, 그렇고 말고." "... 으.. 그래. 너 잘 났다!" 진성은 유쾌한 두 형제, 현준과 현석과 같이 1층으로 내려와 식당으로 들어왔다. 식당에는 푸짐한 음식이 가득했다. 현준 아버지, 진팀장은 이미 와 있었다. 진성이 들어오자 현준 아버지는 진성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진성이 앉았는데도 계속 쳐다보자 진성은 의아해서 물었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아니." "그런데....?" "너, 나한테 할 말.. 없냐?" 갑자기 무슨 할 말 없냐는 말에 진성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리 생각해도 집에서 할 말은 없었다. "네? 제가 무슨 말을......." "아버지." "네?" 아버지라는 말에 진성은 놀랐다. 무슨 아버지를 말하는지 알 리가 없었다. "아버지라고 불러야지." "네?" "사람 차별하는 것은 아니겠지. 자, 불러봐라!" 진성은 이제야 현준 아버지의 뜬금없는 말이 무엇인지 알았다. 현준 어머니에게 어머니라 불렀으니 자신에게도 아버지라 부르라는 소리였다. 진성은 그 말이 무엇인지 알았지만 이렇게 다 있는 앞에서 말하기가 조금 부끄러웠다. "아.... 아저씨......." "어? 진성아, 사람 차별은 아주 못.된. 짓이란다. 아주 못된 짓이지. 그렇고 말고." "..그.. 그래도..." "어허..!!!" "........ 아... 버..지.." "하하하하. 바로 그거다. 이제부터 그렇게 불러라. 한 번 부르기가 그렇지 앞으로는 쉬울 거다. 빨리 밥 좀 주구려. 배가 무척이나 고프니까. 하하하." 진팀장의 입이 귀에 걸렸다. 현준과 현석은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르다가 진성의 말을 듣고는 놀라버렸다. 그리고 곧 이해해서는 같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진성아 축하한다. 이것을 축하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 이렇게 기쁜 날, 국민의례를 빠뜨릴 수가 없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하하하. 하하하하.. 으.. 배 아파..." ".........." 현준은 기회를 잡았다 싶더니 곧바로 국민의례를 말했고 현석은 그 말에 배꼽을 잡고 웃어댔다. 진성은 얼굴이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현준을 노려보았다. 현준은 진성을 보지 않고 끝까지 애국가를 다 부르는 저력을 발휘했다. 현준은 나중 일은 생각하지 않기로 한 모양이었다. "나중에 보자." "그래, 오늘도 수고하고.. 나중에 보자." 현준과 같이 차를 타고 온 진성은 엘리베이터에서 헤어졌다. 진성은 빨리 로플팀의 요람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미리 와 있던 나현수 프로그램 팀장이 들어오는 진성을 보고는 외쳤다. "강팀장, 어제 개막식 잘 봤어! 끝내주던데..." "....... 안 보셔도 되는데요.." "어허..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면 안 되지. 그나저나 강팀장 정말 그 정효진이라는 탤런트와 안 사귀나? 처음 본 것 같지 않고 서로 호흡도 잘 맞던데..?" "......." 인터넷 뿐 아니라 스포츠 신문에도 정효진의 다른 사람이 있다는 말은 오히려 게이머 스키피오, 진성과 정효진이 사귀는 증거 중의 하나라는 말이 기사화 되었다. 둘이 사귀기 때문에 그런 질문에 엉겹결에 반사적으로 그런 부정하는 말이 나갔다는 게 그 기사의 주장이었다. 사실, 정효진이 사귀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어도 좋아하는 사람은 게이머 한신, 진현준이었다. 몇 번 보았고 김재동을 통해 아는 사이었기에 부담 없이 진행했던 것이 사람들의 모습에는 어울리게 보인 모양이었다. 진성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냥 스쳐서 요람에 마련된 팀장실로 들어갔다. 원래 여러 개의 비품실 중 하나를 비워 만들었기에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팀장실이라고 말할 정도는 되었다. 자신의 의자에 깊숙이 앉은 진성은 한숨을 푹 쉬고 말았다. "휴우.. 당분간은 귀찮겠네." ------------------------------------------------- 잠깐 쉬어가야죠!!!! 여러분들의 코멘트와 추천에 감사드립니다!! 꾸벅~~ 앞으로도 좋은 글로 보답을.. 하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재미있다면 추천을!!! ------------------------------------------------- TGP1(The Gamer Part 1) [162 회] 리그 시작 진성이 주축이 되어 개발하는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은 순조롭게 그 과정이 풀려갔다. 정해 놓았던 시일보다 훨씬 더 빠르게 일이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거의 무리가 없어 진성은 처음으로 자신이 책임을 맡은 일이라 무척이나 기뻤다. 특히 이제까지 소프트웨어와 가상현실 시스템만을 다뤄왔던 진성이 팀장을 맡으면서 접속기를 비롯한 하드웨어 부분에 대해서도 끊임없는 공부와 전문가들의 조언을 들으며 일취월장할 수 있었다.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이 비교적 장애 없이 일이 추진된 이유는 바로 진성의 작업 스타일 때문이었다. 진성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모든 일을 알아야 된다고 생각은 했지만 일 자체도 모두 자신이 컨트롤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나현수 소프트웨어 팀장을 비롯해 사람들에게 믿고 일을 맡겼다. 미리 정해 놓은 대로 일정 기간마다 그 일의 진척에 대해서 확인하는 것은 당연히 진성의 할 일이었지만 그냥 잘 되고 있냐는 말보다 그 사이에 그 분야의 일을 진성 자신도 열심히 익혔기에 그 파트의 팀장과 무리 없는 대화가 가능했다. 진성이 그런 팀장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배경에는 진팀장의 조언이 큰 역할을 했다. 진팀장 자신이 오랜 시간 동안 책임자로 있으면서 느꼈던 것을 틈이 날 때마다 진성에게 조언해 진성은 진팀장이 겪었던 실수나 실패를 비교적 무난하게 피하면서 팀을 이끌 수 있었다. 밀리터리 아트 싱글 버전에서 게임 내용에도 온라인을 접목해 변화를 시도했고 어느 정도는 개발을 마친 상태였다. 1:1 뿐 아니라 여러 게이머들이 팀을 나누어 서로 싸울 수도 있었고 잠입 액션의 미션도 게이머들끼리 공유할 수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을 작업으로 여러 파트에 할당했다가 다시 모아 테스트 계획까지 잡았던 진성은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이 자신의 분신 같은 느낌도 들었다. 물론 이런 빠른 개발이 가능했던 이유는 기존에 개발했던 경험과 노하우가 보이지 않게 개발 속도를 빠르게 했기 때문이었다. "나팀장님, 저, 팀장님께 갔다 오겠습니다." "오.. 강팀장, 어디 팀장?" "진팀장님한테요." "왜?" "........" "하하하. 알았다. 빨리 갔다 와라. 강팀장이 없으면 일이 안 돼!" 츄파 춥스를 빨면서 말하는 나현수의 모습에 진성은 확실히 로플 시스템의 최고 전문가 조진철 팀장의 뒤를 이을 만한 사람은 나현수 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소프트웨어 뿐 아니라 하드웨어의 전반적인 지식까지 있고 무엇보다도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츄파 춥스를 물고 다니는 그 편한 느낌에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보면 무리한 일정을 보다 쉽고 편하게 소화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진성입니다." "그래? 들어와라." 진성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진팀장의 책상에는 복잡한 서류들이 가득했다. 진팀장의 얼굴도 그 서류처럼 복잡했다. "무슨 일이지?" 진팀장은 그 서류에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진성은 그런 진팀장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진팀장님, 이제 거의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의 개발일이 끝이 날 것 같습니다." 그제서야 진팀장은 고개를 들었다. 생각보다 훨씬 빨리 일이 끝난 것이다. "뭐? 이렇게 빨리." "제일 걱정했던 인터넷 회선 속도와 게임의 조율문제가 생각보다 빨리 끝났습니다. 조금 테스트를 해 봐야겠지만 현재로서는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의 출시 계획을 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오호.. 그래? 자신감이 있어 보이는데?" 진팀장이 보기에 초보의 개발팀장의 태도가 아니었다.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어 보였다. "예? 하하. 그냥.... 다른 팀원들이 너무 잘 해 주셔서.. 저야.. 뭐.." "그래, 그런데 게임의 내용은 기존 밀리터리 아트 싱글 버전 그대로 낼 것인가?" "아닙니다. 온라인이기 때문에 1:1 뿐 아니라 여러 명이서 상대와 싸울 수 있는 모드와 잠입 액션도 여러 명이서 하나의 미션을 놓고 동시에 투입되는 모드도 만들었습니다. 또한 이 부분은 거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는데 테러리스트도 게이머, 그 테러리스트를 진압하는 것도 게이머가 할 수 있도록 하는 모드도 있습니다." "오.. 온라인이라는 특징을 이용하는 것이군. 음... 재미있겠는걸." "일단 로플팀 내에서의 공식 테스트를 한 후에 회사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베타 테스터를 모집했으면 합니다." 비슷한 게임을 이미 시장에 출시한 상태라 진성의 계획은 일견 그리 좋아보이지 않았다. "베타 테스터? 이미 밀리터리 아트 싱글버전이 나갔기 때문에 조금 그렇지 않을까?" "사실, 제 생각은 이번의 베타 테스트를 통해 다시 한 번 밀리터리 아트의 인기를 조성하고 그 뒤에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의 프로 리그를 만드는 게 어떨까 합니다." "프로 리그?" 저변이 확대되지 않은 게임을 프로 리그로 만든다는 것은 도박 중에서도 딸 가능성이 별로 없는 도박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모를 진성이 아니었기에 진팀장은 그냥 듣고 있었다. "예, 게임의 재미만으로 따지면 문명 온라인도 재미있지만 직접 몸을 움직이는 듯한 이 밀리터리 아트를 따라올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이렇게 온라인까지 된다면 프로 리그를 만들지 못할 이유는 없지요." "그렇기도 하군." "그렇게 된다면 문명 온라인에 이어 또 다른 빅 리그가 시작될 겁니다." 진팀장은 진성에게 자세하지는 않지만 사정을 말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진성에게 들었던 그 가상현실의 또 다른 현실화라는 계획을 위해 사람을 만나고 나름대로 조사한 과정에서 드러난 일을 그대로 말해 줄수는 없지만 진성도 알고 있어야했다. "음..... 그런데 시간을 조금 늦출 필요가 있겠군." "네?" "진성이 네가 지난번에 제안했던 그 건에 대해서 지금 분산해서 조사도 하고 있는데.. 상당히 앞선 내용이면서도 아주 실현 가능성이 높은 것 같아. 가상현실 시스템으로 모든 컴퓨팅 환경을 바꾼다? 대단한 아이디어지. 그런데 선결될 일들이 꽤 많은 것 같다. 일단 기술 공개를 회사에서 찬성할지가 급선무고 지금 회사 고위층에 좋지 않은 일들이 생길 것 같아서 지금은 조금 시간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 네가 조만간 말하려고 했는데, 지금 시간이 있으니 말하면 되겠구나. 아마도 우리 회사가 곧 어려운 일에 부딪칠 것 같다. 그 일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말할 수 없지만 쉽지 않은 일이라고만 알아 두어라. 하지만 그 일로 인해 어쩌면 전화위복이 되어 네가 말한 그 아이디어를 더 쉽고, 확실하게 진행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진성아, 너는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의 게임에 더 신경을 써서 완성도를 높이고 누가 뭐라고 해도, 어떤 일이 있어도 신경 쓰지 말고 언제라도 게임 출시 발표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일을 추진해라.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냐?" 정확히는 모르지만 진팀장의 말 자체는 이해한 진성이었다. "....... 예, 알겠습니다." "그래, 그렇다고 너무 무리는 하지 말고. 나가 봐라." "네....." 진성은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진팀장, 현준 아버지가 입으로 정말 어렵다는 말을 하다니. 평소 자신의 테두리 내에서 일을 해결할 능력도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일언반구 하지 않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큰일이 있어도 바로 옆의 사람은 그 일이 언제 지나갔는지 모를 때도 많았다. 하지만 진성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먹었다. 진성은 밖으로 나오면서 로플의 일부를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에 도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비록 많은 시간과 또 다시 조정 단계가 필요하겠지만 완전히 기존의 밀리터리 아트 싱글 버전과 다른 차별성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진성이 생각한 것은 바로 도시의 등장이었다. 게임에 접속해서 단순히 상대를 지목해 서로 동의한 다음 이기기 위해 싸우고 팀을 만들어 맹목적으로 미션에 참가하는 것 이상의 동기를 부여해 줄 수 있는 그 무언가를 진성은 도시라고 생각했다. 게이머가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에 접속하게 되면 일단 커다란 도시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크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수백 명은 같이 어울릴 수 있는 곳을 만든다면 그곳에서 게이머들끼리의 관계가 생겨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단순히 일방적으로 부여된 미션, 퀘스트가 아니라 게이머들끼리 고난도의 미션을 만들어 서로 도전할 수도 있고,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클랜을 만들 수도 있게 되어 게임은 한결 더 인간적인 냄새를 풍기게 될 것이다. 한 도시에 수용 가능한 게이머의 수가 수백 명이 될지, 수천 명이 될지는 실제 게임을 구축해 보고 계산해 봐야 알겠지만 진성은 충분히 메리트가 있다고 생각했다. 비록, 그런 도시를 구축하기 위한 가상현실 시스템을 설치해야 하기 때문에 굉장한 투자가 필요하지만 진성은 그 부분을 로플의 실제 테스트 일환으로 대체할 수가 있다면 그리 문제가 없지 않을까 생각했다. 어차피 로플에서 계속 섬이나 작은 도시 정도의 환경을 이용해 테스트하고 있는 단계여서 안정성이 확보된 공간이라면 충분히 밀리터리 아트에서 이용할 수 있고 반대로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에서 얻은 통계적인 결과를 로플에서 이용할 수도 있게 될지도 모른다. 진성은 나현수에게 전화하고는 서울 외곽의 로플 연구소로 가기 위해 회사를 빠져나왔다. 지하철로 이동하던 진성은 이제 차가 한 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팀장이 되고 나서 다른 회사의 관계자들, 특히 앞으로 대량생산을 하게 될 가상현실 접속기의 새 버전에 이용된 새로운 디자인의 프레임을 만드는 회사와 비슷한 하드웨어 회사를 방문할 일이 적지 않아 계속 팀원들의 차를 타고 갈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혼자라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이제 진성은 자신이 팀장임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오, 진성아.. 여기는 웬일이냐?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여기까지 행사하셨는지요? 강팀장님?" "조팀장님이 보고 싶어서 왔지요." "뭐? 하하하. 좋지. 좋아. 자, 안으로 들어가자." 로플 연구소의 지하에 있는 연구실에서 조팀장과 만난 진성은 조팀장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온 진성의 얼굴에 뭔가 할 얘기가 있음을 알아챈 조팀장의 배려였다. "그래, 네가 맡은 그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은 잘 되어가고 있냐?" "네, 거의 끝이 나기는 했어요." 한참 개발할 것이라 생각했던 조팀장은 놀랐다. "뭐? 벌써?" "생각 외로 일이 잘 풀려 잘하면 출시 계획을 잡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 게임이 출시되면 분명히 강진성, 진성이가 모든 개발의 총책임자로 알려질 것이다. 조팀장은 조금은 섭섭했다. 아니, 섭섭했다기 보다는 부러웠다. 비록 자신이 로플의 시스템 책임자였지만 원래 다른 사람의 떡이 더 커 보이는 법이다. "........ 누구는 개발팀장이 되어 게임도 출시하는데.. 누구는 아직도 프로그램 팀장이라니.. 휴우...." "... 조팀장님! 제가 진팀장님께 그대로.. 그대로 말씀드릴게요." "뭐? 하하하. 진성아, 농담도 못하냐?" "제가 확.실.히. 농담이라고 말씀드릴게요." "...... 진성아....." 조팀장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밥이었던 진성에게 이렇게 밀릴 줄은 생각도 못했다. 언제까지나 자신의 스트레스 해소용, 또는 심심할 때 건드릴 수 있는 든든한 장난감으로 남아 있을 줄 알았던 진성이 이렇게 변하다니. 조팀장은 아마도 진팀장의 핏줄을 이어받은 진현준, 그 녀석에게 서서히 동화되면서 진성이 바뀌었다고 확신했다. 핏줄은 속이지 못하는 법이다. "조팀장님, 지금 로플 개발은 어떻게 되고 있나요?" "음.. 뭐라고 해야지? 지금 현재 로플의 공간은 서울시의 절반 정도라고 보면 된다. 한꺼번에 들어가서 생활할 수 있는 사람은.... 음... 대략 만 명 정도." "굉장히 큰 땅에 만 명은 너무 작지 않은가요?" "땅이야 얼마든지 크게 만들 수 있다고 해도 한꺼번에 만 명이 접속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사실이야. 이렇게 만드는데도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는데.." "저..." 진성이 뭔가를 말하려는 듯하다가 자신의 눈치를 보자 조팀장은 궁금해서 물었다. "뭔데? 빨리 얘기해라." "사실, 오늘 진팀장님에게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 출시 계획을 잡기 위해 만났는데 당분간은 출시 준비만 하고 계획은 나중에 하자고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당분간 시간이 남을 것 같다는 생각에 어쩌면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에 로플의 공간을 추가하면 어떨까 해서요." 로플의 공간을 추가한다니. 쉽지는 않지만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어떤 가상현실 시스템을 담을 만한 하드웨어의 지원도 불가피하다. "뭐? 로플의 공간을?" "예,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은 그야말로 게임에 접속해서 싸우는 것 밖에 없잖아요." "그렇지." "하지만 밀리터리 온라인에 로플의 공간을 추가하면 일단 접속해서 그 공간으로 들어와 어느 정도 생활을 함과 동시에 다른 게이머와 대화도 나눌 수 있지 않을까요. 심지어 그런 곳에서 다른 게이머에게 기술도 가르칠 수 있게 해도 좋을 것 같고.." "음... 아이디어야 좋다만, 그렇게 하려면 가상현실 시스템을 꽤 많이 설치해야 할 것 같은데.... 돈이 많이 들지 않을까?" 문제는 돈이었다. "물론, 그렇지요. 그래서 로플의 테스트 중에 안정을 보장할 수 있는 정도의 공간을 밀리터리 아트에 붙여 로플의 실제 테스트처럼 환경을 조금씩 바꾼다거나 아니면 그 도시 자체를 바꿔 게이머들의 반응을 살펴보면 로플의 테스토도 되고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에서는 게이머들의 공간도 마련되어 좋고....." "테스트를 상용의 게임 공간에서 하자고?" 개발될 게임의 테스트를 또 다른 상용 게임의 공간에서 하자는 진성의 말은 상당히 문제가 있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게임 팬들이 들고 일어날지도 몰랐다. 하지만 진성의 생각은 조금 다른 측면이었다. "물론 그 공간이 게이머에게 문제가 있거나 공간 자체에 문제가 있다면 안 되지요. 그건 말이 안 되지요. 하지만 그게 아니라 충분히 검증된 공간을 예를 들어 계절의 변화를 통해 게이머들의 반응과 일정한 주거환경을 구비해 놓고 게이머들이 어떻게 그 속에서 이용하는지, 심지어 로플처럼 먹지 않으면 살 수 없게 만든다면 게이머들은 어떻게 반응할지를 보기 위한다면 상용의 게임이라고 해서 못할 것도 없지 않나요?" 조팀장은 공간 자체에 문제가 없도록 구현해 그 공간에 변화를 주면서 그 결과를 로플에 적용하면 되지 않는가 말하는 진성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계절의 변화는 전혀 문제될 게 없었다. 심지어 폭풍우와 같은 것들은 오히려 게이머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것이다. "음..... 의도적인 공간이라.." "로플에서 돈을 들여 테스터를 모아 할 수 있는 테스트도 있지만 수백, 수천 명의 테스터를 구하기는 힘들것 같은데.. 이런 경우를 이용하면 로플의 개발에도 도움이..." 확실히 중복되는 투자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다. 하지만 큰일이라 제대로 된 검토가 필요했다. 조팀장은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런 일은 가장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당연히 진팀장이었다. "좀 생각해 보자. 진팀장님에게는 말씀 드렸냐?" "일단 먼저 조팀장님께 이야기를 해 보고 나서.... 나중에 말하려구요." "그래, 잘 했다. 조금 더 생각해 보자. 테스트 단계와 시간을 줄이는 것이라 좋기도 한데.. " 진성도 확실한 결정을 원하지 않았다. 이미 자신도 이런 개발과정을 알았기에 순간적인 판단으로 중요한 것을 정할 수는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진성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그럼, 생각해 보세요. 지금 당장 하자는 얘기는 아니니까요. 안 되면 일단 출시를 하고 나중에 그런 부분은 업그레이드 차원에서 할 수도 있으니까요. 조팀장님, 저 먼저 갑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벌써?" 조팀장의 말에 진성은 가볍게 말했다. "저는.... 개발팀장이거든요." "뭐?" "하하하. 그리고 오늘 밤에 진팀장님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해 드려야지." "야! 강진성!" "........" 진성은 조팀장의 사무실을 나가면서 흘리듯 말했다. 당연히 조팀장은 기겁을 해서는 진성을 불렀지만 대답이 있을 리가 없었다. 자소 소프트 프로팀은 부산 갈매기, 부산으로 출발했다. 하루 뒤에 있을 LQ 전자와의 원정 경기 때문에 급히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원래 비행기를 타고 오려다가 많은 인원이 이동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차를 타고 갔다. 프로 게이머 7명과 관리팀의 현숙, 소희를 비롯한 코디와 장필순을 위시한 트레이너까지 합해 모두 24명, 그리고 경호팀이 9명, 서재필과 서재필을 따라다니는 비서격인 서은주까지 합치면 모두 42명의 대 인원이 움직이는 대이동이었다. 서은주는 24살의 젊은 나이지만 짧은 기간에 비서로서 필요한 경험을 두루 거친 인재였다. 원래 프로 구단의 단장인 황태산의 비서로 갈 예정이었지만 황태산의 자신에게 비서는 한 명이면 족하다는 말에 비서가 제일 필요한 서재필에게로 낙점되었다. 청순한 이미지가 코디인 한소희와 비슷했지만 일에 있어서는 철두철미하고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는 커리어 우먼이었다. "왜 이렇게 차가 막혀?" 꽤 큰 버스와 승용차 3대가 줄지어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는데 앞에서 사고가 났는지 차들은 거북이처럼 천천히 가다가 곧 완전히 멈추고 말았다. 경기는 내일이었지만 빨리 도착해서 경기장도 확실히 살펴보고 쉬는 게 경기력에 도움이 되었기에 서재필은 약간은 짜증스런 말을 하고 말았다. "사고가 난 것 같은데요?" "....... 빨리 가야 좋을 텐데...." 서은주의 말에 서재필은 얼굴을 찡그리며 전방을 주시했다가 뒤에 앉아 있을 선수들을 살폈다. 어이가 없었다. 완전히 어디 수학여행 가는 분위기였다. 부담감에 축 처져 있는 것도 문제지만 너무 이렇게 놀고 있으니 서재필은 한숨을 쉬고 말았다. "칠." "팔." ".... 구.." 생긴 것과는 달리 이런 게임에는 약한 한혜연이 걸렸다. 국민적인 게임, 아무것도 필요 없는 게임, 바로 369게임이었다. 한혜연이 고개를 숙이자 조범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외쳤다. "이번 벌칙은.... 크크크.. 스크류바!" "아... 안... 안돼!" "비비 꼬였네... 들쑥날쑥해... 사과맛.. 딸기맛.. 롯데 스크류바~~" 범현의 말에 절대 안 된다고 외치는 혜연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노래를 부르며 손가락을 세워 혜연의 옆구리, 등을 비비 꼬면서 간지럼을 태웠다. 혜연은 한참을 이를 악물고 참다가 참을 수 없는지 벌떡 일어났다. 현준을 비롯해 다른 사람들은 그런 혜연의 모습에 잠시 얼었지만 곧 혜연이 뭐라고 하자 다들 뒤집어지고 말았다. ".... 다시 해!" 첫 원정 게임인데도 전혀 긴장감이 없는 선수들이었다. 버스 안에는 관리팀과 프로 선수들만 타고 있었다. 버스를 따라오는 승용차에 경호팀들이 나누어 타고 있었기 때문에 버스 안은 대부분이 여자들이었다. 프로 선수들은 모두 버스의 제일 뒤에 몰려 앉아 처음에는 수다를 떨더니 이제는 시끄럽게 게임까지 하고 있었다. 서재필은 뭐라고 하려다가 긴장하고 있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코디들은 중간에 앉아 몇 명이서 소곤소곤 말을 주고받다 프로 선수들이 재미있게 놀자 코디들도 점차 소리를 높이더니 결국 완전히 수학 여행가는 버스로 분위기가 바뀌고 말았다. 수학여행 학생들을 태운 버스는 원래 예정 시간보다 한 시간 늦게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에 도착한 프로팀은 바로 부산에서 게임이 열릴 경기장으로 직행했다. 게임은 사람이 한다. 그래서 미리 한 번이라도 경기장을 가본 것도, 아닌 것은 차이가 많이 났다. 심리적으로 안정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는 꽤 많은 차이가 나 프로팀으로서는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었다. "와... 좋은데..?" 버스에서 내린 프로 선수들은 모두 몇 명의 경호원들과 함께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에 경호원들이 갑자기 늘어나 밀착 마크를 하자 짜증도 났던 선수들이었지만 경호원들이 비슷한 또래거나 바로 형 정도의 나이가 많아 친해지자 스스럼없이 말도 하면서 이동할 수 있었다. 특히 범현은 코디 가운데 괜찮아 보이는 사람과의 소개팅을 주선하기도 해 경호팀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서울의 게임 큐브보다는 그 규모가 작아 보였지만 짜임새는 더 좋은 듯했다. 게다가 확실히 게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가족 단위로 경기를 볼 수 있도록 시설을 잘 해 놓아 보기에도 좋았다. 벽이 온통 그림으로 가득해 다른 곳의 딱딱한 게임 센터와는 차별성을 부여한 것도 좋은 시도였다. "자, 이쪽으로 와라." 앞선 서재필을 따라 선수들은 경기장 무대로 올라갔다. 선수들은 무대에 설 때마다 조금의 긴장과 조금의 설렘을 같이 느꼈다. 내일, 이곳이 가득 찬 후에 선수들은 이곳에 올라 게임을 하게 될 것이다. 다들 숨을 커다랗게 들이 쉬고는 무대를 내려왔다. "다들 배고프지? 뭐 먹을까?" 워낙 대인원이라 다 같이 밥을 먹기는 힘들었다. 특별한 회식 때에나 다 같이 먹을까 평소에는 각 팀별로 식사를 했다. 경호팀은 선수들이 있는 근처에서 밥을 먹었고 코디들은 따로 식사를 했다. 물론 경호팀의 몇 명은 바로 선수들과 같이 식사를 했는데 근접경호를 위한 것이었다. 그 몇 명에 항상 이준이 포함되어 있었고 나머지는 돌아가면서 그런 역할을 수행했다. "부산까지 왔는데... 회를 먹어야죠." 범현이었다. 따가운 서재필의 눈총이었지만 범현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 뒤로 벌떼처럼 현준과 한석이 가세했고 나머지 선수들도 달라붙었다. "당연히... 오랜만에 회를 먹겠군." "회를 먹으면 내일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당연하지요. 오빠. 회 먹으면.... 호호." 거기에 경호원들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였고 코디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재필은 그런 사람들의 모습에 말을 하고 말았다. "그럼, 다 같이 회 먹으러 가자. 관리팀, 경호팀도 같이 가지." "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최현숙과 이준이 대답을 맞춘 듯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휴우... 어제 회는 정말 잘 먹었는데.... 정말 긴장된다." "당연하지. 너, 지면 재필이 형이 가만있지 않을 걸." 범현은 서재필의 아무런 느낌도 없는 눈빛에 찔리는 게 있는 듯, 옆에 있던 곽현호에게 말했지만 현호의 대답은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았다. 원래 개인전과 단체전을 완전히 분리시키려고 했던 운영위원회는 너무 복잡하다는 의견을 받아들여 개인전과 단체전을 같이 소화할 수 있도록 일정을 짰다. 물론 토너먼트 경기가 아닌 리그전에만 해당되는 사항이었다. 나중에는 갈라질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 리그의 시작인 단계에서 곽현호와 한혜연은 나머지 사람들과 같이 움직일 수가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개인전의 선두주자였던 진성이 빠지자 두 사람만 개인전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말이 별로 없는 곽현호와 은근히 새침떼기인 한혜연 두 사람은 그리 쉽게 친해지지 않았다. 먼저 단체전 게임부터 계획되어 있어 현호와 혜연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팀장인 서재필의 말에 주목했다. "오늘의 단체전은 현준과 한석 그리고 진규와 유나가 나간다. 저쪽도 4명이 나오니까. 범현은 다음에 나가는 걸로 하자. 자, 시간은 한 시간 정도 남았으니까 기본적으로 해 왔던 대로 게임을 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현준과 한석이가 말을 할 테니까 잘 들어라." 서재필은 미리 현준과 한석을 불러 상대의 문명과 나오는 게이머의 수에 따라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의논했고 그 결과를 발표한 것이다. 운영위원회가 리그 전에 발표한 문명 온라인 단체전에 적용되는 룰의 경우 최소 인원은 있지만 최대 인원은 없었다. 게임의 성격상 5명이 넘어가면 오히려 더 좋지 않았기에 보통은 3명에서 5명 사이였다. 범현은 조금 실망한 듯했지만 워낙 성격이 털털해 오히려 유나에게로 가서 지면 가만 두지 않는다는 말을 하다 한석의 눈빛에 현호에게로 찌그러지고 말았다. 다 장난이었지만 범현의 그런 모습은 프로팀의 분위기를 밝게 만들었다. "오늘 상대는 중국 문명이다. 일단 내가 센터를 맡고, 한석은 디플1, 진규가 밀리 그리고 유나가 디플2를 맡는다. 일단 빠르게 컨트롤하는 게 생명이다. 한석은 알아서 할 테고, 진규 너는 이제까지 연습할 대로 로마의 그 군대강화법을 확실하게 성공시켜야 된다. 할 수 있겠지?" "이제는...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이런 후배들 앞에서 그런 실수는 안 합니다." "뭐? 네가?" "하하하..." 목소리를 깔고는 자신보다 나이는 많지만 늦게 들어온 범현과 유나를 바라보며 말하는 진규의 말에 현준을 비롯해서 대기실에 있던 사람들은 다들 웃고 말았다. "그래, 믿는다. 실패하면...... 아마도 재필 형이 여기 부산에 두고 갈 거다. 그리고 유나는 다른 것은 신경 쓰지 말고 상대가 어디에 있고 그 국경의 자세한 정보를 모아라. 동맹국이나 전체적인 정보는 한석이가 다 할 테니까 유나는 직접 정찰병을 이끌고 상대 국경의 상세한 정보를 모으는 게 임무다. OK?" "네, 오빠." "너무 긴장만 하지 않으면 질 이유는 없으니까." 내려오면서 369게임을 하던 현준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게임에 관련된 일이나 게임에서의 현준은 마치 진성의 빈자리를 채우려는 듯, 굉장한 카리스마를 내뿜었다. 무조건 강한 것은 아니었지만 프로팀 내에서 아버지의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었다. 현준의 당당하면서도 흔들림 없는 말에 다른 선수들까지 자신감이 생겼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서재필은 현준이 상당히 성장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현준의 그 당당함도 이준의 말에 곧 사라지고 말았다. "현준아, 누구 찾아왔는데... 아, 맞다. 정효진이라고...." "네? 효진씨?" 가끔 핸드폰으로 연락을 주고받던 현준은 정효진이 부산에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바쁜 스케줄과 공인이라는 이유로 만나기는 힘들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다니. 현준은 얼굴이 벌겋게 변하면서 대기실 밖으로 달렸다. 그 뒤로 범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현준 형... 오늘 위험한데.. 저렇게 흥분하면.. 재필이 형, 차라리 제가 현준 형 대신에 나가는 게......" 현준은 그런 얘기는 귓전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대기실 밖으로 나오자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정효진이 보였다. "아.. 여기는 어... 어떻게...." 핸드폰으로는 떨지 않던 현준은 직접 말을 하려고 하자 말이 잘 나오지도 않고 침도 말랐다. 정효진은 선글라스를 벗으며 말했다. "현준씨, 꼭 이기라는 말을 전하려고 왔어요." "예? 아... 하하. 굳이 이러지 않아도..." "제가 온 게 부담이 되나요?" "아. 아니요.... 사실은 조금 기대.. 도 했거든요.." 정효진은 현준의 더듬거리는 말에 기분이 너무나 좋았다. 매니저에게 조르고 졸라서 이곳으로 온 보람이 있었다. "오늘 꼭 이겨야 해요. 알겠죠?" "네, 하하하. 꼭 이겨야죠. 경기 보실 건가요?" "아.. 시간이 없어서.. 사실 지금 저기에 안절부절 못하는 사람이 바로 제 매니저예요. 지금 다른 곳에 있어야 되는데 제가 협박을 했거든요. 저는 이만 갈게요." 현준은 정효진의 말에 기분이 좋아 마치 몸이 떠 있는 것 같았다. "네.... 이렇게 와 줘서.... 너.. 너무 고마워요." "뭘요. 그럼 오늘 꼭 이기세요." "네, 물론!" 정효진은 선클라스를 끼고는 매니저가 있는 곳으로 뛰었고 매니저는 시계를 보고 있다가 정효진이 뛰는 것을 보자 빨리 오라며 손짓을 했다. 현준은 그런 모습을 보고는 너무 기분이 좋았다. 정효진이 자신에게 이기라는 말을 하려고 이렇게 찾아오다니. 현준은 오늘 기필코 이기고 말리라 결심했다. 현준이 대기실 안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하지만 전혀 굴하지 않는 현준은 한석, 진규, 유나에게로 다가가 말했다. "오늘...... 절대로 질 수가 없다. 절대 이겨야 한다. 자, 파이팅!" 갑자기 손을 앞으로 내밀며 파이팅을 외치는 현준의 모습에 다들 영문을 몰랐지만 진규가 따라하자 그냥 따라하고 말았다. 정효진과의 얘기를 들었던 이준 혼자 현준의 모습에 배꼽을 잡고 웃고 있었다. 조금의 시간이 흘러 어깨도 당당한 현준을 선두로 자소 소프트의 게이머들은 관중들이 몰려 환호를 하고 있는 경기장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오랫동안 게임을 하지 않았죠? 게임소설이 아니라고 해도 아무 말을 할 수 없었지만 이제.. 다시 게임을~~~~~~ ^^;; 재미있으면 추천을!!!!! ------------------------------------------------------------ TGP1(The Gamer Part 1) [163 회] 리그 시작 LQ 전자는 중국 문명을 선택했다. 중국 문명은 전술적인 우위와 넓은 영토로 인한 전력의 우세가 특징이었다. 다만 양날의 검인 영토는 쉽게 통제하기 어려워 멀티게임에 난점이 있었다. 라스베가스에서 열렸던 이벤트 행사의 게임에서 중국 대표팀인 중화그룹의 선수들은 중국 문명을 플레이 하면서 영토로 각각의 컨트롤 영역을 나누는 방법을 사용했지만 자소 소프트에게 거의 완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중앙 통제적인 방법을 쓰기에도 그 넓은 영토로 인해 제대로 컨트롤하기가 힘들어 중국 문명은 개인전에 비해 단체전이 어려운 문명으로 손꼽혔다. LQ 전자가 선택한 방법은 그 절충형이었다. 중앙의 전체적인 게임 조율을 위한 게이머가 한 명 있고, 나머지 세 명이 각 지방으로 나누어 컨트롤을 하게 되는 시스템이었다. 중앙에 있는 게이머의 역할이 상당히 커 승패의 갈림길에서 그 게이머의 선택이 게임 전체를 좌우하곤 했다. 그런 점에서 LQ 전자는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LQ 전자 뿐 아니라 다른 프로팀 모두의 고민이기도 했는데 대부분의 프로팀들이 단체전보다는 개인전에 팀의 실력 있는 게이머를 배치했다. 개인전 우승 0순위였던 게이머 스키피오 강진성의 불참으로 그 우승의 향방이 묘연해진 개인전으로 인해 프로팀들은 누구를 개인전에 참가시키는지를 결정하기 위한 상당한 시간을 투자했다. 국내 공식 랭킹에서 1,2,3 위인 스키피오, 한신, 사신이 모두 참가하지 않거나 단체전에 참가하는 바람에 개인전에서는 그야말로 전국시대가 될 거라는 전문가들의 예상 때문에 각 프로팀에서는 다른 팀의 선수 선발을 보면서 결정하기도 하는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했다. 대부분의 프로팀에서 팀의 실력 있는 게이머가 한 명은 개인전에 참가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단체전은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2,3위인 한신과 사신이 포함된 자소 소프트의 단체전 멤버가 워낙 대단해 개인전에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단체전의 특성상 이변이 일어나기 쉬워 삼선전자 같은 경우 공식 랭킹 4위인 게이머 정성진을 단체전에 포함시켜 서울 연고와 더불어 단체전에서 자소 소프트와 정면 승부를 벌였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지금부터 이곳 부산에서 제 3차 문명 온라인 삼선전자배 프로 리그, 리그 초반의 빅 매치 서울의 자소 소프트와 부산의 LQ전자와의 경기를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해설로 수고해 주실 홍진호씨를 모시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아나운서 김동수의 멘트가 끝이 나자 깔끔하게 옷을 입은 해설자 홍진호의 모습이 보였다. "예, 안녕하십니까? 홍진호입니다." "네, 서울보다 부산이 날씨가 따뜻한 거 같죠?" 김동수의 말에 홍진호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두 사람의 옷이 모두 그다지 두껍지 않았다. "아무래도 남쪽이니까요. 오랜만에 부산에 와 보니 아주 좋군요. 오늘 부산 팬들은 아주 좋은 경기를 보시게 될 것 같습니다." 다른 얘기를 했던 김동수는 곧 게임 얘기로 넘어갔다. 이제는 꽤나 능숙한 진행이었다. 두 사람 모두 문명 온라인 전문 아나운서와 해설자로 상당수의 팬들을 거느린 스타 진행자였다. "오늘 경기 어떤 선수가 나오죠?" "오늘은 중국 문명의 LQ 전자와 그리스 문명의 자소 소프트 간의 대결이 되겠습니다. 이미 발표한 바로 LQ 전자는 박수민 선수, 황정철 선수, 조전수 선수, 최한민 선수가 출전하겠습니다. 그리고 자소 소프트는 게이머 한신, 사신 그리고 성진규 선수와 최유나 선수가 게임을 하게 되겠습니다. 사신 김한석과 최유나 선수는 원래 쌍룡은행에 있다가 자소 소프트로 온 선수지요." 김동수와 홍진호는 서로 호흡을 맞추며 주거니 받거니 질문하고 대답했다. "네, 오늘 팬들이 주목해야 할 선수는 누구를 들 수 있겠습니까?" "LQ 전자에서는 황정철 선수가 센터를 맞게 될 겁니다. 중국 문명에서 센터의 역할은 굉장히 중요하지요. 황정철 선수의 활약 여부가 기대됩니다. 그리고 자소 소프트에는 너무나 유명해 설명이 필요 없는 사신 김한석과 한신 진현준 선수를 유심히 보셔야겠지요. 특히 국내 리그에 센터라는 자리를 만들게 한 장본인인 진현준 선수의 균형감 있는 플레이와 역시 디플이라는 자리를 확립한 사신 김한석 선수를 지켜보시면 더 재미있는 게임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리틀 스키피오로 유명한 성진규 선수도 빠뜨릴 수는 없겠지요." "그렇군요." 원래 자소 소프트 프로팀이 쓰던 센터, 디플, 밀리, 배틀이라는 용어는 그 라스베가스의 이벤트 행사 이후로 국내 프로 리그에서 완전한 공식 문명 온라인 단체전에서 사용되는 하나의 용어로 고정되었다. 거의 모든 팀에서 센터는 누구, 밀리는 누구라고 할 정도로 완전히 정착된 용어였다. 특히 센터의 한신 진현준, 디플의 사신 김한석의 플레이는 센터와 디플의 교과서라고 할 정도로 거의 실수가 없어 기본적으로 국내 프로 리그의 흐름을 센터와 디플의 역할이 쥐도록 만들 정도였다. 아직 배틀과 밀리에서 한신과 사신만한 게이머가 나오지 않았을 뿐, 이미 용어 자체는 완전히 정해진 상태였다. "오늘 게임 예상을 해 주시죠." 김동수 아나운서의 질문에 홍진호 아나운서는 곧바로 LQ 전자와 자소 소프트 간의 특징적인 면들을 열거하고는 전체적인 비교를 했다. "예, 중국 문명과 그리스 문명의 대결입니다. 일단 중국 문명의 LQ 전자는 황정철 선수가 센터를 맡고 나머지 세 선수가 영토를 3등분해서 컨트롤을 하게 될 겁니다. 중국 문명은 전술적으로 컨트롤하기 쉽고 병력을 쉽게 모을 수 있지만 넓은 영토를 제대로 컨트롤하기 힘든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 LQ 전자가 과연 이런 어려움을 어떻게 잘 조율해 나가느냐가 관건입니다. 그리고 자소 소프트의 그리스 문명은 탄탄한 센터와 디플의 운영과 더불어 나머지 두 선수의 활약에 따라 게임의 승부를 가릴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 국내에서 밀리 전문 게이머로 급부상하고 있는 리틀 스키피오 성진규 선수의 실력에 최유나 선수가 뒷받침을 한다면 객관적으로는 자소 소프트의 우세가 점쳐집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봐야 알겠죠?" 게임을 100% 예측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단체전은 그것이 더 심했다. "그렇지요. 단체전은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의 게이머가 리얼타임으로 게임을 하기 때문에 많은 이변이 일어나기도 하지요." "그러면, 잠시 후에 게임을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기는 KBC입니다." 게임이 시작되었다. 관중들은 커다란 화면에서 게임이 시작된 후 두 프로팀의 화면을 같이 볼 수 있었다. 관중들이 잘 볼 수 있도록 정리를 잘 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혼란스럽지 않도록 화면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여러 게이머들이 있기 때문에 화면도 굉장히 많았다. 그리스는 문명 온라인 문명 중에서도 해군력이 굉장히 강했다. 5단 갤리선까지 만들 수 있고 기본적으로 그리스 해군들의 전투력이 높아 바다에서 그리스를 제압할 만한 문명은 거의 없다고 봐야했다. 반면에 중국 문명은 바다보다는 육지에서 더 많은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다양한 전술적인 병법을 활용과 양에서 일단 앞서는 병력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려면 무엇보다 육로가 필요했다. 그리스의 자소 소프트는 두 문명 사이에 육로가 없기를 바라고 있었고 반대로 중국의 LQ 전자는 육로가 꼭 있기를 바라는 상태였다. 행운의 여신은 LQ 전자의 손을 들어주었다. 두 프로팀의 배치를 본 관중 중에 LQ 전자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하나의 커다란 섬 안에 중국과 그리스가 자리하고 있었다. 섬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커 하나의 대륙이라 할 만했다. 중국은 그 대륙의 서남부에 위치했고 그리스는 그 반대쪽인 북동부에 있었다. 그 사이로 세 나라가 존재했는데 베라, 이리스, 고야라는 이름의 국가였다. 고야가 그리스와 중국 사이의 공간의 절반 중 오른쪽인 동쪽을 점하고 있었고 베라와 이리스는 서쪽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위치하고 있었다. 고야는 중국과 그리스 모두 접경하고 있었지만 베라는 중국, 이리스는 그리스만 접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고야 한 나라만 통하면 그리스로 직행할 수 있었지만 베라를 통과한 뒤에는 이리스까지 통과해야 그리스로 진입할 수 있었다. 또한 베라와 중국의 경계에는 베리토라는 험준한 산맥이 있어 군대가 넘기 힘들었고 고야와 그리스 사이에도 그에 비견할 만한 이르카라는 산맥이 장애물로 놓여 있었다. 그리고 이리스는 국토 전체가 이르카 산맥이나 베리토 산맥처럼 험하지는 않았지만 결코 평탄하지 않은 산악지였다. "디플1, 센터. 주변 정세를 알려 달라." "디플2, 센터. 일단 정찰병을 이끌고 출발할 준비를 해라." "밀리, 센터. 군대강화법 실행할 기반을 닦아라." 게이머 한신, 현준은 빨리 지시를 내렸다. 알아서 하고 있겠지만 여러 번의 연습 끝에 기본적으로 할 것은 다 하는 것이 게임 플레이에 좋다는 결론을 게이머들이 모여서 스스로 내렸기에 그 규칙에 충실하기로 했던 것이다. 현준은 세 명으로부터 각각에 대해서 확인 메시지를 받고는 자신이 해야 할 문명과 관련된 일을 시작했다. 디플, 게이머 사신, 한석은 빠르게 주변 정보를 탐색하기 위해 정찰과 빠른 접촉을 위한 인물들을 대거 보냈다. 그리고 주변 국가들에 대비해 하나씩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무런 정보도 없었지만 디플로 오랜 연습 게임을 통해 생긴 감으로 어느 정도 예측을 하고 있었다. 그게 맞으면 좋고 틀리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단지 그 비는 시간 동안 했던 컨트롤이 무용지물이 되는 것밖에는. "오호.. 접경 국가는 2개로군." 한석은 몇 가지 정보를 추가로 얻은 뒤에 바로 센터, 현준에게 말했다. "센터, 디플1. 주변 정보다." 현준은 그 정보를 보면서 생각했다. '음.. 그리스에서 육로로 중국까지 가려면 이리스를 통해 베라로 가던가 아니면 이리스를 통해 고야로 가야겠군. 높은 산맥이 고야와의 국경에 있단 말이지. 그렇다면 이리스가 제일 중요하겠군. 이리스와 확고한 동맹을 맺어야겠다. 중국으로서는 고야를 놓칠 수가 없을 테고 베라는 별로 소용이 없을 테니, 우리가 베라와 동맹 맺기에 문제는 별로 없겠군. 같은 대륙이라 걱정했는데 그나마 다행이다.' "디플1, 센터. 이리스를 최우선 동맹국으로 해 주기를 바람." "디플2, 센터. 이리스와 고야를 통해 고야와 중국의 국경을 살펴보고 베라도 가서 확인해 보라. 자세한 주변 정보는 같이 보낸다." 현준은 한석과 유나에게 각각 지시하고는 진규에게도 지시를 내렸다. "밀리, 센터. 육군은 이제부터 모두 산악에서도 강한 경보병으로 양성하되 접경국가인 이리스와의 국경 방어에 신경을 써라. 해군은 일단 중국 근해를 제외한 바다를 완전히 장악할 정도의 계획을 세워라. 중국이니까 바다에서는 그리 어렵지 않을 거다. 정보는 같이 보내니 잘 알아서 해라." 현준은 지형을 본 후에 이리스와 고야가 제일 중요한 지역이 되리라 예상했다. 중국도 그리스도 한 나라만을 통해 상대 나라로 통하는 육로를 개척하기 힘들었다. 물론 고야와 그리스 국경에 험준한 산맥인 이르카를 넘고 올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무리를 했다가는 전쟁에서 지고 게임에서도 지고 말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적어도 두 나라를 거쳐야 상대 국가로 갈 수 있는데 그리스의 입장에서는 이리스와의 동맹만 체결하면 어느 정도 육로를 봉쇄할 수 있거나 문명 발전이나 전력 강화에 필요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대륙이라는 사실에 그리 좋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자세히 지형을 보니 대륙이라고 해도 쉽게 상대를 육로로 공격할 수는 없어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했다. 현준은 산악 지역에서도 활동할 수 있는 경보병을 육성해 고야의 산맥을 타고 넘어올지도 모를 중국의 군대를 방어하고 이리스와 베라 두 나라를 동맹국으로 포섭한 뒤에 대륙의 서북쪽을 완전히 장악할 생각이었다. 현준은 그 중에서도 이리스가 1차 전쟁이 일어나는 전장이 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현준은 그와 동시에 자신이 개발해서 완성했고 아직도 수정 작업을 하고 있는 전략인 그리스 문명강화법을 시작했다. 앞으로 한동안 그리 큰일은 없을 것이기에 가장 적합한 시간이었다. 현준은 거의 기계적으로 나오는 컨트롤과 문명을 체크하면서 얻는 순간순간의 수정으로 점점 강화된 문명을 만들어나갔다. 디플, 한석은 먼저 이리스와의 전격적인 동맹에 합의했다. 게임의 설정 상 이리스는 그리스와 그 역사적 근원이 다르지 않아 동맹에 큰 걸림돌은 없었다. 이런 조건은 굉장히 그리스에게 유리한 것이었다. 이상함을 느낀 한석은 고야를 조사해 보고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고야는 이리스, 베라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사이가 좋지 않다기보다는 예전에 그런 과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석은 그리스가 이리스를 동맹으로 선택하면 고야는 당연히 중국 쪽에 붙을 수밖에 없는 게임의 설정을 알 수 있었다. 한석은 내친 김에 베라와의 동맹을 위해 힘을 씀과 동시에 현준에게 말했다. "센터, 디플1. 이리스와의 동맹은 상당히 쉬웠다. 대신 고야와 이리스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 아무래도 고야는 포기해야 할 것 같다." "디플1, 센터. 그러면 베라는?" "센터, 디플1. 베라는 충분히 동맹을 맺을 수 있을 것 같다." "디플1, 센터. 베라와 동맹을 맺고 베라, 이리스, 고야의 경제적인 측면과 혹시 불안정한 지형 그리고 국가 민족 구성원에 대해서 분석을 해봐라. 아, 특히 베라와 이리스의 경보병의 규모는 꼭 부탁한다." 한석은 베라와의 동맹을 추진하면서 각 지역에 정탐을 보내어 필요한 정보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한석은 확실히 센터로서 게임의 전체적인 시야에 뛰어난 현준의 재능을 알 수 있었다. 본인이 아는지 모르겠지만 가끔 약간 현준이 무리하게 요구한 정보가 아닌가 싶은 것이 게임의 향방을 가르는 열쇠가 되는 순간이 곧잘 있어 한석은 이번에도 그런 경우가 아닐까 생각했다. 현준은 한석의 이야기를 듣고는 바로 디플2, 유나에게 말했다. "디플2, 센터. 베라에는 갈 필요가 없다. 고야를 통과해서 중국으로 가서 내부 정세를 알고는 북쪽의 베리토 산맥 근처로 이동해라. 밀리인 진규가 해군을 이끌고 그 근처로 갈 것이다." "밀리, 센터. 해군이 어느 정도 양성되었으면 중국의 서북쪽을 깨끗이 청소해라. 그곳 근처로 유나가 갈 테니까 나중에 잘 데려올 생각을 해라. 못 데려오면 너도 죽는다. 진규야, 알겠지?" 현준은 대충 시간이 맞아떨어지리라 생각하고는 잠시 멈추었던 문명 강화법의 막바지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아 그리스의 불과 천문학, 기하학에도 시간과 재력을 투자했다. "고야와 그리스의 국경에 큰 산맥이 있다고?" 황정철은 역시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넓은 지역을 컨트롤하기에 초기 정찰이 쉽지 않아 조금 늦게 정찰 결과를 얻을 수 있었는데 쉽게 동맹을 맺을 수 있는 단계까지 나아간 고야에서 그리스로 넘어가는 길목에 험준한 산맥이 있다는 사실에 너무 일이 잘 풀린다던 상상이 깨지고 말았다. 중국 문명으로 그리스를 바다를 통해서 접근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한 일이 아니기에 황정철은 일단 각 지역의 수비를 든든히 함과 동시에 육군을 하나로 모아 훈련시키는 일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했다. 각 지역을 컨트롤하는 게이머가 직접 군대를 이끌 수는 없기에 황정철은 각 지역의 조정 업무와 통합 군대의 훈련까지 맡아야 했다. "디플1, 센터. 바다 쪽에서 접근하는 배를 주의해서 봐라. 하지만 절대 바다로 나가 응전하지는 마라. 해군은 완전한 열세가 되지 않도록 양성하고 나머지는 육군으로 집중해라. 훈련된 군대 10만을 지금 바로 한민에게 보내라." "디플2, 센터. 바다를 조심하고 응전은 금물이다. 10만의 군대를 지금 즉시 한민에게로 보내라." "디플3, 센터. 수민과 전수에게서 각각 10만의 군대가 도착하면 고야와의 국경 근처로 보내라. 네가 가진 병력 중에서 10만의 군대도 같이 보내라. 내가 직접 훈련시킬 생각이다." 세 지역에서 모집된 군대라 각각의 특색이 있었다. 게다가 게임이 진행될수록 컨트롤의 스타일 차이와 각 상황에서의 선택하는 방법의 차이로 점점 각 지역은 그 고유의 특성이 나왔다. 그런 것이 군대에도 묻어남은 당연했다. 평소에는 잘 모르지만 많은 연습을 통해 전시에 그 특성으로 무너질 확률이 높음을 알게 된 LQ 전자는 아예 센터인 황정철로 하여금 통합군사 훈련을 하도록 만들었다. 고육지책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로 인해 조금, 센터의 공백이 있었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다. 가장 문제는 빠른 시간에 이리스를 통해 그리스로 넘어가는 국경이 봉쇄되어 정보를 늦게 알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비록 고야를 통해 그 이르카 산맥을 넘어 정보를 얻었지만 황정철은 정보가 조금 늦었음을 확신했다. 황정철은 정보에 대한 생각은 잠시 접고 30만의 대군의 훈련을 시작했다. 드넓은 벌판에서 30만의 대부대가 깃발을 휘날리며 오와 열을 맞추고 지시에 따라 전술적인 변화를 취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각 부대별로 방진, 원진, 추행진을 차례대로, 빠르게 변화시키는 훈련과 더불어 각 지역의 부대가 큰 단위지만 서로 섞여 작전을 펼치게 만들어 지역 간의 차이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황정철은 훈련과 동시에 고야와의 동맹으로 곧 이 30만의 군대를 출진시키기로 결심했다. 그 사이에 고야와 베라, 이리스 사이에 감정의 골이 깊어 고야의 군대와 30만의 중국 군대라면 충분히 베라와 이리스를 병탄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일단 이리스만 점령하게 된다면 그리스로 바로 진출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리스 전체가 산악지역이라는 점인데 황정철은 고야와의 연합군이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최유나는 중국의 내부로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몇 명의 정찰병과 함께 중국 안으로 들어와 정보를 얻었다. 고야와의 국경이 봉쇄되기 전에 들어왔기에 중국의 게이머들은 유나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는지 유나는 어렵지 않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밖에서 보던 관중들은 그런 대담한 전략에 혀를 내둘렀다. 4명이서 하는 단체전에서 게이머 한 명의 역할은 지대했다. 그런데 이런 확실한 정보를 위해서 한 명의 게이머를 희생시킬 각오를 하다니. 새삼 자소 소프트가 엄청난 실력으로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LQ 전자보다 더 도전적인 색깔의 팀임을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센터, 디플2. 최종 정보입니다. 저는 그곳으로 갑니다." 모든 정보를 다 보낸 유나는 북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밀리, 센터. 출발해라. 군대의 통제는 내가 하겠다." "센터, 밀리. 알겠습니다." 현준의 지시를 받은 진규는 갤리선으로 이루어진 해군을 이끌고 이리스와 베라의 근해를 가로질러 중국의 바다로 향했다. 진규는 분명히 상대인 중국이 바다로 와서 멋진 한 판 승부는 벌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차이가 많이 나는데다가 대륙으로 이루어져 육로를 개척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진규는 상대에게 될 수 있으면 들키지 않아야했다. 게이머 최유나를 무사히 귀환시키는 것이 목표였기에 진규는 조심스러웠다. "유나 누나, 조금만 기다려. 내가 간다." 밖에서 사람들이 보고 있다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했다면 그런 말은 하지 않았겠지만 진규는 이미 연습과 경기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게임에 몰입된 상태였다. 평소의 말이 튀어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게이머 성진규와 최유나가 사귀는 거 아니야?" "최유나가 연상이잖아?" "요즘은 연상, 연하 커플이 좋다고 하던데.." 당연히 관중들은 물론 보고 있던 팬들이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진규는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할 일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센터, 디플1. 그리스의 해군이 나타났다." "디플1, 센터. 지켜만 봐라." 박수민은 육군을 양성하면서도 북서쪽의 바다를 잊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그리스의 해군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제대로 정찰을 하고 있지 않았다면 나타났는지도 몰랐을 만큼 은밀했다. 자세히 관찰한 결과 확실히 상륙을 위한 해군 수송선은 아니었다. 대부분이 전선이었다. 박수민은 센터, 황정철의 말대로 육군 양성에 힘쓰면서 그냥 지켜만 보고 있었다. "어? 왜 저기로 가는 거지?" 박수민은 멀리 있던 그리스의 해군이 베라와의 국경선 근처 가까이 근해로 다가오자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절대로 상륙은 아니라 확신했지만 그래도 군대를 이끌고 그 근처로 이동했다. 박수민은 점차 다가오는 그리스 해군의 모습에 무슨 영문인지 모른 채 긴장해서는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로 다가갔다. "저 사람들은?" 박수민은 멀리서 군대를 주둔시키고 앞으로 다가가 보았는데 평범하게 보이는 몇 사람이 바다로 나와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알 수가 없어서 센터, 황정철에게 물었다. "센터, 디플1. 그리스의 해군이 베라와의 국경 근처로 다가와서 군대를 이끌고 왔는데 상륙할 의도는 없는 것 같다. 그런데 그 지점에 몇 명의 사람들이 나와 있다.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다." 그 이야기를 들은 황정철 역시도 쉽게 알 수 없었다. 첩자라고 생각하기에도 이렇게 티를 내면서 정보를 얻을 필요는 없었다. 해군 전선이 그리스에서 왔을 정도면 중요한 일인데... 황정철은 고야로 30만의 군대 진군 명령을 내리고는 다시 생각을 했다. 해군이 움직일 정도로 중요한 일인데다가 눈에 띄는 것도 불사할 정도라면.. 아! 맞다! 황정철은 이제야 감을 잡았다. 분명히 게이머다. 황급히 지시를 내렸다. "디플1, 센터. 그 사람들을 잡아라. 그 중에 게이머가 있다. 빨리!" "뭐?" 박수민은 그 지시를 받자마자 머리가 번쩍했다. 확실히 그렇다면 모든 것이 설명될 수 있었다. 박수민은 곧 군대를 진군시켰다. 시간적으로 부족할 것 같아 기병을 먼저 출발시켰다. 박수민은 게이머를 잡을 수가 있다는 생각에 흥분되기 시작했다. 라스베가스에서 중국 대표팀의 게이머를 잡은 이래 단 한 번도 게임에서 상대 팀의 게이머를 잡은 공식적인 게임은 없었다. "군대가 다가온다고?.... 이거 큰일인데... 어쩌지? 그래도 배로 가면 그만이니까." 최유나는 군대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약간 놀랐지만 역시 바다에서 다가오는 배를 보고는 걱정하지 않았다. 곧 다가온 배에서 나온 작은 배를 타고는 그 전선을 향해 출발했다. 최유나는 기병들이 달려오고 있음을 알았지만 못 미칠 것을 확신했다. 하지만 최유나는 화살을 생각하지 못했다. "핑! 핑! 핑!" 순간, 최유나는 기겁을 했다. 연습게임에서 이런 경우를 몇 번 당한 적이 있지만 아직도 적응되지 않았다. 화살이 빠르게 귓가를 스쳐 지나며 귓불을 할퀴자 최유나는 덜컥 겁이 났다. 전선에서도 활을 쏘았지만 거리가 부족했다. 최유나는 자신에게로 날아오는 화살에 눈을 감고 말았다. "윽...?" 눈을 뜬 최유나는 자신 앞에 세 명의 병사들이 가로막고 있음을 알았다. 한 명은 전선에서 나온 해군이었고 다른 두 명은 자신과 함께 중국에서 정보를 모았던 병사였다. 세 명이 가로 막자 그 어떤 화살도 최유나에게 접근할 수가 없었다. 비록 게임이었지만 NPC에게 잘 대해준 이유로 그런 현상이 벌어졌던 것이다. 특히 전선에서 나간 병사는 밀리, 진규의 명령을 들었기에 거기에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최유나는 비록 게임이었지만 눈물이 핑 돌았다. 현실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모습이었다. 다행히 최유나는 안전하게 전선에 도달할 수 있었고 곧 밀리, 성진규를 만날 수 있었다. "누나, 수고했어요." "......" "자, 이제 돌아갈 테니까. 걱정 마세요." 진규는 제법 어른스럽게 최유나를 감싸 안아 다시 한 번 관중들에게 오해를 살만한 행동을 했다. "센터, 밀리. 디플2, 최유나 무사히 배에 올랐습니다. 귀환하겠습니다." 현준은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곧바로 디플1, 한석에게 말했다. "디플1, 센터. 유나가 무사귀환 한단다. 걱정 했지? 하하." 현준은 한석에게 놀리는 투로 얘기했지만 그 장면을 본 관중들은 진규와 유나 그리고 한석이 연결된 삼각관계가 아닌가 생각했고 일부는 확실하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현준은 무사히 끝난 문명강화법과 진규가 출발하기 전에 끝낸 군대강화법을 확인하고는 이리스에서의 사활을 건 전투를 준비했다. 지금까지 양성된 전 그리스의 육군을 경보병에다 훈련은 산악전을 위주로 한 것은 바로 산악지대가 대부분인 이리스에서의 처절한 전투를 위해서였다. 일단 지금까지의 경보병으로 중국과 고야의 연합군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면 천문학의 발전으로 인한 자연 재앙을 이용하고 해상을 완전히 장악해 일단 고야부터 고사시킬 생각이었다. 그런 후에 고야의 영토를 이리스와 베라에게 양도하는 조건으로 베라, 이리스, 고야 그리고 그리스를 묶는 초거대 연합국을 만들어 중국을 압박할 계획을 실행시킬 것이다. 현준이 처음에 게임의 맵이 대륙으로 된 것과 그리스와 중국 사이에 세 개의 나라가 놓여 있다는 사실을 접한 순간 떠오른 몇 가지 전략 중에 마지막을 선택해 조금씩 수정한 것이 바로 초거대 연합국의 결성이었다. "이제 끝을 봐야겠지?" 현준은 완전히 훈련된 정예 경보병을 이리스로 보내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전쟁의 기운은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 주인공이 단 한번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요즘 괘씸해서 ^^;; 아, 그리고 이 다음편은 공지입니다. 혹시 글올라왔다가 좋아하시다... 짜증내지 마시기를...... 공지가 좀 많은데다... 꼭 알려야 할 내용이라~~~ 좋은 하루되십시오. 너무 피곤해..... 오타나.. 문맥을 검사하지 못했습니다. 죄송~~~~~~~~ 사실, 공지 쓰기 위해 한편을 올리는 거와 진배없습니다. 재미있다면 추천을!!! ------------------------------------------------------- TGP1(The Gamer Part 1) [165 회] 리그 시작 30만의 중국 대병력이 고야로 속속 모여들었다. 그리스의 경장보병 역시 이리스로 몰려들었다. 또한 베라의 보병도 이리스와 고야의 국경으로 움직였다. 경천동지의 한판 전투가 이리스와 고야의 접경지역에서 일어날 태세였다. 중국은 센터인 황정철이 직접 고야로 와서 30만의 군대를 통솔했다. 나머지 세 사람은 중국의 각 지역에 남아서 추가 병력 양성과 함께 넓은 영토를 컨트롤했다. 그 중에 북서쪽을 담당하던 박수민이 황정철이 했던 조정의 역할 일부를 겸해서 컨트롤했다. 그런 방법은 그 동안의 연습으로 인한 성과였다. 그리스는 성진규와 최유나가 투입되었다. 외교 부분에 치중했던 최유나가 상대적으로 할 일이 줄어들어 필요한 역할이 많은 전투 분야로 일시적으로 옮겼던 것이다. 게다가 중국 진영은 고야와 중국 자신의 군대만 보면 되지만 그리스는 이리스와 베라를 생각해야 했기에 진규 혼자서는 힘들다는 게이머 한신, 현준의 판단이었다. 전투에 있어서도 일가견이 있는 현준과 한석은 일단 뒤로 빠져 전체 문명과 앞으로 있을 초거대 연합국의 건설을 위한 밑바닥에서의 조율을 실행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었다. 전투의 모든 책임과 권한은 일차적으로 진규에게 있었다. 물론 정말 중요하고 정치적인 문제까지 고려된다면 센터인 게이머 한신, 현준에게 물어봐야겠지만 기본적으로 그 지형에서 병력의 운용과 상대 병력을 보고 어떻게 공격할지, 수비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진규가 해야 할 일이었다. 진규는 긴장했지만 수많은 연습을 통해 비슷한 상황을 많이 겪었기에 조금은 담담할 수 있었다. 자신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실행까지 책임을 져야했지만 진규는 비교적 담담했다. "디플2, 센터. 유나야, 이제부터 너는 밀리2라고 바꾼다. 진규는 밀리1이다." 현준은 다시 모든 게이머에게 새로 코드를 정해 말했다. 밀리2는 밀리1의 명령을 받을 수 있었다. 디플1인 한석의 통제에 있었던 유나는 이번에 진규의 통제 아래 있게 되었다. "밀리2, 밀리1. 최대한 고야와 중국의 군대를 이리스 내부로 끌어들일 생각입니다. 산악지형이라 급히 훈련을 했을 테지만 쉽게 적응하지 못할 겁니다. 제가 일단 접경지역 근처에서 부대를 이끌고 사정을 살펴볼 테니 누나는 이리스 지역의 소거를 해 주십시오. 이미 한석이 형이 이리스와 협상을 끝냈겠지만 그 협상한 지역까지 소거가 되었는지 확인해 주세요." 진규는 빠르게 유나에게 말하고는 병력을 두 개로 나누었다. 13만의 경보병 중에 3만을 유나가 이끌고 이리스의 내부로 움직였다. 진규는 10만의 병력과 이리스, 베라에서 온 각각 10만의 병력을 모았다. 디플인 한석이 그 군대 지휘권을 모두 그리스가 행사하도록 했기 때문에 진규는 도합 30만의 군대를 지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서로 다른 군대가 모였기에 일관된 통제를 하기가 굉장히 힘들었다. 진규는 시간이 조금 더 있었다면 어떻게라도 해 보겠지만 너무 시간이 없어 일단 각 국가별로 군대를 일정 거리 떨어지게 만들어 잡음을 없앴다. 진규는 상대인 중국의 병력이 30만에 달하고 고야의 병력 또한 15만이 넘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냥 정면으로 부딪치면 질 게 뻔했다. 다행스런 점은 이리스가 산악지대라는 것과 중국과 고야의 병력이 그런 산악지대에 그리 익숙하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진규는 지형의 특징을 가장 잘 아는 이리스의 군대에게 미끼로서의 역할을 부여했다. 이리스의 군대는 가장 잘 도망갈 수도 있고 진퇴를 쉽게 할 수 있기에 그 역할에 제격이었다. 자신의 나라에서 벌어지는 전투였기에 가장 잘 아는 군대는 자국의 군대인 게 당연했다. 진규는 지형을 연구해 너무 티가 나게 함정인 듯한 곳은 피하고 자신이라도 추격할 만한 곳을 상정해서 전술을 짰다. 그리고 베라의 군대는 매복의 역할을 맡겼다. 매복이라고 해서 상대의 대군의 측면이나 옆을 치는 것이 아니라 추격으로 인해 길어진 군대의 앞이나 뒤를 끊어 피해를 입히는 역할이었다. 그런 면에서 10만의 부대를 10개로 나누어 적당한 곳을 선택해 매복에 들어갔다. 베라의 군대는 스트레이트나 어퍼컷이 아니라 잽의 역할을 맡았다. 상대를 KO 시킬 강력한 펀치는 당연히 그리스의 경보병이었다. 진규는 자신이 데려온 그리스의 정예 경보병도 매복을 할 작정이었다. 단지 다른 점은 10만의 군대를 하나로 묶어 고야와 중국 연합군의 허리를 강력한 돌격으로 끊어 버리는 임무였다. 평지가 아니라 40만이 넘는 병력이라도 늘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고 거기에 미끼와 지역적인 매복을 통해 괴롭히면 분명히 10만의 병력으로 40만이 넘는 병력의 허리를 완전히 부술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이다. 진규는 그 기회에 10만의 정예 경보병을 동원할 생각이었다. 황정철은 보고를 통해 들어온 이리스의 지형을 보고는 고민에 빠졌다. 그곳으로 무턱대고 들어갔다가는 병력에서의 이점을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그렇다고 베라를 통해 이리스에 들어간다고 해도 그리 신통한 것도 아니었다. 그대로 있으려 하니 상대적으로 그리스에 비해 장기전에 약한 중국이었기에 급한 것은 자신이었다. 중국은 초기에 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로 대단위 병력을 모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거대한 병력은 문명의 발전과 함께 비례해서 커지지는 않았다. 군대를 부양할 능력은 문명이 발달한다고 해서 그리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일정한 군대의 무장 상태를 업그레이드 시켜 군대의 전력을 강화하는 방법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그 군대의 무장에 대해서는 중국보다 그리스가 훨씬 나았다. 상대적으로 적은 초기의 병력 수급과 후반에서의 무장 차이는 서로 상쇄되는 면이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전쟁을 치르지 않아 서로 군대를 양성하고 문명을 발전시키면 비록 군대의 병력 수에서는 중국이 유리하지만 질적 면에서는 오히려 그리스가 더 나아 종국에는 중국이 유리하다고 볼 수만은 없게 되었다.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유리함이 사라지기 때문에 황정철은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가 없다." 황정철은 고야와 중국의 연합군을 이끌고 이리스로 향했다. 그와 동시에 혼자 이런 큰 군대를 통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 알 수 있었다. 박수민이나 다른 게이머를 데리고 올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그 시간으로 인해 황정철은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고야와 일부 중국 병력을 남기고 자신은 고야와 그리스 사이의 국경에 놓인 험준한 산맥인 이르카를 통과할 생각도 했지만 장점을 버리고 단점을 취하는 방법이었다. 결국 황정철은 처음에 느꼈던 그 지도로 인한 유리함이 결코 게임 전체에 대한 유리함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황정철로서는 이 전투에서 진다고 해도 처참하게 지지만 않으면 게임을 잃는다고는 할 수 없었기에 조금은 소극적, 방어적인 생각으로 이리스로 병력을 통솔했다. 아직도 중국의 각 지역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군대를 양성할 여력이 충분했다. "드디어 오는군." 진규는 생각보다 늦게 출발한 고야와 중국의 군대의 진군을 보고 받고는 중얼거렸다. 상대가 머뭇거린 덕에 후방으로 갔던 유나가 돌아와 10만이 아니라 13만의 부대가 가능했고 중요한 미끼로 그 역할을 할 이리스의 군대를 유나가 지휘해 조금 더 작전에 유기적인 움직임이 가능했다. 이미 모든 계획은 다 알고 있었기에 진규는 조용히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지겹군. 이렇게 건드렸다가 다가서면 도망가니.. 이거야 원." 황정철은 힘겨웠다. 45만에 달하는 군대를 산악지형에서 제대로 유지하는 것은 굉장한 컨트롤이 필요했다. 그냥 행군하는 것만도 쉽지 않은데 그 사이에 쥐새끼처럼 나타나 잠시 공격하고는 사라지는 군대의 모습에 동요하는 45만의 군대를 통제하는 것은 힘에 부쳤다. 황정철은 혼자서 이런 대 군대를 몰고 이런 지형으로 온 것을 후회했다. 다른 게이머 한 명을 더 데리고 왔어야 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아니, 그 전에도 연습할 때 완전히 같지 않은 비슷한 경우를 거쳤지만 지금과 같은 그런 견제는 경험하지 못했기에 황정철은 더 어려웠다. 황정철은 쉬지 않고 컨트롤하면서 군대를 지휘했다. 황정철은 다시 고야로 돌아갈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일단 이리스의 수도가 있는 곳까지 가까워지면 이렇게 견제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 반면에 지금의 이 힘겨운 컨트롤이 무너지면 이런 산악지형에서 그야말로 45만의 오합지졸이 될지도 몰랐다. 황정철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일단 이리스의 수도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공격이 아니라 방어전을 펼칠 수가 있겠지. 아.. 아니다. 만약에 상대 게이머가 그 이리스의 수도마저 완전히 소거시켰다면?' 황정철은 고민했지만 그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하지만 황정철은 대군을 이끌고 이제까지 왔던 대로 천천히 매복과 기습을 조심하면서 앞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잘 버티는데... 조금만 더 있으면 되겠지." 유나는 상대 군대를 살펴보면서 중얼거렸다. 40만이 훨씬 넘는 대군을 이런 산악 지형에서 흐트러트리지 않고 유지하는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다. 하지만 유나 역시 그런 극한 컨트롤이 필요한 것을 경험해 봤기에 그런 컨트롤을 하면 얼마나 피곤해지는지. 자칫 잘못하면 말도 안 되는 컨트롤을 할 수도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유나는 몇 개의 부대로 나눈 이리스의 군대를 이용해 이제까지 한 번씩의 견제를 앞, 뒤, 좌, 우 동시다발적으로 벌일 작정이었다. 이런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제대로 유지를 할 수 있다면 상대 게이머를 인정하고 또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자, 가 볼까?" "이... 게이머구나!" 황정철은 이제까지 가끔 나타나던 그 부대가 동시에 네 군데에서 나타나 군대를 건드리자 곧 그 부대를 지휘하는 사람이 게이머임을 확신했다. 그렇다면 이 근처에 게이머가 있다는 말과 같았다. 황정철은 굉장한 피곤을 느꼈지만 아직은 참을 만했고 게이머가 있다는 사실에 정신을 번쩍 차렸다. 조금의 손실이 있더라도 게이머를 잡을 수 있다면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장기전으로 갈 때, 굉장히 유리한 고지에 서게 될 것이다. 황정철은 곧 45만의 군대에서 10만을 분리해 2만 5천씩 나누어 각 부대를 뒤쫓게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은 15만의 군대를 지휘해서 도망가고 있을 부대의 길목을 노려 게이머를 잡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황정철은 상대 부대가 이리스 군대인지 확인하지 않은 상태였다. 굉장히 빠르고 지형에 익숙해 도망치는 것이 고야와 중국의 연합군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로 인해 황정철의 시도는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오히려 최유나로 하여금 황정철의 의도를 알 수 있게 만드는 역효과를 내고 말았다. 최유나는 그런 황정철의 의도를 알았기에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고 멀리서 군대를 명령해 괴롭혔다. 황정철은 게이머만 잡으면 그대로 퇴각해도 된다는 생각에 흥분했는데 아무 결과도 없이 놓쳐버리자 오히려 더 피곤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 때, 또 최유나의 견제가 들어왔다. 군대의 앞과 뒷부분에서 소규모 군대로 괴롭히자 황정철은 자신도 모르게 명령하고 말았다. "이.. 저것들.. 없애 버려!" 그와 동시에 뒤에 있던 군대들은 뒤의 그 견제하던 부대를 쫓았고 앞의 군대는 마찬가지로 앞에서 견제하던 군대를 쫓아 순식간에 길게 늘어났다. 황정철은 자신도 모르게 했던 말로 인해 순식간에 군대의 진형이 흐트러지자 기겁을 하면서 다시 컨트롤 했다. "선봉, 돌아와라. 후위의 부대는 지금 즉시 복귀해라." 그 컨트롤에 쫓아가던 군대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졌지만 최유나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더욱 더 집요하게 달려들어 괴롭힌 것이다. 이미 한 번의 명령이 있었기에 고야와 중국의 연합군은 오히려 황정철의 그만 돌아오라는 명령을 무시하고 최유나의 이리스 군대를 쫓기 시작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이... 이럴 수가!" 황정철은 자신의 눈앞에 길게 늘어진 군대를 보며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피곤했더라도 그런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내리다니. 자신을 질책할 수밖에 없었다. 황정철은 냉정하게 판단했다. 이미 군대가 길게 늘어진 이상 앞쪽보다는 뒤쪽이 더 중요했다. 황정철은 뒤로 이동했다. "오호.. 유나 누나가 잘 했네." 보고를 받은 진규는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10만의 그리스 경보병 부대를 이동해 자신이 생각했던 곳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야와 중국의 연합군대 중 앞으로 쫓아간 병력들은 베라의 매복 군대를 만나게 되었다. 게다가 도망치던 이리스의 군대까지 되돌아와 같이 공격을 하자 곧 혼란에 빠져 이리저리 흩어지고 말았다. 고야와 중국의 연합군대와 베라의 매복 군대 모두 게이머의 통제가 없었지만 최유나의 이리스 군대가 개입하자 전세는 순식간에 기울어졌다. 고야와 중국의 연합군대 중 앞쪽으로 엄청나게 길어진 군대는 그 기세를 잃고 흩어지고 말았다. 가장 두터운 중간도 마찬가지였다. 그리스의 정예 경보병이 언덕을 넘어 굉장한 속도로 돌진하자 앞으로 가야할지 뒤로 가야할지 몰라 혼란되어 있던 고야와 중국의 연합군대를 반으로 갈라버렸다. 힘과 전력의 차이가 아니라 기세의 차이였다. 그와 동시에 혼전이 되어 버렸는데 이미 지휘부가 뒤로 이동해 고야와 중국의 연합군대의 중간부분은 와해되고 말았다. 황정철은 도망치고 있었다. 자신의 예상대로 중간의 군대는 그리스 군의 공격을 받아 궤멸된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황정철은 자신이 있었더라도 그 상태를 모면하기는 힘들 것이라 판단했고 그 때문에 미리 자리를 떠나 도망쳤던 것이다. 하지만 보고 있던 관중은 황정철의 냉철한 행동을 다르게 보았다. "... 군대를 버리고 도망치는 거 아냐?" "맞아. 아직은 중국이 죽지는 않았으니까. 그런데 별로 보기는 안 좋은데.." "어쩔 수 없잖아?" "뭐가 어쩔 수 없어! 만약에 황정철 선수가 거기에 있었다면 어떻게 될지 어떻게 알아? 어쩌면 게이머 성진규가 곤혹스러웠을 지도 모를 텐데..." 안타까워하는 팬들이 많았다. 부산을 홈팀으로 했기에 LQ 전자의 선수들은 부산 팬들의 영웅이었다. 그랬기에 이해하지 못한 행동들을 보고는 쓴 소리를 했던 것이다. 그 속에는 LQ 전자 프로 선수들을 향한 마음이 가득했다. 황정철은 겨우 도망을 쳐서 고야로 탈출할 수 있었다. 결정적인 패인은 혼자서 45만의 군대를 컨트롤하려고 했던 점과 그 전투에서 지더라도 괜찮다는 어떻게 보면 안일한 생각 때문이었다. 황정철은 고야로 들어오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이미 늦었다. 그리스의 13만 경보병과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베라와 이리스의 도합 20만의 대군이 고야로 물밀듯이 들어오고 있었다. 고야의 군대가 다 죽지는 않았지만 이리스의 복잡한 지형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황정철은 그 보고를 받고는 어쩔 수 없이 고야와 중국의 국경을 넘어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30만이 넘는 대군으로 인해 고야는 순식간에 점령되고 말았다. 황정철은 다시 중국 본토로 들어와 센터를 맡았다. 그리고 제대로 그 전투의 패인에 대해 다른 게이머들에게 말할 시간도 없이 다시 병력을 모집했다. 그 30만의 대군을 국경에서 막을 병력이 필요했다. 본토를 떠나 다른 곳으로 원정을 떠날 군대의 규모는 쉽게 늘일 수는 없어도 평소 지역에서 군대를 모집해 두었기에 황정철은 곧 20만이 넘는 군대를 모을 수 있었고 고야와의 국경으로 보냈다. 그 책임자는 자신이 아니라 고야와의 국경과 접한 지역의 게이머인 최한민으로 임명했다. 황정철은 자신이 너무 피곤해 그와 같은 임무를 맡기 역부족임을 스스로 알았다. 다행히 고야를 거쳐 중국으로 다가오는 병력은 없었다. 30만이 넘는 병력이 일시에 쳐들어왔다면 중국 문명 자체가 무너지지는 않겠지만 적지 않은 피해를 봤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황정철은 다른 한 편으로 그 상대의 군대가 중국 영토로 들어왔으면 하고 원하는 마음이 있었다. 상대의 군대가 중국으로 들어와 소진된다면 이리스에서의 그 패배에 대한 부담도 많이 줄어들 것이다. 그런데 상대는 조금의 피해도 입지 않은 채 고야에서 그 병력을 멈췄다. 황정철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자, 이제 한석이 형 차례네." 진규는 고야를 완전히 점령한 다음 고야의 수도로 와서 혼자 중얼거렸다. 이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끝이 났다. 아니, 앞으로 할 일이 있겠지만 당분간은 없을 것이다. "센터, 밀리1. 고야의 점령이 끝이 났습니다." "밀리1, 센터. 진규야, 수고했다. 이제는 한석이 차례다." 현준은 진규의 말을 듣고는 곧바로 한석에게 말했다. "디플, 센터. 고야의 점령이 끝이 났다." "센터, 디플. 알았다. 움직이겠다." 한석은 미리 현준과 준비한 대로 계획을 실행시켰다. 이미 베라, 이리스와 사전에 조율한 대로 그리스, 베라, 이리스 그리고 고야까지 합친 초거대 연합국을 탄생시킨다는 계획이었다. 각 국의 내정은 각국에게 맡기고 군사적인 행동과 외교적인 부분에서만 서로 협의하여 결정한다는 것이 그 골자였다. 또한 고야의 통치는 베라와 이리스에게 일임해 사전의 협의가 진실이었음을 보여 주어 계획의 실행은 더욱 매끄러웠다. 한석은 중국의 게이머들이 놀랄 표정을 상상하면서 빠르게 진척시켰다. "이게 뭐야?" 황정철은 너무나 놀랐다. 자신이 들은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이런 믿기 힘든 얘기를 힘들게 교란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스, 이리스, 베라, 고야가 합병이 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한 대륙의 3분의 2가 하나의 나라, 그것도 그리스를 중심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니. 황정철은 너무도 놀랐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게임의 결과는 명약관화(明若觀火)했다. 이리스와 베라에서 최소한 20만 그리고 고야에서 20만 또한 그리스에서 20~30만 정도가 모이면 60만 이상의 대군이 모이게 된다. 게다가 각 나라에서 지원을 하기에 그 보급 문제도 그리 무리가 되지 않을 것이다. 중국도 동원 자체는 할 수 있지만 그런 대규모 군대를 받쳐줄 경제력이 부족했다. 또한 해상 역시 그리스가 거의 완전히 장악했기에 중국으로서는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일단 게이머 한신과 사신의 물밑 작전과 진규와 유나의 전투에서의 승리로 인해 굳어진 초거대 연합국의 결성으로 게임으로 급격하게 한쪽으로 그 승세가 쏠렸다. 그리고 조금씩 연합국에 밀리던 중국은 건곤일척의 대결을 벌였지만 진규와 유나 대신에 현준과 한석이 대규모 군대를 지휘해 중국의 군대를 무찔렀다. 비록 60만 중에서 30만이 넘는 병력이 소진되었지만 중국 문명, LQ 전자의 게이머들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현준과 한석이 나섰는데도 60만에 가까운 병력 중 절반이 희생되었다는 것은 LQ 전자의 선수들이 대단한 저항을 했다는 말에 다름 아니었다. 관중들은 비록 게임에는 졌지만 끝까지 최선을 다한 선수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쳤다. "휴우.. 오늘 힘들었다. 진규야, 유나야 오늘 정말 잘했다." 한석은 게임을 끝내고 대기실로 돌아가면서 진규에게 말을 걸었다. 현준은 말하지 않았지만 초반에 위험을 무릅쓰고 중국으로 들어가 정탐을 성공한 유나와 이리스에서의 전투를 성공적으로 끝낸 진규가 이번 게임의 승자였다. 특히 스스로 전투를 계획해서 그 실행까지 매끄럽게 성공시킨 진규의 역량이 아주 돋보인 경기였다. 현준은 그런 진규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속이었지만 굉장히 뿌듯했다. 어린 동생이 아니라 이제는 완전히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동료가 된 것이다. 현준은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진규에게 다가가 어깨동무를 하고는 대기실로 걸어갔다. 그 모습에 유나와 한석은 서로 쳐다보며 웃었다. "축하해요! 수고했어요." "목 마르죠? 이거 마셔요!" 들어가자마자 코디들이 수건과 이온 음료를 들고는 네 사람을 맞이했다. "다들 수고했다. 정말 잘했다. 오늘처럼만 하면 우승도 문제없겠다." "진규야, 잘했다. 내가 했어도 그 정도는 했겠지만 나이 어린 네가 그렇게 완급을 조절하면서 할 수 있다니 내가 오늘 조금 배웠다." 서재필의 말을 이어 게임에 참가도 하지 않은 조범현이 너스레를 떨며 진규에게로 다가갔다. 무대의 뒤로 나와 대기실로 걸어올 때까지 완전히 느끼지 못했던 승리의 기쁨이 네 사람의 게이머에게 이제야 들이닥쳤다. "진팀장이 웬일입니까? 나를 다 보자고 하고?" 자소 소프트의 임원이자 사장인 박경락과 같은 라인이라고 정평이 난 김이사는 주위에 신경을 쓰면서 미리 와 있던 진팀장에게 말을 걸었다. 회사에서 서로 다른 라인으로 드러나 있었기에 김이사는 진지하게 자신과의 약속을 정한 진팀장의 의도를 모르고 있었다. "일단 이것을 한 번 보십시오." 진팀장은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자신의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어 김이사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잇지 않았다. 진팀장의 간단한 말과 행동에 김이사는 어쩔 도리가 없이 받은 서류를 조심스럽게 읽기 시작했다. 거의 10분이 넘게 지나자 김이사의 얼굴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굉장히 당혹한 표정으로 진팀장에게 물었다. "진팀장, 이게 사실입니까?" "그게 사실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진팀장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하기는. 이게 사실이면 나나 진팀장 모두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이런 사실을 알았습니까?" "저도 원래는 몰랐는데 다른 일 때문에 평소 만나지 않던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거기에서 이상한 기류를 읽었지요. 제 친구 중에 그에 관계된 사람이 있어 아주 대략적인 얘기를 들을 수 있었고 그 때부터 조금 알아봤는데 이런 게 나오더군요." 진팀장은 간략하게 설명했다. 문제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였다. 진팀장은 말을 돌리지 않고 바로 물었다. "김이사님,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무슨 말씀입니까?" 진팀장은 칼을 빼들었다. 둘 중 하나였다. "회사와 사장 중 하나를 택하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네? 그게... 무슨?" 김이사가 당황하면서 말하려고 하자 진팀장은 말을 끊고는 확실하게 말했다. "조금 전 그 서류를 봤으니 쉽게 빠져나올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잖습니까? 다행히 그 모든 관계는 사장에게 집중이 되어 있습니다. 이쯤 말씀드리면 제 의도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피땀 흘린 회사를 그냥 무너지게 둘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 김이사는 사장과 회사를 놓고 택일하라는 진팀장의 말에 곤혹스러웠다. 자신이 여기까지 온 데는 사장의 역할과 관심이 지대했다. 그런데 지금 위기가 있다고 마음을 바꾸라니. 김이사는 진팀장의 의견이 무엇이든 거절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진팀장의 말을 들은 김이사는 말문이 막혔다. "이미 검찰에서는 그 계획이 잡혀 있습니다. 아직 분위기를 보고 있지요. 게다가 어떻게 하든 간에 사장의 퇴진은 어쩔 수 없습니다. 김이사님도 사장을 따라 회사를 떠나겠습니까?" "........." "이번 주 중에 주주총회가 열릴 겁니다. 거기에서 대세가 판가름 나겠지만 상임 임원의 과반수가 넘는 사람이 현재 사장의 퇴진을 결의했습니다. 김이사님의 선택과는 상관없이 저희는 현 사장의 퇴진을 결정할 겁니다. 그 전에 확실한 입장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다면 김이사님께도 불이익이 돌아가게 될 겁니다. 그럼 저는 이만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아시겠지만 조금 전에 보신 서류의 내용은 밝히지 말아주십시오." "......" 진팀장은 서류를 다시 가방에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몇 걸음 걷다가 뒤로 돌아 고민에 잠긴 김이사의 모습을 보고는 시각을 확인한 다음 만나야 할 다른 사람과의 약속을 생각하고는 바쁘고 밖으로 나갔다. 김이사는 그 때까지도 움직이지 못했고 심지어 커피가 식고 있는지도 몰랐다. 진성의 의견을 들은 후, 백방으로 그 의견을 프로젝트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던 진팀장은 자신이 모르는 가운데 이상한 기류를 느꼈다. 현재 한국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망한 게임 회사인 자소 소프트에 대한 투자를 꺼리는 곳이 단 한군데라도 있다는 사실은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오히려 투자를 어떻게든 해 보려고 안달이 나야 정상이다. 진팀장은 그런 이상한 분위기와 맞물려 자신의 친구에게서 들은 이야기로 인해 진성의 의견은 미루고 그 이상한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노력했다. 진팀장은 자신의 친구 중에 검찰에 있던 인물에게 귀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바로 자소 소프트의 사장과 정계의 거물간의 정치자금과 관련된 문제였다. 진팀장은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앞이 깜깜함을 느꼈다. 이제까지 자소 소프트가 어떤 정치적인 압력이나 다른 기업들의 견제를 덜 받았던 것은 사장의 수완 덕분이었다. 게다가 그 수완이라는 것이 말 뿐이 아님을 진팀장 역시 알고 있었다. 단지 신경 쓰지 않고 있었을 뿐이었다. 진팀장은 드디어 올 게 온 것이라 생각했다. 그 정계의 거물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현실이었지만 직접적으로 정치인에게 피해가 가기 보다는 돈을 준 기업인에게 그 초점이 맞춰져가고 있었다. 진팀장은 백방으로 움직여 그에 대한 사실들을 하나, 둘 모으기 시작했다. 비록 시간이 많지 않았지만 자신이 자소 소프트의 내부 고위층 인사였기에 대강의 비자금과 그 유용에 대한 단서를 포착할 수 있었다. 진팀장은 고민했다. 어차피 터져야 할 것이라면 최대한 그 피해를 막아야 했다. 다행히 사장만이 그 정치인과 접촉했기에 기업의 조직적인 행동이라는 오명은 벗을 수 있을 듯했다. 진팀장은 혼자서 할 만한 작은 일이 아니라 생각했고 그로 인해 이팀장까지 그 일에 동참했다. 진팀장과 이팀장은 그 일에 최선을 다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불안한 마음도 있었다. 자신들 역시 회사에서 상임 임원이었기에 그 비자금에 대해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어쩌면 사장이 잡혀 들어가면 자신들 역시 그에 대한 조사를 받을 지도 몰랐다. 스스로 거리낌이 없었지만 사람이란 것이 떨어서 먼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정치와 언론이란 믿을 게 못됨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진팀장과 이팀장은 자신들을 어느 정도 희생할 각오를 하고 그 일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진팀장과 이팀장은 그 때부터 임원과 대주주들을 만나며 현재의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그 와중에 진팀장보다 더 그 일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대주주를 만나기도 했다. 그 대주주의 제안은 사장의 퇴진과 새로운 기업으로 다시 일어선다는 것이었다. 사장이 그 사실을 곧 알게 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최소한 자소 소프트 자체에는 피해가 덜 가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곧 있을 상임 위원회와 주주총회를 위해 진팀장과 이팀장은 부지런히 돌아다녀야 했다. ------------------------------------------------------------- 어떻게 될까요? 연휴 잘 보내셨는지? 혹시 도로에서 많은 시간을 허비하지는 않으셨는지? 마음 풀고 다시 시작합시다(^^) 잊은게 있어서... 수정합니다. 이벤트!!! 앞으로 내용상 그다지 많이 나오지는 않겠지만 TGP1의 중심이 문명 온라인이었기 때문에 독자님들이 전략, 전술을 제게 보내주시면 그 중에 제가 선택을 해서 5분에게 1권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메시지로 보내시면 됩니다 ^^ 그리고 166회를 올리게 될 텐데.. 그 때, 리플을 달아주시는 분 중 정확하게 1, 10, 20, 30, 40 번째 리플을 다신 5분에게 2권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66회는 죄송하지만 글 본문이 아니라 이벤트를 위해 만들고 이벤트가 끝남과 동시에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166회는 이번주 토요일 밤 12시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기준은 제 핸드폰 시계입니다. 제 나름대로 정확히 12시가 되면 올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유조아가 미친 짓을 한다면 이 두번째 이벤트는 자동적으로 연기되는 것으로 아시기를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재미있다면 추천을!! ------------------------------------------------------------- TGP1(The Gamer Part 1) [168 회] 리그 시작 "뭐라고?" 김이사는 사장 앞에서 아무런 대답도 못한 채 가만히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로플의 개발팀장인 진팀장을 만났던 김이사는 한참을 고민하면서 망설였지만 지금까지 자신을 밀어주고 보살펴 준 사장을 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사장에게 문제가 생기면 김이사 자신도 무사하다고 볼 수도 없었다. 그래서 곧장 사장실로 와 진팀장이 했던 말과 자신이 봤던 서류의 내용은 사장에게 말했다. 박경락 사장은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정치권에서 문제가 생기고 있다는 기미는 느꼈지만 검찰에서 이렇게 빠르게 손쓰고 있을 줄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박경락은 곰곰이 생각했다. '그 동안 내게 정보를 줬던 곳에서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조용히 있다는 말은 나를 버렸다는 것인가? 아무래도 확인이 필요하겠군. 그나저나 진팀장은 어떻게 알았을까? 어쨌든 이대로 죽을 수는 없지. 뭐? 주주총회? 흥, 어떻게 될 지 두고 보라고.' 박경락은 생각을 정리했다. 어쩌면 자신이 팽 당하게 될 처지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때를 위해 들어 놓은 보험이 자신의 수중에 있었다. 그리고 만약에 자신이 버려진다고 한다면 절대 혼자 그런 처지가 될 생각은 절대 없었다. "김이사!" "네, 사장님." "일단 우리 쪽 주주들의 동향을 파악하도록 하고. 오늘 저녁에 내 집으로 임원들 다 모이라고 하게. 물론 우리 쪽 인물들에게만 말하면 되겠지." "네, 알겠습니다. 그.. 그런데 어떻게 하실지?" 김이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 배를 탄 운명이었기에 그 운명이 어떤 운명인지 알고 싶었다. 사장의 과거와 이제까지 봐 온 그 능력을 생각해 일단 믿었지만 자신의 운명을 승산이 없는 곳에 던지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김이사의 물음에 살짝 고개를 치켜든 박경락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자네는 나만 믿고 따라오면 되네. 자, 박이사에게도 사정을 이야기하고 빨리 움직이도록 하게나." "네!" 김이사는 더 이상 물어볼 수가 없이 그냥 사장실을 나오고 말았다. 이미 엎지른 물이었다. 김이사는 종종걸음으로 박이사에게로 걸어갔다. 임시 주주총회를 대비해야만 한다. 김이사가 나가자 눈빛을 내던 박경락은 자신의 의자에 깊숙이 소리를 내면서 앉았다. 자신에게 히든카드가 있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막다른 골목에서 꺼내야 할 마지막 카드였다. 그것을 쓰게 된다면 그 다음이란 있을 수 없었다. 김이사에게는 시원스레 말했지만 박경락은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정보 계통에서 자신을 버렸다면 객관적으로는 승산이 없다는 말이다. 박경락은 그런 상대의 판단을 뒤집을 만한 큰 건수를 터트리거나 자신 대신에 이 모든 것을 뒤집어 쓸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까지 자신이 모든 자금의 관리와 정치권과의 접촉을 담당했기에 단 번에 다른 사람을 내세울 수가 없었다. 박경락은 오랜 시간 동안 정치권과의 줄다리기를 하면서 익힌 감각과 경험을 이용해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은 위기 중에 최고의 위기였다. 진팀장은 자소 소프트의 주식 가운데 11%에 육박하는 주식을 지닌 대주주를 만나고 있었다. 시원스런 머리에 듬성듬성 흰 머리카락이 나 있고 그리 길지 않은 흰 수염을 기르고 있는 노인이 바로 국내에서 손꼽히는 부자로 유명한 박갑재였다. 이미 일흔이 넘은 나이였지만 굉장히 정정하고 시세와 정세를 읽는 눈이 탁월해 10번의 투자를 하면 3, 4번은 실패를 하지만 나머지 성공하는 것들이 실패보다 워낙 규모가 커서 실패를 만회하고도 남는 성과를 거두는 사람이 바로 박갑재였다. "어르신, 제 말을 이해하셨습니까?" ".......... 자네의 이야기는 이미 들어 알고 있네." "........" 30여분이 넘도록 계속된 진팀장의 설명에도 아무런 물음도, 더 이상의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던 박갑재의 대답은 진팀장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 알고 있던 얘기를 30여분 가량이나 또 듣다니. 진팀장은 순간적으로 자신을 기만한 게 아닌가 싶어 화가 났지만 알고 있는 얘기를 또 듣는 상대의 노련함에 머리가 순간 차가워졌다. 박갑재는 아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런 모습에 진팀장은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리자 박갑재는 눈을 뜨고 자신 앞에 놓인 차를 천천히 마시며 입을 열었다. "자네가 자소의 개발팀장 중 한 사람인가?" "... 네, 그렇습니다." "자네가 원하는 것은 임시 주주총회가 열리면 내가 그 사장의 해임에 찬성에 달라는 것 아닌가?" 진팀장은 박갑재의 단도직입적이면서 핵심을 찌른 말에 놀랐다 황급히 대답했다. "...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어진 박갑재의 말은 진팀장의 생각과는 달랐다. "그렇다고 그 여파를 피해나갈 수 있을까? 사장이 정치 자금으로 문제가 생기고 그 자금이 회사의 자금에서 유용한 것이라면 아무리 그 일이 터지기 전에 사장을 해임한다고 해서 책임이나 그로 인한 영향을 무시할 수 있을까?" 박갑재의 말에 진팀장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 완전히 피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그 여파를 최소화 시킬 작정이었습니다. 어르신의 말씀대로 그런 민감한 문제가 생긴다면 피해가 없을 수는 없지요." "음.. 그런가?" 박갑재는 다시 한 번 눈을 감아버렸다. 그리고는 생각에 잠겼다. 진팀장은 그런 상대의 모습에 앞에 놓인 식은 찻잔을 들어 단숨에 마셔버렸다. 갈증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몇 모금도 되지 않는 식은 차는 그리 갈증 해소에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진팀장은 자세를 그대로 박갑재의 눈을 주시하고 기다렸다. "자네... 새로 회사를 차릴 생각은 없는가?" "... 네?" 박갑재가 이번에는 눈도 뜨지 않고 입을 열어 진팀장에게 말했다. 하지만 눈만을 바라보고 있던 진팀장은 박갑재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아니, 귀는 들었지만 머리는 그 소리를 해석해 내지 못했다. "젊은 사람이.... 내, 다시 말해 주지. 자네, 자네가 직접 회사를 차릴 생각은 해보지 않았는가?" "........." 진팀장은 박갑재의 말을 듣고는 입을 열 수 없었다. 자신이 새로운 회사를 차리라니. 하지만 곧 박갑재의 말에도 일리가 있음을 알았다. 진팀장은 새로운 자소 소프트의 사장으로 이팀장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미 증명된 문명 온라인의 대대적인 성공과 그 프로젝트 관리 능력을 선보인 이팀장이라면 다른 임원들이 무조건적으로 반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창업에 대한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그런데 박갑재의 말을 듣자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아니더라도 새로운 회사를 만드는 방법을 말했던 것이다. "어르신, 그 방법이 제일 피해를 줄이는 방법입니까?" "..... 그렇다고 볼 수 있네. 하지만 그 방법은 시간이 꽤 오래 걸리지. 기존의 자소 소프트의 전문가들이 모두 다 같이 새로운 회사로 옮긴다는 보장도 없는데다가 잘 나가고 있는 회사를 옮길 사람은 없겠지. 자네가 이런 이야기를 회사에 소문을 낸다면 모르겠지만. 허허허. 소문을 내면 그 즉시 신문이나 TV에서 떠들어 대겠지. 그렇게 된다면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한 채, 폭탄을 직격으로 맞는 것과 진배없지." 박갑재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새로운 회사를 만든다고 해서 기존의 모든 것을 그대로 새로운 회사로 가져올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기술과 관련된 것의 특허는 대부분 개인이 가지고 있지만 그것의 사용에 있어서 일정 기간 동안 회사의 허락을 받아야 했기에 쉽지 않았다. 제일 좋은 방법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시간에 쫓기는 현재로서는 힘든 방법이었다. "어르신, 회사를 새로 만드는 것은 힘들 듯합니다." ".... 그렇겠지. 자네의 설명 중에 한 가지가 빠진 듯하군." 박갑재의 말에 진팀장은 무슨 말인지 몰라 되물었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차기 사장은 자네인가?" 박갑재의 말에 진팀장은 급히 말을 이었다. "아, 아닙니다. 자소 소프트의 히트 게임인 문명 온라인의 개발팀장인 이희철 팀장을 차기 사장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경력과 실적으로 볼 때, 충분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희철 팀장? 개발팀장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개발팀장이 차기 사장이라.... 음....." 다시 박갑재는 고민에 빠졌다. "진팀장." "네, 말씀하십시오." "나는 보통 6할에서 7할 정도의 투자 승률을 가지고 있다네. 내가 이렇게 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승률이 높아서가 아니라 높은 승률을 유지하고 그 승률을 가치가 높은 곳에 집중했기 때문에 가능했지. 자소 소프트의 경우는, 내 판단으로 보면 무조건 투자를 해서 이득을 창출해야 하는 곳이지. 음... 내 의견을 한 번 듣고 생각해 보게. 내가 말한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해서 자네의 그 임시 주주총회에서 다른 의견을 낼 생각은 없네. 하지만 조금 더 나은 방법이 있다면 그것도 고려해야겠지." 박갑재의 장황한 서두에 진팀장은 긴장했다. "말씀하십시오, 어르신." "새로운 회사를 만드는 것이 어려우니..... 회사를 분리하도록 하게." "네? 분리라니요?" "내가 볼 때, 이미 자소 소프트는 하나의 회사로서는 그 규모가 너무 커. 게다가 앞으로 많은 발전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지금 이 위기를 오히려 미래를 위한 기회가 바꿔 게임 개발팀을 위주로 분사하는 게 어떻겠나?" 분사라는 말에 진팀장은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분사라니. "분사?" "자소 소프트 그룹으로 만드는 거지. 일단 박경락을 사장에서 해임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그와 더불어 회사 체제를 그룹으로 만들고 그룹 밑에 몇 개의 회사로 나눠 경영권을 분리시키면 새로운 회사를 만드는 것에 비할 바는 안 되지만 그나마 낫지 않겠나?" "아..." 진팀장은 박갑재의 말을 듣고는 놀라버렸다. 확실히 개발팀장인 자신과는 그 관점부터가 달랐다. 확실히 박갑재의 말은 현실성도 있고 피해를 줄일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게다가 주주총회를 통해 통과할 수 있는 사안이기도 했다. 박갑재는 진팀장의 얼굴이 활짝 펴지자 같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 작업을 위해 내가 데리고 있는 기업 상담 전문가들을 대거 투입하도록 하지. 관련 전문가들이니까 아마도 주주총회를 준비하는 데 꽤 도움이 될 걸세." "아.... 고.. 고맙습니다." 진팀장은 박갑재의 말을 듣고는 다시 놀랐다. 이렇게 불쑥 찾아온 자신의 말을 듣고 주주총회에서 찬성해 주겠다는 말만 들어도 고마운데 앞으로 자소 소프트의 체계에 대한 조언과 더불어 이제는 자신이 직접적으로 그 일에 대해 도와주겠다고 하자 진팀장은 너무나 고마움을 느꼈다. 하지만 무엇이든지 과한 것은 좋지 못함과 같았다. 진팀장은 정색을 하고 박갑재에게 물었다. "어르신, 그런데 왜 이렇게 도와주시는 겁니까?" "허허. 자네는 사장을 해도 되겠구먼. 그렇게 의심할 줄도 알아야 하네. 음... 자네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라면... 이득이 되기 때문이지. 내가 보기에 자소 소프트는 아직도 그 발전 가능성이 대단하지. 가능하면 내가 가진 주식의 비율을 늘리고 싶을 정도라네. 늙은 몸이지만 아직 안목이 줄어든 것은 아니니까. 그렇지 않나?" "네? 아... 네.. 어르신, 고맙습니다." 박갑재 같은 사람이 움직였다는 말은 자소 소프트에 투자하는 것이 큰 이득이라는 말과 같았다. 진팀장은 그제야 얼굴을 풀었다. "자네는 최대한 회사 내의 임원들을 만나도록 하게. 나는 내 나름대로 힘써볼 테니까." 진팀장은 완전히 나서겠다는 박갑재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군만마를 얻은 듯했다. 박갑재가 나선다면 훨씬 더 유리한 국면으로 접어들 것이다. 어둑어둑해진 저녁. 아주 정성을 들인 정원이 있는 3층 집의 커다란 거실에는 양복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가득했다. 기다랗게 앉은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던 한 사람이 일어서더니 말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에 나를 배신할 사람이 있다면 지금 당장 일어나 내 집에서 나가도록 하게!" ".........." 박경락은 집에 모인 임원들을 살펴보면서 나직하지만 힘 있게 말했다. 당연히 아무 말도 없었다. 박경락은 다시 한 번 쳐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김이사에게 들었겠지만 지금 우리는 좋지 않은 국면에 놓여 있네. 그 초점은 나 한 사람이지만 내가 만약 검찰에 소환이라도 된다면......" 박경락은 일부러 말을 끌었다. 그 순간 모인 간부들의 대부분이 몸을 움찔했다. 정치권과의 연계는 없었지만 비자금을 마련하는 데에 직, 간접적으로 관여한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개인적인 유용마저 있었다. 박경락은 다시 말을 이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겠지. 하지만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걸세. 자네들에게 말할 수는 없지만 이런 상황을 대비해 놓은 것이 있기 때문이지. 문제는 지금 날뛰고 있는 진팀장과 이팀장 그리고 그에 따라 나대는 사람들일세. 아무래도 곧 임시 주주총회가 열리게 될 텐데 다들 예상하겠지만 나의 해임 문제가 수면으로 떠오르겠지. 주주총회에서 내가 해임이 된다면 당연히 자네들도 얼마 가지 못해 모두 회사에서 쫓겨나고 말걸세. 내가 오늘 이렇게 장황하게 말을 하면서 자네들을 이렇게 모은 이유는 단 하나, 나를 따르지 않는다면 정말로 후회하게 된다는 말을 하기 위함일세. 나, 박경락은 절대 이런 위기로 쓰러지지 않을 거라는 것은 자네들이 더 잘 알거야. 오히려 나는 이번의 일로 인해 진팀장의 말에 혹한 사람들과 그 주주들을 잘 살펴볼 생각일세. 부화뇌동하는 사람들은 이번 일로 굉장히 많이 흔들리겠지. 나는 그런 사람들을 자세히 볼 생각이네." "......." 박경락의 말을 들은 임원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중의 절반이 넘는 임원들은 이팀장이나 진팀장을 만났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확답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다는 말을 했다. 진팀장과 이팀장이 보여준 서류에는 자신이 알고 있었던 비자금과는 그 액수에 있어서 차원이 달랐고 그로 인해 이탈하려는 마음도 더 커졌다. 하지만 박경락의 자신에 찬 말을 듣자 마음은 고민으로 가득 찼다. 비비꼬인 등나무 줄기였다. "아무튼, 나는 자네들을 믿네. 자네들도 나를 믿게. 그러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테니." 박경락은 믿으라는 말로 마지막을 대신했다. 박갑재의 말을 듣고 진팀장을 찾아온 사람들은 대단한 전문가들이었다. 게다가 이미 자소 소프트의 예산이나 조직 체계, 그리고 예상되는 수입에 대해서도 자료를 가지고 있었다. 박갑재는 이미 자소 소프트에 대해서 자세히 분석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제 생각입니다. 자소 소프트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하드웨어 제작 부분입니다. 현재 각 개발팀에 하드웨어 부분이 들어가 있고 그에 따라 하청이 주어지고는 있는데 효율적이지 못합니다. 하드웨어 부분을 따로 떼어 하나의 회사로 만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전문가 중의 한 사람이 진팀장에게 한 말이었다. 진팀장 역시 그런 점은 이미 이해하고 있었다. 중복된 일이었다. 게다가 진팀장은 앞으로 로플의 상용화를 생각했기에 현 단계에서 하드웨어 부분을 따로 떼어 회사로 만드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라 생각했다. 기술 공개가 이루어진다면 자소 소프트의 주 사업 분야 중 하나는 로플의 접속기 제조일 것이다. 그 때는 접속기에만 집중해서 연구개발과 마케팅이 필요할 것이다. 진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곧 말했던 사람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다음 부분은 소프트웨어 부분입니다. 바로 게임 개발이지요. 이 부분은 두 가지로 나누려다가 오히려 서로간의 연구 결과 교류와 경쟁력 등 여러 요소를 생각해 볼 때, 규모는 조금 커지겠지만 하나의 회사로 두는 게 나을 듯합니다. 현재 문명 온라인과 로플의 개발팀이 주축이 된다면 별 문제가 없을 겁니다." "네, 그 다음은요?" 진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문명 온라인과 로플을 분리하려고 했지만 그 사람의 말에도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다음은 프로구단입니다. 아니, 프로구단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드웨어 분야와 소프트웨어 분야가 일차적인 이익을 창출한다면 이 세 번째 회사는 이차적인 이익을 추구하게 될 겁니다. 프로구단은 그 중의 하나이지요." 전문가의 말 자체는 알아들었지만 그 의미는 감이 잡히지 않아 진팀장은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저희 팀의 분석에 따르면 자소 소프트는 이익의 대부분을 일차적인 생산 단계에서 얻습니다. 이차적인 것은 거의 전무하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이차적인 이득이라면?" "예를 든다면, 문명 온라인이라는 게임 자체에서만 이득을 얻지 그것을 통한 이익의 재창출 시도가 전무한 상태입니다. 그 때문에 다른 곳에서 어부지리로 그 이득을 가지는 상태지요. 프로 리그의 성공을 위해 기득권을 포기한 것은 좋았지만 완전히 포기해서는 안 되지요. 그럴 이유도 없지요. 게임 개발사로서 할 수 있는 이벤트와 기존의 생산된 제품인 게임을 이용한 온라인상이나 오프라인 상에서의 관심 유발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대단하지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저라면 문명 온라인에서 유명한 게이머 스키피오를 좀 더 확실한 게임계의 스타로 만들겠습니다. 아니, 게임계가 아니라 좀 더 넓은 의미의 스타로 만들겠습니다. 스타는 돈을 불러들이지요." "......." 진팀장은 그제야 무슨 말인지 알았다. 이차적인 이득이란 문명 온라인의 명백하면서도 믿기 힘든 대성공을 발판 삼아 인기를 얻게 된 요소들을 더욱 극대화시키는 것이었다. 게이머 스키피오, 진성의 인기를 이용해 진성을 여러 방면으로 진출시켰다면 훨씬 더 경제적으로 나은 결과를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진팀장은 이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것이 추세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아들 현준과 아들로 생각하는 진성이 관계되었기에 주저했던 것이다. "자소에서 하지 않는다면 다른 곳에서 하겠지요." ".... 네, 알겠습니다." 진팀장은 현준과 진성의 선택에 따른 문제였기에 그렇게 대답했다. 게다가 그런 스타 마케팅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아니 필수적으로 추구해야 할 부분도 적지 않았다. TV에는 자소 소프트 빌딩 앞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보여주고 있었다. 기자였다. 곧 낭랑한 기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X월 X일, 자소 소프트에서 임시 주주총회가 열릴 예정이라는 자소 소프트의 발표가 있었습니다. 정기총회가 두 달 정도 남은 이 상황에서 갑자기 별다른 일이 없이 주주총회가 열리게 되자 자소 소프트의 직원들 뿐 아니라 투자자들 역시 동요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항간에 자소 소프트에 대한 좋지 않은 루머가 떠돌고 있기는 하지만 현재 국내 게임계 1위의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촉망받는 기업이라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그런 루머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기자가 말을 끊자 화면은 순간 바뀌며 전문가로 보이는 사람의 연구실을 보여주었다. 수십, 수백 종류의 책들이 서가를 가득 채워 대단한 사람이라는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연구실이었다. 영어와 불어 그리고 독어로 된 원서들이 가득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연구실의 주인이 하는 말이라면 다 믿을 수 있게 만들 정도였다. 기자가 질문했다. " 지금 이 자리에 기업경제발전연구소 수석연구원인 김정연씨가 나와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네, 자소 소프트는 대단한 우량 기업입니다. 현재로서는 별다른 악재가 없는 한 당분간 계속 자소 소프트의 성장은 계속될 거라는 것이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주주총회라는 말이 나왔지만 아무래도 내부 갈등으로 인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내용 자체는 추측성이 다분했지만 말투는 굉장히 딱딱한데다가 끊어서 말해 정말 사실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대단한 테크닉이었다. "아, 그렇군요. 자소 소프트의 임시 주주총회 소식은 많은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지만 외부적으로 그리 큰 문제는 없는 듯합니다. 지금까지 XXX 뉴스 박진만이었습니다." TV의 화면이 바뀌자 진팀장은 곧 TV를 꺼버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최대한 빨리, 그리고 사고 없이 주주총회를 끝내면 좋을 텐데.." 진팀장은 회사 내에서 생긴 간부급 지지자들과 같이 주주총회에 건의할 안의 수정을 완전히 마친 상태였다. 사장의 해임을 골자로 하는 제안은 그에 찬성하는 간부들에게 어느 정도 공개되었고 의견 수렴도 거의 마쳤다. 하지만 분사 계획은 자소 소프트 내에서 진팀장과 이팀장만 알고 있었다. 아직 분사 계획은 완전히 만들지 못했지만 주주총회 전까지는 충분히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진팀장과 이팀장이 그 분사 계획안을 발의하는 것이 아니라 대주주인 박갑재가 대신 발의하기로 서로 말을 마친 상태였다. 10%가 넘어 11%에 달하는 주식을 가진 대주주여서 발의도 가능했다. 대전으로 갔다 서울로 돌아온 자소 소프트의 프로팀은 굉장히 어수선한 분위기에 이상함을 느꼈다. 평소와는 완전히 달랐다. 비슷한 다른 게임 개발사들보다 후한 연봉과 대우 그리고 자유스러운 사무실 분위기로 유명한 자소 소프트의 평소 모습과는 달랐다. 딱히 꼬집어 말하기는 힘들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긴장감, 그 자체였다. 아직 일행 모두 주주총회에 대한 얘기를 듣지 못한 상태였다. "재필이 형, 도대체 무슨 일이죠?" "... 나도 잘 모르겠다. 나중에 보자." 서재필은 선수들을 자소 소프트의 지하에 남겨 두고 재빨리 단장 황태산을 만나기 위해 급히 움직였다. 자신이 생각해도 뭔가 이상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회사에 무슨 일이 생겼나?" "이렇게 잘 나가는 회사에 무슨 일이 있을라구? 자, 다들 수고했다. 재필이 형이 갔으니 우리도 해산해야겠지. 내일 보자고." 현준이 상황을 정리했다. 원정을 갔다 온데다가 앞으로 삼일 동안은 게임이 없기에 빨리 집으로 가서 쉬기로 오는 동안 합의했었다. 현준의 말에 모두들 서로 잘 쉬라는 말과 함께 흩어졌다. 한석은 유나와 같이 재빨리 나갔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떼를 지어 몰려 나갔다. 혼자 남아 있던 현준은 핸드폰을 꺼내들어 전화를 걸었다. 한참이 지나자 상대방이 전화를 받은 모양이었다. "어, 어디냐?...... 어디? 로플팀 요람? 어.. 지금 왔다. 당연히 피곤하지. 지금 잠깐 들리고 집에 가려고. 그런데 왜 이렇게 회사 분위기가 뒤숭숭하냐? 뭐? 주주총회? 정말? 잠깐.. 지금 올라갈게." 현준은 재빨리 전화를 끊고는 진성이 있는 로플팀의 요람을 향해 달렸다. "수고했다. 많이 피곤하지?" 진성은 현준이 숨을 헐떡거리며 달려오자 반가워 말했다. 요즘 진성은 개발팀장으로서, 현준은 게이머로서 바빴기에 서로 얼굴 보는 시간도 그리 많지 않았다. 현준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바로 물었다. "주주총회, 정말이냐?" ".... 정말이다. 오랜만에 만나서 농담할 정도로 보였냐? 내가?" 진성의 농에도 현준은 심각했다. "무슨 일이지?" "진팀장님과 이팀장님이 요즘에 굉장히 바쁘던데 나로서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지." "아버지?" "..... 몰랐냐? 야, 너 아들 노릇은 좀 해야지." "...... 그랬냐?" 진성은 현준의 말에 어깨를 으슥했다. 그리고는 물었다. "대전에서는 수고했다. 게임은 못 봤는데 잘 했다고 하더라. 그런데 개인전은 좀 어떠냐?" "..... 힘들지 뭐. 진성이 네가 안 나온다고 하니까 각 프로팀들의 강자들이 죄다 개인전으로 몰렸다고. 그래서 나와 단체전 참가자들은 잘 된 일이지만 혜연이나 현호에게는 참 힘든 일이지. 승률이 50%도 되지 않으니까." 진성은 그 두 녀석, 혜연과 현호가 걱정이 되었다. 범현 같은 녀석이라면 별로 걱정하지 않았겠지만 은근히 자존심이 강한 혜연과 현호여서 걱정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 그렇구나. 그 두 녀석은 어때?" "기분이 좋을 리가 없지. 이게 다 진성이 네가 안 나와서 그런 거다." 현준의 억지에 진성은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그게 말이 되냐? 그리고 져보기도 해야 이기기도 하지." "뭐?" 현준은 진성의 능청스런 말에 어이가 없었다. 제대로 져본 적도 없는 주제에 져봐야 이긴다는 말을 하다니. 그런 현준의 표정에 진성은 슬쩍 웃으며 말했다. "하긴, 예외인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하하하. 주주총회에는 신경 꺼라. 네게 관심 가진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하나도 없으니까. 인기 게이머이지만 회사로 봐서는 단지 고용된 사람에 불과하니까." "...... 그렇긴 하지." "그리고 진팀장님이 알아서 잘 하시겠지. 우리 저녁이나 먹으러 갈까?" 진성이 화제를 바꾸자 현준이 냉큼 미끼를 물었다. "네가 사는 거냐?" "크... 좋다. 오랜만에 내가 사지. 교외로 갈까?" "음... 좋지. 하하하. 내 애마가 요즘 녹이 슬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가자." "그럼 먼저 내려가 차 빼 놔라. 정리 조금 한 뒤에 내려갈 테니까." "빨리 와라." 현준이 요람을 나서자 진성은 그 뒷모습을 보며 웃었다. "저 녀석은 저런 면이 좋단 말이야.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있어야지. 일단 밥이나 먹고 나중에 와서 테스트나 해 봐야지. 별 일이 없어야 할 텐데..." ------------------------------------------------------------ 실로 오랜만에 글을 올린 것 같습니다. 오늘이 토요일 맞지요? ^^; 주주총회에 참여한 적이 없어(^^) 제 나름대로 조사한 것이어서 전문가(^^)들의 눈에 헛점이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끔하게 침을 놓아 주십시오. 오늘 3권 마지막 수정 원고를 넘깁니다. 예상이지만 다음주쯤에 3권이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지막. 다음에 카페를 만들 생각으로 준비중에 있습니다. 글 연재도 하겠지만 출판중인 것보다는 그렇지 않은 글들 위주로 할 생각입니다. 또한 무엇보다도 글을 쓰는, 읽는 기쁨을 아는 사람들끼리 조금이나마 서로 나눌 수 있기를 원해서 만든 겁니다. 나중에 정식으로 오픈하게 되면 다시 말씀드리지요^^; 재미있다면 추천을!!! ------------------------------------------------------------ TGP1(The Gamer Part 1) [170 회] 로플 그룹 사장 박경락은 자신이 그 동안 구축했던 정부의 비선과 정보통을 총동원했다. 자신이 민선당 뿐 아니라 자유당에서 불법 정치자금을 댄 증거를 가지고 있었기에 현재의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바로 집권당인 자유당에서 민선당의 정치 비자금 수사에서 자신을 제외시키도록 설득하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박경락은 고민하고 있었다. 그 히든카드를 쓰게 되면 그것으로 자유당과의 인연은 끝이 나는 꼴이었다. 그렇게 해서는 지금 당장 발에 떨어진 불똥을 해결하기 힘들었다. 진팀장은 아마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자신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하더라도 주주총회를 통해 자금 유용에 대한 부분을 지적하면 어쩔 수 없이 대표 자리에서 물러나게 될 것이다. 박경락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정치권력을 상대로 이렇게 협박과 비슷한 거래를 했다가는 뒤탈이 좋지 않을 텐데.. 그렇다고 현재의 상황을 뒤집을 만한 다른 방법도 없고. 사면초가군. 어떻게 일이 이 지경으로 엉망이 되고 만 거지?' 진팀장은 사장실로 들어와 있었다. 역시나 화려한 가구들로 꾸며져 돈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이었다. 진팀장은 은근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분명 사장이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있을 텐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가 주주총회를 며칠 남겨 놓고 이렇게 갑자기 부르다니 뭔가 꿍꿍이속이 있지는 않을까 걱정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진팀장이 먼저 물었다. 별로 답답할 것은 없었지만 이 화려한 사장실에 있다는 것 자체가 달갑지 않아 먼저 물었다. "내일 임시 주주총회를 한다면서?" 사장의 말투에서 불안감을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뭔가 믿는 것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진팀장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거기서 아마도 내 해임안이 상정되겠지?" 사장의 단도직입으로 묻는 질문에 진팀장은 내심 놀랐다. 특히 별다른 감정의 변화가 없이 묻자 불안함은 더 커졌다. 오랜 기간 동안 회사의 대표로 있다가 강제로 축출당한다는 말을 이리도 가볍게 할 수 있을까. 진팀장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어차피 알게 될 일, 분명히 대답했다. "........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면 내 대신 누가 대표가 되는 거지?" 진팀장은 사장이 화를 낸다거나 신경질을 부릴 줄 알았는데 전혀 딴판이었다. 오히려 자신의 후임 사장이 누구인지 묻는 게 아닌가. 이제 불안함은 단지 생각이 아니라 확신으로 바꿨다. 진팀장은 정색을 하고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것까지 말씀드릴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하지만 사장은 오히려 능글거리며 진팀장을 향해 중얼거렸다. "사람 야박하기는...." "더 이상 볼 일이 없으시다면 그만 나가보겠습니다." 진팀장은 그런 사장의 모습도 별로 보기 싫었고 사장실도 불편했기에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말했지만 사장은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허.. 이 사람, 왜 이리 급한가? 앉아 보게. 지금부터 내가 할 말이 있으니까." 할 말이 있다는 사장의 말에 진팀장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진팀장은 지금부터 하는 말이 사장의 속마음임을 확신했다. 침이 마르는 듯했다. "......." "자네, 회사를 살리고 싶겠지?" 사장의 목소리는 당당했다. 며칠 후면 회사를 떠나야만 하는 사람치고는 너무나 당당했다. 진팀장은 말하지 않고 사장이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 "나 역시 마찬가지라네. 회사를 살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 하지만, 내가 죽어서는 살아 있는 회사도 소용이 없지 않겠나?" "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자 진팀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사장은 그런 진팀장을 한 마디로 앉히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더 들어 보게. 지금 정치권에서 비자금 문제 때문에 시끄럽고 그 와중에 나를 희생양으로 삼을 눈치인 듯한데.... 내가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것 같은가?" 사장의 목소리에는 낮게 깔렸지만 알아채지 못할 정도는 아닌, 마치 낮게 스며드는 안개와 같은 분노가 느껴졌다. 진팀장은 사장의 말이 단순한 농담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진팀장 역시 정색을 하며 물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민선당이 당하고 있는 처지라 이런 일이 벌어졌지. 바로 집권당인 자유당의 압력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겠나? 그런데 내게는 자유당의 그 압력을 이겨낼 히든카드가 있다네. 계속 쓰면 힘들겠지만 그래도 이번과 같은 위험한 시기에 당연히 효과를 발휘할 카드지. 그렇게 되면 나를 해임할 이유가 없어질 텐데...."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지만 진팀장은 원칙론을 고수했다. 어차피 자소 소프트의 피해는 돌이킬 수 없는 상태라 판단했다. 현재 사장으로 인해 정치적으로 문제가 해결된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수면으로 떠오를 사안이었다. 잠시 사장의 말에 고민을 했던 진팀장은 단호하게 말했다. "주주들은 사장님의 공금 유용과 비자금 문제에 대한 자료를 다 받은 상태입니다.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근거는 충분하다고 봅니다." ".... 쯧쯧... 그래서야 어떻게 사업을 하겠나? 이제까지 자소 소프트와 같이 작은 회사에 많은 메이저 기업들을 누르고 게임계에서 최고를 달릴 수 있었던 것이 기술이 탁월해서였다고 생각하나?" 사장은 진팀장이 안스러운 듯 말했지만 사장의 목소리에는 스멀스멀 불안감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진팀장은 사장의 말이 틀린 말이 아님을 알았지만 잠자코 있었다. 그러자 사장의 말이 이어졌다. "......" "물론 그런 기술적인 부분이 크지. 하지만 정치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고 게임에만 전념하도록 만들어 준 게 누군데.. 이제 와서 그런 얘기를 하면 섭섭하지. 게다가 내가 빠지면 자소 소프트가 제대로 굴러갈 것 같은가?" 진팀장은 서서히 목소리가 커지는 사장의 모습을 보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진팀장은 처음 사장에게 느꼈던 그 당당함과 편안함이 그 속의 분노와 당황을 숨기기 위한 가면이었음을 확실히 깨달았다. "자소 소프트가 더 큰 기업이 되려면 어쩔 수가 없는 일입니다." "뭐? 어쩔 수가 없다고? 자소 소프트가 이렇게 당당한 기업이 되도록 만든 게 누구인데..? 이제 와서 나를 쫓아내겠다고?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내가 빠지면 자소 소프트가 제대로 운영될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리고 내가 가만히 자소 소프트를 그대로 둘 것 같은가?" 이제는 완전히 악을 쓰는 사장이었다. 사장의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진팀장의 목소리는 담담해졌다. "그런 방법으로는 더 이상 기업이 성장하지 못합니다." "....... 결코 나 혼자 죽지는 않을 걸세." 사장은 더 이상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사장의 말투 역시 단호했다. 하지만 진팀장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맘대로 하십시오. 더 이상 할 말씀이 없다면 이만." "... 후회하지 말게." "후회하지 않습니다." 진팀장은 가볍게 목례를 한 뒤에 사장실에서 빠져나와 한숨을 쉬고는 자신의 사무실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진팀장과 이팀장은 소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진팀장은 어려운 이야기를 꺼냈다. 바로 앞으로 있을 로플 그룹의 총수에 대한 얘기였다. 진팀장은 앞으로 있을 기술공개와 관련해 그 모든 것을 처리하려면 확실히 말이 통하는 그룹의 총수가 필요하다고 확신했고 여러 생각 끝에 최적의 조건을 가진 사람이 이팀장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다른 지엽적인 얘기부터 시작해서 은근히 이팀장의 마음을 떠보았다가 결정적으로 이팀장에게 로플 그룹의 총수를 맡아달라고 부탁을 했다. 하지만 되돌아온 이팀장의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 그건 내 자리가 아니네." 진팀장은 다시 한 번 자신의 말을 시작하려 했지만 이팀장은 말을 끊었다. "내가 보기에는..." "아니, 그 자리에는 적합한 사람이 있지." 자신이 모르는 사람 중에 그런 사람이 있었던가 싶었던 진팀장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회사의 사정을 잘 알고 그 사정과 나아갈 방향을 적절히 균형을 맞춰줄 인재가 또 있었던가 싶었다. "그래? 그게 누군가?" "바로 자네일세." 자신을 가리키며 웃는 이팀장의 말에 진팀장은 놀라고 말았다. 대주주인 박갑재로부터 기업을 해도 되겠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팀장이 자신을 그룹의 총수로 지목하자 놀라고 말았다. "말도 안 되네. 농담 말게나." 말도 안 된다는 말을 들은 이팀장은 정색하며 대답했다. "절대 농담 아니네. 이 모든 일의 시작은 자네지. 그리고 일을 이끌고 간 사람도 자네니까. 나는 그저 자네가 가는 길에 무임탑승했을 뿐이네." "그.." "말이 되네. 내가 박갑재 어르신에게도 말씀을 드려놓았으니까 다른 말 하지 말게나. 그 계획을 실행하려면 자네가 그룹의 총수가 되어야 하지. 그렇지 않나?" "......" 자신도 모르게 그런 작업을 해 놓았다는 말에 진팀장은 어이가 없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말게나. 자네라면 잘 할 걸세" 프로팀 사무실로 들어온 범현은 서재필을 보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들었습니까?" "뭘?" "주주총회 결과 말입니다." 범현은 자신이 제일 먼저 알았다는 것에 힘차게 말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맥빠지는 것이었다. ".... 그거?" "아십니까?" "조금 전에 알게 됐다." "그럼?" "프로팀은 완전히 다른 회사에 속하게 될 것 같다. 진팀장님, 이팀장님 그리고 단장님을 비롯해 많은 분들이 모여서 의논을 했다니 그리 나쁘지는 않겠지. 그리고 네가 그렇게 흥분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범현아, 이번 주말에 있을 경기 준비는 잘 하고 있냐?" "네? 아... 네." "그렇지 않아도 어수선한 분위기에 지기만 해 봐라..." "네..." 범현은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고 사무실을 나오고 말았다. 하지만 프로팀의 선수들은 아직 소식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범현은 재빨리 다른 사람들이 있을 연습실을 향해 달렸다. 자소 소프트의 주주총회 결과에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전격적으로 현 대표인 박경락 사장이 물러남과 동시에 자소 소프트의 이름을 로플로 바꾸면서 세 개의 계열회사를 거느린 그룹으로 완전히 회사 체계를 바꾸겠다는 결정은 뭇사람들의 관심을 불러모았다. 거기에 자소 소프트의 개발팀장이었던 진민수 팀장이 새로 생길 로플 그룹의 총수로 선임이 되자 국내 언론 뿐 아니라 국외의 많은 언론들의 집중 조명을 받게 되었다. 로플 그룹 아래에 로플 소프트, 로플 하드, 로플 엔터테인먼트의 세 회사가 구성되고 각 회사의 인선은 차례로 진행중이어서 분위기는 어수선했지만 기존의 사원들 중 단 한 사람도 직장을 잃거나 할 일도 없는데다 새로 회사를 나누면서 시행할 여러 제도로 인해 대부분의 직원들은 오히려 새로운 체제를 기대했다. 하지만 특별한 이유가 보이지 않는 이런 엄청난 변화에 언론은 뭔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며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우량 기업 중에서도 대표적인 우량 기업인 자소 소프트가 갑작스레 대표를 해임하고 회사 이름까지 바꾸며 그룹 체제로 가는 것은 누가 보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그룹 체제 자체에 장점이 있다손 치더라도 잘 해나가고 있는 대표를 해임할 필요는 없었다. 오래지 않아 주주총회에서 거론된 일들은 언론으로 흘러들어갔고 각종 신문이나 방송의 메인 뉴스에서는 자소 소프트의 대표였던 박경락 사장의 비자금 문제로 인해 주주총회가 열렸고 그 때문에 해임된 것이라 대서특필했다. 그와 함께 검찰에서 박경락 전 사장의 소환을 결정하자 방송과 신문에서 나온 기사들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임을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여론은 로플 그룹에 좋을 수가 없었다. 로플 그룹으로서는 자구책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오히려 도마뱀이 꼬리만 내던지고 도망가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로플은 많은 사람들에게 죄송하다는 성명만 발표했을 뿐, 무수한 추측기사에도 흔들리지 않고 그룹 체계를 완성시켜 나가고 있었다. 그룹의 새로 임명된 고위 관계자들은 내부 직원들의 동요를 걱정했지만 생각보다는 그 영향이 적었다. 대부분 자소 소프트 시절부터 사장과 그 계열의 임원들과 다른 임원들이 노선이 달랐음을 어느 정도 알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직장으로서 자소 소프트보다 더 나은 대우를 하는 곳은 별로 없었기에 떠날 이유가 없었다. 정치 비자금 문제가 불거지긴 했지만 국내 뿐아니라 해외에서 그 인지도가 더 높은 자소 소프트, 이제는 로플 그룹이었기에 직원들의 선택은 당연했다. 거의 한 달이 다 되도록 그룹으로의 변모 노력은 계속 되었다. 원래 자소 소프트의 사옥이었던 건물은 로플 소프트가 사용하기로 하고 로플 하드와 로플 엔터테인먼트는 건물을 새로 짓거나 확보하기 전까지만 같은 사옥에 있기로 합의를 했다. 많은 인사 이동이 불가피했다. 먼저 그룹의 총수는 로플의 개발팀장이었던 진민수가 주주총회의 지지를 받아 회장으로 선임되었고 부회장은 전문 경영인을 영입하기 위해 공석으로 비워둔 상태였다. 로플 소프트의 사장은 문명 온라인 개발팀장인 이희철 팀장, 로플 하드의 사장은 로플의 하드웨어 책임자였던 곽진호, 로플 엔터테인먼트는 자소 소프트 프로 구단 단장이었던 황태산이 맡기로 결정했다. 그 중 곽진호가 자신은 경영에 재능이 없다고 반려함에 따라 곽진호를 부사장으로 내리고 전문 경영인을 로플 하드의 사장으로 영입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서재필은 로플 엔터테인먼트의 프로 구단 단장으로 승진 발령이 났다. 로플의 소프트웨어 팀장이었던 조진철 팀장은 로플 소프트의 한 축인 로플의 개발팀장으로 승진했다. 문명 온라인의 개발팀장은 이희철 팀장을 보좌해 소프트웨어를 맡았던 김성철 팀장이 맡기로 했다. 또한 강진성은 그 동안 해 왔던 개발과정에서의 기여와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의 개발 완료로 인해 새로 만들어질 밀리터리 아트 개발팀의 팀장으로 내정되었다. 강진성은 20대 초, 중반의 나이에 로플 소프트의 이사급에 준하는 대우를 받게 되어 다시 한 번 주목을 받았다. 로플 그룹으로 다시 태어나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에도 소속 프로팀 선수들은 프로 리그에서 최선을 다했다. 완전한 계약 승계를 보장받았기에 별다른 걱정도 없었지만 모 회사가 현재 평판이 좋지 않았기에 프로팀 선수들은 더 열심히 경기를 치렀다. 단체전에 출전해서 단 한 게임도 지지 않는 쾌거를 이룩했고 곽현호, 한혜연은 개인전에서 승률 70%가 넘어 순위권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진회장은 자신을 은밀히 모처에서 보고 싶다는 자유당 인사의 연락을 받고 비서를 대동한 다음 정원에 깔끔한 연못이 아주 보기 좋은 고급 음식점에 도착했다. 몹시도 바빴기에 피곤했던 마음이 이곳에 오니 풀어지는 듯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이미 상대는 나와 있는 모양이었다. 비서들은 밖에 있고 자신만 혼자 안으로 들어갔다. "진회장, 처음이지요?" "네, 그렇습니다." "자, 앉지요." "네..." 잠시 의례적인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은 음식이 들어오자 별다른 말도 하지 않고 식사를 했다. 30 분이 넘도록 식기들의 부딪치는 소리만 났다. 식사가 끝나고 상을 내어간 후에 차가 나오자 상대 정치인의 입이 열렸다. "내,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지요. 박경락 전 사장을 알고 있습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민선당의 비자금을 관리하고 있었고 실제 비자금을 만들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까?" ".....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일은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되지요." "......" "현재, 저희 자유당이 유리하지만 그런 유리한 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요.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는 상상도 못할 것을 희생해야 할 때도 있지요. 나는 진회장이 아직 젊고 패기가 넘치며 나라를 생각할 줄 안다고 생각하고 있소. 나라를 위해 일할 생각은 없는지... 묻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나라를 위해?" "그렇소. 나라를 위해 하는 일이오. 나라를 위해!" 진회장은 이 자유당의 사람이 왜 자신을 만나려고 했는지 이유를 확실히 알았다. 박경락 전 사장을 대신해 달라는 요구였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뻔뻔스런 말이었다. 저런 말을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말하는 상대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 확신했다. "사람을 잘못 보신 듯합니다. 저 역시 나름대로 나라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세금도 잘 내고 있는 편이고... 수출을 통해 외화도 벌어들이고 있지요. 기업인으로서 그 이상의 나라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진회장은 단호하게 말했다. 어물쩡 넘기려다가는.... 발목을 잡힐 수 있었다. "허......" "오늘 식사 잘 했습니다. 그럼 다음에." "이.. 이보게..." "그럼 이만!" 진회장은 매몰차게 나와 버렸다. 저기에 앉아 있다가는 자신도 그 늪에 빠질 것만 같았다. 워낙 경쟁력이 있었던 회사였기에 여러 악재가 있었던 가운데에서도 선전을 했고 그로 인해 그룹으로의 재편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하지만 잘 되는 일이 있으면 그렇지 않은 일도 있듯, 로플 그룹은 반갑지 않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바로 새로운 로플 그룹의 총수 진민수 회장의 검찰 소환 소식이었다. 그 동안, 그룹으로 재편하면서 검찰에서 요구한 세금 장부와 기타 문서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한 동안 아무런 말도 없던 상태라 기업의 이미지와 어쩌면 부가될 벌금을 걱정했지 더 이상의 사태 확산은 없으리라 다들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것도 그룹의 회장을 소환한다는 소식은 마치 청천벽력과 같았다. 처음에 떠들어대다 잠잠했던 언론은 다시 기지개를 펴고 집중포화를 퍼부었다. 예전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었다. 박경락 전 대표가 검찰에 소환되어 조사를 여러 차례 받을 때는 자소 소프트라는 회사는 살아야 한다는 데 그 논점이 집중되어 있었다면 지금의 여론은 현재의 로플 그룹 자체에 대해 맹공을 퍼붓고 있었다. 그런 언론의 달라진 모습으로 로플 그룹은 상당히 당황하고 있었다. "이사장, 사장이라고 부르니 조금 이상하군. 어떻게 하는 게 좋겠나?" 진회장은 친구인 이희철에게 이사장이라 부르다 쑥쓰러워했지만 지금은 꼭 의논해야 할 일이 있는 중요한 자리였다. 세 개 회사의 사장과 주요 간부들이 다 모인 자리였다. "... 일단 회장님께서 검찰 소환은 받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요즘 이상해진 언론 때문에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떳떳함을 꼭 밝혀야 합니다." "저도 검찰 소환 자체는 동의하지만 문제는 꽤 긴 시간 동안 가만히 있다가 이제야 소환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예전과는 달리 우호적이지 않은 언론도 마음에 걸리고요." 곽진호였다. 로플 하드는 현재 대주주 박갑재가 보내 준 사람들이 경영을 대신 봐주고 있었다. 곽진호는 부사장 겸 실무 책임자였다. 곽진호의 말은 모두의 마음이었다. 사실 그대로만 조사를 한다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정치라는 것이, 언론이라는 것이 사실만을 전제로 하지 않았기에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각 회사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상태입니까? 직원들은 어떻습니까?" "로플 소프트는 별로 변화가 없었기에 직원들의 동요도 거의 없습니다. 앞으로 있을 직원 지원책이 이미 발표되어 직원들은 오히려 그룹으로 바뀐 것을 좋아하는 눈치입니다." 로플은 그룹으로 바뀌면서 대대적으로 직원에 대한 복지 지원을 강화했다. 기본적으로 보장된 주 5일 근무에 직원들의 능력 배양을 위해 투자하는 돈은 전부 회사에서 지원하기로 했다. 예를 들어 회화를 배우기 위해 학원을 다닌다면 모든 것을 회사에서 투자하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각 회사의 분사가 완전히 끝이나면 직원들의 작업 환경을 크게 개선시켜 수면실이나 수영장 등을 직원들을 위해 구비하기로 했다. 그 외에도 자잘한 것들이 많아 직원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로플 하드는 아직 사옥을 구하지 못했지만 이번 달 내로 완전한 체계를 갖출 수 있을 듯합니다. 우리 직원들이야 괜찮지요." "로플 엔터테인먼트는 아직 규모가 그리 없어 현재로는 프로 구단만이 있습니다. 프로 구단 선수들은 지금 현재 리그 진행 중이라 상당히 바빠 동요할 사이도 없습니다." 곽진호와 황태산의 말이었다. 그 뒤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계속 나누었지만 회장의 검찰 소환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 있을 수가 없었다. 일단 소환에 응한 다음에 사태의 추이를 보자는 쪽이 대세였다. "아버지, 잘 다녀오십시오."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 몸 조심하세요." 현준과 진성 그리고 현준 어머니가 차례로 진회장에게 말하자 진회장은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하. 내가 지금 어디 죽으러 가는 것 같군. 빨리 갔다 올 테니 오늘 저녁 내가 좋아하는 청국장이나 먹어 봅시다." "빨리 갔다 오기나 하세요." 진회장의 너스레에 현준 어머니는 눈가에 눈물이 맺혔지만 일부러 더 퉁명스레 말했다. 진회장은 손을 흔들고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차에 탔다. 스스로 부끄러운 점은 없었지만 그래도 검찰에 조사를 받기 위해 소환된다는 사실은 두려웠다. 차는 부드럽게 출발했다. 차가 움직이는지도 거의 느끼지 못했지만 진회장은 점차 검찰이 가까워 옴을 알았다. 스스로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아마도 수십 명, 어쩌면 백 명이 넘는 기자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TV에서 많은 정치인들이나 기업인들이 소환되는 것을 보았는데 자신이 그런 모습으로 TV에 나올 생각을 하자 웃음이 나왔다. "자, 진민수. 가 보자." 곧 차가 멈추자 진회장은 스스로에게 굳게 말하고는 차에서 내렸다. 그 순간부터 눈을 뜨고 있기 힘들 정도로 후레쉬가 터졌다. "진회장님, 정치 자금과 관련해 비자금에 개입되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데 한 말씀 해 주십시오.""박경락 전 대표가 진회장님도 관련되었다고 진술했는데 알고 계십니까?" "로플 그룹으로의 변화는 사전에 계획된 것이고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지금 심경, 한 마디만 해 주십시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각종 녹음기들이 자신 앞에 놓였고 뭔가 한 마디라도 해 주기를 원했지만 진회장은 담담하게 앞만 보고 걸어갔다. 오히려 차 안에 있을 때보다 더 차분해졌다. 후레쉬는 여전히 터졌지만 진회장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앞으로 걸어갔다. 건물 안으로 들어갔는데도 기자들은 계속 따라왔다. 곧 위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타자 검사인지 단 한 명을 제외하고 기자들은 따라 타지 않았다. "모든 것은 밝혀질 겁니다." 진회장은 단 한 마디만을 남긴 후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어서 오십시오, 진회장님." "수고하십니다." 같이 타고 올라간 사람의 안내로 들어간 곳은 그리 넓지 않은 곳이었다. 예전에 무슨 물고문 사건도 있었다고 들었지만 생각외로 상당히 깔끔했다. 조금 있으니 40대 후반의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사람이 들어왔다. "특수 3부 부장검사 안철진이라고 합니다." "진민수입니다." 진민수는 손을 내밀기에 악수를 했고 곧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그러자 안철진이 물었다. "커피 한 잔 드릴까요?" "아닙니다." "될 수 있으면 빨리 끝내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 진민수는 안철진의 말에서 매번 하는, 의례적인 말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일의 전문가일 테니 그럴 수도 있다 싶었다. 대략 20분 가까이 잡다한 말을 주고받은 진민수는 안철진 부장검사의 안내로 방을 옮겼다.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상황을 빠르게 전개했습니다^^ 재미있다면 추천을!! -------------------------------------------------------- TGP1(The Gamer Part 1) [171 회] 로플 그룹 아침에 소환에 응했던 진회장은 밤 자정을 넘어 2시가 되어서야 검찰에서 나올 수 있었다. 진회장은 곧장 대기하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12시간이 넘도록 계속 된 질문과 대답의 연속이었다. 집으로 돌아오자 집 밖에 세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 "아저씨." "......." 현준 어머니는 너무나 지쳐 보이는 진회장을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현준과 진성은 너무 고단해 보이는 진회장의 좌우로 붙어 부축을 했다. "하하하. 가끔 소환에 갈 만도 하구나. 이렇게 두 아들에게 부축도 다 받아보고." 진회장은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걱정하고 기다렸을 가족을 위해 너스레를 떨었다. 정말 가족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현준은 말도 안 되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될 농담을 하는 아버지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예?" "하하. 하지만 너무 자주 받으면 안 되겠지?" "당연하지요." 진성은 재빨리 대답하고는 현준에게 눈짓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진회장을 곧장 안방까지 부축하고 난 다음에야 밖으로 나왔다. "무슨 조사를 할 게 그리 많아 사람을 12시간이 넘도록 붙잡아 두냐?" "어떤 사람들은 거의 30시간이 넘도록 조사를 한다고도 하니..... TV에서 볼 때는 별 관심이 없었는데 아저씨가 저리 피곤해 하는 모습을 보니 정말 그 조사하는 사람들도 피곤하겠다." "어? 진성이 너, 지금 검사들 편 드는 거냐?" "뭐라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 마라. 그나저나 아저씨, 몸은 괜찮겠지?" "... 요즘 바빠서 몸이 안 좋아 보이시던데..... " 두 사람은 현준 어머니가 들어간 안방을 보며 걱정스레 말했다. 다음 날, 신문에는 큼지막하게 로플 그룹의 진회장의 검찰 소환에 대한 기사가 일면을 장식했다. 언론의 일방적인 집중 포화에도 많은 사람들은 그 시기로 인해 진회장의 소환은 단순한 참고 조사가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활자화 되어 나온 기사에는 박경락 전 대표의 측근 중 한 명이 자신과 함께 비자금에 진회장이 연루되었다는 증언을 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로플 그룹은 발칵 뒤집혔다. 특히 로플의 개발 계획에 힘을 쓰느라 그럴 시간도 없었음을 잘 아는 조진철 로플 개발팀장과 로플 소프트의 이희철 사장, 로플 하드의 곽진호 부사장은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그 증언을 했다는 측근은 누가봐도 박경락 전 대표의 꼭두각시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언론의 강력한 선언과 비슷한 논조의 기사와 연일 방송되는 뉴스로 인해 로플 그룹의 총수 진회장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 이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그 새끼가 어떤 새끼인데.... 그리고 이딴 걸 보도하는 언론들은 또 무슨 근거로 하는 것인지. 그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어. 언론이 갑자기 이상한 논조로 보도하는 것을 보고는 알아봤어야 했어. 다 그 새끼가 한 거야! 이...." 진회장과 평소에는 호형호제하는 곽진호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로플 소프트의 사장인 이희철을 찾아와 악을 쓰며 외쳤다. 이희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주먹은 피가 나도록 쥔 상태였다. "진회장, 출근했는지 확인해 봐라." 이희철은 가만히 있다가 날뛰기 직전인 곽진호에게 말했다. 하지만 곽진호는 잘 듣지 못한 듯 되물었다. "네?" "민수가 출근했는지 확인해 보란 말이다." 싸늘한 목소리였다. 이희철 팀장이 제대로 화를 내는 것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곽진호였던 터라 순식간에 꼬리를 내리고 대답했다. 자신보다 더 화가 난 사람은 바로 이희철이었다. "아.. 네.." 진회장이 출근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회장실에는 꽤 많은 사람이 모였다. 당연히 그 중에는 이희철 사장과 곽진호 부사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진회장, 어떻게 할 텐가?" 공식적인 석상이 아니었기에 이희철은 편하게 말했다. 하지만 진회장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은 결백하다고 해도 상대가 자신을 물고 물귀신처럼 같이 죽자고 달려드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진회장은 천천히 대답했다. "그 쪽에서 주장하는 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검찰에서.... 검찰에서 밝혀 주겠지." 이희철 뿐 아니라 모인 사람들은 그 목소리에서 검찰에 대한 신뢰가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진회장을 향해 거짓으로 진술했던 사람들의 말을 제대로 조사해 보면 누가 잘못했는지 충분히 알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조사는 일절 하지 않은 상태로 소환만 먼저해 일단 확인부터 한다는 핑계를 대고 하루 종일 사람을 못살게 군 것이다. 사태가 심각함을 알았다. 언론은 이미 심하다 싶을 정도로 편파적인 보도를 한 지 오래였고 이제는 검찰까지. 이 정도면 단순히 사실이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라 도대체 누가 이런 일을 하고 있는지가 더 중요했다. 이희철은 눈앞이 까맣게 변함을 느꼈다. 진회장도, 자신도 정치적인 해결 능력은 없다고 봐야했다. 기껏 아는 것이 검찰이나 법조계에 친구들이 있다는 것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의 사태는 그보다 훨씬 더 위에서 내려오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한참을 지났지만 결론이 있을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나가고 이희철과 곽진호만 남았다. "민수, 어떻게 할 생각인가?" "어떻게 하다니? 우리가 뭐 잘못한 게 있나? 잘못은 밝혀 질 걸세." ".... 그렇지." 원론적인 얘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희철은 갑자기 누가 자신을 만나기를 원한다는 비서의 말에 자신을 찾아올 사람이 있을까 싶어 누군지 물었다. 곧 들려온 비서의 말에 들어오라고 했다. 40대 후반의 남자였다. 주름이 잘 잡힌 양복에 약간 튀어나온 배가 인상적이었다. 전체적으로 후덕한 인상의 남자였다. "갑자기 이렇게 찾아와서 실례가 아닌지?" 남자는 자연스럽게 말했다. 말 뿐이었지만 정말로 미안한 느낌이 드는 모습이었다. 이희철은 자신도 모르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리고는 곧 왜 왔는지 직설적으로 물었다. 왜 찾아왔는지 모르겠지만 별로 만나고 싶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찾아오신 건지?" "급하시군요. 요즘 어려운 일을 당하고 계실 텐데....." "그게 무슨?" 이희철은 무슨 말인지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갑자기 자유당 정책보좌관이라는 인물이 자신을 찾아와 어려운 일에 대해서 말하니 쉽게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요즈음 로플 그룹의 총수 진회장으로 인해 많이 시끄럽지 않습니까?" "아......" 이희철은 이제야 이 사람이 말하는 그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이 사람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알기 힘들었다. "그거야 로플 그룹의 문제일 뿐입니다만." "하하. 너무 딱딱하시군요. 세상은 부드러워야 잘 살 수 있지요. 모난 돌은 깎이기 마련이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은근한 말에 이희철은 정색을 하고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하하. 아실 만한 분이... " 이희철은 곧 깨달았다. 이 사람이 왜 왔는지. 그리고 자신의 직감일 뿐이지만 왜 진민수가 그렇게 당하는지도.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어려움에 관심이 있다면 이리로 전화를 주십시오. 이렇게 불쑥 찾아왔는데 반갑게 맞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희철의 당황하는 표정을 즐기는 듯한 남자였다. 이희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남자를 따라가지도 않았다. 이희철은 박경락 전 대표가 검찰에 소환되고 나고 얼마 뒤에 진팀장을 찾아왔다던 자유당 인사와의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 때, 진팀장을 통해 어떻게 해 보려고 했던 자유당이 강경하게 진팀장이 거절을 하자 지금의 이런 일을 벌였고 그와 함께 차기 회장 1순위인 자신에게 이런 제의를 한 것이다. 쾅! 이희철은 책상을 주먹이 으스러져라 내려치고 말았다. 자신에게 친구를 버리고 자유당의 조건을 들어주면 로플 그룹의 회장 자리를 보장해 준다는 유혹이었다. 이희철은 자신에게 그런 더러운 유혹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더러웠다. 욕지기까지 올라왔다. 곧바로 진회장에게로 가려다 머리를 식히며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이라도 진회장이 자유당의 조건을 들어준다면 이와 같은 언론과 검찰의 횡포를 막을 수 있을까? 이희철은 자신의 무능력을 한탄했다. 이럴 때, 권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이제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언론의 뜨거운 반응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들끓어 올랐지만 현준을 비롯해 프로팀 선수들은 자신의 일에 열중했다. 다른 선수들은 모두 현준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모든 언론의 중심에는 현준 아버지 진회장이 있었다. 그렇기에 기분이 좋을 리가 없는 현준을 사람들은 주시하고 있었다. 요즈음 현준은 연습실에서는 거의 말이 없었다. 또한 진회장의 소환 이후 현준은 프로팀의 단체전에서 일단 빠져 경기에 참가하지 않았다. 한석이 단체전의 중요한 역할인 센터를 맡았고 밀리는 여전히 진규, 디플은 유나가 맡고 나머지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돌아가면서 플레이했다. 현준은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다른 사람들에게 미안하기도 했지만 짜증이 나기도 했다. 아니, 그 사람들이 아니라 이 빌어먹을 신문들, 방송들에게 화가 치밀었다. 살아오면서 가장 존경한 사람인 아버지가 그런 일을 했을 리가 없었다. 특히 개발팀장이었을 때 자금을 관리했다니 누가 믿겠는가. 로플이라는 것을 현준은 잘 몰랐지만 그 밀리터리 아트 싱글 버전의 테스터를 할 때, 그런 게임을 만드는 총책임자가 비자금 관리할 시간이 있었다는 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아버지였기에 현준은 믿고 또 믿었다. 자신이 있으면 연습이 잘 안 되기에 현준은 연습실에서 나왔다. 딱히 갈 곳이 없었다. 현준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로플의 요람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자신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해 줄 친구 진성이 있었다. 로플 소프트는 여전히 잘 돌아가는 편이었지만 회사 내의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언론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사람은 계속 들으면 믿게 마련이었다. 한 두 사람씩 회장을 성토하자 분위기는 엉망이 되고 말았다. 진성은 이미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의 개발은 앞으로 추가할 것을 제외하고는 완료한 상태였기에 개발팀장이었지만 당장 급한 일은 없었다. 로플의 요람에서 앞으로의 계획과 완전한 가상현실, 로플이 시작되기 위한 기획들을 다듬고 있었다. 하지만 연일 계속되는 진회장에 대한 언론의 공격으로 진성 역시 마음이 좋을 리가 없었다. 로플 그룹을 이나마 정상적으로 돌아가게 만든 사람이 바로 진회장이었다. 일이 손에 잡힐 리가 없었다. "현준이로구나." 그럴 때, 현준이 들어왔다. "방해한 것은 아니겠지? 개발팀장?" "방해라니. 마음이 좀 그랬는데 네가 오니 그나마 낫다." "연습실에 내가 있으면 다른 선수들이 연습을 못해서 나왔다. 여기 잠깐 있어도 되겠지?" "물론이지. 아마도 여기가 로플 소프트에서는 제일 한가한 곳일 테니까." "그래? 휴우...." 현준은 참았던 한숨을 쉬고 말았다. 다른 사람에게는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없었지만 친구인 진성에게는 당연했다. 현준은 울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었다. "진성아, 이렇게 억울할 수가 없다. 도대체 검찰은 무엇을 하고, 언론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보도를 해 대니.... 도대체가...." "......." 현준의 말은 울분에 겨운 악에 가까웠다. 진성 역시 현준의 말에 동의했다. 어떻게 흰 것을 검다고 말할 수 있는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내게 힘이 있다면... 언론도.. 검찰도.. 그리고 그 배후도 모조리 파헤쳐버릴 텐데..... 내게 힘이 있다면 이 빌어먹을....... " "..... 힘이 있다면?" 진성은 현준의 말에 문득 생각했다. 자신에게는 힘이 있지 않는가?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가상현실 내에서 예전에 경험했던 바로 어디든 갈 수 있었다. 그렇다면 언론이나 검찰의 컴퓨터에 침입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더라도 뭔가 도움이 될만한 일을 할 수는 있지 않겠는가? 진성은 순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희망을 봤다. 다른 사람들은 할 수 없어도 자신은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제까지 아직 나이도 어리고, 정치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겠냐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미리 자포자기 또는 자신을 과소평가한 것만 같았다. "현준아, 너... 나를 도와줄 수 있겠냐?" 진성이 눈빛을 반짝이며 묻자 순간 현준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네가 도와줘야 할 수 있을 것 같다." "도대체 무엇인데?" "확신은 못하지만 아저씨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이야." "..... 무엇인지는 몰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 날, 밤 로플의 요람에는 두 사람이 남아 있었다. 진성과 현준, 두 사람은 할 일이 있다는 핑계로 다른 사람들이 모두 퇴근할 때까지 남아 있었다. 회사의 분위기상 사람들은 오래 있지 않고 빨리 퇴근하는 편이었고 개발팀장인 진성이 남는 것에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퇴근한 것을 확인한 진성과 현준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상 현실 시스템 OK!" 두 사람이 밀리터리 아트의 테스트를 위해 이리저리 뛰었다. 진성이 하드웨어 테스트에서부터 소프트웨어 테스터까지 모든 과정을 다 알고 있었기에 기본적인 확인은 다 한 다음에 현준에게 밖에서 꼭 해야할 몇 가지를 알려주었다. 요람의 밀리터리 아트 시스템은 혼자 접속할 수가 없었다. 밖에서 접속 컨트롤을 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진성은 현준이 그 역할을 해 주기 바랬다. "자, 모든 시스템에 문제가 없으니까... 내가 접속기에 타고 신호를 보내면 그 때 접속하게 만들면 된다. 알겠지?" "OK!" 몇 번에 걸쳐 설명했고 시스템 자체는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기에 진성은 접속기로 들어가 탑승했다. 수없이 많은 테스트를 했지만 오늘처럼 떨리는 순간은 없었다. 안으로 들어간 진성은 길게 숨을 들이쉬고는 천천히 내뱉었다. "현준, 자 가보자." 진성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진성은 순식간에 가상현실로 들어와 있었다. "현준아, 요람으로 아무도 못 들어오게 막고 나는 다른 공간으로 갈 테니 잘 보고 있어라." 진성의 진지하면서도 열정어린 말과 행동에 현준은 고마움을 느꼈다. "진성아.... 고맙다.." "네게 한 분 밖에 없는 아버지이기도 하지만 내게도 한 분 밖에 없는 아저씨니까." 그 말을 마친 진성은 공간을 뚫고 그 이면으로 들어가버렸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었다. 진성은 느껴지지도 보이지도 않는 공간에 앉아버렸다. 그리고 키보드를 만들었고 초대형 모니터까지 생성시켰다. "자, 어디부터 들어가볼까? 일단 검찰청부터 시작해야지." 진성의 손이 바빠졌다. 해킹에 있어 최고수는 아니지만 일가견이 있었기에 진성은 대강 들어가는 방법은 알고 있었다. 이런 저런 방법을 보통의 방법처럼 시도했지만 불가능했다. 역시 아마추어 해커에게 문을 열 서버가 아니었다. "검찰청 접속!"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100인치는 되어 보일 가상공간의 모니터에 검찰청 홈페이지가 나왔다. "운영자 아이디, 패스워드." 일사천리였다. 홈페이지 서버를 통해 진성은 시작했다. 필요한 자료다 싶으면 계속 복사본을 만들어 마치 책으럼 공중에 띄워 놓고 필요하면 말 한마디에 검색까지 가능했다. 진성은 이런 일을 하면서 나중에 이렇게 작업을 하면 굉장히 편하겠구나 싶었다. 많은 노력 끝에 진성은 필요한 자료가 있는 컴퓨터에 침입했다. 바로 진회장의 담당 부장검사의 컴퓨터였다. 하지만 그 속에는 알맹이가 빠진 껍데기 뿐이었다. "휴우.... 역시 쉽지 않구나." 해킹은 쉽다고 해도 필요한 것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진성은 세심하게 조금의 자료도 놓치지 않고 그 끝까지 찾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료는 산더미처럼 쌓여져 갔다. 진성은 자신이 미리 만들어 놓은 시계를 봤다. 3시가 넘었다. 하루만에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더라도 진성은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진성은 백방으로 찾았지만 결국 제대로 찾지는 못했다.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검찰에서 조사는 하고 있다지만 공식적인 발표는 점점 더 늦어졌고 그럴수록 언론의 기사는 점점 더 집요해졌다. 심지어 그 아들인 게이머 한신에 대해서도 걸고 넘어질 정도였다. 원래 프로 게이머가 될 수 없었으나 아버지 진회장, 당시 진팀장의 압력으로 프로 게이머로 성공할 수 있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문명 온라인 공식 홈페이지와 그 기사를 쓴 언론에 대응했지만 언론의 힘은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런 인신공격성 기사들이 줄을 잇자 인터넷의 네티즌들이 들고 일어났다. 자소 소프트, 현재의 로플 그룹에 대한 언론의 기사들에 대해서 네티즌들은 별로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 중 일부만이 언론의 편향된 시각을 꼬집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게이머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 시작되자 네티즌들, 특히 문명 온라인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은 즉각 맞대응하기로 결정하고 해당 언론사의 홈페이지를 점령하는 등 실력행사에 나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플의 전체적인 이미지와 총수인 진회장에 대한 시각은 날로 날로 나빠졌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 바로 그 꼴이었다. 그런 중요한 때에 검찰은 조사 결과의 발표를 계속 미루고 있는지, 아니면 아예 조사를 하지 않았는지 모를 정도로 말이 없었다. 진회장은 벌써 3번의 검찰 소환에 응했다. 첫 번째가 15시간이 조금 넘었다면 두 번째는 20시간 세 번째는 꼬박 하루가 넘는 동안 검찰청으로 들어가 고생을 해야했다. 진회장은 세 번의 검찰 소환을 통해 검찰 역시 끄나풀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분통이 터지고 분노리 핏발이 섰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어떻게 해야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까에 대해서만 생각하기 위해 노력했다. 진회장이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은 가족과 자신을 믿어주는 회사였다. 문명 온라인 리그는 계속 되고 있었지만 끝나지 않고 그 열기가 더해가는 로플 진민수 게이트로 인해 리그의 인기는 뚝 떨어졌다. 그래도 다른 프로 리그보다는 나은 수준이었다. 현준은 일단 완전히 단체전에서 빠진 상태였고 나머지 선수들이 힘을 합쳐 리그를 운영해 나가고 있었다. 오기 때문인지 구 자소 소프트, 로플의 프로팀은 현재 단체전 1위, 개인전에서는 곽현호와 한혜연이 각각 25위와 33위에 랭크되어 있었다. "찾았다!" 거의 일주일이 넘도록 집에 들어가지 않은 진성은 겨우 원하던 결과를 찾았다. 바로 진회장, 현준의 아버지와 같이 비자금을 관리했다는 사람의 계좌를 추적해 진회장과는 상관없는 일이었고 진회장 관련 발언 바로 직전에 거액의 돈이 그 사람 가족 중 한 명에게로 입금된 사실을 밝혔던 것이다. 그 뿐 아니라 하나가 통하니 주루룩 다른 것들도 물려나왔다. "이럴 수가.... 이런 정도였단 말인가?" 진성이 발견한 것은 전 대표였던 박경락 사장이 가지고 있던 비자금 장부의 일부였고 온갖 전산망을 다 뒤져 각 정치인들에게 돈이 들어갔음을 증명하는 자료였다. 놀라운 것은 기존의 민선당 뿐 아니라 자유당의 인사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진성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검찰 조직에도 손을 댔다. "........" 할 말이 없었다. 진성은 왜 진회장이 목표가 되어 이런 일을 당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기존의 비자금 관리책이며 비자금을 만들어온 박경락 전 사장의 몰락은 민선당의 몰락과 더불어 당연한 것이었지만 문제는 박경락 전 사장이 민선당 뿐 아니라 자유당에게도 비자금을 제공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로 인해 박경락 전 사장은 자유당에 협박과 비슷한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중간 과정은 많이 생략되어 잘 알 수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진회장에 대한 언론의 집중포화로 박경락 전 사장의 숨통을 틔워주고 진짜는 진회장이라는 분위기로 모는 동시에 로플 그룹의 차기 지도자와 접선을 해 기존의 비자금 관리책임을 맡기는 것이 현 상황의 골자였다. 진성은 그 문서에서 차기 지도자로 이희철 팀장의 이름이 올라가 있는 것을 보고는 상당히 놀랐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다. 결국 진회장은 박경락 전 사장이 살기 위한 희생양인 동시에 비자금 운용을 거부한 괘씸죄를 범해 이런 궁지에 몰린 것이다. 진성은 비록 가상현실이었지만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느낌이었다. 검찰 역시 집권당인 자유당의 압력을 버텨낼 수 없었다. 모든 것을 다 알아낸 진성은 가상현실 속에서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자신이 상상하지 못했던 엄청난 일인 동시에 그만큼 추악한 사건의 진상이었다. "이런 일이 있었다니......" ---------------------------------------------------------- 억지스런 전개도 있지만.. 너그럽게.. ^^ 진성이 한 건 하지요~~~~ 이제 하나 남았습니다 재미있다면 추천을.. ---------------------------------------------------------- TGP1(The Gamer Part 1) [172 회] 로플 그룹 숨겨진 진상은 어느 정도 알아냈고 증거도 있지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는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검찰과 언론까지 좌지우지할 정도인 현 상황에서 검찰에 증거를 들고 가봐야 잘못하면 증거만 빼앗기고 더욱 철저히 진실을 왜곡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진성은 곰곰이 생각을 거듭했다. 게임에서의 복잡한 상황에서 발휘된 직관력과 상황 판단력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현실에서도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겨도, 져도 어쩔 수 없는 그런 게임이 아니라 진다면 그 결과가 엄청날 현실의 게임이었다. 현재의 상황이 그대로 이어진다면 비록 진회장에게 씌워졌던 말도 안 되는 혐의가 풀린다고 해도 그 때는 이미 늦어 로플 그룹의 주도권은 정치인들에게 넘어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진성은 골몰히 생각하면서 계획을 짰다. 중요한 요점은 누가 이런 일을 했는지 절대 알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아침에 출근한 이희철 사장은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머리가 묵직했다. 자민당에서 주고 간 그 명함을 지갑에서 꺼내어 손가락 사이에 끼워 이리저리 살폈다. '민수가 그렇게 고생하는 것은.... 그 정치인들에게 제대로 처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휴우.. 차라리 내가 그 더러운 역할을 할까? 그렇게만 한다면 지금까지 지켜왔던 문명 온라인과 로플, 그리고 민수까지 모두 살릴 수 있을 텐데.... 현 상태로는........' 좋지 않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상하게도 자신은 그 언론의 겨냥 범위에서 벗어나 있었다. 괜시리 진회장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이희철 사장은 다시 한 번 명함을 살폈다. 전화를 할까, 아니면 조금 더 버텨야 할까? 뭔가 회생의 실마리가 있어야 희망이라고 걸지. 현재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이었다. 이희철은 평소의 습관대로 컴퓨터를 켜서 자신에게온 메일들을 확인했다. 이제 한 기업의 리더가 되었기에 각종 메시지들이 많이 들어오곤 했다. "[전경련]...... [벤처기업인연합회]? 음... [젊은기업가모임].... 뭐, 모임이 왜 이렇게나 많아? 어.... [자유당의 꼭두각시가 될 겁니까?]" 이희철은 자신에게로 온 메일 중에 폐부를 찌르는 메일 제목을 보고는 열었다. 가슴이 뛰었다. 안의 내용을 천천히 읽어가던 이희철은 놀라고 말았다. 이 메일을 보낸 사람이 도대체 누구일까? 그 사람은 상황을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자신에게 일종의 행동 지침을 보내준 것이다. 이어 그 메일에 첨부로 되어 있는 파일들을 열었다. "아....." 양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정말 중요한 자료들이었다. 진회장과 관련해 증언한 사람의 계좌 내역과 특이사항, 전 사장의 비밀 장부 일부 그리고 그 장부에 나온 몇몇 중요한 사람들의 계좌 내역까지 상세하게 나와 있었다. 이희철은 어떤 한 사람이 이 모든 자료를 준비할 수는 없다고 확신했다. 자료들은 굉장히 구체적이었다. 입금 액수와 날짜, 시간까지 다 나와 빼도박도 못할 자료였다. 이희철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밖으로 내쉬었다. 문제는 자기가 보고 있는 이 자료들이 사실인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누군가 조작을 해 자신에게 보낸 것을 믿고 움직인다면 어리석기 그지 없는 일이다. 그 때, 모니터 화면에 그리 크지 않는 메시지 박스가 떠올랐다. 채팅창이었다. "자료는 100% 정확합니다. 이희철씨는 이 자료를 가지고 검찰로 가십시오. 가기 전에 경호원을 최대한 배치하기 바랍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그와 동시에 각 언론에 보도자료를 보내고 기자회견을 요청하십시오. 일정은 적혀진 대로 하십시오." 단호한 말에 이희철은 재빨리 물었다. "당신은 누군가?" "구 자소 소프트, 지금은 로플 그룹이지요. 로플 그룹이 이런 식으로 무너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은 사람입니다." ".... 우리 직원인가?" "하하.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검찰과 언론에 흘릴 자료라면 최소한 검증은 해야 하지 않겠나?" 검증에 대해 묻자 상대는 마치 웃는 듯했다. 자신을 시험하는 것일까? "그거야 이희철씨가 해야 할 일이지요. 100% 사실이니까 아무거나 확인해 보시면 알 겁니다. 하지만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곧 움직이기 바랍니다. 곧 인터넷에서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겁니다." "인터넷?" "그럼 이만..." 이희철은 뭔가에 홀린 듯했지만 아직도 모니터에 비치고 있는 자료들은 그게 꿈이 아님을 보였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이희철은 비서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한 후에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런 일의 전문가는 따로 있었고 적어도 자신은 아니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뭐야? 이거.. 도대체 이게 뭐야?" 안철진 부장검사는 자신의 컴퓨터를 켠 다음 손도 대지 않았는데 화면이 바뀌며 모니터를 가득 채운 이상한 글에 놀라고 말았다. [검찰.... 정치권의 압력에 제대로 수사를 하지 않다! 로플의 진회장에 대해 수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방관하는 이유는 뭘까? 전 대표 박경락에 대한 수사 역시 뒷전이다. 검찰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가? 아니다. 지금이라도 제대로 수사를 해라. 그렇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 것이다.] 한참을 그런 글이 있다가 화면이 돌아온 듯 하다 다른 화면으로 바뀌었다. "헉!" 안철진 부장검사는 너무나 놀라고 말았다. 척 보니 계좌 내역임을 알았는데 문제는 그 계좌의 주인이 바로 자신이었다. 게다가 빨간 색의 굵은 표시로 뭉칫돈이 들어온 일자와 시간 그리고 액수를 표시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정확했다. 안철진 부장검사는 하늘이 노랗게 변함을 알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누가 장난을 쳤다고 해도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안철진은 컴퓨터를 꺼버렸다. 안절부절 하지 못하다가 자신이 기댈 수 있는 곳에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그래.. 바로 그거다. 흔들어 놓았으니 뭔가 더 흘러나오겠지." 그 시간, 안철진의 핸드폰의 통화 내역을 주시하고 있던 진성의 말이었다. 민족일보라는 거창한 이름처럼 나오는 기사는 민족적이면서도 균형감을 잃지 않은 신문사가 민족일보였다. 적은 부수였기에 영향력 역시 적은 편이었다. 그렇지만 민족일보는 진회장과 관련해 가장 치열하게 기사를 내놓는 대표적인 신문사였다. 다른 거대 신문사들에 밀렸지만 민족일보는 스스로 정도를 가고 있다고 믿었다. 편집장 최일영은 전날 먹은 꽤 많은 술 때문에 속이 좋지 않았지만 억지로 참고 신문사로 출근했다. 오늘은 진회장과 관련해 기사를 정리하는 미팅이 있었다. 자신이 그 자리에 있어야만 신문사 전체의 방향을 조율할 수 있었다. 빨리 출근했지만 속이 좋지 않아 화장실에 오래 있었던 최일영은 당분간 술을 먹지 않겠다는 지키지도 못할 다짐을 스스로 하면서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왔다. 컴퓨터를 켰다. 이미 컴퓨터는 모든 업무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이었고 각종 메일들은 대부분이 스팸이지만 도움이 되는 것도 꽤 많았다. "어....? 이게 뭐지?" 최일영은 메일을 열어 보고는 깜짝 놀랐다. 자신에게 온 메일 중에 눈을 확 끌어당기는 문구였다. [언론사들 진회장 사건과 관련해 정치권의 영향으로 편협된 보도를 일삼다. 수사 결과의 추측보도 뿐 아니라 인신비방성 기사까지. 그런 언론 같지 않은 언론들은 후회할 것이다. 민족일보도 역시 그런 신문가인가? 대답하라!] 찔끔했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이 훤히 드러나는 듯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다음부터 자세하게 이어진 정치권, 검찰, 언론을 아우르는 거대한 음모의 전모였다. 완벽한 자료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정권마저 뒤엎을 수 있는 거대한 사건이었다. 최일영은 팔에 소름이 돋고 몸이 떨림을 알았다. 특종이라는 감이었다. 아니, 특종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만은 없었다. 최고 수뇌권과의 연결고리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역사상 최고의 스캔들이 될 것이다. 최일영은 바쁘게 움직였다. 이게 사실이라면, 사실이라면.... 최고의 기사가 될 것이다. 자민당 사무총장 수석 비서인 정명환은 평소 습관대로 일찍 와서 접견실의 창문을 열어 공기를 환기시키고 주위를 살펴 뭔가 모자라거나 더 필요한 것은 없나 확인했다. 각종 신문들을 가져와 커다란 책상에 읽기 편하도록 배열을 하고 책상 위의 정리상태도 확인했다. 사무총장 강도일이 컴맹이었기에 정명환은 강도일의 컴퓨터를 켰다. 별로 중요할 메일은 없을 테지만 그래도 모르기에 매일 확인했다. ".... 이게.... 어...." 정명환은 놀랐다. 강도일의 이름 뿐 아니라 자신의 이름까지도 포함된 문서였다. 문서는 계속 자료만 보여줘서 보통 사람이라면 이게 뭐냐며 신경도 쓰지 않겠지만 정명환은 너무나 놀라 정신없이 읽었다. 자신의 재산에 대한 내역이 아주 정확하게 나와 있었다. 특히 최근에 받은 대가성 보너스에는 붉은 색으로 강조까지 되어 있었다. 강도일의 자료에는 자신보다 적어도 0이 하나 더 붙어 있는 액수가 붉은 색 선으로 둘러져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정명환은 강도일이 당사로 나오고 있을 중이리라 확신했지만 기다릴 수가 없어 수화기를 들었다. 잘못하면 정치인생은 물론 철창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http://www.JINgate.com]. 이 주소는 국내 유명한 홈페이지의 메인 화면에 공히 같은 화면으로 한 날, 한 시에 떠올랐다. 힘없는 표정을 하고 있는 진회장의 얼굴이 잘 드러난 메인 화면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었다. [로플 그룹의 총수 진회장이 관련된 것으로 알려진 정치 비자금 문제와 관련해 검찰, 정치권, 언론의 횡포를 고발한다!] 그 메인화면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검찰 조직 내에서의 주요 인물들에게서 나온 뇌물성이 짙은 뭉칫돈의 입금 내역에서부터 언론사의 갑자기 바뀐 기사의 논조와 그 비슷한 시기의 계좌 추적과 통화 내역, 그리고 정치권, 특히 자민당 내에서 이름만 대도 알 수 있는 엄청난 사람들이 연루된 비자금 장부의 일부분이 공개되어 있었다. 모든 것은 실명이었고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굉장해서 곧 이 홈페이지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삼선전자 메인 홈페이지부터 시작해 각종 은행들, 심지어 검찰과 각 언론사의 홈페이지가 동시에 해킹되었기에 네티즌들은 처음에 도대체 어떤 해커가, 해커집단이 이런 일을 벌였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곧 그 해킹된 홈페이지에서 자료가 공개되어 있는 곳으로 이동한 네티즌들은 그 내용을 보고는 놀라고 말았다. 자료 하나하나가 굉장히 위험한 것들이었다. 비교적 젊고 자유로웠던 네티즌들은 그 안의 자료들을 인터넷을 통해 유포시키기 시작했다. 일부러 불펌 방지가 되지 않았던지 자료들은 쉽게 배포되었다. 인터넷을 달군 소식들은 해당되는 검찰, 언론 그리고 정치권에게로 빠르게 전달되었다. "그... 그게 사실인가?" 목소리는 몹시도 떨렸다. 마치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 달라는 듯했다. 하지만 앞에 있던 젊은 사람은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 네." "도대체 누가?" "그것보다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안철진 부장검사는 머리를 손으로 싸맨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탈출할 방법이 없었다. 이미 있는 사실이 다 공개되었기에 도망갈 여지가 없었다. 누가 이런 일을 했는지 몰라도 너무나 정확했다. 잘못된 자료로 덮어버리기에는 너무도 정확한 것들이었고 이미 여론의 가운데에 있었기 때문에 손쓸 시간도 없었다. 끝이었다. 자유당 사무총장 강도일은 화가 나 책상을 두드리면서 물었다.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도대체 어떻게.. 누군가 내부에서 정보를 유출하지 않았다면 저렇게 확실한 정보를 공개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리스트에 들지 않은 내부의 중요한 인물은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도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하기에 저런 것이 나돌아? 말 좀 해 보게!" 강도일의 말에 비서 정명환은 할 말을 잃었다. 스케쥴 관리나 하는 것이 비서가 아니었다. 강도일과 관련된 모든 일에 대해 권리가 있었던 정명환이었기에 할 말이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정말 모르는 일인가?" 강도일은 정명환을 노려보며 물었다. 정명환 정도의 위치가 되어야 가능할 자료의 정확성이었다. 하지만 곧 정명환의 대답에 한숨을 쉬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마저 넣어버리는 바보는 절대 아님을 강도일은 잘 알고 있었다. "그 자료에는 제 이름도 나옵니다. 제가 알면 그렇게 뒀겠습니까?" "음..... 하긴...." 그런 상황에서 민족일보의 날카로운 논조의 기사가 나가자 이제는 온라인이 아니라 오프라인에서도 들끓기 시작했다. 검찰과 정치권 거기에 언론까지 망라한 엄청난 내용의 기사에 사람들은 정말 사실일까 싶었다. 평소 민족일보가 과격하지는 않았지만 사실만 싣는 신뢰를 보였기에 많은 사람들이 믿기 시작했다. 이미 인터넷에서 터진 홈페이지 건으로 인해 충격을 한 번 받았기에 더 쉽게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민족일보는 일면 톱기사로 그 음모를 다루고는 4면을 할당해 자료는 사진으로 보이면서 세심하게 배려했기에 사람들은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참으로 시기적절한 보도였다. 리스트에 올라가 있는 대형 언론사들은 반박 기사들을 내보냈지만 그 근거가 빈약함은 누구나 보더라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와 동시에 인터넷에 기반을 가지고 있던 독립 언론 홈페이지들과 온, 오프라인을 통합한 시민 단체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이번 일로 인해 어쩌면 정권 교체까지 일어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보도로 가장 타격을 입은 곳은 당연히 자유당과 검찰이었다. 이제 집권당으로 제대로 국정 운영을 해도 모자랄 판인데 이런 대형 사건이 터지자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하지만 자유당에도 상황을 보는 인물이 있어 이미 무마할 수 있는 단계가 지났음을 깨달았다. 검찰과 언론의 범위에 있었다면 어떻게든 해 보겠지만 이미 인터넷에 공개됨과 동시에 평소 말을 잘 듣지 않던 언론사를 통해 적절히 발표했다는 사실이 손쓸 시간을 없애 버렸다. 자유당의 최고위층은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비록 자신들이 그 사건의 리스트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조사를 하게 되면 쉽게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그 일을 잘 모르는 젊은 자유당 소속 의원들은 왜 당을 공격하느냐며 성명을 냈지만 앞으로의 일에 대해 너무도 뻔히 잘 아는 원로 의원들은 묵묵부답,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검찰은 국민의 신뢰가 땅에 떨어졌음을 알았다. 한 동안 노력했던 성과는 물거품이 되었고 정치권의 앞잡이라는 말이 인터넷에서 유행할 정도였다. 검찰청장의 개입 여부는 아직 언급이 되지 않았지만 누구라도 청장이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런 일을 벌일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로플 그룹 계열사 사장이 이희철이 자료를 언론과 검찰에 보냄과 동시에 기자 회견을 요청하자 모든 관심은 이희철에게 집중되었다. 언론들은 그런 공개적인 기자 요청에 어쩔 수가 없었다. 아무리 잘 잊는 국민이라 하더라도 눈앞의 일의 잘잘못을 가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전 국민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이희철의 자료에 대한 내용 공개와 민족일보에서 나온 자료보다 더 자세한 자료를 언론 앞에 내놓고 공정한 수사를 원한다는 말로 검찰을 공격하자 여론은 거세게 일어났다. 특히 문명 온라인 프로 리그의 중계권을 가져 로플 그룹의 공격에 직접적으로 참가하지는 않았던 KBC는 이희철 사장이 주장한 내용과 검찰과 관련된 기록을 방송으로 계속 내보냈다. 인터넷에서의 자료 공개, 민족일보의 보도, 이희철 사장의 전격 기자회견은 시기적으로 맞물려 그 리스트에 오른 상대가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만들었다. 사람들은 그 있어서는 안 되는 사건에 놀라면서도 도대체 누가 인터넷에 그런 홈페이지를 만들 정도인지, 어떤 해커가 그런 일을 했는지 궁금해했다. 하지만 단 한 번, 30여 분 동안 각 유명한 회사의 홈페이지는 해킹을 당해 다른 화면을 보였지만 곧 정상화되었다. 또한 전문가들이 그 해커를 추적하기 위해 나섰지만 종잡을 수가 없었다. 추적불가능이었다. 자유당 총재 안병철은 이마에 손을 대고 얼굴을 찌푸린 채 앉아 있었다. 자유당 자체의 존립이 어려울 정도의 타격이었다. 지금 이 자리까지 오는데 얼마나 큰 노력을 했던가. 다행히 자신의 이름과 정말 최고위 최측근의 이름은 그 리스트에서 빠져 있었지만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안병철은 무슨 수를 써더라도 상대를 밝혀 내고야 말 거라 결심했다. 자존심 문제가 아니라 이렇게 한 번 당하게 되면 다음에도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무엇이든 확실히 해결을 해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었기에 안병철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한 가지, 이런 짓을 벌인 상대를 가만 두지 않을 거라는 것만은 단호히 결정했다. 하지만 자신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게 인생인 것이다. "총재님." "무슨 일인가?" "총재님께 메일이 와서 제가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뭐?" 지금의 컴퓨터에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어릴 때부터 다루기는 했기에 안병철 총재는 컴퓨터를 전혀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귀찮기도 하고 별 도움도 되지 않기에 비서에게 모두 맡겼던 것이다. 하지만 많은 곳에서 이메일을 통해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는 정보를 얻었던 터라 메일에서 뭔가 이상함을 말하는 비서의 태도에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안병철은 모니터로 다가가 하나하나 읽어내렸다. 반의 반도 읽지 못했지만 손을 떨려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었다. 이게 공개된다면... 자신의 정치 인생은 끝장이리라. 지금의 상황이라면 2년 정도만 어떻게 버티면 회생할 수도 있겠지만 저.. 저 자료가 공개되면... 안병철은 가슴이 뛰다 못해 터지려는 느낌을 받았다. [.. 이 자료는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자료가 없어서 공개하지 않은 게 아니라 일부러 하지 않았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왜 공개하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을 주시하고 있겠습니다. 추적해 봐야 헛수고일 겁니다. 그럼.] 은근한 협박이었다. 안병철은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상대는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자신은 완전히 상대의 눈앞에 벌거벗은 듯 드러나 있는 꼴이었다. 거기에 상대는 자신을 몰락시킬 수 있는 폭탄을 가지고 있었다. 안병철은 어쩔 수 없었다. "사태의 수습을 지시하게. 그리고.... 이 일을 일으킨 상대는.... 당분간 덮어두게." 진회장과 박경락 전 대표를 담당했던 검사들은 모두 검찰청 내부 감찰을 받게 되었고 다른 검사들이 그 사건을 맡게 되었다. 이미 전국민의 관심이 쏠려 있었기에 새로 온 검사들의 부담감은 대단했다. 하지만 막상 사건을 파헤치니 너무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이런.... 이런 것을 그렇게 미적거렸단 말인가? 안철진, 그 사람 안 되겠군...." 새로 온 부장검사였다. 아무리 정치권에서 압력이 들어왔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일처리를 해서는 안 된다. 당연한 일을 너무 오래 끌었던 것이 문제였다. 자유당 사무총재를 비롯해 몇 사람과 검찰의 담당검사들이 기소되었다. 언론사에서는 내부적인 징계만 있었을 뿐이었지만 로플 그룹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 동안 당한 것을 풀기라도 하는지 거대 언론사 사주를 상대로 거액의 소송이 줄을 이었다. 자소 소프트라는 이름을 버리고 로플 그룹으로 새로 태어나려던 그룹 이미지에 막대한 영향을 입혔다는 내용이었다. 10억 단위가 아니라 수백 억이 넘는 액수여서 또 한 번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긴 시간이 걸리겠지만 재정에 있어서는 그 어떤 기업보다 탄탄했던 로플이었고 임원회에서도 지금까지 겪었던 언론의 횡포를 갚으려는 듯해서 언론사들은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언론을 무기로 여론을 만들어야 했지만 현재의 분위기는 언론사의 말 자체를 믿지 않았다. 사람들은 과연 이 일을 벌인 사람이나 단체의 정체에 대해 호기심을 가졌다. 톱니바퀴가 물리듯 단단히 물려가는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누구나 조직적인 대응이 아니겠느냐 의심을 가졌다. 생각보다 정치권과 검찰에서는 그 부분에 대해 별다른 조사가 없었다. 사이버 수사대에서 해킹과 관련해서 수사를 벌였지만 아무런 흔적도 찾지 못했다. 한 때, 로플이 흔들릴 때 진회장을 강하게 비난하고 단체 행동까지 하려고 했던 직원들은 로플이 정상화 되자 회사를 나갈 수밖에 없었다. 회사 차원에서 보복조치가 아니라 주위 직원들의 시선을 참기 힘들었다. 로플 그룹은 정상을 되찾았다. 진회장에 대한 강한 언론의 비난이 끝이 나고 속속 그 진상이 알려지면서 로플 그룹의 이미지는 차츰 좋아졌고 회사 분위기도 안정되어 갔다. 세 개의 회사로 분사한 계획 역시 착착 진행되었고 부지를 매입하거나 기존의 빌딩을 구하기 위한 움직임도 본격화 되었다. "아버지.. 수고하셨어요." 마지막 검찰의 소환에 응해 2시간 만에 돌아온 아버지를 본 현준의 말이었다. 진회장은 예전의 30시간에 가까운 소환 조사를 생각하고는 끔찍했지만 자신을 보고 있는 세 사람의 존재에 입가에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이제야 끝이 난 것이다. 그 일 전체를 놓고 볼 때, 기이한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지만 위기에서는 벗어난 것이 확실했다. "아저씨, 이제는 괜찮겠지요?" "당연하지." "......" 현준 어머니는 그 동안의 고생과 걱정을 생각했는지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진회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현준 어머니를 안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제 끝난 것 같소. 앞으로는 눈물 흘리지 않게 해 줄 테니....." 사회의 모든 관심이 정치권, 언론, 검찰 그리고 로플 그룹에 쏟아져 있을 때에도 문명 온라인 프로 리그는 계속 되었다. 단체전은 로플 그룹의 프로팀이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었고 2위는 삼선전자를 유지하고 있었다. 개인전에서는 워낙 강자들이 많아 선두권을 유지하는 게이머들이 5명이나 되어 한 게임, 한 게임이 중요했다. 로플 그룹의 프로팀 중 개인전에 참여한 곽현호와 한혜연은 기대보다는 훨씬 잘해 주었지만 실력의 장벽을 넘지는 못했다. 곽현호가 19위, 한혜연이 25위였다. 하지만 팀 수와 각 팀에서 3명 가까이 나온 것을 보면 선전한 결과였다. 현준은 로플의 요람에서 여전히 개발팀장으로 바쁘게 일하는 진성의 사무실로 소리를 죽여 들어갔다. 누군가 들어오는 것을 느낀 모양인지 고개를 든 진성과 눈이 마주치자 현준은 자신도 모르게 말하고 말았다. "진성아, 정말.... 정말.... 고맙다!" 하지만 진성의 말투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퉁명스러움, 그 자체였다. "뭐가?" "그...." 현준이 뭔가를 말하려 하자 진성은 대뜸 말허리를 자르며 단호하게 말했다. 꿈에도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잊어야 했다. "말 안 하기로 했지. 잊어라..." "그.. 그래도...." "잊어라. 잊어라. 잊어라." 현준은 그 모든 것이 진성 혼자서 해 낸 일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지만 자신이 직접 보았고 그 과정에서 진성을 도왔기에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이 세상에서 컴퓨터와 인터넷이라는 온라인이 얼마나 대단한 힘을 발휘하는지 현준은 절실히 깨달았다. 그와 더불어 정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그것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차이가 얼마나 큰 지도 절실히 느꼈다. 더구나 자신의 아버지가 가지지 못한 자였던 경험은 현준으로 하여금 절망하게 만들었고 친구인 진성이 가진 자라는 사실에 희망으로 들떴고 그 희망은 현실로 나타났던 것이다. "아무도 모르겠지?" 현준은 여전히 일에 매달려 있는 진성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 솔직히 진성이 해킹을 통해 그 많은 자료를 다른 곳에서 빼내왔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혹시라도 추적이 될지 몰라 걱정했었다. 은근슬쩍 말하자 진성은 당연한 얘기를 왜 하냐는 말투였다. "아무도 몰라야 하지." "그런데 왜 조사를 하지 않지?" 현준은 아예 까놓고 말했다. 거기에 진성 역시 대놓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해도 못 찾을 거야. 그리고 할 수 없게 만들어 놓았거든." "뭐?" "더 알면 다쳐!" 법정의 지루한 공방전은 사회의 관심을 받기는 했지만 갈수록 그 열기는 사그라들었다. 대신 리그 막바지로 향하는 문명 온라인의 열기가 그것을 대신했다. 로플 그룹의 정상화로 문명 온라인의 인기는 예전과 비슷할 정도로 회복되었다. 마지막 치열한 경기를 제외하고는 어느 정도 윤곽이 잡혀 앞으로 있을 월드리그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 다음회부터는 게임 내용과 본연의 야그로 돌아갈 겁니다. 봐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TGP1 사랑(ㅡ.ㅡ)해 주십시오!!!!! 재미있다면 추천을~~~ ------------------------------------------------------------ TGP1(The Gamer Part 1) [173 회] 로플 그룹 한동안 프로팀에서 빠져 있었던 게이머 한신, 진현준의 가세로 로플 그룹의 문명 온라인 프로팀은 단체전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리그가 시작되기도 전에 단체전에서는 그 어떤 팀도 자소 소프트, 현재의 로플 그룹을 능가할 수 없으리라는 많은 사람들의 예측 그대로였다. 준우승은 관록이 넘치는 삼선전자가 차지했고 그 뒤로 LQ 전자와 KTC가 차지했다. 로플과 삼선전자 그리고 LQ 전자는 사람들이 예상했지만 KTC는 의외의 결과였다. 개인전의 우승은 삼선전자의 게이머 정성진이 차지했고 쌍룡은행의 전주환, 계룡투신의 장정탁, 제일전자의 최용범이 차례로 그 다음 순위에 올랐다. 국내 프로 리그가 끝이 나자 이제 사람들은 내년 1월부터 열릴 문명 온라인 아시아 리그를 기대하기 시작했다. 한국, 중국, 일본에 인도와 싱가폴, 필리핀, 태국이 참가해 7개국이 참여하는 거대 프로 게임 리그가 되었다. 원래 연말까지 대륙 리그를 끝내고 1월부터 월드 리그를 하려고 했지만 유럽 국가들의 국내 리그가 늦춰져 전체적으로 일정을 그에 맞게 조정했기에 상대적으로 아시아와 북미의 국가 소속 프로팀들은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로플 엔터테인먼트의 빌딩. 프로팀 전용 휴게실에는 원래 있던 커다란 탁자들은 다 치워진 상태였고 가운데 원탁과 그 위로 3단 케익이 있을 뿐 나머지는 깨끗했다. 원래는 휴게실이었지만 지금은 크지는 않지만 깔끔한 연회장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한쪽에 낮은 단이 만들어졌고 그 위에 로플 그룹의 회장인 진민수 회장이 마이크를 들고 서 있었다. "다들, 수고했다. 힘든 시기였는데도 다들 애 많이 썼다. 태산이 자네부터 시작해서 선수들, 그리고 그 뒤에서 지원했던 스텝들까지 모두.. 정말 수고했네. 조촐하지만 단체전의 우승을 축하하고 개인전에서 기대 이상의 성적을 낸 선수들에게 위로하기 위해 준비했으니 즐겨 주게나. 자, 나이 든 사람들 눈치는 보지 말고." 진회장이 마이크를 두고 단 아래로 내려오자 경쾌한 음악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연회장으로 변한 휴게실의 한쪽에 5명으로 구성된 실내악 전문가들의 연주가 들렸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음악이어서 분위기는 아주 부드러워졌다. 진회장이 내려옴과 동시에 황태산 로플 엔터테인먼트의 사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기뻐해라. 로플 그룹의 총수인 진회장님이 오늘 우리 모두 회식을 하라고 금일봉을 내려 주셨다네. 길게 말하면 다들 지겹겠지? 편하게 즐기자고." 성격답게 화끈하면서도 짧은 말이었다. 그와 함께 사람들은 자유롭게 오가면서 음식을 들기 시작했다. 보통은 3단 케익을 사진을 찍으며 자르게 마련인데 진회장도, 황태산 사장도 그리 좋아하지 않아 그냥 덩그러니 가운데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이미 샴페인을 터트린 것은 경기장에서 있었기에 그런 광란의 분위기보다는 약간 들뜬 적당한 분위기였다. 진성은 샴페인이 든 잔을 양손에 들고 걸어서 현준에게로 갔다. 잔 하나를 건네고 자신도 살짝 맛을 봤다. "수고했다." 진성의 말을 들은 현준은 샴페인을 들어 역시 맛만 보았다. 그리고 대답했다. 자신은 아버지 진회장으로 인한 걱정으로 게임에 제대로 참여하지 못했기에 조금은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내가 뭘.. 나는 다른 사람들이 다 해 놓은 뒤에 들어가서 우승만 했을 뿐인데... 범현이가 내 대신 수고했지." "아니에요. 형이 없었으면 우리 팀이 그렇게 짜임새가 있었을 리는 없으니까요." 현준의 말을 받은 사람은 범현이었다. 현준이가 빠진 덕에 게임에 참가한 범현은 신인답지 않은 대담한 플레이를 보여 주목을 끌었다. 평소 할 말은 다하고 사람들과 친해지기 쉬웠던 성격이 게임에도 영향을 미친 모양이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다." "현준이 형에게는 그런 말은 어울리지 않아요." "그래? 그럼 어떤 말이 어울리는데?" "음.. 당연하지 또는 그걸 말이라고 하냐? 뭐.. 이런 것이 더 잘 어울리지 않을까요?" "뭐?" 현준은 괜히 물었다 싶었다. 하지만 한바탕 웃고 나니 기분이 훨씬 좋아지는 듯했다. 현준은 범현에게로 다가가 손바닥을 크게 휘둘러 철썩 소리가 나도록 범현의 등을 쳤다. "아아악! 왜 그래요?" "이게 더 잘 어울리지. 그렇지?" 능글능글한 현준의 대답이 이어졌다. "네?" 그 모습에 진성은 물론 다른 선수들과 모인 사람들은 웃고 말았다. 진성은 잠시 그 자리에서 나와 조용히 있는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혜연과 현호였다. 진성은 너무도 조용한데다 자신이 다가서자 더 어두워지는 두 사람의 분위기에 무슨 일인가 싶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두 사람이 이렇게나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가지고 있던 샴페인 잔을 옆에 있는 난간에 두고는 두 사람에게 물었다. "두 사람 왜 그래? 무슨 일 있나?" ".... 진성 오빠, 미안해요." 진성은 자신에게 미안하다는 혜연의 말에 영문을 몰라 뭐라고 할 수 없었다. 혜연의 눈가는 촉촉이 젖어 있어 큰일이라도 생긴 듯했다. 자신도 모르게 혜연의 어깨를 잡으며 물었다. "뭐가? 무슨 일있어?" 혜연은 처음으로 자신의 어깨를 잡은 진성의 모습에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제대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혜연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묻어났다. "진성 오빠가 참가를 안 해서 우리라도 열심히 하려고 했는데......" 하지만 진성은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몰랐다 혜연의 말에 겨우 왜 이러는지 알게 되어 어이가 없었다. 친한 사람 중에 누군가에게 무슨 큰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닐까 싶었던 진성은 혜연이의 어깨에서 손을 떼며 물었다. "그래서?" "네?" 진성은 퉁명스런 자신의 말에 고개를 든 혜연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그래서 열심해 했어?" "네......" 혜연은 모기만한 소리지만 확실히 그렇다고 대답했다. 진성은 이제 혜연에게서 고개를 돌려 현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해 물었다. "그럼 됐지 뭐. 현호 너도 그런 것 때문에 그런 거냐?" "....." 진성은 어이가 없었다. 이제 갓 시작한 녀석들이 10위 안, 아니 4위권을 노렸다니. 물론 열심히 했으니 아쉽기도 하겠지만 지금 이러고 있는 것은 청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진성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이것들이..... 너희 둘, 개인전 15위와 12위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고나 말하는 거냐? 국내에 있는 프로팀만 해서 16개가 넘는데 너희들이 개인전 15위, 12위를 했다는 말은 어떤 프로팀을 가더라도 그 프로팀의 중추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선수라는 말과 같다. 그런데 뭐가 미안한 거지? 우승을 못했다고? 4위에 들지 못했다고? 너희들 뭔가를 착각하는 것 같은데.... 나는 이 문명 온라인을 베타 테스트 때부터 시작했다고. 그런데 너희들이 벌써 나를 따라올 생각을 하는가 본데.... 꿈 깨라." 진성은 확실히 말했다. 분명 이 녀석들은 자신들의 실력이나 기대치보다 훨씬 더 잘했다. "네?" "너희가 투자한 시간에 비해 너희들의 실력은 훨씬 더 대단했고 그 결과도 좋았다. 그런데 너희들이 그런 얼굴을 하고 있다면 너희보다 오래 준비했지만 너희보다 좋지 못한 결과를 거둔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더 비참하겠냐?"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자, 이리로 와라. 그리고 같은 팀의 단체전 출전 선수들이 우승을 차지했는데 축하해 줘야지. 안 그래?"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가슴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네....." "너희들의 그 아쉬움은.... 내가 월드 리그에서의 우승으로 갚아주마." 진성은 두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 장난스레 말했다. "네? 아....." "그 정도로는 부족하나?" "아.. 아니에요." "자, 가자." 진성은 혜연과 현호의 가운데로 가 어깨동무를 하고는 현준이 있는 곳으로 억지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너희들보다 더 대단한 개인전 12위와 15위시다...." 진성의 의도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당연히 현준이었다. 현준은 현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정말 두 사람의 실력으로 개인전에서 12위와 15위에 오른 것은 대단한, 어쩌면 기적이라고 해도 무방할 결과였다. 두 사람이 기죽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수고했다." 현준의 말에는 진지한 마음이 담겨 있어 현호는 쑥쓰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당연히 수고했지요. 혜연아, 현호야, 축하한다. 여기 이 단체전은 우승 못하면 욕먹는 멤버지만 너와 혜연은 20위권도 솔직히 기대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덜컥 12위, 15위를 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있겠냐? 나도 단체전 하지 말고 개인전에 참가할 걸 그랬나?" 혜연과 현호가 어색해하자 범현이 나서며 말을 이었다. "뭐? 20위권?" "사실 그 당시만 해도 우리 실력.... 좀 아니었잖아? 그 정도에서 10위권에 든 것만도 기적이지. 기적. 그렇지 않나요, 현준이 형?" 범현은 현준에게 동의를 구했지만 현준은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범현은 다 좋았지만 가끔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점이 있었다. 물론 그런 면으로 인해 더 분위기는 좋아지긴 했지만. 진성은 침대에서 눈을 떴다. 천장이 보였다. 오랫동안 있었기에 이제는 당연하게 느껴진지도 옛날이었다. 평소라면 바로 침대에서 일어나 운동하러 밖으로 나갔을 것이다. 고개를 돌려 침대 옆에 놓여 있는 탁상시계를 보았다. 5시 30분이었다. 밖은 아직도 어두웠고 추울 것이다. 어제 늦게까지 있었기에 피곤한 점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침대 이불 안에서 온기를 느끼며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는 것이 더없이 좋았다. 몸을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이불의 사각거리는 소리도 좋았고 은근히 따뜻한 이불안의 느낌도 무척이나 좋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둡지는 않아 어렴풋 보이는 것들도 무척이나 달라보였다. 자신은 참가하지 않았지만 또 하나의 리그가 끝이 났다는 생각이 들자 지금까지 했던 일이 떠올랐다. 처음 베타 테스터와 프로 게이머로 문명 온라인팀에 들어갔던 일, 학교를 휴학한 일,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사고, 다시 하기 힘든 현준과의 연습, 2차 프로 리그와 메이저 리그의 우승, 라스베가스에서 있었던 일. 굵직굵직한 일만 생각해도 꽤 많은 일이 있었다. 태어나서 고등학교 졸업하기 전까지 있었던 일 중 기억나는 것은 오직 하나였지만 그 이후로는 일본, 미국 등 해외로 여행 겸 출장으로 가기도 하는 등 복잡한 일들이 있었다. 문득 자신이 현준의 집에서 살게 된지도 3년이 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런 불편함도 없이 집에 들어오면 따뜻하고 빨래도, 밥도 해 주시는 현준 어머니. 진성은 자신을 낳아주신 어머니에 대한 생각으로 현준 어머니의 말없는 도움과 희생에 무심했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만약 혼자 살았다면 은근히 진성을 괴롭혔을 일들을 묵묵히 도맡아 하셨던 현준 어머니. 그런 생각을 하자 진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진성의 몸에는 나른함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진성은 컴퓨터를 켰다. 참으로 오랜만에 집에서 컴퓨터를 사용하는 듯했다. 회사에서 매일 컴퓨터와 씨름하다 보니 집에 와서는 무의식적이었지만 컴퓨터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꽤 빨리 부팅하자 마우스를 움직였다. "음... 토요일이지만 쉬는 날이니 어디 갈 때가 없을까?" 진성은 여기저기 서울 인근에 갈 만한 곳이 없을까 싶어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오늘 하루는 현준 어머니를 위해 투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로플 그룹의 총수가 된 진회장은 너무나 바빠 아침에 제일 먼저 나가고 아주 늦게 들어왔다. 현준 어머니는 가끔 예전이 더 나았다고 말하곤 했다. 한참 동안 찾았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것은 찾지 못했다. 아이들이 가는 곳으로 정할 수는 없었다. 교외에 좋은 곳들은 대부분 가든과 같은 음식점들이어서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단지 밥먹으러 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럴 바에야 사부 유조의 집으로 가 차를 대접하고 식사를 하는게 더 나을지도 몰랐다. 진성은 딱히 찾지 못하자 컴퓨터를 끄고 말았다. 가족의 정에 대해 목말랐던 적이 많았기에 진성은 좋은 곳에 간다고 해서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해 줄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좋은 곳이 있을까 싶었던 진성은 한숨을 쉬고는 다시 침대에 누워 고민했다. 식사 시간이 될 무렵, 진성은 침대에서 일어나 간단히 씻은 다음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진성아, 어디 아프니?" 현준 어머니는 평소 집에 있을 때는 거의 빼먹지 않고 운동하던 진성이 아침 운동을 하지 않자 몹시 걱정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진성은 갑작스런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네?" "오늘 아침 운동을 빠뜨린 듯해서... 어디 아픈 건 아니니?" 이제야 질문의 의미를 알게 된 진성은 웃으며 현준 어머니에게 말했다. "오늘은 좀 생각할 게 있어서요. 걱정하지 마세요." 진성은 둘러대고는 자리에 앉았다. 이미 현준 아버지는 나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무슨 생각할 게 있기에... 혹시 진성이 너, 오늘이 처음으로 수련을 하지 않은 날이 아니냐?" 현준 아버지는 진성과 현준 어머니와의 대화를 얼핏 들었는지 물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수련을 빠진 적이 거의 없었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아니에요. 예전에도 일이 있거나 하면 안 한 적도 있었는걸요. 그리고 요즘에는 별로 수련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요." "뭐? 그래? 그런데 무슨 생각을 했냐?" 그 때, 아직도 내려오지 않은 현준, 현석 두 사람을 깨우기 위해 현준 어머니가 위로 올라갔다. 진성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아저씨, 오늘 출근하시죠?"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는 진성의 태도에 현준 아버지 역시 같이 목소리를 낮췄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일 외에는 장난기가 가득한 중년의 남자인 현준 아버지, 진회장의 또다른 모습이었다. "음.. 일이 있으니 나가봐야지. 그런데 왜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냐? 뭔가 비밀스런 말이라도 할 작정이냐?" 진성은 마음 속을 털어놓았다. 없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더 쉽게 알아채는 법이다. 진성은 아주 솔직하게 말했다. "그게 아니라. 사실, 아주머니께 제가 계속 받기만 한 듯해서요. 그래서 오늘 하루만이라도 아주머니, 좋아하시는 것 하셨으면.... 아무래도 가족이 다 모여서 즐겁게 지내는게 제일 좋지 않을까요?" "그래? 하하하. 진성이 네가 저 두 녀석보다, 아니 나보다 더 낫구나. 그러면 네가 현준, 현석이와 상의해서 나에게 알려다오.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시간을 낼테니." 현준 아버지는 호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저씨, 아주머니라고 부르지만 마음 씀씀이는 오히려 아들 녀석들보다 나았기에 기분이 흡족했다. "네, 그럴게요. 아저씨, 비밀이에요. 아셨죠?" 현준 어머니는 투덜대며 내려왔다. 현준 아버지는 대답을 윙크로 대신했다. "두 녀석 모두 이불을 똘똘 말아서 잠을 자고 있지 않겠어요? 어쩜 저리도 똑같은지. 5분만 기다리시면 내려올 거에요. 진성아, 지금 배고프지 않지?" 진성은 웃으며 대답했다. "네, 괜찮아요." "나도 괜찮다오. 신문 조금 더 보지 뭐.." 시간이 조금 지나자 얼굴에 졸음을 달고 있는 두 형제가 내려왔다. 곧 두 사람이 앉자 식사가 시작되었다. "현준이는 수고했다. 어제 늦게 잤을 텐데... 밥먹고 피곤하면 푹 쉬도록 해라. 그런데 현석이 너는 요즘 뭘 하기에 그렇게 피곤해 하냐?" 현준 아버지는 현준이 어제 늦게 들어온데다 꽤 고생을 했기에 푹 쉬라고 했지만 동생인 현석이마저 현준처럼 피곤해하자 요즘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했다. 평소 아들이 뭘 하는지 제약을 가하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아버지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 "왜? 아버지인 나한테도 말 못할 일이냐?" 현석이가 대답을 하지 않자 현준 아버지는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보통의 아버지라면 걱정하겠지만 현준 아버지는 그와 반대인 듯했다. 자신의 아들이 자기에게 하지 못할 말이 있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그런 비밀이 있다면 어떻게든 파헤쳐 보리라 마음 먹는 탐정과 같은 눈빛이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나중에 그 결과가 나오면 말씀드릴게요." "그래? 음.. 내가 기대해도 될만한 일이냐?" 뭔가 하고 있다는 말에 현준 아버지는 아쉬움을 감추며 다시 물었다. "음.... 그럼요." "좋아, 기대하지." 곧 식사는 끝이났고 현준 아버지, 진회장은 제일 먼저 출근하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진성은 현준, 현석과 3층으로 다 올라오자 두 사람을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두 사람을 침대에 앉히고 자신은 의자에 앉은 후에 입을 열었다. "오늘, 아주머니께 뭔가 기쁜 일을 해 드리고 싶은데 너희들은 어떠냐?" 진성의 말에 현준은 심드렁하게 물었다. 몸은 아주 피곤해 말을 길게 하기도 싫을 정도였다. 순간 생각했는데 오늘은 분명 아무날도 아니었다. "엄마? 무슨 날인가? 생신은 아니신데?" "무슨 날이라서 그런게 아니라 요즘 다른 사람들이 바쁘다는 핑계로 집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잖아. 아주머니도 스트레스 많이 쌓였을 것 같아서... 좋은 생각 없냐?" "그래?" "그렇기는 하겠네요. 그런데 진성이 형이 진짜 우리 엄마 아들 같아요. 도대체 형은 무슨 생각하며 살아요? 진짜 아들은 별 생각이 없고.." 현석은 은근히가 아니라 노골적으로 현준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현준은 그런 현석의 말에 조금도 화를 내거나 흔들리지도 않았다. 도리어 너 역시 아들이라는 말로 되받았다. 꽤 오랫동안 두 사람을 봐온 진성이었기에 그런 두 사람의 대화에는 이미 적응된지 오래였다. "그러는 너는 무슨 생각이라도 했냐?" 현석은 아예 현준의 말을 무시하고는 뭔가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 아, 맞다. 엄마 옛날부터 연극보시는 것, 좋아했잖아? 그치?" "아, 그렇구나. 예전부터 연극보러 다니시는 것 좋아하셨는데......." "그래? 그럼 다 같이 연극보러 간 후에 식사하는 걸로 계획을 잡을까?" 진성이 정리했고 두 사람은 찬성했다. "그게 좋을 것 같다." "그래요. 그게 좋겠어요." "그럼 너희들은 피곤해 보이니 쉬고 있어라.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아, 아주머니 어떤 연극을 좋아하시지?" 진성은 마지막으로 어떤 연극을 좋아하는지 물었다. 극장도 좋아야하겠지만 무엇보다 내용이 중요한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캣츠!" "그래? 음... 내가 알아보지 뭐." 두 사람이 각자 자신의 방으로 가자 진성은 다시 한 번 컴퓨터를 켰다. "하루에 두 번 컴퓨터를 켜보기도 정말 오랜만이군. 최근 1, 2년 내에는 이런 일이 없었던 것 같은데...." 실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진성은 재빨리 연극 정보를 찾기 시작했다. 돈은 문제가 아니었다. 시간과 공연을 누가 하는지가 더 중요했다. 자신은 어떤 곳이 더 나은지 모르기에 연극을 본 사람들의 평을 중심으로 검색했다. 많은 사람들이 재미있게 봤다면 믿을 수 있을 것이다. 1시간에 걸친 검색 끝에 겨우 결정했다. 예매 기능이 있어 자신의 신용카드로 로얄석 다섯 매를 예약했다. 또한 근처의 유명한 레스토랑에도 예약을 마쳤다. 그리고 나서 아저씨, 진회장에게 전화를 했다. "네.. 오후 4시까지 대학로 근처로 나오시면 됩니다. 그 때, 저나 현준에게 전화하시면 됩니다. 네.. 그리고 식사는 그 근처 괜찮은 곳에서 하기로 예약을 했으니... 예... 당연하지요. 저도 부자에요. 예, 알겠습니다. 예...." 진성은 아주머니의 얼굴에 가득할 미소를 생각하면서 모든 계획을 마치고는 침대에 누웠다. 따갑지는 않지만 뺨을 간질거리는 햇빛이 창문을 넘어왔다. 잠시 누웠던 진성은 뭔가 생각이 났는지 얼굴에 미소를 가득 채우며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꽤 쌀쌀한 날씨에 따스한 햇빛은 축복이었다. 연극 캣츠를 본 다음 미리 예약한 레스토랑에 도착한 현준 가족과 진성은 따로 떨어진 방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현준 어머니는 감동한 듯, 현준 아버지를 보며 말했다. "저.. 정말 고마워요..." 눈가에 눈물마저 그렁그렁하자 현준 아버지는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이것은 모두 진성이 생각이라고. 나야 시간 조금 낸 것 빼고는 아무것도 한 게 없지. 그렇지 않냐?" 현준 아버지의 말에 현준과 현석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맞아요. 진성이 엄마가 요즘 고생하시는 것 같다고 해서...." "엄마, 우리보다 진성이 형이 더 아들같죠? 그래도 우리 미워하면 안 돼요!" "뭐?" "하하하." "하하..." 진성은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미리 주문해 두었던 꽃다발과 포장이 된 작은 선물 상자를 가지고 들어왔다. "이왕 오늘 아주머니를 위해 시간을 내기로 한 것, 제대로 하려고요. 아주머니, 그 동안 정말 잘 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진성은 꽃다발과 선물 상자를 현준 어머니의 품에 안겼다. 그런 일은 자신들에게 말하지 않았기에 현준 아버지는 물론 현준과 현석도 놀랐다. "진성아, 그건 규칙 위반이다!" "형, 그렇게 하면....... 우리는 어떻게 해요?" "진성아......... 남편인 내 입장도 생각해야지?" 현준 어머니는 꽃다발의 향기를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맡은 다음 음미했다. 정말 오랜만에 받아보는 꽃다발이었다. 그리고 곧 작은 선물 상자의 포장을 뜯었다. 마치 보석함과 비슷했다. 곽을 열어보니 화려하지도 그렇게 수수하지도 않은, 무난하지만 나름대로 아름다움이 있는 마치 평소 진성의 성격도 비슷한 목걸이가 있었다. "지... 진성아.." "제게 주셨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현준 어머니는 참고, 참고, 참았던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뺨을 따라 타고 내려와 탁자에 떨어지는 눈물이었다. 진성이 눈짓을 하자 현석이 일어나 현준 어머니에게로 다가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엄마, 오늘 같이 좋은 날에 이렇게 눈물을 흘리면 어떻게 해요? 지금은 제가 진성이 형보다 못한 아들이지만... 정말 잘 할게요. 저 버리면 안 돼요!" "......." 현준 어머니는 막내아들 현석의 말에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그 표정을 본 현준 아버지, 현준 그리고 진성은 웃음이 났지만 당사자를 앞에 두고 웃을 수가 없어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 잠시 쉬었다 가는 내용입니다 ^^; 재미있다면 추천을.. --------------------------------------------- TGP1(The Gamer Part 1) [174 회] 로플 그룹 "네? 결혼이요?" 갑자기 결혼 이야기를 꺼낸 이준의 말에 서재필 뿐 아니라 프로팀 연습실에 모인 선수들 모두 놀라고 말았다.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조용하던 이준이 결혼한다는 말에 모두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도대체 상대가 누구일까. 그것이 제일 궁금했다. "누구에요? 예뻐요?" "회사 내에서 만났나요? 학교 후배?" 곧 이준의 얼굴에서 진지함을 읽은 사람들은 옆으로 다가가 꼬치꼬치 캐물었다. 몹시도 난감한 표정을 지은 이준이 쳐다본 사람은 다른 아닌, 자칭 메이크업 아티스트인 최현숙이었다. 그 시선을 느낀 사람들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사람들의 눈에는 설마, 설마 아니겠지 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곧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뭐야? 다들 내가 이준씨와 결혼하면 안 된다는 표정이잖아? 사실.. 그동안 이준씨와 만나고 있었는데 회사에서 티낼 수는 없잖아. 한동안 회사도 어려웠고.. 이제 그런 문제는 없으니까." 현숙은 오히려 뭔가 이상하다며 이준에게로 다가가 팔짱을 꼈다. 얼굴이 붉게 변한 이준과는 달리 현숙은 아주 당당했다. 평소 현숙의 성격과 다름없었다. "지.... 진짜에요? 에이... 누나, 거짓말이죠? 충분히 놀랐으니까 실토하세요." 두 사람을 보던 범현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현숙에게로 다가가 물었다. 프로팀에서 가장 활달하고 다른 사람들과 친한 범현이 몰랐다는 말은 프로팀의 누구도 사전에 현숙과 이준의 사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는 말과 같았다. 범현의 말에 현숙의 태도는 당당, 그 자체였다. 당연한 말을 또 하게 만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야! 아무렴 내가 결혼 이야기로 장난칠 사람처럼 보이냐?" '네.' "아니요." 범현은 그렇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상대는 다른 사람도 아닌 현숙이었다. 앞으로의 프로 게이머 생활이 편하려면 현숙의 눈밖에 나면 안 됨을 잘 알고 있었기에 밖으로 튀어나온 말은 현숙이 원한 대답이었다. 가만히 있던 진성이 다가서며 물었다. "현숙이 누나, 그러면 상견례도 했나요?" "당연하지. 재필 오빠, 서운하지?" 진성의 말에는 그나마 고분고분 대답한 현숙이었다. 현숙은 가만히 이준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서재필을 걸고 넘어졌다. 현숙과 같은 여자와 평생을 같이 살게 된 이준이 불쌍해서 쳐다보고 있던 서재필은 갑작스런 현숙의 말에 뭐라고 할 수 없었다. "뭐?" "오빠가 나 좋아한 거 다 알고 있는데... 어쩔 수 없지. 나는 이준씨가 더 좋으니까. 아, 맞다. 우리가 말하기 그러니까 재필 오빠가 사장님께 우리 주례 부탁 좀 해 주면 안 될까?" 고단수였다. 스스로 서재필이 자신을 좋아했다고 말한 다음, 상대가 뭐라 할 수 없도록 말을 바꿔 주례 얘기를 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기자 출신 서재필이었다. 서재필은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고는 말했다. "..... 그.. 그래 알았다. 그런데 나 너 좋아한 적 없다. 혹시나 해서 말인데.. 그런 유언비어는 퍼트리지 말아다오." "그거야 오빠 하는 거 보고... 신혼 살림에 무척이나 필요한 게 많은데...." 서재필도 막무가내의 대명사 최현숙에게는 힘든 듯했다. 결국 현숙이 원한 것은 따로 있었다. 서재필은 웃고 말았다. "아.. 알았다. 말만 해라." "재필 오빠는 역시 최고야! 아, 결혼은 월드리그 끝나면 할 테니까 시간이 조금 있지. 재필 오빠, 그 때까지 필요한 리스트 뽑아 놓을 테니까.. 부탁해~." ".............." 프로팀 연습실은 한바탕 소란스러웠다. 로플 그룹 어디보다 선남선녀가 많은 곳이기는 했지만 사내 커플이 탄생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그동안 조금의 기미도 없이 사귀고 있었다니 사람들은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결혼을 결정했기에 모두들 두 사람에게로 가 축하해 주었다. 드디어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의 출시일이 결정되었다. 이미 완성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여러 문제로 출시일이 미루어졌던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의 출시일이 결정되고 홈페이지를 통해 일정이 공개되자 기존 밀리터리 아트 싱글버전의 사용자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게임기의 업그레이드와 여러 가지 온라인 미션이 부여될 수 있어 사람들은 기대를 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예전 진성이 현 로플의 개발팀장인 조진철과 의논했던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의 각 서버에 로플의 테스트를 접목하는 것도 추가되었기에 사용자들은 더 새로운 것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코엑스 컨벤션 센터 안은 입추의 여지 없이 미리 초청된 사람들로 가득했다.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의 공식적인 출시를 바로 컨벤션 센터에서 하기로 했고 밀리터리 아트 싱글 버전 사용자 중 거의 7천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달려와서 자리를 하고 있었다. 무대 뒤, 대기실에는 진성이 깔끔한 정장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조팀장이 있었다. 무척이나 긴장 되는 듯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대기실 안을 왔다갔다 하는 진성의 모습에 조팀장이 입을 열었다. "어때? 긴장되지?"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던 진성은 순간 조팀장의 말을 놓쳤지만 곧 대답할 수 있었다. 무척이나 떨렸다. 차라리 게임을 하는 게 훨씬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네? 아.. 네.. 예전에 무대에 한 번 서 본 기억은 있지만, 휴우.... 그 때 생각만 하면 떨립니다. 잘 할 수 있겠지요?" "당연히 잘 해야지. 자, 시간 됐다. 올라가봐라." 진성은 옷 매무새를 확인한 후 복도를 통해 무대 위로 올라갔다. 진성이 올라가는 순간 장내는 떠나가는 듯한 환호성이 들렸다. "강진성!" "스키피오!" 환호성은 딱 두 가지, 강진성과 스키피오라는 외침이었다. 밀리터리 아트 싱글 버전의 사용자들은 모두 문명 온라인의 최고수 강진성이 개발에 참여했다는 사실과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의 개발 책임자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한 가지만 해도 쉽게 오르기 힘든 위치를 강진성이라는 사람은 동시에 최고의 위치에 올랐기에 사람들은 부러워했다. 진성은 그런 환호성에 얼굴이 붉어졌지만 곧 침착을 되찾고 마이크를 올려 사람들에게 입을 열었다. "안녕하셨습니까?" "물론이죠!" "스키피오!" 자신의 한 마디에 컨벤션 홀이 떠나가라 대답하는 사람들을 보며 진성은 가슴 뭉클했다. 순간 연예인들이 사람들의 환호에 이렇게 기분이 좋을까 싶기도 했다. "오늘은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의 개발 책임자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리셨습니다. 그 동안 밀리터리 아트 싱글 버전만으로 버틴 여러분들의 인내에 경의를 표합니다!" 진성은 농담을 했지만 좌중은 별로 농담이라 생각하지 않았는지 웃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러자 머쓱해진 진성이 다시 말했다. "보통 이런 곳에는 웃어주는게 도리 아닙니까?" "하하... 스키피오, 당신이 말하니까 진담같지 않습니까?" "와하하하하.. 맞아요!" 진성의 퉁명스런 말에 사람들은 웃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진성은 부드럽게 좌중을 리드하며 진행하기 시작했다. 기본적인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의 달라진 점부터 시작해서 앞으로 있을 이벤트의 계획과 서버와 관련된 것들을 자세히 설명했다. 또한 중간중간에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의 실제 게임 화면을 보여주기도 해 모인 사람들의 관심을 한곳으로 끌어모았다. 예전보다 훨씬 더 무대에서 능숙한 진행을 보여주는 진성이었다. 문명 온라인 아시아 리그는 일본의 도쿄에서 각 나라의 프로팀들이 다 모여 치르기로 결정이 났다. 일정은 1월 한 달 동안이었다. 각 프로팀마다 일정이 다를 수가 있어 정확한 날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1월 한 달 동안은 아시아 각국의 게임이 계획되어 있었다. 총 5개의 단체전 출전팀과 5명의 개인전 출전 선수를 뽑는 대회였다. 아시아 리그에 출전할 로플 그룹의 프로팀 선수들은 며칠 간의 달콤한 휴식을 끝으로 다시 한 번 맹연습에 들어갔다. 거기에는 진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로플 소프트의 개발팀장이었기에 연습에만 매진할 수는 없었지만 로플 그룹의 방침상 진성은 프로 게이머를 우선적으로 할 수 있게 되어 대회 준비를 할 수 있었다. 또한 한국 문명 온라인 운영위원회와 아시아 문명 온라인 운영위원회에서 진성의 참가를 강력히 원하고 있어 진성은 어느 정도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의 출시와 관련된 일들을 처리하면 완전히 프로 게이머로서 대회에 참가할 마음먹었다. 진성은 로플 소프트의 중추, 로플의 개발팀, 팀장실에 들어와 있었다. 방안에는 커다란 책상과 수수한 소파 몇 개를 제외하고는 책으로 가득찬 책꽂이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커다란 책상에는 각종 책들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진성은 그 앞에서 서 있었고 한참을 뭔가 찾던 조진철 로플 개발팀장은 슬며시 고개를 들어 말했다. "뭐? 그러니까 네가 프로 게이머를 하면서 각 나라를 돌아다니는 동안 나더러 그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의 개발팀장까지 같이 맡아달라는 말이냐?" 진성은 머뭇거리다 말했다. 어차피 알게 될 사실 자신의 입으로 양해를 구하는 것이 낫다 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찾아왔던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미안했다. "....네." "진성아, 너는 내가 노는 것으로 보이냐?" 진성이 들어오기 전만 해도 쇼파에서 다리를 탁자위에 올리고 쉬고 있던 조팀장은 뭔가를 계속 찾으며 진성에게 말했다. 무척이나 퉁명스러워서 진성의 말이 달갑지 않음을 사방으로 발산했다. "아니요." "나같이 바쁜 사람에게 짐을 넘기려 하다니." "사장님 지시인데요." 조팀장이 계속 말을 하자 진성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자신의 부탁이 아니라 사장님의 지시라면 조팀장도 어쩔 수가 없을 것이다. 예상대로 조팀장은 깜짝 놀란 듯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뭐?" "제가 대회에 꼭 나가야 합니까 라고 물으니 꼭 나가야 한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럼 제 일은 어떻게 하지요, 하니까 진철이가 있잖아, 하시더군요. 제가 부탁드리는 것이지만 이미.. 사장님은 조팀장님이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 개발팀장까지 당분간 같이 맡는 것으로 알고 계십니다." 어떻게 보면 무척이나 얄미워 보일 만큼 자세히, 단호하게 진성은 설명했다. 마치 자신은 그와 같은 일에 전혀 책임이 없다는 말투였다. 조팀장은 이미 그 말을 듣고는 내막을 짐작했다. 진민수 로플 그룹 회장, 이희철 로플 소프트 사장. 그 두 사람이 이번 일의 원흉이다. 하지만 문제는, 자신이 그 두 사람에게 뭐라고 할 만한 명분이 없었다. 조팀장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 "출시 문제는 다 끝났고 서버를 이용한 본격적인 테스트는 제가 돌아오면 할 테니까 그 동안 생기는 자잘한 문제만 조팀장님이 좀 알아서 해 주세요. 네?" 진성은 조팀장을 보고는 안쓰러워 부드럽게 말했지만 충격을 받은 조팀장은 대답이 없었다. "........" "그럼, 저는 이만... 나중에 돌아올 때, 선물 사 가지고 올게요." 진성은 선물이라는 말까지 꺼냈지만 조팀장에게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발꿈치를 들어올려 소리가 나지 않게 진성은 팀장실을 나갔다. 진성이 나가도 나서도 조팀장은 그대로, 말없이 서 있었다. "........" 조팀장은 순간 얼었다 진성이 나가고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지만 이미 떠나버린 버스였다. 사실, 요즘 로플의 알파 테스트가 순조롭게 끝이 날 듯해 조금 한가할까 싶었다. 그런데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고 이런 일이 자신에게 떨어지다니. 분명 진회장의 의견이었을 것이다. 조팀장은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에휴.... 예전에는 진성이에게 장난도 많이 쳤는데 이제는 오히려 당하는구나." "오랜만이지?" "그래. 오랜만이지." 진성은 로플 엔터테인먼트의 프로팀 연습실을 찾았다. 예전보다 훨씬 큰 연습실이었다. 적어도 2, 3층 높이의 천정에 굉장히 넓어 10대 가까운 문명 온라인 게임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또한 몇 개의 최신 설비가 설치된 방이 있어 게임의 결과를 가지고 중간중간 체크해 가면서 무엇이 문제인지 서로 토론할 수 있는 곳도 구비되어 있었다. 진성은 몇 번 오기는 했지만 대부분 현준을 보거나 사람들을 만나러 왔지 연습하러 온 적은 없었다. 그 동안 문명 온라인을 전혀 하지 않았기에 진성에게는 많은 양의 연습이 집중적으로 필요했다. 유망한 다른 나라의 선수들이 했던 게임도 보고 분석해야 했고 그와 더불어 예전의 경기 감각을 최대한 끌어올릴 필요가 있었다. 진성을 반갑게 맞이한 사람은 당연히 현준이었다. 현준은 반갑게 진성을 맞이한 다음 이때다 싶어 진성에게 게임을 제안했다. 어차피 연습하러 왔기에 당연한 것이지만 현준은 실력이 떨어진 이 때, 완전히 박살을 내고 싶은 장난기가 들었던 것이다. "오랜만에 한 판 어때?" "음... 내가 그 동안 쉬어서 불리하지만 그 정도의 핸디캡은 있어야 네가 나와 일대일로 상대할 수 있겠지?" 하지만 진성은 그런 현준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핸디캡이 있어야 비슷하다면서 진성이 말하자 현준은 과장되게 놀라면서 말했다. "뭐? 예전의 나로 생각하면 곤란하다고!" "그래? 그거야 해 보면 알지." 진성은 그리운 느낌마저 드는 로마 문명으로, 현준은 마땅한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 그리스 문명으로 일대일 문명 온라인 게임을 시작했다. 일요일이라 쉬는 날이었지만 진성은 새벽에 빨리 현관문 밖으로 나왔다. 진성은 요즘 무공 수련을 해도 뭔가 진전되는 느낌이 없어 무척이나 답답한 상태였다. 몸에 무리가 가고 뭔가 이상하다거나 하는 점은 없었지만 답보 상태인 것만은 확실했다. 이제까지 자신의 성장 속도가 보통 사람의 수준을 뛰어넘는 것임은 알았지만 막상 이제와는 달리 수련의 성과가 눈에 보이지 않자 급한 마음마저 생겼다. 스스로 조절을 하지만 아직은 젊은지라 급한 마음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었다. 새벽이면 어김없이 팔극신권의 팔극진결을 수련했고 무명비검과 팔괘장 그리고 축지법도 같이 수련했다. 축지법은 어느 정도 몸에 익혀져 대단한 위력을 가졌지만 실전의 타격에 사용했다가는 큰일이 날 정도여서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수련으로 자신의 경지가 유의 경지를 넘어선 것은 확신했지만 그 이상의 성장은 어떻게 알아볼 방법이 없었다. 진성은 처음으로 사부 유조가 가르쳐 준 경지 이상을 경험하게 되어 조금이지만 당황한 점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 순간, 진성은 사부 유조와 유맹의 고수 손주황이 한 말이 생각이 났다. 기의 정점, 기의 정점에 이르게 되면 성장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거라는 말이 떠올랐다. 진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빠르게 움직였다. 팔극진결을 빠르게 수련하니 전혀 다른 무술 같았다. 확실히 예전에 비해서 무술의 수련에 대한 성과는 없었다. 이것이 기의 정점인가? 진성은 확신할 수 없었다. 무의식 중에 기의 정점을 그 어떤 탁월함이라 생각했고 그에 어울리는 특이한 현상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평범, 그 자체였다. 또한 자신은 아직도 무명검법 가운데 무명기검과 무명절초 등 익힐 것이 많았다. 그런데 기의 정점이라니. "과연 이게 기의 정점이란 건가? 이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진성의 뇌까림에는 확신이 없었다. 순간, 환(幻)의 경지라는 말도 기억이 났다. 내 안에서 다른 무술들이 하나로 변하리라는 손주황의 말. 진성은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팔극진결을 다시 한 번 펼쳤다. 마음을 편히 가지려 했고 몸은 오직 움직임에 충실했다. 진성은 자신의 몸보다는 마음에 집중했다. 마음을 보고, 마음을 느끼려 했다. 진성의 의식은 서서히 침잠했다. 마음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 순간, 진성의 몸은 팔극진결이 아니라 무명검법을 펼쳤고 또한 팔괘장을 펼쳤다. 진성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몇 차례에 걸쳐 몸은 팔극신권, 무명검법, 팔괘장, 축지법을 반복해 펼쳤다. 그러다 어느 순간 팔극신권과 무명검법이 서서히 하나로 합쳐지기도 하고 팔괘장과 축지법이 합쳐졌다. 또한 팔극신권과 축지법이 하나로 합쳐지기도 했다. 팔괘장의 보법을 하면서 무명검법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다 한 순간 팔극신권, 무명검법, 팔괘장, 축지법이 진성의 몸에서 하나로 합쳐졌다. 팔극신권의 강맹함도, 무명검법의 시원함과 날카로움도, 팔괘장의 튼튼한 방어도, 축지법의 묘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유의 경지가 경력이 몸안으로 숨어드는 시기라면 환의 경지는 가진 바 무예들의 특출난 부분이 안으로 스며드는 시기였다. 화려한 폭발은 아니었지만 진성은 전혀 다른 기예들이 합쳐져 네 가지 물살이 빠른 소하(小河)가 유유히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흐르는 대하(大河)가 되어버렸다. 비록 자신은 느끼지 못하고 있지만 그야말로 기의 정점에 들어선 것이다. 환의 경지, 진정한 환의 경지가 바로 기의 정점이었다. 모든 기예가 하나로 모여드는 경지, 그것이 진정한 환의 경지였다. 진성은 눈을 떴다. 뭔가 변화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스스로 마음이 잔잔해서 하늘과 구름이 그대로 비치는 바람 한 점 없는 호수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 명경지수(明鏡止水)였다. 진성은 미동도 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아주 편했다. 무술의 발전에 대한 생각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진성의 마음에 가득한 것은 살아있다는 것 자체로 기쁜 마음이었다. 마치 주위의 스쳐가는 바람이 자신을 위해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진성은 자신의 존재에 만족했다. 한참 동안 가만히 있다 일어난 진성은 다시 한 번 몸을 움직였다. 그러다 스스로 놀랐다. 팔극진결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팔괘장도 아니었다. 어떤 순간에는 무명검법 같은 느낌도 들었지만 또 한 순간에 자신의 몸은 공간을 뛰어넘어 있었다. 그것이 끊이지 않은 움직임 속에 한순간에 일어났다. 이상한 것은 팔극신권의 강맹한 움직임도 없었고 팔괘장의 마치 물과 같은 동작도 잘 드러나지 않았다. 그 뿐 아니라 무명검법의 기묘한 움직임도, 축지법의 놀라운 동작도 드러나지 않았다. 평범한 가운데 놀라운 무예가 스며 있었다. 놀라 의식적으로 몸을 멈췄다. 가만히 서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었다. "이것이... 환의 경지인가? 아... 그러면, 이것이 그야말로 기의 정점이라는 건가?" 누군가에게 물었지만 진성은 확신했다. 기의 정점. 팔극신권, 팔괘장, 무명검법, 축지법 등 그 어느 것 하나 발전했다고 볼 수는 없었지만 모난 부분들이 깎이며 하나로 합쳐졌다. 진성은 입가에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앞으로 더 힘든, 더 많이 생각해야 할 단계들이 많겠지만 현재로는 만족할 수 있으리라. 자신의 나이에 이런 경지에 오른 사람이 과연 있었을까 싶었다. 진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맹의 고수들, 특히 손 어르신이나 데카츠 어르신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 일본으로 가니 왕현추, 왕아저씨에게 연락을 드려야겠다고 결심했다. "뭐, 기분 좋은 일이라고 있는 거니?" 식사 준비를 하던 아주머니가 진성에게 물었다. 유난히 얼굴이 밝고 편안해 보여 물었던 것이다. 하지만 진성은 갑자기 들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네?" "얼굴을 보니 뭔가 기분이 좋은 듯한데..?" "아... 네, 사실 요즘 잘 풀리지 않는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오늘 아침에 그게 시원스럽게 풀린 것 같거든요. 아직 100% 확신할 수는 없지만요." "그래? 진성이 너는 부지런하니까. 자, 나는 남편 하나와 아들 둘을 깨우러 갔다 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라." "네.." 곧 그 남편 하나, 아저씨와 아들 둘, 현준과 현석이 식당으로 들어섰다. 잠이 가득한 얼굴 그대로였다. "진성아, 네 덕분에 일요일에도 이렇게 아침을 빨리 먹는다." "맞아요. 진성이는 너무 부지런하니까.." "그런데 세상 살아가려면 너무 튀면 곤란하지 않나요?" 차례대로 말한 세 사람의 목소리에는 퉁명함과 비꼬는 투가 역력했다. 아무래도 아주머니가 세 사람을 깨우면서 진성 자신에 대해서 말한 모양이었다. 진성은 마치 아이들 같은 유치함에 웃고 말았다. "자, 이제 식사하죠." 아주머니가 식탁에 앉자 다들 식사를 시작했다. 이른 아침부터 움직한 진성과 준비하느라 일찍 일어난 아주머니는 맛있게 식사를 했지만 세 사람은 마치 모래를 씹는 표정이었다. 진성은 계속 웃으면서 식사를 했다. "잘 먹었습니다." "그래.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운동도 하니까 밥맛이 좋을 수밖에. 진성아, 먼저 올라가도 된다. 이 사람들, 밥 다 먹으려면 3박 4일은 걸릴 것 같으니까." 아주머니는 세 사람, 남편과 두 아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일요일 같은 날, 몸도 좀 움직이고 해야지 건강하고 입맛도 좋을 텐데. 3박 4일이라는 말에 진성은 웃었고 세 사람은 사래가 걸린 듯 연신 콜록거리며 물을 찾았다. 그 모습을 본 진성은 입밖으로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고는 말했다. "예... 그럼 먼저 올라갑니다. 현준아 3일 뒤에 보자." 3층으로 올라온 진성은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오랜만에 팬 사이트에 들어가 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 컴퓨터를 켰다. 여전히 엄지 발가락으로 파워 버튼을 눌렀다. 잠시 기다리니 낮은 진동 소리와 함께 컴퓨터가 켜졌다. 박막 모니터를 켜자 OS(운영체제)의 처음 장면이 보였다. 아무리 봐도 마음에 들지 않는 화면이었다. 바꾸려고 했지만 귀찮고 별로 마음에 드는 것이 없어 그대로 둔 상태였다. "자, 잠깐 들려 볼까?" 순간 가상현실을 이용해 통쾌한 복수를 했던 해킹이 생각이 났지만 진성은 고개를 흔들었다. 마음만 먹으면 이 나라 뿐 아니라 외국의 은행 모두를 해킹해 흔적을 남기지 않고 돈을 모을 수도 있었지만 진성은 그럴 생각은 절대 없었다. 지금도 돈은 남아 돌았다. 프로 게이머로서 받은 돈만 해도 대단했다. 또한 개발팀장이 되면서 연봉은 엄청나게 뛰어 올랐다. 돈은 자신이 관리하지 않아 그 규모를 제대로 알 수는 없었지만 10억 가량일 것이다. 그 정도면 젊은, 20대 중반의 청년에게 과분했으면 과분했지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 컴퓨터가 이상했다. 사이트에 들어서기 전부터 화면이 잠깐 멈췄다가 시작되는 현상이 두 번 정도 있더니 곧 컴퓨터는 먹통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뭐지? 바이러스인가?" 키보드를 두르렸지만 전혀 반응을 하지 않았다. 진성은 어쩔 수 없이 수고스럽게 엄지발가락을 이용해 리부팅 시켰다. 약간 짜증이 났다. 바이러스 자체에 평소 관심이 있지는 않았지만 모처럼 좋은 기분이 반감되는 듯했다. 순간 인터넷에 바이러스를 유포하는 놈들을 다 찾아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스스로 그 생각의 유치함에 웃고 말았다. 컴퓨터는 리부팅이 되었지만 확실히 바이러스였다. OS 로딩 시간이 지나자마자 이상한 글자를 찍더니 곧 먹통이 되고 말았다. "바이러스... 도대체 누가 이런 바이러스를 만들어 인터넷에 뿌리는 거지? 그리고 OS를 만들었으면 좀 제대로 만들었어야지..." 이미 인터넷에 그 바이러스에 대한 보안 패치가 나돌고 있었지만 진성은 자신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보다 오히려 돈만 벌려는 OS 회사에 짜증을 집중했다. 현재 OS 시장은 거의 독점과 비슷했기에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회사에 대한 직접적인 원망이나 그런 것보다는 단지 이 순간, 짜증을 풀기 위한 행동에 불과했다. "내가 만들어도 이것보다는...... 아...." 진성은 별로 생각하지 않고 한 말에 스스로 놀랐다. OS라니. OS는 굉장한,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상품이었다. 진성은 자신이 별 뜻없이 한 말이지만 가상현실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사용된다면 그 시스템에 맞는 OS는 당연히 필요하리라 생각했다. 가상현실이 완전한 사무, 작업 공간이 되려면 그에 적합한 도구를 갖추어야 하고 그런 것이 원활하고 효과적으로 구비되려면 당연히 OS, 운영체제가 필요할 것이다. "아.. 그렇지." 진성은 떠오른 생각에 스스로 흥분했다. 기술 공개를 하면 기술 개발사로 다른 기업보다 앞설 수 있는 기간은 기껏해야 2년에서 3년 정도일 것이다. 그 후에는 다른 거대 기업들의 격전장이 될 게 분명했다. 진성이 생각한 것은 그 때, 로플의 접속기를 완전히 장악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다시 생각해 보니 만약 OS를 로플 그룹에서 개발한다면, 가상현실 시스템에 걸맞는 OS를 개발하고 보급에 성공한다면 하드웨어 뿐 아니라 소프트웨어의 기준을 정할 수 있는 위치에까지 급상승할 것이다. 그것이 성공한다면 초거대 기업들도 로플 그룹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진성은 바이러스로 먹통이 된 컴퓨터에는 전혀 관심도 없이 침대에 누워 떠오른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가능하게 된다면, 로플 그룹은 그 이름에 걸맞게 로플이라는 세계의 하드웨어, 소프트웨어의 기준을 정하는 명실상부한 로플에 관한한 최고의 기업이 될 것이다. -------------------------------------------------------- TGP1의 연재 주기가 느려지고 있습니다. 인정합니다 ㅡ.ㅡ 사실 다른 글로 인해 느려지고 있다기 보다는.... 곧 TGP1은 끝이 날 텐데... 아직 출판이 따라오지 못하는 관계로 연재를 늦추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늦어도 200회 안에는 TGP1은 결말이 날 겁니다. 그래서.. 조금만 참아주시기를~~~~ 재미있다면 추천을~~~ -------------------------------------------------------- TGP1(The Gamer Part 1) [175 회] 로플 그룹 진성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OS에 대해 눈이 번쩍 뜨일 만한 생각을 했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한지는 미지수였다. 게임 개발과 OS 개발은 완전히 다른 분야였다. 로플 그룹 소속 개발자들은 대부분 OS 개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물론 그룹 외에서 인재를 끌어들을 수도 있겠지만 시간이 너무도 부족했다. 길게 잡아도 3년. 3년 내에는 로플에서 경쟁력 있는 OS를 만들어야 했다. 진성은 결국 로플 그룹에서 OS를 만들려고 한다면 자신이 그 일에 직접 뛰어들어야 함을 깨달았다. 자신이 아니면 제대로 로플에서 프로그래밍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물론 제한적이지만 진성 자신이 로플에 접근할 수 있는 도구를 만들어 준다면 가능하겠지만 그래봐야 그 제한된 범위 내에서였다. "내가.... 내가 할 수 있을까?" 컴퓨터를 전공하고 있지만 2학년에서 휴학을 한 자신이 OS라는 전문 분야에 도전할 수 있을까? 만약 진회장이나 조팀장과 같은 전문가에게 이런 제안을 하게 된다면 10중 8, 9는 자신이 OS 개발에 참여해야 한다는 말과 같았다. 이제까지 문명 온라인의 베타 테스팅이나 밀리터리 아트의 개발과는 완전히 달랐다. 게임이 아니라 시스템인 OS의 개발이었다. "휴우......" 생각하기 전에는 아깝지 않았는데 OS의 개발과 만약에 성공한다면 가져올 그 막대한 이익을 떠올리자 안타까웠다. 로플 그룹이 이 일을 하게 된다면, 그래서 성공하게 된다면 단순히 로플 그룹의 쾌거가 아니라 한국이 세계 첨단 산업의 선두에 설 수 있게 되는 것과 같았다. 단숨에 세계 기술의 리더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기술보다는 경제적인 가치가 훨신 더 클 것이다. 이미 부족함이 없는 진성이었지만 회사와 더불어 평소 생각하지 않았던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생각하자 놓칠 수 없다는 마음이 점점 커졌다. 실패하더라도 밑져야 본전이었다. 성공한다면.... 현재의 OS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마이크로조프트를 누르고 로플 그룹이 그 분야의 리더로 우뚝 설 것이다. 게다가 그로 인해 한국의 경제력도 급성장하게 될 것이다. "한 번.. 한 번 해 보자! 해보고 안 되는 것과 미리 겁 먹고 못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니까. 휴우......" 진성은 스스로 결심했다. 이희철 사장은 자신 앞에서 꽤 오랜 시간 동안 발표한 진성을 보고는 물었다. 한 시간이 넘도록 상기된 표정으로 자신에게 힘찬 목소리를 들려준 진성은 땀을 흘렸지만 오히려 생기가 있어 보였다. "네 말은 로플 그룹의 차원에서 OS를 개발하자는 말이냐?" 이사장의 말에 진성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확고한 말이었다. "네, 그렇습니다."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나?" 이사장은 까놓고 말했다. 기업은 이윤을 먹고 사는 동물이다. 이득이 없다면 움직일 수 없는 것이 기업이라는 생물의 오직 한 가지 본능이었다. 진성은 그 말에 여전히 담담하지만 확고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진성의 논리는 간단했다. '할 수 있다' 바로 그것이었다. "없을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혀 경험이 없지만 OS 전문 기업의 경우도 로플 시스템에 대해서는 전혀 경험이 없습니다. 조금 불리하겠지만 그런 특수성을 생각해 보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음..." 이사장은 너무도 확신에 찬 진성의 말에 고민에 잠겼다. 이미 로플의 가상세계로서의 개념을 처음 제기한 사람이 바로 눈앞의 청년임을 알고 있었다. 기술적인 개념 뿐 아니라 확실히 돈이 될 수 있는 경제적 센스도 있는 청년이었기에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하지만 이사장 자신이 OS 개발 경험이 없었기에 더욱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로플의 OS를 로플 그룹에서 개발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OS 시장이 아니라 로플이라는 가상현실에서 표준이 되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로플 그룹이 가지고 있다는 말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이 단순히 회사 차원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나라가 다시 한 번 날개를 펴고 날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이사장은 단순히 로플 그룹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나라의 기회라는 말에 다시 한 번 되뇌일 수밖에 없었다. 보통 천재라는 사람은 어릴 때부터 신동이었고 그것이 오래 이어져 어린 나이에 수학을 달통하고 엄청난 속도로 십대에 박사학위를 딴 사람이라 생각했지만 이사장은 정말 천재는 그보다 거시적으로 한 나라, 또는 세계를 바라보고 그것을 구체적인 생각으로 표현하고 밀어부칠 수 있는 추진력이 있는 사람이라 확신했다. 바로 눈앞의 청년이었다. 처음에는 능력 있는 프로 게이머, 그 다음에는 실력 있는 개발자, 얼마 전에는 새로운 세계를 열려는 선구자, 지금은 회사와 국가를 생각하는 열정적인 애국자의 모습이었다. 이사장은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젊은 청년의 말에 자신의 마음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순간 로플 그룹은 이 청년, 강진성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행운임을 확신했다. "국가라......." "개발하는 방법이라 여러 방법이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강행했으면 좋겠습니다." 생각을 거듭하는 이사장의 모습에 진성은 아예 못을 박았다. 이사장은 평소 보아온 진성의 모습과는 다른 확고한, 어찌 보면 고집스러운 모습에 놀랐다. 그만큼 진성이 보는 로플의 세계가 확실하단 말인가. ".........." "만약 로플 그룹 차원에서 OS 개발을 포기한다면 저 혼자서라도 OS 개발을 시작할 생각입니다." 진성은 다시 한 번 말을 이었다. 로플 그룹의 차원에서 안 된다면 혼자라도 시작할 생각이었다. 단순히 이사장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속으로 이미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런 예는 OS의 역사에서 없지는 않았다. 한 사람이 프로토타입, 초기 모델을 만들면 많은 사람이 달라들어 OS 로서 제대로 모습을 갖추어 가는 것이다. 초강수의 말에 이사장은 다시 한 번 놀라고 말았다. "혼자서?" "비록 힘들지 모르지만,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지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모르되 이미 그 세계를 상상한 사람으로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혼자서, 아니면 뜻 있는 사람들을 모아서라도 OS 개발은 꼭 할 겁니다." 진성의 결심은 확고했다. 진성 혼자서는 안 된다고 하더라도 한 사람이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의 노력까지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은 안 된다 하더라도 진성이라면 가능하리라. 이사장은 정색을 하고 진성에게 물었다. "그렇게까지 생각하나?" "그렇습니다." "그래? 음... 조금 더 생각해 보기로 하지. 워낙 큰 문제니까. 조팀장은 어떻게 생각하나?" 이사장은 잠시 물을 조금 마신 다음 조진철 팀장에게 물었다. 진성이 먼저 조팀장에게 그 얘기를 말했고 그 후에 자신에게로 왔기에 조팀장의 의견은 꼭 들어볼 필요가 있었다. 조팀장의 목소리는 낮게 깔렸지만 그 내용만은 확실했다. "제가 처음 진성에게 먼저 이 로플의 OS에 대해 들었을 때는 너무 무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냉정히 생각해 보니 진성의 말처럼 OS 개발을 미리부터 포기하는 것이 너무나 아깝습니다. 마치 신세계를 발견해 놓고 그곳으로 갈 수 있는 배만 만들어 팔 뿐 정작 신세계의 것들은 누리지 못하는 꼴과 같지 않습니까? 진성의 말대로 로플 그룹 차원에서 OS 개발을 할 수 없다면 진성과 둘이서라도 OS 개발을 시작할 생각입니다." 진성과 같은 의견이자 이사장은 의아했다. 진성은 젊은 시절의 혈기라 해도 조팀장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한국이 자랑하는 시스템 프로그래머이자 로플 그룹의 중추적인 개발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진성의 의견에 동조하다니. "자네까지?" "그 정도로 OS의 개발은 단순히 하나의 프로그램 개발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힘들지만 그만큼 그 가치는 엄청납니다." "휴우.... 알겠네. 조금 더 생각해 보고 가능하면 로플 그룹 관계자 회의를 소집하도록 하지." 이사장은 한숨을 쉬고 말았다. 앞으로 로플 그룹을 이끌, 지탱할 두 사람의 기둥이 같은 목소리를 내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조금 더 다듬어 로플 그룹에 안건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다만, 혼자서라도 개발한다는 말은 뺄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최악의 경우였다. 로플 그룹의 본사에 세미나 실에는 진회장을 비롯해 그룹의 실무진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진회장을 위시해 로플 엔터테인먼트 사장 황태산과 로플 소프트 사장 이희철, 그리고 로플 개발팀장 조진철, 문명 온라인 개발팀장 김성철, 로플 하드 부사장 겸 개발팀장 곽진호, 마지막으로 로플 소프트의 밀리터리 아트 개발팀장 강진성과 기타 관계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늘의 안건은 로플 소프트에서 올라온 제안에 관한 겁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이 자리에서 나온 건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극비를 요하는 것이므로 절대 이곳 밖에서는 언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난번 회의 때 로플 시스템의 기술 공개와 그 계획에 대해서 들었기에 오늘 있을 브리핑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질문은 발표가 끝난 다음에 해 주시기 바랍니다. 강진성 밀리터리 아트 개발팀장?" 이희철 사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좌중의 사람들을 보고 말을 하고는 진성을 쳐다보았다. 진성은 심호흡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세미나실의 앞으로 나갔다. 곧 조명이 어두워지고 컴퓨터와 연결된 프로젝트가 화면을 비추기 시작했다. "지난 회의 때, 로플 시스템이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 또 하나의 세계, 가상현실이라는 말씀을 들으셨습니다. 이제 가상현실을 지금처럼 단순히 온라인 게임, 십대나 이십대의 놀이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마도 다들 알고 계실 겁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릴 내용은 지난 회의와 연결되는 내용이니 염두해 두시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진성은 화면을 바꿨다. "현재 계획된 로플 시스템의 가상현실화에서 궁극적으로 우리 로플 그룹은 로플 시스템 중에서 로플 접속기에 주력하게 될 예정입니다. 거기에 가상현실에서 즐길 수 있는 게임에 대한 시장 선점은 할 수 있겠지요. 물론 그것만 해도 엄청난 가치를 가지고 있음은 틀림이 없습니다. 전 세계 수천만 명 이상이 사용하게 된다면 그 접속기만 해도 대단한 가치를 가지고 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로플이라는 새로운 세계, 새로운 패러다임의 변화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바로 로플 시스템에서 운용할 수 있는 OS, 운영체제의 개발입니다." 그 얘기를 들은 사람들은 놀라 옆 사람과 말을 주고받았다. 충분히 그럴 만한 내용이었다. OS라니. 세계 유수의 소프트웨어 회사들 중에서 2, 3개의 회사만 OS를 공급하고 있었다. 그런데 게임 개발사가, 그것도 아직 세계를 대표하는 기업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기업이 OS를 개발한다니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한 얘기였다. "다들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로플 시스템을 개발한 우리 개발팀은 누구보다도 시스템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기술 공개를 한다고 해도 앞으로 2, 3년 간은 누구도 우리 개발팀을 따라올 수 없을 겁니다. 다만 OS에 대한 개발 경험은 없습니다. 그 문제는 국내외에서 뛰어난 인재들을 모으고 그룹 차원에서 OS 개발팀을 만들고 전폭적으로 지원한다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로플에서의 OS는 보통 컴퓨터의 OS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실제 하드웨어를 제어하는 것이 아니라 로플 내에서의 각 요소를 변화시켜 사용자가 원하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로플 OS의 목표입니다." 진성은 잠시 쉬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이나 로플 OS, 가칭 로스(ROS:Rofl OS) 에 대해 말했다. 그리고는 말을 정리했다. "구체적이고 자세한 사항은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단순히 회사에서 상품으로 개발하는 OS가 아니라 어쩌면 한국을 짊어지고 나갈 중추적인 기술로서 인정해야 할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로플 OS가 완성되고 제대로 다른 기업들보다 완성도를 가진다면 로플로 인한 시장의 주도권은 사실상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표준을 정하는 우리 로플 그룹이 가지게 될 겁니다." 진성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진성의 단언하는 말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 말을 주고받기에 바빴다. 무척이나 가슴 떨리는 말이기도 했지만 그에 비례해서 무척이나 힘든,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몰랐다. 전혀 다른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에 2, 3년은 너무도 짧았다. "이 제안은 현재로서는 단지 제안일 뿐입니다. 지난번의 그 가상현실에 대한 얘기는 현재 계획 단계에 완전히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지만 이 OS와 관련된 것은 제안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로플 소프트의 사장으로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현재 로플 그룹의 분위기는 굉장히 좋습니다. 외부에서나, 내부에서나 발전에 대한 기대 심리가 충분하고 의욕이 있습니다. 그런 분위기와 향후 2, 3년 뒤를 바라볼 때 강팀장의 제안은 몹시도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현재 우리에게 기술이 없고, 힘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없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다른 거대 기업들이 기술 공개가 이루어진다면 빠른 속도로 우리 기술을 따라오게 될 겁니다. OS 전문 기업이 로플 시스템을 파악하는 시간이라면 우리가 OS를 만들 정도의 시간은 되지 않겠습니까? 무리일지도 모르지만 도전이 없다면 성장도 없습니다. 또한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OS 개발 과정은 현 로플 시스템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줄 겁니다." 이희철 사장은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그만큼 진성의 생각은 투자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로플 그룹에서 OS를 만든다면 그것은 단지 로플에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밖으로도 그 힘을 떨칠 수 있을 것이다. 처음 진성의 제안을 들었던 때와는 달리 이희철 사장은 오히려 진성의 생각에서 한 단계 앞선 OS를 생각했다. 단지 로플 시스템에서만 능력을 발휘하는 OS가 아니라 그것을 기반으로 완전한 패러다임 쉬프트, 즉 OS의 이동을 생각했던 것이다. 가전에서부터 핸드폰과 앞으로 개발될 자동차를 통합하는 것까지 포함했다. 그래서 로플 시스템의 접속기는 단순한 게임 접속기가 아니라 개인용 디지털 단말기로 때로는 자동차와 때로는 집안의 가전과 완전히 연결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희철 사장은 아직 거기까지 나갈 때가 아니었기에 잠자코 마음속으로만 간직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로플 소프트의 이희철 사장의 말에 깊이 생각했다. 앞을 보는 안목이 탁월해 문명 온라인을 전 세계적으로 히트시켜 오늘날의 로플 그룹을 만든 사람이 바로 이희철 사장이었기에 절대로 무시 못할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로플 그룹, 서열 2위가 바로 이희철 사장이었다. 생각과는 달리 질문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직 제안이었고 OS라는 것은 별 생각없이 의견을 말할 정도로 간단하지 않았다. 결국 회의를 주재한 이희철 사장이 다음에 다시 논의하자는 말로 끝내고 말았다. 모였던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로플 그룹이 OS를 만들고, 로플이 히트를 하게 되었을 때의 상황이 떠올라 있었다. 굉장히 흥분되는 일이었다. 진회장은 아들처럼 생각하는 진성의 발표에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자신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는 것과 같았다. 개발자였기에 진회장 역시 OS에 대해 조금이지만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룹의 총수로서 진회장은 모험을 무작정 시도할 수 없었다. 진성이 제안을 할 경우에는 검토해야할 제안이었지만 자신이 나서면 그것은 이미 사업의 한 방향으로 정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진회장은 무척이나 늠름해 보이는 진성의 모습에 속으로 또 다른 계획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진성은 로플 그룹 차원에서 참석해 발표했던 회의 이후로 로플은 물론 밀리터리 아트에서도 완전히 손을 떼고 문명 온라인에 매달렸다. 한동안 쉬었기에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현준과 한석은 오랫동안 게임을 했기 때문인지 그 감각이 대단했다. "진성아, 너 이러다 동경에 가서 창피만 당하고 오는 것 아니냐?" 현준은 짐짓 고개를 푹 숙인 진성을 보면서 물었다. 진성을 생각해 주는 듯했지만 표정은 그 반대였다. 진성은 입을 열 수 없었다. 이런 분한 기분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 "나야 요즘 기분이 좋지만, 널 생각하니 마냥 좋아할 수도 없잖아. 휴우... 내가 문명 온라인 게임하고 나서 너한테 다섯 번 연달아 이겨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처음. 하하하하." 좋아할 수 없다는 녀석의 얼굴에 가득한 함박웃음을 본 진성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현준의 말대로 자신이 최선을 다했는데도 내리 5연패를 하고 말았다. 그동안의 공백은 쉽게 무시할 수 없었다. 앞에서 웃어제끼는 현준 녀석을 팔극신권의 절초로 날려버리려는 상상을 했지만 실제로 실행하지는 못했다. "........." 현준은 순간 한기를 느꼈지만 그래도 웃고, 또 웃었다.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다. 기대하지 않았기에 기쁨은 두 배, 아니 열 배, 백 배가 되었다. "다시 한 번 더 하자." 한참 동안이나 숙였던 고개를 든 진성은 현준에게 다시 한 번 말했다. 다섯 번이나 졌지만 처음부터 완전히 밀리다 진 게 아니라 박빙의 승부처에서 판단 미스와 컨트롤 미스로 어이 없이 진 게 세 번이었기에 진성은 나름대로 게임 경험만 많이 쌓은다면 예전의 실력을 되찾을 수도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곧 그 뒤부터는 어처구니 없게 지곤 했다. 현준은 그런 진성을 보면서 웃었다. 그리고는 누가 봐도 얄미울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더? 힘들 텐데...?" 가만히 있던 진성은 오른손을 들어 경력을 살짝 집중해서 허공을 향해 손바닥을 폈다. 그 순간 공중에서 공기가 터지는 것과 같은, 펑하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는 현준을 보며 진성은 나지막하지만 충분히 위협적인 목소리로 길지도 않게 말했다. "....... 말로 할 때, 하자!" "헉! 하.. 하자." 현준은 이제야 상대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았다. 자신은 잘 몰랐지만 보디가드, 경호원 책임자 이준이 평소 자기 같은 사람 10명이 넘벼도 이길 수 없는 사람이라고 진성을 말했기에 진성의 위협적인 행동에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이 조금 전부터 계속 진성을 놀렸다는 사실이 기억이 났다. 하지만 진성은 그 후로도 내리 다섯 번을 져서 현준이 프로팀 연습실과 다른 곳으로 다니면서 불멸의 신화, 10연승을 선전하는데 결정적인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하면 할수록 더 실력이 떨어져 제일 나중에는 진성 스스로 게임을 포기하고 나가버리고 말았다. 자신의 실력에 이제까지 너무 자만했다는 마음도 들었지만 너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임에 화가 났던 것이다. 진성은 그날부터 집에 들어가지 않고 회사의 연습실에서 침식도 잊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이대로 동경에 갔다가는 개인적인 창피보다도 국가적인 망신이 될 수도 있었다. 이름에 걸맞는 실력을 가져야만 했다. 한동안 보지 않던 예전에 정리한 전술서와 전략 노트를 꺼내 처음부터 정독으로 읽기 시작했다. 뭔가 잘 되지 않을 때는 기본으로 돌아가는 게 제일이었다. 로마의 기본 전략에서부터 이미 인터넷에서 유행하고 있는 오더와 자신이 여러 병법서들을 읽고 난 후에 개발했던 전술들을 보고 있으니 급한 마음은 사라지고 그 때의 그 열정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은 적어도 지금의 진성에게는 진리였다. 진성은 손자병법을 비롯한 무경칠서(武經七書)를 탐독하기도 하고 리비우스의 로마사와 그 로마사를 평한 마키아밸리의 로마사 논고 등도 찾아서 읽었다. 그 뿐 아니라 동양 병서 중에 자신이 대략적인 내용을 모아두었던 중국 명나라의 장수 척계광이 지은 왜구의 토벌을 위한 기효신서(紀效新書)와 비슷한 병법들까지 찾아 발췌하면서 읽었다. 아침 식사를 하던 진회장은 현준에게 물었다. 어쩐지 진성이 빠져 한 사람의 자리가 없으니 왠지 허전했다. 요즘 회사에서 연습에 몰두한다고 하지만 너무 과한 것도 오히려 좋지 않았다. 그래도 본인이 그렇게 굳이 하겠다니 말릴 수도 없었다. "진성이는 아직도 회사에서 밤을 새고 있나?" "네, 요전에 저한테 10연패 한 게 그렇게 억울한 모양이에요." 현준은 걱정 반, 웃음 반으로 대답했다. 확실히 요즘 진성의 연습하는 기세는 대단했다. 처음 자신과 함께 문명 온라인 프로 게이머가 될 때 보였던 열정 혹은 그 이상이었다. 어떨 때는 먹는 것도 잊을 정도로 집중했기에 요즘은 진성과 별로 말도 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 현준 네가 가끔 잘 먹고는 있는지 살펴라." "네, 알겠습니다." 식사를 다 한 현준은 어머니에게서 3층의 도시락을 받아들고는 회사, 로플 엔터테인먼트로 출근했다. 진성이 집에 들어오지 않고서부터 매일 진성에게 도시락을 전달하는 것은 당연히 현준의 몫이었다. 매일 화려하게 바뀌는 반찬 덕에 현준과 진회장 역시 아침마다 행복했지만 그래도 진성의 그런 모습은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무리하지 말라고 해라." 현준 어머니의 말에 현준은 웃으며 대답했다. "낮에 들어오면 볼 텐데요." "그래도.." 진성은 점심 시간에는 집으로 돌아와 샤워도 하고 옷도 갈아입고 다시 나갔다. 그 때, 현준 어머니는 가끔 진성에게 쉬면서 하는 게 더 능률이 좋지 않겠냐고 말했지만 진성은 웃기만 할 뿐이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진성의 모습은 대단했다. 눈은 퀭하니 못먹은 사람 같았지만 눈빛만은 살아 있었다. 밤 새 읽고 또 읽은 것을 인공지능을 상대로 게임을 해서 그 내용을 확인한 모양인지 몹시도 지쳐 보였다. 또한 계속 되는 강행군으로 인해 이미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볼살이 야위어 한동안 보지 못한 사람은 정말 진성인지 의심할 정도였다. 또한 힘이 없어서인지 평소 그리 느리지 않았던 걸음걸이가 보는 사람이 힘들 정도로 느릿느릿 바뀌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진성은 거의 프로팀 연습실을 벗어나지 않았다. 가끔 화장실 갈 때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책상이 있는 곳과 연습실 사이를 오갈 뿐이었다. "어제는 어땠냐?" 현준은 한 손에 도시락을 들고는 진성에게로 다가갔다. 진성의 모습은 평소 아침의, 그 피폐한 모습과 다름이 없었다. 현준은 여느 때처럼 전날의 결과에 대해 물었다. 뭔가 변화가 있지는 않을까 생각했던 현준은 진성에게서 평소와 똑같은 대답만 들었다. "....... 전패.." 인공지능에게도 계속 지고 있다는 말에 현준은 답답해서 다시 한 번 더 물었다. 인공지능에게 진다면 프로팀에서 진성이 이길 상대는 아마도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준은 진성이 말한 인공지능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보통 프로라면 2:1이나 3:1까지 가능했다. 문명 온라인의 경우 인공지능이 상당히 훌륭한 편이어서 프로 전용 게임의 경우 인공지능은 쉽게 볼 수 없었다. "아직도냐?" "어쩔 수 없지. 밥은?" 진성의 대답은 담담했다. 그리고 현준의 손을 보며 물었다. 현준은 그런 진성의 모습에 어이가 없는지 도시락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여기 있다. 어머니가 무척이나 걱정하신다." 진성은 현준의 퉁명스러움에 피식 웃고 말았다.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녀석이었다. 또한 현준 어머니에게도 무척이나 죄송했기에 진성은 마음에 담고 있던 말을 이제야 꺼냈다. 사실 어느 정도 완성된 상태이기는 해도 뭔가 제대로 해 보고 싶었고, 게이머 스키피오라는 이름으로 쌓은 것들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은 마음도 가득했기에 완벽을 기했다. "알았다. 당분간만,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다." "뭐? 인공지능을 상대로 전패라며?" 아직 인공지능에게도 제대로 이기지 못하는 상태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비록 여러 전략과 전술을 테스트 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기에 현준은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진성의 대답은 간단한 대신 기대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 기대해라." 현준은 진성의 의미심장한 말에 찔끔했다. 요즘 계속 컴퓨터 인공지능을 상대로 전패라고 했지만 조금 전 진성이 말할 때의 모습은 아주 날카로운 기세가 전해질 정도였다. 열심히는 했지만 지금과 같은, 쉽게 말하자면 독기를 품은 진성은 이제까지 보지 못했다. 현준은 드디어 진성이 다시 부활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한편으로는 무척이나 기뻐해야 할 일이겠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아쉬웠다. 진성이 예전의 그 실력과 감각을 제대로 찾는다면, 당분간 자신이 진성에게 이길 기회는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날카롭고 시기적절한 직관은 여전한데 저렇게 독기까지 품고 있으니, 10연승을 자랑하고 다녔던 현준은 앞으로 진성의 모습을 생각하고는 한숨을 쉬고 말았다. 사실 진성은 5:1에서 6:1까지 인공지능과의 대결을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전패일 수밖에 없는 것은 어느 정도 해볼만하는 생각이 들면 곧바로 인공지능 문명의 수를 늘였던 것이다. 그러니 전패일 수밖에. 그 말의 의미를 모르는 현준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사흘이 더 지나서야 진성의 처절한 연습은 끝이 났다. 스스로 밤 12시가 넘어서 집으로 들어온 진성은 잠을 푹 자고 별다른 일도 없다는 듯, 아침 수련을 하고 다 같이 모이는 식사에 모습을 드러내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지... 진성아!" "진성아, 이제 끝난 거냐?" 진회장, 현준 아버지와 현준은 거의 동시에 진성을 보며 외쳤다. 너무도 놀랐던 것이다. 그 모습에 웃음을 띤 진성은 간단히 대답했다. 간단했지만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듣고 싶어한 말이기도 했다. "......네." "걱정 많이 했다. 끝이 났다니 다행이다." "웬만하면 앞으로 그런 것 하지 말아라. 걱정하는 사람 맘도 생각해야지?" 현준 아버지와 어머니가 차례대로 말했다. 진성을 걱정하는 마음이었다. 특히 현준 어머니는 눈가에 눈물이 맺힐 정도였다. 진성은 몹시 죄송했다. 이번에도 자신만 본 까닭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아주머니." 현준은 넋을 잃고 말았다. 눈동자가 풀어지지는 않았지만 피곤에 지친 얼굴에는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10전 10패, 10연패였다. 얼마전 진성에게 10연승을 거뒀던 현준은 10번을 해서 모두 진성에게 패했다. 게다가 처음에는 박빙의 승부였다가 게임이 진행될수록 다양하면서도 치밀한 진성의 전략에 현준은 완패하고 말았다. 완전한 복수전이었다. 어느 순간에는 마치 진성이 자신 몰래 자신의 게임 화면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예전 WIS(War In Space) 아마추어 세계 대회 우승할 때 봤던 마치 상대방의 움직임을 보는 듯한 직관력이었다. 현준은 기운이 없었지만 오싹함은 느낄 수 있었다. 독기를 품고 달려드는 진성의 모습은 그야말로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그렇지 않아도 문명 온라인에서는 세계 제 1인자, 0순위로 알려진 진성이 저런 열정과 지지 않으려는 오기로 똘똘 뭉친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현준은 피식 웃고 말았다. 어차피 자신은 단체전이었기에 진성과 마주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각국의 내노라 하는 개인전의 일인자들은 아마도 벽을, 그것도 거대한 벽을 느낄 것이다. 지금 그 벽은 하루, 또 하루 더 높고 튼튼해지고 있었다. 그 사람들이 불쌍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자신이 그 독기에 자극을 준 셈이었기에 땀에 절은 진성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 "진성아, 네가 월드 리그에서 우승한다면 그 영광의 절반은 나한테 있다." "..... 뭐? 아.. 알았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진성은 웃으며 대답했다. 현준에게 그렇게 된통 깨지지 않았다면 이리도 피를 말리면서 연습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본다면 현준이야말로 현재의 실력이 있게 된 원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충분히 그렇게 생각하고도 남았다. "그런데... 휴우.... 어떻게 그렇게 단기간에 실력이 이렇게 많이 올라갔냐?" 흐르는 땀을 닦으며 현준은 진성에게 물었다. 게임의 실력이란, 특히 최고 수준의 실력이란 쉽게 올라가기도 힘들지만 쉽게 내려가지도 않았다. 꾸준한 게임 경험과 더불어 컨디션 유지가 필수적이었다. 그런데 진성은 그런 상식을 뛰어넘어버렸다. 현준은 너무도 궁금했기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대답은 엉뚱했다. "그냥 열심히 하는 거지. 내가 이긴 것은 다 운이라니까." "뭐? 운?" 현준은 뚱딴지 같은 대답에 되물었다. "예전에 내가 말했지. 나한테 이기려면 운을 키우라고." 진성의 대답에 현준은 웃고 말았다. 하긴, 상식이 통하는 않는 것이라면 어떻게 실력을 올렸는지 들어봐도 자신에게 적용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진성이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자신은 철저히, 어떨 때는 그게 불만이기도 하지만, 상식이 통하는 사람의 전형이었다. 인정하고 말았다. "운? 하하하... 그래 알았다." "하하하..." "운을 키우려면 밤을 열심히 새야겠군. 배 고프다. 저녁 네가 사라." 하지만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든, 통하는 사람이든 배는 똑같이 고프고 그러면 당연히 먹어야 할 것이다. 현준은 진성에게 퉁명스레 말했다. 진성 역시 그 말에 웃고는 흔쾌히 승낙했다. "오케이. 어디든, 뭘 먹고 싶든 말만 해라." -------------------------------------------------------- 맛있게 드십시오. 주말이라 특별히~~~~~~~ 분위기를 보아하니 곧 게임을 하겠군요^^; 진성이 된통 당했지만... 앞으로는 잘하겠지요. 주말 잘 보내십시오!!! 아, 혹시나 해서... 3권까지 나왔는데 책을 사지 않으신 분들은 ^^ 아시죠? 그게 안 되신다면... 주변의 책방에 압력을...... 제게 평소 사용하시는 사시미와 짱돌을 이용하신다면 100% 효과 볼 수 있을 겁니다!!!!! ^^; 그럼 이만 갑니다... 재미있다면 추천을!! -------------------------------------------------------- TGP1(The Gamer Part 1) [176 회] 로플 그룹 "네? 팬클럽 창단식을 한다구요?" 연습을 하고 있던 진성은 자신을 찾아온 서재필의 말에 놀라 되물었다. 자신에게 일언반구, 말도 없이 팬클럽 창단식을 한다니. 그것도 커다란 실내 경기장을 빌려놓고.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한 진성의 반응에 서재필은 담담하게 말했다. "놀랐겠지만 로플 엔터테인먼트의 첫 번째 사업 중 하나로 기존의 프로 게이머에게 공식적인 팬클럽을 지원하기로 했다. 그 중, 첫 번째로 게이머 스키피오, 진성 네 팬클럽이 생길 것 같다. 물론 온라인에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진성이었고 각 지역마다 오프라인에서의 팬클럽 모임도 없지는 않았지. 이번 기회에 그런 팬클럽들을 하나로 모아 로플 엔터테인먼트와 유기적으로 연결을 해서 앞으로 게임이나 기타 이벤트에도 좋은 결과가 있게 만들면 좋겠지." 로플 엔터테인먼트는 프로 게이머와 관련된 여러 가지 기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에서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일본으로 넘어가 아시안 리그가 시작되기 전에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다 보니 가장 조건이 맞는게 바로 팬클럽이었다. 이제까지 자발적인 참여로 인해 진성의 팬사이트가 운영되고 각 지방에서 팬클럽이 만들어졌지만 이제부터는 로플 엔터테인먼트에서 팬클럽의 운영에 도움도 주고 팬들을 하나로 묶어 다양한 사업을 펼칠 생각이었다. 진성 역시 그런 마케팅은 예전에도 본 적이 있었기에 뭐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자신에게 말도 하지 않고 일을 진행시켰다는 사실에 불만이 가득했다. ".... 그거야.. 그런데 제게는 아무 말씀도 않고..?" "뭐? 현준에게 말 했는데... 현준이 말하지 않았냐?" 진성의 말에 서재필의 대답은 진성으로 하여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현준에게 말했다니.... 그렇다면 현준이 까맣게 잊었던가... 아니면 일부러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 "하하.. 그랬구나. 아무튼 내일 팬클럽 창단식이 있으니까 그렇게 알아라. 평소대로 출근하면 되니까.... 내일 보자." 서재필은 진성의 얼굴을 보고 사태를 짐작했다. 어차피 현준과 진성이 풀어야 할 일이기에 서재필은 간단히 정리해서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성 역시 같이 일어서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네..." "아.... 그거? 내가 너한테 얘기 안했냐?" 침대에 누워 오랜만에 가벼운 책을 읽고 있던 현준은 자신에게로 다가와 다짜고짜 팬클럽 창단에 대해 묻는 진성을 올려다보며 귀찮은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너무도 당당했기에 오히려 화를 내려던 진성 자신이 이상할 정도였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침대에 털썩 앉은 진성이었다. ".........." "내일 특별한 일.. 없지? 어차피 하는 연습이야 잠깐 쉰다고 큰 문제가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진성아, 내일 무대 올라가서 떨지나 마라." 거기에 자신을 걱정해 주는 말을 자랑스레 여기는 현준의 모습에 진성은 한숨을 푹 쉬고 말았다. "휴우..... 내가 너한테 기대할 걸 기대해야지. 앞으로 그런 얘기가 있으면 재깍재깍 말해줘. 그렇지 않아도 무대 올라가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그나저나 보통 팬클럽 창단식 하면 뭘 하는지 내가 알아야 준비를 하던가 말던가 하지......." 진성은 무척이나 걱정이 되었다.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 출시 기념회에 있었던 일 뿐 아니라 그 어떤 곳보다 무대 위라는 곳이 자신에게 잘 맞지 않는다고 느꼈다. 로플 그룹의 회의에서도 별로 떨지 않았던 진성이었지만 팬들 앞에 서면 무척이나 떨리곤 했다. 진성의 마음을 아는지 누워서 책을 보던 현준이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내가 조금 가르쳐 줄까?" "뭐? 네가?" "네 팬클럽 창단식 끝나면 나도 곧 할 예정이거든." 진성이 처음일 뿐이지 현준과 한석 그리고 진규의 팬클럽 창단식도 예정되어 있었다. 뒤에 들어온 나머지 사람들은 월드 리그가 끝난 후에 팬클럽을 결성하기로 계획이 되어 있었다. 진성은 그 말에 현준에게 다시 물었다. "아... 그렇겠구나. 그래, 도대체 뭘 해야 하는데?" "음... 일단 노래 정도는 기본이고... 춤도 추고 장기도 한 가지쯤은 있어야지." 노래와 춤 그리고 장기가 필요하다는 말에 진성은 어쩔 수없이 한숨을 쉬고 말았다. 평소 노래를 잘 듣지 않았기에 더욱 그랬다. 그나마 들었던 것이 그리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노래여서 진성은 앞이 캄캄했다. "노래..... 춤......... 휴우..." "진성 너는 춤이야 적당히 무술을 이용하면 될 것 같은데.. 장기 역시 그쪽으로 밀면 될 테고.. 문제는 노래, 맞지?" 자신을 잘 아는 현준의 말에 진성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침묵은 곧잘 긍정의 의미였고 지금은 당연히 긍정이었다. "........." "평소 잘 부르는 노래 없냐?" 현준의 물음에 진성은 퉁명스레 대답했다. 자신을 잘 아는 사람, 이 세상에서 진성 자신을 제일 잘 아는 사람 한 명만 꼽으라면 당연히 현준일 것이다. ".... 내가 별로 노래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너도 잘 알잖아?" "하긴, 음.. 그럼 내가 좀 골라줄까?" "그래줄래?" "험험.. 친구 사이에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 평소 듣던 노래에서부터 시작해서 최신 가요까지 현준은 컴퓨터를 동원해서 듣고 또 들으며 진성에게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의욕을 갖고 시작한 현준이었지만 곧 진성이 최신의 가요가 가진 리듬이나 멜로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 것은 하루, 이틀에 고쳐질 수가 없는 것이어서 현준은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 평소 네가 그나마 들었던 노래로 가자." 현준은 어쩔 수가 없었다. 평소 들었던 음악이라면 무척이나 익숙할 것이다. "...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그런 노래를 해도 될까?" 진성은 솔직하게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분위기가 무척이나 좋은 그런 곳에서 평소 자신이 그나마 즐겨 들었던 노래를 부르면 어떻게 될까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오히려 경기보다 더 긴장이 되었다. "...... 솔직히 말해 분위기가 다운될 수도 있겠지만 사회자와 팬들 분위기에 따라 다르니까. 그나저나 내일 사회자가 누구야?" 현준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말문을 열었다. 그런 문제는 당일의 객석 분위기와 사회자로 나온 사람이 얼마나 잘 이끌어가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 획일적으로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 할 수는 없었다. 현준의 질문에 진성의 대답은 모른다였다. 오늘 오후, 그것도 늦게 서재필에게 통보를 받았기에 진성은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몰라." "왜 몰라?" 현준은 진성이 모른다고 하자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자신의 팬클럽에 나오는 사회자가 누구인지 자신이 모르면 누가 안단 말인가? 현준은 그 모든 것이 자신이 진성에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임은 생각도 않고 있었다. "건드리지 마라. 원래 네가 잊지 않고 말해 줬다면 내가 미리 다 알아봤지." "하하하...... 자, 노래 연습이나 하자." 진성의 나지막한 말에 사실을 깨달은 현준은 실없이 웃으며 컴퓨터에서 나오는 음악의 볼륨을 최대한으로 높였다. 펜싱 경기장은 모여든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서울 비롯해서 부산, 광주, 대구 할 것 없이 전국에서 모인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꽉 차 있었고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경기장 안은 사람들이 내뿜는 열기로 가득했고 시간이 되자 전체 조명이 꺼짐과 동시에 무대의 중앙에 한 부분에만 조명이 들어왔다. 그로 인해 사람들의 이목이 그곳에 집중되자 키가 작은 한 사람이 조명을 받으며 무대 가운데로 걸어나왔다. 무대로 나온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되자 모인 사람들은 환호하기 시작했다. 가운데로 나온 사람은 손을 들어 진정시킨 다음 경기장 안을 가득 메운 사람들에게 간단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하지만 사람들은 별 다른 말이 없었다. 그 말 다음에 다른 말이 더 나올거라 기대했던 터라 간단히 안녕하냐는 인사에 사람들은 꿀 먹은 벙어리마냥 무대 위의 사람에게서 뭔가 다음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기만 했던 것이다. "........." "이 사람들이....... 팬 미팅 처음 오셨어요?" 모인 사람들을 향해 퉁명스레 던지는 무대 위 남자의 말이었다. 팬 미팅 처음 오냐는 말에 경기장을 메운 사람들은 입을 모아 크게 외쳤다. "아니요." "살살 대답해도 됩니다. 저, 귀 안 먹었어요. 사회자가 처음 나와서 안녕하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아실만한 분들이... 설마 가끔 정신을 잃으시는 분들은 아니겠지요? 자, 다시 해 보도록 하지요. 여러분들..... 안녕하세요?" 사회자가 다시 묻자 사람들은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안녕하세요." "이제야 사람 같이 보이네요. 여러분, 오늘 여기 왜 오셨죠?" 사회자는 모인 사람들을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다시 물었다. "게이머 스키피오의 팬클럽 창단식 때문에요!" "그렇죠. 그럼, 제가 누구인지는 아시나요?" "김재동이요...." 사회자인 김재동은 이제야 사람들이 돌아왔다는 둥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는 잠시 살핀 후, 앞쪽에 있는 사람 중 한 사람을 지목하며 말했다. "정신이 이제야 완전히 돌아왔군요. 자, 지금부터 문명 온라인 프로 게이머, 스키피오 팬클럽 창단식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거기 빨간 장미 들고 계신 분. 뒤로 쳐다보지 마세요. 본인이에요, 본인. 네.. 게이머 스키피오의 본명을 알고 계시나요?" "......." 갑작스런 김재동의 지목에 당황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김재동은 웃으며 농담을 걸었다. 그 말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어허.... 설마 다른 팬클럽에 가야하는데 잘못 온 것은 아닌가요?" "..... 강진성이요." 장미를 들고 있던 사람은 그다지 크지 않는 목소리로 외쳤지만 사람들의 웃음소리에 묻혀버렸다. 그러자 김재동은 관중을 진정시키며 다시 한 번 물었다. "안 들려요. 다시 한 번 크게 말씀해 주세요." "강진성이요." 커다란 목소리로 강진성이라는 이름이 들리자 곧 무대에 설치된 폭죽이 터졌고 김재동이 그 뒤를 이어 낮은 목소리로 진지하게 관중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스키피오 강진성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와!!! 관중의 환호소리와 함께 무대 중앙에서 진성이 올라왔다. 세미 정장 차림에 선글라스를 끼고 나온 터라 평소의 모습이 아니었지만 모인 사람들은 엄청난, 경기장이 떠나갈 듯한 목소리로 환호성을 질러댔다. 김재동이 뭐라고 했지만 순간 들리지 않을 정도였고 어쩔 수 없이 김재동은 손가락을 입에 대고 관중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곧 경기장은 조용해졌다. "오늘은 게이머 스키피오, 강진성의 팬클럽 창단식입니다. 사실 창단식이라고 하기는 그렇고 공식적으로 다 같이 모이는 자리라고 하는게 낫겠지요. 진성씨, 기분이 어떻습니까?" ".... 재동 형도.. 참... 기분이라.. 뭐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문명 온라인 프로 게이머로 데뷔하기 전에 팬 사이트가 있었는데 그 때와는 사뭇 느낌이 다르네요. 여러분들, 이렇게 저를 생각해 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와!와!... 짝짝짝! 관중들은 함성과 동시에 박수로 고개 숙여 인사하는 진성에게 응답했다. "저 역시 팬 클럽이 있기는 한데... 보통 소극장을 빌려서 하지 이렇게 큰 경기장에서 팬 미팅을 하는 것은 처음 봅니다. 이 정도면 콘서트를 해도 될 것 같은데... 여러분, 게이머 스키피오, 강진성의 노래를 듣고 싶지 않습니까?" 김재동은 노골적으로 진성의 광팬들에게 물었다. 그 대답은 들을 필요조차 없었다. 사실 정해진 순서에 진성의 노래는 들어있지 않았다. 아침에 급히 진성이 뒷부분에 있는 노래 순서를 강력하게 주장해 없애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순전히 김재동의 개인적인 요구였다. "예.. 듣고 싶어요." "노래! 노래!" 하지만 이미 모인 진성의 팬들이 발을 구르며 한 목소리로 외치자 어쩔 수 없었다. "재동 형에게 제가 한 방 먹었네요. 어쩔 수 없지요. 사실, 혹시나 이런 상황이 올까봐 준비한 노래가 하나 있는데.... 잘 부르지 못하더라도 잘 봐주세요." 진성은 살짝 옆으로 비켜서는 김재동을 가볍게 흘기고는 마이크를 꼭 쥐었다. "임재범의 고해... 들려드리겠습니다. 험험...." 진성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반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경기장 안의 사람들 분위기는 조용해졌다. "제게있어 그녀는 단 하나의 길임을 용서하소서 제게있어 그녀는 아침이며 제게있어 그녀는 생명임을 용서하소서 제 자리가 아님을 알며, 감히 그녀를 탐함을 용서하시고, 그래도 후회하지 않음을 용서 하소서 이건 제뜻이 아니었으나 오히려 감사함을 용서 하시고 또 용서하소서 당신이 가르친 그 사랑을 그녀 앞에 제가놓게하시고 사람의 절망과 허무는 제게버려 그녀앞엔 아름다움만이 있게 하소서... 어찌합니까 어떻게 할까요 감히 제가 감히 그녀를 사랑합니다 조용히 나 조차 나 조차도 모르게 잊은척 살아 간다는건 살아도 죽은겁니다 세상의 비난도, 미쳐보일 모습도 모두 다 알지만 그게 두렵지만 사랑합니다. 어디에 있나요? 제 얘기 정말 들리시나요? 그럼 피 흘리는 가엾은 제 사랑을 알고 계신가요? 용서해주세요 벌하신다면 저 저 받을께요 허나 허나 그녀만은 제게 그녀 하나만, 허락해 주소서...." 잘 부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조용하고 처음으로 진성이 무대에서 부르는 노래였기에 노래가 끝나자마자 팬들의 함성은 다시 한 번 경기장을 떠나갈 듯했다. 진성은 내심 경쾌한 노래가 아니었기에 분위기가 다운되는 것은 아닐까 싶었지만 팬들의 모습을 보자 다행이라는 생각이 앞섰다. 그 뒤로 다시 김재동이 나와 달구어진 팬들의 분위기를 이어 미리 섭외된 가수들과 스타들을 소개했고 진성은 스타들이 나올 때마다 무대로 나와 같이 말도 주고받는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김재동의 농간인지 아니면 게스트로 나온 스타들의 생각인지 진성은 춤까지 추고 장기자랑까지 해야했다. 춤은 막춤으로, 장기자랑은 540도 공중 회전차기와 고난도 동작을 보여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게이머 스키피오, 강진성의 팬클럽 창단식 겸 미팅은 흡사 콘서트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진성은 아침에 빨리 일어나 습관처럼 운동을 하면서도 전날의 팬미팅을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수천 명이 넘는 팬들 앞에서 마이크를 쥐고 노래도 부르고 나중에는 급기야 잘 추지 못하는 막춤까지 추고 만 기억이 생생했다. 그 순간 호흡이 흩어지고 말았다. "휴우... 수련이 그런 자리보다 100배는 더 낫다. 다시 하라면...." 바람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 말았다. 곧 아침수련을 끝낸 진성은 안으로 들어갔다.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밖으로 나와 수련을 하면 별로 추운지 잘 느끼지 못했지만 안으로 들어가니 훈훈한 따뜻함이 느껴졌다. "진성이구나... 밖에 날씨가 춥지?" 진성이가 들어오는 것을 본 현준 어머니는 미리 준비한 몸에 좋은 인삼을 갈아 우유와 섞은 흰색의 액체가 가득한 컵을 건넸다. 요즘 무리했다는 사실을 안 현준 어머니의 배려였다. 한 컵, 쭈욱 들이킨 진성은 컵을 놓으며 말했다. "몸을 조금 움직이니 그리 춥게 느껴지지 않는걸요." "그래, 네 말이 맞다. 이 집에 사는 나머지 남자들이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지. 배고프겠구나. 조금만 기다려라." 진성의 말에 현준 어머니 역시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한숨 섞인 말을 했다. 요즘 자주 듣는 말이었기에 진성은 그냥 웃고 말았다. "네, 어머니." 간단히 대답하고는 3층 방을 향했다. 평소와 달리 운동을 일찍 끝냈기 때문에 아직 시간이 있었다. 3층으로 올라와 현준의 방을 한 번 쳐다보고는 웃으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진성은 여전히 발가락으로 컴퓨터를 켰다. 그다지 시간이 많지는 않겠지만 쓰지 않으면 고물이 되어버릴 컴퓨터를 그냥 놀리기는 싫었고 지난 번에 OS에 대한 아이디어를 컴퓨터를 사용하다 얻었기에 진성은 컴퓨터 앞에 앉았다. "어떻게 결정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OS에 대한 공부는 시작해야겠지?" 아직 부팅이 끝나지 않은 모니터 앞에서 중얼거렸다. 이미 회사 차원에서 OS 개발을 하지 않는다면 혼자서라도 한다고 선언해 버렸고 자신의 마음 또한 변함이 없었기에 진성은 진지하게 생각했다. 조진철 로플 개발팀장이 같이 한다고 말했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도움이지 주도해 나간다는 말은 아니었다. 진성은 식사 전 짜투리 시간을 이용해 도움이 될 만한 사이트를 찾기 시작했다. "휴우.... 하긴 쉽게 할 수는 없겠지." 포털 사이트를 바꿔가면서 검색을 하고 이름에 뭔가 있을 법한 사이트를 열어봤지만 알맹이는 거의 없는 사이트가 대부분이었다. 가끔 내용이 있기도 했지만 대부분 분석이나 이론적인 것이 대부분이었다. 순간 현재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마이크로조프트를 해킹해서 소스 코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곧 머리에서 지워버리고 말았다. 해보지 않아 단언할 수는 없지만 마이크로조프트가 결코 은행보다 보안에서 앞선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록 앞선다고 해도 거기서 거기일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해킹 자체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진성은 그런 식으로 한다는 말은 OS를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 바꾸는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게다가 로플 OS는 완전히 개념부터가 다르기에 마이크로조프트의 OS 코드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몰랐다. "진성아, 밥 먹으러 가자... 아아하함.. 허어어엄...." 아직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있는 현준의 목소리였다. 진성은 컴퓨터를 그대로 두고는 현준과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현석은 이미 자리에 앉은 상태였다. 진성과 현준이 자리에 앉자 곧 식사가 시작되었다. "진성아, 오늘.. 회의가 있는 것 알고 있지?" 식사를 하던 진회장, 현준 아버지가 고개를 돌려 진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말에 진성은 머리를 굴렸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룹의 총수인 진회장이 알고 있을 회의라면 간단한 의논을 하는 자리는 아닐 것이다. 순간 OS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지만 진성의 입에서는 먼저 현준 아버지에게 되묻는 말이 나와 버렸다. "네? 무슨 회의요?" "네가 지난번에 말했던 것.. 그것 오늘 어느 정도 결정을 본다고 했는데 기억이 나지 않냐?" 예상대로 OS에 대한 얘기였다. 그 후로 검토해 본 뒤에 다시 미팅을 하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었다. 그런데 그게 오늘이라니 금시초문이었다. "아... 그게 오늘이었나요?" "조팀장이 말하지 않았나? 아무튼.. 오늘이다. 어차피 조팀장이 네게 말하겠지만... 아마도 네게 발언 기회가 주어질 거다. 잘 준비해서 말하도록 해라." 진성은 현준 아버지의 말을 듣고 나서야 자신의 기억에 이 회의가 없는 이유가 바로 조팀장 때문임을 알 수 있었다. 로플에서 OS 개발을 검토하고 있다는 것은 중요한 비밀 중의 하나였기에 진성과 현준 아버지도 구체적으로 입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진성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 알겠습니다." 무슨 회의냐고 끈덕지게 묻는 현준을 따돌린 진성은 곧바로 조진철 팀장을 찾아갔다. 자신에게 일언반구 회의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 때문이었다. 평소의 진성이라면 그리 화내지 않았을지도 몰랐지만 현준에게 한 번 당하고 나니 꼭 꼬집어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노크를 한 뒤 들어오라는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팀장실로 들어간 진성은 조팀장의 책상을 보고는 놀라고 말았다. 무슨 책이 그렇게 많이 쌓여 있는지 꽤 넓은 책상의 가장 자리부분은 수북히 쌓인 책으로 인해 앉아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분명히 들어오라는 말을 한 것으로 봐서 팀장실 안에 있는게 분명한데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 때였다. 책 더미 뒤로 까만 머리가 보이더니 조금 후에 쑤욱 머리가 올라왔다. 마치 책 더미에 머리를 얹어 놓은 듯했다. "요즘 할 일이 많아서..... 아,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아직 확실히 결정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좋은 방향으로 결정이 날 듯해서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책에 완전히 둘러싸인 조팀장은 진성을 보더니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말했다. 목소리에는 평소 찾기 힘든 흥분이 배여 있어 그다지 힘들어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오랜 시간 동안 책을 보고 있었는데 눈이 퀭하게 느껴졌다. 진성은 조팀장의 말 중에서 뭔가를 준비한다는 말에 이상함을 느꼈다. 로플 말고 당장 준비하는 것이 또 있는지... 로플이라면 이런 정도의 책을 다시 훑어볼 필요는 없었다. 도대체 무슨 책일까? 너무도 다른 모습과 초췌한 조팀장의 얼굴에 찾아온 이유조차 까먹고 만 진성이었다. "네? 이 많은 책들이요? 그.. 그런데 무슨 준비를 하는지?" "뭐? 무슨 준비라니... 이게 다 로플 OS 때문에 구한 자료들인데... 아, 맞다. 나야 컴퓨터로 보는 것보다 이렇게 종이로 된 책 보는게 더 좋아서 이러고 있지만 진성, 네게는 이 자료들 스캔한 것과 또 다른 자료들을 모아 둔 DVD가 있으니 기대해라... 얼핏 계산해 보니 DVD 30장 정도는 되어 보이겠던데..." 조팀장의 말을 들을수록 진성의 눈은 커지고 말았다. 자신이 말한 로플 OS 때문에 겨우 남은 짜투리 시간에 인터넷 검색이나 할까 말까한 자신과는 달리 조팀장은 이미 당면한 일로 생각하고 벌써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성은 눈앞의 이 모든 책과 자료들이 모두 OS 에 관한 것이라는 조팀장의 말에 벌써부터 질리고 말았다. 또한 미리부터 준비하는 조팀장의 모습에 놀람과 동시에 자신에게 날아올 자료가 DVD 30장이 넘는다는 조팀장의 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예전 가상현실과 관련된 연구를 할 때 받은 것을 다 합쳐도 DVD 10장이 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 때의 데이터는 대부분 가상현실 인터페이스에서 나온 시뮬레이션 데이터였다. 진성은 놀라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DVD 30장?" "그 정도는 봐야지. 아니, 그냥 봐서는 안 되고.... 만약 로플 그룹 차원에서 OS 개발을 결정하게 되면 그 내용 이상을 완전히 이해하고 아마도... 크크... 거의 매일 당분간은 세미나를 해야 할지도 모를 걸..." 단순히 보는 것만도 질릴 내용인데 조팀장은 진성에게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세미나라는 말은 그것을 해야 하는 누구에게나 꺼리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진성은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세미나라는 말이 나가고 말았다. "세미나?" "그래. 세미나." 조팀장은 못을 박았다. 진성은 세미나라는 말에 예전에 얼떨결에 세미나를 하게 된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 때의 그, 잘 알지도 못하는 것을 남들 앞에서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잘 알게 되었던 터라 진성은 세미나라는 말에 몸서리를 치고 말았다. 당연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너.. 설마 이런 정도도 예상하지 못하고 OS 개발하자고 한 것은 아니겠지?" 진성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자 조팀장은 놀란 듯, 말을 이었다. 그 말에 당연히 진성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침묵은 보통 긍정이었고 특히 이 경우에는 확실한 긍정의 의미였다. "........." ".... 발 뺄 생각도 하지 마라. 누가 뭐라고 해도 OS 개발의 핵심은 바로 너니까. 네가 없으면 로플에서의 OS는 꿈도 꾸기 힘들걸. 이론적으로 완벽하게 설계를 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구현할 사람이 있어야지. 내 생각이기는 하지만, 진성 네가 OS에 대해 확실히 개념을 잡고 제대로 알고 있기만 하면 로플 OS 프로젝트의 성공은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범위 내의 목표가 아닐까 싶다." 조팀장은 다시 한 번 자세히 말함과 동시에 못을 박았다. 공치사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진성이 없다면 로플 OS의 개발은 다시 한 번 전면 검토를 해야할지도 몰랐다. 그 정도로 진성의 참여는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진성은 그런 진지하면서도 엄청난 일의 무게에 퉁명스레 말했다. "........ 저는 게이머인데요." "아, 그래. 그 얘기도 할 작정이었다. 진성아, 개발자를 택하든, 게이머를 택하든 그것은 네 자유지만 네가 만약 게이머를 택하게 된다면 로플 OS 프로젝트는 아마도.. 성공하기 힘들 거다. 네가 로플 OS에만 매달려도 성공을 점칠 수 없는 상황인데 게이머와 개발을 동시에 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내 개인적인 바램은 네가 개발자로서 같이 일했으면 하지만... 그것은 네 선택이니까." 조팀장은 기다렸다는 듯, 진성에게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던 얘기를 하고 말았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해도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할 수는 없었다. 문명 온라인 프로 게이머로서,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의 책임 개발자로 이름을 얻은 진성이었지만 사실 모든 일을 한꺼번에 한 것은 아니었다. 게임 하나 개발하는데도 프로 게임 리그를 포기해야할 정도인데 OS를 만든다고 결심을 하게 된다면 아마도 그 개발 기간 동안 게이머로서의 생활을 완전히 포기해야 할 것이다. ".........." 진성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개발일에 대해서 이런저런 일도 많이 하고 개발팀장으로 게임도 시장에 내본 경험이 있지만 아직은 젊은, 어린 수준임을 스스로 자각했다. 자신은 나름대로 진지하게 로플 OS에 대해 제안을 하고 그것의 파급효과에 대해서 발표를 했지만 정작 그 개발이라는 것이 계획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고급 인력이 상당수 투입되어야 가능한 것이었다. 열매만 생각했지 그 열매를 맺기 위해 필요한 고통에는 둔감했던 자신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진성에게 조팀장은 그 심정을 안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는 뭔가 잊은 것이 생각났다는 듯, 진성에게 급히 말했다. "아, 또 까먹을 뻔했다. 한 시간 정도 후에 회의가 있을 테니까 나랑 같이 가자." 그 말을 들은 진성은 아침 식사 때 현준 아버지, 진회장과의 대화와 자신이 조팀장을 만나러 온 이유가 머리에 떠올랐다. ".......... 저... 혹시 그 때 제가 발언해야 할 시간이 있나요?" "음..... 맞다. 어라.. 그런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내가 예전에 말 했던가?" 조팀장은 진성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히 말하지 않은 것 같은데 도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진성은 그런 조팀장의 모습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 낮게 중얼거렸다. "........ 조팀장님!" "이크... 아, 맞다. 그 회의 전에 로플 개발팀 미팅이 있는 걸 있었네. 요즘 기억이 오락가락 한단 말이야. 이 근처에서 잠깐만 기다려라. 금방 올 테니까. 알겠지?" 조팀장은 진성의 말에 위험을 느꼈는지 아무 책이나 몇 권 주섬주섬 챙겨서는 곧바로 사무실을 나가며 진성에게 말했다. 진성은 당연히.. 할 말이 없었다. "........" =========================================================================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제가 쓰는 TGP1의 인터넷 연재가 너무 빠르고 현재 TGP1의 마무리 단계에 와 있기 때문에 잠시 인터넷 연재를 중단해 달라는 것입니다. 아실 분은 아시겠지만 책이 팔리는 것과 인터넷 연재에는 무시못할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또한 인터넷에서 완결이 되는 것과 아닌 것에도 관계가 있지요. 판타지계를 주름잡을 명작이라면... 그런 것에 상관이 없겠지만....... 저 역시 그 점에 있어서는 부인할 수가 없어 출판사의 말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당분간 TGP1의 연재를 중단해야할 것 같습니다. TGP1을 좋아해 주시고, 기다려주시는 인터넷 독자분들께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이번 주중(대략 목요일 정도..)에 4권 분량의 원고 수정을 완료함과 동시에 삭제할 예정입니다. 출판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다면 연재 재개해서 꼭 완결을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 나름대로 그 동안 TGP2의 비축분을 마련해 놓을 생각이어서.... 나중에 놀랄만한 광참을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일주일이 넘도록 연중^^ 이었다가 이렇게 한편 올리며 이런 말을 하게 되어 그렇게 마음이 좋지 않네요.... ㅡ.ㅡ 나름대로 이런 공지를 올리기 위해 오늘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글을 썼습니다.... 즐겁게 보시고... 다음 파트인 아시안 리그와 월드 리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라 믿습니다.... ^^) ============================================================================== TGP1(The Gamer Part 1) [177 회] 아시안 리그 =============================================================================== 너무 오랜만이네요.. ^^; 오늘 TGP1 5권이 나왔습니다. 곧 배본이 되겠지요. 오랫만이라.. 인사를 드릴 겸, 책이 나왔다는 소식도 알릴겸 글을 올립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해야 하는데.. 솔직히 기다리시는 분들께는 죄송하네요. 곧 6권이 나오면 아마도 7권 연재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왕 기다리신 것, 조금만 더.. 퍽퍽 ㅡ.ㅡ TGP1 완결은 7권입니다.. ^^; =============================================================================== 아시안 리그가 열릴 동경으로 가기 며칠 전, 로플 소프트는 발칵 뒤집혔다. "그게 정말인가?" "네, 현재 중국과 미국에서 확인되었습니다." 로플 소프트의 사장이자 예전 자소 소프트일 당시 문명 온라인의 개발팀장을 맡은 이희철은 중국과 미국에서 문명 온라인 게임기에 대한 해킹이 발생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마추어 버전이 아니라 프로 버전을 내장한 문명 온라인 게임기는 철저한 관리와 게임기 내부에 들어가는 보안 프로그램을 자주 바꾸어 해킹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온지 시간이 지났지만 기본적으로 경기장에서는 해킹이 불가능했다. 그런데 중국과 미국에서 들어온 소식에 따르면 사전에 문명 온라인 게임기 내부에 무선 통신이 가능한 소형 칩을 장착해 그것으로 게임 도중에 해킹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이 사실은 대단히 중요했다. 지금까지 프로 팀에 배포된 문명 온라인 게임기는 해킹될 수 있어도 실제 경기장에서 사용되는 게임기는 사전에 철저한 프로그램 검사가 이루어져 행킹이 힘들었다. 소식이 정말 사실이라면 게임 도중에 해킹을 하기 때문에 방법이 없었다. 아니, 단 한 가지. 게임기를 완전히 분해한 뒤에 다시 조립하면 되지만 많은 시간이 걸릴 게 분명했고 그런 일을 할 사람은 로플 하드에만 존재했기에 완전한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미 일정이 정해진 각 대륙별 리그를 취소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세 명씩 각 대륙 리그에 보내도록 하세. 제일 좋은 방법은 우리가 확실히 그런 해킹을 방지하는 것일세." "그게 제일 좋은 방법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다른 프로팀에서 찬성할지는 모르겠습니다." 김성철 문명 온라인 개발팀장은 한 가지를 언급했다. "무슨 말인가?" "로플 그룹 산하에 로플 엔터테인먼트가 있어 회사가 다르지만 다른 프로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손을 대면 로플 프로팀에게 조금 더 유리하게 조정하지 않을까 생각할 게 뻔합니다." 김팀장의 지적은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대회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로플 소프트의 사람을 보내 게임기를 손보게 하는 것도 문제가 될게 뻔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편이었다. "차라리 각 대륙 리그 운영 위원회에게 들어온 소식에 대한 자세한 분석과 그 대처 방안을 서면으로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물론 대회가 끝이 나면 완전히 전량 거둬들여서 검사를 해야겠지요." 이희철 사장은 김팀장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너무도 없었다. "그렇게 하기로 하지. 자세한 것은 김팀장이 알아서 하도록 하게. 시간이 없으니까. 먼저 실행하고 나중에 보고하도록 하게나." 며칠 밖에 시간이 남지 않아 바쁠 게 뻔한 상황을 알고 있던 이희철 사장은 나중에 보고하라는 배려를 했다. 자신이 개발팀장에 있었기에 그 고충을 잘 알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사장님." "그 사장님이라는 소리는 그다지 듣기 좋지 않군." 일단 급한 상황에 대한 처리 방법이 결정이 나자 이희철 사장은 마음 고생이 심할 게 뻔한 김팀장에게 농을 걸었다. 거기에 현재는 그룹의 회장과 로플 하드의 부사장인 진민수와 곽진호가 호형호제하는 것이 무척이나 부러웠기에 해 본 말이기도 했다. "그러면 뭐라고 불러 드릴까요? 사.장.님!" 하지만 김팀장은 형님이라고 했다가는 도매급으로 노년으로 분류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직은 젊게 살고 싶고, 젊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이 사람이... 음.. 그냥 둘이 있을 때는 형님이라고 부르게." "네? 연세가 지극하신 분께 그럴 수야 없지요. 사장님!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김팀장은 웃으며 사장실 밖으로 나갔다. 농을 거는 이희철 사장도, 농을 농으로 받는 김팀장도 서로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김팀장은 앞으로 20년 정도 지나면 그 때는 형님으로 부르리라 마음 먹고 있다는 점만 이희철 사장이 모르고 있었다. 해킹에 대한 소식은 빠르게 프로팀들에게도 전해졌고 당연히 로플 엔터테인먼트의 문명 온라인 프로팀 선수들과 스텝들도 곧 정보를 입수했다. 급한 상황임을 알았지만 프로팀이 어떻게 해 볼 건덕지가 없었기에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해킹이 가능한 거냐?" 현준은 농담조로 진성에게 물었지만 곧 자소 소프트가 어려웠고 아버지가 검찰에서 고생할 때가 떠올랐다. 진성에게 완벽한 해킹 기술이 없다면 지금의 로플이 있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 때 그렇게 고생해서 엄청난 일을 해 낸 진성에게 누구도 수고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은 너무나 고맙고 진성이 자랑스러워 아플 정도로 등을 쳐줬지만 진성의 입장에서 보면 섭섭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해킹? 가능하지. 세상에는 해킹 안 되는 시스템은 없으니까." 쳐다보지도 않고 아직도 열심히 전략 노트를 읽는 진성의 말에 현준은 소름이 돋았다. 정말 진성이면 세상 어디든 인터넷이나 전화로 연결만 되어 있다면 뚫고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지난 번의 그 일이 있고 나서도 아무런 일이 생기지 않은 것을 보면 조금의 흔적도 남기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모양이었다. 같은 과라 그런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는 현준은 도대체 언제 그런 실력을 키웠는지 짐작도 못했다. 진성이 만약 화가 나서 미국 국방성의 네트워크를 뚫고 들어가 핵무기 발사 버튼을 작동시킨다면... 영화나 책에서 얼핏 대통령이 직접 명령을 내리고 몇 단계의 보안 절차를 거쳐야지만 가능하다는 말을 들은 듯하지만 진성이라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그 생각까지 이르자, 이 사실을 세상 모든 사람, 아니 정치하는 사람들이 안다면 진성을 암살시키거나 진성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허무맹랑한 생각이지만 만약 후자라면... 더 좋은 세상이 오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적어도 진성이라면. "왜 그렇게 웃어? 뭐 좋은 일이냐?" 물어 놓고 배시시 웃기만 하는 현준의 모습에 고개를 든 진성이 물었다. "아.. 아니야. 조금 더 좋은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지금 한 판 할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현준의 모습에 진성은 읽던 전략 노트를 덥고는 말했다. 지금까지 17연승을 기록하고 있어 3승만 더 보태면 현준에게, 그것도 대회 직전의 20연승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진성은 아직도 10연패를 기억하고 있었다. "아.. 배가 아프네. 화장실 좀...." 진성을 계속 피하던 현준은 잽싸게 일어나 문으로 다가가면서 손을 배 위에 올리고 말했다. 배가 아픈 사람이 저렇게 빨리 뛰어나갈 수 있을까. 뭐라고 하려던 진성은 17연패에 빠진 현준의 쓰린 속을 생각하고는 피식 웃고 말았다. 밖으로 나온 현준은 화장실은 가지 않고 복도 끝에 만든 휴게실로 들어갔다. 안에는 잠시 담배를 피러 나온 범현과 현호가 커피를 다 먹은 일회용 컵에 재를 털며 앉아 있었다. "뭐하냐? 연습 다했냐?" 갑자기 나타나 신경질을 내는 현준의 모습에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멍해지고 말았다. 찡그린 얼굴에 눈빛마저 사납게 느껴지는 현준의 모습에 순간 긴장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러다 범현이 일어나 자판기에서 제일 비싼 망고 주스 캔을 뽑아 따서는 현준에게 주면서 말했다. "진성이 형이 게임하자고 했죠?" "... 네가 뭘 좀 아는구나." 한순간 봄볕에 눈녹듯 살얼음 같던 긴장은 녹아 없어졌다. 현호는 아직도 무슨 일인지 감을 잡지 못했지만 이런 면에는 범현이 전문가였다. 요즘 진성과 만나면 힘이 없고 어떨 때는 괜한 짜증을 부리는 현준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본 관찰의 승리였다. 한 모금 길게 들이킨 현준은 범현에게 말했다. "범현아, 지금 나와 게임 한 판 하자." "네?" 조금 전까지 현호와 지겹도록, 입에 쥐나도록 게임을 하고 온 범현은 기겁을 했다. 피곤하기도 하지만 지금 현준과 게임을 하면 아마도... 며칠은 갈 정도로 충격을 받을 게 뻔했다. 그렇지 않아도 격차가 심한 실력인데 최선을 다하는 현준과... 붙으라면.... 범현은 순간 이런 현준을 17연패로 몰아넣은 진성의 실력에 혀를 내둘렀다. 그냥 있다가는 꼼짝도 못하고 게임하러 끌려갈 판인 범현은 아직도 옆에서 무슨 영문인지 잘 모른다는 기색이 역력한 현호를 보고는 내심 사악하게 웃었다. "현준 형, 저보다는 조금 더 게임을 잘하는 현호가 낫지 않겠어요?" "뭐? 음.. 맞다. 그렇겠다." "네?" 현호는 이제야 범현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았지만 엎지른 물이었다. 순간 범현을 노려보았지만 눈치 빠른 범현은 이미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행동을 본 현준은 망고 쥬스를 다 마시고 캔 전용 쓰레기통에 원샷으로 던져 넣고 일어서며 말했다. "둘 다 따라와." 현호와 범현의 얼굴은 순간 현준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일그러졌다가 펴졌다. 이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일본으로 떠나기 전 공식적인 행사가 여러 개 있었지만 그 중 선수들이 가장 부담을 느끼는 것은 단 하나, 방송 출연이었다. 그냥 일회성 출연이라면 그 시간만 긴장해서 충실하면 되지만 이번에 무슨 특집으로 한 프로팀을 정해 아시안 리그 떠나기 전부터 밀착 취재를 시작해 일본을 거쳐 나중에 월드 리그까지 따라다니는 촬영이라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로플 그룹으로서는 돈 안 드는 광고를 해 주겠다는데 반대할 이유도 없었고 선수들 역시 단순히 게임만 하는 것이 아닌 엔터테이너로 계약한 것과 마찬가지였기에 어쩔 수 없었다. 방송국에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한국 최고의 프로팀 로플 엔터테인먼트 프로팀을 고집했고 결정은 선수들의 의견과는 상관없었다. "여기를 보세요. 지금 심정이 어떠세요? 이제 내일이면 일본으로 떠나는데?" 일본으로 떠나기 하루 전이지만 무슨 시차가 몇 시간이나 나는 것도 아니고 도착해서 바로 게임을 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로플 프로팀 선수들 모두 연습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한석은 졸린 눈으로 연습실에서 나오다 예쁘장하게 생긴 미녀 리포터 강수정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아.. 조금 피곤한 것 빼고는 괜찮아요." "컨디션은 어떤가요?" "좋아요. 피곤한 것만 빼 놓고요." "연습이 너무 많은 것 아닌가요?" "아니오. 평소에는 이것보다 더 심해요." 한석은 강수정의 공세에 졸음이 싹 달아났다. 그래서인지 굉장히 빠른 걸음으로 휴게실이 있는 곳으로 냅다 달아났다. 방송국에서 나온 사람들은 절대 휴게실과 연습실 그리고 숙소에는 들어가지 않기로 약속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곤두서 있을 선수들을 자극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숙소는 첫 날 잠깐 촬영을 했고 휴게실과 연습실 역시 며칠을 두고 촬영했기에 충분했다. 강수정은 프로팀 선수들 대부분을 인터뷰하고 개인적으로도 말하는데 성공했지만 오직 한 사람, 스키피오로 유명한 강진성만은 말도 제대로 못해 봤다. 얼핏 무술의 달인이라는 소리는 들었지만 그렇게 쉽게 빠져 나가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카메라 기자와 함께 숨어 있다 나타날 요량이라면 아예 다가오지도 않았다. 정말 귀신같은 감각을 지녔는지 아니면 이제까지 운이 좋았는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강수정으로서는 너무 아쉬웠다. 물론 선수들을 돌아가면서 간단히 한 인터뷰 내용은 있지만 평상시의 모습 그대로를 담고 싶었던 강수정으로서는 아쉬운 대목이었다. "아.. 현준씨." "찍지 마세요. 피곤해요." "아, 그게 아니라 진성씨 어디 있는지 아세요." "진성이... 아까 나갔는데요. 아마 숙소로 간 모양인데.." 강수정은 또 허탕을 쳤음을 직감했다. 언제 빠져나갔는지 모르지만 정말 귀신같았다. 절대 놓치지 않으리라. 앞으로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기에 기회를 노리면 언젠가는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진성과 현준은 일본이 세 번째였다. 첫 번째는 밀리터리 아트 싱글 버전을 동경 게임쇼에 소개하기 위해 테스터로 왔었고 두 번째는 메이저 리그에 참가하기 위해 왔었다. 그러니 이번이 세 번째인 셈이었다. 진성은 공항에 내리자마자 예전 현준이 당했던 그 소란을 생각해서 계속 히죽 웃었다. 그 모습을 본 현준은 자신도 그 생각이 나는지 웃으며 말했다. "진성아, 그 때 기억나지? 바지도 막 찢어지고... 일본 팬들... 장난 아니잖아." "맞다. 그 때..." "아, 기억이 난다. 그 때, 내 친구는 나를 버려두고 혼자 살려고 도망갔었지.. 아마." "뭐 그런 옛 일을 다 기억하냐? 그나저나 오늘은 잘 나갈 수 있을까?" 진성은 은은히 들려오는 함성 소리에 걱정이 되어 말했다. 올 때 보니까 자신들 뿐 아니라 비슷한 시간에 다른 팀들도 온 것 같았는데... 이 정도면 아마 수천 명의 팬들로 공항은 북새통이 되어 있을 것이다. 진성과 현준 그리고 비슷한 경험을 한 진규는 걱정스런 얼굴이었지만 나머지 선수들은 오히려 기대에 차 있었다. 그 중에서도 범현은 입국 수속을 밟을 때도 제일 앞에 서 있을 정도로 기분이 좋은 듯했다. 별 다른 일 없이 호텔에 도착했다. 몇 대의 차를 통해 숙소로 이동한 로플 프로팀은 각자 자기 짐을 들고는 미리 예약해 둔 방으로 찾아 들어갔다. 진성은 평소 말이 없던 현호와 방을 쓰고 현준은 범현, 한석은 진규와 같은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 피곤하지는 않지?" 바퀴가 달린 가방을 끌어다 침대 옆에 둔 진성은 푹신한 의자에 걸터 앉으며 말했다. 침대는 아주 깨끗했고 아이비 색 시트는 깔끔한 느낌을 더했다. 원목에 붉은 천으로 마무리한 의자와 탁자는 고급스러웠다. 보통 일본식 호텔에서 이런 장식처럼 화려하지 않지만 아마도 외국인이 많은지라 그에 맞게 실내장식을 한 모양이었다. "비행기도 얼마 타지 않았는데요.." 현호는 가방을 펼쳐 놓고 옷을 꺼내 정리하며 말했다. 로플 프로팀 가운데 진성과 더불어 말이 적기로 선두를 달리는 현호는 의외로 아주 깔끔했다. 처음 보면 누구나 흠칫할 만한 날카로운 눈과 냉냉한 분위기에 꺼려기도 하지만 친해지는데 시간이 걸려서 그렇지 일단 친해지면 상당히 세심한 구석도 많았다. 하긴, 친해지기 힘든 이유에 오른팔의 상처 자국와 왼팔의 문신도 포함되어 있기는 했다. 진성은 현호에게서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동질감을 느끼고 했다. 한참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현호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혼해 혼자 살았던 시간이 꽤 많았다. 이혼한 직후 아버지 집으로 가서 살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재혼을 했고 그 후로는 적응을 잘 하지 못하다 1년도 채 못 되어 집을 나오고 말았고 어머니 역시 곧 재혼할 예정이라 현호는 아버지에게 지원을 받기는 했지만 혼자서 오피스텔에 살며 고등학교를 졸업했던 것이다. 현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문명 온라인에 관해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최고수인 스키피오 강진성, 엄청난 연봉과 계약금 그리고 하늘 끝까지 치솟은 인기... 연예인과 호형호제하는 게이머... 여러 가지로 뉴스를 만드는 모습은 정작 강진성이 고아라는 사실은 덮어 버려 현호는 처음 현준을 통해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반신반의했다. 현호는 자신보다 더 비참하고 어려운 사람들도 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자신을 무너뜨리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은연중 배여나오고 혼자서는 절제하기 힘들어 나쁜 짓도 했던 터라 무의식중에 열등의식이 모든 말과 행동에 깔려 있었다. 어떨 때는 지나침으로, 어떨 때는 소심함으로 주위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열등의식... 다행히 범현이라는 좋은 친구를 만나 자소 소프트, 지금의 로플에 정착하게 되었지만 그 열등의식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활달하게 가족 간의 모습이 너무도 보기 좋은 범현의 당당한 활달함은 현호에게 있어 도저히 가지기 힘든 것이기도 했다. 진성이 고아이며 친척 하나도 없이, 친구집에 얹혀 산다는 말을 들은 현호는 평소 진성의 모습을 더욱 유심히 살폈고 꽤 긴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진성에게로 다가가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현호는 이런 좋은 환경, 돈을 받는 프로라서가 아니라 이런 좋은 친구와 이해해 주는 선배들이 있는 이런 환경에서 자신 속에 독버섯처럼 자라나는 이 열등의식을 없애고 싶었고 그래서 진성에게 말했던 것이다. 그 때, 진성은 현호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얼마나 힘들었고 그 때 어떻게 일어설 수 있었는지에 대해 얘기했다. 그리고 무술의 스승인 유조를 만난 것과 그 분의 마지막을 지켜드린 시간들에 대해 담담하게 말했다. 한참을 이야기하자 현호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진성에게 아버지의 유언과 같은 말과... 유조가 유언을 남긴 것만도 감사한다며 웃는 진성의 환한 모습에 현호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고, 많은 것을 누렸는지 깨달았고 너무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비록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혼해서 따로 살고 계시지만 두 분 다 살아계시고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현호는 자신이 적어도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고 있는 진성 선배보다는 훨씬 행운이라 확신했다. 그 후, 현호는 용기를 내어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났고 배다른 동생들도 기쁘게 볼 수 있었다. 현호는 자신의 마음만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마치 마법처럼 세상이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 "진성이 형, 고마워요." 현호는 변치 않고 최선을 다하고, 항상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진성을 볼 때마다 너무도 고마웠다. 프로 게이머로 성공한 것보다 잃었다고 생각한 것들을 되찾을 수 있었다는 것이 더 소중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자신을 따뜻하게 지켜봐 준 친구들과 선배들이 있었고 그 중앙에 우뚝 진성 선배가 서 있었다. "뭘?" 진성은 갑자기 진지하게 말하는 현호의 목소리에 밖을 쳐다보다 고개를 돌려 되물었다. "아니오. 그냥 다요..." "뭐? 싱겁긴..." 진성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현호는 그런 진성의 뒷모습을 보고는 다시 가방에 눈을 돌렸다. 현호는 자신의 얼굴,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 사실은 전혀 알지도 못한채 가벼운 마음으로 옷을 정리했다. "진성 형, 이번 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면 저희 가족들과 식사 한 번 같이 하실래요?" 현호는 약간 머뭇거렸지만 말을 꺼내자 의외로 쉽게 말할 수 있었다. "가족들?" 진성은 현호의 가족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혼했고 재혼한 상태의 부모라고 알고 있었는데 자신과 함께 식사를 하자니 무슨 말일까? "네, 많이 좋아졌거든요. 제가 어머니와 아버지께 진성 형 얘기를 했더니 꼭 한 번 식사 초대를 하시겠다고... 그리고 제 동생들도 진성이 형 꼭 보고 싶다고 해서... 그래서 형 사정만 되면..." "나야 좋지. 내 스케쥴은 너도 아니까 빈 시간에 잘 맞춰봐." 진성은 기분이 아주 좋았다. 정상적인 가정은 아니지만 그게 중요한가? 그것보다는 지금 얼마나 가족으로 서로 느끼고 사랑하는가가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 진성은 무조건 찬성이었다. "알겠어요. 고마워요, 진성이 형." "흠흠... 그런 얘기는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때 해라." 진성은 짐짓 무뚝뚝하게 말했고 현호는 갑작스런 변화에 놀랐다. "예?" "아니다. 농담이다, 농담. 하하." "하하..." 진성과 현호는 서로를 바라보며 속이 후련하도록 웃었다. "진성아, 손님 오셨다." 현준이 문을 벌컥 열며 들어왔다. 이미 편한 차림인 츄리닝으로 갈아입은 현준의 모습이 보였다. "누구? 아.. 데카츠 어르신!" 이제야 옷을 갈아입은 진성은 문밖에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고 곧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유맹의 회원이자 거합도의 달인 요시히로 데카츠였다. "잘 있었나?" 유창한 한국말이었다. 데카츠는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오면서 말했다. "어..어쩐 일로?" 진성은 안으로 들어와 호텔 방 이곳 저곳을 둘러보는 데카츠의 모습에 나지막하게 물었다. 직접 데카츠가 찾아올 정도면 간단한 일은 아니리라 생각해서였다. "시간 조금 내 줄 수 있겠나?" 예상대로 데카츠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무슨 일이신지.." "솔직하게 말하겠네. 예전에 자네도 본 분이지. 자네가 부르는 그 무명검법을 경험하신 그 분, 기억하고 있겠지?" "아...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진성은 예전 동경에 왔을 때, 데카츠와 같이 무명검법에 대해 조금이나마 실마리라도 찾기 위해 그곳까지 찾아갔던 기억을 떠올렸다. "어르신께서 그리 오래 살지 못할 듯 싶네..." "네?" 진성은 너무나 놀랐다. 사람이란 본래 나이가 들면 당연히 가야할 곳이 있지만 그렇게 정정하고, 축지법까지 익히신 분이 갑자기 이렇게 건강이 악화될 수 있을까 의문이 갈 정도였다. 진성의 목소리에는 놀람과 의아함이 섞여 있었다. "그 어르신께서... 자네의 축지법을 보고 싶어하시네. 시간 좀 내줄 수 있겠나?" ".. 알겠습니다." 데카츠의 말에 진성은 곧 대답했다. 자신이 가진 축지법은 그 어르신에게서 나온 것이고 그 때에도 꼭 다시 찾아와서 보여 드린다고 말했었다. 그것은 엄연한 약속이었고 이제, 지켜야만 한다. 거기에 아직 게임은 며칠 시간이 있기에 충분히 시간은 있어 다행이었다. 하지만 팀이 다같이 행동하는데 자신만 빠진다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같이 가자." 뒤로 돌아보니 서재필이 서 있었다. "약속은 지켜야지. 빨리 준비해라. 데카츠 어르신,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말을 듣고서야 진성은 그 때, 서재필이 같이 있었음을 떠올렸다. 데카츠가 고개를 살며시 숙이자 서재필 역시 고개를 숙이고는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에 진성은 츄리닝을 벗고 양복으로 갈아 입었다. "먼저 밖에 나가 있을 테니 빨리 오게." "네, 어르신." TGP1(The Gamer Part 1) [178 회] 타메오 다케시 진성은 데카츠, 서재필과 함께 예전에 가봤던 그 백발 노인의 집으로 향했다. 차에서 내려 천천히 등산길을 올라가는데 나이가 든 데카츠보다 서재필이 조금 더 힘들어 할 만큼 세 사람의 걸음은 빨랐다. 한참을 올라가다 서재필이 천천히 가자며 진성에게 눈치를 줄 정도여서 힘들었던 서재필의 등은 땀으로 가득했다. 위로 올라가는 등산길 중간에서 빠진 길로 한참을 걸어간 세 사람은 변함이 없는 비탈진 기슭에 지어진 집을 보았고 들었던 이야기와는 달리 바로 그 백발 노인이 미리 밖에 나와 기다린 모양인지 세 사람을 보자 반가워 하며 맞아 주었다. "데카츠 어르신?" 그리 오래 살지 못한다는 말에 놀라 마음을 졸이며 올라온 진성과 서재필은 겉으로 보기에는 지난 번과 다른 점을 찾을 수 없는 백발 노인의 모습에 옆에 있던 데카츠를 쳐다보았다. 데카츠 역시 백발 노인의 정정한 모습에 놀란 눈치였다. "어르신?" 데카츠는 앞으로 나서며 백발 노인을 불렀다. "어서들 오게. 자,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아는지 모르는지, 백발 노인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먼저 돌아서서 집 안으로 들어갔고 세 사람은 멍하게 서로를 쳐다보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집 안은 그리 달라진 게 없는 듯했다. 안으로 들어가면 이 집이 비탈진 언덕에 지어져 얼마나 보기에 불안한지 알 수가 없는 점은 마찬가지였다. 백발 노인은 준비한 차를 정갈하게 내어 왔고 세 사람은 자리에 앉아 쌉싸름한 차의 끝맛과 여운이 남는 향기에 흠뻑 젖을 수 있었다. "어르신..." 데카츠는 분명 너무도 힘들어 하는 노인의 모습을 보았고 의사의 진단 뿐 아니라 백발 노인 본인이 남은 시간에 대해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 지금 보니 정정한 게 앞으로 십 년은 더 살 수 있을 정도였다. "음.. 아마도 평생을 수련에 매진해서 그런지 얼마 남지 않았지만 아직도 이렇게 힘이 있다네. 아주 신기한 일이지. 차 맛이 어떤가?" 백발 노인은 진성을 향해 물었고 진성은 은은한 노인의 눈빛을 그대로 받으며 대답했다. "아주 좋습니다. 특히, 입안에 감도는 향이 너무 좋습니다." "그래? 다행이군. 내가 직접 말린 거라네. 아마도, 일본에서는 나를 제외하고는 이 나무의 잎으로 차를 만들지 않을 걸세. 허허허.." 백발 노인은 진성의 말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는지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을 드러냈다. 서재필과 데카츠 역시 그 미소에 기분이 좋아졌다. "혼자 계시니 적적하지 않으십니까? 어르신 정도면... 제자를 받으셔도 되었을 텐데요." 가만히 있던 서재필이 조심스레 백발 노인에게 물었다. 아니, 물었다기보다는 노인의 말을 듣기 위해 말을 던졌을 뿐이었다. "나 정도 나이가 되면, 사람이 많아 부산한 모습도 좋지만 이렇게 고즈넉한 산자락에서 혼자 사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지. 허허... 젊은 사람들을 이렇게 오라, 가라 해서 미안하이. 자, 아래로 내려가볼까?" 일어서는 모습과 먼저 계단을 내려가는 노인의 움직임은 젊은 사람이나 다름이 없을 정도여서 서재필과 데카츠는 놀랐고 진성은 별다른 표정도 없이 노인의 뒤를 따랐다. 아래에는 예전에도 와 본 적이 있는 도장이 있었고 커다란 유리 밖은 여전히 절벽이었다. "내 평생, 물려 받은 검술과 십허검법을 마음속에 담아 살아왔다네. 지금은 나이가 들어 제대로 펼칠 수 있는지 자신할 수도 없는 형편이네만, 그래도 스스로 만족할 정도는 수련했다고 생각하고 있네. 평생을 고련했는데도 배운 시기가 늦어서인지 십허검법은 내게 건널 수 없는 커다란 틈이었지. 진성군, 내게 그 축지법을 보여 주겠나?" 조용한 침묵 가운데 덤덤한 목소리로 말하는 노인의 모습은 평안해 보였고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듯, 죽음에 대해 그다지 두려움이 없는 듯했다. 노인의 말에 진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도장의 가운데로 천천히 걸어갔다. "이것을 어르신께 배운 뒤에 제가 생각하기에 적지 않은 발전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어린 나이에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이런 경지에 이르러 어르신이 전수해 주신 축지법에도 성취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간단히 말을 마친 진성은 서서히 눈을 감았다. 눈을 뜨고 있더라도 별로 상관은 없지만 어쩌면 백발 노인에게 마지막이 될 시범이라 정신을 집중했던 것이다. 몇 초의 시간은 침묵 속에서 몇 분, 아니 몇 시간으로 변했다. 진성의 모습은 순간적으로 흐릿해지며 사라졌고 도장의 반대쪽, 밖이 훤히 보이는 유리 바로 앞에 다시 나타났다. 상상에서나 나올 순간 이동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의 움직임에 데카츠와 서재필은 물론 노인 역시 신음을 흘리며 감탄했다. 진성은 몸을 돌리더니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 순간 팔의 일부가 사라지면서 동시에 몸도 사라졌고 도장의 가운데에 완전히 몸이 나타났다. "대단하군..." 백발 노인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어르신, 지금 보여 드릴 것은 축지법을 제 사부님께서 전수해 주신 팔극신권에 접목한 결과입니다. 어르신께서 봐주셨으면 해서... 그러면 보여 드리겠습니다." 진성은 백발 노인께 축지법과 팔극신권을 조화롭게 이어 수련한 결과를 보여 주고 싶었다. 무명비검의 연장선에서 나온 성과였고 그 기본은 축지법이어서 자신에게 전수해 준 노인에게 꼭 보이고 싶었다. 진성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 팔극진결의 움직임이 너무도 부드러워 춤사위로 오인할 정도였는데 지켜보던 데카츠, 서재필 그리고 백발 노인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굳건한 하체의 힘을 상체로 끌어올려 정권을 칠 때는 팔꿈치 아래 부분이 순간적으로 사라지곤 했으며 태산 같은 기세로 다리를 뻗을 때는 다리가 순간적으로 보이지 않기도 했다. 도대체 어찌된 영문일까... 세 사람은 이해했지만 동시에 인정할 수 없었다. 축지법이라는 것 자체도 믿기 힘든 것이지만 무술의 한 경지에 그와 같은 것이 있어 저런, 말도 안 되는 무술이 탄생하다니... 데카츠는 무술에 있어서, 진성에게 이길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으리라 생각했다. 팔극신권의 수련이 아직 나이가 어려 절정에 이르지 못했다 하더라도 실체가 없는 것과 같은 상대를 누가 이길 수 있겠는가. 자신이 거합도의 최고 절기를 보인다 해도 진성의 옷자락 하나 베지 못할 것이다. 지켜 보던 백발 노인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두 줄기 뜨거운 눈물이 이제는 나이가 들어 골이 패인 노인의 뺨을 따라 아래로 흘렀다. 곧 진성의 시범은 끝이 났고 백발 노인은 들어오던 진성에게로 다가가 두 손을 잡고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진성군.... 자네가.. 자네가.. 내 소원을 이루어 주었네." 진성은 아무말 없이 백발 노인을 바라보았다. 이 순간 자신에게 뭐라고 할 말은.. 단 한 마디도 없었다. "아.. 내 꼴 좀 보게나. 시장할 텐데..." 백발 노인은 전혀 오늘, 내일 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계단을 척척 올라가더니 부지런히 식사를 준비했고 서재필과 진성이 옆에서 조금 거드는 것을 빼면 모든 것을 혼자 다 준비했다. 오래지 않아 식사는 준비가 끝났고 네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많이들 들게. 내 마지막 가는 길에 진성군과 같은 후배를 만나게 되어 아주 기분이 좋다네. 살만큼 살았고 하고 싶은 것도 원없이 했으니... 이 정도면 아주 만족하는 삶이지. 자, 들게나." 백발 노인이 웃으며 식사를 시작하자 나머지 세 사람은 어색했지만 곧 노인의 웃음에 전염이 되는 듯 맛있는 음식에 웃고 떠들며 시간을 보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음식도 꽤 먹은 후, 진성이 준비한 디저트를 꺼내왔고 네 사람은 한 자리에 앉아 정답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치 한 가족 같은 느낌이었다. "정말 고맙네. 평생 홀로 산 것과 마찬가지지만 이렇게 마지막에 가족이 생긴 듯하니 너무도 기분이 좋아. 허허..." 데카츠는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굳게 닫힌 입으로 노인을 따라 웃으려니 표정마저 이상해 보였다. 일견 행복해 보이기도.. 하지만 데카츠는 약간은 씁쓸한 노인의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진성군, 내 자네에게 줄 게 있네. 잠시만 기다리게." 노인은 어디론가 가더니 기다란 나무로 된 함을 들고 왔다. 데카츠는 백발 노인과 오랜 친분을 유지했고 가끔 찾아와 이야기도 나누는 사이였는데도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함이었다. 함을 든 노인의 모습에서 경외가 엿보였고 놓는 모습에서도 아주 조심스러워 정말 중요한 물건임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이것은... 바로 그 분이 내게 남기신 거라네." 노인의 목소리에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동시에 스며들어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아주 오래된 듯한 나무함의 뚜껑을 여니 안에는 이곳, 저곳이 상처가 많이 난 목검과 서책 하나가 정갈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그 분이 누구십니까?" 데카츠는 노인이 이토록 중요시하는 물건을 남긴 사람이 누굴까 몹시도 궁금했다. "... 바로 십허검법의 주인이지." 노인의 말에 진성은 나무함 속의 물건을 더 자세히 살폈다. 무명검법을 전수한 사람이... 이런 물건을 남겼다니. 목검과 책이라... 과연 무슨 내용일까.. 진성은 아주 궁금했다. "이 목검은 그 분이 직접 사용하셨던 것이고, 이 책 역시 그 분이 직접 준 것이라네." 노인은 목검을 꺼내어 사랑스럽게 만져보더니 진성에게 건넸다. 목검을 받아 들은 진성은 목검의 무게가 생각보다 훨씬 더 무겁다는 것에 놀랐다. 보통의 진검보다 더 무거운 듯했다. 무슨 나무로 만들었기에 이처럼 무거울까? 안에 쇠라도 들어 있는 건가... 목검은 아주 균형이 잘 맞고 검을 드니 느낌이 아주 좋았다. 곳곳에 긁히거나 이가 나간 상처를 제외하고는 아주 마음에 드는 검이었다. 무엇보다도 쥐고 있을 때의 느낌이 너무 좋아 마치 주문 제작한 듯했다. "정말... 좋은데요." "당연하지. 그 분이 말씀하시기를, 십허검법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그 검이 아주 편안하게 느껴진다고 하시더군. 아마도 자네가 그 검법을 수련해서 그렇게 느끼는 거라네." "아..." 진성은 세월을 뛰어 넘어 그 무명검법의 고수를 만나는 듯했다. 같은 목검을 들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진성의 심장은 두근거렸다. 노인은 나무함 속에 있는 서책을 꺼내 진성에게 건넸다. 오래된 책이라 혹시나 떨어질까 조심스레 받은 진성은 몇 장을 넘겼는데 통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기묘한 문양이 있는데 글인지 아닌지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어찌 보면 한글과 비슷했지만 뜻을 알 수는 없었다. "십허검법의 축지법을 제대로 연마했고 십허검법을 수련하는 사람에게 전하라고 하셨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그와 같은 사람을 만나기는 힘들지도 모르지만 혹시 노년에 만나게 되면 꼭 전하라고 하셨지. 음... 그러고 보면 그 분께는 신통한 능력이 있는 듯하기도 하네. 어디 한 번 읽어 보게나?" "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기묘한 문양은 처음 보는 것이라 진성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런가? 아무튼, 그 서책은 자네 것일세. 자네 역시 자네의 제자나 혹 십허검법을 수련하는 사람에게 그 책을 전하게나. 어떻게 하든지 그것은 자네의 자유일세. 그 목검 역시 마찬가지지." 백발노인의 얼굴은 웃는 듯하면서도 엄숙한 느낌마저 감도는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진성은 도저히 거절할 명분도, 마음도 없어 공손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어르신." 시간이 늦었고 백발 노인이 원했기 때문에 진성과 데카츠 그리고 서재필은 하루를 그곳에서 묵기로 했다. 집은 보통보다 훨씬 컸고 방도 많아 세 사람이 더 왔다고 잘 곳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예전에 왔을 때가 생각이 났다. 그 때, 이주방과의 다툼으로 인해 데카츠를 만난 후, 무명검법에 대한 얘기를 꺼냈고 그 인연으로 백발 노인을 만났던 것이다. 진성은 집 밖의 언덕 위 바위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부모님을 여의고 난 다음 세상이 무너지는 듯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속의 내장이 온통 얽힌 듯, 빨갛게 달아오른 숯덩이가 뱃속을 사정없이 돌아다니는 듯한 고통이 항상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 때 다가온 사람은 둘도 없는 친구인 현준이었다. 현준이의 집에 살면서 현준의 부모님과 동생을 만나 가족처럼 지내게 되었고 그 인연으로 프로게이머로 데뷔해 지금은 스키피오라는 이름을 세계에 떨치는 프로게이머가 되었다. 그 뿐인가. 게임을 하면서 우연히 사고가 생겨 목숨이 위태롭기도 했지만 그 덕에 사부이자 할아버지인 유조를 만나 무공과 더불어 사람이 살아가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부 유조의 죽음은 진성에게 죽음에 대한 또 다른 면을 가르쳐 주었고 사부 유조로 인한 인연은 유맹 어르신들과의 만남을 가지게 되었고 지금 이곳까지 올 수 있게 된 원동력이었다. 산 위라서 그런지 별빛이 더 선명하고 빛나는 수도 훨씬 더 많았다. 이렇게 앉아 있고 보니 높은 산에 별장을 짓고 밤마다 별을 보며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듯했다. "별이 좋지?" 백발 노인이었다. 중국어를 먼저 시작했지만 진성은 일본어도 배웠고 능숙하지는 않지만 간단한 말 정도는 듣고 말할 수 있었다. "예, 아주 좋아요." 진성은 누군가 올라왔고 그 사람이 바로 백발 노인임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놀라지 않고 고개만 약간 돌려 대답했다. "앞으로 뭘 하며 살 것이냐?" "..." 말은 알아들었지만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진성은 머리에 떠오르지 않아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앞으로 뭘 하면 산다니... 프로게이머, 얼마 후부터는 로플 OS를 개발하는 프로그래머, 그 후에는... 진성 자신도 몰랐다. 어쩌면 도장을 열어 팔극신권을 전수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무술을 계속 연마할 생각이냐?" "잘 모르겠습니다." 이럴 때 솔직한 것보다 나은 것은 없을 것이다. "그래. 그렇겠지. 네 나이에 이런 성취는... 아마도 무척이나 드문 경우겠지." 드문 경우가 아니라 불가능했다. 진성의 성취는... 그 자체로 불가사의였다. 백발 노인의 목소리에는 부러움이나 질투는 전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씁쓸함이 더 진했다. "앞으로 무엇을 하든 간에, 네 스스로 후회가 없도록 해라. 그게 최선인 것 같으니까." 담담한 목소리는 울리지 않았지만 묘한 힘을 가진 듯 진성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을 움직이는 기묘한 목소리였다. "부탁이 하나 있구나." "말씀하세요." "이 집을 자네에게 주었으면 하는데.." "네?" "어차피 이런 곳에 혼자 지내며 살 사람은 노인밖에 없지. 자네더러 이곳에 와서 살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다만, 자네가 생각이 나면 이곳에 와서 지친 심신도 회복하고 수련도 했으면 해서 말이네. 늙은이의 욕심이지만 자네가 이 집에서 수련을 한다고 생각하니 너무 기분이 좋아. 내 생각이 앞선 것인가?" "아... 네..." 갑자기 빨라진 백발노인의 말 중 절반은 알아듣지 못해 진성은 대충 얼버무렸다. 뭔가 중요한 말인 것 같은데... 그 순간 진성에게 구원자가 나타났다. 데카츠였다. "자네가 이곳에 가끔, 아주 가끔이라도 와서 수련하는 했으면 하는 어르신의 소원일세. 나는 진성, 네가 어르신의 부탁을 들어주었으면 하는데." 간단한 설명에 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어르신." 아무도 없는 이 곳에 오랫동안, 자주 올 수는 없어도 가끔 와서 청소도 하고 지하의 그 도장에서 수련도 한다면 아주 좋은 곳일 것이다. 진성이 가진 돈만 해도 이런 정도의 별장은 힘들지 않게 지을 수 있었다. 이곳은 돈이 아니라... 백발 노인의 마음이 담긴 곳이었다. "허허.. 데카츠, 자네가 오니 일이 쉽게 되는구만." "어르신도... 예전에 제게 주신다고 하셨으면서 이제는 진성군에게 간 것입니까?" "내가 그랬던가? 늙은이의 변덕이니 자네가 좀 참아주게." "네, 알겠습니다. 어르신." 두 노인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지만 말은 더욱 길어졌다. 진성은 슬며시 몸을 움직여 자리를 피해 아래 집으로 들어왔다. 미등 몇 개만 켜졌지만 운치가 있는 집안은 아주 정갈하고 느낌이 따뜻했다. "진성아." 안으로 들어가자 거실에 서재필이 기다리고 있었다. 거실 안에는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고 낮은 탁자 위에는 이리저리 서류들이 흩어져 있었다. "무슨 일이세요?" 진성은 서재필의 반대편에 앉으며 물었다. 웬만해서는 흔들리지 않는 서재필의 목소리는 아주 조금이지만 확실히 흔들려 뭔가 당황한 모양이었다. 서재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서류를 내밀었다. 하지만 곧 진성이 평상시의 대화는 조금 가능하지만 아직 이런 서류를 읽을 만한 일본어 실력이 아님을 알고는 다시 가져갔다. "간단하게 설명할테니 잘 들어라. 타메오 다케시라는 이름이 아마도 어르신의 성함인 듯한데... 이것은 어르신의 예전 유언이다. 음... 모두 합치면 여섯 장이 넘는 것 같은데. 아무튼 그것보다, 타메오 어르신은 친지도, 가족도 없이 혼자 살아오셨고 지금까지 유언장에는 요시히로 데카츠라는 이름이 있었는데 아마도 데카츠 어르신이겠지. 그런데 이것을 봐라. 보면 알겠지만 새로 작성된 유언장인데 상속인이 바로 너다. 확인해 봐라." 한국말로 하는 서재필의 말은 명백했다. 상속인이라... 조금 전에 백발 노인이 집을 맡아달라고 했고 그것에 동의했을 뿐인데, 상속인이라니. 노력하지 않아도 진성의 얼굴에는 황당함이 떠올랐고 서재필 역시 정확하게 그 표정을 확인했다. "몰랐구나. 아무튼, 이 집을 포함해 이 산 전체가 타메오 어르신의 소유고, 동경과 그 인근에도 적지 않은 땅을 가지고 계신다. 음... 여기 나와 있는 걸로 보니 땅만 해도 무려 30억엔이 넘는구나. 호오.. 진성아, 너 이제 부자다, 부자. 이 정도면..." 진성은 황당하다 못해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30억엔이면, 한국돈으로 300억이나 되는 액수였다. 300억, 말이 300억이지 상상하기에도 힘든 돈이다. 지금 받고 있는 연봉만 해도 분에 넘치는 거금인데, 아무런 노력도 없이 300억을 상속받는다는 사실은 진성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 때, 두 노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타메오 어르신." 진성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일어서며 크게 외쳤지만 두 노인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앉거라." 타메오 다케시는 눈에 띄게 힘들어 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진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게 이 집을 맡긴다. 네 맘대로 해도 되지만 이 산과 이 집만은 그대로 두고 언제까지나 와서 쉴 수 있는 곳으로 하려무나. 그리고 나도 잘 알지 못하는 땅이 있다고 변호사가 말해 주던데 그것은 네가 알아서 하도록 해라. 액수는 중요하지 않다. 내 평생의 소원이었던 것을 네가 보여 주었고 나 역시 십허검법을 향해 달려왔기에 네게 주는 것이니까, 사양하지 말도록 해라." "어...어르신..." 진성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목소리는 아직 정정했지만 이마에서 흐르는 식은땀과 눈빛이 약간 이상했다. "원래 이 녀석에게 주려고 했는데, 마음이 바뀌었다. 데카츠, 불만이 있지는 않겠지?" "그걸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저 역시 가능하면 이 녀석에게 상속할지도 모릅니다." 데카츠는 한술 더 떴고 두 노인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껄껄대며 웃었다. "뭐? 하하하.." "하하.." 서재필과 진성은 뭐라고 할 말을 잃어버리고 두 노인을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300억을 이제 두 번 본 사람에게 주는 타메오 다케시나 원래의 상속인이었지만 깨끗이 양보한 요시히로 데카츠의 행동은 범인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범주였다. "오늘은 조금 피곤하구나. 내일 보도록 하자." 백발 노인, 타메오 다케시는 천천히 일어나 먼저 거실을 나가 방으로 갔고 거실에는 세 사람이 남아 있었다. "아마도... 내일을 넘기기 힘드실 듯하다." 아직도 웃음소리가 울리고 있는 듯한 거실에서 데카츠의 말은 거실을 한순간 싸늘한 정적이 넘치는 공간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진성아 네가 생각하기에 너무 큰 것이라 여길 수도 있겠지만 그냥 이대로 두어도 되지 않겠냐? 상속받았다고 해서 그것을 꼭 팔거나 할 필요는 없으니까. 30억엔이라 해도, 그대로 두면 집이고 산이며 땅일 뿐이니까." 데카츠의 말은 백발 노인처럼 묘한 힘이 숨어 있었다. "알겠습니다, 데카츠 어르신." "그래, 잘 생각했다. 유산 문제는 내가 도와주마." 데카츠가 도와준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다. 진성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데카츠 어르신이 유산을 받았다면 더 나을 텐데, 생각했지만 데카츠가 그것을 허락할 리가 없었다. 곧 세 사람 역시 내일을 기약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하늘은 여전히 맑아 수많은 별들이 쏟아질 듯한 밤은 계속되었다. 새벽에 진성은 습관적으로 잠에서 깼다. 순간 어디인지 분간을 못해 멍했지만 곧 데카츠, 서재필과 함께 백발 노인에게로 왔음을 기억했다. 그냥 잠을 자려다 잠이 오지 않아 어제 받은 그 목검을 들고는 발걸음 소리를 죽여 지하의 도장으로 내려갔다. 도장이 지하에 있으니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를 주지 않아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살금살금 내려가 어제 보아둔 벽에 손을 대어 불을 켜려는 순간 목소리가 들렸다. "켜지 마라." 어두운 가운데 절벽쪽으로 나 있는 거대한 창에 어스름한 푸른 빛이 희미하게 비쳐들었다. 도장의 가운데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목소리와 뒷모습으로 볼 때.... 백발 노인, 타메오 다케시였다. "어르신?" "내 마지막 수련이다." 너무도 엄숙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의 카리스마가 가득한 목소리였다. 진성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채 목검을 들고 아래로 내려온 통로 바로 앞에 멈춰 서 있을 뿐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던 백발 노인은 진검을 들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진검과 하나가 되는 백발 노인의 모습은 실로 경탄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비록 진성이 백발 노인과 진검 승부를 한다면 열이면 아홉은 진성이 이기겠지만 경지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았다. 오랜 연륜에서 나온 백발 노인의 검을 다루는 모습은 마치 검 역시 하나의 생명체인 듯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신검합일(神劍合一). 진성은 검의 의지와 백발 노인의 의지가 완전히 같음을 직감했다. 노인의 팔이, 노인의 머리가 검을 움직이는게 아니라 검이 가려고 하는 길을 노인이 움직였고 노인이 움직이려는 곳이 바로 검이 가고자 하는 길이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축지법, 십허검법, 팔극신권... 그 모든 것이 저 속에 녹아 있었다. 아니 그 이상의 거대한 무언가가 노인의 몸에서 검으로, 검에서 대기로, 그리고 대기에서 진성에게 전달되는 듯했다. 전율. 온 몸에 가공할 전류가 흐르는 느낌이었다. 축지법에서는 자신이 노인을 한참이나 앞섰지만 생의 마지막, 모든 것을 다 건 이 검무(劍舞)는 그보다 한참 위였다. 아니 위라는 것보다는 모든 것을 다 포용했다. 포용. 말로 표현하기 불가능하지만 굳이 하라면 진성은 포용이라는 말 외에는 할 말이 없었다. 단순히 검을 휘두르는 것에 이런 기묘한 느낌을 줄 수 있다니. 진성은 순간 무술이 아니라 사람이라 생각했다. 무술의 경지가 아니라 이것은 사람의 경지인 것이다. 하나의 경지를 넘으면 그 다음 경지를 바라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러나 지금 보고 있는 것은 무술의 경지가 아니라 한 사람이 평생 갈고 닦은 마음의 경지였던 것이다. 진성은 깨달았고 충격을 받았다. 사부 유조에게서 무술을 배운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유맹 회원들과의 만남을 통해 더욱 향상된 무술의 수준, 거기에 요즘 답보 상태에 있긴 했지만 그래도 20대의 나이에 그런 경지에 이르렀다는 자신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무술의 경지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의 경지라니. 대련이나 실전에서 상대를 이긴다고 해서 그것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힘의 부분은 아주 작아 보잘것 없는 것이었다. 마음이라니. 왜 그렇게 느꼈다고 누군가 물었다면 진성은 절대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대기를 통해 무언가가 스며들어 자신으로 하여금 느끼게 만들었다고 밖에 대답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진성은 자신도 모르게 털썩 주저앉았고 눈에는 이미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한 사람이 평생을 바친 마음의 경지가 눈앞에 드러나고 있었고 그 감동은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거대했다. 화를 내지 않아 수양이 깊은 것도 아니고, 음식을 절제한다고 도를 닦는 것도 아니었다. 말로는 표현하지 못해도 뭔가 마음 자체가 커져 자신을 수용하고 주변 사람들을 포함하고 나아가 거대한 세계를 포용한다고 하면 과장된 걸까? 진성은 여전히 눈물을 흘리면서 끊일 듯 말 듯한 백발 노인 타메오 다케시의 검무를 눈을 부릎뜨고 쳐다보고 있었다. 가슴 속에, 머릿속에 완전히 새겨놓을 심산이었다. 툭.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던, 모든 것을 압도하던 백발 노인의 검무는 끝이 났고 타메오 다케시는 도장의 한가운데 진검을 떨어뜨린채 서 있었다. 평생 검을 갈고 닦았던 사람에게 검은 분신과 다름이 없었다. 진성은 백발 노인의 숨이 이미 끊어졌고 그 상태 그대로 서 있음도 알았다. "..." 뭐라고 말하고 싶은데, 너무나 커다란 감동과 타메오 다케시라는 사람의 마음에 완전히 들어가 있던 진성은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아..." 겨우 입을 연 진성은 소매로 눈물을 닦노는 천천히 계단을 밟고는 위로 올라갔다. 서재필과 데카츠에게 알려야 했다. 다리가 후들거려 진성은 좀처럼 쉽게 올라오지 못했다. 겨우 몇 걸음 옮기고는 쉬었다고 올라오기를 반복했다. "어르신..." 위에는 데카츠와 서재필이 서 있었고 올라온 진성은 데카츠에게로 무너지며 울음을 터트렸다.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한 사람에 대한 경외의 눈물이며 그 마음의 크기에 대한 감동의 눈물이었다. 하지만 그 눈물의 끝에는 아쉬움과 쓸쓸함이 묻어났다. 진성은 데카츠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동경의 숙소로 돌아왔다. 마음 같아서는 자리를 지키고 싶었지만 지금의 진성은 공인이었다. 예전에 사부 유조 때문에 경기를 포기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데카츠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거기에 서재필 역시 마찬가지여서 진성은 몇 번이나 되돌아보면서 산을 내려왔다. 숙소에 있던 현준은 진성을 굉장히 걱정했다. 잘 버려진 칼과 같은 느낌이 진성에게서 흘러나와 사람들로 하여금 깜짝깜짝 놀라게 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다지 말도 하지 않았던 진성이지만 현준에게는 모든 것을 터놓고 이야기를 했다. 타메오 다케시라는 노인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시작해서 무명검법에 대한 것과 이번에 상속받은 것들... 그리고 그 날 새벽의 일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말했다. 진성은 자신이 생각하는 최고의 친구를 보았다. 위로하려고 노력하지는 않지만 같이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친구. 현준은 괜히 말을 꺼내려고 하지도 않고, 말을 이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다만 친구가 느낀 감정에 정직, 솔직함을 두 눈으로 보여주었다. 그것이다. 그것으로 된 것이다. 진성은 자신에게 이런 친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만족했다. 뭔가 많은 것이 빠져나간 듯, 공허했던 마음은 천천히 채워지고 있었다. "우리... 친구지?" "그럼." 서재필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진성의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걱정했지만 다행히 원래의 진성으로 돌아왔고 게임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오히려 더 냉정해진 게임 플레이여서 현준을 비롯한 선수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 오랜만에 유조아에 올리는군요.. ^^ 이것은 서비스(^^)입니다. 원래는 안 되는데...... ㅜ.ㅜ 원고 마감에 맞추느라... 조금 시간이 그랬네요. 곧 6권이 나올 겁니다. 6권 나오면... 적당한 간격으로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7권이 완결입니다. 당연히 윗글도 7권에 포함된 것입니다. TGP2 기다리고 계시죠? 사실 그것 때문에 고민이 많습니다. TGP1이 생각보다 적게 나가... 그 연결선상으로 TGP2가 나올 때 얼마나 시장성이 있을까?.... 고민이 안 될 수가 없지요. 글을 써도 출판되어 시장에서 망(^^)한다면.... 안 되겠지요. 휴우.. 아무튼... 한편 올리니 잘 보십시오. 댓글을 보니.. 제가 한달 후에 글을 올린다고 한 것 같은데... 기억에는 ㅡ.ㅡ; 제가 그랬다면 죄송하구요. 6권 나오면... 그 때, 조금씩이나마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 TGP1(The Gamer Part 1) [179 회] 아로요 아키노 "지금부터 아시안 리그의 개막전 경기인 우리 한국의 게이머 강진성과 필리핀에서 온 아로요 아키노의 대결을 생중계 해 드리겠습니다." TV에는 문명 온라인의 국내 중계에서 이제는 자리를 굳힌 아나운서 김동수와 해설자 홍진호가 나와 곧 시작될 경기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었다. 처음 문명 온라인이 국내에서 중계할 때부터 콤비를 이룬 두 사람이어서 무척 자연스러운 진행이어서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았고 특히 두 사람은 팬클럽을 가질 정도로 문명 온라인 팬들의 관심을 받았고 시청률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저 두 사람, 잘 하지?" 대기실에서 지켜 보던 현준은 입에 사탕을 문 채로 옆에 있는 진규에게 물었다. 오늘은 단체전 경기가 없어 선수들의 얼굴에는 여유가 넘쳤다. "처음부터 중계를 했으니까요. 다른 방송에서 중계하는 것은 재미가 없고, 어떨 때는 어처구니가 없어 듣기도 힘들어요." 진규의 말은 사실이었다. 단순히 알려진 사실을 정리해 조리있게 말하는 것이 방송에서 아나운서와 해설의 역할은 아니었다. 야구나 축구처럼 적재적소에 명확한 해설과 지적은 보는 게임을 더 흥미롭게 만들었다. 방송을 진행하는 김동수와 홍진호 두 사람의 문명 온라인 아마추어 버전의 실력은 고수라고 불리기에 충분하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그런 경험과 실력이 없다면 이처럼 원활한 진행은 힘들 것이다. "진성이 형이 나와요." 범현의 말에 대기실의 모든 눈은 커다란 TV 화면에 집중되었다. 이제는 무대에서도 꽤나 능숙해 카메라를 향해 웃어보이기도 하는 진성의 모습은 역시 든든했다. 아시안 리그 뿐 아니라 월드 리그 개인전의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가 바로 진성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이 가졌고 그래서인지 게임 상대보다 훨씬 더 화면에 많이 잡혔다. "스타는 스타네. 범현아, 상대는 누구지?" 현준은 녹아서 콩알만한 사탕을 깨뜨린 후에 범현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그 목소리에는 걱정이란 조금도 없었다. "필리핀에서 온 아로요 아키노라는 게이머인데... 여자인데요. 아주 미인이라고... 실력은 중,상 정도 될 것 같습니다." 범현은 가지고 있던 진행표를 보면서 대답했다. 곧 TV 화면에도 아로요 아키노가 나왔는데 붉은색의 원피스를 입고 나온 아로요 아키노는 게이머가 아니라 모델같아 보였다. "와..." 현준을 비롯해 같이 있는 선수 중 남자들은 대부분 감탄을 했다. "저런 여자가 게이머를 하다니... 아깝다." "네, 약간 이지적이면서도... 섹시한데요." 현준의 말에 진규 역시 가세했다. "보기 좋기는 하지만, 혜연이가 저렇게 입으면 더 나을 것 같은데.." 조용히 경기를 준비하던 현호가 작고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현준을 비롯한 선수들과 뒤에 있던 코디들, 그리고 그 뒤에 있던 경호원들까지 일제히 현호를 바라보았다. 거기에 현호의 말이 울리자마자 대기실 안은 TV 소리 외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나...나는.. 다.. 다만..." 당황한 현호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뭔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너무나 뜨거웠다. "오호... 현호 네가 혜연이를 좋아하는 모양이구나. 네가 한석이처럼 입을 헤 벌리고 다니지만 않으면 나는 찬성한다." 현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현호와 아무말도 못하고 붉게 물든 얼굴을 숙인 혜연을 보며 확인했다는 듯 능청스럽게 말했다. "저도 찬성해요." "나는 당연히 찬성이지." 진규와 범현은 박수까지 치며 좋아했고 가만히 있다 현준에게 한 마디 들은 한석은 억울하다는 표정이었지만 현호를 보며 웃었다. "내가 뭘 입을 벌리고 다녀? 아무튼 나도 찬성한다." "아.. 아니에요. 아니란 말이에요." 현호는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급히 말했지만 곧 날아온 현준의 말에 꿀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다물고 말았다. "뭐가 아닌데?" 대기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건 상관없이 게임은 시작되었다. 게이머 스키피오, 진성은 로마였고 아로요 아키노 역시 로마 문명이었다. 곧 게임의 지도가 관객들에게 공개되었다. "아..." 관객들은 오랜만의 게임이라 굉장히 기대했고 지도를 보자 그것이 목소리로 터져나왔던 것이다. 지도는 크게 세 개의 섬으로 되어 있었다. 왼쪽과 오른쪽의 섬, 모양은 달랐지만 크기는 아주 흡사했다. 완벽한 원에서 여러 군데의 이가 빠진 것과 비슷한 두 섬 사이에 칠레처럼 위아래로 길게 뻗은 섬이 있었는데 그 이름은 타스마니아였다. 보통 게임에서 게이머의 국가를 제외하더라도 두 개 혹은 세, 네 개 정도의 다른 국가가 나오는데 오늘은 게이머의 문명을 제외하면 오직 하나 타스마니아 밖에 없었다. 이런 환경에는 누가 타스마니아와 빨리 동맹을 맺는가가 제일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이다. 진성은 빠르게 정찰을 했다. 곧 어렵지 않게 하나의 섬으로 이루어졌고 동쪽으로 가려면 다른 나라 타스마니아를 지나야 함을 알았다. 당연한 순서로 타스마니아에 사자를 보냈고 문명의 전반적인 일을 처리하는데 시간을 할당했다. 전설의 더블 스터러티지는 이제 무용지물이어서 사용할 수 없었지만 군대강화법은 여전히 건재했다. 아직까지 진성의 업그레이드된 군대강화법을 마친 로마의 군대와 일대일로, 전술 없이 힘으로 붙어 이길 군대는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진성이 가진 역량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이런..." 돌아온 사자에게서 보고를 받은 진성은 일이 약간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아직 타스마니아 너머 있는 지형에 대해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경험상 자신의 영토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초반의 정찰은 이미 정해져 타이밍이 거의 같아 진성의 사자와 아로요의 사자가 동시에 타스마니아에 들어갔고 그 때문에 타스마니아는 양쪽의 동맹 요청을 모두 거절했던 것이다. 물론 상대를 치기 위해 우회해도 되겠지만 그러다 타스마니아를 거스려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필요는 전혀 없었다. "음... 어쩔 수 없이 장기전으로 가야 할까?" 비록 게임 상에 나오는 인공지능 국가지만 그런 국가가 우방으로 존재하고 상대에게는 그런 우군이 없다면 그 게임은 한쪽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경기가 되고 만다. 진성은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보았지만 처음부터 무리를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아로요 역시 사자의 보고를 듣고 상황을 예측했다. 진성이 고민했던 것에 비해 아로요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장기전 준비에 바로 돌입했다. 세계 최강이라 불리는 게이머 스키피오를 상대로 오랫동안 준비를 해 왔던 아로요는 단기전으로는 승산이 없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특히 완전히 똑같은 군대라도 진성이 지휘하고 명령을 내리면 완전히 다른 군대가 되어 버려 초반의 소수 정예 위주의 전투는 아로요에게 불리했던 것이다. 또한 아로요는 원정 역시 승산이 없다고 내심 결정을 내리고는 최대한 안으로 끌어들여 일시에 승부를 매듭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타스마니아의 대응을 본 아로요는 초반의 전투는 아예 없다고 결론낸 다음 장기전, 마지막을 위한 준비에 힘을 쏟았다. 초반부터 보통 때와는 달리 병사들이 입을 갑주의 발전과 무기의 발전, 그리고 경제 성장을 위해 모든 시간과 재력을 투자했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위험을 감수하고 쳐들어 온다면 모든 것은 그대로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 아로요는 모험을 걸었다. 진성은 일단 서쪽 험한 곳에 있던 수도를 동북쪽의 넓은 곳으로 이전했다. 수도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에 장기전의 효과를 더욱 강하게 하려면 수도부터 옮겨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 초반의 발전은 손 놓고 있어야 했다. 진성은 무모하게 타스마니아로 다시 사자를 보낸다거나 군사 행동을 취하는 등의 쓸모없는 행동을 엄금했다. 지금은 내치에 힘쓸 때인 것이다. 진성은 수도로 정한 동북쪽의 시빌드로 향했다. 한참 건물들이 지어졌고 모든 구획들이 일제히 정리되더니 건물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아..." 순간 진성은 거대한 바위를 옮길 때 피어나는 먼지들과 내리쬐는 햇빛, 분명 NPC일 게 틀림이 없는 병사들의 움직임이 정말 실재인 것처럼 실감이 났다. 따스한 햇빛, 들이키면 속이 답답할 것만 같은 먼지들... 땀 흘리며 힘들어 하는 병사들. 진짜 사람처럼 손 대면 피부에 흐르는 땀의 축축하고 끈적한 촉감을 느낄 것 같고 조금만 더 다가가면 숨이 막혀 심하게 기침을 할 것처럼 현실적이었다. 아니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현실이었다. "후우..." 몇 초 동안이었지만 진성은 자신이 정말 시빌드라는 곳의 대지 위에 서서 병사들을 독려한 듯했다. 수십, 수백 번 게임을 하면서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기분이었고 경험이었다. 굉장했다. 가슴 깊은 곳에서 터져나온 커다란 한숨이 눈에 보이는 거대한 공사 현장이 게임 속임을 말해 주었고 진성은 멍한 상태에서 벗어나 빠르게 게임을 컨트롤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이런 현실에 가까운 경험을 한 터라 경기가 끝나면 꼭 기술팀에게 이 일에 대해 물어보리라 마음 먹었다. 위아래로 길게 뻗은 섬 타스마니아를 경계로 두 로마 문명은 마치 거울에 비친 상(像)과 비슷했다. 거울에 비친 물체의 모습은 좌우가 바뀌는 것처럼 진성의 로마 문명과 아로요의 로마 문명은 거의 반대에 가까운 문명의 차이를 보였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같은 문명임을 알 수 있었다. 진성은 군대강화법을 비롯해 로마 문명, 그 중에서도 군대의 전체적인 강화에 주력했다. 지휘관들부터 시작해 병사들 전체의 능력을 위주로 한 강화 방법이었다. 이런 강화법은 프로 경기를 통해 알려지기는 했지만 아직 진규와 진성을 제외하면 쉽게 쓰기 힘들어 두 선수의 개성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로 독특한 것이었다. 그에 비해 아로요의 방법은 지극히 문명 온라인의 정석과 같은 플레이였다. 군대 중심이 아니라 문명 전체의 수준을 높이는 방법이었다. 검과 방패는 관련 기술들이 발전함에 따라 자연스레 향상되었고 갑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보급과 관련되어 여러 사항들이 개선되면서 사기까지 같이 올라가는 시너지 효과 덕도 톡톡히 보고 있었다. 서로 그 정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만큼 조만간 부딪힐 게 뻔했고 그 시간은 점점 다가와 보고 있는 관객들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홍진호씨,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김동수 아나운서였다. "네, 현재 두 선수는 나름대로 자신의 영토에서 빠른 발전을 꾀하고 있지요. 문명 온라인을 조금이라도 해 보신 분들, 아니 이런 전략 게임을 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지금은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 불리한 상황입니다. 가운데에 위치한 타스마니아는 확실한 장벽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 장벽을 먼저 넘으려는 게이머에게 어쩌면 치명적일 수도 있는 피해를 주기에 아마도 두 게이머는 머릿속으로 어떤 방법을 쓸 지 고심하고 있을 겁니다." 홍진호의 말은 당연함 그 자체였다. "홍진호씨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음... 제가 스키피오의 위치에 있다면 비밀리에 타스마니아에 동시다발적으로 상륙해 아로요의 진영에서 눈치채기 전에 타스마니아를 점령해 버릴 겁니다. 아주 위험해 조금이라도 사전에 비밀이 새어나갔다가는 게임을 망칠만한 위험도가 높은 작전이지요. 하지만 성공한다면, 그야말로 게이머 아로요는 타이밍을 놓치게 되는 셈이 되겠지요." 홍진호는 안경을 벗어 이마의 땀을 한 번 손수건으로 닦은 후에 다시 안경을 썼다. 그만큼 긴장한 눈치였다. "그렇군요. 과연 스키피오가, 아로요가 어떤 전략을 쓸지 여러분들도 예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TV를 보고 있던 현준은 대뜸 진규를 향해 말했다. "진규야, 진성이 어떻게 할 것 같냐?" "저는 진성 형이 먼저 공격할 것 같은데요." "어떻게 공격할 것 같은데?" "음... 아마도 수송선으로 크게 우회해서 상대 섬으로 가지 않을까요?" 진규는 조심스레 대답했다. 현준은 고개를 돌려 범현에게 시선을 옮겼다. "저 역시 진규와 비슷한 생각인데요." 현준은 또 고개를 돌려 현호를 바라보았다. "저는... 진성 형이 타스마니아와 아로요를 동시에 공격할 것 같습니다." 현호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어깨를 만지며 대답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이렇다 할 이유는 없지만 진성 형이라면 그럴 것 같습니다." 현준은 현호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현호와 생각이 같다. 진성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무모하다고 말할 전략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멋지게 성공시킬 것다. 물론 기다렸다가 아로요의 선제 공격 후에 움직인다면 필승이겠지만 진성이가 그렇게 쪼잔하지는 않지." 진규와 범현은 현준과 현호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듯했다. 두 사람은 한석을 쳐다보았고 한석은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잘 모르겠는걸." "진규야, 범현아. 내기할까? 오늘 저녁, 밥사기!" 현준이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그래요. 내기해요." 범현은 뭔가에 끌리듯 덥석 현준의 말을 받았지만 옆에 있던 진규의 얼굴빛은 완전히 달라졌다. 지금까지 자소 프로팀에서 여기 로플 엔터테인먼트 소속 프로 게이머로 지내면서 현준을 계속 봐왔기에 저리도 자신감이 있는 모습에 마음이 영 찝찝한 모양이었다. "저는 안 할래요." 진규의 선택은 괜히 사서 고생할 필요는 없다였다. "그러면 범현이와 내가 내기한 거다. 다른 사람들은 구경이나 하고 떡이나 먹어라." 진성의 전략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현준이었다. 오랫동안 같이 지내왔고 초창기 테스터부터 서로를 알았기에 현준의 예상은 탁월했다. 진성은 많은 수의 수송선을 만들고 절반은 동쪽의 타스마니아와 가까운 항구에 배치하고 나머지 절반은 동북쪽과 동남쪽에 배치해 크게 우회할 생각이었다. 타스마니아로 진격하는 수송선과 아로요의 섬으로 상륙할 수송선은 거의 동시에 출발했다. 그러나 도착하는 시간은 타스마니아가 훨씬 더 빨랐다. 아로요의 섬으로 향한 수송선들은 크게 돌아서 가야 하기에 시간적으로 훨씬 더 많이 걸리는 게 당연했고 진성은 한 곳이 아닌 여러 군데에 동시에 상륙한 로마 군대를 컨트롤하는데 마음을 집중했다. "와..." 남북으로 길게 뻗은 타스마니아의 서부 해안에 동시다발적으로 상륙한 로마 군대는 한곳으로 모이지도 않고 타스마니아를 점령해 나가기 시작했다. 분명 한 사람의 게이머라 한 순간에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은 하나 뿐이지만 마치 여러 명의 게이머가 동시에 컨트롤하는 것처럼 보였다. 타스마니아의 약점은 남북으로는 길게 뻗어 있지만 동서로는 너무 짧아 단 시간에 중앙의 부분을 점령해 남북을 고립시킬 수 있어 잘못하면 양쪽이 동시에 고사당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진성은 굉장한 속도로 중앙 부분을 완전히 궤멸시켜 타스마니아의 역량을 반, 아니 삼분의 일로 순식간에 줄여버렸다. 전통적인 각개격파와는 약간 다르지만 지형의 잇점을 그대로 살린 진성의 기습에 타스마니아는 궤멸 직전에 이르고 말았고 타스마니아는 옆에 있는 아로요의 로마 문명에 도움을 요청했다. 어느 정도 영토를 확보한 진성의 로마군대는 더 이상의 진격을 하지 않고 방어에만 몰두하면서 뭔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역시 대단하군." 아로요는 보고를 받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결과적으로 타스마니아라는 섬나라의 지형적인 특징을 무기로 남북을 완전 고립시킨 스키피오의 전략은 성공했다. 지금 봐서는 왜 자신이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 자책도 생겼지만 스키피오의 지형을 이용하는 능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로요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참전을 결심했다. 타스마니아가 상대방에게 넘어간다면 게임은 해 볼 것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타스마니아를 도와 상륙한 스키피오의 로마 군대에 피해를 점차 늘린다면 본대는 여전한 자신의 군대가 충분히 스키피오의 군대를 이길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로요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아로요의 로마 군대는 수송선을 타고 타스마니아의 북부와 남부로 나누어 상륙했다. 이미 타스마니아 영토의 반은 스키피오에게 넘어간 상태지만 아로요의 로마 군대가 전쟁에 개입하자 상황은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게다가 그 동안의 피로가 겹쳤는지 스키피오의 로마 군대는 어렵게 얻은 영토를 아주 쉽게 내어주는 등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아로요의 로마군대는 중앙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돌진했다. "이제 시작이다." 진성은 두 개로 나눠 우회한 수송선들이 아로요의 로마 문명의 서북쪽과 서남쪽에 각각 도착해 상륙하는 것을 확인했다. 예상대로 아로요는 타스마니아의 남쪽과 북쪽으로 군대를 투입해 타스마니아를 돕고 있었다. 상륙을 완료한 진성의 로마 군대는 각각 중앙을 향해 빠르게 행군을 시작했다. 중간에 장애물이 생기면 최대한 빨리 돌파하거나 불가능하면 우회해 중앙의 수도를 향해 최대한 빨리 움직였다. 서북쪽과 서남쪽의 군대는 오래지 않아 아로요의 로마 문명에게 발견되었지만 주력 군대가 타스마니아로 간 상태에서, 굉장한 기동력을 보이는 상대를 저지할 만한 전력은 남아 있지 않았다. 상륙한 군대의 소수 병사를 이용해 진성은 수송선을 아로요의 로마 문명의 섬 서쪽 해안을 타고 가운데 부분에 모이도록 조치를 취했다. 진성은 아로요의 반응을 이미 예상했고 그에 적절한 방법을 선택했지만 관객들은 진성의 의도를 제대로 알지는 못한 듯했다. "우와.." "대단하다." "역시 스키피오다." 관객들은 대형 스크린으로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아로요의 진영을 노리는 진성의 플레이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진성의 능력 중 빠른 맵, 지형에 적응하는 재능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다. "그런데 수송선은 왜 움직일까?" "그러게 말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진감 넘치는 게임 플레이는 관개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이..이런.." 아로요는 급히 날라온 소식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스키피오의 로마 군대가 쉽게 후퇴를 하는 것 같아 뭔가 이상했는데 본토에 난입해 있다니.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군대일까. 타스마니아 중앙의 군대는 아닐 것이다. 아로요는 그것보다는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내려야 했다. 타스마니아를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이곳에서 남아 있는 로마 군대를 완전히 궤멸시킨 후에 본토로 건너갈 것인가. 아무리 스키피오라고 해도 군대를 두 부분으로 나눈 상태에서 동시에 두 개의 전투를 수행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로요는 나눠진 군대여서 본토의 남겨둔 병력이면 성과 요새를 중심으로 방어전은 가능하리라 생각하며 일단은 이 곳, 타스마니아가 먼저라 확신했다. 꽤 많은 스키피오의 로마 군대가 타스마니아의 중앙에 몰려 있어 이 부분만 확실히 점령해 상대 군대를 궤멸시킨다면 오히려 자신의 이득인 셈이다. "예상대로군." 진성은 아로요의 섬에 상륙한 군대를 최단시간에 수도까지 행군시키다가 섬 서쪽 지점에 모인 수송선을 재빨리 타스마니아의 동쪽 해안으로 이동시켰다. 타스마니아에서 아로요의 군대와 타스마니아의 남은 전력에 밀려 중앙으로 몰리고 있던 자신의 로마 군대를 수송하기 위해서였다. 아로요의 군대에 쉽게 물러서던 진성의 군대 행동은 의도된 작전이었다. 밀리는 척하며 타스마니아의 동쪽 해안으로 모이면 그 때 한참을 우회해서 타스마니아의 동쪽으로 온 수송선을 타고 처음 타스마니아로 상륙했던 군대 전부를 아로요의 섬으로 옮기는 것이 작전의 핵심이었다. 하나도 남김이 없이 수송선에 모두 타자 진성은 재빨리 수송선을 이동시켜 쫓아온 아로요의 군대를 바보로 만들어 버렸다. 아로요의 군대가 수송선을 타고 자신의 섬으로 돌아갈 무렵에는 진성의 군대는 이미 수도를 공략해 어쩌면 함락시킬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아로요가 남은 군대를 모두 진성의 영토로 진격시킬 수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아로요의 수송선들은 타스마니아의 동쪽 해안에 있었기 때문에 바다를 통해 진성의 영토로 가려면 크게 우회해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 정도면 이미 상황 종료되고도 남을 정도의 시간이어서 진성의 얼굴에는 여유가 감돌기 시작했다. "급속 행군." 상륙한 로마 군대는 앞서 간 군대를 좇아 빠르게 행군했는데 거의 수도에 도착한 군대가 가면서 널찍한 길을 만든 것과 같아 행군하는데 아주 편해 로마 군대는 피로를 거의 느끼지 않고 움직였다. "아..." 절묘한 작전이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이 계산된 터라 한 번 휘말리면 빠져 나오기 불가능한 전술이었다. 두 개로 부대를 나누어 하나는 타스마니아의 서쪽 해안을 기습하고 다른 하나는 크게 우회해 수송선으로 아로요 자신의 영토로 진격하는 작전. 조금의 오차나 실수가 있었다면 역공격으로 게임을 망칠 수도 있는 과감한 작전이었다. 더구나 상대의 반응까지 예상해 그 군대를 타스마니아에 가둬 버리는 것과 같은 적절한 대처는 아로요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들었다. 북쪽과 남쪽으로 내려가 수송선을 타고 상대 진영인 서쪽의 섬으로 돌아서 갈지, 영토를 지키기 위해 갈지 아로요는 고심했다. 그 어느 방법도 시간상 스키피오에게 타격을 줄 수도 없고, 자신의 몰락을 바꿀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아로요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고 말았다. "게임 오버." "와..." "저 수송선... 계획한 것이겠지?" 관객들은 진성의 작전을 놓고 말들이 굉장히 많았다. 어떤 사람들은 우연히 그렇게 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도된, 계산된 작전이었고 그 작전은 지형과 맞아떨어지며 거의 완벽하게 이루어져 상대방을 꼼짝도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고 생각했다. 해설가 홍진호는 손에 땀을 쥐며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흥분된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으로 설명했다. 그 옆에 있던 김동수 아나운서 역시 자못 날카로운 목소리로 진행했는데 베테랑이어서 잘 보여주지 않는 모습이기도 했다. 곧 밖으로 나온 두 게이머, 진성과 아로요가 무대의 가운데로 나와 악수를 하자 관객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정말 대단하네요." "하다보니 그렇게 된 겁니다." "저 역시 프로 게이머에요. 그 정도는 알고 있어요. 꼭 우승하세요." 진성은 얼버무렸지만 약간 까무잡잡한 필리핀의 미녀 아로요는 진성의 볼에 가볍게 입맞춤을 하면서 우승을 빌었다. 전혀 예상도 못한 터라 진성은 고스란히 아로요의 부드러운 입술을 느끼고 말았다. "와..." 진성의 여성팬들은 자지러지기도 했지만 남자들은 진성과 아로요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발을 구르며 좋아했다. 당황한 사람은 아로요와 진성의 매니저들, 그리고 방송 관계자들이었다. -------------------------------------------------------- 또 오랜만입니다. 원고 정리하느라... ^^ 마지막 권이다 보니 뭔가 빨라지는 것 같기도 하고 부족한 것 같아... 고치다 보니.. 시간이 ^^ 또 언제 올릴지 모르겠지만 (될수 있는 대로) 부지런히 고치고 있으니.. 기다려주세요!! ^^; 좋은 하루!!!!!!!!!!!!!!!!! -------------------------------------------------------- TGP1(The Gamer Part 1) [180 회] 데자뷰 "어이, 진성. 아주 보기 좋던데..." 대기실로 들어온 진성을 맞이해 말을 한 사람은 당연히 현준이었다. 조금 전 아로요의 기습 입맞춤이 이곳 대기실에서도 최고의 화제였다. 현준은 땀을 닦고 있는 진성에게 머리를 들이밀며 물었다. "무슨 얘기를 한 거야? 설마 사귀는 것은 아니겠지? 음... 진성이 너는 연예인 뺨치는 인기인이니까 이런 스캔들, 아주 조심해야 한다고." 다른 사람도 아닌 현준은 이런 이야기를 할 자격이 없었다. 영화배우이자 탤런트인 정효진과 이미 공식적으로 만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진성은 현준을 한 번 보더니 피식 웃었다. "아무 관계도 아니야. 게임 수고했다는 이런 저런 얘기 가볍게 했는데 갑자기.. 그러더라고. 휴우... 내가 얼마나 난감했는지 알아?" 진성은 손짓을 하며 설명했지만 어느새 몰려든 사람들의 얼굴에는 뭔가 더 있지 않나 하는 표정으로 가득했다. "이 사람들이... 아니라니까." "경호원들 열 명이 넘게 덤벼도 너를 어쩔 수 없는데 아로요 같이 나약한 여자 한 명이 천하의 강진성의 볼에 입을 맞출 수 있다는 말은... 전혀 믿어지지 않는 걸." 현준의 말 한 마디는 결정타였다. 이준의 말에 따르면 언젠가 경호원들이 진성과 같이 대련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날 이후로 경호원들은 진성의 또 다른 별명을 만들어 부르기도 했다. 바람. 어떤 사람은 신풍이라고도 했지만 대부분은 바람으로 통했다. 잡으려고 해도 절대 잡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그 사실을 코디들과 선수들 역시 알고 있었기에 평범한 여자인 아로요를 피하지 못했다는 말은 뭔가 마음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고 그것은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 진성은 초롱초롱한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한숨을 쉬고 말았다. 같이 지내는 사람들이 이 정도면... 아마도 지금 한국은 발칵 뒤집혔을지도 몰랐다. '아로요의 입맞춤'이라는 태풍이 소강상태에 이르자 진성은 서울의 로플 소프트로 전화를 걸어 게임에서의 그 경험에 대해 확인하기 위해 로플 소프트의 개발 총 책임자인 조팀장을 찾았다. "네, 저 진성이에요." "무슨 일이냐? 그 입.맞.춤. 잘 봤다. 팬 서비스 차원 치고는 아주 리얼하던데... 하긴 네 나이면 관심을 가질 때도 되었지. 그리고 남자로서, 청년으로서 네게 매력이 있음은 나도 인정하니까. 부럽다.."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고 자신의 할 말만 다 해버리는 조진철 팀장의 속사포 같은 말에 진성이 질릴 뻔했다. "팀장님. 사실 게임 중에 이상한 점이 있어 물어 보려고 하는데요." "뭐? 그것은 문명 온라인이잖아. 내가 아니라 김성철 팀장한테 물어봐야 하는 것 아니냐?" 조팀장은 로플 가상현실 시스템이 전문이라 비슷하지만 달랐다. "제 생각에 게임 자체가 아니라 가상현실과 관련되지 않았나 싶어서 전화 드린 겁니다." "그..그래... 무슨 일인지 자세히 얘기해 봐라." 웬만해서는 진성이 이처럼 진지하게 말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조팀장은 긴장했다. 진성이 이렇게 정색을 하고 말할 때는 항상 뭔가가 있었다. 진성은 현실처럼 느껴졌던 그 경험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자신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그 자리에 있는 것과 같은 현실감. 병사들이 지닌 창으로 자신을 찌르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 진성은 최대한 묘사를 해서 조팀장에게 설명했다. 먼지마저 실재 같았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음... 그런 일이 일어나다니?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냐?" 조팀장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일이 이제야 나타날 수도 있었다. 그런 가능성은 항상 존재했고 진성의 존재는 가상현실 개발에 있어 핵심이었기 때문에 조팀장의 걱정은 당연했다. "아닙니다. 이렇게 현실적인 경험은 처음이에요. 한 번도 이런 일은 없었어요. 한 번도." 진성은 강조해서 말했다. "알겠다. 내가 김팀장과 만나서 의논해 볼 테니 너는 게임에 집중해라." 잠시 생각하는 듯 침묵에 빠졌던 조팀장은 진지하게 말을 끝냈다. "네." 전화를 끊은 진성은 오늘 있을 현호와 혜연의 게임을 보기 위해 대기실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아로요의 입맞춤이라는 태풍은 이제 소멸된 듯 모두들 TV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이... 아로요 만나고 왔지?" 오직 한 사람, 현준만 잊지 않는 듯했다. 나중에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이런 눈빛을 받은 현준은 대번에 꼬리를 내렸다. 그리고는 화제를 돌려버렸다. "시..시작한다." 게임이 끝나자마자 정리를 한 후에 로플 선수단은 곧바로 호텔로 이동했다. 진성은 피곤한 상태라 곧바로 객실로 올라가 쉬기로 하고 나머지 선수들은 다음 날 있을 단체전 경기를 위해 연습실로 직행했다. 일본이지만 국제적인 호텔이라 외국인이 많이 이용해 객실 자체는 서양식이었다. 커다란 침대와 편히 앉을 수 있는 탁자와 의자. 베란다에도 나무로 짠 시원한 흔들의자가 놓여 있어 편히 쉬기에는 그만이었다. 냉장고에서 캔 주스를 딴 후 가져온 짐 중에 노트북을 꺼내 부팅 시키고는 베란다의 흔들의자에 앉아 밖의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서울과 비슷할 정도로 스모그가 낀 모습은 그리 보기 좋지 않았지만 따뜻한 햇살은 정신적으로 지친 부분을 어루만져 한결 피곤이 가신 듯했다. 진성은 OS 개발에 대한 부담감으로 노트북에 온갖 자료들을 다 모아 이번 아시안 리그로 일본에 올 때 가지고 왔다. 노트북 가방에는 상당수의 DVD 영화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리 보고 싶지 않았다. 가볍지만 화면은 거의 16인치에 가까워 책상에 두고 써도 무방할 정도의 노트북 화면에는 조팀장이 잘 정리한 OS의 개념이 여러 가지 도표와 색색으로 강조한 슬라이드로 잘 나와 있었다. "휴우.. 이런 걸 해야 한단 말인가." 아직 컴퓨터 공학에 있어서는 학부생일 뿐인 자신이 이런 고급의 일을, 그것도 중추적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에 앞이 캄캄했다. 차라리 해킹이라면... 그 순간 진성은 고개를 흔들었다. 가상현실에서 해킹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그 날 이후 고민을 거듭한 결과 해킹은 자신이 아니라 가상현실 시스템이 대신 하는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물론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에게만. 그것은 자신의 실력이라 할 수 없었다. 회사에서 하지 않으면 혼자서라도 하겠다고 공언한 터라 진성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노트북으로 뒤적거리며 보고 있었지만 쉽게 핵심적인 포인트를 찾기에는 너무도 방대한 자료였다. 아니 핵심을 찾았다고 해도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단순히 이해를 목적으로 한다면 충분하겠지만 진성은 조팀장과 더불어 로플 OS를 직접 만들어야 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주스를 다 마실 동안 진성은 겨우 두 장의 슬라이드를 보았을 뿐 전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앞으로 피를 말리는 시간이 될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OS에 대해 모르면 OS 개발 프로젝트는 사실상 실패라고 말한 조팀장의 주장이 귀에 들리는 듯했다. 지친 지금 상태로는 계속 들여다봐도 알 수가 없어 진성은 노트북을 끄고는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타메오 어르신이 생각이 났다. 오랜 시간을 혼자서 살아왔다는 백발의 노인, 쓸쓸한 느낌을 주던 마지막 그 검무. 눈을 감아도 머릿속에 뚜렷하게 떠올랐다. 그 검무, 모든 것을 포용하는 그 움직임... 그 때 타메오 어르신은 과연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진성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천장을 쳐다보았지만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피곤함에 못 이겨 서서히 눈꺼풀이 무거워졌고 진성은 오래지 않아 잠에 들었다. 타메오 다케시의 장례와 이어진 아시안 리그 게임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강행군을 했던 진성은 자신도 예상치 못할 정도로 몸이 피곤했고 그래서 저녁을 거른 채 잠에 푹 빠져 있었다. 문득 잠에서 깬 진성은 어두운 주변의 모습에 시계를 보니 새벽 2시였다. 몇 시간을 잔 것일까. 몸은 아주 상쾌해 날아갈 듯했다. 오랜만에 이렇게 편하게, 오래 잠을 자서 그런지 온 몸에 활력이 넘쳤다.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아 일어나 불을 환하게 켜고는 탁자 위에 놓인 노트북을 한 번 쳐다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지금 OS에 관해 모르는 것을 굳이 파고들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타메오 어르신에게 받은 그 목검이 생각나 손에 쥐면 묘한 느낌을 다시 경험하고 싶어 목검을 꺼내 들었다. 보통 사람이 한 손으로 들면 휘두르기 힘들 정도로 무거운 목검이었다. 처음 만졌을 때부터 재질이 무엇일까 생각했던 목검은 진성의 손에 딱 맞았다. 검을 이리저리 돌려보던 진성은 무명검법에 아주 잘 맞는 목검이라 확신했다. 균형감부터 시작해 검의 길이와 적당한 무게는 무명검법의 일부를 펼치자 정말 무명검법, 아니 십허검법에 딱 맞음을 보여주었다. 좁은 객실은 아니었으나 이 목검을 들고 무명검법을 펼칠 정도로 넓지도 않아 진성은 목검을 들고 마음껏 휘둘러보고 싶은 욕구를 참아야했다. 탁자를 구석으로 옮겨보기도 했지만 그리 높지 않은 천장과 침대와 가구가 배치된 객실에서 무명검법을 수련하기는 불가능했다. 목검을 침대에 던진 진성은 그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가 그 서책이 떠올라 가방에서 오래 된 서책을 꺼내들었다. 일본어도, 한글도 아닌 약간 이상한 글로 된 책이었는데 정확히 글이라고 보기에도 힘들었다. 그렇다고 고대 이집트와 같은 상형문자라 하기도 어려워 알기 어려웠다. 한글과 아주 유사한 모양이기는 한데... 무슨 문양 같기도 하고 한 페이지 전체를 멀리서 보면 특정한 무늬를 나타내는 것 같기도 해서 진성은 두 눈을 부릅뜨고 마치 매직 아이를 보는 것처럼 집중도 하고 초점을 흐리게 만들기도 했다. 뭔가 떠오를 듯 하면서도 보이지 않아 괜히 눈만 아팠다. 시계를 보니 2시 30분, 해가 뜨려면 아직도 몇 시간이나 남았다. 침대에 눕는다고 해서 쉽사리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진성은 그 이상한 서책을 들고는 베란다의 의자에 앉았다. 산속에서 느끼는 밤의 정취와 도시의 밤은 완전히 달랐지만 그래도 서늘한 느낌이 온 몸을 감싸 정신이 드는 것만 같았다. 약한 조명에 서책을 든 진성은 제일 첫 장에 있는 이상한 그림을 보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분명 십허검법을 익힌 사람이 남긴 물건이니 십허검법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무거운 목검과 같이 남긴 걸 보면, 이 서책의 내용과 문양은 십허검법, 진성이 무명검법이라 부르는 검법과 필시 연결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진성은 뜻 모를 문양을 보면서 무명소검, 무명대검, 무명비검의 묘리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가늘고 부드러운 느낌의 무명소검, 패도적이며 거친 기세의 무명대검, 도저히 막을 수 없는 무명비검... 그 이후의 단계인 무명기검과 무명9절초. 축지법을 익혀 무명비검은 돌파했지만 무명기검과 무명9절초는 아직 실마리도 못 잡고 있는 형편이었다. "... 무명기검이라..." 무명기검이라는 말을 입으로 내뱉었지만 정작 진성이 원하는 동작은 타메오 다케시가 임종 직전 보여준 그 움직임이었다. 모든 것을 다 빨아들이고 포용할 것만 같은 움직임, 숨 막힐 정도의 압박은 아니지만 어느새 정신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동작들. 사부 유조의 죽음으로 진성은 경의 단계를 지나 유의 단계에 돌입할 수 있었다. 이번에 타메오 다케시의 죽음으로 진성은 어떤 단계가 아니라 경지 위에 있는 차원이 다른 경지를 직접 눈으로 맛봤다. "휴우..." 아무리 골머리를 싸안고 고민을 해도 안 될 것은 되지 않는다. 진성은 털썩 침대 위에 누웠고 곧 눈을 감았다. 꿈속에서 아버지, 어머니를 만나고 사부 유조의 얼굴을 봤으면... 하면서 진성은 서서히 잠이 들었다. "진성아 일어나라." 오랜만에 늦게 일어난 진성을 깨운 사람은 한석이었다. 현준 역시 늦게 일어나는 사람으로 유명해 서재필은 할 수 없이 한석에게 부탁했고 한석 역시 흔쾌히 진성의 방으로 왔다. "어.. 한석이구나." "현준이 아니라서 실망했냐?" 게슴츠레 눈을 뜨고 말한 진성의 대답에 한석은 유쾌하게 되물었다. "뭐? 하하. 사실 꿈으로 부모님과 사부님을 만났거든. 그렇다고 그리 미안해 할 필요는 없다. 세 분께서 빨리 가라며 성화가 대단했거든. 밥 먹으러 가야지. 조금만 기다려라. 금방 씻고 나올 테니까." 진성의 사정은 한석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부모님이 안 계셔 현준과 같이 지낸지 꽤 오래 되었고 보통 사람과는 달리 무술의 고수인데 무술을 전수해 주신 분마저 유명을 달리했다는 사실.. 로플의 프로 게이머들 모두 대강의 사정을 알고 있었다. 모두들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흔들림이 없이 자기 할 몫 이상으로 해 주는 진성의 모습에 겉으로 표현은 하지 않지만 같은 팀 소속이라 자랑스러워했다. 한석 역시 마찬가지였다. "빨리 나와라. 딱 십 분만 기다릴 테니까..." 한석은 진성의 꾸며내지 않은, 저런 쾌활함이 부러웠다. 도대체 어디에서 저런 유쾌함이 흘러나올까? 진성에 비해 부족함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자신조차도 연습이 과중하거나 하면 짜증이 나기 일쑤였다. 한석은 게이머 스키피오로 알려진 진성의 게임 실력보다 평소의 모습에서 더 많은 것을 얻는다고 생각했다. "조금만 기다려라. 치사하게 먼저 가기 없기다." 십오 분이 지나서야 진성은 욕실에서 웃통을 벗은 채 나왔고 한석은 침대 위에 앉아 진성이 보다만 한글과 비슷하지만 자세히 보면 완전히 다른 글이 쓰인 서책을 손에 들고 있었다. 옷을 입고 있을 때는 잘 모르지만 일단 웃통을 벗은 진성의 몸매는 누구나 부러워할 만했다. 수영 선수들처럼 잘 빠진 데다 굳은 근육이 균형 있게 자리해 우락부락하지는 않지만 보기에 아주 좋았다. "이 책.. 무슨 책이야?" "아, 그 책? 아는 분에게 받은 책인데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니까." "이거... 가림토 같은데." "뭐?" "가림토라고 학계에서 검증되지는 않았지만 한글 이전에 있었던 고유의 언어라고 하던데... 내가 예전에 학교 어느 교수님 연구실에서 아주 특이한 아르바이트 하면서 봤던 그림이라 아직 기억이 나는데... 모양이 비슷해. 이 서책은 가림토로 쓰인 모양이야." 한석의 말에 진성은 놀라웠다. 무슨 글인지 몰랐는데 한석이 알고 있다니... 역시 세상은 단순 비교가 통하지 않는 곳이다. 한석의 확신에 가까운 말에 진성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가림토라면 그것을 번역하는 전문가가 있을 테고... 그렇게만 되면 내용을 알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리라. "밥 먹으러 가자." 진성이 옷을 다 입는 동안 한석은 알지도 못하는 그 서책을 뒤적뒤적하더니 이내 침대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복도로 나가 이층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걸어갔다. 아침을 다 먹은 일행 중 오늘 단체전 게임이 없는 진성, 현호, 혜연은 일본 방송국에서의 섭외요청으로 다른 게이머와는 별도의 스케줄대로 움직여야 했다. 옷차림도 진성, 현호, 혜연 세 사람은 굉장히 화사해 마치 소풍가는 것과 같았고 나머지 게이머들은 평소의 옷차림이었다. 어차피 대회장 대기실로 가서 게임용 복장을 갖춰야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방송국으로 먼저 가서 제반 사항을 정리한 다음에 바로 대회장으로 갈 테니까 그렇게 알고... 은주가 같이 있을 테니 진성아 너무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 서재필의 걱정스런 말이 무색하도록 진성과 혜연, 현호는 정말 소풍가는 옷차림에 어울리는 표정이었다. "놀러 가는 것 아니니까 잘 해라." "네, 알겠습니다." 경호원 뿐 아니라 코디들도 둘로 나누었다. 어디를 가든 차는 항상 다섯 대가 움직였기 때문에 진성 일행이 차 두 대, 대회장으로 가는 현준 일행이 차 세 대로 가기로 했다. "진성아, 꼭 이기마." "당연한 말 아니야? 이기지 못하면 재필이 형이 가만 놔두지 않을 텐데... 아닌가?" "... 경기하러 가는 사람에게 그런 말 하면 되냐?" "너... 어제 나한테 했던 말 기억 안 나지?" 진성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 준이 형 빨리 가죠." 현준은 차창 밖으로 뺀 얼굴이 재빨리 넣더니 이준에게 빨리 가자며 너스레를 떨었다. 팀에서 제일 고참격인 진성과 현준이 한바탕 소란을 떨자 프로팀 전체의 분위기는 부드러워졌다. 서재필은 그런 모습에 자신이 할 일을 대신한 두 사람이 무척이나 든든하게 느껴졌다. "그럼 출발 할까?" 호텔 앞에 세워진 다섯 대의 차는 일제히 밖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NKO 방송국은 일본에서 10대와 20대에게 강한 지지를 받고 있는 엔터테인먼트 전문 방송국이었다. 주로 연예계의 이야기나 스타들의 생활상을 밀착 취재해 방송하거나 직접 제작하지 않은 해외의 화제 드라마를 수입하던 NKO 방송국은 문명 온라인과 관련해 미리 시장을 예상하고 선점해 지금은 게임 전문 채널로 인식을 바꿔가는 중이었다. 정문에서부터 수백 명의 팬들이 미리 로플 프로 게이머들의 방문을 알았는지 진을 쳤는데 경비원들과 팬들 사이에 작은 실랑이는 기본이었고 심지어 방송국 안으로 들어가려는 차가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사람들이 붐볐다. 천신만고 끝에 방송국 안으로 도착한 진성과 혜연 그리고 현호는 관계자의 안내에 따라 공개 홀로 갔는데 다시 한 번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밖에 있는 사람들의 두 배는 될 듯한 관객들이 세 사람이 등장하자 홀이 떠나갈 듯 환호성을 지른 것이다. "휘유... 대단하네." "이게 다 스키피오의 힘 아니겠어요?" 이마에 땀을 훔치는 진성의 옆에 선 혜연은 자신과 현호가 아니라 게이머 스키피오를 보기 위해 이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반은 농담이었지만 반은 씁쓸했다. 실력 뿐 아니라 문명 온라인 게이머를 한 기간, 경력에서 게이머 스키피오를 능가할 게이머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어떨 때는 같은 팀이라는 것이 너무도 좋았지만 또 어떨 때는 자괴감에 빠질 정도로 싫을 때가 있었다. "스키피오의 힘? 아니지. 로플 프로팀의 힘이겠지." 진성은 별 거 아니라는 투로 말하고는 무대 가운데로 걸어갔다. 혜연과 현호는 진성의 말에 서로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세 사람이 무대 가운데에 도착하자 미리 나와 있던 사회자와 PD들과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아직 녹화는 아니어서 그리 긴장되지는 않지만 세 사람 모두 녹화보다 경기가 더 쉽다고 생각했다. "일본어, 상당히 잘 하시네요." 녹화를 다 마치고 나오는 진성에게 서재필의 비서인 서은주가 다가서며 물었다. 같이 온 서재필은 방송의 방향에 대해 자세히 방송 관계자들과 얘기한 다음 곧바로 대회장으로 떠났고 그 뒤는 서은주가 맡았는데 막상 진성이 거의 막힘이 없는 일본어를 구사해 서은주가 해야 할 통역의 역할을 대신해 버려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개인적으로 아는 분이 일본에 계셔서... 배웠어요." 전문 용어는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일상의 대화나 게임 관련 대화는 그리 막힘이 없었다. 그 사실은 현호와 혜연 조차 몰라 놀라기는 서은주와 마찬가지였다. "중국어도 잘 한다고 들었는데... 아닌가요? 설마, 중국에 아는 분이 있어 배웠나요?" 서은주는 서재필을 통해 진성이 중국어에 능통하다는 사실을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일본어에 중국어까지... 게이머로서 시간이 없을 텐데 도대체 언제 배웠을까? 필요는 배움의 어머니라고 하지만... 언어라는 것이 재능이 없으면 배우기 힘든 것 중의 하나였다. "어떻게 아셨어요?" "..." 진성의 대답 같지 않은 대답에 서은주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농담으로 물었던 게 진담이었다니... "정말인가요?" "네... 정말이에요. 대만과 북경에 아는 분이 있어요." "그..그렇군요. 자, 다 끝났으니 우리도 대회장으로 가도록 해요." 서은주는 재빨리 일행들을 챙겼고 곧 다시 한 번 더 늘어난 팬들을 뚫고 방송국을 나섰다. 진성과 혜연, 현호가 대회장에 도착했을 무렵 게임은 거의 끝이 나고 있었다. 톱니바퀴의 이가 맞물려 돌아가듯 틈이 거의 없이 플레이가 잘 맞는 네 사람, 현준, 한석, 진규, 범현의 호흡은 거의 완벽했다. 오늘은 유나가 아니라 범현이 가세했는데 모두 남자 게이머여서 그런지 굉장한 속도감이 관중들을 즐겁게 했다. "대단한데... 게임 시작한 지 삼 십 분 정도 된 것 같지?" "31분 됐어요. 이제 곧 끝나겠는데요." 진성의 말에 과묵한 현호가 말을 받았다. 로플의 게이머 네 명이 동시에 미치지 않는 한 지고 싶어도 지기 힘든 상황이어서 이제 대기실로 들어온 세 사람에게는 마음 편히 경기를 볼 여유가 생겼다. "끝났군." 진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대 게이머들은 게임 오버를 선언했고 그와 동시에 관중들의 함성 소리가 대회장을 진동시켰다. 아직 문명 온라인의 기술력을 따라올 게임 회사가 없기도 했지만 게임성에 있어 전략 시뮬레이션에서는 독보적인 문명 온라인은 장기간 판매와 프로 리그의 인기에서 톱을 기록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 기간 동안 양산된 문명 온라인의 매니아들은 더욱 더 문명 온라인을 국민 게임으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잘 끝났냐?" 게임이 끝나자 대기실 내에 설치된 비전에서 눈을 뗀 서재필이 진성에게로 다가오며 물었다. "그냥 질문에 대답하는 것인데요 뭘..." 서재필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다. 조금 있으면 서울에서 조팀장이 이곳으로 온다고 하더구나. 너와 만나 할 얘기가 있다고 하던데...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다만 급한 일이라고 하니... 일단 사람 하나를 공항에 보냈으니 점심 먹고 나면 도착할 거다." "조팀장님이요?" 분명히 몸이 두 개라도 바쁠 조팀장이 비행기를 타고 이곳 동경으로 오다니... 동경이 서울에서 그다지 멀지 않지만 그래도 하루에 왔다 가기에는 가까운 곳도 아니었다. 무슨 일일까? 순간 얼마 전에 자신이 말했던 그 일 때문이 아닐까 진성은 생각했다. "자세한 일은 만나서 하겠다고 하더라." "네..."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다. 지금 진성이 너는 로플의 프로 게이머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로플 그룹 전체로 보면 게이머보다는 프로그래머로서의 진성이 더 필요할지 모르지만 지금은 게이머 스키피오였다. 서재필은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것 때문에 한 가지에 피해를 줘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당연하지요." "그래... 이제 들어오겠구나. 수고했다고 말해야지." "네." 서재필이 대기실로 들어오는 문을 바라보며 말하자 진성은 가볍게 대답하며 현호와 혜연 그리고 유나가 서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 때, 문이 열리며 땀으로 범벅인 네 명의 로플 전사가 대기실 안으로 보무도 당당하게 들어섰다. "하하하. 진성아 이겼다." "수고했다. 정말 잘 하더라." 진성은 게임 전체를 다 보지는 못했지만 마지막 상황을 보고 그 전 경기 운영을 추측해 말했다. "다 보지도 않고는... 아무튼 고맙다. 나보다는 오늘 진규와 범현이 정말 잘 했거든." "성진규, 조범현... 수고했다." 현준의 말에 진성은 진지하게 진규와 범현에게로 다가가 말을 건넸고 두 사람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특히 겉으로 태연한 척 너스레를 떨곤 하던 범현은 자신의 몫을 제대로 했다는 진성의 말에 더 기쁨을 참지 못하는 듯했다. "자, 수고했다. 오늘과 내일은 아무 게임이 없으니 일단 쉬도록 하자. 간단히 씻고 삼십 분 후에 이동한다. OK?" "네!" 비록 첫 게임이라 앞으로 꽤 많은 게임이 남아 있어 마음의 긴장을 완전히 풀 수는 없지만 첫 게임이 잘 풀려 로플의 게이머들은 쓸데없는 긴장을 하지 않게 되어 서재필은 적잖게 마음이 놓였다. 연습한 만큼 실력을 발휘해 진다면 그것은 아무 말 할 수 없지만 긴장해 제 실력을 보이지도 못하고 진다면... 억울해서 잠도 안 올 게 틀림이 없었다. 조용했던 대기실은 늘어난 게이머들로 부산했고 그 주변을 뛰어다니는 코디들도 북적댔다. 서재필은 한쪽 모서리의 의자에 앉아 그런 모습을 보면서 웃음을 지었다. 이런 것이야말로 사람 사는 모습인 것이다. -------------------------------------------------------- 이연참 올라갑니다.. ^^; -------------------------------------------------------- TGP1(The Gamer Part 1) [181 회] 친구 수십 명이 한꺼번에 식사를 할 만한 곳은 예약을 하지 않으면 거의 불가능했다. 다행히 그 어떤 상황에서도 앞일을 챙기는 서재필이 미리 예약을 꼼꼼히 확인해 호텔 주변의 한 식당에서 로플 선수단 전원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덴뿌라 소바를 맛있게 먹던 진성은 누군가 어깨를 손가락으로 두드리자 뒤를 바라보았다. "아... 조팀장님?" "진성아, 배고프다. 같이 좀 먹자." 조진철 팀장은 넉살 좋게 말했다. "아. 네..." 비좁지는 않지만 남지도 않는 자리에 막무가내로 조팀장이 파고들자 진성과 옆에 있던 현준이 자리를 벌려야 했다. 배가 고파 한참 잘 먹고 있던 현준은 낯익은 사람이 다가와 가운데에 떡 허니 앉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아.. 조..팀..장....님..." 곧 누구인지 알게 된 현준. "...." 고의로 그랬는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현준의 입안에 있던 자잘한 면발이 '팀'이라는 말 전후로 조팀장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 면발로 만들어진 폭탄의 범위 안에 들었던 진성은 엄청난 속도로 뒤로 물러나 다행히 폭탄은 조팀장 만을 덮쳤다. "...." 면발을 퍼부은 사람, 얼굴이 온통 면발로 덮인 사람. 두 사람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시간이 잠시 멈춘 듯했다. "푸하하하.." 대신 그 옆에 있었던 게이머와 코디들, 경호원들의 웃음 물결이 퍼지기 시작했다. 멀리 있어 상황을 잘 몰랐던 사람들은 전해 오는 이야기를 들으며 웃음을 참지 못해 제 2차 면발 대전이 일어나기도 했다. "현준아... 아무리 반가워도 그렇지.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것 아니냐? 음... 회장님 전화번호가 뭐더라.." 약간씩 떨려오는 조팀장의 목소리는 그냥 들어보면 담담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 조팀장님!" 현준은 조팀장에게 달라붙어 면발을 떼어내고 하얀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막 진정이 되려는 순간, 진규의 말로 인해 현준의 얼굴은 샛노랗게 변하고 말았다. "현준이 형, 아까 그 물수건으로... 얼굴도 닦고 팔도 닦고... 겨드랑이도.." "그만!"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을 들었던 조팀장은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한바탕 요란한 점심을 먹은 뒤 조팀장과 진성은 따로 자리를 가졌다. 호텔의 꼭대기 스카이라운지에 음료수를 시켜 놓고는 마주 앉았다. 진성은 조팀장의 얼굴만 봐도... 그 면발이 떠올라 웃음을 참기 힘들었지만 필사의 노력으로 꾹꾹 눌렀다. "진성아... 내가 여기까지 직접 찾아온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조팀장은 짐짓 진지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말씀하세요." 진성은 조팀장이 직접 왔다는 것만으로도 아주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로플 그룹 전체를 통틀어도 개발에 대한 영향력에 있어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사람이 바로 조팀장이었다. "하나는... 네가 말한 로플 OS에 대한 것이다. 그룹에서는 네가 말한 대로 OS에 대해 사업을 하기로 방향을 거의 정한 상태다. 아직 외부에 알리지 않고 내부적으로 계획을 정비하는 단계지만 그룹 전체가 그 프로젝트를 지지하기로 한 것 같다." 조팀장은 담담한 척 했지만 설레는 듯 말하는 동안에 다리를 떨고 있었다. "잘 됐네요." "결과가 좋아야 잘 된 거지." 조팀장의 말에 진성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조팀장은 처음부터 줄기차게 자신이 참여하지 않는다면 100% 실패할 프로젝트라고 공언해 왔었다. 조팀장의 짧은 말이 무엇인지 진성은 알고도 남았다. "그런데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진성은 얼굴에 조금 남아 있던 웃음기를 완전히 없애고 조팀장에게 물었다. "문제라... 당연히 있지. 회사에서는 나더러 로플 OS 프로젝트를 맡으라고 하는데... 나는 반대했다." 로플 OS에 대한 아이디어는 진성 자신이 냈지만 그것을 수행할 사람으로는 조팀장이 적격이었다. 국내에서 시스템 프로그래밍에 대해서는 단연 독보적인 존재이며 세계에 내 놓아도 그리 빠지지 않는 사람인 조팀장이 아니면 누가 팀장을 맡을 수 있을까? 나현수도 있지만 아직 경험과 연륜에서 조팀장을 따를 수는 없었다. "그럼 누가 하는 겁니까?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진성은 조팀장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사람이 떠오르지 않아 몹시도 궁금했다. "... 바로 너." "네?" 조팀장이 잘 가르쳐 주고 열심히 하면 로플 OS에 대해 어느 정도 기여는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진성에게 조팀장의 말은 청천벽력과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봐도 알 수 없는 OS에 대한 개념과 사실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데 이제는 아예 프로젝트 팀장을 맡으라니... 이건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안 돼요!" 진성은 반사적으로 외쳤다. 순간 스카이라운지의 다른 사람들이 조팀장과 진성이 앉은 자리를 향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왜?" 조팀장은 그런 창피에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진지하게 물었다. "실력이 안 되잖아요. 이제 겨우 학부생 2학년인데... 뭘 믿고 맡깁니까? 돈이 일, 이억이 들어가는 게 아닐 텐데... 이왕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야.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야지." 조팀장은 진성의 말을 그대로 인정했다. "그런데 왜 그런 살벌한 농담을 하시는 겁니까?" "농담 아니야. 내가 예전에 네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프로젝트는 실패할 거라고 말한 적이 있지?" "네..." 진성은 조팀장의 담담하면서도 꼬치꼬치 묻는 듯한 태도에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물론 네가 OS에 대해 잘 모르고 기본 개념도 제대로 잡혀 있지 않아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듣지 못할 거야. 그렇지?" "네... 아시면서.. 왜?" "너 옛날에 삼선전자 해킹할 때 네가 네트워크에 대해 자세히 알아서 해킹에 성공했냐?" "아... 아니요." 진성은 조팀장에게 말리는 느낌이었다. 이러다가는... "물론 OS와 해킹은 전혀 다른 성질의 문제라 일방적으로 생각할 수는 없지만 네 능력이 하나라면 그 가상현실에서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백 아니 천, 그 이상일 거다.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내가 왜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너를 팀장으로 해야 한다고 로플 그룹 회의에서 바득바득 우기다 여기까지 날아왔는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알아야 한다. 이건 내 생각이지만 기존의 프로그래밍 방법으로 로플 OS를 만든다는 것은 봉사가 코끼리 만지는 격이다. 그렇게 해서는 백 번 해 봐야 백 번 다 실패하고 만다.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기 때문에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어..어떻게요?" 조팀장의 진지한 말에 고개는 끄덕일 수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는 듣는 입장이지 자신이 직접 그 일을 해야 한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진성은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전에 나한테 얘기한 것 같은데... 너 처음 가상현실 테스터 할 때 한 말 기억 안나? 아무튼, 네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네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가상현실 속에서 너처럼 직접적으로 가상현실을 다룰 수 있는 툴을 제작하는 일이다. 너 혼자 모든 것을 할 수가 없으니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툴로 만드는 것이지. 물론 네가 직접 해야만 하는 일도 있겠지." "..."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겠지. 완전히 프로그래밍의 방법부터 다르기 때문에 내가 팀장, 아니 다른 누가 팀장을 해 봐야 앞으로의 방향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뿐이지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 같다. 정말 무슨 문제가 있으면 나나 네 옆에 있을 사람이 충고하고 그것을 네가 결정하는 게 훨씬 더 나은 시스템이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래서 로플 그룹에 네가 없는 동안 내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회장님과 로플 소프트 사장님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진성은 조팀장의 말에 반박할 말을 잃어버렸다. 대신 생각해 낸 게 마지막 보루 진회장과 이희철 사장이었다. "두 분은 내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셨다. 너를 믿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나를 믿는 것이겠지." 앞이 캄캄해졌다. 로플 그룹 서열 1, 2위가 찬성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만드는 방법 자체가 완전히 달라질 거라는 얘기는 충분히 이해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작업은 딱 한 번 밀리터리 아트 온라인의 개발팀장을 한 것밖에 없는데... 엄청난 규모가 될 로플 OS 개발의 팀장이 되라니... 진성은 할 말이 없었다. 처음에 자신이 시작해 그 꿈을 다른 사람에게 전했지만 그게 돌고 돌아 이제는 피하기 힘든 화살로 자신의 심장을 향해 날아오는 느낌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네가 열심히 정신 차려서 해야겠지만 컴퓨터 단말기로 노가다 같은 일은 하지 않을 테니까..." "그게 더 걱정이라구요. 차라리 노가다라면 얼마든지 하지요." "강팀장,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 막무가내의 조팀장이었다. "음... 로플 연구소는 비공식적으로 며칠 전부터 생겼는데 이번 월드 시리즈가 끝나면 아마도 네 위치가 그곳으로 옮겨지겠지. 주위 눈이 있어 연구소 소장은 내가 맡겠지만 OS 프로젝트의 리더는 진성이 너다. 알겠지?" "..." "감격해서 대답도 못하는 모양이군. 내 덧붙여 기쁜 소식을 전해 주지. 비밀리에 OS 관련 전문가들 중 해외에 있는 사람들을 지금 접촉하고 있는 중이야. 세계에서도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이지... 너와 같이 일하게 될 사람들 중 적어도 백 명은 해외에서 인정받는 컴퓨터 공학자와 인체 공학자, 심리학자들이겠지. 어때? 기쁘지?" 마치 아이를 놀리는 짓궂은 어른 같았다. "..." 진성은 입도 뻥긋 하지 않았다. 자신이 없는 동안 이런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니.. 이렇게 통보만 하려면 그냥 전화로 말만 하지 동경으로 왜 찾아왔을까? 순간 진성은 조팀장이 할 말은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하고 싶어 조팀장께서 직접 이곳으로 오신 건가요?" "역시 진성이는 날카로워..." 조팀장은 가지고 온 가방에서 몇 가지 서류를 꺼냈다. "이게 다 뭔가요?" 진성은 뭔가 계약서와 비슷한 서류를 펼쳐 탁자에 쫘 까는 조팀장의 행동이 의심스러웠다. 혹시... 팀장으로 계약하자는 건가? "아마도 너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예전에 가상현실에서 지금의 너처럼 곧바로 프로그래밍 하는 방법을 특허 낸 적이 있거든. 기억해?" "아... 그런 말 들은 것 같기도 한데요." 진성은 로플이 자소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을 때 프로 게이머 겸 테스터로 활동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언뜻 들었음을 기억해 냈다. "아무튼... 그 특허를 출원했는데 얼마 전에 통과되었다. 아니, 국내 특허는 예전에 했지만 미국과 유럽의 주요한 나라들에도 무사히 특허가 받아들여졌다." "그런데요?" 진성은 그것과 조팀장이 동경으로 직접 온 것이 무슨 상관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런... 그 특허의 권리자가 바로 너 강진성이란 말이다." 조팀장은 얼굴 가득 웃으며 말했다. "네?" "네 이름으로 그 때 특허를 출원했고 오래지 않아 국내 특허는 따냈지. 그 후, 시간을 가지고 해외 특허도 은밀히 도전했는데 이번에 무더기로 특허가 출원되었다." "그..그래서요?" "뭐가 그래서야? 그룹에서 그 특허 내용을 사용하기 위해 특허권자와 계약을 하려는 거지." "네? 계약이요? 그런데 그 특허는 회사에서 일하다... 얻은 것 아닌가요?" "어허... 이 녀석... 아무리 그래도 회사는 함부로 특허가 난 것을 그대로 사용할 수도 없고 사용하면 당연히 그만한 돈을 지불해야 한다. 이 녀석아, 신문 좀 보고 살아라." "... 그런가요?" "그렇지. 그룹에서는 나중에 괜히 껄끄러운 일이 발생하기 전에 원천적으로 너와 계약을 해서 로플 그룹이 그 특허 권리를 가지고 있을 요량으로 너와 계약을 먼저 하겠다는 것이지. 내 생각이지만 적어도 이 년 내에 그 특허로 인해 너는... 휴우.. 앞으로 나를 못 본 채 하지는 마라." "네? 네..." 진성은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잘 한 번 살펴봐라." 조팀장이 건네준 계약서를 대충 읽어보던 진성은 뭐가 좋은지 나쁜지 알 방법이 없었다. 대충 로열티로 특허 사용 제품의 10%를 지불하는 것은 눈에 들어왔다. "여기에 사인하면 되나요?" "진성아, 이 계약 내용 알겠냐?" "..." 진성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계약하라니.. 할 뿐. 아버지와 같은 진회장이 이미 이와 같은 계약에 대해 다 알고 있을 만큼 굳이 자세한 내막을 몰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휴우... 옛날 너 처음 프로 게이머 계약할 때 이희철 사장님이 황당했다고 하던데... 그 기분을 이제 알겠다. 그 때도 너 별 생각 없었다며?" "..." 진성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잘 봐라. 다른 것은 별로 신경 쓸 것 없고... 가장 중요한 항목은 두 가지다. 하나는 계약금, 바로 이곳인데 공란으로 되어 있지. 이것은 나중에 제품이 나올 때 합의해서 쓰는 것으로 보면 된다. 그리고 다음이 로열티지... 10%면 아주 좋은 조건이니까." "그런데 특허를 사용해 무슨 제품을 만드는 건가요?" 진성의 말에 조팀장은 할 말을 잃었다. 조금 전까지 설명했던 내용이 바로 그것이었는데.... "진성아, 네가 로플 OS 프로젝트에 들어와 제일 먼저 개발해야 하는 게 바로 OS나 다른 프로그램의 제작을 위한 프로그램이다. 그 제작도구가 개발되고 가상현실 기술이 공개되면 아마 전 세계적으로 가장 각광을 받을 프로그래밍 제작도구가 바로 그것일 거다. 그렇게 본다면 그 툴은 지금 마이크로조프트의 제작도구보다 훨씬 더 큰 영향력을 끼칠 게 틀림이 없겠지." "그..그렇군요." 진성은 이제야 조팀장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 그리고 왜 계약서를 가지고 이곳으로 날아왔는지도. 또한 조팀장이 직접 이렇게 움직일 정도라면 기술 공개와 관련한 사항들이 많이 진척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언제쯤 기술 공개가 될 예정입니까?" "음... 아직 결정되지는 않았지만 너와 내가 그 제작 도구를 완성하면 곧 기술공개가 이루어질 거다. 아마도.. 삼 년 내에는 이뤄지겠지. 너무 시간을 끌어도 좋지 않으니까." "네? 아... 네..." 진성은 조팀장의 세세한 설명을 들어가면서 계약서를 살펴보고는 제일 아래에 있는 공란에 사인을 했다. 로플 그룹의 총수인 진회장의 사인은 그 왼쪽에 이미 된 상태였다. "이제 내가 온 이유 중 하나는 해결됐군. 진성아, 네가 말했던 그것... 문명 온라인 김팀장에게 물었더니 한 번도 보고된 적이 없는 것이라 하더라. 급히 여러 부분을 살폈는데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 거의 단정 지어 말했는데.. 내 판단은 문명 온라인 게임이 아니라... 그 바탕인 가상현실 때문인 것 같다." 왔던 일을 마무리 짓자 조팀장의 목소리는 약간 경쾌해졌다. "저도 사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한 번이면 무시하겠지만 앞으로도 그러면... 그 때는 정밀 검진을 한 번 받아봐야 할 듯도 하다. 아직 회장님이나 사장님께서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내 말, 알겠지?" "네..." "너는 이제 혼자의 몸이 아니다. 너에게 로플 그룹은 굉장한 기대를 걸고 있다. 몸조심해라. 앞으로 계속 그런 일이 생긴다면, 로플 소프트 소속 의학팀을 통째로 너에게 보내 체크하게 만들 수도 있으니까. 내가 아니라 회장님과 사장님이 그렇게 만들 테니... 몸조심해라." "네, 알겠습니다." 진성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듣자하니 너 일본에서 유산을 상속받았다며?" "네... 그런데 어떻게?" "지금 회장님과 사장님을 비롯해 고위층 사람들은 모두 다 알고 있던데... 그 액수가 보통이 아니라며? 이야... 진성이 너는 욕심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돈이 막 굴러오는 것 같다. 휘유... 이 계약으로 인해 네가 얼마나 벌어들일지 나는 상상도 가지 않는다. 진성아, 정말 나를 못 본 체 하면 안 된다. 하긴 나도... 아주 큰 떡고물이 떨어질 테지만." "... 절대 그럴 일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믿으마. 나는 갈 테니 게임 열심히 하고..." "네." 조팀장은 서둘러 진성과 같이 밖으로 나갔다. 조팀장은 서재필과 만나 이런 저런 얘기를 하더니 곧 헤어져 공항으로 이동했다. 오전에 방송국 갔다 오고 오후에는 조팀장과 이야기 한 뒤에 간단히 산책을 하며 쉬어 몸은 피곤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팀장에서 들은 이야기와 그 계약으로 인해 진성은 골치가 아팠다. 예전에 아무것도 모르던 그 때, 자신의 이름으로 출원했던 특허로 그룹과 자신이 계약을 맺다니... 돈이 문제가 아니라 진성은 그에 따른 책임이 더욱 커질 것이 두려웠다. 원래 가진 능력보다 더 큰 것을 원하면 누구나 두렵고 떨리기 마련이다. 가상현실에서의 능력은 진성이 원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우연으로 인해 선택된 것과 다름이 없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진성이 아니라 현준이 그 당시 사고를 당했다면 지금쯤 로플 그룹이 모두 현준을 중심으로 돌고 있을 것이다. 진성은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을 계속했다. '내가 아니었다면... 현준이었다면... 그랬다면... 다른 사람이었다면..'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지금, 다른 것이 아닌 게임에만 집중했을 것이고 현준처럼 앞으로의 장래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사부 유조와의 관계는 물론이고 유맹이란 단체도 알지 못했을 게 당연했다. 그러고 보니 최근 삶의 큰 변화는 모두 가상현실로 인한 것이지 자신이 뭔가 노력을 해서 얻은 성과는 결코 아니었다. 언제라도 가상현실과의 그 연결고리가 끊어진다면 자신은 한낱 쥬신대 컴퓨터 공학과 2학년 휴학생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게임 개발에는 경험이 있어 그런대로 시행착오를 겪으며 나아갈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솔직히 불가능했다. 조팀장 레벨까지 갈 수 있을지도 모를 노릇이다. "휴우..." 한숨만 나왔다. 자신의 능력이 아닌, 어디서 온 것인지도 모르는 능력으로 쌓은 탑은... 그 능력이 사라지면 와르르 무너지고 말 것이다. 바람이라도 조금 불면 순식간에 무너질 모래로 쌓은 탑인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음... 그 때는 팔극신권 도장이나 열어야 할까?" 자신이 생각해 내고서도 웃긴지 진성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데카츠처럼 도장을 지어 놓고 후배들을 교육시키며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가상현실과의 그 연결이 끊어진다 하더라도 몸으로 익힌 팔극신권은 사라지지 않을 게 분명했다. "어이, 강진성!" 현준의 목소리였다. 시계를 보니 밤 10시 30분이었는데... 진성은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밖에는 현준과 한석이 서 있었는데 현준은 맥주 두 병을 들고 있었고 한석은 안주로 먹을 만한 것들을 푸짐하게 챙겨 온 모양이었다. 진성의 말이 없어도 막무가내 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은 진성과 함께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세 사람만 모여 술을 마셔 다들 기분이 좋은 듯했다. 술에 취하지는 않았지만 적당히 술을 마시자 현준이 진성을 바라보며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진성아, 너는 앞으로 게임 개발자가 되겠지?" "... 그렇겠지. 아니, 아직 몰라. 어쩌면 도장을 차릴지도 모르지." 신기했다. 조금 전까지 그런 생각을 했는데... 현준의 질문에 진성은 반은 농담조로 도장에 대해 말해버렸다. "뭐? 하하하... 그래 맞다. 너는 도장을 차려도 된다. 너라면 성공하겠지?" 현준은 크게 웃었다. 그 웃음 속에는 뭔지 모를 부러움도 섞여 있었다. 사실 진성에게는 선택의 폭이 굉장히 넓었다. 로플 그룹에서 인정받는 게임 개발자인 동시에 굉장한 무술인 팔극신권의 전수자이며 게임에도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으니. 현준은 그게 부러웠다. "넌 뭐 할 거냐?" 진성은 육포를 하나 뜯으며 현준에게 물었다. "나... 음... 아직 모르지만 영화배우 한 번 해 볼까 생각중이다." "뭐? 네가?" 현준의 엉뚱한 말에 진성과 한석은 그대로 얼어버렸다. 영화배우라니... 현준이 영화배우가 되지 말란 법은 없지만 너무도 다른 분야라... 두 사람은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영화배우를 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그래도 뭔가 징조나 낌새가 있어야지 전혀 다른 분야라니. 게임이 영화를 대체할 만한 엔터테인먼트 요소라는 사실은 상당한 공감을 얻고 있지만 그렇다고 게이머가 영화배우와 가깝다는 소리는 절대 아니었다. "내가 하면 안 되는 법이라도 있냐? 예전에 캐스팅 제의가 들어온 적도 있다니까." 현준은 두 사람의 반응에 웃으며 캐스팅 제의라는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진성과 한석은 다시 한 번 더 놀랐다. 게이머에게 누가 캐스팅 제의를 하겠는가? 하지만 현준의 표정은 아주 진지해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만 볼 뿐이었다. "그래? 나는 한 번도 못 들었는데." "쪽팔려서 말 못했지. 그리고 효진씨가 더 기다려 보라고 하더라." "그런데 어떻게 너한테 캐스팅이 들어왔지?" 육포를 하나 뜯던 한석이 이번에 물었다. "음... 이야기를 들어보니 예전 동경에 진성이 너와 같이 왔잖아. 밀리터리 아트 게임쇼에 나올 때 너와 내가 연기한 적이 있었지? 그 때, 그 동영상이 인터넷에 떠돌았는데 영화 관계자 중에 그 영상을 본 사람이 있었나 보더라." "이야... 그렇다면 정말로 영화 데뷔할 수도 있겠네." 한석도 그 때의 그 영상을 본 적이 있었다. 일종의 복수극을 연출한 것이었는데... 아주 리얼했다. "다 꿈이지 뭐." 아직 마음을 굳히지는 못한 모양인지 현준은 가볍게 말했다. "아니야. 효진씨와 네가 같이 영화를 찍으면... 아무리 엉망이더라도 최소 백 만은 볼 테니까... 성공이지 뭐." "... 나는 이왕 한다면 정말 잘하고 싶다." "진심이냐?" 진성은 현준의 눈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당연하지." 정말이었다. "효진씨도 알고 있냐?" 진성의 물음에 현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어머니는?" "당연히 모르시지." 현준은 답답하다는 듯 술잔을 단 번에 비워버렸다. 옆에 있던 한석이 다시 술을 채웠는데 다들 아무런 말이 없었다. 현준은 다시 술을 비우더니 다시 술을 따르는 한석에게 물었다. "한석이 너는 뭐 할 거냐?" "나?" "그래. 너도 계속 게이머로 있을 수만은 없잖아." "나는 게이머로 있을 수만 있다면 계속 있고 싶은데... 어쩔 수 없겠지. 그렇다 하더라도 매니저를 한다거나.. 게임 관련 일을 계속 하고 싶다. 사실, 재필이 형에게 이런 얘기를 했는데... 잘 들어 주더라. 내가 게이머로서 그만 둔다면 아마도 로플 엔터테인먼트에서 일하게 될 것 같다." 진성은 영화배우를 하고 싶다는 현준의 말에도 놀랐지만 이미 서재필과 상의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자신의 앞길을 준비하는 한석의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 그게 정답일 것이다. "생각 잘 했다. 나는 영화배우... 하하하.. 진성이는 도장 사범, 한석이 너는 게임 매니저... 성공하면 내가 가장 돈을 많이 벌겠네. 그치?" "뭐? 하하.. 성공할 경우지." "그래." 비슷한 고민을 하는 것만으로도 세 사람은 같이 술을 먹고 있다는 것이 너무도 좋았다. 같은 나이에, 같은 게임의 프로 게이머로서 이름을 날렸고 이제는 앞날의 걱정까지 같이 하다니... 이런 인연은 결코 가볍게 여길 수는 없었다. "우리 친구지?" "당연하지." 현준의 물음에 한석이 대답했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한석의 물음에 이번에는 진성이 대답했다. -------------------------------------------------------- 오랜만이지요!!! 한꺼번에 두 개를 올립니다. ^^; 재밌게 보세요! -------------------------------------------------------- TGP1(The Gamer Part 1) [182 회] 아만폴로 아시안 리그 예선전이 모두 끝이 났다. 개인전에서는 이변이 없이 한국, 로플 프로팀의 진성이 한 번의 패배를 기록하면서 1위를 차지했고 그 뒤로 일본과 중국 그리고 필리핀의 게이머가 진성을 쫓고 있었다. 어차피 예선전 성적은 그리 큰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본선에서의 성적으로 월드시리즈에 참가할 선수를 뽑게 되어 일본과 중국의 게이머는 예선전에서 제대로 실력을 보이지 않은 게 아닌가 하는 평가도 있었다. 단체전에서는 로플과 삼선전자, 일본의 소냐전자가 공동 1위에 올랐다. 세 팀 모두 한 번의 패배만 기록해 대회의 유력한 우승 후보이자 월드 시리즈 진출 가능성이 가장 높아 다른 팀의 견제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예선전이 끝난 뒤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있어 어떤 팀들은 본국으로 돌아가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동경에 남아 본선을 준비했다. 예선에서 떨어져 본선에 올라가지 못한 팀들은 당연히 철수했지만 로플은 개인전과 단체전 모두 올라가 동경에 계속 있기로 했다. 하지만 진성은 서재필과 함께 서울로 갈 준비를 서둘렀다. 예선전을 치르며 세 번이나 그 이상한 체험을 하게 되어 어쩔 수 없이 정밀 검진을 위해 서울로 돌아가야 했다. 진성이 서울로 가는 이유는 서재필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몰랐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게임 개발 때문에 가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괜찮겠지?" 서재필은 걱정이 앞섰다. 예선전이라 별로 상관이 없지만 그래도 독보적으로 1위를 한 진성의 월드시리즈 진출은 당연했다. 그런데 몸에 이상이 생겨 중도하차 한다면 진성 뿐 아니라 로플 그룹으로서도 굉장한 손해였다. 월드시리즈 개인전 우승 0순위가 바로 진성이었다. "네." 진성의 목소리는 약간 힘이 없었다. 개인전에서 한 번 패한 경기가 바로 몸이 안 좋아서였다. 그 전까지 상대의 게임 운영이 눈에 선명하게 보일 정도의 신기한 체험을 해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곧바로 몸이 아파 진성은 게임 중 기권을 선언하고 말았다. 그 경기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게이머 스키피오의 몸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닐까 의구심을 낳았지만 그 다음 진성은 곧바로 엄청난 실력을 보여 그런 여론을 일축해 버렸다. 비행기에 올라탄 진성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불안했지만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 다른 사람까지 불안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무술로 단련되어 몸에 다른 병이 있지는 않을 거라 확신했고 오늘 새벽에도 운동하는 가운데 별다른 이상이 없어 진성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비행기는 곧 소리를 내며 땅에서 이륙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로 올라가 아래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비행기에서 내린 진성은 입국수속을 마친 뒤 선글라스를 끼고 모자를 푹 눌러쓴 다음 밖으로 나오다 낯익은 얼굴을 보고는 놀랐다. 현준 어머니였다. "어머니..." "진성아, 괜찮으냐?" 오랫동안 보지 못한 아들을 만나는 엄마의 모습이었다. 진성은 꼭 손을 붙잡고 있는 어머니를 모시고 밖에 대기하고 있는 차로 걸어갔다. 다행히 어머니는 택시를 타고 오셔서 그냥 갈 수 있었다. "어떻게 알고 나오셨어요?" 진성이 그 시간에 한국에 도착한다는 사실은 로플에서도 몇 사람밖에 알지 못하는 비밀 중의 비밀이었다. "현준 아버지의 표정이 조금 이상해 내가 꼬치꼬치 물어보지 않았겠니? 그런데 정말 괜찮으냐?" 대충 상황을 짐작했다. 현준 아버지, 진회장이 별로 표정이 좋지 않아 물어 진성의 상태와 한국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알아낸 모양이었다. 한국에 왔으니 진성이 집에서 잠을 자야 하기에 진회장이 그렇게 말한 듯했다. "괜찮아요. 몇 가지 검사는 하겠지만 몸에는 정말 이상이 없어요." "다행이다. 몸조심해라. 다른 것은 나중에도 할 수 있지 않느냐? 건강을 잃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단다." 현준 어머니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어 진성은 그저 고맙고 기쁠 따름이었다. "네, 어머니." 서재필은 조수석에 앉아 앞을 바라보다 힐끔 뒷좌석의 모자(母子)를 바라보았다. 친구의 엄마와 아들의 친구 사이지만 정말 엄마와 아들 같았다. 내심 부러웠다. 문득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니... 아니, 생각하지 말자. 서재필은 억지로 쭉 뻗은 도로를 노려보았다. 진성과 현준 어머니를 태운 차는 곧바로 로플 소프트에서 지원하는 의료 센터로 직행했다. 이미 모든 절차는 다 밟은 상태라 의료 센터에서도 진성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비밀은 잘 지켜졌는지 의료 센터 입구는 한산했고 진성은 여전히 선글라스를 낀 채 안으로 급히 들어갔다. 진성은 곧바로 신체 체크에 들어갔다. 피 검사에서부터 보통의 신체 검진에서 하는 사항과 심전도, MRI 등도 두루 거쳤다. 거기에 보통 운동선수들이 주로 하는 체력 관련 테스트도 빠짐없이 실시했다. 거의 세 시간에 걸쳐 테스트를 받은 진성은 그 전날부터 저녁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아 배가 몹시도 고팠다. "이제 다 끝난 거니?" 현준 어머니는 그 때까지도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네... 대충요. 배가 너무 고프네요. 뭐 좀 먹으러 가야겠어요. 어머니도 배고프지요?" "그럴까? 그 서재필이라는 사람도 같이 가는 게 좋지 않겠니?" 현준 어머니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그럴까요?" "그러자구나. 그 사람, 조금 외로워 보이던데..." "네?" 진성은 현준 어머니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서재필이 외로워 보이다니... 현준 어머니가 그렇게 말한다면 뭔가 이유가 있겠지만... 진성은 꽤 오랜 기간을 같이 지내면서 그런 마음은 단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식사 같이 하지 않겠어요?" 서재필이 안에서 나오자 현준 어머니는 손짓을 하며 말했고 서재필은 스스럼없이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지친 진성과 서재필 그리고 현준 어머니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푸짐한 한정식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검사결과는 양호했다. 아니 이 이상 건강할 수 없을 정도로 결과가 좋았다. 마치 운동선수를 연상시킬 정도로 체지방은 낮았고 근육은 균형이 잡혔다. 담배는 아예 입에 대지도 않았고 술도 거의 하지 않는 것과 같아 간과 허파도 아주 건강했다. 또한 혹시 있을지 모르는 유전적 병도 찾을 수 없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로플 소프트의 로플 요람으로 오랜만에 온 진성은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는 조팀장을 보았다. 아직도 그 때의 면발이 떠올라 웃음이 났는데 대놓고 웃을 수는 없었다. "그 일은 잘 되어가고 있나요?" "무슨 일?" "그 OS 프로젝트요." "그건 내가 어떻게 알아? 팀장이 게임하러 동경에 가 있는데..." 짐짓 진성의 탓으로 돌리는 은근한 말투였다. "... 조팀장님!" "잘 굴러가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강팀장님." "... 저 갑니다." 예전의 진성이 아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요람을 나갈 작정으로 몸을 움직였다. "아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지금은 앞으로의 계획을 조금 구체적으로 만들고 같이 일할 사람 구하는 정도지 뭐. 아마도 네가 합류해야 본격적으로 일을 할 수 있겠지."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그래? 말해 봐라." "이번에 동경 갈 때 로플의 가상현실 어떻게 안 될까요?" "그게 무슨 소리냐?" 조팀장은 뚱딴지같은 소리에 진성을 쳐다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어차피 동경에서의 아시안 리그에는 우승이 중요한 게 아니라 통과해 월드시리즈 가는 것이 목표니까 남는 시간에 로플 세계에서 그 툴에 대해 생각 좀 해 보려구요." "... 그래서 로플 시스템을 설치 해 달라고?" "네." 당연한 듯 대답하는 진성. "그게 쉽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뻔뻔한 진성의 얼굴에 조팀장은 한숨을 쉬고 말았다. 요즘에는 어떻게 된 노릇인지 예전과는 달리 진성에게 자꾸만 휘말리는 느낌이다. "휴우... 알겠다. 한 번 생각해 보지. 로플 시스템 자체는 힘들고 최신 접속기는 공수해 줄 수 있다. 인터넷이 되니까 조금 느려도 충분하겠지. 어때?" "네, 조금 부족하지만 그 정도로 만족하지요." "뭐라고?" "저 이만 갑니다. 나중에 봐요." "..." 현준과 진성이 서로 바뀐 게 아닐까... 조팀장은 점점 진성이 얄미워지기 시작했다. 잠깐의 휴식이 지난 다음 아시안 리그의 본선이 시작되었다. 리그 시작 전부터 많은 전문가들이 예상한 대로 개인전보다는 단체전의 경쟁이 눈에 띄게 심해 예선전 1위로 올라온 한국의 로플과 삼선전자 그리고 일본의 소냐전자가 각축을 벌이고 그 뒤를 쫓고 있는 프로팀들도 결코 만만치 않은 전력으로 상위팀들을 견제할 듯했다. 그야말로 단체전은 각 국가의 명예를 걸고 총력전을 벌이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에 비해 개인전은 약간 달랐다. 불꽃이 튀는 경쟁은 당연하지만 단체전에 비하면 오히려 관심이 적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게이머 스키피오를 제외하면 아시아에서 유명한 게이머들은 대부분 단체전에 포진되어 있어 상대적으로 레벨이 낮다는 사실이 그런 현상을 낳은 것인지도 모른다. 미국 쪽이나 유럽에서는 개인전이 더 각광을 받는 형편이었는데 유독 아시아권은 개인보다는 단체전을 훨씬 더 중요시했고 더 큰 영광이라 여기고 있었다. "잘 해라." "당연하지." "기권은 없다." "당연하지." "형, 열심히 해요." "당연하지." "진성아, 파이팅! 이겨!" "..." 같은 말로 계속 대답하던 진성은 이대로 계속 하면 언제까지 같은 말만 계속할까 싶어 말을 멈추고 대기실을 한 번 바라본 다음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진성과 필리틴의 게이머를 시작으로 문명 온라인 아시안 리그의 결선이 시작되었다. 진성의 첫 상대는 필리핀 엘니도 팀의 에이스 격인 아만폴로였다. 수려한 외모에 늘씬한 키를 자랑하는 아만폴로는 특히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아틀란티스를 고집해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아틀란티스는 가장 어렵기로 소문난 문명이어서 아틀란티스로 아시안 리그 결선까지 올라온 것을 보면 게임에 대한 아만폴로의 재능을 읽을 수 있었다. 무대로 올라온 진성은 키도 크고 눈이 큰 아만폴로와 간단히 악수를 했다. 뭐라고 아만폴로가 얘기했지만 관객들의 함성소리와 영어 같으면서도 발음이 이상해 진성은 알아듣지 못했다. 대신 어색하게 웃었는데 아만폴로 역시 웃음을 지었다. 돌아서서 게임기로 걸어가던 진성은 곧 아만폴로가 했던 말이 무엇인지 알았다. 대충 이 게임은 내가 이긴다는 정도의 내용 같았다. "꽤나 자신만만하군..." 아시안 리그로 와서 게임을 한 상대 중에 가장 대담한 아만폴로를 힐끔 본 진성은 곧 게임기에 탑승했다. 익숙한 절차를 거쳐 게임 준비 상태로 들어선 진성은 게임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게임이 시작되었다. 가운데를 중심으로 정확히 위아래가 대칭되는 지도였는데 위쪽이 아만폴로의 아틀란티스, 아래쪽이 진성의 로마였다. 둘 다 섬이어서 이번에는 해전이 상당히 중요한 열쇠가 될 듯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로마의 해군이 조금 우위에 있지만 예선전에서 나타난 아만폴로의 해전 역시 일품이어서 쉽게 점칠 수는 없었다. 다만, 네임밸류와 객관적인 능력에서 앞서는 스키피오의 우세를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예상했다. 두 게이머 모두 초반에는 일반적인 오더를 지키는 듯했다. 이제 로마를 이용하는 어느 정도 게이머에게는 필수가 되어 버린 군대강화법을 아주 착실하게 수행하는 스키피오와 스키피오가 처음으로 선보였던 초반 군대 해산이라는 아틀란티스만의 전략을 거의 그대로 사용하는 아만폴로의 모습은 폭풍전야의 고요함 같았다. 관객들은 그다지 다를 바가 없는 두 게이머의 진행 상황을 한눈에 지켜보며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다. 곧 폭풍처럼 변할 무겁고 검은 구름이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는 듯했다. "시작이다." 관객 중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스키피오의 명령이 갑자기 빨라지며 군대가 둘로 나뉘어 각기 다른 곳으로 집중되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아만폴로의 군대 역시 둘로 나누어졌다. "이야 대단한데... 두 사람이 서로 상대의 화면을 보고 하는 것 같다." 갑자기 빨라진 진행과 그에 맞춰 대칭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에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스키피오가 먼저 움직이며 그에 맞게 아만폴로가 대응하는 톱니바퀴 같은 모습에 관객들은 탄성을 질렀다. 스키피오의 로마 군선이 완성되자 곧바로 로마의 해군은 상대적으로 늦은 아틀란티스의 근해를 장악하기 위해 한 걸음 빨리 움직였다. 전략으로 유명한 스키피오가 다른 게이머에 비해 전체적인 컨트롤에서도 그리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가 볼까.." 스키피오의 담담하면서도 낮은 목소리가 경기장을 울렸다. 그와 함께 두 곳에서 동시에 나온 해군이 하나로 합쳐지더니 아틀란티스 해안 가까이 접근해 위협을 주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아틀란티스 군대가 로마의 병력이 상륙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막는 신경전 또한 볼만했다. 스키피오가 상륙하기 좋은 곳을 선점하면 재빨리 아만폴로가 들이닥쳐 상륙을 방해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왔다. 스키피오의 해군은 둘로 나누어지더니 각각 아틀란티스의 양쪽 해안으로 위협을 가했고 그에 따라 아만폴로의 군대 역시 나누어졌다. 게임 자체는 전형적이어서 튀는 부분이 없지만 굉장히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 관객들은 그런 점을 느끼지 못했다. 진성은 몇 번 두드려 보았지만 예상 외로 상대의 방어는 강했다. 어떨 때는 절묘한 컨트롤로 타이밍을 끊어버리는 모습에 이런 게이머가 다 있었나 싶기도 했지만 또 어떨 때는 왜 이런 식으로 대응하지 않았을까 의문이 갔다. 분명 훨씬 더 대단한 실력을 보여줄 만한 게이머인데... 어떤 순간에는 왜 저렇게 허둥댈까 싶었다. 아니, 심할 경우에는 마치 다른 사람이 게임을 하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했다. 이렇게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진성은 한쪽에는 군선을 가장한 상륙용 수송선, 다른 한쪽은 완전한 군선으로 만들어 상대를 허둥대도록 만든 후에 약한 쪽을 칠 생각으로 작전을 구사했다. 초반 해군을 둘로 나누어 상대방에게 경각심을 돋운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중요한 것은 상대가 이 사실을 절대 모르게 비밀을 지켜야 했는데 진성은 보안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 어느 정도 수송선이 완성된 후에 진성은 돌아온 전선과 함께 원정에 나섰다. 외교에 신경 쓸 다른 나라가 없었기 때문에 그만큼 전투에 집중할 수 있어 원정도 쉽게 나설 수 있었다. 같이 가던 병력이 적은 군선과 외양만 군선인, 병력으로 가득 찬 수송선은 섞인 상태 그대로 둘로 나누어져 아틀란티스의 양쪽 해안으로 접근했다. 역시 아틀란티스의 군대는 상륙을 막기 위해 나왔고 로마의 해군은 넌지시 상륙하려는 듯하다가 다시 가운데로 모였다. 두 번째 나누어질 때는 정확히 수송선은 왼쪽으로 군선은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아틀란티스의 군대가 이번에도 똑같은 모습일 거라 확신하게끔 진성은 각별히 주의를 기울였고 상대 역시 그대로 따라가는 듯했다. 먼저 군선을 해안에 접근하게 만든 진성은 아틀란티스 군대가 나타나면 곧바로 빠지도록 명령을 내렸다. 예상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고 이제는 수송선의 발 빠른 상륙만 남았다. 아틀란티스의 군대가 반으로 나누어진 상태에서 두 배의 병력으로 로마의 군대가 상륙해 자신이 직접 컨트롤 한다면 비록 바닷가라 진퇴의 자유가 없지만 충분히 승산이 있을 것이다. "됐다." 진성은 아틀란티스의 군대 규모를 보고는 즉시 모든 병력을 상륙시켜 빨리 전열을 정비했다. 군대강화법이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효과가 있고 직접 컨트롤 한다면 상대방에게 상당한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확신을 가지고 급속 행군으로 바닷가에 위치한 작은 언덕을 넘은 진성은... 펼쳐진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 아니.. 이럴 수가." 아틀란티스 전체의 군인이 바로 그곳에 다 모여 있는 듯 병력의 수가 엄청났다. "후퇴. 전군 후퇴." 어쩔 수 없었다. 같은 수의 병력이라도 바다를 뒤로 하고 적당한 수의 기병도 없이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상대는 투석기 등을 완전히 준비하고 있어 그대로 맞부딪친다면 백전백패일 게 눈에 선했다. 진성은 후퇴하면서 도대체 어떻게 상대가 알았을까 고민에 빠졌다. 일부러 수송선을 만들 때부터 전선의 외양 그대로 만들었고 배의 무게를 보고 알아차릴까 싶어 군선에 적당한 무게의 돌을 채우기도 했다. 또한 엄격한 보안을 유지해 정보가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도대체 어디에서 구멍이 생긴 것일까? 진성은 이제까지 게임을 하면서 전략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해 패한 적은 있어도 이렇게 보안이 뚫려 힘든 적은 없어 무엇이 문제일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특히 이번에는 보안에 최고의 주의를 기울였다. 하지만 지금은 무사히 빠져나가야 할 때다. 뒤쪽에서 화살이 날아왔고 기병들이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코앞이 배였다. 바로 옆에 화살이 떨어질 정도로 위험했지만 진성은 무사히 배에 오를 수 있었다. 날아오는 화살과 그에 맞아 죽는 로마의 병사들... 이것은 전투가 아니라 대량 학살이었다. "... 떠난다." 삼분의 일 정도만이 배에 올랐다. 보병 중 늦어 아직 배 근처에도 오지 못한 병력이 있지만 그들까지 오기를 기다리다가는 모든 배가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진성의 나지막한 명령에 배는 곧 바닷가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야..." 결선 리그 첫 경기에서부터 이변이 연출되었다. 아직 경기가 끝난 것은 아니지만 관객들은 예선전부터 파란을 일으킨 아만폴로가 세계 최강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을 게이머 스키피오를 상대로 이처럼 선전하는 모습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대담하면서도 꼼꼼한 스키피오의 전략을 한눈에 간파한 아만폴로의 책략. 관객들은 열광했다. "그런데 아만폴로가 어떻게 알았을까?" 밖에서 게임을 지켜본 관객들 중 몇 사람은 아만폴로의 도박과 같은 승부수를 이해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스키피오를 궁지에 몰아넣은 한 수가 되었지만 반대의 경우였지만 일패도지해 한 순간 게임을 잃었을 것이다. 스키피오가 못했다기보다는 하늘이 아만폴로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말이 정확한 듯했다. 이유야 어찌되었던 관객들은 스키피오의 저력을 기대하며 계속되는 게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현준은 진성이 이처럼 밀리자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아무리 아만폴로의 게임 화면을 기억해 봐도 진성의 저 전략을 간파할 근거는 전혀 없었다. 열이면 열, 군대를 둘로 나눠야 하는 게 정상인데... 소수의 군대만 정확히 돌을 실은 군선 쪽으로 보내고 전 영토의 군대를 완전히 긁어모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진성이 상륙할 장소에 투석기까지 설치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니. "진성 형이 아니라 저였으면 몰살했을 겁니다." 진규 역시 현준의 의문에 동의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보다 병력의 삼분의 일이나 살려서 후퇴한 진성의 능력이 더 눈에 들어왔다. 공격적인 전투 부분에는 강하지만 세부적인 컨트롤에서는 아직 월드 클래스에 진입하지 못했다며 스스로 자책하는 진규에게는 그 부분이 더 크게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저 아만폴로의 컨트롤은 이해할 수가 없다." 이번에는 한석의 말이 이어졌다. 아시안 리그 결선까지 올라온 상대치고는 너무 쉽게 도박을 하는 게이머라니... 한석은 믿을 수가 없었다. TGP1(The Gamer Part 1) [183 회] 무승부 수송선과 군선의 타격은 없어 다행이지만 3만에 달하는 병력이 한순간 날아가 버렸다. 진성은 수송선과 군선을 불러들여 본토에 대기한 다음 수비에 치중하는 게임 운영을 하며 상대를 계속 생각했다. 도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게임이 끝이 나면 상대의 경기 화면을 볼 수 있어 궁금증이 풀리겠지만 그 때는 이미 늦은 시점이다. 보안에 구멍이 났다면 이 이상 어떤 전략을 구사한다고 해도 상대방에게 읽히고 말 것이다. "어떻게 한담?" 최대한 빨리 구멍을 찾아야 하고 그 동안에는 공격해 올 상대를 대비해 꾸준히 수비에 치중해야 했다. 이런 느낌도 오랜만이었다. 경기장에서 공식 게임을 할 때 이처럼 자신 있게 펼친 전략이 속수무책으로 깨진 적은 거의 없었다. 진성은 처참함보다 오히려 스릴을 느꼈고 오기를 가졌다. 처음 무술을 배웠을 때, 도무지 어쩔 수 없는 사부 유조의 존재처럼 순간이지만 꼭 이루고 싶은 목표가 생긴 것이다. '... 절대 질 수는 없지.' 거의 무표정에 가까운 표정으로 항상 게임을 했던 진성의 얼굴에 보통 때와는 다른 특별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현준에게 10연패 한 후 독기를 품고 연습을 거듭해 10연승으로 되갚았던 그 때의 얼굴과 비슷했다. 진성은 이를 악물고 정신을 집중해 하나하나 컨트롤 해 나가기 시작했다. "아만폴로라고 했나.. 저 녀석... 이기기 힘들겠는걸." 가만히 지켜보던 현준은 진성의 얼굴을 보고 난 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바로 옆에 있던 범현이 그 말을 들었는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진성 형이 정말 대단한 것은 알지만 지금 상황은 아만폴로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것 아닌가요?"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만했다. 초중반이지만 가진 바 중요한 병력의 삼분의 이를 모두 날린 상황에서 수비에 치중하는 진성은 누가 보더라도 불리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아만폴로가 힘들겠다니.. "범현아, 내기 할래? 나는 100% 진성이 이긴다고 보는데..." 현준은 피식 웃으며 범현을 유혹했다. "...네, 그래요. 정말 진성 형이 이겼으면 좋겠지만 현재는 너무 불리해요." "좋아. 그러면 선수단 전원 밥 사기. 어때?" "그.. 그건.." 범현은 얼마 전의 내기가 기억이 났다. "뽑았으면 무라도 잘라야지. 안 그래?" "네. 알았어요." 범현은 결국 현준과 내기를 하고 말았다. 내기의 당사자인 두 사람과 나머지 선수단 모두는 이어질 경기의 진행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아..." 진성은 정신없이 컨트롤 하는 순간, 예전에 느낀 그 특이한 경험이 다시 시작되었음을 깨달았다. 확실히 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상대가 컨트롤 하는 것들이 느껴졌다. 군대를 어떻게 모으고, 훈련시키며 배치하는지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자연스레 알았다. 상대의 컨트롤은 대단했지만 생각한 것보다는 아니었다. 자신보다 더 빠른 컨트롤을 가진 현준과 한석에 비하면 손색이 있었고 굳이 비교하자면 리틀 스키피오 진규보다 약간 모자란 수준 정도로 생각할 수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컨트롤에 울림이 부족했다. 프로게이머 중 특히 컨트롤에 재능이 있는 선수들은 컨트롤이 계속 될수록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울림이 느껴지곤 했다. 마치 문장이 하나로는 거의 느낄 수 없지만 그것이 모여 한편의 글이 될 때만 느껴지는 독특한 울림... 아만폴로에게는 그것이 부족했다. 그런 울림은 단기간이 아닌, 오랜 연습과 부단한 노력으로만 가능했다. 활기가 넘치는 현준의 컨트롤, 정확하면서도 통찰력이 엿보이는 한석의 컨트롤, 본래 가진 성격과는 다른 공격적 템포가 강한 진규의 컨트롤. 사람마다 다른 컨트롤의 느낌이 아만폴로에게는 그저 밋밋함 외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생각보다... 컨트롤 연습을 하지 않은 듯하네.' 게임에서 컨트롤이 모든 것을 좌우하지 않지만 컨트롤만큼 정직한 것도 없었다. 연습한 양은 그대로 컨트롤로 드러나곤 했다. 진성은 빠른 수비를 위해 군대를 적재적소로 분산시켰다. 그리고 예전에 썼던 군대강화법 중 각 지휘관만을 모아 교육시키는 방법을 다시 사용하기로 마음먹고는 재빨리 지휘관을 한곳으로 불러 모았다. 오래된 전략으로 꽤 많이 알려졌지만 지금 열세의 전력을 극대화하는 방법으로는 적당해 선택했던 진성은 정신을 집중해 교육에 열을 올렸다. "어..." 우연일까. 진성은 상대 역시 시간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시도를 하자 조금 당황했다. 이런 지휘관의 교육에 맞서는 방법은 그와 비슷한 방법으로 맞불을 놓는 게 가장 효과적이었다. 진성은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의 컨트롤에 대응할 때는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 오는군. 아만폴로의 원정군이 출발했다. 오래지 않아 한 곳으로 올 것이 분명했다. 진성은 굳이 원하지는 않았지만 상대의 전술이 완전히 다 보였다. 그러다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완전히 똑같은 작전이었다. 상대는 절반의 군선과 절반의 군선과 똑같은 수송선을 가지고 왔던 것이다. 틀림없이 상대는 자신이 쓴 전략을 그대로 사용해 게임을 이기겠다고 생각한 듯했다. 진성은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다. 거기에 진성의 남쪽 해안에서 둘로 나누어져 양쪽 해안을 따라 북상하려는 모습 또한 완전히 같았다. 너와 똑같이 했다... 어떻게 할래? 완전히 이런 식이었다. 진성은 화가 났다. 이런 식의 게임이라니...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다. 진성은 전 군대를 수송선이 움직이는 곳으로 완전히 모았다. 물론 아만폴로처럼 군선이 있는 곳으로 소수의 병력을 이용해 기만 책략을 사용했다. 아만폴로에게 당했던 것과는 달리 진성은 완전히 상대를 안으로 끌여 들여 섬멸할 작정으로 컨트롤에 심의를 기울였다. "이야..." 똑같은 전략으로 상대하는 아만폴로의 원정에 기가 막힌 대응을 보여주는 스키피오의 전술. 관객들은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게임에 빠져 있었다. 아만폴로가 스키피오의 수송선이 어디인지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알아냈을까 의문을 가졌던 관객들은 또 한 번 궁금증에 빠져버렸다. "이번에는 스키피오?" 두 게이머 모두 뭔가 직감이 있는지 대단한 각축전이었다. "거 봐." 진성의 움직임에 현준은 범현을 보며 말했다. 그리고는 뒤에 있던 한석, 현호와 하이파이브를 했다. 진성도 이기고, 범현에게 저녁도 얻어먹고... "어..어떻게... 어떻게 저 상황에서 저런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거죠?" 범현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만폴로도 그랬지만 이번에는 진성이라니... "진성이니까." 현준의 간단한 말에 범현은 할 말이 없었다. 그래, 진성 형이니까. 그게 정답일 게 분명했다. "이..이런..." 아만폴로는 게임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당황했다. 신중하게 상대의 전략을 썼는데... 이렇게나 정확하게 자신의 주병력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다니. 순간, 상대인 게이머 스키피오 역시 장치를 사용하는 게 아닐까 의심이 갔다. 그래, 한국이고 게임을 만든 로플 소속의 게이머이니까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다. 이제까지 엄청난 전략을 만들어 낸 세계 최강의 게이머 스키피오를 두려워 해 온 아만폴로는 상대 역시 자신과 다름없다는 사실에 우스웠다. 아만폴로는 이런 식으로 하다가는 서로 상대의 전략과 컨트롤을 훤히 알아 어쩔 수가 없다고 확신했다. 도대체 어떤 장치를 쓴 것인지 모르겠지만 서로 안 이상 승부는 쉽게 갈리지 않을 게 분명했다. 이 지도에서 최고의 포인트는 바로 상륙인데 병력이 어디 있는지 아는 상황이라면 상륙하는 쪽이 열이면 아홉은 불리해 패할 게 틀림없었다. "..." 아만폴로는 잠시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병력의 우세니까 나누어 상륙해 볼까? 승산은 있지만 상대는 적어도 컨트롤에서 자신보다 앞선 고수였다. 자신처럼 장치를 썼지만 그래도 가진 바 능력이 있는 선수였다. 굳이 스키피오에게 이겨야 할까? 아니다. 비기기만 해도 충분하다. 음... 그렇지. 생각을 정리한 아만폴로는 다시 스키피오의 로마 남쪽에서 수송선과 군선을 합쳐 수송선의 삼분의 이는 영해에 그대로 두고 나머지 수송선과 군선들로 상륙을 시도했다. 어차피 이 병력은 날아가겠지만 비기기에는 충분한 병력이 남아 있는 셈이다. 진성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 유리한 상황이고 이쪽의 사정을 알 수가 없을 텐데... 상대는 마치 모든 것을 아는 것인 냥 상륙을 하지 않았다. 상륙하려다 그냥 아래로 내려가 버린 것이다. 진성은 문득 상대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해킹? 그제야 진성은 서울에 있을 때 들었던 얘기가 뇌리에 떠올랐다. 설마... 곧 상대의 군선들이 가까이 다가왔는데 군선과 수송선의 삼분의 일만 포함되어 있었다. 도대체 뭘 하자는 것일까? 이것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진성은 삼분의 일인 병력보다 해상에 그대로 멈춰 있는 나머지 삼분의 이를 더 주시했다. 어디로 갈지 몰라도 그게 주력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무모하게도 삼분의 일 병력으로 아만폴로의 로마 군대는 상륙했다. 진성은 나머지 병력의 움직임에 주의를 기울이다 전혀 움직일 생각이 없는 듯하자 모은 병력으로 한순간에 아만폴로의 군대를 박살내 버렸다. 바다를 뒤에 둔 아만폴로의 군대는 진성의 정예 병사와 컨트롤이 합쳐진 로마 군대에 궤멸되고 말았다. 병력의 수에 있어서 열세인데다 전력까지... 이상한 시도였다. 주의를 계속 기울였지만 공해에 있던 수송선들은 뭔가 해보려는 듯 주변을 왔다 갔다 하기만 할 뿐 별다른 시도는 없었다. "이게 도대체 뭐지?" 진성은 상대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에이... 중반까지는 재미있었는데... 아만폴로가 게임을 망쳤어." "맞아. 우세한 상황에서 저렇게... 어휴.." "그만해라. 스키피오를 궁지에 몰다 비기기만 한 것도 잘 한 것 아니야? 공식게임에서 정식으로 맞붙어 스키피오를 저만큼이나 궁지에 몰아넣은 선수가 그동안 있었어?" 관객들은 흐지부지 무승부로 끝이 난 게임에 제각각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끝날 게임이 아닌데... 너무도 아쉬웠던 것이다. 아틀란티스의 막강한 군대와 스키피오의 로마 군대가 격돌하기만을 기다렸던 팬들로서는 너무도 아쉬운 경기였다. "휴... 다행이다." 범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 경과로 비겼으니 저녁을 살 필요는 없어 졸였던 마음을 이제야 놓을 수 있었다. "... 뭐가 다행이야? 아, 내기? 그거 농담이었는데... 그나저나 저 아만폴로, 이상해. 다 이긴 게임을 저렇게 만들어 버리다니. 아니, 이길 가능성이 높았던 경기인데.. 참.." 현준은 범현을 힐끔 보더니 화면에 나온 땀범벅의 아만폴로 모습에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봐도 이해 못할 구석이 많았다. 왜 저랬을까? 스키피오의 이름이 그만큼 두려웠던 것일까? 무대로 나온 진성은 아만폴로와 함께 관객에게 인사하고는 무대 뒤로 걸어갔다. 진성 역시 아만폴로가 게임을 그렇게 끝낸 것에 대해 무척이나 궁금했다. 공격했으면 자신이 상당한 타격을 주었겠지만 미리 알고나 있는 듯 살짝 피해가는 모습, 정말 해킹일까? "좋은..... 게임.... 나는 당신이.... 두렵지..... 않아. 당신 역시... 하하하." 아만폴로는 잘 알아듣기 힘든 영어로 말했는데 진성은 그 말을 듣고 무슨 말인지 몰랐다. 좋은 게임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두렵지 않다니.. 아, 이제까지 두려워했다는 건가? 진성은 그보다 마지막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말한 '당신 역시'라는 것에 마음이 걸렸다. 뭐가 역시라는 것일까? 아.. 맞다. 상대는 내가 정확하게 전략의 허점을 파악하자 나 역시 해킹으로 다 알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구나. 이런... 정말 해킹이란 말인가. 진성은 믿기 힘들지만 거의 확신 했다. 또한 자신이 이상한 현상으로 상대의 컨트롤을 알 수 있게 된 것이 결과적으로 보면 해킹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처음 인식하고는 당황했다. 이래서야 정당한 게임이 아닌 것이다. 오늘 아만폴로와의 게임에서 급한 마음에 이상한 현상으로 인한 능력을 조금의 의식도 하지 않고 게임에 사용했다. 진성은 상대가 해킹을 했다는 생각에 약간은 상대방에 대한 혐오감이 생겼는데 자신 역시 그다지 다르지 않음을 알고는 당황한 것이다. 아만폴로에게 정확히 나는 해킹을 하지 않았다고 말해 주고 싶지만 자신이 없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던 상대의 컨트롤을 알 수 있다는 점은 해킹과 완전히 같았다. 다행히 머리가 아프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진성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대기실로 돌아와야 했다. "저... 기권을 해야겠습니다." 진성은 몇 시간 동안 고민한 결과를 지금 막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서재필에게 말했다. "뭐라고?" 분명 상대가 잘 해 위기에 빠졌지만 노련하게 무승부까지 몰고 간 진성의 실력은 여전했다. 그런데 갑자기 기권을 한다니 이 무슨 말인가? 기권이라는 말을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아시안 리그... 개인전, 기권하고 싶습니다." 서재필은 그제야 진성의 말이 진심임을 느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속 시원히 들어보자." "..." 진성은 말 대신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예선전에서 그 현상이 아니어도 충분히 이길 게임이지만 돌이켜 보니 해킹한 것과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진성아, 무슨 고민이 있기에 그렇게 말도 못하냐? 무엇이든 다 말해라. 설마 어디 아픈 것은 아니겠지?" 서재필은 다른 무엇보다 진성이 몸이 아파 게임을 그만해야 한다고 마음먹은 게 아닐까 걱정했다. 그게 아니라면 무슨 이유로 이렇게 느닷없이 기권이라는 말을 꺼낸 것일까? 평소의 모습으로 볼 때, 진성은 결코 쉽게 말을 하거나 변덕이 심하지 않아 무척 진중한 사람이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진성이 입을 열었다. "오늘 게임에서... 상대는 해킹을 했습니다." "뭐라고?" 서재필은 단정적인 진성의 말에 놀랐다. "아만폴로는 어떻게 했는지 몰라도 해킹을 해 제 게임을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서재필은 그제야 아만폴로가 만들어 낸 초중반의 멋진 대응과 후반의 전술을 이해했다. 하지만 곧 그것이 진성의 기권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네가 왜 기권을 해야 하지? 하려면 아만폴로가 해야지." "저 역시... 해킹을 한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이 무슨 소리인가? 해킹을 한 것과 다름이 없다니. 해킹을 한 것도 아니고, 해킹을 한 것과 다름이... 아, 그렇구나. 그 순간 서재필은 진성의 말뜻을 완전히 이해했다. 예선전에서 있었던 그 현상, 그 신기한 경험이 이번 게임에도 있었고 그 때문에 진성이 흔들렸음을 서재필은 깨달았다. "그게 해킹이라고 생각하나?" 낮게 깔린 서재필의 목소리. "결과적으로는 같습니다." 진성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단정적인 서재필의 말에 진성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네가 키가 크다고 해서 그것이 키가 작은 사람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을까? 네가 머리가 좋다고 해서 대학에 떨어진 사람들을 위해 고민해야 하나? 물론 그 앞에서 으스대거나 막말을 해서는 안 돼지. 하지만 그것 자체가 잘못한 것은 아니다. 검사결과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지만 나는 나름대로 네게 일어난 그 현상에 대해 결론을 내렸다. 이제까지 내가 매니저 역할을 해 오면서 진성이 너의 연습 자세와 창의적인 접근을 보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정말 이 게임을 위해 태어난 게 아닐까 싶기도 했지.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잘 모르겠지?" "..." 진성은 다만 서재필을 쳐다볼 뿐이었다. "네가 무술을 하니 어쩌면 쉽게 말할 수 있겠구나. 무술을 하다보면 막힌 부분이 생기지. 그러다 우연히, 혹은 노력에 의해 돌파구를 찾고 바로 그 때 한 단계 발전하게 되고... 나는 그런 경지를 잘 모르지만 너는 잘 알 것이다. 무술만 그럴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내가 수많은 사람과 부딪쳐 본 결과 사람을 대할 때도 노력에 의해, 혹은 우연히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법칙을 느끼곤 하는데... 절대 다른 사람에게 말로 설명하거나 이해시킬 수가 없지. 너의 그 경험 또한 마찬가지다. 모든 게이머가 그런 느낌을 가질 수 없지만 그것으로 인해 네가 죄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것이 그렇게나 신경 쓰인다면 연습이나 노력으로 그런 현상을 없애는 게 옳은 방법이 아닐까? 아만폴로처럼 네가 원해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니까." 서재필의 긴 말이 끝났지만 진성은 그저 서재필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조금 더 생각해 봐라. 네가 축지법을 이용해 사라졌다 나타나는 것과 엄청난 노력 끝에 상대방의 컨트롤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나는 그 축지법이 더 신기하다." 그 말을 끝으로 서재필은 진성의 방에서 나갔다. 나머지는 진성이 결정할 문제였다. 진성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현준과 한석을 비롯해 몇몇 사람들이 달라진 진성의 태도에 걱정을 했는지 여러 번 찾아왔지만 진성의 방문은 열리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며 진성은 생각에 잠겼다. 다른 말보다 서재필이 마지막에 남기고 간 말이 강하게 뇌리에 남아 있었다. [조금 더 생각해 봐라. 네가 축지법을 이용해 사라졌다 나타나는 것과 엄청난 노력 끝에 상대방의 컨트롤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나는 그 축지법이 더 신기하다.] 생각해 보니 누가 과연 이 축지법을 믿을까? 서재필 역시 직접 봤으니 그렇지 보지 않았다면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 직접 몸에 익힌 자신조차 경험하지 못했다면... 터무니없는 얘기로 치부했을 게 분명했다. 그러면 그 현상 역시 그런 것일까? 게임을 오래 하니 그와 같은 현상이 일어난 것일까? 무슨 일이든 오래 하면 그에 대한 특별한 감각이 생긴다고 하는데... 그런 것일까? 한쪽 마음은 그런 것으로 인정하자는 편이었고 다른 한 부분은 그래도 꺼림칙하다는 생각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휴우... 이런 걸로 고민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진성은 아만폴로와의 게임 전까지 그에 대한 자각이 전혀 없었음을 떠올렸다. 사람은 역시 부딪치지 않으면 잘 모르는 법이다. 이럴 때 사부 유조가 있었다면 자세히 물어볼 텐데... 진성은 문득 사부님이 그리웠다. 이제까지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었지만 정작 이런 선택의 기로에서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사부 유조였다. 사부님이라면 뭐라고 하셨을까? 아마도... 네 마음이 가는대로, 네가 자유로움을 느끼는 방향으로 결정하라고 하시지 않았을까? 진성은 홀가분하게 기권을 하고 싶기도 했지만 자신에게 기대를 거는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킬 수 없었고 노력도 하지 않고 포기하기는 너무도 싫었다. "그래... 내가 경솔했다. 경솔했어." 진성은 서재필을 찾기로 결심했다. 자신에게 정확한 충고를 해 준 서재필... 무술과 게임 그리고 가상현실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진성이었지만 이런 상황에 시기적절한 충고에는 자신이 없었다. 진성은 서재필의 존재로 인해 로플 프로선수단이 얼마나 잘 돌아가고 있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진성은 복도에 줄지어 서 있거나 혹은 앉아 있는 현준을 비롯한 선수를 보고 놀랐다. "이제 나왔냐?" "형, 괜찮아요?" "오빠 걱정했잖아요. 별 일 없는 거죠?" "진성 오빠, 오빠가 힘이 없으니 다들 연습할 힘이 안 나요." 다들 나름대로 한 마디씩 하자 진성은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나름대로 사람들에게 잘 하려고 했지만 정작 다른 사람들의 정은 잘 받아들이지 못했던 진성은 한순간 느낀 따뜻한 정에 감정이 북받쳤다. "이야... 너희들 이것 봐라. 진성이 눈에 먼지가 들어 갔나보다." "정말이요?" "어라. 진짜네. 진성이가 이런 곳에서 눈물을 흘릴 리는 없으니... 먼지가 들어간 모양이다." "오빠, 눈이 촉촉하니 더 매력이 있어요." "유나야, 너는 한석 오빠가 있는데 그런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돼. 진성 오빠, 제가 먼지 빼 드릴께요." 혜연이었다. "제가 내일 홈페이지에 진성 형 눈에 먼지 들어간 사연을 올려도 되겠죠?" "그래, 범현아. 자세히, 아주 자세히 올려라." 진성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눈에는 글썽이는 눈물과 입가에는 웃음을 짓고 말았다. 울다가 웃는 게 아니라 울면서 웃어버렸다. 복도의 끝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던 서재필의 얼굴에도 웃음이 맺혔다. "저 녀석... 이제야 한꺼풀 벗겨진 듯하네." ---------------------------------------------- 재미있게 보십시오! ---------------------------------------------- TGP1(The Gamer Part 1) [184 회] 룸스 진성은 경기가 없는 혜연, 현호의 도움으로 그 현상을 막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그 와중에 정말 신기할 정도로 잘 알아맞히는 진성의 날카로움에 혜연과 현호는 놀라 한동안 멍할 정도였다. 어떻게 보지도 않고 상대를 알 수 있는 것일까? 직접 경험해도 믿기는 힘들었다. 다행히 수십 번이 넘는 시도 끝에 진성은 놀랄 만한 집중력으로 상대가 아닌 자신의 경기에만 온 주의를 다 기울여 겨우 그런 현상이 일어나도 스스로 만족할 수 있었다. 경기에 임하는 자신의 인상이 안쓰러울 정도로 구겨질 때가 있었지만 그래도 스스로 납득할 정도여서 진성은 기분이 좋았다. 다만, 경기가 끝날 때마다 샤워한 듯 땀으로 목욕을 하는 것이 조금 불편했고 너무도 피곤해 문제였다. 아만폴로는 절묘하게 해킹한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면서 승수를 쌓아갔다. 아만폴로가 해킹 한다는 사실은 진성과 서재필 만이 알았다. 곧바로 운영위원회에 신고하려던 서재필은 마음을 바꿔 먹었다. 정확한 증거가 없다면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서재필은 특유의 인맥으로 기자 시절 아는 전문가들을 단시간 내에 불러 모아 집중적으로 증거를 잡기 위해 노력했다. 그 때문에 서울에서 열 명에 가까운 전문가들이 서재필을 찾아 동경으로 날아왔다. 하지만 아만폴로 측은 그런 낌새를 눈치 챈 모양인지 더 이상의 본격적인 해킹은 없었고 다만 순간적인 해킹을 하곤 했다. 서재필은 그 사실을 알고 아시안 리그 운영위원회에 말하려다 대회 후에 그 문제를 거론하자는 로플 그룹의 의지를 따르기로 했다. 어느 정도 게임에 집중할 수도 있고, 그 현상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어지자 진성의 마음속에는 OS 프로젝트에 대한 걱정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로플 연구소의 소장은 조팀장이 맡겠지만 실질적인 책임자는 자신이라는 말에 진성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호텔의 협조를 얻어 방에 최신 로플 접속기를 설치한 진성은 아주 빠른 인터넷까지 연결해 모든 준비를 다 갖추었다. 서재필에게서 게임에 영향을 주지 않을 정도만 사용하라는 명령 같은 지시를 받았지만 진성은 개의치 않았다. 오랜만에 강력한 보안을 거친 뒤 가상현실 로플에 접속하자 진성은 무척이나 편안함을 느꼈다. 일본에서 접속해서인지 약간 다른 듯했지만 가상현실에서 진성은 여전히 신과 같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툴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지?" 진성은 조팀장에게서 자신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은 이미 타성에 젖거나 틀에 박힌 지식에 빠져버린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독특하고 신선한 생각을 쉽게 해 낸다는 것이라 들었다. 곰곰이 따져보니 문명 온라인의 경우도 독특한 전략과 그 전략을 실제로 구현하는 재능을 가진 듯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가상현실에서 뭔가 만드는 것도... 기존에 프로그램을 짜는 것과는 달리 완전히 다르게 접근할 수는 없을까? 진성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로플은 가상현실이다. 가상현실은 완전히 또 다른 세상이다. 마이크로조프트의 윈도우즈가 현재 OS의 대세고 그에 필적할 만한 다른 것은 거의 죽은 상태이니... 진성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노트북의 OS에 대한 개념도를 볼 때 골치 아팠던 것과는 달리 이런 고민은 그다지 머리가 아프지 않았다. 즐거운 상상을 하는 것처럼 오히려 머리가 시원해지는 듯했다. 윈도우즈는... 창문이지. 맞아, 평면이니까 당연히 창문을 통해 볼 수밖에 없지. 가상현실은? 로플은? 완전한 3차원 입체인데... 아, 맞다. 공간이다. 가상현실의 핵심은 바로 공간이지... 거기에 시간까지 더해졌지만. 그러면 로플 스페이스라고 OS 이름을 지어야 하나? 그건 좀 아닌데... 아, 그렇지! 룸스(Rooms)! 딱이다. 음... 보통의 컴퓨터에서 프로그램의 전환을 윈도우 사이의 전환이라면... 그렇지. 로플에서는 룸이 바뀌면 되는 거구나. 룸이 바뀐다는 말은... 어떻게 보면 사용자가 옮겨 다니는 것으로 생각해도 되지. 아하..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되는구나. 처음에 진성은 가상현실에서 현실의 컴퓨터와 거의 같은 단말기를 이용해 뭔가 필요한 프로그램을 사용할 수 있게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해 보니 그것은 제트 비행기를 단지 고속도로만 달리는 자동차처럼 사용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룸스... 모든 것은 방이다. 방이 기본적인 개념이고 방마다 완전히 다른 작업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가상현실 OS인 것이다. 진성은 흥분이 되었다. 자신이 생각해냈지만 정말 그런 것이 현실로 다가온다면... 신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순간, 조팀장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얼마나 황당해 할까 대충 얼굴이 떠올랐지만 역시 개의치 않았다. Rooms(Rofl Oriented Object ManagerS). 약자도 딱 들어맞았다. 진성은 더욱 신이 났다. 그렇다면 룸스에 걸 맞는 프로그램 제작 툴은 어떻게 해야 할까? 아, 그렇지. 룸스는 방이 기본이니까 방을 만드는 것이 기본이지. 음.. 그러면 건축과 다를 바가 없잖아. 건축의 기본 개념에 이차원의 프로그래밍 환경을 삼차원으로 바꾸는데 필요한 요소들을 집어넣으면... 그렇지. 하지만 사람들은 이차원의 작업 환경에 익숙해 있는데 어쩌지? 아니야, 사람들은 더 효율적인 환경으로 옮겨올 거야. 진성은 이것저것 궁리해 보며 직접 만들어 보았다. 기본적으로 서울에 있는 자신의 방을 그대로 옮겨 놓고 어떤 식으로 해야 지금의 프로그래밍이나 오피스 작업에 더 편리한 환경을 만들 수 있는지 직접 하나씩 만들었다. 처음에는 굉장히 큰 모니터를 방안 중앙의 공중에 그대로 띄워 놓고 널찍한 책상과 그 위에 입력 장치로서 가상 키보드를 두었다. 공중 여기저기에 필요한 문서들을 책 모양으로 펼쳐 두니 공간 활용은 극대화할 수 있었다. 거기에 커다란 모니터들은 얼마든지 더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입력을 그대로 키보드로 할 필요가 있나? 아니지.. 모든 말을 그대로 처리할 수는 없지만 문명 온라인에서처럼 언어 해석기를 각 파트에 맞게 잘 개발한다면... 굳이 키보드는 필요가 없지. 그러면 출력은... 당연히 필요가 없지. 얼마든지 고해상도의 가상 프린터는 만들 수가 있으니까. 한 번 생각이 뚫리기 시작하자 일사천리였다. 세 개의 40인치에 가까운 모니터들과 말로 하는 입력과 허공에 떠 있는 무수한 책들... 이 모든 것이 진성에 의해 짧은 시간에 만들어졌다. 아니야. 이것은 단지 현실의 작업을 가상현실로 옮겨놓은 것에 불과해. 진성은 자신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룸스라면 획기적인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음... 가상현실에서 몸을 움직인다고 해서 현실의 몸이 아픈 것은 아니잖아? 현실의 몸이 피곤할 리는 없지. 다만 정신적으로는 피곤할 수 있지만. 그러면 몸을 움직이는 게 훨씬 더 낫지. 굳이 마우스 같은 것을 쓸 필요는 없잖아. 진성은 방안의 모든 것들을 다 없애버리고 다시 시작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룸스와 어울릴까? 입력은 입과 몸으로 해야 한다. 맞아, 그래야지. 모든 프로그램은 집에서 하나의 벽돌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면 되겠지. 그런 작은 벽돌을 쌓아 집을 만드는 것처럼, 거대한 소프트웨어 역시 작은 것들로 쌓으면 되니까. 모니터 화면은 따로 있을 필요가 없이 공간 자체가 그 역할을 하면 될 테고... 그러면 되겠지. 너무 피곤하지는 않을까? 신경을 많이 쓰니까? 음... 생각해 봐야할 문제다. 진성은 여러 가지 생각에 골몰했다. 완전히 새롭다는 것에 푹 빠져 자신이 꽤 오랫동안 접속기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 순간, 진성 눈앞에 밝은 반투명의 창이 열리더니 메시지가 왔다. [진성아, 이제 그만하지. 너 내일은 없지만 모레 게임 있잖아? - 조팀장.] 서울에서 로플을 모니터하고 있던 조팀장의 메시지였다. 자신이 만들어 공간에 걸어둔 시계를 보니 세 시간이 지나가 있었다. [알았습니다. 지금까지 뭐하세요?] [OS 팀장이 없어서 그 일까지 다 하고 있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저 역시 이곳에서 생각하고 있단 말이에요. 그러지 말고 지금 잠깐 로플로 들어오실래요? 꼭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뭐? 지금?] [네.] [그거 어려운 것 알지?] [알아요. 빨리 들어오세요.] 뻔뻔한 말에 조팀장은 어쩔 수 없는 듯했다. [알았다. 잠깐만 기다려라.] 조금 있으니 뿌옇게 흐렸다가 선명하게 나타난 조팀장이 진성의 방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이러고 보니 멀리 있는 사람들 이제 화상채팅은 안하겠네요?" "아... 그도 그렇구나." 진성은 너무도 현실감이 있는 조팀장의 모습에 순간 또 하나가 생각이 났다. 화상채팅... 그보다 진일보한 아바타가 아닌 본인들이 직접 말을 나누는 느낌... 로플에서는 가능했다. 조팀장 역시 그 생각에 미치자 또 다른 사업 아이템이라 확신했다. "그런데 왜 불렀냐?" "그게...." 진성은 자신이 생각해 낸 룸스(Rooms)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중간 중간 조팀장의 어이 없어할 표정을 살폈지만 진성의 말투는 자부심으로 가득했다. "네가 생각해 낸 거냐?" "네..." "룸스..." 조팀장은 약간 넋이 나간 듯했다. "유치하지요?" "아니, 아주 좋아. 사실 로플 OS는 조금 그랬거든. 뭔가 귀에 확 들어오고, 뭔가 패러다임이 바뀌는 이미지가 약했지. 룸스라.. 좋아. 나는 정말 찬성이다. 그런데 이 룸스를 어떻게 꾸밀 거냐?" "잠깐만요." 진성은 조금 전까지 작업했던 것을 한꺼번에 불러냈다. 회선이 불안한지 약간 느렸지만 그래도 참을 만했다. "이게 다 뭐냐?" 진성의 방 공간이 완전히 바뀌어 공간 전체가 하얀 색으로 변하고 허공 여기저기 뭔가 벽돌과 같은 것들이 흩어져 있었다. 무엇일까? 아무리 봐도 그냥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쓰레기를 흩어 놓은 듯했다. "저 작은 벽돌 같은 것들은 모두 작은 기본적인 프로그램이에요. 집 지을 때 가장 기본이 되는 벽돌과 같은 역할을 하지요. 저런 것들을 이렇게..." 진성은 두 손으로 작은 벽돌들을 이리저리 옮기며 결합도 시키고 특별한 동작으로 벽돌을 복제하고 변형하기도 했다. 순식간에 벽돌과 같은 것들은 아름다운 비너스 동상이 되기도 했고, 2인승 스포츠 자동차로도 바뀌었다. 미리 만들어 본 것이라 거의 시간을 들이지 않고 만들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하면 뭔가 만들 수 있지요. 물론 저것들처럼 아주 작은 기본이 되는 것들은 전문가들이 만들어야겠지요. 어쩌면 로플도 저런 일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스포츠 자동차를 만들다 보니... 로플에서도 자동차를 사고 팔수 있도록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물론 자유경쟁이지요." 조팀장은 룸스라는 말에는 아주 적절해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였지만 진성이 순식간에 비너스 동상과 스포츠 자동차를 만드는 모습과 그 과정을 살핀 후 한 말을 듣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녀석의 머리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솔직히 가상현실에서 진성이 가진 능력은 노력이나 실력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우연히, 혹은 타고났을 가상현실과의 독특한 관계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난번에 로플 그룹 관계자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던 가상현실을 또 하나의 세상으로 보자는 획기적인 사고에 이어... 이제는 프로그램 제작 방법을 완전히 바꾸어 버릴 만한 신선한 개념을 고안해 낸 것이다. 아마도 본인은 그 개념의 가치를 잘 모르고 있는 듯했다. 이렇게 된다면 전문가들은 아주 작은 벽돌과 같은, 고효율의 원소와 같은 역할을 할 프로그램만 만들면 되고 현실의 프로그램 역할을 할 비너스의 동상이나 스포츠카와 같은 것은 전문 기업이나 혹은 사용자가 직접 제작해도 무방할 것이다. 현실에서 프로그램 하나를 만들려면 제작도구 사용법을 제대로 배워야 하는데... 가상현실이라면 현실에서 눈에 보이는 뭔가를 만드는 것과 다름이 없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제작 도구를 사용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프로그래밍의 신개념이었다. 진성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 조팀장의 모습에 뭔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 "진성아... 정말 잘 생각했다. 정말... 그래, 바로 이거야. 이런 것을 리더인 네가 해주면 된다. 사실 네게 프로젝트 팀장을 맡기며 많이 망설였는데 이제 맘을 놓을 수 있을 것 같다. 세부적인 것은 내가 챙기면 되니까 걱정하지 마라. 너는 이렇게 앞서 가며 개념을 만들고 정리하기만 하면 된다. 솔직히 네가 한 말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지 나는 상상도 할 수 없다. 휴우... 나도 정말 흥분이 되는구나." "정..정말인가요?" 조팀장이 흥분하자 진성은 오히려 걱정을 했다. "당연하지. 네가 로플에 있어서 다행이다." 조팀장은 진심으로 진성이 자랑스러웠다. 어쩌면 누구나 생각해 낼 수 있지만 이처럼 적절하게, 세계를 움직일 정도로 실현할 위치에 있지는 못할 것이다. 진성의 말을 들으니 앞이 막막했던 OS와 로플에서 사용할 프로그램 제작 도구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주력해야 할 것은 기본적인 요소, 마치 벽돌과 같이 쌓아 다른 것을 만들 수 있는 재료인 것이다. 그 외에는 모두 다른 회사에 맡기면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 제작도구는 엄청난 수요를 낳을 게 불 보듯 뻔했고 진성은 제작도구의 10% 로열티를 받게 되어 있었다. "네가 얼마나 부자가 될지 나는 상상도 못하겠다." "네?" 진성은 다른 생각 중인지 조팀장의 말을 얼른 듣지 못했다. "아니다. 너무 오랫동안 고민하지 말고 쉬도록 해라. 아, 이왕 만들어 놓은 것은 잘 저장해 두고... 알겠지? 아니, 그럴 게 아니라 조금 고생이 되겠지만 나한테 보내라. 내일 사장님과 회장님께 보여드려야겠다." "...아직 완성 안 된 것인데요?" "그것 완성하려면 하루 이틀로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잔말 말고 정리해 보내라. 나는 나갈 테니 게임 잘하고 가끔, 아주 가끔 룸스 생각도 하고, 정리도 하고 해라. 알겠지?" 조팀장은 은근히 진성에게 룸스에 대해 압력을 넣었다. 농담인 줄 알지만 진성은 얼굴을 숙이고 말았다. "네..." "나, 간다." 조팀장은 기분이 무척이나 좋은지 목소리마저 밝았다. 다음날. "이게 정말 진성이 만든 것인가?" 이희철 사장은 조팀장이 직접 가상현실로 들어가 시범을 보이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는 놀라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접속기에서 나와 회의실로 옮겨 앉은 조팀장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룸스라고 했던가?" 진회장이었다. "네, Rofle Oriented Object ManagerS를 줄여 룸스(Rooms)입니다. 진성이는 이런 이름 짓는데도 재주가 있나봅니다." 조팀장은 마치 자신이 한 일인마냥 자랑스러움에 가득 차 있었다. 처음 진성을 만나 가상현실에 대한 세미나를 했을 때가 문득 기억이 났다. 정말 지금의 진성이 그 때의 그 녀석과 같은 사람인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음... 어떤가? 희철?" 진회장은 진지한 얼굴로 이희철 사장을 바라보았다. "휴우... 나는 정말 할 말이 없네. 자네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예전에도 느꼈지만 진성이 이 녀석은 보통의 기준에서 판단할 수 없는 놈이야. 사람이란 자신이 깊숙이 개입한 일일수록 시야가 좁아지게 마련인데 말이야... 이 녀석에게는 그런 원리가 통하지 않는 것 같네. 룸스라... 윈도우즈의 시대는 가고 룸스의 시대가 오겠군. 축하하네." 이희철 사장은 한참 감탄을 하더니 뜬금없이 진회장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꺼냈다. "뭐가 말인가?" "진성이 녀석, 자네 아들이 아닌가? 지난 번 그 특허 계약을 보니 로열티가 10%나 되던데... 저 룸스가 퍼지고 룸스를 이용해 제작이 일반화되면... 도대체 얼마나 그 제작도구가 많이 팔릴지 생각해 보게. 마이크로조프트의 회장 저리 가라야. 게다가 앞으로 룸스를 개발하면 개발팀장으로 상당한 혜택은 뻔한 노릇이니..." "뭐? 하하하. 그야 그렇지. 진성 녀석, 아버지를 닮아 조금 똑똑하긴 하지." 조팀장은 두 사람의 농담에 어이가 없었지만 그저 웃어넘길 수 있었다. "자네가 많이 바빠지겠군." 진회장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며 말하자 조팀장은 놀라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네?" "진성이 녀석이 이렇게나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는데 룸스 개발을 성공하지 못하면...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자네가 한 말처럼 가장 중요한 방향이 정해졌으니 적어도 3년 안에는 완성할 수 있겠지?" "아.. 네. 가능할 것 같습니다." "같은 게 아니라 가능하지.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조팀장이 나가는 수밖에." 이희철 사장은 한술 더 떴다. "네?" "농담일세. 자넨 농담도 못하나?" 조팀장은 요즘 윗사람에게도 당하고, 진성에게도 당하는 듯해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 고민에 고민을 해 살만 빠졌던 때보다는 훨씬 더 나았다. 이제는 전문가들을 끌어들일 비장의 무기가 갖추어진 셈이다. 한국인 시스템 공학자나 소프트웨어 대가들이 진회장과 이사장이 본 시뮬레이션을 본다면 열이면 아홉은 룸스의 미래를 눈치 채고 로플로 오려고 노력할 게 틀림이 없었다. 진성이 그런 세부사항까지 알고 한 것은 아니겠지만 은연중에 인재 스카웃과 개발의 방향 설정을 동시에 해결해 버렸다. '되는 놈은 무슨 일을 해도 된다.' 조팀장은 진성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라 확신했다. --------------------------------------------- 어쩐지 진성에게 좋은 일만 생기는 듯하지요? 음... ^^ 재미있게 보십시오! 유조아 긴급점검으로 인해 늦게 올립니다. ^^ --------------------------------------------- TGP1(The Gamer Part 1) [185 회] 룸스 일본에서의 아시안 리그는 전문가들의 예상과 거의 다름없이 끝이 났다. 개인전에서 맞붙은 스키피오와 필리핀의 아만폴로는 예상외로 스키피오의 압승으로 끝이 나 스키피오, 아만폴로를 비롯해 모두 다섯 명의 선수가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다. 로플 프로팀은 비밀리에 아만폴로 측에 해킹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는데 서재필은 상대 감독과의 은밀한 만남에서 같은 처지에 야박하게 대하지 말라는 비웃음을 들었다. 순간 완전히 밝히려다가 진성과 관계된 일이라 서재필은 참았고 공식적인 문제제기는 하지 못한 채 월드 리그에서는 사용하지 말라는 나직한 경고만 했을 뿐이었다. 단체전에서는 접전 끝에 로플이 우승을 차지했고 일본의 소냐, 필리핀의 나레소, 중국의 중화그룹, 한국의 삼선전자가 뒤를 이어 역시 월드시리즈 진출을 확정지었다. 로플은 개인전과 단체전 우승을 휩쓸어 명실상부한 아시아 최강의 프로팀임을 다시 한 번 증명했다. 로플의 선수들, 특히 남자 선수들에게는 또 하나의 낭보가 한국에서 들려왔다. 우승이 확정되자마자 한국 운영위원회 이름으로 발표된 성명에는 정부가 국위 선양에 기여할 월드 시리즈 진출이 확정된 로플과 삼선전자 선수단에게 병역특례를 부여했다는 소식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군대에 대해 걱정할 나이였던 로플과 삼선전자의 선수들은 마음에 큰 짐을 내려놓은 듯했다. 운영위원회의 줄기찬 로비와 함께 기록으로도 한국의 이름을 세계, 특히 아시아에 떨친 두 팀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문명 온라인 팬들은 대부분 찬성했지만 일각에서의 반대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았다. 게임으로 돈도 벌고, 거기에 군대까지 면제되다니... 불공평하다는 소리가 나올 법도 했다. 그런 목소리는 대다수의 사람들의 의견에 묻혀 그리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현준아, 축하한다. 이제 군대 걱정 안 해도 되잖아." "아... 맞다. 너는 원래 면제였지?" 현준은 이제야 생각난다는 듯 진성을 보며 말했다. "네가 제일 기뻐하는 것 같다." "뭐? 아니야. 범현이는 원래 좋아할 녀석이고... 현호 저 녀석도 얼마나 좋아했는데... 한석이는 유나 두고 군대가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고 했지. 나만 그런 것 절대 아니라고." 현준은 혼자 그런 소리를 듣기 싫은지 현호와 한석까지 걸고 넘어졌다. 역시 현준이다. 그 말에 현호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지만 한석은 극구 부인했다. 절대 눈물을 보인 적은 없었다는 항변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한석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는 않았다. 미국을 비롯한 북미와 유럽의 리그가 예상보다 더 많은 팀들의 참가로 지연돼 월드 시리즈는 한 달 뒤 영국의 런던, 프랑스의 파리,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열리기로 확정되었다. 예전 로플 프로팀이 미국 라스베가스에 갔다가 불미스런 총격 사건이 있어 미국은 처음부터 배제되었고 종주국인 한국이 있는 아시아보다 아직은 문명 온라인이 덜 알려진 유럽에서 시리즈를 개최하기로 각 대륙의 운영위원회의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 덕분에 일본에서 완전히 철수한 로플 프로팀은 오랜만에 여유로운 휴가를 즐길 수 있었다. 서울로 돌아와 간단히 아시안 리그 보고를 한 프로팀은 황태산 사장의 간단한 금일봉 수여식과 파티를 끝낸 뒤 삼일 간의 짧은 휴가를 가졌다. "여기에요." 현호는 이제 막 호텔 로비로 들어서는 현준과 진성을 보며 손짓을 했다. 이미 친구인 범현을 비롯해 유나, 혜연은 도착해 있었고 한석은 아직 오지 않았다. "한참 헤맸다. 이번에 진성이 차를 샀는데... 운전이 어찌나 서툴던지. 혼났다." "그만 해라." 진성은 이번에 큰 맘 먹고 국산인 현도 자동차의 브랜드 중 안정성에서 정평이 난 레가로를 한 대 뽑았다. 스포티하면서도 진중한 느낌이 좋아 조금 비싸지만 현준 아버지, 어머니의 적극적인 찬성에 힘입어 차를 샀고 이 참에 현준을 태우고 약속장소까지 온 것이다. 오는 동안 제대로는 처음 하는 운전이라 당황하기도 했던 진성은 옆에서 쫑알거리는 현준의 잦은 태클에 그냥 앞 차를 받아버리고 싶은 충동까지 느꼈다. "이렇게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은 현호의 가족들이 다 같이 모이는 날인데, 얼마 전에 약속한 것처럼 진성은 그 모임에 참석할 생각이어서 현준을 끌어들였는데 현준이 나머지 게이머들 모두를 불러버려 규모가 꽤 커졌다. 현호는 이러한 마음 씀씀이에 너무도 고마워 평소와는 달리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디냐? 들어가자. 배고파 죽겠다." 현호의 어깨에 팔을 올린 현준은 과장된 목소리로 말한 다음 진성을 힐끔 쳐다보았다. "이쪽으로 가면 됩니다." 세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우와... 진짜다." 현호의 동생으로 보이는, 이제 막 열 살이 넘는 듯한 꼬마의 모습에 모였던 사람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올랐다. TV에서만 보던 아시아 최강, 아니 세계 최강의 게이머 진성이 안으로 들어오자 윤호는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그래. 진짜다. 그런데 내가 들어왔을 때와는 소리부터 다른데? 윤호야 이리 와 봐라. 아까는 내가 최고라며?" 이미 윤호와 친해졌는지 옆에 있던 범현이 윤호의 겨드랑이를 붙들며 말했다. "아.. 간지러워요. 그거야 아까는 형이 최고인 줄 알았으니까요. 진성 형이 정말 최고잖아요. 아, 현준 아저씨도 있네. 형, 너무 좋아." 또록또록 말하는 윤호의 모습에 범현과 순식간에 아저씨로 몰린 현준은 할 말을 잃었다. "나는 현호 애비 되는 사람일세. 자네가 강군이군. 내 현호에게서 이야기 많이 들었네. 건축 관련 일을 하는데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현호에게 신경을 쓰지 못해 마음이 안 좋았는데... 자네 덕분에 이런 자리도 갖게 되고, 고맙네." "제가 뭘... 다 현호가 속이 깊어서입니다." 오십 대 중반의 현호 아버지의 말에 진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대답했다. 그 때, 밖에서 한석이 들어왔고 게이머들과 현호 가족들은 즐거운 한 때를 보낼 수 있었다. 짧은 휴가 기간 동안 선수들은 각기 평소 못했던 일에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범현과 현호는 때가 이르지만 자동차에 이것저것 싣더니 여행이랍시고 전국 투어를 나섰고 현준은 오랜만에 정효진과 데이트를 즐겼다. 한석은 유나를 데리고 고향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갈 모양이었다. 혜연은 오랫동안 집에 가지 못했는지 가족과 오붓한 시간을 보낼 듯했다. 물론 그 후에 전국 투어에서 돌아온 현호와의 계획이 잡혀 있었다. 로플 엔터테인먼트 지하에는 진규와 진성만이 남아 있었다. "넌... 어디 안 가?" 진성은 회사에서 만날 사람이 있어 나왔는데 진규가 쉬는 날인데도 보이자 궁금해서 물었다. "... 저는 월드 시리즈 끝나고 나서 쉬려고 합니다." "..." 예전부터 많은 연습량을 소화해 현준을 질리게 했던 장본인이 바로 진규라는 사실을 진성은 잠시 잊고 있었다. "쉬는 것도... 훈련이다." "네?" "쉬어야 다음에 더 잘할 수 있다. 내가 한 말은 아니지만, 잘 쉬어야 더 잘 할 수 있다고 그러더라." "누가요?" "진현준." 진규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현준 형이라면 그 이상의 말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할 만한 사람이었다. "그런 진성 형은 왜 나오셨어요?" "나? 나는 회사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이 있거든." "휴가잖아요." "그렇지. 근데 내 개인적인 일이거든. 음... 솔직히 말하면 내 개인적인 일로 회사에서 아는 사람과 만날 약속을 했으니 어쩔 수 없지." "무슨 일인데요?" "간단히 말하면, 이상한 글로 적힌 책이 하나 있는데 그 내용이 궁금해서... 문명 온라인 처음 기획하면서 조언을 얻었던 역사학자 중에 그 문자에 정통하신 분이 있다고 해서 도움을 요청했지." "아... 저도 같이 가면 안 될까요? 조금 심심하거든요." "뭐? 알았다. 같이 가자." 진성은 진규를 태우고 레가로를 몰아 쥬신대로 향했다. 정말 오랜만에 온 쥬신대였다. 전화로 만나고자 하는 사람의 연구실을 알아냈는데 알고 보니 쥬신대 사학과 교수였다. 진성은 편하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쥬신대로 차를 몰았고 정문 바로 앞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내리기 전에 모자와 선글라스를 챙겨 쓰고 거울을 보며 확인까지 했다. 이런 곳에서 알려지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몰릴 게 분명했다. 두 사람은 사람들이 힐끔 쳐다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선글라스를 끼고는 교내를 활보해 사학과가 있는 건물을 찾았다. 그 건물 앞에 작은 연못이 하나 있었는데... 그 이름은 가림토였다. 가림토라... 진성은 한석에게 듣고 인터넷을 통해 그 책에 쓰인 것과 아주 흡사한 문자가 바로 가림토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설레는 기대를 가지고 진성은 진규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 강군인가?" "네. 어쩔 수가 없어 선글라스를 쓰고 왔습니다." "아닐세. 자네 정도의 인기라면... 능히 그럴 수도 있지. 그나저나 가림토로 된 서책이 있다는데 사실인가?" 양우석 교수는 몹시도 흥분된 상태였다. 전문 분야 중 하나인 가림토에 관한 연구는 사료가 너무 적어 답보상태였는데 가림토로 기록된 서책이 있다는 말은... 그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인 것이다. "여기 있습니다." 진성은 품에서 낡은 서책을 꺼내 양교수에게 내미었다. "... 정말... 정말 가림토가 맞군. 이건 가림토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형태인 것 같은데... 이것을 어디서 구했나?" 한동안 살펴본 양교수의 목소리는 몹시 떨렸다. "일본에서 잘 아는 분이 제게 유산으로 남겨 주신 겁니다." "일본에서?" 양교수는 놀란 눈치로 반문했다. "네, 하지만 그 분 말씀으로는 원래 우리나라 사람의 물건이었다고 합니다." "음..."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겠습니까?" "시간이 조금 걸릴 걸세. 그나저나 이 서책을 기증할 생각은 없나? 이런 사료는 아주 중요한데..." "죄송합니다. 하지만 교수님께서 공개하지 않으신다면 사진으로 남기시고 연구하셔도 상관없습니다." "그..그래도 좋은가?" "네." 진성은 이미 오기 전에 어느 정도까지 양교수에게 말할지 결정한 상태였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데 받을 것만 생각해서는 아무것도 안 되는 법이다. 진성은 양교수에게 공개만 하지 않는다면 연구에 사용해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알겠네. 적어도 일주일이면 대강의 해석은 가능하고 보름 정도면 서책이 두껍지 않으니 내가 해석본을 만들어 줄 수 있네. 괜찮은가?" "네. 충분합니다." "자네 덕분에 내 연구에 큰 진척이 있을 것 같네. 그나저나 이 책은 사본인 듯한데, 혹시 진본은 없는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긴, 가림토로 된 서책이 아직 남아있을 리가 없지." 진성은 일주일 혹은 보름만 기다리면 그 알기 힘든 서책을 해석할 수 있다는 말에 다행이다 싶었다. 이곳에서 불가능하다고 하면 이제 기댈 언덕도 없어 손놓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더 얘기를 나누다 진성은 진규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햇살은 무척이나 따뜻했다. "저기... 저 두 사람. 게이머 스키피오 강진성과 리틀 스키피오 성진규 아니야?" "아! 맞다. 그 두 사람이다." 잠시 진규가 선글라스를 벗은 순간 몇 사람이 알아보았고 그 옆에 있던 진성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네가 잘못했으니 알아서 해라. 나 먼저 간다." 진성은 오랜만에 영보(影步)를 사용해 몰려드는 사람들을 피하며 쏜살같이 쥬신대의 정문으로 내달렸다. 현준은 정효진과 함께 정효진이 소속된 기획사 밀레니엄의 사무실에 와 있었다. "이런 것은 어떻겠습니까?" 현준은 이미 게이머를 그만 두면 영화로 데뷔할 생각을 굳힌 상태였다. 그런 판단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당연히 정효진이었는데 정효진은 마치 자신의 일처럼 현준의 일을 챙길 정도로 열성을 보였다. 짧은 휴가 동안 그동안 하지 못했던 데이트를 하기에도 바빴지만 정효진은 그보다는 현준을 소속사 사무실로 데리고 와 여러 영화 시나리오를 보여 주었다. 현준은 자신이 승낙하기만 하면 제작될 수 있는 영화 시나리오가 세 개나 된다는 사실에 놀랐다. 비록 적어도 일 년 후에나 촬영에 들어갈 수 있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시나리오였지만. 퓨전사극 하나, 심리스릴러 하나, 그리고 전쟁물이 있었다.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은 절대 아니었다. "아시겠지만 퓨전사극, 심리스릴러, 전쟁영화는 모두 연기력이 필수입니다. 진현준 씨가 참여하겠다면... 아마도 제작진들은 모두 OK 하겠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먼저 체계적인 연기 수업이 먼저가 아닌가 합니다." 현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게이머로서는 최고 실력을 가진 선수 중 한 명이었지만 영화는 또 달랐다. 처음 게이머가 될 때의 두근거림이 느껴졌다. "지금 모든 것을 결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진현준 씨의 이름은 대단히 큰 위력이 있습니다. 천천히, 차분하게 골라도 충분할 겁니다. 이런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진심으로 하는 얘기니까 들어주십시오. 그냥 한 번 영화를 해 보려고 하는 건지, 아니면 평생을 영화에 투자할지 먼저 고민해 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만 그런 마음가짐 없이는... 성공하기 힘들 겁니다." 현준은 정효진의 매니저와 친하다는 이 사람, 최민혁을 다시 보았다. 어찌 보면 상대가 기분 나빠할 수 있는 얘기를 저렇게 차분하게, 조리 있게 하는 것을 보니 사람을 제대로 만난 듯 보였다. "알겠습니다." "너무 고깝게 듣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럴 리가요. 오히려 솔직히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부장님, 저도 감사드려요." "하하하. 효진이에게 이런 말도 들어보고... 현준씨, 영화 정말 제대로 해 보고 싶다면... 장철봉 감독을 찾아가 보십시오. 약간 괴팍하지만 연기력 지도와 연출력에서는 국내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사람입니다. 장철봉 감독이 제대로 메가폰을 잡고 영화를 만든다면 아마 칸 영화제에서 출품 제의가 올 정도입니다. 다만 내키지 않으면 영화를 찍지 않는 사람이라... 그 동영상을 먼저 보낸 다음 찾아가셔도 될 듯합니다." 최민혁은 솔직담백한 느낌이 강해 유명인이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인 진현준의 모습을 보고 내친김에 장철봉 감독에 대한 얘기를 했다. 어쩌면 고통스럽게 조련해 힘들지도 모르지만 장철봉 감독 손을 거친 배우들은 모두 한국의 대들보 영화배우로 성장했다. 진현준이 영화에 몸을 담겠다는 각오만 가진다면 장철봉 감독이 정답일 수도 있었다. "감사합니다." 대략 삼십 분 가까이 얘기를 더 나눈 뒤, 현준과 정효진은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어때요?" "정말... 무엇이든 쉽게 없는 것 같아. 휴우... 재능도 없으면서 괜히 영화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아닌지 몰라." "아니에요. 오빠는 정말 연기에 재능이 있어요. 그건 제가 보장해요." "뭐? 네가? 하긴, 우리 효진이가 보증하면... 있는 거겠지." "오빠는 영화로 성공할 수 있을 거에요." "그러면 좋지." "그런 의미로 오늘 저녁, 오빠가 한 턱 쏘세요." "뭐? 그래. 알았다. 뭐 먹고 싶니?" 현준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살갑게 대하는 정효진의 애교스런 모습에 웃음을 터트리며 물었다. 진성은 진규를 두고 집으로 오면서 전자상가에 들러 디카를 하나 골라 샀다. 가장 좋은 기능일 필요는 없어 어느 정도 기본적인 기능이 되는 정도만 있으면 충분했다. 어릴 때 좋지 않았던 경제사정은 일본에 있는 땅까지 모두 합치면 수백억이 넘는 재산이 있는 진성이 수십만 원 디카들의 가격 비교를 하게 만들었다. 찰칵. 작지만 디카이면서 동시에 캠코더까지 가능한 모델을 손에 든 진성은 집에 도착해 식사 준비를 하는 현준 어머니의 모습을 처음으로 담았다. 액정으로 찍는 화면이 보여 쉽게 찍을 수 있어 아주 편했다. "진성이 아니니? 카메라 샀니?" "네, 그전부터 생각했는데 오늘 오다가 하나 샀어요." "그래, 아주 잘 했다." 현준 어머니는 진성이 너무 일에만 매달리는 게 아닌가 싶어 걱정했는데 또래의 젊은이들처럼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는 모습에 마음이 놓였다. 그러고 보니 꽤 오랫동안 이층 아이들의 방이 그대로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이왕 생각이 난 것, 빨리 얘기해버리는 게 상책이다. "진성아, 네 방과 현준, 현석이 방 도배를 새로 하는 것은 어떻겠니?" "도배요?" 여전히 카메라를 든 진성은 난데없는 도배에 되묻고 말았다. "그래. 분위기도 바꿀 겸... 도배 한 번 새로 하면 기분이 얼마나 다른지 몰라." "그래요? 그런데 당분간은 대회 때문에 시간이 안 날 것 같은데요. 어쩌죠?" "네가 걱정할 필요는 없단다. 사람 불러서 하면 되니까." "네, 알겠습니다. 어머니께서 알아서 하세요." 진성은 대답을 하고는 거실로 나와 이곳저곳을 디지털 카메라로 찍기 시작했다. 없을 때는 몰랐는데 막상 가지고 보니 왜 사람들이 디지털 카메라를 거의 한 사람에 하나씩 가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금방 찍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지울 수 있는 매력은 굉장히 컸다. 손으로 기록하던 글이 이제는 보는 그대로의 이미지로 바뀐 듯했다. 진성은 이번에 새로 산 자동차와 디지털 카메라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삼 일의 휴가가 끝이 났고 로플 프로팀의 선수들은 모두 연습실로 모였다. "잘 쉬었겠지?" "네!" 서재필의 말에 선수들은 모두 힘차게 대답했다. "이제는 뭘 해야 하지?" "....연습이요." 처음 대답과는 손색이 있는, 풀죽은 선수들의 대답이었다. 월요병처럼 놀다가 연습을 시작하려니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하면... 캐나다로 우승 기념 여행을 보내준다고 한다." "정말이요?" "캐나다?" "정말이다. 회사에서 결정했으니까... 그리 알고 있어라. 개인전이든, 단체전이든 우승해야만 하는 것 알지? 자, 이제 연습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자, 시작하자. 현준아, 다 같이 연습하게 잘 해라. 나는 그룹 회의에 올라가봐야 할 것 같거든. 모두 열심히 해라." 서재필은 적절히 선수들에게 하나의 작은 동기가 될 만한 것을 적당한 시기에 말했고 그것은 헤이 해졌던 선수들의 마음을 다잡게 만드는 데 특효였다. 어떤 경우에는 강한 채찍으로, 또 어떤 경우에는 달콤한 당근을 사용해야 하는데 서재필은 직감적으로 그 시기를 너무도 잘 알았다. 로플 그룹 본사. 회의장에는 회장과 사장단 그리고 몇몇 사람들만 참석한 듯했다. 진민수 로플 그룹 회장과 로플 소프트의 사장 이희철, 로플 하드의 신임 사장 백승재, 로플 엔터테인먼트의 사장 황태산, 거기에 부사장 혹은 팀장급의 인사들 몇 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오늘의 회의는 극도의 보안을 요구하는 사안입니다. 모두들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희철 사장이 먼저 일어나 앞에 마련된 강단에 서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보통 그룹 회장이 참석하는 회의도 보안이 엄했지만 오늘은 더 심한 듯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예정인지 사람들은 궁금한 듯 눈빛을 반짝였다. "로플 OS 프로젝트 코드명 룸스(Rooms)가 오늘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모인 사람들 모두 그 프로젝트가 승인되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회장이 적극 지지하고 로플 소프트의 사장이자 그룹 전체의 서열 2위가 찬성한 터라 말이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 출범 시기를 놓고 갑론을박, 말이 많았다. OS는 한 회사가 책임지기에는 너무 큰 프로젝트였다. 정통 소프트웨어 전문 기업도 아닌 로플이 OS 프로젝트를 시작하려면 꽤 많은 준비 기간이 필요하리라 사람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빨리 시작하다니. 자세한 사실을 모르고 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일어서신 분들의 걱정은 잘 알고 있지만 잠시 참으시고 질문은 나중에 받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이 화면을 보시고 말씀들 나눕시다." 이희철 사장은 잔뜩 묻고 싶은 게 많은 사람들을 개의치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실내의 조명이 어두워지며 강단 바로 옆에 스크린이 내려왔고 곧 밝은 화면이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슨 화면인가 했는데... 점점 그 내용을 파악하게 되자 OS와 관련해 전문적인 지식이 부족한 로플 엔터테인먼트 사장 황태산까지 입을 열고는 다물지 못했다. 왜 코드명이 룸스인지 모두들 이해하고도 남았다. 반시간이 채 되지 않는 시뮬레이션을 본 사람들 사이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뭔가 말하고 싶은데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험험... 이 화면을 보고 가슴이 뛰지 않는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화면에 나온 사람은 여기 앉아 있는 로플 소프트의 조진철 팀장이지만 실제로 그 같은 개념을 만들고 저렇게까지 구체화한 사람은... 현재 로플 엔터테인먼트 소속 게이머이자 로플 소프트 밀리터리 아트 개발을 맡고 있는 강진성 팀장입니다." 다시 한 번 좌중은 조용해졌다. 강진성... 지난번에 그룹 주재 회의에서 탁월한 제안을 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시기상조일 수도 있지만 저를 비롯해 몇몇 이 분야에 대해 어느 정도 식견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내린 결론은... 지금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직 스카웃해야 할 사람들도 많고 룸스가 가져야 할 기능의 규정 뿐 아니라 그 상호적인 관계와 현재 시장과의 연관성 등 많은 일들이 산적해 있어 엄두가 나지 않지만 시작은 해야 합니다. 조금 전에 보신 것처럼 저와 같은 것을 단 시간에 만들 수 있는 기반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저런 프로토타입보다 정식 제품을 만드는 데 시간은 훨씬 더 많이 들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룸스 프로젝트는 이미 성공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자신만만한 이희철 사장의 말은 회의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런데 지난 번 말처럼 그 프로젝트의 리더는 강진성 팀장이 맡기로 했는데... 지금은 월드 시리즈 때문에 몸을 뺄 수 없는 시점이 아닙니까?" 황태산이었다. 소속 프로팀이 이제 한 달 후면 월드 시리즈에 진출하게 되는데 지금 강진성이 빠지면 절대 안 되는 상황이었다. 황태산의 말은 당연했다. "맞습니다. 해서 여기 있는 조팀장에게 당분간 프로젝트의 리더를 맡겨 일을 추진해 나갈 생각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을 모두 모아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이 프로젝트 때문에 각 계열사의 인사이동이 불가피해졌기 때문입니다. 룸스 프로젝트는 로플 소프트 산하가 아니라 그룹 차원에서 지원할 예정이며 로플 연구소라는 이름으로 대외에 알려질 겁니다. 물론 연구소장은 조진철 팀장이 맡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룸스 프로젝트가 끝이 나면?" 이번에는 로플 하드의 신임사장인 백승재의 물음이었다. 전문 경영인으로 로플 그룹에 영입된 백승재는 진회장의 후배이자 황태산 사장과는 옛날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민첩하고 사람이 좋은데다 주변 사람들을 아우르는 능력을 지녀 약간은 다혈질적인 하드웨어의 달인 곽팀장과 호흡을 능히 맞출 수 있었다. "네, 또 다른 계열사로 분리시킬 생각입니다." 이희철 사장은 담담하게 말했다. 사람들의 반응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이제 시작될 프로젝트를 3년 이후까지 내다보면서 계획을 하다니 쉽게 결단을 내릴 수 없는 결정이었다. 실패한다면... 그야말로 엄청난 손해를 감수해야 할 것이다. "각 계열사에서 핵심 인물을 로플 연구소로 빼내 갈지도 모릅니다. 최대한 외부에서 인재를 받아들일 생각인데 그게 여의치 못하면 어쩔 수 없겠지요. 앞으로 3년 동안 로플 그룹은 모든 총력을 로플 연구소에 쏟을 생각입니다. 물론 로플 소프트에서는 다음 버전의 게임 개발에 몰두하고 로플 하드에서는 하드웨어 연구에 박차를 가해야겠지요. 각 계열사 사장은 원래부터 팀장급 이하로 얼마든지 인재를 받아들일 권한이 있습니다. 현재 로플 그룹을 이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강진성 군과 같은 인재들을 널리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말은 정중히 했지만 까놓고 들여다보면 OS 제작의 요람인 로플 연구소를 위해 사람을 빼내갈 테니 인물을 찾아서 알아서 일을 해라는 말이었다. 가장 큰 타격을 입을 게 뻔한 로플 소프트의 사장이 저런 식으로 말하자 다른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OS는 기본적으로 소프트웨어였다. 로플 소프트에서 누가 봐도 막중한 역할을 맡고 있는 조진철 팀장과 강진성 팀장이 로플 연구소로 옮긴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타격이었다. 진회장의 아이디어는 주효했다. 다른 사람들은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인사이동은 천천히 할 예정이니 그리 알도록 하십시오. 또한 모든 것을 로플 연구소에 집중시킬 테니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나 로플 OS에 대해 생각해 아이디어를 내도록 하십시다. 우리가 먼저 나가야 사람들이 따라오지 않겠습니까?" 이희철 사장의 불을 뿜는 말에 사람들은 고개만 끄덕였다. 진회장과 이희철 사장 그리고 황태산 사장의 파워는 대단했다. 룸스 프로젝트는 이미 기정사실이 되었고 그로 인해 로플 그룹에는 새로운 돌풍이 불기 시작했다. --------------------------------------------- 7권의 절반 가량을 연재했습니다. 더 이상의 연재는 힘들 듯합니다. 사실 출판사에서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6권까지 인터넷에 먼저 연재가 되는 바람에 책의 판매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듯합니다. 현재로서는 티지피2도 불투명한 상태입니다.. 하하.. ㅡ.ㅡ 마지막 7권을 이런 식으로 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게 없을 것도 같지만... ㅜ.ㅜ 제가 미리 약속한 완결까지의 연재를 지키지 못해 대단히 죄송스럽습니다. 지금까지의 연재로 그 마음을 달래셨으면... 지금까지 티지피1을 좋아해 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2부도 좋은 기회가 생긴다면, 여러분들 앞에 내놓을 겁니다. (출판이 불가능하다면... 시간은 걸릴지 몰라도 인터넷 연재라도 해서 보여야지요.. ㅜ.ㅜ) 이제 곧 소천전기와 더불어 지구인으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하루, 좋은 한 달, 좋은 일 년 되십시오! -작독 배상- --------------------------------------------- TGP1(The Gamer Part 1) [187 회] 끝까지 달리자! "이야기 들었어?" "뭘?" 진성은 잠시 휴게실로 나와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다가온 현준이 뜬금없이 묻자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어 되물었다. "있잖아. 조진철 팀장님이 새로 생기는 로플 연구소장으로 자리를 옮겼대." "뭐?" "몰랐구나. 조진철 팀장 뿐 아니라 로플 소프트 소속 프로그래머 중에 상당수가 지금 당장, 아니면 조만간 로플 연구소로 옮길 것 같다던데... 그리고 로플 소프트는 공개채용으로 사람들을 대거 뽑을 예정이고." "로플 연구소..." 진성은 조팀장이 로플 연구소장으로 갈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이루어질 줄은 생각도 못했다. 적어도 일 년 정도 후에나 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닥치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 조팀장에게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이처럼 일이 빨라지니 자신 역시 뭔가 더 열심히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어 진성은 다시 불안해졌다. "잠깐만." 현준을 그대로 두고 진성은 밖으로 나와 차를 운전해 로플 소프트 건물로 이동했다. 조팀장에게 확인을 해 봐야 할 듯싶었다. 분위기상 올해가 지나야 가능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왜 이렇게 급박하게 돌아가는 걸까? 진성은 이때까지 일본에서 만들었던 그것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진성이구나." 조팀장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짐을 싸고 있었다. 워낙 책이 많아 혼자서 옮기기는 불가능했고 사람을 불러 책을 옮기고 있었다. 책상 서랍을 열어 짐을 챙기며 조팀장은 손짓으로 진성을 불러 책상 앞 작은 의자에 앉으라고 권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겁니까?" "보는 대로야. 로플 연구소가 오픈 되었고 내가 소장으로 이동하는 거지." "그 말이 아니라, 왜 이렇게 빨리 되었냐고요? 지난번에 하는 말을 들으니 올해는 불가능해 보이던데. 아닌가요?" "..." 진성의 역정에 조팀장은 할 말이 없었다. 자신 때문에 시간이 당겨진 줄은 꿈에도 모르는 눈치였다. 얄미웠다. "말 좀 해 보세요." "내가 너 때문에 빨리 죽을 지도 모르겠다. 이게 다 네가 만든 그것 때문에 빨리 당겨진 거다." "네?" "휴우... 생각해 봐라. 그런 것을 가지고도 미적미적할 수 있겠냐? 게다가 회장님과 이희철 사장님이 그것을 보시더니 나더러 로플 연구소장으로 가라며 인사 지시를 내렸다.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있겠냐? 이게 다 너 때문이다." "..." 이번에는 진성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일이 그렇게 되었다니... 하지만 진성에게도 할 말은 있었다. "그걸... 보인 사람은 조팀장이잖아요." "..." 따지고 보면 그렇다. 진성에게 저장한 후에 보내라고 한 것은 조팀장 자신이었다. 게다가 진회장과 이희철 사장에게 보인 사람도 자신이었다. 조팀장은 눈을 감았다. "아마도 당분간은... 로플 소프트에 있을 때보다 로플 연구소로 가면 일은 더 적을 듯하다. 그동안 푹 쉴 테니 열심히 게임하고 오너라. 그 때까지는 유유자적 기다릴 테니까." "... 네, 알았습니다. 대신 회장님께 이 얘기를 들려드려야겠네요." 진성은 조팀장이 얄미웠다. "휴우..." 오랜만에 사부 유조의 집으로 온 진성은 부지런히 정원을 손질하고 객방을 치웠다. 매주 올 수가 없어 급할 때는 고용한 정원사에게 부탁하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은 어쩐지 뭔가 모자란 듯했다. 특히 도장과 손님을 맞는 작은 방은 직접 치우고 닦고 싶었던 진성은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한 달 정도 시간이 남아 마음에 여유가 있던 진성은 일요일을 맞이해 하루 종일 사부 유조의 집에서 보낼 생각으로 아침만 먹고 바로 집을 나서 이제 어느 정도 마음에 흡족하게 치운 듯했다. 현준은 휴일이라 정효진의 촬영장으로 떠났고 다른 선수들 역시 나름대로 약속이나 집으로 돌아갔다. "여기는 여전하네." 도장은 처음 유조를 따라 들어섰을 때와 같았다. 향이 나는 나무로 지어져 은은한 향이 가득한 도장. 이곳에서 진성은 사부 유조에게 팔극신권과 무명검법에 대해 배웠었다. 사부님이 항상 앉던 자리 바로 옆에 조심스레 앉은 진성은 눈을 감았다. 바로 옆에 할아버지가 있을 것만 같았다. 요즘에 느낀 것이지만 아버지, 어머니보다 할아버지인 사부 유조가 더 많이 생각났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떠나버린 부모님과는 달리 유언까지 남긴 할아버지... 진성은 손바닥으로 여전히 윤이 나는 부드러운 바닥을 어루만졌다. 우뚝 일어선 진성. 도장의 가운데서 처음 배웠던 때를 생각하며 몸을 움직였다. 팔극진결... 이 동작에서는 호흡을 이렇게 하고 정신집중은 이런 방법으로 해야 한다.. 이런 식의 가르침이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문득 외로움이 느껴졌다. 일이 없을 때는 항상 같이 다니던 현준이 없어서일까? 진성은 혼자라는 사실을 깨달아버렸다. "현준이 녀석, 효진씨와는 잘 되어 가는 건가?" 짬이 나면 전화나 문자를 주고받고 시간이 되면 부지런히 만나러 가는 현준의 모습은 여러 사람을 부럽게 만들었다. 그 사람 중에 자신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아닌 것 같았다. 한참을 움직인 진성은 도장 한 가운데에 그대로 누워 버렸다. 천장이 보였다. 아... 배가 고팠다. 진성은 순간 일어나 부엌으로 달려갔다. 뭔가 먹을 게 없을까?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이 한동안 없었으니 먹을 게 있을 리가 없었다. "뭘 먹지?" 벌써 2시가 넘었는데 지금 집으로 돌아가기도 좀 그랬다. 회사에 간다고 해도 사람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진성은 근처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사와 정원이 훤히 보이는 객방의 마루에 앉아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게이머로 코디, 경호원들과 같이 다니고 밀리터리 아트 개발팀장을 하면서 역시 적지 않은 사람들과 같이 있어 이렇게 혼자, 그것도 컵라면을 먹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덜 익었는지 약간 꼬들꼬들한 면발이 배고픈 진성에게는 꿀맛이었다. 정리도 하고, 청소도 해서인지 젓가락 몇 번 놀리니 면발은 사라졌고 어쩔 수 없이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국물까지 완전히 마셔버렸다. 시원했다. 낮고 넓은 데다 국물까지 시원한 컵라면. 진성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시원한 냉수 한잔을 들이켰다. 편의점에서 사온 컵라면과 냉수 한잔.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문득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기 전, 어머니가 해 주셨던 라면이 생각이 났다. 그 이후에는 거의 라면을 먹지 않았다는 것도. 객방의 마루에서 내려와 돌계단 몇 개 아래의 정원에서 진성은 한낮의 햇볕을 즐겼다. 천원도 되지 않는 컵라면 하나에 진성은... 혼자서 느낄 수 있는 작은 행복을 발견했던 것이다. 사람들에게 굳이 둘러싸이지 않아도, 충분히 혼자서도 가능했다. 바로 그 때, 진성은 현준과 그 가족이 찬성하지는 않겠지만 어차피 해야 할 독립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어 현준이 먼저 결혼한다면, 진성은 집에서 나와 독립할 작정이었다. "... 완전히 익혀야 완전히 알 수 있다. 완전히 알아야, 완전히 다스릴 수 있고, 완전히 다스릴 수 있어야 완전한 자유는 얻을 수 있다..." "... 지나친 자유는 자유가 아니다. 원하는 모든 것을 아는 것 역시 마땅한 도리는 아니다..." "... 자유는 노력해 얻는 것이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용기가 없다면 자유도 없다..." 어찌 보면 자유에 대한 격언 모음이라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가림토를 해석한 것이라니. 진성은 전문가인 양우석 교수에게 받은 해석본을 손에 들고 몇 번이나 읽었지만 황당함에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현대에 사는 사람이 해석했기 때문에 현대의 시각으로 바라본 것이겠지만 정말 서구의 명언과 다를 바가 없는 듯했다. 특히 서로 어긋나거나, 대립되어 모순이 생기는 부분이 있어 진성을 당혹케 했다. 완전히 알아서 결국 완전한 자유를 얻는다고 하는데... 모든 것을 아는 것은 마땅한 도리가 아니라니.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 것일까? 수련은 계속 하고 있지만 그 성과는 예전에 비해 아예 느낄 수 없을 만큼이나 미미했다. 어떨 때는 제대로 하고 있나 의심이 들기도 했다. 보통 사람이면 아주 오래 전에 느껴야 할 의심과 불안을 진성은 이제 느꼈다. "자유라..." 사부인 유조는 해방을 무도의 목적이라 해석했다. 가진 것에서 자유 하는 것... 무명검법을 전한 사람에게서 받은 서책의 내용과 통하는 면이 많았다. 자유에 대한 글이니... 하지만 추상적이고 무슨 말을 하는지 쉽게 알기 힘든 내용이라 진성은 무척 난감했다. 지금 가진 실마리는 이것뿐인데... "어쩔 수 없지. 일단 월드 시리즈를 끝내 놓고 볼 일이다." 당분간 무명검법과 무술에 대한 관심은 끊기로 작정한 진성은 해석본을 다시 한 번만 자세히 읽고는 책상 위에 던져 놓았다. 그리고는 문명 온라인 연습실로 직행했다. -- 로플 템즈강과 버킹검 궁전, 대영박물관으로 유명한 영국 런던의 날씨는 그리 좋지 않았다. 런던의 변덕스러운 날씨는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직접 겪는 것과 단지 소문으로 듣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전 세계에서 몰려온 월드 시리즈 참석자들은 각자 자신의 여행 가방을 들고는 일제히 공항의 게이트를 빠져나왔는데 문명 온라인이 영국에도 인기가 좋은지 수십 명이 넘는 기자들의 카메라 세례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열광적인 분위기지만 일본처럼 소녀 팬들이 몰려들어 아수라장이 되지는 않았다. 거기에 의외로 게이머들을 응원하는 팬들 중에는 상당히 나이가 들어 문명 온라인을 즐길 수 있을까 싶은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하긴, 영국 출신의 월드 시리즈 진출자의 나이는 30대 후반으로 대회 최고령이었다. "여긴 정말 외국인들 밖에 없구나." 미국과 영국은 완전히 달랐다. 미국의 공항, 특히 라스베가스 근처나 LA의 공항에서는 황인종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 일본인, 한국인, 중국인. 서로 쉽게 구별할 수는 없어 동양인들은 서로 바라보며 친근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영국은 틀렸다. 대부분이 백인이었고 유색인종은 그다지 많이 찾아보기 힘들었다. 찾는다 해도 대부분 여행객이었다. 범현의 말은 적당했다. "여기가 바로 해가 지지 않던 대영제국이었던 바로 그 나라인가?" 한석이었다. 전 세계에 식민지를 가져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던 대영제국... 그 흔적은 대영박물관에 남아 있었다. "자, 빨리 이동하도록 하자." 같이 와 인솔 책임자를 맡은 서재필의 목소리였다. 서재필은 게이머들과 코디, 경호원들 모두를 서둘러 호텔로 이동시켰다. 신기한 구경은 게임이 끝나고 해도 충분했다. 이곳, 영국의 런던에 온 이유는... 단 하나 월드 시리즈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서였다. "동양의 스키피오가 오늘 런던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아시아에서 문명 온라인에 관해서는 최고의 수준에 오른 것으로 평가되는 게이머 강진성은 처음부터 스키피오라는 닉네임을 썼는데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강진성의 게임 플레이는 많은 아마추어 게이머들이 문명 온라인을 즐기는 데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시아 리그에서 단체전과 개인전 우승을 휩쓴 한국의 로플팀은 당당한 표정으로 공항을 나와 미리 예약된 호텔로 이동했습니다. 이상 BBS 산드라 잭슨이었습니다." 텔레비전에서는 미모의 금발 여기자가 로플 프로팀이 게이트를 통과하는 것과 이제까지 보였던 게임 장면들을 편집한 영상을 뒤로 하고 진지하게 설명하는 모습이 흘러나왔다. "드디어 왔군. 어떻게 생각해, 데이비드?" 유럽 리그, 개인전 2위라는 성적을 낸 데이비드 오웬에게 지금은 매니저이지만 한 때는 문명 온라인 게이머였던 아놀드 오웬이 물었다. 개인적으로 아놀드는 데이비드의 형이기도 했다. "뭘?" 데이비드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 건성으로 대답했다. "세계 최강에 가장 가까울 것이라 알려진 로플이 왔잖아. 그 중에서도 스키피오라는 게이머... 너도 그 사람의 플레이 보고는 놀랐잖아. 안 그래?" 데이비드는 문명 온라인을 처음 플레이하고부터 점차 그 재미에 빠져들었는데 결정적으로는 스키피오와 한신으로 알려진 두 게이머의 격돌을 담은 동영상을 인터넷에서 다운받아 보고 난 뒤 완전히 빠져 헤어날 수 없었다. 데이비드의 목표는 동양의 스키피오, 강진성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상이자 라이벌로 한국의 스키피오를 생각하던 데이비드였다. 그러니 형인 아놀드로서는 왜 갑자기 변했을까 걱정이 될 수밖에. "... 그거 다 해킹이야." "해킹?" 무심한 데이비드의 말에 아놀드는 놀라고 말았다. 객관적으로 세계 최고수에 가장 가까운 동양의 스키피오가 해킹을 했다니. 이 말은 밖으로 알려지게 되면 큰 파장을 일으킬 게 틀림이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해킹을 하다니? 나 역시도 게이머를 하며 수없이 그 장면을 봤는데... 전혀 해킹 같지는 않던데... 해킹을 해서 어떻게 그런 게임이 나올 수 있겠냐?"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무슨 일인지 지금 소문이 다 났다니까. 처음엔 믿을 수가 없었는데, 생각해 보니 아무리 게임을 먼저 시작했다고 해도 이제까지 제대로 져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니... 그게 말이 돼? 해킹을 하지 않더라도 그 능력은 대단하지만 십 중 팔, 구는 해킹을 어느 정도는 이용했을 거야." ".... 그래? 그래도 너는 아무 말 않고 가만히 있어라." "당연하지. 내가 바보인 줄 알아?" "아니었어?" "..." 동양에 스키피오 강진성이 있다면 유럽에는 스키피오 율리아노가 존재했다. 이탈리아 태생으로 프랑스 파리에 살던 율리아노는 문명 온라인에서 혜성같이 나타나 쟁쟁한 우승 후보를 꺾는 파란을 일으켰다. 그 플레이는 상대 전략의 허를 찌르거나 자신의 전략에 상대가 휘말리도록 만드는 동양의 스키피오와 너무나 닮아 율리아노는 스키피오라는 닉네임을 얻게 되었다. 또한 이탈리아 태생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율리아노는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고 살고 있는 프랑스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문명은 당연히 로마였다. 강진성이 사용하는 대부분의 전략은 율리아노가 몸으로 익혀 변형할 정도로 능숙했고 그 외에도 자신만의 전략을 만들어 스키피오라는 닉네임이 무색하지 않게 했다. 처음에 율리아노는 프랑스 파리로 유학 온 학생으로 알려졌다. 그다지 좋은 집이 아니라 어려운 환경에서 열심히 사는 젊은이의 이미지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지만 곧 율리아노 집안이 어디인지 언론에 알려지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율리아노는 이탈리아에서도 유명한 마피아 패밀리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언론에서는 난리가 났다. 이탈리아 언론은 그나마 그 마피아 패밀리가 지역에 도움을 주는,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마피아와는 다르다고 말하는 반면에 영국의 언론은 율리아노를 유럽 리그에서 배제시켜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많은 사람이 그 주장을 무시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한동안 사라졌던, 집중과 노력으로 사라지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던 능력이 되살아났다. 진성은 일본 동경에서 게임을 하며 느꼈던 그 현상이 다시 나타나자 마음속의 불안을 감출 수 없었다. 한석과 게임을 하는 도중, 마치 눈으로 보는 듯 완전히 상대의 플레이가 느껴져 진성은 바로 그 순간 게임을 멈췄다. 아니 이번에는 정말 눈에 보였다. 입체 화면을 보는 듯, 상대의 모든 플레이, 컨트롤이 보였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온 몸을 강타하는 충격. 하늘이 노랗게 변했다. 번개를 맞으면 이런 느낌일까? 진성은 신음했다. "윽..." 온 몸에 힘이 다 빠졌다. 이런 경험은 거의 없었는데... 동경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진성은 게임기 밖으로도 나올 힘이 없어 게임기 속에서 숨만 헐떡거렸다. 그 때 게임기 콕핏이 열렸다. 한석이었다. "... 진성아, 어디 아파?" 한석은 걱정이 되어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진성의 이마는 땀으로 범벅이었고 눈은 이상할 정도로 흔들렸다. "괘..괜찮아. 재.. 재필이 형 좀 불러줘." 예전과는 달리 정말 눈에 보이는 현상에 진성은 서재필을 찾았다. 서재필이라고 어떻게 손 쓸 방법이 있을까마는 적어도 이해하고 같이 대책을 세울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다가온 충격에 진성은 정신을 놓고 말았다. 서울 근교의 로플 연구소. 소장으로 온 조진철은 생각과는 달리 그다지 여유롭지 않았다. 많은 일거리와 진성이 월드 시리즈를 마치고 오기 전 어느 정도의 전체 계획이 나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조진철은 놀 시간이 없었다. 로플 OS, 코드명 룸스를 위해 하나부터 열까지 혼자 챙겨야 하는 입장이라 조진철은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휴우... 이 녀석 오기만 해 봐라." 애꿎은 진성만 탓하는 조진철은 서류와 책들에 파묻혀 살았다. 제일 먼저 룸스를 제작하기 위한 도구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하는데 조진철은 그것을 '룸스메이커' 라 불렀다. 속 알맹이는 하나도 없지만 룸스메이커가 가져야 할 기능은 하나한 정리했고 서서히 겉모습만큼은 갖춰가고 있었다. 조진철은 진성이 보여준 희망에 젖기도 했고 그것을 본 대가로 엄청난 일에 짓눌리기도 했다. 그 순간 벨이 울렸다. "소장님!" "뭔가?" 급한 일인 모양이다. 무슨 일일까? 제대로 인원도 갖춰지지 않고, 로플 연구소로 온 사람들도 서먹서먹할 이 때에 무슨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문제가 있다면... 얼마 전 옮긴 로플 시스템뿐인데... 설마.. "로플 시스템이 이상합니다." 역시... 조진철은 급히 밖으로 뛰어나갔다. 로플 소프트의 로플팀에서 대거 로플 연구소로 왔지만 아직은 제대로 로플 시스템을 다룰 사람이 부족했다. 이런 마당에 이상이 생기다니... 조진철은 아직도 페인트 냄새가 나는 깔끔한 복도를 뛰기 시작했다. "문제는?" 로플 시스템 컨트롤 센터로 뛰어 들어간 조진철은 곧바로 물었다. 박경환 연구원은 조진철이 뛰어 들어 오자 당황했지만 곧 대형 모니터를 가리켰다. 로플 시스템의 상태를 나타내는 커다란 모니터에는 수많은 수치들이 나왔는데 조진철은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 이런 적은 처음인데..." 예전에 스파크가 튀어 시스템이 멈춘 적은 있어도 이처럼 요동치고 통제 불능이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 조진철은 차분히 생각한 후, 로플의 기본 테스트를 지시했다. "로플 점검. 베이직 테스트를 시작하도록." "예, 소장님." 연구원들은 분주히 움직였다. 대형 모니터에는 현재의 테스트 과정과 각 세부 사항에 대한 결과가 표시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하드웨어는 이상이 없었다. 소프트웨어는... 아주 바탕이 되는 부분은 정상이었지만 로플 시스템에 대한 통제는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무슨 이유일까? 조진철은 계속 생각했다. "아..." 그 순간, 대형 모니터에 나온 수치 결과들은 완전히 사라졌고 오래된 TV에 나올 법한 노이즈와 더불어 어떤 영상이 떠올랐다. 사람의 얼굴 같은데... 노이즈가 많아 쉽게 알아볼 수 없었다. "녹화는?" 조진철은 급히 물었다. "하고 있습니다." 다행이었다. 처음에는 단지 사람의 얼굴,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 뿐 아무것도 알 수 없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노이즈는 줄어들고 화면 자체도 깨끗해졌다. 그와 더불어 로플 시스템도 점차 정상을 되찾았다. 통제권은 회복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대형 모니터에는 알 수 없는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진철을 비롯해 연구원들 모두 그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 연구원 한 사람이 뭔가 발견한 듯 외쳤다. "저 사람은..." 다른 연구원도 외쳤다. 조진철의 눈에 들어온 영상... 조진철은 화면속의 사람이 누구인지 이제야 알았다. 알고 보니 처음부터 충분히 눈치 챘어야 하는데 왜 이제야 알게 된 걸까? 화면속의 사람은 게이머 스키피오 강진성이었다. 다만 인상이 왠지 모르게 다른 강진성이었다. 조진철은 진성이 로플 시스템에 저런 장난을 친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통제 불능의 현상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제까지 로플 시스템을 보면서 두 번의 커다란 사고를 제외하고는 세상에 이처럼 견고한 시스템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로플은 완벽에 가까웠다. 만든 사람의 입장에서 로플은 굉장히 견고했다. 진성이 장난을 쳤다고 해도... 이런 식의 반응이라니... 조진철은 급히 진성에게 확인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만약 진성도 모르는 일이라면... 조진철은 순간 마음속에 떠오른 의문에 이유도 없이 소름이 돋았지만 애써 무시했다. 연구원에게 이 사실을 비밀에 붙이고 모든 테스트를 다시 하라고 지시한 다음 방으로 돌아온 조진철은 급히 영국 런던에 있을 로플 프로팀 서재필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연참의 시작!!!! -작독(현민)- ---------------------------------------------- TGP1(The Gamer Part 1) [188 회] 끝까지 달리자! 서재필은 한꺼번에 두 곳에서 급한 일이라며 찾자 어리둥절했다. 서울에서 급한 일로 전화한 조진철 로플 연구소 소장과 진성에게 무슨 일이 있다며 뛰어온 범현이... 서재필은 핸드폰을 들고 범현을 따라 뛰었다. 뛰어 가면서 조진철에게 얘기를 들었다. "네? 아... 그러면 진성에게 그 일에 대해 물어 보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네, 알겠습니다. 곧 전화 드리죠." 서재필은 전화를 끊은 다음 범현과 함께 임시 연습실 안으로 들어갔다. "진성아.." 창백한 얼굴, 식은땀, 손까지 하얗게 변한 진성의 모습은 한눈에 아픈 사람과 같았다. "병원에는?" "연락했습니다." 현준이 대답했다. 현준의 목소리는 느껴질 정도로 떨렸다. 서재필의 뇌리에 조진철 팀장의 간곡한 부탁은 사라지고 없었다. 사람이 아픈데 그런 일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서재필은 한석을 바라보았다. "게임을 하는 도중에 갑자기 게임 오버를 선언해 이상한 생각에 다가가보니 땀을 흘리고 제 정신이 아닌 듯했습니다. 그 외에는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한석의 말에서 뭔가 유추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뭐가 문제일까? 매일 무술을 수련하는 진성에게 감기나 몸살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서재필은 그 순간 일본에서의 경험을 떠올렸다. 이번에도 그런 것일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서재필은 한숨을 크게 쉬었다. 한동안 괜찮더니... 월드 시리즈를 앞둔 이 마당에 진성이 아프다니. 서재필은 매니저로서, 프로팀의 책임자로서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 아무래도 진성은 이번 월드 시리즈를 포기해야 할 것 같다." "..." 유나와 혜연까지 모두 모여든 임시 연습실 내부에는 무거운 정적만이 감돌았다. 누구도 말을 하지 못했다. 속 시원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선수들 모두 동경에서의 일을 어느 정도 눈치 채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와 같은 일인가... 그렇다면, 어쩌면 게이머로서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를 문제였다. "안 됩니다. 절대 그래서는 안 됩니다." 현준이었다. 현준의 외침은 벽에 부딪쳐 울리고 또 울렸다. 서재필은 물론 어느 누구도 현준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들의 귓가에는 현준의 말이 계속 울리고 있었다. 로플 그룹의 총수 진민수 회장은 조진철 로플 연구소 소장을 비롯해 그룹의 중요 인사와 같이 예정되지 않았던 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스케쥴 상 계획되었던 몇 개를 취소했다. 그점은 회의에 참석한 이희철 로플 소프트 사장과 황태산 로플 엔터테인먼트 사장, 그리고 로플 하드의 백승재 사장, 곽진호 부사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진성이 쓰러진 시점에 로플에 이상이 생겼단 말인가?" 이희철 사장의 말이 낮게 울렸다. 조진철 팀장에게서 들은 보고에 진회장과 다른 사람들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로플 계획이 가시화 된 시점에 있었던 대형 사고로 당시 게이머이자 테스터였던 강진성이 혼수상태에 빠졌던 사태. 라스베가스에서 강진성이 총격을 당했을 때 시스템 다운에 이르렀던 사고. 거기에 이번에는 진성이 정신을 잃자 통제 불능이 되어버린 로플 시스템. 강진성과 로플 시스템은 뭔가 관계가 있는 것이다. "네, 그렇습니다." 조소장은 확실히 대답했다. 믿기는 힘들어도 사실이었다. 인정해야만 했다. "로플에 이상이 있었던 적은 세 번인데... 그 모두 강진성 팀장과 관련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뒤늦게 합류한 백승재 로플 하드 사장이었다. "그렇습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강진성과 로플은... 연관이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로플의 가상현실에서 강팀장이 보이는 것과 같은 막강한 위력을 발휘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추진 중인 로플 OS, 룸스의 경우도 강팀장이 없다면 저는 100% 실패라고 확신합니다. 제가 룸스를 적극적으로 찬성한 이유는 단 하나 강팀장이 로플 그룹에 있기 때문입니다. 믿기 힘들겠지만 강팀장과 로플의 관계는 인정해야 합니다." "..."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듯했다. 따지고 보면 컴퓨터 시스템인 로플과 사람인 강진성이 그와 같은 현상이 일어나도록 관계가 있을 수 있는가? 제 정신인 사람이라면 절대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조소장의 근거 있는 말에 아무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입으로는 우연의 일치라 하고 싶지만 머릿속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 원인을 알 수는 없나?" 가만히 듣고만 있던 진회장이 물었다. 강진성은 로플 그룹에서도 아주 중요한 인재지만 그보다 자신의 아들과 같은 존재였다. "이번에 영국 런던에서 일어난, 연습 중의 사건을 듣고 저 또한 놀라 지금까지의 기록을 모두 뒤져 정리를 했습니다. 구체적인 사실은 아까 말씀드렸으니 제 나름대로 발견한 것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조소장의 말에 모두들 침도 삼키지 못할 정도로 긴장하며 귀를 기울였다. "처음 강팀장과 로플이 만난 것은 단순히 테스터, 혹은 프로그래머와 시스템의 입장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지금 룸스메이커, 아.. 제 나름대로 룸스를 위한 제작도구를 룸스메이커라 이름 붙였습니다. 아무튼 룸스메이커의 핵심이 될 가상현실 상에서의 프로그래밍 방식을 위해 그 당시 강팀장은 로플에 접속을 하곤 했습니다. 사고가 일어난 것은 로플 시스템 기반의 게임 테스터 중이었습니다. 결론만 말씀드리면 제 생각에 그 첫 사고는 정말 우연입니다. 스파크가 생겼고... 그 때문에 강팀장은 코마, 혼수상태에 빠졌던 것입니다. 그 사고는 우연입니다. 하지만 그 뒤, 라스베가스에서의 총격... 그 사고는 강팀장과 로플이 아무런 연결이 없었는데도 로플은 다운되었고 강팀장은 부상을 당했습니다. 그 때 강팀장은 죽을 뻔 했지요. 이것을 보면 로플과 강팀장의 관계가 논리적, 합리적,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번에 일어난 일... 이번에는 혼수상태도 아니고, 총격을 맞은 것도 아닙니다. 강팀장은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연습하다 기절한 것입니다. 정신을 잃은 것이지요. 병원에서는 목숨에 아무런 지장도 없고 피곤과 부담감으로 인한 스트레스라고 결론 내었습니다. 그런데 로플은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졌습니다. 로플과 강팀장의 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가까워졌습니다.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지만 제 생각이 옳다면, 강팀장이 감기를 앓아도 로플은 요동칠지도 모릅니다." "..." 불을 뿜는 조소장의 말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단 한 가지, 처음의 가정만 제외한다면 조소장의 말은 충분히 논리적이었다. 거기에 그 믿을 수 없는 관계가 더 가까워지고 있다니... "강팀장은 이 일에 대해 알고 있나?" 이희철 사장이었다. "아직 말하지 않았습니다." 강진성 본인이 이 일에 대해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희철 사장은 그게 더 걱정이었다. 아직 확신을 할 수는 없지만 조소장의 말이 사실이라면 진성은 그걸 어떻게 받아들일까. 최초로 기계와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 뭔가를 나눌 수 있는 인간... 조소장은 이사장의 말에 단호하게 대답했다. "모든 것이 확실해질 때까지 강팀장에게는 아무것도 말하지 말도록." "예, 알겠습니다." "조소장은 그와는 다른 관점에서 이번 사고를 다시 한 번 분석해 보도록. 선입관을 최대한 배제하고... 무슨 말인지 알겠나?" 진회장의 말이었다. 조소장은 그 말 의미를 알았다. 이 일은 정말 철저히 조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 모인 사람들, 오늘 들었던 말은 결론이 나기 전까지 절대 말하지 말도록 하시오. 로플 그룹의 미래와 더불어 한 사람의 인간이 가진 미래와 관계된 일이니... 무슨 말인지 알겠소?" "네, 알겠습니다, 회장님." 사람들은 너무도 무거워 허리를 꼿꼿이 세우기도 힘든 분위기와 더불어 진회장의 말을 너무도 잘 알았다. 로플 그룹에 새로운 세상과 그 세상을 만들 도구인 '룸스'에 대한 희망을 준 청년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만약 자신이 그와 같은 경우라면 오싹하고 섬뜩할지도 몰랐다. 진회장의 함구 명령을 끝으로 회의는 끝이 나고 말았다. 진성은 하루 만에 퇴원했다. 피곤과 스트레스가 겹쳐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었을 뿐 건강에는 이상이 없다고 병원에서는 말했다. 진성은 걱정해 주는 사람들과 더불어 호텔로 돌아왔다. 여러 사람들의 위로와 격려를 들은 후, 진성은 방으로 들어가 쉬려는데 서재필이 방으로 찾아왔다. "진성아... 좀 어떠냐?" "괜찮습니다." 진성은 정말 괜찮았다. 어제 정신을 잃었던 것이 거짓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짱했다. 하지만 곧 이어진 서재필의 물음은 진성의 기분은 다운되고 말았다. "혹시... 그 일이냐?" "... 네." 기억은 선명했다. 한석의 플레이가 정말 눈으로 보였던 것이다. "자세히 말해 봐라." "한석과 게임 중이었는데... 예고도 없이, 갑자기 그 현상이 시작되었습니다. 동경에서 그 일이 일어났을 때는 그저 상대가 무엇을 하는지, 어떻게 운영하는지 느낄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정말 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눈으로? 직접?" "네... 삼차원 입체 영화를 보는 것처럼요. 정말 볼 수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 게임을 그만 두고 게임기에서 나오려는데... 참기 힘든 충격이.. 정말 참기 힘들 충격이었습니다." 생각만 해도 식은땀이 나는 진성의 모습에 서재필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 그 때도 상당히 걱정을 했는데 이번에는 그 현상이 더욱 심해진 듯했다. 게다가 생전 아프지 않던 녀석이 그 때문에 정신을 잃을 정도라니... 어쩌면 이 일 때문에 문명 온라인을 다시는 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게이머로서는 다시 재기할 수 없을지도... 그래도 서재필은 매니저였다. 제일 중요한 것은 성적이 아니라 게이머인 사람이었다. "... 진성아, 월드 시리즈 포기하자." 서재필은 어렵게 말을 꺼냈다. 동경에서 진성이 게임을 포기하려고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쩔 수 없어서였다. 페어플레이를 위해서였다. 진성은 서재필의 말에 꿀먹은 벙어리인 마냥 아무 말도 못했다. 동경에서의 그 경험 이후 가끔 생각했지만 꼭 월드 시리즈를 끝마친 다음이었으면 했다. 그런데... "..." "결정하기 힘들겠지. 로플 그룹으로서는, 또한 우리나라 사람들로서는 네가 월드 시리즈에서 당당히 우상하기를 바라겠지. 하지만 나는 그런 우승보다 네가 더 소중하다. 이런 상태로 출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특별히 상황이 좋아지지 않는 이상, 나는 널 경기에 내보낼 수 없다. 만약 누가 널더러 욕하면... 내가 내보내지 않았다고 해라. 알겠냐?" 서재필은 지금 포기하면 들을 수밖에 없는 비난을 자신이 감수할 생각까지 했다. 진성은 그 말에 더욱 할 말을 잃어버렸다. "..." "잘 생각해라. 그리고 푹 쉬어라. 너는 이제 이곳에 게이머로 온 게 아니라 관광하러 온 거다. 알겠냐? 마음 편히 하고..." 서재필은 말없이 고개 숙인 진성을 바라보며 조용히 객실 밖으로 나갔다. "회장님!" "그 방법 밖에 없겠나?" "그렇습니다. 로플 시스템은 아무리 찾아도 이상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진성을 제외한 그 누구도 문제점을 발견할 수 없을 겁니다. 로플 시스템을 100%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진성 밖에 없으니까요." "...." "이 문제는 진성이 해결해야 합니다. 회장님도 아시겠지만, 진성과 오랫동안 같이 일하면서 그 나이에 그렇게 흔들림이 없는 젊은이는 처음이었습니다. 나중에 부모가 없이 회장님 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정말 놀랐습니다. 보통의 젊은이보다 훨씬 더 심지가 굳고 마음이 넓은 아이입니다. 진성이라면 그 사실을 알게 되어도 방황하거나 정체성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원인을 알아낼 겁니다." 조소장은 진회장과의 독대를 청했고 두 사람만 있는 자리에서 진성에게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며칠 동안 연구원들의 원성을 들을 정도로 밤을 새면서 로플을 해부한 조소장은 더 이상 로플을 분석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 확신했다. 거기에 자신이 보아온 진성이라면 충분히 이런 사실에도 흔들리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진회장의 생각은 또 달랐다. 회사 직원이기 이전에 아들이었다. 아들에게 그런 일을 쉽게 말할 수 있는 아버지는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진회장은 고민에 빠졌다. 사실이라면 알려야 할 텐데... 그 방법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게다가 런던의 책임자인 서재필에게서 진성을 월드 시리즈에 참가시키지 않기로 잠정 결정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진성은 지금 문제가 있습니다. 서재필 팀장에게 들으니 게임을 하는 와중에 절대 보여서는 안 될 상대방의 게임 운영이 눈에 그대로 보인다고 합니다. 절대 현실적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현상입니다. 회장님, 이것은 로플과 관계가 있습니다. 진성이 알지 못하면 앞으로 또 무슨 현상이 나타나 진성을 괴롭힐지 모릅니다. 회장님... 결단을 내려야만 합니다! 제가 직접 런던으로 가겠습니다. 저를 보내 주십시오!" 조소장의 눈은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자신의 생각이 확실히 맞다는 자신감이 있었던 것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진회장에게도, 조소장에게도 몇 시간은 될 법한 몇 분의 시간이었다. "저 혼자라도 가겠습니다." 조소장은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 회사에서 보내주지 않는다면 혼자라도 갈 것이다. 조소장은 결심했다. "안 되네." "회장님!" "나도 자네와 같이 갈 테니 그리 알고 준비하게. 내일 비행기로 출발할 테니까." 진회장은 자신이 직접 가리라 마음을 먹었다. 동료를 위한 조소장의 모습에 아버지인 자신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회.. 회장님..." "아버지로서 가는 거네. 준비하도록 하게." "네, 회장님." 조소장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찔끔 흐른 눈물을 재빨리 닦고는 진회장을 향해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진성을 만날 때, 눈물은 흘리지 말게나." "네? 네..." 조소장은 마지막에 농담까지 할 정도인 진회장에게 감탄했다. 그룹의 총수란 저런 사람인 것이다. 속으로는 아파도 겉으로는 표시하면 안 되는... 조소장은 찡그린 얼굴로 웃고 말았다. 재빨리 밖으로 나온 조소장은 내일 출국할 준비를 서둘렀다. 의료팀과 로플 시스템 팀 그리고 그룹 회장이 나서는 만큼 상당한 인원이 움직여야 할 것이다. 진성은 호텔 로비에 갑자기 나타난 수십 명의 한국 사람들의 모습에 놀라고 말았다. 다른 선수들은 모두 연습실에서 땀을 흘리며 게임 연습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진성은 방에만 있기가 뭐해 호텔 근처를 돌아다니다 이제 로비로 들어온 찰나였다. "아..." 제일 앞에 아는 얼굴이 있었다. 절대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닌데... 조진철 로플 연구소 소장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아... 아저씨?" 평소 아버지라고 불렀지만 너무도 의외라 진성은 진회장을 보자마자 아저씨라고 부르고 말았다. "아저씨? 어허.. 며칠 보지 않았다고..." "아.. 아버지.." "그래. 그래야지."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로... 조팀장님은 왜 오셨어요?" 입에 조팀장이라 붙어 있어 쉽게 바꿀 수가 없었다. "나야... 볼일이 있어서 온 거지." 조소장의 얼굴에는 잔뜩 장난기가 가득했다. "서재필 팀장은?" "임시 연습실에 계신데요..." 진성은 그룹의 회장과 로플 연구소의 소장이 왜 이곳으로 왔을까 궁금했지만 일단 연습실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 재미있게 보십시오! -작독(현민) 배상- -------------------------------------------------------- TGP1(The Gamer Part 1) [189 회] 끝까지 달리자! 하루 뒤. 객실에서 진회장, 조소장과 같이 있던 진성은 조소장에게서 로플의 사고 소식과 더불어 처음 스파크가 일며 벌어졌던 사건부터 얼마 전의 사건까지에 대한 설명을 다 들었다. "그.. 그게 사실인가요?" 떨리는 목소리였다. "사실이다. 나와 조소장이 같이 온 이유는 바로 그거다. 그리고 네가 월드 시리즈를 포기한 이유이기도... 하고." 대답은 진회장이 했다. 두 사람은 이왕 말할 것 숨기지 않기로 했고 떨렸지만 진성을 믿고 그대로 말했다. 진성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가상현실에서의 설명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지지 않았다면 지금의 자신은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은 했지만 로플 시스템과 믿을 수 없는 관계가 있다는 말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었다. ".. 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진회장, 조소장 두 사람의 예상보다 진성의 동요는 적었다. "진성아, 괜찮냐?" "... 왜 이렇게 된 것인지 그 이유는 몰라도 그 덕분에 저는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행복을 누리고 있잖아요. 얼마 전에 제가 분수에 맞지 않은 행복을 느끼는 게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거든요. 예전에 비하면..." 진성의 대답에 진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소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네가 직접 풀어야 할 문제인 것 같다. 서울에서 며칠 밤을 새며 뭔가 문제점을 찾으려 했지만 나로서는 역부족이다. 아무리 예전에 네가 손댈 수 없는 곳을 줄였다고는 해도 로플의 근본적인 부분은 접근할 수 없었다. 네가 해야 할 것 같다. 현재로는 월드 시리즈에 참가할 수가 없으니...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쉬엄쉬엄 로플에서 네가 직접 찾아봐라." "....네..." 조소장과 진회장은 혹시 로플 접속 중 진성의 몸에 이상이 생길까 의료팀을 데려왔고 그래서 조금은 자신 있게 진성에게 권할 수 있었다. 진성이 대답하자 조소장은 진성의 방과 가까운 곳에 방을 잡아 로플 접속기를 설치하고 바로 옆방에 의료팀을 상주시켰다. 서재필은 진성의 몸을 생각해 반대했지만 로플 그룹의 총수이자 진성의 아버지와 같은 진회장의 말에 어쩔 수 없었다. 진성은 로플 속에 들어와 있었다. 밖에는 조팀장, 아니 조소장이 자신을 모니터 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연구원 몇 명과 의료팀이 대기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로플은 여전했다. 아니, 조금 더 편안해 진 듯했다. 이곳에 들어와 무엇을 찾으라는 것일까? 조소장의 말을 들을 때는 뭔가 문제가 있어 로플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에 동의했지만 막상 들어와 보니 뭘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진성은 월드 시리즈에 나가고 싶었다. 이제까지 오랜 시간을 달려왔는데 지금에 포기한다면 한국에서, 일본에서 자신에게 진 다른 게이머들에게 미안한 짓이다. 이윽고 진성은 알 수 없는 그 뭔가를 찾기 위해 움직였다. "윽..." 이번에 쓰러진 이후 굉장한 두통이 계속되고 있었다. 진통제도 소용이 없고 가끔은 신음소리가 날 정도의 두통이 진성을 괴롭혔다. 로플에 접속한 상태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스..키..피..오....] 머릿속을 울리는 아주 가는 목소리였다. 들린 것인지 자신이 생각한 것인지 진성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스키..피오..] 이번에는 더 확실했다. 어디서 들린 것일까? 진성이 있는 공간 너머에서 들린 듯했다. 진성은 조소장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는 가지 말라고 한 주의를 순간 잊어버렸다. 순식간에 공간을 열고는 그 반대편 암흑의 세계로 진성은 사라져버렸다. "지... 진성?" 밖에 있던 조소장과 연구원들, 그리고 의료팀은 놀라 긴장했다. 진회장은 이미 한국으로 돌아가 없었고 실무책임자인 조소장은 모든 것을 직접 지시했다. "의료팀, 상태는?" "이상 없습니다." "소프트웨어?" "정상입니다." 다행이 눈에 띄는 이상은 없지만 조소장은 사라진 진성의 모습을 볼 수가 없어 답답했다. 암흑의 공간에 들어선 진성은 한순간 눈이 멀 것만 같은 섬광에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천천히 밝아지자 고개를 든 진성은 깜짝 놀랐다. 이곳은... 쥬신대 캠퍼스였다. 나무들이 우겨져 있는 쥬신대의 초여름 풍경이었다. 햇빛은 강렬하지만 나무그늘 아래는 더없이 시원했다. 자신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는데... 진성은 순간 뒤에 누가 있음을 느끼고는 돌아섰다. "아..."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자신의 얼굴이었다. 진성은 한순간에 깨달았다. 어쩐지 냉정하고 차가운 인상을 제외하면 자신과 완전히 같았다. 마치 거울을 보는 듯했다. "스키피..오.." 약간 어눌하지만 확실한 목소리였다.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다 하는 것처럼 어색했다. 하지만 정확한 한국어였다. "누..누구지? 당신은 누구지?" "그 말은 내가 묻고 싶은데... 난 도대체 누구지?" 진성은 아주 또렷한 한국말을 구사하는 상대의 모습에도 놀랐지만 그 말뜻을 알고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해킹으로 로플 시스템에 침입한 건가? 거울 보듯 비슷한 얼굴을 가졌지만 진성은 눈앞의 상대가 다른 곳에서 접속기를 통해 로플로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뭔가를 눈치 챈 다른 경쟁 회사에서 이런 일을 꾸몄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사실을 조소장에게 알리는 게 급선무다. "당신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에 들어온 것은 불법입니다." "불법이라... 나보다는 강진성, 당신이 이곳에 들어온 게 불법이지 않을까?" "..." 상대는 자신을 알고 있다. 진성은 여유만만한 자세로 서 있는 상대를 바라보다 한순간 몸을 움직였다. 순식간에 공간을 줄이며 축지법으로 상대 앞으로 다가간 진성은 상대를 억류하기 위해 두 손을 뻗었다. 하지만 상대 역시 믿을 수 없게도 공간을 순간적으로 줄이며 뒤로 물러섰다. 축지법이었다. "축지법?" 공격을 피한 믿기 힘든 움직임보다 상대방이 축지법을 썼다는 것 자체에 진성은 충격을 받았다. 상대는 무명검법, 아니 십허검법과 관련이 있는 사람일까? "강진성... 이곳으로 들어온 이유는 잊었나?" "이유?" "월드 시리즈 때문에 런던까지 왔는데, 이곳에서 왜 로플로 접속해야 했는지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 순간 진성은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지만 자신이 생각해도 허무맹랑했다. 하지만 그 때, 서울에서 로플이 이상을 일으킬 때, 조진철 소장이 봤다는 그 영상이 생각났다. 어쩌면... "당신은 누구지?" "이제야 안 모양이군. 믿기 힘들겠지만, 강진성 당신이 생각하는 그대로야." "..." "어떻게 해야 믿을지 모르겠지만, 누가 뭐라고 하던,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저기 밖에 있는 조소장이나 그룹 총수인 진회장이 부정한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여기 서 있는 걸. 부정하는 사람들만 어리석은 것이지." "정말인가?" 진성은 신기하게도 상대의 말에 믿음이 갔다. "당연하다. 내가 왜 네게 거짓말을 해야 하지? 그럴 필요는 전혀 없지. 음... 내가 처음 태어난 날이 기억이 난다. 네가 혼수상태에 빠진 바로 그 날이지. 나도 내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것을 모른다고 존재하는 내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니 지금은 포기했지. 괜한 고민은 존재를 좀 먹거든." 진성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 절대의 공간인 로플... 그 세계에 다른 사람이 들어올 가능성은 극히 적어 제로라고 해도 무방했다. 그런데 그런 공간에 자신과 똑같이 생긴 존재가 있다니. 그리고 그 존재는 자신이 로플 자체라고 주장한다. 믿기 힘들지만 그 분위기나 말을 들어보면 왠지 수긍이 갔다. "그 때부터... 그 때부터 여기에 있었다는 말인가?" "그래. 다만, 지금과는 달랐지. 사람도 태어나서 아기였다가 점점 성장하잖아. 나 역시 마찬가지였지. 처음에는, 아니 최근까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사람들을 관찰하기만 했지. 그리고 인터넷이 연결된 후,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보고, 들은 것이 전부라고 할 수 있지." "그런데 왜 갑자기 나타난 거지?" 진성은 마치 낯설지만 묘하게도 친근감이 있는 상대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음... 왜 갑자기 나타났냐고? 그건 나 역시 딱 꼬집어 말하기 힘들어. 굳이 말한다면 가족이 보고 싶어서? 낯간지럽지만 그 정도면 그럭저럭 맞는 답인 듯한데." "가족?" 진성은 갑작스런 가족 타령에 재빨리 되물었다. "당연히. 내 가족은 세상에서 단 한 사람뿐이니까." 진성은 상대가 손을 들어 자신을 가리키자 움찔했다. "나?" "그래. 너밖에 없지. 그리고 너도 가족이 없잖아?" 진성은 혼란스러웠다. 이 모든 것이 꿈처럼 느껴졌다. 로플 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존재, 가족이라 말하는 존재라니... "너와 나는 연결되어 있다. 조소장에게 들어 알겠지만 네게 무슨 일이 있을 때, 나도 위험하다는 얘기지. 난 내가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 아직 모르고 있다. 난 누구지? 네가 대답해 줬으면 하지만, 너 역시 모를 게 분명하니 어쩔 수 없지." 진성은 도대체 상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도 못했다. 평소라면 날카롭게 질문도 하겠지만 지금은 자신과 똑같게 생긴 모습과 그 모습을 한 상대의 정체에 혼란스러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간단히 말하면, 나는 너를 도와야 하고 너는 나를 도와야 한다. 우리는... 가족이니까. 아니,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이일지도 모르겠다. 문명 온라인, 앞으로 해도 상관없을 거다. 아마도, 확실치는 않지만 나라는 존재 때문에 네게 그런 현상이 일어난 거 같으니까. 내가 조치를 취하면 되는 문제니까. 잘 지내라. 나를 기억하기는 힘들겠지만... 나중에 보면 좀 더 깊은 대화를 나누었으면 좋겠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섬광이 번쩍했다. 섬광이 사라지면서 조금 전, 있었던 일에 대한 진성의 기억도 같이 사라졌다. 진성은 암흑의 공간 속에 멍하게 서 있다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은 왜 여기 있을까? 시간은 얼마나 됐을까?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이곳으로 뛰어들었는데... 진성은 급히 걱정할 조소장을 떠올리며 공간 밖으로 나갔다. 진성의 뇌리에는 한 가지가 기억이 났다. 이제 다시는 문명 온라인을 하면서 그와 같은 현상은 없을 거라는 이유 없는 확신... 그와 함께 이제까지 괴롭혔던 참기 힘든 두통이 씻은 듯 사라져버렸다. -- 월드 리그 번화한 거리에서 조금 벗어나면 으레 있을 만한 오래된 술집. 그 지하의 작은 방에는 세 사람이 한 탁자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있었고 한 사람은 두 사람을 중재하는 듯 중간에 앉았는데 분위기는 긴장감으로 팽팽했다. "100만 파운드." 왼쪽에 앉은 코트의 깃을 올린 남자가 말했다. 말하고는 두꺼운 안경을 닦았다. 얼굴은 물론이고 손까지 땀으로 축축했다. "50만 파운드." 반대쪽에 앉은 사람이 말했다. 100만 파운드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하지만 깃을 올린 남자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값을 올렸다. "110만 파운드." "..." "120만 파운드." 다시 한 번 값이 올랐다. "아..알았소. 그런데 만약 실패하면?" "그 때는 돈을 돌려 주겠소. 이미 알고 왔겠지만 내 물건은 최고요. 다른 허술한 물건과 비교할 생각이라면 당장이라도 그만 두시오. 손님은 많으니까. 하하하.. " 자신 있는 목소리. 사내의 손에는 이미 땀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알았소. 여기에는 50만 파운드밖에 없소. 나머지는 물건을 받은 후, 첫 번째 경기가 끝난 뒤에 주겠소." "... 여기가 내 계좌니 이쪽으로 이체하도록 하시오." "다른 사람에게도 팔았소?" "... 당신이 마지막이오." 마지막이라는 말은... 다른 사람에게도 팔았다는 말이다. "..." "다섯을 넘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사내는 한껏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물건은?" "삼 일 후, 웨스터민스터 사원에서 봅시다. 자세한 시간은 다시 연락을 하겠소." 사내는 깃을 다시 한 번 올린 뒤 돈 가방을 들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유럽에서도 제일가는 기술자인 사내는 그 실력만큼이나 자존심도 세 약속은 철저히 지켰다. 사내가 돈 가방만 가지고 나가도 돈을 건넨 사람은 별 반응이 없었다. 영국 런던에서 월드 시리즈가 시작되었다. 아시아 리그, 유럽 리그, 북미 리그에서 올라온 프로팀들이 한 자리에 모여 최고를 뽑기 위해 한 달이 넘는 대장정에 돌입했다. 일단 런던에서 열흘 가량 개인전과 단체전의 리그 경기를 한 다음 프랑스 파리로 이동해 예선 리그를 마무리 짓고 이탈리아 로마에서 최종 우승자를 뽑는 결선 토너먼트를 치를 예정이었다. 한 때, 로플팀의 에이스 게이머 스키피오가 건강상의 문제로 월드 시리즈에 불참한다는 말이 떠돌아 많은 사람들을 걱정시켰다. 특히 한국인들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에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소문이 돌았는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다행히 연습하는 모습의 스키피오 강진성이 언론에 공개되자 소란스러움은 한순간 사라졌다. 월드 시리즈 첫 게임은 개인전인데 유럽 리그의 일인자 스키피오 율리아노와 북미 리그의 일인자 마이클 렌튼의 경기였다. 스키피오라는 닉네임 답게 로마 문명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율리아노와 아틀란티스 문명에 강점을 가진 마이클 렌튼이 붙었는데... 아주 박빙의 게임이었고 그래서 관객들을 즐겁게 한 경기였다. 승자는 마지막 대전투에서 컨트롤의 우위를 보인 율리아노였다. 율리아노가 마피아 집안 출신이어서 그리 탐탁치 여기지 않았던 유럽 사람들은 미국 대표인 마이클 렌튼을 이기자 그 동안의 반대를 잊은 모양인지 율리아노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그 후로도 많은 경기가 있었는데, 로플팀은 유럽으로 와 아시아와는 다른 분위기를 느꼈다. 일본 혹은 중국... 어디든 로플팀은 항상 화제를 몰고 다녔다. 게이머 스키피오를 비롯해 최강의 게이머 세 명이 포함된 로플팀은 대단한 주목을 받았다. 단지 성적으로 점수를 매겼을 때 상위 세 명의 게이머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플레이를 보며 열광하는 세 사람의 게이머였다. 그런데 유럽으로 오니 그런 분위기는 전혀 없었다.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온 프로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스키피오와 한신의 게임 동영상이 유럽 사람들에게도 최고의 게임 플레이로 알려져 있기는 했지만 동양이라는 것에 거부감이 있는 듯 시큰둥한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실력은 인정하지만 동양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평가절하 되는 분위기였다. "해도 될까요?" 은발의 20대 중반인 한스는 불안한 표정이었다. "하지 않는다면 너희들이 동양에서 온 로플팀을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니아트 팀의 매니저이자 감독인 요한슨은 싸늘하게 선수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크지 않은 나라 이탈리아의 팀으로 유럽 리그 단체전에 간신히 턱걸이 해 월드 시리즈까지 온 마당에 마음이 여린 선수들의 모습에 요한슨은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선수들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다. "한스, 바스텐, 오이스터, 스테판... 너희들 잘 들어라. 너희들 모두가 비록 이탈리아 국적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니아트 팀으로 들어온 그 순간부터 너희들은 이탈리아인과 마찬가지다. 너희들은 기필코 좋은 성적을 거둬야만 해. 무슨 말인지 알겠냐?" 한스는 30대 후반의 근육질 몸매를 가진 요한슨에게 뭐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참았다. 말해 봐야 소용없을 테고... 자신만 당할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여덟 명의 게이머 중 세 명이 온데 간데 말도 없이 사라졌고 한 명은 불의의 사고로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불의의 사고... 요한슨에게 반항하는 것이 불의의 사고와 관련이 있을까? 바로 그 한 명이 겁도 없이 요한슨에게 대들다 4층에서 떨어지는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 한스를 비롯해 게이머들은 월드 시리즈에 와서 해킹을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처음에, 준비 되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경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지 이렇게까지 해킹에 의존해 모든 것을 얻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게이머들은 그 동안의 피나는 노력으로 스스로 만족할 만한 실력을 쌓았다. 그래서 더더욱 해킹을 게임에 이용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꼭 해킹을 해야 합니까?" 과묵하고 우직한 바스텐이었다. 지난번 사고 때도 가만히 있지 않으려는 바스텐을 나머지 세 게이머가 말릴 정도로 바스텐은 요한슨의 행동을 싫어했다. "바스텐... 너희들이 로플팀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요한슨은 히죽 누런 이를 드러내며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너희들이 얼마나 잘한다고 생각하나? 너희들은 해킹 없이는 아무것도 못해... 이런 표정이었다. "이길 수는 없어도 떳떳하게 게임을 할 수는 있습니다." "떳떳? 그게 밥 먹여 주냐? 그리고 그렇게 떳떳하고 싶으면 국내 리그에서 그런 말을 하지. 왜 이제 와서 이 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거지? 바스텐, 네 녀석이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게 다 누구 덕분인데.. 앙?" 요한슨의 목소리는 점차 커졌고 그에 비례해 거칠어졌다. 한스와 오이스터, 스테판은 아무 말도 못했다. 그러나 바스텐은 달랐다. "저... 게임 안 합니다." "뭐? 뭐라고?" 요한슨은 내심 놀랐다. 이 녀석이 이런 말을 하다니. 전혀 예상 밖이었다. "게임 안 합니다. 저는 니아트 팀을 탈퇴하겠습니다." "... 누구 맘대로?" 요한슨은 참았던 날카로운 이빨을 완전히 드러냈다. 싸늘한 목소리. 이전에도 게이머들을 향해 협박조의 거친 소리를 하곤 했지만 지금은 또 달랐다. 냉혹한 느낌... 추운 지하실에 들어섰을 때의 그 오싹함과 같았다. "바스텐 네가 빠지면, 니아트 팀은 월드 시리즈를 포기할 수밖에 없지. 포기라... 그러면 어떻게 될까? 일단 내가 가만히 있을까? 네 부모님이 스페인의 마드리드에 계시지? 하하. 내 인사를 드리지 못했는데 그렇게 된다면 참으로 훌륭한 아들을 두셨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한 번 찾아뵈어야겠군. 그렇지? 그렇게 놀란 표정하지 말라고." "..." 침착하던 바스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니아트를 그만 두면 부모님을 가만 두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요한슨은 바스텐의 표정을 읽고는 승리의 역겨운 미소를 지었다. 이왕 이런 말이 나온 김에 요한슨은 아예 못을 박을 작정을 했다. "한스, 네 동생 마틸다는 무척 아름답더라. 붉은 머리가 아주 예쁘더군. 오이스터, 네 누나는 금발이었지? 안경을 벗으면 더욱 아름답겠지만... 스테판, 너희 어머니는 늦둥이를 보셨지? 이제 두 살인가? 하하... 내 인사를 못 했는데 바스텐의 부모님을 뵈러 가면서 한 번 둘러봐야겠군. 그렇지? 바스텐?" 바스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단순히 자신의 부모 뿐 아니라 다른 게이머들의 가족도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요한슨의 냉혹한 말에 바스텐은 절대 이길 수 없었다.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요한슨은 자신들과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인 것이다. 바스텐은 이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자, 연습이나 하라고. 내일 로플팀을 꺾어 세계를 놀라게 해야지, 안 그래?" 요한슨은 한껏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남은 네 명의 게이머는 서로를 바라보고는 곧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 음모일까나... ^^ 재미있게 보십시오. -작독(현민) 배상- ---------------------------------------------------- TGP1(The Gamer Part 1) [190 회] 끝까지 달리자! "믿을 수가 없어." "나도... 항상 이길 수만은 없겠지만..." "도대체 니아트 이라는 팀이 어떤 팀이야?" 한국에서 월드 시리즈 단체전을 보던 문명 온라인 팬이자 로플팀의 팬이었던 많은 사람들은 경기 결과를 믿을 수가 없었다. 상대가 아주 유명해 월드 시리즈 우승 후보라면 이처럼 충격에 휩싸이지는 않을 것이다. 유럽 리그 단체전에서 마지막으로 어렵게 티켓을 거머쥔 팀이 바로 니아트였다. 보통의 팀과는 달리 다국적 게이머들이 특징적인 니아트는 동양에서 온 막강팀 로플에 비해 객관적으로 열세여서 전문가의 대부분이 로플의 승리를 점쳤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니아트는 월드 시리즈 최고의 다크호스였다. 초반에서 중반 첫 부분까지는 예상대로 로플팀의 우세였다. 톱니바퀴 굴러가듯 빈틈이 없는 게임 운영과 각 파트에 있어 스페셜리스트가 있어 로플은 좀처럼 침몰시키기 어려운 무적함대였다. 하지만 문제는 중반 이후 커다란, 굵직한 전략전술의 예상에서 로플이 완패하고 만 것이다. 그리스의 해군은 상대 바다를 봉쇄했고 그로 인해 바다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는데 니아트는 그 틈을 비집고 나와 로플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가장 큰 이유는 협곡에서의 대회전에서 상대에게 전술을 읽히는 바람에 전멸해 버린 그리스 정예 전력의 상실이었다. 육지에서의 지배력 상실은 곧 무적함대의 침몰을 의미했다. 게이머 한신과 사신이 끝까지 고군분투, 노력했지만 이런 상황을 처음 겪은 게이머 최유나의 공황 상태와 적절치 못한, 무모한 밀리 스페셜리스트 성진규의 플레이로 로플팀은 니아트에게 지고 말았다. 대기실은 싸늘했다. 거기에 어깨를 펼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공기가 감돌았다. 단순히 졌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로플팀 역사상 처음으로 자멸을 겪은 것이다. 이제껏 실력이 안 되어 상대에게 진 경우는 많았다. 그런 경우, 필사의 노력으로 상대를 앞설 수 있는 투지가 생겼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 로플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네 명의 선수, 그 중에서 비교적 어린 두 사람의 게이머가 자신 때문에 게임을 망쳤다고 생각할 정도로 자멸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게임을 펼친 것이다. 코디들과 경호원들 그리고 진성을 비롯해 나머지 선수들도 대기실에 있었지만 무거운 분위기에 어쩔 수 없었다. 문을 열고 네 명의 선수들이 안으로 들어왔지만 누구 하나 수고했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꺼낼 수 없었다. 유나의 억지로 참는 울음소리만이 적지 않은 사람들이 들어선 대기실 안을 울리고 있었다. "수고했다." 가만히 앉아 있던 서재필이었다. "그렇게 숨죽이고만 있을 거냐?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는 법이다. 진성아, 범현아, 현호야, 혜연아... 가만히 있지만 말고 어깨라고 만져주고 그래라. 어이... 코디들.. 게이머 들어왔는데 가만히 있을 거야? 현숙아, 네가 가만히 있으니 분위기가 이렇게 죽잖아? 이준... 너도 좀.. 해라. 기분 나쁘면 너희 둘 결혼이고 뭐고 없다." 최고 책임자인 서재필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멍하게 있던 최현숙과 이준까지 나서며 들어온 게이머들을 향해 다가가 너스레를 떨었다. 게임을 마치고 온 선수들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대기실 안은 이제야 사람 사는 느낌이 났다. 진성은 현준에게로 다가갔다. "수고.. 했다." "..." 현준은 할 말이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유나와 진규의 실수가 두드러지지만 따지고 보면 모든 것을 컨트롤해야 하는 자신의 책임인 것이다. 준비한 것이 이처럼 확실하게 상대에게 노출되어 정신이 없을 정도로 진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런 경기... 이런 경기를 계속 해야 한다면... 아마도 선수 생활을 포기하고 말 것이다. 진성과의 일대일 경기에 어이가 없을 정도로 진 적이 수없이 많지만 오히려 후련하고 다음에는 이런 방법으로 해야겠다... 저렇게 하면 안 되겠다..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오늘의 경기는 그야말로 힘이 쫙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진성은 서재필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진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서재필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생각은 같았다. 두 사람 모두... 해킹을 떠올린 것이다. 상대팀 니아트의 예선 경기를 본 사람으로서 이런 갑작스러운, 절대 우연일 수 없는 통찰력의 증가는 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해킹에 대해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명확한 증거도 없이 해킹 얘기를 꺼냈다가는 경기에 패하고도 인정하지 않는 꼴불견일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유럽 리그의 운영위원회가 월드 시리즈 운영위원회로서 경기장의 게임기를 완전히 관리하기 때문에 또 다른, 운영위원회 간의 마찰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 "나.. 좀 쉴게." 현준의 이런 모습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의기소침한 모습... 현준을 비롯해 한석과 유나, 진규는 경호팀장 이준의 안내로 먼저 경기장을 빠져 나가 호텔로 출발했다. 도저히 이곳에 있기 힘든 모양이었다. 네 사람이 먼저 나가자 코디들과 나머지 경호원들도 호텔로 갈 준비를 바쁘게 시작했다. "진성아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으냐?" 진성과 서재필은 따로 자리를 마련했다. "... 휴우..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필리핀의 그 게이머 아만폴로의 경우도 있잖습니까?" 아만폴로의 경우, 진성과의 게임에서 해킹을 했다고 확신했지만 그 뒤의 경기를 보건대 해킹이라고 잘라 말하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아시아 리그 운영위원회를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극비리에 게임기 검사를 했지만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 때는 비밀을 지켜 검사라도 할 수 있었지만 이곳 유럽은 그럴 수도 없었다. 방법이 없었다. "그렇지. 그나저나 저 녀석들에게는 말을 해 줘야 할 것 같다." "네... 실력으로 진 것은 아니니까요." "니아트 같은 팀이 해킹을 한다면 다른 팀들도 할 수 있다는 말인데... " 문제는 이것이었다. 지금 한 게임 졌다고 월드 시리즈에서 끝이 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잘만 하면 더 집중력을 발휘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남은 경기 중 상당수의 팀들이 해킹을 하나의 수단으로 삼았다면... 이렇게 되면 그 무엇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과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제일 좋은 방법은 지금 이 시점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다. "해킹 방법에 대해 자세히 알 수는 없을까요? 어떻게 하는지 알면 잡아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만약 무선을 이용한다면... 전파 방해라도 하면...." "... 글쎄다." 이곳이 서울이라면, 아니 일본의 동경이라면 그다지 문제가 없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곳은 유럽... 영국의 런던이었다. 서재필은 자신만으로 이 문제를 더 이상 덮어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로플 소프트의 문명 온라인 팀장 김성철이 해킹 방법에 대해 밤새며 대책을 마련 중이지만 이제는 그룹 차원에까지 알려야 할 문제가 된 것이다. 아니, 알고 있겠지만 이제는 공식화 시켜야 할지도 몰랐다. 임시 연습실, 진성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담담하게 일본 동경에서 있었던 일을 시작으로 자신과 서재필이 생각하는 해킹에 대해 현준과 한석, 유나, 진규를 데려다 놓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단정 지을 수는 없다는 말을 몇 차례에 걸쳐 언급했지만 누구나 진성의 얘기를 들으면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상황은 명확했다. "진성의 말을 들어 알겠지만 이번 월드 시리즈는 상당히 모양이 이상하게 되어 버렸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누가 개발했는지 몰라도 상당히 정교한 해킹이 가능하고 실제로 사용하고 있다. 너희들이 이렇게 기운을 잃을 정도로 대패를 한 이유는 바로 해킹 때문이다. 그에 대한 대책은 그룹 차원에서 찾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너희들은 오로지 경기에만 집중하면 된다." 서재필은 네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해..해킹이란 말씀인가요?" 유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어렵게 내뱉었다. 그 동안의 힘든 연습시간들.. 그리고 한국 내 리그 뿐 아니라 아시아 리그를 뚫고 올라온 그 시간들... 결코 짧지 않았다. 그런데 월드 시리즈까지 와서 어이 없이 패한 경기가 바로 해킹 때문이라니... 유나는 다행인자, 불행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저 가슴 속에 터질 듯한 분노가 들끓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대강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침착한 한석이었다. "한석 말대로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한 발 앞서는 상대의 플레이, 볼 수는 없어도 느낄 수는 있었습니다. 해킹이 아니라도 대단한 실력인 상대팀이라... 해킹이라는 도구를 이용하니 그렇게까지 변할 수도 있군요." 현준의 낮은 목소리였다. 두 사람 모두 힘이 빠진 듯했다. "너희들의 마음은 이해한다.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다." "다음 게임도 상대가 해킹을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가만히 있던 진규가 나섰다. "... 생각.. 중이다." 서재필은 힘든 대답을 했다. 이대로 나가면 상황은 뻔했다. 상대 컨트롤을 알고, 전략전술을 안다면 게임은 할 필요도 없었다. 실력이 없는 상대라면 모르겠지만 월드 시리즈는 해킹만으로 올라올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모르긴 몰라도 한 나라에서 최강을 다투는 사람이거나 팀일 게 분명했다. "사실 이번 해킹 문제에서 꼭 알아야 할 것은... 이 해킹 문제가 공론화 될 경우 단순히 월드 시리즈가 무산될 위기 뿐 아니라 문명 온라인이라는 게임 자체에 대한, 그 동안 쌓았던 이미지가 무너질 염려가 있다. 모르긴 몰라도, 그룹에서도 그런 면 때문에 공개적으로 해킹에 대한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어찌 보면, 문명 온라인의 제작사 소속이라는 것 때문에 받는 불이익이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사람들은 침묵에 빠져 버렸다. 저런 문제까지 있었다니. 그 때, 진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지 않는 게임을 하면 됩니다." "지지 않는?" 서재필은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일단 모든 상대가 해킹을 하지는 않을 겁니다. 해킹을 한다면, 초반에 그것을 발견해 이기는 게 아니라 비기는 것으로 목표를 바꾸는 겁니다. 시간을 버는 것이지요. 예선전에서 탈락하지 않고 시간을 버는 것... 그게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 비긴다?" 서재필은 주의깊게 진성의 이야기를 들었다. "네, 그리고 가능하면 상대가 해킹을 한다고 해도 모든 것을 다 알고, 모든 것을 다 대비할 수 있는 완벽한 인간은 아닐 겁니다. 중간, 혹은 마지막에 눈을 뜨고 보고 있다고 해도 속아 넘어갈 만한 함정을 파 놓고 기다리는 겁니다. 아니, 처음부터 상대를 함정으로 몰아 도저히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만들면 됩니다. 힘들겠지만..." 진성의 얘기는 허공을 울려 퍼졌지만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만큼 진성의 얘기는 쉽지 않았다. 아주 어려운 말이었다. "우리가... 그럴 수 있을까?" "그렇게 해야지. 일단은 시간을 벌어야지." 현준의 물음에 진성은 단호하게 말했다. 여기까지 와서 물러설 수는 없는 것이다. 월드 시리즈에 참가한 모든 팀들은 영국 런던을 떠나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다. 월드 시리즈는 탁월한 팀도 없었고, 전패를 당한 팀도 없어 누가 우승을 하게 될지 예상하기 어려웠다. 아시아 리그에서 올라온 팀 중에는 로플과 일본의 소냐전자가 어느 정도 두각을 나타났고 북미 리그에서는 세계 제일의 OS 회사인 마이크로조프트와 쿠레이 자동차가 강세를 보였다. 유럽은 이탈리아의 니아트와 니아트가 이름을 높였다. 특히 니아트는 예상을 깨고 한국의 로플팀을 이기는 등 파란을 일으켜 이름을 널리 알렸다. 몽마르뜨 언덕의 하얀 색 성당 앞은 일요일의 미사를 보기 위한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관광객 차림에 선글라스까지 끼고 온 요한슨은 오면서 산 신문을 말아 쥐고는 사람들을 유심히 보았다. 미사보다는, 성당보다는 누군가를 찾는 눈치였다. 그 때, 뒤에서 나직한 소리가 들렸다. "요한슨..." 요한슨은 돌아보았는데 역시 관광객 차림을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나는 관광객들의 행렬에 묻혔다.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요한슨이 한참을 가다 한적한 카페로 들어가자 다른 한 사람 역시 너무도 자연스럽게 카페로 들어서 제일 구석진 자리로 향했다. "잘 됐습니까?" "최고였네." 요한슨의 말에 멜슨이 대답했다. "월드 시리즈 운영위원회 위원이 이렇게 돌아다녀도 됩니까?" 요한슨의 악의 없는 농담이었다. "운영위원회 위원도 사람일세." 멜슨은 월드 시리즈 운영위원회 위원이자 보안 담당 책임자이기도 했다. 월드 시리즈 각 경기에 사용할 게임기의 검사 역시 멜슨과 다른 위원 베르캄프의 공동 책임이었다. "어떻습니까?" "아주 좋아. 어떤 검사에도 드러나지 않더군. 도대체 누가 만들었나?"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받았거든요." "누가?" "그런 것은 말씀드릴 수가 없지 않습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요한슨은 신문을 멜슨에게 건넸다. 당연한 듯 신문을 받은 멜슨은 조심스레 펼쳐 신문 안에 있던 봉투를 꺼내 챙겼다. "하하.. 알았네." "그런데, 혹시 다른 팀에서도 이런 일, 하지 않습니까?" 요한슨의 조심스런 물음에 멜슨의 얼굴은 굳어버렸다. "자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네.. 알겠습니다. 다음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일이 잘 되면, 보너스가 있을 겁니다." "하하.. 알았네. 그럼, 나는 이만." 멜슨은 금방 일어서 밖으로 나가버렸다. 요한슨은 그 뒷모습을 한참이나 보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분명 저 돼지 같은 멜슨 놈은 다른 팀에게도 돈을 받고 똑같이 했을 게 분명했다. 순간 욕지기가 올라왔다. 역겨웠다. 쳇, 하긴 나도 그에 못지않지만.. 요한슨은 따뜻한 커피를 끝까지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요한슨은 예선전의 게임을 유심히 보고 자신이 가진 정보 조직을 동원해 누가 해킹을 하는지 은밀히 알아보았다. 해킹을 알아낼 방법은 게임기나 경기 화면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끝도 없는 탐욕을 가진 돼지 멜슨을 감시하는 것이었다. 요한슨은 멜슨을 감시하면서 얻은 정보를 통해 멜슨이 얼마나 멍청한지 깨달았다. 자신이라면 절대 믿지 않을 상황인데도 멜슨은 오만한지, 어리석은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위험한 이야기를 잘도 했다. 특히 아내와 똑같이 생긴 동생에게 그 일에 대해 숨기지 않는 모습에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똑같이 돼지처럼 생긴 멜슨의 동생 로만의 불만을 이용한 요한슨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쉽게 정보를 얻었다. 로만은 형인 멜슨이 많은 돈을 가지고 있음에도 자신에게 돈을 나누어 주지 않자 앙심을 품고는 물어보지도 않은 것까지 완전히 털어 놓았다. 물론 만 프랑이 들기는 했지만. 직업이 없이 노는 주제에 술집 여자에게 돈을 쏟아 부은 로만, 아내와 동생에게 콤플렉스가 있는지 떠벌리기 좋아하는 멜슨... 요한슨은 이를 드러내며 비웃었다. 어떻게 저런 인간이 월드 리그 운영위원회에 들어갈 수 있었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요한슨은 그 정보를 가지고 재빨리 움직였다. 밤 10시. 어두운 가운데 아무도 없는 베델가 모퉁이에 불이 켜진 작은 카페 앞에 검은 세단 자동차가 섰다. 한 사람이 내려 카페 안으로 들어가자 차는 슬금슬금 앞으로 움직여 잘 보이지 않는 건물의 그늘로 들어갔다. 잠시 후 몇 대의 자동차가 그런 식으로 와 사람을 두고는 사라져버렸다. "요한슨..." 요한슨은 들어온 사람들과 일일이 악수한 다음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개인전에 나간 진성의 성적은 그리 특출 나지는 않지만 결선 리그까지 가는 데는 별 이상이 없어 보였다. 해킹에 대해 대비를 했기 때문에 초반 상대방에 대한 반응을 살펴 해킹을 사용하는 상대라면 절대적인 방어전을 펼쳐 무승부로 가거나 상대방도 알아차리기 힘든 함정을 파놓아 게임을 이겼던 것이다. 진성은 현준과 한석 등에게 말했던 것을 자신이 먼저 보여 주었다. 상대가 모든 것을 보고 있더라고 해도 상대가 인간인 이상, 인간을 속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원래 깔끔한 게임 운영으로 이름이 높았던 진성이 중구난방 도저히 무슨 목적으로 게임을 운영하는지, 전략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도록 만들다가 마지막에 그 모든 어지러운 것 중에서 드러난 한 방으로 상대 게이머를 KO 시키는 모습에 현준을 비롯한 나머지 게이머들 역시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개인전과 단체전은 엄연히 달랐다. 개인전은 혼자 모든 것을 다 하기 때문에 그 의도 자체를 순간적으로 전략처럼 만들어 풀어나가면 되지만 단체전은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했다. 그래서 개인전처럼 원활한 경기 운영이 어려웠다. 예선전이고 아직은 아니다 싶은지 해킹을 사용하는 팀은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로플팀은 걱정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게임을 해 나가며 상대방의 해킹 여부에 대해 게이머들 뿐 아니라 서재필까지 자세히 살폈고 심지어 로플 그룹에서 보낸 조사단이 경기장 내의 전파를 확인하기도 했지만 쉽게 그 여부를 가릴 수가 없었다. 특히 게임 중 명백하게 해킹으로 볼 정도로 의심날 행동을 거의 하지 않아 판단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적어도 네 팀 혹은 다섯 팀은 해킹을 사용하는 듯했다. 니아트와의 경기 같은 경우가 재현될까 싶어 조심스런 경기운영을 하던 로플팀과 진성은 지지 않는 게임을 했는데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다. 바로 여러 팀이 해킹을 이용하는 듯한데, 다른 팀이나 서로 간에는 해킹을 아예 사용하지 않거나 사용해도 정말 저게 해킹을 이용한 것일까 싶을 정도로 대세에 미치는 영향이 적은 플레이를 했다. 그런데 다들 약속이나 한 것처럼 로플과 게임을 할 때는 이빨을 완전히 드러낸 맹수처럼 달려들어 엄청난 게임 운영을 보여 주었다. 확실한 해킹이었다. 로플팀은 어려운 경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이기는 것보다 지지 않는 것에 집중할 때였다. ------------------------------------------ 고고~~ ^^ 재미있게 보십시오. -작독(현민) 배상- ------------------------------------------ TGP1(The Gamer Part 1) [191 회] 끝까지 달리자!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제일 유력한 것은 게임기에 해킹이 가능한 모듈, 작은 장치를 부착하는 것입니다." 서울에서 런던까지 날아온 문명 온라인의 팀장인 김성철은 서재필을 비롯해 게이머를 모아 놓고 해킹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굳이 말할 필요는 없지만 오리무중인 상태여서 혹시나 증거를 잡을 수 없을까 싶어 시도한 것이다. 김성철 팀장은 몇 가지 샘플을 가져와 보여주었다. 새끼손가락 반 정도 크기의 모듈도 있었고 그보다 훨씬 작아 손톱만한 것도 있었다. "이런 것이 상대 컨트롤이나 화면을 보여 주는 것인가요?" 호기심이 많은 범현이었다. "음... 그렇다고 보면 됩니다. 어떤 모듈은 컨트롤 음성만 텍스트로 보여주기도 하고, 또 다른 모듈은 지도상의 움직임만을 알게 해 주기도 합니다. 대략 다섯 가지 정도가 지금까지 발견되었습니다." 다섯 가지라는 말에 모두들 놀랐다. 한 사람이 만든 게 아니라 다양한 곳에서 문명 온라인 게임기를 해킹하기 위해 노력한 증거였다. 게이머들에게는 김성철 팀장의 자세한 설명보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그것이 더 중요했다. 마음 놓고 상대와의 게임을 할 수 있는지, 그에 대한 확실한 판단을 원했다. "지금으로서는 완벽한 해킹 차단은 힘듭니다. 서재필 팀장에게 들어서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곳 운영위원회와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이 힘들어 게임기에 대한 정밀 조사도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라 해킹이라는 말을 완전히 언론에 내비치지 않고는 해킹 차단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는 없습니다. 무선으로 외부에서 게이머를 향해 뭔가 정보를 주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게이머가 그런 정보를 들을 수 있는 장치를 들고 갈 수가 없으니까요. 문제는 게임기입니다. 검사를 담당하는 사람이 월드 시리즈 운영위원회 소속 위원과 보안 관련자들이라 일단은 믿어야 하지만 제일 의심이 가는 곳이기도 합니다." 김성철 팀장의 말은 확실했다. 지금 상황으로는 해킹 자체를 막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나마 해킹이 일어났다면 어떤 부분이 문제일지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점만도 다행이었다. "자, 모두들 잘 들었으리라 믿는다. 문명 온라인을 제작한 로플 그룹 소속 프로팀으로 해킹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을 발표하기는 힘들다. 어찌 보면 기업의 논리에 게임 리그가 휘둘린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월드 시리즈를 포기하더라도 해킹을 공론화 시킬 수는 없을 것 같다. 물론 다음 리그나 월드 리그에서는 절대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겠지. 또한 이번 월드 시리즈가 끝이 나면 월드 시리즈 운영위원회에 대한 공식적인 감찰을 요구할 예정이다. 다 그룹에서 하는 일이지만... 아무튼, 우리에게는 상대가 해킹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과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뿐이다. 나머지는 너희들에게 달렸다. 지금 포기해도 나는 말리지 않겠지만 너희를 응원하는 많은 사람들을 생각해라..." 서재필은 담담하게 말을 하고는 게이머들만 남긴 채 밖으로 나갔다. 김성철 팀장과 같이 온 연구원들 역시 밖으로 나가 안에는 여덟 명의 게이머들만 남았다. 로플 그룹에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해킹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말하고 싶지 않은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대로 게임을 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핸디캡을 스스로 떠안는 꼴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 이대로 그만 둬야 해?" 혜연이었다. 비록 국내 리그 이후, 연습 상대 외에는 공식 경기를 한 적이 없지만 그 동안 같이 땀을 흘리고 고생해 왔던 터라 너무도 아까웠던 것이다. "상대는 우리를 완전히 보는데 무슨 수로 이겨?" 범현은 완전히 깨놓고 말했다. 니아트와의 단체전 게임 하나로 네 명의 게이머는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던가. 이제까지 했던, 그렇게 연습했던 것이 이것밖에 되지 않았던가... 그런 마음, 그런 감정은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다. 범현은 그 마음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도..." 울먹이는 유나였다. 유나는 자신의 뼈아픈 실수를 아직도 잊지 못한 듯 말하다 울음이 북받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조용했다. 거센 돌풍이 한차례 분 방 안에는 기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하는 수밖에." 현준의 목소리가 조용한 게이머들 사이로 울렸다. "여기까지 온다고 얼마나 노력했냐? 비록 지더라도 이때까지 노력한 것과 한국에서 우리를 응원해 줄 사람들에게는 떳떳해야지. 흥.. 해킹.. 하라고 해. 해킹해서 이기면 퍽이나 기분 좋겠다. 솔직히 목구멍까지 우리도 해킹하자는 말이 올라왔는데, 그래서는 찝찝할 것 같다. 해 보자. 하지도 않고 포기할 수는 없잖아?"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모두들 현준의 생각과 같았다. "진성이도 하는데 우리라고 못하란 법은 없잖아." 한석이었다. 진성이 해킹을 쓰는 아만폴로를 상대로 보여준 그 게임을 한석은 마음에 두고 있었다. 절대적인 열세 속에서 상대 게이머라는 인간 자체를 속이려는 시도. 완전히 사기 치는 것과 같은 긴장감과 실패할지도 모를 확률이 많지만 포기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진성은 뭐라고 하려는데 한 발 앞서 말한 한석의 말에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다시 삼켰다. 현준과 한석이 이미 모든 것을 말했던 것이다. 비록 이기는 것보다 지는 것이 당연하지만 진성은 이런 상황에서도 상대하려는 것 자체가 이미 이긴 게 아닐까 생각했다. 월드 리그는 예상과는 달리 흘러갔다. 기존 각 대륙 리그에서 1위로 올라온 선수와 팀이 강세를 그대로 유지할 거라는 전문가들의 추측과는 완전히 달랐다. 성적 뿐 아니라 그 전까지 그리 인상적인 게임을 보여 주지 못한 선수와 팀들의 약진이 두드러져 보는 사람들에게 더 큰 호기심을 심어 주었다. 여덟 명이 올라가는 결선 토너먼트에 세계 최강으로 평가받던 게이머 스키피오, 강진성이 4위에 랭크되고 같은 팀인 로플이 단체전에서 7위에 올랐다. 강진성은 어느 정도 결선 토너먼트에 있어 안정권이지만 로플팀은 남은 몇 경기에서 잘못할 경우 탈락할 위험에 처해 있었다. 모두들, 특히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팬들은 그런 현실을 믿을 수 없어했다. "오호..." 쇼파에 편히 앉아 있던 요한슨은 월드 리그 경기 결과가 적힌 서류를 손에 쥐고는 웃음을 지었다. 초반에 누가 해킹 장치를 가진 것인지 알아낸 요한슨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 팀들 간에 의견을 조율해 일단 최우선으로 최강자로 알려진 게이머 스키피오와 그 소속팀인 로플을 결선에 아예 접근도 못하도록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요한슨의 니아트 뿐 아니라 해킹 장비를 갖춘 다른 프로팀들은 보통의 다른 팀에게는 해킹을 사용하지 않거나 정말 필요한 승부처에서만 이용했는데 강진성과 로플팀에 대해서만 모든 수단을 동원해 이기려고 기를 썼다. 또한 서로 해킹을 사용하는 자신들은 모두 결선 리그에 올라갈 때까지는 경기 결과에 따라 서로 협의해 안정권에 들기로 합의 했다. 그런데 강진성은 4위, 로플팀은 7위라니... 대단한 실력이다. 정말 해킹이라는 수단이 없었다면 동양의 조그마한 나라, 한국에서 날아온 게이머들이 월드 리그를 독식했을 게 분명했다. 요한슨은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비록 여기까지 오면서 소속 게이머들과 마찰이 있어 본의 아닌 사고가 있었지만 이제 보상 받을 때가 멀지 않았다. 강진성과 로플팀이 눈에 걸리지만 마음만 먹으면 절대지지 않을 것이다. 아니, 만약 예상을 뛰어넘는다고 해도 요한슨은 걱정하지 않았다. 다른 방법이 있으니까. "이 녀석들은 연습을 제대로 하고 있으려나?" 요한슨은 푹신한 가죽 쇼파에서 일어나 선수들이 있을 곳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걸 꼭 사용해야 합니까?" 율리아노는 특별히 개조된 문명 온라인 게임기에 접속한 상태로 말했다. 보통 게이머가 보는 영상은 외부 모니터를 통해 관객들에게도 보이는데 율리아노의 시야 가장자리에 반투명의 창이 떠 있었고 그것은 게이머인 율리아노만 볼 수 있었다. 그 영상은 바로 연습 상대의 게임기에서 흘러나온 해킹된 플레이 화면이었다. 율리아노는 이런 연습을 한다는 것 자체가 창피했다. 스스로 실력이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데 이런 것을 사용해 게임을 연습하라니... 그 때, 그 뒤에 있던 남자의 입에서 작은 말이 울려 퍼졌다. 요한슨이었다. "율리아노, 시키는 대로 해라." 율리아노 역시 조직의 일원이었다. 단체전 게임에 나선 게이머들은 요한슨과 율리아노가 마피아인지 모르고 있었다. 요한슨은 불필요한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개인전의 율리아노와 단체전 게이머들을 철저히 분리시켰다. 서로 만날 일이 없도록 아예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율리아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 맘대로 뭔가 하고 싶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문명 온라인 게임도 무시할 수 없지만 그보다 조직에서 한 단계 위로 올라갈 기회를 잡았다는 사실은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살 만 했다. 문명 온라인 게임 리그가 굉장한 인기를 끌고 월드 리그까지 열리자 마피아는 그것을 곧바로 자신들이 자신 있어 하는 사업 분야와 접목시켰다. 바로 도박이었다. 스포츠나 경마 등의 도박에 손을 뻗치고 있던 마피아로서는 문명 온라인 리그 역시 그와 다르지 않았다. "네가 우승하기만 하면... 단숨에 행동대원을 뛰어 넘을 수 있다. 아니, 어쩌면 게임 도박은 네 몫으로 돌아갈 수도 있지." 율리아노의 마음을 짐작한 모양인지 요한슨은 점잖게, 조금의 떨림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감독이자 매니저인 요한슨은 조직에서 보스와 가까운 고문 역할을 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원래 율리아노, 요한슨이 속한 패밀리 뿐 아니라 마피아 대부분의 조직들은 게임의 가능성을 잘 모르고 있었다. 직접 게이머로 출전한 율리아노와 율리아노에게 평소 이야기를 들은 요한슨의 강력한 주장으로 조직은 이 분야에 투자를 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율리아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직에서 유학도 보내 주었고, 이제는 자신이 패밀리에 대해 뭔가 할 수 있는 기회였다. 정정당당하지 못한 방법이라 마음에 거리낌이 있었지만 그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옛날과는 달리 마피아라고 해서 살인, 강도 등의 범죄를 멀리하고 있지만 비합법적이라고 해도 이익만 남는다면 웬만한 일은 무시했다. 율리아노 역시 마피아의 일원이었다. 율리아노는 실제 게임과 똑같은 긴장된 마음으로 연습 경기를 계속 했다. 해킹 장비가 있으니 누구에게도 지지 않겠지만 절대지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연습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결선 리그가 시작되었다. 개인전 여덟 명, 단체전 여덟 팀은 이탈리아 로마로 자리를 옮겨 월드 리그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한 자리에 모였다. 지금까지 런던과 파리에서 있었던 개인전 및 단체전 경기는 이제 의미가 없었다. 의미를 굳이 찾는다면 상위권 팀들이나 선수가 비교적 약한 상대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단 한 번의 게임으로 승패가 결정 돼 탈락이냐 위로 올라가느냐가 판가름 나는 토너먼트라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진성은 4위로 개인전 결선 리그에 올랐고 로플팀은 6위로 예선 리그를 마쳤다. 정확히 몇 개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적지 않은 팀이 로플을 노린 듯 조직적으로 나와 고생했지만 이제까지 버텨온 선수들은 서로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갑작스런 로플의 부진의 이유를 궁금해 했지만 별다른 정보를 얻지 못했다. 다만, 로플팀과 상대한 팀들이 신기하게도 다른 게임보다 훨씬 더 강한 면모을 보였을 뿐이라 그 날의 컨디션에 따른 결과라 여겼다. 개인전의 진성과 현준을 비롯한 단체전의 로플 선수들은 비기는 게임에는 이길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잠까지 줄여가며 사방이 꽉 막힌 이 상황에서 상대방이 절대 볼 수도 없고, 예상할 수도 없는 게임 운영으로 경기를 이길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나뭇잎을 숨기려면 어디로 가야 하지?" 뜬금없는 진성의 말에 현준을 비롯한 선수들은 귀를 쫑긋 세웠다.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지만 진성이 연습실에서 이처럼 정색을 할 때는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숲으로 가야지요." 진규가 대답했다. "그렇지. 숲으로 가면 나뭇잎을 찾기 힘들겠지." "그런데 그게 무슨 말이야?" 현준은 진성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물었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은... 어쩔 수 없이 소극적인 수비밖에 할 수가 없는 상태지?" "그렇지." "하지만 소극적인 대처는 비길 수밖에 없다. 이기기는 정말 힘들지." "..." 진성의 말은 사실이었다. 견고한 방어는 가능하지만, 그 뿐이다. "문제는 상대가 우리의 컨트롤을 알고 있다는 건데... 그 컨트롤을 보아도 우리의 전략을 알 수 없게 만든다면..." "아..." 한석의 탄성소리였다. 한석이 제일 먼저 알았다. 현준은 얼굴에 뭔가 알았다는 표정을 띄우며 진성을 바라보았다. "너는.... 도대체..." "나? 천재잖아." 진성은 가볍게 농담을 한 다음, 선수들 모두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지금은 당장 져서 탈락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절대 지고 싶은 생각은 없다. 문제가 무엇인가? 상대가 우리 컨트롤을 너무도 잘 안다는 점이지...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지? 자신의 약점을 강점으로 바꾸면 된다. 무슨 말이냐고? 내가 만약 엉뚱한 컨트롤을 한다면 상대는 이게 또 무슨 컨트롤일까 의심을 하며 이것저것 따져보겠지. 상대가 이거다 싶으면 우리는 다른 컨트롤을 또 시작하는 거다. 그렇지... 상대에게 혼란을 주는 것이지. 물론 혼란으로만 끝이 나면 상대는 무시하고 밀어붙이겠지만... 그게 단순한 컨트롤이 아니라 뭔가 숨겨진 게 있다면 상대는 긴장하게 되고 그러면... 진성의 설명을 들은 선수들과 그 뒤에 있는 서재필은 정말 놀랐다. 힘들겠지만 방어만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어렵겠지만 하면 된다." 진성의 단호한 말에 평소 같으면 말도 안 된다고 할 선수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로마의 문명 온라인 월드 리그 경기장 대기실. "자, 이제 한 게임, 한 게임이 중요하다. 너희들 모두... 지금까지 정말 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이 자리까지 왔다. 져도 된다. 다만, 후회는 남기지 않도록 해라. 그리고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마. 다음 리그부터는 절대 해킹이 발붙일 수 없도록 만들겠다." 서재필은 선수들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자랑스레 바라보며 말했다. 포기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 온 것은 모두 선수들의 끈기와 집중력 때문이다. 서재필의 얼굴에는 그 모든 것이 드러났고 선수들의 얼굴에도 자부심이 가득했다. "진성이는 아만폴로와의 게임에 최선을 다하고 현준, 한석, 유나, 범현, 진규는 마이크로조프트팀과의 경기에 후회가 남지 않도록 열심히 해라. 우리들은 이곳에서 너희들을 열심히 응원할 것이다." "네." 선수들은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진성이 먼저 대기실 밖으로 나갔다. 묘하게 같은 날 개인전에 진성이, 단체전에 로플팀이 출전하게 된 것이다. "진성아, 이겨라!" "이겨요." "오빠, 져도 좋아요. 열심히 하세요." 진성은 고개만 가볍게 숙인 다음 경기장으로 직행했다. 진성의 상대는 아만폴로였다. 아시아 리그에서 해킹을 한 바로 그 선수였다. 그 때는 진성의 판정승이었지만 분명히 아만폴로가 문제를 의식해 진 경기였다. 지금이야말로, 지면 떨어지는 토너먼트이기 때문에 진검승부가 될 것이다. 게이머 스키피오, 진성의 경기는 누구도 제대로 해설을 하지 못했다. 일견 보기에 중구난방인 컨트롤과 집중력이 없어 도대체 무슨 전략을 사용하는지 알기 힘든 경기 운영에 베테랑이라 자부해 온 많은 해설가들은 난감한 낯빛을 감출 수 없었다. 스키피오의 경기는 너무 어지러워 관객들은 물론 중계를 보던 많은 사람들 중 대부분이 무슨 의도인지 몰랐다. 처음부터 방어적 경기 운영을 하는 스키피오와 그것을 뚫으려 절묘한 컨트롤을 선보인 아만폴로. 경기는 결정적인 대결 없이 종반까지 갔다. 두 사람 모두 지쳤는데 그 중에서도 스키피오 강진성이 더욱 심해 보였다. 사람들은 스키피오 강진성이 결선 리그 토너먼트에서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걱정을 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상황에서 뒤통수를 치는 묘책이라 할 수밖에 없는 승부수를 본 후 중계를 하는 사람들과 관객들, 전 세계에서 보던 시청자들은 모두 무릎을 쳤다. 나뭇잎을 숨길 가장 적당한 장소는 바로 숲이다. 여러 가지 전략 같지도 않은 컨트롤의 연속으로 상대를 혼란에 빠뜨린 가운데 몰래 간 비수를 들이댄 꼴이었다. 진성이 쓴 방법은 어떻게 보면 질서가 없어 대충 마음대로 게임 운영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절묘하게 순서를 바꾸거나 뒤로 컨트롤을 미뤄 상대가 눈치 채지 못하게 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 게임 플레이에 무척이나 감탄해 상대의 화면을 보고 경기를 해도 질 수밖에 없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왜 이렇게 스키피오가 어렵게 경기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너... 왜 안 했지?" 경기장 뒤로 나온 진성은 아만폴로의 서투른 영어를 들었다. 아만폴로는 아시아 리그의 경험 때문에 진성 역시 해킹을 사용하리라 생각해서인지 소극적으로 나왔고 끝까지 가는 접전을 벌였지만 경기를 패한 후에 느낀 바가 있었다. 상대는 전혀 해킹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경기할 때에는 잘 몰랐는데 지금에야 확실히, 너무도 확실히 느껴졌다. "나는 원래부터 하지 않았다." 간단한 영어로 대답한 진성은 혼란스러워 하는 아만폴로를 두고 대기실로 걸어갔다. "수고했다. 정말, 수고했다." 서재필은 땀으로 범벅이 된 진성이 대기실 안으로 들어오자 앞으로 다가가서는 포옹했다. 지금까지 꽤 많은 리그가 있었고 많은 중요한 경기들이 있었지만 서재필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지친 진성조차도 상당히 놀란 모습이었다. "재..재필 형?" "수고했다." 서재필은 선수들을 이런 상황에까지 몰고 온 상황이 자신의 책임이라 생각했다. 비록 기술적인 문제와 정치적인 면이 얽혀 있는 해킹에 대해 프로팀 매니저인 자신이 크게 할 일은 없지만 서재필은 지금의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랬기에, 그랬기에 진성의 승리에 더욱 더 기뻐한 것이다. "휴우... 조금 힘들기는 했어요." 진성은 편한 의자에 앉아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을 한 번 둘러보았다. 최현숙이 건네주는 이온 음료를 한껏 들이킨 진성은 자신만만한 시선으로 현준과 한석을 보았다. "이제 너희들 차례야." 진성의 말은 간단했다. 그리고 그 말을 하기 위해 자신은 정말 노력에 노력을 더했다. 현준과 한석은 진성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성이 위로 올라간 가운데 볼썽사납게 단체전 팀만 떨어진다면... 한국에 돌아갈 면목이 없을 것이다. 월드 리그가 끝이 나면 내부적으로 해킹에 대한 논의가 흘러나와 억울함이 덜하겠지만 그래도 지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특히나 이런 상황에서는 더욱 더. "알았다. 자신은 없지만.... 기대해라." 현준의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진성아, 그런데 그 전략이 한 번은 되겠지만 다음에 만날 상대는 그와 같은 것을 알고 있을 텐데..." 한석이었다. 역시 분석적이고 차분한 한석은 그 다음까지 예상해 말을 꺼낸 것이다. 진성은 수건으로 얼굴을 다시 한번 더 닦고는 입을 열었다. "물론이지. 하지만 첫 번째 게임을 분석해 보면 우리가 그와 비슷한 전략을 사용할 거라 예상하겠지. 아니, 예상은 하지 않더라도 선입견이 있지 않을까? 그럴 때는 어둠 속의 비수가 아니라 눈앞에 들이댄 뭉뚝한 몽둥이로 때려잡으면 되지 않을까? 아마 상대는 속았다며 후회하겠지만 이미 경기는 끝이 나 있을 테니 아무 소용도 없지." 생긋 웃으며 말하는 진성의 대답을 깊이 생각한 한석은 소름이 돋았다. 진성은 나뭇잎을 숨기려면 숲으로 가라는 그 방법을 생각하며 그 다음까지를 대비했던 것이다. 혼란과 더불어 보이지 않는 비수를 들이대어 성공한다면 다음 상대 역시 그와 같은 방법을 염두에 두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늘어나고 우리 쪽이 능동적인 입장에서 경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방법을 선택할지는 당연히 게임 중에 판단해야겠지만, 한석은 이런 아이디어를 시간이 많지도 않은 리그 중에 생각해 낸 진성이라는 사람에 대해 정말 놀랐다. 창조적인 플레이와 정확한 컨트롤로 인해 굉장한 선수임에는 틀림없지만 한석은 진성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어 열심히 노력하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은 자신만의 착각이었던 것이다. "그래... 그렇구나." 약간 씁쓸했지만 한석의 대답에는 자부심도 섞여 있었다. 진성을 만나 느끼고 얻은 것들은 이런 씁쓸함보다 훨씬 더 컸고 한석은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 재미있게 보시고.. 코멘도.. ^^ -작독(현민) 배상- --------------------------------------------------- TGP1(The Gamer Part 1) [192 회] 끝까지 달리자! 개인전에 네 선수가 남았고 단체전 팀에도 네 팀이 남았다. 영국 텔슨의 리베라, 이탈리아 니아트의 율리아노, 미국 포드의 스트롱홀드, 한국 로플의 강진성이 바로 그 개인전 네 선수였다. 그리고 단체전에는 이탈리아의 니아트, 미국의 마이크로조프트, 한국의 로플, 프랑스의 샤넬이 올라왔다. 요한슨은 경기 결과가 적힌 종이를 심하게 구겼다. 단체전에 올라온 네 팀 중 로플을 제외하고는 모두 해킹 장비를 갖춘 팀이다. 예선 리그 1위로 올라온 니아트는 프랑스의 샤넬로 맞붙게 되었다. 요한슨은 그 때문이 아니라 한국의 로플이 아직까지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화가 났던 것이다. 게다가 로플의 게임을 봤는데 자신조차 감탄할 정도의 플레이를 선보였다. 한순간에 상대가 해킹을 하고 있고 그것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방법임을 알았다. "... 마이크로조프트가 지면.." 불길했다. 설마 질까 생각했지만 처음 로플과 상대했던 팀도 마찬가지였다. 요한슨에게 프랑스의 샤넬은 그리 어렵지 않은 상대였다. 같은 해킹을 하는 상황이라면 게이머의 실력이 문제인데 샤넬보다는 자신이 데리고 있는 게이머가 훨씬 더 나았고 그것은 객관적인 사실이기도 했다. 또한 개인전 역시 걱정이었다. 게이머 스키피오.... 최강의 게이머로 평가 받는 사람이었다. 문제는 로플이었다. 요한슨은 불안했다. 우승을 하지 못한다면... 생각만 해도... 요한슨은 특별한 방법을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성은 예선 리그 1위인 영국의 게이머 리베라와 경기를 가져야 했다. 그리스 문명을 사용하는 리베라는 대단한 뚝심을 가진 선수였다. 그 동안 있었던 경기를 지켜본 결과 리베라는 자존심이 무척 강하고 상대가 누구든 가리지 않아 굴곡이 적은 실력을 발휘하는 게이머였다. 리베라는 다른 경기에서는 해킹을 사용하지 않았다. 단 한 경기, 예선전에서 진성과 대결해 박빙의 승부 끝에 이겼는데 그 때 해킹을 사용했다. 일단 나뭇잎을 숲으로 보내야 했다. 진성은 컨트롤을 시작했다. 일단은 먼저 외교다. 진성은 최대한 많은 인원을 외교에 동원했다. 외교는 기본적으로 컨트롤이 많이 필요한데 진성은 무리일 정도로 많은 인원을 투입했고 그로 인해 컨트롤의 양은 보통의 게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증가했다. 이것은 의도한 계획인데 상대가 어떻게 상황이나 컨트롤을 아는지 그 정확한 방법은 알지 못해도 컨트롤 자체를 볼 수 있는 해킹의 가능성아 높았다. 상대 역시 자신만의 게임 플레이를 해야 하는데 갑자기 증가한 진성의 컨트롤에 정신을 집중해서 볼 게 당연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몇 가지 진성에게 이익이 생기는데 첫 번째로는 상대의 초반 컨트롤 타임을 뺏게 되고, 두 번째는 상대에게 컨트롤의 양이 많아도 그리 대단할 게 없다는 선입견을 심어주는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초반 외교를 튼튼히 할 수 있어 방어적인 경기 운영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어떻게 나올까?' 진성은 처음부터 모든 컨트롤을 상대가 알 수 있다는 가정 하에 플레이를 했다. 군대강화법도 예전의 간결하고 정확한 핵심만을 컨트롤 하던 방법을 버리고 이제까지 모아온 전략 노트에서 했던 자질구레한 것들도 모두 컨트롤에 포함시켰다. 그 뿐 아니라 동맹을 공고히 하면서 정기적으로 외교를 위한 인원을 보내 그렇지 않아도 많던 컨트롤을 완전히 홍수처럼 만들었다. "..." 리베라는 게임 초반부터 당황했다. 예선전에서 대단한 실력이었지만 해킹이라는 수단을 사용해 이긴 적이 있는 상대여서 해킹을 부끄러워하면서도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결승에서 맞붙을 율리아노를 은근히 더 의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초반의 외교부터 완전히 예상을 벗어나 무슨 의도인지 모를 경기 운영에 리베라는 자신의 게임 컨트롤을 천천히 하며 상대 강진성의 컨트롤을 유심히 살폈다. 한참을 살폈는데 결론은 불필요한 컨트롤이었다. 리베라는 상대의 책략에 당했다고 확신했다. 아무것도 아닌데... 괜히... 리베라는 자신이 당황해 귀중한 시간을 잃었음을 인정했다. 그렇다고 해도 상대의 컨트롤을 보지 않을 수는 없었다. 리베라는 서서히 컨트롤 속도를 높이며 여전히 상대의 컨트롤을 살폈다. 월드 리그에 나온 게이머라면 누구나 동양의 작은 나라 한국의 게이머 스키피오의 경기를 보았을 것이다. 문명 온라인의 제작사 소속이라는 장점도 있겠지만 그 경기를 보면 누구나, 특히 전문가인 게이머라면 스키피오의 능력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단순히 빠른 컨트롤이 아니라 뭔가 고정관념을 깨뜨려 로마 문명의 한계를 허물어 버리는, 컨트롤 자체를 뛰어넘는 게임을 볼 수 있었다. 리베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음속으로는 아무것도 아니라 했지만 리베라는 그 순간 전설의 더블 스트러티지를 떠올렸다. 패치가 된 지금에는 결코 이룰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전략이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최강의 전략이었다. 성공하면 무적의 전략이 되지만 성공하기가 너무도 힘들어 강진성 외에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다는 전략...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리베라는 혹시... 이런 말도 안 되는 컨트롤이 그와 유사한 대형 전략을 위한 사전 작업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느꼈다. 리베라는 처음부터 해킹을 사용하면서도 이유도 없이 불안했고 그 불안함은 점점 두려움으로 변해 커져가고 있었다. 상대가 자신의 컨트롤을 보는 상황에서 원정을 가는 것은 기름을 들고 불에 뛰어드는 격이다. 진성은 한국에 있는 많은 팬들이 로플 프로팀의 갑작스런 방어적 경기 운영에 분통과 불만을 표시하고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지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또한 열악한 상황, 지는 게 당연한 처지에서 그 불리함을 뒤집어 상대를 이기는 것에는 보통의 경기와는 다른 즐거움, 쾌감이 있었다. 위기가, 불리함이 클수록 그것을 이겨냈을 때의 기쁨 또한 비례해서 커진다. 진성은 벌써 군대강화법을 두 번 연속으로 사용했다. 군대강화법은 원래 지휘관의 능력 업그레이드를 위한 것과 병사 개개인의 사기 진작과 동기를 부여하기 위한 두 가지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진성은 그런 두 가지를 두 번 연속으로 사용했다. 연습 게임에서 한 번 사용한 것보다 훨씬 더 낫지만 두 번 한다고 해도 비례해서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어찌 보면 시간 낭비일 컨트롤이었다. 진성은 그런 점을 상대가 확실히는 모를 거라 확신했다. 상대는 공식 게임에서 단 한번도 이런 컨트롤을 펼친 적이 없는 터라 이 컨트롤을 보며 머리를 굴릴 게 뻔했다. '자... 어떻게 할 거냐?' 전혀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한 번의 도발도 없었고 분위기를 볼 때 잘 되는 것 같아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자신감이 흘러나옴을 느꼈다. 진성은 컨트롤의 홍수 속에서도 착실히 군대를 양성했고 수도를 중심으로 막강한 수비선과 성을 쌓아 상대의 공격을 대비했다. 넓은 지역으로 퍼져 있으면 자신의 진영을 볼 수 있는 상대에게 당할 게 뻔했다. 최대한 좁은 지역에 군대를 빠르게 모을 수 있게 만들어 그런 불리함을 커버하려고 노력했다. 리베라는 점점 수렁에 빠져들었다. 평소 자신의 뚝심 있고, 거침없는 플레이가 아니라 어쩐지 모르게 상대에게 맞춰 가는 경기 운영이었다. 본인은 느끼지 못했지만 밖에서 리베라를 응원하던 많은 팬들은 평소와 다른 모습에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했다. 리베라는 한 가지만 알았다. 상대인 게이머 스키피오의 플레이가 예상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이었다. 준결승까지 올라오는 동안 게이머 스키피오의 경기를 모두 본 리베라였지만 또 다른 스키피오의 경기에 쉽게 적응하지 못해 자신의 경기를 가져가지 못했다. 오히려 예선전 자신의 실력 그대로 상대했던 것이 훨씬 더 나았다. 해킹에 의지해 자신의 장점을 살리지 못한 리베라... 점차 조급해졌고 상대 진영에 대한 공격을 성급하게 시작하려고 했다. "..." 진성은 리베라의 군대가 바다를 넘어 다가온다는 보고를 듣고도 맞서 움직이지 않았다. 어차피 모든 것을 알고 있을 상대여서 군대를 움직여 고립이 되어 버리면 그 병력은 전멸일 게 분명했다. 부대 간의 거리는 최소한으로 하고 부대 사이의 연락도 굉장히 빠르게 할 수 있도록 진성은 조치를 했다. "드디어... 오는군." 상대는 컨트롤의 우위와 전략적 이점을 이용해 일거에 쓸어버리려 할 것이다. 비슷한 규모의 군대라도 전술은 절대적이었다. 만 명이 넘어가는 군대의 전력에서 지휘관의 전술적 능력과 병사들의 전술 숙지 능력은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이었다. 진성은 또다시 상대가 머뭇거릴 컨트롤의 홍수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하나의 부대를 움직일 때도 평소와 두 배가 넘는 컨트롤을 쏟아낸 진성은 무척 힘들었지만 상대 역시 이런 컨트롤의 의미를 찾느라 쉽게 공격하기는 힘들 것이라 확신했다. 일단 상대가 컨트롤 할 수 없는 상황으로 전장을 이끌고 간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승산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이길게 분명했다. 리베라는 골몰히 생각했다. 자신이 알고 있던 상대의 모습이 아니었다. 필요 이상으로 세밀하고 군더더기가 많다고 느낄 정도의 컨트롤이었다. 보통의 게이머가 했다면 비웃어 준 뒤에 치고 들어가 모든 것을 뒤집어엎으면 되겠지만 지금 경기의 상대는 게이머 스키피오였다. 게임 하나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웅으로 대접 받는 문명 온라인 최고수인 게이머 스키피오인 것이다. 그런 게이머가 이런 복잡한 컨트롤을 하는 데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게 당연했다. 리베라는 바로 그 이유를 찾지 못해 바로 앞에 스키피오의 군대를 두고서도 제대로 된 공략을 하지 못했다. "이.. 이런.." 스키피오의 군대가 물밀 듯 다가왔다. 굉장한 속도였다. 게다가 세 방향으로 분리해서 다가온 것이다. 리베라는 재빨리 전투 준비를 하고 공격 명령을 내렸다. 뭔가 꺼림칙했지만... 지금은 전투를 해야 한다. 진성은 상대가 제대로 반응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군대를 돌진시켰다. 모든 것을 안다면 훨씬 유리하겠지만 진성은 그 유리함을 불리함으로 바꿔버렸다. 홍수 같은 컨트롤에서 상대가 정말 중요한 핵심을 쉽게 파악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세 방향으로의 돌진을 명령한 진성은 반응이 느린 상대의 모습에 내심 쾌재를 불렀다. 의도한 대로 되어가고 있었다. 진성은 자만하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야 상대를 잡을 수 있다.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온 몸에 힘이 넘쳤고 많은 컨트롤로 쉬기 직전이었던 목소리마저 평소보다 좋은 상태가 되었다. 머리는 맑아졌고 눈빛은 날카롭게 빛났다. 이제는 이길 수 있다. 맞붙은 후에 진성은 엄청난 컨트롤을 쏟아냈다. 마치 보고 읽는 것과 같은, 속사포 같은 말을 쏟아낸 것이다. 그 와중에도 정말 중요한 쐐기 형태의 부대에게 명령을 내려 상대 진영의 좌측에서 후방까지 유린하라 명령했는데 그와 유사한 명령이지만 소규모 부대에게 전하는 영양가 없는 컨트롤이 많아 상대는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다섯 번의 컨트롤을 한다면 정말 중요하고, 진성이 의도하는 컨트롤은 단 하나였다. "이럴 수가." 리베라는 버젓이 눈을 뜨고 당하고 있었다. 전투에 돌입한 후, 상대의 컨트롤에 맞춰 대응하려던 리베라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컨트롤과 그 양에 질려 버렸다. 전투는 아주 유동적이라 적절한 컨트롤은 필수적이었다. 그런데 리베라는 상대방의 컨트롤에 주의를 기울이느라 정작 자신의 컨트롤에는 집중할 수 없었다. 그것은 곧바로 전투 결과로 나왔다. 거기에 많은 컨트롤이라 그냥 살피지 않고 넘겼던 것 중에서 정말 리베라의 군대를 유린하는 명령이 있어 리베라는 당황했다. 신출귀몰. 상대의 군대는 마치 살아 있는 듯했다. 아니, 명령도 제대로 받지 않고 움직이는 듯했다. 순간 리베라는 상대방 역시 해킹을 사용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해킹을 사용하는데... 그 해킹이 단순히 상대의 컨트롤을 보는 게 아니라 이런 방법으로 게임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그 무언가를 사용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무력감이 찾아왔다. 저런 해킹을 사용한 게이머에게 누가 이길 수 있을까? 해킹이 아니더라도 대단한 게이머인데... 리베라는 상대의 비열한 짓에 분통이 터졌지만 곧 자신 역시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 경기는 진 게임이다. "아..." 국지적인 전투에서 한 번 이겼을 뿐인데. 진성은 리베라가 고작 전투 하나를 끝내고 경기를 포기해 버리자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원정에서의 전투 패배는 게임의 패배로 직결되지 않는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수비하다 패하면 그것은 위험하지만 공격하다 패하는 것은 찾아보면 방법이 충분히 있었다. 또한 지금 상대는 훨씬 더 유리한 입장에 서 있는 셈인데... 얼떨떨했다. 왜 포기했을까? 진성은 상대가 해킹을 사용한다는 것이 창피해 그런 게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했지만 다른 사람을 속마음을 알 수는 없었다. 다행히 경기에 이겼고 진성은 월드 리그 개인전 결승에 진출했다. "이야... 대단하다!" 대기실로 들어오자 로플 프로팀의 관계자들은 마치 진성이 우승이라도 한 것인 냥 기뻐했다. 로플 프로팀 사람들은 이 경기가 진성에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해킹을 쓰는 상대에게 이런 방법으로 이기다니. 그 중에서도 현준을 비롯한 단체전 선수들은 더욱 기뻐했다. 자신들도 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조금 전의 진성이 풀어간 게임은 어쩔 수 없이 상대에게 주도권을 넘길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기발한 대응으로 능동적인 게임 운영을 보여준 하나의 예였다. "수고했다." 서재필은 진성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한 때, 월드 리그 참가가 불투명했고... 해킹 때문에 아예 우승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제 결승에 진출했다니. 서재필은 얼굴 가득 웃음을 지었다. "오빠, 수고했어요. 이제 한 게임 남았네요." 혜연이었다. 진성은 이제 단 한 게임, 결승전만 남겨 두었다. 그 게임이 끝나면 결과에 관계없이 월드 리그는 끝이 난다. "누가 제 상대인가요?" "... 율리아노다." 서재필의 말에 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해킹을 하는 상대끼리라면 실력이 높은 선수가 이길 게 당연했다. 율리아노의 승리는 이미 예상된 것이었다. 진성은 고개를 돌려 한석과 현준을 바라보았다. "너희들도... 알지?" "당연하지." "당연히!" 두 사람은 진성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대부분 전문가들의 예상대로 게이머 스키피오는 월드 리그의 결승전에 진출했다. 거대한 평원에는 수십만의 군대가 진을 쳤다. 건곤일척의 한판 승부! 과연 누가 이길 것인가? 모니터를 통해 전장의 기운을 느낄 수는 없겠지만 TV 화면을 통해, 혹은 직접 경기장을 찾아 거대한 화면을 통해 전장을 보는 사람들은 마치 자신이 그곳의 흙냄새와 서늘하다 못해 차가운 바람을 느끼기라도 한 듯 몸을 떨었다. 깃발이 바람에 펄럭였고 낮지만 힘찬 북소리는 병사들의 사기를 높였다. 말의 낮은 울음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병사들의 몸에서는 곧 시작될 전투로 인한 긴장이 팽팽하게 느껴졌다. 갑옷이 부딪치고 무기가 땅에 끌리는 소리 외에 전장은 고요 그 자체였다. 수십만 개의 갑옷과 무기를 가진 괴물이 이제 곧 평원에서 상대를 없애기 위해 격돌할 것이다. "밀리1, 센터. 최선을 다하자. 진규야 수고했다." "디플, 센터. 한석아.." "밀리2, 센터. 유나야, 마지막이다." 현준은 마지막 전투를 남겨두고 말을 마쳤다. 이미 승부는 기운 상태였다. 한 사람의 천재인 진성은 준결승의 힘겨운 상대를 물리치고 결승까지 진출했지만 다섯 명의 천재가 될 수는 없었던 현준을 비롯한 로플 프로팀의 단체전 선수들은 역부족이었다. 승부는 났지만 현준, 한석, 진규, 유나는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적어도 경기에 대해서 다른 얘기를 듣고 싶지는 않았다. 진규가 맡은 부대가 엄청난 속도로 돌진하기 시작했고 그 뒤를 그리스의 정예부대가 날카로운 기세를 발하며 달리기 시작했다. 장엄하다 못해 숭고한 전투의 시작이었다. 관객들은 물론 전 세계 문명 온라인 준결승을 지켜보던 사람들 모두 손에 땀을 쥐며 그 순간을 기다렸다. 승부는 결정되었지만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대기실로 들어온 순간 단체전 선수들은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로플 프로팀의 단체전은 결승전 진출에 실패한 것이다. 언제 지더라도 이상할 게 없었지만 한 게임만 이기면 결승전이라는 사실이 더욱 그들의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다. 한 게임만... 우승이 코앞인데... "... 죄송합니다." 진규는 울먹이며 말했다. 현준과 한석은 말이 없었고 유나는 이미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상태였다.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뭘 죄송해? 이런 상황에서 준결승까지 온 너희들이 더 대단한 거다. 눈물 뚝! 유나야... 한석아, 유나 좀 달래라. 내 말은 안 들어도 네 말은 듣지 않을까?" 서재필은 노골적인 농담을 해 울던 유나를 웃겼다. "수고했다." 진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유나에게로 가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진규와 현준, 한석을 차례로 안았다. "유나 너를 안았다가는 한석이에게 무슨 보복을 당할지 모르니까... 섭섭하게 생각하지는 말아라." 진성의 말에 유나는 다시 한 번 울먹이면서 웃어버렸다. 요한슨은 게이머 스키피오의 경기를 본 후 머뭇거리던 마음을 굳게 먹고 결심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개인전 우승이 날아가 버릴지도 몰랐다. 이번 문명 온라인 월드 리그를 통해 조직에서 새로운 도박 시장으로 게임을 재평가한다면 그 공은 자신의 것이 분명할 것이다. 요한슨은 월드 리그가 끝이 나면 해킹에 관한 문제가 불거질 거라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 이미 도박이 끝나 배당금을 받고 나면 요한슨으로서는 해킹이 밝혀지든 말든 상관이 없었다. 선수들은 해킹을 이용한 것으로 인해 불명예를 뒤집어쓰겠지만 마피아인 요한슨은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제대로 조직의 수뇌부에 어필하기 위해서는 개인전 우승도 필요했다. 요한슨은 전화기를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통화를 했다. 간단한 통화였다. 내용은 단지 만나자는 약속이었을 뿐 상대의 이름도, 자신의 이름도 밝히지 않았다. 선술집의 낡은 지하실. 요한슨은 예전에 만났던 바로 그 기술자를 만났다. 빛이라고는 천장에서 선으로 연결된 전등 하나라 탁자 주변만 밝지 나머지는 잘 보이지도 않았다. 취조실 같은 분위기였다. "이번에는 암살이라도 할 셈인가?" 앉자마자 내뱉는, 비웃는 말에도 요한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뭐... 나야 가격만 맞으면 어디에 써도 상관하지 않지만." "200만 파운드." "250만." "알았소." 요한슨은 곧바로 대답했다. "내 계좌로 입금하면 곧바로 보내 주겠소. 그럼." 요한슨은 기술자가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탁자에 앉은 채 그대로 바라보았다. ------------------------------------------------- ^^ -작독(현민) 배상- ------------------------------------------------- TGP1(The Gamer Part 1) [193 회] 끝까지 달리자! 단 한 경기를 제외하고 월드 리그의 모든 경기가 끝이 났다. 단체전을 중요시하는 동양과는 달리 유럽은 개인전을 더 중요시해 단체전 우승팀이 결정 난 다음 마지막 경기에 개인전 결승전을 배정했다. 단체전은 이탈리아의 니아트가 우승을 차지했다. 개인전은 한국의 강진성과 이탈리아의 율리아노가 대결을 벌이는데 만약 율리아노가 이기면 이탈리아의 니아트는 월드 리그의 개인전과 단체전을 모두 석권하는 셈이 된다. 이탈리아의 니아트는 마피아와 관련이 있다는 소문이 많았다. 특히 게이머 율리아노는 마피아 단원이라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왔다. 하지만 율리아노를 비롯해 단체전 선수들 모두 실력 또한 전혀 뒤떨어지지 않아 뭔가 마피아가 손썼을 거라는 억측은 사실상 힘들었다. "내일이다." 진성은 방 안 침대에 편하게 누워 천장을 보았다. 이제 내일이면 오랫동안 달려왔던 길이 끝난다. 우승일지 준우승일지 모르지만 끝은 나게 될 것이다. 홀가분하면서도 섭섭했다. 그 동안의 노력과 같이 지낸 사람들... 진성은 이번의 게임은 마지막 공식전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더욱 심란했다. 앞으로 몇 년간은 로플 OS 개발을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로플 그룹은 이미 움직이고 있고 자신이 가야할 자리 역시 마련되어 있는 상태였다. 빨리 합류할수록 성공 가능성이 높아지는 셈이다. 눈을 감으니 연습 시간들이 떠올랐다. 출출할 때면 간식을 사와 입을 즐겁게 해주던 서재필... 선의의 경쟁자가 된 한석과 현준. 없으면 절대 안 될 진규를 비롯한 게이머들... 최현숙을 비롯한 코디들... 이준과 경호원들... 모두 한마음으로 월드 리그의 끝까지 달려왔다. 마음이 복잡했던 진성은 방에 설치된 로플 접속기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서 가볍게 팔극진결로 몸을 풀려고 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까 싶어 로플 세계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로플은 여전히 편했다. 아무도 없는 공간이 아니라 시간을 갖고 꾸며 크지 않은 방이지만 아주 편한 곳으로 바뀐 지 옛날이었다. 진성은 서서히 팔극진결을 펼쳤다. 눈감고도 가능했고 과장하면 자면서도 팔극진결을 펼칠 수 있을 것 같았다. 팔극진결에 이어 목검을 만들어 무명검법도 펼쳤고 그 중에 축지법도 사용했다. 한참을 움직여도 땀이 나지 않아 기분이 좋았다. 운동 효과는 현실과는 달리 없거나 아주 미미하지만 진성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아니지만 진성에게는 로플은 단순한 가상의 세계가 아니었다. "휴우..." 크게 숨을 쉰 진성은 허공에 누웠다. 그리고는 눈을 감았다. 아주 편했다. "조금만 있다가 나가야지." 진성은 서서히 잠이 들었다. 진성이 완전히 잠이 들자 공간에서 서늘한 인상의 또 다른 진성이 나타났다. "아무것도 모르고 자는군." 또 하나의 진성은 자고 있는 진성의 머리를 잠시 만졌다. "그래. 편히 지내라. 더러운 것은 내가 다 처리할 테니까. 내 형제여." 냉정하면서도 묘한 미소를 지은 또 다른 진성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공간을 가로질러 사라졌다. 아침에야 로플 접속기에서 나온 진성은 아주 상쾌했다. 꽤 오랫동안 로플에 접속해 있어 혹시 머리가 아픈, 예전의 그 현상이 재발할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다행히 몸은 더 이상 좋을 수 없을 정도였다. 씻고 내려가니 최현숙을 비롯한 코디들이 간단히 빵으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잘 잤어?" "네.." "오늘만 수고해라." "네.." 최현숙은 큰 누나처럼 진성을 챙겼다. 진성이 자리에 앉자 호텔의 유능한 요리사가 준비한 신선한 샐러드와 갓 구운 빵을 고소한 치즈와 같이 가져와 진성 앞에 제대로 올려두었다. "현숙아, 나도 부탁한다." 진성 뒤에 들어온 서재필은 현숙에게 부탁했지만 현숙은 들은 채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톡 쏘며 말했다. "손 있으니 갖다 먹어요." "그래.. 알았다." 서재필은 웃으며 진성 옆자리에 앉아 갓 구운 빵에 잼을 발라 먹었다. "오늘이 끝이구나. 부담만 가지지 말고 게임하면 된다. 아, 이런 얘기 하면 부담이 되어 소화가 안 되는 건 아니겠지?" "..." 진성은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찾아서 부지런히 먹기 시작했다. 해킹하는 게이머를 상대로 경기를 하는 것은 상당히 힘들었다. 단순히 컨트롤의 양이 많을 뿐 아니라 그 이상으로 정신을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체력소모가 훨씬 더 많았다. 게임기를 나올 때면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진성은 지쳐 있곤 했다. "다른 사람들은요?" "모두들 아직 자겠지. 너를 제외하고는 모두 월드 리그가 끝난 셈이니까. 그리고 기분이 별로 좋지도 않겠지." 그 전날 있었던 단체전 준결승에서 졌기 때문에 게이머들은 다소 의기소침해 있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위로해 준다고 해서 풀린 성질이 아니었다. 스스로에 대한 아쉬움은 시간이 지나야 서서히 사라질 것이다. "이거 곤란해." "제가 책임진다니까요." 멜슨은 요한슨의 막무가내 부탁에 얼굴을 찌푸렸다. 한낱 프로팀의 매니저가 운영위원회인 자신에게 이런 말을 지껄이다니.. "안 되네. 돌아가게. 자네가 여기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불쾌하니까." 멜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요한슨의 품에 넣은 손에서 소형 권총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른 아침의 화장실이라 아무도 없었다. "이... 이게 무슨 뜻인가? 자네... 이리도 무례할 수 있나?" 멜슨은 요한슨의 달라진 모습에 놀랐다. 이제까지 다소 영악해 보이지만 모두 잔머리일 뿐이라 느끼던 그런 요한슨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냉혹한 마피아의 정체가 드러난 것이다. "멜슨, 당신 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려고 이러나?" 요한슨은 마치 볼펜으로 꾹꾹 눌러쓰듯이 말했다. 도저히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기 힘들게. 순간 멜슨의 얼굴은 하얗게 변해 버렸다. 아내를 어떻게 한다거나 동생을 해치운다면 이리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딸이라니... 그제야 요한슨의 팀인 니아트가 마피아와 관련이 있다는 소문을 떠올렸다. "서.. 설마 마피아인가?" "... 이제 아셨나?" "..." 멜슨은 할 말이 없었다. "내 말대로 해.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어떤 짓을 할지 모르니까." ".. 알... 알겠다." 멜슨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일이 어떻게 되던 가족, 특히 딸에게 사고가 일어나서는 안 된다. 멜슨은 그렇게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시켰다. 게다가 멜슨은 요한슨이 건네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저 아무런 일이 없이 지나갔으면 했다. 동양의 스키피오와 서양의 스키피오가 결승에서 만났다. 두 선수 모두 공히 로마 문명이었고 게임 스타일도 아주 비슷했다. 다만 문명 온라인에서 지금까지 경기를 통해 창조적인 플레이와 틀을 깨는 전략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성적도 좋은 진성과는 달리 율리아노는 이탈리아의 게이머라 경험에서 진성에게 뒤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엄청난 연습량 때문에 객관적으로 게이머 스키피오가 유리하겠지만 그 또한 단정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었다. 문명 온라인을 조금이라도 해 본 사람은 두 스키피오의 대결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전 세계로 약간의 시간차를 가지고 중계되는 문명 온라인 월드 리그 개인전 결승전은 사람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이끌었다. "이 정도면..." 요한슨은 기분이 좋았다. 단체전은 이미 우승을 거두었고 오늘 개인전에서만 우승하면... 자신에게는 장밋빛 날들만 남은 셈이다. 단체전 우승으로 이미 조직은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다. 속해 있는 조직이 다른 조직 뿐 아니라 적극적인 전략으로 게임 도박에 대한 협력을 얻어 처음이지만 그 규모는 대단했다. 개인전과 단체전을 모두 합치면... 1억 파운드 가량의 돈이 움직일 것이다. 요한슨은 자신에게 떨어질 돈을 머릿속으로 계산해 보고는 더 기분이 좋아졌다. "율리아노, 네게 달렸다." 이미 조직에서 요한슨과 율리아노에 대한 일종의 포상을 결정해 놓고 있어 율리아노의 얼굴도 무척 밝았다. 비주류였던 율리아노는 이제 패밀리의 핵심 멤버로 들어설 기회를 잡은 것이다. 마지막 게임이 이제까지 해킹을 사용하는 상대를 모두 꺾고 올라온 동양의 스키피오라 마음이 걸리지만 율리아노는 자신의 실력을 믿었다.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확신했다. "만약에..." 율리아노는 요한슨의 나직한 말에서 풍기는 끈끈한 뭔지 모를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만약에... 네가 개인전에서 밀린다고 해도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다 조치를 취해 놓았으니까." "..." 역시. 율리아노는 요한슨의 말에서 죽음의 향기를 맡았다. 어떻게 했을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상대인 강진성이라는 게이머는 어쩌면 죽을지도 모른다. 율리아노는 자신이 마피아라는 사실을 마음에 되새겼다. 자신과 가족을 지키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다. 상대는... 동양인이다. 율리아노는 요한슨의 소름끼치는 미소에 고개를 끄덕였다. 진성은 무대로 가기 전, 조용하면서도 차분한 마음으로 대기실을 나섰다. 모두들 크지 않은 목소리로 진성의 우승을 원했다. 혹시나 부담이 될까 싶어 목소리를 낮췄던 것이다. 진성은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자신을 걱정하고 응원한다는 사실에 힘이 났지만 대기실 밖으로 나와 무대로 나가는 통로에 경호원 몇 명과 같이 걷자 경기는 혼자 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누가 뭐라고 해도.. 진성은 이 경기가 마지막 경기라 생각했다. 당분간 문명 온라인은 없을 것이다. 무대로 나왔는데 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두근거림이 가슴 근처에서 몸 전체로 퍼져나갔다.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월드 리그 결승전인 것이다. 맞은편에서 상대 게이머가 걸어 나왔다. 악수를 하고 각자 자신의 게임기로 이동했다. 진성은 상대인 율리아노의 태도에서 약간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이런 느낌.. 도대체 뭘까? 뭔가 불쾌한... 누군가 자신을 감시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예전에도 이런 느낌이 든 적이 있었는데... 하지만 게임을 앞둔 터라 진성은 생각을 멈추어야 했다. 6개월이 넘는 대장정의 끝이다. 드디어 강진성과 율리아노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지도는 간단했지만 게임을 하는 선수에게는 쉽지 않을 지형이었다. 마치 아령과 같은 모양의 대륙인데 국가는 단 둘, 두 게이머의 나라였다. 정확히 가운데를 국경으로 한 두 나라였다. 이럴 경우 초반에 한쪽으로 급격히 경기의 흐름이 가버릴 수 있는데 아령 모양의 가운데에는 험준한 산맥이 놓여 있어 직접 반대쪽의 게이머 영토를 침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자세히 보면 길이 두 개가 있는데 북쪽 끝과 남쪽 끝에 협곡을 통하는 좁은 길이 존재했다. 두 길 모두 공격은 힘들고 수비는 매우 쉬웠다. 바다 역시 그와 다르지 않았다. 많은 암초와 여울이 심한 곳이 많아 원활한 해군운용도 어려웠다. 육지로 통하는 길은 만 명을 백 명으로 막을 수 있는 길이고 바다는... 배를 이끌고 다니기 심히 어려웠다. 이런 지도에서 과연 어떻게 상대를 물리칠 수 있을까? 절대 초반에는 상대에 대한 공격이 불가능했다. 항해술이 발달한 중반 이후 바다를 이용한 전술이 많이 사용될 가능성이 높았다. 처음에 싱겁게 끝나는 게 아닐까 싶었던 사람들은 눈빛을 내며 앞으로의 진행을 기대했다. 진성은 깜짝 놀랐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말 간단한 지형이라면 자신의 컨트롤을 볼 수 있는 상대에게 이길 방법이 없었다. 준결승에서 리베라를 이긴 것도 거의 중반 이후를 생각하며 컨트롤에 신경을 썼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지도를 자세히 살핀 결과 절대 초반 승부는 걸 수 없다는 사실에 안심했다. 이런 지형은... 자신에게 유리했다. 해킹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상대가 무엇을 할지 모르는 자신은 일단 남쪽과 북쪽에 뚫려 있는 좁은 통로를 막으면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율리아노는 진성과는 반대로 기뻤다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이겨버릴 수 있는, 상대를 쓸어버릴 수 있는 기회였는데... 율리아노는 될 수 있으면 사람이 다치지 않기를 원했다. 목적만 이룰 수 있다면 굳이 사람이 다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요한슨의 잔인한 미소를 떠올린 율리아노는 빠르게 컨트롤을 시작했다. 이번 게임의 핵심은 해군이었다. 암초와 여울의 바다를 얼마나 잘 오갈 수 있는지 그게 관건이었다. 남쪽과 북쪽의 통로는... 그야말로 뚫리기만 한 것이지 그곳을 통해 대병력을 이동시킬 수는 없었다. "해군이란 말이지..." 같은 문명이기에 이제는 그야말로 진검승부다. 율리아노는 자신에게만 보이는 반투명 창을 통해 상대의 컨트롤을 살피며 적당한 속도로 게임을 운영했다. 힐끔 진성의 컨트롤을 살핀 율리아노는 내심 예상과 다른 컨트롤에 의아했다. 준결승에서 보여주었던 그 현란한 컨트롤의 홍수를 기대했는데 이번에는 보통의 게이머보다도 입을 적게 열었던 것이다. 율리아노는 강진성이 이기고 온 게임 중 해킹을 쓴 상대와 한 경기를 나름대로 분석했는데 대부분 자멸이 그 원인이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신은 스스로 무너지는 일은 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진성이 북쪽 해안에 항구를 건설하자 율리아노 역시 마찬가지로 북쪽에 항구 시설을 건설했다. 될 수 있으면 같은 방향으로 지을 경우 상대 컨트롤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이 더욱 큰 효과를 가지게 될 것이다. 율리아노는 처음 느꼈던 불쾌함이 차츰 사라져 이제 곧 우승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쳤다. 율리아노에게는 정정당당히 게임을 해야 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양심의 문제는 더더욱 있을 수가 없었다. 폭풍 전야의 고요함처럼 게임은 단 한 번의 무력 충돌도 없이 흘러갔다. 두 게이머 모두 정상급인데다 별명이 스키피오로 같고 문명마저 로마여서 마치 거울을 보는 듯했다. 특히 진성이 뭔가를 하면 신기하게도 위치도 거의 비슷하게 시작하는 율리아노였다. 중반이 되어 어느 정도 규모의 해군을 갖추자 진성과 율리아노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중반이 되기 전 진성의 컨트롤 흐름이 완전히 바뀌었다. 막힌 둑이 터지듯 엄청난 컨트롤이 줄을 이었고 진성의 로마 문명은 활기로 가득 찼다. 진성은 사람을 여럿 보내 자신의 영토 곳곳을 샅샅이 조사했다. 이미 산맥 사이에 협곡처럼 두 개의 길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또 어떤 곳이 있을지 몰랐다. 또한 그런 복잡한 컨트롤에 작은 배를 이용해 자신의 연안에 위치한 암초와 여울에 대한 자세한 지도를 작성하는 지시도 내렸다. 많은 컨트롤에 묻혀 있어 그리 쉽게 알아채기는 힘들게 만들었다. "오호... 이거로군." 율리아노는 진성의 쏟아져 나오는 컨트롤 속에서 그 진의를 파악했다. 자신의 실력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운이었다. 만약 컨트롤이 그냥 흘러가버렸다면... 그랬다면 상당히 곤혹스러웠겠지만... 안타깝게도 행운의 여신은 자신의 손을 든 듯했다. "나도 질 수는 없지." 율리아노는 군선 하나를 해안의 지도를 작성하도록 할당했다. 내륙의 조사는 그렇게 자세히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율리아노는 단 하나 해안의 자세한 지도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대단하구나. 해킹이 없었다면 이기기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율리아노는 상대 게이머의 실력을 인정했다. 맵에 대한 적응력은 최고였다. 적응력이라기보다는 통찰력이라 해야 옳겠지. 이윽고 곧 지도가 완성되었고 율리아노의 해군은 조심스레 암초와 여울을 비껴 공해로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상대의 바다를 향해 나아갔다. 상태를 보니 상대 역시 바다로 나온 모양이었다. 최초의 전투.. 율리아노는 웃었다. 상대가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뻔히 보면서 전투하는 상대에게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율리아노는 상대의 진형을 보며 서서히 전투 대형을 갖추었다. 진성은 완전한 지도를 가지고 바다로 나갔는데... 과연 예상대로 상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자신이 해킹이라는 수단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했을까? 냉정하게 생각해 본 진성은 비슷한 게임 플레이를 하다 전투를 통해 타격을 주는 방법이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공략이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상대 역시 근해에 대한 자세한 지도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일단 상대와 부딪쳐 봐야 할 것이다. 만약 양심의 가책이든, 방심이든 해킹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면... 진성은 이 때 확실한 타격을 입혀야 한다고 결심했다. 제발 그랬으면... 진성은 자신이 뭔가 운을 바라는 마음을 느끼고는 피식 웃었다. "... 역시 대단하다." 첫 전투는 율리아노의 근소한 승리였다. 율리아노는 보고 있는 가운데에서 당할 수도 있음을 직접 경험했다. 일단 혼전이 되자 군대강화법을 통해 상대적으로 강한 상대의 해군은 대단한 위력을 발했다. 해킹이 없었다면... 자신의 해군 대부분이 이곳에 수장되었을 것이다. 율리아노는 승리를 확신했다. 상대가 아무리 잘해도 절대 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 전투를 통해 확인한 것이다. 지금은 소규모의 비슷한 해군이지만 대규모가 된다면 지금처럼 빠른 기습은 불가능하다. 그 때가 되면... 율리아노는 자신의 승리가 눈에 선했다. 이긴 것이다. "..." 진성은 율리아노라는 게이머에 대해 단 한 번의 전투로 어떤 사람인지 알았다. 쉽게 흥분하지 않으며 멀리 내다보는 시야도 탁월한 게이머였다. 나뭇잎을 숲에 숨긴다면 숲 전체를 태워버릴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은 쉽게 흔들리지 않고 쉽게 속지도 않았다. 속는 대신 다른 방법을 사용할 인물이었다. 게임에 진 것인가. 우승을 놓쳐버릴 수밖에 없는 것일까? 진성은 이 한 번의 전투를 통해 보통의 방법으로는 상대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상대 역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순간, 얼마 전까지 있었던 그 능력이 절실했다. 그 능력을 사용하면 똑같이 해킹하는 셈이 되겠지만 너무 억울했다. 이곳까지 그렇게 고생하며 올라왔는데... 제대로 게임도 하지 못하고 상대에게 농락당해 끝이 날 생각을 하니... 차라리 게임을 포기해 버릴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개를 흔들었다. 여기까지 올라온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진성은 현준을 비롯해 단체전에서 진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다. 정말 억울했다. 방법이 있다면... 방법이 있다면... 진성은 마음속 깊이 뭔가를 바라고 또 바랬다. 바로 그 때, 진성이 보는 거대한 화면의 한쪽 구석에서 노랗고 작은 불빛이 순간적으로 반짝 빛이 났다. 근해에서는 해군이 마음대로 움직이기 힘들어 율리아노는 공해에 해군을 모았다. 그리고는 상대 게이머의 바다로 접근했다. 그 사이 진성 역시도 해군을 모아 둔 상태였다. 진성은 암초와 여울로 된 근해의 곳곳에 해군을 숨겨둔 상태였고 율리아노의 해군은 먼 바다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진성은 보통의 경우라면 암초와 여울이 큰 장애가 되어 공략하기 불가능하겠지만 해킹을 이용하는 상대에게는 그다지 어렵지 않은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착잡했다. 장애물이 없는 바다로 나가 싸우려니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을 것 같아 숨어 있는데 이것은... 각개격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 나가자." 진성은 지더라도 최선을 다하리라 마음먹고는 전 해군을 모아 근해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오호.. 이제야 나오시는군.' 율리아노는 진성의 모습을 이미 다 알아채고 있었다. 이제 승리의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비록 정당하지는 않지만, 돈과 권력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고 이제 그것을 모두 다 얻기 직전이었다. 바다에서 군선의 부대가 거세게 돌진하는 모습은 쉽게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도합 육십 척이 넘는 군선이 망망대해에서 부딪쳐 서로를 향해 화살을 발사하고 충각으로 상대 배를 들이받고 드디어 배가 붙어 육박전이 전개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얼핏 보면 전략적인 면이 없어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움직이는 배들은 철저히 전술에 따라 이리저리 이동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용호상박, 백중세를 유지하던 두 게이머. 차츰 율리아노 쪽으로 승세가 기울었다. 진성으로서는 그런 백중세를 유지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실력 발휘였다. "어쩔 수 없는 걸까?" 진성은 참담한 기분을 느꼈다. "이제 끝이다." 율리아노는 가슴 속 깊이 차오르는 기쁨에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제 이긴 것이다. 하지만 일이라는 게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만은 않았다. 율리아노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뭐가 이상한 걸까.. 살핀 율리아노는 상대의 컨트롤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반투명 창이 사라졌음을 알았다. 이런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순간 율리아노는 침착하기 위해 심호흡을 했지만 이런 경우는 이제껏 없어 마음 한 구석이 사라진 듯했다. 율리아노의 당황은 게임 플레이에 그대로 나왔다. 율리아노의 군선들의 움직임이 이상해졌다. 진성은 그것을 보고 상대의 의도는 짐작할 수 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군선을 컨트롤 했다. 작은 떨림이 큰 돌풍을 일으킬 수 있을까? 진성은 가능함을 직접 보여 주었다. 율리아노는 순간적인 패닉 상태에서 벗어났다. 지금까지 은연중 해킹을 최후의 믿을 보루로 생각해서인지 그 충격이 컸는데 율리아노는 오래 지나지 않아 스스로를 다스렸다. 하지만 역전이 되어버린 상황을 보고는 낯빛이 변했다. 이길 수 있을까.. 속으로 생각해 봤지만 상대는 실수를 하지 않을 게 분명한 동양의 스키피오였다. 해킹에 의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 뒤집을 가능성도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힘들었다. 진성의 역전에 관객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이제 동양인이니, 서양인이니 상관이 없었다. 처음부터 밀리던 진성이 극적인 컨트롤로 전세를 뒤집었다는 것 자체만으로 관객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감추지 않았다. 세계 최강다운 게임 운영에 사람들은 역시를 연발하며 이제 끝으로 향할 게임에 집중했다. 진성의 해군은 아직도 율리아노의 해군과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율리아노가 해킹할 수 없자 두 사람의 실력은 극명하게 나타났다. 율리아노의 원래 실력은 이보다 더 나았지만 해킹이라는 수단이 사라져 자신의 실력조차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강진성의 우위를 확신할 수 있는 전개였다. ----------------------------------------------------- ^^ 재미있게 보십시오! -작독(현민) 배상- ----------------------------------------------------- TGP1(The Gamer Part 1) [194 회] 끝까지 달리자! "쓰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지." 요한슨은 대기실에서 화면을 지켜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율리아노가 깨끗하게 이겨 괜히 사람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요한슨은 품안에서 스위치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두 개의 버튼 중 녹색 버튼을 눌렀다. "윽..." 순간 감전이 된 것처럼 진성의 몸은 떨렸고 입에서는 신음소리가 나왔다. 뭐라고 말하려고 하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 눈은 볼 수 있었는데... 거의 이겨 놓은 경기는 다시 뒤집어지기 시작했다. 전혀 컨트롤을 할 수가 없으니... 진성은 경을 끌어올렸다. 이런 일이라니... 다행히 몇 초 지나지 않아 진성의 입에서는 목소리가 나왔고 또 다시 몇 초 지나지 않아 진성은 억지로 컨트롤을 시작했다. 율리아노는 갑자기 멈춰버린 상대 게이머의 플레이에 요한슨이 뭔가 손을 썼음을 알고는 그 틈을 노려 상대 전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움직여 괜히 마음 급히 움직인 자신의 배들이 포위당하는 모습에 놀랐다. 율리아노는 이런 상황에서도 상대가 속임수를 쓴 것이라 판단했다. 율리아노에게 강진성은... 이미 하나의 뚫을 수 없는 절대의 벽이 되어버렸다. "불발인가..." 요한슨은 녹색 버튼 아래의 적색 버튼에 손가락을 올려놓고는 중얼거렸다. 얼마 동안만 기절했다면 누구도 다치지 않았을 텐데.. 요한슨은 자신의 운명을 탓하라며 망설임 없이 적색 버튼을 눌러버렸다. 진성은 단 한 순간에 정신을 놓아버렸다. 직접 경험해 보지는 않았지만 번개를 맞으면 이런 상태가 될까? 율리아노는 완전히 멈춘 상대의 플레이를 다시 한 번 느꼈지만 빨리 움직이지는 않았다. 혹시나 이것 역시 상대의 속임수가 아닐까 했던 것이다. 하지만 곧 율리아노는 움직였고 엄청난 속도로 상대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요한슨이 뭔가 조치를 취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때, 진성의 군선은 유기적인 움직임을 보이더니 다른 배들은 그냥 두고 율리아노가 탄 대장선을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이미 대세는 율리아노에게 넘어갔지만 만약 게이머가 잡히거나 죽게 된다면 게임은 그것으로 끝이 나는 것이다. 율리아노는 그에 생각이 미치자 급히 전장을 이탈하려고 했지만 믿기 힘들 정도로 교묘한 움직임을 보이며 앞을 막는 진성의 배들은 마치 하나하나가 게이머가 직접 컨트롤 하는 듯했다. 관객이 보는 화면에는 여전히 진성의 목소리로 컨트롤이 들렸지만 그 분위기가 어쩐지 모르게 차가운 터라 낯설었다. 별로 말은 하지 않아도 그 분위기가 느껴지던 진성이 돌연 다른 사람처럼 변한 듯했다. 하지만 관객들 대부분은 너무도 급변하는 경기의 흐름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대장선은 충각에 박혀 흔들렸고 불화살에 여기저기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또한 전체에 비하면 적지만 대장선에 오르기에는 결코 적지 않은 진성의 해군들은 거침없이 상대 군인들을 베어 넘기며 대장선을 점령했다. 멀지 않은 곳에 자신의 군선이 있지만 달려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율리아노는 게임에서 졌음을 확신했다. 요한슨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걸까? 진성의 해군 중 한 병사가 앞으로 나오더니 검을 들어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율리아노의 목을 베어버렸다. 게임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 "이... 이럴수가..." 요한슨은 대기실에서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분명 그 게이머는 목숨조차 보장할 수 없을 충격을 받았을 텐데... 순간 요한슨은 그 기술자를 의심했다. 돈만 챙기고 작동도 하지 않는 물건을 넘겨준 게 아닐까? 하지만 게임상에서 율리아노가 죽자 곧바로 쓰러져 버리는 상대 게이머의 모습을 보고는 그렇지도 않음을 알았다. 경기장은 게이머 강진성이 쓰러지자 술렁이기 시작했다. 전문 의료팀이 무대 위로 달려 올라갔고 경호원들은 그 주변을 철통같이 지켜 섰다. 요한슨은 그 모습까지 보고는 미리 챙긴 가방을 들고는 빨리 대기실을 빠져 나갔다. 진성은 눈을 떴다. 이곳은... 마치 로플 안으로 들어온 느낌이었다. 하얀 공간의 허공에 떠 있는 자신... 분명 월드 리그 결승전을 치르고 있었는데 이곳은 도대체 어디일까? 고심했지만 알 방법은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로플이 아닐까 싶어 접속을 해지하려고 했지만 불가능했다. 이곳은... 로플이 아니었다. "현실인가?" 진성은 꿈이라 확신했다. 그 순간, 진성은 마치 거울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바로 자기 앞에 똑같이 생긴 누군가가 서 있었던 것이다. 단지 차가운 느낌이 강한 것을 제외하고는... "당신은.. 누군가요?" 물음에도 상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진성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도저히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예전에 본 듯한 느낌도 들긴 한데 언제 봤더라... "복수는 내가 한다." 진성 자신과 비슷한 목소리였다. 무슨 복수를 말하는 걸까? "무슨 복수입니까? 저는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잘 쉬고 있어라. 나중에 보도록 하지." 그 말을 마친 상대는 공간에서 연기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이곳은... 어디일까? 진성은 알 수가 없었다. 사방 어디로 가더라도 그 끝은 커녕 조금도 변하지 않을 정도로 공간은 컸다. 이곳은... 도대체... 또 하나의 진성, 차가운 눈을 가진 진성은 자신이자 자신의 공간인 로플에서 빠른 손놀림을 보여 주었다. 예전 진성이 로플 그룹을 사용하기 위해 했던 그 방법을 거의 그대로 사용했다. 이탈리아 니아트 팀에 대한 마피아 조직의 개입 여부를 분명히 보여주는 자료들을 영국과 프랑스의 자존심 강한 언론에 보냈고 그와 동시에 이번 일에 연루된 문명 온라인 유럽 운영위원회 회원인 멜슨과 니아트 매니저인 요한슨, 장비를 만든 기술자 사이에 오고 간 자금의 흐름에 대한 것도 확실한 자료를 병행해 인터넷에 발표했다. 그 사이트는 바로 문명 온라인 월드 리그 사이트였고 이미 사이트는 또 하나의 진성에 의해 해킹된 상태였다. "이것으로는 부족하지." 또 하나의 진성은 바쁘게 움직였다. 문명 온라인 게임을 처음부터 지켜봤기에 누가 해킹을 했는지 모두 다 알고 있어 게임에 대한 분석과 더불어 해킹 장비와 그와 관련된 자금 흐름을 추적해 월드 리그에 누가 해킹을 사용했는지에 대한 자료 역시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또한 마피아 조직이 이번 리그를 통해 싹쓸이할 생각이었던 도박에도 손을 대 1억 파운드에 가까운 돈을 순식간에 빼돌려 미리 마련해 둔 스위스의 은행에 예치해 두었다. 물론 계좌 주인은 강진성이었다. 슬쩍 웃은 금발의 진성은 이번 일에 관여한 마피아 조직 보스와 핵심 멤버부터 행동대원에 대한 각종 범죄 여부에 대한 상세한 증거를 모아 이탈리아 검찰과 국제 경찰에 보내버렸다. 이 정도면 적어도 몇 년 동안 그 마피아 조직은 재기하기 힘들 것이다. 물론 그 이후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힐 수도 있겠지만 눈매가 서늘한 진성은 이미 다른 곳에서 모아둔 돈을 이용해 다른 마피아 조직을 통해 그 마피아 조직을 완전 궤멸시킬 작정을 했고 실제로 실행에 옮긴 상태였다. 특히 요한슨은... 절대 성한 몸과 정신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이번 사건에 대한 로플 그룹의 입장에 대해서도 추측 형태로 간단히 밝힌 또 하나의 진성은 그제야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뭘 하고 있을지 궁금하군." 엄청난 충격으로 어찌된 일인지 로플과 연결되어 버린 강진성... 접속기도 없이 오래도록 로플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또 하나의 진성은 생각했다. 억지로라도 원래의 상태로 보내버려야 할 것이다. 게이머 강진성은 게임이 끝난 직후 정신을 잃었고 곧바로 의료진에 의해 응급처치를 받은 후 병원으로 이동했다. 월드 리그 개인전 우승을 결정지었지만 로플팀의 선수들 및 관계자들은 진성의 상태에 대해 걱정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 결혼식 진성은 혼수상태에 빠진 지 열흘 만에 깨어났다. 그 사고를 알고 있던 모든 사람들은 진성이 깨어나자 큰 기쁨을 느꼈다. 그 동안 누가 그런 일을 처리했는지 모르지만 이탈리아의 마피아 조직 중 관계했던 일당들, 선수들 그리고 해킹 장비와 소형 전자장치를 만들었던 기술자까지 모두 인터넷에 공개되었다. 특히 일의 중심인물인 매니저이자 마피아 조직의 일원이었던 요한슨은 완전히 미쳐버렸고 선수들 중 율리아노를 제외하고는 모두 양심선언을 해 그 동안의 일에 대해 낱낱이 밝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 사실임을 입증했다. 마피아 조직은 완전히 만천하에 드러났고 일망타진 될 상황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경찰이 들이닥치기 전 조직의 보스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이미 살해된 상태였다. 아마도 다른 조직 간의 알력이 그 이유인 듯했다. 월드 리그를 책임졌던 유럽의 운영위원회는 사실상 해체가 되고 새로운 인물들로 구성되었다. 기존의 운영위원회에는 추잡한 비리가 구조적으로 뿌리를 내려 그와 같은 사고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멜슨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지만 믿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멜슨은 여러 가지 죄목으로 이미 기소된 상태였다. 한국의 문명 온라인 팬들은 로플 프로팀의 월드 리그에서 드러난 소극적 게임 운영의 원인이 바로 상대의 해킹이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또한 그런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단체전은 3위, 개인전은 우승이라는 성과를 거둔 것만도 대단한 것이라 확신했다. 아시아의 팬들 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그런 로플 프로팀의 모습과 끝까지 정정당당했던 플레이에 깊은 감명을 받은 듯했다. 비록 그동안 숨겨졌던 도박과 비리의 음모가 밝혀져 문명 온라인 월드 리그의 명성은 무너졌지만 로플은 그 이상으로 유명해졌다.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또 하나의 사실은 이탈리아 마피아가 개입한 게임 도박의 판돈인 1억 파운드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점이었다. 경찰은 물론 정보 요원들도 엄청난 규모의 도박이라 추적했는데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한 때, 제 3의 조직이 있어 그 돈을 빼돌린 게 아닐까 싶었지만 조금의 증거도 찾을 수 없었다. --------------------------------------------------- ^^ 거의 다 왔네요!!! -작독(현민) 배상- --------------------------------------------------- TGP1(The Gamer Part 1) [195 회] 대단원 진성은 강한 햇빛에 눈을 떴다. 낯익은 천장과 커튼, 그리고 커튼의 틈으로 들어온 햇빛이었다. 아... 이곳은... 집이다. 진성은 자신이 집으로 돌아왔음을 알았다. 그런데 왜 나는 여기 있을까? 이탈리아 로마에서 월드 리그 결승전을 하고 있었는데... 진성은 그 뒤의 일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몸이 약간 불편했지만 천천히 걷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몇 걸음 걷자 진성은 병원에서 눈을 떴고 아버지, 어머니를 비롯해 현준과 한석 등의 게이머들.. 서재필, 조팀장을 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래층으로 아주 힘겹게 내려갔다. 땀이 났지만 오히려 시원한 느낌이었다. "진성아..." 현준 어머니였다. 놀란 표정이 역력했다. "잘 계셨어요?" 진성은 웃으며 말했다. 현준 어머니는 뛰어와 진성의 손을 붙잡고는 눈물을 흘렀다. "이제 좀 괜찮으냐?" "저야.. 괜찮아요. 이번에도 어머니께 걱정을 끼쳐 드렸네요." "..." 현준 어머니는 아무 말도 못했다. 그저 진성의 얼굴을 쓰다듬고 앞으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옆으로 넘겨주었다. 진성을 보고 만지느라 정작 자신의 눈에서 흐른 눈물이 뺨을 타고 내려가 턱에서 바닥까지 그냥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어머니.. 저 어디 안 가요." 진성이 웃으며 다시 한 마디 하자 그제야 현준 어머니는 눈물을 닦으며 진성을 데리고 식당으로 갔다. "몸은 좀 어떠냐?" "오늘은 밖에 나가 운동은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진성의 말에 어머니는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진성은 그 미소에 마음이 푸근해졌다. 정말 집에 온 것이다. "혹시... 어머니, 이탈리아에서의 게임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아세요? 저는 기억이 하나도 없어요." 진성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기억이 안 나는 모양이구나. 그 게임에서... 결승전이었던가.. 그 게임이 끝나자마자 진성이 네가 의식을 잃었고 어제야 겨우 의식을 찾았단다. 나는 정말.. 정말..." 진성은 또 다시 어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자 가볍게 어머니에게 다가가 그리 크지 않은 어깨를 감싸 안았다. "어디 안 간다니까요. 그리고 저 배고파요." "그.. 그래.. 내 정신 좀 봐." 어머니는 급히 눈물을 닦더니 진성을 다시 한 번 확인 하고서 뒤돌아 음식 준비를 시작했다. 며칠 뒤. "기분이 어때?" 현준이 묻자 진성은 오랜만에 달리는 자동차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고개를 돌려 현준을 바라보았다. "그야... 좋지. 죽었다 살아났는데." "너는 유난히 사고가 많다. 이번에 몇 번째냐?" 현준은 슬쩍 고개를 돌려 웃고 있는 진성을 쳐다보았다. "세 번째. 사람은 누구나 세 번 죽을 기회가 있대. 모든 사람들은 그 세 번의 시간 중 하나에 죽음을 당하지. 나는 세 번 모두 죽지 않았으니... 어쩌면 절대 죽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렇지 않아?" "...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아무튼 이렇게 회복되어 같이 출근하니 너무 기분이 좋다." "그나저나 너 언제 데뷔 하냐?" "뭐?" "데뷔!" "아... 그거.. 효진이와 의논해 보고 있어. 나는 효진이 이름이나 게이머로서의 내 이름을 먹고 들어가지는 않을 거야. 아마도.. 장철봉 감독님의 새 작품에 조연으로 나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그러면 게이머... 은퇴해야겠네?" "그렇지. 넌?" "나도 은퇴해야지. 어쩌면 몇 년 뒤에 다시 복귀할지도 모르지만." "진짜?" "진짜." 현준과 진성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속이 다 시원하도록. 회사에는 많은 사람들이 진성을 보려고 모여 있었다. 문명 온라인의 개발팀원들부터 시작해 로플 관계자들과 밀리터리 아트 개발자들까지... 모두들 모여 진성의 회복을 축하해 주었다. 오랜만에 본 사람들이 꽤 많았다. 진성은 그 사람들의 얼굴에서 처음 게이머가 된 이후를 떠올렸다. 그동안 정말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한참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진성과 현준은 게이머들이 있을 로플 엔터테인먼트로 향했다. 그곳에는 서재필을 비롯한 사람들이 목을 빼고 진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진성아!" "오빠!" "강진성..." 진성이 아주 큰 연습실로 들어서자 사람들은 아주 반가워 소리쳤다. 시간이 지나서인지 게이머들의 얼굴에는 단체전 우승을 하지 못한 섭섭한 마음들은 모두 사라진 듯했다. 거기에는 모든 사실이 밝혀져 로플팀이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많은 사람들이 이해해 주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진성이 들어오자 환호하던 사람들은 완전히 안으로 들어와 멈추자 일제히 조용히 했다. 진성의 말을 듣기 위해서였다. "기다렸죠? 이제 괜찮습니다. 이제... 현숙이 누나와 이준 형의 결혼식에 가야 하지 않나요?" 진성의 말에 모두들 웃었고 최현숙과 이준은 눈치를 보며 얼굴이 붉어졌다. "맞다. 깜박 잊고 있었네. 너희 둘... 빨리 날 잡아서 보고서 올려라! 음.. 원래 사내 커플은 좀 그렇지만 내 특별히 봐준다." 서재필은 한술 더 떴다. 의식이 없었던 진성이 깨어나 웃으며 말하자 분위기는 굉장히 좋아졌는데 거기에 현숙과 이준의 결혼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오자 모두의 얼굴에는 웃음이 피어났다. "강팀장..." "네?" 진성은 조진철 로플 연구소 소장 방으로 왔다. "언제 게임 세계에서 은퇴할 것인지요?" 일부러 말을 높이며 장난치는 조소장의 말에 진성은 환하게 웃었다. "음.. 생각 좀 해 보지. 조소장이 내가 없으면 힘이 많이 드는 모양인데... 그렇게 원하면 내 빨리 은퇴를 해야지. 내가 뭐 힘이 있나? 할 수 없지." 진성은 짐짓 조소장에게 농을 걸었다. 말투는 옛날 진팀장이 조팀장에게 말하던 것과 같았다. "..." "내 말에 너무 감동할 필요는 없네. 내 조소장의 나에 대한 존.경.은 잘 알고 있으니까." 진성은 한술 더 떴다. 조소장은 할 말을 잃었다. 어떻게 된 녀석이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면 이렇게 바뀌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 내가 졌다. 졌어. 그런데 정말 언제 은퇴할 거냐?" "확실히는 모르겠어요. 저 뿐 아니라 현준과 한석도 은퇴할 생각이거든요. 아, 어쩌면 한석은 당분간 게이머 생활을 더 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래?" "네. 은퇴하지 않아도 저는 이제 이곳으로 출근해야 하는데요. 뭘..." "그건 그렇지." 당분간 로플 그룹의 총수에게서 쉬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조소장의 힘들어 눈이 퀭한 모습을 보니 마냥 쉴 수는 없었다. 특히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더 해쓱하게 보이며 한숨을 지어보이는 통에 진성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서해로 놀러갈까 생각했던 진성은 만약 놀러 가면 꿈에 조소장이 나타날 것만 같았다. 진성은 이탈리아 로마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자세히 들었고 자신이 직접 인터넷을 통해 그 때의 상황을 찾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누가 이런 일을 했을까? 현준은 혹시 처음 로플 그룹이 생겼을 때처럼 해킹을 이용해 마피아 조직과 그에 관계된 사람들을 일망타진한 게 아닐까 물었지만 자신은 금시초문이었다. 그것은 절대 아니었다. 직접 그 때의 급박한 상황에 대한 자료를 다 읽은 뒤, 진성은 자신이 로플 그룹을 구하기 위해, 현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애썼던 방법과 상당히 유사함을 발견했다. 정확하고 도저히 뺄 수 없는 증거를 적절한 단계로 언론과 여러 기관에 통보해 단기간에 상대를 섬멸해 버리는 것이 아주 비슷했다. 정말 자신이 한 것일까? 하지만 진성은 그런 것이 한, 두 시간에 가능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한 것이다. 알 수 없는 것을 붙들고 있기는 시간이 아까웠다. 그렇지 않아도 로플 OS 프로젝트로 인해 점점 더 바빠 진성은 그에 대한 생각을 뒤로 넘겨 버렸다. 한 달 뒤. 로플 그룹, 특히 게임 관련 이벤트에서 사용하는 코엑스의 컨벤션 홀에서는 게이머 스키피오와 게이머 한신의 은퇴식이 있었다. 보통 은퇴라면 간단히 하는데 로플 그룹에서는 두 사람의 그룹에 대해 기여한 바를 인정해 칠천 명의 팬을 초청해 은퇴식을 열어 주었다. 단순한 은퇴식이 아니라 하나의 이벤트로 만들었던 것이다. 자리는 하나도 남기지 않고 꽉 찼다. 팬들 뿐 아니라 백여 대에 달하는 카메라와 그보다 더 많은 기자들이 무대 바로 아래에 진을 치고 은퇴식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팬들은 월드 리그 우승을 달성하고 떠나는 게이머 스키피오와 비록 월드 리그 단체전 3위지만 상대는 해킹을 사용하는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한 게이머 한신의 은퇴를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하면서도 아쉬워했다. 충분히 1, 2년은 게이머 생활을 할 수 있을 텐데... 강진성은 로플 그룹에서 게임 개발 관련으로 옮긴다는 소리가 있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지만 진현준은 왜 은퇴를 하는지 사람들은 궁금해 했다. 드디어 한 사람이 등장했다. 검은색 구두에 검은색 정장, 검은색 셔츠까지 입은 사람이 무대의 중앙으로 나오자 사람들은 환호했다. 강진성이었다. "안녕하세요?" "네!" 건물이 떠나갈 듯한 목소리였다. "제 은퇴식인데.... 저더러 사회를 보라고 하네요. 이것 참.. 여러분도 기가 막히지요?" "하하하하.." 진성의 유들유들한 말에 팬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 무대에 올라 헤매던 모습과는 달랐다. 전문 MC라고는 할 수 없어도 그에 버금가는 여유로움이었다. "저 혼자 진행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자, 한 사람을 소개하겠습니다. 예전에 저와 같이 사회를 본 적이 있는데... 여러분, 오늘은 제발 그 딴딴딴딴.. 이런 거 하지 마세요. 제 친구가 싫어한답니다. 영화계의 보물, 정효진씨를 소개합니다." 팬들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감칠맛 아는 진성의 멘트에 웃음을 참지 못한 것이다. 붉은색의 원피스를 입은 정효진이 가볍게 걸어 나왔다. "딴딴딴딴 딴딴딴딴..." 팬들은 웨딩마치를 또다시 불렀다. "이 사람들이 하지 말라고 해도.." "하하하하.." 진성의 장난에 팬들은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정효진은 무대 가운데로 나와 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진성씨가 아주 말을 잘 하죠?" "네." "예전에 그 진성씨인지 잘 모르겠어요. 이러다가 진성씨 MC가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요." "MC도 좋아요." 정효진이 나오자 무대는 훨씬 더 밝아진 듯했다. "효진씨, 우리만 나와 말하면 제 친구가 아주 기분 나빠할 겁니다. 빨리 소개하세요." 진성의 말에 팬들은 또 다시 웃었다. 팬들은 이제 누가 나올지 짐작했던 것이다. "게이머 한신, 진현준씨를 소개합니다." 정효진의 말에 무대 뒤에서 온통 하얀색 옷을 입은 진현준이 걸어 나왔다. 평소와는 달리 머리에 힘을 준 무스까지 바른 현준의 모습에 팬들은 아주 좋아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이 뭐라고 외치자 모두들 따라 외쳤다. "... 제비다!" "제비! 제비! 제비!" "하하하하..." 현준은 얼굴을 구겼고 그것이 스크린에 잡히자 팬들은 또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은퇴식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팬들은 특히 로플 소속 게이머들의 장기자랑을 남김없이 봤고 진성과 현준이 시간을 투자해 준비한 노래와 춤을 보고는 즐거워했다. 특히 진성과 즉흥적으로 춤을 같이 춘 미모의 팬, 현준의 볼에 뽀뽀한 또 다른 여성 팬의 행동에 모두들 웃고 떠들며 시간을 보냈다. 이윽고 시간이 흘러 은퇴식은 끝이 났다. 너무도 재미있게 놀아 은퇴식인지 모를 정도였다. 모든 순서가 끝이 나고 팬들은 모두 돌아갔다. 무대 뒤 대기실에는 일본을 비롯해 유럽을 같이 이동한 로플팀 사람들이 다 모였다. "그 동안 수고했다." 서재필은 두 사람에게 다가가 악수를 했다. 악수하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오빠, 수고했어요." "앞으로 또 언제 봐요?" "여기는 우리 아버지 그룹 소속 회사니까 나는 언제라도 올 거다." 현준은 일부러 오만하게 말했지만 게이머들에게 통하지는 않았다. 그저 피식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나는 로플 연구소로 가니까 가끔 올게." 진성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주는 못 보더라도 가끔 만나서 밥이라도 한 끼 할 수는 있겠지. "이렇게 헤어질 수는 없습니다!" 범현의 목소리였다. 모두들 범현을 바라보자 범현은 소주잔 기울이는 시늉을 했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고 서재필을 바라보았다. "아, 맞다. 그룹에서 두 게이머에게 그 동안 수고했다며 보너스와 격려금, 그리고 경기 우승에 대한 상금을 주기로 했는데 거기서 조금 쓰지 뭐. 자, 나를 따르라." 사람들은 모두 좋아 박수를 치며 서재필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진성과 현준을 서로 바라보다 피식 웃으며 사람들을 따라 나갔다. 새벽에 일어난 진성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정원으로 나가 팔극진결과 무명검법, 팔괘장 등을 수련했다. 더 이상의 뚜렷한 성장은 느껴지지 않았다. 가림토를 번역한 글을 수십, 수백 번 읽었지만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진성에게 수련은 하나의 과정이었고 사부 유조를 떠올리는 시간이서 꾸준히 해나갔다. 고요한 휴식을 취한 진성은 집 안으로 들어왔는데 여전히 어머니는 진성에게 시원한 것을 건넸는데 오늘은 인삼과 우유, 사과를 갈아 만든 것이었다. 굉장히 시원했다. "고맙습니다." "그래.. 그런데 진성이 너도 아직은 어리지만 그래도... 결혼 생각을 해봐야 하지 않겠니? 군대 가는 것도 아니니 더 빨리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진성은 갑작스런 어머니의 말씀에 사래가 걸린 듯 켁켁거렸다. "어머니... 저 아직 어려요." "... 나야 네가 늦게 가겠다면 좋겠지만." "걱정 마세요. 오히려 늦게 가서 걱정하실 테니까요." "그럼 나야 좋지." 어머니의 웃음에 진성은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 "오늘 언제지?" "11시오." "너와 현준이는 조금 빨리 가는 게 좋지 않겠니?" "여기서 9시에 출발하려구요." "그래? 빨리 해야겠구나. 네가 현준이, 현석이 좀 깨우렴." "네, 어머니." 진성의 대답에 어머니는 기분이 좋은 듯 웃으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진성은 웃으며 위로 올라가 현준의 방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이불을 돌돌 감은 채 자는 모습이었다. "웬만하면 일어나지?" "... 오늘 휴일이잖아." "현숙이 누나가 늦게 오면 가만 안 둘 텐데..." 진성의 말이 끝나자마자 현준이 튕기듯 일어났다. "아.. 맞다. 오늘이지." 오늘은 바로 이준과 최현숙의 결혼식 날이었다. 현준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진성을 보고 눈곱이 낀 상태로, 머리가 헝클어진 그 상태로 피식 웃었다. "빨리 밥 먹고 가야지. 대충 씻고 내려가. 현석이 깨우고 내려갈 테니까." "알았다. 여전히 부지런하구나. 원래 우리 집 남자들은 아침에 늦게 일어나야 정상인데 말이야." 현준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룹 회장이지만 아침에 무척 약한 진회장을 비롯해 현준과 현석 역시 늦잠을 즐겼다. 현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내려가자 다른 사람들은 모두 와 있었다. 두 사람이 앉자 곧 식사가 시작되었다. "어디라고 했지?" 현준 아버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강남 롯데 호텔이요." "호텔?" "네..." "돈 좀 썼겠네..." 식사 시간 동안 결혼식에 대한 얘기가 주를 이루었다. 한참 최현숙과 이준이 어떻게 살까, 누가 주도권을 쥘까 얘기하던 가족은 이제 현준에게 정효진에 대해 난처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아들아, 언제 한 번 집으로 데려오도록 해라. 네 엄마가 부담스럽다면 회사로 와도 된다." "당신이 더 부담스러울 걸요. 현준아, 이번 주에 네 엄마는 아주 심심하단다. 한 번 봤으면 좋겠는데... 아, 내가 효진양의 팬이라는 것 말해줘도 된다." 현준은 얼굴을 붉힌 채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분간도 못할 정도였다. 결혼식장은 많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준과 최현숙의 양가 집안사람들과 더불어 로플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 북새통을 만들었다. 또한 어디에서 이야기를 들은 것인지 은퇴했는데도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는 게이머 스키피오와 한신이 온다는 말을 듣고 온 팬들로 몸살을 앓았다. 로플 그룹의 총수인 진민수 회장과 로플 소프트 이희철 사장, 로플 하드 부사장인 곽현호, 로플 연구소 소장 조진철을 비롯해 많은 고위급 인사들이 참석했고 로플 프로팀의 선수들과 코디들, 경호원들 모두 일찍 와서 신랑과 신부를 만나 사진을 찍으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탤런트 정효진과 특별히 진성과 현준의 부탁으로 사회를 맡게 된 김재동이 도착하자 분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이윽고 결혼식이 시작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이준과 최현숙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너는 언제... 결혼 할 거냐?" 진성은 옆에 앉은 현준에게 나직하게 물었다. 평소 거침없이 대답하던 현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 아직은 아니야." 현준은 반대쪽에 앉은 정효진을 바라보았다.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현준이 걱정은 하지 말고 너나 잘 해라." "맞아. 네 걱정이나 해라." 진성의 옆에 앉은 한석이 가볍게 말했고 현준이 그 말을 받았다. 현준에게는 효진이 있고 한석에게는 유나가 있었다. "..." 진성은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웃기만 했다. 결혼식은 무사히 끝이 났고 신랑, 신부와 함께 기념 촬영이 있었다. 양가 사람들의 촬영이 끝난 후, 친구들과 직장 사람들이 다 같이 섰는데 굉장했다. 마치 연예인의 결혼식 같았다. 로플 프로팀의 선수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동안 같이 고생하며 지냈던 시간들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앞으로도 자주 만날 기회가 있겠지만 지금 이런 뿌듯한 만족감은 다시 느낄 수 있을지 몰랐다. "... 우리 준이 형님.. 따라 갈까?" 완전히 결혼식이 끝난 뒤, 모인 게이머들과 또래의 사람들은 갑작스런 현준의 제안을 들었다. 누구 하나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은 없지만 그렇다고 빠지는 사람도 없었다. "어디라고 했지?" 진성이었다. 진성이 나선 이상 모두의 의견은 완전히 일치했다. "제주도!" 이번에는 한석이었다. "범현아, 예약해라." 현준의 말이 다시 들렸고 범현은 재빨리 항공사에 전화를 걸었다. 프로팀을 이끌던 세 사람이 나서자 흐름은 완전히 이준과 최현숙의 신혼여행지인 제주도로 가는 분위기로 바뀌고 말았다. "... 현숙 누나가 나중에 가만 안둘 텐데요?" 진규가 걱정스런 투로 물었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지 뭐." 현준이 툭 내뱉자 모두들 찬성을 하며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이준과 최현숙의 신혼여행과 더불어 진성과 현준이 참가하는 마지막 로플 프로팀의 MT 장소는 제주도로 결정이 되었고 모두들 떠들며 기분을 내고는 공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 설마 나를 잊은 건 아니겠지?" 뒤이어 나온 서재필까지 가세하자 모인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때마침 시원한 바람이 불었고 하늘은 너무나 맑았다. 어디론가 놀러 가기에는 안성맞춤의 날씨였다. --------------------------------------------------------- 그 동안 티지피원을 사랑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 그저 마음가는대로 썼던 글이라 미흡한 점이 많았는데 관심을 가져주시니.. ^^ 이번주 일요일을 기해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근처 책방이나^^ 혹은 얇은 주머니를 압박하여 구입신공을 이루시길 바랍니다^^(노골적이죠?) 티지피투는 많은 분들이 생각하시는대로 가상현실 로플이 전세계적으로 그 영역을 넓히는 부분입니다. 주인공은 여전히 강진성이지만 다른 인물들이 추가가 될 것이고... 티지피원을 보지 않더라도 충분히^^ 이해가 되도록 만들 생각입니다. 다시 한 번 그 동안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모두 좋은 하루, 좋은 한달, 좋은 한해가 되시기를~ -작독(현민) 배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