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1 話 따스한 햇살이 꽃잎에 내리고, 어느덧 봄이 가깝게 느껴지는 계절이 되었다. 안동(安東) 김가(金家) 세지덕파(勢志德播) 12대손 김준학의 여식, 예원. 예원은 사저와 조금 먼 못에 있는 팔각 정자에 앉아 흐르는 물결을 한없이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 예원이 이처럼 생각에 잠기게 된 까닭은 그믐날의 일 때문이었다. 그믐날, 예원의 사저에는 궁에서 내관을 비롯한 상궁 2명이 혼례에 관한 이야기를 예원의 아버지인 김준학(훗날 석풍 부원군)과 어머니인 박선명(훗날 진선대부인 박씨)과 의논하기 위해 찾아왔었다. 예원은 별채에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지는 못하였지만, 예원의 시중을 드는 화춘이가 말하길 혼례의 일정에 대해 들었다고 하였다. 대대로 왕실과 돈독한 사이로 지내 온 가문을 위해서라면 예원은 자신이 혼례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제 막 자신이 여인이 되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 예원은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세자를 마음에 품을 수 있을 지 걱정되었다. “언니!” 생각에 잠겨 있던 예원을 깨운 것은 진화였다. 올해 열다섯이 된 진화는 안동 기방의 수련생으로 유학과 미술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소녀이다. 진화는 치맛자락을 정리하고 예원의 옆에 앉았다. 예원은 진화를 보며 가지런한 이가 살짝 보이게 웃어 보인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는 것이야?” “이것저것.” 예원이 대답을 하지 않자 진화는 더 궁금하다는 듯 예원의 저고리 끝을 부여잡고 다시 한 번 묻는다. 그런 진화에게 알았다며 예원은 자신의 속내를 고스란히 털어 놓는다. 예원의 말에 귀 기울여 듣는 진화는 어느 순간 여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듣고 있었다. “진화 네가 나였더라면 어찌 선택했겠어?” “내가…… 언니라면?” “그래.” 진화는 한참을 생각하다 고개를 숙이고선 작은 목소리로 예원에게 답했다. “기생이 될 몸인데, 어찌 그런 걸 생각하겠어. 다 부질없는 짓인 걸.” “하지만…….” “그래도 굳이 생각하자면 나도 언젠가는 기생이 될 거고, 언니도 언젠가는 최고의 규수가 되어서 한 남자의 여인이 될 거야. 난 화초를 올리고, 언니는 혼례를 치르고…… 우리가 여인으로 태어난 이상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니까. 그러니 너무 마음 쓰지 마. 분명 세자께서는 좋은 분이실 거야.” 진화의 진심어린 말에 예원은 자신이 너무 짧은 생각을 하였던 것이라며 마음속으로 질책을 하였다. 예원이 진화에게 다시 말을 걸으려 할 때, 진화의 표정은 시들어버린 꽃 마냥 좋지 않았다. 예원은 혹여나 몸이 좋지 않은 것인가 싶어 진화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언니.” “어디가 안 좋은 것이야?” “아니. 단지…….” “단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야.” “……언니가 세자 저하의 여인이 된다면 우리 둘은 다시는 이런 담소도 나누지 못하게 되겠지. 그럼 우리는 지금 이 시절이 마지막이 되겠지.” 이제와 분명 그리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 예원. 예원의 눈가는 어느새 촉촉이 젖어 들었다. 비록 신분의 차이가 있으나 진화와는 4년이라는 긴 세월 말동무로 지내온 막역한 사이이거늘. 명문가의 여식으로 벗 하나 삼지 못할 운명이었을 수도 있건만, 진화는 예원에게 처음으로 다가와 준 평생의 지기였다. “그리 되도록 안 둘 것이야. 내 첫 동무인 너를 잃고 싶지 않아.” 예원은 진화의 손을 잡은 채로 입술을 지그시 깨문다. 그렇게 진화에게 우정을 맹세하고 있는 예원을 부르는 목소리가 못 건너에서 들려온다. 화춘이다. 예원은 진화의 손을 다시 한 번 꽉 잡고서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기에 진화는 예원의 손을 놓았다. 그렇게 정자에서 진화와 헤어진 예원은 다리를 건너 화춘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화춘은 예원에게 장옷을 씌어주며 서둘러 사저로 향했다. 사저에 도착한 예원의 눈앞에 보인 것은 그믐 날 내관과 함께 찾아왔던 상궁 중 한 사람이었다. 상궁은 예원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하였다. 예원도 그녀에게 역시 예를 갖추었다. 상궁인 그녀가 찾아왔다는 것은 혼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궁중 예법 등 세자빈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들을 훈육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박상궁이라 하옵니다. 규수님.” 예원은 미소 짓고 있었지만 그리 기쁘지 않았다. 진화의 말에는 동의하는 바이지만 그리 쉽게 정리할 수 있는 것이 마음이 아니기에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은 박상궁이 사저에서 함께 머물며 예원을 보살펴주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는 혼례를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또 다른 증거가 되어버린 셈이다. 박상궁과 짧은 대화를 하고 신시(申時) 쯤 별채에 들어와 해시(亥時)가 되도록 예원은 단 한 번의 흐트러짐도 없이 자리에 앉아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 긴 시간동안 예원이 생각한 것은 앞으로 자신이 미래에 어떤 인물이 되어 있을 지였다. 세자는 반드시 왕이 될 것이고 세자의 여인인 자신도 왕비가 될 것이라는 것, 그리고 단 한 명의 벗도 없이 홀로 궁에서 지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미시(未時)에 정자에서 만난 진화가 떠올랐다. 예원은 자신의 오른손 약지에 끼워져 있는 옥가락지를 바라보다 서궤에서 종이를 꺼내 펼친 후, 먹을 붓 끝에 묻혀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렇게 이별이 빨리 찾아오게 될 줄은 몰랐다. 오늘에서야 너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려주었는데, 세월은 뭐가 그리 급한 지 나를 재촉하는 구나. 내가 너에게 그리 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다짐하였지만 지금 당장은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이 무리라 생각한다. 허나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세자의 여인이 되어도, 훗날 이 나라의 어미가 되어도 너를 잊지 않을 것이니. 그 증표로 너에게 이 옥가락지를 선물할 것이다. 이 옥가락지를 끼고 나를 기다려 주거라. 내 언젠가는 너를 다시 찾아 올 것이다.’ 진화에게 전해 줄 서찰을 다 쓰고 난 뒤에도 예원은 쓰라린 가슴을 부여잡은 채로 눈물을 흘리며 밤을 지새웠다. 새벽이 다 되어서야 비로소 잠을 청한 예원. 그러나 묘시(卯時)가 되어 눈을 뜬 예원은 이부자리도 정리하지 않고 진화가 있는 기방으로 향했다. 화춘도 없이 장옷을 쓴 채로 기방을 가는 예원에게는 오로지 진화에게 줄 서찰에 대한 생각 밖에 없다. 기방도 역시 이른 시간이여서 그런지 조용하다. 기방 문 앞에 서있는 예원은 주변을 돌아보다 가슴을 쓸어내리고선 문을 바라본다. 선뜻 기방 안으로 들어 설 마음이 생기지 않아서다. 입술을 깨물고 문고리를 잡은 예원은 짧은 한숨을 내쉬고 문을 열려 힘을 줬다. 그런데 그 순간, 기방 안에서 문을 잡아당기는 힘에 예원은 이끌려 기방 안으로 들어섰다. “……누구십니까.” 사내의 목소리였다. 예원은 서둘러 반듯하게 몸을 세우고 장옷으로 자신의 얼굴을 반쯤 가렸다. 그 사이로 보이는 사내는 구릿빛 피부에 여인만큼 아름다운 눈매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기방에 드나들기에는 아직 때가 안 된 어린 소년의 모습이다. 예원은 고개를 돌리고선 소년에게 물었다. “아직 성인이 아닌듯한데 어찌 이 시간에 기방에 계십니까.” “……그럼 귀한 자제분은 어찌 이 시간에 기방에 오셨습니까.” 그제야 예원은 기방을 찾은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을 떠올렸고, 다시 소년이 서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장옷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빠지면서 예원의 모습이 고스란히 소년의 눈에 들어왔다. 소년은 멈칫하며 예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헸다. 기방에서 태어나 기녀들과 일생을 함께해왔지만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예원만큼 아름답다고 생각한 여인은 없었다. 그것이 신기하고 놀라워 소년은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소년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느낀 예원은 서둘러 다시 장옷으로 얼굴을 가린다. “이, 이곳에 사시는 분이십니까.” “예.” “그럼 수련생인 진화를 아시겠군요.” 예원의 입에서 진화의 이름이 나오자 소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화와 소년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내며 친남매와 같이 자라왔고, 진화는 자주 소년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과거를 떠올리다보니 몇 년 전부터 진화가 그리 입에 달고 살던 벗이 예원이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소년은 살짝 미소를 짓고선 예원에게 답했다. “예. 진화에게서 자주 듣곤 하였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렇습니다. 헌데 이 새벽에 어찌 기방에 오셨습니까.” 예원은 오른손 약지에 끼워져 있는 옥가락지를 빼 서찰이 들어 있는 봉투에 넣어 소년에게 건넸다. 그리고 감정을 추스르고 소년에게 당부했다. 서찰을 꼭 진화에게 전해달라고. 당부를 하는 예원의 슬픈 표정을 본 소년은 이런 것을 물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물었다. “왜 전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건…….” 소년의 물음에 어느새 예원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당황한 소년은 자신의 바지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예원에게 건넸지만 예원은 그저 눈물만 흘릴 뿐, 손수건을 받지 않았다. 소년은 망설이다 예원에게 좀 더 다가갔고 손수건을 잡고 있는 손을 뻗어 예원의 볼에 흐른 눈물을 닦아줬다. 소년의 행동에 예원은 촉촉이 젖은 눈으로 소년을 바라봤다. 마주친 소년의 눈은 예원과 다름없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꼭 미안하다고 말하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예원은 무언가에 홀린 듯 소년에게 물었다. “……이름이 무엇입니까.” “김…… 정후이옵니다.” 예원은 자신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볼에 닿은 정후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을 맞잡으면서 예원은 느꼈다. 여인으로서 처음으로 봄바람에 흩날리는 꽃잎과도 같은 자신의 떨리는 마음을. 그리고 정후 역시 자신과 같은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저는…… 김예원이라 합니다.” 第 2 話 사저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예원. 예원은 순간 힘이 빠져 자리에 풀썩 주저 앉고 만다. 예원의 행적을 찾기 위해 모여 있던 종들은 놀란 표정으로 예원에게 달려간다. 화춘이 예원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예원의 어미인 선명은 가슴을 부여잡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아비 준학은 화춘에게 어서 별채로 예원을 데리고 가라며 손짓한다. 화춘은 서둘러 예원의 손을 자신의 어깨에 걸치고 별채로 걸음을 재촉했고, 준학의 앞에 서 있던 박상궁도 화춘의 뒤를 따라 별채로 향했다. 진시(辰時)가 되어 의원의 사저에 당도하고, 곧장 별채로 가 예원의 몸 상태를 진맥했다. 그러나 의원은 예원의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말하였고, 처방도 따로 없으니 푹 쉬는 게 가장 좋다 말했다. 진료를 마친 의원이 나가고, 박상궁은 예원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쉰다. 그 소리를 들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원은 힘겹게 눈을 떴다. 눈을 뜬 모습을 본 화춘은 기쁜 목소리로 예원을 불렀다. “아, 아씨!” “……규수님.” 예원은 주변을 돌아보다 일어서기 위해 팔을 바닥에 짚는다. 하지만 박상궁이 이를 제지하며 예원을 다시 눕히고 말했다. “의원이 푹 쉬어야한다고 그랬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장차 세자빈이 되실 몸입니다. 그러니 제 말을 들으세요.” 박상궁의 말에 예원은 입술을 꾹 깨문다. 다시 자리에 누운 예원의 몸에 이불을 덮어주는 박상궁은 예원에게 오늘 하루는 편히 쉬라며 화춘과 함께 별채를 나간다. 두 사람의 나간 방문을 한참 바라보던 예원은 눈길을 천장에 둔다. 바닥에 놓인 손을 올려 자신의 가슴에 가져갔다. 떨리는 자신의 마음을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다는 듯 예원은 눈을 감는다. 그 시간, 예원이 가고 난 뒤 기방 문 앞에 홀로 서 있는 정후. 자신의 손에 주어진 손수건과 서찰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반대편 손을 가슴에 가져다 대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독백을 한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 걸까.” 그렇게 예원이 간 길을 바라보고 있는 정후의 뒤로 막 잠에서 깨어나 밖을 나온 진화가 나온다. 진화는 멍한 표정으로 아무도 없는 길을 바라보는 정후의 등을 살짝 건드린다. 정후는 살짝 놀란 표정으로 진화를 맞았고, 진화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누가 지나가기에 그리 멍한 표정을 서 있는 것이야.” “아, 그것이…….” “그건 또 무슨 것이고.” 진화가 가리킨 것은 정후가 들고 있는 서찰이다. 정후는 예원의 부탁을 떠올리며 진화에게 내민다. 진화는 입을 삐죽 내밀더니 정후에게 자신에게 주는 것이냐며 물었다. 정후는 고개를 끄덕이자 서찰을 두 손으로 받아든 진화는 곧장 봉투를 뒤집어 서찰을 빼냈다. 그리고 서찰과 함께 떨어지는 옥가락지 하나. 진화는 잠시 손에 놓인 옥가락지를 바라보더니 서찰을 펴 읽기 시작한다. 서찰은 예원이 쓴 것이었다. 서찰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던 진화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맺혀 있었다. 예원의 진심이 담긴 서찰을 다 읽고 난 뒤, 진화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옥가락지를 하염없이 바라보다 작은 소리로 외쳤다. “언니…….” 한참동안 그렇게 서 있던 진화는 예원을 직접 만나 이야기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기방의 문을 나온다. 그러나 그런 진화를 잡는 정후. 한가득 눈물이 담긴 눈으로 정후를 보는 진화. “오라버니. 나 좀 놔줘. 나 언니 꼭 봐야해.” “지금은 안 돼. 나중에.” “……나중이 언제 올 지, 어찌 알아.” “허나 지금은 안 돼. 지금 그 분을 따라 나선다면 네가 다칠지 몰라.” 정후는 진정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진화가 지금 예원의 사저로 향한다면, 사저에 살고 있는 종들이며 예원의 부모가 진화를 볼 것이다. 그리고 진화가 기방에서 수련을 받고 있는 수련생이라는 것을 알면 이제는 영영 이별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말리는 것이다. 그런 정후의 뜻을 눈치 챘는지 진화는 예원의 사저로 향하는 길목을 젖은 눈으로 바라보다 주저앉아버린다. 정후는 진화의 옆에 앉아 진화를 자신의 어깨에 기댈 수 있도록 감싼다. ‘너만큼 나도 언젠가는 아프겠지.’ 정후는 쓴 웃음을 머금고 진화를 품은 채 다시 예원이 지나간 그 길을 바라본다. 며칠 후. 몸이 좋아진 예원은 박상궁과 함께 훈육을 받기 시작했다. 걸음걸이부터 시작해 앉는 법까지 모든 것을 이제는 왕실의 사람처럼 살기 위한 법을 말이다. 훈육을 받는 동안에도 예원은 진화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알 수 없는 정후에 대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우시(牛時)부터 시작한 훈육은 신시(申時)가 되어 끝났다. 마루에 앉아 천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고 있는 예원에게 다가오는 박상궁. 박상궁은 예원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목례를 한 뒤 말했다. “규수님께서는 참으로 잘 하고 계십니다.” “과찬이시지요. 아직은 많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아닙니다. 오늘 잠시 궁에 입궐을 하게 되는 데 꼭 중전마마와 전하께 전해드리겠습니다.” 박상궁의 말에 예원의 손이 멈추고, 예원은 커진 눈으로 박상궁을 바라봤다. 박상궁은 다시 한 번 목례를 한 뒤 돌아서서 장옷을 쓰고 사저를 나온다. 그런 박상궁의 모습을 지켜보다 예원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독백을 한다. “정말, 나는 왕실의 사람이 된 것이구나.” 사저를 빠져나온 박상궁은 안동 마계도에서 말을 빌려 한양으로 향했다. 박상궁이 한양에 도착할 때 쯤 이미 하늘에는 달이 드리워져 있다. 박상궁은 말을 마구간에 맡기고 궁에 입궐하였다. 궁은 조용했고, 나인들과 병사들만이 잠에 들지 않고 있었다. 박상궁은 중전이 있는 덕성궁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박상궁을 제일 먼저 맞이한 것은 바로 중전의 수행상궁인 최상궁이다. 최상궁은 박상궁을 반가운 얼굴로 맞았고, 박상궁은 자신보다 계급이 높은 최상궁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자네의 소식은 들었네. 세자빈이 되실 규수님을 모시게 되었다지.” “예. 그래서 규수님의 소식을 중전마마께 전해드리러 이렇게 입궐하였습니다.” “아직 중전마마께서는 침소에 드시지 않았으니 내 곧장 아뢰겠네.” 최상궁은 중전에게 박상궁이 온 사실을 바로 아뢰었다. “중전마마. 안동 규수 김예원의 수행상궁, 박상궁이 들었습니다.” “……들라하라.” 중전의 목소리가 들리자 최상궁은 박상궁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박상궁은 걸음을 옮겨 나인들을 통해 열린 문을 통해 중전의 방에 들어섰다. 박상궁의 모습을 본 중전은 읽고 있던 서책을 닫는다. 그리고 박상궁에게 손짓하며 말하길. “이리 가까이 앉게.” 박상궁은 중전의 말에 고개를 숙인 채 다가가 방석이 놓인 자리에 앉는다. 중전은 서궤에 손을 올리고선 박상궁에게 물었다. “그래. 규수 예원은 어찌 지내는가.” “며칠 전, 몸이 좋지 않으셨습니다.” “어찌. 그럼 지금은 상태가 호전 되었느냐.” “예. 규수께서는 훈육을 받기 시작하셨사옵니다.” 박상궁의 말에 중전은 활짝 미소 지었다. 그리고 중전은 서궤 밑에서 서찰을 꺼내 박상궁에게 내민다. “그것을 규수께 전하게.” “예. 중전마마.” 이야기를 마친 박상궁이 방을 나가고, 중전은 달빛이 드리운 창가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이내 그 달빛을 보며 독백을 한다. “세자빈. 얼른 그 얼굴을 보고 싶습니다.” 第 3 話 박상궁은 가기 전, 한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오겠다며 예원에게 양해를 구했다. 예원은 그 때는 아무런 생각 없이 그리하라며 말했지만 지금 와 생각해보니 잘한 일이라고 스스로에게 칭찬했다. 덕분에 하루 정도는 훈육을 받지 않은 채 평소의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하지만 그런 예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늘에서는 잔잔히 빗줄기가 떨어지고 있다. 차가운 마루에 앉아 긴 한숨을 내쉬며 손에 쥔 장옷을 다시 한 번 꽉 쥐었다. 마음 같아서는 비라도 맞으며 사저를 나가고 싶지만 혹여나 고뿔이라도 걸려 박상궁에게 호되게 혼이 날까 예원은 망설이고 있었다. 멍한 표정으로 사저 담을 바라보고 있던 그 때, 담 너머에서 무언가가 움직인 것을 목격했다. 예원은 잘못 본 것은 아닐까 싶어 다시 담 너머를 유심히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에 장옷을 쓰고 신을 신었다. 빠른 걸음으로 마당을 지나 반쯤 열려 있던 대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아까 움직임이 보였던 담 쪽을 바라보며 예원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정후였다. 예원과 눈이 마주친 정후는 당황한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고 있고, 예원은 그런 정후가 자신에게 먼저 말을 걸어주거나 다가와주길 내심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예원의 바람과는 다르게 정후는 돌아선 뒷모습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예원은 잠시 울적한 표정으로 정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장옷 끝자락을 쥔 손에 힘을 바짝 주고 입을 벌렸다. “왜, 그냥 가십니까.” 예원의 용기에 정후는 가던 걸음을 멈춰 섰다. 그리고 몸을 반쯤 돌려 예원의 모습을 확인한 정후는 완전히 예원의 쪽으로 몸을 틀었다. 봄이 서서히 오고 있기는 하나 아직은 비를 맞으면 한기가 느껴질 날씨인데 장옷 하나를 걸치고 자신을 부르려 한 예원에게 미안함이 커진 정후였다. “기방의 심부름을 하고 지나다…… 잘 지내실까 궁금해 들렀습니다.” 그 말에 예원은 함박웃음을 지어보이며 정후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정후는 고개를 숙인 채 예원의 시선을 피했다. 그런 정후가 야속한 지 예원은 어느새 뾰로통한 표정으로 정후를 바라봤다. 그리고 정후의 안부 대신 진화의 안부를 먼저 물었다. “진화는요. 진화는 잘 지내고 있나요.” “예. 하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규수께서 주신 서찰을 읽곤 합니다.” 그래도 잘 지내고 있다는 진화의 소식에 마음이 한결 놓인 예원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정후는 자신의 앞에서 계속 비를 맞고 서있는 예원이 안쓰러웠는지 사저로 들어가라며 손짓했다. 하지만 정후의 행동을 보며 예원은 고개를 흔들며 답했다. “이렇게 비를 맞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허나…….” “저와 함께 걸어주시겠습니까.” 예원의 말에 정후는 표정이 굳어졌다. 비오는 날, 함께 거리를 걸어달라니. 정후는 예원에게 고개를 흔들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예원은 정후에게 다가가 소맷자락을 붙잡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정후는 혹시나 자신의 얼굴이 붉어지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돼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정후를 보며 예원은 미소 지으며 물었다. “기방 구경을 시켜주시겠습니까.” “예?” “진화와 함께 사시는 곳이 어떨까 궁금합니다.” 다시 한 번 그것은 할 수 없는 일이라며 고개를 흔들려던 정후는 그렇게 해도 결국에는 예원의 말대로 하고 말 것이라는 것에 체념한 채 예원의 걸음을 인도했다. 기방으로 향하면서도 예원은 정후의 소맷자락을 놓지 않았다. 그 시각, 한양의 궁에서는 싸늘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 이유는 중전에게 찾아간 세자 적 때문이다. 적은 이른 아침 눈을 뜨자마자 곧장 중전의 처소로 향하였다. 적의 수행내관인 문내관은 아직 진시(辰時) 밖에 되지 않았으니 한 시진(時辰) 뒤에 중전께 문후를 드리라며 조심스레 말을 전했지만 적은 단호했다. “나는 지금 당장, 어마마마를 알현할 것이다.” “저하.” “네 진정 나를 다그칠 생각이더냐.” 적의 말에 문내관은 놀란 표정을 한 채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적이 걸음을 옮기자 그 뒤를 따라 걸어갔다. 문내관은 적의 행동에 대해 대충 눈치를 채고 있었다. 어제 저녁 규수 예원의 수행 상궁인 박상궁이 입궁하였다는 소식을 적에게 전했었다. 그래서인지 지난 밤 적은 단 한숨도 잠을 청하지 않았다. 이 이른 아침에 중전을 뵙겠다고 하는 것을 보아서는 무언가 결심을 한 듯 했고 말이다. 그러나 그 속을 알 수 없어 문내관은 불안에 휩싸이고 있었다. 중전의 처소에 도착한 적은 연신 굳은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봤다. 중천이 밝기도 전에 중전의 처소에 온 적의 모습에 최상궁은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이내 침착한 듯 적에게 다가와 머리를 조아렸다. 적은 그런 최상궁에게 물었다. “어마마마는 일어나셨는가.” “예. 한 식경(食頃) 전에 일어나셨습니다.” “그럼 과인이 왔다는 것을 고하여라.” 최상궁은 평소와는 다른 적의 모습에 잠시 망설이다 대답을 한 뒤, 중전의 처소 가까이에 다가서 아뢰었다. “중전마마. 세자저하께서 오셨습니다.” 잠시 뒤 모시라는 중전의 말과 함께 적은 처소에 올라섰다. 문내관은 적의 모습을 보며 혹여나 무슨 일을 벌이는 것은 아닐까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바라봤다. 그런 문내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적은 나인들이 열어준 방문으로 중전을 만났다. 중전은 아직 머리를 올리지 않은 모습으로 적을 맞이하였다. “오늘은 어찌 이리 빨리 오셨습니까.” 중전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살짝 고개를 숙여 목례를 한 뒤, 방석이 놓인 자리에 앉는 적이다. 적의 표정이 좋지 않자 중전은 몸이 좋지 않은 것 같으니 문후는 이정도면 됐다면서 적을 처소에 돌려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적은 조금의 표정변화도 없이 중전을 바라봤다. 그런 적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중전은 적에게 물었다. “세자.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까.” “……예.” “무엇입니까.” 적은 잠시 눈을 내리고 생각을 정리하였다. 그런 적을 바라보는 중전의 가는 눈. 적은 살짝 입술을 깨물더니 이어 중전에게 대답했다. “세자빈으로 책봉 될 규수 김예원을 직접 만나고 싶습니다.” 적의 말에 중전은 놀란 눈으로 적을 바라보며 굳어졌다. 그리고 잠시 바닥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가 다시 적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세자가 세자빈으로 책봉 될 규수를 직접 만나러 가겠다는 것, 그리고 세자가 궁 이외의 곳을 간다는 것도 대신들에게는 흉보기 딱 좋은 꼴이 될 것이다. 중전은 마른 침을 삼키고 적에게 물었다. “어,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단지 저의 부인이 될 사람을 보고 싶은 것뿐입니다. 어떤 사람이고, 어떤 성품을 지녔는지 제가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규수 김예원은 참으로 총명하고, 지성미가 뛰어난 여인이라 들었습니다.” “박상궁이 그리 아뢰었죠.” “세자.” “박상궁은 세자빈이 될 사람의 수행상궁이 될 몸입니다. 또한 세자빈을 왕실사람으로 만들어야 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잘하던지 못하던지 그리 포장하여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중전은 적의 말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런 생각을 할 것을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었기 때문에 지금의 상황이 무척이나 당황스러울 뿐이다. 적은 중전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박상궁과 함께 안동으로 갈 것입니다.” “세자. 그것은 안 됩니다.” “왜 안 되는 것입니까. 제가 대신들에게 미운털이라도 박힐까 그러십니까.” “……예.” 중전은 굳은 표정으로 적을 바라봤다. 정말 두려웠다. 중전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 고였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적에게 보이기 싫어 입술을 꾹 눌렀다. 중전의 행동에 적은 알 수 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중전은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적에게 말했다. “제가 왜 대신들을 두려워하는 지…… 알고 싶으십니까.” “……예.” 중전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적을 바라보다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중전은 아직은 적에게 알려주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지금은 적이 알아서도, 이 일을 말하여서도 안 된다고. “어마마마.” “아닙니다. 그저 세자께서 다치실까 걱정이 됩니다.” 중전의 표정이 차갑게 식어가고 적은 그것을 느꼈다. 그러나 더 이상 물어보고 싶은 생각은 생기지 않았다. 그 이유를 안다고 해서 중전의 말을 들을 생각도 없으니. 적은 살짝 벌어진 입을 굳게 닫으며 중전을 바라봤다. 중전은 서궤에 올려둔 손에 힘을 꽉 주고 다시 한 번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적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 어미가 이리도 걱정을 하는데, 그래도 궁 밖을 나가실 것입니까.” “…………” “세자.” 중전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적은 그런 중전을 보면서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 중전을 똑바로 응시하고 대답했다. “그럴 것입니다.” 적의 대답에 중전은 억장이 무너져 내린 표정으로 적을 바라봤다. 자신의 마음을 다 알려주지 못하는 현실에 가슴이 아팠고, 또한 자신의 심정을 헤아려 주지 않는 적의 행동에 무심함을 느꼈다. 그러나 적은 중전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었다. 자신의 어머니이기에 혹여나 자식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 그 것을 적 역시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적은 자신이 꼭 예원을 보고 판단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해하십시오.” “…………” “제가 어떤 사람인지는 어마마마께서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중전은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적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은 어떤 일을 해서라도 꼭 이루고야 마는 그런 성정의 사람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똑 부러지는 성격으로 대신들을 깜짝 놀라게 하며 세자의 자리에 앉았고,?사신들과 함께하는 자리에서는 누구보다도?뛰어난 입담으로 마음을 휘어잡고는 하는 그런 사람. 그리고 소유하고 싶거나 버려야 하는 것에는 누구보다도 냉혹한……. “그렇다면 저는 어마마마께서 허락하신 거라 생각하겠습니다.” “……세자.” “저는 강합니다.?어마마마께서 걱정하시는 만큼 어리지 않으며, 둔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저는 규수를 만나러 박상궁과 문내관을 데리고 함께 안동으로 갈 것입니다.” 적은 그렇게 중전에게 등을 돌리고 중전의 처소를 빠져나왔다. 밖에 서 있던 최상궁과 문내관은 적이 문을 열고 나오자 고개를 숙였다. 적은 굳게 닫고 있던 입을 열고 문내관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안동으로 갈 것이다. 박상궁과 함께 갈 것이니 채비하여라.” 그리고 적은 다시 한 번 중전의 처소를 돌아봤다.?하지만 이내 돌아서서 중전의 처소를 빠져나가는 적이었다.?그런 적의 모습을 보고 있던 문내관은 깊은 한숨을 한 번 내쉬고선 적의 뒤를 따랐다. 第 4 話 기방에 도착해 정후는 대문을 열었다. 비가 와서 그런지 마당에는 아무도 나와 있지 않았다. 정후의 뒤에 숨어 기방에 들어선 예원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기방도 그저 보통 집들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그렇게 정후의 뒤를 따라 걷고 있던 그 때, 누군가가 정후를 불렀다. “얘, 정후야.” 정후를 부른 것은 그의 어머니이자 안동 기방의 행수, 운초였다. 정후는 살짝 고개를 숙여 운초에게 인사를 했다. 마루에 서서 정후를 바라보고 있던 운초는 정후의 뒤에서 장옷을 뒤집어쓰고 숨어 있는 예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운초의 눈길이 예원에게 향한 것을 본 정후는 운초에게 말했다. “진화의 친구입니다.” “수련생, 진화 말이더냐.” 정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옆으로 돌렸다. 운초의 눈에 반쯤 보이는 예원의 모습은 참으로 고운 규수의 모습이었다. 딱 보아도 양반집 자제가 분명하거늘 어찌 우리 같은 미천한 신분의 기생과 어울릴 수 있단 말인가, 라고 생각하는 운초였다. 빗속에 오래 서 있어서 그런지 예원은 몇 번의 기침을 하더니 숙이고 있던 고개를 올렸다. 그리고 운초를 보고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저는 김예원이라 합니다.” “예. 저는 안동 기방의 행수, 운초라고 합니다.” 두 사람이 인사를 마치고 눈을 마주친 그 때, 마루 끝자락 방문이 열렸다.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며 나오는 수련생들. 진화도 함께였다. 정후와 예원, 그리고 운초의 시선이 수련생들에게 향하고 그 시선을 느낀 한 명의 수련생이 걸음을 멈췄다. 수련생들은 그제야 세 사람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진화의 시선이 그 곳에 닿을 때, 예원은 활짝 웃으며 진화를 바라봤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예원의 모습에 진화는 놀란 듯 했다. “어, 언니!” 예원은 진화가 서 있는 마루 가까이로 다가갔다. 진화도 예원에게 가까이 오기 위해 신도 안 신고 마루 밑으로 내려왔다. 진화의 손을 잡고 예원은 활짝 웃어보였다. “이게…… 이레 만이지?” “응. 꼬박 이레가 지났지.” 두 사람의 모습에 다른 수련생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수근 거렸다. 그 모습을 본 운초는 수련생들을 가는 눈으로 바라보며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이레 만에 만났다는 데, 그 기쁨을 해치고 싶지 않았기에. “헌데, 언니 손이 왜 이리 찬 것이야.” “잠시 비를 맞아서 그런 것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예원은 활짝 웃어 보이며 진화와 눈을 맞췄다. 진화는 그런 예원을 바라보다가 운초를 보고 예원에게 기방 구경을 시켜주어도 되는 지 물었다. 운초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리 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혹여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정후와 동행하라 말했다. 진화는 고개를 끄덕이고선 그대로 예원의 손을 잡고 별채로 지어진 예방(藝房)으로 향했다. 그 두 사람의 뒤를 정후가 따랐다. 예방(藝房)에 들어선 세 사람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진화는 예원을 보고 활짝 웃더니 자신이 가야금을 연주해주겠다며 가야금을 넣어둔 장으로 걸어갔다. 가야금을 꺼내기 위해 팔을 뻗은 진화의 옆에 정후가 섰다. 그리고 진화 대신 가야금을 꺼내 진화가 앉았던 자리 앞으로 내주었다. “고마워. 오라버니.” 정후는 살짝 웃어 보이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런 정후의 앞에 앉아 있던 예원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진화의 연주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진화는 가야금의 몸채를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렸다. 그리고 시작되는 연주. 끊기듯 이어지는 아름다운 가야금 선율에 예원은 어느새 흠뻑 취해 있었다. 그런 예원의 모습을 본 진화는 신이나 더욱 열심히 연주를 하였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는 정후는 자신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진화의 연주가 끝이 나고, 예원은 활짝 웃으며 박수를 쳤다. 진화는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가야금을 바닥에 내려놨다. 그리고 다시 자리를 잡고 앉으려던 찰나, 박수를 치고 있던 예원의 심하다 싶을 정도로 계속되는 기침에 예원의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붉어진 얼굴로 연신 기침을 내뱉는 예원. 그런 예원이 걱정 됐는지 정후도 예원의 곁에 가까이 다가왔다. 진화는 예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런데 그 순간 진화의 손으로 느껴지는 뜨거운 온기. 진화는 놀란 얼굴로 예원을 바라봤다. “왜 이리 몸이 뜨거워!” 진화의 말에 정후가 손을 뻗어 예원의 이마에 올렸다. 진화의 말이 맞았다. 지나칠 정도로 열이 많이 나고 있었다. 그러나 예원은 고개를 흔들며 계속해서 기침을 했다. “……아, 아니야. 나는 괜찮아.” “뭐가 아니야. 이렇게 열이 많은데, 어찌 그리……. 오, 오라버니! 언니, 빨리 돌려보내야 해.” “정말로 괜찮아.” 진화는 굳은 표정으로 예원을 바라보다 정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정후는 진화의 표정을 보더니 예원의 몸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예원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았다. 힘없이 정후의 손에 이끌려 일어선 예원은 아직도 기침을 멈추지 않는다. 두 사람이 나갈 수 있게 방문을 열어 주는 진화. 바깥은 어느새 먹구름이 가득해 어두워져있었고, 빗줄기는 훨씬 굵어졌다. 정후는 진화에게 예원을 잡아달라고 한 뒤, 예원의 신을 마루 위에 올려놓고 직접 신겨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돌려 진화에게 예원을 업을 수 있게 놓아달라고 했다. 진화는 붙잡고 있던 예원을 정후의 등에 눕히고 그 위에 예원의 장옷을 덮어주었다. “오라버니.” “걱정 하지 마. 무사할 테니.” 정후는 진화를 안심시키고 빠른 걸음으로 대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본 수련생들과 운초, 놀란 표정으로 정후와 예원을 바라봤다. 대문을 열기 위해 잠시 멈칫했던 정후는 대문이 열리자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같은 시각, 안동에 거의 당도한 적은 굵어진 빗줄기를 보고 서두르자며 문내관에게 지시했다. 문내관은 고개를 숙이고선 적에게 짧은 대답을 한 뒤, 행렬을 따르는 모든 병사들과 나인들에게 명하였다. 문내관의 옆에서 걸음을 걷던 박상궁은 어제 저녁 중전이 예원에게 전해주라던 서찰이 들은 주머니를 만졌다. 그리고 살짝 한숨을 내쉬고선 이내 문내관의 걸음에 맞춰 몸을 움직였다. 사저에 도착한 적의 행렬. 적이 가마에서 내리고, 뒤를 따르던 병사들과 나인들의 몸을 낮췄다. 가마 앞에 선 문내관과 박상궁 역시 몸을 낮추며 적을 맞았다. 적 앞으로 나인 둘이 양산을 바쳤다. 적은 잠시 사저 주변의 풍경을 둘러보다 문내관에게 말했다. “과인이 왔다는 것을 전해라.” “예. 저하.” 문내관은 적의 말에 대답을 하고 사저의 대문 앞에 섰다. 그리고 목을 가다듬고 외쳤다. “세자저하 납시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예원을 찾던 종들이 허겁지겁 마당에 모여들었다. 그리고 마루에 서서 초조히 예원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준학과 선명은 적이 이곳에 찾아왔다는 것에 놀란 눈으로 대문을 응시했다. “대감.” “부인도 들은 것이오?” “진, 진정…… 세자저하께서 오신 거랍니까.” 준학은 입술을 꾹 깨물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예원이 사라진 지 벌써 한 시진(時辰)이 지났다. 그런데 하필 이런 때 세자가 직접 사저에 방문을 하였다니. 준학은 두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지금 이대로 세자를 담 너머에 세워 둘 수는 없는 노릇. 준학은 가늘게 눈을 뜨고 종에게 문을 열라 지시했다. 대문이 스르르 열리고, 그 너머로 적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준학과 선명은 마루에서 내려와 신을 신고 적이 보이는 곳으로 몸을 숙였다. 대문이 닫히고, 적은 마당 한 가운데에 서서 그 두 사람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사저의 모습을 살폈다. 궁에 비하면 보잘 것 없이 작았지만 왕실과 가장 친분이 두텁다는 것은 인정할 만 한 모습이었다. 주변을 살피던 시선을 거두고 적은 준학과 선명을 응시했다. 선명은 자신의 소맷자락을 꽉 쥐며 고개를 숙였다. “규수를 만나러 왔습니다.” 적의 말에 준학은 당황한 표정을 감추려 살짝 시선을 회피했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숙이며 적에게 말했다. “소, 송구스럽게도 제 여식이 산보(散步)를 가여 지금은 사저에 있지 않사옵니다.” “이렇게 세차게 비가 오는 날, 규수께서 산보(散步)를 가셨다?” “그, 그러하옵니다!” 선명은 황급히 대답 하였다. 그런 선명을 보더니 적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챘다. 자신이 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도 아닐 터인데 사저의 모든 종들이 마당 한편에 줄 맞춰 서있는 것이며, 자신을 보고 안절부절 하며 긴장한 모습을 애써 감추려는 예원의 부모를 보니 말이다. 그리고 그 말에 놀란 것은 박상궁도 마찬가지였다. 몸이 연약하여 바람만 불어도 서늘하다며 옷을 껴입는 예원인데, 비오는 날 산보라. 박상궁은 입술을 꾹 깨물고 적을 바라봤다. 적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우, 우선 안으로 드시옵소서.” 준학은 서둘러 자신의 몸을 돌려 적이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만들었다. 적은 살짝 눈을 내려 마당을 응시하다 준학의 말대로 마루가 있는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 때였다. 누군가가 빠른 손놀림으로 대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모두의 시선이 대문으로 향하고, 한 가동(家?)이 대문을 열었다. 대문이 열리고,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등장한 사람은 예원을 업고 있는 정후였다. 비에 흠뻑 젖은 장옷을 덮은 채로 정후의 등에 업혀 있는 예원을 본 준학과 선명은 순식간에 얼굴 전체가 경직되었다. 적은 싸늘한 표정을 한 채 정후를 바라봤다. 그러나 정후는 다급하다는 눈빛으로 주변을 돌아봤고, 그 눈빛을 본 화춘이 정후에게 달려갔다. 그러며 호들갑스러운 목소리로 정후에게 업힌 예원을 보며 물었다. “우, 우리 아씨 아닙니까! 어찌 이리…….” “비를 많이 맞으셨습니다. 서둘러 의원을 들여야 합니다.” 정후는 모두에게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이어 화춘이 예원을 받을 수 있도록 등을 숙여 자세를 취했다. 그런 정후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적의 표정은 마당을 적시는 빗줄기보다도 차가웠다. 예원의 몸을 자신의 몸으로 지탱하고 선 화춘은 예원을 보고선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예원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리다 못해 파란 핏줄이 다 보일 정도였다. 그런 예원의 모습을 보고 선명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적의 뒤에 서 있던 문내관은 지금의 이 상황을 적이 어떻게 이해하게 될 것인지에 대해 불안에 휩싸였다. 규수 예원이 어떤 사람이며 어떤 성품을 지녔는지를 알고 싶다며 찾아 온 안동에서 처음 본 예원의 모습이 다른 사내에게 업혀 들어오는 꼴이라니. 불안했다. 그것은 박상궁도 마찬가지였다. 수행상궁으로서 자리를 비운 것이 하루. 그런데 이런 일이 세자와 함께 온 지금 이 순간에 벌어지다니. 통곡을 하고 울 지경이었다. 세자가 분명 자신을 거짓을 고한 명예에 눈 먼 상궁이라 손가락질 할 것이라 생각하는 박상궁이었다. 그리고 그 분(憤)을 풀 수 있는 것은 지금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정후라고 판단했다. 숙이고 있던 몸을 일으킨 정후에게 박상궁은 떨리는 손을 붙잡고 다가갔다. 그런 박상궁의 모습을 지켜보는 적. 박상궁이 어떤 짓을 할 지 대충 떠올렸다. 분명 박상궁이 그 자의 뺨을 때릴 것이라고, 적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박상궁의 작은 손이 정후의 뺨을 휘갈기고, 붉게 물든 볼을 한 채로 고개가 돌아간 정후. 적은 미간을 찌푸렸다. “감히! 세자빈이 되실 몸을 네까짓 게 뭐라고!” 박상궁의 호령(號令)에 정후는 고개를 돌린 상태에서 한 방울의 눈물을 떨어트렸다. 세자빈. 안동 최고의 양반 댁의 귀한 자제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에 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인 것을 알았는데, 세자빈이라니. 정후는 이를 꽉 깨물고 두 눈을 감았다. 그런 정후를 보고 아직도 분(憤)이 수그러들지 않는지 다시 한 번 손을 올리는 박상궁. 그 순간이었다. “그만하게.” 적이었다. 안으로 들기 위해 반대편으로 향하고 있던 몸을 돌려 박상궁과 정후가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양산도 쓰지 않은 채 말이다. 박상궁은 떨리는 손을 자신의 치맛자락으로 대신 달래었다. 적은 박상궁에게 가까이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자네의 분풀이로 저 자를 이용하지 말게나.” 박상궁은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적은 박상궁을 지나쳐 정후에게 다가갔다. 정후의 앞에 서서 적은 다시 한 번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행색을 보아서는 천한 신분이 틀림없었다. 천한 신분과 어울리는 규수라. 적은 한 쪽 입 고리를 올리고선 정후를 응시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정후에게 말했다. “규수와 어떤 사이냐.” “…………” “세자의 물음이다. 불충(不忠) 죄를 저지를 셈이더냐.” “……그, 그저 길가에 쓰러져 계시는 것을 보았을 뿐입니다.” 정후는 거짓을 고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었다. 기방을 구경 갔었고, 이미 알고 지냈다는 것을 고할 수 없었다. 자신은 상관없지만 천한 것과 어울렸다는 것으로 혹여나 눈 밖에 날 예원을 생각하면 당연할 수밖에 없는 거짓이었다. “측은지심(側隱之心)이 많은 사내로구나. 이름이 무엇이더냐.” “……기, 김정후이옵니다.” “김정후라, 내 너의 그 측은지심(側隱之心)을 높이 사 한양에 올라가 다시 부를 것이다.” 적은 정후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그러나 정후는 고개를 숙인 채 적의 얼굴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적은 그런 정후를 바라보다 몸을 돌려 화춘이 받치고 있는 예원에게 다가갔다. 화춘은 화들짝 놀라 예원을 받친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규수를 내 등에 업 거라.” “아, 예!” 화춘은 황급히 적의 어깨에 예원의 팔을 올렸다. 그리고 적이 예원을 업을 수 있도록 뒤에서 예원의 몸을 받쳤다. 예원을 업은 적의 모습을 보고 마루에 힘없이 걸터앉아 있던 준학과 주저앉아 있는 선명, 그리고 불안에 휩싸여 생각에 잠겼던 문내관, 떨리는 손을 붙잡고 시선을 정리하지 못하던 박상궁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 시선들을 고스란히 받으며 화춘의 뒤를 따라 별채로 향하는 적. ‘이런 여인을 보러 나는 이곳까지 온 것인가.’ 적은 입술을 꾹 깨문 채 자신의 등에 업힌 예원을 힐끗 바라봤다. 그런 적의 마음을 알 수 없는 정후는 그 자리에 서서 예원을 업고 가는 적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두 주먹을 꽉 쥔 정후의 손으로 차가운 빗줄기가 쏟아지고, 이내 몸을 돌려 예원의 사저를 벗어나는 정후였다. 第 5 話 처음에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예원의 집 앞에 서 있는 그 모든 사람들의 정체에 대해서. 그러나 이제는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모두 세자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빗줄기는 더욱 굵어졌고, 그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정후는 터벅터벅 느린 걸음으로 예원의 사저에서 벗어났다. 비 비린내가 온 몸에서 진동을 하고 있었지만 그 것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저려오는 손끝과 가슴의 진동에 아플 뿐이었다. 그러나 그 아픔도 기방에 도착할 때 쯤 무뎌졌다. 기방의 문을 힘없이 밀어 열었다. 그리고 쓰러질 듯 휘청거리는 몸을 기방에 들였다. 마루에 앉아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예원을 위해 기도를 하고 있던 진화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런 진화에게 보인 정후의 모습은 넋이 나간 사람이었다. 진화는 정후가 마루와 좀 더 가까워졌을 때 정후를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오라버니.” 자신을 부르는 진화의 목소리에 정후는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진화는 궁금해졌다. 혹여나 예원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긴 것인가, 아니면 예원의 집에서 몰매를 맞고 쫓겨난 것인가. 여러 가지 생각이 겹쳐 진화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정후에게 직접 물어보겠다는 생각으로 빗속에 뛰어 들었다. 그리고 정후의 앞에 선 진화는 빗물에 차갑게 식은 정후의 손을 잡았다. “오라버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야?” “…………” “그런 것이야?”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정후는 고개를 숙였다. 그런 정후의 행동에 진화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 순간, 고개를 숙인 채로 정후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빗소리에 묻힐 만큼 작은 소리로. “그렇게 큰 사람일 거라는 거……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같은 시각, 예원이 옮겨진 별채에는 의원이 당도하여 있었다. 적은 의원의 바로 옆 자리에 앉아 자리에 누워 있는 예원을 바라봤다. 아직도 창백한 낯빛이 안쓰럽다. 의원이 진맥을 마치고, 예원의 손을 이불에 살짝 놓았다. “어떤가.” “독감(毒感)에 걸리신 듯하옵니다.” “허면 위험한 상태인 것인가.” “혈기가 돌지 않아 몸이 차여 오래 지속 될 수 있사옵니다.” 적은 한숨을 내쉬곤 의원에게 수고하였다는 말과 박상궁에게 처방을 일러주라며 하명했다. 그 말을 들은 의원은 몸을 낮춰 예를 갖춘 뒤, 예원의 방에서 빠져나갔다. 방에 남은 것은 예원과 적, 단 둘 뿐이었다. 적은 바닥에 두고 있던 시선을 예원의 얼굴로 옮겼다. 첫 인상(印象). 적이 처음 본 예원의 모습은 낯선 사내에게 업혀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본 모습은 비에 온 몸이 젖어 죽은 송장처럼 새하얗게 질려 있는 얼굴이었다. 그나마 지금 적의 앞에 있는 예원의 모습은 앞서 본 모습들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다. 창백하기는 하나, 살짝 감도는 선홍빛 입술과 투명한 피부는 아름답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적은 자신의 다리에 올려두었던 손을 들어 예원의 얼굴로 가까이 움직였다. 그러나 그 손은 볼에 닿기 전 거두어졌다. “네가…… 나의 여인의 된다는 것이냐.” 적은 나지막하게 독백했다. 대답은 없었고, 적의 한숨소리만이 방 가득 울렸다. 적은 다시 한 번 예원의 얼굴을 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문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저……하.” 적을 부르는 예원의 목소리였다. 미세하다 할 정도로 작은 소리였지만 곱다 할 정도의 음색이었다. 적은 살짝 고개를 돌려 예원을 바라봤다. 가늘게 뜬 눈으로 적을 보고 있는 예원. 적은 그런 예원이 안쓰러웠던지 다시 예원의 옆으로 자리를 잡았다. 예원은 적에게 예를 갖추기 위해 자신의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손을 바닥에 짚었다. 그 모습을 본 적은 곧장 예원의 손을 잡았다. “누워라.” “허나…….” “세자의 명이니라.” 적의 굳은 표정에 예원은 고개를 숙였다. 적은 반쯤 일어서 있는 예원을 다시 눕혔다. 그리고 예원에게 눈을 맞추고 물었다. “과인의 목소리를 들은 것이냐.” “……예.” “그럼, 대답할 수 있겠느냐. 과인의 물음에 지금 대답해 줄 수 있느냐.” 적의 단도직입적인 요구에 예원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자신의 여인이 되는 것이냐는 물음에 지금 어떠한 대답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긍정의 대답을 하며,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는 것은 예원의 마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부정을 할 필요도 없었다. 적의 여인이 되는 것은 언젠가는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니 말이다. 무엇을 어찌 대답해야할 지에 대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예원은 다시 시선을 적에게 두었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적에게 대답했다. “신첩(臣妾)이 지금 저하께 드릴 수 있는 대답은…… 없사옵니다.” “……무슨 말이냐.” “저하에 대하여 신첩은 알지 못하옵니다. 헌데, 어찌 저하의 여인이라며 긍정의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너는 과인의 여인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냐.” “그렇지 않사옵니다. 부정의 대답도 저는 할 수 없사옵니다. 그 이유는 저는 반드시 저하의 여인이 될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부정한다고 하여 저의 미래가 바뀌지는 않기 때문에, 저는 그 대답도 저하께 드릴 수 없사옵니다.” 적은 예원의 두 눈을 바라봤다. 예원은 진심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명예(名譽)와 지위(地位)에 눈 먼 여인이라면 적의 신분에 만족하여 적의 여인이 되겠다고 말하였을 것이고, 색(色)이 넘치는 여인이라면 그저 적의 외모에 감탄하여 그리 말하였을 것이다. 적은 예원이 어떠한 대답을 할 것인지 궁금했었다. 그런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은 하였다. 그러나 명확한 내용이 없었다. 아픈 몸으로 버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원은 자신의 흐트러짐 없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 모습에 적은 미세하게 흔들리는 자신의 눈빛을 느꼈다. 첫 대화(對話). 작지만 똑 부러지는 목소리. 자신의 진심을 담았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에게 예를 차릴 줄 아는 여인이 예원이었다. 비록 첫 인상은 생각했던 모습이 아니어 실망한 점이 더 컸지만, 이번만큼은 만족스러웠다. 그래서 어느 샌가 적의 입가에는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기방에 도착하자마자 진화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 대화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 진화가 울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진화를 안심시키기 위해 예원에게는 아무 일도 없다며 무사히 데려다주었다고 말했다. 그래도 걱정이 되었는지 진화는 아직도 마루에 앉아 기도를 하고 있다. 방에 들어와 젖은 옷을 갈아입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정후는 다시 예원의 집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비단 옷을 걸친 여인에게 뺨을 맞았고, 세자에게는 측은지심(側隱之心)이 많은 사내라며 칭송받았다. 그러나 가장 정후의 머릿속을 맴도는 것은 자신이 세자에게 한 대답이었다. ‘규수와 어떤 사이냐.’ ‘……그, 그저 길가에 쓰러져 계시는 것을 보았을 뿐입니다.’ 그 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예원에게 향할 오해와 비난을 막고 싶었으니까. 자신의 미천한 신분으로 인해 어쩌면 예원이 힘들어질 지도 모른다고 판단했기에 그런 대답 밖에는 할 수 없었다. “허나…….” 하지만 그 현실이 너무나도 비참하고 치욕스러웠다. 자신이 조금만 더 잘났더라면 그런 거짓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자신이 규수와 같은 명문가에서 태어난 자제였더라면 이러한 느낌을 갖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열등감이었다. 신분에 대한…… 절대로 극복될 수 없는 열등감. 주먹으로 딱딱한 바닥을 내리치는 정후를 살짝 열린 문 사이로 바라보는 운초. 운초는 조심스레 방문 고리를 잡아당겼다. 문소리에 숙이고 있던 몸을 일으키는 정후.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운초는 정후의 바로 앞에 앉았다. 그리고 정후의 눈을 마주보며 물었다. “무엇이 그리 너를 힘들게 하는 것이냐.” “…………” “어미다. 어미에게는 말해 보거라.” 운초는 정후의 손을 잡고 다시 한 번 대답을 기다렸다. 정후는 바닥으로 떨어트렸던 시선을 운초에게 두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열등감이 생깁니다.” “어느 것이.” “신분입니다.” 정후의 말에 운초는 가슴이 강하게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기녀, 운초. 안동기방의 최고 기녀로서 행수의 자리에 있는 운초이지만, 천한 것이 기녀라는 것은 자신도 뼈저리게 느낀다. 아무리 인정받는 재주꾼이라 할지라도 천하다는 것은 하늘이 내린 운명이니. 그런 자신에게 나온 유일한 핏줄, 정후가 신분에 열등감을 느낀다 말하고 있다. “……그 규수를 연모하고 있는 것이냐.” “…………” “그래서 그런 열등감을 가진 것이냐.” 정후는 이제야 자신의 마음이 어떠한 단어로 칭해져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연모(戀慕). 보고 있어도 그립고, 보지 않아도 그려지는……. 그리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세자빈이 될 운명의 여인이 예원이라면, 그런 예원을 연모하게 되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정후는 입술을 꾹 깨물다 운초를 불렀다. “어머니.” “그래.” “……제가, 그 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정후의 물음에 운초는 잠시 생각해보았다. 연모하는 마음 하나만으로 할 수 있는 일. 생각해보니 그 것은 단 한가지뿐이었다. 그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는 것.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그런 것. 운초는 정후의 두 손을 자신의 손으로 감싸 잡고 대답했다. “연모하는 이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부부의 연도 아니고, 벗의 연도 아니지만…… 누구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런 가까운 사람.” 운초의 말에 정후는 자신의 볼을 스쳐 바닥으로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내지 못했다. 어쩌면 운초의 말대로 될 수 있다면 지금 자신을 감싸고 있는 열등감 따위는 생각조차 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第 6 話 며칠 후. 예원에게 줄 탕약을 들고 부엌에서 나온 박상궁에게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저녁까지만 해도 독감(毒感)으로 인해 병상에 누워있던 예원이었다. 마당의 한 가운데에 서서 중천(中天)을 바라보고 있는 예원의 모습에 박상궁은 그대로 예원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예원에게 다가선 박상궁은 살짝 몸을 숙이며 말했다. “규수님. 몸이 좋지 않으십니다. 헌데, 어찌 아침 바람을 맞으십니까.” 박상궁의 목소리에 예원은 들고 있던 고개를 숙이며 박상궁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이내 박상궁의 들고 있는 탕약을 바라봤다. 예원은 쓴 웃음을 지어보이며 박상궁에게 대답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의원이 독감(毒感)이라 했지만 제가 생각하건데 그저 단순한 감기(感氣)인 듯합니다.” “규수님.” 박상궁은 예원에게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괜찮다며 웃어 보이는 예원의 모습에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예원은 다시 고개를 들어 중천을 바라봤다. 희미하게 핀 안개에 가려졌지만 이제는 봄 햇살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따뜻한 빛이었다. 박상궁은 잠시 망설이다 마루 위에 탕약을 내려놓고 예원에게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자신의 저고리 속주머니에 두었던 중전의 서찰을 꺼냈다. “저, 규수님.” “예.” 다시 예원이 박상궁을 바라봤을 때, 박상궁은 예원에게 서찰을 내밀고 있었다. 예원은 이게 무엇인지 묻는 눈빛으로 박상궁을 응시했다. 박상궁은 예원의 눈을 똑바로 응시한 채로 그 물음에 답해줬다. “중전마마께서 보내신 서찰입니다.” “……중전마마께서요?” “꼭 전하시라 명하셨습니다.” 서찰을 받아든 예원은 놀란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서찰을 바라보았다. 박상궁은 살짝 몸을 숙여 예원에게 인사를 한 뒤, 다시 부엌으로 들어갔다. 마당에 홀로 남은 예원은 서둘러 서찰을 펼쳤다. 종이 위에 쓰여 진 가득한 글씨. ‘규수께 내가 이렇게 서찰을 보낸 것은 규수와 나의 아들이자 이 나라의 세자인 적의 혼일(婚日)이 정해졌기 때문입니다. 혼일은 경인월(庚寅月) 을묘일(乙卯日)입니다. 이제 왕실의 사람이 되는 규수를 내 정성껏 보살필 것입니다. 난 규수가 세자 적의 배필로서 충분히 존경받을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내 생각이 맞을 거라 장담하겠습니다. 그러니 규수는 나에게 그런 사람으로 다가와 주세요. 한 사내의 여인으로, 이 나라의 어미로 말입니다.’ 중전의 진심이 담긴 서찰이었다. 예원은 자신의 이마를 쓸어내렸다. 경인월(庚寅月) 을묘일(乙卯日)이라면 이레의 시간이 남았다는 것이었다. 정말로 자신의 혼인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자 예원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러다 문득 닷새째 안동에서 머물고 있는 적이 떠올랐다. 예원은 서둘러 손등으로 눈물을 거둬내고 부엌에 들어간 박상궁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저, 세자저하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박상궁에게 적의 행방을 듣자마자 예원은 사저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평소보다 훨씬 빠른 걸음을 재촉하여 적에게 향했다. 박상궁이 알려준 곳, 그 곳은 평소에 예원이 자주 가던 연당(蓮塘)의 정자였다. 정자가 보이고, 적의 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다리를 건너 예원은 적에게로 다가갔다. 예원의 인기척을 듣고 적이 고개를 돌렸다. 예원은 적에게 예를 갖추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이 곳까지 나를 찾아 온 것이냐.” “그러하옵니다.” “무슨 일이기에 그러느냐.” “……다시 궁으로 돌아가시길 청하옵니다.” 예원의 말에 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예원의 앞에 몸을 세웠다. 예원은 고개를 들어 적의 얼굴을 바라봤다. 예원의 눈을 보니 그것은 꺾이지 않을 진심이었다. 적은 예원이 뒤이어 할 대답을 듣기 위해 말을 아꼈다. 적의 예상대로 예원은 말을 이었다. “궁으로 돌아가시어 저를 기다려주시길 바라옵니다. 경인월(庚寅月) 을묘일(乙卯日), 이레 남은 시간동안 저는 이곳에서 마지막 정리를 하고 싶사옵니다. 그러니 저하께서 먼저 가셔서 왕실의 사람이 될 저를 반겨주셨으면 하옵니다.” 같은 시각, 안동 기방에는 귀한 손이 찾아왔다. 그는 안동의 목사(牧使), 김덕주였다. 기방의 문을 연 덕주를 맞은 기녀들은 서둘러 가장 안쪽에 자리한 방으로 덕주를 안내했다. 한 번의 기침을 내뱉고 덕주는 방에 들어섰다. 방에 있는 기생은 다름 아닌 안동 기방의 행수(行首), 운초였다. 덕주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자리에 앉았다. 운초는 예를 갖춘 뒤, 덕주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운초가 자리에 앉자마자 덕주는 운초를 보며 물었다. “오랜만에 연통(蓮通)을 보냈더군.” 덕주의 말에 운초는 살짝 입 고리를 올렸다. 덕주는 자신의 앞에 놓여 진 상위의 술잔을 들었다. 그 모습에 운초는 덕주의 술잔에 술을 가득 담아주었다. 덕주는 술로 목을 축인 뒤, 다시 운초에게 물었다. “왜 나를 기방까지 불렀는가.” “……도움을 청하는 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도움을 청한다?” “예. 소인(小人)이 그 자에게 직접 대감을 알현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자네가 그리 말했다면, 그만큼의 목적이 있는 자인가보군.” “그러합니다.” 운초의 대답과 동시에 방문을 누군가가 두드렸다. 그리고 이내 열리는 문. 운초가 말한 그 자, 정후였다. 정후는 살짝 고개를 숙여 덕주에게 예를 갖추고 상 앞에 섰다. 덕주는 정후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운초를 바라봤다. 이제야 떠오른 것이다.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그 자가 바로 운초의 아들이라는 것 말이다. “자, 자네.” “예. 제 아들, 김정후입니다.” 덕주는 운초의 말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이 벌써 10년 전, 그새 정후의 모습은 사내의 모습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서 있던 정후는 덕주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 모습에 덕주는 굳어진 얼굴을 한 채, 정후를 바라봤다. “대감을 처음 알현합니다.” “……나를 만나고 싶었다고 들었다.” “예.” “연유가 무엇이냐.” 덕주의 물음에 정후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정후의 표정을 보고 덕주는 그 연유가 분명 예삿일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정후의 대답이 덕주에게 전해졌다. “대감의 양자가 되고 싶습니다.” “……!” “저를, 양자로 받아주십시오.” 덕주는 커진 눈으로 정후를 바라보다 운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운초, 그녀가 머리를 쓴 것이었다. 절대로 거절할 수 없도록 자신의 아들을 양자로 삼아 달라 얘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운초는 살짝 미소가 머금어진 얼굴로 덕주를 바라봤다. 그 눈빛은 ‘거절 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듯 덕주에게 다가왔다. 덕주는 그 시선을 회피하고 정후를 바라봤다. 그리고 살짝 열린 문틈으로 들려온 정후의 목소리에 놀란 것은 진화도 마찬가지였다. 부엌에서 받아든 안주거리를 들고 방에 들어가려 하던 찰나였다. 뜬금없었다. 지금껏 기방에서 잘 지내던 정후가 안동 목사에게 양자로 받아 달라 말하고 있었다. 진화는 살짝 미간을 찌푸린 뒤 방문 바로 앞, 마루에 걸터앉았다. 잠시 후, 이야기를 마친 정후가 방에서 나왔다.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진화를 발견했다. 정후를 올려다보는 진화. 시선이 마주치자 진화는 입을 떼었다. “오라버니. 잠깐 얘기 좀 해.” 진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후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자신의 이해하지 못한다는 듯 쳐다보는 정후를 마루 밑으로 잡아당겼다. 그리고 방과 살짝 거리를 두고 나서야 고개를 돌려 정후를 바라봤다. 정후는 아직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진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라버니, 목사 대감께 양자가 되고 싶다고 한 연유가 무엇이야.” “들은 것이구나.” 그제야 진화가 이러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이해되는 정후였다. 정후가 예상해도 진화가 이렇게 할 이유는 충분했다. 열여덟이 되도록 한 번도 기방을 떠난 적 없는 자신이 목사에게 양자가 되고 싶다고 무릎을 꿇은 것을 보았으니. “대답해 봐. 왜 갑자기 양자 타령이야. 기방이 싫어진 거야?” “아니야.” “그럼. 무엇 때문인데.” “그 분을 연모(戀慕)해.” “그……분?” 방금 빠져나간 정후의 뒤를 바라보고 있던 운초는 시선을 돌려 덕주를 바라봤다. 덕주는 깊은 한숨을 내쉰 뒤, 술잔을 기울였다. 그 모습에 운초는 고개를 숙여 잠시 생각에 빠졌다. 지금 이것이 과연 정후를 위한 일인지에 대한 생각을……. “운초, 자네.” “예. 대감.” “일부러 그런 것이지.” “……그리 생각하십니까.” 운초의 얼굴에는 쓴웃음이 지어졌다. 덕주는 그런 운초를 안쓰럽다는 듯 동정의 눈빛으로 바라봤다. 운초의 눈은 어느새 붉어져 있었지만 그것을 덕주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고개를 푹 숙였다. 덕주는 입술을 지그시 물다 입을 떼었다. “벌써 20년이 지났군.” “…………” “단 한 번도…… 형님께서는 이곳을 찾지 않으셨지.” “정(情) 한 번 주지 않으셨는데, 어찌 오셨겠습니까.” 20년 전, 운초가 화초를 올린 첫 사내. 연모하였지만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너무 컸던 사내. 그가 바로 정후의 아비였다. 찾아가 정후를 아들로 인정해달라 말할 수 있었지만 그리 하지 못했다. 천한 신분의 자신과 정후가?호되게 버려질까 무섭고 두려웠다.?그러다 자연스레 홀로 정후를 키우며 기녀로서,?예인으로서 최고의 경지에 오르겠다 다짐하게 되었고, 그렇게 이루었다.?그리고 세월에 따라 그에 대한 연모의 흔적도 지워갔다.?그러나 운초는 정후를 자신처럼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연모한다면 그 마음을 표현할 수 있도록 살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찾은 것이 바로 덕주였던 것이다. 덕주의 측은지심(側隱之心), 그것을 동정이라 할 수도 있지만 운초는?상관없었다. 그저 정후를 위한 길이 이것이라 판단했고,?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저 아일, 거두겠네.” “대감.” 덕주의 대답에 운초는 고개를 들어 덕주를 응시했다. 그 눈빛은 아주 오래 전,?갓난쟁이 정후를 안고 찾아왔을 때와 흡사했다. 덕주는 그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좁히며 운초에게 말했다. “동정(同情)이 아닐세.” “…………” “형님을 대신하는 아비의 정(情)이라 생각하게.” 第 7 話 예원의 청대로 적은 그 다음 날, 안동을 떠나 궁으로 돌아갔다. 적이 자신의 청에 응해준 것은 너무도 고마웠지만,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을 보러 이 곳, 안동까지 왔음에도 불구하고 아픈 모습만 보인 못난 여인이라는 것도 내심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이제 예원에게 중요한 것은 나흘이라는 시간동안 안동의 모든 것을 담아 남을 여생을 지낼 궁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에 잠겨 있다 보니 어느새 예원의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손등으로 떨어지려 하는 눈물을 거둬내고 예원은 방 너머에 있는 화춘을 불렀다. 그 부름에 화춘을 냉큼 방문을 열고 예원의 앞에 섰다. “예. 아씨.” “……궁으로 들어갈 때 가지고 갈 물건들을 정리해둬라.” “아, 아씨. 아직 나흘이나 남았습니다. 어찌 그리 빨리…….” “지체한다 해서 좋을 것 없지 않느냐. 차라리…… 빠른 것이 낫겠지.” 예원의 말에 화춘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예원의 옆에서 종살이를 한 것이 벌써 7년이었다. 올해나이 스물이었다. 자신보다 두 살이나 어린 예원이었지만 그런 예원의 밑에서 생활하며 단 한 번도 밉거나 싫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원을 따를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나보고 빠르다면서 너는 어찌 그리 빨리 우는 것이야.” 화춘은 예원의 말에 서둘러 눈물을 닦았다. 부르르 떨리는 입술을 꾹 누르고 예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방을 나와 바닥에 놓인 신을 신었다. 그 뒤를 종종 따라오는 화춘. 마당으로 걸어 나가던 예원은 자신의 뒤에 느린 걸음으로 따라 나오는 화춘에게 뒤따를 것 없다 말한 뒤, 사저를 빠져나왔다. 사저를 빠져나와 예원이 향한 곳은 정자였다. 연당(蓮塘)의 정자, 그 곳은 예원과 진화를 만나게 해준 장소였다. 4년 전, 어미 선명에게 혼이 나 울적한 기분으로 찾아 온 정자에서 울고 있는 진화를 봤다. 아직도 그 모습이 생생히 기억나고 있었다. ‘나도 언젠가는 기생이 될 거고, 언니도 언젠가는 최고의 규수가 되어서 한 남자의 여인이 될 거야. 난 화초를 올리고, 언니는 혼례를 치르고…….’ 느린 걸음으로 연당(蓮塘) 위의 다리를 건너 예원이 향하고 있는 곳, 기방이었다. 그 길을 걸으며 예원은 며칠 전의 기억을 떠올려냈다. 비오는 아침. 정후의 소맷자락을 잡고 걷던 그 때의 모습. 예원은 붉어진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며 쓴 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이 길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방 앞에 선 예원은 그저 멍하니 대문을 바라봤다. 처음 정후를 보았던 그 날, 저 문이 열리고 기방에 자신도 모르게 끌려 들어갔었다. 그리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던 정후의 손. 그 손의 따뜻함을 잊을 수가 없다. “고맙단 말도 못했는데…….” 예원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 내렸다. 혹여나 자신의 울음소리를 누군가가 듣지 않을까 예원은 작고 보드라운 손으로 입을 막았다. 불러보고 싶었다. 진화도, 정후도. 모두 불러 얘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예원은 한참동안 기방의 대문을 바라보다 돌아 서 반대편으로 다시 느린 걸음을 걸어갔다. “행수어르신!” 외출을 위해 대문을 열려던 운초를 불러 세운 것은 다름 아닌 진화였다. 이틀 전, 덕주의 양자로 삼아진 정후가 기방을 떠났다. 오누이처럼 지내왔던지라 진화는 정후와의 이별에 참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 모습이 안타까워 운초는 며칠 간 수련에 임하지 않아도 된다고 진화에게 말했다. 그런데, 진화가 달려 나와 운초를 불렀다. “진화야.” “……행수어르신.” “그래.” 운초는 감지(感知)하고 있었다. 진화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말하려고 한다는 것을. 그렇게 진화의 말이 나오길 기다리던 운초에게 진화는 말 대신 바로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진화의 행동에 운초는 살짝 당황했다는 눈빛으로 진화를 바라봤다. 그런 운초의 눈빛에도 진화는 굴하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운초에게 말했다. “저를 이 나라 최고의 기녀로 만들어 주세요.” “……!” 그것은 진심이었다. 정말로 최고의 기녀가 되고 싶은 눈이었다. 운초는 아무 말 없이 진화의 눈을 응시했다. 진화는 그런 운초에게 빨리 대답을 받고 싶었다. “어찌 대답이 없으십니까. 행수께서 저를 그렇게 만들어주세요. 분명 해내실 수 있습니다.” “……내가 왜 그리 해야 하는 지 말해 보거라.” “예?” “그 것이 타당한 지 들어봐야 내가 결정하지 않겠느냐.” 운초의 말에 진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타당한 연유(緣由). 자신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해야만 했다. 그러면 어떻게 얘기를 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진화가 다시 고개를 들어 운초를 바라봤다. “행수어르신께 이리 부탁드리는 것은 제가 선택할 길이 이것 뿐이기 때문입니다. 오라버니처럼 사내였다면, 저도 양자가 되는 길을 선택할 수 있었겠지만 저는 계집입니다. 그리고 기방의 수련생입니다. 이런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최고의 기녀가 되는 것, 그것이 최선이었습니다.” “왜 그리 되어야 하느냐.” “…………” “규수 때문이더냐.” “……평생의 인연입니다.” 진화의 말에 운초는 주먹을 꽉 쥐었다. 평생의 인연(因緣)이라. 그 말은 운초에게 당연하게 들려오지 않았다. 운초는 몸을 숙여 땅 위에 올려 진 진화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진화와 두 눈을 맞추고 물었다. “후회하지 않겠느냐.” “예?” “최고의 기녀라면, 어쩌면 왕의 여인이 될 수도 있다.” “……!” “그래도 그렇게 할 것이냐.” 그렇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저 단순히 이름만 대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그런 최고의 기녀가 되어 자신을 찾을 수 있게만 만들고 싶었을 뿐이었다. 왕의 여인, 그것은 모든 여인의 마지막 꿈이었다. 그러나 진화에게는 달랐다. 기녀(妓女)의 신분으로 한 남자의 여인이 된다. 그 것은 최고의 갈등이었다. 진화는 붉어진 눈으로 운초를 응시했다. 그리고 운초가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며 대답했다. “그럴 것입니다. 옆에 있을 수 있고, 볼 수만 있다면…… 그리 된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같은 시각, 덕주의 사저. 예전과는 사뭇 다른 행색으로 마루에 앉아 있는 정후였다. 그렇게 앉아 있는 정후에게 다가오는 덕주. 정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덕주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사흘이구나.” “……예?” “세자의 혼례가 남은 날 말이다.” “어찌 아셨습니까.” “네 어미, 운초가 말하더구나.” “…………” “궁에 들어가려는 연유도 그 때문이라고.” 정후는 살짝 주먹을 쥐었다. 사흘이라는 시간. 짧다고 표현할 수도 있지만, 정후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느리게 갈 시간이었다. 막지 못하는 그 슬픔을 그대로 안은 채……. 자도 자는 것 같지 않고, 밥을 먹어도 먹는 것 같지 않은 그런 생활의 반복. 해가 뜨고 해가 지고, 달이 뜨고 달이 지고. 이렇게 네 번이나 반복 되는 그 시간 속에서 사는 것이 두려웠다. “버텨내 거라.” 덕주의 말이었다. 정후는 입술을 꾹 깨물고 덕주를 바라봤다. 먼 산을 바라보던 덕주는 정후에게로 시선을 돌려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 버텨내지 못한다면, 너는 절대로 궁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버텨내겠습니다.” “그래. 그래야 한다.” 정후에게도, 예원에게도, 진화에게도, 그리고 적에게도…… 사흘은 너무나도 긴 시간임과 동시에 버텨내야만 하는 시간이었다. 누군가는 막을 수 없다는 슬픔에. 또 누군가는 이별을 해야 한다는 슬픔에. 그리고 누군가는…… 새로운 만남을 시작하는 설렘에 말이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사흘은 너무나도 짧았다. 모든 것이 뒤바뀌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을 알리는……. 그 날이 찾아왔다. 第 8 話 경인월(庚寅月) 을묘일(乙卯日). 중천(中天)이 밝자 안동은 어느새 사람들이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즐길 수 있는 대축제. 바로 세자가 혼례를 치루는 날이 바로 오늘이기 때문이다. 특히 대대로 왕실과 연(緣)이 깊은 안동 김가에서 세자빈이 나온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우르르 사저 앞으로 모여들었다. 전날 밤, 궁(宮)에서 청혼을 의미하는 납채(納采)가 도착했다. 박상궁을 통해 납채를 건네받은 예원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납채를 내려다보았다. 정말 하루가 지나가면 자신은 안동 김가의 규수가 아닌, 왕실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 두려워졌다. 그 두려움에 어느새 예원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 모습에 박상궁은 서둘러 천을 내밀어 예원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진초시(辰初時),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시각이었지만 예원은 혼례를 위한 단장을 하기 위해 일어나 있었다. 마지막 자신의 방을 바라보는 예원의 눈에서는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혹여 누가 보지는 않을까 싶어 서둘러 눈물을 거둬내고 박상궁과 궁에서 온 보행시녀(步行侍女)들을 방으로 들였다. 연분을 바르는 박상궁의 손길과 혼례복을 입히는 보행시녀들의 손길에 예원은 떨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했다. 예원의 앞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선명(훗날 진선대부인 박씨)은 눈물을 고름으로 훔쳐냈다. 사초시(巳初時)가 되어서야 예원은 혼례를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준비를 마친 예원은 곧장 자신의 어미 선명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작고 보드라운 손으로 선명의 손을 잡았다. “……어머니.” “그래. 예원아.” “어머니.” 곱게 한 화장이 혹여 지워질까 선명은 떨어지려 하는 예원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예원은 두 손에 힘을 주고 선명의 손을 꽉 쥐었다. “마지막이겠구나. 너의 이름을 부르는 마지막 날…….” “……가기 싫습니다.” 결국 예원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고 말았다. 지금껏 참아왔던 그 말이 어미인 선명의 눈물을 보자 입 밖으로 나오고야 말았다. 예원의 말에 선명은 예원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를 가졌을 때 나는 봉황을 내 품에 안았었다. 봉황(鳳凰)은 왕실을 의미하고, 왕후를 의미하는 것이라 들었다. 헌데 이리 세자빈이 되어 이곳을 떠나는 너를 보니, 그 것이 다 맞는 말이라 생각이 드는 구나.” 그 말을 끝으로 선명은 잡고 있던 예원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예원의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주고선 방문을 활짝 열었다. 더 이상 지체하면 혼례의 모든 일정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선명은 자신의 슬픔을 뒤로한 채 방에서 걸어 나왔다. 선명의 뒷모습을 보고 울지 않으려 입술을 꾹 깨물던 예원은 조금씩 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에서 나와 별채의 마루에 섰다. 가지런히 놓여 진 신을 신고 예원은 보행시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마당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열린 대문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안동 사람들은 박수갈채를 보내며 환호했다. 가마에 오르기 전, 예원은 사랑채 마루 위에 서있는 자신의 아비 준학(훗날 석풍부원군)을 보고 마지막 절을 올렸다. 준학은 애써 침착한 표정으로 예원에게 손짓했다. 박상궁은 예원이 가마에 오를 수 있도록 가마의 문을 열었다. 치맛자락을 정리하고 가마에 오른 예원. 예원이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마꾼들이 가마를 들어올렸다. 가마가 대문을 지나 사저를 빠져나갔다. 수많은 인파를 뚫고 길가로 나온 가마를 따르는 사자(使者)와 박상궁. 그 뒤를 이어 보행시녀들과 호위무사가 움직였다. 가마에 올라 있던 예원은 살짝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손을 흔들며 기뻐하는 사람들 틈에서 예원은 두 사람을 애타게 찾고 있었다. 그러나…… 둘은 끝내 예원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인데…… 정말 이게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것인데.’ 같은 시각, 기방 마루에 앉아 하늘을 올려 보고 있는 진화의 곁으로 정후가 다가왔다. 정후의 모습에 진화는 살짝 놀란 기색을 보이며 시선을 정후에게로 옮겼다. 진화의 옆에 앉는 정후는 굳은 표정과 함께 시선을 땅으로 떨어트렸다. 두 사람 모두 며칠 새 많이 수척한 모습이었다. “오라버니.” “…………” “우리가…… 배웅도 안 해주고 여기에 이러고 있는 거, 언니도 알까?” “…………” “참아야 하는 데, 그게 너무 아파서…….” 진화는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세게 쥔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내리치는 진화를 보던 정후는 진화를 자신의 품으로 감싸 안았다. 그리고 정후는 눈물도 보이지 않은 채 연신 굳은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유정시(酉正時)가 되어 궁으로 도착한 예원. 해가 뉘엿거리는 시각이었지만 아직도 많은 인파가 세자와 세자빈의 혼례를 보기 위해 궁 근처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예원을 태운 가마가 궁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은 모두 활짝 웃어 보이며 자신의 일 마냥 기뻐했다. 그러나 예원의 표정은 그들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가엾어 보였다. 가마에서 내린 예원이 처음 밟은 궁궐의 땅. 예원은 굳은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런 예원에게 박상궁이 다가서고 고개를 살짝 숙인 뒤 박상궁은 예원에게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혼례는 진성궁(眞成宮) 앞에서 거행되니 그 곳으로 행차하시면 되옵니다.” 박상궁의 말대로 진성궁 앞은 혼례를 위한 준비가 모두 갖춰줘 있는 상태였다. 예원이 들어서자 대신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여 예원을 맞았다. 예원은 표정 변화 없이 박상궁의 부축을 받으며 식이 거행될 장소로 걸어갔다. 예원의 맞은편에는 적이 서 있었다. 두 사람의 혼례는 엄숙한 분위기에서 빠르게 진행되었다. 모두들 세자 적과 세자빈 예원의 식을 지켜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였지만, 당사자들은 아무런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 단 한 번의 눈빛도 주고받지 않은 채, 식이 끝나버리고……. 대신들과 짧은 인사를 하고 난 뒤, 적은 소리 없이 먼저 식장을 떠났다. 주변을 돌아보다 적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안 예원이지만 처음 보는 대신들에게 인사를 하고 난 뒤에야 식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예원은 뒤이어 한인왕과 중전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중전의 처소인 태왕궁으로 향했다. 최상궁의 안내를 받고 궁 안으로 발을 들여 놓은 예원은 나인들이 열어 준 방문 너머로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처음 보는 왕과 중전에게 큰 절을 올렸다. 그 모습에 그저 흡족하다는 미소를 지어보이는 두 사람. 예원이 옷을 추스르고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왕과 중전의 모습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예원이었다. “세자빈.” 한인왕이 예원을 부른 것이었다. 예원은 처음으로 들어보는 세자빈이라는 호칭에 살짝 긴장한 낯빛을 감추지 못한 채 고개를 들었다. “폐하.” “어찌 폐하라 부릅니까. 과인은 이제 세자빈의 아비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자빈은 이제 왕실의 사람이 된 것 입니다.” 한인왕의 말에 이어 들은 중전의 말은 예원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만들었다.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껏 불려오던 ‘김예원’이라는 이름은 이제 그 누구도 부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는 이름이 되어버렸다. 그 생각에 예원의 눈이 어느새 붉어졌다. 그러나 예원은 입술을 꾹 깨물고 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버텼다. “세자빈.” “예. ……아바마마.” “무섭다 생각지 마세요. 이제는 이곳이 세자빈의 집입니다.” “……망극하옵니다.” 달이 하늘에 떠오르고, 해초시(亥初時)가 되어서야 예원은 태왕궁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예원이 발걸음을 옮긴 곳, 바로 식을 거행하였던 진성궁이었다. 진성궁은 앞으로 예원이 지내야하는 궁이기도 하였지만, 오늘은 적과의 첫날밤을 치르는 장소였다. 처소의 문 앞에 서 있던 나인들이 문을 열어주고 혼례복을 입은 그 상태로 처소에 발을 들였다. 처음으로 밟아 본 자신의 방에 예원은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다. 예원은 박상궁이 지시한 대로 금침(衾枕) 옆 방석 위에 앉았다. 예원이 자리에 앉자 나인들이 촛불 옆에 다과상을 내려놓았다. 나인들이 몸을 숙인 채 방을 빠져나가고 뒤이어 박상궁이 예원에게 몸을 숙여 인사를 했다. 그런 박상궁을 예원이 작은 목소리롤 불렀다. “박상궁.” “예. 동궁마마.” 동궁마마. 세자빈의 또 다른 호칭이었다. 지금껏 규수님이라며 부르던 박상궁이었는데, 식을 올리고 처음으로 입을 떼어 부른 것이 동궁마마였다. 예원은 다리 위에 올려두었던 손을 꽉 쥐었다. “……아닙니다.” “소인(小人), 물러가겠사옵니다.” 박상궁은 다시 예원에게 인사를 하고 난 뒤, 방을 빠져나갔다. 결국 방 안에 홀로 남은 예원은 박상궁이 나간 방문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러다 계속 고정되어있던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혼자인 게 무섭습니다. 차라리 세자께서……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기다란 양초 위로 흔들리던 촛불이 점점 짧아지고, 시간은 어느덧 한 시진(時辰)이 지나버린 자초시(子初時)였다. 예원은 지친 기색이 역력해보였고, 이미 방문을 바라보던 시선에는 힘이 전혀 없었다. “왜, 왜 저를 이리 홀로 두십니까.” 예원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인왕이 그리 생각하지 말라 하였지만 예원은 궁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자신의 집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이 없다 할지라도 차라리 익숙한 적의 품에서 잠드는 것이 나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예원의 마음을 모르는 지, 자정(子正)이 지나 깊은 밤이 되어도 적은 예원의 처소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第 9 話 중진왕(重鎭王) 2년. 나라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평화로웠다. 백성들의 얼굴에는 항상 웃음꽃이 피었고, 생활 또한 넉넉해져 굶어죽는 이가 없어졌다는 평까지 파다하게 퍼졌다. 한인왕(閒人王)의 다음 후계자로 지목되어 왕위를 계승한 중진왕은 이 나라의 유일한 세자, 적이었다. 약관(弱冠)식을 치르고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왕위를 계승 받은 지는 2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선왕들보다 안정된 생활이 이어지면서 중진왕의 정치력은 상당한 수준이라 평가되고 있었다. 그리고 중진왕과 함께 중전의 자리에 오른 세자빈, 예원. 올해 스물셋이 된 예원은 어느덧 성숙한 여인으로 성장해있었다. 또한 진성왕후(眞成王后)라는 존호(尊號)를 받으며 왕후로 책봉되었다. 이렇게 평화로운 나라에도 유일하게 왕과 왕의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돌고 돌았다. 그것은 단 한 번도 중진왕이 진성왕후와 침소에 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에 대해 백성들은 여러 가지 근거들을 내세우며 떠들어대곤 하였다. 중진왕이 씨를 뿌리지 못한다는 설과, 진성왕후의 몸에서는 씨가 자랄 수 있지 않는다는 등의 여러 가지 유언비어(流言蜚語)들이 말이다. 진성궁(眞成宮) 앞 뜰. 몇 명의 나인들이 뒤를 이어 서있고 그 앞으로는 박상궁이 서 있었다. 그리고 못 앞에 서서 달을 바라보는 예원이 있었다. 차가운 밤바람이 진성궁에 불어오자 박상궁은 예원에게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중전마마. 밤바람이 차옵니다. 어서 처소로 드시지요.” “……박상궁.” “예. 중전마마.” 예원의 옆에 몸을 숙인 채 서있던 박상궁은 살짝 허리를 펴 예원을 바라봤다. 중천(中天)의 달을 바라보며 입술을 꾹 깨무는 예원의 모습에 박상궁은 자신도 모르게 아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아직도 궁이 참 무섭습니다.” “중전마마.” “벌써 4년이라는 시간을 마음 편히 잠들지 못하며…… 그리 지냈다는 거, 박상궁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4년이라는 시간, 예원에게는 지옥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안동에서 지내고 있는 석풍부원군과 진선대부인이 가끔 입궐하여 예원의 처소를 들르기도 하였지만, 그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문제였다. 마음에 품은 이를 보지 못한 그 긴 세월, 평생의 지기를 만날 수 없는 그 슬픔, 자신의 지아비로 여기는 사람에게 안길 수 없는 그 괴로움……. 그것은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허전함이었다. “너무…… 외롭고 괴롭습니다.” 예원의 볼을 타고 한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눈물이 달빛에 순간 반짝였지만, 그마저 구름으로 인해 가려졌다. 다음날, 태왕대비의 처소에 문후(問候)를 가기 위해 채비를 마친 예원은 곧장 태왕궁으로 향했다. 태왕궁은 한적함이 감돌고 있었다. 예원과 박상궁, 그리고 몇 나인들이 태왕궁에 도착하자 처소의 앞에 서있던 최상궁이 예원에게 다가와 몸을 숙이며 인사를 했다. 예원은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띄우며 최상궁에게 물었다. “어마마마께서는 기침(起寢)하셨습니까.” “예. 한 시진(時辰) 전에 기침하셨사옵니다.” 예원은 최상궁에게 자신이 왔다는 것을 태왕대비에게 아뢰라고 말한 뒤, 처소의 앞으로 걸어갔다. 잠시 뒤 태왕대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인들은 숙인 몸으로 굳게 닫혀있던 문을 열어주었다. 예원은 태왕궁의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밤새 평안(平安)하셨사옵니까.” “예. 내 밤새 아주 좋은 꿈을 꿨습니다.” “꿈을 꾸셨사옵니까.” 지난 4년을 그리 했듯이 오늘도 태왕대비와 예원은 소소한 담소를 나눴다. 그런데 오늘은 태왕대비가 예원에게 아주 흥미로운 일이 있다며 넌지시 말을 꺼냈다. “오늘 궁궐 내의 무관을 뽑는다고 합니다.” “아, 지난 날 언뜻 들어본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주상(主上)께서 직접 그곳에 자리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적의 소식에 예원은 살짝 표정이 굳어졌다. 그것을 태왕대비에게 들킬까 고개를 살짝 숙여 애써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러나 태왕대비는 알고 있었다. 적에 대한 소식을 예원이 남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중전.” “예. 어마마마.” “……많이 힘들지요.” “다 제가 부덕(不德)한 탓이 아니겠사옵니까.” 태왕대비는 그런 예원이 가엾어 보였다. 지난 4년이라는 시간을 그리 외롭게 보냈으면서도 자신을 찾아와 내색 한 번 하지 않는 예원이 가엾고 기특하였다. 그리고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아들 적이 왜 예원을 품에 한 번도 담지 않았는지 이해도, 생각도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적에게 후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마음에 둔 여인도 없으면서 어찌 이렇게 예원에게 무심할 수 있을까 싶어 태왕대비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고 있었다. 같은 시각, 무관시험이 열리는 중앙 사청(射廳)에는 태왕대비의 말대로 적이 자리하고 있었다. 총 200명의 예선 통과자가 적의 앞에서 차례대로 대결을 펼치고 있었다. 적은 차분한 표정을 계속 유지한 채 참가자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적은 마지막 대결이 있는 그 순간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 모습에 문내관은 적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러나 묻지 않았다. 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 행동으로 인하여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을 거라 장담했기 때문에……. 마지막 무관 시험의 참가자 두 명이 시험장 위에 올라서고, 적은 차분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두 사람의 목검이 나란히 세워지고 드디어 대결은 시작되었다. 그런데 대결을 지켜보던 적의 표정이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지금껏 그토록 차분하던 표정은 사라지고 시험장 위의 한 참가자를 유심히 살펴보는 모습이 심각하기 그지없었다. 경기의 승자를 예상이라도 한 것일까. 적이 그렇게 바라보던 사내가 마지막 대결에서 승리를 했다. 사내가 적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자 적은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행동에 문내관은 놀란 표정으로 적을 바라보다 다시 몸을 낮췄다. 적은 굳은 표정으로 사내가 있는 시험장 위로 걸어갔다. 시험장에 남아있던 참가자들과 무관들이 적의 행동에 다들 놀란 눈치였지만 적은 개의치 않았다. 적이 점점 자신에게 가까워져 오자 사내는 시험장 위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적은 사내의 바로 앞에 정확히 섰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 “왕의 물음이다. 불충(不忠) 죄를 저지를 셈이더냐.” 익숙한 질문에 사내는 고개를 들어 적을 바라봤다. 그리고 적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대답했다. “소신(小臣), 김정후라 하옵니다.” 정후의 대답에 적은 순간 온 몸이 경직되었다. 자신의 직감이 맞아 떨어진 것이었다. 단 한 번의 만남이었지만 너무나도 강렬해 절대로 잊을 수 없었던 그 날의 기억. 그리고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잊어버릴 수 없었던 그 이름. “……네가, 궁으로 찾아왔구나.” “예. 소신이 직접 궁으로 찾아 왔습니다.” 기억하고 있었다. 그 날, 세자 적이 자신에게 했던 그 말을……. ‘김정후라, 내 너의 그 측은지심(側隱之心)을 높이 사 궁으로 돌아가 다시 너를 부를 것이다.’ 적 또한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그런 말을 정후에게 했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또 다른 기억이 적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 것은 처음 정후에게 했던 질문의 답이었다. ‘……그, 그저 길가에 쓰러져 계시는 것을 보았을 뿐입니다.’ 그 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그 당시에 알고 있었다. 처음 본 사이가 어찌 집까지 알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적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정후에게 물었다. “너는 무엇을 하기 위해, 무관이 되려 하는 것이냐.” “소신은…… 진성왕후님의 수행궁전지사(隨行弓箭之士)가 되고 싶습니다.” 第 10 話 늦은 밤, 진성궁(眞成宮) 소속의 상궁들과 나인들의 발걸음이 무척이나 분주했다. 천자전(天子殿)에서 보내온 연통(連通)에 의하면 중진왕이 오늘 밤을 진성궁에서 보낼 것이라 하였다. 4년 만에 처음으로 왕후와의 첫날밤을 보내는 날이니 당연히 분주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금침에 앉아 단장을 하는 예원의 손끝이 떨려왔다. 오랜 시간동안 마주 앉아 이야기도 몇 번 해보지 않았던 적이 자신을 찾아온다는 것이 너무도 긴장되었던 것이다. 비록 그를 연모(戀慕)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적은 지아비였다. “……박상궁.” “예. 중전마마.” “전하(殿下)께서는 언제 오신다하셨습니까.” “해정시(亥正時)에 오신다는 연통을 받았사옵니다.” 일 각(刻)의 시간이 남았다. 그 사이 모든 준비를 마친 상궁들과 나인들은 본래 위치에 서서 중진왕을 맞을 준비를 마쳤다. 박상궁도 방에서 나와 처소의 바로 앞에 섰고, 금침에 앉아 있던 예원도 옆으로 자리를 옮겨 적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리고 진성궁의 입구를 환한 등불이 밝히고, 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적은 진성궁의 앞으로 걸어갔다. 모든 상궁들과 나인들은 몸을 낮추며 적에게 예를 갖추었다. 적은 시선을 내린 채 박상궁에게 말했다. “고하 거라.” 박상궁을 적을 바라보고 고개를 숙였다. 그 자세 그대로 예원의 처소 앞에서 적이 왔다는 사실을 예원에게 알렸다. “중전마마. 전하께서 오셨사옵니다.” 그 소리에 자리에 앉아 있던 예원은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입술을 꾹 깨물고선 방문을 바라보며 적을 맞이하라고 대답했다. 예원은 고개를 숙인 채 적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발소리가 방문 앞에서 멈추고, 문이 열렸다. 예원은 마른 침을 삼키고 움츠리고 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적을 바라봤다. 적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것이 얼마만인지…… 예원은 발그레한 볼을 한 채 적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전하.” “……자리에 앉지요.” 오랜만에 만나 적이 예원에게 처음으로 던진 말은 따듯한 부름이 아니었다. 편전(便殿)에서 대신(大臣)들과의 자리에서처럼 딱딱하고 냉정한 그런 말투일 뿐이었다. 적이 자리에 앉자 예원은 고개를 숙인 채 따라 앉았다. 두 사람의 모습을 비추는 촛불이 살짝 감도는 바람에 흔들리고, 적은 자신의 앞에 놓인 주합(酒盒)을 잡았다. 그리고 술잔을 가득 채운 뒤 아무런 말도 없이 목을 축였다. 그 모습에 예원은 직감하고 있었다. 적이 자신을 찾아 온 것은 다른 연유(緣由)라는 걸……. “중전.” “예. 전하.” “……내일부터 중전의 곁에는 수행궁전지사(隨行弓箭之士)가 함께 할 것이오.” 적의 말에 예원은 고개를 들어 적을 바라봤다. 그리고 적이 찾아 온 연유가 바로 이 말을 전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았을 때, 예원은 자신의 떨리는 손이 멈춘 것을 알아챘다. 그 손으로 치맛자락을 쥔 예원은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적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 옵니까.” “말 그대로 중전을 지키는 무사를 진성궁으로 보낼 것이오.” 적은 단호했다. 예원이 자신의 말을 거절한다하여도 상관없다는 듯……. 그러나 예원은 자신의 생각을 적에게 전했다. 비록 그것이 꺾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예원도 알고 있었다. “전하. 신첩(臣妾)은 무사가 필요치 않사옵니다.” “……그리할 것이니, 내일 그 자를 반겨주기 바라오.” 적은 그 말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의 행동에 예원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렇게 깨문 입술에서 피 한 방울이 떨어져 예원의 치마를 적셨다. 그러나 적은 그런 예원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방문으로 걸어갔다. 그런 적을 바라보다 예원은 두 주먹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나 적에게 외쳤다. “신첩이!” 예원의 외침에 적은 걸음을 멈춰 섰다. 그러나 적은 예원에게 뒷모습만 보일 뿐 돌아서지 않았다. 적이 원망스럽다는 듯 예원은 흐느끼며 적에게 물었다. “신첩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십니까.” 예원은 자신의 떨리는 주먹을 가슴에 가져갔다. 그리고 주체하지 못하는 슬픔에 가쁜 숨을 내쉬며 적에게 말했다. “전하의 여인이옵니다. 헌데, 어찌…… 저를 이리 버리십니까.” 적은 그제야 살짝 고개를 돌려 예원을 바라봤다. 예원의 모습은 아련하고 가여웠다. 그러나 적은 자신의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짓누른 채 낯선 사람에게 말하듯 그렇게 냉정한 말투로 예원에게 대답했다. “과인(寡人)이 중전을 품을 수 없는 연유(緣由) 알게 된다면…… 그 때는 과인이 왜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었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오. 허나 중전에게 그 연유를 언제 말하게 될 지는 과인도 알지 못하니…… 과인의 여인이라는 것을 차라리 잊어버리시오.” 적의 말에 예원은 자리에서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지도 못한 채 적의 모습을 바라봤다. 적은 잠시 망설이다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방문을 열어 예원의 처소에서 빠져나갔다. 예원의 처소의 문이 열리자, 처소 주변에 있던 모든 궁인(宮人)들이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애써 감추며 몸을 낮췄다. 적은 처소의 계단을 내려와서야 그 걸음을 멈춰 섰다. 걸음을 멈춰 서게 한 것은…… 예원의 흐느낌이었다. 가냘프게 들려오는 그 울음소리에 적은 돌아서서 처소를 바라봤다. ‘그래도…… 그 자를 만나면…….’ 속으로만 그리 외치며 적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두 주먹을 쥔 채로 다시 몸을 돌려 대전(大殿)으로 걸음을 옮겼다. 적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박상궁은 계속해서 울리는 예원의 울음소리에 처소의 문을 열었다. 자신의 가슴을 부여잡고 바닥에 엎드려 울고 있는 예원. 박상궁은 서둘러 예원에게로 걸어갔다. “마마.” “어쩝니까. 나는 어찌해야 하는 것입니까.” 박상궁은 그런 예원을 안아주었다. 예원은 박상궁의 팔을 잡았다. 그렇게 한참을 진성궁에서는 울음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다음날. 인초시(寅初時)가 되어서야 잠에 든 예원은 태왕대비의 문후도 가지 못한 채 금침에 누워 있었다. 다행히도 어제의 일을 태왕대비가 알게 되어 오늘은 오지 않아도 되니 몸조리를 잘 하라는 연통을 보내왔다. “중전마마. 미음(米飮)이옵니다.” “먹지 않습니다. 가져가세요.” “한 술이라도 드셔야하옵니다.” “……가져가세요.” 박상궁은 예원의 뒷모습을 애처롭다는 듯 바라보다 한 쪽에 상을 밀어두고 방을 나갔다. 홀로 방에 남은 예원은 돌아서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방문을 바라봤다. ‘내일부터 중전의 곁에는 수행궁전지사(隨行弓箭之士)가 함께 할 것이오.’ 오늘이라 했다. 예원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4년이라는 시간동안 함께 해왔던 진성궁의 모든 궁인들은 중전이 내린 사람들이었을 뿐, 적이 보내 준 이는 단 한명도 없었다. 오늘 오는 수행궁전지사만이 적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예원은 그를 맞이하라 했던 적의 말에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그리고 힘없는 발걸음을 옮겨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 조심스럽게 열리는 방문에 밖에 서 있던 박상궁은 나오려던 예원을 막아섰다. “중전마마!” “……전하의 사람이 온다하였습니다.” “허나…….” “괜찮습니다. 나는…… 괜찮습니다.” 예원은 자신의 팔을 잡고 있던 박상궁의 손을 바라봤다. 박상궁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손을 거뒀다. 그러자 예원은 느린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왔다. 시린 바람이 예원을 감쌌지만 그것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예원은 연당(蓮塘)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예원은 바람으로 작게 출렁이는 물의 움직임에 시선을 멈췄다. 그런데, 예원의 뒤로 작게 발소리가 들려왔다. 예원은 고개를 들어 천천히 뒤를 돌아 그 발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봤다. 흐릿하게 보여 오는 낯선 모습에 예원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이내 걸어오던 그 모습이 멈춰 섰다. 예원의 옆에 서 있던 박상궁은 그 자의 모습에 충분히 놀라고 있었지만 이내 고개를 숙였다. 예원의 눈에 뚜렷하게 보이는 그 모습……. ‘……잘 지내실까 궁금해 들렀습니다.’ 예원의 붉어진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모습이 점점 예원에게 가까워졌다. 예원의 볼로 또 다시 눈물이 떨어질 때, 예원의 볼을 무언가가 따스하게 감쌌다. 그리고 그 따스함이 예원의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이렇게…… 또 우시는 것입니까.” 그 것은 손이었다. 처음 만난 그 날, 이별의 생각에 울고 말았던 예원의 눈물을 닦아주었던 그 손이었다. 비록 행색이 달라졌지만 예원은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그려보던 모습이었기에……. “……그대는…….” 예원의 볼을 감싸고 있던 손을 내리고, 그는 예원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예원을 바라봤다. 눈물이 가득 맺힌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예원에게 살짝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소신(小臣), 김정후. 수행궁전지사로…… 처음 왕후님을 알현하옵니다.” 第 11 話 예원은 정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지금이 혹여 꿈이진 않을까 두렵기도 했고, 떨리기도 했다. 그렇게 그려보고 싶었던 그 모습이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으니……. 예원은 어느덧 언제 울고 있었냐는 듯 환하게 웃어 보이며 정후에게 물었다. “……어찌 이곳에 왔나요.” 정후는 예원의 미소에 자신도 덩달아 미소 지었다. 그리고 예원의 두 눈을 응시하며 누구보다도 따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신(小臣)이기에 온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요.” “소신이 지킬 수 있고, 지켜야만 하는 것이…… 왕후님이시기에 이곳에 온 것입니다.” 옆에서 두 사람의 재회를 지켜보던 박상궁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예원이 정후를 연모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4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 몸이 좋지 않아 병상에 누워 있을 때도 예원은 꿈속에서 정후를 찾았다. 박상궁은 시선을 돌려 진성궁의 입구를 바라봤다. 그리고 이내 경직된 표정으로 그곳을 응시했다. 이미 돌아서서 반대편으로 걸어가고 있었지만 그 행색의 주인공은 누가 뭐라 해도 중진왕이었다. 박상궁은 고개를 돌려 예원과 정후가 있는 곳을 바라봤다. 예원의 저리 행복한 미소를 보는 것이 참으로 오랜만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 미소를 중진왕이 보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다. 편전(便殿)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을 것이라 그리 다짐했지만 결국 적의 걸음은 진성궁에 도착해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이끌림에 적이 본 것은 자신이 이어준 두 사람의 재회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볼 수 있었다. 지난 4년 간 자신의 옆에서 궁(宮)을 지키던 예원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그런 아름답고도 환한 미소를……. 적은 윗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돌아섰다. 그리고 짧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두 주먹을 세게 쥐었다. 그리고 가슴 속에 계속해서 세뇌시켰다. ‘……마음에 품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알고 있다.’ 같은 시각, 사정시(巳正時)에 열리는 편전회의에 참석하려는 대신(大臣)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중 무리를 지어 편전 계단을 올라오고 있는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주품석좌(主稟席座) 정종하를 대표로하는 무리들이었다. 주품석좌는 가장 상급의 대신으로서 왕에게 의견을 묻고, 그 의견에 대립하는 대신들의 의견을 정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종하는 한인왕 2년에 주품석좌의 자리에 올라 중진왕의 시대에도 함께하고 있었다. “소식 들으셨습니까.” “무엇을 말인가.” 세간좌(稅奸座) 임택진의 물음이었다. 느린 걸음으로 함께 동행 하던 대신들도 소식이라는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궁을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러는 것처럼 말이다. 택진은 혹여 다른 이가 듣지는 않을까 싶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어젯밤, 전하께서 중전의 처소에 가셨답니다.”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중요한 것은 뒵니다. 전하께서 처소에 들른 지 한 식경(食頃)도 채 되지 않아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그건 여러 번 있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벌써 4년입니다. 어찌 사내가 여인이 있으면서 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긴, 그건 그렇습니다.” “장거리에는 이미?파다하게 퍼졌습니다.” “무엇이요.” “아, 그 거 말입니다.” “그 거라니.” 택진은 아직도 소식을 듣지 못한 대신들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어찌 나라의 큰일을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귀가 어둡다는 식의 표정을 지으며 말이다. 그리고 대신들에게 그 것이 무엇인지 얘기해주려던 찰나. “……씨를 못 뿌린다는 것.” 종하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택진은 기운이 쏙 파진 표정으로 종하를 바라봤다. 대신들은 종하의 말에 주변을 살피며 조금씩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아냈다.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고 있던 종하는 편전의 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왼쪽 입 고리를 살짝 올리며 비웃음 쳤다. “주상 전하(主上殿下) 납시오.” 그 때, 문내관의 목소리가 들리자 대신들은 분주히 움직였다. 그리고 편전의 입구에서 보이기 시작하는 중진왕의 모습에 몸을 숙여 인사하는 대신들. 그러나 종하는 살짝 고개를 숙일 뿐, 다른 대신들과는 차원이 다른 모습으로 적을 맞이했다. 계단 위에 올라선 적은 차가운 시선을 종하에게 두었다. 아버지이자 선왕인 한인왕에게 충신이라 인정받으며 백성들에게도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주품석좌이지만, 적은 그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을 어린 취급하는 것이 싫었고, 특히 그의 눈빛은 증오가 생길 만큼 싫었다. 적은 오른쪽 입 고리를 살짝 올린 뒤,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옮기던 걸음을 종하의 앞에서 멈췄다. 살짝 고개를 꺾어 종하를 내려 보며 말을 걸었다. “좋은 아침이오.” “예. 전하.” 종하는 그런 적을 바라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그 미소를 읽지 못한 적은 종하를 매서운 눈으로 노려본 뒤 걸음을 옮겼지만, 옆에 몸을 숙인 채 눈치를 보던 대신들은 그 자리에서 경직되었다. 그 눈은 꼭 30여 년 전의 그 날과 비슷했기 때문에……. 적이 편전으로 들어서고, 종하와 대신들이 뒤따랐다. 편전의 문이 닫히고 회의가 시작되었다. 회의의 안건(案件)은 지방 탐관오리들의 가결(加結)에 대한 처벌이었다. 비록 지금의 나라는 선왕들의 시절보다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롭지만, 탐관오리가 사라졌다고는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적은 자신의 아버지인 한인왕의 임기 말년, 세자의 이름으로 비밀리에 안사관(按査官)을 만들었다. 안사관의 관사(館事)들은 각 지방의 관청에 하급 관리로 역임되어 조사를 하였고, 그로 인해 몇몇 지방에서 탐관오리의 횡포가 적발된 것이다. 열띤 회의의 결과, 그들에게 가결한 양의 두 배를 나라에 납헌(納獻)할 것을 명하고, 관직을 파하며 3대를 관직에 올릴 수 없도록 조치하기로 정해졌다. 주요 회의가 끝이 나자 택진이 눈치를 살피며 이야기를 꺼냈다. “전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재명일(再明日) 뒤 열릴 가무별감(歌舞別監)의 연회에 여악행수(女樂行首)가 각 지방의 대표 기녀(技女)들을 선보일 수 있도록 청하였사옵니다.” 그 말에 몇몇 대신들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여인을 안지도 않는 왕이 어찌 천한 기녀들을 궁에 부르라 하겠는가 싶었으니 말이다. 적은 몇몇 대신들을 보더니 살짝 웃어 보이고선 대답했다. “……그리하시오.” 뜻밖의 대답에 대신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적은 대신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대신들이 자리하고 있는 곳으로 잠시 시선을 돌렸다가 몸을 돌려 편전을 빠져나갔다. 다음 날. 장거리는 무척이나 소란스러웠다. 아이들은 신이 나 춤을 추며 뛰어다녔고, 장사를 하는 상인들마저 상점에서 나와 구경하기 바빴다. 그 이유는 나라의 최고 기녀들의 행진이 있기 때문이었다. 가마를 타고 가는 여악행수의 뒤로 말에 올라탄 기녀들이 하나 둘 나타났다. 그 모습에 장거리의 사내들은 마른 침을 삼켜가며 애타는 눈빛으로 손을 뻗곤 했다. 그리고 기녀들 중, 유독 사내들에게 둘러싸여 행차하는 기녀가 있었으니…… 바로, 진화였다. 들썩거리는 몸은 색(色)이 넘쳐날 정도로 아름다웠으며 눈빛은 강렬했다. 그러나 진화는 사내들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멀리 보이는 궁(宮)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드디어…… 만나는 구나.’ 궁 역시 내일 열릴 연회(宴會) 준비로 소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진성궁은 무척이나 조용했다. 한적한 바람이 진성궁을 감쌀 뿐, 다른 궁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정후는 연당(蓮塘)을 바라보고 있는 예원의 곁으로 다가갔다. 예원은 그 기척을 느꼈는지 돌아서서 정후에게 웃어보였다. 정후는 살짝 미소 지으며 예원에게 물었다. “다들 즐거워하는데 어찌 이리 계십니까.” “제가 즐거워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해 보이십니다.” 예원은 살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고개를 들어 정후를 바라봤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틀며 아까보다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그런 즐거운 궁이나 돌아볼까요?” “예?” 정후는 예원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정후를 보며 예원은 활짝 웃더니 정후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정후는 순간, 경직된 표정으로 예원을 바라봤다. 그리고 예원은 그런 정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같이, 구경 가요.” 정후는 꼭 4년 전에 자신에게 기방을 구경 시켜 달라던 예원의 모습을 새삼스레 떠올렸다. 그 생각에 고개를 숙여 살짝 미소 짓던 정후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팔을 예원에게 내어주었다. 자신의 앞에 보이는 정후의 팔을 내려 보던 예원은 망설이다 정후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진성궁을 빠져나왔다. 第 12 話 정후의 말대로 각궁(各宮)의 궁인들은 들 떠 있었다. 그만큼 연회는 오랜만에 열리는 것이었다. 적이 왕위를 계승하면서 열린 연회가 나라에서 가장 최근에 열린 연회였으니 말이다. 거기에 나라 최고의 기녀들이 연회에 참여한다는 것에 모든 이들의 기대는 가득 부풀어져 있었다. 예원과 정후의 뒤로 줄줄이 따르는 나인들, 그리고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입술을 꾹 깨무는 박상궁. 그러나 그런 박상궁의 눈빛을 느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예원은 정후를 바라보며 살며시 물었다. “헌데, 진화는 어찌 지내나요.” 예원의 물음에 정후는 살짝 입가에 미소를 짓다, 이내 굳어진 표정으로 예원에게 대답해주었다. “기녀(技女)가 되었습니다.” “그리고요.” 사실, 진화의 소식은 직접 전해 듣지 못했다. 2년 전, 운초의 제안으로 각 지방의 가무(歌舞)를 배우기 위해 안동을 떠났다. 그리고 정후 역시 그 당시 무관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하며 지냈기 때문에 더 이상 진화의 소식을 알 수 있는 길이 없었다. 가끔씩 운초를 통해 편지를 받을 뿐, 얼굴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소식이 끊긴 사실을 예원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런 말을 한다면 예원은 진화 걱정에 힘들어 할 테니……. “그저 기녀로서 재주를 팔며 지내고 있습니다.” “잘 지내고 있는 것이죠?” “예.” 정후의 대답에 예원은 활짝 웃어보였다. 그리고 멈춰있던 걸음을 떼며 수줍은 듯 정후에게 말했다. “언제 한 번 진화를 보러 안동에 가봐야겠어요.” “……예?” “꼭 만나러 간다고 기다리라 약조했어요. 그러니 이제라도 만나러 가야겠죠.” 정후는 예원의 말에 시선을 땅으로 떨어트렸다. 그리고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하지만 정후는 예원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다시 웃어 보였다. 그런 정후를 바라보다 자신이 잡고 있는 정후의 팔을 손으로 감싸며 예원은 말했다. “그 때, 같이 가줘요.” “……예. 그리 하겠습니다.” 정후의 약속을 받는 예원은 더욱 활짝 웃어 보이다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봤다. 그 순간, 그리 활짝 펴있던 웃음꽃이 예원의 얼굴에서 사라졌다. 정후는 그 모습에 시선을 돌렸다. 정후의 눈에 보이는 것은…… 점점 자신과 예원에게 가까워져 오는 적의 행렬이었다. 적은 두 사람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두 주먹을 세게 쥐고 있었다. 적의 뒤를 따라 걷던 문내관은 그 모습에 입술을 꾹 누르며 불안을 참아냈다. 한 번도 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왕의 여인이었다. 다른 사내와 있는 모습이 보기 좋지 않을뿐더러, 지금 예원의 곁에 있는 이는 안동에서 예원을 업은 채 적에게 나타난 이었으니 말이다. 적이 살짝 거리를 둔 채로 멈춰 섰다. 예원과 정후는 살짝 고개를 숙여 적에게 인사를 했다. 그러나 적의 눈에 가장 확연하게 보이는 것은 정후의 팔을 붙잡고 있는 예원의 손이었다. 그러나 예원은 그러한 사실을 망각한 채로 그저 적을 바라보고 있었다. 적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예원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궁전지사에게 물을 것이 있으니, 잠시 자리 좀 비켜 주겠소.” 적의 말에 예원은 살짝 커진 눈으로 적을 바라봤다. 그러다 정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제야 자신이 적의 팔을 잡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황급히 손을 내리고선 적을 바라봤다. 예원은 적의 어두운 표정을 보다 시선을 떨어트리고선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예원이 점점 멀어지자 정후는 살짝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적을 바라봤다. 적은 정후에게 한 걸음 다가오더니 정후에게 시선을 둔 채,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가 안동 목사 김덕주의 양자라 들었네. 그것이 사실인가.” 적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정후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숙이며 적에게 대답했다. “그러하옵니다.” 정후의 말에 적은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다 정후의 표정을 살피며 다시 물었다. “그 자가 누군 지 모르는가.” 정후는 그 물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적을 바라봤다. 적은 정후에게로 향하던 시선을 거두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적의 행동에 정후는 가늘게 눈을 뜨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 그러나 정후가 그 생각을 다 정리하기도 전에 적이 먼저 말을 꺼냈다. “과인이 괜한 말을 하였다. ……신경 쓰지 말 거라.” 적은 정후에게 두었던 시선을 옮기더니 멈춰 섰던 발걸음을 떼었다. 그렇게 자신에게서 멀어져가는 적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정후는 입술을 삐죽 내밀다가 고개를 갸웃거리고선 예원이 먼저 간 길을 따라 걸었다. 다음 날. 궁(宮)은 연회를 보기 위해 몰려 든 궁인들과 관리들로 인해 무척이나 북적거렸다. 그리고 오늘은 진성궁도 바쁘기는 마찬가지였다. 연회는 나라의 공식적인 행사였고, 그러한 행사에는 당연히 국모(國母)인 왕후가 참석해야하는 법. 오랜만에 참석하는 공식 석상이기에 진성궁의 궁인들은 바쁠 수밖에 없었다. 예복(禮服)을 차려입은 예원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방을 나섰다. 새하얀 피부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선홍빛 입술은 예원의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었다. 계단을 다 내려온 예원은 진성궁의 입구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몸을 돌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입구에는 정후가 예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예원의 모습에 정후는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표정을 애써 감췄다. 그리고 예원이 입구를 지나치자 뒤를 따랐다. 그렇게 예원의 행렬이 연회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연회장에는 이미 많은 대신들이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태왕대비 역시 자리에 앉아 연회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예원은 자신의 자리에 앉기 전, 태왕대비에게 예를 갖추었다. “오늘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태왕대비와의 짧은 담소(談笑)를 나누고 자신의 자리로 걸음을 옮기는 예원. 그 뒤로는 정후가 따랐다. 정후의 모습을 지켜보던 태왕대비는 처음 보는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다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예원의 자리에 앉자 대신들은 고개를 숙여 예원에게 인사를 했다. 예원 역시 대신들이 있는 곳을 바라보면서 살짝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이 연회장에 도착했다. 모든 대신들이 일어서고 예원과 태왕대비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적은 태왕대비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한 뒤, 예원의 옆인 자신의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대신들은 적이 자리에 앉자 자신들도 따라 앉았다. 드디어 연회의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다. 가무별감(歌舞別監)의 연주에 맞춰 각 지방의 대표 기녀들이 등장하였다. 궁중무용 처용무(處容舞)부터 시작해 민속무용 승무(僧舞)까지……. 각양각색의 무용이 연회장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연회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이번에 기녀로 승급하는 수련생들이었다. 장구춤의 옷차림새로 올라선 수련생들. 모두의 시선은 그곳에 향해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예원은 커진 눈으로 수련생들 중 한 사람을 바라봤다. ‘……이 옥가락지를 끼고 나를 기다려 주거라. 내 언젠가는 너를 다시 찾아 올 것이다.’ 예원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한 수련생의 손에서 반짝이는 옥가락지였다. 4년 전, 안동을 떠나기 전에 진화에게 전해주었던 자신의 옥가락지. 음악이 시작되었다. 춤을 추는 수련생들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몸짓으로 연회장의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다. 차츰 빨라지는 장단에 빠른 발놀림으로 움직이는 수련생들. 하지만 예원은 단 한 수련생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진화였다. 지금 이 연회장에서 춤을 추고 있는 이들 중 진화가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진화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정후도 그 수련생만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수련생이 자신만을 보고 있는 것 역시……. 적은 춤을 바라보고 있던 자신의 시선을 예원에게로 돌렸다. 그런데 예원의 시선이 단 한 사람에게만 향한다는 것을 느낀 적은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춤을 추고 있는 수련생이었다. 그리고 그 수련생이 예원에게 시선을 두며 춤을 추고 있다는 것도 느꼈다. 춤이 끝나고, 수련생들은 그 자리에 앉았다. 수련생들이 기녀로 승급할 수 있는 기회는 바로 지금이었다. 화초머리를 올려줄 첫 사내를 찾아야만 기녀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대신들은 자신이 마음에 들어 하는 수련생에게 화초를 올려주겠다며 나섰다. 그리고 그 순서를 차례대로 흘러 진화에게 도착했다. 수련생들 중 가장 수려한 외모를 지닌 진화였기에 대신들은 서로 진화에게 화초를 올려주겠다며 말했다. 그 모습에 예원은 가지런히 올려두었던 손으로 치맛자락을 꽉 쥐었다. 싫었다. 아직 열아홉 뿐이 되지 않은 소녀인 진화에게 부인도 있고, 자식도 있는 그런 대신들에게 안기기는 싫었다. 그러나 단 한 명의 대신이 예원의 눈에 들어왔다. 바로 문리좌(文吏座)의 박준재였다. 준재는 대신들 중 가장 어렸고, 부인도 자식도 없었다. 또한 준재가 지금껏 진화를 품겠다며 손을 내민 대신들보다 상급이라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그 자도 두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기녀의 신분이 한 남자에게 기댈 수 없는 것을 모르지는 않지만, 한 번 품어지고 버려질 진화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예원은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런 예원의 모습에 정후는 두 눈을 감았다. 역시, 정후도 그 모습을 보기 싫었다. 오누이보다도 더 정을 줬던 아이가 진화였다. 그런 진화가 대신들의 노리개가 되는 것이 너무나도 싫었다. 그런데 그 순간, “……과인이 품겠소.” 그 목소리에 모든 대신들의 시선이 위를 향했다. 그리고 태왕대비의 시선과 그 곳에 있는 모든 궁인들의 시선 역시 그러했다. 자신의 여인도 품지 않은 자가 지금 천한 기녀를 품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바로 적이었다. 예원과 정후는 놀란 기색을 숨기지 않고 적을 바라봤다. 적은 아무런 표정도 짓고 있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진화는 얼굴을 들어 적을 바라봤다. 4년 전, 운초의 말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최고의 기녀가 된다는 것은 왕의 여인이 된다는 것. 그러나 그 때, 진화는 상관없다고 말했다. 예원을 볼 수만 있다면…… 그것은 지금도 변함없었다. 진화를 품겠다고 손을 내밀고 있던 준재는 실망스럽다는 표정으로 손을 거뒀다. 거둬진 손을 바라보고 자리에서 일어난 적은 진화가 있는 연회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연회장 위에 올라 선 적은 진화의 앞에 멈춰 자신의 손을 진화에게 내밀었다. 진화는 고개를 들어 예원과 정후가 있는 곳을 바라봤다. 그리고 아랫입술을 깨문 뒤, 자신의 머리를 묶고 있던 붉은 댕기를 잡아당겼다. 댕기가 풀리고, 진화는 두 손으로 댕기를 잡아 자신에게 내민 적의 손에 올렸다. 第 13 話 적이 한 번도 품지 않은 자신의 여인을 두고 기녀를 품는다는 소식에 모든 대신들과 백성들은 늦은 밤이 되도록 궁 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왕후에게 그러한 모욕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들이 궁을 가득 메웠다. 그 건 태왕대비도 마찬가지였다. 태왕대비는 직접 적에게 찾아가 이 사태를 수습하라 청했지만, 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주상(主上). 이리 하시면 안 됩니다.” “……어마마마.” “중전이 가엽지 않으십니까. 여인입니다. 여인으로서 중전은 가장 치욕스런 삶을 살고 있단 말입니다.” 태왕대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여인으로서 그런 치욕스러움을 당하면서도 그리 내색 한 번 하지 않는 예원이 가엽고도 불쌍했기에 흐른 눈물이었다. 그리고 왕실의 사람, 예원이 아닌 다른 여인을…… 그 것도 천한 기녀를 품는다는 자신의 아들, 적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흐른 눈물이기도 했다. 적은 시선을 땅으로 떨어트린 채 태왕대비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 이유는 태왕대비가 자신의 어미였기 때문이었다. 어미라면 자식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느낀다는 것을 알기에…….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태왕대비에게 말했다. “……중전을 품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주상!” “……송구합니다. 어마마마의 청을…… 들어드릴 수 없습니다.” 적은 자리에서 일어나 태왕대비에게 인사를 한 뒤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옮기면서 적은 두 주먹을 꽉 쥔 채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진화의 처소로 향했다. 혼례복을 입은 채 금침 위에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는 진화. 진화는 자신의 오른손 약지에 끼워져 있는 옥가락지를 만지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참았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는 순간, 방문이 열렸다. 점점 가까워져 오는 발소리에 진화는 두 손을 꽉 잡았다. 떨리는 숨소리가 혹여 전해질까 진화는 입을 닫아 숨을 참았다. 그리고 발소리가 멈췄다. “……고개를 들어라.” 적이 낮은 음성에 진화는 참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적을 바라봤다. 방 안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촛불에 비친 적의 모습은 무척이나 싸늘해보였다. “이름이 무엇이냐.” “……유…… 진화이옵니다.” 적은 진화의 바로 앞에 자리를 잡았다. 적이 가까이 앉자 진화는 살짝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런 진화의 손목을 잡아당긴 적 때문에 앞으로 휘청거리며 적과 더욱 더 가까워졌다. 적은 자신의 코앞에 얼굴을 맞대고 있는 진화를 내려 보며 물었다. “중전과 알고 지낸 사이더냐.” 적의 물음에 진화는 놀랐다. 어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인지도 궁금했지만, 이것을 지금 묻는 이유 또한 궁금했다. 그러나 진화는 묻지 못했다. 천한 자신이 왕에게 무언가를 물을 수 있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 진화를 바라보던 적은 살짝 입 고리를 올렸다. 그러나 그 모습은 그저 슬퍼 보이기만 했다. “……안동에서 알고 지내던 너희 세 사람이더냐.” 느끼고 있었다. 연회장에서 그 세 사람의 눈빛을……. 서로를 그리워했다는 그런 눈빛은 적에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적은 잠시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어 진화에게 물었다. “궁으로 들어와야만 하는가.” 적의 질문에 진화는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그리고 적의 물음에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하옵니다.” “그럼 과인의 여인 되어야 한다. ……그래도 궁에 남을 것이냐.” 적은 진화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었다. 기녀의 신분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 그 것은 왕의 여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진화의 눈빛을 읽었기에 다시 기회를 준 것이다. 큰 눈망울에 담긴 갈등을 보았기에……. 진화는 입술을 꾹 깨물고 다시 한 번 자신의 손에 끼워 진 옥가락지를 바라봤다. 그리고 적의 두 눈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이 길 밖에 없다면, 그리 할 것입니다.” “……너와 궁전지사에겐 중전이 그리 소중한 사람인가 보구나.” 적은 의미를 알 수 없는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한참을 바닥을 내려 보던 적은 진화의 손을 잡았다. 진화의 떨리는 두 손이 적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적은 그런 진화를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부터 너는 기녀 유진화가 아닌, 과인의 후궁이 되어 이 궁에서 살게 될 것이다.” 같은 시각, 진성궁(眞成宮)은 고요함이 가득했다. 궁 앞에 있던 대신들과 백성들이 물러선 지 한 식경(食頃)이 지났다. 그러나 한 시진(時辰) 동안 연당(蓮塘) 앞에 서 있던 예원은 그러한 소식에도 멍하니 밤바람에 흐르는 물결을 바라보았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정후는 예원의 옆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예원이 바라보고 있는 물결에 자신의 시선을 옮겼다. 멍하니 서 있던 예원은 정후가 자신의 옆에 왔다는 것을 느끼고 살짝 입 고리를 올리며 말했다. “차라리 잘 된 것이라 생각하려 합니다.” 정후는 예원의 말에 고개를 돌려 예원의 얼굴을 바라봤다. 예원은 미소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미소가 아니었다. 그저 울지 못해 짓는 어쩔 수 없는 표정에 불과했다. 예원은 짧은 탄식을 내뱉고선 말을 이었다. “……여인으로서 지아비에게 품어지지 않는 다는 것은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러니 다른 여인을 품는 것이 맞는 도리이겠지요.” 예원은 입술을 꾹 깨물고선 작은 손을 꽉 쥐었다. 그 모습을 본 정후는 예원의 모습에 자신의 감정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저 가냘프게만 느껴지는 예원의 어깨로 자신의 손을 움직였다. 하지만 정후의 손은 끝내 예원의 어깨를 감싸지 못한 채 거둬졌다. 다음 날. 궁이 한바탕 소란스러워져서 그런지, 그 기운은 아직 온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이 진성궁은 너무나도 고요했다. 그런 진성궁을 찾은 사람은 뜻밖에도 주품석좌(主稟席座) 종하였다. 종하의 모습에 박상궁은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종하에게로 다가섰다. 종하는 박상궁을 내려보며 말했다. “아뢰어라.” 예원을 만나겠다는 말이었다. 박상궁은 불안한 생각에 휩싸여 잠시 망설였지만, 자신보다 높은 신분의 종하를 내칠 수 없어 다시 처소에 다가가 예원에게 물었다. “중전마마. 주품석좌(主稟席座) 정종하가 마마를 알현하길 청하시옵니다.” 자리에 앉아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예원은 박상궁의 말에 방문을 바라봤다. 자신을 찾아온 이가 주품석좌라는 것이 의아했지만, 그래도 안으로 일단 들이기로 했다. 예원의 말이 떨어지자 처소의 문이 열렸다. 종하의 모습이 보이고, 예원은 자세를 고쳐 잡았다. 종하는 살짝 고개를 숙여 예원에게 인사를 했다. 그 모습에 예원도 고개를 숙였다. 인사를 받은 뒤, 종하는 자리에 앉았다. 그런 종하에게 예원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찌 오셨습니까.” 종하는 그 물음을 기다렸다는 듯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대답했다. “지난 밤, 중전마마의 심기가 많이 불편하셨을 거라 생각하여 이리 찾아온 것이옵니다.” 예원은 그 말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이내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종하에게 말했다. “……주품석좌께서 저를 그리 생각해주시는 군요.” “중전마마께서는 세자를 낳으셔야 하는 이 나라의 국모이시니, 당연히 대신으로서 해야 할 당연한 일이라 사료(思料)되옵니다.” 종하의 말에 예원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그리고 매서운 눈으로 종하를 노려봤다. 그런 예원을 보며 종하는 살짝 미소를 띠우며 말을 이었다. “다행히 중전마마께서 잘 견뎌내 주시니 소신(小臣)이 참으로 감격스럽사옵니다.” 예원은 무릎 위에 올리고 있던 손을 꽉 쥐었다. 동시에 손 안에서 구겨지는 치맛자락. 그 모습을 바라보던 종하는 앉아있던 자신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앉아 있는 예원을 내려 보며 말했다. “그럼 소신은 이만 일어나보도록 하겠사옵니다.” 살짝 고개를 숙여 예원에게 인사를 한 뒤, 종하는 살짝 미소를 머금고 예원의 방문을 열었다. 처소 밖에 서 있던 박상궁은 몸을 숙여 종하에게 예를 갖췄다. 그러나 마음만은 그러하지 못했다. 예원에게 그리 모욕을 준 이에게 예를 갖추고 있다는 것도 모욕이라 생각하고 있는 박상궁이었다. “주품…… 석좌?” 예원이 걱정되어 진성궁을 찾은 태왕대비의 목소리였다. 놀란 기색이 역력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주춤거리는 태왕대비에게 종하는 점점 다가섰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춘 뒤,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오랜만에 가까이서 뵙사옵니다. 태왕대비마마.” “……어, 어찌! 중전의 처소에 있는 것입니까.” 종하는 단숨에 느낄 수 있었다. 태왕대비가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 태왕대비를 보며 종하는 한쪽 입 고리를 살짝 올리며 대답했다. “그저 소신은 중전마마에 대한 깊은 충심으로 찾아온 것입니다.” “추, 충심이라…… 했습니까.” 기가 차는 대답이었다. 태왕대비는 그에 대한 비밀을 모조리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모든 백성이 종하에 대해 충신이라 하였지만, 태왕대비는 단 한 번도 그리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가족을 잃게 한 장본인이 종하였으니……. 종하는 당연하다는 듯 소탈하게 웃어 보이며 태왕대비에게 말했다. “예. 세자를 낳으셔야 하는 몸이 아니십니까.” “주품석좌!” 그리고 그 말을 통해 태왕대비는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불길한 징조라는 것을 실감하고, 떨리는 손을 부여잡았다. 그런 태왕대비를 지켜보던 종하는 가엽다는 식의 눈빛으로 바라보다 고개를 숙인 뒤,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그런 종하의 뒤를 보고 서 있던 태왕대비는 가쁜 숨을 내쉬며 소리쳤다. “내 이번에는…… 그리 맥없이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명심하세요! 주품석좌의 그 교활함이 훗날, 자기 자신에게 화를 입힐 것이니!” 소리를 지르던 태왕대비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소리를 들은 예원은 처소의 문을 열어 밖을 확인했다. 태왕대비에게 달려간 진성궁의 시녀들은 서둘러 태왕대비의 등을 받쳤다. 예원은 황급히 밖으로 나와 태왕대비에게로 걸어갔다. 의식을 잃고 쓰러진 태왕대비. 그러나 태왕대비를 그렇게 쓰러트린 종하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고개를 돌려 진성궁의 문으로 향했다. 그렇게 문을 빠져나가는 종하를 지나친 정후는 종하의 모습에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종하는 걸음을 멈춰서고 정후를 바라봤다. 한 번 입 고리를 올리고,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며 정후에게 말했다. “앞으로 중전마마를 잘…… 보살펴주길 부탁하네.” 第 14 話 쓰러진 태왕대비를 태왕궁(太王宮)으로 서둘러 옮기는 궁인들의 뒤를 따르는 예원의 머릿속은 온통 자신의 처소인 진성궁(眞成宮)에서 주품석좌(主稟席座) 종하에게 그리 소리를 친 태왕대비의 목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내 이번에는…… 그리 맥없이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과거에도 그러한 일이 있다는 것이 분명했다. 예원은 입술을 꾹 깨물고 정신을 잃은 태왕대비를 바라봤다. 그러다 잠시 비틀거리는 예원을 옆에서 정후가 부축했다. 그리고 또 다시 그럴지 모르는 예원의 옆을 지탱하며 함께 태왕궁으로 향했다. 태왕궁에 도착한 지 한 시진(時辰)이 지났다. 그 시간동안 태왕대비의 곁은 예원이 지키고 있었다. 금침(衾枕)에 누워 가늘게 뜬 눈으로 예원을 바라보는 태왕대비. 태왕대비가 깨어난 것을 본 예원을 의원을 드리라는 명을 내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그러나 태왕대비가 그런 예원의 손을 덥석 잡았다. 커진 눈으로 예원은 태왕대비를 바라봤다. “그리 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마마마. 그러다 옥체(玉體)가 상하시기라도 한다면…….” “그보다…….” 태왕대비는 예원에게 시선을 둔 채로 자신의 몸을 힘겹게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 한편을 부여잡고선 힘겹게 예원에게 물었다. “주품석좌…… 그 자가 어찌 중전의 처소에 들른 것입니까.” “……제가 걱정되어 찾았다고 하였사옵니다.” “걱정이요?” “예. 제가 지난밤을 어찌 지냈을까 하는 그 생각에…….” 예원은 아까의 일을 다시 생각하다 두 손을 꽉 쥐어 잡았다. 약을 올리듯 미소 짓던 종하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런 예원을 바라보던 태왕대비는 예원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감쌌다. “중전.” “예. 어마마마.” “그 자…… 절대로 가까이 해서는 아니 됩니다.” “어찌…….” “그 자는 교활하고 악랄한 사람입니다.” 태왕대비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눈의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그리고 입술을 깨물며 말을 이었다. “모두들 대단한 충신이라 생각하지만, 그 자는 충신이 아닙니다. 오로지…… 자신의 꿈을 위해 이 궁을 삼키려고 하는…… 비열한 자입니다.” 태왕대비의 말에 예원의 눈이 커졌다. 예원 또한 종하가 충신이라고 생각했었다. 한인왕 시절부터 지금까지 가장 권력이 세며 백성들에게 사랑 받는 자가 종하였다. 그리고 나라를 위해서 한 일도 그만큼 많았다. 그런데 그 자가 궁을 삼키려한다……. 예원은 이해가 되지 않는 다는 표정으로 태왕대비를 바라봤다. 태왕대비는 예원의 눈빛을 보고 입술을 다시 한 번 꽉 깨물었다. “중전은 모르실겁니다.” “………….” “난 그 자에게…… 너무 많은 것을 빼앗겼습니다. 부모도, 형제도, ……그리고 자식도.” 예원의 손을 잡고 있는 태왕대비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예원은 그 순간 입을 다물 지 못한 채 멍하니 태왕대비를 바라봤다. 자식을 잃었다는 태왕대비의 말. 적 이외에 다른 자식이 태왕대비에게 있었다는 그 사실……처음 듣는 말이었다. “어마마마.” “처음 들으실 겁니다. 아무도 이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니까요.” 예원은 벌어져 있던 입을 다물었다. 태왕대비는 자신의 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고선 긴 탄식과 함께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 세(世) 전이었습니다. 그 때는 중전도, 주상도 태어나지 않았을 때이지요. 그리고 그 땐, 지금의 주상이 아닌…… 나의 또 다른 자식…… 진이 세자였지요.” “………….” “……그 때, 진이 7살이었습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밖을 구경하지 못해, 그 날은 내 친정으로 그 아이를 보냈습니다. 그리 가고 싶어 했으니까요. ……가기 전까지만 해도…… 활짝 웃으며, 이 어미에게 인사를 하였던 그 아이가……명후일(明後日) 뒤 싸늘한…… 주검이 되어 궁으로 돌아왔습니다. 친정을 습격한 자객들로 인하여…… 그 집에 있던 모든 이들이…… 죽었으니까요.” 말을 잇는 태왕대비의 입술이 떨렸다. 그리고 온 몸이 경직되어 있었다. 예원은 어느새 붉어진 눈으로 태왕대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한 번 태왕대비는 자신의 감정을 애써 짓누르며 말을 이었다. “진의 장례를 치르고 정신없이 궁을 돌아다녔습니다. 혹시라도…… 그 아이가 이 어미에게 다시 찾아오지 않을까…… 혹시라도 그 아이가…… 이 궁 어딘가에 살아있지 않을까…… 그러다가 듣게 되었습니다. ……대신(大臣)들의 이야기.” 대신들이라는 말에 예원의 커진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때의 일을 떠올리는 태왕대비의 눈에서도 눈물이 떨어졌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깨물며 태왕대비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주품석좌…… 그 자의 짓이었습니다. 왕을 하고 싶다고, 이 나라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고 내 모든 것을 앗아갔습니다. ……헌데, 선뜻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말하지 못했습니다.” 예원은 자신의 손을 있는 힘껏 쥐었다. 그 손 안에서 구겨지는 치맛자락처럼 예원의 머릿속도 그렇게 얽히고설켰다. 모든 내용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것은 지금까지 자신이 모르고 있던 사실들에 대한 충격이었다. “……이상하게도 겁이 났습니다. 사실을 말하면 나의 지아비이신 한인왕께서도 위험하실 것이고, ……나 또한 어찌 될지 몰랐으니까요.” 태왕대비의 말에 예원은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자신이었더라도 그리 했을 것이라고 말이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예원의 손을 다시 잡으며 태왕대비는 두려움에 떨리는 목소리로 예원을 불렀다. “중전.” “예. ……어마마마.” 예원은 고개를 들어 태왕대비와 눈을 맞췄다. 태왕대비의 눈은 너무나도 깊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난 후에야 깨달은 것이지만, 태왕대비의 눈은 참으로 슬펐다. 그것이 다 마음의 병이 있어서라고 생각하니 예원의 눈은 다시금 붉어졌다. “주상은…… 모릅니다. 이 모든 사실, 아무도 내뱉어서는 안 되는 사실이었기에 알지 못합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럼 전하께도 알려야지 않겠습니까.” “안됩니다. 그리하면 궁이 혼란스러워질 것입니다.” 예원은 태왕대비의 말에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이 사실을 자신이 품어야 한다는 두려움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런 예원을 붉어진 눈으로 바라보며 당부하는 태왕대비였다. “주상 때문에 왕이 되지 못한 자입니다. 무슨 짓을 벌이지 몰라요.” “어마……마마.” “중전이 주상을 보필해야 합니다.” “……보필이라면.” “주상이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기 위해선, 충신도 필요하겠지만…… 원자가 필요합니다.” “……!” 원자가 필요하다는 태왕대비의 말에 예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에게 마음을 주지 않는 적이었다. 4년이라는 긴 시간을 궁에서 함께 보냈지만, 한 번도 자신을 품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적에게서 어찌 자식을 얻을 수 있을까 생각하는 예원이었다. “내 모르는 것 아닙니다. 중전이 여인으로서 얼마나 치욕을 당했는지 내 잘 압니다. 허나…… 이제는 위험합니다. 그 자가 중전을 찾아 왔다는 것은…… 어쩌면 무슨 일을 시작하기 위해서 일지도 모릅니다.” 같은 시각, 적과의 첫날밤을 보낸 진화는 자신이 머물렀던 궁에서 걸어 나왔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진화를 찾은 것은 몇 명의 시녀들이었다. 시녀들은 진화를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지만, 그래도 진화의 옷을 벗겨 새로이 옷을 입혀주었다. 밖은 일광(日光)이 따스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그 빛으로 인해 살짝 웃어 보이는 진화였다. 그러나 그런 진화에게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들. “저 천한 기녀를 전하께서 품으셨다니까?” “어찌 그러실 수 있지? 중전마마는 한 번도 안 품으셨으면서.” 소곤거리며 진화가 있는 궁 밖으로 지나쳐가는 궁녀들의 담소에 진화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 방금 나온 처소의 문을 바라봤다. ‘내일부터 너는 기녀 유진화가 아닌, 과인의 후궁이 되어 이 궁에서 살게 될 것이다.’ 자신의 몸을 품기 전, 적이 했던 말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비록 열다섯에 나이에 그리 생각하며 살아왔지만, 막상 이렇게 되고 보니 두려움이 컸다. 궁녀들이 지나가며 자신을 손가락질 하는 것도 두려웠고, 천한 기녀 출신인 자신이 궁 안에서만 살아야한다는 것도 두려웠다. 진화는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진 옥가락지를 매만졌다. 그런데 그 순간, 어떤 사내의 목소리가 진화에게 들려왔다. “……저, 저기.” 진화는 고개를 돌려 사내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봤다. 홍색의 옷을 입고 있는 그 자, 바로 어제 자신을 품으려고 손을 내밀었던 사내였다. 진화는 그 자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화의 시선에 준재는 뒷머리를 긁적거리다가 조금씩 진화에게 다가갔다. 진화의 앞에 선 준재는 수줍은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 모습에 진화는 조심스럽게 준재에게 물었다. “어찌 저에게 인사를 하시는 것입니까.” 진화의 물음에 준재는 고개를 들어 진화를 바라봤다. 그러다가 잠시 망설이던 대답을 진화에게 해주었다. “후궁이…… 되실 거라 들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인사를 드려야지요.” 후궁이라는 말에 진화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런 진화를 보던 준재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한 것일까 싶어 당황한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봤다. 그런데 그 순간, 진화가 살짝 웃어 보이며 준재에게 말했다. “후궁이 된다 해서 저의…… 천한 태생이 바뀌는 것도 아닌데요.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진화는 혹여나 자신의 눈물이 보일까 고개를 돌려 반대편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준재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모습이 아련하고 가엾었다. 그래서 자신의 감정을 애써 추스르지도 못한 채 진화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그 따스한 목소리에 진화는 고개를 돌려 준재를 바라봤다. 자신의 볼에 떨어지는 눈물을 닦지도 못할 정도로 진화의 눈에는 준재가 가득 들어왔다. 왠지 슬퍼 보이는 그의 모습에 진화는 다시 한 번 눈이 붉어졌다. 준재는 쓴 미소를 지으며 진화에게 말했다. “왕의 여인이십니다. 그러니 그런 말…… 하지 마세요.” 그리고 준재는 자신의 입술을 깨물며 진화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진화를 지나쳐 그 곳을 빠져나갔다. 준재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진화는 시선을 하늘에 두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바라보며 진화는 마음속으로 물었다. ‘왕의 여인이라는 거…… 내가 잘 선택한 걸까…… 언니.’ 第 15 話 태왕궁(太王宮)에서 나온 예원은 힘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다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고, 그 모습을 본 정후가 예원의 몸을 일으켜 줬다. 반쯤 넋이 나간 표정의 예원을 정후는 조심스럽게 불렀다. “왕후님.” 정후의 부름에 예원은 고개를 들어 정후를 바라봤다. 그러다 자신의 떨리는 손으로 시선을 옮겼고, 살며시 그 손을 쥐었다. 정후는 무슨 일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런 예원이 안쓰러워 보였다. 예원의 떨리는 손을 감싸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손을 내밀려 했지만 이내 그 손을 거두는 정후였다. 그리고 예원의 어깨에 살짝 손을 얹었다. “대전(大殿)으로 가겠습니다.” 예원의 작은 목소리에 정후는 예원의 어깨에서 손을 내렸다. 그런 감촉도 느끼지 못한 예원은 조금씩 걸음을 떼었고, 그런 예원의 모습을 바라보던 정후는 애써 입술을 깨물며 예원의 걸음에 맞춰 따라 걸었다. 같은 시각, 대전 앞뜰에는 적이 나와 있었다. 지난밤, 난생 처음 여인을 자신의 몸으로 품었다. 그러나 그 여인이 자신이 연모(戀慕)하는 이가 아니라는 것에 적은 마음이 답답하고도 저려왔다. 적의 표정이 여느 때보다 밝지 않자, 문내관은 조심스럽게 적에게 다가가 물었다. “전하. 무엇이 불편하시 옵니까.” 문내관의 물음에 적은 하늘로 향해 있던 시선을 거뒀다. 그리고 몸을 숙인 채 자신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는 문내관을 보며 힘없이 살짝 웃어보였다. “불편한 것이 있다 하여도, 과인은 그것을 표현하지 못하겠구나.” 적의 대답에 문내관은 다시 한 번 머리를 조아렸다. 적은 다시 시선을 하늘로 옮겼고, 생각에 잠겼다. 살랑거리며 부는 바람이 적의 볼을 스쳐 지나갔다. ‘소신은…… 진성왕후님의 수행궁전지사(隨行弓箭之士)가 되고 싶습니다.’ ‘이 길 밖에 없다면, 그리 할 것입니다.’ 궁에 남고 싶은 이유를 말했던 두 사람의 목소리가 적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 때의 얼굴이 눈앞에 선히 그려졌다. 두 사람은…… 닮아 있었다. 간절하고 아련한 그 모습이 말이다. 그리고 적은 느꼈다. 자신이 느낀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그런…… 것인가.” 적은 독백을 한 뒤, 몸을 돌려 대전의 입구를 바라봤다. 그 순간, 적의 눈이 커졌다. 자신이 시선이 닿은 곳에서 예원이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적은 살짝 당황한 기색을 내비췄다. 지난 세월동안 대전에는 발걸음조차 하지 않았던 예원이었다. 그러니 그럴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예원의 뒤로 따라 들어오는 정후가 적의 시선에 들어왔다. 박상궁과 나인들이 입구에 멈춰서고, 정후는 예원과 함께 걸어오다 걸음을 멈춰선 뒤 고개를 숙였다. 예원은 적의 바로 앞에 서 걸음을 멈췄다. 적은 마른 침을 삼키고 예원의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 혹여나 자신의 감정이 들키진 않을까 싶어 차가운 목소리로 예원에게 물었다. “어인…… 일입니까.” 적의 물음에 예원은 자신이 왜 대전으로 왔는지 잠시 머릿속으로 되짚어봤다. 그러나 말할 것이 딱히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 예원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기억. 예원은 굳어진 표정을 한 채로 적에게 대답했다. “한 시진(時辰) 전, 어마마마께서 정신을 잃고 쓰러지셨사옵니다.” 적은 커진 눈으로 예원을 바라봤다. 그리고 짧은 한숨을 내쉬고 난 뒤, 물었다. “많이 편찮으신 것이오.” ? “지금은…… 안정을 되찾으셨습니다.” 예원의 대답이 끝나고, 두 사람은 한참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적이 고개를 돌려 반대편을 바라보았고, 예원은 그런 적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런 예원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적은 다시 예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찌 그리 보는 것이오.” 태왕대비의 말이 떠올라 계속해서 적을 바라보던 예원은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그리고 마른 침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아, 아닙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였습니다.” 대답을 한 뒤, 예원은 고개를 들어 적을 바라봤다. 적의 표정을 살피며 예원은 조심스럽게 적에게 물었다. “헌데, 어제 품으신 기녀는 어찌 하실 것입니까.” 진화의 행방에 대한 물음이었다. 적은 그 물음에 예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다 땅으로 시선을 떨어트리곤 예원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중전은…… 어찌하였으면 좋겠습니까.” “……예?” “후궁으로 들인다고 한다면…… 반대할 것입니까.” 적의 물음에 예원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 어느새 검붉게 변한 눈으로 적을 바라봤다. 예원의 눈이 고스란히 적에게 보여 지고, 적은 대답하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살짝 미소를 지었다. “봤습니다.” “…………” “연회에서, 중전의 눈빛을…….” 예원은 그 순간 느낄 수 있었다. 적이 일부러 진화를 품었다는 것을 말이다. 다른 대신들이 품지 않았으면 하는 눈빛을 적이 읽었고, 결국 자신이 직접 품은 것을……. 적은 잠시 망설이다 두 주먹을 꽉 쥐고선 예원에게 말했다. “……삼을 것입니다. 후궁으로.” “…………” “중전이 원하는 것, 이것 아닙니까.” “……전하.” 예원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 눈물을 보았지만 적은 애써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두 눈을 감고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예원에게 말했다. “……이만, 가보세요.” “…………” “혼자…… 있고 싶습니다.” 적의 말에 예원은 작은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혹여나 자신의 울음소리가 적에게 들리지는 않을까 싶어서……. 그리고 적의 말대로 예원은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고, 자신의 감정을 애써 짓누르며 돌아섰다. 그리고 대전의 입구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점점 자신에게로 가까워져 오는 예원을 보던 정후는 햇살에 반짝이는 예원의 눈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것이 눈물이라는 것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예원이 정후를 지나치고, 몸을 돌려 예원의 뒤를 따르려던 정후는 적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적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쓸쓸하게 보였다. 그러나 이내 시선을 거뒀고, 예원의 뒤를 따르는 정후였다. 대전을 나온 예원은 느린 걸음으로 정처 없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런 예원의 옆에서 따라 걷던 정후는 예원을 슬픈 눈으로 바라봤다. 한참을 아무 말 없이 걷기만 하던 예원은 힘없이 떨어져있던 자신의 손을 가슴에 가져다 대고, 작은 목소리로 정후에게 말했다. “기분이…… 이상합니다.” “어찌 그러십니까.” 정후는 걸음을 멈추고 계속 걸으려는 예원을 멈춰 세웠다. 예원의 몸이 반쯤 정후에게로 돌아서고, 정후의 바로 밑으로 예원의 모습이 들어왔다. 정후는 예원을 아주 따스한 목소리로 불렀다. “왕후님.” “가슴이 언제부턴가…… 저립니다.” 예원의 말에 정후는 살짝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신도 그러했기 때문이었다. 예원을 생각하고, 예원을 그려볼 때마다 가슴이 너무나 저렸기 때문에……. 그런데 예원이 적을 만난 후 가슴이 저리다고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다. 정후는 두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예원은 달랐다. 지아비를 섬기는 마음으로 저린 그 마음…… 연모가 아니었다. 항상 강하고 무딘 사람일 거라 생각했던 적이었는데, 그가 알지 못하는 그의 비밀을 알게 된 지금…… 가슴이 너무도 저렸다. 그렇게 자신의 감정에 치우쳐 멍하니 서 있던 예원은 감정을 뒤늦게 숨기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정후를 바라보며 말했다. “……헛소리를 했습니다.” 예원의 말에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고 있던 정후는 예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예원의 눈빛을 읽을 수가 없었다. 진짜로 가슴이 저린 것인지, 정말 지금의 말대로 잘못 생각한 것인지. 정후가 자신의 눈을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자 예원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을 돌렸다. “함께 진화를 보러 가지 않겠습니까.” 第 16 話 계절이 바뀌었다. 따뜻한 봄기운이 사라지고, 이제는 여름이 되었다. 궁에 변화가 있다면 후궁으로 진화가 책봉(冊封)되었다는 것이었다. 단지 그것만이 궁 안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었다. 도월궁(桃月宮). 진화는 오늘도 계단에 앉아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입구에서 그 모습을 본 예원이 진화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정후는 그런 예원의 모습을 보고 입술을 깨물며 외면했다. 고개를 숙인 채 땅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던 진화는 고개를 들어 예원을 바라봤다. 자신을 보고 활짝 웃어 보이는 예원. 그러나 진화는 웃지 않았다. “오늘은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 것이야.” “…………” 자신에 역시나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진화를 보고 예원은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진화는 몸을 일으켜 세워 예원에게 예를 갖추었다. 그리고 보이지 않게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예원에게 말했다. “……이리 오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진화야.” “…………” “왜 그러는 것이야. 왜…… 외면하는 것이야.” 예원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맺혀 있었다. 세 달이라는 시간동안 따듯하게 얘기 한 번 해보지 못했다. 가까이 있게 된다면 어린 시절처럼 함께 이야기 나누며 웃고 싶었던 게 예원이었다. 그러나 그 것은 그저 헛된 꿈이었고, 기대였다. 진화는 예원의 시선을 애써 피했고, 입술을 깨물며 예원에게 대답했다. “처음부터 크기가 달랐던 사람들이옵니다. 그러니 이제는…… 저를 찾지 말아 주시옵소서.” 예원의 볼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진화는 돌아서서 계단을 올랐다. 두 손은 모아 자신의 가슴에 가져다대고 진화는 나오려는 눈물을 참아냈다. 그리고 진화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예원은 작은 목소리로 독백했다. “네가 궁에 들어와서 얼마나 좋았는데…… 너는 어찌 나에게 이러는 것이야.” 그 소리는 미처 진화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예원은 몸을 돌려 도월궁의 입구로 걸어갔다. 정후는 그런 예원의 모습을 안쓰럽다는 듯 바라봤다. 걸음을 옮기던 예원은 그 자리에 멈춰선 채 정후를 바라봤다. 예원의 시선에 정후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런 정후를 보며 예원은 물었다. “궁전지사께서는…… 이해하시겠습니까.” “…………” “평생의 지기에게 외면당하는?이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예원의 볼로 눈물이 다시 한 번 흘렀다. 흘러내린 눈물을 거두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선 도월궁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도월궁을 나간 예원의 모습을 지켜보고 서있던 정후의 두 눈이 검붉게 변해갔다. 정후는 두 주먹을 꽉 쥔 채 슬픈 미소를 지어보이며 작은 목소리로 독백했다. “……평생의 정인(情人)에게 외면당하는?이 마음 또한…… 너무 아프고…… 아플 것입니다.” 같은 시각, 화답사(華?寺). 화답사는 궁과 가장 가까운 절이기도 했지만, 나라에 큰 일이 있거나 행사가 있을 때마다 그 길일을 잡아주고, 예언을 하는 지주, 원방(元幇)스님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고요한 분위기가 감도는 화답사에 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법당에서 수련을 하고 있던 원방은 적이 왔다는 소식에 일찍 수련을 끝마치고 대법당을 나왔다. 긴 계단 밑에 서 있는 적의 모습에 원방은 서둘러 계단을 내려와 적의 앞에 섰다. 적은 두 손을 모으고 원방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원방 역시 적에게 예를 갖추었다. 고개를 든 적은 자신의 곁은 모두 물리라고 문내관에게 말했다. 그리고 문내관에게도 잠시 자리를 비켜 달라 명했다. 문내관이 자리를 떠나고, 적과 원방 두 사람만이 그 곳에 남았다. 원방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물린 적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눈치 챘다. 하지만 적이 먼저 말을 꺼내기 전까지 원방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적은 한참동안 떨어트리고 있던 시선을 원방에게 두고 말을 꺼냈다. “오랜만에 이리 찾았습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신 게군요.” 적의 얼굴에서 살짝 지어져있던 미소가 사라지고, 어느새 아무런 표정도 남아있지 않았다. 원방을 똑바로 응시한 채 적은 대답했다. “4년 전…… 지주께서 하신 말씀 때문입니다.” 4년 전, 봄이었다. 안동에서 올라온 적이 곧장 찾은 곳은 궁이 아니라 화답사였다. 이곳에 와서 적은 왕후가 될 예원에 대해 원방에게 물었다. 원방은 적에게 고스란히 남겨진 예원의 기운을 느끼고선 적에게 말했다. 예원의 운명에 대한 비극을……. “변함…… 없는 것입니까.” 적은 입술을 깨물며 원방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원방은 가늘게 뜬 눈으로 먼 산을 바라봤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반대편에 떠 있는 해를 바라보며 적에게 대답했다. “운명이라는 것은 하늘이 정해준 것이요…… 거슬러 올라갈 수도, 내려올 수도 없는 것입니다.” 원방의 대답에 적은 두 주먹에 힘을 세게 쥐었다. 그리고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선 강한 의지가 담겨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 운명을 바꾸고 싶습니다.” 원방은 그 순간, 적의 얼굴에서 날개를 활짝 핀 봉황(鳳凰)의 기운을 느꼈다. 그 기상은 너무나도 높았고, 꺾일 줄 몰랐다. 그 누가와도 꺾을 수 없는 그런 날개였다. 원방은 그 기운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미세하게 떨려오는 목소리로 적에게 물었다. “주상(主上)께선…… 왕후(王后)를 지키실 수 있겠습니까.” “지키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죽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지키실 수 있겠습니까.” 원방의 말에 적은 다시 한 번 주먹을 꽉 쥐었다. 한 나라를 책임져야 하는 왕의 운명이기에 적은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순간, 적은 한 여인의 지아비일 뿐이었다. “평생 마음에 품은 정인이기에…… 그럴 것입니다.” 第 17 話 밤이 깊어지고, 궁(宮) 위로 밝은 보름달이 떠올랐다. 각궁(各宮)을 돌며 산보(散步)를 하는 예원과 정후. 그리고 그 뒤를 나인들이 졸졸 따랐다. 낮에 진화의 일로 인해 어색한 기운이 감도는 예원과 정후였다. “……저, 왕후님.” 정후의 부름에 예원은 걷던 걸음을 멈춰 섰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돌려 정후를 바라봤다. 정후는 살짝 입술을 깨물더니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예원을 보고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언젠가는…… 모두가 함께 웃을 수 있는 날이 올 겁니다.” 아무런 표정도 짓고 있지 않던 예원의 얼굴에 조금씩 미소가 번져갔다. 그 미소는 밤하늘을 환하게 비추고 있는 달빛으로 인해 더욱 빛나고 있었다. 예원은 그 미소를 머금고 정후를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궁전지사의 말처럼 그런 날이 언젠가는…… 오겠지요.” 그 말을 한 뒤, 걸음을 옮기려던 예원의 뒤로 빠른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예원은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봤다. 박상궁이 두 손으로 치맛자락을 붙잡고 달려오고 있었다. “마마, 중전마마!” 어느새 박상궁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예원과 정후의 앞에 멈춰 섰다. 박상궁의 다급한 목소리에 예원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찌 그리 뛰어오신 겁니까.” “저…… 전하께서 마마의 처소에 오셨습니다.” 박상궁의 말에 예원의 두 눈이 커졌다. 대전(大殿)에 찾아 갔을 때가 마지막이었으니, 언 세 달만이었다. 혼자 있고 싶어 하던 그 때의 적이 예원을 찾아왔다는 소식에 정후 역시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혹여나 누군가가 자신의 모습을 보지는 않을까 애써 감정을 수습하는 정후였다. “또한 그 뿐만이 아니라…….” 박상궁은 자신의 가쁜 숨을 추스르지도 못한 채 이어 예원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마마의 처소에서 오늘 밤을 지내신다 하옵니다.” 같은 시각, 도월궁(桃月宮)에는 아주 익숙한 손님이 찾아와 있었다. 바로 문리좌(文吏座) 준재였다. 처소 안은 오로지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가득할 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구름에 가려져있던 달빛이 이내 처소의 창문을 비추는 그 순간, 준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진화를 불렀다. “……도월궁.” 준재의 부름에도 진화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런 진화의 모습에 준재는 오늘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오늘은 진화에게는 아주 중요한 일이 있는 날이었기에, 준재는 입술을 깨물며 진화에게 말했다. “오늘 밤…… 전하께서 중전마마의 처소에서 잠을 청하신다 합니다.” 그 말에 진화의 커진 두 눈이 준재에게 고정되었다. 그리고 어느덧 진화의 두 손이 놓여있던 무릎 위의 치맛자락은 거칠게 구겨져 있었다. 그러나 진화는 자신의 감정을 애써 짓누르며 준재에게 말했다. “저는…… 어차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람이 아닙니까.” “헌데, 어찌 그리 아파하며 마음에 품고 있는 것입니까.” “……제가 남들과 다르다는 걸 알았을 때, 처음으로…… 마음에 품은 사람이니까요.” 준재는 알고 있었다. 진화가 마음에 품은 이가 그 누구도 아닌, 예원이라는 것을 말이다.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내며 사내가 아닌, 여인을 마음에 품은 진화의 이야기를……. “왜 그리 힘들게 사시는 겁니까.” “……문리좌.”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진화를 안 지 세 달이 되었지만, 웃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항상 붉게 물들어 있는 두 눈에서 언제쯤 눈물이 흘러내릴까 기다릴 수밖에 없던 준재였다. 그리고 그런 준재의 마음을 진화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문리좌가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 “저의 마음입니까.” 진화의 말에 준재는 두 눈으로 진화를 똑바로 응시했다. 진화의 두 눈이 준재와 마주치고 그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준재는 그 모습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리고 진화를 향해 있던 자신의 몸을 돌려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준재의 모습을 바라보던 진화는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헌데 어쩝니까. 문리좌를 마음에 품을 수 없는…… 제 기구한 운명을…….” “…………” “이제…… 찾지 마세요.” 문을 잡으려던 준재의 손이 멈췄다. 마른 침을 한 번 삼키고, 준재는 고개를 돌려 진화를 바라봤다. 어느 곳을 바라보는 지 알 수 없는 진화의 시선. 준재는 그런 진화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좋지 않습니다. 천한 기녀 출신의 후궁이 사는 도월궁에…… 밤낮 가리지 않고 드나드는 문리좌를 바라보는 시선이…… 저는 두렵습니다.” 진화의 말에 준재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그 것은 이렇게 지낼 수밖에는 없는 자신과 진화의 운명에 대한 안타까움이었고, 진화를 두렵게 만드는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준재는 검붉은 두 눈에 맺힌 눈물을 애써 감추며 진화에게 물었다. “이것이 제 마음이라면, 그래도 찾지 마라 하실 겁니까.” “……마음이라 해서 표현할 수 있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좀처럼 마르지 않았다. 진화는 두 눈을 감고 자신의 감정을 애써 짓누르며 말을 이었다. “천한 기녀 출신이지만 문리좌가 예전에 말했듯…… 저는 왕의…… 여인입니다.” 준재는 다시 한 번 주먹을 세게 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준재의 볼에도 어느덧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준재는 진화에게 대답했다. “……왕의 여인께서 그리 말하시니, 저는 이만…… 사라져드리겠습니다.” 그 말만을 남기고, 준재는 그렇게 도월궁을 빠져나갔다. 적이 진성궁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돌아온 예원과 정후의 눈에 정말 적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연당을 바라보고 있던 적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로 향하고 예원과 정후는 고개를 숙여 적에게 예를 갖췄다. 그 모습을 본 적이 진성궁 안으로 들어서고, 박상궁은 예원에게 몸을 낮추며 궁으로 들라 말했다. 예원은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고개를 돌렸다. 예원의 시선이 멈춘 곳, 그 곳에는 정후가 서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서 있는 정후를 바라보는 예원의 두 눈이 붉게 번져갔다. 그러나 이내 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린 예원은 적의 뒤를 따라 궁 안으로 들어섰다. 단 하나의 촛불을 사이에 두고 자리한 적과 예원.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없이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정적을 먼저 깬 것은…… 예원이었다. “……전하.” 예원의 목소리에 적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예원을 바라봤다. 적에게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예원의 붉게 물든 두 눈이었다. 적은 그 모습에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트렸고, 그 상태로 예원에게 말했다. “과인이 중전을…… 품을 것입니다.” 적의 말에 예원의 온 몸이 순식간에 경직되었다. 4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처음으로 자신을 품겠다는 지아비의 말에 놀란 여인이었다. “그리해도 되겠습니까.” 예원이 싫다 말한다면 적은 깨끗이 포기할 생각이었다. 그저 원방(元幇)의 말에 따라 운명에 순응하려 했다. 그것이 예원을 위한 길이며, 자신을 위한 길이었기 때문에……. 그 물음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예원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세게 물은 입술이 찢어지면서 예원의 치마 위로 핏방울이 떨어졌다. 그러나 그조차 느끼지 못한 예원은 작은 목소리로 적에게 대답했다. “왕의…… 여인이옵니다. 신첩(臣妾)의 허락이 없다하여도 전하께서는 유일하게…… 신첩을 품을 수 있는 사내이시옵니다.” 진성궁의 입구에서 발길을 채 돌리지 못하고 있던 정후의 두 눈에는 불빛조차 볼 수 없게 된 고요한 궁만이 들어왔다. 그 궁을 바라보던 정후의 눈은 어느새 붉어져 있었고, 그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김예원.” 정후의 작은 독백은 차갑게 불어오는 바람보다도 작았다. 그래서 그 구슬픈 목소리는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촉촉이 젖은 두 눈을 차갑게 식은 땅으로 떨어트렸던 정후는 다시 불 꺼진 궁을 바라보며 바람보다는 큰 목소리로 독백했다. “이제 우리가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겠지요…… 왕후님.” 第 18 話 온 나라는 축제와도 같은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4년 만에 첫날밤을 치른 적과 예원의 소식을 들은 지, 언 3주가 흐르고 그보다 더 좋은 소식이 백성들을 이리도 기쁘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식은 그동안 궁인들과 백성들이 쉬쉬하며 이야기하던 유언비어(流言蜚語)들을 잠재웠다. 늦은 밤, 종하의 집으로 모여든 대신(大臣)들의 입을 오르내리는 것 또한 그 이야기였다. 술잔을 상 위에 세게 내려놓은 뒤, 혀를 끌끌 차는 세간좌(稅奸座) 택진은 입을 한시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있었다. 대신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지금 이 시점에서 어찌!” “그렇습니다. 이제 좀 시작하려던 찰나에…… 참나.” 택진의 주먹이 상을 내리쳤다. 그러나 대신들 중, 가장 침착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사람이 단 한 명 있었다. 바로 이들은 자신의 집으로 불러 모은 종하였다. 종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술잔을 기울이며 자신의 목을 축였다. 그런 종하가 답답했는지 택진은 가슴을 내리치며 종하에게 말했다. “회임(懷姙)이라니까요! 헌데, 어찌 그리 태평하게 술만 들이키십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도모(圖謨)하는 일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이러다가는 아무 것도 못한 채로 또 세월을 보내야 한단 말입니다!” 대신들의 말을 듣고만 있던 종하의 입 고리가 살짝 올라갔다. 술잔을 상 위에 내려놓은 종하는 고개를 돌리며 대신들의 모습을 둘러봤다. 종하의 눈빛에 대신들은 어느새 입을 다물고 조용해졌다. 대신들을 둘러본 종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 말에 대신들의 모든 시선이 종하에게로 향했다. 종하는 다시 한 번 술로 목을 축였고, 두 눈을 매섭게 부릅뜨고 말을 이었다. “오히려 일을 시작하는 게 더 쉬워질 것 같습니다.” “그, 그 말씀은…….” “예. 모두가 생각하고 있는 그것입니다.” 대신들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져있었다. 그리고 대신들의 온 몸은 어느덧 두려움으로 휘감겨져 있었다. 한 세(世) 전, 세자였던 진(進)을 포함한 태왕대비의 모든 일가족을 자객을 시켜 살해했던 그 때와 같은……. 종하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다 이내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내일, 궁에 들어가 봐야겠습니다.” 다음 날, 종하는 어제 말했듯 궁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가 도착한 궁은…… 도월궁(桃月宮)이었다. 종하의 눈에 들어온 것은 연당(蓮塘) 앞에 서 있는 진화였다. 한 쪽 입 고리를 살짝 올리며 그 곳으로 걸음을 옮기는 종하. 그리고 진화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이었기에 진화의 두 눈은 당황한 듯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처음으로 이렇게 찾아뵙습니다.” 진화는 종하에 대해서 준재를 통해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때 준재는 절대로 그 자를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었다. 잔인하고, 위험한 사람이라면서 말이다. 진화는 그 생각을 떠올리며 종하에게 시선을 뒀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숙여 종하에게 인사를 하는 진화였다. 종하는 살짝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지운 뒤, 진화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꺼냈다. “도월궁께서 궁에 들어오신 이후, 줄곧 중전께서 이곳을 찾으셨다 들었습니다.” “…………” “후궁(後宮)임에도 불구하고 도월궁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신가봅니다.” “…………” “그럼 도월궁께서도, 중전마마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시겠군요.” 종하의 말에 진화의 두 눈은 당혹감과 함께 두려움으로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진화는 떨리는 두 손을 잡으며 종하를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회피했다. 자신의 진정한 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운초와 준재뿐이었다. 그 두 사람이 종하와 만날 일은 없을 터, 진화는 애써 마음을 추스르며 입술을 깨물었다. “보답을 해드려야지 않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진화는 종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런 진화를 바라보며 웃어 보이던 종하는 이내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며 진화에게 말했다. “그저, 보답하시는 게 어떨까 해서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그저 그 뿐입니까.” “도움을 청하신다면 도와드릴 수는 있습니다만…….” 종하의 말에 진화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 것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궁 안에 아는 사람이 있다면 준재가 전부인 진화였기에 예원에게 보답하기엔 가진 것이 없었다. 진화는 종하를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어찌…… 그 보답을 도와주시겠습니까.” “제가 정성껏 준비하겠습니다.” 종하는 입 고리를 희미하게 올리며 진화에게 대답했다. 진화는 그 모습에 시선을 땅으로 떨어트렸고, 그런 진화를 바라보며 종하는 비웃음을 쳤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종하는 돌아서서 도월궁을 빠져나갔다. 걸음을 옮기는 종하의 얼굴은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도월궁에서 빠져나온 종하를 가장 먼저 본 것은 바로 준재였다. 준재는 커진 눈으로 종하를 응시하다 걸음을 옮겼다.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걸어가려던 종하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준재를 보고 다시 원상태로 몸을 움직였다. 인사도 하지 않고 준재는 매서운 목소리로 종하에게 물었다. “어인일로 도월궁에 오셨습니까.” “내가 왜 자네에게 그 연유(緣由)를 말해야 하나.” 종하의 말에 준재는 차가운 시선으로 종하를 바라봤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종하는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준재를 훑어보다가 넌지시 물었다. “그러는 자네는, 왜 이 곳 있는 것인가.” “…………” “자네가 도월궁에 밤낮 할 것 없이 드나든다는 소문은 내 들은 적이 있네. 이리 보니, 그 모습이…… 아련하기 그지없군.” 준재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미간을 찌푸리며,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종하는 준재의 모습을 보면서 살짝 입 고리를 올렸고, 이내 걸음을 옮겼다. 그런 종하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준재는 시선을 돌려 도월궁을 바라봤다. 같은 시각, 진성궁(眞成宮)에서 예원은 태왕대비를 맞이하고 있었다. 예원의 회임소식을 듣고 가장 기뻐한 것은 바로 태왕대비였다. 며칠 전 예원의 어미인 진선대부인이 다녀갔을 때, 태왕대비는 자신이 태몽을 꾼 것 같다며 예원의 태기를 살펴보라 명했었다. 그리고 그 것이 딱 맞아 떨어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태왕대비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기분 나쁜 꿈을 꾸었습니다.” 태왕대비의 표정은 무척이나 심각했다. 그 모습에 예원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서궤(書?)에 올려진 예원의 두 손을 잡은 태왕대비는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예원에게 말했다. “……중전, 조심하세요.” “어마마마.” “정말로 뭔가 일어날 것만 같습니다.” 예원의 손을 잡고 있는 태왕대비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예원은 그런 태왕대비의 손을 감싸며 두 눈을 맞췄다. 태왕대비는 짧은 탄식과 함께 말을 이었다. “지금은 위험한 때입니다. 그러니, 되도록 궁을 나가지 마세요.” “……예. 그리 하겠습니다.” 태왕대비는 그렇게 예원에게 약속을 받은 뒤, 태왕궁(太王宮)으로 돌아갔다. 태왕대비가 간 뒤, 예원은 궁 앞뜰로 걸어 나왔다. 그 자리에 서서 배를 쓰다듬던 예원의 두 손이 멈췄다. 작게 들려오는 익숙한 발걸음 소리에 예원은 고개를 돌렸다. 3주 만이었다. 돌연 사라져버렸던 정후의 모습이 예원의 눈에 담겼다. 예원은 입술을 깨물며 다가오는 정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정후는 많이 수척해보였다. 그 전보다 마른 얼굴에, 눈은 더욱 깊어져 있었다. 예원의 앞에 멈춰선 정후는 고개를 숙여 예원에게 인사를 했다. 예원은 그런 정후를 바라보며 두 손을 마주 잡았다. 그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 어디를 다녀 온 것입니까.” “잠시…… 바람을 쐬고 왔습니다.” 오랜만에 듣는 그 목소리는 예원의 가슴에 가시처럼 박혔다. 중저음의 목소리는 3주 전과는 너무나도 다르게 느껴졌다. 따듯한 것 같이 들렸지만, 차가웠다. 절대로 깨지지 않는 얼음처럼 그렇게 단단하게 얼어있는 목소리였다. “회임…… 하셨다 들었습니다.” 정후의 말에 예원의 눈이 커졌다. 예원은 맞잡은 두 손은 배 위로 가져갔다. 정후의 두 눈에 그 모습이 생생히 담겼다. 얼굴에는 아무런 내색도 드러나지 않았지만, 정후의 두 손은 어느새 꽉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예원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회임을…… 하였습니다.” “경하…… 드립니다. 왕후님.” 예원은 입술을 있는 힘껏 깨물었다. 깨문 입술이 찢어지며 피가 전체로 번져갔다. 피로 붉게 변한 입술처럼 예원의 두 눈도 붉어져 있었다. 그러나 정후는 차갑게 굳힌 얼굴로 예원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정후가 야속하고 미워 예원은 숨을 들이켜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진정으로…… 나를 지켜주셔야 합니다.” “…………” “이 나라를 짊어질…… 원자가, 제 안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예원은 정후를 한참동안 더 바라봤다. 그러나 예전과는 다른 그 모습에 마음이 종이가 찢기듯 찢어졌다. 예원은 원망이 담긴 눈으로 정후를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그리고 처소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순간, 정후가 대답했다. “……소신(小臣), 왕후님을 지키기 위해 궁에 들어왔습니다. 눈 감는 그 순간까지…… 왕후님을 지킬 것입니다.” 정후의 대답을 듣는 순간, 예원의 볼은 또 다시 눈물로 가득 찼다. 그러나 예원은 돌아서지 않고, 입술을 꽉 깨물며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걸어가는 예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정후의 두 눈이 점점 붉게 물들고 있었다. 예원의 앞에서 연모(戀慕)의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에, 돌아선 뒷모습을 보며 눈물? 짓는 정후였다. ‘제가 왕후님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이 것 밖에는 없지 않습니까.’ 第 19 話 다음날, 적의 부름을 받고 안동에서 예원의 아비인 석풍부원군이 궁으로 찾아왔다. 대전(大殿)에 도착한 부원군을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문내관이었다. 몸을 낮춰 인사를 한 뒤, 문내관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디에 계시는가.” 부원군의 물음에 문내관은 고개를 돌려 정각(亭閣)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부원군은 살짝 입술을 깨문 뒤, 문내관을 지나쳐 정각으로 향했다. 정각에는 적이 먼 산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부원군은 두 손은 포갠 뒤, 살짝 고개를 숙이며 적을 불렀다. “……전하.” 돌아선 적은 고개를 숙인 채 자신에게 인사를 하고 있는 부원군에게로 다가갔다. 부원군은 고개를 들어 적을 바라봤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적에게 물었다. “어인 일로 소신(小臣)을 궁으로 부르셨사옵니까.” 적은 부원군의 물음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다 이내 시선을 하늘로 옮기며 대답했다. “장인(丈人)의 동생인, 김덕주라는 자의 양자에 대해 묻기 위해입니다.” 덕주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부원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숙여 자신의 표정을 감추는 부원군이였다. 적은 숨을 한 번 들이켜 쉬고 부원군에게 물었다. “그 자의 양자가 누군지 아십니까.” 20년이 넘도록 만나지 않은 형제였다. 그래도 같은 지역에서 살고 있기에 들리는 소문은 어쩔 수 없었다. 양자를 들였다는 소문 또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양자가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부원군은 고개를 숙이며 적에게 대답했다. “소신,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오래 전, 연(緣)을 끊어 간간히 소식만 듣고 있을 뿐, 자세히 알지는 못하옵니다.” “……그렇습니까.” 적은 그 말에 하늘로 향해 있던 자신의 시선을 땅으로 떨어트렸다. 그런 적의 모습을 보고 부원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찌…… 그 양자에 대해 물으시는 것이 옵니까.” 부원군은 적의 행동이 낯설기만 했다. 감추려고 하는 것이 눈에 훤히 보이고 있었다. 불안함에 휩싸인 듯, 적의 시선은 흔들리고 있었다. 적은 마른 침을 삼키고선 부원군에게 대답했다. “……중전과 함께 지내고 있는 자입니다.” 적의 대답에 부원군의 두 눈이 커졌다. 왕의 여인인 예원이 다른 사내와 함께 지낸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당황한 표정으로 적을 바라보던 부원군은 더듬거리며 적에게 물었다. “그, 그것이 무슨 말씀이시 옵니까. 중전께서 왜 사내와 함께 있단…….” “……제가 보낸 이입니다.” 부원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적이 대답했다. 그리고 그 대답에 부원군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적은 부원군을 바라보고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단지…… 그 자의 삶에 대해 궁금했을 뿐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적은 살짝 고개를 숙인 뒤, 부원군을 지나쳐 정각을 빠져나왔다. 적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부원군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리고 무슨 일인지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정각을 나오는 부원군이였다. 같은 시각, 도월궁(桃月宮)에는 어제와 같이 종하가 찾아와 있었다. 진화의 앞에 앉아 자신이 가져온 약재를 내미는 종하. 그런 종하의 모습을 바라보기만 하고 있던 진화는 마른 침을 삼키며 종하에게 물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도월궁께서 중전마마께 올리실 탕약에 들어갈 약재들이옵니다.” 진화는 무릎 위에 올려뒀던 두 손에 힘을 줬다. 그리고 입술을 꽉 깨물며 매서운 눈빛으로 종하를 노려봤다. 종하는 그런 진화를 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숨을 한 번 들이쉬고 진화는 종하에게 물었다. “제가 이것을…… 어찌 받아드려야겠습니까.” 그 물음에 종하는 호탕하게 웃어버렸다. 그런 종하를 보며 진화는 시선을 한 곳에 멈추지 못한 채 불안해하고 있었다. 웃음을 멈춘 종하는 눈썹을 치켜 올리고선 진화에게 내밀고 있던 약재 두 봉지를 뜯었다. 그리고 진화에게 내밀며 말했다. “그리 못 믿으시겠다면, 먼저 시험해보시지요.” “…………” “제가 이걸 먹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탕약을 중전마마께 가져다주시지요.” 종하는 진화에게 말을 전한 뒤, 곧장 밖에 서 있는 나인에게 약재를 건네주며 끓여오라고 명했다. 그런 종하를 보며 진화는 주먹을 꽉 쥐었다. 나인이 다시 진화의 방문을 열 때 쯤, 이미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나인은 조심스럽게 탕약이 담긴 두 그릇을 내려놓았다. 나인이 물러나고 다시 둘만 남게 되었다. 종하는 두 그릇에 두었던 시선을 진화에게 옮겼다. 그리고 희미하게 웃어 보이며 한 개의 그릇을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탕약을 들이켜는 종하의 모습을 보며 진화는 마른 침을 삼켰다. 바닥을 내보이는 그릇이 진화의 앞에 놓아졌다. 종하는 한 쪽 입 고리를 올리며 진화에게 말했다. “이제, 보셨습니까. 이래도 저를 의심하시겠습니까.” “오…… 오해를 한 모양입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종하를 보며 진화는 자신이 괜한 의심을 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진화를 보며 종하는 나머지 한 그릇을 진화에게 내밀었다. 그 것을 본 진화는 커진 눈으로 종하를 바라봤다. “그럼…… 이만 중전마마께 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탕약이 식겠습니다.” 종하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아 있던 진화는 그릇을 목 쟁반에 올렸고, 일어나 그 것을 들어올렸다. 자리에 앉아 있는 종하를 내려 보던 진화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문으로 향했다. 방문을 열고 진화가 나가자 종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진화의 뒤를 따라 처소를 빠져나오는 종하였다. 종하가 나왔을 때, 이미 멀찍이 걸어가고 있는 진화. 그런 진화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아까 들어왔던 나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종하와 눈이 마주치자 나인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몸을 움츠렸다. “도월궁에 있는 궁인(宮人)은 너 하나뿐이다.” “…………” “내가 지금 이 곳에 들렀다는 것을 발설한다면, 그 때는…… 어찌 되겠느냐.” 나인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 두려움에 온 몸을 떨고 있었다. 그런 나인이 우습다는 듯 활짝 웃어 보이며 종하는 몸을 돌려 도월궁을 빠져나왔다. 주변을 살피던 종하는 한 쪽 눈썹을 치켜 올리고선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본 사람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준재였다. 도월궁으로 들어서려던 준재는 종하의 모습에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내가 왜 자네에게 그 연유(緣由)를 말해야 하나.’ 준재는 두 주먹을 꽉 쥐고선 걸어가는 종하를 노려봤다. 그리고 그런 종하의 뒤를 조심스럽게 뒤따라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인지 알고 싶었기 때문에……. 자신의 뒤를 준재가 따라온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 채 계속 걷던 종하의 앞으로 택진이 나타났다. 종하가 궁에 입궐할 때 따라 들어온 택진은 소식을 듣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종하의 모습에 택진은 한 쪽 손으로 입을 가리며 종하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묻지도 않고 그냥…… 받습니까.” “어찌 그러겠습니까. 의심은 했지요.” “그래서요? 그래서 어찌 하셨습니까.” “……그래서 먹었습니다.” 종하의 말에 택진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종하의 뒤를 쫒던 준재가 발걸음을 멈춰 섰다. 그렇게 두 사람의 시선이 종하에게 향해 있었다. 종하는 두 눈을 깜박거리며 희미하게 웃어보였고, 이내 말을 이었다. “저도 운에 맡겼었습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두 개를 뜯었습니다. 하나라면 믿지 않을 것 같아서요.” 종하도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진짜 탕약을 먹게 될 지, 아니면 다른 것을 먹게 될 지 말이다. 진화의 앞에서는 웃어 보였지만, 그 것은 술수였다. 당황한다면 모든 일은 다 수포로 돌아가게 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주품석좌.” “하늘이…… 돕나 봅니다.” “대, 대단하십니다!” 택진의 말에 살짝 웃어 보이는 종하였다. 그리고 두 사람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던 준재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붉어진 두 눈으로 종하를 노려봤다. 그 눈빛을 느끼지 못한 종하는 택진을 보며 말했다. “이제 그 천한 기생 년이…… 중전을 죽일 것입니다.” 第 20 話 진성궁(眞成宮)에 도착한 진화는 천천히 궁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처음으로 찾는 진성궁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걸어오는 진화의 모습을 가장 먼저 본 것은 박상궁이었다. 박상궁은 커진 눈으로 진화의 행동을 살폈다. 그리고 그 시선은 어느덧 목(木) 쟁반을 들고 있는 진화의 손으로 향해 있었다. “진화?” 반대편에 서 있던 정후의 눈에도 진화가 들어왔다. 그리고 점점 진화에게 가까워지는 박상궁의 모습도 들어왔다. 박상궁은 살짝 몸을 낮춰 진화에게 인사를 했다. 진화도 살짝 고개를 숙이며 박상궁을 마주했다. 박상궁은 목 쟁반에 두었던 시선을 옮겨 진화와 두 눈을 맞췄다. “어찌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중전마마께…… 이 탕약을 올리려 합니다.” 진화의 대답에 박상궁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시선을 떨어트렸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며 한 나인을 불렀다. 부름을 받은 나인이 자신의 옆에 서자 박상궁은 진화가 들고 있는 목 쟁반 위의 그릇을 들어 나인에게 건넸다. 나인은 커진 눈으로 박상궁을 응시했다. “마셔 보거라.” 놀란 것은 나인뿐만 아니었다. 그 앞에 서 있던 진화도 그러했고, 멀찍이 서 있던 정후도 그러했다. 박상궁은 담담한 표정으로 나인을 바라봤다. “아니겠지만, 궁인으로서 당연한 해야 할 일이다.” 박상궁의 말에 나인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박상궁에게 그릇을 받아 들었다. 진화는 탕약을 들이켜는 나인을 계속해서 바라봤다. ‘주품석좌도 멀쩡했어. 그러니, 아무 일…… 없을 거야.’ 진화는 살짝 떨리는 두 손을 맞잡았다. 나인이 탕약의 반이 안 될 정도를 마시고 난 뒤, 입을 떼었다. 나인은 그릇을 박상궁에게 내밀었다. 박상궁은 나인을 보며 물었다. “아무렇지도 않으냐.” 나인의 대답을 기다리는 박상궁에게 들려온 것은 그 대답이 아니었다. “태왕대비(太王大妃) 마마 납시오.” 태왕대비의 모습에 모두가 그 곳을 바라보며 몸을 낮춰 태왕대비를 맞이했다. 진화와 박상궁의 앞에 선 태왕대비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도월궁께서 탕약을 가져오셔서…… 확인해보고 있었사옵니다.” “탕약?” “예. 허나, 나인의 상태가 양호하여 탕약을 들이려던…….” 그 순간이었다. 지금껏 멀쩡히 서 있던 나인이 창백한 낯빛을 한 채로 땅에 쓰러졌다. 그 모습에 모두 놀란 눈으로 나인을 바라봤다. 박상궁은 서둘러 쓰러진 나인의 맥을 짚었다. 아무 말 없이 맥을 짚는 박상궁에게로 모두의 시선이 향했다. 그리고 박상궁은 커진 눈으로 태왕대비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고, 이내 더듬거리며 말했다. “수…… 숨을…… 쉬지 않습니다.” 박상궁은 떨리는 손을 나인의 목에서 떼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인의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내리는 검은 핏줄기. 그 것을 본 궁인들은 모두 커진 눈으로 진화를 응시했다. 진화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 어찌…….” 진화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죽은 나인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순간, 진화의 귓가에 맴도는 목소리. ‘이제, 보셨습니까. 이래도 저를 의심하시겠습니까.’ 모든 게 종하의 술수였다. 예원을 해(害) 하기 위해 자신을 시험한 것이었다. 그것을 이제야 깨달은 진화는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놀란 채 서 있던 태왕대비는 두 주먹을 꽉 쥐고, 비틀거리며 진화의 앞으로 다가갔다. “이게, 도월궁의 짓입니까.” “…………” “대답하세요!” 태왕대비의 높은 언성과 함께 진화의 볼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제야 진성궁의 앞에 도착한 준재는 가쁜 숨을 내쉬며 입구로 들어섰다. 그리고 태왕대비의 옆으로 쓰러져 있는 나인과 그 앞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진화가 들어왔다. ‘이제 그 천한 기생 년이…… 중전을 죽일 것입니다.’ 준재는 커진 눈으로 그 곳을 응시했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이것 밖에는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다시 달리기 시작한 준재는 진화의 곁으로 향했다. “태왕대비마마!” 태왕대비와 진화의 사이에 선 준재. 갑작스러운 준재의 등장에 태왕대비는 커진 눈으로 준재를 바라봤다. 준재는 입술을 꾹 깨물며 천천히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정후와 박상궁은 멈칫하며 시선을 떼지 못했다. 태왕대비의 앞에 무릎을 꿇은 준재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도월궁의…… 짓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소신(小臣)이…… 배후(背後)이옵니다.” 준재의 말에 다시 한 번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태왕대비는 준재의 말에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리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삼키며 준재에게 물었다. “지금, 배후라고 하셨습니까.” “……그러…… 하옵니다.” “아, 아닙니다! 문리좌(文吏座)께서는 이 일과 아무런 관련도 없사옵니다. 진정입니다. 이 일은…….” “그 입 다물지 못할까!” 진화의 말을 끊은 태왕대비는 준재와 진화를 내려 보며 실성한 사람마냥 웃어보였다. 나인의 시신을 수습하던 박상궁은 태왕대비의 웃음소리에 고개를 떨어트렸다. 정후는 두 사람의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게 한참을 웃던 태왕대비는 웃음을 멈추고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주저앉은 진화와 준재를 노려보며 말했다. “내 미리 알아봤어야 했습니다! 천한 기녀 출신의 후궁과, 왕의 여인을 연모(戀慕)하는 신하라…….” “…………” “왕실을 능멸(凌蔑)한 그 죄를 물어, 죽음으로 다스릴 것입니다. 뭣 하느냐! 당장 이 대역 죄인들을 옥에 가둬라!” 입구를 지키고 있던 군사들이 준재와 진화를 잡아 일으켰다. 그렇게 두 사람을 끌고 입구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그 때였다. 예원이 시끄러운 밖을 확인하기 위해 닫혀있던 처소의 문을 열었다. 예원에게 들어온 것은 군사들에게 이끌려가는 두 사람의 모습이었다. “……진화?” 두 눈을 감고 있던 정후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두 눈을 떴다. 그리고 예원이 문을 열었다는 것을 알아채고선 처소의 앞으로 달려갔다. 굳어진 표정으로 진화가 끌려가는 곳을 바라보는 예원의 앞에 선 정후는 처소 밖으로 나오려는 예원을 막았다. “왕후님. 들어가십시오.” 정후의 말에 예원은 고개를 돌려 정후를 바라봤다. 예원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정후가 자신의 감정을 짓누르며 참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예원은 자신을 잡은 정후의 손을 뿌리치며 대답했다. “진화가 오지 않았습니까. 헌데, 어찌 저리…….” “왕후님.” 정후는 다시 한 번 예원의 팔을 잡았다. 그러나 예원은 또 다시 정후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진성궁의 입구에서 벗어나는 진화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느리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목소리는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어, 어마마마…….” 신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 태왕대비의 앞에 선 예원은 분노에 가득 찬 태왕대비의 모습을 보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러나 군사들에게 붙잡혀 끌려가는 진화와 준재의 뒷모습을 보고선 태왕대비에게 물었다. “어찌, 도월궁이…… 저리 가는 것입니까.” “중전. 도월궁이 문리좌의 사주(使嗾)를 받고 중전을 시해(弑害)하려 했습니다.” “시, 시해라니요.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시 옵니까.” 한편, 그에 관한 이야기는 궁 안에서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진화와 준재가 예원을 독살하여 왕위 계승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는 소문과 더불어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유언비어(流言蜚語)들이 말이다. 그리고 그 둘에 대한 태왕대비의 분노 역시……. “그게…… 사실입니까.” “예. 태왕대비께서 직접 내리신 명(命)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시겠습니다.” “그럴 것입니다. 왕실의 최고 어른이 아니십니까.” 대신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것처럼 태왕대비의 말을 거역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이 나라의 왕인 적 뿐이었다. 그러나 왕의 신분이어도 왕실의 최고 어른인 태왕대비의 말은 그리 쉽게 꺾을 수 없었다. “어마마마…….” “할 것입니다.” 역시나 태왕대비의 뜻은 완강했다. 기녀 출신의 후궁을 들인다 했을 때, 자신의 뜻을 굽힌 채 궁으로 들였다. 그리고 도월궁에 문리좌가 드나든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도 그 것이 사실이 아닐 거라 믿었었다. 그 두 사람이 중전과 뱃속의 원자를 죽이려 했다는 이 일에 대해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해 자신도 책임이 있기 때문에……. “중전과 원자를 죽이려던 자들입니다. 그것은 이 왕실을 능멸한 대역죄입니다.” “…………” “주상(主上)께서는 나서지 마세요. 내가…… 할 것입니다.” 그날 밤, 모두가 잠든 시간이 되어서야 정후는 진화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횃불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그 곳은 정적만이 감돌았다. 정후는 숨을 들이켜고 천천히 걸어갔다. 예원은 진화의 소식에 정신을 잃은 채,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예원을 보면서 정후는 두 주먹을 꽉 쥐었고 이 일에 대해 밝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친 동생과도 같았던 진화를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고, 또한 자신과 같은 마음으로 예원을 바라보던 진화의 가여운 사랑에 눈물이 났다. “진화야.” 진화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감고 있던 두 눈을 떴다. 그리고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정후의 모습에 진화의 두 눈은 어느새 눈물로 가득해졌다. “……오라버니.” 그러나 진화는 이내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며 눈물을 삼켜냈다. “네가, 그러지 않은 거잖아. 그럴 수도…… 없는 거잖아.” “…………” “헌데, 왜…… 말하지 않아.” 정후의 물음에 진화는 두 손에 세게 힘을 줬다. 정후는 그런 진화가 너무도 가엾어 보였다. 진화는 파르르 떨리는 두 눈을 깜박거리며 정후의 물음에 대답했다. “차라리…… 이 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진화야.” “……오라버니.” 진화는 옥의 기둥을 잡고 있는 정후의 두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정후와 두 눈을 마주하며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처럼 아무런 표현도 못한 채…… 그리 바보처럼 바라보지는 마. 적어도 오라버니는…… 사내이니까.” 정후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눈물을 본 진화는 울지 않기 위해 입술을 깨물며 정후의 손을 감싸고 있던 자신의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리고 정후에게 두었던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긴 뒤, 정후에게 말했다. “그만 가. 오라버니까지 다치면, 누가, 어…… 언니 옆을 지켜주겠어.” 진화의 곁을 계속해서 지키던 정후는 결국 진성궁으로 돌아갔다. 정후가 돌아간 뒤, 진화는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며 버텨내고 있었다. 그런 진화의 모습을 반대편 옥에서 바라보고 있던 준재는 작은 목소리로 진화를 불렀다. “도월궁.” “…………” “진정으로 이 길이 더 나을 지도 모른다 생각하셨습니까.” “……예. 그랬습니다.” 진화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진화는 입술을 깨물며 애써 더 나오려는 눈물을 참아냈다. 그리고 담담한 듯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헌데…… 문리좌가 나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 “어찌, 어찌…… 이러시는 것입니까.” 결국 진화의 목소리는 파르르 떨리고 말았다. 그 목소리를 전해들은 준재의 두 눈이 붉어졌다. 준재는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트리곤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그리고 진화의 물음에 답했다. “저도 이 길이 더 나을 것 같아서입니다.” “…………” “마음 속 정인(情人)을 보낸 뒤, 살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버텨낼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준재는 자신의 두 눈에 담겨 있던 눈물이 땅으로 향하자, 고개를 들어 진화를 바라봤다. 그리고 진화를 보며 살짝 웃어보였다. 그런 준재를 보고 있던 진화는 결국 참고 있던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준재는 “우리가 가져가는 그 비밀은 언젠가는 다 밝혀지게 될 것입니다.” “문리좌.” “미안합니다. 당신을 지켜줄 수 없는…… 사내여서…….” “…………” “다음 생엔, 이리 만나지 맙시다.” “……문리좌.” “적어도 평범한 여인과 사내로 만나, 서로를 품을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만납시다.” 말 끝을 흐리며 고개를 떨어트리는 준재를 바라보는 진화의 두 눈이 눈물로 흐릿해졌다. 두 볼로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지도 못하는 진화는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준재에게 그래도 희미하게 웃어줬다. 그리고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거렸고, 준재의 말에 답했다. “그러겠습니다. 하늘이…… 우리를 다시 만나게 해준다면, 그 때는…… 당신의 여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두 사람을 밝히고 있던 환한 달빛이 구름에 가려지고…… 그렇게 길지 않은 그들의 마지막 밤이 흘러가고 있었다. 第 21 話 이레라는 시간이 흘렀다. 두 사람의 죽음과 함께 궁에 찾아 온 것은 깨지지 않는 고요함이었다. 그리고 그 고요함의 시작은 진성궁(眞成宮)이었다. 진화의 죽음을 막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리던 예원은 정신을 잃고 나흘이라는 시간을 고통스럽게 보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난 뒤의 사흘을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채 보내고 있었다. “마마. 중전마마.” 처소 앞에서 예원을 부르는 박상궁은?대답하지 않는 예원의 행동에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그러나 예원은 그런 박상궁의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박상궁을 처소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잠시나마 이 궁에 있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예원의 머릿속을 맴도는 그 말, 이생에서 진화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었다. 예원은 서궤(書?) 위에 올려진 진화의 유골함을 바라봤다. 처소 안에서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자, 박상궁은 고개를 떨어트리고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박상궁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정후였다. 박상궁은 입술을 깨물고선 천천히 정후에게로 다가갔다. 먼 산을 바라보고 있던 정후는 발자국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박상궁의 모습에 정후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런 정후를 보며 박상궁은 미간을 찌푸리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정후에게 말했다. “……중전마마께 가 보세요.” 뜻밖의 말에 정후는 놀란 눈으로 박상궁을 응시했다. 박상궁은 그런 정후의 시선을 피하며 다시 자신의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처소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정후는 크게 숨을 들이켜고 처소로 다가갔다. 안으로 들어선 정후의 발자국 소리만이 처소 안에 울려 퍼졌다. 예원의 방 앞에 멈춰선 정후는 조심스럽게 문에 손을 가져갔다. 문을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땅으로 떨어트린 채, 정후는 느리게 방문을 열었다. 열린 방은 낮에도 불구하고 어둠으로 가득했다. 정후는 입술을 깨물고 방 안 깊숙이 들어섰다. “……왕후님.” 나지막하게 예원을 불렀다. 그러나 인기척은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궁전지사.” 예원의 목소리가 정후에게 들려왔다. 희미하게 들렸지만, 그 덕분에 정후는 어둠 속에서 예원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정후는 예원이 앉아 있는 곳으로 한 걸음씩,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나 그 걸음은 얼마 가지 않아 멈췄다. 발자국 소리가 멈추자 예원은 고개를 들어 정후를 바라봤다. 방 안이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정후의 표정을 보고 예원은 가슴 한편이 저려왔다. 많이 야위어있었기에……. 예원은 정후에게 향해 있던 시선을 다시 자신의 손이 놓여진 서궤 위로 옮겼다. 그리고 진화의 유골함을 바라보며 속삭이듯 정후에게 말했다. “진화가 궁에 들어왔을 적, 나는 너무도 좋았습니다. 함께 할 수 있을 거라 그리…… 생각했으니까요.” “…………” “헌데…… 말 한 번 따듯하게 해주지 못했고……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왕후님.” “내가 너무 많은 것을 꿈꾼 것인가 봅니다.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 모두가 행복할 수는 없는 것인데…….” 예원은 넘치려는 감정을 짓누르기 위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작은 손에 힘을 주고선 간신히 다시 눈을 떴다. “궁전지사…….” “……예.” “이 아이를…… 보내주어야겠습니다.” 같은 시각, 안동. 적의 말을 듣고 돌아와 부원군은 여러 가지 생각에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결국, 택한 것은 직접 동생 덕주를 만나겠다는 것이었다. 20여 년 만에 찾은 덕주의 집. 부원군은 집의 모습을 바라보다 긴 탄식과 함께 큰 소리로 외쳤다. 부원군의 외침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머슴은 부원군의 모습에 무척이나 놀란 듯 했다. 그리고 몸을 숙여 부원군을 맞이했다. “……네 주인은 어디 있느냐.” 머슴을 따라 간 곳은 마당과 길게 연결 된 사랑채였다. 고개를 푹 숙이고 인사를 한 뒤, 머슴을 재빨리 반대편으로 도망가듯 빠르게 걸어갔다. 부원군은 마른 침을 삼키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몇 걸음 가지 않아, 사랑채 끝에 서 있는 덕주의 모습을 발견했다. “김덕주.” 나지막한 목소리로 덕주의 이름을 불렀다. 부원군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덕주가 부원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20년 만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부원군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사랑채로 올라섰다. 덕주는 시선을 아래로 둔 채, 부원군의 모습을 보지 않았다. 부원군은 그런 덕주를 보다가 주먹을 꽉 쥐고 물었다. “어찌…… 네 양자를 궁으로 들여보낸 것이냐.” “……그것을 물어보려 20년 만에, 이리 찾으신 겁니까.” 덕주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어 부원군을 바라봤다. 부원군은 그런 덕주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그 물음에 답했다. “그래서다.” “…………” “예원의 곁에, 20년 동안 연(緣)을 끊은 채 살았던 덕주, 네 양자가 있기 때문…….” “……무슨 상관입니까.” 부원군의 말문을 막았다. 덕주의 말에 부원군은 살짝 당황한 기색을 내보였다. 덕주는 그런 부원군을 보며 눈썹을 치켜 올렸다. 부원군은 그 순간 느낄 수 있었다. 덕주의 눈빛이 자신을 원망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제 양자가 형님에게 폐라도 끼치는 것입니까.” “덕주, 네가…….” “왜 궁에 보냈냐고 물으셨습니까.” “…………” “그리 그 답을 듣고 싶으시다면, 예. 말씀 드리지요. 제 양자를 궁으로 보낸 이유는…… 그 아이가, 형님의 여식을 지키고 싶다 했기 때문입니다.” 덕주의 답을 들은 순간, 부원군의 몸이 살짝 기울어졌다. 예원을 미리 알고 있었던 자, 부원군은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순간, 유일하게 떠오르는 일이 있었다. 적과 예원의 첫 만남. 비오는 그 날, 창백하게 질린 예원을 업고 사저로 달려 온 어린 소년의 모습이 부원군의 눈? 앞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어린 나이에 자신의 전부를 걸고, 정인(情人)을 바라보며 그리고…… 지키기 위해, 궁으로 가려했던 아이였기에 보낸 것입니다.” 정인을 바라봤다는 말에 부원군의 얼굴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굳어졌다. 그런 부원군을 보며 덕주는 두 주먹을 꽉 쥐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어미가…… 저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 “20년이라는 세월을……! 홀로 버텨내던 그 아이의 어미가, 저에게 이제야 손을 내밀었습니다.” 부원군은 흥분한 목소리로 자신에게 소리치는 덕주를 바라봤다. 덕주는 끓어오르는 분노와 원망을 애써 참아내며, 부원군에게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렇게 하고 싶었던 말을 꺼내는 덕주였다. “형님이 버린…… 기녀(妓女) 운초가 말입니다.” 덕주의 말에 부원군은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부원군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운초에 대한 기억은 찾을 수 없을 만큼 희미했다. 그저, 자신이 화초를 올려준 여인이라는 그 기억이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 그 아이가 내 아들이라.?어찌…… 장담할 수 있냐.” “운초는 형님만을…… 사내로 품었습니다.” 부원군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헛웃음을 쳤다. 늦게야 이 모든 것을 알게 된 상황이 너무나도 비참하게 느껴졌다. 부원군은 힘없이 내려진 시선을 간신히 덕주에게 고정시킨 뒤,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는…… 알고 있었느냐.” “…………” 덕주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감정을 내보이지 않았던 부원군은 떨리는 손을 꽉 쥐고선 덕주의 멱살을 낚아챘다. 그리고 두려움으로 깊어진 두 눈으로 덕주를 노려보며 물었다. “어찌! 그 모든 것을 알면서 그 아일, 궁으로 들여보낸 것이냐!” “형님의 잘못이니까요!” 덕주의 매서운 두 눈이 부원군을 노려봤다. 부원군은 덕주의 말에 충격을 먹은 듯, 잡고 있던 덕주의 멱살을 서서히 놓아주었다. 그리고 어느 한 곳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두 눈을 감았다. 덕주는 그런 부원군을 계속해서 노려보며 원망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소리쳤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형님의 잘못입니다!” “…………” “형님이 운초를 품지만 않았다면, 우리가 이리 되지 않았을 것이며! 그 아이가…… 예원을 연모(戀慕)하게 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덕주에게서 완전히 손을 놓은 부원군은 충격에 비틀거리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렇게 한 걸음씩 덕주에게서 멀어지며, 부원군은 입술을 깨물었다. ‘모든 게…… 내 잘못이다. 그런…… 것이다.’ 해가 뉘엿뉘엿 지면서 붉은 노을이 산 뒤로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고요함만이 감도는 바닷가에는 단 두 사람만이 있었다. 아니, 이생의 사람은 아니었지만 진화도 함께 있었다. 궁에서 나오면서 박상궁에게 정후와 단 둘이 진화를 보낼 줄 것이라 명했고, 절대로 다른 이를 따르게 하지 못하도록 지시했다. 박상궁은 자정이 되기 전 궁으로 돌아올 것을 약속 받은 뒤에야 예원을 보내주었다. 그로 인해 궁이 아닌 다른 곳에서 예원과 함께 할 수 있게 된 정후였다. 잔잔히 퍼지는 파도 위에 선 예원은 굳게 닫혀 있던 진화의 유골함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예원은 입술을 깨물며 진화를 자신의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바다로 진화를 보내주었다. 그렇게 진화를 보내는 예원을 보면서 정후는 자신의 주머니에 들어있는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오라버니.’ ‘이 걸, 언니에게…… 돌려줘.’ 쥐고 있던 손을 편 정후. 그 손에 쥐어진 것은 예원이 궁으로 떠나기 전, 진화에게 주었던 옥가락지였다. 정후는 옥가락지를 보며 두 눈을 감고 떨리는 손을 다시 쥐었다. ‘그리고 나로 인해…… 슬퍼하지 말고, 부디…… 행복하게만 살아달라고…….’ 옥에 갇힌 채로 죽음을 기다리던 그 순간에도 진화는 예원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정후는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예원에게로 다가갔다. 자리에 주저앉은 채로 진화의 빈 유골함을 바라보던 예원은 정후가 다가오자 고개를 들어올렸다. “왕후님.” 정후의 부름에도 예원은 일어나지 않고, 다시 고개를 숙인 채 빈 유골함을 바라봤다. 그런 예원의 옆에 앉은 정후는 예원의 떨리는 손을 잡았다. 예원은 붉어진 눈으로 정후를 응시했다. 정후는 예원을 바라보며 자신이 쥐고 있던 옥가락지를 예원의 손에 놓아줬다. “……진화가 남긴, 유일한 것입니다.” 정후의 손이 가리고 있던 손이 보이자 예원의 두 눈에는 어느덧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눈물을 참기 위해 애쓰는 예원의 모습을 본 정후는 일어서서 몸을 돌렸다. 멍하니 손에 놓인 옥가락지를 바라보던 예원은 떨리는 손으로 반지를 잡았다. 그리고 자신의 손에 끼운 뒤, 그 손을 꽉 감싸 쥐었다. 그리고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궁전지사.” 돌아 서 있던 정후는 예원의 부름에 몸을 살짝 돌렸다. 예원은 어느덧 담담한 표정으로 바다 너머의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예원의 모습을 본 정후는 완전히 몸을 돌려 예원의 옆에 섰다. 예원은 수평선을 바라보던 자신의 두 눈을 정후에게로 돌렸다. 그리고 정후와 눈을 맞춘 뒤, 말했다. “난, 궁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안됩니다. 왕후님…… 그리 해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예원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감정을 숨기지 못한 채 가쁜 숨을 내쉬는 예원을 정후는 안쓰러운 듯 슬픈 눈빛으로 바라봤다. 예원은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참아냈고, 말을 이었다. “궁은…… 나를 가두고, 내 사람들을 하나 둘 잃게 할 것입니다. 허나, 자신이 없습니다. 그렇게 또 다시…… 누군가를 잃기가 두렵고, 싫습니다.” 참고 있던 눈물은 말이 끝나자마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예원의 눈물을 지켜보던 정후는 자신의 손을 예원의 볼로 가져갔다. 정후의 떨리는 손이 예원의 볼에 닿았다. 예원은 깊은 두 눈으로 정후를 바라봤다. 정후의 두 눈에서도 눈물이 떨어졌다. 예원은 옥가락지가 끼워진 작은 손으로 자신의 볼을 감싼 정후의 손을 감쌌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그대가 될까, 겁이 납니다.’ 第 22 話 날이 밝자마자 적은 진성궁(眞成宮)으로 향했다. 지난 밤, 예원이 궁을 나갔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자정까지 돌아오기로 박상궁과 약조하였기에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예원은 돌아오지 않았다. 적의 모습에 박상궁은 서둘러 무릎을 꿇으며 몸을 낮췄다. 문내관은 그런 박상궁을 바라보다 적에게 시선을 돌렸다. 적은 아무런 표정도 지어 보이지 않고 두 눈만 깜박거렸다. 박상궁은 바닥에 머리가 닿을 듯 숙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적에게 말했다. “소신(小臣)을 죽여주시옵소서.” 자신의 앞에 완전히 몸을 눕힌 박상궁을 내려다보며 적은 무척이나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궁전지사와…… 함께 간 것이냐.” “…………” “대답하라!” “그…… 그러하옵니다. 전하.” 박상궁의 대답을 듣는 순간, 적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지만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리고 적의 머릿속을 스치는 또 하나의 기억……. ‘스스로…… 벗어나려 할지도 모릅니다.’ 예원의 운명에 관한 비극을 말해줬던 화답사(華?寺)의 지주 원방(元幇)의 예언을 말이다. 적은 두 눈을 감고 깊은 탄식을 뱉었다. 그리고 이어 문내관에게 명을 내렸다. “지금 당장…… 궁전지사의 어미를 불러 들이 거라.” “예. 전하.” “그리고…….” 적은 두 주먹에 힘을 주며 저리는 가슴의 통증을 참아냈다. 그리고 끓어오르는 두려움와 함께 차오르는 숨을 들이키며 말을 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궁을 나간 것을…… 절대로 발설해서는 안 된다.” 같은 시각, 궁으로 향하지 않은 두 사람은 진화를 보낸 그 바닷가에 남아 있었다. 금빛 모래 위에 앉아 잔잔히 밀려들어오는 파도를 바라보고 있는 예원. 그 곁으로 정후가 다가왔다. 예원은 정후를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활짝 웃어보였다. 정후는 예원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자신의 무릎을 감싸고 있는 손을 예원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살짝 쥐고 있던 손을 펴 예원에게 보여주었다. 그것을 본 예원의 미소는 너무도 아름다웠다. “꽃반지가 아닙니까.” “……예. 오던 길에 꺾어 만들었습니다.” 예원은 정후의 손에 올려진 꽃반지를 조심스럽게 잡았다. 비록, 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이었지만 예원은 그 반지가 어떤 반지보다도 예쁘게 보였다. 활짝 웃어 보이던 예원은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며 정후에게 물었다. “끼워…… 주시겠습니까.” “예?” 예원의 말에 정후는 놀란 듯 커진 눈을 한 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예원은 그런 정후를 바라보다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농입니다. 그리 놀라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예.” 정후는 머쓱한 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예원은 정후를 바라보던 시선을 꽃반지로 옮겼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손가락에 끼웠다. 끼우고 보니 예원은 꽃반지가 더 마음에 들었다. 환하게 웃으며 꽃반지를 만지작거리는 예원을 바라보던 정후는 나지막하게 불렀다. “왕후님.” 그 부름에 예원은 고개를 들어 정후를 바라봤다. 정후는 예원과 눈이 마주치자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한 곳에 멈추지 못한 채, 두리번거렸다. 예원은 반대편 손으로 꽃반지가 끼워진 손을 맞잡은 뒤, 정후에게 물었다. “그리…… 꼭 불러야겠습니까.” 예원의 말에 정후의 시선이 멈췄다. 두 눈을 깜박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정후에게 예원은 다시 한 번 활짝 웃으며 물었다. “이름을 불러 주면 안 됩니까.” “제, 제가…… 어찌.” “괜찮습니다.” “…………” “지금은 양갓집 규수도 아니고, 왕의 여인도 아닌…… 그저 평범한 여인이 아닙니까.” 정후는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예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가슴은 말을 듣지 않았다. 저려오는 가슴의 통증은 이미 온 몸으로 퍼져 있었다. 정후는 붉어진 눈시울을 한 채로 예원을 응시하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예…….” “…………” “……예원…….” 힘겹게 예원의 이름을 처음으로 불러보는 정후. 그런 정후의 목소리에 어느덧 예원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러나 눈물을 참고, 웃어 보이며 예원은 지금껏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말을 꺼냈다. “예, 오라버니…….” 한편, 덕주의 말을 듣고 다시 궁으로 돌아온 부원군이 곧장 향한 곳은 진성궁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고요한 진성궁의 분위기에 부원군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뭔가 달랐다. 허전한 느낌이 감돌고 있었다. 처소 앞에 서서 불안감에 서성이던 박상궁은 발자국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기다렸던 예원은 아니었지만, 부원군의 등장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박상궁은 서둘러 부원군의 앞으로 걸어갔다.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조심스럽게 부원군에게 물었다. “어, 어찌…… 궁에 오셨사옵니까.” “중전마마를 뵈어야 하네.” “……예?” “급히 전할 말이니 어서 고해주게.” 박상궁은 부원군의 말에 입술을 깨물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 박상궁을 본 부원군은 살짝 높아진 언성으로 박상궁에게 물었다. “어찌 고하지 않는가! 급하다 하지 않았나.” “……저, 지난 밤, 궁을 나가셨는데……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박상궁의 말에 부원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서 궁을 나갔다는 것에 불안감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부원군은 가슴을 쓸어내리고선 다시 한 번 박상궁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중전께서 궁을 나가시다니……!” “그, 그것이…….” “홀로…… 나가셨단 말이냐.” “수…… 수행 궁전지사와…… 함께 가셨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부원군의 몸이 비틀거리며 중심을 잃었다. 간신히 몸의 중심을 되찾은 부원군은 허탈하다는 듯 웃음기 하나 없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박상궁은 그런 부원군의 모습을 보다 고개를 숙였다. 부원군은 떨리는 두 손을 꽉 쥔 뒤 몸을 돌려 진성궁의 입구로 향했다. 진성궁에서 나온 부원군은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역시나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이면서 말이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형님의 잘못입니다!’ 덕주의 외침이 귓가에 생생하게 들려왔다. 부원군은 걸음을 멈추고 옆에 세워진 돌기둥을 부여잡았다. 그렇게 한동안 고개를 숙인 채 그 자리에 서 있던 부원군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고개를 든 부원군의 두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한 여인의 모습이었다. 이제는 고운 피부도 아니고, 아리따운 외모도 아닌 여인이었지만 부원군은 그 여인이 누구인지 단 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운……초.” 반대편으로 걸어가는 운초의 모습을 본 부원군은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그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운초의 바로 앞,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서 두 눈으로 운초의 모습을 바라봤다. 자신의 앞에 선 사내의 모습을 바라보던 운초의 굳어졌던 표정은 어느새 창백하게 변해버렸다. 20년 만에 정인의 모습을 본 것이었다. 그러나 운초는 입술을 꽉 깨물고, 자신의 치맛자락을 잡고 있는 두 손에 힘을 줬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자신을 지나쳐 걸어가는 운초의 모습에 부원군의 두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져 서 있던 부원군은 운초가 가는 곳으로 몸을 돌린 뒤, 큰 소리로 외쳤다. “운초……!” 그 자리에 운초가 멈춰 섰다. 부원군은 멈춰선 운초에게 조금씩 다가갔다.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운초의 가슴이 점점 찢기듯 아파왔다. 운초의 바로 뒤에 선 부원군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운초에게 물었다. “……왜, 그 아이를 궁으로 보낸 것인가.” “…………” “알고 있지 않았는가. 중전이 내 여식이라…….” “아니요.” “……!” “……몰랐습니다. 그 아이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었습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단지,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해 정후의 연모(戀慕)의 정(情)이 다칠까 염려하였을 뿐이었다. 이렇게 얽히고설킨 연(緣)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정후에게 멈추라고 할 수 없었다. 보듬어주기엔 그 상처가 너무 클 것이기에……. “……중전과 궁전지사…… 자네와 내가 끝내야 하네.” “…………” “운초.” “저는, 그리 못합니다. 그리 하지 않을…….” “그 둘을 지금 막지 않는다면!” 부원군은 운초의 손을 잡았다. 운초는 눈물이 가득 맺힌 눈으로 부원군을 응시했다. 붉어진 눈으로 운초를 내려 보던 부원군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서로에게 독(毒)이 될 것이야. 연모(戀慕)의 탈을 쓴 독…… 말일세.” 한편, 바닷가에 앉아 있던 두 사람. 해가 지기 시작하자 정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뒤 아직 자리에 앉아 있는 예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정후의 손을 본 예원은 조심스럽게 그 손을 잡았고, 정후에게 의지하여 일어났다. 그런데 그 순간, 예원의 손에 끼워져 있던 꽃반지가 끊어져버렸다. 그것을 본 예원은 커진 눈으로 정후를 바라봤다. “……꼬, 꽃반지가…….” 예원의 두 눈에는 오직 끊어진 채로 남아 있는 꽃반지만이 들어왔다. 정후는 그런 예원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괜찮다면서 다시 만들어주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예원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처음으로 받아본 선물이었다. 다시 만든다고 해서 그만큼의 가치가 생겨나지 않을 터……. 예원은 입술을 깨물며, 반대편 손으로 꽃반지를 감쌌다. “……이리 맥없이 끊어져버렸습니다.” 第 23 話 적을 만난 운초는 결국, 두 사람의 간 곳을 말하지 않았다. 단 한사람, 부원군에게만 그 곳이 어딘지 말해주었다. 적은 예원과 정후의 행방을 모른다는 운초를 돌려보낸 뒤, 대전(大殿)의 정자에 서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운명이라는 것은 하늘이 정해준 것이요…… 거슬러 올라갈 수도, 내려올 수도 없는 것입니다.’ 원방(元幇)의 말이 적의 귓가를 맴돌았다. 적은 먼 산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적의 뒤로 문내관이 조심스럽게 다가왔고, 이내 적에게 말을 건넸다. “전하. 태왕대비마마께서 오셨사옵니다.” “……어찌 오셨다 하던가.” “중전마마의 일로 오셨다 하옵니다.” 문내관의 말에 적은 상기된 표정으로 정자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문내관의 뒤를 따라 태왕대비에게로 향했다. 대전의 입구에 서서 적을 기다리고 있는 태왕대비는 두려움에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적의 모습에 치맛자락을 붙잡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는 태왕대비였다. “주상(主上).” “…………” “중전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태왕대비의 물음에 적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붉어진 눈으로 태왕대비를 바라보며 천천히 그 물음에 대답했다. “……궁에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중전이 궁에 없다니요!” “……청유(淸遊)를…… 떠나고 싶다하여, 그리하라 했습니다.” “청유를 가셨단 말입니까.” 거짓을 말하고 있었다. 적과는 그 날 이후로 또 다시 말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았던 예원이었다. 하지만 태왕대비에게는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예원을 패륜(悖倫)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매몰차게 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적이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태왕대비는 적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모습이 꼭 예원에 대한 무관심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주상. 아이를 가진 중전인데, 어찌 이 위험한 시기에 청유를 보내셨습니까.” 태왕대비의 말에 적의 눈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적은 굳어진 표정으로 태왕대비를 바라보며 자신의 감정을 애써 짓누르며 대답했다. “수행…… 궁전지사가 함께 갔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같은 시각, 대신(大臣)들이 모여 있는 종하의 사저는 무척이나 고요했다. 모두의 예상과는 다르게 중전이 아닌, 도월궁(桃月宮) 진화와 문리좌(文吏座)가 대역죄의 누명을 쓴 채 죽음을 맞이했다. 만약, 자칫하면 모두가 죽을 수도 있었던 위험한 순간이었다. “주품석좌(主稟席座), 어찌 하실 계획입니까.” “예. 문리좌와 그 기녀가 모든 것을 밝히지 않아서 다행이었지만, 이미 상황은 악화되었습니다.” 택진을 비롯한 대신들은 모두 불안감에 종하의 선택을 재촉하고 있었다. 종하는 술로 목을 축인 뒤, 대신들을 매섭게 노려보며 물었다. “지금…… 직접 하란 말입니까.” 종하의 물음에 대신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쥐 죽은 듯 조용하게 앉아 있었다. 그나마 택진이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그, 그것이 좋을 듯하여…… 더 이상 이용할 자도 없지 않습니까.” 택진의 물음에 종하는 한 쪽 입 고리를 올리며 웃어보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술잔을 기울였고, 목을 축였다. 종하는 대신들을 돌아보다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있습니다.” 종하의 말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대신들은 커진 눈으로 종하만을 응시했다. 종하는 굳어진 표정으로 두 손으로 턱을 받쳤다. 그리고 이내 차가운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제가 직접 이용할 자…… 그 자가 정변(政變)의 시작입니다.” 한편, 운초에게 들은 예원과 정후가 있는 바닷가에 도착한 부원군은 주변을 돌아보며 두 사람의 모습을 찾았다. 바다가 가까워질수록 차가운 바닷바람이 부원군의 몸을 감쌌다. 오늘도 역시나 바닷가에서 경치를 바라보고 있던 예원과 정후는 갑자기 바람이 세차게 불자, 서둘러 사주(砂洲)에서 걸어 나왔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지내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부원군의 두 눈에 그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예원아.” 부원군과는 반대로 정후와 함께 걸어가던 예원은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을 느끼고선 고개를 돌렸다. 예원의 행동에 정후 역시 따라 고개를 돌려 반대편을 바라봤다. 예원은 커진 눈으로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부원군을 응시했다. “아…… 아버지.” 두 사람에게로 점점 다가오는 부원군은 예원과 정후를 번갈아 바라봤다. 예원의 앞에 선 부원군, 정후가 있는 곳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자리 좀…… 비켜주게나.” 부원군의 말에 정후는 예원을 바라봤다. 예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놀라 커진 눈으로 부원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정후는 망설이다가 살짝 고개를 숙인 뒤, 먼저 돌아섰다. 정후가 점점 멀어지자, 예원에게 좀 더 다가서는 부원군이었다. 그런 부원군의 행동에 예원은 자신을 잡으러왔다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았다. 그리고 이곳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어찌 알았을 지가 제일 궁금했다. “왜…… 궁을 나온 것이냐.” “…………” “예원아.” 부원군의 부름에 예원은 땅으로 향해있던 시선을 부원군에게로 옮겼다. 물어볼 것도, 그리고 하고 싶은 말도 많았지만 부원군은 예원의 대답을 기다리며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한참동안 그렇게 두 사람의 사이에는 바람만이 불어올 뿐이었다. “저는…… 궁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예원의 말에 순간적으로 부원군의 몸이 비틀거렸다. 그런 부원군을 보는 예원의 시선은 담담했다. 부원군은 떨리는 목소리로 예원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어찌 궁으로 돌아가지 않아!” 부원군의 물음에 예원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답을 하지 않는 예원을 보다가 부원군은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그 말을 꺼냈다. “저 자와…… 살겠다는 것이냐!” “…………” “예원아!” “……궁으로 돌아간다 해서, 제가 행복할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그럼, 도망 다니며 사는 것은 행복할 것 같으냐!” 부원군의 말과 함께 예원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부원군은 그런 예원을 보면서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전해야 하는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넌, 저 자와 함께 있는 순간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껴한다.” “…………” “……네 뱃속의 원자와, 신분의 차이…… 그리고…….” 마지막 말은 그리 쉽게 꺼내지지 않았다. 이미 예원의 두 눈은 눈물로 가득해져 있었고, 부원군을 원망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부원군은 두 눈을 감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예원에게 전했다. “……근친(近親)이라는 이유로…… 그리 될 것이다.” 부원군의 말에 예원은 그 순간 온 몸이 경직되었다. 그리고 살짝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파르르 떨리는 두 눈을 깜박거렸다. 허탈한 듯 미소를 짓던 예원은 미세하게 들리는 신음소리와 함께 부원군에게 물었다. “그…… 근친…… 이라니요.” “……미안 하구나…… 예원아…….” “……그게, 무슨 말씀이신 겁니까. 누구와…… 근친이라는…….” 예원의 물음에 부원군은 두 눈을 다시 감았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부원군을 보며 예원은 떨리는 손을 꽉 잡았다.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며 예원은 두려움과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버지!” 두 눈을 감고 있던 부원군은 천천히 눈을 떴고, 예원을 바라봤다. 그리고 입술을 꽉 깨물며 예원에게 힘겹게 진실을 말했다. “……내…… 아들이다.” 부원군의 대답을 듣는 순간, 예원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충격에 휩싸여 있는 예원을 보던 부원군은? 예원의 앞에 앉아 두 손을 잡았다. 파르르 떨리고 있는 예원의 두 손을 자신의 손으로 감싸며 부원군은 끝내 눈물을 보였다.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입니까.” 예원의 말에 부원군은 잡고 있던 손에 힘을 꽉 쥐었다. 맥없이 앉아있는 예원을 바라보며 부원군은 안쓰러운 듯 미간을 찌푸리며 예원에게 말했다. “궁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러지 않으면 모두가 다치고…… 죽을 지도 모른다.” 부원군은 한참동안 예원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예원의 손을 감싸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리고 예원의 어깨를 감싸며 자신의 품에 예원을 안았다. 부원군에게 안긴 예원은 흐느끼며 부원군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예원의 등을 다독이며 부원군은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 선택에 모든 것을 맡길 것이다.” “…………” “허나, 지키고 싶다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구나.” 부원군은 그 말을 남기고선 예원에게 등을 돌린 채 그곳을 떠났다. 부원군의 말을 듣고 예원은 한참동안 그 자리에 그렇게 앉아있었다.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예원은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고 정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비틀거리며 걸어가던 예원은 지난날을 떠올리며 정후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깨달아가고 있었다. ‘……소신(小臣), 왕후님을 지키기 위해 궁에 들어왔습니다. 눈 감는 그 순간까지…… 왕후님을 지킬 것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언젠가는…… 모두가 함께 웃을 수 있는 날이 올 겁니다.’ 그러나 근친이라는 부원군의 말로 인하여 예원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지키기 위해서 궁으로 돌아가지 않으려던 것이었는데, 이제는 궁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다치게 될 상황이 된 것이었다. 예원은 두 손에 힘을 꽉 쥐었다. 그 시각, 정후는 오지 않는 예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정후에게 의문이 있다면 바로 부원군이 이곳을 어찌 알고 찾아왔냐는 것이었다. 자신이 이곳에 대해서 이야기한 사람은 유일하게 자신의 어미인 운초뿐이었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던 정후는 멀리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멀리서 걸어오는 예원의 모습을 보고 정후는 천천히 그곳으로 걸어갔다. 모든 생각을 정리하고 돌아오던 예원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정후의 모습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세게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정후가 예원의 앞에 멈춰 섰다. 어두웠지만 정후는 단번에 예원의 표정이 밝지 않은 것을 알아챘다. “괜찮으십니까.” 자신에게 괜찮은 지 묻는 정후를 바라보던 예원은 그 시선을 땅으로 떨어트렸다. 다시 한 번 두 손에 힘을 주며 예원은 정후에게 망설이던 말을 전했다. “……궁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차가운 예원의 목소리에 정후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자신에게 말하는 예원을 보며 정후는 조심스럽게 예원을 불렀다. “왕후님.” 예원은 자신을 부르는 정후를 바라봤다. 그 순간, 예원의 귓가에 부원군이 했던 모든 말들이 생생히 들려왔다. ‘지키고 싶다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모두가 다치고…… 죽을 지도 모른다.’ ‘……내…… 아들이다.’ 정후는 멍하니 서 있는 예원에게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예원은 자신에게 점점 다가오는 정후의 손을 바라봤다. 그렇게 예원의 손목까지 다가왔던 정후의 손. 그 순간, 예원의 뒤로 물러서면서 정후의 손은 예원을 잡지 못했다. 정후는 예원의 행동에 낯설음을 느끼며 자신의 손을 거뒀다. 예원은 가쁘게 내쉬어지는 숨을 들이켜고 정후에게 말했다. “돌아가야…… 합니다.” 第 24 話 예원이 궁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적은 곧장 진성궁(眞成宮)으로 향했다. 그 소식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분주하게 움직이는 나인들의 모습이었다. 적이 진성궁 안으로 들어서자 모든 나인들은 일제히 동작을 멈추고 몸을 낮췄다. “……전하!” 박상궁이 적의 모습을 보고 놀라 서둘러 몸을 낮추며 맞이했다. 적은 그런 박상궁을 내려 보며 물었다. “중전이…… 돌아온 것이냐.” “예…… 묘정시(卯正時)가 되어 궁으로 돌아오셨사옵니다.” 박상궁의 말에 적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굳게 닫힌 처소의 문을 바라봤다. 박상궁은 적이 왔다는 사실을 알린 뒤,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적은 담담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처소 안으로 들어섰다. 언제나 그랬듯이 고요한 예원의 처소. 예원의 방문 앞에 선 적은 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었다. 문고리를 잡은 손이 미세하게 떨렸고, 잠시 적은 망설였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감정을 추스른 뒤, 문을 열었다. 어두운 방 안은 예원의 숨소리조차도 들려오지 않았다. 방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적은 잡고 있던 문을 닫았다. “……중전.” 나지막한 목소리로 예원을 불렀다. 그 순간, 적의 귀로 점점 가까워지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 발자국 소리는 적의 앞에서 정확히 멈췄다. 적은 예원의 모습을 고스란히 눈에 담았다. 웃음기 하나 없는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슬픈 그 두 눈을 말이다. 적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예원은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서서히 자신의 몸을 낮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적은 예원의 모습을 지켜보던 자신의 눈을 의심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서 있던 예원이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은 상상해보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적은 떨리는 목소리로 예원에게 물었다. “어찌…… 어찌 이러는 것입니까.” “……신첩(臣妾)의…… 생각이 짧았사옵니다.” “중전.” “다시는…… 궁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예원은 주체할 수 없이 밀려드는 고통에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무릎 위에 올려져 있던 손에 힘을 주며 애꿎은 치맛자락을 잡은 뒤, 천천히 뒷말을 이었다. “수행궁전지사를…… 버리겠습니다.” 예원의 말에 적은 굳어진 표정으로 들썩이는 예원의 가녀린 어깨를 바라봤다. 그러다 이내 예원의 앞에 앉아 눈을 맞췄다. 고개를 들지 않은 채 흐느끼는 예원의 어깨를 적은 조심스럽게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예원을 자신의 품에 안았다. 적의 어깨에 고개를 묻은 채 눈물을 흘리는 예원. 그런 예원의 등을 감싸며 적은 저려오듯 아픈 자신의 가슴을 애써 다독였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울고 있는 예원에게 물었다. “……그 자를 끝까지 위하는 것입니까.” 적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정후에 대한 예원의 마음을……. 예원은 적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그 순간, 예원의 등을 감싸고 있던 적의 손이 바닥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그리고 적이 예원의 말에 답했다. “그리…… 하세요.” 적의 품에서 벗어난 예원은 붉어진 두 눈으로 적을 바라봤다. 자리에서 일어난 적은 입술을 깨물며 예원에게서 등을 돌렸다. 굳게 닫힌 문을 여는 적의 두 손이 파르르 떨렸다. 예원은 참고 있던 흐느낌을 터트렸다. 그 소리에 적은 문을 잡고 있는 자신의 손에 힘을 세게 줬다. 그러나 이내 발걸음을 떼었고, 예원의 방을 나왔다. ‘……당신에게 그보다 더한 벌(罰)은 없을 테니까.’ 같은 시각, 궁에 들어온 정후는 진성궁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지난밤부터 예원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거기에 정후에게는 궁으로 함께 들어오지 말자고 했던 그 차가운 목소리가 아직도 정후의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예원의 행동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걸어가던 정후. 정후의 옆으로 사악한 미소를 머금고 지나가는 자가 있었으니…… 종하였다. 종하는 자신을 지나쳐 진성궁으로 향하고 있는 정후의 뒷모습을 바라보더니 살짝 입 고리를 올리며 정후에게 말을 걸었다. “……중전과 청유(淸遊)를 다녀왔다 들었네.” 멍하니 생각에 잠겨 걸어가던 정후는 그 말에 걸음을 멈춰 섰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이 걸어온 곳을 바라봤다. 적색의 대신(大臣) 옷을 입고 있는 중년의 남자. 그 순간, 정후의 머릿속을 스쳐가는 기억이 있었다. ‘앞으로…… 중전마마를 잘…… 보살펴주길 부탁하네.’ 정후의 기억 속의 종하는 태왕대비가 쓰러지던 날의 모습 그대로였다. 종하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정후에게 웃어 보이더니 점점 거리를 좁혀왔다. 정후는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종하를 응시하다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래. 청유는 재미있었는가.” 그제야 눈치 챌 수 있었다. 예원과 자신이 궁에 없는 동안, 궁 안에서 어떠한 소문이 돌았는지 말이다. 정후는 희미하게 웃으며 종하의 물음에 대답했다. “……궁전지사의 임무를 다했을 뿐입니다.” 정후의 말에 종하는 활짝 웃어보이다가 이내 표정을 굳히며 낮게 내리고 있던 시선을 올려 매섭게 정후를 노려봤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입 고리를 올리며 정후에게 물었다. “헌데…… 진정 청유를 다녀온 것이 맞는가.” 허를 찌르는 종하의 물음에 정후의 표정은 급격히 굳어졌다. 정후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종하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네의 어미가 전하를 뵈었고, 중전의 아비인 부원군이 궁에 자주 모습을 보이더군.” 그 순간, 부원군이 어떻게 그곳을 찾아왔는지 짐작이 갔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감추었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종하에게 물었다. “청유를…… 가지 않았으면 왕후님과 제가 무엇을 했겠습니까.” “……도주(逃走).” 종하는 회심의 미소를 지어보이며 정후에게 더욱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정후의 바로 옆에 선 뒤,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서로, 연모(戀慕)…… 하는 것이지. 중전과…….” “……!”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궁 안에는 종하의 사람이 많았다. 그러니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도 종하에게는 다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청유를 떠났다는 궁 안의 소문을 듣고 확실하게 두 사람의 관계를 짐작했던 종하였다. 온 몸이 경직되어 그 자리에 굳어버린 정후는 미세하게 떨리는 손을 꽉 쥐었다. 그리고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종하를 노려봤다. 종하는 그런 정후를 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자네를 도와주려하는데…….” 종하의 말에 정후의 미간은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종하는 매서운 눈으로 정후를 바라보다가 이내 정후의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내 손을…… 잡겠는가.” 정후는 시선을 내려 종하의 손을 내려 봤다. 그러다 날카롭게 선 눈빛으로 다시 종하를 바라보며 차갑게 대답했다. “……제가 왜 대감의 손을 잡겠습니까.” “…………” “절대로…… 잡지 않을 것입니다.” 정후는 자신의 앞에 내밀어져 있는 종하의 손을 뿌리친 뒤, 다시 진성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종하는 그렇게 자신의 제안을 거절한 채로 멀어져가는 정후를 바라보며 사악하게 한 쪽 눈썹을 치켜 올린 뒤, 독백했다. “넌 결국, 잡고 말 것이다.” 종하에게서 벗어나 진성궁에 도착한 정후는 입술을 깨물며 지나온 길을 돌아봤다. 그리고 이내 시선을 돌려 진성궁을 바라봤다. 정후는 주먹을 꽉 쥐고, 진성궁의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 순간, 정후의 앞을 두 개의 창(槍)이 막았다. 정후는 커진 눈으로 창을 바라봤고, 고개를 돌려 문지기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짓인가.” 정후의 물음에도 문지기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정후는 그런 문지기들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선 창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힘껏 내리 누르는 문지기들 때문에 통과할 수 없었다. “……비켜라.”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들어갈 수…… 없다?” 문지기의 말은 정후를 웃게 만들었다. 허탈한 웃음을 짓던 정후는 이내 표정을 굳히고선 대답을 한 문지기에게 물었다. “어째서.” “……중전마마의 명이십니다.” 대답을 듣는 순간 정후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정후는 순간적으로 문지기의 멱살을 잡았고, 이내 매섭게 문지기를 내려 보며 다시 한 번 물었다. “누구의…… 명이라고?” “주, 중전마마께서…… 수행궁전지사를 처소 안으로 들이지 말라 명하셨습니다.” 자신을 막아선 이유를 안 정후는 잡고 있던 문지기의 멱살을 서서히 놓았다. 그리고 그 순간 재빨리 자신의 허리에 차고 있던 칼집에서 칼을 빼들어 문지기의 목에 가져갔다. 문지기는 흠칫 놀란 표정으로 정후를 바라봤다. 옆에서 정후를 막고 있던 문지기 역시 다름없었다. “……직접 뵈어서 들을 것이다.” “아, 안 됩니다!” “비켜…… 서라.” 칼을 더욱 더 가까이 대는 순간, 옆에 있던 문지기가 자리를 비켰다. 그 모습을 본 정후는 이내 칼을 거두고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들어선 진성궁에는 몇 명의 나인들만이 있을 뿐, 박상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정후는 칼을 다시 칼집에 집어넣고 처소의 앞으로 걸어갔다. 허나, 나인들은 아무도 정후를 말리지 않았다. 문지기에게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으므로……. 정후는 처소의 문을 열었고, 이내 그 안으로 들어섰다. 느리게 걸어가 예원의 방 앞에 선 정후는 미간을 찌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정후는 문고리를 잡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여느 때와 같이 어두운 예원의 방 안. 문을 닫고 돌아서는 그 순간, 예원의 목소리가 정후에게 들려왔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그 목소리는 지난밤보다도 더 차갑고 냉정하게 들려왔다. 정후는 살짝 벌어진 입을 닫지도 못한 채 예원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희미하게 방 안으로 들어오는 햇빛으로 인해 예원의 얼굴을 흐릿하게나마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정후는 미간을 찌푸렸다. 예원의 표정은 무섭도록 창백했다. 정후는 파르르 떨리는 두 주먹을 꽉 쥐고선 예원에게 물었다. “어찌…… 저를 들이지 말라 명하셨습니까.” 자리에 앉아 있는 예원은 심하게 떨려오는 자신의 손을 맞잡았다. 혹시나 그 모습을 정후가 보지는 않을까 입술을 꽉 깨물며 굳어진 표정을 유지했고, 정후의 물음에 차갑게 대답했다. “이제…… 필요 없어졌습니다.” “……!” “수행궁전지사 따위는 나에게 이제…… 아무 쓸모도 없는 것입니다.” “…………” “쓸모…… 없는 자를 곁에 둘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정후는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차가워진 예원의 목소리와 말투에 정후는 충격을 받았고,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기까지 했다. 정후는 입술을 꽉 깨물며 떨리는 목소리로 예원에게 물었다. “가…… 갑자기, 왜 이리 매정하게 구시는 겁니까.” 다시 자신에게 묻는 정후가 오히려 매정하게 느껴지는 예원이었다. 충분히 가슴이 저려왔고, 시리도록 아팠다. 한 번이어도 이리 아픈 가슴을 정후가 또 다시 찢어가고 있었다. 예원은 나오려는 눈물을 참아내며 정후에게 말했다. “필요 없다…… 하지 않았습…….” “……왕후님!” 예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후가 예원을 불렀다. 그 부름에 예원의 눈에서는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정후는 인상을 쓰며 멀리에 앉아 있는 예원을 바라봤고, 원망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예원에게 물었다.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갑자기 이러시는 타당한 이유라도, 말해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정후에게 전할만큼 용기도 나지 않았다. 차라리 이대로 자신이 묻어둔 채 살아가는 것이 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으니까……. 자신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예원을 바라보던 정후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예원에게 말했다. “그럼, 제가…… 말씀 드릴까요.” “…………” “왕후님의 마음이…… 저를 향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저를 버리시겠다는 것…….” “나는……!” 예원은 정후의 말을 막았다. 더 이상 들으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예원은 치맛자락을 꽉 쥔 뒤, 이를 악물고 말을 이었다. “……나는, 이 나라의…… 왕비입니다. 그런 내가 어찌…… 궁전지사와 같은 신분을 마음에 품겠습니까. 오직 이 나라의 왕이신 지아비를 섬기고, 마음에…… 품을 뿐입니다.” 그 말에 정후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허탈한 미소를 지어보였고, 예원을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그러나 이내 정후의 얼굴에서는 허탈한 미소마저 사라졌다. 그리고 예원을 향해 소리쳤다. “헌데, 어찌! 저를 처음에 버리지 않으셨습니까!” 예원은 정후의 물음에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짓누르기 위해, 다시 손을 맞잡았고, 이내 정후에게 마지막 대답을 해주었다. “……지아비께서, 처음으로 내린…… 사람이었으니까요.” “…………” “……용서…… 하세요.” 예원의 마지막 말을 듣는 순간, 정후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또한 꽉 쥔 채로 놓지 않았던 정후의 두 주먹은 서서히 힘이 빠져갔다. 지아비가 보냈기 때문에 자신을 받았고, 이제껏 옆에 두었다는 예원의 말은 정후에게서 작게나마 남은 희망을 앗아갔다. 정후는 입술을 깨물며 예원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켜야 할 사람이 자신을 지킬 필요 없다 하면…… 지키려는 자는 정말 쓸모 된 것이겠지요.” “…………” “소신(小臣)…… 김정후. 이제…… 왕후님을 곁을…… 떠나드리겠습니다.” 정후의 볼로 마지막 한 줄기의 눈물이 떨어지고, 그렇게 정후는 돌아서서 예원의 방을 나갔다. 세게 닫힌 방문과 함께 예원은 참아오던 눈물을 흘렸다. 혹여나 밖으로 자신의 울음소리가 세어나가지는 않을까 입을 틀어막았다. 예원은 서궤(書?) 위에 올려져 있던 작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이미 시들은 채 끊어진 꽃반지였다. 꽃반지를 작은 손에 올려놓은 예원은 그 손을 자신의 가슴에 가져갔다. 저려오는 가슴의 고통을 안고 예원은 정후가 나간 문을 바라보며 작게 독백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오라버니.” 第 25 話 반년이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두 번의 계절이 바뀌었다. 많은 사람이 모이는 장터에도, 항상 분주한 궁에도 겨울은 그렇게 찾아왔다. 그 시간동안 많은 것이 바뀌고, 사라지고…… 떠났다. 태왕대비의 급작스러운 서거(逝去) 소식도 있었으며, 부원군의 자결(自決)도 있었다. 또한 기녀 운초는 모든 속세(俗世)와 단절된 삶을 살겠다며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홀로 사라졌다. 덕주 역시, 자신의 신분을 버리며 운초와 함께하겠다며 그리 떠났다.? 이미 만삭(滿朔)이 된 예원의 소식에 백성들은 새로운 시대가 곧 열릴 거라며 환호하고 기뻐했다. 그러나 예원은 백성들의 기쁨과는 다르게 하루하루를 고통스러워하며 살아갔다. 마음의 병이 생겼으며, 식욕을 잃었다. 그리고 하나 둘, 모든 것을 정리해가기 시작했다. “마마. 어서 드셔야하옵니다.” “…………” “중전마마.” 금침(衾枕)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넋이 나간 사람처럼 앉아 있는 예원을 보며 박상궁은 안타까운 듯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예원은 깜박거리던 두 눈을 감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박상궁을 불렀다. 예원의 부름에 박상궁은 자리를 고쳐 잡고 예원을 응시했다. 천천히 감고 있던 눈을 뜨며 예원은 박상궁을 바라봤다. 그리고 작게 숨을 들이쉬며 말을 이었다. “이제 박상궁께서도…… 제 곁을…… 떠나세요.” “중전마마! 마마를 두고…… 어찌 저에게 진성궁을 떠나라 하십…….” 말을 잇던 박상궁은 순간적으로 불길한 생각에 사로잡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상기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박상궁을 응시하며 예원은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 시간 이후로, 진성궁 안의 모든 궁인(宮人)을 내보내고, 문을…… 폐쇄하세요.” 그 순간, 박상궁은 온 몸에 돋는 소름과 함께 눈물을 흘렸다. 연륜(年輪)이 쌓이다 보면 모든 것을 감지할 수 있다는 말을 이제야 믿는 박상궁이었다. 입술을 꽉 깨물며 자리에서 일어난 박상궁은 두 손을 포개어 자신의 이마에 가져갔다. 그리고 서서히 몸을 숙여 예원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흐느끼면서 힘겹게 다시 일어난 박상궁은 몸을 낮춘 채로 몸을 돌려 문으로 다가갔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박상궁.” 박상궁은 떨리는 두 손으로 문을 활짝 열었고, 이내 그 문 뒤로 모습을 감췄다. 홀로 방 안에 남은 예원은 박상궁이 나간 문을 바라보며 두 손에 세게 힘을 줬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꾹 깨물며 예원은 서서히 손에서 힘을 뺐다. 그리고 서궤(書?) 안으로 손을 짚어 넣어 한 장의 종이를 꺼내 들었다. 같은 시각, 대전(大殿) 안으로 들어선 문내관은 조심스럽게 적에게로 다가갔다. 낮게 시선을 떨어트리고 있던 적은 문내관을 응시했다. 그리고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문내관에게 물었다. “……알아보았는가.” “예. 전하.” 문내관은 대답과 함께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적에게 좀 더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하신 말씀대로, 대신(大臣)들의 사병(私兵)이 움직이기 시작했사옵니다.” 3개월 전, 생을 마감하기 직전에 태왕대비는 숨겨두었던 모든 것들을 이야기해주었다. 바로 적의 죽은 형, 진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 말이다. 또한 적에게 꼭 전해야 할 사실이 있다며 찾아 온 한 시녀의 이야기가 결정적인 보탬이 되었다. “문내관.” “예. 전하.” 적은 두 주먹을 세게 쥐고선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문내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여느 때보다도 날카롭고 차가운 목소리로 문내관에게 명을 내렸다. “모든 궁의 시위(侍衛) 수를 늘리고, 점검하라 이르게. 그리고…… 궁 안 곳곳에, 그 일에 대비할 군사들을 배치시키도록 하게.” 문내관은 적의 말을 듣고 곧장 대전을 빠져나갔다. 문내관이 지나간 대전의 입구를 바라보며 적은 가늘게 눈을 찌푸렸다. ‘그들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면, 아마도…… 오늘이겠지…….’ 적의 예상처럼 노을이 하늘을 뒤덮으며 붉은 빛이 온 나라를 감싸는 그 순간, 그들의 준비는 끝이 났다. 대신들은 수장(首長)인 종하의 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종하가 모습을 드러내자 그 앞의 모든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며 종하를 맞이했다. 종하의 옆에 선 택진은 고개를 숙이며 결의에 찬 표정으로 물었다. “해가 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시작할까요.” 택진의 물음에 종하는 한 쪽 눈썹을 치켜 올리고선 지고 있는 붉은 태양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시선을 택진에게 옮겼고,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아직, 한 사람이 남았습니다.” “그 자가 과연 손을 잡겠습니까.” 택진이 말은 꺼냈지만,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절대로 장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이 거대한 일의 승패를 좌우할 수도 있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대신들의 생각과는 달리 종하는 믿고 있었다. 버릴 수 없는 연모(戀慕)의 정(情)을……. “잡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말을 마친 뒤, 종하는 곧장 미리 알아둔 정후의 거소(居所)로 향했다. 종하의 사저와 멀지 않은 거리였기 때문에 시간의 그리 소비하지 않았다. 가마에서 내린 종하는 사악한 미소를 지어보이고선 거소 안으로 들어섰다. 거소 안에 있던 정후는 활짝 열리는 문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문을 연 사람이 종하라는 것을 알아채고선 차갑게 굳어진 표정을 한 채로 종하를 응시했다. 종하는 그런 정후를 보면서 한 쪽 입 고리를 올렸고, 점점 정후에게로 다가갔다. 종하가 다가올수록 정후는 자신의 손아귀에 더욱 더 힘을 가했다. 종하가 정후의 앞에 멈춰서고,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정후에게 말을 건넸다. “잘…… 지냈는가.” 종하의 물음에 정후는 어이가 없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그리고 이내 매서운 눈빛으로 노려보며 종하에게 말했다. “하고 싶은 말만 전하시지요.”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다 인사 좀 하려했는데, 그리 원한다면 그러지.” 종하는 살짝 짓고 있는 미소를 얼굴에서 없앤 뒤, 정후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정후를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 “나를…… 도와라.” “…………” “나를 돕는다면…… 중전의 목숨은 거두지 않을 것이다.” 종하의 입에서 중전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정후의 온 몸은 경직되었다. 단 한 번도 가슴 속에서 꺼내지 않았던 단어였기에 그 충격은 너무나도 컸다. 종하는 그런 정후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고, 말을 이었다. “오늘 밤, 궁으로 대진격(大進擊)할 것이다.” 정후는 커진 눈으로 종하를 바라봤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던 일이었지만, 막상 상황이 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후는 입술을 깨물다가 작고 낮은 목소리로 종하에게 물었다. “……정변(政變)을 일으키겠다는 겁니까.” “정변이라…… 그래. 정변이지.” 대답을 하며 종하는 활짝 웃어보였다. 그 모습은 소름끼칠 정도로 사악했다. 그런 종하를 보면서 정후는 미간을 찌푸렸고, 이를 악물고 다시 한 번 물었다. “만약, 제가…… 거절하면요.” “중전이 죽겠지.” “……!” “네 연모의 주인을 지키고 싶다면…… 오늘 밤, 나와 함께하는 것이다.” “…………” “자, 이제 선택해라. 중전을 살릴 것인지…… 죽일 것인지.” 종하는 마지막 말과 함께 궁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시 손을 내밀었다. 정후는 상기된 표정으로 그 손을 내려 봤다. 정후는 떨리는 두 손을 꽉 쥐었다. 종하의 속셈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절대로 배신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선뜻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그렇게 혼란스러워 하던 정후는 문득 떠오르는 지난 기억 속의 예원을 떠올렸다. ‘……어찌 이곳에 왔나요.’ ‘수행궁전지사 따위는 나에게 이제…… 아무 쓸모도 없는 것입니다.’ ‘……용서…… 하세요.’ 활짝 웃고 있는 그 모습을 떠올리기도 했고, 매정하게 자신을 버리는 모습도 떠올렸다. 예원의 모습을 그리던 정후는 두 눈을 감고 마지막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정리가 되는 순간, 천천히 떠지는 눈과 함께 정후의 손이…… 위로 향했다. 第 26 話 하늘이 검게 변하고 기망(幾望)이 그 하늘에 떠올랐다. 모두가 잠든 시간이 되어서야 궁으로 사병들이 잠입하기 시작했다. 자객 몇 명이 궁의 담을 넘었고, 궁 입구의 문지기들을 칼로 베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조심스럽게 궁의 문을 연 자객들은 서둘러 몸을 낮춰 종하와 그 뒤를 따르는 대신들을 맞이했다. 궁 안으로 들어선 종하와 정변(政變)의 가담자(加擔者)들. 종하는 그들의 앞에 서서 높이 칼을 들어올렸다. “대전(大殿)으로 대진격(大進擊)하라!” 사병들과 대신들은 크게 함성을 내지르며 종하와 함께 칼을 높이 들어올렸다. 그리고 횃불을 들고선 대전이 있는 곳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이동을 하면서 그들의 칼로 많은 궁인들이 목숨을 잃었고, 궁은 온통 피로 물들어갔다. 한편, 종하보다 일찍 궁에 들어 온 정후는 곧장 진성궁(眞成宮)으로 향했다. 숨을 죽이며 도착한 진성궁의 앞. 그러나 정후의 생각과는 달리 진성궁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반대편 기둥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정후는 조심스럽게 걸어 나왔다. 천천히 진성궁의 입구로 다가간 정후는 손을 뻗어 굳게 닫힌 문을 잡아당겼다. 그런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폐쇄된 진성궁 안에는 예원이 홀로 연당(蓮塘) 앞에 서 있었다. 예원은 만삭이 되어 이미 볼록한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예원은 밀려드는 불안함과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가슴을 조여 오는 그 고통은 꼭 죽음을 암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붉어진 눈으로 하늘을 올려보는 예원의 볼로 눈물이 흘러내리는 순간, 진성궁의 문이 굉음과 함께 부셔지면서 열렸다. 예원은 화들짝 놀라 바로 입구를 바라봤다. 나무에서 나오는 뿌연 먼지와 함께 흐릿하게 보이는 사람의 형태. 서서히 먼지가 땅으로 가라앉고, 그 형태는 예원의 눈에 고스란히 담겼다. 굳어진 얼굴로 그곳을 바라보던 예원의 눈에서 또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 오라버니.”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독백하는 예원에게 다가오는 정후는 재빨리 예원의 손을 잡았다. 예원은 커진 눈으로 정후를 바라봤다. 정후는 예원의 얼굴을 바라보던 시선을 떨어트렸다. 정후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이미 만삭이 된 예원의 배였다. 입술을 꾹 깨물며 외면하고선 정후는 예원의 손을 잡아당기며 걸음을 옮겼다. 갑작스럽게 재회한 정후의 모습에 예원은 약간의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끌고 가는 정후의 손을 반대편 손으로 감쌌다. 정후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예원을 바라봤다. “어찌…….” “정변이 일어났습니다.” 정후의 말에 예원의 손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정후는 그런 예원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꽉 잡았고, 이내 말을 이었다. “어서, 궁을 나가야 합니다.” 같은 시각, 모든 궁을 장악한 종하와 그 무리들은 마지막으로 남은 대전의 앞에 섰다. 피로 범벅이 된 옷을 입은 채 종하의 명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대신들과 사병들. 종하는 천천히 대전 앞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마지막 계단에서 몸을 돌려 아래를 내려 보는 종하는 자신의 손에 들린 칼을 세게 쥐었다. 그들에게 지시를 내리기 위해 종하가 입을 벌리는 순간, 그들의 주변을 엄청난 숫자의 군사들이 둘러쌌다. 순식간에 포위된 그들은 서둘러 칼을 뽑아들었다. 종하는 커진 눈으로 군사들을 노려보다가 대전으로 시선을 돌렸다. 종하의 시선이 멈추자, 대전의 문이 활짝 열렸다. 밑에 있던 대치(對峙) 중이던 군사들과 정변의 가담자들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적은 매서운 눈으로 계단에 서 있는 종하를 노려봤다. 종하는 한 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마지막 계단에서 올라섰다. 마주하게 된 적과 종하는 서로의 모습을 살피며 경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경계를 뒤로 한 채, 종하가 먼저 자신의 칼을 빼들었다. “……주품석좌.” “어서 칼을 드시지요.” 종하는 칼을 높이 들어 적을 가리켰다. 적은 그런 종하를 보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적이 칼을 들지 않자, 종하는 한 쪽 입 고리를 올리며 칼을 세게 쥐고 적에게 달려들었다. 그 순간, 밑에서 대치하고 있던 모두가 칼을 들고 서로에게 돌진했다. 자신에게 달려드는 종하의 칼을 피한 적은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다. 종하는 서둘러 칼을 휘둘렀고, 적은 그 칼에 팔을 찔렸다. 주춤하면서 멈춰선 적에게 다시 달려드는 종하. 적은 몸을 피한 뒤, 종하의 허리를 내리쳤다. 그리고 적은 칼을 들고 있는 종하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가격했고, 종하는 순간적으로 칼을 떨어트렸다. 떨어진 칼을 줍기 위해 종하가 손을 뻗자 적은 칼을 발로 밟으며 자신의 칼을 빼들어 종하의 목에 가져갔다. 그리고 숫자로서 이미 밀렸던 대신들과 사병들은 결국 군사들에게 포획되었다. 종하는 자신의 목을 겨냥하고 있는 적의 칼을 내려 보던 시선을 들어 적을 노려봤다. 적은 미간을 찌푸리며 종하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진 것입니다.” 적의 말에 굳어진 표정으로 계속 적을 노려보던 종하는 실성을 한 듯 크게 웃어보였다. 그리고 자신의 목에 놓여 진 칼을 손으로 잡았다. 적은 커진 눈으로 종하를 바라봤다. 활짝 웃고 있던 입가의 미소를 없앤 뒤, 종하는 매서운 눈으로 적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졌다고 했느냐. 아니, 난 지지 않았어.” “…………” “졌다 해도, 순순히 지지는 않았지.” 종하의 말에 적은 미간을 찌푸리며 가늘게 눈을 떴다. 모든 정변의 가담자들을 추포하고 난 뒤, 군사 두 명이 계단을 올라와 종하의 뒤에 섰다. 그리고 종하의 두 손을 잡아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종하는 반항하지 않았다. 적을 향해 사악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마지막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중전.” “……!” “중전은 절대로…… 너에게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종하는 그렇게 군사들에게 이끌려 적에게서 멀어져갔다. 종하의 마지막 말에 적은 세게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을 서서히 뺐다. 들고 있던 칼이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다급하게 달려오는 문내관의 모습이 적에게 보여 졌다. 문내관은 혼자였다. 분명, 문내관에게 적은 중전을 데려오라고 명했었다. 그러나 중전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적의 앞에 멈춰선 문내관은 적의 얼굴을 바라보지도 못하며 몸을 낮췄다. 적은 불길한 예감에 파르르 떨리는 눈을 찡그리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문내관에게 물었다. “중전은…… 어디 있는가.” “…………” “묻지 않았는가. 왜 중전을 데려오지 않았나!” “……수행 궁전지사였던 김정후가…… 중전마마와 함께 진성궁을 나가고 있었사옵니다.” 문내관이 진성궁 앞에 도착했을 때, 진성궁의 문은 모두 부서져있었다. 그리고 문내관이 시야에 들어온 것은 멀리 걸어가는 중전과 궁전지사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황급히 대전으로 달려온 문내관은 죄책감에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궁전…… 지사가 궁에 왔단 말인가.” “……예. 전하.” 적은 굳어진 표정으로 몸을 돌려 후문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적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기억. 4년 전, 화답사(華?寺)의 지주(支柱) 원방(元幇)이 했던 예언을……. ‘……전하께서 품으실 수 없는 이유는 이미 정해진 정인(情人)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생에서는 절대로 함께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지요. 그 자는 중전을 죽음으로 몰고 갈 자입니다.’ 두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던 적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문내관을 바라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느 쪽으로 가고 있었는가.” “……후문으로 향하고 있었사옵니다.” “후문의 병력은 어느 정도인가.” “스물 남짓이옵니다.” “……지금 당장, 후문으로 갈 것이다.” 문내관의 말대로 후문에는 스물 남짓의 군사들이 문을 지키고 있었다. 그것을 모르고 후문의 앞으로 다가선 정후와 예원은 그대로 군사들에게 둘러싸였다. 군사들은 예원의 모습에 모두들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그러다가 예원의 옆에 서 있는 정후의 모습에 금세 칼을 빼 들었다. 정후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예원의 손을 놓았고, 이내 자신의 칼을 빼들었다. 그리고 예원만이 들을 수 있게 작게 속삭였다. “……왕후님. 지금 제가 하는 모든 행동을 이해해주십시오.” “궁전지사.” 그리고 그 순간, 정후는 예원의 목에 자신의 칼을 가져갔다. 예원은 커진 눈으로 정후를 바라봤다. 정후는 입술을 꽉 깨물며 칼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쥐었다. ‘이제, 진정으로…… 나를 지켜주셔야 합니다.’ 예원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 길이 전부였다. 이미 정변을 일어났고, 그 상황이 어찌 되었을 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서둘러 예원과 궁을 나가야만 했다. 스물 남짓의 군사들과 싸움을 한다면 절대로 궁을 나갈 수 없었고, 그런 정후에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예원뿐이었다. 예원은 이 나라의 국모였으니, 군사들도 어찌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기에 정후는 이와 같은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정후의 생각대로 군사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한걸음씩 물러섰다. 정후는 천천히 예원 반대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예원의 붉어진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두 사람은 앞으로 걸어갔다. 앞을 가로 막고 있던 군사들은 두 사람이 다가오자 머뭇거리다가 길을 열어줬다. 두 사람은 후문 바로 앞에 멈춰 섰다. 정후는 닫혀 있는 문을 당겼고, 조금씩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순간, 정후는 자신의 어깨로 향한 무언가에 시선을 내렸다. “……칼을 거둬라.” 칼이었다. 정후는 살짝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 칼을 겨눈 자를 바라봤다. 파르르 떨리는 두 눈과 함께 정후는 예원의 목으로 가져갔던 칼을 떨어트렸다. 예원은 힘없이 떨어지는 칼과 정후의 팔을 보고선 고개를 돌렸다. “정변은…… 끝났다.” 적의 모습이 고스란히 예원의 눈에 담겼다. 예원은 경직된 표정으로 적을 바라봤다. 적은 자신을 바라보는 예원과 눈을 맞추다가 시선을 옮겨 정후를 바라봤다. 매서운 눈으로 정후를 보며 적은 문내관에게 명을 내렸다. “문내관은 중전을 모시 거라.” 적의 말을 들은 문내관은 군사 두 명과 함께 예원을 붙잡았다. 예원은 군사들의 팔을 뿌리치려고 힘을 줬지만 그것은 역부족이었다. 군사들에게 이끌려가면서도 예원은 정후와 적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그렇게 예원이 멀어져가고, 그 곳에는 정후와 적, 그리고 몇 명의 군사들이 남았다. 적은 자신이 칼을 겨누고 있는 정후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예원에게 연모의 정을 품고 있는 자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원방의 예언처럼 적의 눈에는 예원을 죽음으로 몰고가려했던 자로 인식되었다. “어찌…… 중전에게 칼을 겨눈 것인가.” “…………” “……정변에…… 가담한 것인가.” 적은 자신이 생각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결국에는 자신의 여인을 마음에 품은 사내였지만, 그래도 그 마음이 아름다웠기에 궁에 들어올 수 있게 했었던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 마음이 진심이었다는 것을 듣고 싶었다. 이 모든 것이 오해라고 말이다. ‘네 연모의 주인을 지키고 싶다면…… 오늘 밤, 나와 함께하는 것이다.’ 정후는 미간을 찌푸리며 허탈한 미소를 희미하게 지어보였다. 모든 것은 오해였다. 하지만, 정후는 그 오해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렇게 되는…… 것이겠지요.” 정후의 대답에 적은 칼을 거뒀다. 절대로 원하지 않았던 대답을 꺼낸 정후를 원망하듯 바라보며 적은 떨리는 목소리로 군사들에게 지시했다. “……이 자를 추포하여라.” 군사들은 적의 말에 재빨리 정후의 두 팔을 붙잡았다. 정후는 조금의 반항도 없이 군사들에게 붙잡혔다. 붉어진 눈으로 적을 바라보며 정후는 입술을 깨물었다. 적은 그런 정후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몸을 돌렸다. 두 주먹을 세게 쥐고선 반대편으로 걸어가는 적은 이를 악물며 자신의 감정을 짓눌렀다. 그런 적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정후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적에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그 말에 적은 걸음을 멈춰 섰다. 살짝 고개를 돌려 적은 정후를 바라봤다. 그 순간, 정후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적의 눈에 고스란히 담겼다. 그러나 정후는 그 눈물과는 어울리지 않게 활짝 웃으며 적에게 말했다. “……저는 절대로 왕후님과 함께할 수 없는 사람이었나 봅니다.” 그렇게 어느 날보다도 긴 밤이 지나고, 다음 날이 밝았다. 장터에는 지난밤에 궁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이 입에서 입을 타고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또한 장터 곳곳에 붙여진 왕의 국새(國璽)가 찍힌 집행령(執行令)으로 인해 만천하에 정변의 끝을 알렸다. 「정변의 수장(首長) 주품석좌 정종하와 그를 따른 대신들은 사약을 내려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며, 진성왕후의 수행궁전지사로 정변에 가담한 김정후는 금일(今日) 신정시(申正時), 화형(火刑)에 처할 것이다.」 第 27 話 정후의 화형이 집행되기 한 시간 전, 신초시(申初時). 편전(便殿) 앞에는 무명천으로 만든 허름한 옷을 입은 채 무릎을 꿇은 종하와 대신(大臣)들이 있었다. 매섭게 부는 겨울바람이 그들의 몸을 감쌌다. 자신들에게 죽음이 다가올 것이라는 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는 대신들은 살려달라며 울부짖기도 했다. 그러나 종하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표정으로 편전을 바라봤다. 편전에 도착한 적은 미리 준비되어 있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계단 밑에 울부짖는 대신들을 바라봤다. 적은 시선을 돌려 종하의 행동을 살폈다. 종하는 굳어진 표정으로 적을 자신을 바라보는 적을 똑바로 응시했다. 내관들이 줄 맞춰 종하와 대신들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들의 손에는 검붉은 사약이 담긴 목(木) 쟁반이 들려져 있었다. 모두가 대신들의 앞에 멈춰 섰다. 적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내관은 자신이 들고 있던 교서(敎書)를 적에게 내밀었다. 적은 교서를 받아 활짝 펼쳤고, 그 안에 쓰여 진 내용은 담담하게 읽어 내렸다. “정변(政變)의 수장(首長), 주품석좌(主稟席座) 정종하와 그를 따른 여덟 명의 대신들에게 사약을 내리라 명(命) 한다.” 적의 명이 떨어지자 대신들의 양 옆에 서 있던 군사들이 목 쟁반 위의 사약을 들고 대신들에게 전달했다. 먹지 않겠다며 발버둥 치는 대신들은 끝내 강제로 사약을 받았고, 마지막 발악을 하며 죽음을 맞이했다. 군사에게 사약을 받아 든 종하는 이를 악물고선 파르르 떨리는 눈으로 적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천천히 사약이 담긴 그릇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목으로 차오르는 사약을 애써 흔들림 없이 마시는 종하를 보며 적은 가늘게 눈을 뜨며 나지막하게 독백했다. “……주품석좌.” 종하의 목으로 그릇에 담긴 사약이 모두 들어간 그 순간, 떨리는 손으로 잡고 있던 그릇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핏줄이 곤두 선 이마를 찡그리며 밀려오는 죽음의 기운을 짓누르는 종하를 보며 적은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그 순간, 부릅뜬 눈으로 적을 바라보며 종하는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소리를 내질렀다. 종하는 몸을 살짝 움직이며 일어서려 땅을 짚었다. 군사들을 서둘러 종하를 막아섰다. 종하는 힘겹게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이…… 이 나라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 “다음 생이…… 있다면, 그…… 때는 내 기필코…… 왕이, 될 것이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종하의 목선에 선명하게 보이던 핏줄들이 이내 모습을 감췄다. 죽는 순간까지 종하는 편전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눈조차도 감지 않은 채로 말이다. 적은 그런 종하를 보면서 두 눈을 감으며 이를 악물었다. ‘…… 당신이 원하는 것처럼 나에게도 다음 생이 있다면, 나는 기필코…… 왕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다음 생엔…… 당신이, 그리 원하던 왕이 되십시오.’ 적은 감고 있던 두 눈을 천천히 떴다. 군사들은 서둘러 숨을 거둔 대신들의 시신을 거두기 시작했다. 적은 미간을 찌푸리며 문내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문내관에게 물었다. “중전은…… 어찌 되었는가.” “의식을 아직 되찾지 못하셨다 하옵니다.” 문내관의 대답에 적은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그리고 의자의 손잡이를 잡고 있던 두 손에 힘을 세게 쥐었다. ‘오히려 잘 된 것이다. 그 자의 마지막을…… 볼 수 없을 테니…….’ 자리에 앉은 채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 적을 보며 문내관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전하.” “…………” “……신정시(申正時)가 다 되어가옵니다.” 문내관의 말에 적은 떨어트렸던 시선을 원래대로 되돌린 뒤, 앉아 있던 자리에서 서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적은 미세하게 떨려오는 목소리로 낮게 독백했다. “가야만…… 하는 것이겠지요.” 한편, 진성궁(眞成宮)에는 예원의 어미인 진선대부인과 박상궁이 함께 하고 있었다. 적의 부름을 받고 곧장 궁으로 들어온 진선대부인은 부은 눈을 한 채, 꼬박 밤을 지새웠다. 예원에게 지시를 받고 진성궁을 떠나 있었던 박상궁 역시 예원의 소식을 듣고 곧장 진성궁으로 돌아왔다. 의식을 잃은 채 깨어나지 않은 예원을 보면서 대부인은 눈물을 훔쳤고, 이내 긴 탄식과 함께 말을 내뱉는 대부인.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어찌 이런 변고(變故)가…….” “대부인마님.” 옷고름으로 눈물을 훔치고선 대부인은 예원에게 두었던 시선을 박상궁에게로 돌렸다. 그리고 박상궁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작게 물었다. “중전의 수행 궁전지사였던 자가…… 정변에 가담하였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 “화형에 처해 진다 들었습니다. 그럼, 진정으로…….”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순간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의식을 잃은 채 금침(衾枕)에 누워 있던 예원이 두 사람을 가늘게 뜬 눈으로 힘겹게 바라보고 있었다. 대부인과 박상궁은 놀란 눈으로 예원을 응시했다. 예원은 약간의 고통이 전해지는 배를 붙잡고 힘겹게 다시 물었다. “무슨…… 말씀이냐고 물었습니다.” “…………” “화형…… 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냔 말입니다!” 소리를 내지르던 예원은 휘청거리며 배를 움켜쥐었다. 예원의 행동에 대부인과 박상궁은 서둘러 손을 뻗어 예원을 지탱했다. 예원은 스스로 휘청거리는 몸의 균형을 맞추고 떨리는 목소리로 작게 말을 이었다. “아무런 잘못도 없단 말입니다…… 그 자는, 나를…….” 예원은 흐르려는 눈물을 닦아내고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부인과 박상궁은 예원이 일어서자 바로 따라 일어섰다. 그리고 금침에서 벗어나려는 예원의 손을 붙잡았다. “마마!” 자신의 손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대부인과 박상궁을 바라보며 예원은 차갑게 말했다. “놓으세요.” “……안 됩니다. 중전.” 대부인은 고개를 흔들며 예원의 손을 꽉 잡았다. 박상궁 역시 맞잡은 예원의 손을 절대로 놓아주지 않았다. 예원은 어느새 눈물이 가득 맺힌 눈으로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그 손들을 뿌리쳤다. 막아야만 했다. 정후가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자신뿐이라는 것을 알기에 꼭 가야했다. 예원은 찢어질 듯 아파오는 복통을 참으며 대부인에게 말했다. “어머니…… 저를 놓아주세요. 가야합니다. 제가…… 막아야만 합니다.” “……중전.” “박상궁.” 대부인과 박상궁은 예원을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을 뺐다. 서서히 떨어지는 두 사람의 팔을 보던 예원은 입술을 꽉 깨물며 배를 움켜쥐고 빠른 걸음으로 자신의 처소를 빠져나갔다. 같은 시각, 많은 사람들이 화형대 주변에 몰려 있었다. 궁의 문이 열리고, 군사들에게 이끌려 화형대가 있는 곳으로 걸어오는 정후의 모습을 보던 사람들은 자신이 던지기 위해 들고 있던 돌을 정후가 있는 곳으로 힘껏 내던졌다. 그 수많은 돌들은 다시 닫힌 궁의 입구에도 향했고, 정후의 옆에 서서 화형대로 이끌던 군사들에게로 향했다. 그러나?그 모든 것은 정후에게로 향하는 것이었다. 편전에서 도착한 적은 입구 위에 지어진 정자에 서서 아래를 내려 봤다. 돌을 맞아 이미 피범벅이 된 얼굴로 정후는 하늘을 올려봤다. 아니, 적이 서 있는 정자를 바라봤다. 그러나 정후의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 적은 입술을 깨물며 애써 고개를 돌렸다. 군사들에게 이끌려 화형대 위로 올라선 정후. 군사들은 서둘러 나무 기둥에 정후의 몸을 묶었다. 화형대 주변으로 몰려든 백성들은 화형대 위에 묶여져 있는 정후를 향해 또 다시 돌을 던졌다. 또한 입에 담지 못할 정도로 심한 욕설로 정후를 모욕했다. 사람들이 던진 돌로 인해 정후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후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정후의 모습을 보며 적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진성왕후님의 수행궁전지사(隨行弓箭之士)가 되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적은 정후를 보고 있던 자신의 두 눈을 감았다. 적의 두 눈이 감기는 순간, 화형을 집행하기 위해 군사가 점화봉을 들었다. 점화봉이 들리는 순간, 그 자리에 있는 모든 백성들은 환호하며 대역 죄인을 어서 처형하라 외쳤다. 화형대에 묶여져 천천히 고개를 든 정후는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점화봉의 형상을 바라봤다. 붉어진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순간, 나무로 지어진 화형대에 점화봉이 스쳤다. 순식간에 번져가는 불씨는 점점 커져갔다. 그만큼 백성들의 목소리도 궁 앞을 가득 메웠다. 적은 그 함성소리에 서둘러 감고 있던 두 눈을 떴다. 이미 화형대를 전부 덮어버린 불의 형상이 고스란히 적의 눈에 들어왔다. 적은 앞으로 주춤거리며 담에 손을 올렸다. 불에 점점 희미해져가는 정후의 모습을 바라보며 적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찌…… 어찌 비명조차 지르지 않는 것인가.” 정후는 불에 타오르는 그 순간에도 절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적은 단단한 담을 내리치며 붉어진 두 눈으로 화형대를 바라봤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독백했다. “이리도…… 잔인한 죽음을 맞이하면서, 어찌…….” 화형대의 가장 높은 기둥까지 불길이 솟아오르는 그 순간, 굳게 닫혀 있던 궁의 문이 활짝 열렸다. 소리를 내지르던 백성들과 화형을 집행하고 있던 군사들, 그리고 궁 위의 정자에서 정후의 죽음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적의 눈이 문으로 향했다. “아…… 안 돼.” 궁의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예원이었다. 눈보다 하얀 소복(素服)을 입은 채로 걸어 나오는 예원은 찢어질 듯 아파오는 만삭의 배를 붙잡고서 넋이 나간 사람처럼 화형대로 다가섰다. 서둘러 예원에게 몇 명의 군사들이 다가갔고, 이내 그 앞을 막아섰다. 예원은 군사들을 바라보다가 이내 몸을 기울였다. “안 돼!” 군사들은 앞으로 더 다가가려는 예원을 붙잡았다. 위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던 적은 두 주먹을 꽉 쥔 채로 서둘러 예원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예원은 울부짖으며 화형대가 있는 곳으로 손을 뻗었다.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이미 불타오르고 있는 화형대 속에 정후가 있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파왔다. 자신을 막아서고 있는 군사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며 예원은 온 힘을 다해 소리를 내질렀다. “어서 멈춰라! 불을 끄란 말이…….” 소리를 내지르던 예원은 그 자리에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 모습을 목격한 수많은 백성들은 웅성거리며 예원의 모습을 지켜봤다. 군사들은 서둘러 예원을 일으켰지만, 예원은 이미 의식이 없었다. “……마마!” 박상궁은 서둘러 궁녀들을 이끌고 가 쓰러진 예원을 부축했다. 창백해진 얼굴에 흘러내린 눈물을 닦으며 박상궁은 눈물을 훔쳤다. 그런데 그 순간, 박상궁은 자신의 치마를 적시는 무언가에 고개를 떨어트렸다. 입구에 도착한 적은 쓰러진 예원의 모습에 그 자리에 경직된 채로 서 있었다. 불길함에 온 몸이 떨려왔다. 적은 예원을 바라보던 시선을 땅으로 떨어트렸다. 그렇게 떨어트린 적의 시선에 담긴 것은 점점 다가오는 물줄기였다. 적은 커진 눈으로 그 물줄기가 흘러나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중전마마, 마마!” 예원이었다. 하얀 소복이 다 비칠 정도로 이미 젖어 있는 상태의 예원은 배를 움켜쥔 채로 쓰러져 있었다. 박상궁은 서둘러 궁녀들과 함께 예원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군사들의 힘을 빌려 예원을 궁 안으로 옮기려 하고 있었다. 궁 입구 앞에 서 있는 적은 창백하게 굳은 채로 군사들과 궁녀들에게 이끌려 자신을 지나쳐가는 예원의 모습을 붉게 물든 눈으로 바라봤다. 궁 안으로 들어가는 예원의 모습을 지켜보는 백성들은 탄식을 내뱉으며 어느새 예원의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덧 타오를 만큼 타오른 불길은 점점 사그라지고 있었다. 하나 둘, 백성들이 그 자리에서 떠나고…… 화형대 위에 홀로 남겨진 정후의 시신을 바라보며 적은 입술을 꽉 깨물며 시선을 돌렸다. 그 때, 적의 머릿속에 떠오른 기억은 지난밤의 일이 있었을 당시의 기억과 동일했다. ‘……전하께서 품으실 수 없는 이유는 이미 정해진 정인(情人)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생에서는 절대로 함께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지요. 그 자는 중전을 죽음으로 몰고 갈 자입니다.’ 그렇게 참고 있던 눈물이 적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적은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아내려 버텼지만, 이내 더 많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적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부여잡았다. 적은 감정으로 가빠진 숨을 내쉬며 힘겹게 이미 숨을 거둔 정후의 모습을 보며 독백했다. “내가……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었다. 모든 것이 다…… 내 잘못 된…… 선택 때문이었어.” 第 28 話 진성궁을 오가는 궁인들은 바쁜 몸놀림으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미 산통이 시작된 지, 세 시진(時辰)이 훨씬 지났지만 뱃속의 원자는 좀처럼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의식을 잃은 채로 힘조차 주지 못한 채 누워 있는 예원의 이마를 하얀 천으로 닦아내며 대부인은 눈물을 훔쳤다. “제발…….” 벌어진 예원의 다리를 바라보며 박상궁은 떨리는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 순간, 조금씩 자궁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박상궁은 커진 눈으로 고개를 들어 예원을 확인했다. 고통이 그대로 드러나는 얼굴은 창백했다. “마마.” 예원의 모습을 지켜보던 대부인은 미간을 찌푸리는 예원의 모습에 서둘러 차가운 손을 잡았다. 박상궁은 입술을 꽉 깨물며 손을 뻗어 천천히 모습을 보이는 원자 아기씨를 조심스럽게 끌어당겼다. 예원은 가쁜 숨을 내쉬기 시작했고, 대부인은 그런 예원의 두 손을 꽉 잡으며 눈물을 보였다. 순간적으로 세게 힘을 준 예원은 목을 뒤로 젖히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리고 그 고통과 함께 원자의 모습이 세상에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피범벅으로 갓 태어난 원자를 품에 안고서 박상궁은 서둘러 얇은 천으로 원자의 몸을 닦았다. 그 옆을 지키고 있던 시녀들도 분주하게 박상궁을 도왔다. 깨끗한 모습으로 얼굴을 내비친 원자는 듬직한 사내아이였다. 탯줄을 자르고 난 뒤, 재빨리 피를 멎게 하기 위해 매듭을 지었다. 그리고 보드라운 솜이불로 원자의 몸을 감싼 박상궁은 몸을 일으켜서 예원이 누워 있는 곳으로 향했다. “대부인 마님.” 박상궁을 바라보며 눈물을 훔치고선 원자를 받아든 대부인은 칭얼거리며 우는 원자의 모습에 활짝 웃어보였다. 그리고 서둘러 누워있는 예원을 바라보고선 들 뜬 목소리로 말했다. “……마마. 아들입니다.” 대부인은 품에 안고 있던 원자를 예원의 옆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예원의 손을 잡아 원자에게 올렸다. 그런데 그 순간, 힘없이 떨어지는 예원의 손. 바닥을 내리치는 예원의 손에 대부인은 경직된 표정으로 예원을 바라봤다. 지나칠 정도로 창백한 예원의 얼굴은 이미 푸른빛이 감돌고 있었다. 대부인은 천천히 자신의 손을 예원에게 가져갔다. “중전…… 마마.” 대부인의 울먹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든 박상궁은 이제야 예원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힘없이 떨어진 손을 보는 순간, 박상궁의 두 눈이 금세 붉어졌다. 두 눈을 감은 채 누워 있는 예원을 천천히 흔들기 시작한 대부인은 이를 악물며 눈물을 참고 말을 이었다. “마마…… 어서, 원자를 안아 보셔야지요.” 그러나 애타게 부르는 대부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예원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끝내…… 눈을 뜨지 않았다. 한편, 진성궁 밖에 서 있던 문내관은 입구에 서 있는 적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문내관의 모습에 적은 입술을 깨물었다. 문내관은 그런 적을 바라보며 숨을 한 번 들이켜 쉬고 말을 꺼냈다. “원자 아기씨께서…… 태어나셨사옵니다.” 분명 밝아야 하는 목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문내관의 목소리는 밝지 못했다. 적은 그것을 눈치 채고 서둘러 문내관에게 물었다. “중전은…… 어찌…… 되었는가.” 문내관은 적의 물음에 고개를 푹 숙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힘겹게 입을 떼었다. “……중전마마께서는…….” 끝내 문내관은 말을 잇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앞에 고개를 숙인 채 말을 멈춘 문내관을 바라보던 적은 넋이 나간 사람마냥 멍한 눈빛으로 문내관을 내려 보며 물었다. “왜…… 대답이 없는가.” “…………” “문내관!” “……승하(昇遐)…… 하셨다옵니다.” 문내관은 대답과 함께 그 자리에 주저앉아 적에게 몸을 숙였다. 적은 휘청거리는 몸을 지탱하기 위해 입구의 기둥을 부여잡았다. 파르르 떨리는 눈을 가늘게 뜨며 적은 천천히 기둥에 의지하고 있던 몸을 똑바로 세웠다. ‘다시는…… 궁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궁으로 다시 돌아왔던 날, 자신에게 무릎을 꿇으며 다짐했던 예원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울려 퍼졌다. 적은 조금씩 앞으로 걸어가며 작은 목소리로 독백했다. “아니다. 아닐…… 것이다.” 입구를 지나, 진성궁에 들어선 적은 눈물이 가득 맺힌 눈으로 바닥에 앉아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궁인들을 바라봤다. 땅을 내치며 울고 있는 대부인과, 몸을 숙인 채 일어나지 않는 박상궁을 보며 적은 실감할 수 있었다. “……중전.” 나지막한 목소리로 독백을 하던 적은 이내 빠른 걸음으로 예원의 처소로 다가갔다. 문을 활짝 열고 안으로 들어선 적은 곧장 예원의 방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문 앞에 도착한 적. 그러나 선뜻 문을 열지 못했다. 안에서 들려오는 갓 태어난 원자의 울음소리만이 처소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을 뿐이었다. 적은 힘겹게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았다. 그리고 힘없이 문을 여는 적이었다. 피로 물든 이불에 덮여져 누워 있는 예원의 모습이 적의 눈에 담겼다. 적은 방 안으로 조금씩 걸어 들어갔다.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적은 두 주먹을 꽉 쥐고선 애써 눈물을 참아냈고, 예원의 옆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예원의 모습은 모든 고통을 이겨낸 사람처럼 편안해보였다. 그런 예원이 원망스럽게 느껴져 적은 붉어진 눈으로 예원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예원의 손으로 감싸진 솜이불 속에서 칭얼거리며 울고 있는 원자. 적은 떨리는 입술을 애써 깨물었다. 그러나 적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떨리고 있었다. “다시는…… 떠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적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적은 파르르 떨리는 손을 뻗어 예원의 창백한 얼굴로 가져갔다. 조심스럽게 예원의 볼을 쓰다듬는 적은 저려오는 가슴의 통증을 짓누르며 말을 이었다. “운명을 거스르려 했던 과인(寡人)의 죄를…… 용서하세요.” 예원의 볼을 감싸던 적의 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적은 한동안 그렇게 넋이 나간 사람처럼 예원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렇게 눈물로 예원의 마지막을 보내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내 떨리는 손으로 예원의 품에서 원자를 빼내어 자신의 품에 안았다. “……중전. 부디…… 나를 용서하세요.” 그렇게 울부짖던 원자는 어느덧 적의 품 안에서 곤히 잠들었다. 적은 희미하게 웃어 보이며 예원에게 고개를 숙여 마지막 인사를 했다. 많은 궁인들의 통곡소리가 진성궁 안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런 진성궁은 여느 때보다도 환하게 떠오른 만월(滿月)에 빛나고 있었다. 第 29 話 온 나라는 원자의 탄생의 기쁨과 함께 나라의 국모를 잃은 슬픔에 잠겨야 했다. 장터에는 새하얀 백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모든 궁에도 백기가 차가운 바람에 펄럭였고, 예원의 죽음에 슬퍼하고 있었다. 예원의 시신은 옥(玉)으로 만들어진 관에 보관되었고, 평소 지내던 진성궁에 안치(安置)되었다. 이레라는 시간동안 치러질 예원의 장례 절차는 소박하게 치러지기로 결정되었다. 이생에 살던 예원의 모습과도 같이 말이다. 대전(大殿)에 지어져 있는 정자에 서있는 적과 문내관. 상복을 입은 채로 먼 산을 바라보며 적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문내관을 불렀다. “……문내관.” “예, 전하.” 문내관의 대답을 들었지만 적은 자신의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문내관은 숙이고 있던 몸을 살짝 들어 올려 적을 바라봤다. 정확히 볼 수는 없었지만, 적의 눈이 햇빛에 반짝거리는 것을 본 문내관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적은 두 눈을 천천히 감고선 천천히 입을 떼었다. “……중전의 마지막을 함께 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 “……그 자의 시신을 가져오세요.” “전하.” “그것이…… 과인(寡人)이 중전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입니다.” 예원의 마지막 장례가 있는 날, 초라한 목관에 보관된 채로 진성궁에 도착한 정후의 시신. 미리 진성궁에 도착해있던 적은 문내관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수레를 바라봤다. 수레는 적의 바로 앞에 멈춰 섰다. 적은 하얀 천으로 걷어내고 정후의 모습을 확인했다. “……궁전지사.” 불에 타 얼굴조차 알아 볼 수 없는 정후의 모습에 적은 입술을 깨물었다. 죄책감이 든 나머지 휘청거리던 적은 떨리는 손으로 관을 잡았다. 그리고 간신히 서서 정후를 내려 봤다. 그 순간, 적의 두 눈에 보이는 정후의 모습은 너무나도 평화로워보였다. 가장 잔인한 죽음 맞이하였지만, 오히려 살아 있는 자신보다도 행복해 보이는 정후의 모습에 적은 관을 잡은 두 손에 힘을 세게 쥐었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수행…… 궁전지사, 김정후. 자네의 임무는 중전을 지키는 것이네. 자네의 주군(主君)으로서 마지막 명을 내리니…… 중전과 함께…… 이생을 떠나게.” 적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정후를 바라보던 시선을 옮겨 진성궁을 보며 적이 희미하게 미소 짓는 그 순간, 하늘에서는 새하얀 눈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적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보았고, 어느덧 활짝 웃어 보였다. ‘……부디 그곳에서는 안녕히…….’ 그리고 그 날,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상복을 입은 채 거리에 나와 예원의 마지막 길을 함께해주었다. 하지만?그들이 알 지 못했던 사실이 있었다. 누구보다 평범한 상여임에도 불구하고 그 크기가 클 수밖에 없었던 이유……. 그 것은…… 예원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슴 속에 품었던 정인(情人), 정후와의 동행이었다. 第 30 話 길었던 겨울은 그렇게 끝났다. 그리고 궁에는 여느 때보다도 아름다운 봄이 찾아왔다. 이제 막 태어난 세자 월(月)은 유모의 손으로 키워지게 되었다. 하지만 예원의 모습을 빼닮은 것이 꼭 예원을 보는 것과도 같은 기분이었다. 느린 걸음으로 산보(散步)를 하던 적의 걸음이 멈춰 섰다. 입구를 따라 활짝 핀 매화는 예원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천천히 진성궁(眞成宮)으로 들어선 적은 고요한 정적이 감도는 궁을 둘러봤다. 진성궁은 예원을 지우지 못한 채, 그렇게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다. 문득, 적은 떠오르는 기억에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이 때쯤이었다. 5년 전, 화답사(華?寺)에서의 이야기……. 5년 전 그 날, 안동에서 돌아와 곧장 화답사로 갔던 적은 지주(支柱)인 원방을 만났다. 원방의 예언은 한 번도 틀리는 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적은 찾아간 것이었다. 혹시라도 원방이 자신과 예원의 미래를 미리 짐작해주지 않을까 해서……. 그리고 적의 생각은 딱 들어맞았다. 원방은 예원과 적의 운명이 어찌 될 것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절대로 알려줘서는 안 되는 것이 운명이었지만, 원방은 적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운명에 대한 예언을 해주었다. 원방의 말에 적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부푼 기대를 안고 원방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세자빈이 되실 규수께서는…… 봉황의 기운을 타고 나신 분이십니다.” “봉황이라면 왕실과 왕후의 상징이 아닙니까.” “예. 그러합니다.” “그럼…… 왕실에 아주 들어맞는 인물이라는 말씀이시군요.” “……아닙니다.” 해맑게 웃고 있던 적은 원방의 차가운 대답에 놀란 눈으로 원방을 바라봤다. 원방은 살짝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적을 보았고, 이내 말을 이었다. “규수께서는…… 왕실과 어울릴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 순간, 적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멍한 표정으로 원방을 바라봤다. 원방은 그런 적을 바라보면서 차분하게 이야기를 계속 해나갔다. “본래 봉황은 오색의 깃털을 지니고, 오 음(音)으로 된 묘한 음색으로 울며 아름다움을 뽐내는 왕실의 상징인 새입니다. 선왕들께서도 그러하셨고, 왕후의 자리에 오른 모든 여인들이 그러했습니다. 특히 세자 저하께서는 가장 아름다운 음색을 지닌 봉황의 기운을 지닌 분이십니다.” “…………” “그것이 왕실의 상징인 봉황입니다. 허나, 세자빈이 되실 규수께서는 아름다운 봉황의 형상을 하고 계실뿐, 소리 내어 울지 못하는…… 가엾은 봉황의 기운을 가지셨습니다.” “……울지 못하는 봉황이 무슨…… 뜻입니까.” 적은 원방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동물들의 기운으로 사람의 운명에 대해 예언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난생 처음으로 들어보는 말에 적은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자신이 마음에 든 여인이 함께할 수 없다는 말에 당황해하고 있었다. 원방은 적의 물음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적에게 되물었다. “저하께서는…… 울지 않는 새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예. 울지 않는 새는 없습니다. 모든 새는, 아름다운 음색으로 지저귀는 것이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울지 않는 새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지요.” “…………” “또한 절대로 만나서는 안 될 반대의 운명이 서로를 품는 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원방의 말에 적은 어느새 파르르 떨리는 손을 세게 쥔 채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붉어진 두 눈으로 원방을 똑바로 응시한 채……. 원방은 그런 적을 향해 더욱 더 잔인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서로를…… 품는 것이 곧 독이 될 것이며, 그 끝은…… 수많은 사람의 희생과, 가엾은 운명의…… 죽음입니다.” “……!” “말씀 드렸듯이 저하께서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가진 봉황의 기운을 지니셨습니다. 허나, 규수께서는 울지 못하는 봉황의 기운을 지니셨지요. 절대로…… 어울릴 수 없습니다.” 원방은 모든 일의 끝을 알고 있었기에, 말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적과 예원은 결국 나흘 뒤 혼례를 올렸다. 그로인해 비극의 씨앗은 뿌려진 상태였다. 단지, 4년이라는 시간동안 원방의 예언으로 예원을 품지 않은 적의 행동으로 자라나지 못했을 뿐……. 예원의 방에 들어선 적은 느린 걸음으로 금침(衾枕)에 다가갔다. 예원에게 수행 궁전지사를 보낼 것이라고 말하던 그날, 원망으로 눈물짓던 예원의 모습이 생생히 떠올랐다. 금침에 앉은 적은 떨리는 손으로 그 위를 쓸어내렸다. 이를 악물고 예원을 그리며 서궤에 손을 올린 적은 결국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런데 그 순간, 적의 두 눈에 접혀져 있는 종이가 들어왔다. 적은 고개를 들고 손을 집어넣어 종이를 꺼냈다. 적은 서둘러 고이 접혀있는 종이를 펴서 자신의 두 손으로 잡았다. 종이 가득 쓰여 져 있는 것은 예원의 마지막 이야기였다. 「이 서찰을 전하께서 보실 때쯤, 신첩은 궁에 없을 것이옵니다. 다시는 궁을 떠나지 않겠다며 약조를 하였는데 이리 먼저 떠나게 된 죄, 5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했지만 여인으로서 보필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했던 죄, 전하의 그 넓은 마음을 이렇게 늦게야 알게 된…… 신첩의 죄를 부디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지아비를 섬기고, 연모하는 것이 여인의 도리인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신첩은 너무도 못난 여인이었던 같사옵니다. 허나 전하께서는 신첩에게 유일한…… 지아비이셨습니다.」 편지를 읽어 내리던 적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두 손으로 편지를 부여잡고선 적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애써 자신의 슬픔을 짓눌렀다. 그런데 그 순간, 예원의 방으로 밝은 빛 한줄기가 들어왔다. 적은 붉어진 눈으로 창문을 바라봤다. 그렇게 창문을 바라보는 적의 두 눈에 날아가는 새의 모습이 들어왔다. 적은 커진 눈을 한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 황급히 처소를 빠져나왔다. 분명 새의 모습이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주위를 돌아보던 적은 자신이 잘못 본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러나 적의 귓가에 새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고, 이내 적은 고개를 들고서 계단을 빠르게 내려왔다. 진성궁 안으로 돌며 적은 자신이 본 새의 모습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적은 찾아냈다. 그 곳은 연당(蓮塘)이었다. 연당 옆, 매화나무 가지에 앉아 서로를 향해 지저귀는 세 마리의 새를 보며 적은 가쁜 숨을 뒤로 한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적은 어느새 희미하게 웃던 미소를 활짝 지어보이며…… 눈물을 흘렸다. 적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선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부디 그곳에서는 행복하셔야 합니다.” 적의 말이 끝나는 순간, 지저귀던 새들은 날개를 펴고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 적은 하늘 높이 올라가는 세 마리의 새를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미소를 머금었다. 서로 뒤엉켜 날아가는 세 마리의 새들이 행복해 보였기에……. 따듯한 봄 햇살 아래, 그렇게 세 마리의 새는 아름다운 음색으로 지저귀며 진성궁 위의 하늘을 날아올랐다. 봉황은 울지 않는다.... The End.