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ene Number. 1 “안녕하세요.” 회의실로 하나 둘 모습들 들어내는 연기자들. 죄다 지각이었다. 회의 시작은 10시부터 이었으니까. 구겨진 표정으로 시계를 바라보던 수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손에 쥐어진 대본을 들고선 말을 이었다. “오늘 회의, 내일로 미루도록 하죠.” 수현의 말에 모두들 놀란 기색이 역력하다. 수현은 대본을 들고 회의실 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 때 가장 늦게 도착한 창재가 문을 열었다. 날카롭게 뜬 눈으로 창재를 바라보던 수현은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는 겁니까?” “오늘 회의 안하기로 했어요. PD도 지각하는 판국에 어떻게 회의를 진행하겠어요.” 창재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수현은 멈춰 선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창재는 한숨을 내쉬고선 수현의 뒤를 쫓았다. “이봐요. 강수현씨.” 또 다시 창재의 부름에 멈춰 선 수현. “그렇게 가면 어쩌자는 겁니까. 드라마 안만들 겁니까?” “저렇게 약속하나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하고는 오히려 안 만드는 게 나을지도 모르죠.” 수현이 다시 돌아서서 가려고 하자 창재는 삼키려던 말을 내뱉었다. “이딴 식으로 일합니까?” 그 말에 수현의 고개가 자연스레 다시 돌아갔다. “뭐라구요?” “이딴 식으로 일했냐고 물었습니다.” ＊＊＊＊ “선배. 나 이번엔 정말 하기 싫어.” “왜? 아, 그 다혈질 PD.” 창재는 방송국에서 꽤나 유명인사 중 한 명이었다. 기분이 좋다가도 한 순간 보면 소리 지르며 사람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창재와 함께 일했었던 혜영은 그를 잘 알고 있다. 혜영 역시 그 다혈질 성격을 참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어쩌겠어. 이미 다 짜여 진 기획을.” “마음 같아선 다 엎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야.”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혜영은 한숨을 내쉬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왜? 언니도 무슨 문제 있어?” “이창재보다 더 문제적인 성격의 소유자이지.” 그 말에 곰곰이 생각하던 수현은 커진 눈으로 혜영을 바라봤다. “그. 손석훈 PD 말하는 거야?” 혜영은 수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하고 같이 한다는 소리는 들었었는데.” “보통 성격이 아니야. 뭐든지 자기가 하자는 대로 해야 하는 그런 이기적인 성격.” 그 때 옆 테이블에 누군가가 털썩 주저앉았다. “어, 장재희.” 옆에 앉은 건 수현의 동기인 재희였다. 수현의 부름에 재희는 쳐진 몸을 이끌고 자리를 옮겼다. “넌 또 왜 그래?” “내가 참. 나보다 한참 어린 녀석한테.” “어린 녀석?” “이 번에 히어로라는 드라마로 대박 친 PD말이야.” “아, 정주한 PD.” “아니 글쎄, 새파랗게 어린 게 누구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하여간 밥맛 떨어진다니까.” 그렇게 자신들이 겪은 일들을 얘기하다보니까, 이래저래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PD들과의 실랑이가 이만저만 아니라는 것. 앞으로 더 많은 시간동안 함께 해야 할 텐데 말이다. Scene Number. 2 결국 그 다음 날, 수현에게 연기자들로부터 연락이 왔다. 회의에 참석해주었으면 한다고 말이다.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문 경우였다. 연기자들이 작가를 기다리는 것 말이다. 하지만 수현에게는 그저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었다. 이런 일은 종종 수현에게 있었던 일이었으니까. 회의가 시작되고, 연기자들과 스텝들과의 이야기가 오랫동안 이어졌다. 아마 이 회의가 끝나자마자 드라마를 만들게 될 것이다. 몇 달은 눈 붙일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쁠 거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회의실의 분위기는 한마디로 뜨거웠다. 일을 하고 싶어 안달난 사람들이 모인 곳처럼 말이다. “그럼 이상 회의는 이 것으로 마치도록 하죠.”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제각기 인사를 하며 회의실을 빠져 나가는 사람들. 수현도 자리에서 일어나 대본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강수현씨.” 창재의 목소리가 수현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무슨 일이죠?” 창재는 수현의 앞에 멈춰 섰다. 그러더니 헛기침을 연신 하다 말을 내뱉었다. “어제 내가 너무 지나친 말은 한 것 같더군요. 사과하겠습니다.” “사과요?” 수현은 창재를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창재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선 수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뭐, 강수현씨가 좋던 싫던 앞으로 우린 스텝입니다.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일하는…….” 수현은 손을 잡지 않고 창재를 계속해서 바라봤다. 창재는 민망해진 손을 내리고선 회의실을 황급히 빠져 나갔다. 한참동안 창재가 나간 곳을 바라보던 수현은, 그제야 살짝 웃어 보이며 회의실을 빠져 나왔다. 작가실로 향하는 길, 수현의 PDA가 주머니 속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액정을 바라보더니 수현은 곧장 전화를 받았다. “선배.” 수현에게 전화를 한 건 혜영이었다. [지금 어디에 있어?] “이제 회의 끝나고 가는 중이야.” 그 말이 끝나고 잠시 동안 정적이 감돌았다. 그러다가 혜영의 말이 다시 시작되었다. [국장한테 연락 왔어.] 그 말에 걸음을 계속해서 옮기고 있던 수현이 멈춰 섰다. “뭐라고?” [재희까지 포함해서 우리 셋한테 만나자고.] “만나자고?” ＊＊＊＊ 국장실 문을 열고 들어선 세 사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드라마 국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다들 오셨네.” 세 사람을 반갑게 맞이하는 드라마 국장. 하지만 셋은 그리 그 모습이 달갑지 않은 듯 표정이 밝지 않다. 국장의 권유에 소파에 앉은 세 사람. “바쁠 텐데 내가 불러 미안하게 됐군요.” “……아닙니다.” “그럼 다행이네요.” 넉살 좋아 보이는 웃음 소리였다. “세 분 모두 아실 겁니다. 이번에 저희 KNB방송국에서 개편을 맞이해 세 분께 기대가 많다는 걸…….” 세 사람은 그 말에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알아서들 잘 해주시라 믿습니다.” 국장의 그 말에는 무언가 가시가 담긴 듯 했다. 예쁜 장미에 가시가 돋아 있는 것처럼, 저 말에도 건들면 피가 철철 흐를 것 같은 그런 느낌이……. “월화, 수목, 토일. 모두 6일입니다. 단 하루라도 여러분의 드라마가 실패해서는 안 됩니다.” 국장의 표정은 너무나 표독스러웠다. 세 사람은 일그러진 표정을 애써 숨기며 국장을 외면했다. 국장의 말처럼 세 사람은 각자 이틀 씩 자신의 드라마를 만들어야 한다. 지금까지 방영 중이던 드라마들이 하나씩 끝나면서, 이 세 사람이 이 곳. KNB방송국으로 오게 되었다. 한꺼번에 이렇게 드라마들이 끝난 적은 극히 드물다. 방송국에서는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이런 선택을 하게 된 것이었고, 또한 시청률 대박 작가라는 타이틀과 함께 능력 있는 작가들을 찾았다. 그리고 KNB방송국에서 믿고 있는 세 작가들이 바로 강수현, 임혜영, 장재희 작가이었다. 세 사람이 쓴 드라마들은 모두 승승장구 했고, 시청률도 평균 30% 이상으로 대박을 쳤다. 역시 KNB방송국도 그 대박을 꿈꾸는 것이었고 말이다. “그럼 바쁠 테니 이만 가 봐요.” 국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세 사람은 인사를 하고 난 뒤, 국장실에서 도망치 듯 빠져 나왔다. 한숨을 내쉬고선 걸음을 옮기던 세 사람. 작가실로 향하는 길에 재희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한 채로 두 사람에게 물었다. “만약에 시청률이 나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재희의 물음에 수현과 혜영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리고 이내 혜영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을 해주었다. “‘시청률 대박 작가, 무너지다.’라는 헤드라인으로 기자들에게 씹히겠지.” “…………” “또 스카우트 제의도 한동안 뜸해질 거고, 저 잘난 국장에게 싫은 소리를 들어야겠지.” 수현과 재희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 때 잘나가던 선배가 한 번의 실패로 인하여, 다시 재개하지 못한 경우도 봤었던 그들이었기 때문에 더욱 더 공감했다. “꼭 시청률이 높다고 해서 좋은 드라마는 아닌데.” “하지만 그게 현실이잖아.” “투자자들과 연기자들에게는 그게 낙인 거지.” “맞아. 그게 정말 현실이야.” 재희는 그 말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혜영은 마지막으로 정말 공감대를 제대로 형성하는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우리가 먹고 살 수 있도록 좌지우지 하는 것 또한 그 몇 안 되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거야.” Scene Number. 3 벌써 세 사람이 드라마 제작을 시작했다는 기사들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거기에 초호화 캐스팅, 또 대박 드라마를 제작했던 PD들까지. 모두들 KNB방송국에 눈을 맞추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 중, 그 누구도 기사를 반가워하지 않았다. 작가이고 PD이기 때문에. 눈을 즐겁게 하는 연예인이 아니기 때문에……. “이건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 주한은 신문을 내던지며 말했다. 기자는 주한의 행동에 놀란 듯 눈이 커졌다. “왜 그러시는 건지…….” “전 연예인이 아닙니다. 이렇게 얼굴, 이름 팔아가면서 작품하고 싶지 않단 말입니다.” 주한의 말이 끝날 때 쯤, 기자실 문이 열렸다. 주한이 들고 왔던 신문을 똑같이 들고 들어오는 건, 다름 아닌 재희였다. 재희의 등장에 주한은 고개를 돌렸다. “앞으로는 이런 기사 없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돌아서서 기자실을 빠르게 빠져나왔다. 이제 막 들어온 재희는 멍하니 서있는 기자를 바라보더니, 주한의 뒤를 쫓아 기자실을 나왔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주한을 재희는 느린 걸음으로 따라갔다. 그러던 중, 재희는 멈춰서 서 주한에게 물었다. “좋아할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봐요?” 재희의 질문에 주한이 멈춰 섰다. “뭐라구요?” 그리고 돌아서서 재희와 눈을 마주했다. “요즘 PD들. 솔직히 작품 잘 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니까요. 당신도 별반 다를 바 없을 것 같아서요.” 주한은 날카로워진 눈빛으로 재희를 바라봤다. 하지만 재희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젊었을 때 마음껏 누려요. 늙어서는 이런 이슈,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테니까.” 재희는 들고 있던 신문을 구겼다. 재희의 행동을 지켜보던 주한은 인상을 찌푸렸다. “장재희씨.” 주한의 낮은 목소리에 재희는 살짝 긴장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이내 당당하다는 듯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당신 태도부터 고쳤으면 합니다.” “뭐, 뭐라구요?” “잘난 척하지 말고, 자신을 낮추는 법부터 배워야 하는 것 같네요.” 주한은 재희를 바라보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재희는 주한의 말이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봐요. 정주한씨!” ＊＊＊＊ “신문 봤어요?” “네.” 관심이 없는 듯 대충 대답하는 석훈. 혜영은 그런 석훈을 잠시 노려보더니 옆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내일부터 촬영에 들어갈 생각입니다.” 석훈은 혜영에게 파일을 넘겨주었다. 혜영은 파일을 열어보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던 석훈은 고개를 돌려 자신이 하고 있던 일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옆에 계속 앉아 있던 혜영은 민망한지 고개를 돌렸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있던 두 사람. “안 갑니까?” 석훈이 혜영에게 물었다. 혜영은 당황했는지 눈이 커졌다. “가, 갈 거예요.”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난 혜영. 석훈을 계속해서 바라보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저기요.” “네.” “어떻게 생각해요?” “뭘 말입니까?” 석훈은 혜영의 질문에 하던 일을 멈추었다. “기사 읽고 나서 뭐 느낀 거 없어요? 힘이 난다거나,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 안 들어요?” 석훈은 그 말에 쓰고 있던 안경을 벗었다. 그리고 혜영을 잠시 바라보더니 쓴 웃음을 지어보였다. “임혜영씨는 그런 생각이 듭니까?”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요? 그런 이슈거리가 되었다면 그만한 가치가 되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혜영은 자신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말을 번복할 생각도 없었고 말이다. “그 것 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군요.” “뭐라구요?” “그깟 기사 때문에 당신이 만든 드라마가 상품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군요.” “지, 지금 말 다했어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혜영은 커진 눈으로 석훈을 응시했다. “내가 만든 드라마가 상품이라니요? 난, 그런 생각 단 한 번도 한 적 없어요.” 혜영은 커다란 눈으로 석훈을 바라봤다. 석훈은 혜영의 눈을 바라보며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자만심과 욕망이 당신의 드라마를 상품으로 만들고, 당신을 작가가 아닌 광대로 만드는 겁니다.” 석훈은 그 말을 끝으로 그 곳을 빠져나왔다. 혜영은 석훈의 말을 듣고선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가슴이 벅차 오는 느낌이 들었고,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 혜영은 입술을 꾹 깨물며 주먹을 쥐었다. “자만심? 욕망?” 기가 막힌다는 듯 혜영은 웃어보였다. “내가 작가가 아니라 광대라고?” 그리고 혜영은 석훈이 나간 곳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서있지 않은 그 곳을 바라보던 혜영의 눈에서, 한 방울의 눈물이 떨어졌다. 하지만 그 눈물이 떨어진 것을 혜영조차 알지 못했다. 오로지 원망과 증오가 가득했기 때문에……. “내가 만든 드라마가 진짜 드라마가 되는지, 상품이 되는지……. 그리고 내가 작가가 되는지, 광대가 되는지……. 보여주겠어.” Scene Number. 4 다음날, 모든 촬영은 예정대로 이루어졌다. 수현과 창재의 월화 미니 시리즈 ‘프라이드’ 혜영과 석훈의 수목 드라마 ‘굿바이 데이’ 재희와 주한의 주말 드라마 ‘아틀란티스’ 드디어 KNB방송국의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다. ＊＊＊＊ “안녕하세요.” 촬영장에 도착한 수현을 가장 먼저 반겨주는 건 다름 아닌 진우였다. 진우는 ‘프라이드’의 남자 주인공을 맡은 연기자로서, 한국을 넘어 아시아에서 사랑을 받고 있는 한류스타이다. “네. 안녕하세요.” 수현은 경직된 표정으로 진우를 바라봤다. 진우는 민망했는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수현은 걸음을 옮겨 창재의 옆으로 향했다. 창재는 살짝 고개를 돌리더니 수현이 온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서는 연기자들과 스텝들이 모두 준비가 되었는지를 체크했다. 몇 분이 지나고 난 뒤, 모든 준비가 끝났다. 창재의 큐 사인과 함께 촬영이 시작되었다. 꽤나 순조롭게 진행되는 촬영. 연기자들의 호흡, 대사, 감정, 표정……. 모든 게 너무나 완벽 그 자체였다. 창재도 연기가 마음에 들었는지 오케이를 외쳤다. 그런데 그 때 수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유유히 걸음을 옮겨 진우의 앞으로 걸어갔다. “이 장면에서 이렇게 대사해 봐요.” 수현은 볼펜을 꺼내들고선 대본 위에 글씨를 써내려갔다. 진우는 수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수현은 볼펜을 집어넣고 돌아서 서 창재에게 말했다. “다시 한 번 가죠.” 모든 스텝들은 그 말에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고, 작은 목소리로 웅성거리며 떠들기 시작했다. “촬영은 잘 됐습니다.” 창재는 스텝들을 대표해 수현에게 말했다. 이 장면에 시간을 더 낭비할 수는 없다. 아직 촬영해야 할 분량은 너무나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하지만 미흡한 대사를 내보내기는 싫어요.” 수현의 지나친 욕심이었다. 완벽해보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생기는 부담감 때문이었다. 꼭 대박 드라마를……. 히트를 쳐야 한다는 그런 부담감……. ＊＊＊＊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일어나는 사고를 촬영해야 한다는 건 꽤나 곤욕스러웠다. 우선 시청에 연락을 해야 했고, 모든 안전 장비와 시설을 갖춰야 했기 때문이다. 단 한 번의 NG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 만큼 이 한 장면에 들어간 돈은 어마어마했다. 가히 블록버스터에 비교할 정도로 말이다. 한국 드라마 역사상 TOP3 안에 들어갈 정도의 액수였으니까……. “큐!” 석훈의 큐 사인이 떨어지자 촬영장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연기자들은 또 다른 자신을 불러내었다. 그리고 무사히 NG없이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 스텝들은 모두 가슴을 쓸어 내렸다. 만에 하나 사고가 생겼더라면 드라마가 시작되기도 전에 촬영사고라는 낙인이 찍힐 테니 말이다. 이슈가 된다는 것은 어쩌면 드라마의 대박을 알리기도 하는 것이지만, 이런 이슈는 금세 식기 마련이다. “수고하셨습니다.” 연기자들은 스텝들과 인사를 하고 난 뒤, 다음 촬영을 위해서 재빠르게 움직였다. 스텝들도 서둘러 촬영 장비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촬영 잘 된 것 같아요?” “100%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80%는 잘 된 거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석훈은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목을 움직이며 걸음을 옮겼다. 그런 석훈의 뒷모습을 보면서 혜영은 주먹을 쥐었다. 자신에게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하던 석훈에게서, 그의 자만심을 보았기 때문에……. ＊＊＊＊ “그런 말 없었잖아요.” 연기자와의 실랑이가 일어났다. “수진씨. 어제 분명히 말씀 드렸잖아요. 오늘 그 촬영하겠다고.” “언제요? 난 못 들었어요.” 촬영은 거의 상반신을 노출해야 하는 장면이었다. 연기자가 두려워하는 이유는 바로 이미지 때문이었다. 지금까지의 이미지와 다른 변신을 해야 한다는 것이 두려워서……. “그럼 촬영 안 할 겁니까?” 주한은 딱 잘라 물었다. 수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큰 눈으로 주한을 바라봤다. 두 사람을 바라보던 재희는 한숨을 내쉬고선 수진의 매니저에게 말했다. “촬영 연기 할 테니까, 설득해주세요.” “아, 네.” 재희의 말에 황급히 수진을 데리고 자리를 피하는 매니저. 재희는 주한을 바라보더니 물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잖아요. 어차피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인데.” “하기 싫다면 바꿀 수도 있죠.” 주한의 말에 재희의 눈이 커졌다. “뭐라구요?” “하기 싫은 사람. 억지로 데려다가 연기하게 하고 싶은 생각 없습니다. 이 드라마에 캐스팅 되고 싶었던 연기자들은 줄을 서 있단 말입니다.” “이봐요. 정주한씨. 당신 뭘 믿고 그렇게 대담한 거죠?” 재희는 주한을 커다란 눈으로 응시하며 물었다. 주한은 굳게 입을 다물고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이가 어려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아직 경력이 부족해서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재희의 말에 주한의 인상이 구겨졌다. 하지만 재희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대박이 전부는 아니라구요. 한 번 대박이 영원한 대박이 아니라는 거 명심하라 이 말입니다.” Scene Number. 5 “잠시 만요!” 엘리베이터 사이로 발을 집어넣은 혜영. 손 위로 높게 쌓인 책들 사이로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저기 10층 좀 눌러주실래요?” “네.” 혜영의 부탁에 탑승자는 순순히 10층 버튼을 눌러주었다. “감사합니다.” 그 말을 하고난 다음에 혜영은 고개를 돌려 옆 사람을 바라봤다. 커다란 키에 익숙한 얼굴의 남자. 그 남자를 바라보던 혜영의 눈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어!” 외마디 비명과 함께 혜영의 손 위에 있던 책들이 우르르 떨어졌다. 떨어진 책을 황급히 줍기 시작한 혜영. 그 모습을 보던 남자도 이내 고개를 숙여 혜영을 도와주었다. 책을 줍던 혜영의 손이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이네요. 임혜영씨.” 혜영의 앞에서 살짝 웃어 보이는 남자. 그는 혜영이 3년 전 극본을 쓴 ‘머스트’의 남자 주인공이자, 혜영와 1년 반 정도를 연인으로 지냈던 동건이었다. 그 두 사람은 이미 1년 전 결별을 했고, 그 이후 처음으로 대면하는 것이었다. 책을 주어든 동건은 혜영에게 책을 건넸다. 동건의 눈을 외면한 채 혜영은 책을 받았다. “드라마 새로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 들었는데, 정말인 것 같네요.” “……이 쪽은 소식이 너무 빨라서 짜증나는 곳이죠.” 혜영은 책을 다시 쌓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월화 드라마였었나요?” 혜영은 그 질문에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선 대답했다. “아니요. 수목 드라마에요.” 그 말에 살짝 멈칫한 동건. 하지만 이내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우리가 인연이긴 한가보네요. 나도 수목 드라마인데…….” “수, 수목 드라마라니요?” “소식이 빠르다고 하더니, 못 들었나보네요. 나 CBS방송국에서 드라마 하게 되었어요.” 그제야 기억이 나는 혜영이었다. 작가실에서 꽤나 이슈가 되었던 이야기. 몇 년 전만 해도 드라마 왕국이라고 불리던 CBS방송국에서 특별드라마를 만든다는 소식을 말이다. 그 것도 혜영과 같은 수목 드라마로 말이다. “그, 그런데 여긴…….” “아……. 잠깐 만날 사람이 있거든요.” 혜영은 굳은 표정을 한 채로 고개를 돌렸다. “앞으로…….” 그 때 10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혜영은 돌리고 있던 고개를 앞으로 반드시 고정했다. 그 순간 혜영의 눈에 들어온 사람. 그건 석훈이었다. 혜영은 당황한 표정으로 황급히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리고 석훈을 지나쳐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임혜영씨!”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던 동건이 혜영을 불렀다. 걸어가던 혜영도, 그 자리에 서있던 석훈도. 동건에게로 눈을 돌렸다. “앞으로 잘 해보죠.” 그 말에 놀란 표정으로 돌아서는 혜영이었다. ＊＊＊＊ “저 할게요. 그러니까 시켜주세요.” 전날 까지만 해도 노출은 절대로 할 수 없다며 말하던 수진. 어느새 주한의 앞에까지 찾아와 하겠다고 한다. “갑자기 왜 그러는 거죠? ……혹시 내가 연기자를 교체하겠다고 발언을 했기 때문입니까?” 주한의 말에 수진은 고개를 숙였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던 수진은 이내 대답했다. “솔직히 그런 마음 없지는 않아요.” “그럼 돌아가세요.” “네?” 주한은 수진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수진에게 주한은 말했다. “그런 마음 다른 드라마에서나 하시기 바랍니다. 난 겁먹은 연기자 필요 없습니다.” 주한은 수진을 지나쳤다. 수진은 인상을 찌푸리더니 눈을 이리저리 굴려가며 어떻게 이 상황을 대처해야하는지 고민했다. 그리고 벌써 많이 떨어진 주한을 불러 세웠다. “감독님!” 주한은 가던 걸음을 멈춰 섰다. “겁 안 먹었어요. 단지 그런 마음도 있다는 거예요. 하지만 그 역할 놓치고 싶지 않아요. 오랜만에, 아니 처음으로 ‘하고 싶다, 정말 미치도록 하고 싶다.’ 라고 생각한 역할이에요. 그러니까 기회를 주세요.” 수진은 그 말을 하고 난 뒤, 고개를 숙였다. 주한에게 하는 부탁의 인사였다. 그 때 그 곳의 건너편을 지나가고 있던 재희의 눈에 그 장면이 포착되었다. “어…….” 재희는 커진 눈으로 수진과 주한이 서있는 그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놀랄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수진의 성격은 이미 방송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그런 성격이었으니까……. 그런데 허리가 꺾이도록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 그것도 재희가 어리다고, 경력 부족이라고 그렇게 무시하고, 또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주한에게……. 이해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 수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큰 소리로 외쳤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나도 잘 모르겠어. 국장이 그렇게 지시했다고만…….” “그,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아직 드라마는 시작도 안했잖아요!” 수현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으려 했지만 컨트롤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어떤 작가가 이런 상황에 감정을 조절할 수 있겠는가. “혹시, 기사 때문에 그러는 거래요? 그건 어디까지나…….” “국장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거 알잖아. KNB방송국에 해가 되는 일이라면 극구 사양하고, 반대하는.” “이해 못하겠어요. 국장 만나야겠다구요.” “진정해. 지금 만나서 뭘 하겠다고…….” “그래도 이대로 있을 수는 없어요. 이건 날 무시하는 행동이라구요!” 수현은 작가실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곧바로 드라마 국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국장실 앞에 도착한 수현은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 잠시 동안 국장실 문을 바라봤다. 수현은 입술을 꾹 깨물고선 다시 걸음을 옮겼고, 이내 국장실 문을 열었다. “국장님!” Scene Number. 6 “마침 잘됐군요. 부르려던 참이었는데.” “공동 집필이라는 말……. 사실인가요?” 국장은 수현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겨 소파에 앉았다. “우선 앉아서 얘기하죠.” 국장의 침착함에 오히려 더 화가 치솟아 오르는 수현이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신 거죠? 첫 제작될 때는 이런 말씀 없으셨잖아요.” “사람의 마음이 누구보다 쉽게 바뀐다는 거 잘 알잖아요.” “……호, 혹시 기사 때문에 그러시는 거예요? 그 기사라면 걱정하…….” “아니라고는 말 못합니다.” 국장의 말에 수현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그 순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이미 KNB방송국을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첫 번째가 되었다는 것을……. “그 기사에 강수현작가의 옛 작품들을 보게 되었죠. 흥행이라... 그 땐 상상도 못했었지 않습니까. 확실히 반짝 스타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반짝 스타라니요?” “강수현작가님, 지금껏 평균 시청률 30% 이상인 드라마 얼마나 되시죠?” 국장의 물음에 수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굳어진 표정으로 국장을 바라봤다. 국장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더니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KNB방송국에서 살아남으시려면 어쩔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국장이 그 말을 마친 뒤, 국장실의 문을 누군가가 두드리기 시작했다. “들어오세요.” 국장의 말과 동시에 문두드림이 멈추고, 문고리가 돌아가면서 문이 열렸다. 누군가의 모습이 들어오면서 수현의 눈이 커졌다. “어서와요.” 국장실에 들어 온 그 사람은 바로 유정이었다. ＊＊＊＊ “너랑 나랑 참 인연인 가봐? 이렇게 다시 만나고…….” “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그 성격, 여전하네.” “……왜 하필 너인 거지?” 수현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유정을 바라봤다. 유정은 살짝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수현의 물음에 대답했다. “어쩔 수 없는 거잖아. 능력이 안 된다면 도움이라도 받아야하는 거…….” “뭐?” “솔직히 나도 이 프로젝트. 별로 마음에 안 들었어. 근데 알아보니까 꽤 흥미롭더라고. 잘 나가는 PD, 그리고 대박 출연진이라……. 공동 집필이라도 난 할 만 할 것 같던데?” “그래서 하겠다고 한 거야?” “어. 너도 오히려 득이 된 셈 아닌가? 네가 전 작품 만큼만이라도 노력해준다면 우리 둘이 쓴다는 이유만으로도 시청률은 대박일 거야. 그리고 네 경력에도 도움이 될 거고.” 수현은 기가 막힌 듯 웃어보였다. “그러니까 나보고 조용히 하고 따라오라 이 말인 거니?” 그 때 반대편에서 이야기를 하며 걸어오던 혜영과 재희의 눈에 두 사람이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서둘러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슨 일이야?” 혜영의 목소리에 수현과 유정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리고 혜영과 재희의 눈에는 유정이 들어왔다. “너, 너…….” 혜영은 커진 눈으로 유정을 바라봤다. “오랜만이네요.” “……네가 여기 왜 있어?” 재희는 유정을 노려보며 물었다. “나도 이제 여기서 일하게 됐거든.” “무, 무슨 소리야? 개편 이미 끝났어.” 그 말에 유정은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유정의 그런 행동을 보고 있던 혜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여기 있는 이유는…….” “문유정.” 수현은 유정에게 말하지 마라는 듯 유정을 붙잡았다. 하지만 유정은 수현의 손을 뿌리치고선, 혜영과 재희를 흔들림없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 이유는 월화 미니시리즈의 작가가 되었기 때문이야.” ＊＊＊＊ “그게 무슨 소리야? 문유정이 아까 말한 게 사실인 거야?” 수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두 손으로 머리를 붙잡고 있을 뿐이다. “야, 강수현!” “……나도 몰라.”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수현은 머리를 붙잡고 있던 손을 내리고선 말했다. “……국장이 그런 거야. 내 실력 못 믿어서.” “뭐?” “아직 시작도 안 했잖아.” “KNB방송국의 첫 희생자……. 강수현.” 수현과 유정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절친한 친구로 지냈었다. 같은 꿈을 키우고 있었고, 또 서로 잘 통했기 때문이다. 결국 두 사람 모두 작가가 되었다. 하지만 그 이후, 두 사람의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다. 이유가 무엇인지 말하게 된다면... 그건 문유정이라는 작가가, 강수현이라는 작가의 글을 빼어갔기 때문이었다. 대학 시절 수현은 이미 한 대본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현은 유정을 믿었기 때문에, 그 대본의 일부를 보여주었다. 그게 끝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몇 년 뒤, 수현이 써놓았던 그 대본과 너무나 똑같은 전개방식과, 인물들이 드라마로 제작되어 대중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 때 당시 수현이 유정에게 물었다. “왜……. 내 작품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리고 유정의 그 대답으로 수현과 유정은 친구 관계를 끊게 되었다. “네가 보여주지 못한 것뿐이야. 그리고 이미 내 것이 되었고.” 그 이후로도 유정은 계속해서 승승장구 해갔다. 하지만 수현은 약간의 굴곡을 보이며 그저 적은 관심을 받는 작가가 되었었다. 그러던 중 한 작품으로 인해 스타덤에 오르게 되었고, 지금은 A급 작가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 비록 유정만큼은 아니지만……. “왜 하필, 문유정인지 모르겠다.” Scene Number. 7 “작가가 두 명이라니?” “선배가 몰랐어? 선배 드라마인데…….” “그게 무슨 소린데? 작가가 두 명이라면 공동 집필이라는 거야?” “그렇지. 이번에 문유정작가가 같이 하기로 했다는데……. 선배, 진짜 몰랐던 거야?” 주한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창재의 표정이 굳어졌다. 갑작스러운 공동 집필에 관한 이야기. 어떻게 PD에게도 말하지 않고 할 수가 있는 거지? “혹시 누가 제의 한 건지 알 수 있을까?” “이번에 들어 보니까 국장이 그런 거라고 하더라고.” “……국장이?” 국장이 그랬다는 사실에 창재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 누가 되었던지 창재에게 말을 했어야 했다. 분명 창재는 이 프로젝트에 참여 된 스텝이니까. 그 때 창재와 주한의 앞에 누군가가 멈춰 섰다. 바닥에 비춰진 그림자에 창재와 주한은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세요. 이창재씨.” 두 사람 앞에 서 있는 건 바로 유정이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딱 그 셈이다. “누구시죠?” “앞으로 같이 일하게 된 문유정이라고 합니다.” 그 말에 창재와 주한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있던 주한은 엉거주춤 일어섰다. “어, 어……. 그럼 선배. 나 먼저 가 볼게.” 주한이 자리를 비키자 유정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 앉았다. 창재는 좋지 않은 표정으로 유정을 바라봤다. “갑자기 공동 집필이라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 “PD이신데 모르셨다보네요. 이번에 국장님께서 저를 부르셨거든요. 도움이 필요하다고.” 주한의 말이 사실이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유정은 창재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창재는 유정의 손을 잡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은 채로 유정에게 물었다. “왜 하필 이 드라마인 겁니까?” “……네?” “강수현작가랑 좋지 않은 인연이라는 거 압니다. 아마 문유정, 당신이 벌인 표절 사건 때문이었죠.” 유정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져 갔다. “안 좋은 소문 퍼트린 강수현작가 무시하고 짓밟는다고 국장에게 말했습니까? 그래서 국장이 알았다고 하던가요?” “이, 이창재씨.” “문유정씨의 외삼촌이 국장이라는 것도 압니다. 지금 뒤에 든든한 후원자가 있으니 마음껏 즐겨보겠다고 온 겁니까?” “그, 그걸 어떻게…….” “숨긴다고 해서 숨겨진다고 생각합니까? 그 것도 소문이 사람을 죽이는 이곳에서?” 창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유정이 있는 그 곳을 다시는 돌아보지 않았다. ＊＊＊＊ 수현의 일을 듣고 나니까 혜영까지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나마 정붙이고 잘 지내는 선후배사이인데. 친동생같은 수현이 그렇게 됐다는 게 내심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이봐요. 임혜영씨.” “…………” “임혜영씨. 정신 안 차립니까!” 석훈이 소리를 지르자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혜영은 커진 눈으로 석훈을 바라봤다. “네?” “지금 뭐하자는 겁니까. 회의 중에는 딴 생각 하지 말라고 했지 않습니까!” 석훈의 언성이 점점 높아져 갔다. 모든 스텝들이 다 있는 그 곳에서 그렇게 핀잔을 주었어야 싶기도 하다. 그래도 혜영은 오랜 경력도 있고, 또 능력으로 인정 받는 A급 스타 작가인데 말이다. “……오늘은 이만 하죠.” 석훈은 파일을 내리치더니 회의실을 가장 먼저 빠져나갔다. 혜영은 입술을 깨물더니 석훈이 나간 문을 바라봤다. 스텝들은 혜영에게 인사를 하고 난 뒤, 회의실을 조용히 빠져나갔다. “손석훈.” 혜영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회의실을 나갔다. ＊＊＊＊ “말 하지 않겠다는 겁니까?” “……말해봤자 바뀌는 건 없어요.” 수현의 힘없는 목소리에 창재는 인상을 찌푸렸다. 항상 당당하던 그녀의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다. “그럼 당신 이름 옆에 문유정이라는 세 글자가 쓰여 져도 괜찮다는 말입니까? 좋은 의미도 아니고, 당신을 무시하고 짓밟는 의미인데?” 수현은 창재의 말에 잡고 있던 펜을 놓쳤다. 수현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무시당한 다는 걸 누구보다도……. 하지만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저 10초 안 돼 지나가는 그 이름을 누가 알겠는가. 공동 집필이라고 한다면, 그저 ‘아, 그래?’ 이런 반응으로 끝날 텐데……. 시청자를 위해 쓰는 것이지만, 항상 그들로 인해 상처 받는다. “어차피 끝났잖아요. 시청자들은 이 드라마를 공동 집필로 알고 있잖아요. 내가 거기에다 재를 뿌릴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변하지 않는 건, 내일이 바로 첫 방송이라는 것이다. Scene Number. 8 드디어 KNB방송국의 모든 드라마들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첫 시작을 알리는 것은 바로 수현과 창재였다. 하지만 두 사람의 기분은 그리 밝지가 못하다. 새롭게 등장한 유정때문이기도 했지만, 옆 방송국인 CBS에서도 꽤나 스케일이 큰 드라마를 제작했기 때문이다. “시청률 어느 정도까지 예상할 수 있겠습니까?” “첫 방영이니까 15%에서 20%정도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케이블 방송들과 타 방송국의 시청률을 생각해본 결과로 말입니다.” “뭐, 무난한 시작이기는 하지만 대작 드라마인데 너무 약하지는 않을까요?” 창재의 말에 살짝 웃어 보이며 다시 되묻는 국장. 창재는 그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쪼록 오늘 지켜보겠습니다.” 국장의 말이 끝나고 창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국장실을 나가려던 찰나, 국장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 말을 내뱉었다. “문유정작가, 공동 집필…. 일부러 그러신 겁니까?” 창재의 물음에 소파에서 일어난 국장은 다시 소파에 앉았다. “일부러 그랬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창재의 말에 국장은 안경을 치켜 올렸다. 그리고 창재는 국장을 바라보더니 대답했다. “언제까지 숨기시려고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문유정작가와 국장님 사이 알고 있습니다.” 놀란 표정의 국장은 커진 눈으로 창재를 바라봤다. “그, 그걸…….” “돌고 도는 이야기에 끝날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더군요. 그리 많은 사람들이 알지는 않습니다. 아는 사람이 1%라면 모르는 사람이 나머지 전부이니까요.” “………” “하지만 그거 알아두십시오.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고 해도, 이곳에서는 낙하산, 별로 안 좋아한다는 거 말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죠?” “저나, 저희 드라마 스텝, 강수현작가를 비롯하여 KNB방송국에 소속되어있는 모든 이들에게 반감을 사실 수도 있다는 말씀…… 드린 겁니다.” ＊＊＊＊ “드디어 오늘이네요.” “왜 또 온 거예요?” 혜영은 자신의 앞에 앉은 동건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동건은 혜영을 바라보더니 웃어보였다. “같이 저녁이나 하려고 왔는데…….” “……그 쪽하고 저녁 먹을 시간 없어요. 바쁠 텐데 이만 가보시죠.” 혜영은 동건의 옆을 지나쳤다. 그 때 동건의 손이 혜영의 손목을 붙잡았다. 커진 눈으로 동건을 바라보던 혜영은 황급히 손을 뿌리쳤다. “뭐, 뭐하는 짓이에요!” “할 얘기가 있는 겁니다.” “네?” “저녁이라도 먹으면서 얘기하고 싶지만 원하지 않으니까 여기서 하도록 하죠.” 동건의 진지한 모습에 혜영은 굳어진 표정으로 동건을 바라봤다. “……왜 하필 나에게 오지 않았던 거죠?” “뭐가…….” “출연 제의 말입니다. 방송국 관계자에게 들어보니까 원래 캐스팅이 나였다고 하더군요. 이미 거의 확정이었고 말입니다.” 그 말에 혜영은 동건의 시선을 외면했다. “왜 날 캐스팅하지 않은 겁니까? 사적인 이유 때문에?” “……없다고는 말 못해요. 하지만 그 역할은 지금 연기하고 있는 배우가 훨씬 잘 소화할 거라고 판단했어요. 그리고 그 선택, 난 후회 안 해요.” 그 말에 동건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럼 내 선택도 후회 하지 않겠군요.” “………” “내가 저번에 말했죠. CBS방송국에서 수목드라마 하게 되었다고…….” “그, 그럼…….” “사적인 이유뿐이었다면 날 캐스팅하지 않았다는 걸 이해했겠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네요. 당신의 그 선택, 실수했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싶어졌다구요.” ＊＊＊＊ “그럴…… 리가요.” “정말입니다.” 달랑 종이 한 장을 건네는 주한, 하지만 그 종이에는 놀랄 만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아닐 거라며 콧방귀를 뀌던 재희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대한민국의 모든 TV를 통해 수현과 창재의 ‘프라이드’가 방송이 된 이후, 딱 1시간 만에 시청률이 공개되었다. “마, 말도 안돼요. 이거……. 진짜인 거예요?” “나도 못 믿었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싶기도 하구요.” “하지만 이건…….” 그야말로 시청률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모두가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너무나……. “그렇게 방송국에서 투자했는데…….” “투자를 많이 한 것도 중요하지만, 이건 수현이의 작가 인생이 달린 문제에요. 국장은 공동 집필하기로 했다는 걸 아주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수현이를 더 힘들게 할 거라구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게 무슨 소리야?” 말을 하고 있던 재희의 눈이 커지고, 옆에 서 있던 주한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 두 사람 앞에 서 있는 것은 바로 그들이 얘기하고 있던 수현이었다. “수, 수현아.” “그게 무슨 말이야? 작가…… 인생이 달렸다니?” 주한의 표정이 굳어지고, 재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수현의 눈에 재희의 손에 들려진 종이가 들어왔다. “……그게 뭐야?” Scene Number. 9 “아, 아무 것도 아니야.” 재희는 종이를 뒤로 숨겼다. 수현은 고개를 돌려 주한을 바라봤다. 주한은 당황한 표정으로 수현의 눈을 피했다. “뭔데…….” 수현은 그제야 무엇인지 깨달았다. “……시청률 나온 거야?” “………” 수현은 재희를 바라보더니 재희에게로 가까이 걸어갔다. 그리고 재희가 숨기고 있던 종이를 빼앗아 들었다. 그건 수현이 예감한 대로 시청률이 나와 있는 종이였다. “프라이드……. 4.2%” 수현은 시청률을 보자마자 종이를 놓았다. 종이가 땅에 떨어지고, 수현은 굳은 표정으로 재희와 주한을 바라봤다. “자, 잘못 나온 걸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재희는 애써 수현을 위로해주었다. 하지만 충격이 컸던 것일까? 수현에게 재희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그저 자만하고, 당당했던 자신을 원망하고 있었다. 그리고 점점 두렵고 무서운 마음이 생기고 있었다.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비하하고, 질타할……. 그런 모습이 눈 앞에 펼쳐졌다. ＊＊＊＊ “저, 그만 두겠습니다.” “그게…….” “……못하겠습니다.” 방송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작가가 드라마를 포기하고 나간다고 하는 것이 말이다. 국장은 안경을 치켜 올리며 물었다.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두렵습니다.” “뭐가 말이죠?” “무엇이든지 다……. 두렵고 무섭습니다.” 수현은 인사를 하고선 국장실을 나왔다. 국장의 책상 위에는 ‘辭職書’가 놓여 져 있었다. 국장실에서 나온 수현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혹시라도 누가 볼까 눈물도 손으로 숨겼다. ‘KNB방송국의 첫 희생자……. 강수현.’ 수현은 그렇게 작가실로 향하고 있었다. ＊＊＊＊ 수현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방송국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기자들은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수현의 이야기를 기사로 써내려갔다. ‘강수현작가, 시청률 저조 후 도피.’ ‘자신 없던 작가, 드라마만 남기고 떠나다.’ 모두들 수현을 비판하는 이야기들뿐이다. 공동 집필에 관한 이야기들도 여럿 있었지만, 그 책임 또한 수현에게로 돌아갔다. ‘실력에 자신 없었기 때문에 공동 집필을 요구했던 것…….’ 이라며. “가, 강수현!” 기사를 읽고 바로 도착한 혜영과 재희. 하지만 수현의 자리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때 도착한 창재. “가, 강수현작가 어디 있습니까?” “……없어요. 수현이가.” 창재는 놀란 표정으로 수현의 자리를 바라봤다. “어디로 갔는지 모릅니까?” “우리한테도 아무 말도 없었어요.” “맞아요. 우리도 갑작스럽다구요.” 창재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작은 목소리로 외쳤다. “국장, 문유정…….” “네?” 재희는 창재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창재는 혜영과 재희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국장이 한 짓일지도 모릅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국장이 한 짓일지도 모른다니…….” “염연히 말하자면 국장이 아니라 문유정작가의 짓입니다.” 창재의 말을 듣고 있던 혜영과 재희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시청률 조작일 가능성이 있다는 소리입니다.” “시청률…… 조작이요?” “자세히 알아봐야겠지만, 이번 일 그렇게 쉽게 넘어갈 일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문유정작가의 공동 집필 건도 말입니다.” “공동 집필 건은 왜…….” 창재는 잠시 망설이더니 대답했다. “……국장의 조카가 바로 문유정작가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에 혜영과 재희는 굳어졌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무도 충격적인 말이어서……. 지금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게 정말……. 사실이에요?” “……네. 모두 사실입니다.” Scene Number. 10 오랜만에 보는 낡은 기찻길, 그리고 넓은 들판. 지금까지 쌓여 있었던 모든 스트레스가 모두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엄마!” 수현은 애써 기분이 좋은 목소리로 엄마를 불렀다. 수현의 목소리에 문을 열고 나오는 엄마. “수, 수현이니?” “안에 있지, 왜 나와.” “정말 온 거야? 일은……. 어쩌고.” “……휴가를 냈어. 엄마 보고 싶어서.” “드라마 이제 시작했다고 그러던데……. 휴가를 냈어?” “괘, 괜찮아. 미리 준비해둬서 상관없어.” 눈물이 가득 맺혀 있었지만 목소리만은 밝았다. 그 이유는 수현의 엄마가…….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기 때문이다. “……들어가자!” 수현은 엄마의 손을 잡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에 들어가니 꽤 쌀쌀한 기운이 돌았다. “엄마, 집이 왜 이렇게 추워. 따뜻하게 좀 하고 있지.” “참을 만해. 그리고 기름 값이 얼만데…….” “기름 값 걱정하지 말고 써. 딸이 돈 버는데 무슨 걱정이야.” 엄마는 수현의 손을 때렸다. “엄마가 돼서 해주는 게 없는데……. 엄만 그런 거 싫다.” “엄마...” 초점이 없는 엄마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엄마는 웃어 보이며 말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배고프겠다.” 서둘러 수현의 점심을 챙기는 엄마. 그 모습을 보면서 수현은 무언가 뭉클해졌다. 눈이 보이지 않아도, 항상 소리 만으로라도 딸이 만든 드라마를 듣는 엄마. 항상 불편한 몸인데도 불구하고 잘 챙겨주는 엄마. 그런데 그런 엄마에게 실망을 안겨주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 “그 소문이 정말이야?” “그렇다니까…….” “아휴, 강수현작가 불쌍하게 됐네. 어쩌다가…….” 순식간에 국장과 유정의 사이가 방송국 내로 퍼지게 되었고, 방송국 관계자들에게 수현의 일이 모두 공개되었다. 그리고 벌써부터 국장에 대한 안 좋은 이미지가 커져, 해임설까지 돌고 있다고 한다. “이봐, 손PD.” “아, 네.” “이번에 국장 해임설 들었는가?” “……네.” “사태가 심각하다고 그러던데, 뭐 아는 거라도 있는가?” 석훈은 어색하게 웃어 보이더니 대답했다. “선배님이 모르시는데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래도 자네가 이PD랑 친분이 있지 않은가.” 이런 이야기는 석훈만 듣는 게 아니었다. 혜영, 재희, 창재, 주한. 이 모두가 이 소리를 듣고 있었다. 수현의 일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냐며 말이다. 하지만 석훈과 같이 모두들 대답했다. 잘 모르겠다는 식으로 말이다. ＊＊＊＊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 “………” “강수현은 드라마 버리고 도망갔어요. 그런데, 아직도 공동 집필로 올리는 이유가 뭐죠?” 유정은 창재를 노려보며 물었다. 하지만 창재의 대답은 유정을 더욱 더 화나게 만들었다. “드라마의 원래 집필은 강수현작가였으니까요.” “뭐, 뭐라구요?” 창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유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도 숨기고 싶었습니까?” “……무,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요.” “공동 집필, 시청률 조작……. 모두 당신이 한 일이라는 거…….” 창재의 말에 유정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이내 침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창재PD.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시, 시청률 조작이라니요? 근거라도 있나요?” 창재는 유정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뇨. 그저 짐작일 뿐입니다.” “그럼 그런 오해 안 해줬으면 좋겠네요. 기분 더럽거든요.” 유정은 돌아서서 문으로 향했다. 그런 유정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창재는 인상을 찌푸리고선 말했다. “근데 그거 압니까?” “………” “이곳에선 어떤 아무리 감추고 싶은 비밀이라도 밝혀진다는 것 말입니다.” “……네?” “조심하라고 전해주십시오. 문유정, 당신 삼촌한테…….” Scene Number. 11 “문유정, 너 정말…….” “다들 바쁘지 않아? 이렇게 나 붙잡고 얘기할 시간도 없을 텐데?” 유정의 말에 혜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사실대로 말해.” “뭘?” “네가 그런 거지. 그렇지?” “내가 뭘? 왜 다들 생사람 잡고 난리야!” 유정은 혜영과 재희를 노려보았다. 두 사람 역시 유정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네가 한 짓이라는 거 다 알아.” “증거 있어? 증거 있냐고!” “……밝힐 수 있어.” 유정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어보였다. “어떻게 밝혀? 무슨 수로? 예전 일 들먹거리면서 내가 한 짓이라고 말할 거야?” “……넌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애야.” 혜영은 유정을 노려보며 말했다. “언젠가 꼭 밝혀질 거야.” 혜영의 옆에 서 있던 재희는 유정을 노려보더니, 혜영의 팔을 붙잡고선 말했다. “선배, 그냥 가자. 저런 애랑 더 이상 말 섞지 말자고.” 재희의 말에 혜영은 유정을 보더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문 앞에서 멈춰선 혜영은 유정에게 마지막으로 말했다. “후회 하지 마. 지금 네가 벌인 짓.” ＊＊＊＊ “드디어 다들 한자리에 모였군요.” 국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다섯 명이 서있는 곳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내가 부른 이유를 다들 알고 있겠죠?” 다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뻔한 이야기를 내뱉기는 싫었으니까……. 방영을 하고난 뒤 벌써 3주가 흘렀지만, 그러니까 총 6편의 편이 방송이 되었지만 시청률은 고작 10%를 넘을까 말까한 수준이었다. 평균 시청률이 9.8%이니 말이다. “그래서 말입니다.” 국장은 다섯 명을 바라보더니 자신이 들고 있던 서류를 내보였다. “이번에 다시 개편을 할 생각입니다.” 국장을 바라보고 있던 모두의 눈이 커졌다. “개, 개편이라니요?” “말한 그대로입니다. 개편 하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개편을 하겠다고 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또 다시 하겠다는 건……. “……국장님.” “지금 16부작으로 되어 있는 내용, 줄이세요.” “네?” “조기 종영하라는 말입니다.” 조기 종영이라는 말을 듣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더 더욱 화가 치솟았다. “하지만 국…….” “CBS방송국에게 계속 지고 있다는 거 압니까?” “………” “특히 수목드라마가 가장 차이가 많이 난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자 혜영의 표정이 굳어졌다. 석훈 역시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드라마왕국이라는 타이틀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다섯 명의 표정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수현의 일로 깨달았던 것이었지만, 이제야 더 실감할 수 있었다. 국장은 자신들을 이용하기 위해 데려왔다는 것을……. ＊＊＊＊ “국장 해임 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네?” “이번에 한 번 제대로 하기로 했나봐. 그래서 나도 이참에 동참하려고.” 선배의 말에 주한은 헛기침을 몇 번 반복했다. 갑작스러운 사건들로 인하여 국장의 이미지는 날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었다. 수현의 일도 있었고, 이번에 또 다시 개편을 하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우선 해임 건이 체결되면 곧바로 정리 되겠지.” “……하지만, 그렇게 쉽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작가건 PD건 다들 저렇게 발 벗고 나서는 거지. 잘됐다 싶어서.” 다들 기회다 싶어서 그런 것이다. 지금까지 국장이 했던 짓을 한꺼번에 걸고넘어지자는 심보. 모두가 들고 일어서면 안 될 리 없을 테니까. “정PD. 어떻게 할 거야?” “전……. 잘…….” 주한은 입술을 깨물더니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그 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전 할래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재희였다. 주한은 재희의 말에 커진 눈으로 재희를 바라봤다. “국장 해임 건, 저도 참여할게요.” “장재희씨.” “……망설일 거 뭐있어요. 우리도 당할 만큼 당했잖아요.” Scene Number. 12 “본격적으로 시작한다고 해요.” “오늘부터요?” “……네.” 다섯 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그들의 손에 쥐어진 자판기 커피는 다 식어 있었다. “사태가 점점 커지는 것 같죠?” “그러게요.” 창재는 커피를 마시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네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아직 한 명이 돌아오지 않았으니까요.” “………” “꼭 돌아오게 할 겁니다. 강수현작가, 돌아오게…….” 창재의 말에 네 사람은 숙연해졌다. 비록 같은 작품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수현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힘든 생활 속에서도 사람들을 위해 또 다른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 똑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는 동지였기 때문이다. ＊＊＊＊ - 다음 소식입니다. 현 KNB방송국은 시청률 조작설과 함께 공동 집필 비리설에 휘말리고 있다고 하는데요. 자세한 소식, 박준식기자가 전해드립니다. KNB방송국이라는 말이 뉴스로 전해지자, 설거지를 하고 있던 수현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서둘러 TV 앞으로 걸어왔다. “수현아. 저 방송국 네가 있는 곳 아니니?” “어, 어.” 수현은 손에 있는 물기를 닦고선 리모컨을 손에 쥐었다. - KNB방송국에선 시청률 조작설과 공동 집필 비리설에 휘말리고 있습니다. 바로 월화드라마 ‘프라이드’입니다. 현 KNB방송국 드라마 국장인 강……. 수현은 황급히 리모컨으로 TV를 껐다. “수, 수현아.” 엄마의 부름에 수현은 당황한 표정을 숨기고선 말했다. “어?” “무슨 일 있는 거야? 프라이드면…….” “아, 아무 것도 아니야. 그냥 설일 뿐이야.” 엄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사실대로 말해. 너 무슨 일 있는 거지? 그래서 온 거지?” “아, 아니라니까.” “거짓말 말고……. 무슨 일인데. 무슨 일이 길래…….” 수현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그리고 엄마를 껴안은 수현은 말했다. “엄마……. 나 무섭고 두려워.” ＊＊＊＊ 다음날, KNB방송국 앞은 물론이고 로비까지 기자들로 붐볐다. 다들 국장을 취재하기 위해서 몰려 온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안 돼 국장이 모습이 보이자, 기자들은 벌떼같이 모여들어 국장의 주위를 감쌌다. “어떻게 된 겁니까?” “시청률 조작설이 사실입니까?” “공동 집필에 관한 비리는 무엇이죠?” 기자들의 질문이 계속 쇄도하자 국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경호원들은 국장의 주위로 몰려드는 기자들을 밀어냈고, 국장은 그 틈을 타,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문이 닫히자 기자들의 시끄러운 말소리가 끝났다. “……골치 아프군.” 국장은 머리를 손으로 감쌌다. 그렇게 엘리베이터가 국장실에 도착해 문이 열리자, 국장의 눈앞에 낯선 광경이 보였다. ‘국장 해임 건을 체결하라!’ ‘드라마국장, 자진 퇴임하라!’ 하나같이 국장의 해임 건에 대한 내용들의 현수막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국장은 안경을 치켜 올리고선 걸음을 옮겼다. “국장님…….” “김비서, 이것들 다 치우도록 하세요.” “아, 네.” “그리고 임시총회 열 테니 준비하도록 하세요.” “……임시총회요?” 국장은 그 말을 하고 난 뒤, 국장실의 문을 열었다. Scene Number. 13 “그 소식 들었어?” “무슨 소식이요?” “오후에 국장이 임시총회를 열겠다고 했대.” “이, 임시총회요?” 말을 듣고 있던 혜영의 눈이 커졌다. 임시총회를 열겠다니, 정말 개편을 할 생각인가보다. “근데 거기서 해임 건 거론을 하겠다고 하더군.” “……해임 건을요?” “국장이 있는 곳에서 거론해야지. 우리끼리 떠들어대도 눈 하나 깜박 안 할 사람이니까.” 혜영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국장은 그만큼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었으니까……. ＊＊＊＊ 넓은 회의실을 가득 채운 사람들. 모든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국장이 모습을 보였다. “다들 바쁘신 와중에도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국장은 안경을 치켜 올리고선 말을 이었다. “오늘 임시총회를 소집한 이유는……. 개편을 다시 조정하기 위해서입니다.” 국장의 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안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앉아 있던 다섯 명은 자신들의 예상했던 일이 사실이 되어, 긴장한 듯 표정이 굳어졌다. “이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개편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또 다시 개편을 한다니요?” “그 점에 대해서는 말씀 드리죠.” 국장은 회의실을 돌아보더니 말을 이었다. “KNB방송국이 드라마왕국이라는 타이틀에 걸맞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때 관계자들이 물었다. “그래서 강수현작가를 쫒아냈습니까?” “그리고 시청률 조작을 한 겁니까?” 꼭 기자회견처럼 변해버린 임시총회. 국장은 당황한 표정으로 관계자들을 바라봤다. “가, 강수현작가는 스스로 나간 겁니다. 그리고 시청률 조작은 거짓입니다.” “아닙니다.”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그 말에 국장의 눈도, 앉아 있던 유정의 눈도 커졌다. “시청률 조작은 사실입니다.” “그, 그게 무슨 소리…….” “모든 방송국의 시청률과 함께 조사해 본 결과……. 시청률이 다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회의실은 또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조정 전 시청률은 분명 16.2%였습니다. 그리고 조정 후 시청률은 모두가 알다시피 4.2%입니다.” 4배 이상의 시청률 하락……. 그건 더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케이블 방송국인 TBC, HBN, WSB가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졌고 말입니다.” 결국 시청률 조작은 네 개의 방송국이 한 짓으로 밝혀졌다. ＊＊＊＊ “엄마.” “나도 갈래. 나도 무슨 일인지 알아야겠어.” 수현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나, 엄마 아니어도 힘들어. 그러니까 그냥…….” “……엄마로서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까. 그러니까 가는 거야. 힘들면 이 엄마한테 기대라고.” 수현의 눈이 빨갛게 충혈 되었다. 엄마는 수현의 두 손을 잡았다. “엄마…….” “내 딸이 힘든 거 볼 수 있다면 오히려 더 나을 텐데……. 볼 수 없으니까, 그저 네 울음소리 밖에 들을 수가 없으니까……. 엄마는 그게 너무 힘들고, 두렵다.” 결국 엄마의 두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 “국장 표정 굳은 거 봤어?” “당연하지.” 회의실을 빠져 나오는 사람들의 대화였다. 다섯 명도 회의실을 빠져 나왔다. 그 때 방금 회의실에서 나온 유정은 다섯 명을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걸음을 옮겼다. “문유정.” 혜영의 부름에 걸음을 멈춰선 유정. 그리고 돌아서서 다섯 명을 노려보며 말했다. “……나, 안 져. 절대로 내가 아니라는 거 증명할 테니까.” “증명할 수 있다면 증명해보시죠.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 빠져드는 건 당신일 테니까.” 석훈의 말에 유정은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빨개진 눈과 함께 돌아서 걸었다. 유정이 한참 멀어지고, 다섯 명은 서로를 바라봤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기다릴 수밖에 없죠. 체결 될 테까지.” 다섯 명은 그렇게 회의실을 바라봤다. 그 중 가장 먼저 고개를 돌린 재희. 재희의 눈에는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절대로 만나지 못할 것 같았던……. “수, 수현아.” 복도 끝에 서 있는 건 바로 수현이었다. Scene Number. 14 “미안해요. 나 때문에 일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어요.” 수현의 사과에 모두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런 사과, 필요 없어. 사과 받으려고 벌인 일 아니야. 우리뿐만 아니라, 이 일에 관련 된 모든 사람들이…….” 재희의 말에 수현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이 일로 많은 사람들이 다칠 지도 몰라요.” “……상관없습니다.” 창재의 말에 수현의 눈이 커졌다. “우리도 사람이라는 걸 알려줘야 하는 것뿐입니다. 단지, 그 시작이 강수현씨부터 시작된 것뿐입니다.” 그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치솟아 오는 감정에 수현은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어쩌면 혼자만의 일로 끝났을지도 모르는 일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고 있다는 걸 느꼈기 때문에. “근데……. 저 분은 누구셔?” 혜영의 물음에 수현은 눈물을 닦으며 대답했다. “……우리 엄마.” ＊＊＊＊ 국장실에 들어선 수현과 엄마. 발자국소리에 돌아 앉아 있던 국장은 수현만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챘다. “누굽니까?” 국장의 물음에 수현은 잠시 망설이더니 대답했다. “저희 엄마세요.” “단 둘이 얘기했으면 하는데…….” “그건 곤란할 것 같은데요. 저희 엄마가 몸이 불편하셔서요.” 국장의 의자가 돌아가고, 국장의 눈에는 두 사람이 들어왔다. 무언가에 놀란 표정의 국장. “누, 누구라고요?” “……저희 엄마이세요.” 국장은 굳어진 얼굴로 수현을 바라봤다. 입술을 깨문 채로 수현에게 물었다. “어디가……. 불편한 지 알 수 있을까요?” 수현은 국장의 말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대답해주었다. “눈이 보이지 않으세요.” 그 때 수현의 손을 잡는 엄마. 수현은 뒤로 돌아 엄마를 바라봤다. “……많이 들어 본 목소리인데, 이름을 알 수 없을까?” “어?” “이름을 들으면……. 기억이 날 것 같아.” 수현은 그 말에 국장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강재현…… 국장님.” 엄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리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수현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이, 이름이 뭐라고?” “강…… 재현…….” 그 순간 엄마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놀란 수현은 커진 눈을 한 채로 엄마를 일으켜 세웠다. “어, 엄마. 왜 그래?” “……어, 어떻게…….” 국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수현은 엄마를 부축하며 일어섰다. “국장님, 나중에 다시 오도록 할게요. 지금은 상황이 좋지가 않네요.” 수현은 엄마를 부축하며 돌아서서 국장실을 나왔다. 국장실에 홀로 남은 국장은 그저 문을 바라봤다. “……강수현이었어.” ＊＊＊＊ “괜찮아?” “………”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워 있는 엄마. 수현은 의자에 앉더니, 엄마의 손을 잡았다. “엄마. 아까 왜 그런 거야?” “………” “국장님하고 아는 사이인 거야?” 수현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엄마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그 모습에 수현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엄마…….” “수현아. 이거……. 꿈 아니지?”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무언가 불안해 보이고, 두려워하는 모습. 그 때 엄마는 잡고 있던 두 손을 세게 잡았다. “수, 수현아.” “어?” “엄마가…… 미안하다.” “가, 갑자기 뭐가?” 엄마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고, 수현에게 엄마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강재현이라는…… 그 사람. 네…… 아빠야.” 수현은 충격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커다랗게 떠진 눈으로 엄마를 바라볼 뿐…….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네…… 아빠라고.” Scene Number. 15 “아, 아빠…… 라니.” 엄마는 일어서서 수현을 품에 안았다. 수현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말도 안 돼. 내 아빠가…….” “미안해. 수현아 미안해.” 그저 미안하다는 말 밖에 하지 않는 엄마. 수현은 품에서 벗어나 엄마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말해봐. 왜, 왜! 국장이…… 내 아빠인 거야? 왜!” 초점 없는 두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네 아빠는 널 가졌다는 걸 몰랐었어. 헤어지고 난 뒤에야 알았어. 지우라고 했는데, 내가 지우지 않았어. 그 사람의 아이였으니까…….” 수현의 손이 어깨에서 떨어졌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엄마를 바라보는 수현.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말을 잇는 엄마. “널 갖고 있었을 때 교통사고로 시력을 잃었어……. 그 순간 널 잃을 줄 알았지만, 넌 기적적으로 살아났어. 그래서 내가 힘들어도, 널 키웠던 거야.” 모든 진실이 거짓과도 같이 느껴졌다. 자신을 이용한 국장이 지금껏 그려왔던 자신의 아빠라는 게……. 수현은 다시 엄마의 품에 안겼다. “어떡해. 엄마……. 나 어떡해야해?” ＊＊＊＊ - 시청률 조작설에 관련하여 KNB방송국과 비롯한 네 개의 방송국이 조사에 들어갔……. TV를 꺼버린 국장은 두 손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얼굴을 손으로 감싼 채로 한동안 있던 국장은, 조심스레 서랍을 열었다. 파일을 하나 꺼내더니 그 파일을 열었다. 몇 장을 넘기더니 국장은 넘기던 손을 멈추었다. ‘저희 엄마세요.’ ‘눈이 보이지 않으세요.’ 국장은 서류를 바라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수현의 사진과 함께 쓰여 져 있는 수현의 인적사항. 국장의 눈이 빨갛게 충혈 되었다. “왜…… 너인 거냐?” 국장은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국장의 눈에서는 눈물이……. “왜……. 내가 버리려고 했던 네가…….” ＊＊＊＊ 다음날, 국장실에 도착한 국장. 그런 데 이상하게 경호원들이 그 앞을 막아서고 있다. “비키게.” “안 됩니다.” 국장은 커진 눈을 한 채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국장의 앞을 막은 경호원들. 국장은 그들을 바라보더니 물었다. “왜?” “………” “왜 들어갈 수 없는 건가?” 그 때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돌아선 국장의 눈에는 다섯 명이 들어왔다. “여, 여긴…….” “들어가실 수 없는 이유를 알려드릴까요?” “뭐?” 국장은 안경을 치켜 올리며 그들을 노려보았다. “……업무 정지 되셨습니다.” 창재의 말에 국장의 눈이 커졌다. “어, 업무 정리라니.” “본사에서 내린 결정이니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본사라는 말에 국장이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더니 당황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그, 그럴 리가 없어. 업무 정리라니…….” 국장의 넋이 나간 모습에 조금은 놀랐다.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었기 때문에……. “만나야겠어. 본사 국장을 직접 만나야겠다고.” 국장이 걸음을 옮기려고 하자, 창재는 국장의 팔목을 붙잡았다. “가셔도 소용없습니다.” “이거 놔. 너희들이 뭐라고 날 막아.” “가셔봤자 국장님이 더 불리해지실 겁니다.” 창재의 말에 국장은 창재의 팔을 뿌리쳤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복도를 바라봤다. 국장의 눈에 들어온 사람. 그건 바로 수현이었다. 국장과 다섯 명이 서 있는 곳으로 걸어온 수현은, 국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만하고 돌아가세요.” “강…… 수현.” “그 정도로 하셨으면 상처도 금방 아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더 다치기 전에 그만하세요.” 수현의 말에 국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리고 수현은 두 눈을 감고 마지막으로 말했다. “……이제 그만하세요. 아빠.” Scene Number. 16 “아빠…… 라니?” 수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모두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게 정말…….” 그 순간,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그저 수현이 말을 꺼낼 때까지……. 수현은 입술을 깨물고선 말했다. “몰랐어요. 국장이 내가 그렇게 그리워하던 아빠라는 거.” “………” “국장, 너무 미운데. 내 아빠라잖아요.” 수현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내 아빠라니까.” 수현은 흐른 눈물을 손으로 닦았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원래대로 돌려놓고 싶어요.” ＊＊＊＊ 가려는 수현은 창재가 붙잡았다. 반쯤 돌아선 수현은 창재를 바라봤다. “이창재PD.” “정말로 갈 겁니까?” “……말했잖아요. 내 아빠니까, 내가 돌려놔야 해요.” 창재는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무모한 짓입니다. 그러다가 당신한테 돌아갈지도 모른다 이 말입니다.” 수현은 입술을 깨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아무리 말해도 피할 수 없다는 거. 하지만 나 때문에 이 모든 게 시작된 거예요. 내가 막지 않으면 그 누구도 막지 못해요.” 수현의 말이 끝나자 수현의 팔을 잡고 있던 창재의 팔이 스르르 내려갔다. “모든 걸 끝내겠다는 말입니까?” “……끝낼 수 있다면 끝낼 거예요. 아무에게도 상처 입히지 않게.” 수현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방송국을 나갔다. ＊＊＊＊ “부탁드립니다.” 수현은 고개를 숙였다. 자리에 앉아 있던 본사 국장은 수현의 행동에 놀란 표정이다. “이, 이봐요. 강수현작가.” “업무 정지, 그리고 해임 건도 철회 부탁드립니다.” “갑자기 찾아와서 그게 무슨 말입니까? 강수현작가가 제일 잘 알지 않습니까. 이 사건의 제일 큰 피해자도 강작가이니까.” 본사 국장의 말에 수현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입술을 꽉 깨물더니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제가 제일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무시도 당했고, 일까지 그만뒀습니다. 그런데…….” 수현은 목에 메였는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국장님 자리에 있다면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방송국을 위해서…… 그런 거니니까요.” “그럼 이해 한다는 겁니까?” “……네. 이해합니다.” 본사 국장은 수현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저 두 사람은 생각에 잠겼다. 그 때 본사 국장이 먼저 말을 꺼냈다. “사태가 커졌기 때문에 막지 못할 겁니다.” 그 말에 수현의 눈이 커졌다. “그, 그럼…….” “하지만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어떤 방법이 있죠?” ＊＊＊＊ 다음날, 방송위원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네 개의 방송국 관계자들은 물론이고, 취재를 하기 위해 몰려 온 기자들까지. 북적거리고 소란스러웠다. 위원장이 모습을 드러내고, 플래시가 터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뒤이어 국장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럼 위원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위원회는 예정대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지금까지 조사되었던 내용들과 함께, 이 일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조사가 다시 시작되었다. 한 시간 정도가 지나고, 쉬는 시간. 모두들 지친 격력이 가득했다. 하지만 국장의 표정은 변함없이 꿋꿋했다. 하나도 부끄러울 게 없다는 표정으로……. “그럼 징계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위원장은 마지막으로 말을 전했다. “TBC국장 이명철 해임, HBN국장 박지석 해임, WSB 국장 성준기 해임, KNB드라마 국장 강재현…….” “잠시 만요.” Scene Number. 17 “잠시 만요.” 수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여 있던 사람들은 그 덕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위원장이 서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깐 할 얘기가 있습니다.” “이 징계에 관한 것입니까?” “……네.” 위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를 비켜주었다. 수현은 단상에 올라서더니 주위를 살피고선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선, 징계 처리를 늦추게 한 점.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밝혀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수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플래시가 터져댔다. “시청률 조작에 대해선 더 이상 말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게 사실이니까요. 하지만 현 KNB방송국 드라마국장이신 강재현 국장님의 비리 사실은…… 모두 거짓입니다.” 그 말에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국장과 유정은 커진 눈으로 수현을 바라봤다. “비리에 관련 되어 있었던 프라이드의 공동 작가 문유정작가 또한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수현은 입술을 깨물고 마지막 말을 이었다. “모든 비리에 대한 소문은…… 그저 설에 불과합니다. 그 점 말씀드립니다.” ＊＊＊＊ 결국, 수현의 말로 징계 처리는 연기되었다. 해임 건에 대해 다시 한 번 검토해 보게 되었고 말이다. 회의실을 빠져 나온 유정은 곧장 수현에게로 걸어왔다. 그리고 넋이 나간 듯 걸음을 옮기는 수현을 붙잡았다. “왜 그런 거야?” “………”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냐고. 불쌍해진 거야? 동정심이라도 생긴 거냐고!” 수현을 잡고 놓지 않는 유정. 위원회에서 나온 창재는 곧장 그 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유정의 팔을 붙잡았다. “이거 놔요.” “그만 하세요.” 창재의 말림에 유정의 손이 떨어지고, 수현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걸음을 옮겼다. 무언가에 홀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강수현…….” 굳어진 표정으로 앞을 바라봤다. 그리고 수현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왜 막은 거냐?” “기회를 주고 싶었어요.” 수현은 눈물을 참고 또 참았다. 주먹이 쥐어지고, 수현은 대답했다. “내 아빠이니까요.” ＊＊＊＊ 그 날 저녁, 집에 돌아온 수현은 긴장이 풀렸는지 들어서자마자 주저앉았다. 그 소리에 엄마는 수현에게로 걸어왔다. “수, 수현아.” “……엄마.” 다가온 엄마를 안은 수현은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나, 아빠 해임 막았어.” “……수현아.” “나 잘한 거지? 정말 잘한 거지?” 결국 수현은 또 다시 눈물을 보였다. 엄마는 수현의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수현아. 미안하다.” “엄마.” “근데 어떡하니. 네 아빠라는 건 변하지 않는데…….” 그 이유로 그렇게 한 것이었다. 수현이 위원회에서 그렇게 말한 이유. 국장이 변함없이 자신의 아빠이기 때문에, 그건 절대로 바뀔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네가 너무 아픈데……. 엄마는 아무 것도 해줄 수가 없다.” “……엄마.” “근데, 수현아. 엄마가 정말 미안한데……. 천벌 받아 마땅한데……. 네가 네 아빠 용서했으면 좋겠다. 미워도 그냥 표현하지 말고 그냥 잘해줬으면 좋겠어.” 수현의 볼에 있던 엄마의 손이 떨어졌다. “내가 다 받을게. 내가 천벌 받을게. 그러니까 용서해…….” Scene Number. 18 수현의 말로 인하여 해임까지 갔던 징계는 몇 달 감봉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그리고 국장의 지시대로 드라마들은 모두 조기 종영되었다. 또한 다른 작가들과 PD들로 교체되며 또 다시 개편을 맞이했다. 그리고 6개월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변함없이 KNB방송국은 점점 잊혀 져 가고 있었다. 시청률 조작 사건으로 인하여, 모든 드라마들은 점차적으로 타 방송국들에 비해 쪽박을 쳤다. 모두 CBS방송국의 압승이었다. “또 하락했습니다.” 국장은 뒷목을 잡았다. “어, 얼마나 말입니까?” “1.6% 하락했습니다.” 국장은 심호흡을 하면서 손을 내려놓았다. “알았으니 나가봐요.” 국장실의 문이 닫히고, 홀로 남은 국장은 머리를 손으로 감쌌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거야.” 그 때 국장실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국장은 고개를 들고 그 곳을 바라봤다. “……유정아.” “할 얘기가 있어요.” 유정은 곧장 소파에 앉았다. 국장은 유정을 바라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로 걸어갔다. “무슨 얘긴데?” 한숨을 내쉬던 유정은 국장을 바라보고선 말했다. “삼촌한테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유정의 낯선 모습에 국장의 눈이 커졌다. “모든 게 다 나 때문이에요. 수현이 때문이라고 부정하려고 해도 다 내 책임이잖아요.” “유, 유정아.” “점점 망해가고 있는 KNB방송국, 그리고 드라마……. 지켜보기 너무 힘들어요.” 유정의 말에 국장은 고개를 숙였다. 유정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다시 시작하는 건 어떨까요?” “뭐?” “원래 제작 그대로 다시 시작하는 거,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그게 무슨 소리냐?” “그 여섯 명으로 다시 개편했으면 해요.” 국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고 국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못한다. 그 사람들도 이미 망한 사람들이야.” “삼촌……. 아니, 국장님.” “망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려. 말도 안 된다.” “아니요. 그 사람들 능력 있어요. 단지 그 때의 여건이 좋지 않았다구요. KNB방송국 살리기엔 그 사람들이 필요해요.” “그런 얘기 할 거면 나가라. 듣고 싶지 않구나.” 국장이 돌아서자 유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만, 조금만 굽혀보면 안 돼요? 나도 이렇게 굽혔잖아요. 삼촌도 그냥 인정해요.” “………” “삼촌이 그렇게 죽고 못 사는 KNB방송국 살리는 길, 그 것 뿐이에요.” ＊＊＊＊ 커피를 건네받은 창재는 석훈을 바라봤다. 석훈은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KNB방송국 부도나게 생겼어.” “네? 선배, 그게 무슨 소립니까?” “시청률 봐라. 그 덕에 투자도 끊겼지. 드라마들은 협찬도 줄줄이 끊기고 있대.” “그 정도로 심각합니까?” “심각하지. 조만간 다시 국장 해임에 대해 떠들지도 모르겠다고 그러더라.” “국장 해임을 말입니까?” 또 다시 국장 해임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6개월 전,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돌려놓은 수현의 일이 모두 허사가 될 지경이니 말이다. “강수현작가가 한 일, 오히려 헛수고가 된 것 같다. 그냥 그 때 내버려 뒀어야 했어.” “하지만, 선배도 알잖아요. 강수현작가가 그럴 수밖에 없다는 이유.” 석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부도난다고 하니까 마음이 좀 그래. 그래도 내가 일하던 곳인데.” “……살릴 수 있는 방법 없을까요?” “글쎄…….” 석훈과 창재는 한숨을 내쉬며 커피를 마셨다. ＊＊＊＊ 차에서 내린 혜영은 문을 잠그고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작은 꽃집 앞에서 멈춰 섰다. 꽃에 물을 주고 있는 한 여자. 혜영은 입술을 깨물더니, 그 여자를 불렀다. “……수현아.” 혜영의 부름에 수현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꽃에 주던 물을 잠갔다. “서, 선배…….” 혜영의 등장에 수현은 적지 않게 놀란 표정이다. 수현은 손에 묻은 물기를 닦고선 혜영에게 다가갔다. “여긴…… 어떻게…….” “너 데리러 왔어.” Scene Number. 19 “우리가 나서야 해.” 혜영의 말에 수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혜영에게 대답했다. “선배, 난 못해.” “수현아.” “이미 끝났는데 달라지는 건 없잖아.” 수현의 말에 혜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혜영은 수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아직 안 끝났어. 너도, KNB방송국도.” “………” “이게 기회라고 생각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 “선배.” “보여줘야지. 네가 할 수 있는 능력을.” 혜영의 말에 수현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우리 여섯 명이 이루지 못했던 것, 이제 이루자고. 나뉘지 않고 여섯 명이 함께.” ＊＊＊＊ 국장실 앞에 선 여섯 사람. 긴장한 표정이 역력하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문…… 열게요.” 수현은 국장실의 문을 열었다. 국장의 의자가 돌아가고, 국장의 눈에는 여섯 명이 들어왔다. 적지 않게 놀란 표정의 국장. “국장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국장은 소리쳤다. “나, 나가세요!” 하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국장실을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국장을 바라보고 말했다. “……드라마를 만들고 싶습니다.” “뭐, 뭐요?” “나뉘지 않고, 저희 여섯 명 모두가 공동으로 제작하고 싶습니다.” 국장은 안경을 치켜 올리고선 말했다. “절대 안 됩니다. 그러니까 어서 나가요!” 국장의 말에 여섯 명은 서로를 바라봤다. 그리고 무릎을 꿇었다. 여섯 사람을 본 국장의 눈이 커졌다. “이, 이게 뭐하는…….” “부탁드립니다. 다시 드라마를 만들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여섯 명을 보던 국장은 입술을 깨물었다. 잠깐이나마 흔들린 마음을 다시 돌리기 위해서. “이만 나가보세요.” “국장님.” “나가보라고 했지 않습니까!”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국장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은 너무나 슬펐다. 국장은 애써 그들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모두가 나가고 난 뒤, 수현은 홀로 국장실에 남았다. 나가지 않는 수현을 본 국장은 물었다. “……왜 자진해서 하겠다고 하는 거냐?” 국장의 물음에 수현은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기회라고 생각하니까요.” “기회?” “한 번 쓰러져서 바닥을 보니까 다시 치고 올라오고 싶어졌어요. 바닥이 바닥을 만나서 정상에 서는 모습 보여주고 싶거든요.” “네 행동…… 이해할 수가 없구나.” 수현은 국장을 바라봤다. 그리고 살짝 웃어 보이며 말했다. “이해하지 마세요. 난 국장님이 내 아빠처럼 행동해 주질 않길 바래요.” 수현의 말에 국장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수현은 돌아서서 국장실을 나왔다. 국장은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KNB방송국 살리기엔 그 사람들이 필요해요.’ ‘바닥이 바닥을 만나서 정상에 서는 모습 보여주고 싶거든요.’ ‘부탁드립니다. 다시 드라마를 만들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조금만, 조금만 굽혀보면 안 돼요?’ ‘삼촌이 그렇게 죽고 못 사는 KNB방송국 살리는 길, 그 것 뿐이에요.’ 국장은 굳어진 표정으로 수현이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날 이렇게 하려고 이곳에 남겨둔 거냐?” Scene Number. 20 며칠 뒤 국장은 개편에 대한 내용을 발표했다. 결국, 국장은 여섯 명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리하여 공동 제작이 시작되었고, 투자부터 협찬까지 모든 걸 여섯 명이 분담해서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첫 방영의 시청률은 그들의 노력대로 성과를 거두었다. 그렇게 시작된 드라마는 점차 자리를 잡아갔고, KNB방송국을 위기해서 구해주었다. 또한 국장이 그렇게 원하던 드라마왕국이라는 타이틀까지 거머쥘 수 있게 만들어주었고 말이다. ＊＊＊＊ “참 힘들었죠?” “네.” “어린 나이인데 벌써 경험 해볼 건 다 해 본 것 같네요.” “……장재희작가.” 주한의 표정이 굳어지자 재희는 살짝 웃어 보이며 말했다. “알았어요. 앞으론 정말 나이 얘기 안 할게요.” 그 말에 주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동안 그렇게 평가해서 미안해요.” 재희의 말에 주한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이제는 안 그래요. 당신 능력 인정할 수 있어요.” “장재희작가…….” “앞으로도 잘 해보자구요.” 재희는 주한에게 손을 내밀었다. 주한은 재희와 손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희미하게 웃어 보이며 재희의 손을 잡았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 “여기까지 무슨 일이에요?” “……저번에 미안했어요.” 동건의 사과에 혜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미안해요?” “오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거였어요. 능력 있는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했다는 생각에…….” 혜영은 동건의 말에 살짝 웃어보였다. “괜찮아요. 이미 지난 일이잖아요.” “……새 드라마 시작한다고 하던데.” “네. 다시 시작해요.” 동건은 입술을 깨물더니 혜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시 시작한 걸 진심으로 축하해요.” “동건씨.” 혜영은 잠시 동안 가만히 서 있더니, 동건의 손을 잡고 환하게 웃어보였다. “고마워요.” 잠시 잡고 있던 손이 놓여지고, 동건은 혜영에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럼 잘 지내요.” “동건씨 도요.” 동건은 돌아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혜영 역시 반대편으로 돌아섰다. 그 때 혜영의 눈에 들어온 건 석훈이었다. “손PD.” “내가 방해한 겁니까?” 석훈의 말에 혜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그 말에 석훈은 혜영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몇 번의 헛기침 후 석훈은 혜영에게 말했다. “그동안 미안했습니다.” “……네?” “당신을 무시했던 말들, 행동들. 모두 미안합니다.” 혜영은 그 말에 활짝 웃어보였다. “아니에요. 나도 그랬는데요 뭐.” ＊＊＊＊ 창재는 수현에게 커피를 내밀었다. “고마워요.” 수현은 커피를 받아들자마자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난간에 기대어 하늘에 떠 있는 별을 바라보았다. “참 많이 떴네요.” “그러네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창재는 수현에게 물었다. “다시 시작하니까…… 어때요?” 창재의 질문에 수현은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진짜 숨 쉬고 있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요?” “……진짜 숨 쉬고 있는 기분이요?” “네.” 그 대답에 창재는 웃어보였다. “신이 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해요. 이 기분 때문에 난 이 일을 너무나…… 사랑해요.” “……마찬가집니다.” 창재의 말에 수현은 고개를 돌려 창재를 바라봤다. 그리고 환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우린, 드라마를 위해 사는 사람들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